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목회와 예배
녹취자 : 김세나
아침서부터 굉장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걸 것인가. 여러분 철저하게 교리를 가르치면 좋아합니다. 좋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최선이라는 것도 알고 개혁 교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그렇게 교리를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신앙생활을 해야지만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그것을 끝까지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압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얼마나 허무한가를 압니다. 제가 현대 복음주의 신학자들 가운데 데이비드 웰스와 마이클 호튼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기독교 개혁 신학과의 관계에서 그 시대와의 관계성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진단하는 신학자들이 개혁 신학자들 가운데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 분들의 저작들이 우리 교회에서 필독서로 읽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개념들은 그대로 용어들은 그대로 남았는데 속에 파고 들어와서 알맹이를 따 먹어서 다른 것으로 다 바꿔버리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마이클 호튼 교수가 오후에 힘 줘서 땀을 흘리면서 설교한 것입니다. 제가 묻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것에 대해서 동의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끝까지 그리스도가 없는 교회가 좋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대답해 보십시오. 끝까지 그것이 좋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압니다. 그리스도 없는 설교가 얼마나 허무하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랍비들이 했던 것처럼 도덕주의로 나가라고 가르치는 그것이 마지막에 아무것도 거둘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압니다. 우리는 confident 합니다. 확신합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끝까지 도덕적인 설교가 좋다고 하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나는 오늘 이런 논지에 대해서 한번 현실적인 답을 내놓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제가 웨스트민스터 방문했을 때, 우리 두 분과 카프리 총장님과 넷이 앉아서 한 1시간 반동안 토의하는 가운데 똑같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데이비드 웰스가 아주 현실적으로 기가 막히게 기독교가 저해 받고 있는 원인들을 진단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좋다는 것은 누구도 다 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것인가. 그 때에 결국은 분석은 많지만 대안이라고 하는 것을 서술하기에 힘들 정도로 너무 간단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간단하다 라고 하는 것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웰스의 책을 읽으면서도 마이클 호튼 교수의 책을 읽으면서도 이번에도 Gospel Commission 이라는 책이 3월에 미국에서 출판되는데 제가 추천사를 썼습니다. 읽으면서도 제가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것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현실적으로 교회 안에서 나타나서 그래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가르치면 성도들이 토할 것처럼 힘들어하는 교회가 될 수 있게 하겠느냐.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쳐 달라고 성도들이 애걸하는 교회가 될 수 있게 할 것이냐. 그리고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상식이 아니라 기독교의 진리의 체계들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 교인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겠느냐. 좋은 나무만 있다고 해서 좋은 숲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토양을 가진 산이 여야지만 나무가 심겨질 때 자랄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답들을 여러 갈래들로 이야기 할 수 있고 훨씬 종합적인 접근이 이루어 져야 되겠지만 예배와 관련해서 이 문제를 찾아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예배 상황은 심각한 위기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의 예배 상황이 어떠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극장 구경도 상영시간 15분 전에 가서 팝콘 사고 콜라사고 기다립니다. 그리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예배는 15분 전에 오는 사람들이 희귀합니다. 5분 전에 러시아워입니다. 심지어는 11시에 예배 시작했는데 25분이 되도록 아직까지 밖에서 차 대고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들어옵니다. 들어오고 나서 그 다음에는 예배 드리는 태도를 보십시오. 예전에는 설교 시간이 우리 어렸을 때에 보통 90분, 1시간 이상 갔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설교하면 교인들 다 갑니다. 그게 설교를 길게 하는 것은 자신을 학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예배 시간이 점점 짧아져서 이제는 예배의 목표가 끝나는 게 목표입니다. 언제? 한 시간 안에. 하다하다 안 되면 찬송가 1절 부르고 마치겠습니다라고 해서라도 시간을 맞춰야 합니다. 줄어드는 시간은 설교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설교가 줄어 들어서 25분, 30분 넘게 하는 교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가 사실은 정말 설교입니다. 사람들이 그 설교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해 전에 어느 복음주의적인 단체에서 앙케이트를 했는데 예배 마치고 가는 사람 100명을 붙들고 앙케이트를 냈답니다. 방금 목사님이 설교를 어디를 했느냐고 했더니 95명이 모른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95명 중 절반은 방금 드린 예배의 설교가 구약이었는지 신약이었는지 생각이 안 나는 사람입니다. 5명 사람을 연락처를 적어놨다가 3일 후에 다시 전화를 해서 기억하고 있는지 물었더니 3일 사이에 세 사람은 잊어 버렸습니다. 두 사람은 기억을 하고. 그러니 설교를 기억하지 못하는데 그렇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예배당에 들어와서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예배를 드리다가 일어났다 앉았다 이렇게 저렇게 예배를 드리고 예배는 뭐가 그렇게 순서가 복잡합니까. 내가 부교역자로 있을 때 그 교회에는 65분 동안에 예배 순서가 23가지였습니다. 수많은 예배의 순서가 드려집니다. 마지막에 사람들이 설교 시간에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견디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머리가 벗겨지셨어요. 목사님이 머리를 숙이면 눈이 나쁜 저 같은 사람은 목사님이 얼굴을 우리에게 보이며 설교를 하는지 숙이고 설교를 하는지 머리 위에다가 그림만 그리면 사실 알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시종일관 이렇게 설교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똑같이 거기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2층에서 내려다보면 아무도 없습니다. 예배를 견디는 태도는 설교를 견디는 태도인데 그것도 여러 가지입니다. 예배 시간에 낙서 하는 사람, 주보 읽는 사람, 주보에 헌금 헤아리는 사람, 감사헌금 왼쪽 줄에 몇 명, 오른쪽 줄에 몇 명 곱하기 금액 나누기 한 사람 앞에 얼마, 수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디서 더 높은 데서 연락이 왔는지 삐삐를 들고 옆으로 뛰는 사람, 그 다음에 예배 시간에 의자 밑으로 들어가서 핸드폰을 받는 사람, 졸다가 성경 떨어뜨리는 사람,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나는 목회자로, 그리고 신학자로서 거기에는 하나님 없습니다. 지금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삽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거기에 오신다면 내가 제일 먼저 나가서 오시지 말라고 당부를 할 것입니다. 거기 왜 오십니까. 그러니 그러한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도대체 본인이 변하겠습니까. 세상이 변하겠습니까.
종교 개혁 시대에 위대한 개혁 운동들을 견인해 나갔던 견인차 역할을 했던 것이 예배입니다. 칼빈 시대의 기록을 보니까 매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매일. 일하러 가기 전에 매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온 도시의 사람들의 관심이 예배입니다. 그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그러한 개혁 정신의 추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대로 가톨릭을 믿어왔던 사람들이 수없이 성당 다녀도 전혀 하나님 못 만나다가 개혁 교회에 들어와서 주님을 만나는 감격을 느끼면서 오랜 동안의 조상들에게 내려오던 신앙을 버려두고 개혁교회로 꽉 붙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중요한 것은 교회이고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은 모두 말하자면 세속적인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세속적인 삶과 교회의 삶은 아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한 대조를 이루는 상황에서 성도들이 주일날 밖에 나갈 때에는 우울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가서는 안 될 질게 뻔한 세상으로 발길을 옮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토요일에 돌아올 때에는 상처 투성이가 되어서 돌아올 게 뻔한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입니다. 개혁주의적인 세계관이 아닙니다.
언젠가 지방에 내려 갔더니 나를 차로 픽업하는 사람이 나를 타자마자 녹음 테이프를 탁 틉니다. 누군가가 거기에서 열심히 강의인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뭡니까 그랬더니 담임 목사님 특강인데 한번 들으면서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생각해서 들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이 강사가 그러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여태까지 교회가 제일 중요하다고 배워왔습니다. 예배가 제일 중요하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사실은 예배는 우리의 삶으로 표출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기까지는 우리들이 용인할 수 있습니다. 하시는 말이 뭐냐 하면 예배는 곧 삶이고 삶이 예배입니다. 틀렸습니다. 그 대목에서는.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이 앞의 것이 이원론을 가리킨다면 뒤의 것은 엉터리 일원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삶을 예배로서의 삶을 아예 구별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구 흘러가서 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유명한 교회입니다. 지체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주일 예배를 안 드립니다. 왜 안 드리냐 했더니 그 시간에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을 봉사를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날 그 봉사를 하면서 끝나는 것입니다. 예배를 안 드리냐 했더니 이게 우리의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주 훌륭하게 설명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메리니트 크라인이라고 하는 60년대 웨스트민스터에서 구약을 가르쳤던 신학자입니다. 그 사람은 이것을 그 사람이 직접 설명한 것은 아닌데 그 분의 이론을 제가 간단하게 비유를 하자면 원뿔과 같이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좁은 의미의 예배와 넓은 의미의 예배가 구별, 딱 나뉘어 진다고 말하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뉘어지지 않는다고 이야기 하면 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원뿔 구조로 이해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중심은 아주 분명하게 좁은 의미의 예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외연은 확장된 것이 넓은 의미의 예배입니다. 넓은 의미의 예배와 좁은 의미의 예배가 막힘이 없이 통하게 되어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층차가 있고 위에서 보면 또렷이 보면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좁은 의미의 예배를 하나님 앞에 성공적으로 잘 드리는 사람이 그러한 예배의 정신으로 바깥에 나아가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다가 왔던 그러한 전투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좁은 의미의 예배를 드릴 때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라고 하는 다급함과 그리고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는 실제적인 위로와 감격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관관계 속에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좁은 의미의 예배도 우리들이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선 우리들이 가정에서도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직장에서 신우회에서도 예배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개인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조용한 시간을 드리면서 얼마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고 심지어는 성경 한구절 읽고 마음 속으로 조용히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는 그 자체도 하나님 앞에 훌륭한 예배고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은 통회하며 눈물 흘리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훌륭한 제사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들보다도 더 우위에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공적인 예배입니다.
이 공적인 예배가 왜 그렇게 중요하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unity를 유지할 수 있게 했던 중요한 동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아무리 하나님이 한 피로 불러 주셔도 그들이 실제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같은 아버지 뱃속에 나온 자식들은 싸우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오히려 더욱 물고 뜯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한 교단의 교회들은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더 열심히 투쟁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동체적으로 원리적으로 선택하셨어도 그 원리적으로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제적인 면에서 온전한 unity를 이루면서 살아가게 하는 중요한 하나님의 방편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핏줄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함께 한 장소에서 동시에 같은 하나님의 속성을 경험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unity를 만들게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대표적인 것 딱 두 개만 들고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맨 처음에 모세가 찾아와서 나도 원한게 아니었는데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나보고 너희들을 데리고 애굽을 도망치라고 그러시더라 그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엎드리며 주님이 보낸 구주가 오셨나이까 그러고 경배했습니까. 미친 놈이라고 그랬습니다. 말 안들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모세가 가자 하니까 다 따라 왔습니다. 그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온 애굽 중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큰 사람으로 보였더라 그랬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동시에 그들이 10대 재앙을 경험했습니다. 거기에서 두렵고 엄위하시고 언약받은 백성들은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을 속성을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빼놓지 않고 한꺼번에 경험했기 때문에 그들이 함께 나올 수 있었고 심지어 거기에는 출애굽기 12장 58절에 보면 중대한 잡족이 따라왔다고 되어 있는데 핏줄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니라 오히려 가나안의 원주민들까지 끼어있었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에 신앙고백과 할례를 통하여 이스라엘 회중속으로 들어오게 되어 사실상 한 이스라엘이 되어서 함께 도망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구약에서만 예를 드냐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신약에서 봅시다. 신약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이스라엘 초대교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를 따라서 오순절을 기다렸습니다. 동시에 성령을 통해 경험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였습니다. 여러분들 마지막에 줄리어스 킴 목사님이 설교했습니다. 정말 예수 만난 사람들은 그리스도 중심으로 설교를 안 하면 분노를 느낀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의 고백입니다. 분노를 느낀답니다. 어떻게 설교를 저렇게 할까. 왜 평소에 듣던 그 설교가 아니면 분노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에 대해서 치를 떱니다. 그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예배가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공적인 예배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한 교회의 영적인 수준은 그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주일예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 교인들의 윤리와 영적인 수준은 그 예배를 드리는 예배의 품질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능가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개혁주의 목회와 예배를 이야기 하자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를 목회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개혁주의를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사실은 로마 가톨릭에서 뛰쳐 나온 것은 다 개혁주의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온갖 잡다한 것이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좁은 의미에서 보면 더 줄어듭니다. 거기에서 이단에 속한 것들, 소키누스주의, 알미니우스주의 그리고 아까 이야기 한 펠라기우스주의 다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소키누스주의가 사실 펠라기우스주의의 부활입니다. 다 이름만 바뀌었지 그대로인 것입니다. 보르스티우스주의, 그 다음에 아나뱁티스트 이런 것들을 다 제외한 것들을 우리 Reformed라고 부릅니다. 더 좁게 만들면 더 좁게 가장 협의로 부르게 되면 그러면 칼빈과 그리고 제네바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개혁파 사상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 이러한 식으로 우리들이 개혁주의라고 보면 개혁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우리 늘 배우는 것입니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중심으로 합니다. 지금 마이클 호튼 교수가 계속해서 두 시간동안 연속해서 열변을 토하고 마지막에는 땀이 흠뻑 흐르도록 외친 게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 중심이어야 하는 이 기독교가 사람 중심이 되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은 나쁜 짓하는 것이 세속주의가 아니라 가치 판단의 중심 기준을 하나님에게서 사람 중심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러면 아까도 보십시오. 죄라고 하면 그 가치 기준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법입니다. 그런데 그 법을 지키기에 모자라거나 위반을 했습니다. 그러면 판결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죄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준을 사람에게 옮기면 어떻게 됩니까. 어찌 할 수 없는 연약성입니다. 그리고 나도 받은 상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거울이 빛을 반사하듯이 내 상처가 상황에 대해서 반응한 것이 그게 바로 결함 있는 삶입니다. 이렇게 사람 중심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즐겁게 해 드릴 수 있을까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얼마나 더 유익을 얻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어떻게 나를 부수고 헌신해서 하나님의 나라의 번영에 이바지할까 그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이바지 하고 타인들이 나에게 기여해서 나의 행복을 증진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본주의적이지만 상당히 종교주의적인 인본주의입니다.
작년에도 호튼 교수랑 만나서 아까 긍정의 힘 이야기 나왔는데, 똑같은 이야기 나왔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신학이 어떠냐. 그 사람은 신학이 없다. 최근에 미국의 신학자들이 분석을 해냈는데 영지주의적인 특성 플러스 펠라기우스 플러스 알미니우스주의 그 다음에 80년대, 70년대의 번영주의, 그것은 하다가 보니까 황소 뒷다리에 개구리 맞은 격으로 분석이 그렇게 된 것이지 그가 그런 것을 의도해서 영지주의를 연구해서 그것을 영지주의적으로 해보겠다. 그리고 펠라기우스를 탐구해서 펠라기우스를 따라가 봐야지, 아니면 60년대의 번영주의를 연구해서 70대의 번영주의를 한번 재연해 봐야지 그것 아닙니다. 그래서 묻는 사람들에게 항상 그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내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게 제가 왜, 지금 미국 학자들은 heresy라는 말을 잘 안 사용합니다. 이단입니다. 그 말은 웬만하면 사용을 안 합니다. 그런데 정말 정상적인 복음 주의자들은 단호하게 이야기 합니다. He is heresy. 제가 이것을 왜 종교적으로 이야기 하냐면 여러분, 우리 70년대에도 우리나라에 번영주의가 있었습니다. 80년대까지. 90대와서 좀 사라졌습니다만, 왜 그럽니까. 먹고 살기 위한 번영주의입니다. 너무 배고프고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고 힘이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 우리 좀 한번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것들을 선포하는 교회들이 강력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그래도 복음을 완전하게 버렸다고 할 수 없는 그러한 어떠한 sympathetic 한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동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 종교적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먹고 살기에 모자라기 때문에 번영주의를 꿈꾸고 거기에 몰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한껏 실현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심리학자 매슬로우라고 하는 사람을 알 것입니다. 매슬로우가 인간의 욕구 단계를 다섯 단계로 나누면서 맨 마지막에 올라가는 가장 높은 단계가 무엇입니까. self-realization 자아실현입니다. 자아실현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꿈과 모든 생각이 막 이루어져서 이 세상이 나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고프고, 배부르고, 좋은 옷 입고, 나쁜 옷 입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종교적인 성향을 가진 문제라는 것입니다. 신 번영주의는 그것을 가능하다고 우리에게 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최고 싫어하는 것이 꿈 타령입니다. 자꾸 꿈을 갖으라 그러는데 성경은 꿈을 버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뭐라 그럽니까. 사도바울이 꿈에 부풀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가는 길에 예수님 만나고 어떻게 됩니까. What shall I do? 내가 뭘 해야 되겠습니까. 사울이 그런 말 하면 안 됩니다. 일평생 그것을 가르치면서 산다고 믿은 사람이었는데. 제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그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뭐냐 하면 그 꿈을 보태면 네가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자꾸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인본주의적인 것들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면 뭐냐 하면 그러면 도대체 소위 이야기 하면 center-shift 그러면 나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을 중심하는, 인간을 중심으로가 아니라 정확하게 하면 나를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전체를 중심으로 하는 것은 그것은 근대주의에서 끝났습니다. 이제는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모더니즘을 지났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인간 보편 모든 인간의 중심이 아니라 나 중심인 것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더 많이 이야기 하겠는데 요즘 마이클 샌델의 책들이 무지하게 많이 팔립니다. 100만부가 팔렸다고 하는데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한국의 민도가 어마어마하게 높아졌다고 하나,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그 사람은 신칸트주의자입니다. 다 나 중심으로 생각하다 보니까 아나키즘 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온갖 혼란한 사회 타락성들이 생겨나는데 우리가 살기에 너무 불편한 사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우리 속에 규범이 있어야 되겠다고 하는데 규범이 될만한 하나님의 존재, 선, 악, 이런 것들을 전부다 잘라 버렸습니다. 근원을 다 지워버린 것입니다. 포기해 버렸습니다. 왜, 그것들을 살아 남겨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우리를 항상 판단을 합니다. 아, 우리가 악하구나. 아, 왜 악하냐. 창조주가 있는데 그 분의 뜻이 그게 아니다. 이런 식으로 담론이 가기 때문에 그런 것 자체를 거부한 지가 오래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 같은 사람이 나의 평생 과업은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었다라고 담대하게 외쳤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준들을 다 사라져 버리니까 아나키즘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게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너의 공동체의 규범을 만들어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규범을 만든다 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규범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법학 쪽에서는 그렇게 안된다 라고 하는 것을 이미 1960년대 이전에 결론을 냈습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법 사상에 있어서 결국은 법은 무엇이 옳으냐를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그 기준이 뭐냐에 대해서 두 가지 사상이 있는데 자연법 사상과 실전법 사상이, 자연법 사상은 뭐냐 하면 본래의 신의 뜻이 있어서 자연 안에 선악을 알게 해 주는 길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와 결혼을 해야지 남자는 남자가 결혼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본성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자연이 말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가만히 생각하면 똑바로 찾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자연법 사상입니다. 그런데 실전법 사상은 뭐냐 하면 그런 것이 뭐가 있냐. 그리고 이 사상들이 근대 자유주의가 들어오면서 확 열렬하게 환영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뭐냐 하면 공동체에서 합의를 했기 때문에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논리에 의해서 인류가 커다란 비극을 받게 되는데 파시즘, 나치즘, 일본의 제국주의입니다. 파시즘, 나치즘의 이 히틀러 치하에서 최고 절정기에 93.4%의 국민의 지지율을 얻었습니다. 독일 역사에서 아직 그만한 정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합의해서 투표해서 그 제도를 택한 것입니다. 그 제도하에서 2차 대전이 일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 법학자들이 회의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아, 인간의 합의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무지막지한 것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미국처럼 제도가 잘 되어 있고 사회 시스템이 클리어하고 모든 사회 제도가 퍼펙트한 나라에서는 그 논리가 상당히 먹힙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처럼 후진국에서는 그러한 논리를 하게 되면 그러면 막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는 결론을 가져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유신헌법입니다. 얼마든지 통치자들에 의해서 조작되고 공동체의 이름으로 소수의 사람들을 억압하고 핍박하고 인권을 약탈한 끔찍한 일들이 일아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들이 인간 중심으로 해서는 해결이 안 되는데 기독교는 그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이 center-shift가 어떻게 일어나느냐. 중생과 회심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중생하고 회심하기에 이르도록 회심한 사람들에게 이 개혁주의 방식의 설교와 목회 세계관은 아주 달콤하게 받아들여진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좀 설명하기 위해서 제가 여러분들이 잘 아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명을 잠깐 빌어 오겠습니다. 이야기를 하면 길지만 조나단 에드워즈가 만들어 놓은 그 많은 신학의 설명 중에서 우리에게 오늘 커다란 유익을 주고 있는 유산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affection theory 라고 하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 하면 정동이론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이 뭐냐 하면 이것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라톤 이전부터 오던 문제들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것입니다. 플라톤이 이런 질문을 제개합니다. 선한 것이 있고 아름다운 것이 있죠? 있어요, 없어요? 그런데 선한 것에 마음이 많이 끌립니까. 아름다운 것이 마음이 많이 끌립니까.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것입니다.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공부의 마음에 끌립니까. 게임에 마음이 끌립니까. 게임은 예쁜 것입니다. 거기에 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질문을 합니다. 정말 이상하다. 왜 인간은 선한 것에 마음이 이끌리기 보다는 예쁜 것에 마음이 이끌릴까. 그 예쁘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예쁜 것이 아니라 내가 예쁘다고 느끼면 예쁜 것입니다. 거기에 끌리는 것. 기독교는 거기에 대해서 완벽한 해답을 갖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니까? 타락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감긱에 들렸다가 낳아도 입맛이 바뀌는데 이게 하나님 앞에 저주 받은 죄인이었던 영적인 입맛과 거듭나고 하나님의 생명에 접붙여진 사람이 되었을 때의 입맛이 똑같다면 의심해 질 여지가 있습니다. 말도 안됩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중생과 회심을 어떻게 설명하냐 하면 존재론적인 변화와 인식론적인 변화로 설명을 합니다. 즉, 중생과 회심은 그 전에 인간에게 없었던 존재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만 사랑하고 죄를 좋아하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좋아하는 성향을 하나님이 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식론적인 변화는 전에는 이 육신의 눈을 비롯한 감각을 비롯한 들어오는 것으로만 만족을 했고 그것을 열렬히 찾는 것이 그의 인식론의 인식의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중생과 함께 소위 이야기 하는 new sense 라고 하는 것들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 뉴 센스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예전에는 도저히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었던 것들을 느끼고 감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탁월하심, 진리의 아름다움, 성령의 달콤함, 은혜의 비밀, 하나님의 성품이 주는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드의 글에 보면 sweetness 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sweet. 달콤한 것들을 경험합니다. 이게 달콤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캔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예수의 성품을 생각할 때 마음속에 막 저려오는 그 떨림과 말하자면 sweetness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 눈물이 막 쏟아지고 마음 속에서.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이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루어진 모든 강의가 하나를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있는 기독교를 만드는 사람이 목회하는 교회가 중생한 교인들이 있을 때, 그리스도 중심적인 설교를 한 교회인데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있을 때, 회심한 사람들이 있을 때 그러한 목회와 신학은 그 교회에 커다란 힘을 부여합니다. 물론 그러한 설교나 신학 혹은 그러한 모든 교회의 가르침이 불신자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못 준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는 그 곳에 불신자들이 올 때 주님을 만나고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매일 매일 도덕주의 설교 타령만 하면 언제 그 사람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겠습니까.
그런데 거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들어오게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진짜 사람들을 중생하고 회심하게 하는 이 놀라운 변화는 사실은 신학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성령의 강한 역사에 의해서 현재적으로 어떠한 사건들을 그 사람들 속에 일으킴으로써 변화를 받아서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혐오하게 만들고 이런 것 아닙니까. 갓난 아이한테 이거 손 불에다 대면 큰일 난다. 하지마. 하지마. 하지마. 너무 겁을 많이 주고 망치를 들고 한번 이것 만지기만 하면 혼나 이러는 것입니다. 얘가 공포가 있습니다. 공포가 있습니다. 아, 그것 하면 안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것이 뭐냐 하면 한번 데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엄마가 사탕 주면서 한번 만져 보라고 해도 싫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하지 말자. 하지 말자 그것도 필요하지만 더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있는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한번 맛보아서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를 보면 짜증이 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이해 되십니까.
그래서 우리 열린 교회에서 개척을 하고 17년이 흘러왔는데 우리 모든 목회자들은 목회의 영광을 회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의 꽃이 회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당에서도 주일날이면 어린아이들이 와서 나한테 인사를 합니다. 걔네들은 내가 무비 스타라고 생각을 합니다. 항상 이 TV로만 본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무슨 연예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보면서 악수를 하고 뛰어가면서 나 김남준 목사님을 만났다 그러면서 뛰어 갑니다. 그러면 내가 항상 물어봅니다. 너 몇 학년이니? 초등학교 1학년입니다. 이름이 뭐야? 김 아무개입니다. 그래. 너 회심했니? 그럼요. 목사님 저는 유치부 때 회심했습니다. 또 어떤 애는 회심했니? 잘 모르겠어요. 난 한 것 같은데 엄마는 안 했대요. 노력할께요. 그것을 회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할 때 자주 자주 온 여기에 경건하게 앉아 있는 예배당을 꽉 채운 청중이 한 사람도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이 중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라고 생각을 하고 가끔은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로서 신학자들 만으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을 못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영혼들을 만나는 전도자, 그리고 목회자들이 신학자들의 이러한 모든 견해와 생각들을 잘 소화해서 함께 기도하면서 담대히 외쳐야 합니다. 여러분, 조직신학 특강을 들으면서 회심했다고 하는 사람 들어본 적 있습니까. 그러나 이름 없는 무명의 전도자의 전도를 듣거나 전도 설교를 들으면서 회개한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게 바로 두 사역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가르침들을 잘 받아서는 그 다음에는 이것은 말하자면 전투 계획도입니다. 다 이길 길이 생겼다. 돌격 할 때 네가 가 그러면 안 됩니다. 나는 사령부에 남을게. 너가 가. 그러면 안 됩니다. 돌격 그러면 일사 분란하게 뛰어 나가서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그게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제일 먼저 가서 주일학교 가르치기 전에 가서 명단 써 놓고 경건하게 기도하면서 이 녀석이 회심했나를 양심과 신학에 입각해서 체크해. 체크 안 된 이 사람들이 미래에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전파할 미래의 사람들이고, 그리고 그리스도 없는 설교 도덕주의를 부추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 있는 설교를 하면 짜증낼 사람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오늘날 이 한국 교회의 반 복음주의적인 거대한 세력들이 교회 안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거 한국교회가 30년 동안 공들여 만든 결과입니다. 웃음이 나옵니까. 목회 사역을 허투르게 하면 당대에 결과가 오는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더 심각한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또 문제가 그것입니다. 자,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의 회원의 자격을 엄격하게 정의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례는 줘야 되겠는데 교인은 늘어나는데 양심에 손을 얹교 생각해도 중생의 표가 없습니다. 회심을 안 한 것 같아. 그러면 여러분 정직하게 세례 받으러 오는 사람이 30명, 50명쯤 되는데 제가 면담을 해 보니까 이 사람들이 열렬히 세례를 받고 싶어서 candidate 했지만 중생의 표가 없습니다. 나는 목회자의 양심으로 세례를 줄 수 없습니다. 장로님, 우리 아무도 세례 주지 맙시다. 그럴 때 장로님이 아, 목사님은 정말 Reformed입니다 라고 할 교회가 몇 개쯤 되겠습니까. 너 때문에 회심 안 한 것 아니야, 그럴 것 아닙니까. 너는 그것도 안하고 월급 받고 뭐했냐 그럴 것 아닙니까. 현실적으로 없으면 기준이 낮아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개혁주의 목회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중생과 구원이고 그 다음에 중생하면, 회심하면 놀랍습니다. 이야기는 한번 해볼까요? 중생하고 회심해서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뜨거워지면 예배와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특히 기도를. 초등학교 애들도 75분, 80분씩 설교를 해도 자세하나 안 흐트러지고 똑바로 앉아서 듣습니다. 그것입니다. 두 번째가 뭐냐 하면 개혁주의 목회자가 되려면 성경적으로 설교한다고 하는데 어느 설교자가 나는 국어책적으로 설교한다고 그러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성경적이라고 그러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이냐 하면 성경적인 설교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그 성경적인 설교를 성경적일 있도록 지탱해주는 틀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포도나무는 길이가 2m면 옆으로 24m를 뻗어갑니다. 열두배를 뻗습니다. 그래서 포도나무 어떻게 합니까. 포도나무 위에다가 넝쿨을 매거나 받침대를 쭉 십자가를 뽑아 가지고 그 위를 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성경적인 설교가 만약에 그 질료가 이렇게 뻗어 나가는 포도나무라고 한다면, 24m 짜리 포도나무 가지라고 한다면, 1m면 12m가 되니까 12m 포도나무 가지라면 신학은 그것을 받쳐서 세워주는 틀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오늘날 왜 교회가 그렇게 개혁주의가 좋다고 이런 교수님들이 물건너 와서 이렇게 외치고 지나가고 저도 이렇게 기회 있으면 외치고 글을 쓰고 그래도 사람들이 쳐다도 안 보는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공부를 안 하고는 개혁주의 목회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물을 것입니다. 정말 그 공부를 안 하면 개혁주의를 못 합니까. 네, 못합니다. 그러면 공부 못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경건주의 목회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혁주의 목회는 못합니다.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개혁주의라고 하는 그 자체가 잘 들으십시오. 최근에 나오는, 최근에 이미 설득력을 얻고 있는 이론들을 모두 종합해서 내가 정리해드리는 것입니다. 개혁주의는 가깝게는 지금 올드프린스턴의 신학 더 멀게는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 더 멀게는 종교개혁자 더 멀게는 중세까지 더 멀게는 초대교회까지 뻗어 있습니다. 그 신학적인 유산들이 이렇게 면면히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가지고 계승되고 단절되어 오는 가운데 장점들을 채택해서 강력한 체계가 있는 사상을 만들어 낸 것이 이 개혁파입니다. 개혁주의입니다. 그래서 제가 사람들 만날 때마다 하는 이야기 있습니다. 플라톤을 읽으면서는 내가 동물이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감사했고,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으면서는 내가 기독교인인 것에 대해서 한없이 감사했다면 루터와 칼빈을 읽으면서는 내가 가톨릭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에 대해서 무한한 긍지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베자 이후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개신교 교도 가운데 개혁파 교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무한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이 간증을 더 못하는 것에 대해 유감이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최고의 조상들을 두었다고 자부해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사상적인 유산을 가지고 있는 후예가 이 개혁파 교회 교인들이 바로 그러한 후예입니다. 그런데 조상을 몰라봅니다. 조상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왕가에서 태어났는데 그저 머슴집에서 개구쟁이처럼 놀고 그렇게 철없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 안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절대 못합니다.
제가 17년 교회 열린교회를 개척했고 그냥 목회 때문에 힘들고 어려웠던 한 3-4년 정도를 제외하고는 제가 쉬지 않고 공부를 해왔습니다. 우리 부교역자들이 증인입니다. 주일날 8시에 설교하고 집에가서 쓰러져서 주일날 설교하러 못 나와도 월요일날 공부하러는 나왔습니다. 마지막 내리는 결론은 뭐냐 하면 아, 이렇게 개혁주의가 공부하지 않으면 안되는 분야이기 때문에 결국은 개혁주의를 못하게 되는구나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상의 체계를 세우고 그 큰 사상의 얼개를 사람들에게 설교하고 그것을 읽히고 그것을 가르치고 그대로 살게하고 살지 못하는 원인들을 분석하고 그리고 그것들을 살 수 있는 길을 복음을 통해서 그들에게 제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요하게 탐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언약적 의무의 실천입니다. 자, 우리는 소위 이야기 하는 개혁 주의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커다란 전제를 사람들에게 아주 장엄하게 가르칩니다. 그다음에 뭐냐 하면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주님이 모든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예수님이 나를 위해 모두 구속을 해 주셨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에 대한 아주 훌륭한 규범들을 영국 청교도들이 우리들에게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역사상 이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신 약속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언약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하신다라고 하는 사상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이 언약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이게 언약의 편무성입니다. 또 동시에 또 하나가 뭐냐 하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지만 그 은총속에 들어간 우리의 관계가 언약 관계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는 언약의 당사자로서 우리의 언약에 충실하게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주님이 우리같은 사람을 언약의 백성으로 불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뼈 빠지게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언약 사상입니다. 이 둘 사이를 가장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치우치지 않고 걸어갔던 사람들이 영국의 청교도, 청교도 중에서도 존 오웬이나 윌리엄 퍼킨스 같은 복음주의적인 청교도입니다. 그러한 것들을 교회에서 정확하게 가르쳐 주어서 그래서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이 하나님의 그러한 놀라운 언약 안에서 주님의 일방적인 은총으로 구원을 얻은 백성이라는 것, 그리고 언약의 당사자로 자기를 불러 주셨다는 것에 대해서 로얄티를 가지고 살수 있도록 끊임없이 그들을 하나님의 은혜로 붙들어 주어야 되기 때문에 존 오웬 목사님이 목회의 본질을 두 가지로 요약했는데 사람을 회심시키는 것,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회심시키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님이 하시지만 두 번째는 회심한 사람이 그 회심한 은혜를 계속 보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호튼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그리스도인 되기 위한 일회용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을 때만 복음이 아니라 그 후에 견고하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언약관계를 유지하는 그 일에 있어서도 그것을 견인하게 만들어 주는 그 놀라운 감격이, 내가 그래도 목사인데 전도사인데, 그런 도덕주의가 아니라 항상 자기가 누구인가를 십자가를 보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서 그 분의 대속의 은혜를 알고 자기가 죄인인지를 알고 눈물을 흘리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좋아할 수 없습니다. 상품이라는 게 구매자가 있으니까 생산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좋아하는 인간들이 있으니까 신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즘 판도는 어떻게 되느냐. 저는 이렇게 요약을 합니다. 요즘의 신앙의 판도는 신학자들은 다른 하나님을 만듭니다. 목회자들은 다른 구원의 길을 가르치고 신자들은 다른 동기에서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삼자가 연합하여 악을 이루고 있는 상황입니다. 삼자가 협력하여 악을 이룹니다.
여러분들은 전공이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시겠지만 기독교 신학과 철학, 신론 상충부에 올라가면 가관입니다. 가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하면서 결국 하나님을 다른 하나님으로 바꿔 놓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아까 라인홀드 니버가 이야기 했듯이 심판이 없는 하나님입니다. 십자가 없는 예수를 통해서 진노하시지 않는 하나님이 죄 없는 인간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로 그래서 심판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그러한 하나님으로 바꿔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게 사라진 게 뭐냐 하면 여러분, 교회에서 아마 초등학교 다닐 때, 유치부 때 예배에서만 해도 회개하라는 설교를 들어보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완벽하게 사라졌습니다. 목회자가 잡아 먹을 듯이 리팬트 오어르 페르시를 외치는 예배의 광경을 언제 경험했습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던져 질 것이라고 하는 심각한 설교를 전도사들로서 어린 아이들에게 설교를 한적이 있습니까. 혹시 동화처럼 설교하지 않았습니까. 들어본 적은 있습니까. 이제는 회심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이켜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조금 생각을 바꾸셔서 회심하셔야 해. 옛날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지금은 좀 하나님이 태도를 바꿔서 우리를 섬기셔야 하는 시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계속 하나님이 반응이 없으니까 신학자들이 올라가서 신론을 뜯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다 가짜였다. 그래서 새 하나님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 광야에서 만든 우상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하나님을 다른 방식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완전히 다른 the other God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겠습니다. 다 못하지만 결국 이런 모든 것들의 대안은 우리들이 종합적일 수 밖에 없겠지만 현실적으로 예배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예배의 목적이라면 그 목적을 도달하기 위해서는 목적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 목표가 뭐냐 하면 예배 시간에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줘야 합니다. 예배를 드렸으면 하나님을 못 만났으면 원통해서라도 좀 엎드려서 기도를 하고 만났으면 감격해서라도 떠나지 말고 거기에 앉아서 회개를 해야 합니다. 아니, 영화 끝났을 때 벌떡 일어나는 것처럼 후루루룩, 신학교에도 지난 번에 설교를 했더니 예배 시간 채플 시간 5분 전인데 이게 영화관의 영화 상영 5분 전 내지는 민방위 교육 5분 전이지 예배 시간 5분전 아닙니다. 모여든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시끄럽게 떠드는지 마음 속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렇게 가르쳐서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그냥 예배에 참석하는 평신도들이라면 기도를 많이 하시라고 그리고 예배드리기에 예배드리는 정신에 어울리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예배를 드리러 가라. 나 이렇게 잘 살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정말 주님의 은혜로 이렇게 살 수 있었습니다. 다시 은혜를 주십시오 라는 마음으로교회에 가라 그리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주일학교에서라도 설교를 하고 있다면 목숨을 걸어라는 이야기입니다.
일본 바둑의 기복 가운데 토혈국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둑을 두다가 하다가 하다가 지니까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둑돌을 놓고 졌다고 말을 한 다음에 바둑판에 피를 토하고 죽었습니다. 오락을 하다가도 안 되면 이렇게 피를 토하고 죽는데 설교인데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는데 예수를 전하라고 열심히 전했는데 이 인간들이 예수를 안 믿을 때에는 자신에게 찔림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어느 목회자가 그랬습니다. 담임 목사가 설교하는데 정말 꼴불견이더랍니다. 설교하는 담임 목사를 보면서 그랬습니다. 아이고 참 우리 나라에 기적이 참 많다. 저걸 설교라고 하고 밥을 먹고 사는게 기적이구나 자기가 그랬다고 합니다. 본인의 고백입니다. 자기에게 설교할 기회를 주더라는 것입니다. 수요일날. 로이드존스 설교를 다 모아 가지고 밤새도록 편집을 해서 쫙 만들어서 설교를 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반도 설교를 안 했는데 다 자는 것입니다. 그냥 화가 나가지고 다 하지도 않고 주섬주섬 접어서 내려와서 그랬답니다. 사람들 말야 세계적인 설교를 하는데 동네적인 반응도 안 보이고.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하고 내 설교가 이 사람들의 수준보다는 너무 높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정말 아닌 것입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셨잖아. 그런데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셔서 말귀 못알아 듣는 인간에게 못 알아듣는다고 주먹 한방 날리지 않고 설명하고 가르치고 물어보면 답하고 삶으로 보여 주시면서 끈기있게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따라서 당신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가르쳐 주겠습니다. 이번주에 가서 토요일날 보따리 싸가지고 교회에 가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두시까지 기도하고 자. 기도제목은 하나야. 여러 가지 하지 마. 배우자를 주십시오. 그런 것 하지 마. 하나님 앞에 잘 보이면 하나님이 다 주셔.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고 거의 한번도 기도하지 않고도 나 장가 잘 갔어. 그리고 오직 뭐냐 하면 하나님, 내가 정말 정성껏 주님의 은혜로 설교를 준비했는데 담대하게 외치겠습니다. 성령의 감화를 주셔서 오늘 나의 양 떼들에게 예수님 만나 주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엎드려서 기도하고 반드시 오늘 회심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믿고 설교를 합니다. 그리고 안 되면 그 다음주에는 4시까지 기도해. 그리고 나중에 하다가 안 되면 나를 이 강단에서 죽이시든지 회심을 시키시든지 하나님이 나에게 정말 내가 회심의 도구가 될 수 없다면 하나님 나를 이 세상에서 밥 벌레 만드지 마시고 데려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놀라운 임파워링 파워를 막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말했습니다. 회심하지 못한 교인을 위해 눈물 흘릴 수 없는 사람은 누군가 대신 울어줘야 할 불쌍한 영혼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머리로만 하는 개혁신학이 아니라 그 속에 피가, 붉은 피가 묻고 뜨거운 눈물이 믿고 그 다음에는 이마에 흐르는 뜨거운 땀이 묻어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해 보셨습니까. 대부분 우리 후배들 그렇게 기도 안 합니다. 영혼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울어 본 적이 언제 입니까. 예배를 위해서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예배의 은혜가 하나도 없을 때 여기 엎드려서 내가 일주일 동안 산 무엇이 하나님 보시기에 나빴길래 오늘 예배에서 얼굴을 숨기십니까. 이 예배를 죽순 것이 장로님 때문이겠습니까. 여당 원내 대표 때문이겠습니까. 대통령 때문이겠습니까. 4대 강 때문이겠습니까. 천안함 사태 때문이겠습니까. 미국 때문이겠습니까. 누구 때문이겠습니까. 그것도 예배라고 드려놓고 온 교인 자고 방만하게 만들어 놓고 가운 입고 만면의 웃음을 띄면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데 뭐가 감사한 것입니까. 뭐가 도대체 감사한 것입니까. 어떠한 것이 감사한 것입니까.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는데 왜 목회자들이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까. 여기가 무슨 수퍼마켓입니까, 아니면 음식점 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피 묻는 개혁주의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혀의 개혁주의가 아니라 그 속에서 신학교 들어갔을 때 제일 섬뜩한 경험이 그것 이었습니다. 말 많이 듣고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 들었던 칼빈은 심장을 북 뜯어서 손에 든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그림에 표시는 안 했지만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심장 아닙니까. “Cor Meum Tibi Offero Domine, Prompte Et Sincere”나의 이 마음을 주님께 드리나이다 기꺼이 진심으로. 그것 자체가 칼빈의 마음이 어떠한 것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을 물려받아야지, 그런데 그것은 글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으로 체계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 만나고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예수 죽인 것이 바로 나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그 예수 죽인 것을 자기의 몸에 짊어지는 그것을 어떻게 이 지면에다가 글로 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받아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확언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진리와 성령이 휩쓸고 지나가는 예배만 다섯 번만 드려봐. 그러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가지고 와서 설교하면 사람들이 자기 시작합니다.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왜, 그들은 이미 달콤한 신랑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장사꾼이 와서 부르면 그 소리에 속지 않습니다. 늑대의 목소리에 속지 않습니다. 엄마의 양의 목소리를 이미 들은 아이들입니다. 이게 오늘 세미나의 결론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