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5일 새벽예배
“여호와의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사를 통촉하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 5:1-3)
이 시 역시 다윗의 시로 표제가 되어있구요. 역시 탄원시입니다. 무엇인가 아주 깊이 고통하는 가운데 하나님앞에 탄원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1절에서 시인은 자기의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통촉이라고 하는 단원은 원래 우리말 뜻으로 말하자며는 촛불을 켜 밝혀서 들여다 본다 그런 뜻입니다. 통촉이라는 단어는 들여다 본다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를 번역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아주십시오.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께 탄원하고 있죠! 이런 기도를 누가 할 수 있을까 누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성경이 말하기를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그랬거든요.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아 주십시오. 라고 하나님앞에 탄원 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마음이 깨끗해야 되겠죠.! 그렇지만, 또 한번 생각해 보며는 깨끗한들, 하나님이 들여다 보실 만큼깨끗한 마음을 인간이 소유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마음 안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죄 뿐아니라 우리들의 영혼의 어두움과 지성의 눈 멀음으로 인해서 파악할 수 있는 수많은 죄들이 그 안에 가득 있어요.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앞에 알아봐 달라고 들여봐 달라고 하나님앞에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어떤 결론에 도달하냐 하며는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들여다 봐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물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고, 하나님앞에 깨끗한 마음을 소유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여야지 이런 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들이 인정하지만, 그러나 정말 하나님께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마음이 그렇게 깨끗한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비록 자신의 마음이 한때는 더렵혀 졌고 그리고 죄와 불결로 오염되었다 할지라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사람! 그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사람!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하는 사람! 그 사람들이면 누구든이 이렇게 기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깐 시인이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기도할 때에 이시인은 순결한 마음의 상태였다기 보다는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마음을 하나님앞에 쏟아놓고 있는 상태!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놓고 있는 상태 그때에 이 시인이 하나님앞에 이렇게 기도할 수 있던 것 이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마음을 쏟아놓으며 하나님앞에 기도할 수 있었던 이 시인이었기에 하나님앞에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그래서 죄가 있으면,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그 죄에도 불구하고 원수들에게 억압을 받고 있으면 구원을 배풀어 주시고, 너무나 안타까운 기도의 제목이 있어서 넘지 안으면 안될 인생의 고비가 있으면 그것을 넘어갈 힘을 주시고, 어쨌든 그렇게 하나님앞에 탄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안에 일어나는 작용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작용,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할 갈망이에요. 하나님을 향하고자 하는 간절한 갈망!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목마름, 주님의 은혜를 받고자 하는 간절한 사모함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변화되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의 소원! 이것들은 인간의 마음안에 일어나는 작용중에 최고의 작용이에요. 만약에 그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는 가운데 그런 갈망이 생기고 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하는 그런 소원으로 이어지게 되고, 이러한 갈망을 가지고 있지만, 자신의 죄가운데 있게 되며는 그가 참외하고자 하는 소원으로 이어지게 되는 거죠. 반대로 그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어도 이런 갈망이 없다! 그러면 그는 결국은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다가 미끄러져요. 죄가 많이 있는 데도 이런 갈망이 없다 죄가운데 그 영혼은 계속 파괴되어 가요. 그러니 이것은 정말 간절한 갈망이고 이 갈망이어야 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자 하는 갈망이에요. 그러므로 이런 갈망이 없으면 사실은 그 사람은 죽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이거에요. 하나님 없이도 살수 있는 사람! 새벽에 기도하러 나오고 주일이면 예배드리려 나오고 성경을 읽지마는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서 안개가 가득 차있어요. 무엇을 하든지 이런 갈망이 없어요. 그러면서 그의 영혼은 계속해서 어두움 속을 걸어가게 되는 거에요. 특별히 괴로운 것이 없을지도 모르지마는 그러나 가슴벅찬 신앙의 감격도 이미 잃어 버린지 오래되었죠. 그걸 성경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자라 고 표현하고 있는 거에요. 그런 갈망을 이 시인이 갖고 있었던 거에요. 원수 들에게 애워싸여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어요. 근데, 이시인의 마음을 찌르고 있는 고통은 원수들의 숫자나 그들로부터 받는 픽박이나 고난이 아니였다는 말이에요. 그럼 뭐에요! 뭐가 이 시인의 마음을 찌르고 아프게 만들었어요! 원수들의 압제나 고통 육체의 고난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자신에게 비춰주시지 않는다고 하는 안타까움이었어요.
그모습 내눈에 안보이고 그 음성 내 귀에 안들려도 내 영혼 날마다 주를 만나
신령한 말씀 늘 배우도다
하나님 안보이죠. 언제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의 귀에 들리게끔 크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래도 내영혼이 날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나의 지성으로 들을 수 있다면, 보이는 세상보다는 안보이는 주님을 더 의지하는 거에요. 만져지는 이 세상보다는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을 더 뜨겁게 사랑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는 거에요. 근데 지금 그것이 사라진 것이 원수 들의 많은 숫자보다도 더 중요 하다 이거죠. 내가 오늘 묻고 싶어요. 이렇게 여러분 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셔요! 언재든지 내 심사를 통촉하소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기울어져 있습니까? 그분앞에 우리의 마음이 쏟아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의 시선이 그분께 고정되어 있습니까! 이 아침에 새벽에들 나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 고정 시키는 거에요. 그 일을 위해서 나오는 거에요. 그리고 깊이 우리의 마음에 찔림을 받고 마음의 눈을 들어서 이 세상에 잡다한 번뇌를 불러일으키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거에요. 그럴때에 그가 누구든지 간에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말 할 수 있는 거에요. 성전으로 기도하러 올라갔던 세리는 정말 죄만 지은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앞에 자신의 마음을 물같이 쏟아 놓을 수 있게 되니깐, 나를 불쌍이 여겨달라고 가슴을 치며 하나님앞에 기도했어요. 자기를 통촉해 달라고 하는 것 아니에요. 이렇 때 시인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시선이 무얼까요? 심판하기 위해서 들여다 보시는 감찰관 같은 눈초리가 아니에요. 긍휼과 은총이 가득찬 연민의 마음으로 들여다 보시는 하나님의 눈빛을 기대하는 거에요. 신자의 모든 삶은 이런 하나님을 향한 갈망! 어느 때든지 흩어진 마음을 모으면, 그 하나님을 갈망하게 되는 거에요. 길을 걸어가다가고 그분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흐르고 밥을 먹다가도 그 하나님의 생각에 목이 메이는 이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의 마음이에요. 그리고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할 때, 하나님은 자비로운 눈빛으로 그들의 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여전히 부족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또 여전히 부분적으로 삶에 있어서 온전하지 못하고 불순종하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고 측은히 여기시고 하나님이 통촉하시는 거죠. 우리에게 정말 이런 마음이 있느냐 라고 하는 거에요. 하나님의 은혜는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부어 주는 거에요. 한번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 내 심사를 통촉해 주시옵소서. 나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내가 이런 상황 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나를 통촉해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마음을 찢으며 매달리는 적이 있느냐는 것이죠. 이어서 오늘 성경에 보며는 시인이 나는 기도하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통촉하시는 그 마음은 기도의 향불이 피어오르고 있는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는 일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간권이 되지마는 그러나 그렇게 마음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그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앞에 그 말씀에 감화로 말미암아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을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니깐, 눈부신 진리의 빛과 마음을 쏟아 붇는 이 기도는 때어 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이죠. 눈부신 진리의 빛이 자신의 지성가운데 비친다고 생각하면서 실상은 마음을 쏟아부어 하나님앞에 기도할 수 없는 사람들은 사실은 그 눈부신 빛이 정말 그의 영혼의 장열 하듯 비춰서 그를 행동하도록 만들어 주는 그런 은혜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에요.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움직여 질 때에 그것은 우리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그 지성이 움직일 때가 있고 그냥 사변만 하도록 움직일 때가 있어요. 뒤에 나오는 생각만 하도록 우리를 움직이는 경우에는 생각만 질서를 잡아 줄뿐 그 생각한 것이 행동으로까지 이어지도록 만들어 주지는 못해요. 근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생각만 정리하게 만들어준 진리가 아니라 행동하게 만들어준 진리가 필요해요. 그것을 통해서 우리안에 깨어짐이 일어나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앞에 바뀌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작용들이 우리에게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아~ 오늘 설교 들었어. 정말 감동적이 었어! 정말 감동적이었어. 그래서 어떻다는 겁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뭐가 바뀌었습니까? 아~ 오늘 설교 정말 들을 때 마음이 따뜻했어. 그래서 뭐가 바꿨다는 겁니까! 아~ 오늘 예배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드렸어. 그래서 어떻다는 겁니까? 중요한 건 그것을 여러분들이 엔조이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속에서 눈부신 진리의 빛을 깨닫고 그리고 그 진리대로 사는 삶이 나타나야 되는 거에요. 그래야지만, 거짓과 허위에서 벗어난 참된 신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이 필요해요. 그게 바로 마음을 쏟아 붙는 기도에요.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죠. 하나님이 모르는 것이 있으시다고 하며는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알죠. 아시죠. 그러나 시인이 여기에서 내 심사를 통촉해 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자기 마음을 알고 계시면 충분하다 그런 뜻이 아니죠. .. 베이커스 빌드에서 집회를 하고 오는데, 어느 성도가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성이면서 그래요. “목사님 저희를 기억해 주세요.” 제가 바보입니까! 가서 일주일씩 집회를 하고온 곳을 제가 죽을 때까지 잊어버릴 수 있겠어요! 기억 속에서 사라질 수가 있겠냐고. 근데 그렇게 손을 붙들고 탄원하는 성도의 간절한 사모함은 그런게 아니죠. 망각 속에서 사라지지 않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죠. 기억해 주십시오. 오랫동안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생각할 때 마다 불쌍히 여겨주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무엇인가 필요하다면, 달려와 주십시오. 그 뜻아니에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이 통촉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거기에 하나님이 긍휼의 사랑에 가득찬 마음을 가지고 돌아보시는 거에요. 우리가 곤고하게 사는 것을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에요. 죄 있는 많은 사람들도 그 곤고 함에서 벗어 날 수 가 있었어요. 우리가 곤고하게 사는 것은 환경적으로 너무 어려워서 곤고하게 사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보다 더 곤고한 사람들도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을 만났어요.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 곤고하게 살게 내벼려 두시나, 탄원하는 기도가 없는 거에요. 제 영혼이 곤고 합니다. 제 영혼을 하나님이 만약에 이렇게 곤고하게 버려 두실 수 밖에 없다면, 하나님 제 영혼을 차라리 취해 주십시오. 그렇게 간절히 호소하는 부르짖음이 없기 때문에 인간이 곤고하게 살게 되는 거에요.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신다.는 거죠. 그런데 오늘 시인이 뭐라고 말하냐며는 나는 아침에 기도합니다. 라고 말해요.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침은 우리 같은 이런게 아니에요. 새벽이라는 걸 뜻하는 독특한 단어가 별로 없어요. 그리고 보께르라고 하는 이 아침은 어두음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전부다 보께르에요. 아침이에요. 그러니깐 새벽이 포함되는 거죠. 새벽이죠. 당연히 새벽이죠. 여러분이 알다시피 이 시인 다윗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어요. 구약에서 이사람 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리고 또 이사람 만큼 하나님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없었어요. 이사람 만한 기도의 사람도 없었어요. 기도의 사람, 찬송의 사람, 말씀의 사람, 순종이 사람, 사랑의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순종한 사람이었어요. 그렇게 하나님앞에 기도속에서 살았던 사람이었어요. 그 풍부한 기도의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이 시인이 자기는 아침에 기도한다고 고백을 했어요. 하루만이 아니라 일생을 아침에 기도했어요. 그래서 다른 시편 속에서도 새벽에 기도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고 심지어 나의 마음을 정했고 확정했으니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는 고백이 나와요. 하나님은 어느 때에든지 기도하는 것을 기뻐하세요. 그렇지만, 시인은 오랫동안 일생을 하나님을 추구하는 그 과정을 걸어오면서 아침의 첫 시간에 아주 쇠악한 정신으로 하나님께 주목하는 마음을 하나님께 쏟는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통촉해 주시는 비결이라고 이시인은 경험적으로 깨달았던 거에요. 그래서 잠도 깨지 않은 가운데 비몽사몽 와서 졸다가 새벽기도 갈 바에야 나오지 마요. 그렇게 한달을 나오는 것 보다는 맑고 쇠악하고 정신 똑바로 나는 마음으로 와서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꽉 찬 가운데 내가 이 새벽에 시간에 주님의 얼굴을 뵈옵게 해 주시 옵소서. 그런 사모함으로 나오는 일주일의 기도가 훨씬 의미있는 거라는 거에요. 보세요. 시인은 새벽의 시간에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틀림없이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새벽에 행하시는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였을 것이에요. 홍해를 가르신 그 새벽, 하나님을 배역하던 소돔과 고모라를 불태우시던 그 새벽,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던 그 기적을 기억하며 이 시인은 그 이른 새벽에 그 하나님앞에 간절히 자기의 마음을 쏟아 놓았습니다. 한나라의 왕인 이 사람이 이렇게 간절히 토로 하며 하나님앞에 부르짖었습니다. 우리가 도대체 가진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도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도 더욱이 하나님이 우리들 자녀로 불러주신 소명을 위해서는 더더욱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더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앞에 매달려야 할지 한번 생각 해 보십시오. 그래서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앞에 매달리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이렇게 하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기뻐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