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7월 19일 새벽예배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 하시니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행 14:1-4)
녹취자 : 김세나
이렇게 해서 이제 사도들은 다시 복음 전하는 장소를 옮겨 가게 됩니다. 회당으로 들어가서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늘 종교적인 회합을 갖고 또 자신들과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르치는 장소로 이용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해외 교포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 비슷하게 그렇게 이 회당이 교육, 그리고 종교, 유대인들의 사회적 필요를 채우는 장소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비교적 그 회당에서는 자유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사도들은 전문적으로 성경을 가르치고 연구하기 때문에 백성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곳으로 인정을 받았던 것으로 여겨져요. 그래서 회당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이죠.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의 기독교가 박해를 피할 수 있는 아주 훌륭한 방법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 로마는 식민지 안에서 일어나는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개입하고 싶지 않아했고, 그 다음에 회당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니까 자기들끼리의 문제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같은 회당 안에서 같은 성경인 구약을 가르쳐주는 일들이 있어도 이 기독교 복음 전도자들이 가르치는 이 구약성경의 가르침은 유대교 사람들이 회당을 통해서 가르치던 구약성경의 가르침과 아주 판이하게 다른 그런 방식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구약성경을 사용했지만 구약성경 속에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유대인들은 몰랐지만, 복음 전도자들은 알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이었죠. 그리고 구약성경은 바로 그것을 증거 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오시고 그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그리고 다시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것,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지금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의 선포의 메시지였습니다. 지금 바로 그 성령의 도움에 힘입어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고 그 다음에 돌아오라는 거죠.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시고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이 복음 전도의 단순한 선포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것은 같은 회당에서 가르쳐지는 구약성경이라 할지라도 판이하게 다른 내용이었고, 이것을 통해서 기독교는 진정으로 자기의 모습을 이 세상 속에서 드러낸 것이었죠. 이런 면에서 이제 이 회당을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기독교를 뿌리 내리게 하는데 사용하신 것이고, 그래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회당 속에서 가르쳐 지다가 바깥으로 나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에 있어서 기독교의 가르침이 유대교의 가르침과 전혀 다르구나. 이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이미 기독교가 억누를 수 없게 커져버린 상태였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사도들이 회당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게 되었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만, 거기에 있는 유대인들이 문제였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도록, 유대인과 헬라인들을 특별히 헬라인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헬라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그 우리로 말하자면 희랍 사람들, 그리스 사람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죠. 로마가 지배하기 전에 그 제국 전체가 그리스 제국이었고, 유명한 마게도니아 왕이 거기에서 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화적으로 그 사람들이 모두 헬라 언어를 사용하는 헬라인들이었고, 그리고 유대인들이 도시마다 모여 살았습니다. 오늘날의 차이나타운이나 코리아타운처럼 모여 사는 것이죠. 그래서 유대인들이 가서 말씀을 전한다고 하니까, 이 복음 전도자들이 말씀을 전한다고 하니까 처음에 사람들이 모여서 잘 들었겠죠. 그 가르침이 현저하게 유대인들과 다르니까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이제 반감을 품게 되고 사도들의 이야기를 믿으며 사람들의 마음에 말하자면 속삭여서 그들로 하여금 사도들을 향해서 악한 마음을 품게 만들었던 것이죠. 복음이 전파되었던 곳에는 언제나 악한 무리들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아마 복음전도자들은 금방 교만해지고 아마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과정에서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기 보다는 자기를 신뢰하게 될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이렇게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무리들을 하나님께서 남겨두셔서 그래서 전도자들로 박해를 받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참된 복음의 전파는 모든 사람들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그들 안에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드러내서 그들을 심판하는 기능이 있어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죠. 예수님만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하셨던 분이 없었을 것이고 또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충만하게 받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말씀을 전파할 때 그 말씀의 능력과 권세가 대단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그 모든 사람들이 회개했냐 하면 절대 그렇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가는 곳 마다 예수님이 말씀을 선포하고 나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주 명확하게 구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를 들으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워하든지 사랑하든지 그 믿든지 아니면 안 믿겠노라고 거기에 반감을 품든지 둘 중의 하나 태도를 분명하게 하는 역사를 가지고 있었어요. 우리는 우리가 바라기는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주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죠. 그러나 항상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아주 선명한 복음이 들려질 때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려고 하는 악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올바르게 전파되면 주님께 돌아올 사람과 주님께 결코 돌아오지 않을 사람들을 구분해내는 아주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고 분명하고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 그 때에 영혼들의 크신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서 그 영혼들이 변화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그러한 역사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니까 믿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악한 마음을 품고 사도들을 괴롭히고 핍박하고 그랬습니다. 그 때에 이 사도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지 보십시오. 오늘 성경은 뭐라 말하냐 하면 그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지난번에 했었던 것처럼 금방 신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뭐라 그랬냐 하면 오래 거기에 머물러 있어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오늘 뭐라고 그러느냐 하면, 오래 있어서 주를 힘입어 그를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시니, 그랬습니다. 오래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대단한 고통이 아닐 수 없어요. 대단한 고통이 아닐 수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보통 괴롭고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죠. 그런데 이들은 가만히 주님이 자신들을 보내신 뜻을 이해하면서 핍박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내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의 본받을 자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거기에 보내셨고 복음을 전파하는데 아직 하나님이 거기에서 자신들을 더 많이 섬기기를 원하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 뜻을 깨닫고 나니까 이 사도들 일행이 자신들은 비록 고난과 박해를 받아도 주님이 거기에 복음을 더 많이 전하시게 하려는 뜻을 알고 나니까 고난을 받아도 거기에 오래토록 머물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이렇게 간단하게 표현이 되어 있지만, 하지만 매일매일 얼마나 괴로운 일이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박해와 핍박을 견디면서 그러면서도 그들은 거기에 남아있었습니다. 왜 남아있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거기에 그렇게 좋다하는 사람 말고 싫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아서 악감을 품게 하고 선동을 해서 자신들을 그렇게 괴롭히는데도 거기에 오래 남아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두 가지 목적 아니겠어요. 믿은 사람들을 돌봐야죠. 싫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복음을 듣고 기뻐하고 아멘 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들을 돌봐야지, 그들을 돌보고 믿지 않는 그 사람들 조차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서 그들은 오랫동안 거기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게 바로 정말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으며 자기의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이에요. 그 자세에요. 그것이 바로 오늘 사도들이 보여준 아름다운 모본입니다.
사실 우리는 오래 참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영국 속담에 보면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맡겨 주시면 오랫동안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사역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자기 자신의 신앙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이렇게 고난과 핍박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오래 머물도록 결심을 한 것은 그들에게 남다른 결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에 대한 사랑, 자기들을 그 어려운 땅에 보내셔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에 대한, 자신들의 설교를 듣고 주님께로 돌아와서 유대인들의 박해와 미혹 아래 아직까지도 영향을 받을 어린 신자들을 향한 사랑, 지금은 비록 악감을 품고 대적을 하고 있지만 곤고한 유대인들의 영혼을 향한 사랑, 이런 것들이 거기에 오래 머물도록 만들어 준 것이죠. 그러면서 결국 복음이 잠시 얽매이는 것 같으나 사람에 의하여 메일 수 없고 성령에 의해서 사람들이 자유케되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바로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으면 그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일체 인내함으로 오래 참으면서 그러면서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이 모든 고난과 시련을 사랑으로 참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들이 주님을 섬겨가야 하는 것이에요.
두 번째는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죠. 오래 참은 것이 사랑이라면 이것이 신앙을 보여주는 것이죠. 어떤 신앙을 보여 줄까요. 아무리 너희들이 우리들을 핍박하고 복음을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에게 거절받는 이 복음이 복음의 정당성을 무효화 하지 않는다는 신앙이에요. 너희들이 몰라서 이렇게 우리를 핍박하지만 그러나 이 복음을 듣지 않으면 누구도 구원받을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새로 경륜하셨다. 이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던 것이죠. 자신들의 생명이 어떠한 위협에 처하든지 간에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복음이 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믿어지기 위해서는 들려져야 하고 들려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쉼 없이 선포해야 했어요. 그래서 담대하게 기죽지 아니하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욱 담대하게 선포한 거예요.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이 복음이 가지고 있는 참된 의미에 그들 자신이 꼭 붙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꼭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한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역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이렇게 담대하게 주의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이 전한 방식이 뭐냐 하면 주를 힘입었다 그랬습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이렇게 고난을 받으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파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들이 끊임없이 주님께로부터 받는 놀라운 은혜가 있었어요. 주님께로 받는 끊임없는 은혜, 그리고 놀라운 은혜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이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주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만드는 큰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이 흔히 우리의 사명을 감당해 내지 못할 때에 우리는 환경으로 우리의 감당하지 못하는 사명을 사명에 대해서 구실을 댑니다. 그리고 환경 속에서 우리의 사명들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요인들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도 우리에게는 중요하죠.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환경과 상황을 잘 연구해서 그래서 올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전파하고 전파된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믿어지도록 그렇게 우리들이 환경적으로 잘 정비하고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열심이 처음에는 특심했지만 중간에 꺾이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는 그 열렬한 마음이 중간에 쉬이 사라지고 하는 이러한 모든 어려운 한계들이 사실 우리들이 주님께로부터 끊임없이 힘을 얻지 못하는 은혜 생활의 부재 또는 그 은혜생활의 부족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들이 변명할 수 없다는 것이죠. 믿음은 모든 환경을 뛰어넘는 위대한 능력이요, 힘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놀라운 힘들을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공급받게 만들어서 그래서 믿음이 아니면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하게 만들어요.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시고 함께하시는 놀라운 증거를 봅니다.
오늘 사도들이 바로 이 이고니온에서의 큰 박해, 그 많은 괴로운 시련을 견디면서도 오래토록 거기에 머물면서 유대인들의 간계로 인한 시험들을 참고 주님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렇게 주님을 매일 매일 힘입는 은혜의 힘으로 이것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하고 주를 위해서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주님께로부터 받는 은혜의 힘이 매우 커야 해요. 일을 많이 하면서도 주님께로부터 공급받는 주의 힘의 공급이 없는 사람들은 언젠가 일하다가 결국은 지쳐서 쓰러지고 말 것이에요. 그래서 결국엔 자신의 영혼들도 지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고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명을 감당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끊임없는 주님의 은혜의 힘을 입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주님의 사명을 고난 가운데 감당해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기도의 제목은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할 현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할 수 능력이 없는 자신의 상태, 그 사이에서 주님의 주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힘을 덧입기 위해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이죠. 여기에서 신명을 바치는 섬김이 나오는 것이에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 몸과 마음을 바쳐 헌신을 하니까 주님께서 그들의 수고 위에 위로해 주신 거죠. 그래서 기사와 표적들이 나타나서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 없는 마음을 갖게끔 만들어 준 거죠.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환란과 시련이 믿음의 사람들이라도 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 주님이 사랑하셔서 그들과 동행하시는 사람은 꺾을 수가 없습니다. 이길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주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이에요. 사도들은 큰 고난과 목회적인 어려움을 통해서 오히려 오래 이고니온에 머물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비결들을 터득했고, 몸과 마음을 바쳐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할 때에 기적과 표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들과 동행해주시는 놀라운 증거를 보면서 아름답게 교회를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고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자리에서 오래토록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담대히 주를 섬기고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주님의 종들이 되어서 이처럼 주님이 우리와 함께 동행 해주시는 표적들을 볼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