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16
목 차
여호와께 피하는 자(시 16:1-3) 47
나의 분깃이신 하나님(시 16:4-6 ) 52
훈계하시는 여호와(시 16:7-8) 56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시 16:9-11) 61
여호와께 피하는 자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 16:1-3)
주께 피하나이다
다윗은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마 사망, 재앙, 고난, 그리고 사람들의 미움과 핍박 같은 것들이 있었을 때의 고백인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 피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현실의 도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으면 좋은데 실상은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된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도저히 혼자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주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에 있어 아주 중요한 조건입니다. 주님밖에 의지할 수 없는 것! 그런데 ‘주님께 피함’이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힘과 자원을 주님께로부터 공급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이 어릴 적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면 엄마의 치마폭 사이로 피합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끌어안고 역성을 들어주십니다. 이런 종류의 피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은 그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절대의존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할 때는 자신만만할 때가 아니라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입니다.
주님 없는 세상 평화없네 ♬
오 주 없이 살수 없네
언제 기도가 제일 잘됩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우리의 마음에 눈물이 흐를 때.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 내 마음에 꿀 송이처럼 달게 느껴집니까?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어서 은혜를 주시기를 구하며 우리의 마음에 눈물이 흐를 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겠다는 간절한 사모함은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독립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생겨나서,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려는 소원이 있어도 환경과 나의 자아가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항상 주님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나의 모든 인생의 모든 희망은 우리 주님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원의 부족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들이 항상 여러분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다면 인생을 살아가기에 너무나 힘들 것입니다. 아무데서도 적은 돈이라도 변통할 수 없다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사실 육신의 자원은 줄일 수 있습니다. 큰집에서 살던 사람이 어려우면 작은집에, 잘 먹던 사람이 좀 척박한 음식을 먹고, 잘 입던 사람이 좀 아무렇게나 입고, 문화생활을 즐기던 사람이 좀 포기하고 그렇게 살면 됩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정신적인 자원입니다. 정신적이고 영적인 자원이 없을 때 우리는 매우 곤고하고 어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때 주님께 피하면 주님께는 우리의 결핍들을 채울 수 있는 무한한 자원들을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으로부터 멀리 떠난 죄인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이 결핍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신앙이란 이와 같이 하나님께 끊임없이 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지만 주님께 피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항상 유일한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신앙은 아무렇게나 살다가 필요할 때만 그분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침체에 빠지거나 회심하지 못해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면 참 좋겠는데 그렇게 잘 안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어려움을 만날 때 가슴에 손을 얹고 “아 주님만이 나의 피난처이시며 나의 피할 바위이시며 산성이십니다. 내가 방백을 의지하는 것 보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났습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께 피합니다.”라고 하면서, 주님이 필요한 순간에 마음 깊이 녹아내리면서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무렇게나 살다가 마음을 먹는다고 해서 누구든지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주님은 나의 복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복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피하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 ♬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성자성령 아멘
주님은 나의 복이라
주님만이 우리의 복의 근원이며 다른 곳에는 아무런 복이 없습니다. 다른 것에서 오는 모든 복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영원한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인생에서 만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분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설령 내가 세상에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가난해지고 버림받고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전부인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그분께 피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그리고 내가 그분에 속했고 주님이 나에게 속하신다면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고난이 오면 그것을 통해서 피난처가 되신 주님을 의지하면서 연단을 받고 정결해질 것입니다. 시련이 오면 그것을 통해서 자신과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평안하면 평안함 가운데 하나님을 전심으로 섬기며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 항상 행복한 일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이 그를 미워해도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고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한 그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싫어해서 광야에 버려도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시며, 심지어 원수들이 그를 죽인다 해도 주님은 보좌에서 일어나서 그의 영혼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든 복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고난의 때에, 환란의 때에 여호와께 피할 수 있는 그런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존귀한 자라
마지막으로 땅에 잇는 성도는 존귀한 자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성도라는 말이 히브리말로 ‘하시드’(dysij;)인데 은총을 입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된 것은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된 것입니다. 은혜를 힘입어서 성도가 되었는데 시인이 존귀한 자이며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고 은혜로 대해 주셨음을 돌아보며 자기가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자였음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가 되고 언약백성이 되어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후에 성도들의 존귀함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 저 사람도 하나님이 나처럼 사랑하셨겠지.’라고 생각하니 그 성도 속에서 아름다운 모습이 보이고 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늘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어떠한 용서의 은혜를 입었는지, 자신이 하나님에게 어떻게 사랑과 보호를 입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혼자만 그런 사랑을 입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사랑 받았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나를 아프게 하고 고통을 주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 역성을 들어주셔서 저 사람들을 좀 혼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가 가슴에 손을 얹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베푸시는 그 사랑을 저 사람도 받으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각각 시기와 방법은 다르지만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 성도도 정말 존귀한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붙들어 주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난과 시련을 만날 때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들의 위로가 무엇입니까? “나의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그렇게 환란을 만나서 도망친 모든 사람들이 피하는 곳이 바로 주님의 품입니다. 그 안에서 또 주께 피한 성도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사랑합니다. 이 땅에 있는 육신의 부모 육신의 형제들보다 소중합니다. 성경은 “자기의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불신자보다 악하다”라고 가르쳤습니다. 왜냐하면 이 가족에 대한 사랑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주신 본능에 가까운 감정입니다. 그것을 거스르며 사는 것은 책망 받을 만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가족들은 그들이 주님을 믿어야지만 하늘나라에서도 영원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은 이미 이 땅에서 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가족일 뿐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한 가족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이 땅에 더불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즐거움이 되고 행복이 됩니다. 그들로부터 섬김을 받으며 행복하고 그들을 섬기며 행복하고, 그들을 사랑하면서 행복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하고, 설령 그들이 좀 부족해도 내가 희생함으로서 그 사람이 온전케 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의 분깃이신 하나님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저희가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4-6)
이방신을 섬기지 않으리라
시인은 자기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겠노라고 이야기합니다. 뒤이어 당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기쁨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복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기를 드려야합니다. 여기서 시인이 “하나님이 나의 복이시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의 연합함에 대한 확신입니다. 어떤 사실을 알 때 그것을 개념적으로 아는 방법이 있고 그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개념적으로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압니다. 경험적으로 알게 될 때 회개가 나오고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의고백이 나오고 인생의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어쨌든 하나님만이 나의 복이라고 고백하는 이면에는 내가 다른 신들에게는 예물을 드리지 않을 것이다가 포함됩니다. 여기서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린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다른 신을 경배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다른 신들에게 예물을 드리는 것은 구복행위와 관련 있습니다. 구복신앙. 다윗시대에 중동지방에서는 신들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신들이 뭔가 얻어먹지 못해서 거지처럼 몰려다니면서 인간들을 괴롭힌다. 신들을 굶주리게 하면 신들이 심술을 부릴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관과 비슷한데, 터줏대감에게 제사하고 조상신에게 제사하는 것들도 모두 적극적으로 복을 받는다는 개념보다는 신들을 달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다른 한편으로는 땅에 있는 신들을 섬겨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주로 섬기지만 이 땅에 있는 신들과도 잘 지내고 싶고, 그들로부터 어떤 해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이 혼합신앙입니다. 여기서 시인이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지 않겠다는 것은 그런 혼합신앙을 택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복은 그런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라는 확고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올인 하겠다는 결단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만이 나를 복 주실 수 있는 분이시며 하나님만이 나의 보호자가 되시며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고백입니다. ‘인생에 수많은 역경이 찾아와도 여호와가 나와함께 하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오.’하는 고백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이어서 시인은 나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않을 것이며 그 이름도 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전제는 곡식 위에 액체를 부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술 같을 것을 부어서 드리는 제사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져온 제물에 기름이나 술을 부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그러나 이방에서는 피를 제물 위에 부었습니다. 그러므로 피의 전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니라 이방신께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정하신 방법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정확하게 모르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또한 시인은 “그 이름도 부르지 않겠다.”라고 말합니다. “만약 이방신의 이름을 불러야 할 위기가 온다면 난 차라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 만에 나의 피난처이시고 나의 복이시기 때문에 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인생의 두려움이 느껴질 때도, 인생의 깊은 고난이 올 때도, 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자신의 복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기쁨과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신의 산업과 분깃의 소득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소망 자체가 내 인생의 행복이며 내 인생의 먹고 쓰고 누리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에게 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기쁘고 행복하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라
시인은 여호와는 나의 기업의 분깃이라고 말합니다. 분깃은 복과 동의어입니다. 원래 분깃이라는 것은 맨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성 후에 땅을 제비 뽑아서 정합니다. 아직 정복하지 않았지만 제비를 뽑아서 지파별로, 족속별로, 가정별로 떼어 주었습니다. 그것을 바로 기업이고 합니다. 만일 땅이 있으면 농사를 지을 수 있고 풍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땅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하는 것이 부유의 크기를 가늠하는 척도였습니다. 그래서 1년에 몇 섬이나 추수를 하느냐에 의해서 집안의 부가 결정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대 사람들의 물질관이었습니다.
기업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곧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이 땅을 절대로 개인이 소유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옛날에는 땅을 중심으로 노예제도가 있었는데, 만약에 땅이 있으면, 농사를 지어서 먹고 살 수 있으니 노예가 될 리가 만무합니다. 자기 땅이 있으면 땀을 흘린 만큼 부유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것이 생명과 같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가진 사람이 생존을 위해서 땅에 파종하고 수확을 거두면서 자신의 생명을 이어가듯이, 똑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고 축복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가며 사는 성도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기업이 아름답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가진 땅 10평의 의미와 얼굴도 모르는 사람 1만평의 의미가 같을 수가 있습니까? 남이 얼마를 가진들 그것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가 가진 땅 10평의 의미는 내가 모르는 사람 1만평의 땅의 의미와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주셨습니다. 지금에 적용하면 기업은 하나님이 내게 맡겨두신 사업이나 직장이나 사명 같은 것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로 재어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말할 때는 소위 구약의 지계표 사상이 깔려있습니다. 지계표는 땅의 경계를 알려주는 표석으로서 옮기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남의 것을 빼앗는 것도 잘못이고 그것을 잃어버리는 것도 잘못입니다. 여러분들의 기업이 어디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을 소중하고 아름답고 기쁘게 생각하고 가꾸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일, 가정,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소중하고 여기고 즐거워하며 그 안에서 함께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피난처가 되시고 ‘하나님이 나의 복’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훈계하시는 여호와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16:7-8)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을 주시는 원주인이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은 일반 섭리를 따라 주시는 복과 영혼에 직접 내리시는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특별히 영적인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셔서 변화시켜 주시는 복입니다. 일반섭리의 복은 하나님께서 사람이나 사물의 일반적 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복입니다.
예를 들면,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된다든지, 건강을 주셔서 건강하게 된다든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해 도움을 받는다든지, 이런 것들이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지어주신 기업으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서 감사와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우리의 삶의 자리, 사명의 터,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기업이라고 부릅니다. 그 기업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을 행복으로 아는 사람들이 인생의 만족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입니다.
밤마다 내 심장이 교훈하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행복의 정수를, 하나님께서 나를 훈계하신 것이라고 찬송합니다. 밤마다 자신의 심장이 자기를 가르친다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라고 찬송합니다. 성도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기업을 떠나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사명지를 이탈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이 계속 들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삶의 자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소명의 자리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그 기업을 버릴 때 가장 큰 형벌은 더 이상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때로는 욕망이 있어서 그릇된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음성이 우리의 마음에 들리면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우리를 굳게 붙들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을 타이르고 책망하고 인도해 주시는 한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함께 계신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우리는 두 자아 사이에 대화를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옳지 않은 것을 행하면 우리 안에서 ‘안돼.’라고 외치는 양심의 소리가 들립니다. 심지어는 우리의 육적인 자아가 고집스럽게 그 일을 하려고 하면 경건한 마음이 고통 받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 아래 있을 때 경험하는 현상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마음에 울릴 때 심장이 자신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장이라는 것은 비유인데, 심장이 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명의 근원이 되듯이, 또한 영혼에 있어서 영혼의 깊은 좌소, 즉 심령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패한 본성을 따라 사는 자기를 책망하고 교훈하는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신령한 자아를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은 자신이 하기 싫으면 성립이 안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신앙의 삶인데,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은 성립이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혹은 교회가, 목회자가 그를 도울 수 있는 것도 자신이 그렇게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을 때 도울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항상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시인은 ‘내가 주님을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사는 것은 왕국의 문맥과 연결됩니다. 뭇 백성들이 왕에게 나아갈 때 그 앞에서 부복해야 합니다. 부복한 백성은 왕의 위엄을 가장 절감하게 되고, 자신은 왕의 명령에 복종하며 살아야 할 힘없고 나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아간다는 의미의 한 본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지 않는 적이 없습니다. 사실적 측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든지 간에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지켜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경험적 측면에서 우리 자신이 그것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시는 효과를 나의 영혼과 온 지성과 마음이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살아갈 때에 주위의 수많은 대적들이 있다하더라도,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기만 하면 얼마나 많은 대적들이 에워싸고 있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는가, 인정하지 않는가?’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것을 시인이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라
마지막으로 시인은 ‘내가 요동치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동한다는 것은 중심이 끊임없이 흔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나면 쌓아올렸던 짐들이 떨어지고 사람들이 쓰러집니다. 요동한다는 것은 평상시에 세워놓은 많은 질서들이 흩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켜주실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세워놓은 많은 질서들이 환란과 시련 속에서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다면 그것들은 세우지 말았어야 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요동치 않는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이 되시고, 우리들이 쌓아올린 질서들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그 질서를 견고하게 해 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잘못 쌓아올렸던 질서들은 환란과 시련을 통해서 무너지게 하시고 악한 사람들의 공격을 받아서 허물어지게끔 하십니다.
여기서 시인이 “밤마다 나의 심장이 나를 교훈 하는도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라고 노래한 것은, 하나님 안에서 자신들이 세워놓은 질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지기를 바라셨던 그 사랑의 질서들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니다. 그러면 무너질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면서 세워진 것들이라면 무너질 것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분의 뜻에 의해서 세워진 모든 것들은 더욱 견고해지고,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게끔 쌓아올려진 것은 주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무너질 위험에 처합니다.
결국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우리 자신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쌓아올린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무너지고 변화됩니다. 이런 모든 현상들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그분의 임재 앞에 살 때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요동함이 없는 편안하고 견고한 삶은, 자기의 정욕을 좇는 사람들에게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악인에게는 항상 평안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거슬러 자신의 사욕을 좇아 사랑의 질서를 세우고 그 위에 사물들을 쌓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 앞에 가까이 다가가면 끊임없이 이런 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저들의 삶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늘 불안하고 흔들리는 삶이 악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의 삶은 흔들리지 않은 것이니 이는 날마다 하나님께 교훈을 받고 말씀에 찔림을 받아서 자신의 심장으로 교훈을 받아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의 질서 속에서 사물들을 쌓으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들은 세우고 그분이 원하시지 않은 것들은 버립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모든 자신의 세워놓은 것들은 하나님의 마음에 부합하기 때문에 견고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이 “악인은 요동하나 의인은 항상 견고하도다 마치 산이 견고함같이, 성의 터가 견고함같이 그렇게 견고하다”고 노래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을 날마다 부인하고 주님이 자신을 선택하신 구속의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명의 자리에서 섬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9-11)
말씀에 교훈을 받는 삶
하나님의 말씀에 교훈을 받으면서 살아가면, 자기를 가르칠 수 있는 또 다른 자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 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우리 자신을 스스로 잘 돌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비(是非)에 대한 판단할 수 있는 총명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은혜를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우리가 잘못 살려고 할 때 우리 안에서 그렇게 살지 말도록 강력하게 촉구하는 그 무엇이 우리 안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끄러질 때는 우리의 마음과 육체가 모두 하나가 되어 그릇되이 행하기 때문에 붙들어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꼭 붙잡혀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살아갈 때 영혼은 즐거워하고 육체는 안전하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내면의 세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진리의 말씀이 있을 때 얼마나 기쁩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깨뜨려지고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늘 동행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면 하나님께서 그를 지켜주십니다. 고난이나 어려움이 오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꼭 붙들고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흔히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소유들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고 믿지만, 그러나 사실은 우리를 지켜 주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그분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시인이 이렇게 감격하는 또 다른 이유는 긍휼이 많으신 “주께서 나를 음부에 버리지 아니 하신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음부라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원수들에게 에워싸여서 살 소망이 모두 끊어지고, 하나님께 버림 받은 상태가 음부의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상태에 하나님께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그런 지경에 우리를 놔두지 아니하신다.”는 확신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교훈을 받으며 하나님 자신을 복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을 그렇게 버림 받은 채로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만일 그에게 죄가 있다면 용서해 주시고, 유혹을 받는다면 건져주셔서, 다시금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은혜와 힘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러면서 정반대의 길로 나를 인도 하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의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길입니다. 이 생명은 우리의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삼고 그 진리의 힘입어 살아가지 않는다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그러한 생명의 은혜 혹은 하나님의 큰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생명 속에서 살아가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바와 같이 즐거움이 넘칩니다. 시인의 기쁨을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6장 맨 앞에서 여호와는 나의 복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 때문에 자신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그 생명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미끄러졌다가도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고 변화가 되면 다시금 하나님의 생명이 흘러 들어옵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아주 놀라운 일들이 생겨나는데, 그 생명으로 말미암는 기쁨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기쁨의 근원이시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곳에 항상 기쁨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즐거움들은 금방 사라지는 즐거움들이고 그것들을 잘못 선택하면 우리의 영혼에 해악을 끼칩니다. 그러나 생명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그 기쁨을 누리면 누릴수록 우리의 영혼은 그 기쁨 때문에 놀랍도록 살아납니다. 그리고 그 기쁨 속에서 살아갈 때 영혼은 더 많은 생명을 누리게 되고, 육체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전심으로 순종하고 그분의 모든 뜻에 따라 인간의 분수를 지키고, 그 분량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복된 삶입니다. 오늘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정해주신 분량을 넘어서 줄로 재어주시지 않은 다른 기업을 넘보며 살아감으로 인해, 우리의 영육에 곤고함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늘 순종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시는 여러분들 되기 바랍니다.
시편16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