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고통 받을 때 예배함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시 5:7)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시인은 악인에게 고통을 받을 때 조용히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러자 시인은 하나님이 죄악을 기뻐하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오만하게 생각하고 행하는 자들이 그분 앞에 서 있을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악인이 자신에게 행하는 악을 악으로 되갚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고난 속에서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뀐 것은 없지만 그가 사람에게서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하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이 그 시인의 온 영혼을 구석구석 일깨웠습니다. 그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지식이 시인의 마음에 평안을 주었고 믿음을 주었습니다.
Ⅱ. 고통 받을 때 예배함
오늘 7절은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악인에게 가장 고통을 받던 때,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심정을 통촉해달라고 빌었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달라고 애원했으며, 아침에 주께 기도하리라고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고 주님의 성품을 묵상했습니다. 그러자 자기 앞에 힘 있게 날치며 자신의 삶을 어그러뜨리고 고통을 주는 악인의 존재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존재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결심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크게 두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A. 큰 사랑을 힘입어
첫째, 그 고난 중에 자신이 하나님의 큰 사랑을 힘입고 있다는 것을 먼저 보여줍니다. 우리가 읽은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번역이 그리 잘못된 번역은 아니지만, 무엇인가 논리적으로 빠지는 것 같아서 다시 히브리 성경에서 번역해 보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번역이 나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많은 인자로 말미암아 당신의 집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 이후의 구절은 이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당신을 향한 경외함 안에서 성전을 향하여 나는 경배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 번역을 보면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간 사람이 또 어떻게 성전을 향하여 예배를 할 수 있을까 라는 논리적으로 이상한 구석이 엿보입니다. 그래서 이 두 문장을 따로 끊어서 읽어야 맞겠습니다. 시인은 가장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께 예배하기로 결심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이 먼저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힘입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사랑’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여러분도 잘 아는 ‘헤세드’라는 단어입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에서 ‘인자’로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인자’, 곧 헤세드는 당신과 맺은 언약 때문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무엇인가 그럴만한 자격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과 언약을 맺은 당사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한없는 자비와 용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는 모든 은혜의 힘과 각양 좋은 것들,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영혼에 속한 것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헤세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 ‘헤세드’가 매우 많다고 고백합니다. ‘풍성하다’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로브’라고 되어 있는데 ‘많다’, 혹은 ‘크다’, ‘많이 더 해준 것’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어차피 ‘헤세드’가 추상명사이니 이는 ‘큰 인자를 힘입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공로나 힘 때문이 아니라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시는 큰 인자하심 때문에 자기가 그 고난을 받는 때 하나님을 경배할 마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당신의 많은 혹은 큰 인자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참 신앙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시련 가운데 나타납니다. 시련 속에서 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다릅니다. 그렇지 못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져가지만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 고통 속에서 더욱 절실하게 주님을 찾습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련을 당할수록 참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세상과 자신의 수단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당할 때 우리의 믿음을 스스로 달아보게 하십니다. 큰 믿음을 가진 줄 알았더니 이렇게 고통을 당하면서 자신의 믿음의 무게가 이것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십니다. 고난을 당할 때 그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피할 마음을 가짐으로써 그는 예전보다 더욱 더 뜨거운 신앙으로 생사 간에 주님을 의지하고 예수를 붙듭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고난을 당할 때 당신에게 피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고난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하나님의 은혜의 결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지극히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 속에서 당신의 친교를 보여주십니다. 특히 사람으로 인해서 시험을 당하고 고통을 받을 때 모든 사람의 마음에는 본성적으로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고, 심하면 자신에게 고통을 준 것 만큼 그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이렇게 복수심에 굴복하거나 혹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는 대신 하나님의 품에 피하는 사람들은 천국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평안하고 형통할 때에는 배울 수 없었던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을, 그리고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큰 인자하심을 지극히 비밀스러운 방법으로 깨닫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시인은 시편 31편에서 동일한 상황에 처하여 하나님 앞에 고통을 호소하였습니다. 특히 시인은 자기를 둘러싸고 오가는 그 험악한 풍설들을 경험하면서 육신으로 경험하는 고통 못지않게 심적으로 당하는 괴로움에 몸부림 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신앙의 눈으로 자신의 환경을 살폈습니다. 그러자 그는 사람들로 말미암는 고난 속에서 피할 바위, 숨을 은신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을 눈동자처럼 보호하시는 (주의) 은혜의 품이었습니다. 시편 31편 19절과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서 베푸시는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주께서 그들을 주의 은밀한 곳에 숨기사 사람의 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비밀히 장막에 감추사 말다툼에서 면하게 하시리이다.”(시 31:19-20).
같은 시인이 다른 상황에서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요동하든지 말든지, 악인은 처처에 날뛰며 자신을 괴롭히던지 말든지, 없는 말을 지어내어 그 커다란 구설수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든지 말든지 생사 간에 시인이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보십시오. 그는 악인들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서 자신의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하나님께 빌었는데 그 모든 것들을 통해 하나님의 커다란 혹은 많은 인자하심을 힘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좋은 것을 통해서 좋은 것을 주시지 않고 매우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평안하고 따뜻한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통스럽고 쓰라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이미 시인은 그 오랜 세월 전에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를 깊이 이해하였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오래 계속되는 고통, 크게 증가하는 고통 때문에 아파했고, 예전에 자신의 친구였던 사람들이 발뒤꿈치를 들고 자신에게 가해자가 되었을 때 그는 육체로 당하는 고통 못지않게 마음에 당하는 고통으로 아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바뀌고 변하지만 시인이 의지하고 있는 하나님은 불변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당신에게 피하는 시인에게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더욱 많고 풍성한 인자하심을 그에게 베푸셨습니다.
고난 속에는 항상 나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쓰라린 눈물을 흘리고 비참한 마음으로 통곡할 때 항상 나쁜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의지하였던 그릇된 신뢰를 우리의 마음에서 덜어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우리가 피할 마지막이요 거룩한 산성이시고 우리가 숨을 은신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모든 것이 갖추어진 좋은 환경에서 보여주시지 않았던 당신의 비밀스러운 뜻을 고통 속에서 당신의 품으로 피한 상처받은 어린양과 같은 믿음의 자녀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 은밀한 곳에 감추사 지극히 비밀스러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새로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게 하십니다. 여러분도 고난 속에서 이렇게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사람에게 징징 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한분께 전심으로 의지하고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그래서 주의 큰 인자하심을 힘 입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하나님을 예배함
마지막 두 번째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시인은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만이 완전하신 분이요, 하나님만이 전능하신 분임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악인에게 받는 고통이 시인을 예배하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시인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악인들만을 노려보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아마도 그는 복수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기도보다는 칼을 찼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늘 위에 높고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세계를 향한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빈들에 마른 풀 같이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인간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악인을 당신의 성품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러자 시인의 눈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악한 사람들 대신 온 땅과 하늘 위에 높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경배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크신 인자 때문에 주의 집으로 들어간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성전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으로 들어간다고도 해석할 수 있고 혹은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악인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인자 때문에 내 마음이 하나님이 계신 성전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당신의 임재’ 속으로 들어간다고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을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먼저 ‘경외함으로’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악인으로부터 고통을 받았으나 시인 안에는 그 전보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하는 마음이 더 깊어졌습니다. 왜냐하면 악인은 자신에게 나쁜 짓을 행하기 위해 고통을 주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시인 안에 있는 믿음을 일으키사 그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하게 되자 자신에게 일어난 일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바닥나면 이내 보이는 것이 전부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이나 혹은 그에 대응하는 것이 불신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는 눈에 보이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늘위에 계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하나님의 모든 뜻은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눈을 들어 그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을 추적하게 되면 그 모든 일들을 당신의 뜻으로 삼으시고 그것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은 눈부시게 빛나는 하나님의 거룩함입니다. 그것 때문에 시인은 예전과 다른 그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오늘 시인을 보십시오. 첫 절은 하나님 앞에 탄식하며 시작했으나 7절에 와서는 하나님을 경배할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악인에게 고통을 받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시련 속에서 그는 예배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고난 속에서 그는 온 땅과 하늘 위에 높고 모든 만물을 초월하시는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고 싶었습니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에 관해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깨닫게 된 사실은 하나님은 자신이 경외해야 할 유일한 대상이시고, 하나님을 향한 끝없는 경외심도 그분의 거룩함과 영광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것을 주어도 그것이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나쁜 것을 주실 때 그 나쁜 것을 통해서 좋으신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매일 매일 시험을 받습니다. 오늘도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전개되는, 우리 눈앞에 들어오는 삶의 모든 상황에 대해서 우리는 반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의 크기에 따라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기도 하고 단지 세상을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좋은 선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끝없는 고통을 통해서 이 시인이 알지 못했던 비밀스러운 교제의 세계로 데려 가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눈을 떠 자신의 삶 전체를 움직이고 계시고, 잠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으나 결코 악인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더욱 더 단단하게 하나님을 경외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고난 속에 배우는 신앙을 갖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는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겠다고 자신의 결심을 표명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시 가지고 있었던 성전 신앙을 반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에 앞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한 곳에서만 하나님을 예배하고 제사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미리 보여주시기라도 하시는 듯이 성막의 제도를 계시하셨습니다. 광야를 여행하면서도 그들은 오직 하나님이 세우신 성막에서만 하나님을 경배하고 제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어디가든지 그 성막이 먼저 펼쳐지고 이후에 열두 지파의 진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위에 있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을 뜨거운 햇볕으로부터 지켜주고 어두움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신앙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계속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궁극적으로 시련이 됩니다.
어디에나 안 계신 곳이 없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한 장소, 곧 성전을 지정하시고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또 공동체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을 주시고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은 이후 궁극적으로 성취될 더 큰 것을 위한 그림자였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서만 우리들을 만나 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피로 속함을 받아 당신께 제사하고 예배할 수 있음을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주를 경험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라고 한 것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주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 하겠나이다’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전을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하셨고 눈에 보이는 성전을 부서뜨리는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세우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러한 성막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자신의 육체를 깨뜨리심으로 보다 완전한 영적인 교회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임재를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셨고, 그래서 누구든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공로를 통해 그분의 보혈의 피 길을 지나 아버지의 보좌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리스도와 만나는 장소로 당신의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이 교회는 영원하지 않으나 이 교회를 통해서 만나게 하시는 그리스도는 영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운명을 같이할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들의 존귀함을 봅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마다 우리는 단지 예배만 드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때마다 그 목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대면하는 것입니다. 예배 안에서 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시인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한 뒤 불안하고 두려웠던 마음이 하나님을 예배할 마음으로 바뀐 것처럼 우리도 그 임재 속에서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고난 속에서 당신을 찾는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교회에서 만나주십니다.
시인은 가장 크게 고통 받던 때에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기로 하였습니다. ‘예배하리이다’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매우 특이한 형태의 단어인데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사람을 향해 이 말이 사용될 때에는 ‘인사하다’ 혹은 ‘문안하다’라는 뜻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이것이 사용될 때에는 ‘하나님을 뵙다’ 혹은 ‘하나님을 경배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예배하다’라고 번역된 것이 잘못된 번역은 아닙니다만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을 경배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경외심으로 가득 찬 가운데 그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올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나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 어렵고 그 고난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잠재워지고 나면 좀 더 잘 기도할 것이며, 보다 더 잘 섬길 것이고, 보다 더 하나님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시인의 경험은 그렇지 않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가장 고통을 받을 때 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는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들었습니다. 고통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만난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시련 속에서 받은 그 풍성한 은혜가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고난 속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여, 주님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그렇게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오히려 당신의 거룩하심을 보여주시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래서 예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을 향한 지식의 세계로 데려 가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어떤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은혜로 시련과 큰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에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할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 주님을 깊이 만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Ⅲ. 적용과 결론
악인에게 고난을 당할 때 원망과 미움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시인을 보호해 주었고 그리고 시인은 믿음으로 주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었습니다. 일체의 온유함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예배할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시는 성전이 되십니다. 그래서 당신 앞에 나아오는 많은 사람들이 크고 작은 사연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을 찾았던 것처럼 또한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 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큰 은혜 안에서 여러분들을 부르십니다. 그래서 평안할 때는 깨닫지 못하였던 놀라운 은혜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도 그리스도를 찾고 그분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도 주님을 만나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 여러분들도 고난과 시련 속에서 이렇게 예수를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