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14
목 차
살아계신 하나님(시 14:1-3) 31
무지한 자들의 악(시 14:4-5) 34
도우시는 하나님(시 14:6-7) 38
살아계신 하나님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 14:1-3)
무신론의 두 유형
다윗이 ‘하나님이 안 계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항상 만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다윗이 생활하는 행동반경이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있었기 때문에 언약 백성들 속에서 담대하게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어리석은 자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신론입니다.
우리는 무신론자는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진짜 사상이 잘못되어 무신론을 이야기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생각으로는 인정하나 실재적인 삶에 있어서 실천적으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후자는 실천적인 무신론자들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만났던 사람들은 대부분 두 번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머릿속으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재적인 삶에는 적용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삶은 실제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렇게 굽어보시면서 이르기를, ‘지각이 있는 사람이 있나’하고 살펴보시지만, 사람들이 다 이런 사상에 치우쳐서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일단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지각하면 그 다음에는 우리의 모든 생활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을 주시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지성의 변화
제일 먼저, 우리의 지성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자기의 욕심을 따라서 무지무각 하게 아무렇게나 살아갈 때, 자기 욕심을 따라서 무지하게 마구 살아갈 때, 지성이 혼탁해서 어지러워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지성이 아주 명정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올바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자신의 모든 삶 속에서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한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이 각각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자신의 삶 구석구석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공경하게 되면 될수록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더 상세하게 알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면 될수록 마음속에 어제 말씀 드린바와 같은 지식의 기쁨이 샘솟듯 솟아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는 아주 진실한 소원이 생겨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는 힘들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으면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그리스도와 실제적인 연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면 그 연합 속에서 신자는 더더욱 자기는 죽고 주님이 자기 안에 사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해서 은혜의 힘에 이끌리는 삶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삶을 살면서 매일매일 주님과 더불어 복된 삶을 누리게 됩니다.
결론과 적용
시인이 그런 내용들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라는 이 지식의 기반에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해 배울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나면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어떤 때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실까? 어떤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가? 어떤 삶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삶인가?” 이런 것들을 배우고 싶어집니다. 그러니까 모든 삶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유신론 사상이 베이게 됩니다. 그의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온전해질 수밖에 없잖습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자의 삶입니다.
무지한 자들의 악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시 14:4-5)
본문해설
앞 절에서는 악인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성경에서 볼 때 의인이라는 말은 혼자서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본성 자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의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한 사람이 무슨 사상을 가지고 사느냐, 자신의 모든 생각을 어떻게 하나님과 연관 지어 생각하며 살아가느냐, 이것이 그의 모든 삶과 마음에 있어서 관건이 됩니다. 우리가 읽은 4절과 5절에서는 악인이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살아가는 악인의 삶에 사상적 근원이 무엇이고, 실제로 하나님의 존재하고 역사하시는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지, 악인의 특징
제일 먼저, 그들은 무지하다는 것입니다. 무지가 악인의 특징입니다. 그러면 이 무지는 무엇에 대한 무지일까요? 악인이라고 해서 사물의 이치를 알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아님을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 시대에는 악인들이 훨씬 지혜롭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의로운 사람보다 악인들이 훨씬 지혜로워서 자기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악인이 무지하다고 선언하는 이유는, 다른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 때문입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육신의 눈을 가지고 우리의 육신을 보호합니다. 그래서 눈이 밝으면 길을 넘어지지 않고 잘 걸어가고, 색깔과 사물의 크기를 분별하고, 먹어야 될 음식과 먹어서는 안 될 음식을 비교하는 등등의 잘 구별하며 살아갑니다. 이와 똑같이 우리의 영혼도 그런 시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육체의 시력만을 가지고는 안 되고, 영혼의 시력이 있어야 어떤 일들이 자신의 영혼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판단을 내리고 좋은 것과 나쁜 것들, 선한 것과 악한 것들을 구별해낼 수 있습니다. 영혼의 시력은 그가 가지고 있는 지혜에 의해서 판단되어집니다. 지혜의 근원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아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은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많은 빛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런 사람들의 영혼이 모든 사물들을 더욱 명료하고 또렷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그 모든 지혜가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그 앎으로부터 나옵니다.
악, 하나님에 대한 무지
악인들에게는 그러한 지혜와 지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잘 모른다는 것이 바로 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데도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무지는 자신이 선택한 무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바요나 시몬아 복이 있도다. 이것을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시니라” 여러분들이 하나님에 관해서 많이 알게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의지의 선택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에 대해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여러분이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대해서 앎이 없는 것에 대해서 누구에게도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게로 그 책임이 귀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잘 모른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악입니다. 악인의 삶이 어떻습니까?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을 찾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고 하나님의 도움을 열렬히 구하며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그런 생각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없으면 인간은 아주 매우 쓸모없는 존재가 됩니다. 인간의 탁월함은 영혼 자체 때문에 탁월한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불변하는 광명인 진리를 소유하기 때문에 탁월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진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 영혼을 가지고 있어도 거의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가 됩니다. 그 악인이 그런 하나님을 아는 앎이 없으므로 하나님을 부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범사에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지 않는 사람들은 그 앎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앎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면 그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고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찾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심이로다
시인은 5절에서 “저희가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그렇게 무지해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큰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의롭게 사는 사람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의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하나님께 늘 자기의 사정을 아뢰고 부르짖으며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조차 그분의 위대한 행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큰 두려움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는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만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굉장히 두렵고 무서운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바깥에 굉장히 큰 바람이 불고 전깃줄이 떨리면서 ‘쌩’ 하는 소리가 난다고 칩시다. 바람이 전선을 타고 지나가면 그런 소리가 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 소리를 들으며 ‘아, 바람이 많이 부는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큰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이 계시며 모든 일에 당신 자신의 의지와 주권을 보이신다는 사실을 믿고 살면, 실제로 정말 하나님이 어디에서든지 일하시고 역사하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하면서 매 순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부르지도 않고 찾지도 않는 그런 악인의 삶을 살아야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참으로 알고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의지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입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도우시는 하나님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시 14:6-7)
고통 받는 백성들
시인은 악인에게 고통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소망은 바로 악인들이 박해하지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구원해 주신다는 소망입니다. “악인들은 가난한 자들의 경영을 부끄럽게 한다”는 말에서 경영은 가난한 사람들이 고통과 압제가운데 있을 때 어떻게 하든지 거기서 벗어나보려고 몸부림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가난한 자들만의 경험이 아니라 고통 받는 모든 사람들의 경험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나보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고통은 죽음 가까이 있는 것이고 편안함은 생명을 마음껏 누리는 환경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물 중에 고통 속에 들어가는 것을 기뻐하는 사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두 거기에서 벗어나서 생명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 하다못해 벌레 한 마리를 잡아도, 그 미물도 고통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칩니다.
이처럼 가난한 자들도 그렇게 압제받고 고통 받는 환경 속에서 어떡하든지 경영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힘을 써서 어떻게든지 거기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악인은 그것을 부끄럽게 합니다. 악인에게 더 큰 권력이 있기 때문에 가난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시도를 무산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힘이 없는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힘이 있는 사람에게 고통당하는 모습입니다.
피난처가 되시는 여호와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을 혼자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첫 번째로 시인은 “여호와는 저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지혜와 그리고 깊은 경륜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그 높은 지혜와 경륜은 때때로 우리의 상식을 초월합니다. 우리가 더 이상 아무 희망이 없다고 생각될 그 때에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기적과 같이 나타나셔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편을 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를 경외하는 자 곧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십니다. 전쟁이나 큰 환란이 닥쳐도 안전한 지대에 피난한 사람들은 정말 그 안전한 피난처에서 잘 지냅니다.
할머니가 살아생전에 늘 먼저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원망하시면서 6.25때 피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다른 집은 전쟁 기미가 보이자 미리미리 의논을 하고 준비해서 피난하여 편안하게 살았는데, 당신은 지도력이 있는 남편을 못 만나서 전쟁이 터질 때까지도 피난을 안가고 있다가 임박해서 갔는데 공산군이 먼저 와있었다고 했습니다. 횡성 같은 오지 산골 사람들은 전쟁이 났는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워낙 오지라서 공산군이 내려와서 그 마을을 점령할 필요를 못 느끼고 그냥 다른 곳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그런 마을로 오히려 숨어든 사람들은 편안하게 지내고 후일 전쟁이 끝났을 때 안전하게 다시 삶으로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피난처는 그렇게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주를 경외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정말 환난을 당하고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시련들을 만났을 때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때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 삶이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너무나 억울한 일을 만나거나 견디기 힘들 정도로 마음 아픈 일을 만나거나 고난과 시련을 만나거나 사람들에게 소외당할 때나 아니면 심지어는 자기도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을 때, 우리는 피난처이신 하나님께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크신 보호와 인자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31편에서 시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위하여 예비하신 주의 은혜가 어찌 그리 크신 지요” 저희를 모든 구설의 다툼에서 면케 하신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그 피난처에서 숨어있는 동안에 거기서 하나님의 아름다운 성품들을 발견하고 그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거기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늘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환란이 오고 시련이 와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그분께 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모으는 계기가 되고 시련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계기가 됩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님의 사랑 주님의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게 할 마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여호와
두 번째, 하나님께서 이런 놀라운 구원을 시온에서 베푸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 시온은 하나님이 선택한 성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산지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시온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이름은 마른땅, 요새로 썩 좋은 의미는 아니지만 이 시온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곳이란 뜻입니다. 거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리고 구원의 역사가 펼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 시온은 후에 교회를 가리키는 신학적인 개념으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이 그 압제하는 악한 자들로부터 사랑하는 자기의 백성들을 건져내실 때 그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베푸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질서가 있듯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도 정하신 질서를 따라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도가 모인 교회와 관계를 바르게 하시고 그곳을 통하여서 많은 영혼의 유익을 얻으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그리고 놀라운 능력을 우리들이 매 순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구원의 놀라운 능력이 바로 시온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고난과 시련에 넘치는 삶을 살다가 주님을 찾았을 때 그들을 건져주셔서 변화시켜주신 놀라운 일들을 경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교회와의 관계를 새롭게 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그리스도의 몸인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발견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새롭게 된 사람들입니다.
결론과 적용
그런데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그런 크신 경륜 주님의 그 큰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로는 하나님을 찾는다고 부르지만 자신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데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태도나 행실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될 수 없고 시온에 덕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너무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게 되면 지각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는 분별력이 떨어지고 마음에 치밀어 오르는 욕망만 있어서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이가 들고 인생을 살아 철이 들면서 사리를 분별할 줄 알고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알고 관계를 귀하게 생각하는 지각이 있는 사람이 되어가듯이, 우리 성도들도 그렇게 변해가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저절로 지각이 있는 사람이 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해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천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인생에 있어서 교양과 비슷합니다. 젊어서 교양이 없던 사람들이 결국 나이가 들어도 어떤 훈련됨이나 배움이 없이 그대로 천박한 행동을 하면서 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신앙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매순간마다 지각이 있는 신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해야 됩니다. 사리를 온전히 분별하고 신앙의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판단력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시편14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