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에 관하여..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잠언 30장 25절)
녹취자: 이현정
잠언이 순서대로 쓰여진 것은 아니지만 이 잠언의 마지막 편지를 할 때 끝날 때 쯤에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기록을 해서 농축된 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 24절부터 마지막절 까지 동물이 두 종류가 나오는데 힘이 없는 동물 넷과 힘이 있는 동물이나 인물 넷이 등장을 합니다. 그리고 각각 여덟가지의 동물과 혹은 인물은 주되게 표현하려고 하는 한 가지씩의 강력한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부각시키므로 우리에게 어떻게 지혜롭고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혜롭기만 하고 힘이 없으면 그 지혜는 그리 뛰어나게 빛나지 못합니다. 지혜로울 뿐만 아니라 강하여야 합니다. 이 강한 것은 힘으로도 강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람이라는 정신력에 있어서도 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너희는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자매들보고도 남자 같아지라고 그렇게 요구했던 겁니다.
힘이 없는 동물이 넷이 등장을 하는데 개미 사반 메뚜기 도마뱀입니다. 개미는 부지런함을 사반은 지혜로움을 메뚜기는 자발성을 도마뱀은 위기에 대응하는 임기응변의 대응성을 대표로 하고 있습니다. 힘이 있는 동물이나 인물은 사자, 사냥개, 수염소, 왕인데 사자는 용맹에 있어서, 사냥개는 집착에 있어서 수염소는 고집에 있어서 왕은 권세에 있어서 강한 동물이나 혹은 인물인 것입니다. 기회 있으면 이것을 차례대로 설교했으면 좋겠지만 오늘은 개미만 보겠습니다.
오늘 개미에 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작고 힘이 없는 종류다. 라고 말합니다. 아다시피 개미는 아주 작은 곤충입니다. 그래서 차마 동물이라고 부르기에도 미안할 정도로 아주 작은 개미 눈을 부릅뜨고 숲을 찾아보지 않으면 볼 수도 없을 정도의 작은 개미이고 사람이 밟으면 밟혀서 무수히 죽는 그런 힘이 아주 작은 곤충에 불과합니다. 또 이 곤충은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곤충은 처음부터 힘으로 살도록 창조된 동물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사자나 호랑이가 밀림의 왕 일거라 생각하지마는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짐승중의 최고의 제왕은 누구일까? 코끼리입니다. 동물 전문가들에 의하면 코끼리와 사자 혹은 호랑이가 만나면 호랑이와 사자는 감히 덤빌 엄두도 못 내고 코끼리는 그럼 사자나 호랑이가 있는 것 같이 생각도 안하고 행동한답니다. 사자나 호랑이는 기껏해야 400kg, 아주 커봐야 500kg 인데 코끼리는 최하 5t 그러니까 만약에 가서 발을 문다고 하더라도 이건 벽을 깨무는 격이지 그러고 까불다가 발에 밟히면 뼈도 안남을 정도로 으스러지니까 그 덩치 때문에 감히 덤비지를 못하고 이 코끼리는 머리를 흔들면 내리치는 이 코의 힘이 어마어마 합니다. 여러분들이 다큐멘터리나 영화 같은데서 코끼리가 그 큰 통나무를 코로 드는 것을 본적 있을 것입니다 그 힘이 어느정도 겠습니까. 그걸 만약에 휘둘러서 이 사자 머리통에 한방 맞는다면 뇌진탕으로 그냥 갑니다. 그리고 호랑이 등뼈를 내리치면 곧바로 디스크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게임이 안 되는 겁니다. 그에 비하며 이 개미는 정반대의 곤충이 아닙니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동물 가운데 얕잡아 보일만한 존재의 수에도 안 들어갈 만한 개미인데 이 개미가 뛰어난 것은 그 크기와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혜에 있다고 오늘 지혜자는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지혜가 무슨 지혜냐..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개미의 지혜를 둘로 가르쳐주는데 하나는 이랄 수 있는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동물이다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먹을 것을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와 .. (예화) 여러분 우리 어렸을 때 묵상하다가 생각이 났는데 그 초등학교 1학년이나 2학년 때 쯤 그 국어책인가 어느책에 보면은 개미와 베짱이 얘기가 나옵니다. 여름에 푸른 풀이 있고 그리고 바람이 부는 풍경이 그려지고 거기서 베짱이는 악기를 타고 있고 개미는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수 많은 개미들이 땀을 뻘뻘흘리면서 일ㅇ할 때 베짱이는 그늘아래서 이 악가나 가지고 놀면서 개미를 비웃었습니다. 구체적으로 그 묘사가 생각나진 않지만은 ‘저것들은 인생의 묘미를 몰라. 죽어라고 일하면 인생의 무슨 보람이 있어 우리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것은 자기의 생을 즐길줄 알아야지~ 개미 니들이 음악을 알아?' 예수를 알아~ 하면서 연주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개미들은 그 모든 것들을 모아서 이제 겨울이 와서 지내는데 이 베짱이는 겨울에 목도리 하나 두루고 악기는 어디있는지 팽개치고 지팡이를 집고 그리고 개미의 문을 두드리던 그림이 생각이 나죠? 바로 개미는 그렇게 일 할 수 있는 때를 안다는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이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나면 영원에 대해서 눈을 뜬다고 가르쳐 줍니다. 영혼의 대에서 눈을 뜰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참 이상한 것이 반대편 것을 보면 지금 내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에 반대편을 보면 지금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이 참답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무언지 궁금한 사람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아무리 관찰해도 생명이 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죽은 사람의 장례 자리에 가게 되면 생명이 무엇이라는 것이 또렷합니다. 밝음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들이 전깃불을 켜보고 대낮에 걸어보고 태양을 직접 바라봐도 밝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두움을 보게 되면 밝음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꼭같은 이치로 시간이 무엇일까 시간 속에서 살면서는 시간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 시간이 무엇입니까. 시간이 무엇입니까?’.나는 이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해 죽을지경이었습니다.‘ 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침내 깨닫는 것은 영원을 보게 되면 시간의 의미가 드러나게 됩니다. 참 재밌는게 영원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니 영원을 발견한 것은 시간을 하찮게 여길것 같은데 영원을 발견한 사람만이 시간의 의미를 알고 시간 속에서 성실하게 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원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스런 영원이시여 진리이신 영원이시여 진리의 빛이요 사랑이시오 영원이시며 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우리에게 세월을 아끼라고 말합니다. 아낀다는 것이 어떤것입니까. 늘 달달달달 떨면서 그것을 잃어버릴까바 안타까워 하면서 간직하는 것이 아끼는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마음으로 세월을 아끼라는 것입니다. 정말 살같이 빨리 지납니다. 얼마전에 박기천 목사님 오셨죠? 그 목사님이 지금 여든셋이신데 제가 그 교회에 전도사로 갔을 때를 계산을 해보니까 목사님 연세가 불과 지금 나보다 7살 정도 많으신 나이였습니다. 그 때 예순한살쯤 되셨습니다. 얼마나 건강하셨는데 하루에 내수동 동네를 한 시간씩 뛰시고 집 뒤뜰에 있는 평행봉으로 하루에 160개씩 기계 체조를 하시고 그리고 이틀에 한 번씩 탁구장에 가셔서 핫팬츠 입으시고 그리고 스핀 없이 스트레이트로 두시간씩 탁구를 치시던 건강한 분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스테이크 8인분을 드시던 분이었습니다. 당신은 미국에서 5~6년 있는 동안에 한 번도 김치 생각이 안 났다는 분입니다. 그리고 방학 때는 돌짐을 지고 아르바이틑ㄹ 해서 학교다니는 기간중에 자기 학비와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서 부치고 그거 가지고 학교를 다니고 방학하면 다시 돌짐을 지러 돌산에 가셨다는 겁니다. 그렇게 건강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월이 살 같이 빠르게 흐르지 않습니까? 다른 건 다 빌려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빌려 쓸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시간입니다. 시간을 빌려서 쓸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일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지만 일 할 수 없는 날이 옵니다. 두 가지 방식으로 오는데 첫째는 기회를 상실함으로 일 할 수 없는 날이 옵니다. 박 목사님이 어느 날 저한테 개인적인 이야기를 참 많이 하셨습니다. 이게 은퇴하시기 전까지 교역자를 쓸라면 항상 저한테 전화를 걸어서 아무개를 쓸려하는데 교역자로 괜찮습니까? 하고 물어보실 정도였습니다. 근데 저한테 개인적으로 그러시는 거예요. 교인들이 수련회를 갔는데 기도회인가 갔는데 어느 목사님이 나오셔서 특송을 하시는데 목사님이 특송이 하는 것도 이상하지만 한번을 했는데 구지 그 많은 성도들이 있는데 하번 더 하겠다고 그래서 별로 그렇게 좋은 음성도 아닌 특송을 우리들이 두 번이나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씀이 “전도사님 나는 은퇴하고 저러지 말아야 되는데.” “왜요 목사님” “저분이 현직에 있을 때 고결하신 분이었습니다. 누구하나에게 찾아가서 개기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저분이 글쎄 나보고 내수동교회에서 설교 좀 해달라고 그럽디다. 충격을 받았고 오늘 안 된다고 하니까 그럼 찬송이라도 부르게 해달라고 그래서 찬송 부를 시간을 드렸더니 두곡을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참 그러지 말아야 되는데...”
심지어는 어느 목사님이 친구 목사님께 전화를 해서 나 너네 교회에서 설교 좀 하게 해줘 그러면서 우시더랍니다. 그러면서 보태는 말이 사례금 안 받을게 그러면서 우시더랍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러겠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주셔서 해나갈 때에는 괴롭기도 하고 그저 어느 순간에는 여기서 훌쩍 떠나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세월이 지나고 나면 하나님 거기 있게 해달라고 애를 써도 안됩니다.
교회 개척 초창기에 제가 가르치던 학교에 학생 하나가 영어 선생님을 하던 아주 얼굴도 예쁘고 단정하고 나름대로 말씀에 은혜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 제 강의를 경청을 하고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때 마침 개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그렇지 말고 자매가 신학교도 마치고 했으니까 개척교회 와서 같이 봉사하자. 그러다가 교회가 커지면 전도사를 해다오“ 하고 초청을 했습니다. 근데 구지 뿌리치고 이민을 가겠다고 해서 말리다가 그냥 둬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 7~8년 흐른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서야 저를 만나서 가서 썩 재미없었습니다. 그러드니 뭘 하나 그랬더니 말씀도 받지 못해서 갈급하고 교회에서 뭘 봉사를 하는데 그냥 교회에는 싸움만 하고 너무 힘들고 곤고합니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뭐라 그랬습니까..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왕 이렇게 된것 어떡합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제가 가면 목사님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이랬습니다. 싫습니다. 열린교회가 무슨 경로당입니까? 딱 잘라서 이야기 했습니다. 깜짝 놀라면서 목사님 그렇게 상처받은 이야기를.. 옛날에 내가 더 상처 받았는데..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당신 나이 몇 살인데 내가 뭐 열린교회에서 여전도사들 모아놓고 경로당할일 있수? 됐습니다. 기회가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도 교회를 맡았다가 실패한 어느 목사가 나한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목사님 그게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기회인줄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목사가 목회를 못하고 노동판을 전전하면서 그렇게 생활하는 것을 봤습니다. 항상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래서 우리는 징검다리 신앙이 필요합니다.
(찬양)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주님 가신 십자가의 길 아무것도 모르지만 주님이 여기에 날 세워주셨으니 오늘 여기에 있는 이 날 들이 미래의 날들과 어떻게 연결될지는 하나님이 미래라는 커튼으로 감추워 놓으셨지만 하나님이 나를 불러 여기에 세우신 것이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앞길은 아무것도 안 보여도 주님을 꼭 붙들고 가는 겁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상실하게 하시므로 일 할 수 없는 날이 이르게 하십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건강을 앗아가셔서 때로는 생명을 앗아가셔서 우리로 하여금 일 할수 업는 날이 오게 하십니다. 저는 어떻게 보면 감사해야 되겠지만 사십대 초반까지는 정말 혈기 충천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아프다는 걸 이해를 못했고 그건 대부분 정신력에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내가 아파보니까. 그런 것 만은 아니구나 . 많이 꺾어졌습니다. 어떤 목사님 간증을 하면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성격이 그렇게 칼 같았는데 당신이 아프고 나서는 두 가지가 바뀌었는데 하나는 교역자 뽑을 때 건강 진단표 붙이는 것 하고 두 번째는 아픈 교인들에 대해서 아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목회 속에서 비쳐지더라는 겁니다.
건강을 상실하며 일 할 수 없는 날이 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우리의 삶의 의지를 누군가에게 넘겨주게 되어있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개미의 두 번째 지혜가 나오는데 부지런히 일하는 것입니다. 개미의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먹을 양식을 모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린 시절에 개미가 자기 몸집보다도 열배는 더 큰 밥알 하나를 물고 가다가 쓰러지고 물고 가다가 쓰러지고, 그러다가 동료가 도와주고 하면서 결국은 끌고 개미집으로 들어가는 광경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곤고한 날이 꼭 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한편으로는 밖으로 잘 일해야 하고 한편으로는 안으로 잘 일해야 합니다. 밖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고 미래에 잘할 생각으로 오늘 게을리 하지 말고 충성스럽게 일해야 합니다. 그리고 안으로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위해서 많이 일해야 합니다.
엊그제 제가 총신대학교를가서 학생들한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들이 매일 매일 조금씩 애를 쓰고 사는 것이 하찮아 보여도 이것이 세월이 흘러가서 쌓이면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현저한 격차를 보이는 겁니다. 그래서 전철에서 단어 몇 개 적어서 외우는 거 우습게 보이지만 5년만 계속하면 전철타면서 끄덕거리며 졸고 가는 사람과 단어장을 붙들고 외우던 사람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현저한 격차가 벌어집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고 평온할 때 하나님 앞에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언제나 찬란한 진리의 빛 아래서 사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지체들을 주셔서 사랑받으며 살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은 보고와 같은 곳에 있어도 언제가는 우리를 망망한 대해에 보내실 때가 있고 지금은 빛 가운데 있어도 때로는 곤고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그들이 빛으로 나오지 않을 때 위험을 무릎 쓰고 우리가 어둠속으로 가야할 때도 있는 것이죠. 이런 모든 날들이 우리에게 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러면서 충성스럽게 부지런히 일하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될 때 우리의 영혼과 마음에도 우리의 삶에도 이렇게 곤고한 날에 대비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쌓입니다.
이런 걸 생각해 보십시오 지식을 계속 쌓으면 어려운 날이 올 때에 그것을 잘 사용하고 자기를 비추어 남을 비출 수 있습니다. 또 사는 날 동안에 어떤 사람이 위기에 닥쳤을 때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바보 같은 사람들은 세상이 무정하다고 그리고 세상이 야비하다고 말합니다. 마치 자기가 어려움을 당했기 때문에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는 것 처럼 세상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일 할 수 있을 때 일하지 않고 양식을 모을 수 있을 때 양식을 모으지 않는 개미가 추운 겨울 날에는 굶주리는 것처럼 여러분들이 남을 돕고 선을 베풀만한 날에 여러분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려움을 만나는 그때에 여러분들은 외톨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평온하고 큰 시련이 없는 때에는 나의 남는 정신과 마음, 환란이 없는 때에는 내가 남는 물질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도울 일 할 기회에 그때 사랑으로 많은 사람에게 베풀고 나누어 주고 섬기고 내게 남은 정신력으로 그를 배려하고 그를 위해 수고하고 격려하고 그에게 마음을 써주고 이럴 때 항상 그러한 날이 계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도 추운 겨울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이웃은 결코 홀로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도록 버려두시지 않습니다. 인복이 많은 사람은 사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람 때문에 인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정확한 이치가 인간관계 속에서도 나타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직은 일 때 개미처럼 움직이고 양식을 모을 수 있는 이때 여러분들이 이런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