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22
목 차
기도 중에 깨닫게 된 하나님의 성품(시 22:1-3) 17
멸시받을 때(시 22:4-11) 21
멀리하지 마옵소서(시 22:12-21) 24
예배와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라(시 22:25) 26
여호와를 찾는 자의 복(시 22:26) 29
땅 끝까지 미치는 여호와의 통치(시 22:27-28) 32
광야의 샘물 같은 삶(시 22:29) 35
기도 중에 깨닫게 된 하나님의 성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1-3)
본문해설
본문은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고 있으나 이상하게도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응답도 들리지 않음을 탄식하는 시인의 영혼과 마음 상태를 그리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마음속에 깊은 고통과 괴로움이 있어서 혼자 극복할 수 없는 상태가 이르기 전까지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상태가 되었는데도 부르짖을 줄 모르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기도의 문이 활짝 열려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름다울 때의 기도는 마치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지 않을 때에는 영혼은 부르짖고 싶어도 실제로 기도를 드림에 있어서는 무언가 막혀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것의 정체는 무엇이며, 왜 하나님께서 기도 속에서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가 막히는 이유 1: 흐트러진 마음의 틀
우선, 이 막힘의 정체에 대해 살펴봅시다. 시인은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될 매우 긴급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어야겠다는 마음이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원래 소원이 마음에 가득 차게 되면, 그 기도는 마음을 녹이는 기도가 되어서, 화산이 폭발하여 나오듯 영혼 깊은 속에서 밖으로 분출하게 됩니다. 시인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기도하려고 하려니 기도가 잘되었습니다. 무엇이 기도를 방해하였을까요? 우리들도 종종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 차게 되면 하나님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도하게 되면 그렇게 품었던 열렬하고 경건한 마음은 사라지고, 기도를 시작하자마나 마음이 굳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을 다루시는 방법도 매우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과 영혼의 죄를 다루시는 방식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나 이 세상 자체에 대해 몰두하는 마음은 기도하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의 틀들을 허물어뜨립니다. 사랑하는 것이 별로 없다하더라도 많은 염려와 근심이 있다면, 이도 역시 우리의 마음의 틀에 영향을 줍니다. 마음의 틀이라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사물들을 볼 때에 그것들을 일정한 방향으로 지각하게 만드는 구조물입니다. 마음의 틀이 올곧고 하나님을 향하여 있으면, 사물들을 볼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의 성품, 거기서 비롯되는 인간인 나의 의무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시편의 말씀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마음의 틀이 하나님을 향해 있게 되니 시인은 산을 보더라도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생각났고, 그분으로부터 오는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어려움을 당했는데도 이 본문에서의 시인의 마음의 틀은 하나님을 향해 잘 유지되었기에 그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며, 오늘 본문 속 시인의 마음의 틀은 죄로 인해 무너졌기에 이러한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 지킴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마음의 틀은 예배와 기도를 통해 주님의 은혜로 수시로 씻어내지 않으면 올곧게 유지되기가 힘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틀이 휘어지게 되고, 기도를 실천함에 있어서 즉각적으로 실행할 수 없게 되어 시간이 지날수록 기도하기가 힘들어집니다. 이렇게 흐트러진 마음의 틀들은 영혼에까지 영향을 미쳐 죄와 정욕이 번성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하나님께 매달리고, 간구하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의무입니다. 시인은 죄를 지었기에 마음에 큰 고통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구하고 싶어도 잘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다루시는 과정을 통해 흐트러진 마음의 틀들을 다시 구축하고자 하십니다. 모든 올곧음과 경건함 삶은 올바른 마음의 틀에서 나옵니다. 그러하기에 사단은 끊임없이 이 틀을 공격하여 허물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와 하나님에 대해 정당하게 생각하는 것을 막고, 마음과 영혼에 죄가 쉽게 들어오도록 만들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다시 세우고자 우리를 그러한 탄식 속에 두십니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하루만 연습하지 않으면 바이올린이 이 사실을 알고, 이틀 연습하지 않으면 연주자 자신이 알고, 사흘을 연습하지 않으면 청중들이 안다고 합니다. 마음의 틀을 하나님을 향해 올곧게 유지하며 사는 것이 경건한 삶의 기본입니다. 그러한 삶을 기초로 하여 사는 자만이 하늘을 가르는 성령의 강력한 감화 속에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틀과는 상관없이 단번에 고상하고 높은 기도의 단계로 뛰어오르려고 한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비상한 헌신의 삶을 살려고 한다면, 좋은 신자가 되려는 토대 위에서 그 헌신의 삶을 살아야지 보편적 가치는 다 버리고 단번에 그런 신앙인이 되려는 것은 정상적인 삶이 아닙니다.
기도가 막히는 이유 2: 하나님의 거룩하심
다음으로 살펴볼 내용은 하나님께서 기도 속에서 왜 우리를 그렇게 다루시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용서를 비는데도 응답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관련됩니다. 시인의 탄식 끝에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는 고백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기도가 안 되고 막히는 그 속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로 인해 자신들의 죄인 됨을 깨닫게 됩니다. ‘어려운 시기 속에서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는데, 그리고 나의 공식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실 줄 알았는데, 내 속에 이러한 죄가 있으니 이렇게 간절히 부르짖어도 주님이 들으시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 전 삶으로 공을 들일 때 비로소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기도가 우리 속에 가득 차게 됩니다.
기도할 때마다 마음이 물처럼 녹으며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자가 몇이나 됩니까? 지극히 소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소수인 그 사람 중에서도 오래도록 그러한 기도를 유지하는 자는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러한 기도는 그만큼 힘든 일입니다. 삶을 전방위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으면 그러한 기도는 불가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살지 못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만이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고, 예수님처럼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만이 예수님처럼 기도 속에서 마음이 물같이 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온전한 목표의 합치가 있어야 기도가 온전히 모아집니다.
멸시 받을 때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시 22:4-11)
믿음으로 살았던 조상들을 회상
시인은 본문 말씀을 통해 세 가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았던 조상들의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조상들의 과거를 간절히 회상하게 되니, 그것이 시인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조상들도 이런 큰 환란과 시련을 당하였으며, 그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다는 기록들이 위로가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한 풍부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러합니다. 이것을 통해 시인은 큰 위로와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처지에 있었던 믿음 선배들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는지를 들음으로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함으로써 얻게 되는 유익입니다. 시련을 이겨나가는 비밀들이 성경 속에 있습니다. 환란이 오면 마음에 여유가 없다고 하면서 성경을 멀리하거나 열심히 연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부패하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떤 것이든 나쁜 쪽으로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사모하고 그 말씀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사람들에게 업신여김 당함
두 번째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비참하게 여김을 받는지에 대해 상세하게 써내려가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받는 비방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저런 인간을 도와주실 리가 없다는 비방들이었습니다. 환란이 순전한 육신의 고통에만 그친다면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것은 참으로 별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환란이 단순한 고생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이 주는 정신적인 고통 때문입니다. 정신적이며 영적인 고통은 우리가 다루기에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시인이 당한 고통과 어려움은 세상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 안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더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정서는 마구 흐트러집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만이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조상처럼 우리도 도우시는 하나님
세 번째로 그러한 사실을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옛 조상들이 하나님을 의지해서 도움을 얻었던 것처럼 환란과 시련을 당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줄 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입니다. 시인은 조상의 과거가 아닌 이번에는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게 됩니다. 모태에서 났을 때부터, 어미의 젖을 먹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억하셨고, 모든 인생길에서 쉬지 않고 지키시며 인도하셨기에 주님 앞에 지금 살아있음을 감사하는 고백입니다. 그러한 고백을 하고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겨나게 됩니다. 환란과 고통 그 자체가 시련이 아니라 그것을 당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리라는 믿음이 사라지는 것이 오히려 더 큰 문제입니다. 진정한 시험은 우리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돌아봅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를 이곳까지 인도하셔서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를 기억하며, 그 하나님 때문에 오늘도 믿음으로 살았고 앞으로도 지켜주실 것이라는 생각하게 되면 살아갈 힘을 얻게 됩니다. 환란과 시련을 당해서 침체에 빠진 우리의 심령이 이렇게 함으로써 온전히 새롭게 될 때 그분을 향한 찬송과 기쁨과 경배가 넘쳐나게 되는 것입니다.
멀리 하지 마옵소서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시 22:12-21)
바산의 황소 같은 원수
본문은 시인이 악인들에게 괴롭힘을 받는 상태를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앞선 말씀들보다 훨씬 더 절박하고 갈급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바산”이라는 곳은 사마리아에 속한 지경인데, 좋은 소를 길러내는 산지가 있었다고 합니다. 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나운 짐승은 많이 있을지 모르나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있는 짐승들 가운데 소만큼 힘센 짐승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시인은 원수들이 이렇게 힘센 소들이 자신을 공격하며 들이받고 찢는 것 같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것 같이 상상합니다. 악한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을 때 그 사람들 안에 있는 엄청난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잘 믿고 성화되어갈수록 우리 안에는 힘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때의 힘은 혈기, 정욕, 욕망, 세속적 성취를 위한 강한 추진력들을 말하는 것으로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은혜 안에서 꺾이는 것입니다. 반면 성화됨이 전혀 없는 악인들에게는 이러한 힘이 아주 싱싱하게 살아있기에 그 힘이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성화로 자기를 죽이는 절제함이 저들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과 정신이 악에 의해서 강력하게 충동질 된 사람들이기에 거침없는 생각, 말, 행동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확신에 차고 힘이 세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힘의 원천은 혈기와 욕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은혜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이러한 강한 욕망과 힘에 있어서 그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혈기, 욕망, 정욕 등과 같은 것들은 죽고, 주님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그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강한 원수들 앞에서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며 고통의 긴 시간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게 하기 위해
시인은 왜 그런 엄청난 고통을 견디고 있으며, 하나님은 왜 그를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것입니까? 사실은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인생에서 얼마나 절대적으로 필요하신 분이신가를 실감하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리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하나님께 부르짖게 만드는 힘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마음, 그분과의 바른 관계, 하나님을 의지하는 친밀함에서 나옵니다.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상황은 위급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결핍되면 간절한 부르짖음이 나오지 않습니다. 간절히 매달리고 의지할 때에 이런 놀라운 구원과 은혜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 세상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사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그 은혜의 힘에 붙들려 사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예배와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경배하라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시 22:25)
찬송은 주께로부터 옴
시인은 본문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 대회 중에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에 대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함께 모이면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대회 속에 있는 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부르는 찬송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또한 고백하고 있습니다. 언약백성 중 한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 것이 주께로부터 왔다는 말의 의미는, 대회 중에 드리는 찬양이 예식의 순서에 따라 의례적인 것이 아니라, 그분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기에 찬송한다는 고백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그 찬송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찬양이 되기 위해서는 찬양자의 삶이 그러한 신앙고백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함께 모여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바라볼 때에, 우리의 영혼의 상태와 관련하여 두 가지를 같이 고려하여야 합니다. 먼저 많은 영혼들이 예배를 통해 회복되며 그것을 통해 신앙이 고양되고 영혼이 변화되는 것, 다음으로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삶 속에서 부어주신 수많은 은혜의 간증들이 있는 참된 삶의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항상 함께 고려되어야 합니다. 물론 후자가 없어도 참회하는 마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하나님과 끊임없이 붙어 있으려고 애쓰며,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공급받아 심령이 변화된 자들이 주님 앞에 예배드리고자 나아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시며 그들의 찬양이 감화력 있는 찬양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기도, 헌신, 섬김이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려면, 하나님 앞에 은혜의 간증을 가진 삶을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더 열렬히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는 단순히 우리의 게으름이나 나태함, 설교자의 능력의 부족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일주일 동안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고, 그분에 대한 사랑과 은혜의 경험이 우리 가운데 살아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오직 그렇게 사는 자만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기 위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며, 우리의 삶에 대해 깊이 공들이는 일들이 선행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바치는 우리의 찬양과 경배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기 쉽습니다.
하나님께 서원 갚을 마음
둘째, 시인은 자신의 서원을 하나님께 갚을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대회 중에 모여서 한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찬송드린 것은 주님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그렇게 자신과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 때문에 내 영혼이 그분의 깊은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으니 자신의 서원을 갚고 싶은 소원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서원은 하나님 앞에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좁은 의미에서의 서원은 어떤 개별적인 일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 약속하는 것이나, 넓은 의미에서의 서원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일평생 살겠다는 고백을 말합니다. 이는 곧 자신의 인생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사는 삶이 바로 언약 백성들의 서원을 갚는 삶입니다.
대회 중에서 하나님을 찬송함으로 말미암아 신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되고, 그 은혜의 체험들은 다시 삶의 현장으로 흘러나와 주님의 이름을 높이며 살아가야 될 기도제목과 삶의 모토들을 발견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사는 성도들의 삶입니다. 넓게는 언약백성이 되었기에 삶의 모든 방면에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겠다고 헌신하며, 좁게는 환란 날에 주님께서 약속한 것들을 지키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문제의 매듭은 예배에도 있으며, 동시에 삶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이라는 것은 이처럼 전포괄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심으로 주님을 예배하고 그렇게 예배를 드린 후에는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찾는 자의 복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시 22:26)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
우리들이 참으로 살아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신앙을 떠나서 일반적인 인생의 이치를 가지고 말할 때에도 마음이 살아있어야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기쁨도 고통도 괴로움도 즐거움도 욕망도 없다면, 그 인간의 삶이란 죽은 자와 방불한 삶, 무덤과도 같은 삶입니다. 반면 육신이 불편하거나 생활이 좀 어렵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의욕과 활기로 그것은 정말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살리시는 힘을 가지신 분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이 놀랍게 살아나는 이 역사는 누가 체험할 수 있을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 그리해 주십니다. 본문은 그를 먹고 배부르게 해주실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살면서 그분을 위해 육신의 복을 구하는 사람들은 채움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오히려 영혼에 관한 것들을 더 많이 가르치고 있는 듯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미천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주님께 깊이 기댈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자신의 영혼을 배부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한 걸을 더 나아가 그렇게 마음이 겸손한 자는 주님이 무엇을 주셔도 그것을 자기가 얻은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 겸비함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지하면 살아가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고, 우리를 다루시는 그분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에는 마음이 높아지나, 그분께로 돌아올 때에는 우리의 마음이 낮아지고 겸비해집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마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정말 활기 있고 살아있는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주님 안에서 우리의 영혼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만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에 우리의 심령은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언제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교만한 자의 마음에서는 은혜가 사라지나, 겸손한 자이 마음에는 은혜는 보존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살게 하시고 싶으시나 우리 마음이 높아져 그 은혜를 담을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밤을 허락하시고, 자신이 낮출 수 없었던 마음이 주님 앞에 겸손해지도록 만져주십니다. 그렇게 낮아진 마음이 주님을 깊이 의지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 앞에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라들의 마음을 살게 하시는 비결입니다. 성도의 가장 큰 복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낮아지는 것, 주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낮아지는 것입니다. 이 일은 얼마나 어렵게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작용이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이에게
둘째, 하나님 안에서만 모든 것을 구하며 살려는 사람들에게 이를 허락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불만과 고통은 하나님 밖에서 찾아보려고 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이 고통은 주님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신령한 의미에서의 고통과 전혀 그렇지 못한 고통,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고통은 후자일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의 부패한 옛 본성으로 인한 고통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찾는 자들이 주께 찬송할 것이라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복을 찾으려고 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신가를 깨닫게 됩니다. 가난할 때나, 형통할 때나 곤고할 때에나 모든 것으로 주님을 찬송케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고난도 이기고 시련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십니다. 인생의 모든 복은 하나님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주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구하는 모든 것은 우리와 타인에게 고통을 줄 뿐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에 현혹되기 쉬운 우리이기에 끊임없이 이 지혜를 소유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쉽지 않습니다. 주님만을 깊이 의지하십시오. 그분 안에서 행복을 구하십시오. 그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삶의 행복과 기쁨이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일치하는 것이며, 그 진리와 합치하여 사는 삶입니다.
땅 끝까지 미치는 여호와의 통치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시 22:27-28)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함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신들만 하나님을 믿을 뿐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사모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주님을 경배하는 것처럼 주위의 많은 사람들도 주님을 경배하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주 드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하나의 기능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복음 전도는 먼저 믿은 자들이 변화되어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 마음으로 살아있는 자가 되길 원하십니다. 마음이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자,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들이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 은혜를 통해 열방에까지 주님의 이름이 전파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땅 끝에 있는 민족까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래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던 자들이었는데, 회심의 역사가 그들 속에 일어난 것입니다. 열방이 하나님 앞에 회심하고 돌아오는 이 놀라운 역사는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바로 마음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 저들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원리입니다. 잔잔한 호수 위에 힘껏 돌을 던지면, 물에 빠진 돌은 파문을 그리며 퍼져갑니다. 이와 똑같이 마음이 살아있는 주의 백성들을 통해 말씀은 파문을 그리며 옆으로 전해지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작은 돌멩이가 물속에 떨어졌다면 파문은 생길 것이나 아주 미미할 것이고 그 이동 거리도 짧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돌멩이가 떨어졌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주 멀리까지 힘차게 파문을 그려가지 않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복음 전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얼마나 크게 영향 받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열방을 회심시키십니다.
열방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
또한 본문은 그렇게 회심케 된 열방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며, 하나님은 그 땅 백성들의 주재가 되신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주재가 되신다는 말은 임금, 곧 통치하는 자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분이 중심이 되셔서 모든 것이 명하여지고 백성들은 이에 순종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파문은 당신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편입니다. 한 가족이 변화되는 과정을 살펴보아도 이는 잘 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먼저 변화되고, 그의 헌신으로 말미암아 나머지 가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하여짐으로써 가족구원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제 강북지역에 사는 성도들을 위한 1일 집회가 있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기쁨을 나누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강북 지역은 원래 2구역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교구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처럼 많은 숫자의 성도들이 모이게 된 것은, 누군가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깊이 변화되어서, 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곤고한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눈물로 기도하니까 그것이 파동이 되어 많은 사람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만들었습니다. 잠시 머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던 자들이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어 이제는 영혼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 마음이 살아있는 삶을 사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들이 먼저 변화되고 먼저 은혜를 받고 먼저 새로워져서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고, 그 불씨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마음에 붙여지며,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 불을 전달해 주는 불쏘시개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 가는 것입니다.
광야의 샘물 같은 삶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시 22:29)
신앙의 영향력을 미침
먼저 믿은 우리의 신앙의 영향력에 대해 시인은 계속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님을 찾으면, 온 세상에 두루 그 신앙의 영향력을 미치게 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재물이 많고 걱정이 없는 부유한 자들은 하나님을 잘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자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기 쉬운가하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고민이 많습니다. 육신의 쓸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 생활의 염려에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따를 수가 없게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이든 하나님을 잘 믿고 따르기 위해서 은혜는 필수적입니다. 은혜를 받게 되면 재물이 아무리 많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되고, 가난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진정으로 구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풍부한 자도, 가난 한자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즐거워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자자손손 그 복을 받아 누리게 하심으로써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번영을 이루어가게 하십니다. 이는 물질적이며 세상적인 번영이라기보다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깊은 특질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들을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백성들이 당신을 향해 가지고 있는 관계가 어떠한지를 보시고 이 놀라운 축복들과 변화들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갖고 살아가면, 우리 주변 사람들과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자들에게 이러한 축복의 역사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에 성도들이 도무지 변화되려고 하지 않는다고 칩시다. 그런 그들에게 어려움과 시련이 겹치게 되고, 힘든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하나님의 은혜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될 것이며, 동시에 교회는 하나님을 근심시켜 드리는 교회가 되고, 충만의 은혜의 능력이 바깥으로 뻗어 갈 수가 없게 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은 점점 시험에 들어 은혜로부터 미끄러질 것이고,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게 그 복음을 전해 줄 기력이란 찾아보려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다가 믿지 않는 자가 교회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붙들어주며 헌신할 가능성은 저들에게 너무나 희박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복음 전파에 심각한 어려움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들 각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고 은혜가 성도들이라면, 주변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 은혜가 넘쳐흘러가게 합니다. 그들의 영혼을 향한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섬기고 싶어집니다. 그 은혜의 영향력은 자신을 넘어서 영혼들에게 전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많은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는 은혜의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은 비단 개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결론과 적용
우리가 세상을 위한 최고의 섬김은 올바른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자들을 통해 회심치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동일한 변화를 허락하시고 복음의 혜택을 입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생애가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섬기는 삶,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목을 축이게 했던 삶, 그리하여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드신 그 삶이 바로 우리 주님의 삶이 아니었습니까? 우리의 삶도 광야의 샘물과 같아야 합니다. 그 샘에서 목을 축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붙들고 살아갈 기력들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사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새해에는 이렇게 은혜의 샘의 근원이 되어서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마시우고 먹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부자든 가난한 자든, 누구든지 하나님을 찬송케 하는 자로 바꿀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길 빕니다.
시편22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