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틀란타 새교회 주일저녁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5-6)
녹취자:이병두
시인이 자신의 영혼의 빈 잔이 가득 차 넘친다고 고백한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라고 오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기름으로 시인의 머리에 부으셨기 때문에 시인의 영혼의 빈 잔에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름부음은 바로 오늘날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충만하게 부으실 성령의 은혜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 기름부음은 하나님께서 세 가지 직분의 사람들을 세우시는데 사용된 방법이었습니다. 첫째는 왕이었고, 두 번째는 제사장 이였고, 세 번째는 선지자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다스릴 왕을 세우시고, 하나님의 계시를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선지자를 세우시고,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빌며 제사를 올리는 제사장을 세우실 때 이렇게 세 직분을 세우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기름 부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선지자이기도 한 사람으로서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는 일생동안에 세 번의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아마도 이 시인에게 가장 강력한 인상을 준 것은 첫 번째 기름부음을 경험할 때였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다윗을 구별하여 세우며 기름을 부었고, 선지자의 기름부음을 받을 때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히 임하고 권능이 함께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시대의 성령의 역사와 신약시대의 성령의 역사 사이에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신약시대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중생과 함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고, 이렇게 우리에게 오신 성령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모두 임하는 것은 아니었고, 특별히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이 있는 사람들에게 임했으며,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들을 하게 하시는 동안 성령과 함께 하셨고, 이 성령은 그 개인을 떠나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충만한 기름부음을 통하여 기름 부음 받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이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되고 놀라운 지혜와 용기,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능력을 수여받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성령의 능력이 충만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직분, 왕과 선지자와 제사자등의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중요한 필수요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충만한 역사는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은 물론이고, 특별히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소를 짓게 하실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장인들에게도 이런 놀라운 성령을 부어주셔서 지혜롭게 하시고 기술에 있어서 뛰어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이 충만히 기름부운 자에게 임할 때 그것은 놀라운 지혜와 능력, 권능,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용기와 담대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친밀함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을 늘 사랑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착한 하나님의 자녀였으나, 이 기름 부음을 통하여 그가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고 충만한 영광과 권능을 누리며 하나님 앞에 살았다고 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이런 충만한 은혜와 권능을 한 번에 누리게 되었고, 이것은 바로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령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신약시대 모습의 한 예표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의 마음속에 영혼의 빈 잔이 가득 넘쳐 희열과 환희의 삶을 살게 하였던 그 궁극적인 원인은 바로 성령이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원리는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과 은혜는 신령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이 신령한 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 되십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매일매일 은혜를 구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충만한 하나님이 은혜와 놀라운 사랑, 우리의 정신과 마음이 온전히 구별된 가운데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하나님을 향한 절실한 삶은 모두 성령의 충만한 은혜와 구별하시는 역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성령의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성령이 충만함을 여러분은 목말라하고, 또 그리워하는 있는지 제가 여러분에게 묻는 것입니다.
저는 21살에 회심했고, 회심하기 전 저는 이 세상 속에서 방황하는 한 젊은이였습니다. 15살 때까지 교회에 다녔지만 회심이 없었고, 교회의 모순된 모습을 보며 저는 공동체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정말 혹독한 사춘기를 겪고 많은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어린 나이에 짊어져야 했습니다. 나의 구원의 길은 부지런히 독서하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작품들은 나와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의 고민이 무엇인지를 내게 가르쳐 주어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사상가들과 많은 철학자들의 글들은 이런 인생의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어떤 것이지를 나에게 알려주었습니다만, 그것이 내 인생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살아있는 것이 무섭고 두려웠고, 오늘도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었기 때문에 발아래 구르는 돌멩이 하나, 길섶에 피어난 풀꽃 하나를 저를 부러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쓸모없는 인간을 사랑하셔서 주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게 하셨고, 저는 그 젊은 나이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만났습니다. 그때 저는 비로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과 그 하나님이 하늘 높이 계실 뿐만 아니라, 나 같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해 가을은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교회에 20분이 1도 안 되는 작은 교회당에 스스로 걸어 나갔고, 제가 갔던 그날은 수요일 저녁이었는데 이십 여명의 성도들이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누덕누덕 기운 방석을 깔고 앉아서 삐거덕 거리는 풍금 소리에 맞춰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그 예배당은 초라하고 아주 작았지만 그때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안이 무엇인지를 경험 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집에서 저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로 다짐하였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주님을 영접했고, 이제는 나의 생애에 어떤 일이 있어도 좋으신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기로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얼마 후에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세례를 전혀 원하지 않았지만, 목사님의 강권으로 문답을 거쳐서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주님을 떠나 살던 죄인이 우리 주님과 결혼을 한다고 생각하니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우리 예수님의 신부됨에 감당할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과 떨림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저희 집에서 교회까지는 약 30분 정도 걸어야 하는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매일 저녁 들판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 교회당에 갔습니다. 그리고 불 꺼져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고 나 같은 죄인이 세례를 받아도 되는지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크게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방탕한 삶을 산 것은 아니지만, 저는 글줄께나 읽는답시고 하나님을 모질게 거부했고, 부인했으며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의 글을 칭송하면서 젊은날을 보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책임질 줄 모르는 겁쟁이들이 선택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오히려 예수를 착실하게 믿고 있는 동생에게 거짓된 많은 사람의 이론들을 퍼트려 신앙을 버리게끔 만든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일주일을 매일 저녁 나가 촛불을 켜놓고 좋으신 우리 하나님께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주님께 빌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들으셨고 세례 받을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날 11월 어느 날 추수 감사주일이던 날, 저는 세례를 받았고, 그때에 하나님 앞에 세례를 받던 순간이 지금도 기억에 납니다. 예배가 마친 후에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우리들에게 할아버지 목사님은 세례를 베풀기 시작하셨고, 제게 오셔서 그 물을 제 머리에 바르시며 ‘내가 예수를 믿는 자 김남준에게 성부와 성자의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에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생전 처음으로 신기한 것을 경험했습니다. 목사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손을 만지셨을 때 갑자가 하늘로 부터 놀라운 기운이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온몸을 포근하게 감싸는 따뜻한 기운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려오기 시작했고, 그것이 내 몸을 가득 채우자 내 몸 전체는 마치 깃털처럼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저는 예배가 끝난 뒤에도 한참 동안을 엎드려 눈물을 흘렸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성도들도 거의 모두 흩어진 때에 저는 세례를 받은 신자가 되었고, 그렇게 많이 눈물을 흘리고 성령의 은혜를 체험하고 났을 때, 이전에 내가 품었던 인생에 대한 야망과 욕심은 모두 사라지고 소원이 있다면, 오직 나같이 더러운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용서를 받았으니 이제 내가 얼마나 살든지 살아있는 날 동안에 이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나의 최선의 것을 바치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마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
그 후로도 살면서 여러분에게 다 말씀드리고 싶지 않은 그러한 충만한 성령이 체험을 반복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때마다 각각 다른 상황에서 다른 경험을 제게 가져다주었지만, 결과는 언제나 똑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게 만들었고, 우리 주님 앞에 순결한 사람이 되겠끔 제 마음에 소원을 주었고,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수만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나에게는 괜찮다라고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어찌 저에게 적용되는 진리이겠습니까? 오래 교회에 다녔지만 이런 성령이 깊은 체험이 없는 사람도 신앙생활을 하지만 제멋에 겨워하는 사람들, 주님께 인격적인 승복을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 주님의 사랑,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앞에서 자기를 다 버리는 신앙의 체험이 없었던 사람들을 저는 자주 만납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성령의 깊은 은혜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성령, 죄인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시는 성령, 우리로 하여금 모든 하나님의 계명에 온전히 순종하며 살게 싶어 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성령, 이런 체험을 마음속에서 충만하게 할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의 충만함이 있었기 때문에 이 시인은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인은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을 소유한 사람이었고, 어는 목사님의 계산에 의하면 다윗이 하나님께 바쳤던 금만 오늘날 화폐로 환산할 때 120조 원어치였다고 합니다. 아마 역사상 이 사람처럼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물질을 넘치도록 바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온 소유를 다 드려 하나님을 위해 살았고, 한 나라의 지존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 갈 때는 언제나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생각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인간의 방법과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성도들을 행복하게 하는데 몰두하는 대신 우리 모두 마음을 쏟고 주님의 교회에서 하나님 앞에 이러한 성경의 놀라운 은혜를 하늘을 열고 충만히 부어주시도록 간구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날까? 무지한 자들에게 하늘을 열어 진리의 말씀을 보이시고, 성령께서 그 진리의 말씀으로 저희들의 심령 속에 실어날러 그들의 마음을 깨뜨리고 변화시켜 새 사람을 만드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면, 그래서 그들 모두 하나님 앞에 변화 받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게 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이 세상에 일어날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이 성령의 은혜를 당신의 교회에 충만히 부어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 은혜는 원래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주신 것인데, 아들에 부어주신 이 성령의 은혜가 그의 신부가 되는 교회 위에 전달되고, 우리는 모두 그의 몸에 접붙여진 지체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에 부어주신 그 성령의 은혜에 우리를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시때때로 여러분은 마음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이 은혜를 간절히 구하여야 합니다. 한 순간도 주님이 나를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없고, 주님이 나를 주님의 강한 손으로 사로잡아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내 뜻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이라고 고백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가장 커다란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자기의 자녀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들이 하나님이 은혜를 구하며 아버지 앞에 기도할 때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만족은 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부터 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만족은 세상에 있는 것으로 부터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으로 부터 우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수도사 토마스 아퀴나스라고 하는 인물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늘 금식하고 밤을 새우며 눈물로 기도하는 이 사람의 기도를 보시고,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셨답니다. ‘사랑하는 종 나의 아퀴나스야! 네가 나에게 무엇을 구하느냐?’ 그러자 아퀴나스는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밤을 새우며 금식을 하며 고행을 하며 눈물로 나에게 기도하느냐?’ 이때 그는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저에게 무엇을 주고 싶으시다면, 당신 자신을 저에게 주옵소서. 저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은 저의 것이옵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주님 자신을 우리들이 충만하게 소유할 때까지는 우리는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혜는 바로 이 하나님을 충만하게 소유하는 길입니다. 이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마지막 6절은 시편 23편 전체의 결론 부분입니다. 이 결론 부분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리라’고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고 산다고 고백했고, 왜 그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실 수밖에 없는지를 2절부터 5절까지 천천히 고백했습니다. 이런 고백을 하나님께 올리고 나자 그에게는 미래에 대한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여러분, 혹시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져 보신 적이 없습니까? 미래에 대한 염려와 모든 불안은 미래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래에 대한 염려와 모든 불안은 지금 하나님과 올바른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사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과 온전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 분의 모든 뜻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분을 사랑하며 성령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은 미래가 두렵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미리 알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성령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가르쳐 주시고, 어떤 의미에서 아낌없이 진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만 안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에 될 일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간혹 하나님이 그런 일들을 당신의 종, 선지자들에게 베푸신 적이 있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별한 신앙을 위한 제한된 경우였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미래에 될 일을 당신이 사랑하는 종들에게 조차 감추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면, 좋은 일들이 일어날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고, 나쁜 일을 일어날 것을 미리 알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어는 경우에도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가르쳐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전심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며 살도록 지켜주십니다. 전심으로 하나님 한분을 믿으며 살도록 도와주시고, 지켜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이 시인도 이렇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충만한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자랑하였지만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떤 시련을 만나게 되고, 어떤 행운을 만나게 될지 그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아는 것이 하나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평생에 선함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하는 고백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기를 영원히 따를 것이다’라고 하는 믿음이었습니다. 따를 것이라고 번역된 ‘라다프’라는 히브리 단어는 마치 비행기가 날아갈 때 미사일을 쏘면 비행기가 그 미사일을 피하고 피해도 그 미사일이 계속 그 비행기를 따라 가다가 결국은 그 비행기를 격추시키는 그러한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추격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어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어떤 시련의 계곡을 통과할 지라도 자신이 멈추게 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기를 끝까지 따라다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 선함이라고 번역된 히브리말로 ‘토브’라고 하는 단어는 원래 좋다 그런 뜻입니다.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것이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할 때, 그 좋았더라가 바로 토브입니다.
이 좋았더라, 좋은, 혹은 선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기준이 있어야 됩니다. 그 기준이 있어야지만 그 선하다는 것이 항구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선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이 의도하셨던 그것이 바로 선입니다. 저는 이 교회를 와서 보면서 참 목사님이나 장로님들이 고생 많이 하셨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원래 빈터에 집을 짓는 것 보다 다시 리모델링하는 것이 어떤 땐 돈도 많이 들고 고생도 많이 하게 됩니다. 저도 사실 해봤습니다. 지금의 있는 교회당으로 옮겨올 때 리모델링을 하게 되었고, 그때에 사람들 시켜서 일을 해보니까, 내버려뒀다가는 일이 안될 같았습니다. 그래서 1,2주일 있다가 제가 군화를 신고 작업복을 입고 새벽기도 끝나고 나서 약 석 달 동안 교회 건축을 직접 지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의 자문도 받고, 책도 읽고, 잡지도 보면서 계속 공부하면서 건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잘 리모델링을 했고, 그러고 나서 언젠가는 기독교계의 신문에 잘된 리모델링의 교회사례에 특집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보면 그때 리모델링 한 것에 대해서 거의 후회가 없고, 왜 이런 공간을 이렇게 했을까 하는 후회가 거의 없이 정말 그림처럼 환상적으로 리모델링이 완성되었습니다. 설계도도 없이 리모델링을 했는데도 정말 아름답게 완성이 됐습니다. 그 때에 저는 이 창조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마음속에 이 창조세계에 대한 그림은 있었지만 아직 창조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그대로 실현이 되었을 때 영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현이 되었을 때에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만족하고 기뻐한 표현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집을 잘 지어 놓았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사람들을 거기에 들여보내어 거저 살게끔 혜택을 베풀어 주었다고 칩시다. 그리고 사람들을 거기에 들여보내어 거저 살게끔 혜택을 베풀러 주었다고 칩니다. 그때에 주인이 그 집을 지어 놓은 의도를 잘 이해하면서 가는 곳마다 주인이 그렇게 집을 지어 놓은 것을 기뻐하고, 칭송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집에 살아서 그 집을 알뜰하고 살뜰하게 잘 가꾸면서 산다면 주인의 마음에 큰 기쁨이 되겠지만, 주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유리창을 깨트리고, 아름다운 화단을 뒤엎어서 웅덩이를 파고, 싱크대에서 변을 본다면 그러면 그것을 지어서 살게 한 주인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우리 인간의 죄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아름다운 세계를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망쳐놓은 것이 바로 죄 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세계를 창조하시고, 이 모든 세계와 인간을 원래 당신이 이것을 창조해 놓은 의도에 맞게끔 되도록 하나님이 계속 영향을 행사하십니다. 그리고 인간은 거기에 대해서 반항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거스르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무엇인지를 잘 모릅니다.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하나님이 선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압니다. 이 시인은 바로 이런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악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도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고백록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 살 수가 있겠습니까? 불순종하고 죄를 지을 때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길 때에는 그들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날 뿐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있겠습니까?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때려주시고, 고통을 겪게 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선하시다고 하는 표시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때려서 아프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때문에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자녀의 특권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반드시 징계가 있고, 사생자라면 징계가 없을 것이라고 말한 히브리서 기자의 노래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로 이 시인은 하나님을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할 때에 언제나 선하게 자기를 대하여 주시는 분이심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때로는 불순종하고 때로는 죄에 넘어져 하나님을 반역할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선하신 하나님은 그를 회개시키고 때로는 그의 마음을 때려주셔서라도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와 주님을 섬기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 시인은 매일 매일 하나님의 선하심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잘 될 때만 하나님이 선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들을 막으실 때에도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적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가 보면 그때 내가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내 뜻이었고, 주님이 막으신 것이 그 때에는 그렇게 섭섭하고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났지만 지금은 바로 그것 때문에 오늘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인하게 만드는 것은 육체의 두 눈이나 감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있는 진실한 신앙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범죄하고 회개치 않았을 때 하나님은 바벨론을 들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셨고, 예루살렘은 산산이 파괴되었습니다. 폐허가 된 그 위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멸망한 예루살렘을 보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시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눈물로 예레미야애가를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 멸망한 이스라엘을 보고 찬송했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마음이 산란하고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을 때 그래서 마음이 미끄러질 것 같은 때에 조용히 이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찬양)
너는 어는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주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으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하였습니다. 히브리말로 헤세드라고 하는 이 단어는 여러분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신약성경에서 아가페라는 말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 헤세드는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인데 특별히 가치 없는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자, 자비라는 말로 많이 번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인에게 정말 시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이나 좋은 것 때문에 이런 사랑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시인이 미끄러지고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것 같은 그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와 맺으신 언약을 따라서 변함없이 은총을 베푸시고 감당할 수 없는 은혜를 이 시인에게 부어 주셔서 하나님 앞에 시련과 고난의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면서도 멸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남게끔 이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놀라운 자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범죄 한 사람은 우리인데 우리의 죄를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큰 고난과 희생을 통하여 진노는 당신이 당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입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우리를 따르고 있고, 그래서 오늘날 까지 살아온 우리의 인생 중 우리의 우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깊은 확신이 오늘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시련과 환란이 닥친다고 할지라고 거기서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주실 것이며 자신이 원수들에게 고난을 당하고 압박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좋으신 하나님이 그 나쁜 모든 것들을 사용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이 시인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의 손을 붙들고 의지하며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의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었던 것입니다. 신자에게 슬픔을 능가하는 기쁨이 어디서 옵니까? 죽음의 위협을 능가하는 용기와 확신 어디서 옵니까?
(찬송)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사야할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어린아이 같이 그분의 의로운 옳은 손에 붙들어 그분과 함께 동행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더 눈물 흘리는 날들을 살아야 하고, 며칠이나 더 이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의 길을 지나야 하겠습니까? 때로는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가 않은 시련을 만날 때도 있고, 고난과 역경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기를 구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는 이 모든 것들을 능가할 수 있는 커다란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힘입니다. 환란이나 시련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이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끊을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려운 환경 속에서도 용기를 갖고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 찬 길을 지나면서도 확신을 잃지 않습니다. 때로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 저편으로 보내고, 그리운 사람들을 멀리 떠나보내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겪을 때에도, 잠시 시련을 당하다 결국은 목자 되신 우리 하나님 때문에 반드시 이 슬픔을 딛고 이길 것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안에서 소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열심히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 살지만 때로는 이 세상을 하찮은 것처럼 격멸할 수 있는 내세에 대한 확신이 있는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거하기보다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분을 섬기며 살날을 고대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환란과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우리는 담대하게 이 죽음을 향하여 ‘오라 내가 너의 이 휘장을 찢고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리라’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세상을 작별하고 마지막 한마디를 이 세상 사람들에게 남긴다면 바로 이 말을 남기고 싶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입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는다고 할지라도 그 분의 좋으신 사랑을 어떻게 필설로 다 묘사할 수 있겠으며 우리를 향해 오래도록 인내하고 참으시는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그 사랑을 누가 감히 사람의 말로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아래서 주님의 이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이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굳게 붙들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말입니다. ‘살리로다’라고 하는 단어는 ‘야샤브’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나그네가 잠시 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민으로서 거기에 태어나서 정착을 하면서 사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번역은 예전의 번역도 괜찮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집에 거하리로다’ 괜찮은 번역입니다. 이 시인이 여호와의 집이라고 했을 때에 이때는 솔로몬의 성전이 건축되기 전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동식 성막이었습니다. 성막은 네모난 직사각형으로 된 텐트였고, 두 토막으로 나누어 가운데 휘장을 드리웠고, 작은 방은 지성소, 큰 방은 성소라고 불렸습니다. 성소는 제사장들이 들어가 하나님을 섬겼고, 지성소는 일 년에 한 차례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가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이 성막의 지붕은 물돼지 가죽으로 만들었고, 오랜 세월동안 햇빛을 받고 바람에 쩔고 비를 맞으면서 검으스름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밖에서 볼 때에는 어떠한 화려한 없었습니다만 일단 그 휘장을 열고 안에 들어가면 온갖 색실로 꼰 아름다운 휘장이 있었고, 금으로 만든 도구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등불에 불을 비추면 그 찬란한 빛깔들이 나타나며 아름답고 현란한 모습을 자랑하였습니다.
남들이 바깥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삶을 볼 때, 정말 시시한 삶일 것입니다. 주일이며 남들 다 놀고 즐기는 시간에 성경 찬송 들고 교회가고, 저녁이면 돌아오고, 공휴일이면 또 교회에서 무슨 행사를 한다고 교회에서 지냅니다. 변변한 휴가 한번 못 가볼 때기 많습니다. 밖에서 볼 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성품, 은혜의 세계, 우리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 그리고 날마다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자비하심과 은혜를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있겠습니까?
(찬송)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이런 놀라운 은혜의 세계를 모두 경험한 시인이 결단을 내린 것은 너무 시시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여화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습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커다란 은혜를 2절부터 5절까지 경험했고, 6절에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면, 무엇인가 좀 위대한 일을 하나님 앞에 약속할 만하데 그는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겠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성막은 매우 초라한 텐트에 불과했지만, 그러나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쁨과 슬픔 고난과 역경이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장 사소한 개인의 일부터 시작해서 국가적인 위기를 만날 때까지 아주 하찮은 서민으로 부터 임금에 이르기 까지 이 하나님의 성소, 후에는 성전에 나아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소원을 아뢰었고, 거기서 비는 기도를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들어주셔서 그들에게 큰 은혜와 사랑을 덧입히셨던 것입니다. 이 처럼 하나님은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성소에서 베푸셨기 때문에 그들은 인생의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의 집을 찾았고, 그 집으로 갈 수 없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쪽을 향하여 빌기라도 하면서 주님의 은총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실 구속의 은혜의 예표였고, 이 모든 영적인 의미에서 성전 자체가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었고, 또 그 이후에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당신이 이 세상에 남겨두신 현실적인 교회를 예표 하는 것입니다. 바로 교회가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단순히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고, 자기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고 믿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여러분에게 개인적으로 은혜를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사랑과 은혜는 언제나 자기 아들이신 우리 주 그리스도께 부어지고, 아들인 예수께 부어진 이 은혜는 그리스도와 결혼한 신부인 교회에 전가되고, 그리고 교회에 부어진 이 은혜는 헐몬산에서 이슬이 흘러내림과 같이 그 교회의 영적인 지체들로 결합된 여러분에게 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받은 모든 영적인 좋은 은혜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온 것이고, 그 교회에 받은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온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부터 그리스도께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혼자 믿는 신앙이 아니라,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교회에 접붙여진 한 지체로서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신앙이고, 받은 은혜이고, 받은 선하심이고, 받은 인자하심이고, 받은 은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서는 진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부 키프리아누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어머니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얼마나 많은 무지한 교인들이 교회를 마치 헬스클럽이나 마치 취미 동호인들이 모인 모임처럼 생각하고, 이리저리로 떠돌며 개념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정말 성령께서 슬퍼하시는 생활이고, 혹시 교회에서 단점이나 잘못된 점이 보여도 마치 자신의 몸에 질병을 미워하되, 그 질병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몸은 사랑하면서 돌보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의 교회를 돌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 헌신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누구도 주를 뵈올 수 없으니,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곧 보이는 교회의 지평 속에서 입증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소속된 이 교회를 생명처럼 깊이 사랑하고, 철새처럼 떠도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교회를 향한 그 사랑이 바로 나같이 더러운 죄인들이 짓밟아 아주 없애지 않으시고 일체의 오래 참으심과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며 나를 지키고 계시다는 것을 깊이 체험하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교회, 그리스도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가 자기의 교회를 위해 생명을 주신 것처럼 여러분도 이 교회를 깊이 사랑하되 이 교회만이 아니라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성령 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는 사랑하는 모든 보편 교회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가지고, 그것들이 자기의 몸인 것처럼 여기며 사랑하며 섬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자 우리는 삼일 동안에 이 산맥과 같은 시편 23편을 어떤 것은 대충 지났지만, 그러나 저 앞에 푸른 풀밭으로 시작을 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집에 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우리 신자의 일생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 섬기고, 사랑하고, 우리의 잘못한 것이 있으면 뉘우치고, 날마다 좋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인격적인 승복이 있는 신앙생활을 해 나 갈 것입니다. 우리는 힘닿는 대로 주님을 섬기고, 애써서 우리 모든 마음을 다하여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의 인생의 남은 날들 동안에는 우리들이 바라지 않는 가슴 아픈 일도 일어날 것이고 때로는 우리가 원하는 일은 아니지만 슬픔과 고통의 눈물을 흘려야 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생명은 영원한 것이 아니니 우리가 가장 사랑하던 우리의 부모님들, 또는 내가 사랑하는 내 아내, 남편이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보며, 이별의 강가에서 그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며, 눈물을 흘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할 것이고 힘닿는 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지체가 되어서 정결한 신부와 같이 주님의 교회를 섬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어떻게 됩니까? 우리 모두 죽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예언할 수 있는 것은 80년 후에는 여기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것이 조금 모자라면 90년만 잡으면 아마도 충분히 거의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제가 교회를 목회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 개척한 나이가 30대 마지막 해였습니다. 몇 주의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벌써 20년의 세월이 흘렸습니다. 그때에 철없는 청년이었던 사람들이 이제는 교회의 부목사가 되었고, 아립답고 예쁘던 처녀들이 지금은 이제 중년이 훨씬 넘는 부인들이 되었고, 흰머리들이 나기 시작합니다. 개척할 때에 우리 딸내미는 불과 2살 정도였고, 우리 모두 교인들이 모여서 교회 바닥에서 동그랗게 둘러 앉아 눈물을 흘리며 철야기도를 하면 이 어린아이는 크리넥스 티슈를 뽑아서 교인들의 눈물을 다 닦아주었습니다. 그러던 아이가 어느덧 대학교 3학년이 되었고, 아빠가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좋다고 껑충껑충 뛰던 유치원생은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공수부대를 제대를 하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교역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세월이 어쩌면 그렇게 빨리 흐르는지 모릅니다.
제 기억의 마지막 아스라한 끝은 제가 유치원 다니던 때입니다. 그 시대에 유치원을 다니는 것은 보통 특권이 아니었지만, 저는 그 당시 아버님을 따라 시골에 살고 있었고, 아버지는 사업을 하셨고, 저는 선교사가 세운 교회에 유치원이 있어서 그 유치원에 다녔습니다. 생각하면 그때 나이가 다섯 살이나 여섯 살쯤 되었을 나이였고, 지금도 거의 5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룻간 예배당 거기에 있던 알록달록한 블록들 마당에서 뛰어오는 친구들의 노랫소리 어깨에 멘 노란 가방, 그리고 토막토막 끊어지기는 했지만 친구들과 함께 뛰어놀던 기억들, 뒷집에 사는 소녀 이름은 누군지도 모르고, 지금 아마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을 그 소녀와 함께 손을 잡고 개울을 건너 유치원에 함께 다녔고,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유치원 담장에 있는 풀을 뜯으며 이것을 가지고 가서 우리 떡을 하자고 가방에 담던 기억이 엊그제 같습니다. 버스 한대가 지나가면 뽀얀 먼지가 흩날리고 우리는 그렇게 길을 건너서 유치원을 다니던 기억이 있는데 그것이 벌써 53년 4년 전의 일이 되었습니다. 겨울이면 동네 형들과 함께 개울에서 얼음을 지쳤고 형들이 실패를 휘감으며 날리는 높이 날아오르는 연을 보면서 나도 빨리 커서 형들처럼 연을 저렇게 날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손을 호호 불면서 얼음판에서 놀던 기억이 엊그제 같은데 거의 55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어쩌면 저에게는 지금도 아득히 그 함성이 들리는 불과 열흘 혹은 이주 혹은 세주 전에 기억처럼 느껴집니다. 우리의 살아온 인생의 날들은 얼마나 바람같이 빨리 지나가고, 지나간 날들이 이렇게 빨랐다면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인생의 날은 얼마나 바람을 잡는 것 같이 그렇게 쉽사리 내손을 빠져나갈 것인가 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든 인생을 회상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는것 보다 더 쉬운 나이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교회 복도에서 만나는 아이들에게 사탕을 하나 손에 쥐어줄라 치면 공손히 손을 배꼽에 모으고 90도로 절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라고, 이것이 우리의 일생입니다. 마음은 아직도 그 유치원에 머물러 있고, 형들과 함께 얼음 지치던 들판에 있는데 이제 저는 초로의 노인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허무하게 살아온 날들이고, 어쩌면 우리의 인생의 날들이 그렇게 허무하게 속히 달려가듯이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매주 교회 강단에 오르면서 개척한 이후 4,000번의 설교를 했다는데 이제는 내가 몇 번이나 더 이 강대에 올라갈 수 있을까? 전할 말씀이 없어서 젊은 시절에는 용기 있기 올라갔지만 이제 이 후로는 전할 하나님의 말씀이 많이 갖고 있어도 기운이 없어서 못 올라가는 어는 날이 있을 것이고, 언젠가는 교회에 그동안 교회를 섬기던 김 목사님이 어제 저녁 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광고를 듣는 날들이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바울이 인생의 날들은 얼마나 바람을 잡는 것처럼 허무하고 살았다고 할 것이 없는 얼마나 하찮은 것이 우리의 인생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바람처럼 지나가는 날에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고, 그 이상 아무도 아니라면 아마 이 세상에서 우리만큼 불행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과 함께 이 모든 것은 기억에 뒷장으로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어둠속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인간을 허무하게 창조하셨으나, 당신의 자녀들은 허무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살지만 영원을 잇대어 살도록 만드시고, 시간 속에서 살다가 들풀처럼 소멸하여 가지만 영원히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살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것 입니다. 언젠가 그렇게 주님을 섬기던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작별을 받으며 관에 눕혀질 것이고, 교회의 운구의 행렬은 그토록 오랫동안 정들었고 우리의 교회당에 들를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모든 성도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목자로 모시고 믿음으로 일생을 살았다면, 함께 도열하며 천국을 가는 우리를 향해 마지막 인사를 하는 사랑하는 우리의 후손들과 사랑하는 교우들은 마음속으로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 이 사람 믿음으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여 자기의 생명처럼 섬겼던 사람이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았지만,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최선의 것을 드렸던 착한 성도였습니다. 우리도 이 분처럼 살다가 이분의 뒤를 따르도록 도와달라’고 뺨에 흐르는 눈물을 주먹으로 훔치며, 우리를 천국으로 송별할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그리스도께서 다시 우리의 몸을 부활하실 그날까지 잠시 우리의 육체를 이 땅에 매장하고, 우리의 영혼은 하늘나라에 올라갈 것입니다. 거기서도 우리는 놀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이 땅에 남겨진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의 후손들이 이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다 싸우며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일할 수 있도록 거기서 우리들은 온 마음을 다하여 그치지 않는 열심으로 우리의 교회를 위해 내려다보며 기도할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이 땅에 모든 교회들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진보와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인 번영을 성취하기를 온 마음 다하여 간구하고, 주님의 은혜에 보좌에 탄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 중에 한 사람이 되어서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세세 무궁토록 찬송할 것이며, 우리의 인생을 시련과 역경 속에서 고난의 폭풍 속에서 한 번도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약할 때 강하게 하시고, 쓰러질 때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고, 우리를 도우셨던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의 추격을 감사할 것입니다.
(찬송)
잠시 머물 이 세상은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 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이렇게 선한 싸움을 다 싸우다 우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새 예루살렘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