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8일 새벽예배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히 13:20)
녹취자 : 이시내
큰 목자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결국은 그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평화를 만드신 그 하나님이 그렇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선한 일에 있어서 온전케 되도록 그렇게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세상에는 모두 다 인간 나름대로는 선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각자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 선하다는 판단의 기준이 자기에게 있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참 오늘날 노인학대의 문제가 아동학대의 문제 못지않게 심각한데 얼마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팔순이 훨씬 넘어서 치매기가 있는 어머니를 육십이 넘은 아들이 길거리에 버렸습니다. 그러다 이 할머니가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치매가 걸리니까 그 치료하기 위해 매달 돈이 들어가고 하니까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그 어머니를 길거리에 유기했다고 하는데 나중에 알고보니까 큰 보험을 들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를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길거리에 내팽개쳐 놓고 어디가다가 죽으면 보험금을 타리라 하는 그 얄팍한 계산으로 그 어머니를 죽게 한 것입니다. 머리도 별로 좋지도 않은 노인네가 얼마나 많이 고민을 하면서 묘안을 짜냈겠습니까. 그것이 악한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것이 자기에게는 좋은거라고 해서 행한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자유의지론속에서 악이라고 하는 것은 보다 보편적인 선에서 특정한 작은 범위의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선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그게 악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악한 일도 실제로 저질러지고 행해지면 그게 좋은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게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악을 혐오하고 미워하면 그 일이 행해지겠습니까. 그래서 결국은 인간이 세워놓은 좋다, 나쁘다 라고 하는 이 기준을 가지고는 완전하게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다 라는 것을 판단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선이다, 악이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창조주로써 이 세상을 향해 가지신 계획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 계획 속에서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셨고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을 이 세상에서 구원해 내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으로 건져주시고 주님이 새롭게 해주십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신것입니다.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그런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인간을 향해 걸고 계신 주님의 기대가 왜 없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선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을 따라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리고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것이고 이 세상을 하나님이 왜 창조하셨고 구원받은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을 어떻게 새롭게 가꾸어가기를 원하시나 그것을 우리들이 배우고 알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선한목적을 따라서 살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사셨던 그 모든 생애가 농축되어 있는 가르침이 무엇이냐 하면 주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까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 전반부에 나오는 세 개의 기도가 바로 그러한 선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래의 본 뜻이 이루어지는 그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의 주기도문 속에 아주 훌륭하게 용해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진실한 신자가 되면 예수님의 주기도문을 아주 뼈져리게 이해하게 됩니다. 거기로부터 멀어질수록 주기도문으로부터도 역시 멀어집니다. 진실한 신자에게는 항상 예수님 때문에 자신이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싶다 그런 소원보다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내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거기에 자신의 온 마음과 생각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정말 간절히 사모하지 않을 수 없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순간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선을 구하는 예수그리스도께서 큰 목자로서 우리를 구해 주신 것도 바로 그런 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우리들이 봉사하면서 살기위해서 하나님이 목자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선한 삶을 살기위해서 목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허락해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겠는가. 그런 일들을 이루어가기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 그런 일을 할뿐 아니라 그런 일을 행함에 있어서 자신이 온전하게 되어가야 합니다. 여기에 기독교신앙의 독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단지 일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창조의 목적에 부합한 세상이 되도록 가꾸면서 일할뿐 아니라 또한 자신이 그렇게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는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야 합니다. 그 두 가지가 결국은 성화를 의미합니다. 성화의 삶, 성화의 인격입니다. 왜 지금 큰 목자이야기를 하다가 이 이야기를 하는가하면 결국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목자로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도 이러한 목적 때문이고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을 주셔서 그 목회자들로 이렇게 섬기면서 살게 하신 것도 바로 그것을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고난 받고 다시 살고 이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온 마음과 뜻을 다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오르고 그리고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참된 가치가 아닙니다. 얼마나 티끌과 같은 인간이 거룩한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본분을 지키면서 티끌 같은 피조물이지만 피조물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얼마나 사느냐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누가 이일들을 이미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으며 이미 나는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되었다라고 말할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과 싸우고 날마다 주님이 나를 구속해주신 그 은혜를 자신 속에 솟아나는 욕망보다 더 많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래서 많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 많이 생각하는 것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일들을 위해서 목자이신 예수님이 필요했고 목자이신 예수님은 다시 이 세상에 목회자들을 세워서 그 영혼들을 목양하게 하심으로써 당신이 구원해놓으신 그 궁극적인 목적을 이 땅의 신자들을 통해서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정말 너무나 너무나 필요하고 소중한 이일을 예수님께서 이 목양의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저마다 다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높은 지위나 많은 재산이나 이런 것들을 부러워하는 것들이 아니라 교회에서의 직분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더 많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한바와 같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에 서로 시기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좀 더 주님을 닮아가고 닮아가고 하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