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17
목 차
시험하시는 하나님(시 17:1-3) 65
하나님을 경험하려면(시 17:4-7) 69
지키시는 하나님(시 17:8-13) 72
세상 사람과 성도(시 17:13-15) 76
시험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정직함을 들으소서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않은 입술에서 나오는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나의 판단을 주 앞에서 내시며 주의 눈은 공평함을 살피소서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 하시며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으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치 아니하리이다”(시 17:1-3)
계시가 점차로 증가함
탄원시들을 읽노라면 시인들이 자기에 대해서 무엇인가 과장하고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께서 나의 흠을 찾으시려고 하셨는데 못 찾으셨습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는 대목입니다. 그렇지만 비록 다윗이 지금으로부터 약 3천 년 전 사람이어서, 복음의 계시의 면에 있어서는 오늘날 우리처럼 풍부한 것을 못 누리던 시대에 살았습니다. 역사의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의 계시들이 점점 더 증가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세상에 죄가 유입된 다음부터 하나님을 향한 더 간절한 의존의 마음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더 절실하게 경험하게 된 것도 어떻게 보면 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율법의 시대에서 복음의 시대로 넘어 오면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도 풍족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품과 복음의 계시에 대해서 더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시인들의 경험을 존중하면서 이해할 수 있고 부분적으로는 그 만큼의 계시의 빛 아래서 그런 반응을 보일 수도 있었겠구나 하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짐
시인은 제일 첫 절에서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 진실해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모든 것보다도 뛰어난 것은 진실입니다. 진실함이 없는 기도는 하나님께는 의미가 없습니다. 진실함이 없는데서 비롯되는 기도, 진실함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헌신, 진실함이 없는데서 생겨나는 모든 노력은 하나님을 향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주 크고 위대한 능력보다도 더 뛰어난 가치가 진실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앞에 올바르게 살아온 진실한 죄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시고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물론 우리가 항상 올바르게 사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진실한 사람은 항상 반성을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진실은 진리를 발견하고 거기에 자기의 삶을 합치시킬 때에 생겨나게 됩니다. 자기가 상당히 올바르게 살아왔다고 자부할지라도 먼저는 진리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다음으로는 자기의 삶을 합치시키려는 노력이 없으면 진실은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자기가 올바르게 살아오지 못했을지라도 진리를 발견하고 참회하고 그에 부합하려고 애쓰는 노력이 있다면 진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 중에서 진실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있고, 비록 죄인이라도 진실에 매우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현재적으로 마음이 상하고 통회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까이 하십니다. 물론 그들이 과거에 죄를 지었다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 진리를 발견하고 거기에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고자 갈망하며 진실은 찾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덕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을 안 하면서 살아가는 주변의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생명의 역사, 그리고 세상을 살아가라 자원이 부족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그 탁월한 은총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덕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들로 가까이 하십니다. 그것이 능력보다 더 귀합니다.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비록 열심히 일해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증거가 어디 나옵니까? 마태복음 7장에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것이 아니라”라고 했습니다. “내가 주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라고 자랑하는 이들을 예수님이 모른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이 생명은 진실을 가진 사람들한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이 능력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그분이 보시기에 합당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시험하시는 하나님
두 번째는 시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 하시고 밤에 나를 권고하시며 나를 감찰하시사” 하나님은 끊임없이 권고하시고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시험한다는 것은 착각을 일으키기 쉬운 어떤 사물의 본질을 본래 그대로 드러내서 제대로 찾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르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삶이나 태도, 그리고 마음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나 움직임에 대해서 소스라치게 놀라는 때가 있습니다.
내가 나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사람의 몸에서 냄새가 몹시 심하게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에게는 암내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 본인은 잘 냄새를 못 맡습니다. 왜냐하면 후각이 자기 체취에 아주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에겐 아이들 냄새가 나고, 아빠에게선 아빠 냄새가 나는데, 정작 자기 냄새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내 몸에서 나는 독특한 체취를 맡습니다. 나이가 어린 자매들이 지나가면 신선한 체취가 납니다. 우리가 숲속에 들어갔을 때도 숲 냄새가 납니다. 숲에 들어가 한 15초정도 지나면 그 냄새가 안 느껴집니다. 그러나 반대로 숲 바깥으로 나오면 길거리 냄새가 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육체적으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영적인 정신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에 대해 우리는 이런 것들을 잘 못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가 시험되고 검증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시인이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시험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도록 시험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온전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깎으시고 다듬으시고 내 안에 뭐가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시인을 옳다 인정해주심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들을 통해서 시인을 인정해주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옳다 인정함을 받은 사람들은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와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편이니까 고난이 와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귀하다 정말 훌륭하다.”라는 인정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으며 살아간다면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인정해주시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고, 그리고 매일매일 앞길을 인도하시고 손잡아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주님 앞에서 날마다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려면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시 17:4-7)
어려움을 만날 때
누구든지 어려움을 만나면 도움을 받고 싶어 합니다. 아무리 큰일을 만나도 자기 자신에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자원과 힘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큰 환란이 아닙니다. 시련과 환란을 만나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을 때, 밖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갈망하게 됩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도움을 못 구하지만, 신자들은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간절히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도움을 구하면 그분이 주시는 힘과 자원으로서 인생의 곤고와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믿음으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공식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지만, 정말로 그 공식을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에 직면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그분의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심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오늘 4~7절에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한 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시인이 바로 꼭 그런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며 그와 같은 환란과 시련의 날에 ‘주님이 나의 복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좇음
첫 번째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았습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자신이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썼고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환란과 시련의 날에 기쁨으로 하나님만이 자신의 도움이시며 역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환란의 날에 하나님을 간절히 부르면 자신들에게 필요한 자원과 힘을 공급하셔서 이기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잘 아는데, 그리되기 위해서는 평안한 날에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자신을 바쳐 그분의 말씀과 뜻에 합치시키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환란과 고난의 날에 하나님을 의지하며 간절히 부르짖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실족치 아니함
두 번째는 자신이 “내가 실족치 아니하였나이다”라는 것입니다. 앞에 나오는 말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합치시키면서 사는 것을 가리킨다면, 뒤에 나오는 이 ‘실족치 아니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살아갈 때에 소극적인 면에서 미끄러질 수 있는 위험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데 있어서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불순종하려고 자꾸 뜻을 세우고 하나님께 저항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노력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실족치 아니하였나이다’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키는 것을 가리킵니다.
시편 73편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시인이 신앙생활에 회의를 느끼는 것이 나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잘사는 것을 보면서 회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족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하나님은 맨날 나에게 야단만 치시고 내가 얻은 것이 뭐가 있나?’ 이런 것들은 마음속에서 나오는 적극적인 불순종의 의지는 아닙니다. 그것은 미끄러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끄러지는 것도 결국은 자기 생각을 잘 지키고, 마음을 잘 지키지 않은 탓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지 않도록 시인이 얼마나 분투하고 노력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앞에서 있는 것들이 불순종이라면, 뒤에 있는 것들은 회의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로 인해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서 주님을 계속 붙들면서 살려고 분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마지막 7절에서 어떤 유익을 얻게 되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자기에게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고 바라는 간절한 기도가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기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간절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이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신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할 수 있습니다.
인자를 탄원하는 간구
여기에서 하나님의 인자를 달라고 호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든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치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를 드리며 그분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과 고난의 날에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간절하고 진실한 간구를 드리면서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평안한 날에 주님을 잘 믿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환란이 닥쳤을 때에도 평소에 하던 대로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주님께서 응답해주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키시는 하나님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
나를 압제 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가 자기 기름에 잠겼으며 그 입으로 교만히 말하나이다
저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음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나이다
여호와여 일어나 저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원을 구원하소서”(시 17:8-13)
눈동자 같이 지켜주심
성도가 고난을 당해도 자기의 뜻대로, 자기의 욕심대로 인생을 이어가려고 하면 하나님의 도움이 별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당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평안한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세상의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하고 틀립니다. 그래서 지난날을 돌아보면 하나님의 은혜 중에 있을 때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리지만, 여러분이 은혜로부터 멀어졌을 때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시인은 고난을 당할 때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갈망과 말할 수 없는 아주 간절한 기도를 올려드렸던 것입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보호 하시며” 우리의 몸에 모든 지체들 가운데 자기의식과는 상관없이 보호를 받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눈동자입니다. 다른 부분도 그 정도는 아닙니다. 눈동자는 거의 반사적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바람이 불어서 티 같은 것이 들어오려고 하면 눈꺼풀이 보호해줍니다. 그때 힘으로 눈꺼풀을 내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의 반사적으로 눈꺼풀이 내려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자전거를 배웠는데, 많이 다치면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자전거를 타다가 위험한 상황을 만나면 눈이 감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조망에 찔리기도 하고 개울에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장애물을 만나거나 하면 브레이크를 꽉 잡으면 되는데 그냥 눈부터 감기는 것입니다.
시인이 자신의 모든 신체 중에서 눈동자가 이렇게 보호받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하나님께 보호받는 존재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의지하는 성도들에게는 이런 보호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기도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우리에게 조치들을 취해서 필요한 것들을 주시고 또 깊은 시름과 어려움에서 건져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간섭하시는 행동들이 우리의 기도응답으로 올 때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기도를 초월해서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시는 것을 발견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시인은 눈동자 같이 보호해달라고 호소하면서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적들은 사자 같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양을 치는 목동이었기 때문에 맹수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고, 맹수와 더불어 싸워서 이겼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맹수들의 힘, 먹잇감을 향한 치열한 집념, 무자비한 공격들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원수들을 사자로 비유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젊은 사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적들의 힘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오늘 새벽에 깨어서 잠깐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힘이 얼마나 무서운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으려는 마음의 힘, 그리고 주님을 거슬러 살려고 하는 강력한 힘이 얼마나 큰가? 또 한편으로는 우리 밖에 있는 힘이 얼마나 큰가?’ 세상의 유혹과 시련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꺾으려고 하는 힘, 이런 것들이 안팎으로 있어서 큰 힘으로 작용해서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이 사자의 힘처럼 강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기름에 잠기는 악인들
시인은 악인들의 힘이 사자와 같고 그리고 특히나 경건한 자를 압제하려는 저들의 사악한 힘을 느꼈습니다. 시인은 “그의 내면은 마음은 기름지고 교만하며 기름지다”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마음이 기름지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마음이 풍족하다는 것은 좋은 의미로도 쓰이고 나쁜 의미로도 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많은 것들 때문에 만족을 느끼면 행복한 것이지만 올바르지 않은 것들로 인해서 마음이 부유해지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집니다. 그것이 악한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만약 악한 사람들의 마음이 이처럼 기름지지 않는다면 경건한 시인은 어느 정도까지 압박하다가 곧 뉘우치고 회개하고 하나님한테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들이 돌이키지 않은 아유는,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필요 없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있다면 자기가 잘못한 것과 죄지은 것들이 생각나서 뉘우치면서 하나님께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자신은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돌아오지만 악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저희를 넘어뜨리고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자녀들이 세상에 곤고하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은혜 안에 살고, 사랑 안에 살고, 기쁨 안에 사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지하시는 바이며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항상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혹은 원수의 핍박과 압제 때문에 신앙생활의 기쁨을 잃어버릴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주시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의 힘에 고갈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도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해 목마르게 하시고 갈망하게 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우리에게 이런 시련들 곤고한 시간을 주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것을 경험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고결한 삶이고 아름다운 삶인지 배웁니다. 정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뼈저리게 느끼고 그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느끼는 때는 대부분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가 평탄한 길을 걸어가게 하실 뿐 아니라 고난의 길도 걸어가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가 의지로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사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 곁을 떠나는 것도 때로는 허용하십니다. 그래서 거기서 커다란 고통을 경험하고 다시금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들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매일매일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과 성도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3-15)
성도의 정체성
시인은 자기를 미워하며 고통스럽게 만드는 악한 사람들의 정체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써의 자신의 정체 간에 차이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 사람과 성도의 정체성의 차이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도의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나그네입니다. 인간 그 자체가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되기 전에 세상 사람은 자가가 나그네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말로는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의미는 정처 없이 떠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노래를 한다고 칩시다. “그럼 그 나그네가 어디 가는 나그네요?”라고 물으면 고작해야 “조상들 있는 대로 돌아가는 나그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성도의 정체가 나그네라고 할 때 성경이 말하는 의미는 그것과 다릅니다.
물론 성도들도 예전에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섞여서 이 세상이 본향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영원에 속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오면서 자신이 이 세상을 지나는 과객일 뿐이요, 나그네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 받는 즉시 성도의 마음에 본향이 생긴 것입니다. 그 본향이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 영원한 나라를 향해 가는 것이 자신의 본분이라고 생각하게 되니, 얼마 전까지 고향인줄 알았던 세상이 나그네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영원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연결된 꿈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연결된 꿈들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영원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시인을 그렇게 고통스럽게 압제하는 세상 사람들의 정체가 나옵니다. “이 세상에서 저희에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나를 구해 주시옵소서.” 그들은 영원을 향해서는 유업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물려받을 기업은 이 세상으로 충분합니다. 그들의 유업은 이 세상이고 성도의 유업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있다는 것이 성도와 세상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어느 날 누가 말하기를, “여러분, 조상들이 남겨놓은 땅이 있어. 나중에 알고 보니까 강남에 있는 노른자 땅인데 주인 없던 땅에 네가 주인이야.” 그 빌딩숲 가운에 기가 막힌 땅이 여러분의 것이면, “그 기업을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거지. 시내 한복판에서 무슨 콩을 심을 것도 없고 아니 파를 심을 것도 없고 그까짓 거 있어 봐야 심어도 공해 때문에 먹지도 못하는데……”라고 그 기업을 하찮고 우습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니면 매일매일 그 땅을 보면서 “이게 우리 땅이다. 전에는 우리가 가난뱅이였는데, 자 봐라. 여기다 빌딩을 지으면 천억 원짜리야.”라고 자랑을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영원한 나라에서 받는 기업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 영원한 기업을 받기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악한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신앙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세상 사람의 특징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이미 유업을 받은 사람인데 그들의 특징을 세 가지로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자기 배를 채우는 사람들, 곧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욕망을 만족시키시는 방식은 영원하고 신령한 것이 아니라 제물로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꼭 먹는 음식만이 아니라 재물을 주고 얻을 수 있는 즐거움들로 허기진 욕망을 채우는 것을 보여 줍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영혼이 배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더 정확히는 창자에 영혼의 자리가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나리라”라고 하셨는데, 그 배가 영혼 깊숙한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원으로부터 만족을 얻는 따위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무리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재물은 모두 주님의 재물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재물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물려주신 것입니다.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인데 세상 사람들이 불법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이 이 세상에서 경쟁을 통해 얻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세상 사람에게 “우리 하나님 것이니까 도루 내놔.”라고 하면 날강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도 정정당당하게 경쟁을 해서 그것을 뺏어야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있으면 자기의 배만 불리는데 사용될 것을 뺏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물질로 인해서 만족을 얻는 습관이 몸에 베이면 영원한 나라를 향하여 살 수가 없습니다. 물론 신자가 돈을 많이 벌어서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고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여유가 생기면 자가용을 마련하고, 더 여유가 생기면 조금 더 나은 차를 타고, 집이나 옷도 마찬가지로 다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 있는 재물로써 자기의 깊은 내면이 만족되느냐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으로써 만족을 얻는 것에 익숙해지고, 그것으로 즐거움을 얻는 것에 익숙해지면 영원을 바라보고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돈이 많이 있어도 그것은 쓸 때는 항상 이것을 소비하는 것이 내 영혼에 어떤 영향을 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난을 높은 덕목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재물로 자기의 배를 만족 시키는 것을 좋아한 나머지 영원을 위해 가지는 않는 것은 죄입니다.
두 번째는 자녀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이것이 세상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자녀를 너무 사랑하고 집착한 나머지 이 세상 사람들은 영원을 바라볼 틈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벌어서 목표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자기가 실컷 쓰고 그 다음에 자식들한테 물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정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에 대해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그들은 재물로 배를 채우며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만족을 얻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있는 자원은 이 세상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도움을 주지만,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신령한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늘나라를 향하여 살아가도록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참 신기한 것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돈이 많고 잘나가도 어느 순간에 하나님이 은혜로 역사하시고 내 마음을 충분한 은혜로 채워 주시면,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그렇게 훨훨 날아가야 합니다.
성도의 정체의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자신의 자녀로 만족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주의 자녀가 되게 만들기를 바라는 자들입니다. 물론 자기 자녀도 잘 키우지만 보다 궁극적으로 이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로 꽉 채워서 복음을 전하고 영원을 위해 헌신하게 만들어야합니다. 오늘 핸드폰으로 편지가 왔는데 정말 놀라운 은혜와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감격적인 보고가 왔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원하시는 것은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조차 주님 만나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도의 정체의 세 번째는, 유산을 자녀들한테 물려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유산은 자녀의 물질적 행복을 넘어서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정말 변화되지 못한 성도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기만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된 성도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내가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옵겠습니다. 내가 깰 때에는 주의 형상으로 내가 만족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시인은 주님의 얼굴을 사모합니다.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춰 주신다는 것은 그를 특별히 인정하시고 은총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 있을 동안에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잠시 후면 잠자는 것 같은 이 세상에서 깨어서 영원 나라에 들어가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인데, 그것으로 내가 만족을 하겠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과 경쟁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나라를 향해서 가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그것이 싫은 것이 이상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고난과 박해를 합니다. 그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영원한 나라, 그리고 끝없이 있을 그 가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즉 영원에 대한 감각이 우리에게 밀려오고, 더 나아가 그 은혜를 유지하면서 살 때 우리들이 세상과 섞이지 않고 영원한 본향을 잇대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17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