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정과 하나님의 이루심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14).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우리 인간사의 우연적인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서 계획 된 것이 펼쳐지듯이 실현이 되는 거죠. 그러나 이것은 기계처럼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 속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면서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요소들과 만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지만 인간 편에서 보면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여서 마치 이 세계와 인생 전체가 우리의 의지대로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놓으시고 당신이 인간을 창조하신 계획과 의도대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을 때가 있는가하면, 혹은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죠. 어떤 삶을 살든지 그 모든 삶은, 그 사람의 본성이라는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같습니다. 저수지의 물이 가득 고여 있으면 그 물이 흘러 실개천을 이루고 도랑을 이루고 개울을 이루면서 흘러갑니다. 작게 모일 때에는 그저 물줄기가 되고, 그 물이 모이면 실개천이 되고, 더 모이면 도랑이 되고, 더 모이면 개울이 되고 강이 되지만, 그것은 양상의 차이일 뿐이고 본질인 물 자체가 바뀌지 않아요. 도도히 큰물이 되어 흘러가는 때가 있는가하면, 재잘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곡을 휘돌 때가 있지만, 그것도 양상에 불과하고, 그 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이라는 본질은 변하지가 않는 것이에요. 그러니 우리의 양상을 생각해보세요. 열 분이 교역자로 인생을 살았고, 혹은 어떤 이는 교회의 직원으로, 또 하다가 그만두고 사표를 내고 사업을 할 수도 있고, 또 이만 못한 일을 할 수도 있어요.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될 수도 있겠고, 또 공부를 많이 해서 유명한 학자가 될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러나 그것은 실개천이냐, 개울이냐, 도랑이냐, 커다란 강이냐 이 차이에요. 물은 변하지 않아요. 그 물은 그 물이에요. 그물은 본성에서 흘러나온 물이에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영광을 취하기 때문에 사람을 중심을 보기보다는 외모를 봐요. 본질을 보기보다는 형식을 더 많이 주목하죠. 그래서 같은 저수지의 물을 가지고 흘러도 개울과 도랑, 도랑과 개천, 개천과 하천, 하천과 강, 이렇게 변할 때, 그들은 마치 물까지 변한 줄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양상으로 살든지 그것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그 물길에 무슨 물이 흘러갔느냐하는 것이에요. 강물이 흘러 대를 이루어도 그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고, 실개천 같이 흘러도 그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에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어요.
오늘 욥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을 꼭 이루실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23장 올 때까지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처음 고난을 당할 때에는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있어도, 그리고 자신은 결백한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하는 신정론에 대한 의문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자신의 외적인데서 허물을 찾으려고 했던 자세에서 벗어나서 자신의 내면과 영혼의 뿌리 속에서 문제를 찾을 수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금을 제련하는 문맥이에요. 그러니까 온갖 쇠붙이가 섞여 있어서 불결한 금속을 도가니에 넣어 달구어서 연단하여 금을 정련하는 것처럼, 그것을 자기에게 대입을 시키는 거죠. 그러니까 처음에 나온 그 욥의 반응과는 얼마나 틀립니까? 그는 자기가 정직하게 살아도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를 인정해주실 때까지 하나님의 판결을 기다리겠다는 것이 자기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깨닫게 됩니다. “나는 순금과 가은 존재가 아니라, 더러운 불순물이 많이 섞여 있는 잡티가 섞인 금속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죠. 여기서 그 정하신 뜻이라는 것은 바로 그렇게 주님이 자기를 제련하시고, 단련하시고, 정련하셔서, 순전한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의미입니다.
칼빈이 바로 욥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을 통해서 진정으로 회복시키려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말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요. 그래서 그는 자신의 욥기 주석에서 이 인간의 하나님이 창조하신 순전한 상태는 구속을 통해서 회복하시려는 상태와 동일한데, 이를 두 개의 불어단어로 말합니다. ‘헝듀’라는 말과 ‘앙떼그리떼’라는 단어입니다. ‘온전함’과 ‘전일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디도 찌그러든 곳 없이 온전한 것과, 마음 가득히 주님의 성품이 가득차서 일체를 이루는 그 순전함, 온전하고 순수함, 이것이 바로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이 데려가시려고 하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욥은 하나님이 내게 작정하신 그것을 이루실 것이라는,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올바로 살려고 애쓰는데도 고난이 많고, 저 사람은 왜 대충 사는데도 저렇게 형통할까라는 시편 73편의 시인이 했던 것 같은 고민은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지 못하는 가운데 생겨나는 것이에요. 신앙에 있어서 주님과의 관계는 절대적인 것이에요. 그래서 다른 것이 필요가 없는 거죠. 한 사람이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그 사람밖에 세상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듯이 하나님도 마찬가집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내게는 하나님이 이루고자 작정하신 것이 있다고, 그렇게 일곱 번 단련한 금과같이 그렇게 정금같이 나아오는 것인데, 그런 순전함과 온전함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실 텐데 이렇게 해서라도 이루고자하는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구나!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일은, 내게 작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시는데, 내게 작정하신 일뿐만 아니라, 다른 각 사람들에게 또 다른 무언가 이 세상에 있는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이 있다면 누가 막을 수 있겠으며, 왜 이루어지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것이죠. 그러니 피조물을 향해서 당신 자신의 의지를 펼치심에 실수가 없고 그 의지를 가로막을 것이 없다면,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과의 교제 속으로 나아오도록 보다 더 온전하고 그리고 순수하게 만드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이 계획을 누가 철회시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났을 때에 주님이 하셨던 말씀처럼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너에게 고난이니라” 그러셨죠. 말이 무언가 걸리적거리는 것이 있어서 발로 찼는데 그것이 가시덤불 덩어리에요. 피해가야지 발로 계속 차니 치워지지도 않고 그 뒷발에 끊임없이 상처만 더 늘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온전하고 순전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거룩한 계획은 반드시 이루실 계획이고, 그래서 울의 의무는 하나님의 그 뜻을 이해하면서 사는 거요.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일어나는 좋은 일들뿐만 아니라 괴롭고 아프고 힘든 모든 일들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기면서 그러면서 이것들이 내 마음 속에서 주님을 닮아가도록 하나님이 나에게 지워주신 십자가라고 생각을 해야 되요. 때로는 그것이 자기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고난이라도 그것을 십자가로 짊어지고 주님을 끊임없이 의지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작정하시는 일들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높은 건물이나, 혁혁한 일, 사역을 통해서 어마어마한 일들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에 비하면 그것들을 통해서 받으시는 영광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연단을 통해서 우리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죠.
온 우주에 반짝이는 별들과 그 어마어마한 은하계의 운동들은 우리에게 찬탄을 자아내게 만들고, 그별을 바라고는 우리 인간의 하찮음을 깨닫게 만들어 주지만, 사실은 그 인간 없는 우주를 통해 받으시는 영광보다는, 그 우주 앞에 자기가 티끌인 것을 깨닫고 주님께 참회하는 인간의 마음 하나를 통해 받으시는 영광이 더 큰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그때까지 주님을 깊이의지하면 살아가는 가운데 나를 향해 작정하신 온전하게 하시려는 그 계획을 끝까지 이루어드리기에 충성스러운 삶을 살고, 섬기며 살아가고, 일하며 살아가는 모든 것들, 사람들과의 만나고 헤어지는 속에서 고통과 괴로움과 모든 것들, 이런 것들을 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작정하신 뜻들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주 앞에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