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전반에 대한 설명 프랑스에서 시작해서 전 세계로 퍼짐
녹취자: 변미영
2013.09.24 종교개혁여행(프랑스 파리)
프랑스에서 꽃이 폈다는 것은 프랑스가 개신교가 됐다는 뜻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무르익어가지고 이것이 전 유럽에 수출이 되면서 그러면서 전 유럽 전체를 불과 30,40년 만에 뒤집어놓는 그런 커다란 개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향하고 있는 파리는 원래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는 아주 작은 마을인데 로마제국시대 때에 여기가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로서 부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시다시피 프랑스는 산이 없는 평평한 평지입니다. 그래서 외적으로부터 공격이 매우 심했고 또 여기가 영국처럼 춥고 습기가 많고 별로 땅이 기름지지 못하면 탐을 안 냈을 텐데 보시다시피 무슨 나무든지 곡식이든지 씨만 뿌리면 엄청나게 수확을 거두는 기름진 땅입니다. 전체가. 그래서 프랑스가 요리로 유명할 수 있었던 이유는 뭐냐 하면 저 북쪽으로 한대 식물로부터, 남쪽으로는 따뜻한 아열대식물까지 그리고 저 위에 알프스산지로부터 아래 남부로는 해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류의 먹거리들이 수없이 생산되는 곳이기 때문에 여기서 프랑스 요리가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후에 보게 될 느와용이라는 곳은 칼빈이 태어난 곳이고 그리고 그 칼빈이 거기에서 우리로 말하면 초등교육을 받은 곳입니다. 그리고 이제 파리로 가서 거기서 마르슈, 몽테큐 대학, 대학이라는 게 사실은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받고 그러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말하자면 종교개혁가 칼빈으로 서서히 변모하게 되는 사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그 종교개혁의 큰 뜻을 이해해야겠다는 큰 뜻을 품고 오셨는데 여기 프랑스에서 지금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종교개혁지만해도 저희들이 한 20일 정도를 돌아다녀야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프랑스는 지금도 90%넘는 인구가 가톨릭교도이고 종교개혁시대 때도 사실은 엄청난 핍박으로 이 가톨릭을 고수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종교개혁의 유적지를 의도적으로 잘 보존하지를 않았습니다.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흔적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역사의 숨결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위그노라는 이야기를 들어 봤을 것입니다. 휘그노라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바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의미하고 그 유명한 1572년에 바돌로묘 대학살을 통해서 2만 여명의 개신교도들이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프랑스는 사실은 아마 전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나라이고 그리고 여러분 알다시피 프랑스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마르세이유 행진곡을 들어보면 우리나라 극렬운동권 가사를 생각나게 할 정도로 그렇게 피의 처절한 투쟁이 있는 그 감진 역사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처럼 이 나라가 자유와 평강과 박애를 강조하는 정말 그런 높은 수준의 인본주의를 구가하는 나라가 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고 엄청난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런 역사를 배경으로 해서 이 나라가 이렇게 인본주의적인 국가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많이 오지 않았고 이 사람들이 생활을 잘 모르지만 어제께도 우리교회의 교인 하나가, 자녀 하나가 임준택 장로님 아들인데 파리국립오페라단 단원으로 여기에 ....... (잡음) 사람들이 너무 자유롭지만 속에 들어 가보면 너무 공허하고 우울증 환자들이 너무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합니다. 그런 한계를 또한 가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의외로 전문적인 그 종교개혁을 전공한 사람들을 가이드로 구하는 줄 알았더니 그런 사람들을 구하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가이드 하시는 분들이 설명을 하고 부족한 부분들은 제가 간간히 보충을 해서 설명을 하면서 종교개혁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이 한번 여행으로 사실은 우리들이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고 이번 여행에서 윤곽을 크게 뜨시고 돌아가시면 역사책을 보거나 설교를 들을 때 역사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여행을 하고 간 것과 안 하고 간 것은 현저하게 다릅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그런 역사의 숨결을 느끼면서 앞으로 책을 읽고 공부해나가기 바라고 가능하면 저 같은 경우는 좀 시간이 없어서 못한 부분인데 종교개혁을 좀 꾸준히 한 3년에 1번 정도씩 와서 보면서 재충전하고 예전에 보지 못했던 곳을 다시 답사하면서 찾아내고 하는 이러한 일들을 계속하는 것이 우리의 영적인 생활의 증진을 위해서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부디 은혜로운 여행이 되시기를 바라고 그리고 항상 우리들의 현재 누리는 있는 이 복음적인 생활, 복음적인 예배 그리고 복음적인 교리 이런 것들이 확립되기 위해서 어둠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 흘리며 죽었는가, 그리고 그들을 죽음을 무릅쓰고 굳게 붙들도록 만들었던 복음의 가치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느끼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반성하면서 그렇게 종교개혁지를 돌아보도록 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영적인 생활에 큰 유익이 되리라고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지순례도 한번 갔다 왔지만 성지순례는 성지순례대로 너무 좋았지만은 종교개혁을 이렇게 돌면서는 성지순례에서는 감동을 받았지만 종교 개혁지를 돌아보면서는 실제 나의 생활과 직접적으로 피부에 부딪치는 그런 감격을 참 많이 느끼면서 재충전의 시간들이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은혜로운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시내에서 인문학자들
이름벽 앞에서 칼빈이 조상들에 대해 설명함
녹취자: 변미영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 학교 졸업생뿐만 아니라 유럽 지성사회의 영향을 끼친 나라를 막론한 거장을 여기에다 모두 기록을 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나오고 이쪽에 아비챈나라는 사람도 나오고 여기에 바테 신학자..... 몰리나라는 ......몽테스키외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나옵니다.(주변이 너무 시끄러워서 인명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음)
2013.9.24 종교개혁여행(프랑스 파리)
여기가 왜 중요하냐면 칼빈이 우리가 오후에 가게 될 느와용에서 아까 가이드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서 1709년에 태어나 거기서 까벳드라는 초등학교를 다닙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쟝 코뺑이라는 사람인데 그 지역을 피카르드 지역이라고 합니다. 거기는 약간 반골기질이 있는 지역입니다. 여기에서 제대로 피카르드 지역의 기질을 물려받고 태어나서 그런데 할아버지는 원래 배를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제 배를 포기하고 통나무 숯탄 같은 것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그리고 아버지는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사람이어서 그 동네를 떠나서 느와용으로 법학을 공부하겠다고 옵니다. 시골에서 청운의 푸른 꿈을 안고 거기서 공부를 하는데 사실은 제대로 공부는 못하지만 식자층에 끼게 되면서 그 대신 법학과 여러 가지를 공부하다가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따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독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당 쪽에 접근을 해서 성당의 주교 비서도 하고 참사회 회원도 되고 교회의 돈을 만지는 관리인이 됩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로부터 약간 반골기질을 정의감과 불의를 보지 못하는 반골기질을 칼빈이 물려받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거기에 와서 사회적 상당한 지위를 얻게 되었기 때문에 거기서 호텔을 경영하고 있는 주인집 딸을 만나 아주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부잣집 딸이었습니다. 그 동네에서 가장 예쁜 자매였다고 합니다. 결혼을 합니다.
원래 쟝 칼빈이라는 이름은 코뱅이 원래 불어인데 코뱅은 대머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아버지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삼촌들이 대대로 내려오는 뱃일을 하는 일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젊은 나이에 이 사람들이 도전정신을 가지고 파리로 오게 됩니다. 파리에서 자리를 잡아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해서 칼빈이 파리에 올수 있었던 이유도 삼촌들이 터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올 수 있었고 아버지가 보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성당 참사회 회원이었고 주교 비서였기 때문에 신분은 높지 않았지만 높은 사람들을 의지할 수 있어서 그 사람들과의 인맥을 사용해서 자기 아들 칼빈을 최고의 교육을 시킬 수 있도록 귀족 자제들과 함께 친구로 만들어줍니다. 그럴 수 있는 권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그 아버지가 파문을 당했는데 그 이유가 공금을 횡령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사실 많은 학자들은 그게 사실이 아니고 이것이 교회에서 명령을 내려도 신분상으로는 그 명령을 준수해야할 위치에 있었지만 이 사람 자신은 만만하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이야기해서 눈에 나서 잘릴 때에 누명을 확 씌워서 잘랐다고 합니다.
어쨌든 칼빈은 거기에서 공부를 하고 책에 보면 파리대학 파리대학이라고 나오는데 꼴레쥬라는 단어는 영어로 칼리지를 번역한 건데 그 콜레쥬는 대학이 아니라 그냥 일반학교 모두를 의미하는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와서 다닌 학교가 마르슈 콜레쥬를 다닙니다. 그게 말하자면 중학교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몽테규 콜레쥬를 들어가 그 몽테규 콜레쥬가 우리로 말하자면 고등학교 쯤 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이게 칼빈 생애에서 여기가 왜 중요하냐면 여기에 루터나 에라스무스로부터 개혁사상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이러면 안 된다고 하면서 소위 인문주의자들이 여기에서 모인 본거지였습니다. 그런데 인문주의자들이 본거지로 모이게 된 이유가 뭐냐 하면 소르본느 대학이 있잖아요. 여기에 가톨릭이었는데 프랑스와1세는 교황에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뭐나면 뭔가 일어나고 있는 이 변화의 물결들을 자기가 후원해서 신학문의 터전을 여기에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몽테규 대학을 만들고 유럽의 쟁쟁한 학자들을 거금을 주고 초청을 하게 됩니다. 안 온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몽테규 대학을 만드니까 그때에 에라스무스와 같이 가톨릭교도이지만 인문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그중에 있었던 사람들이 브리소네 데다쁘레, 기욤파렐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브리소네 데다 쁘레, 기욤파렐 이런 사람들은 가톨릭에 있는 사제들이었는데 여기에서 자끄 르뻬브르 데따블이라는하는 번역을 하면 데따블 지방에 있는 자끄 르뻬브르라는 사람이 에라스무스 같은 이 프랑스의 에라스무스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거장이 여기에서 인문주의 사상을 가르치는데 이 사람이 최초로 희랍어 성경을 블란서 성경으로 번역하게 됩니다. (정해진 버스정차시간과 식사시간이 되어서 설명을 중단함)
파리 - 칼빈의 교육내용
녹취자 : 김미현
2013.9.24 종교개혁여행(프랑스)
그래서 그 당시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카톨릭에서는 평신도는 성경을 직접 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것을 만들어내고 신약성경을 먼저 만들어 냅니다. 이 사람은 희랍어와 라틴어, 고전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고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사상이 무엇이냐 하면 철저한 개혁신앙을 가졌다기보다는 ‘이렇게 우리의 모든 신앙과 삶의 기준이 성경이어야 하지 이런 식으로 교회가 타락하고 교회에 사제들의 탐욕이 지배하면서 그런 것들을 우리의 삶과 생활의 근거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사상들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소위 얘기하는 르뻬브르 데따쁠의 가르침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마르틴 루터는 자기의 복음서 주석에서 이 사람을 16번이나 이 사람 이름을 언급을 하면서 자신의 스승으로 칭송을 합니다. 그런데 칼빈이 이 데따쁠에게서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만납니다. 레이어라는 철학자를 비롯해서 꼬르디에, 데따쁠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여기에서 커다란 사상의 감화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개혁 사상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데 아직은 여기에서 완전히 개혁신앙으로 돌아섰다고 말할 수 없고 후에 이 사람이 개혁신앙으로 깊이 회심하게 되는 일이 부르주라고 하는 곳에서 법학을 공부할 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장꼬뱅은 칼빈이 법률학자가 되기를, 변호사가 되어서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잘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삼촌들이 있는 파리로 이 아이를 보내게 되고 머리가 영특했기 때문에 여기서 법학을 비롯해 많은 학문들을 배우면서 틈나는 대로 신학을 공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몽테규 대학 시절에 철저하게 공부하면서 특히 교부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면서 개혁사상의 지적인 기초들을 쌓게 됩니다. 우리들이 본 이름이 쭉 써져 있는 자리 거기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면 프랑수아 1세의 지원을 받아서 만들어진 몽테뉴 대학의 건물이 있고 그리고 바로 그 골목에서 칼빈이 하숙을 하면서 공부를 한 곳이 바로 우리가 지금 본 그곳이기도 합니다.
칼빈이 결국은 여기서 만난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개혁사상을 먼저 만난 것이 아니라 프랑스 인문주의자들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인문주의라고 하는 휴머니스트들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이냐 하면 소위 얘기하는 르네상스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르네상스라는 말은 이태리어로 rinascimento 라는 말에서 오는데 레는 다시고 나스치멘토는 탄생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재탄생 혹은 재생, 재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탄생이라고 했으니까 언젠가는 탄생한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원래의 탄생은 어디였느냐를 볼 때 그것이 소위 얘기하는 그레꼬로만 월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사상들입니다. 이 얘기를 하면 르네상스 이야기를 아쉽지만 조금만 언급을 해야지만 프랑스 인문주의자들이 설명이 됩니다. 이 르네상스는 사실 맨 처음에 일어난 운동이 예수운동으로 먼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르네상스를 ‘인본주의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르네상스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르네상스가 사람들은 14세기에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난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맞는데 사실은 요즘 학설들은 이 르네상스의 기원을 14세기가 아니라 13세기 그 너머서 12세기에서부터 이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12세기의 르네상스를 선구적으로 이끌었던 인물 두 사람을 꼽는데 한 사람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레드릭 2세라는 사람과 그리고 여러분들이 잘 아는 사람인 아시스의 성자인 프란시스가 이 르네상스의 선구자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설명을 들을 때 많은 사람들은 뜨악합니다. 왜냐하면 아시스의 프란시스는 아는바와 같이 프란시스 교단을 세운 사람이었고 수도사였고 일체 교황을 비판하지 않고 순종적으로 청빈운동을 펼치던 존경받는 신비가요, 기독교 사상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어보면 이 사람 아시스 프란시스 속에는 아주 중요한 14세기, 15세기 아니 18세기 계몽주의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본주의를 화려하게 꽃피울 수 있는 유전자가 이 사람 아시스의 프란시스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프란시스가 활동하던 아시스는 이태리 중부 지방에 있는 하나의 마을인데 거기서 지금도 아시스의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느냐 한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당시 이태리 사회는 사회가 크게 세 개의 계급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사제계급, 끌레르꼬라는 사제 계급들이 있었고 그 다음 부류의 사람들이 수도사들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있는 사람들이 라이코스라고 하는 평민들이 있었습니다. 예전까지는 이 구도가 위로부터 사제들이 있고 수도사들이 있고 그 밑에 평민들이 있는 구조였는데 그런데 아시스의 프란시스가 청빈운동을 펼칩니다. 청빈운동을 펼쳤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아시스의 가르침을 부담스러워하면서 이단으로 몰아갔습니다. 그때에 교황은 가만히 사태를 파악해 보니 마음에는 썩 들지 않지만 이런 자가 있어서 계속 청빈운동을 펼쳐야지만 기존에 있는 사제들이 긴장하게 될 것이고 그 때에 교황으로서 이 사제들을 다스리는데 정치적으로 유용하다고 판단이 되어서 교황청에서 승인을 해주게 됩니다. 실제로 아시스의 프란시스는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교황이나 다른 타락한 사제들을 비판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삶으로서 자기 길이 옳다는 것을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을 르네상스의 선구자로 꼽느냐하면 실제 자기는 그런 제도를 비판하지는 않았지만 이 사람의 사역과 설교 속에서는 세 계급으로 되어 있던 사제, 수도사, 평민 이 계급을 수직으로 세운 질서에서 옆으로 확 흩어 버립니다. 그래서 ‘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다 평등하다.’라고 하는 사상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이 만연하게 퍼졌을 때에 이태리 사람들이 아주 커다란 감동을 받게 됩니다. 이태리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의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테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신론자입니다. 또 다른 부류는 끄레덴테스, 열심히 믿는 신앙인들입니다. 세 번째는 라이코스라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은 ‘그저 종교는 종교고 삶은 삶이다.’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사람들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열렬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카톨릭 신자들이 아니라 세 번째 무리의 사람들 ‘종교는 종교고 삶은 삶이지.’ 이렇게 생각하던 사람들의 정신에 혁명이 일어난 것이 바로 르네상스입니다.
그럼 이 르네상스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사람이 신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 질서 속에서 깊은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그러면 인간은 과연 이렇게 객관적으로 하나님만 있고 인간은 하나님에게 부속품과 같은 하잘 것 없는 존재인가?’ 이런 것에 회의를 품다가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 성경에 대한 새로운 연구와 특별히 그리스 시대 때의 사람들의 삶, 그리스 시대 폴리스 시대 때를 잘 알지만 노예가 있었지만 그렇게 노예를 함부로 할 수 없는 시대였고 인간 각자의 존엄성이 깊이 존중받던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가 바로 그리스 시대 사회였습니다. 그 이상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우리의 이것은 인간사는 것이 아니다.’ 라는 ‘이 모든 신이 지정하지 않은 잘못된 억압과 질서는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라는 도전적인 명제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항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에 물든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인문주의를 꽃피우게 됩니다. 예술은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피렌체와 베니스 특히 피렌체를 중심으로 메디치가의 전적인 후원을 받으면서 어마어마한 예술의 부흥이 일어나게 되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이런 사람들이 다 이태리 피렌체 출신 들입니다. 이 예술운동이 그 다음에 북부로 올라가서 이 예술에서 파악한 인문주의 사상들을 학문으로 정리해서 사상화 하고 철학화하면서 책으로 쏟아져 나온 것이 북쪽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인문주의가 유럽으로 광범위하게 수출이 되면서 그 때에 일어나고 있는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가들 예를 들면 프랑스의 왈도파라든지 영국에서 일어난 위클리프, 체코의 얀 후스 같은 인물들에 의해서 개혁사상이 고취되면서 개혁사상의 기본적인 철학과 토대들을 인문주의 운동이 제공해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인문주의 운동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눠집니다. 하나는 무신론적인 인문주의, 종교와 우리 삶은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중도파 그리고 하나님을 잘 믿으면서도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해서 새롭게 성경을 통해 발견해야 한다는 사상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세 번째 사상이 종교개혁의 커다란 자양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리스 로마 시대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이 참으로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가 하는 존엄성과 가치를 발견 했는데 그 발견한 것을 기독교에 접목시키니까 초대교회에 대한 연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거대한 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어거스틴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저작들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질 때 14, 15세기의 이 지금 현재 우리 앞에 16세기에 펼쳐지고 있는 이 기독교의 모습은 원래의 사도들이 우리에게 물려주려고 했던 그 참된 기독교 신앙의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렇다면 이것은 성경으로부터도 어긋난 신앙이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원래의 순수성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라는 기독교적인 신앙의 운동으로 접목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물을 모든 종교개혁자들이 먹는 것인데 이 종교개혁자들이 원래는 카톨릭 세계에 태어난 사제들이었습니다. 이 물을 먹으면서 이 사람들이 커다란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면서 성경을 직접 대면하면서 복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복음을 만난 사람들이 이 프랑스에서 성숙하고 여기서 핍박으로 칼날을 내리치니까 이 사람들이 전부다 피신해서 이 사람들이 각국으로 흩어지면서 여기서 배운 인문주의 사상과 개혁적인 사고들을 많은 나라에 전파하면서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고 칼빈이나 빠렐, 루뻬부르 데따쁠 같은 사람은 끝까지 카톨릭에서 완전히 개혁진영으로 돌아서진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고 그리고 이 사람들이 여기서 빠렐이나 칼빈 이런 사람들이 여기서 핍박을 하니까 스위스 제네바로 가서 거기서 개혁운동의 커다란 뜻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오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누아용 - 건물들 복원관련
녹취자 : 김미현
2013.9.25 종교개혁여행(프랑스)
굉장히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1956년도에 지은 것이기 때문에 나무를 보면 나무가 새것인데 뭔가 옛날 앤틱하게 하려고 꾸민 흔적이 나타납니다. 이것은 그림을 보고, 사진을 보고 추정을 해서 옛날 형식으로 만든 것입니다. 일단 제가 생각하기에는 들어가서 보고 그리고 와서 여기서 좀 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누아용 - 노틀담 성담 앞
녹취자 : 김미현
이제부터는 조금씩 공부를 하겠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이번 여행을 위해서 따로 준비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내 기억에 있는 것을 가지고 얘기를 하니까 여러분들이 자료를 보면서 정리를 하도록 하십시오.
2013.9.25 종교개혁여행(프랑스)
자 우선 여기가 지방이 삐까르 지방이라고 합니다. 영어로 삐까르입니다. 프랑스 말은 삐까흐라고 합니다. 르 발음을 안 합니다. 여기는 다른 나라와 수많은 접촉을 하면서 사실은 환란을 많이 겪은 지방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칼빈 생가도 파괴된 것이 스페인이 여기를 쳐들어와서 그래서 초토화시키면서 모든 마을을 다 부쉈고 칼빈 생가만 사실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다 부서지고 이제 아까 가이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독일군들이 왔을 때 칼빈 생가였다는 표지를 남겨두고 이것은 1954년에 새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거기 얘기하기 전에 여기를 먼저 얘기하면 여기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와서 주교가 파견된 것이 5세기경이라고 봅니다. 6세기경에는 제대로 된 교회가 세워졌고 이 건물은 12세기 건물이니까 벌써 800년 이상 된 역사를 가지고 그 사이에 증축되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방 자체가 그런 많은 환란을 겪었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믿지 않는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지방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이 그런 지역인데 아버지 제럴드 코뱅이 대대로 이 지방에 살면서 삐까흐 지방의 기질을 물려받았고 엄마는 아주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고 이 누아용 지역에 도시마다 ?? 성인이 있습니다. 그 ?? 성인이 안나입니다. 안나가 누구냐 하면 성모 마리아의 엄마입니다. 그 유골이 여기에 있고 그래서 어렸을 때에 .. 칼빈, 깔뱅이 헷갈리는데 원래 이름이 칼빈이 그 당시에 라틴어로 글을 썼으니 요한 레스 칼빈 루스 이것이 칼빈의 필명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사는 곳이 프랑스였고 제네바에서도 프랑스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꺌방입니다. 장 꺌방입니다. 장은 존 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영어권에 많이 소개가 되니까 칼빈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꺌방이라고 안 해도 다 알아듣습니다. 그 아버지로부터 그런 기질을 물려받습니다. 그래서 칼빈이 아주 예민한 사람이었고 힘이 없어서 평소에도 누가 약속시간을 어기면 굉장히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힘들어 했다는 것은 좋은 표현이고 까칠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기질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여기서 떨어진 시골에 있다가 누아용으로 공부를 하러 옵니다. 법학을 공부하려고 하다가 여러 가지 배워서 여기에서 귀족들과 교분을 가지면서 성당에서 일하고 여기 재정을 보게 됩니다. 사제는 아니고 우리로 말하자면 교회 행정실장 중 하나여서 공부를 하게 되면서 교분을 쌓고 칼빈의 아내는 아주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약간 신비주의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칼빈의 회고에 의하면 엄마가 자기 손을 이끌고 성 안나의 유골에 1년에 딱 한번만 보여주는데 입을 맞추기도 하고 순례를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로부터는 경건한 신앙, 신비적이고 경건한 신앙을 아버지로부터는 약간 현실에 항거하는 기질들을 물려받습니다. 여기에서 칼빈의 생애를 나누면 여기에 있는 때가 14살까지입니다. 칼빈의 생애가 1기가 14살 까지 여기 있다가 여기에서는 까떼뜨라고 하는 학교가 있는데 여기서 귀족과 사제들의 자녀들이 다니는 사제들의 자녀, 무슨 사제가 있느냐 하는데 그 당시에는 결혼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이 다니는 학교 빠뻬뜨라고 하는 곳에서 교육을 받고 아버지가 교육에 아주 심혈을 기울여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하려고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시민 계급이 됩니다. 어머니는 여기서 의회 의원까지 됩니다. 그러다 간 곳이 빠리, 마흐슈, 몽떼뉴, 여기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거기서 마흐슈 그 당시 중학교, 몽떼뉴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때 나이가 18세였는데 그 다음에 간곳이 오를레항이라는 곳으로 갑니다. 오를레항이라는 곳으로 가서 1년 내지 2년 법학을 공부하고 그 다음에 간 곳이 브르쥬라는 곳에 가서 19, 20, 21살 3년 내지 4년 정도 있다 다시 빠리로 돌아와서 다시 공부를 하고 그 때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고 그리고 다시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로 옵니다. 그래서 여기로 왔다가 여기서 머물다가 다시 빠리로 가서 종교개혁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칩니다. 여기서 장학금을 받으셨다고 어제 선생님이 말씀하셨는데 정확한 설명은 여기에 있으면서 14살 되던 해에 이 아이가 아버지의 빽으로 말하자면 우리 성당에 보좌신부라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하는 그런 것으로 등록을 시킵니다. 그래서 모든 학비가 나오고 프랑스에 가서도 공부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여기를 배경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여기는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종교개혁가들의 상당히 중요한 본산지가 되고 여기서 인문주의들이 아주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개혁으로 유명한 지역이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 석상 같은 것들이 다 있었습니다. 성당마다 다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는 워낙 종교개혁이 강하니까 다 떼려 부순 것입니다.
누아용 - 칼빈생가 및 칼빈박물관 (1)
녹취자 : 김미현
2013.9.25 종교개혁여행(프랑스)
단칼로 누구든지 날려버릴 것 같은 그런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칼빈이 굉장히 유했습니다. 아버지 보다는 엄마가 그렇게 미인이었습니다. 동네에서 유명한 미인이고 돈이 많은 부르주아고 예쁜 집으로 장가를 갔습니다.
누아용 - 칼빈생가 및 칼빈박물관 (2)
녹취자 : 김미현
2013.9.25 종교개혁여행(프랑스)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칼빈 앞서서 이미 종교개혁에 헌신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브리스오네 ?? 르뻬브루 데따쁠 이라던가 그 다음에 빠렐이라던가 이런 사람들과 같이 헌신했던 사람들입니다. 칼빈이 1509년에 태어났는데 저 사람이 1880년이니까 굉장히 선배들입니다. 이러한 선배들이 새로운 인문주의의 물을 마시면서 이제 기존의 카톨릭의 교리와 세속권력으로 백성들을 지배하는 이 방식에 대해서 근본적인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던 사람들입니다. 칼빈은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기에 보면 르페브르 데따쁠이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데따쁠은 데따쁠이라는 지방 이름입니다. 드는 그 앞에 오?? 데따쁠이라는 지방에서 있는 지방 출신의 자끄 르페브르라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으로부터 심오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저 사람을 프랑스의 에라스무스라고 부릅니다. 루터도 저 사람을 스승처럼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제 말씀드린 대로 저 사람은 개신교로 개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엄마를 닮아서 예쁜 얼굴입니다. 그런데 칼빈의 말년에 병들어서 31가지 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별명이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입니다. 이 사람은 마가르트 마가레라는 사람이고 엄마는 아닙니다. 이 사람이 프랑수아 1세,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보면 맨 앞에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치는 헌정이라고 나옵니다. 여기에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자료가 위층에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초판인데 거기에 보면 1536년에 초판을 찍는데 초판 찍는 것이 바질에서 찍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익명으로 냈습니다. 가명으로 냈는데 거기에 보면 헌정에 이상하게 프랑수아 1세라고 안 되어있고 마르게리뜨 당골레라고 나옵니다. 이 사람은 프랑수아 1세의 여동생입니다. 그 사람은 종교개혁 사상을 가지고 개혁자들을 굉장히 음으로 양으로 도왔던 왕족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하고 깊은 관계가 있었습니다. 프랑스가 국가로서 처음 모습을 갖춘 것이 4세기였습니다. 여러분 학교 다닐 때 메로디 왕조, 카를로 왕조, 부르봉 왕조 등 배웠습니다. 7개 왕조에 70명의 왕들이 있습니다. 이 때 종교개혁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프랑수아 1세였습니다. 비교적 온화한 사람이었습니다. 프랑수아 1세가 있고 앙리 2세가 등장합니다. 아들입니다. 앙리 2세는 프랑수아 2세가 등장하고 그 다음에 앙리3세, 앙리 4세 그 다음에 아니 프랑수아 1세 앙리2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가 등장합니다. 샤를 9세 때에 1572년 바돌로매 대학살이 벌어집니다. 바돌로매 축제를 기념으로 해서 면밀하게 계획을 가지고 개신교라는 개신교들은 살인계획을 가졌다가 일제히 공격을 하는데 개신교에서는 그런 계획이 있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파리에서만 8000명에서 1만 명이 죽고 전국적으로 2만 명이 같은 날 다 죽어버립니다. 비참하게 살육을 합니다. 그 일이 샤를 9세 때에 일어나고 그 다음에 앙리 3세, 4세 나오고 그 다음에 루이 13, 14세 14세가 태양왕입니다. 절대왕조입니다. 15, 16세가 앙투아네트 왕조와 함께 ??에서 콩코드 광장에서 목이 잘린 사람입니다. 사실은 조금 억울한 면이 있는 것이 앙리 16세가 결국 모든 것을 짊어지고 죽임을 당합니다. 800명이나 살육을 당하는데 사실은 저 위에 14세까지는 불만이 많았으나 워낙 유능했습니다. 꼼짝도 못하게 밟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다가 15세 때 할아버지 아버지 계속 불평이 누적이 되는데 16세는 그것을 할 수 있는 통치능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 다 거기서 폭발을 해서 왕이 만만하니 밀어붙여 죽이고 17세는 왕이 되었는데 명목상이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다가 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공화정으로 넘어갔다가 공화정이 너무 민주주의가 혼란이 되니까 누구 한 사람이 나왔는데 그 사람이 나폴레옹이고 나폴레옹이 무너지면서 완전히 민주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누아용 - 칼빈생가 및 칼빈박물관 (3)
녹취자 : 김미현
2013.9.25 종교개혁여행(프랑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1561년, 칼빈이 1564년에 죽었으니 죽기 3년 전에 쁘아실 이라는 곳에서 종교회의가 열립니다. 카톨릭도 사실은 루터에 이어서 칼빈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시달린 것입니다. 프랑스가 왜 심각했느냐하면 그 때 프랑스 인구가 80만 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18만 명이 개혁신앙 때문에 추방되거나 조국을 떠난 것입니다. 그래서 프랑스의 산업 자체가 주저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스위스로 도망가서 여기서 시계 금은세공기술 방직 이런 것들이 최고였는데 그 사람들이 사회 계급에서 중간층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교개혁을 아주 하층과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중간계급층 사람들이 확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종교개혁 사상을 가지고 도망을 가서 스위스에 시계와 섬유가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간 게 1530~1570 몇 년에 그렇게 핍박이 있으니까 1530년경부터 시작해서 1580년 사이에 사람들이 다 도망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가서 프랑스에서 가지고 있던 최고의 기술들을 활용해서 돈을 벌기 시작해서 그 사람들은 주위에 있는 나라들은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이나 이런 것들을 못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사실은 그렇게 활동을 하면서 18세기 유럽의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종자 씨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이 칼빈의 제네바에 가보니 1550년도에 칼빈이 시정에 관해서 연설을 하면서 “우리는 땅도 적고 척박하기 때문에 먹고 살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공업화와 창업이다.” 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16세기 중반에 그 얘기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안 되는 얘기이고 그 얘기는 유럽에서도 150년, 200년 후에나 나오는 이야기인데, 그런 칼빈의 사상이 프랑스 시민사회에 있는 경제 감각, 산업 감각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직도 프랑스에 위그노라는 이름을 붙인 시계가 나옵니다. 그 사람들이 스위스로 넘어갔기 때문에 거기서 화장품 산업이 발전한 것, 석?? 이런 것들 이런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건 결국 여기서 성찬론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차이를 좁혀 보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사실 카톨릭도 한편으로 개신교를 박해했지만 어떻게 하든지 품어보려고 했던 흔적들도 역사적으로 있고 칼빈이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여러분들이 충격을 받겠지만 카톨릭과 하나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교회에 대한 생각은 카톨릭이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생각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다만 중간에 성경의 전통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교회를 망가뜨리는 것들만 제거할 수 있다면 합쳐 보려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칼빈이 직접 여기를 가지는 않습니다. 데오도로 배자를 보냅니다. 배자를 보내서 논쟁을 하게 하는데 결국 합의점을 못 찾습니다. 항상 합의점을 못 찾고 나면 핍박이 있게 됩니다. 저쪽 그림을 보면 칼빈이 이제 64년에 우리 나이로 56세가 될 때에 마지막으로 이 사람이 죽습니다. 얼굴을 보면 알지만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위에 병이 있어서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성경이 놓여있고 결국 죽습니다. 이 사람이 제네바에서 목회를 할 때 얼마나 순수한 정신으로 목회를 했는지 배자는 이 선생님을 최고의 스승으로 알고 일평생을 따랐는데 배자가 무엇이라고 얘기 하냐 하면 “자기가 이 선생님을 그 긴 세월 동안 지켜보는 동안에 기독교 역사상 모든 교부들보다도 가장 탁월한 경건을 유지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때 이제 ??볼쉐라는 사람이 칼빈이 이렇게 했지만 여기에서는 사실은 수많은 반대자들에게 에워 쌓여 있었기 때문에 하루라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성격이 외향적인 사람이 아니라 MBTI검사로 ISTJ가 나온다고 합니다. 내성적이고 혼자 조용히 앉아서 공부하고 그럴 사람인데 전혀 자기와 다른 생김새하고는 다른 인생을 산 것입니다. ?? 폭로를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여기서 쫓겨난 것도 사실은?? 때문이다. 심지어 동성애자였다고 폭로를 합니다. 그것이 사실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서 200년 동안 유럽에서 이 사람 책이 안 읽힙니다. 학자들은 이것이 사실이 아닐 것 이라고 보지만 어쨌든 그렇게 커다란 손상을 입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목회를 하는데 이 사람이 죽은 다음에 배자가 무엇이라고 하느냐하면 “세상이 너무 시시하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아무 기쁨이 없다. 이 세상이 선생님 살아계실 때의 세상이 아니다.” 그럴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에 여기서 숨을 거두면서 하늘나라로 가게 됩니다.
누아용 - 칼빈생가 및 칼빈박물관 (4)
녹취자 : 김미현
2013.9.25 종교개혁여행(프랑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크에서 결혼을 합니다. 스트라스부르크에 가서 칼빈이 아주 훌륭한 한 분을 만납니다. 마틴 부처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분은 칼빈보다 훨씬 연장자였고 선배였습니다. 그리고 칼빈이 어린 나이에 맨 처음 제네바에 갔을 때 28, 29 밖에 안 되었는데 3~4년 하다가 스트라스부르그로 갈 때 31살인가 34살 쯤 됩니다. 거기에 가서 이분은 스트라스부르크에서 이미 스트라스부르크라고도 나오고 스트라스부르라고도 나오는데 이것이 독일 영토가 되었다가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가 해서 독일은 스트라스부르크 프랑스는 스트라스부르라고 해서 이름이 헷갈리는데 거기는 수많은 난민들이 모이는 곳이었고 종교개혁의 자유가 주어졌던 도시였기 때문에 거기에 많이 모였는데 칼빈이 물론 거기서 독신으로 살았다가 마틴 부처는 사제였다가 회심하고 종교개혁가가 되었는데 유명한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칼빈에게 결혼하라고 권합니다. 그런데 칼빈이 미모도 있고 인텔리겐차였고 26살에 이미 유럽에서 최고의 지성인이었는데 자기보다 8살 더 많은 얼굴도 보시면 알지만 평균 이하입니다. 과부와 결혼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깊은 그 안에 사랑에 빠졌을까 하는데 그것이 아니었고 당시에 마틴 부처도 그랬고 종교개혁가들이 전부 다 과부나 수녀하고 결혼을 많이 합니다. 루터도 수녀와 결혼하고 이 사람 마틴 부처도 도망 나온 수녀와 결혼합니다. 왜냐하면 수녀와 과부는 그 당시에 아무 방지책 없는 범죄의 대상이었습니다. 수녀는 카톨릭 사제나 이런 사람들이 강간을 해도 처벌을 안 합니다. 과부는 사회적 절대약자입니다. 누가 와서 짓밟아도 재산 같은 것을 빼앗아도 하소연 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개혁자들은 이런 말 하면 미안하지만 구제하는 마음으로 과부들에게 장가를 들어주고 도망 나온 수녀들을 받아준 것입니다. 루터 곁에도 수많은 도망 나온 수녀들이 에워싸고 있었고 루터가 하나씩 하나씩 다 시집보내는데 끝까지 시집 안 가던 자매가 있었는데 너 왜 안 갔냐 하니 자기는 결혼할 이상적인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데 아직도 안 갔냐 했더니 당신이냐고 해서 이 사람과 결혼을 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이델레뜨와 결혼을 합니다. 결혼한 다음에는 아주 사랑하고 개혁신앙을 철저히 물려받아서 마지막에 죽는 순간에도 칼빈 보다 8년 정도 먼저 죽는데 칼빈이 죽을 때 이델레뜨가 숨이 넘어가려고 하니까 죽은 후에 우리들이 물려받을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기업, 안식 거기의 평화에 대해서 쭉 이야기하니까 이델레트가 마지막에 죽을 때에 아무 기운이 없었는데 거의 벌떡 일어나다시피 하면서 큰 소리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로다.” 하고 죽습니다. 종교개혁가 아내답게 죽은 것입니다.
누아용 - 칼빈생가 및 칼빈박물관
(성경의 무게라는 그림 설명)
녹취자 : 김미현
2013.9.25 종교개혁여행(프랑스)
여기 보면 지금 여기 저울이 하나 나옵니다. 저울이 나오고 성경이 얹어져 있습니다. 여기를 사제가 올라가 있고 이것은 사탕입니다. 이것은 칼빈이 그린 것이 아니라 후대에 다른 화가가 그린 그림입니다. 마귀는 마귀고 여기 책이 있는데 카톨릭에서 얘기하는 유전들입니다. 이것은 종이입니다. 예식에 사용하는 것들이고 베드로에게 주었다고 말하는 교황의 열쇠입니다. 그리고 여기 사제가 올라가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을 합해도 성경이 더 무겁다. 성경이 우리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규칙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다 달아봐야 성경 무게에는 어림도 없다. 비슷하게도 절대로 안내려오는 것입니다. 개혁자들이 지켜보고 교황을 비롯해서 사제들이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소용없다. 성경이 훨씬 무섭다.’ 얘기하는 것입니다. 저 뒤에 있는 동전은 ‘노예들이 저 속에 들어가서 노를 저었다.’ 얘기하는 것입니다. 왜 그 이야기가 나오느냐하면 존 칼빈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제네바에 가면 제네바 아카데미 얘기를 해드리겠습니다만 한 사람이 존 낙스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개혁가입니다. 이 사람이 거기서 개혁 사상 때문에 스승은 화형당하고 스승은 위셔트라는 사람이고 이 사람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해밀턴이라는 사람입니다. 주교였는데 개혁사상에 심취되면서 위셔트에게 위셔트는 존낙스에게 영향을 끼쳐서 존낙스가 칼빈 아카데미에 와서 칼빈 선생님에게 공부를 배우는 학생이 됩니다. 그 때 잠시 추방당해서 쫓겨났을 때 이제 포로로 잡혀서 노예선에서 배 밑창에서 배를 젓는 비참한 생활을 합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난을 당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종교개혁 사람들이 체포되어서 형벌처럼 여기에 던져져서 배를 젓는 배 밑창에 벤허에 보면 발 묶어서 못 도망가게 한 그런 노예생활을 했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 놓은 것 같습니다.
여기 보면 칼빈이 앉았던 의자가 있습니다. 칼빈이 앉았던 의자는 아니고 칼빈이 앉아서 쉬는 의자가 아니라 성경 공부를 가르치던 의자였습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매주 금요일말다 모든 성도들을 대상으로 성경 강해를 했습니다. 그 때 그런 것 할 때 저기 앉아서 하고 사람들은 여기 앉고 칼빈은 높은 곳에 앉아서 했습니다. 복제품입니다.
누아용 - 칼빈생가 및 칼빈박물관 (5)
녹취자 : 김미현
2013.9.25 종교개혁여행(프랑스)
여기도 사실은 칼빈의 흔적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칼빈의 경우에는 흔적들이 아까 얘기하다 말았는데 칼빈의 생애 1기가 여기 누아용에서 14살까지이고 파리로 가서 14살부터 18살까지 공부를 합니다. 2기입니다. 그 다음에 오를레항이라는 곳으로 갑니다. 거기 가서 1년 내지 2년 약간 안 되게 공부를 합니다. 그 때에 거기서 만난 중요한 스승 중에 한 사람이 에뚜앙 이라는 사람입니다. 어제 얘기했듯이 법학을 공부하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어떤 책에 보면 ‘아버지가 처음부터 칼빈을 사제로 만들려고 했다.’는 책도 있고 또 아니면 ‘법률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 책도 있는데 어쨌든 법학을 공부를 합니다. 법학하고 신학하고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20대 때 법학을 아주 좋아해서 책을 본 것이 오늘날 신학 공부에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다음 4기가 어디냐 하면 에뚜알레라는 사람은 고전적인 정신을 가지고 법학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계를 느끼고 그 다음에 알티아쯔라는 새로운 법학자가 가르치는 부르주로 가게 됩니다.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회심했다고 보는데 개혁사상에 물든 것은 이미 이전에 물들었지만 거기서 깊이 주님을 만나고 회심했다고 봅니다. 칼빈은 자기 얘기를 안 하기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시편 주석에 언뜻 나오는 것이 파리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에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얘기가 나와서 첫 번째 개심이 파리에서 이루어졌고 14세에서 18세 사이에 이루어졌고 이후에 부르주에서 깊이 회심해서 오를레항이나 부르주에서 아마 배자를 만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르주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고 종교개혁자가 되고 그 때 거기서 공부한 것이 3년 정도 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파리로 돌아오게 되고 파리로 돌아와서 조금 공부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십니다. 그래서 어떤 책에 보면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굳이 법률가가 될 강한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자유롭게 종교개혁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다음 칼빈이 여기서 머물다가 파리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 때는 이미 이 사람이 최고의 지성인이 되어있습니다. 거기서 공부를 조금 더 합니다. 그래서 알티아치 같은 사람과 법학을 공부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하면 소위 얘기하는 인문주의 정신에 젖은 가운데 학문을 할 것이냐 아니면 새로운 인문주의 정신에 물든 방식으로 학문을 할 것이냐에 따라서 엄청난 학문의 방식에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그런 신학문의 방식을 법학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인문주의자들과 빈번하게 접촉을 하게 되고 여기에 와서도 개혁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파리로 돌아갔다 제네바로 가게 되고 제네바에서 붙잡혀서 종교개혁에 참여하고 3년 정도 목회를 하다가 쫓겨나서 스트라스부르크로 가서 스트라스부르크에서 4년 정도를 하다가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서 21년간을 봉직해서 56세 나이로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큰 섭리 가운데 올바른 정신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사람들과 많은 교분을 갖게 하십니다. 그 중 한사람이 올리베땅이라는 사람인데 사촌이었습니다. 이 사촌이 성경을 프랑스 성경을 번역을 하는 일에 기여를 합니다. 이 사람하고 평생 동지 관계를 맺으면서 종교개혁에 헌신합니다. 누아용에서 칼빈은 다섯 형제와 두 자매가 있었습니다. 제가 본 자료에 의하면 엄마 잔느 르프랑이 다섯 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첫째 아들은 사제가 되었는데 종교개혁 사상에 눈을 열면서 이단 시비에 걸려서 처형을 당합니다. 두 번째가 칼빈이었고 동생 ??? 둘이 종교개혁에 헌신해서 칼빈과 같이 함께 같이 하게 되고 그리고 어머니가 칼빈 6살에 죽고 후처를 얻습니다. 아버지 제라드 코뱅이 그 후처 이름은 누군지 모르는데 거기서 두 딸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두 딸이 하나는 제네바에 또 하나는 누아용에 끝까지 남습니다. 가계가 그렇게 됩니다. 이 옆에 보면 이 사람은 삐에르 카뮈라고 불어로 카뮈라고 그러는데 라틴어로 라무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16세기 말부터 17세기를 살았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입니다. 이 사람은 좀 어려운 얘기이지만 그 당시에 많은 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가지고 도구로 삼아서 개신교 신학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독특하게 그것을 거부하고 플라톤의 신학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사람들이 칼빈이 제네바 아카데미를 할 때 물론 칼빈이 죽은 다음입니다. 굉장히 유명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교수를 하겠다고했는데 거부를 합니다. 그 이유가 성격이 아주 유별나서 친구가 없고 만나는 사람과 부딪치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 이사람 삐에르 ??
파리 - 루브르 박물관 관람 후
회화와 르네상스 설명
녹취자 : 김미현
2013.9.26 종교개혁여행(프랑스)
왜 갑자기 그림에 저렇게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벌거벗은 사람들이 많을까요? 명화라고 그러면서 모나리자는 좀 예외인데 다른 작품들은 벌거벗은 사람들이 많고 다비드상, 오늘 본 밀로의 비너스, 왜 그럴까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사실 르네상스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저렇게 사람을 벌거벗겨서 그림을 그린다던지 조각상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금기였습니다. 그리고 금기였을 뿐 아니라 사람을 저렇게 조각을 해서 하는 예는 없습니다. 예외가 있는데 로마 카톨릭에서 성인들, 계급이 있습니다. 하나님, 그 다음 하나님은 어떻게 그릴 수가 없습니다. 형체가 없으신 분이니까 그러니까 그 다음에 누구를 많이 그립니까?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 그 다음 누구를 많이 그립니까? 천사들, 그리고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구약의 인물들, 신약의 인물들, 그 다음 성인들 즉 카톨릭 교회에서 성인이라고 인정을 받은 사람들, 성자로 추앙된 사람들 이 사람들이 고작이었고 이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거나 조각으로 만드는 것도 모두 하나의 목적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신앙심을 고취시키고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다 나중에 이것이 변질되면서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나온 사람들은 천사들도 아니고 물론 천사들도 있지만 성인들도 아니고 그리고 구약 신약의 인물들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대거 저렇게 옷을 벗고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과 관련이 있느냐하면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이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다시 말해서 여태까지 교회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인간은 ‘아무 쓸모없는 존재이고 아주 타락한 존재이고 그래서 죄만 짓는 존재일 뿐이다.’라고 하는 아주 비관적인 인간관을 비판하면서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베풀어주는 성사와 자비를 힘입어야지만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인간 이해에 대해서 근본적인 반기를 든 사람들이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자기의 사상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로 옮길 수 없지만 번뜩 번뜩하고 빛나는 인간에 대한 이해들이 공통적인 전선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다시 말해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이고 존귀한 존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여전히 쓸모없는 존재라는 인식들이 생겨나면서 ‘만약에 인간의 존재가 그렇게 아름답다면 그러면 그 아름다움은 영혼과 정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육체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냐.’ 이런 인식의 변화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그림을 보면서 다 사람들을 벗겨놓고 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들이 누드나 포르노를 그리는 것과 같은 동기로 사람들이 그런 그림을 그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무식한 해석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그 자체, 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 존재의 육체도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사상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더욱 재미있는 것은 예전에는 성경이나 천사, 성인들, 성모 마리아, 예수 이런 인물들 이외에 풍경을 그린 예가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풍경이나 이런 것은 옛날 생각에는 그런 곳에서 미를 찾고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인간의 감각을 홀려서 우리의 정신으로 하여금 산란하게 만들어 하나님을 향하게 하지 못하게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유럽에서 풍경화가 풍부하게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 종교개혁 일어난 이후이고 그것도 가장 발달한 나라가 네덜란드인데 네덜란드는 칼빈주의를 받아들여서 꽃피운 종교개혁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니까 르네상스 사람들은 이제 인간의 모습 속에서 발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가이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남자는 7등신, 여자는 8등신 비율을 정확하게 지킴으로서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금 예를 들면 다비드상 같은 경우도 보면 깎아내린 것처럼 예쁘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조각의 깊은 가치는 그것이 예쁘게 완벽한 조각상은 아닙니다. 사진을 찍은 것을 잘 보면 얼굴과 손이 비율이 안 맞습니다. 손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비율이 크고 머리는 큽니다. 그것은 결국 피렌체가 남관을 맞이할 때 피렌체 시민들에게는 지성과 그리고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비율을 깨뜨려서 그림을 그렸는데도 그 그림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싹트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상 중의 상당 부분은 중세에서는 놓쳤던 성경에 대한 진정한 인간에 대한 견해를 재발견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르네상스 사람들은 어디서 그렇게 인간의 육체가 아름답다. 인간이 그렇게 중요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배웠을까?’ 하는 것입니다.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한창 일어나고 있을 때 그 당시에는 피렌체가 프로렌스라고 불리웠고 프로렌스, 피렌체 이것은 모두 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프로렌띠아라는 이탈리아어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거기 예술가들이 막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예술가들 중에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라는 유명한 건축가가 이제 로마를 여행하게 됩니다. 왜 로마를 여행하게 되느냐 하면 그리스에 대한 새로운 생각들을 갖게 되면서 그리스의 문명을 물려받은 계승한 나라가 로마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신화를 보면 로마 신화는 새것이 없고 그리스 신화를 모두 재편한 것이 바로 로마신화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폴로라고 하는 미의 여신이 사랑의 여신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람인데 똑같은 인물이 로마 신화에서는 비너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로마가 그것을 계승하고 이것이 건축양식에도 투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이 사람들이 가서 그리스 문화가 찬란하게 재현된 로마의 건축물들을 보면서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게 됩니다. 주전 1세기경에 지어진 판테온이라고 하는 만신전은 기둥 없이 세워져서 지금도 2000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는 지금도 사람들이 드나드는 공간이고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으면 비가와도 천정에 구멍이 뚫렸는데 빗물이 떨어지지 않고 좌우로 빗겨가도록 설계한 탁월한 건축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 시대에 복합몰, 거기 상점, 쉽게 얘기하면 종합 쇼핑센터가 있을 정도였고 마사지 받는 곳까지 있었다고 하니 굉장한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문명들을 발견하고 가만히 조사를 해보니 그 뒤에 로마의 신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로마나 그리스의 신들을 보면 동양에서는 신이 한없이...
2013.09.26 종교개혁여행(스위스)
제네바 칼빈 파렐 낙스 등 동상 앞에서
녹취자: 백지영
여기는 종교개혁자들의 동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사실은 칼빈은 이런 것을 참 싫어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데 이것을 결국은 만들어 놓았고 칼빈 탄생 350주년을 기념해서 1959년 10월 9일인가에 이것을 만들었는데 건축위원장이 루즈벨트 대통령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기금을 모아서 프랑스에 있는 작가가 주축이 되어서 만들었습니다. 맨 끝에 저쪽에 있는 사람이 뒤오 파렐인데 아까 가이드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칼빈을 제네바로 불러들인 사람이었고, 그 다음에 칼빈, 그 다음이 칼빈의 둘도 없는 제자였던 테오드로 베자 그리고 맨 마지막에 서 있는 사람이 불같은 성격을 지닌 스코트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낙스였습니다. 존 낙스에 대해서 ??하는 이유는 제네바 아카데미라고 하는 학교에 학생으로 ?? 그랬는데 라틴어로 예수 그 다음에 구세주 그런 뜻입니다.
칼빈이 여기 오게 된 이야기를 아까 잠깐 말씀드렸지만 전에 하던 이야기하고 조금 연결을 시키면, 오를네앙에서 1년 내지 2년, 부르즈에서 3년 정도 공부를 하는데 거기서 굉장히 공부를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까 어떤 책에는 사제가 되기 위해서 보냈다 그 다음에 법률가가 되기 위해서 보냈다 그랬는데, 맨 처음에는 아버지가 사제가 되게 하려고 보냈다가 파문을 당하니까 가톨릭에 희망이 없다고 보고 아들을 돈 많이 버는 법률가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칼빈이 그 부르즈에서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래서 법학박사학위를 받고 그 다음에 파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파리로 돌아와서 몽테규대학, 그게 고등학교 과정인데, 그 골목에 프랑스와 1세가 소르본느 대학하고 맞먹는 학교를 하나 세웁니다. 그것이 왕립 꼴레주라고 로얄 꼴레주라는 학교인데 거기에 들어와서 잠깐 공부를 합니다. 그때 오를레앙에서부터 이미 엄청나게 공부를 했고 거기 와서도 굉장히 공부를 해서 그때 이미 벌써 이 사람이 유럽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인정을 받을 정도가 됩니다. 그러다가 니콜라스 콥 사건 아시지요? 그래서 결국은 그 집에서 지붕으로 도망을 나와 가지고 스트라스부르로 가려고 하다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전쟁 때문에 못 가고 여기 제네바에 하루를 묵게 되는데, 그때에 티에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칼빈이 도망 나올 때 칼빈을 도와서 앙그렘(Angouleme), 어제 말씀드렸던 마르게리따라고 하는 앙그렘의 마르게리따라는 프랑스와 1세의 누이입니다. 그 사람이 나바르라고 하는 곳에 왕처럼 독립해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개혁자였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거기서 피신을 하고 그리고 내라그로? 가고 하는 데 그 과정에서 티에라고 하는 친구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이 사람이 결국은 가톨릭으로 나중에 전향을 합니다. 그래서 그 도움을 모두 거절을 하는데 그 사람의 도움으로 결국은 기독교 강요를 거기서 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바젤에서 완성을 해서 바젤에서 초판을 출판을 합니다. 그것이 1536년 3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와서 9월쯤 왔다가 파렐한테 티에가, 파렐이 티에와 친합니다, 그래서 지금 존 칼빈이 거기서 하룻밤 묵는다고 한번 만나보라고 합니다.
기독교 강요가 1536년 3월에 나왔는데 그때 이미 삽시간에 퍼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가톨릭은 틀려먹었다고 막 주장했는데 신교(新敎)는 뭘 믿는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초로 통일적으로 이야기한 아주 깔끔한 책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파렐이 굉장히 지혜롭고 현명한 사람이구나 이 사람을 데리고 종교개혁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을 하고 초청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에 제네바의 상황은 어땠느냐 하면, 일단 제네바 사람들은 가톨릭을 싫어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지지했는데, 그러면 종교개혁이 좋아서 종교개혁을 지지했느냐 하면 아니라 가톨릭이 지긋지긋 해서 종교개혁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삶은 개혁주의가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파렐이 열심히 설교를 했지만 사람들은 말을 잘 안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1536년 6월경에 커다란 사건이 생기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온 시가 모여가지고 이제는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법률적으로 통과를 시킵니다.
그래서 파렐이 와서 칼빈을 만나게 되는데, 칼빈이 자기는 그런 것 싫다 자기는 지금 현재 아직도 공부를 더 해야 하고 카피토를 비롯한 유수한 개혁자들과 만나서 교제하면서 사상을 더 키워야 된다고 그래서 자기는 돌아가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 그 유명한, “당신이 그렇게 휴식과 연구를 좋아한다면 거기에 저주가 있을지어다.”라고 합니다. 그때에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면서 어린아이처럼 무릎을 꿇고 칼빈이 흐느껴 웁니다. 이 두 사람의 나이차이가 한 20년 정도 되었는데, 그러니까 아버지 같은 사람이지요. 거기서 막 울면서 그리고 결국은 헌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의회 앞에 이 사람도 교사로 좀 쓰고 싶다 그러니까 의회는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고 관심도 없고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고 하라니까 하는 그래서 결국은 주목도 받지 못하는데, 여기에 제네바의 종교개혁에 참여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참여하게 되는데 그것이 1536년 6월경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바로 무슨 일이 있느냐 하면 그 유명한 로잔회의라고 하는 것이 ?? 왜냐하면 로잔에서는 커다란 혼란이 일어나면서 도대체 종교개혁을 따를 것이냐 가톨릭을 따를 것이냐 온 시민들과 정치지도자들이 갈피를 못 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톨릭에서 대표를 부르고 개신교에서 대표를 불러서 일주일동안 토론을 하자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다 보고 결정을 하겠다고 합니다. 그래가지고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10월에 열립니다. 지금 날짜가 기억이 안 나는데, 5일인가부터 삼일 동안을 칼빈이 대표로 나갑니다. 칼빈, 파렐, 비레 이렇게 세 사람이 나갑니다. 제네바의 개혁 때는 칼빈, 파렐, 비레, 프로망 이 네 사람이 유명했는데, 어쨌든 가서 젊은 칼빈이 얼굴이 하얗고 초라한 사람이 가만히 앉아있는 것입니다. 삼일동안. 그런데 점점 논쟁이 되는데 파렐과 비레가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찬론에 와서 결국은 성찬이라고 하는 것은 실지로 예수님이 육체적으로 임재 하는 것이다 그래서 떡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살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때에 손을 들고 칼빈이 일어나는데 모든 사람들은 이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알려지지를 않아서. 그 사람들이 삼일 동안 계속 해서 너희 종교개혁자들은 뿌리가 없는 사람들이다, 왜 너희들은 교구를 무시하냐 교구가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칼빈이 딱 들이대면서, 당신들이 교구를 무시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당신들은 교구를 제대로 연구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의견을 원고 하나도 없이 조목조목 비판을 하는데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하느냐 하면, 어거스틴의 요한복음 설교 19번째 제 중간부분, 나르다누스에게 보낸 시간서간문 제 몇 쪽, 그 다음에 무슨 무슨 논문 제 몇 페이지쯤, 무슨 무슨 몇 페이지 대개 몇째 줄쯤, 아무 것도 안 보는 상태에서 암기해 가지고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그 사람들이 자기네들이 들어보지도 못한 교구의 이름들이 막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파리에 있을 때 그것을 거의 외웠습니다. 부르주에 있을 때부터. 그래가지고 자유자재로 인용을 하면서 그 사람들을 공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스토리가 있는데 마지막에 장 땅띠라고 하는 유명한 선동적인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대표로 나왔는데, 그 사람이 그 이야기를 다 듣더니 손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커다란 반론이 있겠구나 그랬더니 나오자마자 침울해지면서, “나는 오늘 이 젊은 칼빈 선생의 말을 들으면서 자기가 진리를 악독하게 거스르는 성령을 모독하고 있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제의 옷을 벗고 그리고 내가 진정한 신자가 되겠습니다.”라고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회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수많은 수도사들과 가톨릭 사람들이 보는데 거기서 수십 명의 수도사들이 회개하고, 엉엉 울지는 못했지만 회개하고 그 다음에 1주일 2주일 사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으로 수도원을 탈출해서 넘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던 그 사람들은, 확실히 진리가 가톨릭이 아니구나 그래서 결정을 해서 거기서 매춘부들을 다 내어 쫓고 그 다음에 가톨릭을 다 몰아냅니다. 거기에서 로잔, 보우 이런 지역들이 모두 한꺼번에 개혁권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후에 여기서 칼빈이 39년서부터 41년까지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때 목회 그 상황은 어땠느냐 하면 개패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파렐은 그야말로 굉장히 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밀어붙이면서 너희들 사는 게 거지같기 때문에 너희들은 성찬 받을 자격이 없다고 시민들하고 대립을 하니까 시민들이 이 사람들이 설교 할 때 여기 와서 칼집을 덜럭덜럭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칼을 빼어 들고 강단으로 돌진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해 가지고는 안 되겠다 그런 상황이 됩니다. 그래서 칼빈이 결국은 무슨 생각을 하느냐 하면, 외치는 개혁주의 설교가지고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 무지몽매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신실하신 말씀으로 가르쳐서 그래서 이들을 교화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파렐이 공격하는 특공대 같다면 이 사람은 뒤에서 모든 것을 정돈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거기서 신앙 교육을 위한 여러 가지 구체적인 계획들을 하나씩 하나씩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리버틴이라고 하는 자유파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유파 혹은 방종파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자유파 방종파의 정체는 무엇이냐 하면, 이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들을 때 왜 이렇게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냐 그래서 반기를 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어 하는 그야말로 방종파였고, 또 하나는 신앙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는 귀족들이었습니다. 형식적인 신앙이라면 우리는 오케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 자체를 실질적으로 규율하려고 들지 말라, 우리는 자유롭고 싶다,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3년 동안 있었는데 거기에 시의 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었느냐 하면, 칼빈이 제네바를 다스린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그렇지 않고 종교가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행정과 사법에 대한 권한을 시 의회가 가지고 있었고 시 의회 안에 네 명의 행정 장관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말하자면 참주정치 비슷하게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사람 중에 세 사람이 자유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의 개혁주의적인 설교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혁자들의 말을 들으려고 가톨릭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서 나왔는데 쓰레기 피하다가 똥차 만난다고 힘들어서 그만 두었는데 개혁자들은 더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 집어치워라 해 가지고 결국은 살해의 위협까지 받으면서 추방합니다. 그래서 추방됐는데, 둘이서 제네바에서 몇 달을 방황하다가 파렐은 뇌샤텔이라는 곳으로 목회자로 가고 그리고 칼빈은 마틴 부처에게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고 나서 그러면 제네바의 형편이 어떻게 되었느냐, 네 사람 모두가 다 범죄자로 참수당하거나 부정축재를 하다가 도망가다가 칼에 맞아 죽거나 네 사람이 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제네바는 그야말로 무정부 상태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술 먹고 폭력은 물론이고 나체로 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신앙이 없는 사람도, 이건 정말 아니라고 차라리 이럴 바에야 가톨릭 그때가 오히려 더 사회가 질서가 있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 무서워서 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느냐고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1539년에 여기에 샤돌레스라고 하는 유명한 사제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아주 도전적인 편지를 공개서한을 제네바 우리로 말하자면 당회로 보내는 것입니다. 제네바 시 의회로 보내는 것입니다. 물론 당회도 받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아주 부드러운 말로 시작을 합니다. 형제들이여, 당신들은 지금 종교개혁이라고 하는 이상한 안개가 씌워서 미혹에 빠졌지만 원래의 우리가 믿는 종교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면서 설득을 합니다. 그런데 논리가 너무 정연해 가지고 제네바에서 이 편지를 받고 공개적으로 회신을 하라고 요구를 했는데 아무도 이 회신에 대해서 이것이 왜 틀렸는지,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지를 이야기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숙의를 하던 끝에, 우리의 대안은 하나밖에 없으니 칼빈 선생님을 다시 모셔 오는 것밖에 없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특사가 파견이 됩니다. 아주 최대한 공손하게, 그리고 네 사람이 바뀌었기 때문에 자유파들에 대해서 아주 질린 사람들이 행정장관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정중하게 특사를 여러 번 파송을 합니다. 한 사람이 갔는데 도착도 하기 전에 두 번째 특사를 파송할 정도였으니까 얼마나 다급했는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이 나는 안 간다고 합니다. 그때 그 심경을 칼빈이 편지를 많이 썼는데 4천통이나 편지를 씁니다. 장 삐에르에게 보낸 편지에 보면, “나는 다시 그 소굴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 음모와 모략, 중상 그 끔찍한 소굴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는 여기서 공부하고, 스트라스부르에서 아주 안정적으로 거의 오천 명이 넘는 프랑스 난민들을 목회하는 목자가 되어 있어서 거기서 진짜 목회다운 목회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이델레트하고 결혼도 하고 그러니까 여기에 와야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갑니다. 그러니 파렐이 난리가 났습니다. 자기 혼자 감당이 안 되니까 빨리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안 갑니다. 그런데 마틴 부처가 야단을 치면서 빨리 가라고 합니다.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재미있습니다. 칼빈이 까칠한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사람에게 결혼을 하라고 칼빈이 자꾸 권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도 칼빈에게 결혼하라고 합니다. 자꾸. 그런데 칼빈은 자기보다 나이 훨씬 많은 과부하고 결혼을 했고, 이 사람은 68세에 18세 된 자매와 결혼을 합니다. 그러니까 칼빈이 결혼하라고는 했지만 샘이 났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아니라고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가 깨집니다. 이것은 사실은 책에는 잘 안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서로 마주 안 봅니다. 그 정도 사이가 됩니다.
어떻든 그렇게 해서 칼빈이 여기 돌아옵니다. 그때에 칼빈이, 그때는 편지에 인장을 찍는데 초를 녹여가지고 해서 받아보면 안 뜯어졌어야만 이것이 밀봉된 것이구나 하는데, 인장을 찍을 때 유명한 게 ?? 라틴어로 “어두움 후에 빛이 오리라” 그 문장을 찍어서 보냅니다. 그리고 결국은 여기 오게 됩니다. 올 때에는 칼빈이 언제 온다고도 안 알렸는데 사람들이 며칠 동안을 길거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나라가 엉망이니까 오시라고, 와서 환영을 받은 다음에 짐을 풀기도 전에 의회 앞에 서서, 나를 불렀으니까 정말 내가 일하기를 원하느냐고 그렇다고 하니까, 지난번에 ??파 사람들에게 하도 질려서, 그러면 법을 만들어라. 의회법을 만들고 교회와 정부와의 관계는 어떤 지를 규정하는 법을 만들라고. 그러니까 이제 칼빈의 말을 안 들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 법을 만듭니다. 그래서 교회의 질서를 처음으로 잡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교회의 직분을 네 부류로 나누어서 목사, 장로, 박사, 혹은 교사 그리고 마지막에 집사를 만듭니다. 집사는 구제하는 일, 박사는 가르치는 일, 장로는 치리하는 일, 그리고 목회자는 여러 가지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지 목회자가 된다고 하는 것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드디어 여기서 목회다운 목회를 시작하게 되는데, 그것이 1541년 일이었습니다. 그때서부터 죽을 때까지 23년간을 한곳에서 목회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가보면 칼빈 예배당으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개혁주의적인 사람인데, 가보면 석상들 성인들 이런 가톨릭에서 숭배하던 신상들이 예배당 안에까지 그대로 있습니다. 하나도 안 부서지고.. 그것이 뭐냐 하면 칼빈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저 피에르 예배당을, 피에르는 원래 프랑스어로 피터 그리고 성경말로는 베드로, 라틴어로는 페트루스, 베드로 교회입니다. 그것은 맨 처음에 생긴 것이 4세기경에 생기고 5세기경에 무너졌다가 6세기경에 다시 준공 되고 그러다가 중간에 유실되었다가 12세기에 세웠다가 돈이 없어서 100년씩 200년씩 연장되어서 13세기에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 사이사이에 건축이 증축이나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 기본적인 골격은 13세기 때 세워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었거든요? 여기를 차지해서 설교를 하는데 칼빈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혁명적인 사람입니다. 다 때려 부수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에서 그 때려 부순 성당을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것을 다 때려 부숴 가지고 거기다 벽돌을 갖다가 개신교 예배당을 지은 것입니다. 가톨릭에서 화가 나서 그대로 보존했습니다. 개혁자들이 이렇게 다 때려 부수었다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칼빈은 그런 것을 못하게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노용에서 성당에서 본 것처럼, 석상을 다 떼려면 교회와 그 다음에 모든 도시에 전체적인 합의가 있을 때에 떼버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있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강대에서 어떻게 설교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이 쓰던 물건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칼빈이 부임했을 때 모였던 사람들이 한 6000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죽을 때까지 칼빈이 품고 있었던 사람 교인이 15000명이었다고 하니, 그 당시에 칼빈이 여기 올 때에 제네바 인구가 10만 명밖에 안 되었으니까 만 명 밖에 안 되었던 도시였으니까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왜 그랬느냐 하면 여기가 종교의 자유가 있고 그리고 여기서 개혁신앙을 가르친다고 하니까 수많은 핍박받는 난민들이 프랑스, 이태리, 독일, 영국 이런 데서 난민들이 모두 모였고, 그리고 바로 여기 머물면서 영국의 난민들을 목회하는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이 존 낙스입니다. 여기에서 그 일을 하는데 살인적으로 열심히 목회했습니다. 하면 하루에 세 번 강의하고 매주 설교하고 그 다음에 목회자들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심방하고 그래서 칼빈이 제네바에 목회한 다음에는 논문다운 논문을 쓰지를 못합니다. 설교만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31가지의 질병에 걸려서 결국은 죽게 됩니다. 여기에서 목회를 하면서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처음 판을 개정하고 개정해서 1559년 최종판까지 나오고 이런 일들을 여기에서 아름답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설명을 하면, 그러면 그 당시의 개혁가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았는데 왜 유난히 제네바, 왜 유난히 칼빈이냐는 것입니다. 칼빈이 모든 개혁자 중에 최고의 지성인이었느냐 하면 그렇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똑똑한 천재들이 별처럼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다른 사람들은 잊히고 종교개혁하면 루터도 잊히고 칼빈만 기억에 남게 되었을까가 바로 정답인데, 그게 바로 여기에서 칼빈이 오자마자 얼마 안 돼서 상당한 시간이 흐른 다음에 교육을 계속했는데 정식으로 시의 인가를 받아서 1559년 6월 10일인가에 제네바 아카데미가 세워집니다. 그때는 이미 칼빈이 상당한 교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개혁가로서 죽기 5년 전이니까 아주 사상이 성숙했고 초창기에 비해서 시야도 굉장히 넓어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기다가 제네바 아카데미를 만듭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개혁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여기에 와서 칼빈으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칼빈이 그때에 유럽에서 내 노라 하는 개혁사상을 가진 학자들을 모읍니다. 최근에 제가 책을 쓰느라고 프랑스에서 나온 책 한 권을 보면서 그때에 일어났던 역사를 전부 다 추적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보니까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어떤 사람은 첫해에 900명이 모였다고 하는데 그건 아니고, 전체 숫자가 그 정도 됩니다. 그래서 많이 온 나라로는 프랑스가 제일 많고 그 다음에 다른 여러 나라에서 조금씩 와서 여기서 배우는데, 그것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르치는 과목의 3분의 2가 인문학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여기서 법률과 의학까지도 가르쳤습니다. 목회자가 될 사람들을. 그리고 그 다음에 철저하게 고전교육을 시키고 역사 교육을 시켜서 그래서 아주 유능한 설교자가 되게 하는 그 일을 그 사람들을 여기에서 생산해 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여기서 마친 다음에 자기 각 나라로 돌아가서 거기에서 종교개혁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이 제네바는 언제나 유럽에 있는 모든 종교개혁자들에게 마음의 고향이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사 전반
녹취자: 김경애
공부합시다. 말하는 것도 힘드니까 한 십분 정도만 합시다. 자, 이제 우리들이 드디어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내려서는 설명할 시간도 없으니까 스위스의 종교개혁을 알기 전에 스위스가 당시에 어떤 나라였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위스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신성로마제국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가 신성 로마제국이 세력이 약해지면서 지방의 영주들이 지배권을 갖게 됩니다. 그 지방의 영주들도 서로 다투면서 크게 4개의 가문이 각 성들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중에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합스부르크 가문이라든지 사보이 가문이라든지 그런 가문들이 유럽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에 도시들이 성립을 하면서 황제가 자기들을 지배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자유를 얻다보니까 영주들이 한곳에 모여서 나라를 집중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은 경영력이 약화되고 도시가 발달하면서 자치권을 많이 획득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도시들이 자치도시로 자라게 됩니다. 츠빙글리가 종교개혁을 할 당시에 여기에 칸톤 이라고 하는데 지금도 칸톤이 거의 독립적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CH라고 그러는데 콘페데라치아 헬베티아 즉 헬베티아 동맹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 13세기 말경의 일입니다. 그래서 각기 독립을 유지하는 자치도시들이 연맹을 맺어서 황제와 봉건영주들의 지배를 배재하고 자신들이 자치도시를 이루면서 자유로운 삶을 살기로 동맹을 맺게 됩니다. 그게 벌써 13세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까 스위스는 굉장히 빨리 깬 나라입니다. 스위스로 참고로 말하자면 누구도 지배해본 적이 없는 나라입니다. 그럴 정도로 강인한 나라이고 산악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산으로 도망을 가면 공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히틀러가 여기를 공격을 해서 유럽으로 넘어오는 알프스의 길을 차지하려고 했는데 나치와 싸우려고 하니까 도저히 군사력이 되지 않으니까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위협을 했는데 우리를 쳐들어오면 알프스로 넘어오는 모든 도로를 파괴해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길을 얻으려고 공격을 하는데 길을 다 부수어버리겠다고 하니까 관두라고 오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아까 가이드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농사도 별로 없고 밥벌이를 해먹을 데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두 개의 사업을 기반으로 국민들이 먹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숙박업과 용병입니다. 용병은 이 사람들이 게르만족이기 때문에 굉장히 키가 크고 건장하고 용맹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프랑스혁명이 일어날 당시에 거기의 왕국을 누가 지켰느냐하면 스위스 용병 800명이 지켰습니다. 그런데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니까 목숨이 아까우면 도망갈 듯도 한데 얼마나 충성스러운지 한사람도 남김없이 죽임을 당할 정도로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스위스용병을 고용하고 아빠가 거기에 가서 군대생활을 하면 기기서 돈으로 가족들이 먹고사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숙박업이었습니다. 국경을 넘어 다니는 여행객들을 상대로 숙박업을 하면서 그들로부터 돈을 벌어서 먹고 살았던 그런 나라였습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츠빙글리 태어난 때가 1484년이기 때문에 루터보다 한 살이 많은데 칼빈보다는 연배차이가 많이 납니다. 칼빈이 1509년생이니 말입니다. 루터가 먼저냐 츠빙글리 먼저냐를 보면 사실은 루터의 영향을 받아서 종교개혁을 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츠빙글리가 개혁을 시작한 것이 먼저입니다. 이 츠빙글리는 1484년에 태어나서 그래서 가문의 삼촌이 우리로 말하자면 연고대의 교무처장 정도로 근무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삼촌 빽으로 이 대학 저 대학을 다니면서 하고 싶은 공부를 실컷 하고 바젤로 갑니다. 바젤로 가서 공부를 하는데 거기에서 훌륭한 스승들을 만나는데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인문주의자들입니다. 인문주의자들이 파리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도시마다 그런 인문주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인문주의자들로부터 신사고를 물려받으면서 우리의 가톨릭신앙에 대해서 근본적인 회의를 품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결국은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목회를 하게 됩니다. 목회를 한다고 할 때 목회는 개혁교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제를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세군데서 목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째 목회를 하는 데가 바로 아이즈델른이라는 곳이고 거기서 한 3년 동안 목회를 하는데 이 사람이 한참 개혁사상을 전파하고 있을 그때가 언제였느냐 하면 마틴 루터가 로마를 방문했다가 로마교회가 속속들이 썩었다는 사실에 깊이 충격을 받으면서 개혁의 정신을 품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옵니다. 그 시기에 왕성하게 개혁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가톨릭의 사제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아서 목회를 한 곳이 취리히라는 곳이었습니다. 취리히라는 곳에서 목회를 하는데 여기는 굉장한 종교개혁의 도시가 됩니다. 그래서 개신교의 로마라고 불릴 정도로 종교개혁이 화려하게 꽃피우는 도시가 됩니다.
칼빈과 츠빙글리와 루터의 사이는 어땠을까 생각하면 루터와 츠빙글리는 거의 동갑이었기 때문에 만납니다. 그리고 회담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지금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성찬론에 있어서 견해가 너무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성찬론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았을 텐데 집요하게 츠빙글리가 루터의 성찬론을 공격합니다. 성찬론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성찬론에 대해서 크게 3가지 견해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무엇이라고 그랬습니까? 교리반에서 배우지 않았습니까? 화체설입니다. 그래서 성찬의 떡과 포도주가 곧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봅니다. 두 번째는 루터의 공제설인데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츠빙글리의 기념설입니다. 네 번째가 하나 더 있는데 칼빈이 그것을 극복하고 영적 임재설을 내놓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틴 루터가 왜 공격을 받느냐하면 당신이 애매모호하게 떡 안에 그리스도의 몸이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게 말하면 결국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모든 세계에 있다는 것인데 바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로마 가톨릭의 견해와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 결국은 양 파가 합의점을 찾지 못합니다. 칼빈에 비해서 이 츠빙글리는 훨씬 전투적인 사람이었고 칼빈의 종교개혁보다 훨씬 더 종합적인 그런 과격한 종교개혁을 실행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 그런데 이 사람이 이제 취리히에서 목회를 하는데 거기서 이 사람이 목회를 하는 기간 동안에 네 가지의 커다란 어려움을 만나게 됩니다. 첫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1517년에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 조항을 받았을 때 루터를 열 받게 만들었던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이었습니까? 면죄부판매사건이었습니다. 그 면죄부판매사건이 여기에서도 문제가 됩니다. 거기에서는 레텔이라는 사람이 면죄부판매에 책임자였는데 여기는 베르나르시몬이라는 사람이 여기의 면죄부판매권을 가지고 면죄부를 판매합니다. 면죄부에 대해서는 우리가 독일에 가서 상세히 말씀을 드리고 면죄부판매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가톨릭의 사제로서 공격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단이라는 지목을 받으면서 강력한 비난을 받게 됩니다.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해야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가톨릭의 신부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전통이 언제쯤 생긴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아마 이 전통이 베드로 때부터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인데 베드로는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원래 가톨릭의 사제들이 결혼을 하지 않는 전통이 없었습니다. 결혼을 자유롭게 하다가 10세기에 강력한 개혁을 지지하는 말하자면 수도원의 한 종파에서 교황이 나오는데 그러면서 이제 교회를 개혁해야겠다는 의도 아래서 독신으로 하자고 제창을 합니다. 그런데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츠빙글리가 개혁을 할 때에는 자기 마음대로였습니다. 어떻게 되느냐하면 법으로는 못하게 되어있고 실제로는 결혼을 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또 두 사람, 세 사람, 네 사람씩 거느리는데 그런 일에 모범을 보였던 사람이 교황입니다. 그러니까 영이 서지 않아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 더러운 것이라고 하면서 사제들의 결혼을 합법적으로 허락하라고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그 당시에는 충격적인 주장이었습니다. 이런 사건이 있었고 세 번째 사건이 있는데 그 사건은 무엇이냐 하면 신성로마제국의 카알 5세가 있는데 이 사람은 루터를 법정에 세웠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과 프랑수와 1세가 손잡고 이태리를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러면서 스위스에게 같이 협조를 하라고 그러면서 군사를 보내고 원조를 하라고 요구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 츠빙글리가 강력하게 그 전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쟁이 아니라고 하면서 우리는 하지 말아야한다고 호소한 것입니다. 굉장히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마지막의 네 번째가 그 유명한 소시지사건입니다. 역사에 소시지사건이라는 굉장히 유명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고난주간이 되기 전에 시작해서 부활절까지 40일 동안을 사순절이라고 그러는데 그 사순절을 지키는 전통이 나중에 생긴 것입니다. 이때에는 특별히 언제부터 언제까지 금식하고 하는 수많은 규례들을 가톨릭은 만듭니다. 그런데 40일을 금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그렇게 금식하는 일을 만드는데 이 츠빙글리의 친구 가운데 출판업자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츠빙글리의 책을 열심히 찍어서 개혁사상을 전파하던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츠빙글리와 츠빙글리의 친구를 초대해서 금식하는 기간이니까 무엇을 대접하다가 소시지를 먹습니다. 그런데 츠빙글리는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떤 사람이 몰래보고 금식하게 되어있는 시간에 소시지를 먹었다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칵 뒤집힙니다. 그런데 츠빙글리는 먹지 않았지만 자기는 먹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을 규제하는 자체가 성경이 허락하는 바가 아니라고 신랄하게 공격하면서 먹는 것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하고 연설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사방으로 로마 가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골치 아픈 사람이 나타나서 평화롭던 마을을 뒤흔들어놓는데 이 사람을 죽였으면 좋겠는데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로 개혁정신이 충만한 사람인 동시에 무엇을 건드리고 가르치려고 하면 아는 것이 너무 많고 박식해서 이리저리 문헌들을 끌어들이면서 도저히 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종교개혁을 실시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아주 강력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강력하게 설교를 하면서 설교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지 주일에 설교를 하고나면 일주일 내내 츠빙글리가 설교한 내용이 동네사람들의 화두가 될 정도로 그렇게 설교의 영향력을 끼치던 사람이었습니다. 자 그렇지만 이 츠빙글리가 한 칸톤의 왕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11개의 칸톤이 있었는데 7개의 칸톤이 가톨릭을 따르고 4개의 칸톤이 츠빙글리의 개혁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너무 골치가 아프니까 그러면 양쪽 이야기를 들어보고 한번 우리 시가 무엇을 믿어야 될지를 결정해보자고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이미 자유도시가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강력한 왕의 지휘아래 있던 파리에서는 이런 종교개혁이 통하지 않고 시민적 자유를 이미 누리고 있었던 소위 중세의 자치도시라는 곳이 있는데 어느 나라에 속해있지만 너무 교역이 활발하고 문화가 활발해서 왕이 스스로 너희 자치적으로 하라고 자유를 준 이 지역이 인문주의에 빨려들면서 종교개혁의 전초기지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가톨릭과 논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쪽 지역을 관할하는 최고의 대 감독이 나와라. 나와서 나와 논쟁을 하자.’ 그런데 비겁하게 나오지 않고 대리자를 보냅니다. 그래가지고 이야기를 쭉 합니다. 츠빙글리가 할 말이 많다니까 의회가 츠빙글리에게 먼저 이야기 하라고 하니까 츠빙글리 쭉 이야기합니다. 이런 미사, 성상숭배, 마리아숭배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복음적인 신앙에서 어긋난 것이라고 그러면서 성서에 기록된 참된 말씀으로 우리들의 신앙이 돌아가야 한다고 종교개혁자들이 똑같이 성경에 대한 발견, 그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거기에 나가면 우리가 믿는 바를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하고 67개의 신앙고백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가톨릭과 무엇이 다른 것인지 정리를 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톨릭의 대표 측에 준 것입니다. 이 사람은 별로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듣더니 그래도 이렇게 하면 되겠느냐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조금 생각해보고 답변을 하겠다고 하니까 츠빙글리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것입니다. 1차 논쟁이 끝났습니다. 그러면 2차 논쟁은 언제 하느냐고 하면서 그 후에 9개월 정도의 시간이 흐른 다음에 드디어 저쪽에서 반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서 나온 것입니다. 그들이 엄청난 준비를 해서 67개 조항을 박살을 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츠빙글리는 철저히 준비를 해가지고 갔는데 보니까 완전히 헛방입니다. 왜냐하면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쪽 지역의 수준이 낮았던 모양입니다. 교리반만 공부를 했어도 뭔가 했을 텐데 교리반 실력도 안 된 것입니다. 그냥 횡설수설하는 것을 의회의 대표들이 다 본 것입니다. ‘아이 저것은 말도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혁신학으로 돌아간다.’ 고 의회가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칸톤 자체가 과감하게 가톨릭을 다 버립니다. 얼마나 놀라운지 딱 결정을 하니까 자치도시니까 시민이 합의를 해서 가톨릭 신학을 버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즉시 모든 성찬은 철폐하고 다 뜯어내고 미사를 중지하는 것입니다. 상상도할 수 없는 천지개벽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일사천리로 스위스의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그렇게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츠빙글리는 아주 개척가의 정신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공부도 아주 많이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개신교 역사에 거의 최초의 조직신학서는 씁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참된 종교와 거짓된 종교라는 책을 씁니다. 그러니까 ‘참된 종교와 거짓된 종교’ 그 다음에 ‘독교강요’, 그 다음에 멜란히톤이 쓴 ‘신학총론’ 이 3권이 개신교 초기에 조직신학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쓰고 36권내지 38권정도 되는 많은 저술을 하면서 치열하게 선교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슨 문제냐 하면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이 사람이 여기서 종교개혁을 했는데 유럽에 가서 전쟁을 보면서 거기서 죽는 수많은 스위스병사들을 보는 것입니다. 돈 몇 푼을 벌려고 갔다가 애먼 남의 나라 싸움에 끼어들어서 그렇게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자기들도 죽어서 수천 명이 죽어가는 장면을 목격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아무리 먹고 살 것이 없어도 이 짓은 할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그 다음에 너무 오버한 면이 있지만 나그네들을 위해서 여관을 짓고 돈을 버는 것은 좋은 것인데 그것을 거저 대접을 해야지 돈을 받으면 되겠느냐고 그렇게 공격을 하니까 여기 스위스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네들이 자기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업 두 가지를 공격하면서 결국은 그것을 계속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는 것입니다. 민심 이반을 하고 그래서 정치적으로 큰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굽히지 않고 치열하게 종교개혁을 위해서 헌신을 합니다.
그러다가 이제 이 사람이 가톨릭과 첫 번째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개신교 측의 병사들이 훨씬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협상을 해서 평화로 접어듭니다. 그런데 두 번째 전쟁에서 가톨릭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이천 명 병사밖에 되지 않는 츠빙글리의 공동체를 팔천 명의 가톨릭을 외국에서 병사들을 원조까지 받아서 싹 쓸어버립니다. 그래서 츠빙글리 그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는데 거기에서 자기의 사위, 아들 모두가 장렬하게 전사를 합니다. 그러면서 죽을 때 마지막 남긴 유언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의 육체밖에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까지도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그런 유명한 말을 남기고 까텔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그래서 치열한 종교개혁자의 열렬한 삶이 마감이 됩니다. 이 사람의 동료이자 혹은 후계자로서 종교개혁에 열렬히 헌신했고 칼빈과도 친근한 교분관계를 유지했던 교회사의 유명한 인물이 있는데 그 사람이 불링거입니다. 개신교에서 언약신학의 수립이 중요한 기초를 놓았던 인물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이 스위스 땅은 지금도 60%이상의 사람들이 개신교를 믿고 있고 지금은 신앙이 자유주의로 많이 변질되었지만 그래서 제네바 아카데미도 제네바 대학이 되었지만 지금은 칼빈이 동의할 수 없는 완전히 자유로운 신학을 가진 대학이 되었습니다. 제네바 대학은 스위스에서 상당히 좋은 대학인 것은 확실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이 꿈꾸었던 이상으로부터는 상당히 멀어진 대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위스를 바라보는 여기서는 인간이 치열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어떻게 보면 마르틴 루터가 독일에서 했던 똑같은 고생스러운 일을 여기에서 이 사람들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스위스에서 일어나는 종교개혁을 거론하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교파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재세례파 사람들입니다. 재세례파는 ‘아나 뱁티스트’ 인데 ‘아나’는 ‘다시 한 번’ 이라는 뜻이고 ‘뱁티스트’ 는 ‘침례자’라는 뜻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가톨릭에서 받은 침례는 소용이 없다.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전통이 있어서 지금도 한국에는 재침례파교파가 있는데 자기네 교파 이외에서 다른 곳에서 받은 침례는 무효라고 보는데 우리는 그렇게는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지금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츠빙글리를 비롯한 넓게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이루어지고 있는 이런 식의 종교개혁은 너무 비겁하고 불완전한 종교개혁이라고 하고 그보다도 더 급진적인 방법으로 종교개혁을 해야 한다고 해서 폭력까지 정당하게 봤습니다. 그래서 프랑수와 1세의 침실까지 붙였던 벽보사건도 결국은 재침례교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났던 것이고 이 사람들이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루터시대의 토마스의 농민혁명운동을 일으키는 말하자면 사상적인 배경을 제공하는 사람이 되어서 피로 물든 살육의 전쟁이 종교개혁을 빙자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두고 스위스를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전해진 이 복음신앙이라는 것이 어느 날 평화로운 공부방에서 공부하던 사람들이 가르쳐주니까 따뜻한 방에서 편안하게 받아서 우리에게 전수된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진리에 대한 헌신과 복음에 대한 희생을 통해서 그것이 결국은 우리에게 까지 전해진 신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츠빙글리는 인물은 사실은 칼빈에게 가려서 우리들에게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어지지 않는 인물이지만 그러나 종교개혁에 대한 열정과 용기, 담대함과 희생 이런 점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견고한 신앙으로 치열하게 헌신했던 개혁가였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면서 스위스 땅을 밟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까펠 암 알비스 - 츠빙글리 순교기념비 (1)
녹취자 : 김미현
2013.9.27-28 종교개혁여행(스위스)
여기는 알려지지 않은 장소이고 오지도 않는 장소입니다. 찾지도 않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는 아주 굉장히 중요한 장소입니다. 가보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허허벌판에 밭같이 생긴 곳에 돌멩이 하나 딱 이렇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보다 더 황당한 곳이 어디냐 하면 거기서 한참 걸어서 가면 언덕이 있습니다. 그런데 언덕을 약간 올라가면 거기도 아무것도 없고 요만한 돌멩이 하나 세워 놓았습니다. 역사적으로 무지하게 중요한 장소입니다.
까펠 암 알비스 - 츠빙글리 순교기념비 (2)
그래서 츠빙글리가 결국 열정적인 개혁운동을 합니다. 츠빙글리는 기본적으로 그 때 모든 개혁자들이 그렇지만 선교적이고 정치적인 강한 야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칸톤들이 카톨릭 칸톤과 프로테스탄트들이 받아들인 칸톤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7개와 4개로 갈라져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츠빙글리가 판도를 보니 개신교 칸톤들이 너무 약합니다. 카톨릭은 강합니다. 강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은 아까 얘기했던 함스부르크가나 이런 봉건 영주들의 지배를 아직까지도 받고 있고 그 사람들이 옛 질서와 체제를 좋아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카톨릭 편에 설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사람은 어떻게 했느냐하면 어떻게 하던지 칸톤을 설득해가지고 개혁주의에 영향을 끼쳐서 그 칸톤이 정치적으로 카톨릭을 버리고 이쪽으로 돌아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이제 정치적인 충돌로 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속에서 치열한 갈등이 일어나면서 먼저 카톨릭의 사제 한 사람이 개신교 측에서 끝까지 말을 안 들으니까 처형을 합니다. 그러니까 저쪽에서 개신교 목사를 하나 잡아다가 불태워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증오감이 폭발을 합니다. 그것이 1529년 6월의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양측이 전쟁이 붙습니다. 그것이 1529년 6월 8일의 일이었습니다. 그 때에 거기에 행정관 한사람이 있는데 아주 외교술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카톨릭측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양쪽을 아주 잘 설득을 합니다. 그래서 합의를 합니다. 합의를 하게 된 중요한 동기가 무엇이냐 하면 그 당시에는 카톨릭이 충분히 뭉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쪽 세력이 훨씬 강했습니다. 카톨릭이 약은 것입니다. 전쟁을 해봐야 엄청난 피를 흘리고 자신들이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떄문에 합의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서로 사제들을 죽이고 목회자를 죽였기 때문에 감정이 극도에 달했지만 절제를 합니다.
이쪽으로 가게 되면 언덕 쪽에 이렇게 있는데 제가 솔직히 얘기해서 그 때 와서 기억이 안 나는데 여기어디입니다. 거기에서 만납니다. 새벽에 만납니다. 만나서 그렇게 양측이 합의를 보고 거기서 새벽에 우유에 곡물을 집어넣어서 죽을 끓여먹습니다. 그래서 그 때 그 회담을 밀크회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떠먹고 ‘어쨌든 우리는 생각은 좀 다르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해서 전쟁까지는 하지 말자. 그러면서 먹고 헤어집니다. 그 후 정확하게 2년 후에 다시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31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이 츠빙글리는 고민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언젠가는 충돌이 일어날 것이고 충돌이 일어나면 도저히 물리적인 전쟁으로서는 자신의 개신교 칸톤들이 안 된다. 왜? 응집력도 약하고 숫자도 소수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하면 ‘독일하고 손을 잡고 싶다.’ 왜냐하면 독일의 많은 영주들은 독일가면 설명하겠지만 개신교로 많이 회귀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순수한 신앙적인 이유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의도가 많습니다. 어쨌든지 그래서 이 사람이 루터와의 회담을 전격적으로 제의를 합니다. 루터파하고 연결이 이루어지면 루터 뒤에는 작센지역의 프레드릭 같은 대현자라고 불리는 프레드리코 같은 영주들이 든든한 백을 가지고 있고 이 사람들이 황제 카를5세 이런 사람들하고 다 인척관계입니다. 5촌, 6촌 이렇습니다. 그러니까 그러면 그 세력을 끌어들이면 카톨릭 하고 한번 맞서볼만 하다. 하고 생각을 하고 그 회담에 몰두를 합니다. 그런데 카톨릭은 2년 동안 화해를 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힘을 완전히 길러서 그래서 이 사람들을 공격해가지고 뭉개버릴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함스부르크 왕가에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비밀로 ‘우리가 아무래도 이 친구들 여기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심상치 않다. 그리고 카톨릭 신앙을 고백하는 칸톤들을 계속 꼬셔서 지금 개신교 신앙으로 끌어들이고 있는데 너희 만약에 이 친구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너희 영토가 위협을 받는다.’ 여기서 설복이 됩니다. 그래서 군대를 모아준 것입니다. 군대가 8000명이나 되었습니다. 8000명이나 되는 군대가 오는데 원래 이 아래의 지역이 말하자면 개신교들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인데 그 때 경비 보는 사람이 300명 정도 밖에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 모아봐야 2000명밖에 안 되었는데 그 때에 이 사람은 출타 중이었습니다. 그 전쟁 소식을 듣고 달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싸웁니다. 이 아래 평야에서 싸웁니다. 그래서 결국은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전멸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츠빙글리는 마지막에 전사하는 장면이 장엄합니다. 이 사람이 이제 싸우다가 결국은 상처 부상을 당해서 말에서 떨어집니다. 그런데 사실 그 때 사진도 없고 매체도 없으니까 얼굴을 봐도 이 사람이 누군지 모릅니다. 옷을 따로 입기 전에 모릅니다. 그래서 이제 떨어졌는데 기도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카톨릭 병사들은 말에서 내려서 다니면서 소지품 같은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전리품 같은 것을. 그런데 한 병사가 쓰러져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자비심을 베풀어서 마지막으로 사제를 불러다가 마지막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죽어라 한 것입니다. 말은 못하고 고개를 젓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개신교도라는 것은 압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죽는 순간에 믿음을 배반시키기 위해서 막 짓밟으면서 ‘마리아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마지막에 죽어라.’ 그렇게 침을 뱉으면서 욕을 하는데 절대 안 된다고 합니다. 그 때에 장군 하나가 ‘왜 그렇게 소란스러우냐?’ 하고 옵니다. 딱 보고 얼굴을 알아보았습니다. ‘츠빙글리이다.’ 그래서 그 사람이 칼을 꺼내서 푹 찌릅니다. 푹 찔러서 죽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죽을 때 남긴 유언이 “육체밖에 멸하지 못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이것이 로마 카톨릭의 패권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혼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죽은 다음에 얼마나 이 츠빙글리가 미웠는지 다섯 토막을 냅니다. 다섯 토막을 내서 다섯 개의 카톨릭 칸톤으로 보냅니다. 카톨릭 칸톤에서 그것을 받아서 불을 태우는 것입니다. 화형도 아닙니다. 토막이니까. 불에 태웁니다. 그런데 이것도 누가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그 칸톤 중의 하나가 간이 들어있는 토막을 받습니다. 그래서 태우는데 다 타는데 간이 안타는 것입니다. 다 태우고 약속이나 한 듯이 그 재를 모두 갈아가지고 돼지 사료에 섞어가지고 돼지를 줍니다. 그러면서 이제 츠빙글리의 사역이 끝이 납니다. 그것이 1531년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칼빈과 비교가 안 되는 것이 칼빈은 기껏해야 그 때 고를향?이나 부르짖으면서 공부하고 있었고 36년 되어서야 제네바에 개혁자로 오니까 장렬하게 싸우고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더하겠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츠빙글리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습니까? 아주 중요한 사상 네 가지를 남겼습니다. 철저한 하나님 중심, 두 번째는 성경 중심, 세 번째는 진정한 교회가 무엇인가? 진정한 교회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국가와 교회를 헷갈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믿는 사람만으로 해서는 안 된다. ‘한 지역에서 영주가 신앙 고백하면 이 사람들은 무조건 강제적으로 교회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던 때였는데 이 사람은 그렇게 생각을 안했습니다. 참 교회와 거짓교회에 대한 사상을 오늘 우리가 개혁신학에서 배우는 것과 꼭 같은 것을 이미 이 사람이 완성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성례에 대해서 성례가 카톨릭에서는 7성례입니다. 이 사람이 벌써 초창기에 두 가지 이외에는 신적 권위를 가진 성례일 수 없다. 그 두 가지가 세례와 성찬입니다. 이것도 이제 개혁교회 교리를 완성을 합니다. 다만 조금 아쉬운 것은 성찬에 있어서 철저하게 기념설을 채택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칼빈이 그것을 보완을 해서 기념설이 아니라 영적 임재설을 이야기해서 카톨릭의 사상을 극복하고 개신교 신학을 세우는 기초석을 만들게 됩니다. 그렇게 공부 많이 한 천재가 주님을 깊이 만나고 예수님 사랑하고 헌신하다가 마지막에 여기서 자기 동생, 자기 아들, 자기 사위 모두 같이 여기에서 전사해서 장렬하게 최후를 바치면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빌헬름텔 기독교강요 저작관련,
칼빈의 임종
시간이 없어서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지만 우리 지난번에 어제 카페 감 알비치 갔었습니다. 그래서 츠빙글리가 전사한 현장을 봤는데 여러분 혹시 어렸을 때 읽은 책 가운데 빌헬름텔이라는 소설 기억하십니까? 읽어보지 않았어도 이름은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때를 그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을 지지하는 봉건영주가 이제 자기 지배권을 강요하면서 어느 성을 지배하면서 자기 모자를 놓고 지나가는 모든 동네 사람들에게 절을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절을 안 하고 가니까 “너 왜 절을 안 하냐?”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자기는 “모자 같은 데에 절을 안 하겠다.” 하고 반항심을 보였습니다. 잔인하게도 “그럼 네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놓을 테니까 아들을 맞추면 네가 살고 사과를 맞추면 둘 다 살고 둘 다 못 맞추면 둘 다 죽는다.” 그리고 숙제를 냅니다. 그런데 빌헬름텔이 활의 명사수였습니다. 그래서 두 개의 화살을 가져다 쏘아서 사과를 꿰뚫어서 둘 다 삽니다. 나중에 이 사람을 잡고 보니 화살이 하나 남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사수인데 왜 화살이 둘이냐?” 하였더니 “만약에 기회가 있었으면 남은 화살로는 당신을 쏘았을 것입니다.” 하니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벌을 받고 결국 쫓겨납니다. 죽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결국은 그 활로 남은 화살 하나로 그 사람을 죽이고 복수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때의 갈등을 역사적 배경이 담고 있는 것입니다.
제네바를 휙 지나오는 바람에 사실 제네바에서는 칼빈의 생애에 대한 할 얘기들이 굉장히 많았는데 칼빈이 1553년쯤 들어섰을 때 그러니까 41년도에 가서 13년 정도 지났을 때에는 제네바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칼빈의 대적자들이 수없이 생겨났고 소위 얘기하는 자유파라는 사람들에 의해서 방종하게 살려고 하는 강한 욕구들이 의회까지 들어와서 칼빈을 뒤흔들게 됩니다. 그런데 1553년 쯤 되어서는 엄청나게 많은 인구가 늘어나게 됩니다. 제네바가 원래 쪼그만 동네였는데 인구가 늘어났는데 그 사람들이 이민자들입니다. 이민자들은 그저께 얘기했듯이 유럽 각국에서 핍박을 견디다 못해서 이태리에서 영국에서 프랑스에서 핍박을 받아서 칼빈 선생에 대한 명성을 듣고 칼빈의 제자들로부터 설교를 듣다가 칼빈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칼빈의 책과 주석을 읽다가 왔으니 말할 수 없는 감격일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칼빈을 지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이 맨 처음 2차 제네바 개혁하기 위해 41년도에 왔을 때 5000명 정도 교인이었는데 그 때쯤 되어서 15000명 정도 교인이 되었으니 도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엄청나고 이 사람들이 전부다 헌금을 하고 세금을 내고 그 사람들 중에서 시의 대표자가 뽑히고 하니 시에서 실제적으로 행정관이나 이런 사람들이 적대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칼빈이 1559년에 기독교강요 제 3판을 완성합니다. 처음 기독교강요를 썼을 때가 1536년 이었는데 20여년 만에 마무리를 할 때에는 그 두께가 세배로 늘어나게 됩니다. 엄청나게 두꺼운 상당히 완벽한 책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교리반에 가게 되면 맨 처음 일곱 가지 논제 순서가 어떻게 됩니까? 서론-신론-인간론-기독론-구원론-교회론-종말론 이런 것이 합의가 된 전체적인 얼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칼빈이 기독교 강요 제 3판에서 논제들을 다 배열하면서 그 순서를 완성을 하고 ‘이제야 내 마음에 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기독교 강요와 맞먹는 루터파의 조직신학서가 ‘신학총론’이라고 하였습니다. 루터파에서는 조직신학자들이 별로 안 나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신학총론의 체제가 아주 난잡하고 어지러워서 무엇을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에 비해서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명료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쪽에서 조직신학자들이 많이 나오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고 열심히 사역을 하면서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53년에서부터 그러다가 1563년부터 칼빈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564년에 와서는 심각할 정도가 됩니다. 설교를 하면 피가 나오고 장으로 고생하고, 담석증이 있고, 온 몸이 마르고 이렇게 해서 결국은 64년 2월 6일에는 더 이상 설교를 할 수 없는 처지가 되고 3월 10일에 시의회가 결의를 해서 모든 시민들에게 칼빈 선생을 위해 기도하도록 요청을 합니다. 그리고 4월 25일 자기가 목회하는 제네바의 모든 목회자들, 동역자들을 불러서 이제 유언을 남깁니다. 그리고 결국 5월 19일 성찬을 받고 성찬 받기 직전에 재원 문제로 소원했던 빠렐에게 마지막 작별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5월 27일 오후8시 숨을 거둡니다. 칼빈은 아주 치열하게 공부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이델레뜨가 먼저 죽습니다. 죽기 얼마 전에 아내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목회한다고 공부한다고 헌신적으로 일하면서 가족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고 또 아이를 하나 낳았는데 아들을 낳았는데 두주 만에 죽습니다. 이델레뜨 사이에서 그러면서 자기의 가정에 소홀했던 것을 용서를 빕니다. 이델레뜨 그가 아주 유명한 답변을 남깁니다. 사과하는 칼빈에게 “아닙니다. 아이들을 돌보고 가정을 지키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었고 한 번도 그 소명의 나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열심히 목회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그 모습 자체가 우리 아이들에게는 가장 훌륭한 교육이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델레뜨의 헌신적인 도움과 돌봄, 이해, 이 속에서 칼빈은 연약한 몸을 이끌고 정치 그리고 심지어는 외교, 대외관계, 목회, 병자들을 심방하는 것, 집필활동, 카톨릭과 논쟁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을 감당하는 그런 엄청난 일들을 소화하게 됩니다.
칼빈이 제네바에 있을 때 남긴 아름다운 예화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우리를 눈물 나게 하는 예화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이제 카톨릭 사람들이 하도 제네바로 사람들이 몰려드니까 수시로 사람들이 개신교로 개종을 하니까 카톨릭에서 사람들을 보냅니다. “도대체 칼빈이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보고 오너라.” 그래서 두 사람인지 세 사람이 옵니다. 칼빈 선생의 집이 어디냐 물어보니 가르쳐 줍니다. 똑똑 두드리니 초라하게 생긴 하인이 나오는 것입니다. 옷도 초라하고 남루해 보이는 사람이 걸어 나옵니다. “얘야, 우리는 카톨릭에서 온 누구누구다. 칼빈 선생을 뵈러 왔으니 칼빈 선생을 모시고 오너라.” 그러니 이 종이 “제가 칼빈입니다.” 여기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제들이 돌아가면서 자신들은 그 당시에 아주 호화로운 생활에 빠져있고 했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시종 하나 제대로 섬김을 받지 못하고 거기에 있는 칼빈이 시종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아, 이 개신교의 힘이 제네바 목회에서 오는 칼빈의 개혁신앙의 힘이 이렇게 나타나는 구나.’ 하면서 커다란 감동을 받습니다. 칼빈은 비록 츠빙글리나 루터같이 극적인 삶을 산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정말 오랜 세월 동안 그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환경에 놓이면서 수많은 악한 사람들로부터 피가 마르도록 그렇게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칼빈이 마지막 죽을 때 유언에서 자기의 죽음을 하나님의 구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괴로움과 고통과 질병으로부터 놓임을 받는 날이 자기가 죽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죽을 때 아무도 죽는 것을 못 봅니다. 임종 때가 가까웠다고 유언을 남겨놓고도 한 달 이상 살고 하니 설마 하였다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홀로 고요히 죽고 제일 먼저 발견한 그 시종이 제일 먼저 연락한 사람이 배자입니다. 배자가 좀 떨어진 곳에 있다가 부리나케 달려왔을 때에는 이미 선생님이 운명하신 이후였습니다. 이런 칼빈의 삶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4-5년 전에 왔을 때 루터를 쭉 돌고 그 다음 칼빈으로 왔습니다. 루터를 쭉 돌 때에는 정말 감동은 많이 받는데 눈물은 안 납니다. 왜냐하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시대와 환경은 루터가 같은 그런 경랑이 몰아치던 환경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삐에르 예배당에 딱 들어갔을 때에는 눈물이 한없이 쏟아졌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루터같이 그렇게 담대하고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성적인 사람이 그 고난을 당하면서 긴 세월 동안을 거기서 목회를 하고 마지막에 거기서 목회 안했고 바질에서 책이나 쓰면서 이런데 와서 기독교강요나 3판, 4판 썼으면 칼빈도 오래 살았을 것입니다. 거기서 한없이 시달리면서 결국 일찍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동변상련의 정을 느꼈습니다.
이제 오른편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드디어 알프스를 향해 본격적으로 올라가고 있고 모든 마을이 그렇습니다. 짚더미 하나 묶어 놓은 것도 디자인 고려를 다 해서 색깔과 모양도 모두 다 어울리게 쌓아놓습니다. 이것이 스위스의 힘입니다. 여러분 이제 특별은총은 끝났으니 일반 은총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취리히 - 하인리히 블링거가 사역하던 그로스뮌스터 교회
자 여기 보십시오. 이제 블링거는 여기 우리들이 까펠에 갔었습니다. 그 쪽 나도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는데 그 쪽 지방 사람입니다. 아주 굉장히 종교개혁가들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뛰어난 수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머리 나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 공부를 잘하지 않으면 그 당시에 로마 카톨릭에 지성인이 아니면 깨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수재였습니다. 그래서 5살 때부터 라틴어 학교에 입학을 해서 라틴어를 배우고 그리고 아버지가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얘를 특별히 사랑해서 교육에 심혈을 쏟습니다. 집안이 상당히 여유가 있는 집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12살 되던 해에 화란으로 유학을 보냅니다. 형과 함께 화란에 가서 거기서 공부를 합니다. 화란이 그 당시에 중요 유럽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인문주의를 깊이 받아들이고 말하자면 개혁신앙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도시들이었습니다. 거기서 3년을 마친 다음에 다시 돌아와서 퀠른 대학에 입학하는데 퀠른 대학교는 중세에서부터 아주 유명한 대학이었습니다. 여기 졸업생이 토마스 아퀴나스, 불스 스쿠트스,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승인 대 알베르투스 그리고 이후에 신비주의자이긴 했지만 탁월한 지성을 가지고 있었던 에크하르트, 그의 제자인 요한 파울러 이런 사람들이 다니던 지성과 신비주의적인 영성이 겸비한 학교였습니다. 이 학교에도 역시 탁월한 인문주의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계속 이야기하였는데 뛰어난 종교개혁자 배후에는 교육이 있었고 그 교육의 배후에는 탁월한 인문주의자들이 대학 혹은 콜레쥬 시절이 영향을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영향을 깊이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퀠른에서 석사까지 마칠 때쯤 되어서는 주님을 깊이 만납니다. 이 사람이 누구를 탐독하느냐하면 네 사람 정도를 탐독했는데 요한 크리스토스톰, 동방 교부 중에서 가장 성경 해석에 능하였던 탁월한 설교자였고 여러분들이 이스탄불에 가면 하기오 성당 성 소피아 성당에 가는데 원래 그 성당 있던 자리에 요한 크리스토스톰이 목회하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목회하던 사람이었고 이 사람이 원래 거기서 목회 안했는데 워낙 설교를 탁월하게 잘하니까 보쌈을 해서 납치를 해서 거기다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설교를 했는데 귀족들을 탄핵하는 설교를 해서 미움을 받아서 결국 거기서 순교합니다. 어쨌든 요한 크리스토스톰, 제가 대학원 졸업하고,나서 한창 심취했던 설교자입니다. 기가 막힙니다. 피터 롬바르두스라고 하는 유명한 10세기에 소위 얘기하는 기독교 역사에서 조직신학서를 제대로 쓴 최초의 인물이라고 불리워지는 인물이고 그래서 여러분들이 쭉 보면 종교개혁자들의 연표를 보면 ‘언제 언제 피터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에 주석을 쓰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다 예외가 없이 ‘롬바르두스 명제집의 주석을 쓰다.’ 혹은 ‘롬바르두스의 명제집에 주석을 쓰다.’ 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 그 책이 워낙 기독교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탁월한 책이었기 때문에 내가 신학자로서 역량이 되는가 하는 것을 거기에다가 토를 다는 것으로 시험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 과정을 통과해야 하고 뛰어난 사람들은 책을 냄으로서 ‘이 사람 정말 명제집 해석을 기가 막히게 했다. 이 사람 상당한 실력이 있구나.’ 하는 과정을 심지어 토마스 아퀴나스도 밟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피터 롬바르두스 명제집의 해설이라고 하는 유명한 주석 책이 꽤 여러 권이 나와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이 깊이 심취했던 사람이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그의 스승이었던 암브로시우스 같은 사람을 깊이 공부를 하면서 그러다 아주 중요한 계기 하나를 만나서 책을 한권 손에 넣게 됩니다. 그 책이 루터의 제자인 멜랑히톤이 막 쓴 따끈따끈한 책인 ‘신학총론’이라는 손에 넣게 됩니다. 그런데 이 책은 개신교 역사에서 ‘기독교강요’, 어제 우리가 얘기했던 츠빙글리의 ‘참된 종교와 거짓된 종교’, 이 책 두 권과 함께 개신교 시작 시점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조직신학 책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기독교 강요가 가장 탁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신학총론’을 읽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기독교의 진리의 체계가 이런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깊은 성찰을 얻게 되고 그 다음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약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게 되고 그 때에 옆에 무엇이 있었냐하면 요한 크리스토스톰의 ‘신약성경 설교집’이 있었습니다. 두 개를 같이 놓고 읽으면서 복음을 깊이 체험하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말로 하자면 주님을 영접합니다. 그리고 나서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석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졸업을 해서 처음에는 카르투지오 수도회라고 하는 곳에 들어가서 수도사가 되고 싶었는데 복음을 깊이 만나서 이제 계획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 때에 복음 사상을 깊이 섭취했는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가르칠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함부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자신은 지금 평신도의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차에 시투 수도회에서 교리학교 교장직을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아무래도 수도사하고는 거리가 멀어 거절을 합니다. 그랬더니 ‘그렇다면 미사에 참석 안 해도 좋고 사제가 되지 않아도 좋으니까 사람들을 좀 가르쳐달라.’는 제안이 옵니다.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거기서 카톨릭의 선생의 직분을 가지고 개혁교회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자기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 일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 후에 열심히 하다가 츠빙글리가 죽습니다. 죽으니까 그 동네 전체가 다시 카톨릭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기의 신념대로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떠나오게 됩니다. 그 때에 우리가 어제 갔던 지역에 갔다 취리히에서 그 소식을 듣고 이 사람을 정중하게 초청을 합니다. 취리에서 초청한 것은 개혁주의로 돌아선 교회에서 초청을 하는 것입니다. 초청한 것이 츠빙글리가 죽고 나서 두 달 밖에 안 되었을 때입니다. 그 때 초청을 해서 조건을 겁니다. 츠빙글리한테 시달려서 그랬는지 ‘일체 정치에 간섭하지 않고 설교만 한다고 약속을 하라.’ 마치 담임 목사에 고생한 당회원들이 후임 목회자 부를 때에는 설교만 한다고 조건을 거는 것처럼 블링거를 부릅니다. 블링거를 부르면서 소위 얘기하는 안티스테패스라는 직책을 줍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말하자면 선임목사, 직역을 하자면 최고의 목사라고 하는 뜻입니다. 최고의 목사 직위를 받은 사람이 앞에 누가 있었느냐 하면 츠빙글리가 있었고 그리고 오일코 라파기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바질에서 받았고 이 사람이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서 다시 최고의 목사를 받는데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의회와 서로 의논을 할 때에 이 지역의 모든 목회자의 대표로 인정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여기에 오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목회를 하는데 츠빙글리와는 반대의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조용하고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돌보는 겸손하고 평화주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존경을 아주 많이 받으면서 목회를 하고 25세 되는 해에 역시 도망 나온 수녀와 결혼을 합니다. 개혁자들은 거의 대부분 도망 나온 수녀들과 결혼을 합니다. 결혼을 하고 세 딸을 낳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존경을 받으며 목회를 하는데 그의 나이 60세 쯤 넘었을 때 이 지역에 페스트가 휩쓸고 지나갑니다. 결국은 아내와 세 딸을 모두 잃어버립니다. 그런 큰 슬픔을 겪으면서도 변함없이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목회를 하다가 마지막에는 칼빈 처럼 온 몸에 병이 들고 결정적인 질병은 간에 결석이 생겨서 결석증으로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왜 개혁교회 역사에 있어서 츠빙글리가 그렇게 중요한가 하냐하면 츠빙글리는 개혁신학의 역사에 매우 중요한 일에 이바지하게 됩니다. 그것이 두 개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크게 세 가지 인데 첫째는 1536년인가에 제1스위스신앙고백서라는 것이 작성이 됩니다. 그 때에 사실은 이 사람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지만 여기에 참여해서 스위스신앙고백을 완성을 합니다. 그 스위스신앙고백을 완성할 때 루터파와 다 연결해서 만드는데 작성을 다 해놨는데 취리히에서 그것을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루터파적인 요소가 너무 많고 개혁주의적인 요소를 너무 양보했다 해서 거부를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그 후에 30년 정도 28년 정도 세월이 흐른 후에 1666년 정도 되는 그 때에 다시 신앙고백서를 작성을 할 계기가 생기게 됩니다. 왜 작성을 하게 되었느냐하면 독일가면 얘기하겠지만 독일 지역도 역시 통일이 아주 늦게 되었습니다. 쪼가리 쪼가리 쪼개져서 영주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영주들 중에서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세력이 있는 영주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선제후라고 합니다. 팔라틴 지방의 선제후인 프레드릭 3세라고 하는 사람이 군주로서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에 불링거 명성을 듣고 불링거 쪽에 연락을 보내서 신앙고백서 하나를 작성해 주어서 우리가 무엇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지에 대한 확고한 윤곽을 하나 그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신앙고백서를 작성을 하게 됩니다. 그 때에 가족들이 모두 죽고 자기 자신도 역병에 걸려서 거의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러는 속에서도 4년 동안을 전적으로 그 일을 헌신을 해서 신앙고백서를 만듭니다. 여러 사람들이 만들었지만 사실상 블링거의 작품이라고 모두 인정을 합니다. 그렇게 완성을 하는데 39장 정도로 되어 있는 아주 방대한 신앙고백서입니다. 놀랍게도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 중에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있습니다.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가 쓴 그것이 사실은 이 사람이 쓴 제2스위스신앙고백이 모태가 되어서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 내용이 아주 따뜻하고 목회적입니다. 성품을 반영을 해서 이것을 여기서 받아들이면서 개신교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확고한 신앙고백이 생겨나고 이것을 영국 청교도들이 이것을 받아들여서 자기네 신앙고백의 기준서를 삼습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가 나오기 전까지입니다.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스위스 제2신앙고백서입니다.
이 사람의 신학적인 큰 공로 마지막 하나를 말하고 얘기를 마치겠습니다. 신학적으로 이 사람이 세운 커다란 공로가 몇 개 있는데 우선 작은 것부터 얘기하자면 이 사람은 맨 처음에 선배인 츠빙글리의 견해를 물려받아서 성찬에 있어서 기념설적인 입장을 취합니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에 대한 깊은 경계를 했기 때문에 성찬 속에 어떤 신비가 있다는 것을 끝까지 배척하고자 했던 것이 츠빙글리의 마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목회를 하면서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칼빈의 영적 임재설을 가미를 해서 그래서 아주 은혜로운 성찬교리를 만듭니다. 이것이 이 사람의 공로이고 또 하나는 예정에 있어서 예정이 대개 많은 개혁자들이 예정은 선택만 예정되었지 유기는 예정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이 사람은 아주 확연하게 이중의 예정을 함께 이야기를 해서 모두 영원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런 교리를 확고하게 세웁니다. 이 두 가지 보다 더 중요한 커다란 신학적인 지혜가 있는데 대륙형 언약주의를 만들어냅니다. 언약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여태까지 신학이 조직신학적인 교리 중심으로 오던 것 중에서 특별히 이 사람이 언약에 대한 것을 강조하게 됩니다. 언약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그 언약의 당사자로서 우리를 부르셨기 떄문에 하나님이 그 언약을 통해서 당신의 구원과 보호가 주권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언약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그 언약에 참예하여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교리를 가지고 한편으로는 하나님 홀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주권사상을 강조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으니까 언약 백성답게 살아서 의무를 이행해야지만 이 언약이 아름답게 성취될 수 있다는 쌍무적인 성격을 강조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을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의무를 강조했는데 칼빈이 전자를 치중했다면 이 사람은 후자를 강조해서 이 하나님의 언약관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 말씀을 따라 거룩한 양심으로 살아야지만 올바른 언약관계가 수립될 수 있다는 사상을 만듦으로서 영국 청교도들의 언약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데 그 영향을 깊이 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존오웬 목사님입니다. 이 사람이 쓴 유명한 책이 아무것도 번역되어 있는 것이 없는데 영어로 나와 있는 것이 있습니다. The decades of sermons 수십 년 동안의 설교라는 제목의 책인데 이 책이 무엇을 설교한 것이냐 하면 교리를 설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쪽지역에서는 기독교강요보다 훨씬 더 많이 애독이 된 책입니다. 그래서 개혁신학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책이고 마지막에는 가족까지 다 잃어버리고 눈물로 고통 속에서 목회를 하다가 마지막에 그의 나이 74년생이니 71세 되던 해에 주님의 품에 안깁니다. 시편 16편을 외우면서 임종을 하게 됩니다.
편지의 사람
이 사람은 이 동네를 떠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전 유럽에 있는 개혁자들과 편지를 나누었습니다. 일만 이천 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대단합니다.
기독교회사 공부하기 어려운 이유
그런데 이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기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선 일반역사에 대한 각 나라의 지식이 배경이 되어야지만 무슨 사건이 일어날 때 어떻게 이것이 좌우로 연결이 되는지 알 수 있는데 저도 잘 모릅니다. 저도 교회사 교수에게 “이것 너무 어렵다.” 하였더니 자기네도 박사 할 때 너무 힘들어서 커다란 표를 만들어놓고 독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 프랑스에서는, 이태리에서는 이런 것들을 외우는데 자꾸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도 그러니까 우리 같은 아마추어야 그저 신앙생활 하기에 필요한 정도로 지식을 가지면 되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아는 것 같으면서도 거의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 같다는 뜻은 무슨 얘기를 하면 다 들어본 낱말들입니다. 신성로마제국, 고등학교 사회시간에 열심히 외웠습니다. 선제후 이런 것 다 외웠습니다. 칸톤 이런 것.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사르마뉴 1세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동유럽쪽에서 이슬람 세력들이 세력을 얻으면서 서로마제국은 이미 망했고 로마 기독교 국가들이 현저히 약해졌을 때에 기독교권을 공격을 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기독교권을 와해시키기 위해 누구를 공격하겠습니까? 동로마는 감히 쳐들어갈 엄두를 못 내고 우선 서로마제국에 있는 교황부터 없애면 와해될 것 아니겠습니까? 교황은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고 있는데 샤르마뉴 1세가 오니까 카를로스 1세라고 하는 사람이 막아줍니다. 훌륭하게 막아줍니다. 이 사람은 굉장히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람을 신성로마제국의 시초가 아니냐고 하는데 신성로마제국의 시초가 아니고 이 사람은 신성로마제국의 ??같은 것을 얻는데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기독교 제국을 통일을 하고 싶었는데 결국 상당한 업적을 이룹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고 나니까 아들들을 유능하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들이 여럿이니 어떻게 합니까? 나라를 유산 나누듯이 한 토막 두 토막 나누어서 역사 속에 보면 서프랑크왕국, 동프랑크왕국, 중프랑크 왕국 해서 프랑크 왕국이 세 개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프랑크라는데서 프랑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와해되다가 100년 후쯤 다시 로마교황이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위기가 무엇이냐 하면 그 독일의 제후들이 연합을 해서 교황을 공격하려는 시도였습니다. 그것을 훌륭하게 막아주면서 앞서 있었던 카를5세의 프랑크왕국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는 것입니다. 교황으로서는 너무나 감지덕지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너야말로 말하자면 로마제국의 맥을 이을 정통성을 가진 사람이다.” 여기에는 동로마제국에 대한 없지 않은 감정도 배어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동로마제국이 한창 잘 나갈 때에는 황제가 로마 교황 알기를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정도 수준으로 밖에 안 보았습니다. 오히려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 그렇게 되면서 교황을 보호해줘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의 시대가 거의 800년 가까이 계속되게 됩니다. 그러다 종교개혁이 일어날 때쯤 되어서 강력한 통치권이 이미 다 사라져버리고 신성로마제국이 있긴 있었습니다. 카를4세 같은 경우가 그런 사람입니다. 황제가 된다고 해봐야 선출해서 된 것이니 지난번 가이드선생님이 얘기하신 것처럼 똑똑한 사람을 황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짜 똑똑한 사람 만들면 자기네들을 어떤 식으로든지 다 짓누를 테니 얼얼한 사람 좀 만만해 보이는 사람을 황제로 뽑는 것입니다. 황제가 실질적으로 강력한 권한이 없습니다. 그런 권한이 있었더라면 마틴 루터가 신성로마제국 영토 안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인데 황제가 한 번에 멈춰버리면 끝인데 황제가 그럴 수 있는 권한이 실질적으로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제후 7명과 황제의 관계가 친척, 족벌 이렇게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함부로 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역사가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독일이 이탈리아처럼 프랑스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였다고 한다면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신성로마제국이 다 약화되고 제후들이 있는데 제후들은 각자 종교개혁을 독실한 신앙심 때문에 종교개혁을 택한 사람도 있지만 교황청에 붙는 것이 나을까 마틴 루터 편에 붙는 것이 나을까 생각을 하면서 개혁에 가담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하면서 세계사의 커다란 물줄기가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아인즈델름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다음에 남은 것이 스트라스부르입니다. 스트라스부르크, 혹은 스트라스부르라고 하는데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다 프랑스의 영토였다가 왔다 갔다 하면서 이름이 둘이 생겼다고 하는데 지금은 프랑스 영토가 되어서 스트라스부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스트라스부르에 대한 것에서는 개혁주의의 산실이라고 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들도 많이 일어나고 그리고 거기서 개혁사상이 무르익는 요람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나오는 마틴부처와 칼빈 그리고 프랑스 난밍, 이델레트 등등의 이야기는 스트라스부르그로 가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아인지델른 검은성모상
베네딕트 수도회 도서관
하나만 더 설명하고 가겠습니다. 이 수도원이 유명한 이유 중에 하나가 저기 검은 마리아상 그것만 아니라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있는데 도서관입니다. 도서관이 9세기 책부터 시작해서 23만권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직 못 들어가 봤습니다. 그 장소 중에 제일 유명한 것이 9세기에 그려진 그레고리안 성가 121번의 실제 그린 악보가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교회사에서 그레고리안 성가 혹은 그레소리안 찬트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그 설명을 드리자면 그레고리라고 하는 교황이 있었는데 아주 존경받고 경건한 교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재임 기간이 7세기 사람인데 이 사람이 음악에 아주 깊은 관심이 있어서 이 사람이 스스로 작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곡을 모았는데 그것을 그레고리안 찬트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레고리안 찬트뿐 아니라 교회 역사에서 10여개의 찬트가 있습니다. 찬트라는 것은 성가곡을 모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레고리안 찬트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단음입니다.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면서 변성기 이전의 남성들이 여러 명이 똑같은 단음의 목소리로 부르는 찬송을 들어보신 적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미사곡으로 많이 쓰였는데 그 곡이 유럽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데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여기에 9세기 에 그려졌으니까 벌써 1100년 전이니까 굉장한 것입니다. 필사본으로 그린 121번 악보가 여기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가 유명하고 둘러보니 다른 교회당에서 거의 못 볼 정도의 화려한 건축양식입니다. 이것이 바로크양식입니다. 여러분 단어들은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바로크라고 하는 말은 원래 포루투칼어로 울퉁불퉁한 진주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바로크라는 것이 오고 바로크 예술의 특징은 화려한 것입니다. 저런 화려한 것이 언제부터 본격적으로 생기냐하면 18세기입니다. 사조적으로 18세기는 영국의 경험주의, 낭만주의가 일어날 때입니다. 거대한 인식론의 선회가 이루어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신 중심이었다가 인간에 대해서 눈을 뜨고 인간에 대해서 눈을 뜨고 나니까 ‘하나님이 보시는 시선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보는 것도 중요하다.’ 인간이 보기에 즐겁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즐거우시기 위해서는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지만 우리가 보기에 즐겁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뻐야 합니다. 어느 자매가 어느 회사에 입사시험을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옷차림이 너무 후져서 “자네는 똑똑하고 학교도 좋은데 옷차림이 그것이 무엇인가?” 그랬더니 “우리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장님은 외모도 보신다.”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저런 화려한 인간에게 아름다움에 대한 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화려한 양식이 꽃피게 됩니다. 이 바로크 양식이 프랑스에 들어가서 더욱 세밀하게 발전한 것을 로코코양식이라고 합니다. 원래 로코코는 조개의 빗살무늬 이런 것을 의미합니다.
아인지델른 검은성모상 베네딕트 수도회
너무 오래하면 다음 일정이 지장이 있으니까 간략하게 얘기하겠습니다. 여기가 아인지델른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여기는 카톨릭의 성지 중 성지입니다. 어느 정도 성지냐 하면 10세기까지는 로마와 거의 맞먹는 성지였습니다. 여기가 왜 그렇게 중요한 성지인가하면 9세기경에 여기에 한사람이 수도를 하고 여기에서 커다란 기적과 은혜를 체험한 다음에 수도 생활을 하게 되고 소문이 나게 되고 그 때에 여기에 있는 유명한 어린 성모마리아상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세기 100년쯤 후에 여기에 교회가 서게 되고 큰 수도원이 서게 되고 그리고 수도원 소속은 엄격하기로 아주 유명한 베네딕트 수도회입니다. 그리고 그 11세기경에 건물들의 기본이 서게 됩니다. ?? 역사까지는 잘 모르고 어쨌든 서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가 왜 그렇게 유명한 수도지냐하면 사도 가운데 야고보 사도를 기념하는 순례의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례의 길이 비아자끄라고 하는 곳인데 자끄가 사실은 불어로 영어의 제임스를 옮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가끔 성당을 둘러보다 보면 이상하게 성당에 가리비 조각이 있는 것이 보입니다. 그것이 불어로 가리비를 자끄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리비가 새겨진 곳은 야고보 사도를 기념한 교회, 혹은 야고보라는 교회사 인물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래서 여기가 성자끄의 길이라고 해서 야고보 사도를 기념하는 유명한 순례의 길이 되었고 지금도 15만 명에서 20만 명 정도 나온다고 기사가 나옵니다. 여기가 그렇게 유명해진 이유는 카톨릭이 유명하고 교황이 매년 와서 여기에서 미사를 할 정도로 그렇게 카톨릭에서 중시하는 성지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성지를 우리들이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여기가 제가 취리히에서 설명한 츠빙글리가 목회하던 예배당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굉장히 뜻 깊은 곳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생각했을 때 ‘츠빙글리가 개혁자인데 왜 여기 예배당에서 목회를 하나?’ 했습니다. 그 당시에 그 사람은 카톨릭의 사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취리히에서 목회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까지 그 사람은 취리히에 갈 때도 카톨릭의 사제로 초청을 받아서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가 1500년대 초이니까 아직 종교개혁이 활발하게 일어나서 ‘개신교 신학이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근간이 아직 세워지기 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31년도 12월에 취리히로 하게 되니까 여러분이 생각했을 때 얼마나 많은 기독교의 개신교의 특징들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을 때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츠빙글리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삼촌이 교무처장 같은 사람이어서 여러 대학을 다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노래를 정말 잘했습니다. 공부만 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도미티크 수도회에서 이 사람을 수도사로 말하자면 만들려고 손길을 뻗칩니다. 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고 질겁을 해서 이 아이를 비엔나 대학으로 옮겨서 계속 공부를 하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 비엔나 대학에서 인문주의자들을 만나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특징이 신앙심이 돈독하고 공부를 잘하고 인문주의에 ??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특징을 다 가집니다. 그리고 바젤로 돌아와서 바젤에서 공부를 해서 1484년생이니 21살 되던 해에 학사학위를 받고, 22살 되던 해에 석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목회지로 가는 곳이 글라루스라고 하는 곳이었는데 1516년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10년 동안 목회를 합니다. 글라루스가 어딘지는 저도 가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목회를 하면서 목회도 열심히 했지만 10년 동안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합니다. 그래서 10년 동안에 ??의 저작과 그리고 말하자면 개혁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작품을 섭렵하면서 거기서 풍부한 개혁가적인 정신을 소유하고 복음의 깊이에 대해서 눈뜨는 일이 있게 됩니다. 여기서 10년 동안 아주 목회를 잘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되는데 쫓겨나게 됩니다. 쫓겨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용병제도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어떤 관습이 있었느냐하면 용병이 자기네 교구에서 용병들이 있는 곳에 용병들이 전쟁을 하게 되면 종종 목사와 ??이 ??해서 그들을 격려하고 돌보는 것이 그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가게 됩니다. 그 때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전쟁이 어떤 전쟁이냐 하면 신성로마제국이 이태리 북부를 공격을 하고 그것을 본 교황이 프랑스와 1세에게 지원 요청을 해서 결국은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두 번 전쟁이 일어나는데 1513년 전쟁에서는 이깁니다. 그러다 1516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런데 거기서 일만 명 이상의 스위스 사람들이 군인들이 죽는 광경을 이 사람이 똑똑히 눈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신성로마제국에 용병으로 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에 용병으로 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여러분들이 역사시간에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얘기를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에 대한 이야기는 유럽사 전체와 거미줄처럼 얽혀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이 맨 처음에 생긴 것이 10세기이고 망한 것이 19세기입니다. 그러니까 유럽사 전체에 신성로마제국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신성로마제국 이야기를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여러분 로마제국이 둘로 나누어졌던 것은 아실 것입니다. 로마에 수도가 있었는데 콘스탄틴 대제가 승리하고 왕이 된 다음에 수도를 이스탄불로 옮깁니다. 그것이 바로 콘스탄티노플이고 지금의 이스탄불입니다. 그래서 제국은 하나였는데 제국이 쪼개진 것이 아니라 수도를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말하자면 부황제 같은 사람을 두어서 제국 전체를 통치합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그리로 이전한 이유는 거기는 너무 외지다고 보았습니다. 반도 장화 쑥 들어간 것 같은 곳에 있고 이 큰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지리적으로도 좋지 않고 물자나 자원 같은 것들이 부족하다고 보았는데 이스탄불은 여러분이 알다시피 그 당시에도 벌써 교역로였습니다. 온갖 사람이 모이는 아주 요충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리로 이전을 합니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나라가 갈라지게 되고 거기는 로마에는 교황이 있고 편의상으로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서로마제국은 476년에 망합니다. 시오노나나미가 쓴 로마인이야기를 보면 서로마제국이 신속하게 멸망하게 된 이유는 처음 서로마제국을 지탱하게 만들었던 힘이 로마시민권을 아무에게나 안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배력이 약화 되면서 이 시민권을 자기들이 거느리고 있는 속주에 있는 사람들이 쉽게 시민권을 딸 수 있게끔 길을 열어주면서부터 로마제국의 이상 같은 것들이 허물어지고 로마라고 하는 정치성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서로마제국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로마제국은 1453년 오스만투르크족이 공격을 해서 망할 때까지 서로마제국은 1000년 이상 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약 10세기경의 일이었습니다. 로마교황은 동로마제국은 로마교황 알기를 자기 하수인 정도로만 알아서 그렇게 강성하지 못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북쪽에서 이슬람 족들이 쳐내려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쳐내려오면 당장 로마를 향한 공격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여러분들이 역사 속에서 배운 샤를마뉴대제라고 하는 1세가 훌륭하게 그 공격을 막습니다. 그래서 잘 지켜주는데 그 1세기 후에 다시 오토대제라고 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은 독일에 있는 제후들이 서로 결탁을 해서 로마를 공격을 하려는 것을 막고 전체적인 세력을 통일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져서 제국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때에 교황이 너무너무 고마우니까 오토대제에게 신성로마제국 동로마는 곁길로 갔고 니가 진정으로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는 사람이라고 그 사람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칭호를 부여하면서 자신은 그 위에 있는 사람처럼 행세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문장인 독수리를 거기서 그대로 가지고가서 신성로마제국을 통치하려는데 그것이 19세기까지 계속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제국의 역사입니다. 어쨌든지 간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니까 프랑수아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스위스 사람들을 고용해서 전쟁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명분도 없는 전쟁에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광경을 보면서 이것은 죄악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신랄하게 공격을 하게 되고 결국 10년 목회 했을 때 결국은 쫓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온 곳이 바로 여기 아인지델른입니다. 아인지델른에 와서 3년 목회하고 간 곳이 우리가 얘기했던 취리히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3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그 당시 여기는 검은 성모의 상이라고 하는데 원래 검은 성모가 아니라 맨 처음에 만들 때에는 누런빛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촛불을 켜면서 여기서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니까 그을음이 올라가서 얼굴이 새까맣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프랑스에 이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그런데 거기도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여기 그을음이 묻었네.’하고 깨끗이 닦습니다. 그리고 다시 누런 얼굴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다시 스위스로 돌아오게 됩니다. 스위스 사람들이 성모에게 경배를 하려고 보니까 성모가 검은 얼굴에서 누런 얼굴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원래 성모를 돌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게 되니까 할 수 없이 그것을 검은 색을 칠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유명한 검은 성모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냐하면 여기서 온갖 기적이 일어난다고 소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이 츠빙글리가 목회할 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츠빙글리는 선교의 기회로 삼은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서 무언가 촛불하나라도 드리고 돈을 바치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온 것을 그런 것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설파한 것입니다. 그런데 카톨릭적 입장에서 보면 카톨릭이 가지고 있는 유명한 성지의 신비성을 훼손시키는 못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오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는데 놀랍게도 미신적인 신앙을 가지고 왔던 사람이 그 성령 충만한 복음적인 설교를 들으면서 카톨릭의 잘못된 성상숭배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복음적인 신앙의 감화를 받게 됩니다. 그런 일들을 여기에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사역을 하다가 마지막에 이 사람이 여기서 왜 떠나게 되었는지 아무리 찾아보아도 안 나옵니다. 그 부분은 블랭크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간 곳이 바로 취리히, 취리히로 가서 1월 1일, 그 사람이 1448년 1월 1일 생인데 이 사람이 여기서 저쪽에서 10년, 여기서 3년 목회한 다음 다시 1월 1일에 취리히로 가서 취리히에서 본격적으로 개혁자로서의 모습을 드러내면서 사역을 하다가 장렬하게 다섯 토막이 나서 죽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태도는 카톨릭의 순례자들과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여기를 순례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아이가 성모에게 옷을 입히기로 유명한 예배당이라고 합니다. 저도 여기 처음 왔는데 31벌의 옷을 만들어놓고 매일매일 옷을 갈아입힌다고 합니다. 여기에 설명 끝난 다음에 보면 한 사람이 서있고 황금으로 된 문서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1365년의 일인데 저 사람이 역사적으로 카를4세라고 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데 그때까지는 로마가 전체적으로 국민들이 활보하면서 혼란을 여전이 많이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지배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카를4세가 황금으로 된 칙서를 제국에 반포하면서 제국에 보냅니다. 그 칙서의 내용이 이런 정치적인 혼란을 막기 위해서 이렇게 하면 안 되고 크고 작은 수많은 봉건 영주들이 있는데 그 중 7개 세력이 있는 무시할 수 없는 영주를 선택해서 이 사람들에게 황제를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줍니다. 이 사람이 역사책에 나오는 선제후라는 사람입니다. 선제후 그러면 신성로마제국 시대 때에 수많은 영주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세력이 막강해서 황제가 될 수 있거나 황제를 투표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하면 됩니다. 여기의 황제는 아들, 딸 이런 왕의 계보와 상관이 없고 선출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황금칙서를 손에 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여러분들이 츠빙글리가 여기서 목회했던 생각을 해야 합니다. 여기가 수도원이었으니까 그 당시에는 여기 아무 건물도 없었을 것입니다. 수도원은 대게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지으니 여기에서 그런 참배객들을 맞이하면서 복음신앙으로 외쳤던, 그렇게 담대하게 외칠 수 있었던 것은 말하자면 그 전 목회지에서 글라루스라고 하는 곳에서 10년 이상 공부를 하고 주님을 깊이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지금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에 복음을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자유로운 것인가, 그 당시에 오류와 어둠 속에 쌓여있는 곳에서도 복음을 발견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이 빛을 자유롭게 누리게 된 것을 한없이 감사하면서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013.09.29 종교개혁여행 (독일)
보름스 대성당과 보름스의 루터 기념비
녹취자 : 김세나
(기도-하나님 아버지 유서 깊은 보름스 대성당 유적에 저희들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고 잠시 동안 강의를 통해 저희들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도 깨닫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보름스 대성당은 보카르트라는 사람이 11세기경에 여기에서 처음 교회당을 세우고 이후에 13세기, 14세기에 걸쳐서 1350년 경 이 예배당의 골격이 완성이 됩니다. 이 장소가 세속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사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몇 년에 한 번씩 제국 의회라고 하는 것이 열립니다. 역사책에서 제국의회라고 나올 것입니다. 그때는 뭐냐 하면 선제후들이 있었다고 했었습니다. 독일의 많은 영주들 중에서 세력이 있는 7개의 가문이 선출권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람들이 황제를 투표해서 세운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한 선제후들만이 아니라 그 보다 작은 성을 가지고 있었던 수많은 성주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제국전체에 있는 영주들의 회의가 열립니다. 그것이 바로 제국회의입니다. 그 제국회의에서 중요한 법안과 협의, 협정, 그 다음에 정치와 외교에 관한 공동관심사 등을 토론해서 비록 영주들로서 영지가 수없이 나뉘어져 있고 독립적이었기는 하였지만 제국 전체를 경영할 수 있는 통일성들을 기했기 때문에 큰 혼란을 막고 그래서 다양한 작은 성들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영주들이 하나의 독일의 형태를 가출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전통이 남아서 지금도 권한을 모두 다 중앙정부에 주는 것이 아니라 외교, 국방, 세금, 이러한 몇 개 중요한 것만 주고 나머지는 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지방자치제인 연방제가 된 것입니다. 그때 제국회의가 열렸습니다. 보름스 의회입니다. 이 회의가 굉장히 길게 열렸습니다. 1월에 시작해서 5월까지 하였습니다. 그 저명한 영주들이 여기에서 있으면서 4개월간 회의를 하니까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제국회의였습니다. 이 회의의 최대 안건 중 하나가 마르틴 루터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어떻게 해서 이곳에 오게 되었는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비텐베르크 성당에 95개조 조항을 박고 종교개혁의 횃불을 시작합니다. 늘 말씀 드렸지만 마르틴 루터가 새로운 종교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가톨릭교회를 정결하게 해서 교회다운 교회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루터가 이렇게 95개 조항을 붙였지만 그래서 커다란 반영을 불러 일으켰지만, 이 커다란 로마 교황의 치하에 있는 유럽 전체가 그 다음날 호들갑을 떨면서 그것에 대해 반항을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유사한 일을 하였던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 지경 내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커다란 반영을 일으키지는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로마 가톨릭에서 서서히 반응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운동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특별히 염려스러운 것은 여기에 있는 영주들이 그 가톨릭을 떠나서 개신교를 지지하는 영주들이 속출하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정치적인 문제인데, 왜 그러면 영주들이 조용히 가톨릭 치하에 있으면 큰일을 안 만날 텐데, 왜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는 많은 다른 나라의 공격의 위협까지 받았는데, 그러면서 굳이 개신교 신앙으로 넘어가겠다고 하였을까. 그 중에는 신실하게, 아까 이야기 한 팔라틴의 영주같이 신실하게 개혁신앙을 받아 들여서 born-again 한 그러한 그리스도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종교개혁은 겉으로 보기에는 종교개혁자들의 운동이었지만, 사실은 평신도들이 어마어마한 헌신을 해서 이룩한 운동이었습니다. 평신도들이 제후, 귀족, 부자, 기술자, 이러한 사람들이 막강한 힘과 사회적인 제력을 이용해서 종교개혁을 후원하지 않았더라면 종교개혁이 절대로 성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제 평신도들의 헌신이 이 종교개혁을 위해서 굉장히 커다란 여파를 하였다는 것. 지금도 열심히 돈을 벌고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제2의 종교개혁을 위해서 헌신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이유는 뭐냐 하면, 아주 미묘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영주들이 이게 가톨릭의 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비시돌의 기진장 이야기도 제가 하였습니다. 가짜로 넘겨줬다는 것. 가톨릭이 영지를 차지하는데 현실적인 문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원과 교회는 자기네 영지 안에 있어도 자기 재산이 아니고 로마 가톨릭의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면세입니다. 면세. 세금을 거둘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기네 백성들이 자기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짓고 짐승을 키우고 세금을 꼬박 꼬박 거두었는데 죽으면서 신앙심 때문에 그 땅을 수도원에 기증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됩니까. 점점 수도원 땅이 넓어지고 수도원은 면세입니다. 자기 땅이 쉽게 이야기해서 점점 줄어들고 로마 가톨릭의 땅이 점점 늘어나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세력이 점점 커서 오히려 수도원이 훨씬 더 부자가 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자기 땅을 빼앗기고 있는 것에 대한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부담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만일 개신교를 지지하게 된다고 합시다. 그러면 몰아내고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다시 돌려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 영주의 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정치적인 힘이 없어서 그렇지 정치적인 힘만 있으면 개신교로 넘어가는 것이 이 사람들의 정치, 경제에 커다란 말하자면 이익을 가져다주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독일에서 일어났을 때 종교개혁에 대한 대대적인 지지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일어났다면 절대 이렇게까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비텐베르크에서 1517년 10월 31일에 그 일이 있고난 후에 1520년이 되었을 때 처음으로 로마 교황청에서 교서를 발표합니다. 마르틴 루터와 관련하여 당연히 비난하고 잘못했다고 하는 조서가 발표됩니다. 6월에 발표해서 10월에 마르틴 루터가 그것을 받아서 찢어버리고 12월 10일에 유명한 ‘파문장 화영식’이 거행됩니다. 그래서 장작들을 쌓아놓고 거기에서 다 불태워 버립니다. 그때 나온 것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라는 찬송을 짓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가진 자로서 악기 연주도 아주 잘 하였습니다. 그때에 교황이 교서를 발표를 하고 정식으로 교황청에서 칼 5세, 그는 스페인의 왕이었었는데 원래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을 할 때 작센의 영주였던 프리드리히, 와이즈 프리드리히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현명한자 프리드리히, 그래서 현공이라고 합니다. 현공 프리드리히가 있었는데 이 사람이 사실 왕이 되게끔 모든 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페인의 왕실에서 막대한 돈을 사용해서 제후들을 금권선거를 하였습니다. 프리드리히 그 사람은 칼 5세와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때 황제 나이가 19살이었습니다. 그때 정식으로 황제로서 명령을 하였습니다. ‘너는 보름스 의회에 와서 너의 입장을 알리고 우리의 심문을 받아라. 오지 않으면 너를 온 독일 전체에 공개적인 이단자로 아예 발표할 테니까 너는 와라’ 그래서 이 사람이 고민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프리드리히가 의논을 합니다. ‘이렇게 오라고 하는데 어떻게 합니까?’ 프리드리히가 강력하게 요구를 하니까 칼 5세가 마르틴 루터의 신변은 절대로 보장한다. 그리고 보증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그래서 1521년 4월 16일까지 도착하라고 하였습니다. 4월 16-18일에 루터에 관한 심의가 열렸습니다. 그때 여기에 바로 제국 회의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회의가 열려서 그 사람이 비텐베르크를 4월 2일에 출발해서 십 며칠 동안 뚜껑 없는 마차를 타고 옵니다. 그래서 여기에 도착한 것이 16일 되기 3-4일 되기 전에 도착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마르틴 루터가 깜짝 놀라는 일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마르틴 루터가 오는데 사람들이 루터를 보기 위해서 새카맣게 모이는 것입니다. 모이는 사람들이 얼굴만 보는 게 아니라 같이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치 루터가 수많은 사람들의 호의를 받으면서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찬송을 부르면서 호의를 받으며 오는 것입니다. 저 쪽에 가다 보면 머물렀던 호텔도 있습니다. 제국에서는 황당한 것입니다. 엄청난 농민과 많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마르틴 루터가 마치 개선장군처럼 입성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16일에 통보를 받습니다. ‘너는 내일 심문을 받을 것이니 준비를 하여라.’ 그래서 이제 심문이 시작이 됩니다. 그 다음날 4월 17일 오후 4시쯤으로 기억하는데, 딱 2가지를 묻습니다. 15분 정도 우리로 이야기 하면 교황청에서 알렉산더라는 주교를 파송해서 교황을 대신해서 이 일들을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물어보는 질문은 아주 간단하였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루터가 여태까지 쓴 책들을 쭉 늘어놓고 ‘이것이 네가 쓴 것이 맞는가?’ 루터가 ‘제가 쓴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용에 관하여 질문을 하니까 루터가 고민을 하다가 지혜를 발동하여 ‘내가 쓴 내용은 워낙 내용이 많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나도 사실 무엇을 썼는지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내용에 관한 질문은 하루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루 동안 시간을 번 이유는 마르틴 루터가 답변을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도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마지막에 자기도 사실 여기에서 책에는 안 나오지만, 제가 보기에는 만감이 교차하고 두렵지 않았겠습니까. 수많은 영주들과 제국에서 온 모든 고관들이 서 있는데, 우선 요한 후스도 황제에게 명령을 받았을 때 신변을 보장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죽게 될 것을 90% 이상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혹시 황제가 군인들에게 죽이지 말라고 하더라도 열광적인 가톨릭 신자들이 살해를 하면 그것까지 보호해 줄 의무는 황제에게 없었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밤새도록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온힘을 다해 기도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 순교의 각오를 하기 위해 하루의 시간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불려 나갑니다. 그 때가 6시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루터에 대한 심문이 시작이 됩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제 답변을 하는데 답변은 크게 몇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이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쓴 모든 책들이 이단적인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를 반대하는 사람도 처음에는 내가 책을 쓰니까 이 책이 너무 좋은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소개를 시켜 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한 내용이 당신들조차도 여기에 좋은 내용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면서 하나하나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 하고 회귀할 수 없는 자신의 주장을 이야기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교황이 교황청에서 1520년 6월 25일에 발표한 교서에서 마르틴 루터의 95개 조항 중에서 41개 조항을 다 거론하면서 다 논박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래 조항은 우리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이단적인 주장이라고 하는데 마르틴 루터의 십자가의 신학을 보여주는 핵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답변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마지막에 그 전에도 가톨릭에서 마르틴 루터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막 설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야기를 합니다. 너의 공손하지 못한 태도 등등 이야기 하니까 다 잘못했다고 합니다. ‘제가 그것은 제 열정이 지나쳤습니다. 그것은 제가 예의바르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조금 더 공손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반듯하지 말고 마지막으로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황제에게 사과를 하라’ 그러니까 겸손하던 사람이 갑자기 고개를 듭니다. ‘뭘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요?’ 마지막 내용이 이것입니다. ‘이 책은 내가 쓴 것이 맞고, 나는 최선을 다해서 진리, 복음을 가르쳤다. 내가 쓴 것들은 적어도 두 가지 기준, 성경에서 내 가르침이 틀렸다는 주장을 찾아내고 건전한 인간의 이성에 비추어 볼 때 합당하지 않다고 증명되기 전까지는 한 글자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로마 가톨릭에 대해서 전면적인 도전장을 내놓은 것입니다. 마지막에 한 유명한 말이 여기 써 있는 것입니다. Hier stehe ich, ich kan nicht anderst, Got helffe mir, Amen. - ‘Hier stehe ich(독일어로 나는 여기 서 있습니다), ich kan nicht anderst(나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Got helffe mir,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Amen(아멘 ). 그것으로 자기의 연설을 마치게 됩니다. 마치고 나서 발칵 뒤집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황급하게 칼 황제 5세가 ’그만!‘를 하고 마르틴 루터를 보내는데 그게 4월 18일 밤 8시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에게 떠나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 5월 하순에 칼 5세가 칙서를 내립니다. 이 칙서는 마르틴 루터과 관련된 보름스 칙서라고 부르는데 꽤 깁니다. 결론은 마르틴 루터는 모든 법적 보호 장치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어서 누가 죽이든지 재산을 빼앗든지 고문을 하든지 아무렇게나 해도 죄가 되지 않는 법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내동댕이 처지게 되었습니다.
자, 그러면 프리드리히라고 하는 이 현자는 이 사람이 똑똑하고 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를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보냈을 리가 없습니다. 더군다나 칼 5세와 감정적으로 안 좋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했는가 하면 ‘신변을 보장해라’ 칼 5세에게 프리드리히 선제후가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보장을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같이 정치를 아는 사람이 그 말 한 마디로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겠습니까.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생각할 때 그 사람은 루터를 보호했기 때문에 수많은 가톨릭과 교황청을 지지하는 국가들로부터 공개적인 협박을 받습니다. 루터를 보호를 하지 않는다면 상당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만일 계속 보호하면 상당히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을 경고를 받습니다. 그래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선 첫째는 자기의 정치력을 믿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프리드리히는 너무 재미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신앙이 없었습니다. 끝까지 회심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감동은 받았겠지만,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이 시골에서 자신의 성에 어떤 한 이상한 수도사가 나왔는데 전 세계적인 이목을 집중시키는 시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싸이가 강남스타일을 불러서 강남이 어디에 붙어있는지 모르던 사람들이 전세계가 알게 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재미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제 유명한 연설을 마치고 나서 4월 25일에 떠납니다. 이제 우리들이 가게 될 ‘아이제나흐’가 가까이 나오는데, 아이제나흐 에서는 거기에서 설명하겠지만 거기에서 루터가 중학교를 다닙니다. 중고등학교를. 거기에 가는데 갑자기 숲속에서 검은 복면을 한 기사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들에게 기습을 당해서 마르틴 루터가 보자기에 보쌈이 되어서 어딘가 달리니까, 마르틴 루터는 ‘아, 여기에서 내가 죽는구나. 이것은 칼5세가 가톨릭 영주들이 보낸 자객들이거나 아니면 순수하게 교회의 교권, 정치세력과 결탁하지 않은 교권자들이 결국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정식적으로 죽일 수 없으니까 이렇게 납치하는구나.’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끌려간 것이 발트부르크 성이라고 하는 곳에 10개월 동안을 있는데 언제 알게 되는지 모르는데, 처음에 몇 달 동안을 자신이 여기에 왜 있는지 몰랐습니다. 누가 자신을 납치했는지, 나중에야 자신을 납치한 사람이 자기를 지지해주던 프리드리히가 모두 꾸민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루터 어떻게 됐냐?’ ‘왜 그렇게 됐어?’ 막 제국에 소문이 난 것입니다. 누군가 자객이 납치했다. 모든 사람이 잘 됐다. 틀림없이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떤 가톨릭 열성분자들이 데려가 죽였을 것이라고 하면서 루터가 죽었을 것이라고 모두 믿습니다. 그래서 비텐베르그에 커다란 슬픔이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그 절대로 1년 가까이 되도록 비밀로 지켜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에서 역사책에 보면 루터가 기사복장을 하고 있는 장면 나오지 않습니까. 그것이 융커의 게오르즈라고 하는 가명을 쓰고 쇠로된 기사복을 입고 그렇게 있는 장면입니다. 어느 기사가 와서 거기를 한다고 하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그렇게 이해를 하고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해서 이 사람이 철저하게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발트부르크 성에까지 가는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이 납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이 마르틴 루터의 용기가 어디에서 왔을까. 이것을 존 오웬 목사님은 뭐라 그러는가 하면 믿음의 은사라고 할 때 이러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초자연적인 은사로서의 믿음’ 이러한 담력이 있는 믿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 그러한 놀라운 용기, 이러한 은사, 은혜를 하나님께서 한 번에 확 부어주셔서 담대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제 그렇게 해서 용기를 가지고 자기의 개혁신앙을 지켜냄으로써 독일 전체가 한편으로는 30년 전쟁이라는 불행한 일들이 일어나고 30년 전쟁, 슈발칼트 전쟁 이후에 일어났던 30년 전쟁을 통해서 인구 3명 중 1명이 죽었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그러한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제 개신교회가 서게 되는 역사적인 위대한 일들의 분수령이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013.09.29 종교개혁여행 (독일)
보름스 성당 근처 분수 설명하려다가 자리이동 함
녹취자 : 김세나
이 사람이 11세기 때 사람인데, 그 때 처음 이것을 개척한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이것 보다 훨씬 적은 건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워 놓은 것입니다. 여기 이 사람이 있고, 11세기 때 사람이고 13세기를 거쳐서 14기 때 이 성당이 완성이 되고 그 사이에 기본적인 뼈대가 14세기에 완성이 됩니다.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기독교적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보겠습니다.
2013.09.29 종교개혁여행 (독일)
보름스의 종교개혁자 동상들
루터동상이 정중앙에 있음
녹취자 : 김세나
여기에 있는 종교개혁과 관련된 인물들이 나옵니다. 여기에 있는 이 사람은 작센의 영주, 현자 프레드리히라는 사람입니다. 여기는 이제 할세네 영주 필립입니다. 그 다음에 일어나 보십시오. 제일 가운데 마르틴 루터가 서 있지 않습니까? 손에 무엇을 덜고 있습니까? 오직 성경으로서! 이 사람이 피렌체의 종교개혁 이전에 개혁가였습니다. 이 사람이 순교를 당할 때 마르틴 루터가 증언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개신교가 아니라 가톨릭교회에서 개혁사상을 외치다가 죽었는데, 후스를 존경했습니다. 일평생 따르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은 우리들이 가서 보게 될 요한 후스였습니다. 이 사람의 재미있는 일화가 있습니다. 요한 후스가 사형을 당합니다. 마지막에 죽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지금 죽지만, 100년 후에는 내가 부르짖은 것보다도 더 큰 소리로 부르짖는 거위가 나타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름 후스가 거위를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보면 이 사람이 지낸 곳에 보면 거위가 한 마리 그려져 있습니다. 후스가 말한 거위가 바로 마르틴 루터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쪽에 보면 저 사람은 누구인가 하면, 멜랑히톤이고 이 사람은 인문주의자 로이힐린이고, 옆에 있는 방패처럼 붙어 있는 표 있지 않습니까. 이것은 종교개혁을 지지했던 각 지방의 명패를 붙여 놓은 것입니다. 여기는 브레멘 허스탄스 아이젠나흐, 이러면서 도시들의 명판이 쭉 붙여져 있는 것입니다.
2013.09.29 종교개혁여행 (독일)
하이델베르크 루터의 논쟁
녹취자 : 김세나
우리가 지금 하이델베르크에 왔습니다. 사실 볼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가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서 두 가지 교회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게 바로 어제 말씀을 드렸던 마르틴 루터가 1517년에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당에 내걸고 1518년에 여기에 와서 논쟁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논쟁이라기보다는 슈타우피츠가 개혁의견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곳이다. 그래서 논쟁은 논쟁이었고, 그 사건을 마틴 부처가 지켜보면서 종교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제 시간이 없어서 이야기를 못하였는데, 이 사건은 아주 교회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중세교회를 향해서 최초로 앞으로 개신교 신학이 어떻게 중세교회와 차별화 되어서 전개될 것인가 하는 방향을 마르틴 루터를 통해서 보여준 것입니다. 28개 조항이 신학조항이고, 12개 조항이 철학 조항이라 하였습니다. 28개 조항의 첫 번째 시작이 무엇으로 시작되는가 하면,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로워지기 위해서 주신 수단이 아니라 율법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를 얻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방해가 되는 것이라고 하는 율법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밝힘으로써 카톨릭의 공로주의에 반대하는 사상을 분명히 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구원받은 사람이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였던 것이 아니라 워낙 루터의 신학은 개인의 신앙의 고민이 구원론이었기 때문에 구원론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을 이루게 됩니다. 이에 비해서 칼빈은 관심 자체가 신론 중심적인 신학이었습니다. 꼭 구분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중심이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구원과 관련해 볼 때 마르틴 루터에게 있어서 이 율법은 잘못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 28조항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사랑에 관한 것으로, 사랑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내용은 그렇게 안 되어 있지만 설명을 하자면, 인간의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지면 무엇인가 창조하기 위해서 주시는 사랑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것은 무엇과 관련이 되는가 하면 옛날에 있었던 신비주의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신학,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행복해 하고 그것으로 모두인줄 아는 이러한 신학에 쐬기를 받으면서 이 세계를 향한 창조적인 기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실 인본주의의 영향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인본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어떤 이해를 가졌는가 하면 인간이 신 앞에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창조의 의미는 첫째는 그 신으로부터 불완전한 자신의 인간이 점점 더 온전하고 진실하게 변하고, 그 다음에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면 무엇인가 신의 뜻을 따라 태어난 목적을 이 세상에 수행하고 사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의미이다. 이것을 했는데, 루터가 이러한 사상들을 깊이 받아들이면서 28개 조항을 작성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40개 조항 혹은 28개 조항이 굉장히 중요한 이유는 뭐냐 하면 거기에서 소위 이야기 하는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고 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발표한 최초의 발표문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 가톨릭이 추구하였던 것은 뭐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영광의 신학’이었습니다. 영광의 신학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과 사회,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뜬 것이다. 그래서 이 교회와 모든 것들이 화려하게 되었던 것도 하나님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교회니까 영광스러워야 하고, 이러한 영광을 모두 외적으로 물질적으로 세속적으로 해석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결국 인간이 이성으로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으면서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 영광의 신학이었다면, 마르틴 루터는 아주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와 맺으신 관계와 본질, 하나님이 이루시려고 하는 이 모든 세계의 창조의 역사와 비밀들은 십자가에 모두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개인적으로 경험하고 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함으로써만 하나님과 세계와 이 모든 세계에 대한 공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신학을 세우는데 이것은 이제 개혁주의가 끝까지 붙들고 이제까지 살아온 아주 중요한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마틴 부처가 여기에서 논쟁을 모두 지켜봤는데 애석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십자가의 신학의 본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확히 이해를 못하면서 이 논쟁 과정을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나중에 이 사람 또한 동일한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17, 18, 19 조항쯤을 보면 신학자가 되는 것이 공부하고, 명상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되고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야 된다고 하는 것을 최초로 언급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의 아주 기본적인 골격들을 중세의 혼란 속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그것이 일어난 첫 번째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그로부터 약 45년 후에 일어난 일이었는데, 팔츠의 선제후가 자기주가 개혁교회로 돌아섰기 때문에 무엇인가 개혁교회를 위한 신앙고백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까도 이야기 했듯이 30년 전쟁을 비롯하여 많은 시련을 겪고 있고, 그 다음에 수많은 교회들이 로마 가톨릭과의 분쟁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고 핍절하여 있던 때였기 때문에 신앙고백을 다시 쓰기 원하였습니다. 그 때 신앙고백이 작성된 것이 그 유명한 ‘하이델베르크 신앙 문답’이었습니다. 이것을 기초한 사람이 우르시무스라고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리고 파스카르 올레디무오스라고 하는 두 사람에 의해서 팔츠 선제후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이 사람들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다시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꽤 두꺼웠습니다. 꽤 양이 많은 교리문답인데, 이 교리문답은 상당히 특징이 몇 가지 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교회론적인, 교회론. 맨 처음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에는 구원이 무엇이고 의가 무엇이었는가가 문제였지만, 이 신앙고백을 작성하던 50년 쯤 후에는 교회가 무엇이고, 참된 교회에서 받는 성도의 위로가 어떠한 것인가 우리가 왜 이렇게 몸부림치면서 참된 교회의 회원이 되어야 하는가, 이것에 대해서 깊이 교훈을 주는 위로의 서신입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제1항이 ‘인생의 제일 가는 목적이 무엇이뇨’라고 시작이 되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신자가 생사 간에 받을 수 있는 위로가 무엇이뇨’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위로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190여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꽤 긴 신앙고백문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히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그 이후로부터는 아예 주일 오후에는 항상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하나씩 하나씩 강론해 가는 것이 전통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1563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린 총회에서 채택을 함으로써 개혁교회의 기둥이 되는 신조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이 이것이 기독교 역사와 관련하여 일어난 가장 중요한 두 사건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세속 역사와 관련하여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 하자면, 황태자의 첫사랑, 역사는 아니지만 여기에서 있었고, 그 다음에 다리 건너서 보면 철학자의 길이 있는데 독일은 아시다시피 철학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울하고,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밖에 나가도 볼 것도 별로 없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칸트가 철학자의 길을 걸었는데 얼마나 규칙적이었는지 사람들이 칸트를 걸어오는 것을 보면서 시계를 맞추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칸트는 65세 될 때까지 아무 책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65세에 딱 한 권의 책을 썼는데 세계를 뒤 흔들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순수 이성 비판』이었습니다. 이 『순수 이성 비판』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칸트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이 허락되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 다음에 세속적으로 또 하나 유명한 사건은 괴테가 여기 와서 바람을 피운 곳이 여기입니다. 그리고 슈만이라는 음악가가 법학을 공부하다가 변심을 하여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곳이 하이델베르크입니다.
하이델베르크가 중요한 이유를 하나 설명하자면, 중세의 시대와 역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이 하이델베르크를 비롯하여 이 도시들은 소위 이야기하는 자치 도시였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제후의 영지 안에 있지만 상업적으로 워낙 교류가 많고 활발하기 때문에 중앙에서 꽉 눌러서 통제를 하고 억압하면 돈이 안 흘러서 국가 전체에 동맥경화가 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업이 활발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야지만 세금을 계속 거두어서 영주도 돈이 없으면 영지를 통치를 못하지 않습니까. 자기 영지를 통치를 못하게 됩니다. 수입원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로 북한에서 나진선봉 특별 자치구를 두는 것처럼 그렇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와서 자유롭게 물건을 거래하고 하면서 영지의 부를 축적하였던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목적과 시민들이 영주의 강력한 지배 아래에서 억압을 받기 보다는 자유로운 시민생활을 누리기 위해서라는 두 가지 목적이 일치하면서 각 제국마다 자치도시들이 발달을 하였습니다. 우리들이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모든 도시들이 대부분 자치도시입니다. 영주가 ‘너 그런 말 했어?’ ‘이런 글 썼어?’ 손가락질 하는 곳에서는 자기 의견을 발표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딱 발표하고 숨어 버리면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에서 그 시를 운영할 때 자치 기구들이 있어서 상당히 보호를 해 주었습니다. 사실 제후에게 있어서 자치 도시는 한편으로서는 돈이 들어왔기 때문에 좋은 곳이기도 하였고, 한편으로는 아주 북한의 개성 공단을 북한이 힘들어하는 것처럼 그렇게 온갖 봉건질서를 허물고 새로운 신사도를 받아들이고 가톨릭 신앙을 무너뜨리는 이단 잡종 같은 것들이 들어오는 골치 아픈 지역이기도 하였습니다. 제후의 능력은 그 자치 도시를 어떻게 훌륭하게 통치를 하여 이 두 가지 중에서 좋은 편으로 자기 제국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영지에 이바지 할 수 있도록 키우느냐에 달렸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하이델베르크도 이 중세 시대에는 이미 벌써 오래 전부터 자치를 누리고 있었고, 그랬기 때문에 여기에서 종교개혁의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훌륭한 말하자면 환경들이 조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들이 중세 역사에서 배워서 아는 길드, 상인들이나 수공업, 공업하는 사람들이나 협동조합을 만들었던 길드조직 있지 않습니까. 길드 조직의 힘이 막강하였습니다. 그래서 길드 조직에서 대표자들을 세우기도 하고, 목을 떨어뜨리기도 하고 영주에게 말하자면 정식으로 항의하기도 하는 막강한 세력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정신들이 몇 백 년 동안 훈련되면서 근대시민사회가 형성되는 민주자치의식이 싹트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도시에서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이 나왔다고 하는 것은 이상한 것이 전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한 가지만 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이 하이델베르크에서 유명한 것은 학교입니다. 사실 역사가들 중에서도 확실히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중세의 대학이 언제 세워지기 시작하였느냐에 대해서 아무도 정설이 없습니다. 누구도 모릅니다. 빨리 보는 사람들은 9세기, 800년대로 보기도 합니다. 800년대 이슬람 제국에서 먼저 생겼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학문적인 직접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다음에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 권내를 기준으로 볼 때 10세기, 11세기 등등으로 이야기 하는데 정설이 없습니다. 그러나 희미하게 대충 그래도 근거를 가지고 짚는 것이 11세기경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그것을 과연 오늘날의 대학이라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질문이 따르게 됩니다. 그 이전까지는 학문의 주된 역할들을 어디에서 담당하였는가 하면, 두 개의 기관, 수도원 안에서 학문, 또 하나는 교회 안에 딸린 부속학교, 그러한 곳에서 학문을 가르쳐 왔던 것입니다. 그 전통이 오래전부터 계속되었기 때문에 그 전통을 따라서 칼빈도 노트르담성당에 있는 참사회 학교에서 까떼뜨라고 하는 초등학교를 다녔던 것입니다. 특히 수도원은 아주 높은 수준의 학문을 유지하고 있었고, 초창기에는 대학보다 훨씬 더 학문의 수준이 높고, 책도 많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11세기경에 세워지는데 그 때 세워진 대학들이 프랑스, 이탈리아에 있는 볼로냐 대학, 그 다음에 여기에 있는 하이델베르크로 보는데, 프랑스는 신학을 중심으로, 이탈리아는 인문학을 중심으로, 여기 독일은 철학을 중심으로 세워진 대학이라고 생각을 하면 되겠습니다. 이 도시에서 중세시대 때 누리던 많은 자유를 토대로 다행히 여기가 개신교가 되면서 신학이 이 하이델베르크를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유명한 대학이 되었고 저 학교는 하이델베르크 성이었는데, 그 성을 대학으로 사용하고, 세계적인 대학이 저것 밖에 안 되는가 하는데, 여기 도시에 있는 것들이 전부다 대학 부속 건물들입니다. 대학 건물들이 다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옥스퍼드나 캠브리지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도시 전체가 다 민간집 같은데, 다 대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기에서 기독교의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이것만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이상입니다.
2013.09.29 종교개혁여행 (독일)
하이델베르크 학생감옥
녹취자 : 김세나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시민사회, 근대정신이 사라졌을 것 같지만 정 반대였습니다. 이것이 1700년대부터 한 100년 정도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뭐입니까. 그렇게 감옥에 가두어야 할 정도의 학생들이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상한 사상이 들어오면서 이 사람들이 항거하고 하면서, 그래서 영국의 옥스퍼드 같은 곳도 학생감옥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17세기에 벌써 있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이 학교의 부총장이 되어서 학교를 살리면서 학생들 좋은 학생들 등록금을 주고, 말 안 듣고 까불고 공부 안하고, 머리 나쁘다고 다 들어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우리 모두 다 들어가야 했는데, 그것은 아니고 불경건하고 하나님 없는 사상을 함부로 말하고 하는 사람들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끝까지 저항한 사람들을 감옥 속에 가두었습니다. 그러한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도 교리반 열심히 안 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가둬야 하지 않겠습니까?
2013.09.29 종교개혁여행 (독일)
하이델베르크의 성당,
처마 끝의 악마모양의 물 빠지는 조각상들
녹취자 : 김세나
말씀 드린 것처럼 첫 번째 교회가 같이 공장으로 사용하다가 나중에 개신교로 넘어갔습니다. 이곳이 유명한 것이 원래 도서관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30년 전쟁 동안 가톨릭이 다 약탈해 가고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것들이 돌려받아서 있는데, 파이프 오르간이 중앙에 있는데 13년 동안 만든 오르간입니다. 그리고 처마 끝에 보면 여러분, 짐승이 있지 않습니까. 성령과는 잘 안 어울립니다. 저것은 뭐냐 하면 저러한 형태들이 많은데 말씀드리자면 물받이가 떨어져 내려오면 여기에 빨려 들어가서 건물이 부실이 됩니다. 그러니까 저렇게 해서 물을 토해내서 바깥으로 쏟아 내는 것입니다. (1:00 이후 제대로 들리지 않아서 기록을 못하였습니다.)
2013.09.29 종교개혁여행
하이델베르크
칼데오도르 다리 입구의 고양이
녹취자 : 김세나
<여성 가이드 설명>
칼데오도르라는 돌다리를 세우게 하신 것입니다. 그때 오리지널 모습 그대로입니다. 연도는 제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대략 1700년대일 것입니다. 그 다음에 아까 나중에 오신 분들은 못 들으셨을텐데, 홍수가 나면 얼마나 심하게 홍수가 나는가 하면 지금 여러분이 보시는 건물들 1층이 다 물에 잠기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물이 잠깁니다. 그러다 보니까 나무다리 같은 경우는 쉽게 유실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 관광객들이 오시면 반드시 만지고 가는 조각상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모습 같습니까? 고양이를 조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원숭이로 보고 있는데, 보면 손에 거울을 들고 있습니다. 왜 거울을 들고 있는가 하면, 관광객들에게는 이것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거울을 들고 있는 이유는 옛날에는 유리가 비싸서 청동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하는데 시가지로 들어오기 전에 몸을 좀 단정히 하고 들어오라는 의미로 만들어 놓은 거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관광객들에게 행운이 온다고 이야기해서 그 거울부분만 반짝반짝 한 것을 보실 수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리 중간쯤 가시면 말씀 드렸던 것처럼 마을 전체에 사진이 다 찍힐 것이고, 다리 반대쪽이 철학자의 길로 연결이 되어 있는 다리입니다. 목사님께서 무엇인가 말씀하실 것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김남준 목사님>
저기에 얼굴을 집어 넣고 사진을 찍은 기억이 납니다.
2013.09.30 종교개혁여행 (독일)
발트부르크 성에 루터 은신하던 곳
녹취자 : 김세나
(기도) 고마우신 주님, 루터가 피신하였던 발트부르크 성입니다. 이곳에서 저희들이 잠시 유적을 돌아볼 때 주님의 은혜가 저희에게 가득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잠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보름스 의회에 서게 되었는데 1521년 4월 16-18일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거기에서 이제 칼 5세가 당장 떠나라는 명령을 하고, 떠난 것이 4월 25일로 기억을 합니다. 4월 25일에 거기에서 떠나고 루터도 모르고,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도 작센의 영주 현자공 프리드리히가 누구에게도 이야기 하지 않고 자신에게 딸린 기사들에게만 명령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를 납치하라. 그래서 아이제나흐에서 납치를 해서 발트부르크 성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 아이제나흐는 마르틴 루터가 1498년 나이 15살 되던 해에 오늘 우리로 말하자면 중학교 과정을 공부하기 위해 아이제나흐로 오게 됩니다. 여기에서 3년, 횟수로 4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되었고, 여기에서 마르틴 루터 시대 때에 많은 학생들은 대게 집집마다 다니면서 노래를 불러주면 그 사람들이 빵을 하나씩 주어 이것을 가지고 생활할 정도로 아주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루터는 그렇게 가난한 가정의 아이는 아니었지만, 처음에는 아주 가난하였다가 아버지가 아주 생활력이 강하여 나중에는 꽤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루터가 여기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노래를 잘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뮤트라는 악기가 있는데 여섯 줄로 된 바이올린과 유사한 종류의 악기인데 뮤트를 연주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공교롭게도 사보나롤라가 뮤트 연주를 좋아해서 뮤트를 타면서 사실은 사랑하다가 결국 실패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주님께로 돌아서게 되는데 그러한 자신의 마음을 달래는데 사용이 되었는데 루터가 음악에 대한 조애가 깊었고 뮤트를 연주했습니다. 거기에서 이제 어느 한 가정을 방문하여 노래를 불렀는데 감동을 받은 그 집 주인 부인이 루터에게 그 숙소와 먹을 것을 제공해 주어서 횟수로 4년 동안 아버지의 집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게 됩니다. 그렇게 한 곳이 여기 아이제나흐라는 곳이었습니다. 아이제나흐에서 공부를 마치고 이 사람이 간 곳이 어디였는가 하면 에르쿠르트 대학이었습니다. 당시 에르쿠르트 대학은 독일 제국 내에서 세워진 몇 개 안 되는 초창기 대학이었습니다. 제일 처음 세워진 것이 1359년에 크라하 대학이 세워지고 이어서 여러 대학들이 세워지게 되는데, 그 때 세워진 대학들 가운데 비텐베르크와 에르푸르트 대학이 상당히 엄격한 대학이었습니다.
어쨌든, 아이제나흐에서 루터는 한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선생님은 수도사였습니다. 그 선생님에게서 정확한 문법, 글쓰기,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 웅변술 같은 것들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에르푸르트 대학으로 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마르틴 루터가 자신처럼 고생하지 않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높은 집안의 규수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이루기 원했습니다.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대표적인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아버지에 대해서 굉장히 순종적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에게 법학을 공부해서 법률에 종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명령을 내리니까 그는 아버지의 말씀을 따라 에르푸르트 대학으로 가게 됩니다. 에르푸르트 대학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것이 1501년의 일이었습니다. 거기에 가면서 마르틴 루터는 신학문을 공부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분에게로부터 고전학, 버지를 비롯하여 윌리엄 오캄, 이 사람이 말하자면 어제 말씀드린 비아 모데르나, 새로운 학문방식에 아주 중요한 선구자였습니다. 윌리엄 오캄, 중세 철학을 모두 집대성 하였던 수문과 같은 역할을 하였던 둔스 스코투스 같은 사람을 공부하고 그리고 보나벤추라, 고전적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을 공부하면서 로마 가톨릭이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마르틴 루터에게 생애에 잊혀지지 않는 중요한 사건을 경험하게 되는데 라틴어를 철저히 공부한 후에 생애 최초로 교회에서 읽어주는 성경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라틴 불가타 성경을 펼쳐서 라틴어를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독일어 성경이 없으니까 식자층이 아니면 성경을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라틴어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라틴어를 읽으면서 성경을 직접 대하게 되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놀라운 진리가 있었구나 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1503년에 그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신앙적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 당시 관습으로 남자들이 칼을 차고 다녔습니다. 루터도 칼을 차고 다녔는데 그 칼이 칼집에서 떨어졌습니다. 떨어져서 동맥을 비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마 제 생각에는 자세가 칼을 차고 무엇인가를 줍다가 칼이 뚝 떨어지면서 칼이 툭 하고 손을 건드리는데 그것이 동맥을 건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피가 콸콸 나는데 이것을 붙들고 매달리면서 ‘하나님, 제발 나를 한번만 살려주세요’라고 간절히 부르짖는데, 그것이 마르틴루터가 생애에 태어나서 하나님께 무엇인가 간절히 부르짖은, 마음을 다해서 부르짖은 거의 첫 번째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건을 통해서 무엇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그것으로서 끝나게 됩니다. 그 칼에 베인 사건이 1503년의 일이었습니다. 이 마르틴 루터는 1501년에 대학에 입학하여 1502년에 철학학사 학위를 받고 그리고 1505년에 철학 석사 학위를 받습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오늘날로 말하면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을 합니다. 법률가의 길을 가기 위하여 입학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마르틴루터가 그야말로 인문주의의 물을 흠뻑 마시게 됩니다. 종교개혁자들의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인문주의에 깊이 심취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에 이제 유럽의 대학들이 전문적으로 전공을 가르치기 전에 7개의 과목을 공부해야 했는데, 그것을 3학4과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우리 동양에서 4서3경을 공부하는 것처럼 학문의 기본적인 이치였습니다. 그것을 대학에서 통합적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법학이냐, 의학이냐, 문학이냐, 철학이냐.. 이러한 것들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 3학4과가 무엇인가 하면 3학이, 문법-정확하게 글을 읽고 글을 쓰고 이해하는 것, 두 번째 논리학, 그 다음에 수사학이었습니다. 4과는 산수, 기하, 음악, 천문학. 이 7가지 학문이 대학에서 배우는 기초 3학4과였고, 그 후에 4개의 과목으로 나뉘었습니다. 여러분, 학사모를 보면 4각으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4가지 학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법학, 신학, 의학, 철학, 4가지 과목이 당시 대학의 기본 과목이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마르틴루터는 그렇게 공부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법학대학원에 진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1505년 1월에 입학을 하고 7월에 법학대학원을 입학을 하였고 하니까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마스트리드로 갑니다. 그곳에서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에르푸르트로 돌아오는 길에 커다란 천둥번개가 치면서 벼락이 떨어집니다. 그런데 거기는 평평한 평지이고 평야이기 때문에 그렇게 번개가 많이 떨어졌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 벼락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면서 커다란 공포를 경험하면서, 땅바닥에 엎드려져서 ‘성 안나여, 나를 구원하소서. 만약에 나를 구원하시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7월 16일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 안나는 누구였는가 하면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로서 그 지방의 수호신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이제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르틴루터가 여기에 오게 된 것은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거기에서 끊고 다시 여기로 돌아오면 마르틴루터가 아이제나흐가 마르틴루터의 추억이 있는 곳이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고, 그래서 여기에서 돌아와서 누군가에 의해서 납치가 되어서 여기에서 생활하는 동안 상당한 시간이 지나도록 자신을 구원한 사람이 프리드리히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보다시피 성이 은밀한 곳에 감춰져 있고, 저기에서 사다리를 지고 올리면 다리가 딱 끊어지면서 커다란 계곡이 생겨서 누가 여기를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마르틴루터가 병이 나서 많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의원의 신세도 지게 되는데, 그 속에서 처음에는 게을러지다가, 나중에는 ‘하나님이 왜 나를 보내셨을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 잡고 여기에서 열두 편의 논문과 하나의 중요한 사역을 하게 되는데, 성경을 원어에서 독일어로 번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번역을 할 때 아주 고급 번역이기는 하였지만, 평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부지런히 찾았습니다. 그래서 번역을 해서 9월에 독일어 성경을 완성해서 내 놓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9월 성경>이라고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것이 1522년의 일이었고 그 후 12년 후인 1534년에 구약성경까지 모두 완간하여 독일어 신구약 성경을 만들어 내는데 이로 말미암아 독일어의 문법과 표현, 표준어가 무엇인지 기준이 정해져서 독일 문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마르틴루터의 초판 독일어 성경을 번역한 일이 매우 중요한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겠습니다.
2013.09.30 종교개혁여행 (독일)
발트부르크 성에서 루터 신약성경 독일어로 번역
녹취자 : 김세나
‘윙커 웰거’ 영어로 말하자면 ‘기사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가명을 쓰고, 그래서 여기에 출입하는 사람도 없었지만, 사람의 눈에 띄지 않게 여기에서 10개월간 은거하게 됩니다. 사실, 루터가 여기에 와서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처음에는 무료하게 보내고, 성격이 아주 활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텐베르크에 대한 근심과 여러 가지 많은 것들 때문에 몸이 많이 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생각을 바꿔서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고요한 시간을 보내게 하신 이유가 무엇이었겠는가 생각하면서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12편의 소책자를 쓰게 됩니다. 그 가운데 놀라운 것 하나가 뭐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고해성사, 과연 사제가 우리들로부터 고해성사를 받을 자격을 성경이 부여하였는가. 이에 대해서 논쟁하는 부분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여기에서 글을 쓰고 그 다음에 이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전념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이야기 했듯이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자신이 직접 성서를 라틴어 불가타 성서를 읽으면서 사제들이 당시 예배 시간에 일정 부분 낭독해 주었는데, 대게 복음서와 시편을 낭독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익숙해진 복음서와 시편이 아닌 로마서를 비롯한 다른 성경들을 읽으면서 성경이 이야기 하는 기독교의 진리가 이러한 것이구나, 더욱 폭넓다는 사실을 알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틴 루터가 주님을 깊이 만나 변화를 받고 만약에 많은 독일 사람들이 이렇게 성경을 읽는다면 놀라운 은혜를 받을 것이고, 가톨릭의 무지 목매함으로부터 벗어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양보할 수 없는 개혁신학에 대한 확고한 자세를 갖기 까지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는데, 그 중 하나의 사건은 무엇인가 하면 1510년에서 11년 사이에 로마를 방문하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미 그 때에도 로마 가톨릭의 부패에 대해 깊이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말씀 드린바와 같이 1505년 7월 2일에 벼락을 맞고 7월 17일에 에르푸르트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결단을 실현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수도사가 되고 5년 내지 6년 흘렀을 때 로마를 방문하게 됩니다. 그때 마르틴 루터의 생각에는 이렇게 부패한 것은 아래에 있는 사제들이 타락하고 부패하였기 때문이고, 그래도 교황께서는 절대 이러한 마음이 아니실 것이고, 원래의 로마의 신앙은 훨씬 신성할 것이라 생각하여 이제 여러 수도회에서 대표단들을 형성해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방문하여 교황을 아련하게 됩니다. 거기에 가서 보면서 루터를 아주 실망시킨 것이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스칼라 상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칼라 상타’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로마의 베드로 성당을 올라가는 21개로 되어 있는 계단인데 일설에 의하면 그 계단이 바로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셨을 때 오르셨던 그 계단을 뜯어다가 설치한 것이라고 하는데 진위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거기를 구원받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수많은 순례객들이 무릎으로 ‘스칼라 상타’(상타는 거룩하다, 스칼라는 계단이라는 것입니다) 그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는 고행을 통해서, 그래도 하나님께 잘 보여서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미신적인 행위들을 보게 되는데 루터가 그 위에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데 아무 기쁨이 없이 노예적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해 보았습니다. 아무런 감동을 못 받습니다. 그러면서 이 미신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졌는가하는 것을 보게 되고, 또 하나는 뭐냐 하면 사제들의 아주 문란한 생활과 타락, 왜냐하면 당시 로마는 최고의 소비 도시였습니다. 거기에서 사는 화려한 사제들의 생활과 부패하고 타락한, 향락에 빠진 사제들의 생활을 보면서 이제 이것이 비텐베르그나 이제 자신의 독일에서만의 일이 아니라 이제 로마 가톨릭이 속속들이 썩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면서 거기에서 개혁에 대한 의지를 굳게 다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마르틴 루터의 생애의 연대기를 구성할 때, 이제 우리들이 비텐베르그에 가서 보겠지만 거기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그 탑 속에서의 소위 로마서 1장 17절에 대한 체험이 앞에 있고, 그 다음에 종교개혁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건 것은 1517년이고, 소위 이야기 하는 탑의 염원이라고 하는 놀라운 복음의 체험은 1519년에 있게 됩니다. 그래서 연대기를 구성할 때 헷갈리면 안 됩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강력한 복음주의자, 혹은 개혁주의자, 개신교주의자가 된 것이 어느 한순간 결정적인 사건을 통해서 라고 생각하면 안 되고, 몇 가지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축적되고, 누적된 가운데 특별히 성서의 연구를 통해서 하게 되고 화룡점정과 같은 사전이 1519년 그 탑에서 로마서를 보면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전에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시편과 갈라디아서, 그리고 하박국서, 로마서 등을 강의하면서 자신이 은혜를 받으면서 은혜의 진리들을 터득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여기에서 1522년 5월에 성경을 번역하게 됩니다. 저도 원어성경을 읽어봤지만, 그것을 10개월 만에 번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목회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비서가 없었는데, 그러한 속에서 독일어 번역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인데, 하나님의 특별한 감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12년 후에 구약성경을 번역하는데, 그 때에는 멜랑히톤이나 부겐하겐 같은 제자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실제로 많은 사람과 접촉하면서 평민들이 사용하는 고급스러운 언어로 독일어를 아주 깔끔한 계열에 올려놓게 되고 거기에서 이제 독일문학이 급성장하게 되는 발판이 루터가 만들어 놓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독일 음악의 놀라운 발전도 마르틴 루터의 종교와 음악에 대한 재발견, 다시 말해서 가톨릭에서는 음악을 중시하였지만, 음악을 또한 위험시 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보면 여러분들 천주교 회 미사 드리는 것을 보면 성경을 읽을 때도 ‘뚜두두두두두두’ 높낮이가 거의 없기 때문에, 높낮이를 두어서 그 부분을 강조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지난번에 쯔빙글리가 있던 거기에서 우리들이 잠시 이야기 했었습니다. 거기에서 이야기 했듯이 그레고리 찬트 같은 것은 굉장히 절대적인 음악이었습니다. 사실 듣고 나면 재미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처럼 복잡한 음악에 찌든 사람들은 가끔 한번 들어보면 뭔가 명상을 하게 할지 모르겠지만 음악을 듣고 있으면 재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마르틴 루터는 깨고 음악의 중요성들을 재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에게 커다란 신학적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서 오랫동안 아우구스티누스를 공부하게 되고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이해와 윌리암 오캄, 그리고 둔스 스코투스에 대한 이해, 그 위에 서 있는 인본주의에 대한 영향, 이러한 것들이 가미 되면서 종교개혁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에르푸르트 대학을 졸업할 때 53명 중에서 17등 밖에 못 해서 썩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는데, 대학원을 졸업할 때에는 17명 가운데 2등으로 졸업을 하면서 상당히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영리하고 또렷한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이 성경을 번역한 것이 개신교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독일어 성경 번역한 것이, 아까 이야기 했듯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갈등이 있으니까 성경이 나오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스스로 주님을 만나고 개혁이 일어나고 하는 것들 속에서 성서 해석을 들으면서 개혁신학의 교리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니까 어마어마한 연구를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성경 하나 번역된 것이 군주 몇 명을 지원군으로 얻는 것보다 더 커다란 능력 있는 일들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한 때 말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갇혀 있을 때에도.’ 그렇게 해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성서번역을 한 사건이 중요한 사건이다. 그리고 이제 다음에 3월에 이제 비텐베르크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는 여기 있는 마르틴 루터를 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칼 슈타트라고 하는 사람과 쯔빌링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쯔빌링은 제2의 루터라고 불리울 정도로 아주 선동적이고 실제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 쯔빌링이라고 사람과 칼 슈타트라고 하는 사람, 칼 슈타트라는 이름이 이것은 원래 동네 이름이고 원래 그 사람 이름이 고덴슈탄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루터의 선배였고, 루터가 박사학위를 받을 때 박사학위를 수료하였던 두 사람이 있었는데 루터가 가고 나서 우주공산이 된 것입니다. 그 때 루터를 이은 제2의 지도자가 되고자 하였던 야망을 가진 사람이 칼 슈타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개혁은 불완전하고 소심한 개혁이었고 강력하게 해야 한다고 하면서 말하자면 강력한 개혁을 주도하게 되고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해야 되고, 사제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나눠주는 무질서들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쯔빌링의 설교를 듣고 나서 붕괴한 사람들이 성당에 있는 물건들을 다 때려 부수는 것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혼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르틴 루터가 이제 변장을 하여 야밤에 말을 타고 이제 비텐베르크로 돌아갑니다. 성을 떠나 돌아갔다는 사실을 알고 프레드리히는 아주 분노하였습니다. 루터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의 입장이 곤란해 지는데 경고망동 하였다고 아주 분노하는데, 나중에 루터가 만나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해서 이제 프레드리히의 마음을 풀어 줍니다. 그리고 이제 가서 8편의 장대한 설교를 연속으로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개혁을 원래 위치로 돌려놓게 되고 두 사람이 추방되게 됩니다. 이 외에도 신비주의자들이 등장해서 종교개혁을 막 어지럽히게 되는 일이 있게 됩니다. 상세한 이야기는 비텐베르크에 가서 하겠습니다.
2013.09.30 종교개혁여행 (독일)
스토테른하임 루터가 벼락 맞아서 수사가 되기로 결심한 기념비
녹취자 : 김세나
마르틴 루터가 1505년 7월 2일에 시간은 정확히 나오지는 않는데, 여기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보시다시피 평지이지 않습니까. 평소에도 벼락이 많이 친 답니다. 천둥번개가. 그런데 아시다시피 낙뢰라고 하는 것은 높은 곳부터 때립니다. 그래서 낙뢰가 일어날 때 나무 옆쪽에 숨으면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런데 루터가 엎드려서 ‘성 안나여,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러면 내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라고 여기에서 외칩니다. 너무 소심한 게 아닌가 그러는데 옆에 있는 친구가 벼락을 맞아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웬만큼 담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확한지 모르지만 이 지역이 진흙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발이 폭폭 빠지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는 길이 지체되어서 저녁때쯤 거의 어두워졌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이 캄캄하고 벼락이 내려치니까 옆에 가던 친구를 때려서 옆에 가던 친구가 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가 누구였는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마르틴 루터가 엎드려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성 안나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이 지역의 수호성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수호성인을 부르면서 매달리는 것입니다. 루터에 관한 전기 중 최고의 전기가 예일 대학의 교수로 지냈던 롤런드 베인턴이 지은 『루터의 생애』입니다. 가장 잘 된 전기입니다. 거기에 보면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마르틴 루터가 여기에서, “성 안나여”라고 기도하였지만 성인들의 공로를 공격하는 자가 되고 “수도사가 되겠습니다.”라고 기도하였지만 수도원 제도를 부인하는 사람이 되고, 이제 그러한 아이러니한 장소’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그렇게 수도사가 되겠다고 두려움 속에 떨면서 그 사람 마음속에서는 이제 하나님에 대한 인상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이 새롭게 각인이 되었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주 엄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포도 하나를 훔쳤다라고 하는 이유 때문에 피가 내도록 엄마는 때리기도 하고 아버지도 그렇게 많이 혼을 내고 심지어 학교를 다닐 때 아이슬레벤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도 하루에 15번이나 벌을 설 정도로 어떻게 보면 마르틴루터에게는 그렇게 기억이 있어서 그 기억이 딱 만나면서 하나님 아버지는 무시무시한 공의의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것이 루터의 구원론적인 고민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에르푸르트 수도원에까지 이어져서 거기에서 복음을 통해 벗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013.09.30 종교개혁여행 (독일)
아이슬레벤의 루터 임종의 집
녹취자 : 김세나
마르틴 루터가 62세가 되던 1545년부터 건강이 눈에 띄게 악화되었습니다. 지병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하게 가져올 수 없었지만 그래서 결국 하던 강의를 멈추고 1545년 여름에 여행을 하게 됩니다. 몇몇 지인과 함께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을 떠나고 8월에 돌아와서 다시 비텐베르크에서 강의와 설교사역을 계속 합니다. 그러나 이제 건강은 현저히 꺾어졌고 11월 17일에 강의와 모든 것을 멈추게 됩니다. 그리고 조촐하게 같이 마지막 생일을 보내고, 그러한 와중에서도 마르틴 루터는 자신이 종교개혁을 통해 세워진 일들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2월 성탄절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게 되고 그리고 이제 다시 아이슬레벤, 본인이 너무 몸이 안 좋으니까 자신의 고향이 생각나지 않겠습니까. 비텐베르크에서 다시 아이슬레벤으로 가게 됩니다. 그렇게 와서 아까 돌아오면서 본 교회 있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루터의 공식적인 설교였습니다. 돌아와서 이제 2월이 되었을 때, 2월 14일에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는 비텐베르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편지를 쓰는데 그것이 루터의 생애에 쓴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이 2월 14일에 그렇게 쓰고, 17일이 되었습니다.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는데 사람들에게 ‘혼자 저녁을 먹는 것이 너무나도 싫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됩니다. 식사를 하고 루터가 일찍 저녁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그러다가 9시쯤 잠시 나와서 저녁에 ‘너무 춥다, 불좀 더 때 다오’ 그리고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소파에서 잠을 청하다가 다시 방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때 이제 1시까지, 그러면서 이제 몸의 고통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그가 하나님께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 진리의 하나님 나를 구원하기를 원합니다.’ 그 때에 몇몇 제자들이 모여 있었고, 마지막 임종의 그림에 보면 최소한 8명 정도 모였는데 그들이 누구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거기에 요나스라고 하는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제자와 또 사랑하는 제자 한 사람이 있고 그들이 곁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이제 혼자서 거기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라틴어로, ‘하나님 내 영혼을 부탁합니다. 진리의 하나님 나를 구원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한 다음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세 번을 암송하고 그러면서 이제 뭐라고 했는가 하면, 오면서 여기에 써 붙였지 않습니까. 누가 누가 태어나고 여기에서 세례를 받았다. 내가 여기에서 무엇이고 거기에서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 아이슬레벤에 머물고.’ 어린 시절 추억들이 다 담겨 있는 곳이니까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마르틴 루터가 이제 요한복음 3장 16절을 암송하고 ‘하나님, 내가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저의 몸은 떠나지만 영혼은 당신과 영원히 함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사랑하는 제자들이 마르틴 루터의 손을 잡고 ‘사랑하는 아버님, 당신은 이제껏 당신이 가르친 교리와 진리를 의탁하고 있습니까’ ‘네’ 대답을 마친 후에 그리고 나서 15분쯤 있다가 거친 숨을 쉬면서 운명을 합니다. 이게 1546년 2월 18일 새벽 3시경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여기에서 마르틴 루터는 파란만장한 생애가 끝이 납니다. 마르틴 루터가 죽은 것이 1546년 2월 18일 새벽3시라고 했는데, 한편 어떠한 일이 있었는가 하면 교황이 트렌스 공의회를 개최하기 위하여 왜 소집을 하는가, 루터파 측에서 의견서를 내라고 해서 의견서를 작성해서 멜랑힐톤이 싸인 해서 냅니다. 마르틴 루터가 운명한 1546년부터 47년 사이에 그 유명한 슈마카르트 전쟁이 일어납니다. 마르틴 루터가 만일 한 2년만 살았다면 이 생전에 당한 고통과 비교도 안 되는 커다란 고통을 직면하였을 텐데 하나님이 너가 달려갈 길은 여기까지이다 딱 끊고 데려가셨던 것입니다. 그 때 이미 정확하게 슈마카르트 전쟁이 몇 일부터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책에는 마르틴 루터가 슈마카르트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나오고, 어떤 책에는 슈마카르트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죽었다고 나오기도 합니다. 정확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본격적으로 전쟁이 커다란 화염에 휩싸이기 전에 마르틴 루터는 여기에서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이제 운명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개혁가의 파란만장한 삶은 종지부를 찍고 이후에 마르틴 루터의 사상들이 불꽃처럼 번지면서 개신교의 역사를 써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슬레벤에서는 사실 가장 중요한 장소입니다. 사실 여기가 아니라 오면서 보았던 원래 거기에 있었고 거기에서 제자들이 있었던 가운데 마르틴 루터의 생애가 마감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 내일 보게 될 비텐베르크는, 우리가 지금 연대기 순서대로가 아니고 빗나갔지만, 거기에서 우리 말하자면 사실은 종교개혁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하게 됩니다. 위대한 일이 일어납니다.
2013.09.30 종교개혁여행 (독일)
아이제나흐의 루터하숙
녹취자 : 김세나
사실은 아버지가 재정적으로 문제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친구들과 똑같이 알바로 노래를 부르면 이제 마치 크리스마스 새벽송 도는 것처럼 부르면 사람들이 나와서 공부하는 학생들이 가난하니까 빵을 한 덩이씩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마 이 집 주인일 것입니다. 부인의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정말 노래도 잘 하고 괜찮은 학생이었습니다. 그 다음서부터 숙소와 모든 먹을 것을 제공해 주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졸업할 때까지 이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됩니다.
2013.09.30 종교개혁여행 (독일)
아이젠나흐 바흐동상
녹취자 : 김세나
우리들이 바하, 바하 하는데 정확한 발음은 바흐입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인데, 이 사람이 여기에서 아이젠나흐에서 태어납니다. 1865년생입니다. 이 사람은 이제 가문이 50여명의 음악가를 배출할 정도로 음악의 집안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에젠나흐에서 마르틴 루터가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내었고, 이 사람은 여기에서 태어났는데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 살았습니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얼마나 경건한 사람이었는지 뭐라고 이야기 했는가 하면,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음악이 아니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다’ 이 사람은 수학에도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 ‘바흐의 평균율’ 다 아실 것입니다. 바흐가 평균율을 약 476개 정도 작곡했는데, 이것은 뭐냐 하면 아베마리아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아베마리아에 화음을 넣듯이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전부다 계산하면 정확한 수학적 계산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들을 이미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책 「음악에 관하여」라는 책 속에서 음악이 어떻게 비율을 이루면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지 수학으로 다 밝혀내었습니다. 그러한 전통을 물려받아서 이 음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질서와 규칙에 있고, 이 질서와 아름다움의 규칙은 우주의 질서의 반영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화성법, 대위법, 이러한 것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결국 시간과 영원 안에 있는 사물들의 존재의 질서를 음악 속에 반영한 것이라 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요한 세바스찬 바흐에 의하면 음악은 ‘창조시에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진리를 수학적으로 찾아간 결과’를 음악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서 음악의 목적은 인간 스스로 그것을 즐거워하고 욕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으로 하여금 삿된 욕망으로 하여금 막 출렁거리는 것으로 하여금 음악을 들음으로써 이것들이 정화되고 창조의 하나님의 질서를 찾아갈 수 있게 될 때 그 때 인간의 영혼에 말하자면 정화의 작용을 음악이 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음악은 이렇게 들으면 실제로 사실 아베마리아 하니까 우리와는 가사가 잘 안 맞지만 곡 자체가 요동치던 마음을 잔잔하게 해 주는 좋은 기능을 발휘합니다. 제가 태어나 가장 많이 들은 음악이 이 음악입니다. 그래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바로 그러한 음악의 전통을 물려받았고 그리고 그는 바로크 음악에 정통하였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 위에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여 음악적인 유산을 남겨 놓은 사람입니다.
독일 에르푸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엄수파 수도회
녹취자: 조원정
9월 30일-10월 1일 종교개혁여행(독일)
나중에 이런 거 조금씩 수리는 되었지만 기본적인 골격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이 문으로 들어와서 수도원에 입회를 합니다. 입회를 하고 루터가 건물이 ‘ㄷ’(디귿자)로 되어있는데 저쪽에 이층에서 어느 방인지 모르겠지만 방도 옮기고 했겠지만 들어와서 저쪽 끝에 있는 기거하면서 수도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할례설명, 할례와 비텐베르크 대학에 관하여,
헨델동상
비텐베르그 대학에 마틴 루터가 유학을 갔다고 했는데 나중에 비텐베르크 대학이 여기에 할례대학이랑 합쳐져서 할례비텐베르크 루터 대학으로 개명을 합니다. 할례는 종교개혁하고는 상관이 적지만 매우 중요한 도시입니다.
경건 서적 가운데 경건한 소원이라는 책 보셨습니까? pia desidera라는 유명한 책 입니다. 경건한 소원 이라는 책을 필립 야콥 슈페너가 썼습니다. 필립 야콥 슈페너, 진젠도르프 백작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사람들이 이 도시를 중심으로 18세기에 경건주의 운동이라고 하는 새로운 운동을 일으킵니다. 경건주의 운동은 멀리 바라보면 공동생활의 형제단까지 올라가지만 가까이 보면 데보치오 모데르나 해서 새로운 경건운동이라고 하는 것이 16세기 중반 경에 화란에 우트레이트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화란에서 일어났던 데보치오 모데르나 하는 운동은 나델의 레트로마치오라고도 하는데 제 2의 종교개혁운동이라고도 합니다.
종교개혁 운동이 16세기에 마무리가 되고 웨스트팔리아 조약을 통해서 개신교도들이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신앙의 자유를 따라서 많이 도망친 사람들이 후에 화란에 모이게 되고 화란에서 개혁신학이 눈부시게 발전을 하게 됩니다. 16세기가 전성기를 이루게 되고 화란뿐만 아니라 제네바, 취리히, 이런 곳을 중심으로 영국까지도 완성도 높게 개혁신학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많은 이단이나 사상들과 접하면서 기독교의 진리를 더 구체적으로 변증하다 보니까 교회의 관심사들이 신학을 명료하고 세미하게 세우는데 집중이 되고 종교개혁 맨 처음에 있었던 어떤 경건과 신앙의 연리들이 서서히 식기 시작하고 17세기에 일어났던 데카르트 주의에 영향을 받으면서 인본주의적 사상들이 교회를 거대하게 휩쓸게 됩니다.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났던 것인데 이러한 교회가 형식화되고 교회의 영적인 생명력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한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모태가 어디에서 나오냐 하면 16세기의 신학자 가운데 보이스루스라고 하는 사람이 화란의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영국을 건너가게 됩니다. 그때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청교도 신앙의 현장을 보면서 강력한 영적인 생명력이 화란에도 불 지펴졌으면 좋겠다고 하며 돌아와서 어떻게 하면 학문만이 아니라 경건까지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신학을 구가할 것인가 고민하면서 헌신적으로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피치우스라고 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카톨릭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몇 사람 안 되는 17세기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학교 안에서 학생들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면서 소위 오늘날 얘기하는 그룹 성경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그것에 가르침 받았던 학생들 가운데 일부가 독일로 내려와서 그 가르침의 방식대로 전해주고 엄격주의라고 해서 일체의 욕심을 버리고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운동들을 펼치게 됩니다. 그 운동의 영향력이 백년 후에 할례 지역을 중심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때에 경건주의 운동이라는 것이 일어납니다.
경건주의 운동의 요지가 이렇게 치열한 교회의 논쟁을 통해서 교회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교회가 너무 행위와 뜨거운 경건은 없고 이론에 치우친 교회가 되었으니 이제 교리보다는 삶의 실천이 중요하고 학문보다는 실제로 손과 발을 움직여서 봉사하는 그런 생활에 헌신해야 되지 않겠느냐 입니다.
진장도르프 백작과 필립야콥슈페너 같은 사람은 모두 귀족이었고 특히 진장도르프 백작은 돈도 굉장히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경건하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러한 교회에 깊은 염증을 느끼면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도행전의 교회를 제공하고자 하는 욕구를 갖게 됩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헌신해서 가난하고 굶주린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무지한 사람들을 출판이나 책 이런 것들을 통해서 깨우치고 함께 공동으로 일하면서 자립할 수 있는 복지정책들을 내어 놓게 됩니다. 그때에 독일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폐허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가난하고 특히 고아들이 많이 생겨나게 될 때 아이들을 다 끌어 모아서 사랑으로 돌보고 헌신하게 됩니다. 이때 뜻을 같이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면서 이 운동이 아주 커다란 사회적인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굉장히 중요한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때에 독일이 자발적으로 시작이 된 운동들이 너무나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면서 실제로 수많은 고아들과 행려자들 노인들을 구제하고 그들을 돌보는 것을 보면서 거꾸로 나라가 커다란 감명을 받습니다. 프로이센 정부는 백성들의 관심을 집중시켜서 전체적으로 나라를 하나로 묶어야 할 정치적인 필요가 있었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을 펼치는 교회의 지도자들의 선교적인 목표와 프로이센 정부의 정치적인 입지가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거기서 하고 있던 사업들을 많은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여서 정부가 적극적으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 정부와 함께 협력하는 정책을 삼으며 오늘날 독일의 복지정책이 그때에 모든 골격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독일이 유럽에서 가장 먼저 복지에 대해 눈을 뜨고 철저히 국민들을 비인간적인 삶으로부터 보호하는 모범적인 국가로 입지를 굳히게 되는데 그 일을 경건주의 운동이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교회는 아주 새로운 회복을 보게 되고 많은 교회가 성도들이 사회를 위해 봉사를 하게 되고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하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말이 반드시 좋아졌나 하면 처음에는 아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았지만 사람들은 어려운 교리를 배우는 것은 모두 시간 낭비이고 열심 있는 삶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소위 이야기 하는 실존주의 성경 해석 방법들이 시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펼쳐서 그 속에서 통일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와 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던 전통적인 성경해석의 방식을 무시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오늘 나에게 와 닿는 마음이 무엇인가하면서 체계적으로 성경을 해석할 능력이 별로 없는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자기가 받는 느낌을 중시하는 해석들을 갖게 됩니다. 거기에서 많은 해석학적인 문제가 생겨납니다.
경건주의 운동의 말기에 가서는 교리에 대한 아주 폭넓은 관용주의가 생겨나게 됩니다. 결국은 신학과 교리 때문에 교회에 생명력이 사라진다고 생각을 하고 신학과 교리를 멀리하고 폭넓은 실천적인 신앙을 강조하던 할례대학이 이백년 후에는 유럽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는 최초의 신학교가 됩니다.
여기에서부터 아주 극단적인 자유주의 사상이 유럽 전체에 수출되는 그런 학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들이 믿는 신앙하고는 현저히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빙겐이나 괴팅엔, 하이델베르그 이런 대학들은 그 당시 독일에서 일어났던 경건주의 영향의 흔적들이 특히 티빙겐이 괴팅엔 대학들은 그런 흔적들이 많이 있다고 봅니다. 개혁주의 하고는 좀 거리가 멉니다.
우리들이 여기에서 많은 교회사적 교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교회가 한 시대에 자신에게 주어진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헌신할 때 사회를 그렇게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교훈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리와 신학을 경신하고 폭넓은 신학적인 관용을 갖게 되었을 때 마지막에 불명확한 신학적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 자유주의가 판치게 되었다고 하는 역설적인 두 가지 반성을 우리 모두 같이 함께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할례대학에 대한 이야기는 종교개혁하고는 직접적인 상관은 없지만 간접적으로는 상관이 있습니다. 사실은 경건주의가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났던 개혁파 정통주의 신앙에 대한 하나의 대항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역사적인 교훈을 생각하면서 우리들은 어느 쪽이든지 간에 모두를 잃지 않고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그것이 실제 삶으로 나타나는 생활, 또 한편으로는 치열하게 탐구하고 신학과 교리를 세우고 진리를 변증하는 이 두 가지 일이 항상 같이 갈 때에 온전한 교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는 역사적인 교훈을 이 할례에서 우리들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2013.10.1 종교개혁여행(독일)
비텐베르크 95개조 반박문을 내걸었던 비텐베르크 대성당 앞
녹취자 : 김선희B
여태까지 있었던 것은 사실은 지금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비텐베르크에서 일어난 일들이 하나의 파문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진짜 종교개혁의 시작이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여태까지 설명했던 모든 내용들은 여기에서 일어난 일들의 주석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 이 비텐베르크 대학은 작센의 제후 현자공 프리드리히가 1502년에 이 대학을 세웁니다.
1502년이면 여기에서 대학이 세워지고, 그리고 이제 마르틴 루터를 1508년에 교수로 초빙을 합니다. 1508년은 마르틴 루터가 1502년 대학이 세워질 때에는 마르틴 루터가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학사를 마쳤을 때 정도였을 것입니다. 1505년에 법학석사를 마치고, 1505년 1월에 철학 석사를 마치고, 1505년 1월 6일 법학대학원에 들어갔다고 얘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7월 달에 아버지 만나러 갔다 오다가 벼락을 만난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수도원에 들어가게 됩니다. 7월 17일 에르푸르트 수도원으로 수도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러한 마르틴 루터가 에르푸르트 대학에 다니던 그 때에 이제 작센 제후가 이 대학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아까 가이드 선생이 말씀하셨지만, 작센 지역은 많은 부를 축적하면서 사실은 많은 선제후들 가운데 프리드리히가 존경을 받는 그런 제후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것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세울 때에 스타우피츠라는, 에르푸르트 수도원 시절에 마르틴 루터를 친절하게 상담해주고, 복음으로 인도했던 그 사람이 작센 공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멘토였고 친구와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루터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 사람이 스타우피츠가 이 사람을 이쪽으로 보내어서 교수도 하게하고 공부도 더 하게 하자 이런 제안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이루어지는데 1508년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사실은 1509년에 여기에 와서 공부를 해서 신학 학사 학위를 받습니다. 그런데 뭘 가르치냐 하면 이 사람이 벌써 철학 쪽으로는 석사 학위를 가지고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에 와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해서 인문학을 강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기서 교수 생활을 하고 그리고 이 사람이 이제 1509년에 여기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공부를 해서 신학 학사 학위를 받고, 그 후로 활동을 하면서, 워낙 출중하니까 1512년에 이제 마르틴 루터가 로마를 여행하고 돌아왔을 때 스타우피츠에게 제안을 합니다. “이 박식하고 탁월한 이 사람에게 박사 학위를 주면 어떠냐” 해가지고 1512년에 학사에서 박사가 됩니다. 박사가 될 만한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1510년에서 1511년 사이에 마르틴 루터가 로마를 방문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이제 여러 수도회에서 대표들을 우두머리로서의 대표가 아니라 로마에 가서 교황을 알현하고, 그 다음에 수도원의 직제에 관한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서 여러 수도회에서 한 사람씩 대표를 파송해가지고 모여서 이 사람들이 이제 로마를 향하게 됩니다. 그게 1510년이나 1511년경에 일이라고 봅니다.
가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렸던 28계단으로 이루어진 스칼라 상타의 사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맨 처음에이 마르틴 루터는 이미 벌써 부패하고 있는 가톨릭을 보면서 사제들은 부패했지만 절대로 우리 교황께서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갑니다. 가서 알프스를 넘게 됩니다. 이 때 포 강변에서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수도원에서 하룻밤 머물게 됩니다.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머물면서 그 수도원에 들어와 있는 엄청난 화려함 그리고 말하자면 사치와 향락을 보게 되면서 깊이 마음이 상해하고 그러면서도 이제 로마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생각을 하고 로마에 들어가면서 얼마나 감격했던지 두 팔을 높이 들고, “순교자의 피를 흘린 로마여, 영광의 도시 로마여” 하며 찬송을 하며 들어갑니다.
들어가서 보게 된 광경은 너무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우선 첫째는 스칼라 상타를 오르고 있는 기쁨이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들을 보면서 자신도 해보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을 체험하면서 이 미신적인 신앙의 위험을 깊이 자각하게 되고, 거기에 있는 사제들의 부정직과 타락, 향락 이런 것들을 목격하면서 사실은 교황청은 안 그렇다는 게 아니라 교황이 그 모든 부패와 오류의 진원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사람이 돌아오게 됩니다.
로마로부터 돌아와서 비텐베르크에 오자마자 설교의 포문을 여는데, 그게 바로 십계명에 관한 설교였습니다.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내 앞에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라고 하는 그것을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고 있는 방식으로 설교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우상의 진정한 의미가 탐욕이라는 것을 골로새서와 연결시켜서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불을 뿜는 설교를 하게 됩니다. 이런 설교를 하게 되면서 이제 마르틴 루터는 1516년에 자기가 쓴 책은 아니만, 『독일신학』 이라는 책을 출간합니다. 이것은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14세기경에 어느 수도사가 썼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이 책은 신비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이전 5월 6일인가에 먼저 하나를 발표했는데 세간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에 발표한 제목이 『스콜라주의를 반박함』이었습니다.
스콜라주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학문의 방법인데, 묻고 대답하고, 묻고 대답하고, 묻고 대답하고 하면서 아주 깊이 들어가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해서 어떤 문제들을 의문의 여지없이 깊게 파고 들어가는 것을 스콜라주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스콜라주의라고 이야기 할 때 스콜라주의는 학문의 한 형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요즘은 많이 나아졌지만, 옛날에 죄와 은혜의 지배나 이런 공부들을 할 때 보면 공부하거나 책을 볼 때 보면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계속 1에서 a, a에서 1, 1에서 다시 a에서 1 나가잖아요? 이런 방식들이 스콜라주의의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묻고 대답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스콜라 주의적인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다루고 있는 내용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즉 무엇이냐면, 기본적으로, 여기서부터는 신학적인 설명들을 들어야지만 이것이 이해가 되는데, 기본적으로 마르틴 루터가 주장하는 것은 인간은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절대로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 또 부패하고 타락했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의 영혼의 가장 커다란 두 기능이 하나는 지성이고, 하나는 의지입니다. 지성에 그것이 영향을 미쳐서 아주 현저하게 영향을 미쳐서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스스로 찾아가고 알아갈 수가 없다, 이게 루터의 생각이었고, 그 다음에 의지는 철저히 부패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려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없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는데 가톨릭에서는 그것이 정반대였습니다. 그래서 이 인간은 여전히 인간의 지성은 믿을 만 하기 때문에 인간이 부지런히 탐구해 나가면 이 자연적인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말하자면 당시의 가톨릭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신학 책을 좀 읽으신 분들은 여기서 ‘존재의 유비’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 라고 하는데, ‘아날로기아 엔티스(analogia entis)’ 그게 무슨 뜻이냐면, ‘존재의 유비’는 뭐냐면,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냐, 그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냐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인간 아버지가 누구냐를 보고 거기서 하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과 사람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인 것 사이에 차이점들을 하나씩 하나씩 다 제거해 나가면 마지막에 인간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 웃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성의 건재함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무엇이냐면, 인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충분히 자기 의지로 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보조적인 역할이고, 우리 인간이 주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를 행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마르틴 루터는 이미 에르푸르트에서 자기의 전 존재를 걸고 피가 맺히도록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잘못 되었다는 사실을 깊이 자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마르틴 루터는 스콜라주의 적인 그런 차가운 신학보다는 차라리 신비주의를 훨씬 더 좋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루터와 신비주의는 상당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1510년에서부터 1520년까지 이제 즉 여기에 1508년에 와서 인문학 과목으로 강의를 하다가 2년 후에 1510년부터 여기에서 시편, 히브리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등을 강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마르틴 루터의 여기에서의 성경 강의는 정말 여기 있는 사람들은 생전 듣도 보도 못하던 내용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관심이 성경에 없었고, 신학 박사가 된 사람이 한번도 성경을 안 읽은 사람이 수두룩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철학이 아퀴나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 교과서이고, 성경이 부교재가 됩니다. 성경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경을 설교하는데 원고도 없이 유창하게 성경을 강론하기 시작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커다란 은혜를 받으면서 어떤 사람은 뭐라고 말을 하냐면 “마르틴 루터 선생은 강의시간에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주었습니다. 그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마르틴 루터가 이 강의를 통해서 얼마나 영향력이 컸는지 다른 교수들이 강의실에 와서 마르틴 루터의 성경강해를 들을 정도였습니다.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1516년 4월 7일에 레밍겐의 수도사인 ??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 속에서 현재 자기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1516년을 기준으로 이야기 합니다. 그게 뭐냐면 “나는 내 힘으로 구원을 얻어 보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저는 에르푸르트에서 뼈저리게 경험했습니다. 거기에서 구원의 길이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의를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는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십자가의 신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축적된 실력이 있었기 때문에 그 후에 하이델베르크 논쟁, 아우구스부르크 논쟁, 그리고 마지막에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유명한 논쟁이 있습니다. 나중에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잉글리시 스타트 대학의 교수인 ??와 논쟁을 벌이는데, 거기에서의 승리 같은 것들이 이런데서 축적된 논쟁을 통해서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마르틴 루터가 발견하게 된 가장 커다란 중요한 교리는 무엇이냐면 ‘이신 칭의’의 교리입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라는 교리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이 모든 영적인 혼란의 핵심에는 무엇이 있었느냐면 의에 대한 개념입니다.
의에 대한 개념이라는 게 무엇이냐면, 의라고 하는 것을 크게 세 개로 나누는데, 하나는 하나님 자신의 의, 두 번째는 합당한 의, 혹은 고유한 의, 이것은 율법에 있는 것들을 다 지켜서 하나님 앞에 너는 의롭다고 사법적으로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외부로부터 전가되어 온 이질적인 의, 이렇게 의의 개념이 셋으로 나누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마르틴 루터는 이 세 가지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두 가지만 이야기 했는데, 이 세 가지를 혼동한 것입니다.
로마서를 보면서 크게 절망하였던 것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도대체 하나님이 복음에도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고 했으니까 그 의를 하나님의 justice 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죄 지은 사람은 벌하고, 잘한 사람은 상 준다면 그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그것을 마르틴 루터가 깊이 절망하면서 울부짖다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의이고,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의는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행하는 그 의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의는 외부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공로가 우리에게 전가됨으로 얻는 구원의 의이다 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일들이 이제 1510년서부터 1515~1517년 사이에 있게 됩니다.
아직도 신학을 강의하고 있던 1517년 10월에 이제 마르틴 루터가 여기 바로 이 문에다가 95개 조항을 붙입니다. 95개 조항 전체가 거의가 다 구원론에 집중된 것입니다. 첫째가 회개로 끝나고 마지막에 구원으로 ?? 니다. 그 때에 마르틴 루터가 95개 조항을 붙일 수밖에 없었던 그 때 상황을 설명하면 결정적인 것이 면죄부 판매입니다. 면죄부 판매가 1517년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1507년에 면죄부 판매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브란덴부르크의 실력 있는 정치적 가문의 한 사람이었던 알브레히트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군주인 동시에 이쪽 지역의 대감독이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면 그 때의 교황인 레오 10세가 피렌체 출신의 사람으로서 틀림없이 돈을 뿌려서 교황이 된 사람인데, 이 사람이 피렌체 가문 출신답게 르네상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르네상스가 사실은 기독교 정신하고 안 맞는데 르네상스에 심취하면서 수많은 예술 작품들을 사기 시작합니다. 최대의 구입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돈이 필요하겠죠. 그러다가 베드로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는데 돈을 조달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면죄부 판매를 시작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면죄부를 여러분들이, 그 사람들이 아무 생각 없이 돈 벌어야지 면죄부, 그러지 않았을 거란 말입니다. 그 안에 신학적인 정교한 설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잉여공로사상’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대부분의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공로를 못삽니다. 그래서 이제 아주 극악한 인간들은 곧장 지옥으로 가고, 보통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함량미달입니다. 그래서 어디로 가냐면 연옥으로 갑니다. 연옥으로 가서 이 세상에서 지은 죄를 다 갚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이 세상에 살 동안에 기회가 두 번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죄를 지었으면 사제한테 가서 고해성사를 합니다. “내가 어제 장사하다가 속여먹었습니다.” 아니면 “내 친구를 어제 만나서 반쯤 죽였습니다.” 아니면 “내가 바람을 피웠습니다.” 하면, 사제가 그 죄를 대신할 수 있는 속죄의 숙제를 내줍니다. 보속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그 사람한테 갚아라 하면 그 사람 죽었습니다 하면, 그 두 배를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아니면 주기도문을 백번을 외워라, 아니면 바람을 피웠으면 집에 가서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설거지를 열 번하고 그 다음에 아내 마사지를 백번 해 주어라, 이런 식으로 숙제를 내줍니다. 그렇게 하면 탕감이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성실하게 자기 죄를 속죄하고 대가를 치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누적이 됩니다. 결국은 그러고 죽습니다. 그러면 함량미달입니다. 그러면 연옥으로 보냅니다. 연옥에서 고통을 많이 받으면서 죗값을 많이 치른 다음에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친구나 교회나 많은 이웃들이 그를 위해 열렬히 기도해주면 그게 덜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해서 아주 탁월한 사람들, 성인이나 일평생을,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본 엘리자베스같이 일평생을 그런 고귀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가난한 사람을 위해 살던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공로가 남습니다. 그게 모두 천국에서 뭉쳐져 있습니다. 그 사용권한을 교회가 가지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웃지만, 그 사람들은 그게 심각한 겁니다. 그것이 잉여공로사상입니다. 그래서 그 남은 공로를 하나님이 교회에 주십니다. 교회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단위 순위가 모자란다 싶으면 마리아에게서 남은 공로해서 주면 됩니다. 그런 사상이 이미 그 이전서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자, 그런데 이제 면죄부는 왜 나오게 되었냐면 16세기에 갑자기 사회가 폭발적으로 발전하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중상주의가 시작이 됩니다. 중상주의라고 하는 것은 상업을 중시하는 정책이다 그게 아니라 상업행위는 언제든지 있었는데, 여기에서 물건을 사다가 딴 데 갖다 팔거나 아니면 이때에 물건을 보관했다가 딴 데 팝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죠? 차액이 많이 남겠죠? 이런 것들을 우리들이 중상주의라고 이야기 합니다. 중상주의가 이루어지면 어떻게 되죠? 물건의 거래가 활발해 지니까 뭐가 필요하겠어요? 화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화폐가 본격적으로 등장을 해서 사용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속에서 자, 이제 공로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여태까지는 말하자면 로마 가톨릭교회가 거저 나눠주기도 하고 혹은 개인이 열심히 노력을 해서 얻기도 했는데, 이것을 팔고 싶은 겁니다. 그것을 써서 주는 증서가 면죄부입니다. 우리는 황당하지만 그 사람들은 상당한 정교한 신학이 있는 겁니다. 알브레히트라고 하는 이 사람은 어떻게 군주로써 대주교, 대감독이 될 수 있었느냐 하면 추기경이거든요. 로마 교황청에 가서 흥정을 합니다. 로마 교황청은 돈이 필요했고, 알브레히트는 돈을 조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쪽 지역을 면죄부를 팔 수 있는 권한을 너에게 주겠다, 그 대신 50대 50으로 한다, 단 그 권한을 너에게 주는 대가로 너희는 거금을 교황청에 바쳐라, 그래서 그 당시에 은 2만 7천이라고 하는 그때 화폐 단위가 있었습니다. 그 돈이 얼마인지는 모르는데, 그 사람도 돈이 없어서 후거? 라고 하는 교회에 가서 빌려서 교황청에 갔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본전을 뽑아야 되잖아요? 그래서 이쪽 지역의 면죄부를 팔 수 있는 권한을 공식적으로 받은 겁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것을 받아서 헤쩰이라고 하는 수도사를 고용을 하는데, 이 사람은 우리로 말하자면 보험 영업의 천재였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선동적인 설교를 통해서 돈궤가 딱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동시에 당신 어머니의 영혼이 천국으로 간다는 그 얘기를 헤쩰이라는 사람이 합니다. 선동적으로 해서 이 사람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줍니다. 어쨌든 열렬하게 이것을 팝니다. 그 다음에 알브레히트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 일을 해 나갑니다.
자, 그런데 이게 이제 문제가 생겼습니다.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는 1507년에 이미 면죄부 판매가 이 지역 저 지역에서 시작되었지만, 여기에는 못 팔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똑똑한 사람입니다. 신앙심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왜? 면죄부를 팔면 그 돈이 어디로 갑니까? 교황청으로 갑니다. 그러니 이게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 팔아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무슨 일이 일어 나냐면 이 작센에 있는 사람들이 면죄부를 판다는 소리를 듣고 옆 주, 마인츠 주로 몰래 가서 거금을 내고 그것을 계속 사는 겁니다. 그것이 어마어마하게 비싸서 보통 사람은 살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으로 가난한 사람을 고려한 가격으로 주어집니다. 그렇게 해서 사는 것입니다. 돈 많은 사람은 많이 받았습니다. 맨 처음에는 그것을 멋있게 컬러로 찍어서 만듭니다. 너무 많이 팔리니까 그 다음엔 아무렇게나 막 찍어서 팔았습니다. 그래서 처음 나온 면죄부와 나중에 나온 면죄부를 보면 품위가 다릅니다. 막 찍어서 팝니다. 그런데 작센의 제후가 보니까 미친놈들이거든. 자기네 주위의 돈이 그 옆의 주로 다 가는 것입니다. 그 돈이 절반은 교황청으로 가고, 절반은 알브레히트가 먹고, 또 그 주에다가 수수료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여기의 작센의 제후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루터는 감히 작센의 제후하고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정도의 친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517년에 이것을 발표할 때 전폭적으로 지원을 해줍니다. 그러니까 마르틴 루터도 깜짝 놀란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현자공 프리드리히의 지원을 받으면서 이것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당시에 어느 정도로 교회가 타락했느냐면 주교, 대주교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 타락이 어떻게 됐느냐하면 그저께 설명을 조금만 했습니다마는, 자기네 주, 자기 영토가 있습니다. 그런데 수도원이 들어섭니다. 처음에는 수도원이 그러다가 사람들이 죽으면 어디다 기부한다고 했죠? 수도원에다가 합니다. 그러니까 수도원이 점점 넓어집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자기 땅이 세금을 안내는 땅이 점점 늘어나고, 결국은 로마 교황청의 소유가 되어 가는데, 땅이 점점 넓어져 가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자기 것으로 차지하고 싶어요. 교황청하고 싸울 수 없으니까 한 놈은 자기 제후의 위를 물려주고, 한 놈은 돈을 잔뜩 먹여가지고 얘를 수도원장을 만듭니다. 그러면 둘째 아들은 신앙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돈을 많이 받고 거기서는 얘를 수도원장으로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형은 왕이고, 동생은 수도원장이니까 어차피 콩이 솥에서 풀어져도 팥이 풀어져도 한 솥에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다음에 이걸 주물떡 거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교회에서 엄청난 타락의 상상할 수 없는 타락이 행해집니다. 왜? 모든 돈과 권력을 교회가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엄청난 타락이 일어납니다.
그런 속에서 95개 조항을 발표했을 때 처음에는 시큰둥합니다. 별로 반응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가 너무 고민스러우니까 이것을 복사해가지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편지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퍼져가지고 나타나니까 이것을 대학에 보내가지고, 교회에서 고민이 생깁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 거냐? 대학에서 이것을 받아보고 의견들이 교수들은 양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잖아요? 그것을 반박을 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우물쭈물 하면서 “교황이 직접 해야되겠습니다” 그러고 떠넘겨 버립니다.
교황이 사태를 보니까 이게 엄청나게 확산이 되면서 여기 더군다나 개신교를 지지하고 있는 개혁사상을 지지하고 있는 영주들의 지원을 받으면서 폭발적으로 영향력이 행사가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그러면서 이제 이 문제를 갖다가 해결하라고 에르푸르트 어거스틴 수도회, 어거스틴 수도회가 하나가 아니라 여러 수도원이 있잖아요? 전체적으로 통할하는 우두머리에게 명령을 내리니까 왠지 이 사람은 스타우피cm에게 공을 던져버린 겁니다. 스타우피츠가 “그래? 그럼 마르틴 루터 네가 도대체 말하는 새로운 신학이란 게 뭔지 말해보라” 돗자리를 깔아준 겁니다. 그게 하이델베르크 논쟁입니다. 그걸 보고 깊이 감동을 받은 사람이 누구라고 했죠? 마틴 부처, 부처가 와서 깊은 은혜를 받고 종교개혁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펼쳐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요쪽 뒤로 들어가 보면 탑이 나옵니다. 그 탑에서 마르틴 루터가 유명한 탑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내가 자료를 쭉 찾아보니까 가장 어려운 게 연대입니다. 그래서 연대는 여러분들이 무슨 책이든지 너무 신뢰하지 않는 독나 좋습니다. 어떤 책에 보면 13년, 어떤 책에 보면 14년 그런데 이상하게 마르틴 루터는 1546년서부터 한 16년간 써내려간 ‘탁상담화’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뭐냐면 마르틴 루터의 유일한 낙이 제자들과 함께 토론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올라가보면 마르틴 루터가 탁상담화를 했던 응접실이 있습니다. 이렇게 응접실이 놓여있고 탁자가 놓여있는데 거기서 맥주를 마시면서, 그 당시의 맥주는 하나의 문화였고, 여기서는 물을 먹으면 항상 다리가 붓습니다. 그래서 맥주를 마셨습니다. 여기 지하에 내려가면 마르틴 루터 맥주도 팝니다. 그리고 마르틴 루터 아내 카트린느 폰 보라가 맥주공장 사장입니다. 몰랐죠? 그 돈을 벌어서 남편의 종교개혁을 후원해 주었습니다. 어쨌든 맥주를 먹으면서 담화를 나눕니다.
그때 거기서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들, 벼락 맞은 이야기, 자기 어린 시절 이런 이야기를 특별한 형식이 없이 써 놓습니다. 그때 옆에서 제자들이 그걸 다 받아 적어서 만든 책이 있습니다. ‘탁상담화’라는 책입니다. 유명한 책입니다. 한국에는 요약본 형태로 나와 있는데 여러분 한번 보시면... 그 책 속에서는 무어라고 이야기 하느냐면 이 탑의 경험이 1519년이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저도 맨 처음에는 의심이 되었는데, 어떤 학자는 13년, 어떤 학자는 14년, 탁상담화에서는 19년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마르틴 루터의 기억이 잘못 되거나 아니면 인쇄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면 어떤 이야기가 되냐면 95개 조항을 걸고 2년 후에 탑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의 신학적인 회심을 이렇게 어느 한 순간으로 규정하려고 사람들이 그러거든요. 그렇게 하면 사실은 1517년 후에 탑의 경험이 일어났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마르틴 루터의 신학적인 경험은 결정적인 한순간이 아니라 수없이 작은 사건들이 누적되면서 이제 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 에르푸르트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잖아요? 그리고 처음 성례를 합니다. ‘마르틴 루터’라는 영화 보셨어요? 영화를 보면 첫날 와서 집행을 하다가 포도주 잔을 쏟잖아요? 그러니까 아버지가 “야, 넌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하냐”면서 성질을 팍 내고 가잖아요. 그런데 그게 사실은 마르틴 루터가 실수한 아니라 그 순간에 커다란 신적인 두려움, 뭐냐면 사제인 내가 이것을 축성함으로 말미암아 이 평범한 포도주와 빵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된다고 하는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엄습하면서 이 사람이 겁을 먹는 겁니다. 거기서 소위 이야기하는 ???이 생깁니다. 이런 식으로 마르틴 루터의 신학적인 회심도 한 번의 경험이 아니라 모든 것을 마감 짓는 결정적인 사건이 탑의 경험이었지만, 그 이전에 벌써 이런 경험들이 계속 누적되면서 결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탄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럼 1513년 혹은 14년 혹은 19년에 일어난 탑의 경험이라는 것은 정체가 무엇이냐? 그게 바로 이 뒤편에 있는 탑에서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시설이 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보면 유리창도 없습니다. 연구를 했다는 의미가 책상을 펴놓고 유리창 안에서 공부를 했다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마르틴 루터가 거기에 책을 들고 가서 묵상을 했는지는 알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거기에서 나름대로 성경을 묵상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서였습니다. 로마서를 묵상하면서 의에 대해서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고민을 막 하는 순간에 어느 한 순간에 모든 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이 이것을 당신을 전심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생각이 밀려오면서 하나님의 의에 대한 모든 혼돈들이 말끔하게 제거되는 놀라운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그 경험을 마르틴 루터는 자기의 책 속에서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다 외우지는 못하지만 비슷하니까 들어보세요.
“한 순간 내 마음속에 먹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며 찬란한 복음의 빛이 비추었고, 내 영혼은 지극히 가벼워져 하늘로 오르는 것 같았고, 기쁨으로 가득 찼고 나는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그런 고백을 거기서 하게 됩니다. 그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탑의 경험입니다.
자, 여러분들이 교리반에서 율법의 세 용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세 용도가 첫째가 무엇이라고 하였죠? 첫째가 시민적 생활의 용도, 율법이 돌판에 새겨진 율법이 있고, 우리 마음에 새겨진 율법이 있는데 마음에 새겨진 율법은 무어라고 했어요? 양심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서 시민적 생활이 엉망진창이 되지 않고 주류를 지키는 사회가 됩니다. 첫 번째 용도입니다.
두 번째 용도가 뭐라고 그랬죠? 몽학적 용도. 율법을 행해도 행해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결국은 아, 우리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율법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율법의 두 용도까지 밖에 못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신 용도가 우리를 의로워지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결국은 마지막에 우리의 힘으로는 이 합당한 의를 스스로 성취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주님이 이미 이루신 이질적인 의를 우리에게 전입시키셔야 한다는 필요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거구나 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몽학선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옛날 로마 시대 때에 지체가 높은 귀족 집안에 아이를 공부하도록 돌봐주는 지적인 하인이 있었습니다. 덩치가 크고, 그래서 데리고 갑니다. “도련님, 오늘 학교 가서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절대 떠들면 안 됩니다. 만약에 계속 떠들면 아버님한테 이르겠습니다. 마님한테 이르겠습니다.” “알았어.”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러고 가서 공부를 하러 갑니다. “도련님, 공부 잘 하셨어요?” 어쩌고저쩌고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집에 가셔서 숙제를 하셔야 됩니다.” 신분은 종인데, 아이가 너무 어리니까 지적 후견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됩니까? 이 아이가 커지면 이런 사람이 필요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율법도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필요하지만, 그 후에는 필요가 없다. 이것이 이제 마르틴 루터가 발견한 율법에 대한 두 가지 용도였습니다.
이것은 이제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칼빈이 율법의 제 3의 용도를 이야기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서 구원을 얻으라고 주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예수께로만 인도하면 율법의 용도가 그걸로 끝나는 건 아니다, 구원받은 다음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지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이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라 하는 그 방향을 율법이 우리에게 준 것이다. 그런데 그 율법은 결국은 하나의 요체로 집약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그 계명이다 이렇게 요약을 해서 율법의 제 3용도에 대한 이해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렇게 하면서 개혁주의적인 율법의 이해가 완성이 됩니다.
한편 여기서 설명하고 더 이상 설명안하겠습니다. 마르틴 루터의 집안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폰 보라는 도망 나온 수녀였습니다. 그 당시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제 기억으로는 스물여섯 명의 수녀들이 함께 도망쳐서 마르틴 루터의 그늘 아래로 들어왔습니다. 도망 나온 수녀는 강간해도 좋다 였습니다. 누구에요? 그런 사람들이? 소위 이야기하는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든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개혁신앙을 지지했기 때문에 반기를 든 사람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로마 가톨릭에 대한 항거를 자기의 방탕의 기회로 활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목숨은 간 곳이 없었습니다. 수도원에 있던 수도사는 때려 죽여도 좋고, 수녀는 강간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숨어들어 온 것입니다. 루터가 다 품어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짝 지어서 종교개혁으로 회심한 사제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보내준 겁니다.
마지막에 폰 보라 하나 남았습니다. “너도 빨리 가라” 남았으니까. 괜찮은 사람들은 다 갔고, 별로 사진 보면 알지만 미안하게 생겼거든요. “너 가라” 하니까 “저는 안갑니다.” “왜 안가냐?” “저는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 누구냐? 소개해 줄게” “당신입니다.” 스물여섯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가만히 고민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 합니다. 제자들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반대합니다. 왜? 당신이 결혼하면 종교개혁은 끝납니다. 그리고 당신이 결혼하면 많은 대적들이 이것을 비난해서 결국은 우리 종교개혁의 대의가 흐트러지게 될 겁니다. 그런데도 마르틴 루터는 눈치 안보고 결혼을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의 고백 속에서 왜 그렇게 모두 반대하는 결혼을 실행했느냐?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첫째, 연로하신 아버님께 손자를 안겨드리고 싶었다. 효자였습니다. 두 번째는 이렇게 사제의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정당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오히려 원수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결혼을 합니다.
자, 가톨릭에서는 너무 신난 겁니다. “봐라, 저 사람이 종교개혁을 일으킨 것은 장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래도 루터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 사람과 결혼을 해서 행복하게 삽니다. 마르틴 루터가 결혼할 때에 스물여섯 먹은 처녀를 마흔 두 살 때에 취했습니다. 그러니까 약 16년의 차이가 나는데 결혼을 했고, 폰 보라는 55세까지 삽니다. 그런데 이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 이외에는 교황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폰 보라는 두려워했습니다. 그 당시에 ‘도미나’라는 라틴어가 있습니다. ‘도미나’는 ‘도미노스’의 여성이었는데 아내를 도미나 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흘러가면서 폰 보라를 ‘도미노스’ ‘주님’이라고 호칭을 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말하자면 무서워 한 겁니다. 그러고 이 사람은 어느 정도 쑥스러운 사람이었느냐면, 캐트리나 폰 보라입니다. 원래 캐트리나 라고 하는 것이 제가 알기로는 ‘깨끗하다’ 거기에서 온 단어거든요. ‘캐트리나’할 때 ‘캐’가 'C'로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K'로 바꿔서 “Katrina”로 바꿔서 부르는데 독일말로 ’쇠사슬‘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래서 쇠사슬의 주님, 말하자면 루터가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두려워 한 사람이 없지만, 폰 보라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얼마나 억척스러운 사람이었느냐 하면, 마르틴 루터의 집에 항상 식솔이 득실득실 한 겁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와가지고 가르침을 받겠다, 아니면 순교당한 자녀들, 이런 사람들을 마르틴 루터는 수입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대학교수 때 월급을 조금 받는데 그것 까지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폰 보라가 도저히 안 되겠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도 좋지만 집안 살림을 어떻게 하나, 이 사람이 당당하게 프리드리히를 찾아갑니다. “제후여, 식솔들이 많아서 도저히 생활비가 감당이 안 됩니다. 나에게 돈을 좀 벌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무엇을 해주면 좋겠느냐” “양조장 허가를 내 주십시오” 양조장 허가를 받습니다. 전매특허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전매특허까지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하실에다가 맥주 공장을 차립니다. 하인들을 데리고 맥주를 만들어서 팝니다.
마르틴 루터는 집안 경제생활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해가지고 그 다음에 수입을 올려서 그 돈을 가지고 밥 해 먹이고 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새벽부터 일어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별명이 ‘모닝 스타 오브 비텐베르크’ 비텐베르크의 새벽별이었습니다. 얼굴도 못생겼겠다, 그냥 열심히 일만 한 겁니다. 그래가지고 억척스럽게 돈을 벌고, 열심히 일해서 남편의 종교개혁을 열렬히 후원했는데, 한번은 어떤 일이 있었느냐면 마르틴 루터가 사방으로 공격을 받으면서 종교개혁에 난관에 처해서 교회당에 가서 엎드려서 울고 있을 때, 이 때 카트리나가 완전 상복을 입고 나타납니다. 루터가 깜짝 놀라서 “어디 초상났어?” 물어보니까 “당신이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걸 보니 하나님이 오늘 아침에 돌아가신 것 같아서 오늘 내가...” 그럴 정도로 담대한 뭐 하나 눈 하나 깜짝 안하는 그런 씩씩한 대장부의 기질을 갖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사이에 뜨거운 사랑의 연합이 있었고, 루터가 자기 개인적인 글에서 무어라고 이야기를 했냐면 만약 내 아내, 카트리나가 죽는다면 어느 나라의 왕비가 와서 나에게 청혼을 해도 난 결혼 안 하겠다 그럴 정도로 카트리나를 깊이 신뢰했고 사랑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내고 마지막에 유언을 합니다. 여기서 멈추고 싶다고 그래서 이제 아이슬레벤에서 운구 되어 와서 여기서 영면에 들게 됩니다.
이 비텐베르크는 그런 점에서 커다란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리는 곳이고, 그리고 여기에서 일어난 이 위대한 일들로 말미암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동구 바깥으로 조금 나가면 거기에 루터가 교황의 교서를 불태우는 장소가 나옵니다. 거기가 뭐하는 데냐면 쓰레기 태우는 소각장이었습니다. 거기에 가서 10월 31일 그것을 발표하고, 그 해가 아니라 그 이듬해 였습니다. 6월에 마르틴 루터가 잘못됐다는 교서를 발표하고 파문장이 날아오는데, 그것을 12월 10일 쓰레기 소각장에서 많은 문서들과 함께 장작을 한 50cm쯤 쌓아놓고 불을 붙여서 했는데, 그건 뭐냐면 쓰레기가 아니라 말하자면 교황에 대한 화형형식 같은 것이었습니다. 화형 하는 것처럼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지르면서 마르틴 루터가 여기에서 작곡한 것이 “내 주는 강한 성이요” 그 전까지는 성도들은 가만히 있고, 말하자면 노래를 듣는 입장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같이 부르는 노래인데, 그 중에 최초의 곡 중의 하나라 “내 주는 강한 성이요” 그래서 그 찬송을 부르면서 ???를 행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이 비텐베르크는 이와 같은 많은 유서 깊은 사건들이 일어났고, 이 후에 이제 이 사이사이에 일어났던 신학적인 논쟁과 많은 논쟁들을 다른 기회에 설명하도록 하고, 이것으로써 비텐베르크에 대한 모든 설명을 마치겠습니다.
독일 비텐베르크의 루터의 생가
루터의 첨탑경험
녹취자: 조원정
여기가 마틴 루터가 살았습니다. 로마서에서 주님을 깊이 만났던 탑이 이겁니다. 저 꼭대기에서 성경을 묵상하면서 아주 뜨거워지는 그런 체험도 하는데, 로마서에 있는 서문을 읽다가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 요한 웨슬레입니다. 로마서는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역사를 일으켰던 본문입니다. 어거스틴이 회심한 것도 로마서를 읽으면서 회심을 경험합니다. (잘 안들려서 단어 몇 개 못들은 부분들이 있음)
프라하의 안톤 드보르작 동상 앞에서
그의 일화설명
녹취자: 조원정
그때 철도가 있었습니다. 드보르작이 기차를 타고 가는데 마음속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갔습니다. 갑자기 드보르작이 벌떡 일어나더니 기관사를 향해서 막 달리면서 차를 세우라고 사람들이 미쳤다고 그럴 거 아닙니까? 증기 기관차에 불 떼며 막 달리는데 어떻게 세웁니까? 빨리 세우라고 해서 어쨌든 브레이크를 잡고 세웠습니다. 세웠는데 사람이 내려서 보니까 저 몇 십 미터 앞에 누군가가 철로를 끊어 놓은 겁니다. 기차를 전복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땅땅땅땅 장단을 맞추고 가는데 장단이 틀어지기 시작하면서 기찻길에 위험이 있다는 걸 느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