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1일 교직원예배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골 2:9-10).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오늘 이 시간에도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려고 하오니 주께서 저희들과 함께 해 주셔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이다. 아멘
기독교 신앙은 그야말로 그리스도 신앙이야. 그래서 신앙의 본질은 삼위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것인데 그 삼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당신 자신을 충분히 계시하신 것이죠. 그리스도는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고 또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의지하고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갈지를 보여주시는 탁월하심을 가지고 계시는 거죠.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그 탁월함에 대해서 눈뜨고 그 앞에 누구의 강요도 없이 전적으로 무릎을 꿇어본 사람이 아니면 그가 무슨 경험을 했던지 그리스도인이 아니예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경험한 사람이다 그거에요.
그리스도의 탁월성은 우선 그분의 존재에서 나타나요. 그분이 모든 피조물들 위에 뛰어나실 수 있었던 것은 단지 피조물일 뿐 아니라 피조물이면서 그 동시에 그 본질은 창조주이셨다는데 있는 거죠. 즉, 신성과 인성이 그리스도 예수의 존재 안에서 만난 것이죠. 오늘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이 모든 충만한 것이 육체로 거하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한편으로는 예수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참된 중보자가 되셨는데,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셨고 한편으로는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하여 참 사람이 되셨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면서도 또한 그 피조물인 육체안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신적 본질 때문에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과 같은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나 그의 근본 본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지상생애에서 육체를 입으신 그분의 모습은 연약하기 짝이 없는 나사렛의 한 젊은이에 불과했지만 그분의 존재는 모든 피조물 중에 누구도 닮을 수 없는 탁월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믿음의 눈은 육신을 입으신 그분의 사람의 모습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을 보도록 만들어 주었고 또 예수님은 그것을 사람들에게 당신의 존재와 인격 그리고 그분의 행동과 모든 삶 특별히 그분이 전하시는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사람들의 고통은 그리스도 밖같에서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앞에 있는 이 수많은 종교심들. 수많은 종교심을 가진 사람들. 인류 역사이래 계속되어온 종교에서 안식을 찾아보려고 했던 모든 인간의 노력, 사상과 철학속에서 쉼을 얻어보려고 했던 모든 이성의 몸부림들이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지만, 알 수 없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찾았으니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대신 모든 사물들을 직접 보거나 인간의 정신 세계안에서 하나님을 직접 뵈올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은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었고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고통의 문제는 종교안에서도 해결되지 않고 철학안에서도 해결될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인간의 본분은 바로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예요. 그가 그리스도를 안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 앞에 인간으로 돌아온 사람이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그는 참 인간일 수가 없는 것이예요. 믿음의 눈은 하늘로부터 비취는 성령의 감화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가운데서 탁월하게 뛰어나신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분의 성품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고 중생한 신자의 마음 안에는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이 있으니 이 사랑은 곧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삼위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든 피조물들 위에 뛰어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영혼이 신성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육체만 사람을 닮은 것이 아니라 비록 그 분이 신적 본질을 소유하시기는 하였지만은 그러나 그의 영혼은 사람의 영혼을 닮은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인간의 영혼과는 달리 신성으로 충만한 영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영혼으로 행하는 모든 기능에 있어서 그리스도 자신이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 특별히 인간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지성에 있어서 모든 인간의 뛰어난 지성을 가지셨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면서 스스로 당신의 인성 아래 감추신 신성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처럼 아는 자가 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깊은 곳이라도 만물의 깊은 이치라도 그리고 삼위 하나님의 깊은 비밀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지성을 가지셨고 그리고 그 지성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중보자가 되시어 인간에게 당신이 아시는 참 하나님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계서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공생에 시작하는 첫 머리에서 예수님이 처음 가신 곳은 갈릴리였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을 때 모든 사람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에서 말씀을 듣던 것과는 다른 큰 충격을 받게 되었고 압도하는 인상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놀라운 가르침과 그것과 함께하는 저항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게 하는 하나님의 충만한 능력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받게 되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을 엎드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교만하기 짝이 없던 지성에 성령의 충만한 조명을 갖고 들어와서 이전에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모든 생각을 포기하고 진리의 빛 앞에 눈부셔 엎드려 지게 만듭니다. 마치 사도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엎드려졌던 것처럼 말이죠. 성령의 충만한 능력이 있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고개를 끄덕거리던 교만한 인간들로 하여금 가슴을 치며 회개하게 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엄위 앞에 엎어져 자신은 다만 티끌일 뿐이라고 이전의 교만을 버리게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능력과 오늘날 성령을 받은 우리와의 능력의 차이는 우리는 단지 인간의 성품위에 성령의 능력을 받을 뿐이지만 그리스도는 신적인 본질위에 성령의 능력이 더해진 것이니 그분이 충만한 성령의 능력을 받으신 것과 우리의 성령의 충만한 능력안에서 행한 선한 일들은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신성으로 충만하신 그리스도의 영혼의 부인할 수 없는 특질은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랑할려고 몸부림치고 애씀으로써 겨우 사랑을 이루어 가지만 그리스도의 신적 본질은 그 자체가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육체적 삶 안에서 삼위하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사랑의 성향이 부인할 수 없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분은 결코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사람들을 미워하게 되는 자신의 본성과 싸우시지 않았고 그리고 선을 베풀어야할 인간들에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 충동 때문에 고통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인격 그 자체는 사랑이셨습니다. 그래서 그 충만한 사랑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당신의 말을 통해 당신의 표정을 통해 죄인들의 발을 씻기시는 그분의 희생을 통해 병든 자의 몸에 손을 얹으시고, 그의 문둥병을 고쳐주시고 그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시는 그 모든 치료의 행위 안에서 주님은 당신 안에 있는 충만한 상위에 있는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신 거예요.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예요. 그래서 요한은 말하기를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독생자를 화목제물을 주셨음이라>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랑이 없는 것은 모두 주님을 충분히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예요.
그러면 예수님이 이렇게 독특하게 신적 본질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으셔서 신성으로 충만한 인간의 몸이 되셔 온 땅과 모든 만물위에 탁월하심을 보이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구속하심으로 이 세상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 창조하신 세상 안에 아름다움을 현실적으로도 주시고 잠재적으로도 주셨습니다. 앞으로 드러날 찬란한 세상을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간들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의 종교적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은 보여주신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이 세상을 아름답게 당신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아름답게 당신의 뜻을 이루고사 하였지만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모든 피조물과 인간 사이에 단절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안에 있는 그 충만한 사랑이 사람들 속에 물같이 유통하며 당신의 충만을 드러내는 이 일에 있어서 인간의 타락은 근본적인 파괴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의 사람이심으로 하나님을 이끌어 사람에게로 사람이셨으므로 사람을 이끌어 하나님에게로 참 하나가 되게 하심으로 다시 당신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이 피조 세계 속에 가득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구체적으로 이런 창조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을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죽으시기 위해서 친히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친히 당신 자신이 제사장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전에 제사장은 자기가 아닌 다른 짐승의 육체를 찢어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제의 길을 열었지만 그 길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길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영원하고 무궁한 가치가 있는 자신의 육신을 찢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완전한 화목을 가져오도록 그렇게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신적 본질은 죽음을 당하실 수 없으니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기 위해서는 사람이셔야 했으며 그 죽음이 영원한 속죄의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죄 있는 사람이 아니라 완전하신 하나님이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탁월한 지혜속에서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적 본질을 인성아래에 감추이시고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죽으시기 까지 멸시와 욕을 당하시면서 당신의 그 존재의 탁월함. 당신의 신성으로 충만한 인격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부당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면서 고난으로 가득한 일생을 사셨던 것이예요. 그래서 그 분의 겸손과 낮아지심은 십자가의 못 박히신 그것이 아니라 사람의 몸을 입고 친히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부터 시작을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가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아는 것이라면 신자의 일평생의 가장 큰 의무는 그 탁월하신 분이 자기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단지 지성 안에 아는 것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회상의 기술을 통해 인간의 기억 저 깊은 곳에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나를 위한 죽으심에 대한 기억이 마음의 표면위로 떠올라 우리의 마음을 떨게 하고 우리의 전 인격의 영향을 미치는 그런 종류의 회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투누스는 우리 인간의 기억을 위에 비유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 위속으로 들어가죠? 혀끝에서는 맛있고 쓰고 달고 매운 감각이 느껴지지만 위 속으로 들어가면 아무 감각이 느껴지지 않죠. 그처럼 우리의 마음을 통과한 그리스도의 예수에 대한 모든 지식이 기억속으로 들어가서 쓰고 달고 맵고 한 것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위안에 있는 식물과 같은 기억이 도는 것으로서는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예요. 상상의 작용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그 탁월성과 그리고 탁월하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을 끊임없이 다시 떠올려 마음의 수면위에 떠오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은 매순간 그리스도 예수의 그 탁월하신 존재와 우리를 위한 철저한 죽으심으로 인하여 떨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렇게 떨리는 가슴속에서 바로 그 모든 피조물들 위에 탁월하신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가 바로 나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만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사소한 것입니다.
(찬양) 머리에 가시면류관 어이해 쓰셨는가 채찍에 피흘리심은 누구의 죄값인가
두 번째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순종을 배우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 아버지께 온전한 순종을 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구속의 언약이 이루어졌겠으며 그리고 어떻게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겠습니까? 영원한 삼위 중 한분으로 계실 그때에도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온전한 사랑속에서 복종하신 분이였죠. 그러나 그것은 영혼 속에서 복종이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시간속에서, 공간안에서 사람의 옷을 입고 복종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복종의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 복종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아셨을 뿐만 아니라 시간 세계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 대해서 사람의 몸을 입은 그리스도로서 더 많은 배움을 갖게 되었던 것이죠. 그분이 불완전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완전하신 분이지만 이번에는 사람의 몸을 입으신 공간, 안에 있는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앞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배워갔습니다.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향과 본성은 더 찬란한 불길처럼 타올라 죄인을 향한 넘치는 긍휼로 나타났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그분의 죽으심의 그 큰 고난안에서 죄의 위대한 힘을 깨달았을 것이며 하나님의 공의에 엄위함도 그분이 깊이 체득하셨습니다.
마지막 이유는 모범을 보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과 지혜를 인간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는 예수님이 사람의 몸 입고 오시기 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언제나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 불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율법에 기록된 수천마디의 자비의 하나님에 대한 설명보다는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을 위하여 흐르는 그리스도의 눈에 흐르는 두 줄기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통해서 인간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더 많이 알게 되었고 그리고 죄인들을 친히 섬기시고 고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섬김을 통해 시간 세계안에 내려와서 우리 은 인간을 불쌍히 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더 많이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그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어떻게 온전히 순종해야 하는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향한 지순한 사랑속에서 그분의 모든 뜻에 복종하고 자신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인간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거기에다가 맞추고 사는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핑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환란이 오고 자기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 복종할 수 없을 때마다 죄 없으신 그분이 복종하지 않으려는 그 분의 그 죄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자기를 철저히 복종하시고 그리고 죄가 없으신 그분이 우리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신성으로 충만한 육체를 입으시고 오셔서 우리에게 명백히 알 수 있도록 섬겨주신 그분의 희생의 본을 따라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을 깨닫고 또 구원을 얻은 후에는 다시 그 분이 이 세상에 사신 율법을 다 이루신 그분의 사랑의 생애를 보면서 그 분의 복음의 행적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그리스도인으로써 삶의 본분입니다.
이런 순종하는 삶 안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우리에게 더 충만하게 다가오고 이런 충만한 사랑의 다가옴 앞에서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분이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살았을 그 삶의 뒤를 잊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서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예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