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21
목 차
순종하는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시 21:1-3) 3
의지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시 21:4-7) 8
목표의 합치는 자기를 포기하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시 21:8-9) 11
원수를 완전히 멸하심(시 21:10-13) 13
순종하는 자를 높이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왕이 주의 힘을 인하여 기뻐하며 주의 구원을 인하여 크게 즐거워하리이다
그 마음의 소원을 주셨으며 그 입술의 구함을 거절치 아니하셨나이다(셀라)
주의 아름다운 복으로 저를 영접하시고 정금 면류관을 그 머리에 씌우셨나이다”(시 21:1-3)
하나님의 능력을 인하여 찬양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 백성의 왕으로서, 보다 더 큰 왕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시입니다. 시인은 세 가지를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인하여 기뻐한다는 것,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셨다는 것, 자신을 존귀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드린 찬양은 기쁨입니다. 한 나라의 왕의 영광은 힘입니다. 왕은 자신의 나라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슬하의 모든 백성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왕으로서의 통치 질서가 한 나라를 서게 만듭니다. 만약 그런 힘이 없다면 나라는 서 있으나 이름만 왕이지 다른 사람에게 실제적인 통치권이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고종은 명목상 황제이기는 했으나 실권은 일본에게 있었습니다. 실제적인 통치권을 가지지 못한 것은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왕으로써의 모든 힘과 능력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자신은 보이는 나라의 왕이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는 보이지 않는 왕이심을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그의 자녀요, 그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하나님의 힘을 기뻐하고 자랑하는 자, 자신이 살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하나님의 힘이 작용하는 것과 같은 방향인 자가 아닙니까? 순종하는 자만이 이를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통치를 거스르며 육욕에 따라 살면서 하나님께 복 받기를 바라는 자는 하나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손을 내미는 자와 같습니다. 시인이 기쁨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분의 큰 능력이 더 많이 나타나면 날수록, 그는 더욱 더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제쳐두고 하나님의 복을 이야기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소원을 이뤄주심을 찬양
두 번째 드린 찬양은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목회현장에서 보면 성도들이 살아가는 방향을 바르게 잡아 주어야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이런 말을 해줍니다. “자네가 기도 많이 하고 결정하는 것보다 그 문제에 대해 많은 기도는 안했지만 내가 결정하는 바가 더 옳을 때가 많거든.” 무슨 말입니까?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생각과 의지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전폭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향하지 않은 채 살아갑니다. 문제를 직면했을 때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한다 해도 올바른 결정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오히려 순종하는 사람들의 순간적인 결정이 불순종하는 사람들의 오랫동안 몸부림치며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올바를 때가 있습니다.
택시를 기다리는 자는 버스가 몇 대가 지나갔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찾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무리 보여주셔도 그 많은 뜻과 계획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생의 벼랑 끝에 서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나, 그렇게 될 때까지 그 사람들은 기도할 수 없습니다. 위기 때에 부르짖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 하늘을 솟아오르는 듯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통회와 간구,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모든 대적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것들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길을 걸어가는 자들에게만 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인생의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쳐 줘도 단순한 처방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사는 자, 그분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들은 기도하지 않고 소원만 품어도 하나님께서는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워낙 돈독하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습니까? 사랑은 마음을 헤아리게 만듭니다. 다윗 왕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며 살아가는 행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존귀케 해주심 찬양
세 번째로 드린 찬양은 하나님이 자신을 존귀하심에 대함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당신을 높이는 자들을 높이십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아버지에게도 별로 인정받지 못한 채 들판에서 짐승이나 치던 자가 아닙니까? 한 나나를 통치하는 왕의 영광은 이름 없는 목동의 영광에 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만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며 한없는 영광을 돌리는 사람만을 높여주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대적하며 불순종하고 감사할 줄 모를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더 이상 영광을 받지 않으시며 그를 높이지도 않으십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을 높여 주신 것을 늘 감사하는 자들은 정말 높여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얻을 수 있는 행복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많은 진리의 빛과 하나님의 사랑의 불을 받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심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는 분에 넘치는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짐승 같은 우리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봉사하며 살아가게 하신 것, 아니 성도로서 살아가게 하신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어느 연로하신 권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교회 문 앞에 서서 인사를 하던 제 손을 꼭 잡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많이 늙었지만 역사에 기여하는 사람이 꼭 되고 싶습니다. 제가 조금만 젊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러분들은 새벽에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젊음도 가졌고, 그분을 섬길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얼마나 허망한 삶들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토록 영광스러운 자녀의 명분, 썩지 않는 하나님 나라 위해 봉사하게 하신 것을 아주 존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십시오. 한 나라의 장관의 자리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세상 나라가 아닌 영원한 나라를 위해 부름을 받은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것을 귀한 줄 알고, 자기를 존귀케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다윗을 부끄럽게 하려고 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어릴 적에는 형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형들을 모두 부끄럽게 하시고 다윗을 한 나라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사울의 미움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낮추시고 도망자에 불과했던 다윗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전쟁에서도 어디를 가든지 그분으로 말미암아 다윗을 승리하게 하심으로써 그를 존귀하게 하셨습니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갈 때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윗으로 하여금 깨닫고 연단 받아 더 정련하기 위함이었지 그를 버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원수들은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는 신앙의 감격, 하나님의 은혜의 감격은 늘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늘 기뻐하며 찬양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늘 높여주십니다. 가끔 이렇게 높여주실 때 마음이 교만하여져서 처음의 겸손함과 감사와 찬양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를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 인생의 위기나 왕국의 위기를 주셨습니다.
결론과 적용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떤 인간이었을까를 늘 생각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 주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밖에서 복을 꿈꾸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자궁 외에서 임신된 태아가 반드시 죽듯 하나님 밖에서 잉태된 모든 소원은 사산될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잉태된 것일 때만이 그분의 나라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의지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
“저가 생명을 구하매 주께서 주셨으니 곧 영영한 장수로소이다
주의 구원으로 그 영광을 크게 하시고 존귀와 위엄으로 저에게 입히시나이다
저로 영영토록 지극한 복을 받게 하시며 주의 앞에서 기쁘고 즐겁게 하시나이다
왕이 여호와를 의지하오니 지극히 높으신 자의 인자함으로 요동치 아니하리이다”(시 21:4-7)
생명 주심을 찬송
하나님을 찬송하는 왕의 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인은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 세 가지의 감사 제목을 올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생명입니다. 다윗은 다른 사람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산 사람이 아니라, 수없는 고난과 시련의 길을 걸었던 자입니다. 그 길에서 생명을 부지하기 어려운 위기도 수없이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끊임없는 전쟁과 고난, 그를 죽이려는 반역과 추격들 때문에 그는 항상 죽음의 위협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생명을 보존하여 장수하게 하셨습니다. 마치 작은 촛불이 바람에 꺼질듯하면서도 꺼지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생명싸개 속에 시인을 보존하셨습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다른 좋은 것들을 누리게 하는 기반이 됩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른 것들이 세워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영광을 찬송
둘째는 영광입니다. 다윗은 인생을 살면서 수치스러운 일들을 많이 경험했던 자였습니다. 왕이 되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기에 형들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고, 기름부음을 받고도 사울에게 쫓기는 수치스러운 일을 당했습니다. 게다가 왕이 된 후에도 아들 압살롬 및 여러 사람들의 반역으로 인한 수치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을 높이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악인의 번성함은 잠간이고, 동시에 의인의 고난도 잠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영광의 소중함과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방법들을 터득하였습니다. 왕의 존귀와 위험은 바로 영광의 구체적인 현시입니다.
영광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어떤 물질이나 명예를 가진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중요한 존재로 인정받는 것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그분을 중요하게 여기고, 합당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창조목적이 있으시며, 모든 만물들이 그 목적에 따라 살게 하고자 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데리고 가실 때에 그분의 따르면 비로소 그 사람의 존재는 중요성과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아가는데도 영광 받을 수 있으나 이는 잠시잠간 후에 베여진 풀일 뿐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이 세상의 영광은 소멸하는 영광일 뿐입니다.
즐거움을 주심을 찬송
셋째는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주셔서 그분 앞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은 기쁨은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는 즐거움입니다. 그러한 즐거움은 그분 앞에서 누리는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인정하고 당신께 생명을 받은 것을 감사하는 자들에게 즐거움과 자유를 베풀어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복은 이렇게 그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는 얼마나 약해집니까? 그러나 그 약함은 사실은 강함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강해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표의 합치는 자기를 포기하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네 손이 네 모든 원수를 발견함이여 네 오른손이 너를 미워하는 자를 발견하리로다
네가 노할 때에 저희로 풀무 같게 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진노로 저희를 삼키시리니 불이 저희를 소멸하리로다”(시 21:8-9)
하나님의 뜻에 목표를 합치시킴
시인은 자신이 겪은 승리의 경험들을 언약 백성에게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언약백성들을 해치려는 원수들과 열방들을 보면서 분노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시인과 더불어 진노하시면서 그들의 대적들을 파멸시키십니다. 어떻게 보면 과장된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믿는 자녀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내가 분노할 때에 하나님도 진노하시고, 내가 어떤 사람을 향해 안타까워할 때에 하나님도 안타까워하신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원수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으로부터 오는 현상일까요? 하나님의 뜻과 시인의 뜻이 일치를 이룬, 목표의 합치에서 오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도와주시는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소원을 품은 것은 나인데 하나님이 우리 편에 서서 도와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이 그런 방식으로 다루시지는 않습니다. 과연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그리 대하십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진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하나님의 뜻에 합치시킨 사람을 그리 대하십니다. 그 사람이 만나는 난관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도 넘어야 할 난관입니다. 그래서 어려움들을 넘어 그가 품은 소원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편애하는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정도로 그분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자신의 꺾고 하나님께 합치시킴
인생의 궁극적인 방향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면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시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새벽에 교회에 나와 예배드린다고 하더라도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합치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개별적인 한두 가지가 아니라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일이 더 시급한 일이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합치된 목표를 가질 수 있습니다. 목표의 합치는 자신을 포기한 사랑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꺾고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곧 회심입니다. 그 방향으로 계속 살아가는 것이 회심의 보존입니다. 이는 성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인생의 어떠한 상황을 만난다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뜻을 합치시키고 못하는 자는 늘 고통스럽습니다.
원수를 완전히 멸하심
“네가 저희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저희 자손을 인생 중에서 끊으리로다
대저 저희는 너를 해하려 하여 계교를 품었으나 이루지 못하도다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여호와여 주의 능력으로 높임을 받으소서 우리가 주의 권능을 노래하고 칭송하겠나이다”(시 21:10-13)
원수의 후손들까지 멸하심
앞 절에서는 자기의 원수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같이 진노하시는 장면을 묘사하였는데, 본문은 원수의 후손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수의 후손들은 조상의 생각과 마음을 물려받았기에 시인을 향한 적대감도 함께 물려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들에 대해 다음의 세 가지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원수의 후손들까지도 멸하실 것입니다. 곧 시인을 향한 대적과 반감을 가진 자들이 나올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제거하실 것이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반감의 씨가 후손들에게 이어지지 않도록 적대감을 품을 가능성이 있는 자를 모조리 멸하십니다. 역모를 일으킨 자는 9족까지 멸했다는 기록이 우리나라 역사에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후손들까지 멸해주시는 것은 철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은 그분과 같은 마음을 품은 것이며, 하나님은 친히 당신 자신을 위해 대적들을 정리하고 이기게 해주십니다.
계교를 품고 이루지 못함
둘째는 그들이 계교를 품고 있지만 결코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계교로부터 자기의 사랑하는 시인을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 없이 우리 혼자 악인과 싸운다면 때때로 저들의 지혜가 우리보다 뛰어나서 곤경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 계교들은 하나님께는 알려지지 않을 수 없기에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는 능히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각 나라들은 자국의 안보를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 국방부는 공중에 띄울 정보기 4대를 구입하기 위해 미국과 협상 중에 있습니다. 이 정보기 한 대가 감당할 수 있는 기능은 가히 놀랍습니다. 첨단 레이더 장비를 가지고 반경 360Km 이내 있는 3,000개의 움직이는 사물들을 추적하고 파악할 수 있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전쟁이 나서 공군 사령부가 폭파된다 하더라도 이 정보기만 있으면 작전수행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최첨단 정보기를 먼저 계발하고, 띄우려고 하는 것은 바로 적의 움직임을 상세하게 파악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적의 정보는 훤히 파악해야 하지만, 반대로 아군의 정보는 적에게 전혀 노출되지 않아야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전쟁 가운데 있는 시인을 바로 이런 식으로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드림
마지막으로는 살아 계셔서 자신을 그렇게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길 수 없는 인생 상황 속에서 승리하고, 자기를 해하고자 하는 모든 원수들로부터 보호하십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목표의 합치가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스르며 살면서 도움을 받으려는 인간의 이중적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고 허무한 태도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들을 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 것이고, 원수들이 나타날 때 그들은 의지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을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한 마음을 품고 자기의 모든 뜻과 생각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내 인생의 목표는 따로 없고 주님의 목표가 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삶입니다.
시편21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