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5:14)
녹취자:장형주
오늘 성경에 이 말씀은 오늘날 같은 시대에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구하여야 할 가치가 있는 말씀입니다. 모든 말씀이 그러하지만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시는 바와 같이 오늘날 기독교의 평판이 매우 나쁘고 심지어는 기독교에 대한 강한 사회적인 반감까지 형성되어있는 이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우리가 읽은 본문이 놓여있는 산상수훈을 5장 3절부터 시작하셨고 그리고 7장까지 계속되는 것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일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는 팔복의 말씀으로 시작을 하시고 이 팔복이 끝난 시점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소금이니 너희는 빛이니’ 라는 이 유명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라고 할 때 이 너희는 예수님이 부르신 12제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2명의 제자들이 있기 전 제자들 말고도 4장 문맥에서 보면 그들이 각색 병 들린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고침을 받았고 그들이 함께 팔복산에 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 구절을 읽으면서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하는 이 현재 직설법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은 우리 모두 빛이 되십시다. 빛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십시다.’라고 하는 의미는 아닌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말씀하셨습니다. 그중에는 각색 병 들린 사람들, 그래서 예수님께 고침을 받은 사람들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가운데 이 구절만큼 오해된 성경구절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희는 세상에 빛이라고 한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느냐하면 ‘우리가 빛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기를 원하신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을 때 이 빛은 헬라어 성경으로 보면 (?) ‘그 세상의 그 빛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에서 정관사가 붙은 것은 구지 의미를 따지자면 성경에 나온 빛에 나온 많은 용례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을 비유하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이미 풍부하게 나오는 비유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을 당시 유대인들이 오해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빛은 크게 세 가지 용례로 사용되는데 첫째는 물리적인 빛입니다. 그냥 빛입니다. 두 번째는 신학적인 빛입니다. 진리를 가리킵니다. 세 번째는 윤리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데 이럴 경우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올바르고 의로운 행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공평과 정직, 자비와 긍휼을 행하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윤리적인 행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모든 의미를 가지고 있는 빛이 오늘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여기에 빛을 비추는 것은 누구도 우리보고 저 붉은 불빛을 보라고 저기에 등을 달아놓은 것이 아닙니다. 등불을 저기에 특별히 등을 달아놓은 것은 이 빛이 설교자인 강대에 있는 설교자를 비추어 여러분이 시력이 편안한 상태에서 설교에 집중할 수 위해서 등을 달아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들 자신을 주목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참 빛이 예수 그리스도, 삼위 일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세상 모든 인류에게 보여주시려고 하는 그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예수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빛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불변하는 빛이 있고 하나는 가변 하는 빛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속에서 지워질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빛이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침체하고 심지어는 타락하였다고 할지라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속에 있는 확신,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이 세상의 모든 선악을 판단하시고 그리고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다 라고 하는 이런 확신들은 어떤 경우에도 사라지지 않는 불변의 빛입니다. 그러나 가변적인 빛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알고 올바르게 사랑하고 올바르게 살면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나지만 반대가 되면 잘 드러나지 않는 마치 그 빛이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떻게 행하느냐에 의해서 이웃에 드러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그런 종류의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이런 빛이 모두 일반 도덕적인 의미에서만 해석이 됩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인이 빛을 비춘다는 이야기는 이 세상 사람들과 경쟁에서 더 많이 이웃을 구제하고 착한 행동을 해서 안 믿는 사람보다도 더 뛰어난 일을 많이 하게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빛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이 본문이 가르치고자 하는 참된 의미가 아닙니다.
(예화) 여러분은 18세기의 전설적인 설교자인 조지 휫필드와 함께 요한 웨슬레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감리교를 창시한 인물이었고 대단한 설교의 능력을 소유했던 매우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복음 사역을 위해 애쓰던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아메리카 선교의 위대한 꿈을 꾸었고 그리고 그 일을 위해서 아메리카를 왕래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바다 한 가운데서 커다란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배는 뒤집힐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웨슬레는 두려움 속에 떨었고 기도를 해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고 큰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그 때 흔들리는 배 한 구석에서 일당의 교인들이 모여서 조용히 찬송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요동하지 않는 침착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도하고 있던 그 사람들은 모라비안 교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그 행동을 보면서 웨슬레는 처음으로 자기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하나님의 구원받은 자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이 요한 웨슬레가 못하는 구제를 했거나 아니면 무슨 특별한 연설로 웨슬레에게 감동을 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쩌면 이 모라비안 교도들은 그 폭풍 속에서 하나님께 조용히 기도하며 찬송을 올리는 가운데 웨슬레 같은 사람은 안중에도 없었을지 모릅니다. 무엇인가 그들에게는 웨슬레 자신에게는 없는 담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신뢰, 그의 선하심과 그분의 선하심께 자신의 인생의 생사를 모두 의탁하는 결단과 용기 그 어떤 것들을 이 웨슬레는 침묵 속에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외치는 자가 없었으나 들을 수 있었고 보여주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회피할 수 없는 어떤 메시지들이 웨슬레의 마음속에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이 시대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불우이웃을 돕지 말자거나 혹은 구제하지 말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서 CBS를 비롯한 기독교 언론 매체들이 보여주어야 할 것은 사회의 정의의 구현과 함께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마음을 보여줌에 있어서 단순히 구제를 위한 모금을 방송하는 것 같은 그런 것이 최선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돕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이 세상에 비추고자 하는 그 빛은 그 이상의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힘에 속하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힘, 역사를 이어온 이 기독교의 위대한 힘의 비결이 바로 이 두 기둥에 있습니다. 하나는 사상의 힘이고 또 하나는 윤리의 힘입니다. 이것이 기독교를 버텨온 두 개의 커다란 기둥입니다. 사상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성경의 진리가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지혜라고 하는 그런 사상의 체계와 확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깨달아 아는 일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파편적인 진리를 깨달아 아는 것만으로는 사상의 힘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상의 힘은 성경의 진리를 기둥으로 삼아 벽채와 지붕을 형성하고 창틀을 형성하면서 건물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이렇게 성경의 아주 중요한 진리들의 기둥위에 이것들을 학문적으로 탐구하고 지식들이 파편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전체적인 체계를 이루면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상을 전수받고 이 사상을 고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화) 40년씩 미전향 장기수로 복역하던 사람들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반성문 한 장만 쓰면 이미 오래전에 복역이 끝날 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쓰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전향 장기수에게 인터뷰를 했습니다. “한 장만 쓰면 나올 텐데 이 자유가 그립지도 않느냐? 그 긴 세월을 수십 년을 살면서 왜 이것을 안 쓰냐?” 그랬더니 미전향 장기수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사상으로는 그 한 장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이 한 줄을 쓰는 것은 이제 것 살아온 나의 모든 삶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흠모해야할 힘이 바로 그런 힘입니다. 작은 한 줄이라도 혹은 한 마디의 말이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배치되는 것을 쓸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내 사상에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라고 하는 이러한 체계들이 그리스도인 안에 특히 지도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 속에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이기 때문에 세상 적으로 아주 탁월한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개중에는 여러분이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는 VVVIP들입니다. 사석에서 흉금을 터놓고 대화를 나눠보면 전 깜짝 놀랍니다. 사회에서 하는 자기직업에 대한 지식은 너무 너무 탁월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높은 지위에 까지 올랐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지식은 한심하고 실망스러울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 탁월한 지성인들이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해도 “목사님,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는 이 부르심을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기독교인이 된 순간부터 그는 공부하기 위해서 태어난 운명을 지닌 것입니다. 제가 우리교회 교리반에서 늘 되 뇌는 말이 있습니다. Studeo ergo sum 나는 공부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왜? 이 세상은 치열하게 탐구하면서 이 시대의 정신을 이루어 가고 기독교의 가치관에 치열하게 도전합니다. 이게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 방위적인 도전입니다. 그런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공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특히 지도자들로서는 매우 무책임한 일입니다. 기독교 정신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이 큰 입을 가지고 수많은 백성들에게 쏟아 내는 것들을 정말 위험한 것들입니다. 기독교의 힘은 이 위대한 사상의 힘입니다. 이 사상이 요동치고 이 사상이 위대한 파괴력을 발휘할 때 공산주의를 이기고 심지어는 자본주의의 폐해를 이기고 심지어는 전체주의를 극복하고 그러면서 기독교의 역사를 이루어 왔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철저하게 진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사람들이 되고 기독교 사상을 연구하고 탐구하고 그래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를 빌어서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기독교 방송국인 CBS가 많은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는 인기 프로그램만 방송하지 말고 소수의 사람이 듣더라도 오피니언 리더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 기독교적인 위대한 지성에 눈을 뜨고 이 시대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느끼게 만들 수 있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화)여러분 방송국은 아닙니다. 어느 기독교 방송국이 있는데 거기에서 기독교에 대해서 계속해서 무엇인가 강연도 나오고 그렇습니다. 무교인 우리 은사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 분은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 목사 나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어느 어느 방송에 나온 기독교에 관한 포교는 정말 아니더라. 나는 불신자로서 그런 방송은 기독교 포교에 절대적으로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방식을 택하도록 권고를 하거라.”
예수를 믿으면 잘 살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공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 시대의 정신이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것을 사상으로 다 분해에서 그래서 참된 진리가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저력과 힘들이 기독교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의 사람들이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은 중차대한 사명을 가지고 계십니다. 바쁘게 6개월 동안을 사셨겠죠?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기독교 서적을 금년 6월까지 몇 권이나 읽으셨는지 한번 깊이 반성해보십시오. 여러분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격려하는 것입니다. 말만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이 책 한권씩을 오늘 선물로 드리고 가겠습니다. 이게 오늘 설교내용의 핵심입니다. 별로 아멘도 안하십니다. 박수는 치실 것 없습니다.
두 번째 힘은 윤리의 힘입니다. 이런 강한 윤리의 힘, 이게 기독교의 힘줄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부패한 정치인들이 정말 교인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패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서 현대 사회를 부패시키고 있습니다. 신우회를 만드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들이 딸깍발이의 정신을 가지고 고고하게 사는 것입니다. 타협 없이.
(예화) 저희 교회에도 제법 방송에 접속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방송장비를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방송 업자를 불러서 납품을 받았습니다. 납품이 끝난 다음에 우리 직원에게 봉투를 내밀었습니다. ‘이게 뭡니까?’ ‘5%입니다.’ 상당한 돈이었겠지요. ‘이게 뭡니까?’ ‘리베이트입니다. 다음에도 이용해주십시오.’ ‘우리교회는 이런 것 하지 않습니다.’ ‘무슨 소리십니까? 무슨 신학대학교, 서울에 있는 강남에 무슨 교회, 무슨 교회, 무슨 교회. 그 사람들은 우리에게 몇 %나 주겠냐고 먼저 내고를 하고 거래를 성사시킵니다.’ 그래서 우리 직원이 ‘우리 교회는 이런 것 하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납품이나 잘 하십시오.’
이 불신자들이 이러한 교회의 행태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갖겠습니까? 이미 이 세상은 기독교에 대한 반감으로 꽉 차있기 때문에 도가니를 비롯한 이런 영화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되는데 그럴수록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명징한 삶을 살아야 되는데 그렇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깊이 회개하고 돌이켜 서야 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하는 신 앞에서의 엄숙한 선언을 내포하는 종교의 원리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인류가 만들어 낸 하찮은 종교라고 할지라도 내키는 대로 살아도 좋다고 하는 종교는 이 세계에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항상 거기에는 희생과 자기분투와 포기가 동반됩니다. 그 종교들 가운데 비교되지 않는 최고의 종교인 기독교는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겠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상과 윤리 두 가지가 분명히 중요한 것인데도 이렇게 살지 못하는 오늘날의 현실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사상과 윤리의 기둥 두 사이를 이어주는 또 하나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은혜의 비밀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은혜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어떤 삶을 살게끔 만들어 주는 큰 능력이고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교회가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충만한 은혜의 비밀을 가진 단체가 되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위해서 헌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