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15
목 차
하나님을 만날 자(시 15:1-5) 43
하나님을 만날 자
“(다윗의 시)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그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그 벗에게 행악지 아니하며
그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그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영히 요동치 아니하리이다”(시 15:1-5)
주의 장막, 주의 성산
이 시는 다윗의 시로서 교훈적인 시입니다. 1절에서 여호와의 장막과 성산을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인가” 성소나 성전을 의미하는 두 단어가 나오는데, 앞에서는 장막이라고 나오고 뒤에서는 성산이라고 나옵니다. 성산은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분지입니다. 그리고 장막은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다윗시대 때까지는 성전이 아직 지어지지 않았고 솔로몬에 비로소 건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는 성막의 시대였고 성막은 저 멀리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때부터 이스라엘과 함께 이동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상당히 긴 세월동안 성막이 가나안 땅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다가 후일에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지어지게 되었습니다.
어쨌든,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고유한 장소를 가리키고, 성산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고유한 장소로 예루살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산지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다윗의 시를 읽을 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생각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멈춰라”고 명하시면 먼저 장막이 펼쳐지고 장막을 중심으로 열두지파들이 진을 쳤습니다. 장막 위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징조가 아주 선명하게 나타났습니다. 밤에는 불기둥, 낮에는 구름기둥이 나타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주의 장막에 유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산은, 하나님과의 장엄한 만남이 이루어졌던 시내 산을 이를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다음에 제일 먼저 도착한 시나이 반도에서 모세가 율법을 받기위해 시내 산으로 올라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당히 긴 기간, 약 1년 가까이 머물면서 애굽에서 묵었던 구습들을 다 떨쳐 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공동체적인 놀라운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곳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주의 장막에 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산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산에 유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있는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대면하고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최고의 축복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최고의 행복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의 위엄과 영광 앞에서 악인들은 두려워하고 떨지만, 언약의 백성들은 임재의 영광 앞에서 즐거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행복해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있는 장막에 그것도 잠시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유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던 장막은 한 18평정도 되는 작은 막이었습니다. 장막들에서 번제단과 모든 것들을 지나서 더 들어가면, 성소가 나오고 더 들어가면 6평정도의 방이 나오는데, 그것이 지성소입니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 1년에 딱 한 번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성소에서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보는 가운데 죽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의 근원이고 영광이지만,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심판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시인이 여호와의 장막에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사람이 아니라, 거기에 계속 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여호와의 성산에 올라 하나님의 임재와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주의 장막에 거할 자
2절서부터 끝까지는 장막에 거할 자는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런 삶이 무엇인지를 하나하나 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2절서부터 마지막 절까지 나오는 것은 구체적인 삶인데 이웃을 향하여 신의를 지키는 삶입니다. 신의는 이웃 사랑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일삼으며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혀로 참소치 아니하고 벗에게 행악치 아니하며 이웃을 훼방치 아니하며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하며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치 아니하며 변리로 대금치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치 아니하는 자니” 그 삶속에서 아주 구체적으로 일어나는 일인데, 이것을 뒤집으면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웃에게 선을 베풀기만 하면 사람 이런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과 마주할 수 있습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고 ‘이웃에게 베푸는 선의적인 삶’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자연스런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뿌리라고 한다면, 이웃을 향한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은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 마당에 단풍나무가 있습니다. 가을이 되면 은행이 막 떨어집니다. 은행이 좀 더 익어야 되는데, 바람이 불고 비가 와서 떨어진 은행 알들을 정성껏 실로 나무에 감쪽같이 매달았다고 해서 단풍나무가 은행나무가 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은행나무와 단풍나무는 본질 자체가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항구적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매달린 은행 열매들이 시들어갑니다. 은행나무에서처럼 진액을 먹을 수 없으니까 은행이 익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는 단풍나무처럼 키도 비슷해서 잘 구별이 안 되더라도, 그 나무가 은행나무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은행 열매를 맺습니다.
뷔페에 가면 무순 샐러드가 있습니다. 무 새싹을 하나만 들어서 앞니로 살살 씹어서 맛을 보십시오. 그러면 매운 무를 잘라서 앞부분은 맛있고 뒤는 매운 것처럼, 무순의 맛도 비슷하게 납니다. 연한 순으로 자란 것을 보면서 무를 상상할 수 없지만 동일 본질의 것이기 때문에 비슷한 맛이 납니다. 시인이 이러이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성산에 오르고 주의 장막에 거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은, 그런 행함이 있다고 해서 저절로 그렇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속에서 이웃을 향한 인자한 마음이 생겨나는데, 그렇게 만드는 힘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본성을 바꾸는 아주 위대하고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하는 방향에 내가 순종하고, 그러한 순종의 반복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본성이 변화되어 갑니다. 이웃을 향해 모자랐던 사람이 이웃을 향해 정말 온유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어가고 변화되어 가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주님을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실하심을 힘입어서 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고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변화되어 가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나 만나주실 것 같아도,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들의 마음에 찾아오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그 은혜를 소중하게 사용해서 자기 자신이 계속 바뀌는 사람, 바로 그 사람 곁에 주님께서 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삶과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이 분리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시편15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