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0일 새벽예배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히 13:21)
녹취자: 윤은정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구원받은 성도들을 그냥 무지한 가운데 짐승처럼 살도록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이렇게 잘 양육하시고 또 당신이 세운 목자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신앙을 가르치시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방법을 목양을 통해서 잘 이렇게 일깨우십니다.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오늘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식을 나아놓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낳아 놓은 자식을 잘 양육하고 길러야지만 그가 참 제대로 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중국에 가면은 큰 사회문제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17-8년 전부터 자식을 딸이든지 아들이든지 하나이상 못 낳게 했습니다. 지금도 못 낳게 합니다. 만약에 하나를 낳는데 그래도 더 낳아야 되겠다 라고 하면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한 250만원정도 벌금을 내고 아이를 하나 더 낳아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혜택이 하나도 안주어집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이를 낳아놓고 제때 어떻게 하지 못하니까 그 아이들을 그냥 놔 놓고 신고를 안 하는 것입니다. 신고를 안 하면 어떻게 되느냐? 학교를 못 갑니다. 그리고 의료혜택이나, 뭐, 하여튼, 쉽게 얘기하면 뭐냐하면, 등록 안 된 애들입니다. 주님등록 없는 애들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이 지금 17-18세 이렇게 자랐습니다. 이게 굉장히 많습니다. 이 아이들이 학교를 못가고 사람대접을 못 받으니까 미등록자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범자로 변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참 희안한 나라입니다. 공장 다니고 이러는 여자 아이들이 6개월에 한 번씩 고향에 돌아가서 임신했는지 안했는지 확인서를 떼어가지고 와야지만 재취업이 됩니다. 공산국가니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근데 휴가를 줘서 6개월에 한 번씩 전부다 공장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 한사람이 있었는데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래가지고 이제 신고를 했더니 이 사람들이 이제 중국사람 인줄 알고 허락도 안 받고 애를 낳으면 어떡하냐고 막 그러면서 경찰서에서 신경질을 확 내더랍니다. 우리는 한국사람 이라고 그러면서 죽 설명을 하니까 그러면은 낳아도 된다고... 그렇게 해서 아이들을 낳아서 그 낳아 놓기는 했지만 그렇게 사회적으로 사회가 냉대하고 제대로 교육의 기회를 주지 못하니까 아이들이 거의 부량아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 믿고 거듭 난 것,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 이것은 뭐 말할 수 없는 행복이고 그리고 그것 없이는 사실 모든 인간이 살았다고 해도 사실 진정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 신자가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그 후에 그들을 잘 신앙적으로 양육하고 올바로 믿음생활 잘하게끔 그들을 돕고 해서 일깨워주지 아니 하면은 그 다음에는 전혀 하나님나라의 부량자 같은 사람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아주 못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특별히 영혼을 인도하는 자들을 붙여주셔서 그들을 목양하고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회개할 자인 것처럼 그렇게 섬기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그들을 온전케 해서 진실한 성도로 만들어가는 그 모든 것, 그런 모든 것이 결국 마지막 목적이 뭐냐? 그게, 마지막 목적이 결국은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따라서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온전하게 하시는 것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을 만들고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런 거듭난 사람들을 목양을 통해서 길러내신 이유란 말입니다.
그것을 오늘 여기에서 좀 더 진전해서 뭐라고 하냐면은 ‘자기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잘 목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장하면 성장 할수록 철저하게 그 사람이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거듭났어도 잘 목양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양육되어져서 진실한 신자로 성화되어 가면 갈수록, 성화되어가지 않으면 그 신앙은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자기중심적 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깨쳐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생각 하든지 간에 자기를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고 심지어는 신앙도 자기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하려고 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도 자기의 인생의 유익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려고 그렇게 한 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삶의 모습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매우 부끄러운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어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양육되고 그가 은혜 안에 있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은 스스로 잘 모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와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죄 아래 있을 때 여러분은 전혀 다른 사람입니다. 그렇게 잘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리고 진실한 신자가 되기를 갈망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그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죄 가운데로 들어가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으로 변하고 그리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변하는지 모릅니다. 이게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사랑 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종족의 보존과 자기의 보존입니다. 자기와 종족의 보존입니다.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호랑이가 무섭고, 사자가 무섭다고 그래도 배부르면 절대로 공격하지 않는다고 그럽니다. 자기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안 그렇습니다. 몇 해 동안 먹고 남는 것을 쌓아 두고도 또다시 탐욕을 가지고 사람을 공격합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굉장히 호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입니다. 은혜가 떨어지면은 그런 본성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그런 사람들이 목양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정말 변화되면 그 변화를 유지하면 이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고 싶은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인생의 보람이 하나님의 뜻을 얼마나 행하는가? 그래서 예전에는 인생의 행복이 내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복 받을 수 있을까? 심지어는 예수님도 내가 이 세상에서 그렇게 행복을 누리며 사는 그런 도구로 사용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진정으로 변화되어서 진실한 성도에 가깝게 다가 갈수록 이제 삶의 목적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분이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다 더 직접적인 것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소극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은 보다 적극적인 삶을 행하는 것입니다. 다음 주에 그 얘기를 좀 하려고 하는데 효도를 이야기 할 때도 일일이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은 소극적인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진정한 효도는 그 어머니 아버지가 뭘 좋아하시는지를 생각하고 그 어머니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도 그런 경험을 요한일서 3장에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의 기뻐하시는 바를 행함이라.’ 가끔 지체들이 그런 것을 묻습니다. ‘목사님, 이러이러한 일은 죄일까요. 아닐까요?’ 그런데 그것은 질문을 그렇게 하지 말고, ‘이러 이러한 일을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기뻐하지 않으실까요?’ 보다 적극적으로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럼 두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다르냐 하면은, 전자의 사람은 죄만 되지 않는다면 경계선까지 가서 그 일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후자의 사람은 어때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면 그 일이 직접적으로 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안 하겠다’라고 하는 것,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다‘라고 하는 소원을 가지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겠습니까?
1900년대 초에 미국에서는 댄스바람이 많이 불었다고 합니다. 지금 여기서 돌아가신 그 아레이 토레이 목사님의 할아버지인데, 그분이 쓰신 글 가운데, 특별히 댄스에 대해서 쓴 작은 책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한 20년 전에 읽었는데, 굉장히 재미있게 쓰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뭐냐하면, 그것도 사실은 영국에서 건너온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영국에서 18세기 19세기가 되면서, 우리나라도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가정집에, 지하 같은 데를 홀처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음악과 여러 가지 술 같은 것을 따라 마실 수 있는 파티장처럼 만들어서 거기서 이제 음악을 틀어놓고, 그리고 이제 무도장처럼 가정집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영국에서는 18세기 같은 경우에 필수적이었다고 그럽니다. 미국에서도 그게 아레이 토레이 목사님 시절에 아주 유행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녁때가 되면 모여서 늘 춤을 추고 그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한테 그렇게 ‘댄스를 하고 하는 것, 춤을 추는 것, 이런 것이 성경에 어긋나느냐?’고 자기에게 묻는데,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는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이렇게 묻고 싶다’는 것입니다. 각자 가정을 가진 남자와 여자들이 남의 집, 그 사람의 품에 밀착되어서 안겨서 그렇게 하면서 신체적으로 접촉하고 춤을 추면서 무엇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생각을 하겠느냐? 그게 바른 접근입니다. 그게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게 하실려고 하나님이 구원받은 사람들을 내버려 두시지 아니하고 그들을 잘 양육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삶을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결국은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이 일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양을 통해서 더욱 그 성도들이 그리스도께서 붙잡히고, 그리스도께 연합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날마다 이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서 자신도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기를 힘쓰고 하는 그렇게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만나고 연합되는 삶을 삶으로서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 이런 삶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내가 너희를 신랑되신 예수님께 너희들을 이제 신부로써 그 소개, 중매장이로 자신을 그렇게 말합니다. 훌륭한 사역자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오히려 사라지고, 예수님을 그들에게 만나게 해주고, 그래서 예수님의, 세상에 그 끊임없이 유혹과 그리고 세상의 모든 고통이 밀려와도 그분의 순결한 신부로서 그렇게 살아가게 만들어 주는 것,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고 하찮은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사랑으로부터 떠나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기뻐하시는 바를 행하고 그리고 예수님의 뜻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목양을 받으면서 살게 하시는 이유다 이 얘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