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미움 받을 때 드리는 기도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공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시 5:8)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시인은 악한 자들에게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했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하나님 앞에 결심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경배하며 다시 한번 주님을 경외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이제 시인은 여전히 악인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자신의 처지에서 앞으로 펼쳐질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조용히 생각합니다. 그 결심을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로 올리고 있습니다.
Ⅱ. 미움 받을 때 드리는 기도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미움 받을 때 드리는 기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원수들’이라고 되어 있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쇼레라이’라는 단어인데 ‘쉬르’라는 동사에서 옵니다. 의외로 이 동사는 원수라기보다는 감시하다는 뜻입니다. 이 동사의 폴랄형입니다. ‘감시자’, ‘살피는 자’ 혹은 ‘지켜보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은 시인의 인생에 어떤 나쁜 결말이 나기를 기대하면서 시인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시인의 마음은 고난 받을 때 하나님께로 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심정을 하나님이 통촉해달라고 기도할 정도로 고통스러웠으나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만 호소하기로 다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면서 그들은 힘이 있고 또 악을 행하나 하나님은 그들의 편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시인의 마음은 정해졌으나 여전히 그 주위에는 악인들이 건재하고 있었고 그들은 시인의 불행을 빌며 감시하는 자들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처지에서 시인은 그 미워하는 자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 시인의 기도는 크게 둘로 요약됩니다.
A. 주의 의로 인도하소서
첫째는 ‘주의 의로 인도하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주의 의’라고 되어 있는 부분은 원래는 당신의 혹은 너의라고 하는 2인칭 소유격이 붙어있는 명사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법상 하나님을 ‘너’라고 부를 수 없고, ‘당신’이라고 부르면 높임말이 아니기 때문에 2인칭에서는 높임말이 아니나, 3인칭에서는 높임말입니다. 번역을 찾을 수 없어서 ‘주님’으로 바꿔 버린 것인데, 엄밀히 말하면 ‘당신의 의로’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의’라는 단어가 ‘쩨다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여기에서 말하는 다른 의미가 아니라 추상적인 의가 아니라 ‘의로운 성품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이 의입니다. 의라고 하는 단어가 쩨덱, 쩨다카, 이렇게 여성형과 남성형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여기에 쓰인 의미가 그 의로운 성품에서 우러나오는 의로운 행동들입니다. 그러니까 ‘당신의 의로운 행동들로서’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의로운 행동들로서 나를 인도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참고 견디며 악인들 앞에서 침묵하며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으나 그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행동을 기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악인에게는 악인이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것처럼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피하는 자기에게는 그러한 믿음에 합당한 하나님이 행동을 보여주시도록 구했습니다.
시인이 고난을 당할 때 그 가장 큰 자산은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도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 수 없지만 시인은 적어도 자신의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하나님 앞에 살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난당하는 날에 가장 큰 자산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양심에 거스르게 행하지 않고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며 사는 것이 바로 고난 받는 날에 가장 큰 자산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55절과 56절에서 시인은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비록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마음을 다해 주 뜻대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은 두렵지 않습니다.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은 그가 사랑하지 않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을 그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으니 그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잠시 있다 사라지는 육신의 삶 저편에 있을 영원할 하늘나라의 소망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자기의 편이신 줄 확실히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성품을 따라 공정하게 행동하시면 그것은 의로운 행위가 될 것이고, 그 앞에 악인들은 설 자리가 없으며 자신은 그 앞에 설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의로운 행동이 자신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 의지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실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한다 할지라도 부정한 청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평과 의로움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부당한 청탁이 수락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행동으로 자기를 인도해달라고 간구할 때에 결국 그 간절한 기도는 바로 하나님 앞에 올리는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의로운 행동으로 자기를 인도해 주시면 반드시 자신에게는 희망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운 행동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고난 중에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 분에게만 소망을 두고 왕이신 하나님께만 자신의 심사를 통촉해달라는 간구하는 그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시리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와 그리고 우리의 영혼의 때 묻은 악 때문에 하나님이 시련을 주십니다. 거기에서 우리를 고난을 당하게 하시고 그 고난을 풀무 삼아서 우리를 단련하고 회개하고 정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죄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이러한 시련을 당하게 하십니다. 많은 사람은 우리를 향해 손가락질 하며 그 시련은 너의 죄 때문이고, 너의 악 때문이라고 비난하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비난에 개의치 않습니다. 다만 귀먹어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고 그렇게 모든 것을 침묵하며 자신의 삶 전체를 들여다보고 계시는 하나님 한분께 호소하며 그분 앞에 매달립니다. 전심으로 그 분을 의지하고 그분 앞에 마음을 드립니다. 그래서 그의 소원은 하나님이 의로운 행동을 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그 의에 인도받을 수 있도록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악인에게 에워싸이고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의로 자기를 인도해 달라고 매달리는 것은 그것은 한순간에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부터 혹은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마음이 수많은 시련과 시험으로 요동칠 때 오직 눈에 보이는 현실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굳게 붙들고 그분께만 호소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이러한 기도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과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 원인과 결말을 모르는 시련 중에 있다 할지라도, 심지어 자신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때라 할지라도 거기에서 주님을 굳게 붙들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을 가장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을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큰 능력으로 그들을 붙드실 것이고, 그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였던 방법으로 새로운 길을 내실 것이며 하나님 앞에 다시 살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돌보아 주시는 주님이시니 미움을 받을 때 기도를 드릴 수 있는 믿음은 얼마나 훌륭한 믿음입니까? 미움 속에서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을 함께 미워하고 원한을 품고 심지어 악을 행하고 그의 파멸을 기다리는 것만큼 그의 영혼도 병들어 가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기도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렇게 평안한 인생의 날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의 날은 우리의 인생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특별한 기도가 필요한 때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시인처럼 이렇게 고난과 시련을 당하고 그리고 악한 자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온 몸으로 받고 있는 동안에 이 시인은 자신의 믿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자신 있게 하나님 앞에 당신의 사랑을 힘입어서 주님의 집에 들어갈 것이며 주님의 의로운 행동으로 나를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도는 자신이 올바르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이 자신도 쳐서 올바른 길로 이끌어달라는 간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의 의의 인도함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주의 길을 곧게 하소서
마지막 두 번째는 “주의 길을 곧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마지막 구절을 히브리어로 하면 ‘당신의 길을 나의 면전에 곧게 해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길을 나의 면전에 곧게 해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길’이라고 번역된 ‘데레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길, 여행, 방식, 삶의 과정’ 등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데레크’가 도덕적인 행동과 특성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도덕적인 특성과 행동은 우연히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 심은 데에서 거둡니다. 마음에 악이 쌓여서 악이 특성이 된 사람은 악이 의도적으로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선을 행할 수 있지만 도덕적 특성 자체가 악하기 때문에 그의 행동에서는 악한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선한 사람은 그 반대입니다. 그래서 이 데레카가 한 사람이 걸어온 인생의 길,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막론하고 인생의 길을 가리키는 은유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당신의 도덕적인 행동과 특성을 나의 면전에서 곧게 해 주소서.’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 이러한 도덕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행동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없이 명료하게 보여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의 기도는 하루아침에 나온 기도가 아니라 오랫동안에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온 삶의 열매로서 나오는 기도입니다. ‘당신의 길을 나의 면전에 곧게 하소서’라는 이 기도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 일로서 인간 개인의 삶과 사회 속에서 당신의 도덕적인 행동과 특성을 충분히 보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당신의 도덕적인 성품과 행동을 우리 면전에서 분명히 보여주실 때 어떤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먼저 시인 자신에게 확신과 순종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은 벌하시고 의로운 사람은 지켜주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를 높일 때 시인 자신에게 격려가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잠시 뒤틀린 이 세상의 인간사를 바로 잡으시는 분이시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신하고 순종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뿐만 아니라 악인들에게는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을 향한 깊은 두려움과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는 마음을 가져다줍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여겨지고 자신의 악한 행동들이 감추어지고 그리고 자기들의 잘못된 행동들이 누구에게도 제제 받지 않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을 하찮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당신의 의로운 심판을 보이시고 벌 줄 자에게 벌을 주시고 상 줄 자에게 상 주실 때에 이 악인들은 하나님 앞에 두려워하게 되고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 자신에게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큰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지식을 전달해 줍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의 의를 구하였습니다.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묵상하면서 악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으며 자신은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를 힘입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삶의 용기를 얻게 되었고 오히려 이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욱 예배하고 싶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신자는 자신의 신앙을 어느 때에든지 결국 드러내고 맙니다. 신자는 형통할 때에도 시간은 걸리지만 결국 자신의 신앙의 여부를 삶으로 보여줍니다. 신앙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형통하게 할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자랑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은 형통할 때에 결국 교만하고 하나님 앞에 타락할 것입니다. 시련을 당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시련을 당할수록 그 고통을 통해서 자신의 불결함을 하나님 앞에 깨닫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그 고난을 통해서 자기를 변화시키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를 지키리이다. 그들의 마음은 살쪄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고난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즐거웠다거나 다시 한 번 그러한 고난을 당하고 싶다거나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그냥 고난일 뿐입니다.
(예화) 젊은 날에 하나님 의지하면서 참 소설 같은 인생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그 고난 속에서 붙들어주시고 응답해 주시고 도와주셨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젊은 시절에 고생을 많이 하며 사역하던 교회 옆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의도하고 지나간 것은 아니고 그 근처에 있는 대학에서 저를 초청하였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러 가다가 그 교회 옆을 지나갔습니다. 그때 마음에 다가오는 느낌이 어렸을 때 내가 살던 고향을 지나가는 느낌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렸을 때 살던 고향길이나 어려서 제가 유치원 다니던 강원도 길을 지나갈 때에는 마음이 애틋합니다. 5살, 6살 밖에 안 되었을 텐데 조각조각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또렷한 기억들이 남고, 어떤 때에는 마음이 따뜻해지기도 하고 너무 그립습니다. 그때 늘 짝으로 다니던 뒷집에 살던 유치원 동문은 어떻게 되었을까, 개천에서 팽이 돌리는 형들 옆에서 얼음을 지치던 그 아이들은 어디 있을까, 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교회 옆을 지나가는데 너무 연단을 받고 고생을 해서 그런지 지나가는데 그러한 애틋함과 그리움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생각납니다. 나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교제하였던 사람들,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나를 도와주셨던 분들, 그리고 그렇게 눈물로 기도해 주셨던 권사님들, 이제 다 돌아가시고 그랬지만 기억이 또렷하게 납니다. 그 조각을 제외하고는 그 근처에 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결국 고난은 세월이 많이 지나도 우리에게 고난입니다. 거기에서 주님을 만난 것이 기쁘지 않았다거나 거기에서 주님을 만난 그 믿음의 열매들이 하찮았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라 역시 세월이 많이 지나가도 그 고난 받았던 기억은 여전히 고난을 남습니다. 아픈 것들이 아픔과 기쁨, 그리고 힘들었던 기억들과 행복하였던 기억들이 이 기억 밑에 가라앉아 있다가 그것이 어떤 자극을 받으면 소환됩니다. 다시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가 기억의 표면을 건드려서 다시 희로애락이 일어납니다. 한 30년, 35년도 더 전의 일인데도 아픈 것은 아픈 대로 기억에 남고 기쁜 것은 기쁜 대로 기억에 남고 그렇습니다.
이 시인은 고난을 좋아해서 이러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유익인 이유는 고난 자체가 행복했다거나 즐거웠다 거나 하는 뜻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였기 때문에 그는 비상하리만치 하나님 한분을 바라보아야 했고 그러면서 그는 평탄할 때 하나님의 율례를 온전히 지키면서 살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부족을 발견하고 자신 속에 있는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살아갈 마음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고난당한 것이 나에게 유익이었습니다.’ 왜 입니까?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난 후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고난에 대해서 유익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가 모두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미래를 알 수 있다면 아마 부자도 될 수 있을 것이고, 심지어 권력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입니다. IMF가 나기 직전 그 때를 소제로 다룬 영화가 있습니다. <국가부도>라는 영화입니다. 어느 금융계 종사하던 한 직원이 미래에 일어날 지표를 가지고 아주 확실하게 해석하고 그리고 그의 조언을 따라 투자했던 사람들이 엄청난 부자가 되는 이야기가 그 안에 나옵니다. 미래에 대해서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경제학자 조순씨도 자신의 경제학 책에서 그렇게 미래를 예측할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자신은 참 부럽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경제학자들도 잘 모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미래를 가르쳐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영원히 가르쳐 주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해서 미리 알려줘 봤자 좋은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미래가 장밋빛 미래이면 하나님 앞에 교만할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래가 어둡고 우울한 미래이면 하나님 앞에 이미 운명을 확정되었으니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비밀에 속한 일입니다. 일초 후에 일어날 일도 알 수 없습니다. 모든 죽는 사람은 일초도 안 되는 시간차로 삶과 죽음이 갈립니다. 누구도 그 순간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사 간에 당신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예상 밖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실이 우리가 정말 기다리고 기다렸던 현실 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세월이 많이 지났는데도 그렇게 의외로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한 가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슨 일을 만나든지 간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결국 합력해서 선을 이루에 됩니다. 때로는 고통스럽고 아프다고 할지라도 믿음으로 산 사람들은 결국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애지중지 하는 것들, 다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이고 우리가 결별하기 싫어하는 어떤 사물이나 인연도 결국 앞으로 우리의 인생에서 사라질 것들이고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할지라도 죽음은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사랑하고 싶은 것들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떠오르지만 그렇게 사랑하는 우리 자신이 시간의 흐름을 타고 무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결국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외에 우리를 끝까지 지켜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시인은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받으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의로운 행동으로서 자기를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빌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길을 곧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하나님의 도덕적인 행동과 특성을 이웃의 삶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도와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왜 이것이 시인에게 기도가 되었겠습니까? 보다 더 시급한 기도는 악인은 박살을 내시고 나에게는 큰 복을 주소서라는 기도였을텐데, 그는 자신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올렸습니다. 당신이 거룩한 분이심을 고난을 당하는 나뿐만 아니라 나를 미워하여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행동과 특성이 분명한 것을 드러내셔서 내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처럼, 나의 모든 이웃들이 심지어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던 악한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을 인정하게 해달라는 기도를 빌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그 도덕적인 행동과 특성을 따라서 그 길을 자신들도 인생길을 삼고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의심할 여지가 없는 길을 보여 달라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고난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파하는 것을 배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에게 아프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시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불순한 은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단련이 되어 불순물들과 분리되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을 주시고 때로는 시련을 주셔서 그래서 마음속에 있는 찌끼들을 덜어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앙, 그리고 옳지 않은 자신의 죄가 분리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정결하게 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지 아니하고는 우리의 마음에 진정한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잠시 있다 사라질 평화대신 영원한 평화를, 그리고 아침에 깃들었다가 저녁 되면 사라져버릴 행복대신 변하지 않는 행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때로는 이러한 시련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어떤 시련을 만나든지 고난을 당하든지 혹은 너무나 애매하게 고통을 겪든지 그 모든 환경 속에서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나의 이 모든 상황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덕적인 행동과 특성들을 드러내 보여주시기를 하나님 앞에 간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고난을 통해서 오히려 영광을 받으시고 그 고난을 모두 통과하고 난 다음에는 정금과 같은 신앙으로 나오게끔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고백했던 것처럼 고난당한 것이 나에게 유익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주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최고의 가치는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삶 속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어주신 충만한 사랑은 이웃에게 펼쳐져서 그들도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게 되기를 간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곧게 난 길을 보여주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Ⅲ. 적용과 결론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는 모든 상황을 통해서 정결해집니다.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나 결코 그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기쁨거리를 이 세상에서 찾지 않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이 주시는 삶 속에서 감사하고 주신 분깃들을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궁극의 기쁨을 거기에 두지 않습니다. 고난 자체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 속에서 그 모든 연단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붙드는 믿음을 통해 거룩해 집니다. 하나님이 시련 속에서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친밀한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능히 극복하게 하시고 그 시련을 능히 이겨낼 수 있도록 힘을 주십니다. 세상을 지나면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만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이 세상에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결함이 많은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칭찬만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그러한 환경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한 환경입니다. 누구나 교만해지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대단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순전한 믿음의 사람 시인조차 때로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당하게 하시고 때로는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사랑하는 신하들, 친구들 심지어 어린양처럼 자신의 품에 안고 모든 일에 동고동락했던 백성들에게조차 미움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생사 간에 우리에게 의지할 분이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믿음을 갇게 만들어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칭찬을 받으면 너무나 좋지만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릴 수 없도록 그렇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엄마를 의지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따르는 사람들은 남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시련 속에서 남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위로를 받게 하십니다.
(찬양)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나 피곤치 아니하며
저 위험한 곳 내가 이를 때면 큰 바위에 숨기시고 주 손으로 덮으시네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의지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