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 새교회 주일예배 4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5)
녹취자: 김혜진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한 이 시인은, 어떻게 하나님이해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실 수 있었는지를, 2절서부터 차례대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는 공급해 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소생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4절에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은혜 때문에 하나님을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5절에 와서는 시인이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5절을 오전 예배에 절반, 그리고 오후 마지막 예배에 5절 절반을 설교하고, 시간이 닿으면 6절을 해설함으로써 사경회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잔치집의 맥락입니다. 신랑 신부가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는 그날, 주인은 좋은 포도주를 내어 오고 술잔에 술이 가득 따라진 가운데 함께 축배를 들며 신랑신부의 결혼을 축하하는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환희 기쁨 희락 가슴 벅차는 감격 이런 단어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잡한 현대 생활 속에서 일하기를 강요당하고, 쉴 틈 없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도시의 생활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즐기고 내면의 가득 찬 기쁨으로 환희를 노래한다고 하는 것은, 현대인의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것처럼 보입니다. 더욱이 그 환희와 기쁨이 이세상의 먹고 입고 마시고 높은 지위를 누리는 외적인 것들 때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 그 분의 사랑, 인간이 육체적인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대해서 감격을 느끼는 이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은 마지막으로 신앙 때문에 큰 기쁨을 누려본 적이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와 사랑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환희의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언제 입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 시인이 이런 환희를 경험하고 커다란 기쁨을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고백하고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삶 전체를 의탁하며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제일 먼저 이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말입니다. 잔치 집에서는 주인이 좋은 포도주를 술잔에 넘치도록 흥건히 부어줄 때에, 사람들이 그 포도주를 바라보면서 기뻐하지만, 영적으로 본다면 이 잔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신 하나님이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영혼의 갈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이것을 가리켜서 종교의 시 라고 불렀습니다. 소위 세멘 렐레기아니스 라고 하는 종교의 시는 사람들이 모두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으며, 그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면 만족에 이르도록 채워 질 수 없는 영적인 갈망입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바로 그 인간 안에 있는 영혼의 진실한 갈망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이 긴장의 치열한 갈망을, 이 세상의 명예와 권세 육체의 쾌락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이세상의 사물에 대한 탐욕과 그리고 정욕으로서 이 모든 만족을 얻으려고 해 보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마치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치열한 목마름을 느낄 때 설탕물로서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해 보려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눈은 보아도 만족함이 없고, 가슴은 아무리 탐욕 하여도 마음속에 진정한 평안을 가져다 줄 수가 없습니다.
(예화)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서울에 북쪽 외각에 수유동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어느 의사가 병원에서 당직을 서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들이 택시에서 내리더니, 사람을 신사복을 입은 어느 젊은 중년남자를 데리고 와서 방금 쇼크로 쓸어졌는데 살려 달라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응급실에 눕혀놓고 진찰을 해보니 이미 가망이 없이 생명이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살릴 수가 없으니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고, 이윽고 얼마큼 시간이 지나자, 가족들이 응급실로 몰려와서 울고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가족들이야 자신의 남편 혹은 아빠가 죽었으니까 울고 불지만, 이 의사는 이 환자의 손을 보면서 궁금했습니다. 20여년을 넘게 의사생활을 했지만, 이 환자처럼 기묘한 모습으로 죽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대개 죽을 때에는 두 손을 펴고 운명을 하는데, 이 사람은 한 손은 펴고 한 손은 꽉 주먹을 쥐고 죽었어요. 그래서 도대체 저 주먹에 뭐가 있을까? 그리고 잠시 유족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 주먹을 쥐고 있는 한 손을 폈어요. 그랬더니 투두둑 하고 화토가 두 장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그 화토는 패를 볼 수 있도록 정면으로 땅바닥에 떨어졌는데, 이 의사가 두 개를 보는 순간 깜짝 놀라면서 “어, 삼팔광땡이네!” 사연인즉 이 사람은 지인이 상을 당하여 상가에 있었던 중 이었습니다. 밤새도록 초상집에 있었고, 거기에 온 사람들과 어울려 화토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 돈을 잃었습니다. 그러다 막판에 끝 발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이만큼 쌓아 놓았는데 패를 들었는데 이 패를 열어보니까 삼팔광땡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민화투 이외에는 화투를 칠 줄 몰라서 이 이야기를 듣고, 누구에게 도대체 이게 왜 이렇게 커다란 사건이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화투를 두 장씩 가지고 하는 게임이 있는데 약속을 하고 한 판에 얼마씩 배팅을 합니다. 그때 예를 들자면 만원씩 다섯 명이 배팅을 했다면 배팅을 하고 세 번까지 추가로 배팅을 할 수 있는데 한 사람만 참여 하고 자신의 패를 보고 질 것 같은 사람들은 더 이상 배팅을 안 하면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사람이 그 패를 열어서 누가 승자인지를 결정해서 그 사람이 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패가 두 개가 나오면 배팅한 금액의 두 배를 다시 더 내야 된답니다. 그리고 삼팔광땡이 나오면 약속에 따라서 배팅한 금액의 삼배내지 사배를 더 내야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이 이만큼 쌓였는데 이 사람이 펴보니까 삼팔광땡이 나왔어요. 그러니까 이 사람보다 더 높은 사람이 없으니까 여기에 쌓여있는 금액의 세배내지 네 배를 가져갈 수 있는 놀라운 패를 손에 쥐게 된 겁니다. 사람들이 자 이제 너의 패를 열어 보아라 고 말하기 시작했고, 이 사람 편 자리에 왔을 때 손을 열어보니까 삼팔광땡이어서 너무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죽은 겁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간 다음에 너의 아버님이 어떻게 운명하셨냐고 말할 때, 그 후손들은 참 썰렁 하겠지요. 우리 아버님은 일찍이 화토 두 장을 들고 너무 좋은 패가 나오셔서 충격을 받아서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웃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화토 두 장을 들고 삼삼삼 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이나, 손에 그보다 좀 더 큰 땅문서 집문서 이세상의 학위 같은 것을 추구하다가 죽는 사람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과연 그리 큰 차이가 있을까 한 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빈 잔을 주셨고, 이빈 잔은 하나님 자신의 사랑 하나님 자신의 은혜가 아니면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빈 잔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사랑을 받음으로써만 만족에 이를 수 있는 그러한 빈 잔인 것입니다. 이 시인은 비록 시련과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고 환난과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의 인생의 나래는 역경과 그리고 고난이 그치지 않았고, 그의 심령 속에도 평안이 오래 계속되는 날이 없을 정도로 수많은 환란과 전쟁이 역경들을 거처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거룩한 기쁨이 가득 차는 희열을 누렸습니다.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원수들이 자기를 에워쌀지라도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영혼의 놀라운 환희와 기쁨이 그의 심령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하나님께서 자신의 빈 잔을 가득 채우셨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인이 어떻게 해서 자기 안에 있는 빈 잔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득 차는 기쁨을 누렸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들은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하는데, 크게 보면 이렇게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은,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때문에 이러한 충만한 채워짐을 경험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한 번 이 세상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언제나 기쁘고 행복한 날만 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보험을 드는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결코 어떠한 사고도 재난도 죽음도 시련도 오지 않는다면 보험을 드는 것은 아마 낭비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험을 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생의 내일이 언제나 평안한 오늘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보험은 우리가 정말 시련을 당하고 재난을 당했을 때에 우리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고 우리의 인생이 잠시 흔들리지만, 뿌리째 뽑히지 않도록 우리의 인생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불쌍할까요? 오늘처럼 날이 좋고 그리고 바람도 불지 않는 날에는, 춤추고 노래하며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폭풍이 몰아치고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 저편으로 떠나고, 내가 신뢰하고 믿었던 것들이 사라지고, 홀로 외톨이가 되어서 남는 날에는 그들은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당신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시련과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을 지극히 불쌍하게 여기시고, 실제로 그들은 자신 안에 있는 힘으로서는 이런 시련을 이겨나갈 수 없고, 혹시 이겨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뜻을 따르는 인생으로는 까지 나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도 이렇게 영혼의 채워지지 않는 빈 잔을 가지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사랑이야기를 들려주시고, 그들을 당신의 사람으로 돌아오도록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바로 이 사랑을 전하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이렇게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지는 기쁨은 하나님 없이 홀로 살아가는 외톨박이의 인생으로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며 살아가는 하나님 자녀의 삶이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좁게 보면 시인이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진다고 고백했을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채워졌다고 고백을 한 겁니다. 원수의 목전에서 자기에게 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기름으로 그 머리에 발라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저는 오늘 오전에 전반부를 말씀드리고, 오호의 시간을 가지고 나머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셨기 때문에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을 했는데 우선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여기에 나오는 상이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슐한이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영어의 이팅테이블(eating table)입니다. 즉 음식을 먹는 식탁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늘날 미국 사람처럼 큰 식탁에 정자세로 앉아서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야트막한 소파에 딸린 탁자처럼 넓은 탁자가 있고, 그리고 바닥에 혹은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어 옆에서 있는 음식을 찍어 먹었습니다. 이러한 문화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탁은 낮고 아주 커다란 식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식탁을 나누는 것이 그냥 단순히 살기위한 영양을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생명적인 교제를 나누는 그러한 관계를 의미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함께 식탁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형제 됨, 브라더후드(borhter hood)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문맥은 사실은 구라파 보다는 오히려 한국의 문맥에 매우 가깝습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에 큰 집에서 살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식사 때마다 하나의 식탁이 차려지는 것이 아니라, 꽤 여러 개의 식탁이 차려 집니다. 열 명 스무 명 혹은 더 많을 때에는 사십 명도 한 집안에 살았다고 하니, 그 사람들이 다 모여서 밥을 먹을 수 있는 방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식탁이 신분에 따라서 각기 다르게 차려지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아버지 이런 분들은 안방에 별도로 식탁이 차려지고, 그 위에 올라가는 식품들의 수효나 그리고 품질도 다릅니다, 그리고 건너 방에 다시 식탁이 차려지고 거기에는 어머니 혹은 삼촌 고모 같은 사람들이 밥을 먹고, 그리고 다시 마루로 나오면 거기에는 이제 또 다른 식탁들이 차려지고, 마당에는 종들이 밥을 먹고, 그리고 며느리들이 마루에서 밥을 먹습니다. 이러한 룰은 좀처럼 깨지지 않습니다. 그러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안방으로 들어가고 나의 아내를 남겨놓고 나는 어머니 아버지와 함께 안방에서 식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신분에 따른 질서에 따라 각각 다른 밥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서는 예전에 소위 약간 귀족에 속하는 양반들이 있었습니다. 양반이 상황이 어렵게 되면 상민들과 함께 잠은 잘 수 있었지만, 함께 식탁을 받는 예는 없습니다. 함께 잠을 자는 것은 가족이나 형제가 아니어도 가능하지만 함께 식탁을 받는 것은 형제 됨이 아니면 그 식탁을 함께 나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사 관습을 배경으로 이 이 시인이 이 상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시인은 자신이 인생을 살아오는 모든 날 중에 하나님이 자신과 어떻게 가족과 같은 친밀함을 유지 했으며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식탁을 차려주신 이 경험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인은 비록 어린아이와 같고 때로는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곧 멸망할 사람처럼 연약하였으나, 하나님의 가족이었고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라고 여김을 받으시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식탁을 차려주어 함께 식탁을 나누며 가족관계를 모든 원수들이 보는 면전에서 확인 시켜 주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족은 운명 공동체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에게 가족이 있다면, 여러분 눈앞에서 여러분의 가족이 누군가에게 매를 맞거나 모욕을 받고 있다면, 여러분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의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여러분의 실력을 행사할 것이고, 그리고 여러분의 권한을 행사할 것입니다. 때로는 여러분의 목숨을 걸고 여러분의 가족을 지키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가족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손해를 보거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여러분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관심은 갖겠지만 목숨까지 걸고 그를 도와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족관계와 가족관계가 아닌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이 친밀한 관계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식탁을 차려주신 것으로 묘사하였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20여 년 전인데 저는 이 시편 23편을 히브리어성경으로 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고는 커다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차려 주시고 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말로 ‘아라크(ךרא)’라고 되어 있는 이 단어는 원래 영어로 말하자면 어레인지(arrange) 혹은 ‘줄을 세우다.’ 혹은 ‘많은 물건을 정렬하다.’라는 뜻인데, 구약 성경에서는 군대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많은 군사들이 오합지졸로 모이는 것이 아니라, 행오를 지어서 질서 정연하게 모이는 것을 가리켜서 아라크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이 시인이 받았던 이 밥상이 평범한 밥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커다란 상에 먹을 것이 잔뜩 차려진 화려한 정찬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예화) 저도 목회를 하니까 가끔 교인들을 심방하게 됩니다. 심방할 때 제일 미안한 것은, 그 집에서 직접 자기네 집에서 음식을 만들어서, 차려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먹을 때는 조그마해 보이는 음식 하나도 주부들이 그것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들어가는가를 알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늘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집에서 음식을 만들지 말고 그냥 간단하게 갈비탕이라도 사서 먹으면 충분하고, 또 먹는 것에 너무 치중하지 말라고 권면을 합니다. 그런데 한 10년 전쯤 그렇게 말렸는데도 굳이 음식을 준비하겠다고 그렇게 한 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을 심방하러 갔습니다. 말씀을 잘 전했고 이윽고 식탁이 들어오는데 세 사람이 상을 들고 들어오는데 어마어마해요. 이쪽서부터 저쪽까지 내가 손을 뻗어도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질 않는 정도로 큰 상이예요. 그걸 받는 순간에 고마운 마음보다는 마음이 너무 상했어요.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이라고 한 끼를 위하여 이렇게 많은 수고를 하며 이렇게 음식을 준비했나 하는 생각 때문에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다. “왜 이렇게 까지 하냐? 이 음식을 만들고 고생할 시간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더 좋지 않겠느냐?” 그랬더니, 자매님이 약간은 삐치면서 “목사님 기도도 했고, 성경도 읽으면서 했거든요. 그러니까 아무소리 하지 말고 드세요.” 이거를 어떻게 준비 했냐 그랬더니, 일주일 전부터 준비하기 시작했고, 삼일 전부터 구체적으로 만들기 시작 했대요. 제가 일생에 받아본 최고의 식탁 이었어요. 그러면서 그 자매하는 말이 목사님이 이제 일평생 우리 집에 오는 것이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텐데, 한 달 동안 기도하면서 이 음식을 준비했다는 겁니다. 참 마음속으로 눈물이 났어요.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인데 저렇게 한 끼 식사를 위해서 고생을 했을까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어쨌든 식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상이 너무 커서 젓가락을 아무리 뻗어도 상이 닿질 않으니까, 자신이 저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원하는 것을 집어다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집에 온 사람이 중요한 사람인지 하찮은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전라도 쪽으로 내려가면 음식문화가 굉장히 발달했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거기는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부자들이 많았고 새로운 음식에 대한 탐구가 역사적으로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한 번은 그 쪽 지방으로 설교를 하러 갔는데, 그 교회 장로님이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한 식당에 데리고 갔습니다. 한 30분차를 타고 갔는데 한식을 차려주는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덟 명이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한없이 나와요. 삼분의 일 정도 식사가 나왔는데 저는 이미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었어요. 조용히 앉아서 도대체 이 상에 그릇이 몇 개나 나오는지 세기 시작했어요. 그랬더니 여덟 명 밥상에 정확하게 이백 개의 그릇이 나왔어요. 나가고 들어오고 나가고 들어오고 하면서, 그런데 가격도 그렇게 비싸지 않았어요. 한 15년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저 미국 돈으로 15달라내지 20달라가 약간 되지 않는 그런 금액이었어요. 가고 싶지요. 오세요. 다시 말해서 말씀드리고 싶은 요점은 이것입니다. 이 식탁이 어떤 식탁이었는지는, 손님이 그 주인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만 더 예를 들어 보십시다.
(예화) 여러분이 인제 시집을 갔습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습니다. 처음부터 엄마가 그 남자한테 시집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제 전화를 했습니다. 엄마, 우리 신혼여행에서 돌아왔어! 아, 그러니? 잘했구나, 오너라. 우리 내일 점심때 갈게 엄마! 그래 오너라. 엄마, 우리 꼭 밥 차려 줘야 돼! 그래, 걱정 말거라, 오너라. 그래서 인제 하룻저녁을 자고 그 다음날 아침, 아침을 먹자 그러는 남편에게 말했어요. 여보! 사위 사랑은 장모라고 했잖아! 엄마가 오라고 했으니까 점심을 많이 차렸을 거야. 아침은 그냥 건너뛰고 가서 점심을 맛있게 먹자! 그랬어요. 밥하기 싫으니까. 그래서 인제 남편을 데리고 친정에 갔어요. 벨을 누르고 들어가니까 엄마, 우리 왔어요. 어, 그래 왔니? 그런데 집 분위기가 이상해요 뭐 아무것도 음식 하는 냄새도 안 나고, 엄마는 안방에서 베개 베고 홀로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엄마 우리 왔어, 배고파, 밥 줘! 그래? 그래 잠깐만 기다려라. 부스스 하고 나가더니 엄마가 상을 차리는데, 누가 많이 퍼 먹다가 만 밥 두 그릇 이렇게 놓고, 숟갈 젓가락 이렇게 놓고, 귀퉁이가 깨진 작은 소반에다가 아무래도 신통치 않았는지 밥을 보시더니, 거기다가 찬물을 계속 붓기 시작했어요. 그리고는 그 다음에는 상을 갖다가 사위하고 딸 앞에 딱 놓았는데, 반찬이라고는 무수한 젓가락의 공격을 받은 흔적이 있는 고추장 하나예요. 그리고 먹어라 하고 탁 갖다 놓는데, 밥의 물이 상위로 찍하고 쏟아 졌어요. 이런 상황은 뭘 보여 주냐 하면은, 나는 네가 내 집안에 사위로 들어온 게 너무 슬프다. 내 딸이지만 저런 남자하고 신혼여행을 갔다 와서 내게 인사 오는 것이 너무 괴롭고 삶의 의욕이 없다.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받은 식탁은 어떤 식탁이었습니까? 노예나 하인들이 받는 식탁이 아니라, 정말로 먼 길을 떠났다 돌아온 아들을 위해 온 집안의 하인들을 동원하여, 그리고 온 가족이 힘써 만든 잔치 상이었습니다. 아라크의 밥상 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이 시인이 얼마나 소중한 아들이었는지, 얼마나 사랑하는 아들이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탁을 받았기 때문에 이 시인은 가슴이 벅찼고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충만하게 차서 넘치는 기쁨과 환희를 느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설교를 했더니 어떤 사람이 물어요. 목사님! 정말로 하나님이 밥상을 하늘에서 다윗에게 기적적으로 내려 주셨을까요? 이 사람은 아마 온갖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커다란 밥상이 밧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문학적인 상상력이 없는지,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되냐구요. 여러분은 그런 밥상을 하늘로부터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자신의 마음속에서 확인한, 자기를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쓰러지고, 때로는 불순종하고, 때로는 하나님께 반항하면서 살았지만
(찬양)
어디선가 들이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는 하나님 없이 홀로 버려진 것 같았고,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고난을 당할 때에는, 자기 혼자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망의 음침한 그 골짜기에서 하나님은 지팡이와 막대기로 이 시인을 지켜 주셨고, 어디서든지 하나님은 이 시인과 함께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드디어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벗어나게 되었고, 하나님은 이 시인을 위하여 커다란 말씀의 식탁을 차려, 마치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에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린 받은 것 같이 생각되었지만, 이 거대한 식탁 앞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가족이라는 것 시련과 고난을 당했으나, 하나님은 자기를 자녀처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셔서, 이 원수들의 손안에서도 자기를 지켜주셨다고 하는 것을 절실하게 경험하며, 하나님 한 분만이 자신의 목자이시고 보호자이신 것을 체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식탁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차려주신 영혼의 식탁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온 인생살이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언제나 평탄한 길을 걸어왔습니까? 아닙니다. 돈 있고 건강할 때에는 언제나 행복했습니까? 아닙니다. 시련과 고난이 넘칠 때에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해 주실 때에는 눈물을 흘리며 인생의 골짜기를 지났지만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멀리 떠나셨을 때에는, 모든 것이 있어도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가난하고 목마르고 곤고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행복이라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그러면 우리가 그런 인생의 시련을 만나고 곤고하였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커다란 성찬의 식탁을 우리에게 차리셨고, 그것이 어떻게 새 힘을 주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주시되, 언제나 우리의 인생이 곤고할 때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양식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매일매일 물질인 이 음식을 섭취해야지만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필요한 양식을 섭취하여야지만 영혼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육체는 물질인 음식을 취하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진리를 섭취함으로써 그것을 양식으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고 그 분의 말씀을 들으며 우리의 모든 교만을 꺾고, 그 분의 뜻 앞에 우리를 굴복시키는 것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의 양식을 진리를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자의 행복한 삶은 육체의 힘과 영혼의 힘이 조화를 이루고 그리고 육체가 영혼에 의해 장악된 삶을 사는 것이 이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입니다. 신앙으로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성으로 그 진리를 탐구하면서, 우리의 정신에 새로운 힘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가 너무 지쳐있고 힘들 때에, 아무 음식을 먹을 생각이 없을 때에, 한 끼 만 맛있게 먹고 나도 우리의 몸에 힘이 솟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이 너무 곤고하고 힘들 때에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으로도 우리의 삶에 활기와 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섭취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은혜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 은혜를 유지하기 위하여 진리의 말씀을 받아야 하고, 미끄러져 침체에 빠졌을 때에는 그 영혼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을 위한 최고의 봉사는, 이렇게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말씀을 곤고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어, 그들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하나님의 그 은혜로 가득 채워져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한번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이후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인생길을 우리의 힘으로 살아왔다고 믿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것을 알 때에만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모를 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셨고, 우리의 인생 중 가장 홀로 있는 것 같은 위기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인생을 지켜보셨고, 우리를 붙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인생이 벼랑길에 비탈에 서있는 것 같은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께서는 곤고해서 더 이상 걸어갈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의 엎드러진 길에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이 일을 해주셨습니다. 곤고할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보내어 우리의 주린 영혼을 먹이셨고, 시련에 처하여 갈 바를 알지 못할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인생의 갈 길을 분별하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고 우리가 착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어둠속을 헤매는 우리들이 너무 불쌍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당신의 말씀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어두운 마음의 눈을 뜨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으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회개 하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만들어 주셨고, 그 말씀 속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나마 붙들고 여기에 까지 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 굽이굽이 우리의 인생의 필요한 시기마다 은혜를 주시지 않으셨다면, 짐승과 같은 나를 깨우쳐 진리의 말씀에 눈을 뜨게 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주님을 배반하고 이 세상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신실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갈 짐승과 같은 우리들을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당신의 큰 손으로 붙드시기를 마치 철없는 어린 양을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는 목자처럼,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해 오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날들 중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받지 않았던 날들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회고할 때마다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걸어오면서, 넘어진 것은 우리 자신이 넘어졌지만, 일으켜 주신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셨고, 비참한 일을 만난 것은 대부분 우리의 죄 때문에 만난 것이지만, 그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에 우리를 거기서 건져주시고 위로해 주신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찬양)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성령 충만하고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길 때만 함께 해 주신 것이 아니라, 어둠속에 울고 있을 때, 견딜 수 없는 슬픔으로 비참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언제나 찾아 오셔서 여러분의 눈에 흘리는 눈물을 씻겨 주셨고, 그 슬픔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세상의 친구들이 모두 우리를 버리고 외톨이가 되었을 때에도, 끝까지 우리의 옆에 함께 계셨던 분은 우리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이 그렇게 자신을 위해 큰 식탁을 차려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만족이 어디서 오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 지고자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잃고도 얻을 수 있는 행복은 결코 진정한 행복일 수 없고, 하나님 없이 우리들이 누리는 이 행복은 언젠가 우리를 찌르는 칼이 될 것이고, 우리의 가슴을 꿰뚫는 화살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우리의 육체를 그 정과 욕심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찾고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고난의 골짜기를 지나고, 시련의 폭풍을 지나면서도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의 원수들이 보는 눈앞에서 큰 식탁을 차려 주시므로, 이 시인이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과 그리고 당신이 이 시인과 운명 공동체라는 것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원수들이 이 시인을 해치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도전이었고, 하나님이 무력으로라도 이 시인을 지키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까요? 여러분이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사랑을 나누는 친 아들딸로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여러분이 지은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로운 형벌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찔림은 여러분의 허물을 위함이요, 그가 상함은 여러분의 죄악 때문인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은 목자 되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혹은 신앙생활이 느슨해지고 불순종의 길을 걸어가므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곤고하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여러분에게 이 밥상이 필요한 때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허리띠를 풀고, 곤고하고 굶주린 여러분의 영혼이 진리의 말씀을 맘껏 먹고, 주 하나님을 여러분의 목자로 모시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영혼의 빈 잔이 오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져, 다시 한 번 주님과 함께 손잡고 이 고단한 인생의 길을 승리하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오늘도 여러분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
오늘 이 인격적인 목자 되신 하나님께 돌아와 주님과 함께 승리된 삶을 살 수 있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