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여행 주일설교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스 3:10-13)
녹취자: 박효준
아는 바와 같이 주전 605년에 이제 다니엘이 끌려가고 나라가 완전히 망한 것은 586년이었습니다. 유다가 이렇게 망함으로서 북왕국과 유다 모두가 하나님의 예언대로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상당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예레미야를 통해서 예언하신바와 같이 스룹바벨에 의해서 제 1차 바벨론 포로 귀환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때가 약 주전 538년경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상 나라가 망한 것을 계산하면 정확히 70년 정도 되던 해에 이제 스룹바벨이 1차 포로 귀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60년 정도 세월이 흐른 다음에 이 에스라에 의해서 두 번째 포로 귀환이 이뤄지게 되고 그 후 얼마 있다가 이제 느헤미야에 의해서 세 번째 포로 귀환이 이뤄짐으로서 이제 포로 귀환의 역사는 마무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 본문은 두 번째 포로 귀환에서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와서 그래서 성전에 건축을 시작하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보자마자 제사는 시작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다 부서진 성전의 터 위에서 이뤄진 일이었고 제대로 된 성전은 다 부서져 버렸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큰 도움 가운데 왕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전 건축이 이뤄지게 되었습니다. 건축을 할 때는 제일 먼저 기초를 놓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은 바로 그 기초를 놓는 성전 기공식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성전에 기초가 놓이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고 드디어 우리의 모든 소원이던 하나님의 성전이 다시 세워지는구나하는 감격 속에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지대는 이전에 있었던 솔로몬의 성전 시대보다 훨씬 축소된 아주 작은 규모의 성전이 건축될 것임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에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과 그리고 나이 많은 노인들은 그 기초석이 놓이는 것을 보고 통곡하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솔로몬의 그 첫 번째 성전을 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최소한 이 사람들의 나이가 그저 최소한 70세. 철이 들어서 그 성전에서 이뤄지는 일들의 의미까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80세 가까이 나이가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본 성전은 정말 화려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금값으로 계산해서 금만 약 320조 원어치가 들어간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화려한 성전이었습니다. 그 화려함과 규모는 놀라웠습니다. 거기서 지체들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경배를 드리던 기억을 갖은 이 노인들은 그 지대가 놓이는 것을 보며 통곡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조그맣게 축소된 저 기초를 갖고 우리들이 갖고 온 것들이 물자가 좀 있고 왕도 백향목을 보내줬다고는 하지만 그 물자를 갖고 지어본들 그 성전이 어떻게 그 옛날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에 있었던 그 성전의 영광을 따라갈 수 있을까? 경험이 많은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노인들이었기 때문에 이미 기초석을 보면서 앞으로 세워질 성전의 크기와 초라함을 가늠할 가수 있었습니다. 물론 성전이 전혀 없던 때에 조금이라도 성전이 지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고 또 성전이 그렇게 지어짐으로 하나님의 앞에 절기를 지키고 피 흘린 제사를 올리고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커다란 축복이었지만 그 지난 솔로몬의 영광에 비교할 때는 너무 가슴이 아픈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들의 마음 속는 이런 생각이 오고가지 않았을까요? “아! 왜 나라를 잃어버렸던가? 왜 우리가 결국은 이 예루살렘 성을 침략 당하고 성전의 그 모든 기명들이 이방인의 말발굽 아래 다 뜯겨 가고 그리고 그 성전이 모두 훼파되고 그 지역 자체가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간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불순종과 죄 때문이었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초라하게 놓인 성전의 지대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조상과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로 생활 속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그 말씀이 역사적으로 그대로 이뤄지기까지 신실하셨던 그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교차되는 가운데 그들은 깊은 상념에 잠깁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통곡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의미를 모르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전의 영광이 어느 정도인가 전혀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던 어린 세대들은 그것만 기쁘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해서 큰 소리로 기뻐하며 외쳤지만 노인들은 통곡을 하며 울고 있어서 이 성전의 기공식장에 이제 그 통곡하는 소리와 기뻐 외치는 소리가 물결처럼 함께 번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그 성경의 진수를 보면서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실제 있는 것에 전부가 아니고 또 우리가 그 이상의 것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있었던 모든 것은 아닙니다.
(예화) 저는 4년 전에 종교개혁 여행을 하면서 지금 일정하고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주 고단한 일정이었습니다. 제때에 식사도 못하고 심지어 새벽 4시 반에 호텔에 도착하는 일이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냥 그 여행을 하면서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여행을 했던 어떤 여행보다도 큰 감동을 받았고 그래서 “언젠가 한번 꼭 교인들을 대리고 여기를 와야겠다. 한번 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와서 여기에서 역사를 보고 주님의 교회가 어떠해야하는가를 알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기회가 되면 교회 안에 교회사 학교 같은 것들을 만들어서 그래서 교회 역사를 공부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돌아보시면 오늘 우리들이 믿는 이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그 주관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이렇게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이 편안한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이뤄지기까지 얼마나 많은 전쟁. 진리를 외치는 사람들의 수많은 죽음. 그것들을 둘러싼 음모와 모략 그리고 불의로 진리의 불꽃을 끌려고 하는 악한 마귀의 그 끊임없는 정동이 있었는가 하는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이런 역사를 통해서 터득한 매우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이 어떠하였는가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개신교의 바른 그 주변에는 항상 카톨릭의 타락이 있었고 그리고 그 속에서 참된 복음의 진리를 찾지 못해서 기갈 하는 영혼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진리는 모든 사람들의 것은 아니지만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진리를 외치면 그 진리에 목말라하던 어떤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그 진리를 붙잡는다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움직일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외치는 목소리가 어떤 때는 크고 우렁찬 천둥소리와 같고 어떤 때는 그것이 분명히 진리인데도 아주 가냘픈 비명소리와 같았지만 그러나 어느 시대에든 그 진리가 외쳐지면 하나님은 그 진리를 기다리던 사람들을 예비 하셨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살게끔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여기에 서 있기 까지 우리의 그리스도의 교회에 어떤 일이 일어났었고 어떤 시대가 영광스러웠고 어떤 시대가 초라했는가를 생각 하여야합니다. 초라하고 부패했던 시대를 돌아보면서는 마음의 깊은 경계를 얻어 우리가 살아가고 주님을 섬겨가는 이 시대가 오랜 세월에 흐른 다음 그런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지 않도록 생각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의 살아있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신앙생활은 개인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접 붙여진 모든 보편 교회의 모습을 결정합니다. 그 모습이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도록 사는 것은 우리가 구원 받은 이유이고 구원 받은 이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까닭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생명을 걸고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아무리 주님을 찬송하고 아무리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예배를 드리고 아무리 내가 확신하는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외친다고 할지라도 누군가 우리의 생명을 노려 죽이려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비난도 있고 오해도 있고 진리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모함도 있고 음모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삶의 질서를 조금 불편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지 옛날처럼 우리를 죽이거나 생명을 노리거나 죽인 우리를 다시 끄집어내어 부관 참시하는 일 같은 것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 처럼 자유로운 시대에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들이 이 자유를 즐기면서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이 자유를 어떻게 활용해서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이 교회의 시대를 300년 후의 우리 후손들이 우리의 신앙생활 하던 곳을 와서 그 흔적들을 살피면서 지금 우리처럼 감격하고 그리고 그리워하는 눈물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야 개신교를 핍박하는 카톨릭의 세력이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영웅적인 삶이 나올 수 있었고 그래서 순교자도 나오고 핍박도 있었고 그 핍박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도 있었고 그래서 우리에게 감동을 받는 것이지만 이렇게 자유로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그런 감동을 후세에게 남길 수 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핍박이 있었지만 카톨릭을 믿는 그 시대에는 그래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나름대로 기독교를 인정하던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무신론자들에 의해서 에워싸여 있는 시대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의 시대를 종교개혁의 시대가 아니라 그 무신론적이고 이단적인 그런 로마 시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외쳤던 사도들의 시대와 유사한 문맥에 있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모두 종교 개혁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보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의 오류만 찾아내면 됐었지만 지금 우리는 모든 사상에 “신이 없다.” 말하는 사람들에게 “아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그분이 진리라고 말하는 사실이 이렇게 이 우리가 사는 도덕세계 속에, 자연의 세계 속에, 학문의 세계 속에, 인간의 마음의 세계 속에 살아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하는 시대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종교개혁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보다 더 큰 신앙으로 무장된 가운데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배교를 하고 목숨을 건지든지 순교를 하고 신앙을 지키던지 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신앙과 불신앙의 경계가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완전히 신앙의 자유가 주워진 시대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지 아닌지 이정도면 예수 믿는 사람이 된 건지 안 된 건지 우리 자신도 의식이 없을 때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정말 주님의 영광을 들어내기 위해서는 종교 개혁 시대 때에 살았던 사람들 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하고 매일매일 십자가 앞에서 자신이 죽는 더 큰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100년이나 200년 혹은 300년 후에 우리들이 섬겼던 교회를 보면서 후세의 사람들이 정말 이분들이 남긴 신앙의 발자취가 아름답구나 하는 것을 알고 생각하며 우리의 삶을 비추어 자신들의 신앙을 측정할 수 있을 정도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이 일을 위해서 우리가 힘써야 할 일이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치열하게 이 많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진리가 아닌 것들과 싸워서 우리가 믿는 이 성경의 계시가 참된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우리들이 굳게 붙들고 살았는지를 그 흔적을 남기는 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지식의 형태로 남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책으로 남고 자라나는 세대에 교육을 함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지식으로 남기고 우리 뱃속으로 낳은 아이들에게 이 세상의 사조와 풍조를 공부하지만 그러나 진리가 그 안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이 아이들에게 교육을 통해서 남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전수되어 나갔고 흔적으로 남아서 그래서 이후의 세대들도 그 모든 지식 안에서 살고 그 지식을 추구했던 흔적들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이렇게 복음이 사라진 시대에 이렇게 진리의 말씀을 외치고 이렇게 진리를 치열하게 발견하고 여기에 자기의 삶을 부합시키려고 하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예화) 며칠 전에도 누군가가 와서 나보고 요즘 쓰는 책이 잘 팔리냐고 물어봅니다. 그래서 “한 15년 전까지는, 한 10년 전까지는 그런 관심이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관심이 없다.” “그 왜 그러냐?” “나는 예전에는 지금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글을 쓰고 설교한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많은 세대를 향해서 나는 글을 쓰고 설교를 한다고 생각 하니까 지금 나와 같이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나의 글이나 설교에 대해 알아주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고 오히려 날이 갈수록 그런 좋은 평판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높이 여김을 받고 이런 것들이 구역질나도록 싫다. 그래서 이제는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러면 뭐냐?” “200년이고 300년 이 흐른 뒤에 우리가 살아간 이 신앙의 이 역사. 그리고 내가 쓴 책들을 보면서 그 때는 신앙이 지금 보다 훨씬 더 쇠퇴할 텐데 그때에 누군가가 그 낡은 책들을 고서방에서 발견하면 그러면서 300년 전에 이렇게 복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치열하게 찾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고 함께 살도록 호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사실을 알려줄 수 있다면 하나님은 그 시대에도 그 지식들을 볼 쏘시개로 사용해서 그래서 사람들을 깨우쳐주실 것이다. 에드워즈의 낡은 책 두 권으로 로이드 존스를 깨워서 한국에 그의 책이 60여권이 번역이 되어 수많은 젊은 사람들을 일깨웠던 것처럼 얼마든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을 것이다.”
(예화) 영국에 있는 스펄전은 살아서 설교하여 회심하게 한 사람 보다 죽은 가운데 회심시킨 사람이 훨씬 낳고 지금도 그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회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고 합니다. 심지어는 어느 우편배달부가 소포로 싼 그 포장지가 스펄전의 설교집을 찢어서 싼 포장지였는데 배달하던 중 걸어가면서 그 글을 읽다가 그 우편물을 배달해야 될 그 집에 도착하기 전 길거리에 주저앉아서 울면서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정말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의 높은 진리. 우리가 우리의 선조들이 게을렀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했던 진리. 또 우리의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선배들이 발견했지만 우리들이 누리지 않고 있었던 그 진리들을 발견하여 그래서 교회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올바른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교회를 볼 때마다 사실 카톨릭은 얼마나 커다란 혼란을 느꼈겠습니까? 이 유럽 대륙 전체를 지배하고 있던 교회의 권위가 추락하고 이 도시, 저 도시 특별히 지각이 있고 학문이 뛰어난 사람들은 저마다 카톨릭에 대항을 하고 새로운 복음 신앙을 찾고자 하였음이 이때 카톨릭 교회가 경험했던 혼란과 수치심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놀랍게도 그들의 설교나 가르침이 잘못됐다는 것을 먼저 발견한 것이 아니라 너무 카톨릭의 부패하고 부도덕한 그런 생활들을 보면서 도대체 왜 사람들의 삶이 주일이면 미사도 드리고 희생을 드리는 저 사람들의 삶이 저렇게 방탕하고 타락할까? 그것이 의문이 되어서 추적을 해보니 그 뒤에는 거대한 진리에 관한 오류가 있었다는 것이 발견이 된 것입니다. 이 처럼 진리는 사람들의 눈에는 쉽게 띄지 않고 우리의 도덕적인 삶이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삶들이 우리의 삶과 우리의 진리가 인치를 보일 때 그 때에 그 진리에 자신을 의탁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박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기도해도 그것 때문에 우리를 잡아가지 않습니다. 그런 가운데 모든 환경들이 너무나 편안하고 부족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이 제공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안일해지고 나태해지고 그리고 작은 일에도 못견뎌하고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그런 삶. 우리들이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되면 결국 언젠가는 우리도 부패하게 되고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많은 은혜를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데 쓰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욕을 위해서 사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성전의 지대가 놓일 때에 통곡하며 우는 사람들과 기뻐하며 소리치는 사람들이 함께 있었을 때에 이것은 우리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줍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소리치며 기뻐하며 사는 사람들입니까? 우는 사람들입니까? 또 우리의 손에서 가르쳐지고 신앙 교육을 받게 되는 우리의 후손들은 정말 교회의 영광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런 종교개혁 여행은 어린 나이에 때. 최소한 고등학생 정도 된 나이 때 와서 돌아보면 신앙에 불을 지피고 일생동안을 주님을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를 결심하며 가는 좋은 기회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중요한 사명을 갖고 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온 마음을 다해서 비록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어둡고 비관적이지만 그러면 또 어둡기 때문에 진리의 불꽃을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이 그 사람들을 들어내실 수 있는 그들만의 기회라는 사실을 명심하면서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여러분 자신이 사용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