4월 20일 새벽예배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히 13:8)
녹취자: 윤은정
우리들이 믿음생활을 해 나가면서 앞에 이 이야기한 그 형제사랑의 문제, 그다음에 침소를 더럽히고, 음행과 간음하는 이런 문제, 이런 등등의 이 도덕적인 타락의 문제의 이면에는 죄를 짓고자 하는 욕구의 강함도 원인이 되지만은 그것과 함께 도덕적인 기준의 헤이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도덕적인 기준의 헤이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한편으로부터는 신자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성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세상이 타락하고 도덕적인 기준이 애매모호해지니까 죄를 행하는데 있어서 담대해지고 많이 잘못하면서도 세상이 흐르는 그 시류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됐다라고 하는 아주 뚜렷한 판단을 자신이 스스로 못 내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 면은 요즘은 이혼을 밥 먹듯이 많이 하는데 ,옛날 같으면은 사실 이혼을 하면은 큰일 나는 것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요즘은 이혼을 하는데 여자쪽에서 이혼을 요구하는 예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은 시류가 가져다주는 담대함이라는 것입니다. 인내한다든지 하는 그런 개념이 이제는 모두 사라지고, 사회 전체의 의해서 출판물이나, 메스미디어 이런 것들을 통해서 ‘그렇게까지 해서 사는 것은 바보다’라는 식으로 자꾸 충동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시류가 그러니까 아주 쉽게 그렇게 이혼을 요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녀들에 대한 사랑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그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만은 인간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물러설 수 없는 이 인륜적인 대의, 이런 것들이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정말 자식에 대한 그 무정함을 통해서 사람들안에 역사하는 그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중생자들뿐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믿고 신자가 된 사람들도 그런 자식을 향한 사랑이 없는 그 무정함을 통해서 얼마나 이 죄가 무섭고 처절한가 하는 것들을 확인시켜주는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서구의 문명들이 들어오면서 자기밖에 모르는 극도의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과 생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오는 현상들입니다. 이 시류가 그런 것들을 가져다주면 사람들은 도덕적인 기준이 헤이해지고 아주 판단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에 범죄하고자 하는 그런 상황까지 되면은 아주 쉽게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사회 심리적인 요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한국에서 아주 무례하게 굴고, 그다음에 줄도 잘 안서고, 새치기 하고, 음식점에 가면 아무데서나 담배피고, 소리소리 지르고, 그러던 사람들이 미국이나 구라파 가면 얼마나 얌전해지는지 모릅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은 가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그러니까는 사회가 그렇게 되면 자기도 자연스럽게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이 자랄 때 부도덕한 환경에서 자라게 되면은 큰일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자식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 뭐냐하면은 ‘인간이 참으로 사는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말 못하는 아이시절서부터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며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하고 그리고 어떻게 이해하고 무엇을 향해 분노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서 이제 아주 분명한 이 도덕적인 판단과 기준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무너지고 나면은 이제 사람들이 그런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 가책을 느끼지 않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 안에서 이런 도덕적 기준이 헤이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자신 안에서 도덕적인 기준에 대한 헤이가 오는 것은 세상이 아무리 많이 시류가 변하고 도덕적인 기준이 낮아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믿음의 굳센 각오와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옳다’라고 하는 신앙적인 확신, 그렇게 살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 이런 것들이 있으면 절대로 그렇게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패한 인간의 마음속에서 자신도 그렇게 살고자하는 강력한 욕구를 지니고 있으면 그 욕구가 점점 자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상상하던 것들은 말로 하고 싶고, 말로 한 것들은 실제로 행하고 싶고, 실제로 행해서 결국 범죄에 이르고 싶고 하는 이것이 죄인 안에 있는 부패한 성품의 반로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진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전이 되다가 보면은 결국은 그 죄인이 이 밖의 도움과 안의 도움을 함께 받으면서 도덕적인 기준을 낮추는 것입니다. 신앙을 버린다기 보다는 ‘이렇게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렇게 살아가니까 나 혼자 구지 그렇게 살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주 쉽게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은 ‘이것은 아주 명백하게 죄다.’ 라고 알아도, 죄를 지은 다음에 받을 고통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용서의 교리를 적용하고, 그렇게 용서의 과정에서 겪는 아픔과 희생보다는 ‘이 죄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누리게 될 그 즐거움이 훨씬 더 크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길로 계속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어느 시대에나 살아갈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이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믿는 자들이 특히 더 그렇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너무나 평범한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분이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우리 모든 세상을 다스리시고 그리고 특별히 마지막에는 이 온 세상을 하나님아버지를 대신해서 다스릴 그런 심판주로 주님이 명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온 세계에 대한 판단, 그 안에 사는 모든 인간에 대한 잡다한 삶에 대한 판단, 이런 것들을 그리스도께 맡기셨다’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영원히 동일하신 분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망과 그리고 이 세상의 풍조에 의해서 당신이 가지고 계신 그 기준을 시대에 따라서 가변적으로 낮췄다, 높였다 이렇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렇게 이렇게 살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다’라고 하는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그 계시의 말씀이 동일하다’라고 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의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러왔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분 자신이 그 율법아래에 태어나시고 죄 많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신 그 순간부터 살아가는 한걸음 한걸음이 모두 그 율법의 요구를 하나도 어김없이 따라서 다 사신 그런 생애였습니다.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시면서 그 행하신 모든 생애의 비참함을 통해서 그 예수님이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토록 동일하신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요구를 모두 이루셨습니다. 율법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통해서 모든 이루셔서 그 율법을 완성하심으로서 이제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가 함께 그 율법을 지킨 것이 되고 함께 그 율법을 따라 살다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율법에 의해서 정죄 받고 마지막에 죽으신 그 죄 없으신 예수님의 그 죽음에 우리도 함께 참예한바가되고, 그래서 우리의 죄값을 치룬바 되고 그래서 그분과 함께 다시 살아난 그 부활에 또한 함께 참여하게 된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 안에서 율법과 구원이 영원토록 동일하게 완성되고 성취되어서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구원의 도리로 계속해서 이어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바 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그것이 바로 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할 표준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아들들은 세상의 시류를 따라서 살지만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기준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 수 있는 능력을 끊임없이 하나님께 구하고 거저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가 ‘그럼으로 우리가 은혜를 받자. 진동치 못한 나라를 우리가 받았은즉, 우리가 은혜를 받자’.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이는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니까 이런 삶을 살아라.’ 그렇게 기준을 제시해 주시고, 그리고, 뒤로 물러가신 분이 아니라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공급해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이 간절히 바라는 것은 그런 삶을 살기를 원하고 그런 삶을 살 수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그래서 그런 진동할 수 없는 나라를 받았으니까 우리가 그 진동할 수 없는 나라. 진동치 않는 나라를 받아서 이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그 엄숙한 소명을 받았으니까 이제 그렇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필요하다 이겁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이라는 이 손 바닥만한 땅덩어리, 전 세계에 내놔도 별로 크게 자랑할 것이 없는 나라, 아직도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 가려면은 지문을 찍고, 사진을 촬영하고, 입국허가를 받아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이런 아무것도 아니고 연약한 나라, 이런 나라에 태어나서도 이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쉽습니까? 얼마나 어렵습니까? 정말 법대로 살고 그리고 이 나라에서 통영되는 국가가 우리에게 기대하는 그 말하자면은 요구하는 조건대로 살려면 너무 어렵습니다. 어떤 때는 도저히 법을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 없게끔 되어있는 것도 있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사는 것 정말 어렵습니다. 하물면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죄인들이 아니라 거룩한 무리들이 누리는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렇게 어렵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가 하나님나라의 백성들로 부름 받은 것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감사하지만 그러나 어떻게 그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으로서 죄 많은 이 세상에 시민노릇하기도 어려운데 그 완벽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 수 있을까? 깊이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안에는 우리가 그 하나님의 나라에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같이 하늘을 통해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 이런 것들이 전적으로 필요하고, 그리고 이런 것들이 아니면은 도저히 어떻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도 우리가 은혜를 받자. 그렇게 우리에게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표준은 시대를 따라 수시로 변하는 이 시대의 본에 의해서 찍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서 그리스도 예수의 그 부르심의 본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들이 많은 갈등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면서 이 세상에서 살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고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라고 말했을 때 세상이 그가 싫어서 옥 속에 가두었을 때에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적당하게 박해를 받고 그리고 고난을 당하고 죄 많은 이 세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왕따를 당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유익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이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내가 이 세상에 절대로, ‘이 세상이 나를 만족시켜줄 수 없다’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궁극적인 소명이 이 세상의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생각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데 흔들리거나 좌절이 없도록 그렇게 우리를 붙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땅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의 육신적인 욕심이나 그리고 세상을 향한 사랑이나, 방탕함, 이런 것들에서 오는 기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신령한 기쁨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