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5.21 제2회 개혁신학과 현대목회
상대주의 문화와 개혁주의 목회
녹취자: 이병두
I.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들이 개혁주의 목회 그리고 개혁신학을 따르는 개혁주의의 목회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있지만 사실은 이런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아주 소수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회와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러한 특별한 운동에 대해서 별로 큰 관심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개혁주의를 사랑하고, 개혁주의의 대의를 굳게 지키려고 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이지만 왜 그런지 이런 개혁주의의 노선을 따르면서 목회하는 교회들은 왠지 사람들에게 매력이 없고, 좋아하는 사람만 모여서 자기끼리 좋아하고, 마치 교회와 세상 사이에 높은 담장이 느껴져서 오히려 새신자들이 개혁교회에 와서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고 하는 일들이 흔치가 않은 그런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떤 부분은 개혁주의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교리의 체계, 그리고 현대 정신과 타협하지 않는 아주 분명한 진리와 복음에 대한 확신 때문에도 그럴 수 있지만, 또 어떤 부분은 그렇게 절대적인 부분이 아닌데 이 개혁주의가 가지고 있는 세상과 소통할 줄 모르는 그런 답답함, 이런 것들이 사실 선교적으로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생각해보면, 개혁주의라고 하는 것이 강조되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원래 이 개혁주의 혹은 개혁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사뭇 달라집니다. 최광의로 사용을 한다면, 당시 로마 카톨릭이 아닌 모든 개신교 운동들이 다 개혁신학의 범주 안에 포함이 됩니다. 그러면 이 안에는 이단까지도 모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약간 좁은 의미에서 개혁신학을 생각하면, 이단들을 솎아내고 카톨릭에 대해서 반카톨릭 운동을 일으켰던 프로테스탄트들을 모두 가리켜서 우리들이 개혁신학 또는 개혁주의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개혁주의라는 말은 별로 없고, 개혁신학 이라고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더 좁게 개혁주의를 제한하면 이것은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칼빈주의 운동과 동의어로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로 사용하든지 간에 개혁주의라고 하는 것이 나올 때는 역사적인 배경 자체가 이미 카톨릭 교회가 지배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무엇이 참된 교회이겠는가? 라는 것을 고민하면서 나온 것이 개혁주의 개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주의는 맨 처음 태동될 때부터 상당히 논쟁적일 수밖에 없었고, 기존의 것들에 저항하면서 대항하여 새로운 말하자면, 기독교라는 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성경을 기초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 문맥은 사실 16세기나 17세기 유럽 전체가 기독교화 되어있던 그 시대의 맥락과는 매우 다릅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는 특히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는 기독교가 대중적인 현상이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독교는 매우 일부입니다. 어는 정도 신뢰할 수 있는지 모르지만, 몇 년 전 제가 접한 통계에 보면 기독교 인구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고, 매주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이 약 450만 명 될 것이라고 통계에 접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들이 흔히 25%가 기독교 인구라고 이야기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사실 10%도 될까 말까한 소수입니다. 나머지 90%이상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이 문맥은 사실 16세기나 17세기의 문맥이 아니라 사실, 사도들이 살아가던 1세기 문맥하고 훨씬 유사한 상황인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개혁주의의 대의, 개혁주의의 정신과 신조, 이런 것들을 깊이 존중하면서 우리들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의 신앙과 신학의 지침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충분히 동의할 수 있고, 우리들이 받아들여야 되는 전제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16세기와 17세기에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의 목회를 가지고, 오늘날 우리가 개혁신학을 펼쳐야 되겠느냐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16세기의 교회는 16세기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자기의 사명이 있었고, 18세기 조나단 에드워즈가 활동하던 시대의 개혁교회는 그 교회 나름대로의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계몽주의가 쓰나미처럼 밀려오던 그 시대에 교회 말입니다. 지금은 이미 계몽주의 시대도 다 밀려들어 왔고, 이제는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생겨났던 소위 모더니즘이라고 하는 근대사회, 근대시민정신에 의해서 이룩되던 것조차도 이미 끝나고, 이제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 시대 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이 사명, 그리고 불변하는 가치인 개혁신학을 어떻게 우리시대의 선교와 목회에 접목하고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독특한 상황을 가지고 있고, 또 다른 세대의 교회들이 갖지 못한 소명을 이 시대를 향해 갖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분명히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 그리고 많은 나라의 개혁신학자들과 개인적인 교분을 가지면서 많은 교제들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개혁교회들을 많이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좀 아쉽게 느껴진 것이 뭐냐 하면, 오늘날 이 개혁교회들이 자기 시대에 어떻게 선교해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적극적인 측면에서 너무나 준비가 잘 안 되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왠지 제가 받은 인상으로는 개혁교회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미국과 그리고 유럽까지 모두 망론해서 왜 그런지 개혁교회하면, 그 이미지가 세상으로부터 자신이 무엇인가 피해를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주 깊이 억눌려서 자기방어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는 교회로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은 사실,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원래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이 존 칼빈이 생각했던 것만 봐도 칼빈이 가지고 있는 교회는 끊임없이 뻗어나가고, 자기 자신을 확장하는 선교적인 형태의 교회였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다른 종교개혁자들이 못하던 일들을 존 칼빈은 아주 선교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그 당시에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던 국제적인 협력 관계를 이루면서 자기의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고, 맨 처음 제네바에 있는 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인인 5,000명 남짓 하였지만 마지막 그가 두 번째 돌아와서 목회를 하고, 마지막에 자신의 목회직을 그만둘 때 쯤 되어서는 약 15,000명 이상의 회중들이 그것도 한 나라가 아니라, 여러 나라의 회중들이 함께 섞여서 인터내셔널 처치를 이루어 갔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결국, 목회에 있어서 우리들이 그 시대의 정신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I. 오늘날 시대정신: 상대주의와 문화
그러면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어떤 것입니까? 물론, 오늘날의 시대정신도 한마디로 규정하기가 굉장히 어렵지만, 제가 오늘 이 시간에 다루려고 하는 것은 상대주의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개혁신앙을 확산해 갈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A. 문화란 무엇인가?
문화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 방면에서 있어서 고전적인 연구가로 꼽히는 타헬라라고 하는 사람은 문화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민속학적인 의미에서 넓게 이해할 때 지식, 신앙, 예술, 법률, 도덕, 풍속등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간이 획득한 모든 능력과 습관의 총체를 가리킨다고 말입니다. 서양의 전통을 따르면 원래 이 문명과 문화는 구분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도표를 보시면, 이 문화는 정신적인 영역을 문명은 물질적인 영역을 가리키는 것이 전통적인 문화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로를 만들고, 무슨 건물을 짓고,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물질문명이 발달하는 것을 문명이라고 불렀고, 문학, 예술, 그리고 인간의 정신 이러한 지적활동들을 가리켜서 문화, 그래서 정신적 영역이라고 불러서 문화를 한 사회의 정신이라고 말한다면, 문명은 육체처럼 이렇게 둘이 일체를 이루며 한 사회를 구성해 갔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근대이후에 와서는 이 문화와 문명이 모두 통합이 되어버리고, 경제활동 심지어는 신체활동까지 포함해서 모두 하나의 문화라고 부르는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B. 진화론적 문화관과 문화 상대주의
이러면서 이제 문화관에 대해서 두 가지 대표적인 견해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첫째 견해는 다윈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난 견해인데, 모든 문화와 사회의 모든 것들은 열등한 단계로 부터 우등한 단계로 진화론적으로 발전한다는 가설을 받아 들여서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진화론적 문화관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월한 문화와 열등한 문화로 구분이 되고, 열등한 문화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더 우월한 문화로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당연히 서구사람들에 의해서 도입된 것이고, 그들이 생각하기에 서구사회의 문화는 매우 발달한 우월한 문화이고, 이외의 다른 나라의 문화는 열등하고, 아직까지도 발달하지 못한 낮은 단계에 있는 문화라고 보았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에 대한 생각에서 말하자면 제국주의적인 방식의 선교형태가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마치 오래전 알렉산드로스가 마케도니아 제국을 끊임없이 확장을 해서 헬라제국을 건설했을 때 가지고 있었던 문화관과 아주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생각하기를 이 땅에 모든 나라들은 이제 그리스 철학과 헬레니즘의 교양을 받음으로서 어둠의 국가에서 빛의 국가로 말하자면, 전환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종의 문화 선교사적인 심정을 가지고 정복활동에 나섰던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도표를 보시겠습니다. 이러다가 이제 이러한 견해가 사실 선교에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면서 문화에 대한 생각들이 달라졌고, 상대주의가 근대이후의 서구사회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이 문화도 역시 상대주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문화의 독특성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되는 것이고, 문화가 서로 다른 것은 우월하고 열등한 문화의 수직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각기 고유한 공동체 속에서 자라온 문화적인 배경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다양성의 측면에서 보아야 된다고 하는 문화상대주의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들어온 지는 사실 불과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1900년대가 훨씬 지나서야 이런 문화상대주의에 대한 견해가 생겨나게 되고,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문화를 있는 그대로 연구하려는 그런 움직임들이 훌륭하게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1950년대 60년대에 들어서면서 미국과 유럽에서는 제3세계에 있는 예전에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아주 열등하다고 생각하던 문화 속에서 서구 사회가 갖지 못한 상당한 강점을 가지고 있는 것들을 찾아내면서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자신들이 배워야 되겠다는 자각들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언제가 한번 접해본 문화에 대한 이야기 가운데 서구 사람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던 것은 아프리카 사회에 있는 아주 미개한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기르고,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되는지에 대한 문화적인 연구였습니다. 저도 그것을 끝까지 지켜봤는데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정말 저렇게 한 공동체 속에서 아이들을 길러내서 어른이 되게 하고,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될 때에 그 마을 전체에 커다란 축제를 합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추석 명절보다 커다란 축제입니다. 그 아이들도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 아이들이 완전히 남녀가 성인이 되는 것을 치르는 성인 예식입니다. 남자아이들은 자신이 사냥을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란 것을 그런 테스트를 통과하고, 여자는 여자대로 말하자면 아녀자가 되어서 그 공동체를 일구어 가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테스트 받으면서 그 모든 단계를 거쳐서 성인의 의례를 치르게 되는데 굉장히 커다란 감동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실은 이미 유럽에서는 개인주의 때문에 공동체적인 연대 의식들이 해체되고 파괴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하나의 새로운 사회를 결속 시키는 하나의 훌륭한 모델처럼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의 예이고 그런 식으로 그 사람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중국 이런 많은 나라들의 문화들을 발견하면서 예전에 진화론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문화를 바라보던 그런 시각으로 더 이상 인류의 문화를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문제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도표를 보십시오.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윤리 상대주의라고 하는 것이 도입되는데 이것은 잠시 후에 설명을 드리겠지만 이러한 상대주의 문화들이 들어오고 상대주의 문화는 이미 저 위에 상층부에 철학계와 사상계에서 절대적인 기준들을 거부하면서 상대주의가 들어오게 되는데 이런 상대주의가 급속하게 확산된 것은 미국을 기준으로 하면 19세기 중반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영국을 기준으로 하면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도시화와 산업화가 촉진하는 이 과장 속에서 이러한 가치 상대주의라고 하는 것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에 따르면 윤리의 절대적인 기준을 부인하고 그리고 윤리라고 하는 것을 하나의 개별 문화의 소산으로 간주해서 어떤 절대적인 기준의 가치가 될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윤리 상대주의에 대해서 문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화 상대주의가 윤리 상대주의를 숙주로 삼아서 그래서 이 윤리상대주의 이 모든 현대 사회의 심령들에게 이 절대적인 가치가 없다고 하는 광범한 가치 상대주의, 윤리 상대주의적인 사상들을 퍼뜨리는데 이바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산업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전에 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떤 물건을 생산해 내면 항상 사람들은 그 물건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급자족적 방식으로 물건을 생산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구두를 잘 만드는 재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말발굽에 붙이는 편자를 잘 만드는 재주를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또 그릇을 만드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칩시다. 그릇을 충분히 만들었는데 자기네들이 쓰고 남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동네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해서 말하자면 편자와 바꾸기도 하고, 구두와 바꾸기도 하고 하면서 이루어지니까 경제의 유통과 순환이 모두 실명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지고 생산 과정도 모두 한 사람이 끝까지 재료를 제작을 해서 완성을 해서 마지막에 소비자에게 보급하는 것 까지 다 자기가 혼자 자기의 이름을 걸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영국서부터 시작하여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15세기경서부터 다른 나라로 가고자 하는 욕구들이 분출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북유럽에 있는 노르웨이나 이런 나라부터 이루어집니다. 그 이유는 너무 가난하고 먹고 살 것이 없으니까 세상 어디를 가본들 이보다 더 비참할 수 있을까? 그리고 기회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들은 배를 띄우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그 당시에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구에 대한 생각은 지구가 쟁반처럼 동그랗고 넓적하고 맨 끝에 수평선 너머에 가면 천해 만해한 낭떠러지가 있고 물이 그쪽으로 계속 떨어지는 것을 지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목숨을 걸고 못 돌아올지도 모르는 길을 배를 타고 떠납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러 나라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나라들이 흩어져 있고, 거기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과 무역을 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점점 증진되면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우수한 기술력과 무기의 질 이런 것들을 가지고 폭압적으로 정복을 하기 시작을 하고 그리고 거기를 시장으로 개척을 해서 그들에서 싼 원료를 사다가 자기네 나라에서 만들어서 비싼 가격으로 그 나라 사람들에게 팔고, 그 판 것을 가지고 다시 지하자원이나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들을 공급하는 방식을 계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크게 하는 나라가 강성한 나라가 되는 것이었고, 이런 일들은 15세기경부터 시작해서 16세기 17세기 18세기 넘어오면서부터는 아주 치열한 쟁탈전들이 이루어져서 식민지를 놓고 열강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여기에서 18세기에 제일 우위를 점하였던 나라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었고, 영국은 스페인의 아르마다 함대를 드레이크에 의해서 격침 시키고 나서 제해권을 제패하고, 그들은 무역로를 독점하고 한참동안 경제적인 발전을 구가하게 됩니다.
이런 속에서 많은 물건들이 생산이 됩니다. 이런 물건의 생산에 커다란 힘을 보탠 것이 에너지의 발견입니다. 증기기관의 발견 같은 것들은 커다란 도움을 주었고, 또 후에 나오지만, 전기의 발견 같은 것은 노동시간을 한 없이 연장시켜주기도 했고, 어디서든지 에너지를 돌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생산 기술의 폭발적인 번영을 가져 왔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물건들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이러면서 땅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사회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생산 활동을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도시라고 하는 것들이 생겨나게 되어 지금 현재는 전 세계 인구의 95%가 도시에 산다고 합니다. 도시에 모여서 사는 이유는 물건을 생산하기 위해서 예전에 한두 개 만들 때는 상관이 없었는데, 대량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대량의 원자재와 기술들 그리고 많은 공장들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제 한 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재능과 기술력, 원자재의 수급을 원활하게 하는 인프라를 갖춘 곳이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농토를 팔고 도시로 모이기 시작하고,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자본가는 돈을 투자하고, 기술자들은 기계를 돌리고 그리고 경영주들은 그것을 경영하면서 얼마나 싼 가격에 대량으로 물건을 생산해 내느냐 하는 것들이 이제 경쟁체제로 들어가는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이제 인간의 윤리의식에도 커다란 변화가 옵니다. 이제는 생산 활동을 통해서 누가 만들었느냐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물건을 만들기 때문에 혼자서 만들 수가 없고, 그래서 사람이 사라지고 이제 회사 이름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회사에 있는 사람들도 대량생산을 해야 되니까 구두 가죽을 문지르는 사람은 밤낮으로 가죽만 문지르고, 꿰매는 사람은 꿰매기만 하고, 밑창 다는 사람은 밑창만 달고 장식 붙이는 사람은 장식만 붙이고 그렇게 일을 합니다. 그래서 서로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일들을 수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바로 옆집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말하자면, 사람들과의 전통적인 씨족과 부족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이 모든 것들이 깨집니다. 이것은 도덕과 굉장히 깊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약에 지금도 우리가 씨족사회와 부족사회가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아마 아이들이 담배 못 물고 다닐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길거리만 나가면 삼촌, 아저씨, 육촌, 팔촌 아줌마 다입니다. 그러니까 그 꼬라지를 보면 귓방망이라도 올려붙일 것이고 그렇게 안 되면 당장 그날 저녁에 그 집에 연락이 가서 '니 아들 담배물고 돌아다니더라! 어떻게 자식새끼를 교육시켰기에 애가 그 모양이냐?' 안 되는 것입니다. 통제가 딱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것들이 다 끊어져 버리고 망가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도시로 몰려드는 것입니다. 인류가 도시화가 이루어지기까지는 별로 심리학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제 다 단절되면서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새로운 규정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 하면 굉장히 깁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어떤 암시를 주느냐 하면 '자 봐라! 이 구두 하나를 만들어 내도, 이것이 한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냐 하면, 절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국은 자본가가 아무리 돈이 많아도 생산자가 가죽을 생산 안 해주면 구두 못 만듭니다. 아무리 좋은 가죽을 구해도 기술자가 노동을 안 하면 못 만듭니다. 기술자가 아무리 노동해도 판매하는 사람이 팔아서 돈으로 바꿔오지 않으면 월급을 못 받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서 모든 것이 상대주의와 되어버린 것입니다.
C. 상대주의 문화와 사상적 도전
이러면서 이제 문화 상대주의에 대한 도전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 보는 것은 철학에 있어서 이런 변화의 조짐들이 이미 19세기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더 더듬으면 훨씬 더 멀리 올라가지만 그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장 폴 사르트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철학자로서 실존주의 철학자입니다. 1970년대에 제가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70년대 초반에 우리가 고등학교 다닐 때 장 폴 사르트르 못 읽으면 친구들하고 만나서 이야기가 안됐습니다. 왕따를 당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사르트르는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작가였습니다. 그 당시에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갔던 것들이 말하자면 실존주의 철학이었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앙리 베르그송을 읽으면서 드디어 진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결심했습니다. 남아있는 모든 진리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기존에 있었던 모든 절대적인 진리, 이것이 종교로 부터 온 것이든, 철학적 확신으로 부터 온 것이든 무엇으로 부터 온 것이든지 간에 이것은 결국은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폭압적인 하나의 사상적 규율이다. 이것들을 내버려 두고는 인간에게는 절대로 자유가 있을 수 없고, 자유가 없다면 인간은 참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라고 굳게 믿고 여기에 항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사실 사상적 단초를 제공했던 사람이 마틴 하이데거라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 그야말로 천재였고, 이 사람의 스승은 에드문드 후설이라고하는 현대 형이상학의 하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에드문드 후설도 정말 천재였습니다. 이 사람의 이야기를 한번 들었는데, 얼마나 한 순간에 머릿속에서 창조의 사상들이 쏟아져 나오는지 그냥 이렇게 신문지 같은 종이를 펼쳐놓고, 그냥 막 부르면 제자가 막 받아썼다고 합니다. 정신없이 이렇게 해서 쓰여진 것이 아주 깊은 철학적 사상들입니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이 4만장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나치가 이것을 없애려고 했는데 결국 끝까지 잘 보존이 되어서 남아있습니다.
이 사람의 제자가 바로 마틴 하이데거였습니다. 마틴 하이데거가 후설의 제자였고, 제가 깊이 연구하지 않았지만 이 사람이 쓴 Sein und Zeit라고 하는 『존재와 시간』이라고 하는 책들도 사실 후설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째든 마틴 하이데거는 독창적인 사고를 가지고 당대에 계속되어 왔던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형이상학적인 담론에 대해서 도전을 제기하였습니다. 서구철학의 시작을 소크라테스 이전 파르메니데스 혹은 그 이전으로 본다고 하더라고 그때부터 시작해서 이제까지 계속 와서 하이데거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 그 철학에 많은 변화들이 있었고, 데카르트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존재론 중심으로 움직이던 서양의 형이상학적인 사유를 인식론 중심의 사유로 옮기면서 생각하는 인간이 그 모든 만물의 척도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간을 완전히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문제를 지니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존재와 존재자에 대한 혼돈이었습니다.
표를 보시면 이렇게 기존의 철학적 사유는 존재와 존재자를 통째로 생각했습니다. 존재는 존재고 존재자는 존재를 가진 사물입니다. 이것을 하나로 본 것입니다. 이것을 예외 없이 모두 하나로 본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생각 자체를 잘못된 생각이라고 보고, 이것은 존재와 존재자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야 된다고 하면서 존재에 대한 이분법적인 사유를 제시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본질과 실존이라는 문제가 등장하게 되고, 그래서 예전부터 철학에서 본질은 이 모든 존재자에 선행한다고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은 변함없는 것이고, 존재자는 변하는 것입니다. 변하는 우연적인 것들은 잠시 헛것으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얼음, 물, 눈, 수증기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우연적인 것이고, 결국 마지막으로 돌아가면 H₂O라는 것입니다. H₂O가 본질이고, 다른 것은 모두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존재와 존재자를 하나로 놓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이데거라는 사람이 나와서 거기에다 제동을 걸면서 '존재와 존재자는 나누어서 생각해야 된다. 존재는 무엇인지 우리가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이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고 있는 이 현존적 자체가 훨씬 더 선행해야 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는 사유가 나오게 되고, 인간은 본질은 무엇이냐? 형이상학이 무엇이냐? 그리고 인간의 본래의 존재가 무엇이냐? 인간과 사물의 존재와 신의 존재와는 어떤 관계가 있나? 하는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쓸데없는 논의이고,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있다는 이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라고 다루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본질과 존재 사이에 어떤 필연적인 연관을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것입니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섭리 속에서 인간이 태어나도록 지정되었고, 그래서 그 인간은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더라도 신의 계획 속에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이라고 봤는데, 이미 그렇게 설명하는 배경은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기각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지금 내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여기 왜 있나?' 그냥 있는 것입니다. 그냥! 그래서 사르트르는 '인간이라는 무엇일까? 잉여의 존재다. 남는 존재다.' 남는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없어도 되는데 괜히 있는 것이라 이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400명이 모였는데 책을 500권을 준비한다고 칩시다. 그럼 400권만 준비하면 되지 않습니까? 500권을 괜히 잘못 생각해서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인간이 그런 존재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무엇이라고 했냐하면 던져진 존재다.’ 누구에 의해서 입니까? 모릅니다. 그냥 던져졌습니다. 왜? 그런 것은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던져졌을 뿐이다 이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 규율되고 움직이고 누구에 의해서 계획이 있고 무슨 미래에 대한 전망이 있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끊어낼 수 있는 것은 다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완전한 고립입니다. 그것이 이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절대자유입니다. 도덕에도 매이지 않고, 무슨 하나님의 작정에도 매이지 않고, 운명에도 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부를 때도 됐습니다. 좀 더 있으면 주님을 두 번 부를 때가옵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런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모든 것을 끊어버리고 나면 인간은 완전한 자유다. 자유인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다.' 모든 것이 다 끊어졌다고 생각을 할 때, 그 무서움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무시무시한 자유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샤르트르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느끼는 이유는 자신이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자유에서 온다.' 혹시 여러분 중고등 학교 때 가출해 본 적 있습니까? 제가 보니까 꽤 있으실 거 같습니다. 엄마 아빠가 못살게 굽니다. 마음에 하나도 안 듭니다. 그래서 이제 엄마 지갑에서 돈 좀 꺼내 가지고 도망 쳤을 때에는 신납니다. 자유입니다. 저녁이 되면 우울해지기 시작하고, 돈까지 떨어지고 나면 이제는 너무 괴로운 것입니다. 돌아가고 싶은 것입니다. 속박이 있는 그곳이 정말 사람 사는 맛이 나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철학에서 이런 것들이 다 풀어져 버립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비트겐슈타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분석철학에서 이 거두를 읽지 않고는 분석철학을 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정말 천재였습니다. 남들이 천재였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고전 철학을 일부러 안 읽었습니다. 절대로 소크라테스 플라톤을 하나도 안 읽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 자체는 필요가 없다고 보았고, 이 사람은 모든 인간의 문제가 사실 언어의 문제라고 보았고, 그러면서 이제는 거기서 부터 철학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옛날에 다루던 철학의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논리실증주의라고 하는 것이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인간의 어떤 절대적인 도덕기준을 인간의 덕과 부덕을 평가하는 절대적인 기준으로서의 잣대 자체를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정확하게 말하면, 인간이 그것을 따라야 할 그 자체로서의 규범성을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을 잘라서 기각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인간은 이제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이런 영향이 미학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미학이 근대에서 새롭게 떠오르게 된 것은 17세기 후반 지나면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때가 유럽에서의 사조는 데카르트의 계몽주의가 지나가고 계몽주의에서 절대시 한 것은 인간의 이성이었습니다. 계몽주의 이전에는 당연히 신앙이었습니다. 신앙과 계시를 거부하고 인간의 이성을 절대적인 기준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사람들이 시들먹해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이 정말 이성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인간이냐? 보니까 그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성은 학생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열심히 안합니다. 이성은 공무원에게 정직하게 시민을 위해 봉사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안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희귀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간을 움직이는 이 절대적인 기준이 이성이라는 것에 대해서 회의를 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는 오히려 감정에 의해서 움직이고,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면 이성이 결국 그것을 따라가서 동의를 해주고 합리화 시켜주는 이러한 양상을 갖는다고 보면서 여러분이 잘 아는 낭만주의라는 로맨티시즘이라는 사조가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낭만주의가 밀려오게 되면, 그 다음 인간에게 무엇이 중요하게 됐습니까? 공부해서 이성으로 막 아는 것 보다는 낭만이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낭만은 즐기기가 공부하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지 않습니까? 낭만주의가 들어오고, 그러면서 이제 인간의 이런 감정, 이런 것들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었는데 아주 활발하게 그것을 표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미 새로운 사조가 아니라, 14세기 15세기 정확하게 말하면 14세기 말, 이때에 이미 일어났던 사조들이 다시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르네상스 운동의 사조입니다. 여러분!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교리나 이런 모든 것들을 볼 때에 신을 그리고 성경의 인물들을 그리고 성경의 역사를 그리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르네상스가 들어오면서 사람을 아주 가까이에서 그리기 시작하고, 그것도 옷을 다 벗겨서 그립니다. 다윗상이라고 나오는데 다윗을 그렇게 벌겨 벗겨가지고 물맷돌 하나들고 있는 그런 사람으로 그려내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예전에는 인간은 그림에 있어서도 중심에 있으면 안 되었습니다. 중심은 신, 하나님이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거기에 맞춰서 돌아가는 하나의 패러다임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관점 자체가 인간에게로 옮아오게 된 것입니다. 인간을 크게 클로즈업 시켜서 신과는 상관이 없는 인간의 이런 육체에 대해서 열등하게 여기고 죄악시 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것들을 떳떳하게 다 벗겨서 근육이나 이런 것들을 울퉁불퉁하게 쫙 묘사하면서 이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이 중세 때 관점에서 보면, 아주 도발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왜 저렇게 사람들을 벗겨놓고 저렇게 하나?’ 할 때, 이런 복잡한 시각을 가지고 보면, 그 의도가 무엇인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사람들이 단번에 르네상스가 이루어지면서 사람들이 강하게 기독교에 반기를 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정신은 인간에 대한 재발견입니다. 기독교 사회 속에서 억압받고, 하나님의 계시 아래 무조건 복종해야 되는 이 인간에 대한 견해는 원래 인류가 가지고 있었던 인류에 대한 견해가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아주 바람직한 해석의 모본을 그리스시대 때에서 발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리스 시대를 공부하면 참 좋습니다. 그리고 여행도 해볼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신학을 전공하는 사람이지만 제가 여태까지 접한 모든 자료들로 볼 때에 인류 역사상 인간이 가장 인간다운 대우를 받았던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받았던 그 시대가 그리스 시대라고 봅니다. 그것도 알렉산드로스에 의해서 거대한 제국이 되기 전에 폴리스 시대 때의 그리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아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라는 책에서 ‘국’이라는 하는 civitate라고 하는 라틴어 단어가 거기에서 나오는 나라라고 하는 개념이 지금처럼 이렇게 현대사회에서 수억을 거느린 이러한 대제국이 아니라, 바로 그 폴리스 시대, 인구가 한 10만 명쯤 될 정도의 그래서 거의 사람과 사람들이 얼굴을 알 수 있는 그런 몇 만 명 모이는 폴리스를 염두에 두고 그 civitate의 『신국론』이라고 하는 책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든 그러면서 미학이 들어오게 되는데, 원래 이 미학의 처음 시작은 어떤 숭고하고 설명할 수 없는 장엄한 것에서 부터 미의 개념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굉장히 재미있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보면 아름다움의 근원,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으로 부터 아름다움과 모든 지식들이 흘러나오고,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아름다움과 선 그 자체가 하나는 윤리적인 관점에서 본 것이고, 하나는 미학적 관점에서 본 것입니다. 선과 아름다움 이 두 가지가 사실은 모든 존재의 원리라고 보고, 하나님이 존재중의 존재이시고, 존재이신 하나님이 존재를 부여한 모든 것들은 그 선함과 아름다움을 갖춤으로서 창조시의 완전함을 갖는다고 보았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들을 발견할 때 굉장히 감동적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적인 모든 아름다움의 그 끝, 근원은 결국 하나님 자신이고, 결국은 미학이라도 하는 것들도 그 사람들이 무엇인가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거룩하고 설명할 수 없는 장엄함을 느끼면서 그 속에서 미의 개념을 채취하고, 그 미에 대한 생각들을 정립하기 시작하면서 미의 개념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제 미학적인 개념들이 사실은 물리학자 과학자 천문학자 이런 사람들하고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이 아름다움의 개념 자체가 예술적인 미만이 아니라, 예술적인 미 그리고 윤리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우주와 물질 속에 있는 아름다움이 다 함께 통합적으로 다루어지면서 미의 개념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미학이 생겨나면서 ‘무엇이 사물을 아름답게 하느냐?’라고 할 때 어떻게 생각했느냐 하면, 우리 인간이 경험을 통하지 않고는 다 파악할 수 없는 객관적인 비율과 조형의 관한 비율이 있고, 그 비율과 조화를 이루는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 어떤 사물들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팔등신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몸 전체가 이렇게 되어서 여기가 팔분의 일이 되고, 여기서 부터 여기까지가 1:1.46이 되고 등 다 이렇게 되어 있어서 모든 이 세상의 것들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바닷가에 잡는 조개껍질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과학적으로 관측해 보면, 조개에 나이테처럼 줄이 있습니다. 전부 다 수열에 의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람이 불지 않는 공간에 기름병을 확 던져서 기름방울이 수십 개가 쫙 떨어지면, 떨어지는 그 기름방울 모든 것들이 수열로 정확하게 계산이 됩니다. 그래서 12세기 이탈리아의 수학자 피보나치는 이 모든 세계의 아름다움의 75%는 수열에 의해서 설명이 되고, 심지어 이 우주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신이 수열을 가지고 장난을 친 것이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아주 놀라운 질서들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17세기에 요한네스 케플러라고 하는 과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천체를 관측하면서 수금지화목토천해명 이것을 전부다 찾고, 이것들이 운행하는 궤도를 연구했습니다. 이 비율을 전부 계산해서 오선지에다가 모든 항성들의 궤적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건반에다 쫙 쳐보니까 완벽한 화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관념들이 사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미에 대한 관념이었고, 도덕에 대한 관념이었고, 수학과 질서에 대한 관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것들 자체를 아예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름답고 추하다고 하는 그 개념 자체가 아주 상대적이어서 문화에 따라 다르고, 그런 아름답다 추하다고 말하는 그 자체가 단정적으로 선언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규정을 하면서 여기에 대한 강력한 도전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미와 추라고 하는 이 개념이 절대적으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각기 다른 개념이라고 하는 상대주의가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백남준이라는 비디오 아티스트를 기억하실 겁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그 사람이 왜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 됐는지 잘 모를 것입니다. 우리가 터놓고 이야기해서 그것을 보고 세계적인 대가라고 하고 보니까 ‘저기에 무엇인가 있겠구나.’ 그렇게 보지, 깡통하고 브라운 텔레비전 막 갖다가 붙여놓고, 누구라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 안 듭니까? 여러분도 그 정도는 만들겠다는 생각 안 듭니까? 그리고 어떤 텔레비전은 나오게 만들고, 어떤 텔레비전은 안 나오게 만들고, 어떤 텔레비전은 지지지직 하게 만들고, 그것을 작품이라고 그러는데 동의가 잘 안됩니다. 그의 위대성은 사실 그런 작품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작품이 지향하고 있는 정신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독일에서 공부를 하고, 자기의 첫 작품 발표회 했을 때 그 작품 발표를 퍼포먼스로 발표를 합니다. 그 퍼포먼스가 아주 비싼 그랜드 피아노 위에 금방 자른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소의 대가리를 올려놓고 이 키 조그만 사람이 나와서 큰 도끼를 가지고 황소의 대가리하고 그랜드 피아노를 함께 부셔 버리는 것이 그 공연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 사람이 굉장히 유명해진 것입니다.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무슨 아름다움입니까?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그 자체가 절대적인 기준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면 아름다움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규범 미학이 사라지고, 기술미학이라는 영역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디스크리티브, 이런 스킬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미학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대주의적인 현상은 건축학에도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건축학에 아주 유명한 사람이 있는데 여러분은 좀 생소할 줄 모르지만,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죽었습니다. 이 사람은 'almost nothing' 소위 이야기하는 라틴어로 'paene nihil'라고 하는 ‘거의 없다’의 개념을 건축학에 도입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거의 없다’라고 하는 개념이 무엇입니까? 원래 건축이라고 하는 것이 이런 것 아닙니까? 건축이라는 것이 어떻게 집을 지을까? 사람이 사는 집을 지어야 되겠다. 그럼 우선 사람이 사는 공간들을 이렇게 만들고, 돌멩이로 벽을 쌓았으면 이쪽에는 나무로 하는 것이 어울리겠구나! 이쪽은 나무로 했으니, 저쪽은 유리를 끼우는 것이 어울리겠구나! 이렇게 하면서 건축자재와 건축자재가 색과 질감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것들이 하나의 다양한 composition이 되어서 들어오면서 '야 예쁘다!' 이런 느낌을 주는 거 아닙니까? 그것이 전통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무시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니까 한번 보십시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작품입니다. 이것을 확대시켜보면 이쪽에 유리빌딩을 확대시켜 보십시오. 여러분이 볼 때에 왼쪽에 보면 벽돌이나 이런 것들을 하나도 도입하지 않고, 딱 두 가지 재료만 사용을 하면서 철근과 유리로 다 뒤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 빌딩으로서 굉장히 비효율적인 것입니다. 엄청나게 많은 열에너지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잉글랜드 정부 건축학부를 막대한 돈을 들여 이 사람을 불러 건축을 하게 되는데, 여기도 보면 그림이 조그마해서 이것도 전부 다 보면, 기둥 없이 기둥을 다 바깥으로 빼고, 유리와 쇠로만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목적으로 하는 바가 뭐냐 하면, 그냥 그렇게 무엇이 조화를 이루어야 된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됐다 그러니까 그냥 물성 그 자체를 만족을 해라 그것이 'almost nothing'의 개념입니다. 유리면 그냥 충분히 유리인 것을 느낄 수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쇠는 그냥 쇠인 것을 느낄 수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조화와 이런 것들이 없는 전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개념들을 딱 무너뜨려 버리면서 단순한 건축 양식을 만들어내고, 이렇게 아름답게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통으로 납작하게 상자같이 짓는 것입니다. 그 다음 또 반 데어 로에의 작품이 있습니까? 이런 반 데어 로에의 작품은 정확히 말하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이를 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 더 후대로 가게 되면, 해체주의가 들어오게 되면서 deconstruction이라고 해서 해체주의가 들어오면서 빌딩을 이렇게 네모났게 세우면서 이것이 원래 정상 건축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기울게 세우는 것입니다. 왜? 아무 이유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빌딩이 굉장히 돈이 많이 드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구조 역학적으로 어떻겠습니까? 이것이 무너지면 안 되지 않습니까? 피사의 사탑처럼 이렇게 그 다음에 그렇지 않으면 빌딩을 네모났게 지어놓고, 이쪽이 양초가 녹아내리는 것처럼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돈이 굉장히 많이 드는 건축 양식입니다. 아니면 문이 이렇게 네모나지 않습니까? 문을 네모 낳게 안 만들고 동그랗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이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위로 들어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들을 만들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는 건축의 양식들을 다 해체하고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뿌리를 찾아가 보면 위르겐 하버마스라고 하는 이성주의자와 장 프랑소와 리오타르라고하는 탈근대주의자와의 메타 담론에 대한 논쟁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현상 너머의 질서와 절대적인 도덕 규칙과 미학적 규범이 있느냐 없느냐 그런 것들에 대한 담론. 한쪽에선 있다. 한 쪽에서 없다. 이것에 따라서 건축 양식이 이제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샤 슈바르츠, 하드 브리스, 발켄버그, 베르나르 츄미, 이런 사람들이 현대 건축학을 이끌어가는 해체주의 거장들인데 그중에서 제가 여러분에게 베르나르 츄미 이 프랑스 작가의 작품 하나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이 사람은 합리성과 모더니티를 강조하는 하버마스와 이 모든 담론에 지기를 거부하면서, 이 사람이 이제 독특한 방식으로 새로운 작품을 프랑스의 라빌레트 공원이라고 하는 약 7~8키로, 폭은 1~2키로 되는 거리에 커다란 공원을 설치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이 사람이 만들었습니다. 만드는데 해체주의를 과감하게 도입한 공원이고, 사선과 사형, 뱀처럼 감은 도로를 도입해서 설계를 합니다. 폴리라고 불리는 35개의 구조물을 설치해서 우연적인 결합을 이루게 되는데 재미있는 것이 길을 왜 만듭니까? 어디로 가기 위해 만들지 않습니까? 여기도 길이 있는데, 길 따라 부지런히 걸어가도 아무데도 안나와옵니다. 그러니까 길이 꼭 어디로 가기 위해서 있어야 된다는 것, 자체가 편견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 따라 가면 길이 꽤 길게 막 이어지는데 마지막에 가보면 가다가 흐지부지하고 없어지고, 자기만 덩그러니 공원 한가운데 와 있습니다. 그리고 소위 폴리라는 하는 것을 만듭니다. 35개나 되는 구조물들을 만드는데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좀 더 넘겨보십시오. 이런 폴리라고 하는 구조물을 만드는데, 이 폴리는 35개가 서로서로도 상관이 없고, 공원하고도 상관이 없습니다. 거기에 있어야 되는 필요적인 조화와 무슨 이유의 근거를 갖지 않는 소위 디스샹티뷰라고 하는데 주위의 모든 것과 연관이 없이 끊어져버리고 단절된 채로 덜렁하고 우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연관관계를 찾은 것은 해석자의 주관이지, 작가의 의도는 그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하면서 건축에 반하는 건축을 창출하려고 시도를 한 것입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더 기겁할 이야기는 수학에서도 상대주의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브라우버(L. E. J. Brouwer)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박사 논문을 ‘수학직관주의’라는 것을 썼을 때, 교수가 이 논문을 집어던지면서 '이것이 철학책이지 수학 논문이냐?' 그러면서 혼을 냈는데 지금에 와서는 이 수학 직관주의가 상당히 많은 부분이 수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원래 예전에 수학이라고 하는 것은 저 바깥에 수학적 진리가 있고, 인간의 지성이 그것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것이 수학적 진리라고 인식하게 됨으로서 수학 문제가 풀린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부인하면서 이 수학적 진리에 칸트주의를 도입 합니다. 그래서 '수학적 진리는 그렇게 바깥에 존재하는 신이 만들어 놓은 제 3의 법칙과 같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직관이고, 이 모든 수학적인 법칙은 인간의 사유 안에 있는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제 이 수학적 직관주의라는 것을 창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배중률(배중률은 어떤 사물이 A이거나 혹은 A가 아닌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면 그 중간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컵이다. 컵이든지 아니면 컵이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지 중간이 있을 수 없는데, 이런 중간이 있을 수 없다고 보는 율을 배중률이라고 함) 귀류법 같은 모든 수학에서 기본적인 전제 자체를 다 부인을 하게 됩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이제 아방가르드가 들어오면서 부터 더욱 더 복잡해지게 됩니다. 원래 아방가르드라고 하는 뜻은 전위대라는 선두에 서서 돌진하는 부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초반에 이제까지 내려오는 전통을 파괴하고 현대 예술의 새로운 경향을 앞서 보여주면서 달려가는 그 개념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9세기 까지 확립된 그런 미학에 어떤 객관적인 기준이라고 하는 것들을 규범미학의 개념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미학을 제시하는데 집중하였기 때문에 사실 대중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방가르드 작품들을 여러분이 보면 패션쇼 한다고 그러는데 나가보니까 한우 고기를 얇게 펴가지고 온 몸에 걸치고 그것을 옷이라고 하면서 다니는데 그것에 동의하겠습니까? 그것으로 옷을 입는데 누가 그것을 따라하겠습니까? 이런 것이 앞서가면서 이런 것들을 파괴하는데 대중들은 이것을 쉽게 따라가지 않습니다. 대중들은 어떤 절대적인 이런 기준들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중문화가 제시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녀시대가 머리에다가 무슨 핀을 꽂고 나왔더라, 그냥 다 따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이돌 가수 누가 와가지고 무슨 마후라를 했다더라 하면 그 마후라가 막 팔리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획일화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움베르토 에코같은 사람들이 격렬하게 비판을 합니다. 이런 변화는 음악에도 나타납니다. 아놀드 쇤베르크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이제까지 내려왔던 으뜸화음 이런 식으로 내려왔던 체계를 다 거부하고 하나의 음정을 12개로 나누고, 그 안에 말하자면 하얀 건반과 까만 건반이 나오지 않습니까? 반음, 이것을 전부 다 균등하게 보고 반음이 보조적으로 쓰이는 것을 거부하고, 그 자체를 하나의 규칙 속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작곡들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조성 음악이라고 하는데 무조성 음악 같은 것들이 들어오게 되고, 휴고 발 같은 사람들이 다다이즘이라고 하는 것을 1900년대 초에 창설을 하게 됩니다. 다다이즘이 허무주의로 번역이 되는데, 사실 다다라고 하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다라는 말이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 흑인 종족에서는 다다가 소의 꼬리라고 하고, 이탈리아 지방에서는 엄마를 다다라고 부르고, 장난감으로 타고 다니는 목마나 보모를 부르는 단어가 다다고, 그리고 루마니아어와 러시아어에서는 이중적으로 긍정을 할 때도 다다라고 부른다 합니다. 사실 그 의미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다다이즘 그러면 뭔지 모르는 그 허무주의를 대표하는 것으로 되면서 하나의 현실의 질서를 따르는 사회에 대한 저항운동으로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1900년대에 일어났던 두 번의 전쟁, 제 1차 세계대전과 2차 대전은 인류에게 커다란 충격을 줬습니다. 사실은 처음에 국제 연맹이 생기고, 나중에 국제 연합이 생기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생기고 나면, 결국 인간들이 정말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노력하면 평화가 지켜질 수 있으리라고 보았는데, 사실은 엄청난 모순들이 생겨나게 되고, 아담 스미스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자유방임주의 같은 사상들이 확산되면서 인간은 충분히 이성적이고 소비를 선택할 때 합리적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만 국가에서 간섭을 하면 사회는 모든 도덕과 질서를 갖춘다고 봤는데, 사실은 현실 속에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인간을 커다랗게 좌절하게 하는 탐욕과 불합리들이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III. 기독교 신앙의 본래적 이해
이런 모든 것들을 경험하면서 인간들은 아주 커다란 혼란을 겪게 되고, 그러면서 뉴튼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넘어오고 이런 모든 사상들을 통해서 인간들이 상대주의를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뿐만 아니라 더 이야기를 하면 한없이 길어지니까 발레, 무용, 음악, 이런 데서도 상대주의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속에서 기독교는 도대체 여기에 대해서 어떤 대안을 가져야 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참된 철학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도표를 보시면, 기독교 신앙을 본래 이해 할 때에 오리겐, 갑바도기야 교부들, 크리소스톰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our philosophy, the complete philosophy, the philosophy according to Christ, 심지어 크리소스톰은 ‘그리스도의 철학에 따른다면’이라고 말할 정도로 원래 이 기독교 신앙을 그렇게 설명했고,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는 파트로 피아 필라소피라고 말함으로서 유대교 자체를 조상들의 철학이라고 묘사 합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은 기독교 신앙 자체가 종교 영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세계를 바라보는 총체적인 세계관을 제시하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 심지어는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이 모든 자연세계에서 모든 사물들과의 관계까지도 모두 하나의 통합적인 사고 속에서 이 모든 설명들이 이루어져서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참 인간답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 길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삶의 지혜로서 이 기독교 신앙이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이 기독교 신앙은 원래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참된 철학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그리고 계몽시대까지 계속된 전통이었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하나님의 철학의 핵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2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린도에 들어오기 전 사도바울은 마지막 선교지가 아데네였습니다. 거기에서 에피쿠르스학파 스토이쿠학파 사람들과 만나서 많은 논쟁을 벌였지만, 그렇게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 지방으로 올 때에는 심히 약하고 떨리는 마음이 되었고, 그때에 이 사도 바울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라고 자기의 결심을 표명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모든 철학과 아무 사상도 필요 없고, 오직 이 십자가면 충분하다고 이야기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만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4절 뒤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라고 말합니다. 이 온전한 자가 ‘텔레이오스’(τέλειος)인데 이것은 희랍어로 ‘다 자란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가정에서 비디오 하나를 빌려왔는데 전체적으로는 굉장히 괜찮은 장면인데 야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면 애들 재워놓고 보지 않습니까? 이는 그것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야한 장면 하나에만 집중하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봐도 괜찮습니다. 왜냐하면 그 문맥에서 그것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헤르만 헤세의 『지성과 사랑』이라는 책에 보면,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야한 장면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아주 중요한 고전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그 하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서 ‘텔레이오스’라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렇게 털어놓고 모든 체계를 말하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웬만한 것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말하는데,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가 소피아 철학입니다. 이 세상의 철학이 아니라, 세상에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다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을 통합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에 굉장히 감동을 받고, 20주 정도 고린도 전서 2장 1절서부터 10몇 절 까지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여러분 한번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굉장히 중요한 시리즈입니다.
IV. 현대사회에 대한 개혁주의적 대안
A. 목회에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삼음
이렇게 된다면 결국, 현대사회에 대한 개혁주의적인 대안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목회에 있어서 십자가와 부활을 아주 중심으로 삼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 1년 전에 여기에 모였을 때에 저의 마지막 강의를 혹시 기억하는 분계십니까? 그때에 제가 여러분에게 내년 강의를 예고하면서 조엘 비키 목사님 오신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제가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 우리가 그때에 강의를 굉장히 훌륭한 분들 모시고 강의를 들었지 않았습니까? 그때 제가 여러분에게 도전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 제일 좋은 설교이고,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교인인데 끝까지 버팅기면서 '나는 예수 없는 기독교가 더 좋다. 나는 예수를 성경 해석의 중심으로 삼는 것인 난 싫어! 나는 세속주의가 좋고 나는 상대주의가 좋아.'라고 하면서 끝까지 우긴다면, 그런데 그 힘이 아주 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억나십니까?
1년 전인데 정확하게 그때 했던 이야기를 지금 다시 상기시키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현대사회와 오늘날에 개혁신학이 배척받는 상황에 대해서 분석하고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대안은 사실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여러분 자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딱 하면 가출하고, 후딱 하면 돈 가지고 도망가고, 하여튼 학교는 안가고 경찰서에서 오라고하고 마약을 했다 그러고 아무튼 길이길이 속을 썩입니다. 얘를 도대체 어떻게 할까? 심리학자, 정신과 의사 등등 돈을 다 줘가지고 한 달 동안 이 아이를 스터디 했습니다. 그래서 분석이 딱 나왔습니다. 어렸을 때 아빠로부터 받은 상처가 많다. 그리고 이 아이는 태어날 때 유전자에서 뭔가 이상이 있어서 좀 정상적으로 못 느낀다. 그리고 이 아이가 이렇게 된 것은 아주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 시절에 엄마 아빠가 함께 직장 다니면서 어린이집에 너무 오래둬서 아이가 이렇게 됐다. 그 다음에 뭐가 어떻게 됐다 그러고 분석이 다 나왔다고 칩시다. 그런데 아이는 때려 죽여도 엄마 아빠가 싫습니다. 그러면 아이를 어떻게 온전한 가족관계로 돌아올 수 있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분석은 그렇게 책 한권 쓸 정도로 분석을 많이 했지만 대책은 뭐가 있겠습니까? 단 하나입니다. 아이가 다시 엄마 아빠를 사랑하게 되는 것, 그것 하나입니다. 그럼 모든 문제 해결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 걸기지 누가 그 일을 하겠느냐? 그것은 심리학자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의사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분석은 많아도 대안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B. 목회에 있어서 중생과 회심을 위해 진력함
우리들이 목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양을 돌보지 않습니까? 이렇게 작대기를 들고 이랴이랴 하고 가니까 주욱 따라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양일 때는 목양이지만, 오는 것이 개새끼들이라고 쳐 봅시다. 그것이 목양입니까? 목견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따라오는 게네들이 사자일 경우에는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청교도 설교 너무 훌륭합니다. 그런데 그 청교도 설교를 성도들이 사랑해야지 열매를 맺지 않습니까? 사랑하게 하는 것은 결국 설교 자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설교를 사용하시고 복음을 사용하셔서 그 인간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이 하시는 거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 자신이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복음의 핵심에 붙들린 적이 없는 사람은 솔직하게 말하면 설교를 할 수 없다고 봅니다. 설교를 하나 그 성과를 우리는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이 목회의 본질을 '성도를 회심하게 하는 것이고, 회심의 은혜를 보존하게 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회심할 때에 우리의 죄와 강퍅함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그 사랑에 붙들리지 않습니까? 그것들을 계속 유지하게 하는 것이 목회라고 이야기합니다. 목회에 있어서 중생과 회심에 위해서 땀을 쏟고 진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목회자도 많으시고 신학생도 많으신데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서 목회를 잘 준비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학위나 목회의 경험이나 이런 것은 아닙니다.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불신자들을 모아놓고 100명이고, 50명이고 모아놓고 뜨겁게 기도하고, 한번 가서 열렬히 설교하면, 과연 몇 명이 회심하나 보라 이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자신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설교 할 때에 감동을 받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있으면 많이, 축복이 적으면 적게 그러나 언제나 그런 일들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특성이 있는데, 가치판단이 자기중심적입니다. 신령한 것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마음이 없습니다. 의지가 굴복하지 않습니다. 삶에 있어서 무엇을 배우든지 무신론적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거듭나고 회심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막 빨아들이고자 하는 마음들이 막 생겨나게 됩니다.
몇 년 전에 우리교회에서 회심 집회를 했는데 제 기억에 4, 5, 6학년 아이들에게 설교를 한 것 같습니다. 여러 해 됐습니다. 그런데 그날 4학년 아이들 선생님이 아주 기도를 많이 하셨는지 집중을 참 잘 했습니다. 설교를 했는데 저도 뭐 한 30분 정도를 했는 줄 알았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75분을 아이들을 앉혀놓고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 모든 아이가 그렇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회개하고 그랬는데 그 중에 4학년 아이 하나가 그랬습니다. "회심집회 어땠니?" 그러니까 "엄마, 회심집회 너무 좋았어!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이 있었어!" 그러니까 엄마가 놀래서 "그게 뭐니?" 그러니까 "목사님 설교가 너무 짧았어." 75분이었는데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 받은 사람들에게는 좀 전에 비키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설교집을 읽었다라고 하는 것이 이 속에서 참다운 회심을 경험하고 나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막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선을 봤는데, 어떤 남자를 만났는데 한눈에 완전히 빠져 버렸습니다. 밥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사랑에 푹 빠져 버린 것입니다. 저 남자가 자기를 좋아할 지, 안 좋아할지 모릅니다. 아는 것이라고는 밥 먹으면서 한 시간 동안 들은 대화밖에 없습니다. 고향이 어딘지? 사람이 누군지? 팔다리는 다 성한 것 확인 했지만 특별히 무슨 재능이 있는지? 정신이 어떤지 모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정보를 알고 있어서 가르쳐 준다고 하면 하품하고 껌 씹고, ‘아 시끄러 설교하지 마. 난 잘 거야.’ 그러겠느냐는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인데 얼마나 듣게 싶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주님에 대한 사랑, 우리의 신랑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생겨날 때 성경 전체가 신랑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교회는 그 신랑이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그 신랑의 몸의 일부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얼마나 듣고 싶고, 아름답겠느냐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자꾸 제 이야기해서 미안한데 제가 설교자로 부름을 받고 얼마 안됐을 때 제가 서울에 있는 그렇게 크지 않은 교회에서 한 80명 고등학생들을 놓고 설교를 했는데, 저는 설교한지가 한 30년이 지났지만 아직 까지도 그런 회중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주일마다 세 시간 설교했습니다. 180분. 그런데 여러분처럼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거의 석고상 80개를 딱 놓은 것 같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안경을 이렇게 들고 설교를 듣습니다. 안경을 좀 들면 설교자가 또렷하게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대로 2시간씩 3시간씩 설교를 듣습니다. 그것이 아름다움에 대한 막 빨려드는 그것입니다. 그것들은 결국 중생과 회심, 회심한 후에도 그것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얼마나 은혜가운데 있느냐에 따라서 이것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C. 기독교사상을 갖도록 교육함
어떤 사람이 제 설교 보고 어렵다고 이야기 합니다. 전 전혀 그렇게 생각안합니다. 상당부분 주관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아름다운 것에 눈을 뜨고 나면 복잡한 것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그랬습니다. 사물과 사물이 조화를 이루는데 두개가 딱 만나서 조화를 이루면, 예쁜 것이 그렇게 크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개가 조화를 이루면서 만나면 아름다움이 극대화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오. 마스게임을 둘이 한다고 쳐봅시다.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10명이 한다고 해도 10명가지고 카드 쓰겠지만 이렇게 섹션도 한다고 해도 웃길 것입니다. 그런데 한 3만 명이 한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정말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신학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왜? 어려울수록 너무 예쁩니다. 왜 그것이 다루고 있는 내용을 즐거워하는 한 어려울수록 예쁘고, 설교에는 적용 안 되겠지만 어떤 때에는 너무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딴 사람은 모르니까 정말 행복합니다. 설교를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특히 책을 읽을 때, 철학책 같은 것 읽을 때 머리 터질 정도로 복잡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정신을 가다듬고 읽으면, 이해가 막 되면서 가슴에 핀이 꽂히듯이 핀이 꽂히면서 다가옵니다. 희열을 느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 이야 이거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이 세상의 지혜도 그러한데, 하물며 하나님은 어떠하겠습니까? 그런 갈망을 가득 갖게 될 때 그때 이 진리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확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심어주는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이런 아름다움을 삶의 지혜로서 심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통합적인 것입니다. '자! 공중에 나는 새를 봐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저것은 꼬치구이용으로 만든 거란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참새구이용이다 이것이 아닙니다. ‘공중 나는 새를 봐라. 심지 않고 거두어들이고 창고를 만들지도 않지? 그런데 하나님이 먹이시잖아. 너희는 얼마나 사랑하겠니? 걱정하지 마.’ 참새 한 마리를 보면서 마지막에 신학적인 가르침, 자연학적인 가르침, 윤리적인 가르침, 종교적인 가르침을 주면서 마지막에 그 거룩하신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게 하십니다. 들에 핀 백합을 봐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V. 결론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은 이 모든 지식들에 통합을 이루면서도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부활이 선명한 가운데, 이 십자가와 부활을 굳게 자기의 삶속에서 체험하면서 이 모든 지식들이 확장해 가는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높이는 것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선물로 드리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하는 이 책은 오늘 내가 못한 강의의 모든 말은 그 책이 여러분에게 전해 줄 것입니다. 꼭 읽고 마지막에 ‘아’ 하고 무릎을 꿇으면서 여러분이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지식의 세계가 사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서 꿰어져야 할 그런 꼬치와 같다고 생각을 하면서 여러분이 이 십자가의 중심성, 개혁신학의 중심성을 양보하지 않으면서 이 적실성의 우연을 넓혀서 오늘날 이 사회가 왜 이렇게 혼탁하고, 상대주의적인 시대가 되어가를 생각을 하면서 그 시대까지 우리들이 끌어안고 사랑하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영향을 그들에게 끼쳐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복음을 굳게 붙들고 기도 많이 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이 핏줄처럼 마비증상에 걸리고 썩어가는 이 세속의 문화와 사회 속에 스며들어서 변혁시키고 새롭게 하는 그런 역사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부흥회 분위기로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