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아야 할 것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첫사랑 (아 3:4) 2005.1.18 새해 사경회(오전) 1
2. 그 섬김 (느 9:35) 2005.1.19 새해 사경회(오전) 15
3. 그 순종 (삼상 15:22) 2005.1.20 새해 사경회(오전) 29
4. 그 기도 (대하 33:12~13) 2005.1.21 새해 사경회(오전) 39
1. 첫사랑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사랑을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 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 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 하였구나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 가 보았느냐 하고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아3:4)
이 아가서는 사랑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사랑하는 남녀의 이야기가 담겨있지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짜 가르쳐 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그의 신부되는 교회 사이의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으셨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가서를 우리들이 잘 연구하면 여기에서 성도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또 그리스도가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생생하게 잘 느낄 수 있는 보배와 같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진 이야기가 나오죠.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막 찾고 그러다가 결국 순찰을 도는 사람을 만나서 내 사랑하는 자를 보았습니까? 그 사람들에게도 대답을 얻을 수가 없었어요. 얼마나 간절하게 찾았는지 그렇게 지나가는 사람까지 붙들고 물어보아야 할 정도까지 되었어요. 그들이 모두 떠나고 혼자 남게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이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다시 만난 사랑하는 사람을 꼭 붙들고 놓지 않고 그를 다시 방으로 데려가서 함께 동거하고 기뻐하는 그런 생활을 하게 되었다는 노래를 담고 있는 것이죠.
이 사람이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고 목매하며 찾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 이었습니까? 이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찾게 된 것이죠.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싫은 사람하고 같이 사는 것이 고통스럽겠어요, 너무 사랑하는데 그 사람 없이 사는 것이 고통스럽겠어요? 너무 어려운 퀴즈였나? 싫은 사람하고 같이 사는 게 힘들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너무 사랑하는데 그 사람 없이 사는 것이 힘들어요? 사실은 둘 다 힘들지만 근데 자기가 싫은 사람하고 사는 것은 또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는데 자기가 너무 사랑하고 꼭 있어야 되는 사람하고 같이 살아야하는데 그 사람이 없이 혼자 지내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보면 사람은 기대면서 살수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에요. 우리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기대어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죽거나 멀리 떠나게 되면 그 빠져나간 공허감을 견디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지탱하지 못하고 뒤를 따라서 죽어버리기도 하잖아요. 혼자 사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 없이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이거든요. 우리가 잠시 동안은 우리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도 살수 있어요. 왜냐하면 세상의 즐거움이 워낙 크면 잠시 하나님의 사랑 잃어버린 정도는 신경 안 쓰고 살수 있죠. 그런데 세상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지 않아요. 언제나 세상은 신기루와 같아서 하나님을 잘 믿고 따라가려고 할 때 우리를 유혹하기는 하지만 그 유혹하는 것에 대해서 책임을 져주는 세상은 아니에요. 그래서 세상으로 돌아가서 주님 사랑 잊어버리고 세상 사랑에 빠져서 지내면 잠시는 하나님 사랑 없어도 살수 있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은 세상에 사랑에 질력이 나고 또 세상이 자신을 끝까지 사랑해 주지도 않아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그 결과는 언제나 평안과 기쁨, 영혼의 참다운 변화와 거룩의 은혜로 나타나서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주님께 더 많이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어가지만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처음엔 달콤한 그 맛에 주님의 사랑 생각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사랑의 열매는 아주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오는 것이죠. 그래서 자신의 온 몸이 그 세상사랑에 가시에 찔리고 그 껍질에 벗겨져서 피가 흐르고 고통을 받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며 살도록 지정된 운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잠시 세상사랑에 눈이 멀면 세상 사랑하고 살 수 있지만 그러나 진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인해서는 결코 그 영혼이 만족을 얻을 수 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잠시 동안은 이 세상의 낙으로 즐거워하면서 타락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고 나면 그 모든 것들이 쓸모없는 것이고 자기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버리고 세상으로 나아갔던 것에 대해서 깊이 후회하고 회개하고 뉘우치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렇게 성도는 예수님과 결혼한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고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예수님 말고 딴 데서 기쁨을 얻고 행복을 느끼기 시작하면 이미 벌써 영적인 간음이 시작이 된 거예요. 그것이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신의 남편인 예수그리스도에게서 기쁨을 발견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의무이고 이 안에서만 성도는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의 방탕한 길로 갑니다. 잠시 그렇게 살아보니 즐겁죠. 영원히 즐겁지 않아요. 그가 만약 영원히 즐거울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정으로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은 그럴 수 없는 거죠. 그럼 이제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죠. 도대체 사랑이 뭐냐? 사랑이 무엇이 길래 이렇게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졌을 때 미친 듯이 거리를 헤매면서 찾고 찾았을 때 그렇게 좋아하는데 이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뭐냐 이거죠. 우선 사랑은 내적으로 볼 때 이 사랑의 본질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가 있어요. 첫째는 뭐냐면 사랑은 소중히 여기는 거예요. 사랑하게 되면 그것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거예요. 그게 사랑의 본질이에요. 그것은 사람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물질이나 아니면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에 대한 사랑도 역시 똑같아요. 내가 어떤 물건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의 값어치와는 상관없이 그 물질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게 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이에요. 사랑의 본질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그 사랑의 방식에도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아들이셨습니다. 죄도 없으시고 흠이 없으신 깨끗하신 분이시고 예수님이 사람을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소중한 아들이었어요. 그렇게 귀하고 소중한 아들인데도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해주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죠?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렇게 이 세상에 보내어 고난당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하려고 하는 우리들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에 너무나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래서 소중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인데도 이 세상에 보내신 거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이 사랑을 아는데서 눈을 뜨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참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그 사랑의 본질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구나. 거기에 대해서 눈 뜨는 거죠. 그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소중히 여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귀하게 생각해 주실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까?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고 나면 우리가 얼마나 쓸모없는 사람인지를 깨달게 되죠. 죄가 가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멀리 떠나서 죄 가운데 방황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그런 미련하고 방탕한 자식들이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를 아주 매우 쓸모없고 패역한 사람들인데도 마치 쓸모 있고 매우 귀한 사람처럼 우리를 세심하게 돌보시고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것을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보여주셔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나면 자기 속에 있는 자존감들이 회복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무슨 쓸모도 없고 남들만큼 많이 배운 것도 아니고 미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재산이 많은 것도 아니고 다 쓸모없고 아무 가치 없는 사람이지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정말 죄인이다 그래서 깨닫는 자기부족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도 자기는 아무 가치가 없다 이렇게 생각해요.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황폐해요. 그래서 교만하면 안 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어야 돼요.
내가 비록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이고 그래도 내가 없는 것보다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게 좋아서 하나님이 나를 빚으셔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지. 사람들은 나를 보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내가 꼭 필요해서 이 세상에 나를 만들어 놓으셨을 거야, 그 참된 가치를 내가 어떻게 하면 찾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그 삶이 건강한 삶이에요. 너무 기죽을 필요 없어요. 그 왜 그래요? 돈이 좀 없으면 그런 생각 하는 거죠. 돈이 많았으면 아마 내가 돈이 많아서 하나님을 찾지 않았을 텐데. 내가 적당하게 가난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주님을 찾았으니까 나에게 있어서 가난해진 것은 하나님이 나를 소중하게 여기시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기회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또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거죠. 얼굴이 좀 못생겼으면 어때요? 나 같은 사람도 사는데. 뭔 상관이 있어요. 전 세계의 인류역사에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에요. 누가 나하고 똑같이 생긴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 그래요. 껍질이 나하고 똑같아도 속이 똑같겠어요? 그러니까 역사상 유래가 없는 최신작품이고 그리고 최후의 작품이에요. 그래서 또 그 맛에 사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창조하셔서 참 감사하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되잖아요. 그런데 이제 이런 자존감 없이 내팽개치듯이 살아간다 이거에요. 그러면 삶이 황폐해 지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자존감들을 회복하게 되요. 여러분들은 안 믿을지 모르지만 저는 아주 어려서 말이죠, 왜 그랬는지 열등감이 많았어요. 사실 뭐 잘한 것도 없지만 크게 못한 것도 없고 나중에 집안이 망해가지고 좀 힘들게 살았지만 어렸을 때는 우리 집안도 그렇게 못살지는 않았는데 왜 그렇게 열등감이 심했는지 모르는데 그랬어요. 그것이 예수님 믿고 신앙생활하고 성화의 길을 쭉 걸어오면서 회복이 됐어요. 이제는 제가 스스로 교만해 질까봐 나 자신에 대해서 염려하지 열등감에 빠질까봐 염려한 적은 별로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변신할 수 있었느냐? 뭐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예뻐진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이 생긴 것도 아니고 공부를 유별나게 잘해서 사람들에게 빛나는 그런 지식을 가진 사람도 아닌데 왜 그렇게 되었냐? 그건 모두 제 영혼 안에서 일어났어요. 그게 뭐냐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거예요. 학교에 선생으로 있으면서 보면 말이죠, 아이들이 교수가 특별히 예뻐해 주고 좋아하면 얘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없어요. 밑으로 내려가면 점점 더 심하죠. 주일학교에서 보면 나하고 손잡고 가자 그러면 애들이 새까맣게 따라와서 왜 내손은 안 잡아줘요! 그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손가락 이렇게 해가지고 열 명이 붙들고 그렇게 해서 가는 거예요. 그렇게 샘을 내요. 그런데 그 속에서 뭐를 보냐면 아 이 선생님이 나를 소중하게 여겨주시는 구나. 그때 사람들에게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나는 예수님 믿고 나서 변한 건 별로 없지만 그러나 언젠가 그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걸 쭉 돌아보는 거예요. 근데 그 사랑이 너무 섬세하고 놀라와요. 그런데 그 사랑의 본질이 뭐냐면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하나님도 나를 소중하다 그러시는데 내가 왜 나를 학대하고 나를 하찮게 취급할까? 하나님이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시니까 나는 이 세상에 정말 귀한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만드셨고 내가 이렇게 살아간다. 물론 나보다 잘난 사람도 많고 내가 부족한 것도 많이 있지만 그 부족한 거를 하나님만큼 더 잘 아시는 분이 어디 계시겠어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소중하다고 그러셨으니까 나는 소중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니까 열등감도 사라지고 자존감도 다시 회복이 되더라는 이 얘기에요. 여러분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신 사랑의 본질을 소중하게 여기는 거예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심지어는 여러분들이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났는데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다시 불러서 다시 하나님 앞에 소중한 존재답게 살게 하기 위해서 사경회도 나오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말씀도 듣게 하시는 거예요.
소중하지 않으면 버리죠. 폐기처분하잖아요. 종량제 봉투에 넣어가지고 쓰레기통에 버리잖아요. 그때 봉투도 아까우면 남의 집에다 슬쩍 가져다놓고 오잖아요. 소중하니까 하나님이 고쳐 쓰시려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도 자신을 버리고 싶을 때가 있는데도 하나님은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를 고쳐서라도 쓰시고 싶어 하시는 거예요. 닦아서 쓰시고 고쳐서 쓰시고 하나님이 그러시려고 그러는 거예요.
두 번째 사랑의 본질은 뭐냐면 기뻐하는 거예요. 사랑하게 되면 그를 쳐다보고 기뻐하게 되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만 들어도 기쁘죠. 편지를 받아도 기쁘고 그 사람이 입었던 옷에서 냄새만 맡아도 기쁘죠. 어쨌든지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나게 해주는 모든 것을 다 기뻐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까지도 모두 기뻐하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 자신은 너무나 기뻐하는 거죠. 그게 사랑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먼 길로 떠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방종하게 살면 하나님의 사랑이 안 느껴지죠. 하나님이 우리를 계속 사랑하시는데 사랑이 느껴지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돼요.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지독하게 방탕하고 나쁜 짓하면서 살 때도 하나님 여러분 사랑하세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만을 가지고는 내가 행복해질 수 없어요. 내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고 능력 있고 풍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나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어야 돼요. 언제 느껴져요?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나쁜일을 행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 하지마라는 일 골라서 하면서 그러면서 바쁘게 살아요. 사람들은 다 보고 비난해요. 못된 신자다. 나쁜 신자다. 진짜 나쁜 교인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이 싫어하죠. 어떤 땐 자기 자신도 자기가 싫어. 하나님보다 죄를 사랑해서 세상을 선택하고 그래서 불순종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나도 자신이 너무 싫은 거예요 그럴 때 있잖아요. 자신도 자기가 너무나 싫을 때 있잖아요. 그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예요. 변함없으세요. 여러분들이 죄 많은 인간이잖아요. 그런데도 자식새끼 낳아보세요. 여러분 애를 낳고 길러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깨닫게 되요. 낳아 놓잖아요, 그러면 어떨 때는 말 잘 듣고 공부도 잘하고 그러면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그 말 안 듣고 이러면 진짜 너무 밉잖아요. 그죠? 싫잖아요. 그 말 안 듣고 빈둥빈둥 그러면 너무 밉고 그리고 진짜 속이 상하고 그러잖아요. 오죽했으면 미국에서 어느 자매가 자기 아들 살살 꼬여서 한국 한번 가지 그랬대요. 미국에서는 애들 때리면 경찰에서 와서 잡아가거든요. 아이들을 유치원 때부터 교육을 시켜요. 엄마 아빠가 때리면 911을 눌러라 그러면 경찰이 와서 잡아간단 말이에요.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에요. 이렇게 개 패듯 패도 누가 안 잡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아이가 한번 때렸더니 엄마는 나를 18살까지 양육할 의무만 있지 때릴 권리는 없다 그러더래. 얼마나 교육을 시켰으면 그러겠어요. 그러니 너무 속이 상하니까 한국 한번 나갈래? 눈도 오고 고국구경 한번 할래? 그러니까 한국가고 싶은 마음이 없데. 가면 뭐도 사주고 뭐도 사주고 가자. 그러더니 얘가 그러면 한번가볼까 하고 갔대요. 김포공항에 내리자마자 따귀를 때렸대요. 야 이놈의 자식아 너 엄마 속 그렇게 썩였지? 막 때렸대요. 전화해봐라 전화 해봐! 오나! 전화해봐라!
그 엄마도 참 무서운 엄마에요. 싫을 때가 있잖아요. 너무 속상할 때가 있잖아요. 그럼 사사랑 안할 때에요? 아녜요. 사랑하지 않으면 속상할 일도 없지. 개가 되든지 소가 되든지 뭔 상관이 있어요? 그냥 살면 되는 거지. 사랑하니까 기대가 있고 기대가 있으니까 속이 상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도 신앙의 경험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깊이 우리의 죄를 회개해요. 그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회개하죠. 이게 철드는 순간이에요. 그전까지 어떻게 생각 하냐면 아 씨! 하나님은 나 말이지 돌아보시지도 않고 말이지 나는 하나도 안 예뻐하고 하나님은 괜히 나만 미워해.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이렇게 배척하는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막 일어나고 일어나요. 뭐도 안 해주고 뭐도 안 해주고. 이러면서 이렇게 불만으로 가득차있어요. 그러다가 깊이 회개하고 그 회개 속에서 흐르는 눈물은 눈에 붙었던 콩 껍질들을 다 씻어내 버려요. 그리고 눈이 다 떠지게 되면 그다음에 깨닫게 되는 거죠. 내가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한 것처럼 우리 아버지마음, 우리하나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해드렸을까 내가 이렇게 할 때 얼마나 마음 아팠을까 얼마나 하나님 마음 아프셨을까 그러면서 이번에는 하나님께 섭섭해서 마음이 아픈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던 것 때문에 그렇게 아파하는 거예요. 어느 엄마가 딸이 둘이 있는데 하여튼 지질이 둘이서 교대로 속을 썩인대요. 이놈의 계집애들 시집가서 더도 말고 너하고 똑같이 생긴 딸 둘씩만 낳아라. 얼마나 화가 나면.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나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섭섭했던 것들이 생각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가 얼마나 아프게 해드렸는지 생각이 나는 거예요. 이게 철드는 신자야. 그렇게 하루에 한번 씩만 하나님 마음 아프게 해드린 것 때문에 자기도 아파하고 눈물을 흘리면 나쁜 신자 될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안 그래요. 여러분 회개한지가 언제에요? 하나님의 마음 아프게 해드린 것 한번 헤아려본지가 언제에요? 나 이렇게 아픈데 하나님 나 좀 돌아보시지도 않고 그리고 빌빌대고 다니면서 하나님 원망하고 그랬지만 그래서 해결된 것이 뭐가 있어요? 그랬더니 뭐 좋은 일이 생겼어요? 하나님 원망하고 하나님 나도 안 돌아 보시고 나는 이렇게 아픈데 하나님은 나를 지켜봐주시지도 않고, 또 지체들을 돌아보면서 누구는 나 아픈 것도 사정도 안 알아주고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원망 사람들을 향한 불평 그렇게 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났어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행복합디까? 마음속에 이빨을 악물고 그 인간! 그러면서 미워하는 증오의 마음으로 어금니를 깨물 때 행복합디까? 그래서 뭐 좋은 일이 일어났어요? 잠만 자면 신령한 꿈을 꾸기는 커녕 맨날 사람들하고 만나서 대판거리며 머리 잡아당기는 꿈이나 꾸고 말이지 그러다가 가위에 눌려서 깨고 그랬겠지 뻔하지. 뭐가 행복해? 뭐가 행복해요? 아무것도 행복한 것이 없어요. 그렇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나면 그다음에 뭐가 떠오르나하면 자기 아픈 거는 하나도 안 떠오르고 하나님이 아파하시는 것이 마음에 떠오르기 시작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해요. 하나님 진짜로 하나님이 마음 아프신 것 때문에 자기 마음이 너무나 아픈 거예요.
하나님이 나한테 잘못한 게 뭐가 있나? 자기 외아들까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서 나를 위해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놓으신 다음에 하나님이 길거리에 그냥 팽개치셨어요? 그렇지 않잖아요.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셔서 은혜를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위기 때마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도록 환경을 열어주시고 이렇게 하면서 아주 세미한 사랑의 방법으로 구원받은 이후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셨잖아요. 그렇게 하면서 일생을 우리를 이끌어 오셨잖아요. 어려운 일이 생기고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우리가 누구한테 기도했어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우리 도와 달라고 막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도와 주셨잖아요. 그리고 나서 짧은 시간 안에 고무신 거꾸로 신고 배신하는 것이죠. 그러잖아요.
그래서 오늘 시험에 든 사람치고 옛날에 하나님의 사랑 못 경험한 사람 없고 오늘 깊은 영혼의 침체 속에서 하나님 원망하는 사람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지 않은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마음이 삐뚤어지면 하나님 앞에 그런 사랑이 그런 소중히 여김을 받았던 거,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원망하는 거예요. 그러다 깊이 회개해요. 하나님이 나한테 잘못하신 것이 뭐가 있나? 그리고 하나님 마음 아프게 해드린 걸 깊이 뉘우치는 거예요.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 되실 때.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주셨는데 자기는 주님을 한번도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없다고 뉘우치면서 깊이 회개하는 거예요. 그때 아파하고 그리고 깊이 회개를 하고 나면 그다음에 뭐가 느껴지냐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이 느껴져요.
그 사랑이 어떻게 느껴지냐면 하나님이 나를 참 기뻐하시는 구나.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구나 그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참 기뻐하시는 구나 그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사랑은 기뻐하는 거예요.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이제껏 까지 하나님원망하고 죄지으면서 살았고 이제야 하나님 앞에 뼈저리게 회개하면서 뉘우쳐요. 그런데 예전에 잘못했는데 이제는 뭐잘한 게 있어요? 나쁜 짓만 계속하고 불순종하다가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면서 나 잘못했다 그랬는데 이게 무슨 새 삶을 산 것도 아니고 아직 출발도 안 했어요. 그런데도 깊이 회개하고 나면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신다는 것이 느껴지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래서 말이죠, 제가 예수님을 믿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내가 너무나 악해요.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게 진짜 더럽고 그리고 그때는 지금보다도 훨씬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어두웠으니까 어떻게 살아야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사는지 잘 몰랐고 또 잘 가르쳐주는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막 살고 그랬죠. 그렇게 불순종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는 시간들이 있었어요. 무지와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깊이 그 사랑을 나에게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니까 그때 그렇게 마음에 위로가 됐었어요. 그때 위로가 됐던 것이 뭐냐면 내가 하나님 앞에 성령 충만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열심히 봉사할 때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시험에 들고 심지어 내가 곤고하고 심지어는 내가 내 죄로 인하해서 깊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흐느끼고 있을 때에도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계시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깊이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면서 아 이게 자유구나. 나는 하나님이 나한테 잘해주실 때만 또 어떨 땐 잘해주시는 대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미워하고 싫어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시험에 들어있을 때도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거예요.
그것을 내가 죄 가운데 살 때에는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걸 못 느껴. 그런데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면 봇물처럼 그 사랑이 밀려오는데 그게 뭐냐면 이렇게 짐승처럼 살고 불순종했는데도 내가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구나 이제 새 삶을 시작도 안했는데 새 마음을 갖고 새롭게 주님을 사랑하게 되니까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구나. 이게 사랑의 본질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가장 중요한 특징이 기쁨이에요. 그 기쁨이 어떤 기쁨이냐면 하나님 때문에 느끼는 기쁨이에요. 성도가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거기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인생전체의 기쁨의 근원이 되어야 해요. 그것이 성도의 마땅한 바에요. 그리고 우리들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 기쁨을 얻기 시작하면 우리는 부패하고 있는 거예요. 타락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할 때는 가난해도 행복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좋고 시련이 와도 하나님 앞에 낙심치 않아요. 왜 그래요? 하나님이 내 마음에 기쁨이 되시기 때문이에요. 하나님만 생각하면 그냥 기쁘고 즐거운 거예요. 그냥 행복하고 하나님 앞에 기쁜 거예요. 한 20년전 인데 청년들을 데리고 저기 어느 수양관으로 허름한 수양관이에요. 다 쓰러져가는 수양관이라기 보다는 피난소 같이 만든 그런 수양관인데 하여튼 거기를 갔어요. 거기서 일하는 부부가 있어요. 연세가 좀 드셨는데 진짜 엄하게 일을 하세요.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가 불을 떼고 그 틈바구니에서 소죽을 끓여서 먹이고 그래요. 불을 떼다가 나와서 우리를 맞이했으니까 사실 뭐 시골 분들이 그렇잖아요. 꾸부정 해가지고 걸어 나와요. 그래서 우리 여기서 집회를 하려고 왔다 그러니까 오라고 그래요. 이렇게 추운 겨울에 깊은 산골에서 수양관에서 주님의 일 하느라 애쓰니까 얼마나 힘드십니까? 그러고 제가 인사를 했었어요. 그러면 괜찮습니다 다 주의 일이죠. 이래야 되는데 우리 아들 서울대 다녀요 그래요. 나중에 지내면서 보니까 자기들이 거기에 와서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은 아니에요. 나이 드신 분 두 거기서 밥술이라도 먹는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신앙이 별로 없는 이 분들이 어떻게 생각 하냐면 내가 여기서 소죽이나 끓이고 장작불이나 떼고 허드렛일이나 하니까 너희들이 날 우습게 볼 것 같은데 사실은 우리 아들이 서울대 다닌다. 사실 우리가 들으면 굉장히 썰렁한 얘기죠. 누가 어느 대학 다니냐고 물어봤나? 그런데 그렇게 부모가 말하고 싶었던 이유는 뭐냐면 자기네들은 비록 이렇게 허드렛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분들 마음속에 있는 자기 아들이 기쁨이 되었던 것예요. 아마 그 아들은 대학교가서 야 우리 엄마 아빠 소죽 끓여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죠? 그 아들에게는 엄마 아빠가 그렇게 기쁨이 안 되었을지 모르지만 이 엄마 아빠에게는 이 아들이 그렇게 기쁨이 되니까 그걸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죠. 여러분 우리들이 이 물먹기 싫은 소를 끌어서 냇가에 가서 물을 먹이는 것이 불가능 하듯이 솔직히 전도 안 하려고 하는 교인들 데리고 사실 전도 시킨다고 하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그리스도의 이 아름다움 기쁜 복음의 소식은 말이죠 이게 아무렇게나 전파되는 것이 아니에요. 이 기쁜 소식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을 기뻐하는 사람 그 사람들에 의해서 전파되는 거예요. 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하나님을 너무 기쁘고 즐거워하다보면 그러면 그것을 자랑하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는 거예요. 너 요즘에 어떻게 사랑하니?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 누가 하나님 얘기 듣겠대? 우리아들 서울대 다닌다고 얘기하는 거랑 똑같은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하든지 그걸 얘기하고 싶은 거예요.
하나님... 그 마음의 기쁨이 솟아나면서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써있네. 오래 믿음 사람이 전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 마음에 살아있는 사람 그래서 예수님이 너무 기쁜 사람, 예수님이 자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지금 막 느끼고 있는 사람. 그 사람들이 예수의 복음을 전해요. 예수의 사랑을, 그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를 사람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은 거예요. 사실 그게 얼마나 아름다운 삶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믿게 되었으면 이제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너무 소중하고 하나님 앞에 서 인생을 살아갈 때마다 하나님이 나만 사랑하는 것 같은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하나님이 자기를 독점적으로 사랑하는 것을 느껴지고 하나님을 너무 기뻐하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고 하나님은 또 나 때문에 행복하고 기뻐하시고 그런 소중히 여기고 기뻐하는 관계 속에서 신앙생활 해 나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 사랑이 있는 신앙생활이 아닙니까?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아마 여러분들에게도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그런 때가 있었을 거예요. 우리들이 처음 은혜를 받고 주님의 그 첫사랑을 뜨겁게 경험했을 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 가는 발걸음은 얼마나 가벼웠고 예배당에서 들리는 종소리는 얼마나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되었습니까? 거기서 부르는 찬송가는 눈물 없이 부를 수가 없어서 우리들이 몇 년 은혜 받고 나면 찬송가가 눈물에 베어서 꾸깆꾸깆하게 되잖아요. 거기서 주님을 위해서 섬길 때는 얼만 행복했습니까? 영혼들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남이 하지 않는 일을 도맡아 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길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가득 있지 않았습니까? 그때 우리는 눈물이 있는 신앙생활을 했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기뻐하셨죠. 그래서 어디가든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셨죠. 인생이 살아온 날들이 간증거리였죠. 그래서 우리의 인생 걸어온 길 자랑을 품어 자랑할 유산 자랑할 재능이나 학식은 없어도 우리의 인생을 눈부시게 인도해 오신 하나님의 감동의 역사들을 우리들이 언제든지 말할 수 있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것을 이야기하면 사람들 마음속에 하나님이 우리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사람들로 느끼게 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만 사랑해 주시는 것이 경험되지 않았습니까? 이게 우리의 첫사랑이에요.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우리가 이렇게 살도록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기뻐하고 그래서 하나님 사랑하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이게 하나님 좋아하시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어느 만 큼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이상하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러한 사랑이 다 빠져나가 버렸어요. 옛날보다 교회에서 직분은 더 많이 맡았고 신앙의 연조도 깊어 졌고 이제 찬송가도 많이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그런 면에 있어서는 옛날 첫사랑일 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 유치할 정도로 옛날엔 어렸는데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그것이 내게 없는 것이 발견돼요. 곤고해요.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어요. 진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려본 적이 언제에요? 다른 거 말고 가슴 아픈 거 이런 것 때문 말고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왜 이렇게 사랑해 주실까? 나 같은 쓸모없는 죄인을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용서해주셔서 이렇게까지 사랑해주실까?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사랑 하나님은 나에게 왜 이렇게 베풀어주실까? 하나님, 나는 정말 너무나 행복합니다. 하나님이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에 말씀 준비하러 시골에 내려갔었는데 거기서 두 시간동안 친구 목사를 잠깐 만났어요. 그랬더니 목회하는 이야기는 하는데 너무 힘들고 어렵대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뭐는 쉽습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조금만. 참으면 뭐 좋냐? 그래서 아 조금만 참으면 죽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참아. 그랬더니 허기는 그렇게 슬픈 일만 있는 건 아니래요. 기쁨 일도 있대요. 뭐냐 한번 같이 나눠 봅시다. 그랬어요. 어느 날 갑자기 전화가 왔더래요. 목사님! 예 누구세요? 자기네 교인이드래요. 웬일이냐니까 목사님 나는 너무 행복합니다. 그러고 소리를 지르고 울더래요. 뭐가 그렇게 행복하냐? 그러니까. 그리고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하는데 그것도 참 놀랍대요. 이번에 저쪽 지방에서 해일이 일어났잖아요. 그때 딸하고 사위하고 놀러갔대요 거기를. 결혼을 했는데 신혼여행을 못 갔대요. 너무 어려워서. 그러다가 이제는 살만해지게 되서 미국서 돈도 많이 벌고 해가지고 거하게 갔는데 열흘 동안 소식이 없는 거예요. 가족들은 거의 80%죽었구나 생각을 했다는 거죠. 그러면서 그 부인이 먼저 예수를 믿고 그 다음에 남편이 예수를 믿었는데 그렇게 신사가 된 거지. 아내 손에 이끌려 오고 나서 변화 받은 다음에 새벽기도를 한번도 안 빠진 거예요. 일구월신 오직 기도는 자녀들을 위한 기도였어요.
그것만 하면 안 되지만 그 사람의 수준에선 그랬어요. 그렇게 기도를 했는데 이 남편이 낙심을 많이 한 거예요. 내가 이 딸을 위해서 사위를 위해서 평생 기도를 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이렇게 데려가실 수가 있나? 그래서 온 가족이 슬픔에 잠겨서 막 눈물을 흘리는데 목사님이 심방을 가서 그랬대요. 그것도 참 대담하죠. 살아있으니 걱정 마쇼 그랬대요. 그러니 그게 무슨 목사가 근거가 있어? 큰소리한번 친 거지. 살아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도하면서 기다리시오. 그랬대요. 12일인가 며칠 만에 전화가 왔대요. 집에서 발칵 뒤집힌 거지. 엄마 우리 다 살아 있어 걱정하지 마. 야 어떻게 이렇게 전화도 안했냐? 전화고 뭐고 엄마 말도 하지 마. 뭐 볼 수가 없을 정도로 황폐하게 되서 자기들도 갖갖으로 방콕으로 도망을 와가지고 비행기로 와가지고 이제야 겨우 전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됐냐? 그랬더니 참 신기하더라고요. 이 남편이 바닷가로 산책을 가자 그랬대요. 해일이 일어난 그 시간에. 그래서 남편이 먼저 내려간 거야. 그런데 그 부인이 평소엔 안 그러는데 왠지 하여튼 꿈지럭거리면서 20분이나 넘게 화장을 못 끝낸 거예요. 햇볕 내려 쬐니까 여자들 그냥 나가면 안 되니까 하다못해 뭐 구루모라도 발라야 될 거 아니에요. 그리고 찍어 바르는 동안에 남편은 기다리며 20분이 지나도 안나오니까 화가 좀 난 상태에서 올라왔는데 그 숙소가 3층 이었대요. 도대체 빨리 가야 되는데 왜 아직도 안나오는 거야 20분이 넘었잖아! 그러는데 물이 확 밀려닥치는데 2층에서 물이 딱 멈추더래요. 물 높이가 딱 2층까지예요. 또 남편도 늦게 들어왔으면 그냥 쓸려 내려가는 거예요. 그래 거기 가만히 있었다는 거죠. 2층에 있는 사람들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었다는 거예요, 3층에 있는 사람은 3층에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부지런히 다 바다 구경하러 내려간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그대로 있었대요. 그래도 신기하게 그 호텔은 건물을 튼튼하게 지어서 물만 이층까지 꽉 차고 3층은 그대로 있더래요. 그래서 결국은 거기서 나중에 배를 타고 구조 되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전화를 해서 그러는 거예요. 내가 일평생 자녀를 위해서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자녀들을 데려가시는 구나하고 낙심했는데 목사님이 오더니 살아있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러니 이거 완전히 권위가 선거예요.
그때 뭘 느끼냐면 야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이렇게 소중하게 여기시는 구나. 그렇게 기뻐하는 구나. 그래서 내가 거 봐! 뭐 힘든 일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랬던 그 사람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목사님이 기도해주셔서 감사하다 그러면서 또 목사님 옷도 사 입고 음식도 맛있는 거 좀 드시라고 봉투를 주고 가더래요. 아이고 수지맞았네. 그렇게 좋은데 왜 그렇게 투덜거려! 그랬더니 아참 또 있다 그래요. 뭐가 또 있냐 그러니까 또 그 사람한테 전화가 왔더래요 얼마 있더니. 언젠가는 그분이 목사님 저 행복합니다. 아들놈이 하나있었는데 공부를 아주 지겹도록 작심을 하고 안하더래요. 결국 실력이 안 되니까 다 미끄러질 지경인 거죠. 그러고 전문대를 집어넣었대요. 그랬더니 1년이 지났는데 어느 날 부모를 찾아 왔더래요. 그놈이. 엄마 내 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데? 그랬더니 전문대를 일년을 다녔는데 진짜 죽어도 적성에 안 맞거든요. 6개월 다녀보고 이게 아니란 걸 알았어요. 그래서? 그래서 사실은 엄마 몰래 혼자 공부를 했거든요? 그래서 요번에 학교를 붙었어요. 의대 붙었어요. 1학기 등록금만 내주시면 나머지는 내 힘으로 해가지고 의사 되겠습니다. 그러더래요. 사실은 기술적으로 그게 불가능하거든요. 그 머리로. 근데 그 아들이 이번에 의사고시를 잘 봐서 붙었다고 그러고서 전화가 왔다는 거예요. 그때 또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을 해요. 그 왜 그래요? 자식이 의사가 되서 행복한 것도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해 주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이게 느껴지는 거예요.
신앙이 없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냥 자기 자신만 행복할 뿐이지만 그러나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이 모든 걸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그래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요. 이것이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기쁨이고 즐거움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증거가 항상 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이 살아온 이야기만 하면 그것이 간증이에요. 그 자체가 간증이야. 그렇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 믿은 사람들에게는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나에게 믿음을 더욱 주시옵소서. 찬송하면서 살아가는 거 아니에요. 그게 기쁜 신앙생활의 하나에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처음 주님을 만나고 뜨거운 사랑 경험했을 때도 우리는 그랬잖아요. 어쩜 그렇게 세밀하게 우리의 삶 속에 간섭해주셔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시고 그 작은 공급 받으면서 눈물 흘리면서 감사해하고 그래서 다시 하나님 사랑하기로 맹세하고. 하나님 나를 기뻐하시고 내가 하나님 기뻐하고 이렇게 하면서 서로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마음에 신앙이 자라고 하나님 더욱 더 깊이 사랑하게 되는 행복에 빠지게 되는 그게 바로 우리의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때에 일어나는 일이에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은 어떤지 내 한번 물어보고 싶어요. 이런 첫사랑의 때에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의 사랑에 너무 감격해서 마음이 녹고 예배당에 오는 발걸음은 구름을 타고 오는 것처럼 가볍고 목회자와의 관계도 너무 행복하고 그리고 그 목사님이 있어서 너무 행복하고 자신의 영혼은 안전하다고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이 송이 꿀처럼 달고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위해서 그렇게 사모하게 되고 병원에 입원이라도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은혜에 감격에 깊이 졌어들어 가잖아요. 요즘도 여러분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계십니까? 요즘이 언제냐가 문제가아니라 우리가 일평생 그렇게 신앙생활하면서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것은 꿈이 아니에요. 누가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있어요!
그렇게 살수 있어요. 왜? 우리가 하나님 진실하게 의지하고 매일 매일 죄를 죽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비결을 터득하게 되면 매일 그런 사랑의 감격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살아있을 때 하나님 사랑하고 하나님 섬기고, 주님오라고 부르실 때는 인생의 이 무거운 짐을 훨훨 벗고 날아가듯이 주님께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성도들이 되라고 하나님이 예수님 믿고 우리를 구원 받게끔 만들어주신 거란 말이에요. 그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런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이러한 사랑을 옛날얘기로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런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사실 이거 제대로 하려면 시간이 깊게 걸리거든요. 근데 이제 빨리 마치고 가서 밥을 먹어야죠. 그래서 이제 좀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어요.
이런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제일 먼저 해야 되는 것이 뭐냐면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생각하는 거예요. 생각을 해야 되죠. 옛날에 그런 놀라운 사랑에 붙잡혀서 주님의 크신 사랑, 은혜, 어린아이처럼 감격하고 예수님이 나만 사랑하시고 너는 예수님만 사랑하면서 살면 돼! 지금은 내가 더 많이 성경을 알게 되었고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직분도 맡고 이런 저린 일로 섬기고 있는데 근데 나에게는 왜 그렇게 가슴 떨리는 첫사랑, 그 첫사랑의 애틋하고 뜨거운 이 은혜가 사라졌을까? 생각하는 사람이 돼야 해요. 내가 도대체 떨어진 곳이 어디일까? 생각해야 되요. 생각해야 되요. 그게 중요해요. 생각하면 길이 보여요. 어디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배신하고 이렇게 살기 싫은 부부가 억지로 사는 것처럼 이렇게 억지로 신앙생활하고 있을까? 내가 무엇일 잘못됐을까? 생각하는 거예요. 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생각이 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게 되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별로 없으면 생각을 많이 해도 질문만 계속 나오지 대답은 하나도 없어. 근데 이 질문이 한달, 두달, 석달, 넉달 계속 가느냐하면 그게 아니에요. 그냥 내 영혼이 왜 이럴까? 곤고할까? 그러다가도 다시 세상사에 휩쓸리면 그냥 잊어버리는 거예요. 고통이 올 때까지 그냥 또 잊어버리는 겁니다. 동물과 똑같은 삶이에요.
그래서 두 번째 필요한 것이 뭐냐면 생각을 돕는 것이 필요해요. 그래서 두 번째 필요한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해요. 그래서 혼자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가지고 멍하게 생각하고 있어봐야 그거 몇 십분 가지 않아서 결국 다 잊어버려져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에 그 말씀은 우리에게 생각나게 만들어 줘요.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의 과거를 한번 회상해 보세요. 여러분 자신이 벌거벗은 사람인 줄도 모르고 하나님 사랑을 배신한 사람인지도 몰랐잖아요. 그런 생각 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쫙 비취고 그 말씀이 깨달아져 보니까 아 그렇구나. 내가 하나님을 너무나 멀리 떠났구나. 주님께 너무나 불순종했구나. 정말 내가 하나님의 품을 너무나 많이 떠났구나. 이걸 깨달게 되잖아요. 그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우리를 생각나게 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귀를 기울여서 들어야 되요.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영혼의 변화도 신뢰할 수 없어요. 다시 말씀 드려요?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고 이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우치는 데 신앙의 기본이 있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항상 교회에 나아 올 때는 두 눈동자가 반짝반짝하게 빛나야 돼. 와가지고 그냥 와서 졸다가 가고 말이지 딴 생각이나 하고 말이지. 그렇게 하면 큰일 나요. 그건 하나님 앞에 계속 죄짓는 거예요. 마음은 점점 굳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는 점점 떠나 하나님의 사랑을 아무리 여러분들이 그리워해도 그 사랑을 찾을 수가 없어요. 오늘 여기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서 길거리를 다니고 순찰하는 사람을 만나고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이 애태우면서 그 사랑을 찾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던 것처럼 만날 수가 없다 이 얘기에요.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이거예요.
잘 깨달아야 되요. 자기 생각을 접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생각을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달으려고 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셔서 우리를 생각나게 하시는 데 하나님은 말씀하실 때 이미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거예요. 대개 성경도 잘 안 읽고 설교도 귀 기울여서 잘 듣지 않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잘해! 하나님이 오늘 아침에 내게 말씀하시기를. 오늘아침에 내게도 말씀하셨는데 언제 너한테도 또 가셨냐?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요. 생각을 접고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요. 그러면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해요.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쭉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세 번째는 뭐냐면 하나님 앞에 참회를 하는 거예요. 참회. 이 참회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뭐냐면 진실함이에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추거나 거짓말하거나 회피하거나 그러지 않고 정직하게 하나님, 자기를 생각하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의 생각을 잘 되게 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죠? 그러면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깨닫게 되잖아요. 그걸 가지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거예요. 정직하게 하나님 나는 이것도 잘못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 앞에 주님의 사랑을 배반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그래서 관심을 나 자신에게가 아니라 나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고 모욕을 받으신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많이 불명예를 안겨드렸나 그래서 주님이 얼마나 많이 나를 인해서 가슴아파하셨을까 이것을 생각하면서 주님 앞에 진실해져야 되요. 그리고 그 주님을 위로해 드리고 싶은 마음을 가져야 된다는 거예요.
이게 진실한 참회에요. 깊이 참회를 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빛으로 우리의 죄가 생각이 나고 참회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성령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역사하시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동안에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을 사랑했던 우리의 죄를 토해놓게 만드시고 마음이 어그러져서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움직이셔서 하나님이 새롭게 빚으시는 역사하시기 시작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를 고쳐놓으셔요. 변화시키시고 놀랍게 움직이시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루만지시는 우리를 고치시는, 그때 우리 아파요.
그래서 회개할 때는 모두 아파하면서 울죠. 하나님 너무나 멀리 떠나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렸을 때에 주님의 마음에 있었던 그 아픔이 우리에게 느껴지게 하시는 거예요. 그 다음에 철이 들잖아요. 옛날에 내가 데리고 있던 청년 하나가 전화가 한번 왔어요. 목사님 저 너무 살기가 힘들어요. 얘들 둘이 있는데 어찌나 그렇게 말을 안 듣는지 너무 힘들대요. 그래서 무슨 생각 하냐면 내가 하나님께 한대로 우리아이들에게 받는 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더래요. 진짜 하나님의 마음이 아프셨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바로 그거에요. 그리고 회개할 때는 주님이 우리에게 우리를 바라보며 아파 하셨던 그 아픔이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 회개를 해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이 아직 착한일 시작도 안했는데도 하나님이 기뻐해 주시는 거예요. 하나님이 기뻐해요. 회개하면 아직 착한일 시작도 안하고 하나님 앞에 손해 입힌 것 보상해 드리지도 않았는데도 하나님이 사랑해 주시는 게 느껴져요. 그게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그 가슴 저미는 사랑이에요. 그 사랑으로 돌아오는 여러분들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여기에 보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 뭐라 그래요? 내가 이제 다시는 놓치지 아니 하니라. 그래서 이렇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한 다음에는 그다음에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꼭 붙들고 놓지 말아야 되요. 어린아이처럼, 어린 아이가 엄마 손을 꼬 붙들고 놓지 않는 것처럼. 엄마가 손만 노면 자지러지듯이 입술이 새파랗게 되서 우는 것처럼.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내가 예수님의 사랑은 잃어버릴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내가 모든 것을 상실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하고는 살 수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의 손을 꼭 붙드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주님의 손을 꼭 붙들고 놓지 않는 이 신앙은 곧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이고 이 신앙은 곧 주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신앙이에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성도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어떠한 계명에도 전적으로 순종하는 마음과 완벽하게 일치해요. 그 틀이 같아요. 그 속에서 같은 향취가 풍겨나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약하게 살아가는 그래서 기도하지 않고는 살수 없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지 않고는 살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언젠가는 여러분도 그런 첫사랑을 잃어버릴 때도 있지만 회복한 때도 있었죠. 근데 다시 잃어버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분을 꼭 잡고 놓지 않는 그런 올곧음, 그렇게 하나님께만 붙어서 살고자하는 주님께 목매인 신앙의 마음이 없었죠? 그래서 신앙의 정절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기웃거리고 그래서 세상 사랑에 여러분 마음이 더럽혀져서 지금은 곤고하고 힘들게 살아가고 앞에 놓여 있는 이 한해의 무게가 여러분들에게 정말 적지 않게 다가오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모두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그 처음 사랑을 다시 회복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다시는 그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주님의 팔을 붙들고 놓지 않는 주님께 매달려 있는 신앙생활이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바랍니다.
2. 그 섬김
“저희가 그 나라와 주의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느9:35)
이 느헤미야는 유다나라가 망하고 이 사람도 역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시기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되어서 포로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그 귀환하는 무리들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가운데 오늘 우리 사경회에서 살펴보려고 하는 주제와 관련된 기도가 있기 때문에 오늘 이 본문을 택했습니다.
아침마다 우리는 다시 찾아야 할 것 이라는 시리즈를 가지고 하나님 말씀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에는 우리가 다시 찾아야할 것이 뭐라고 그랬죠? 첫사랑. 첫 사랑을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우리가 다시 찾아야할 것은 바로 그때 그 섬김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느헤미야가 탄식하듯이 하나님 앞에 민족을 대신해서 통회하고 있는 그 깊은 회개의 제목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큰 복을 주셨는데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였던 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된 것이죠. 이 느헤미야가 오늘 이 기도 속에서 하나님 앞에 아래고 있는바 요지는 이런 겁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큰 축복을 주셨죠. 그것은 이 느헤미야뿐 만이 아니라 대대손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찬송의 제목이 되고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애굽에서 자기들을 건져주신 그 구원에 놀라운 은혜입니다. 사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일제 36년을 살면서도 그렇게 치를 떨었는데 이 애굽에서 종살이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비하면 일제치하에 우리가 짓밟힌 생활은 그래도 대접받는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고대시대에 이집트 문명을 보면 그 이해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거성 문화들,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건축물들, 그 도로를 비롯해서 그 많은 문명의 발자취들에는 이름 없이 건설현장에서 죽어간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애굽이 한참 강성했을 때 그들이 전쟁을 일으킨 두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전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죠. 전쟁을 일으킨 두 가지 목표가 있었는데
첫째는 돌을 얻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노예들을 얻기 위해서 전쟁을 치렀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노예로 끌려오게 된 수많은 온간 잡족들과 함께 섞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던 겁니다. 그러니 그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고 그들이 얼마나 피나게 박해를 받았는지는 출애굽기에 보면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한마디로 아무 희망이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서 그렇게 비참하게 종살이를 하고 그 노역에 자기를 바치며 결국은 중노동 속에서 죽어간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는데 하나님께서 유독 그 이스라엘 백성들만 하나님이 애굽의 그 모진 치하에서 건져주신 것이죠. 이때에 많은 다른 종족들이 따라오긴 했지만 그러나 소수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 위대한 구원의 주역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을 하면할수록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였다는 것이죠. 그뿐만 아니죠. 하나님이 그들을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신기한 방법으로 인도해 주시면서 40년 동안 그 광야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그 속에서 수많은 전쟁과 목마름과 배고픔. 수많은 질병의 위협이 있었지만 거기서 하나님이 항상 능력이 모자라서 자기 백성을 안 지켜주신 적은 없었습니다. 늘 하나님이 보호하고 지켜 주셨죠. 그뿐만이 아니죠. 결국은 그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여호수아라는 지도자의 인도를 통해서 요단강을 기적으로 건너게 하시고 여리고성과 그 많은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격파해서 결국은 그들이 그 넓은 땅을 차지하고 거기에서 나라를 세우도록 만들어주신 것이죠. 사실 인류역사를 보면 이 팔레스타인 지방은 인류문명의 배꼽이라고 불리 울 정도로 거기는 모든 나라들이 생겨난 본고지에요.
그러니까 그 땅에서 이 수많은 원주민들이 있었는데 그 원주민들을 모두 물리치도록 만들어 주신 것도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결국은 거기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무시할 수 없는 나라가 서게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지켜주신 분도 하나님이셔요. 그뿐만이 아니죠. 이스라엘백성들이 그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누린 하나님의 그 많은 축복의 역사는 이루 다 설명할 수 없죠.
심지 않는 포도나무에서 열매를 먹고 짓지 않은 집에서 살고 그리고 황무지와 같은 곳을 주셨으면 개척을 해야 될 텐데 이미 잘 가꿔 놓은 성읍들은 그들에게 주셔서 원주민들은 도망가고 그들이 그 땅을 가운데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만나가 언제까지 내린 줄 아세요? 광야에서만 만나가 내린 게 아니라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첫 번째 수확하여서 먹고 살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얼마나 세심하게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자기의 백성들을 돌보셨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그뿐이 아니죠. 그렇게 정착하고 난 다음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서 주위에 있는 수많은 나라에게 얼마나 눈에 가시였겠습니까? 그러니까 틈만 있으면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아래로는 블레셋과 애굽으로 시작을 해서 위로는 앗수르와 그리고 새로 생겨나는 갈대아 민족 바벨론 등등이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압박했고 강 건너편에 있는 모압족속들이 수시로 공격을 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그 수많은 나라들에게 시달리면서도 하나님이 그때그때 마다 훌륭한 지도자들을 두시고 또 그들이 부르짖을 때에 응답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 나라를 보호하고 지켜 오셨습니다.
이런 특별한 은총을 받은 민족이 없단 말이죠. 그렇게 특별한 은총을 받은 민족인데 왜 그러면 나라를 잃어버리고 모두 심판을 받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하나님을 섬기던 그 땅은 황폐하고 하나님이 주신 기름진 그 들과 밭들은 이방인들의 말발굽아래 짓밟히게 되었을까? 결국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진실한 헌신의 삶에서 이탈해 버렸기 때문이다. 결국은 그들의 삶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고 결국은 하나님 앞에 당신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본분을 다하지 않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 민족을 치시고 나라를 빼앗기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이 주신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그 행복이 무엇이고 기쁨이 무엇인지를 그 백성들이 나라를 잃은 설움 속에서 깊이깊이 깨닫게 된 것이에요.
그러면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 인도, 땅을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축복, 그리고 외적들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보호, 이런 것을 모두 경험했기 때문에 오늘 하나님이 섬기지 않고 살아간 것이 그들에게 있어 큰 죄가 되었던 것이에요. 한번 생각해 보십쇼.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하나님의 크신 구원 행동이었죠. 그리고 건져내실 뿐만이 아니라 광야에서 인도하시고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땅을 정벌하게 하시고 나라가 선 다음에도 그 많은 사람들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있을 수 있었던 것도 누가 보호하셨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보호하셨기 때문 아니에요. 이 모든 것을 통틀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주실 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을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가물가물 하리만치 긴 세월이 지난 그 아브라함의 시대에 까지 이어지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런 것을 잃어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잊지 않고 기억하셔서 그들을 하나님이 불러내신 것이죠.
우리도 만찬가지이입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이 세상에서 하나님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죄 가운데 살면서 제 멋대로 먹고 마시면서 짐승처럼 살아가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고 죽어야 할 우리들을 하나님이 그런 특별한 사랑으로 건져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서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우리의 죄를 위해서 대신 고난을 받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고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까? 그 동기가 무엇이었을까요? 이 결국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이 우리의 구원의 은혜로 나타난 거죠.
오늘 우리들이 만약에 하나님 앞에 구원받지 못했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 있어서 인간의 참된 행복이 이 땅에 있는 자원이나 많이 긁어모으는데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 땅에 있는 재산이나 긁어모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갔을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사랑하고 이 세상이 있는 것들 얻기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면서 몸부림치다가 결국은 죽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놓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이 땅에 있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가 참으로 빛나는 인생,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많이 소유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되느냐 그리고 우리의 인생에 참된 가치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아서 척박하고 괴로운 이 세상에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삶, 많은 사람에게 해택을 베풀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생명을 나누어주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참된 가치다. 이렇게 기특한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저는 요즘에 와서 부쩍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10년 동안은 그냥 교회를 세웠으니까 한 걸음 한 걸음 그냥 잘 해서 간다. 그런 생각 밖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도 제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죠. 그래도 하나님께서 여러분같이 좋은 성도들을 만나게 하셔서 10년 동안 살아오게 하셨습니다. 10년 동안 하나님 앞에 부족한 나 때문에는 괴롭고 마음이 힘들고 그랬지만 사실 성도들 때문에 마음을 막 괴로워하고 그런 적이 없다고 하면 목회에서 거짓말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많지 않았어요. 대부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되고 성숙해가는 교인들을 보면서 기뻐하는 그러한 10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렇게 생각해보면 그거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은혜를 주셔서 이제 여기 이 지역에 자리를 잡게 하시고 곤고하고 상한 영혼들을 많이 주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 앞에 변화되어 은혜를 받았어요. 그래서 새사람이 되 갑니다. 요즘도 생각만 하면 즐거운 게 그 부인 혼자 교회 나오고 남편은 억지로 마치 고삐에 메인 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가정 평화의 밧줄에 묶여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끌려나오던 사람들 그래서 자기의 사명은 아내를 차 태워서 교회에 데려다 주는 거라고 그러던 사람들이 어떻게 긴 세월 지나는 동안에 변화되지 않다가 요즘에 하나님께서 만나주셔서 변화가 일어나요. 아내들이 깜짝 놀라요. 그래서 야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그래서 행복한 가정이 되고 그래요. 얼마나 감사해요. 참 좋잖아요. 근데 요즘에 와서는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많은데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 그리고 하나님 은혜에 사로잡힌 사람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알고 감격하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이렇게 모아서 뭐 하시려고 할까 그때 느낀 결론이 뭐냐면 아 아제까지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변화 받고 새로워지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고 앞으로도 그런 일들은 계속 일어나야 하고 또 일어 날 것이지만 이제는 이렇게 모여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하나님이 한대 모으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이 먼지 밖에 나지 않는 척박한 세상 한 복판을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모아 놓으셨구나!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죠.
어떤 강이든지 간에 시원지가 있습니다. 시원지에는 반드시 샘이 있어요. 그 샘에서 흘러나온 물이 한 강의 발원지가 되고 흘러나온 실개천에 수많은 개울들과 합쳐져서 거친 들판을 적시면서 흐르는 큰 강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게 그거예요. 하나님, 이제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이런 큰 구원에 은혜를 받았으니까 이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제까지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무엇을 해야 될지도 모르면서 세상에서 방황했지만 이제는 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디로 흘러가야 할지도 알게 되었고 어떻게 흘러가야 될 지도 알게 되었사오니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하늘에 있는 자원을 많이 주셔서 그 은혜의 힘으로 또 이 땅에 있는 자원도 많이 주셔서 이 땅에 있는 그 자원과 하늘은혜의 자원이 섞여서 이 세상 한복판을 흘러가도록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주님을 알지 못하여 고통 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많이 보여주고 그리고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고통 받는 자들 가까이 계시며 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이신지를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시고 그래서 교회 전체가 이 메마른 벌판을 일직선으로 흘러가지 말고 왜? 일직선으로 흐르면 금방 바다로 가버리니까. 두루 적실 땅이 별루 없잖아요. 굽이쳐 흐르게 해주십시오. 굽이쳐 흘러서 더 많은 땅을 비옥하게 하고 그래서 성도들이 스쳐지나간 사람들 마다 교회의 섬김이 스치고 지나가는 곳마다 많은 영혼들이 변화되고 그래서 새 생명을 찾고 이 죄악 되고 정의를 잃어버린 부정직한 세상이 변해서 깨끗하고 하나님 앞에 받으심 직한 나라가 되도록 그렇게 기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쇼. 하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요즘 이렇게 지나가면 학교를 보면 학교를 하고 싶고 고아원을 보면 고아원을 하고 싶고 왜 그렇게 밖에 학교를 못할까. 학생들은 왜 그렇게 데려다가 괴롭힐까? 그 세상에 사람 잡는 거지. 오죽했으면 카이스트의 러플린 총장이 이야기하기를 한국학생들은 고3때 평생 공부할 연료를 다 써버린대요. 공부하는데 하도 지겨워 가지고 대학에 들어가면 이제 놀 궁리부터 한다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나라가 이 모양이다. 그러니까 고쳐라 그 얘기죠. 우리는 왜 이렇게 밖에 교육을 못시킬까. 학교를 다녀도 온통 학교 선생 ,학원 선생, 엄마, 아빠, 아이 할 것 없이 눈에 불을 켜고 그 아이가 학교 다니면서 사람 되는 것에는 대한 아무 관심도 없어요. 어떻게 하면 기계처럼 공부를 시켜서 좋은 학교 보낼까. 눈이 토끼처럼 빨개가지고 그 일을 위해서 매달리고 그 일에 성공한 사람은 교육을 이긴 사람이고 진 사람은 교육에서 실패한 사람이 되니 이 불공평과 불합리가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모든 망가진 세상을 고치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그 많은 죄와 어두움 속에서 건져내신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구원에 은혜뿐입니까? 구원 받은 후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고아원에 맡기셨나요? 아니면 광야에 텐트 치고 버려두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죄와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 내셔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삼으신 다음에 그 다음에 어떻게 하셨어요? 그다음에 이제 우리의 신앙의 광야길이 시작이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도 우리가 언제나 순종 했어요? 그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꼭 우리의 모습 아니에요? 그 좋다고 홍해를 건넜다고 하나님을 찬송하던 사람이 삼일 길도 가지 못해서 그다음에 목이 마르니까 에이 씨 하나님 왜 우릴 이리로 데리고 왔냐고. 하나님을 막 원망하고 이러잖아요. 우리가 바로 그 모습 아니에요? 은혜 받아서 눈물 펑펑 흘리고 할렐루야 아멘 이제 이 생명도 주께 바치겠사오니 하여튼 골백번도 더 받쳤어 하여튼. 한번도 드린 적은 없지. 그렇게 이제 내가 주님만 위해 살겠습니다. 이제 전 주님 것 입니다. 그렇게 했지만 그러나 사실은 실제의 우리의 삶을 보면 하나님을 만난 감격보다도 더 많이 주님을 떠나간 죄악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 아니에요. 그래서 멀리 떠나서 하나님 개의치 않고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불순종하고 그래요. 그러면 또 이제 끝까지 불순종하고 하나님 없이 살든지. 그런데 그렇게 살 수가 있나. 자기가 좋아서 세상 따라 나가고 불순종 했지만 마지막 돌아오는 것은 뭐냐. 아주 쓰디 쓴 죄의 열매, 그리고 하나님 멀리 떠날 때 결국은 살아갈 수 없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 밀려왔죠. 견디기 힘든 고통과 그다음에 그 괴로움이 밀려오잖아요. 악함이죠. 하나님을 멀리 떠났을 땐 그런 고통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셔요. 결국은 어떻게? 지발로 떠났다가 또 지발로 돌아오면서 하나님 나를 용서해달라고 빌죠.
그래서 하나님이 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서 용서해주시고 다시 화목케 해주시고 또 거리감도 없애시고 그래서 은혜를 주시면 또 한동안 헤헤거리면서 주님을 따라다녀요. 그동안에 교회 가서 또 봉사도 껍죽껍죽하고 안 바치던 십일조도 또 몇 번 해보고 그러다가 그 다음에 은혜 떨어지면 쭉 미끄러져요. 그러면서 무슨 생각이드냐면 하나님은 나만 싫어해. 그리고 다시 세상 생각에 향수에 젖는 거예요. 또 다시 타락하고, 범죄하고, 하나님 은혜에서 미끄러져가요.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교회 다니면서 그 짓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또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괴롭다 그러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그것을 하여튼 수없이 반복하면서 여기까지 오는 거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광야의 긴 세월동안 하나님을 얼마나 많이 원망하고 범죄 했어요. 그래도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 쓸어버리지 아니하시고 결국은 가나안땅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그런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와 사랑 가운데 주님을 멀리 떠나고 방탕하기도 하고 또 회개하기도 하고 다시 은혜받기도하면서 오늘 이 시점에 서 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이만큼이나 먹고 살고 이만큼이나 마음에 평화를 누리고 또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서 목양을 받고 하나님 섬기고 살아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곤고하고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고 회개하며 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말씀으로 인도해주시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살아가다가 영혼의 양식이 떨어져서 궁핍할 쯤 되면 하나님이 은혜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다시 한번 힘을 얻게 만들어 주시는 거죠.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붙들어 주세요.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어요? 하나님의 이 모든 은혜에는 항상 하나님의 계획이 들어있어요. 그 계획에 따라 사는 것이 바로 소명이에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구해 놓으시고, 죄에서 구해 놓으시면 그에게 계획이 없겠어요?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에 대한 바람이 없겠어요? 그 바람이 없으면 그건 짐승이지 말이죠. 아이를 낳아놓으면 그 아이가 그렇게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이런 아이로 자라고 이런 사람이 되고 그래서 앞으로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사회에 기여하는 자식이 되었으면 좋겠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그런 바람이 부모들에게 모두 있잖아요. 그게 바로 사랑 속에 깃들인 계획이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 깃들인 하나님의 소명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 그리고 우리들 인생이 곤고하고 어려울 때 건져주신 그 수많은 은혜의 도움들 하나님이 대가를 바라고 그런 걸 하신 건 아니거든요. 대가를 바라셨으면 그것이 은혜가 아니죠. 그렇죠? 은혜라고 하는 것 자체는 하나님께서 대가가 없이 거저 주시는 거예요. 그게 은혜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져주셨어요.
무슨 대가를 바라고 우리를 그 죄에서 건져주신 것이 아니에요. 죄에 매여서 하나님도 모르고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목적도 모르고 그렇게 허무한데 굴복하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하나님이 너무나 불쌍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깊은 어두움 속에서 하나님이 건져주신 거예요. 우리를 구원해 주신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죄인에 비참한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에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이고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로 나타났고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를 보면 갈피갈피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의 기억이 나지 않는 삶의 발자취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조금만 마음을 가다듬고 우리의 인생을 가만히 돌아다보면 주님의 특별한 은혜와 인도, 주님의 그 은혜의 인도와 보호가 항상 있었단 말이죠. 그래서 영 죽을 우리들을 살리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며 사는 것이 신자의 본분이에요.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은총이 잘 나타난 것이 뭐냐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난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물이 없을 때 물을 공급받고 떡이 없을 때 떡을 공급받고 영혼이 갈급할 때 하나님이 은혜에 생수를 주시고 하셨지만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거예요. 그 하나의 기초라는 것이 뭐예요? 그게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요.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사람들이에요.
우리를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살려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일평생동안 가슴에서 잊어버리면 안 되는 거죠. 하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그것을 잊지 않고 그 십자가에 대한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이 우리 모든 삶의 동기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이에요.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중심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착한 성도의 눈에는 항상 눈물이 고여 있어요. 이 쓸데없는 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구나. 나의 인생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빗 덩어리다. 이것을 돌아보아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저것을 돌아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에 빗진 것이고 또 이것을 생각해도 하나님의 은혜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그게 바로 착한신자의 모습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마음속에서 감사가 계속 샘솟는 거예요.
이 세상 나를 버려도 나 관계없도다. 내 한량없는 영광은 십자가뿐이라.
아무것도 소용없고 주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 그 은혜가 너무나 커서 그래서 그 사랑 받는 것이 내게 분에 넘친다는 그 마음이 착한 신자의 마음이에요. 근데 은혜가 떨어져요. 그러면 어떤 신자가 되요? 못된 신자가 되요. 못된 신자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냐면 하나님이 자기를 이런 아무 희망이 없는 죄 가운데서 건져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이 크신 구원을 그저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인 것처럼 생각 한다 이 애기예요. 이게 결국은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진 것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을 때에는 사소한 것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지만 신자가 은혜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내게는 우리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 하는 고백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라 이 말이죠.
이 세상에 있는 많은 하나님의 축복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그래서 주님이 주신 모든 축복들은 하나님을 기념하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도록 우리를 불러내는 소명이 근거가 되는 거예요. 다시 한번 말씀드릴 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높이고 공경하도록 불러내는 소명의 근거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를 생각할 때는 항상 이 놀라운 은혜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계획이 무엇일까? 그런 계획을 나에게 세우셨으면 이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신자의 중요한 의무에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 앞에 착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이 은혜에 대한 감사가 마음속에 항상 있어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나를 소망이 없는 이 세상 죄악 가운데 건져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만으로도 하나님 앞에 너무나 감사하고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한번 보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축복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져요. 하나는 일반 섭리를 통해서 오는 축복이고 또 하나는 일반 섭리가 아니라 영혼에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시는 축복이에요. 그러나 이 두개가 나누어지기는 하지만 그러나 완전히 떨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구분되긴 하지만 두 개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에요. 자 한번 보세요. 우리가 남들이 알지 못하는 매우 기쁜 일이 생겼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되죠. 특별히 신자가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자신의 일반적인 모든 삶에 대한 영적 해석능력이 탁월하게 되요. 그래서 어떤 일이 생겨도 항상 마음속에서 이것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을 하고 그 우연히 이루어진 것 같은 일 배후에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내 영혼을 훈계하시기 위해 나를 훈계하시기 위해서 이 일을 허락하셨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그러한 일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은혜의 손길을 느끼게 되는 거예요.
옛날에 제가 청년들을 가르칠 때 어느 청년 하나가 나와서 간증을 해요. 은혜 많이 받고 이제 예배시간마다 한사람씩 간증을 하는데 그런 얘기를 해요. 너무나 가난하고 어렵던 시절이었는데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는 지금 나 쓸 것은 필요 없지만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제게 돈이 조금 필요합니다. 하나님 만원만 보내 주십시오. 그때는 만원이 꽤 큰 돈이었어요. 그러면 기가 막히게 그 만원이 생긴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하냐면 그 만원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렇게 살아계셔서 내 기도를 들어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내 간증 들으면서도 왜 그 하필 만원을 보내 달라고 그랬냐? 한 십만 원쯤 보내달라고 그러지. 그 열 번 기도할 거 한번만 기도해도 되지 않냐? 그런데 하여튼 가슴에 만 원짜리를 품고 기도를 하면 그렇게 눈물이 나더래요.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이렇게 꼭 필요할 때 하나님이 나에게 보내 주시는 구나. 아 정말 감사하다. 생긴 것은 만 원짜리 한 장 생겼는데 만원을 하나님이 주신 사건이 자기의 영혼을 어루만지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만들어준다 말이에요. 이게 사실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에요. 그다음에는 그 만원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면서 천 원씩 쓴대요. 참 지금도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그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잊혀지질 않아요. 기도하면서 천 원씩 이천 원씩 필요한데 쓴다 이거에요. 그렇게 일반 섭리를 통해서 들어오는 하나님의 축복이 이 깨어 있고 은혜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항상 영적인 축복의 효과를 가져다 줘요. 그래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백을 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제 그렇게 일반 섭리를 통해서 들어오는 축복도 있고 또 구분되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돈 주신 것도 아니고 새집 주신 것도 아니고 좋은 차 주신 것도 아니고 무슨 하나님이 눈에 보이는 것을 해 주신 것이 아닌데도 하나님 앞에 큰 은혜를 받는 때가 있죠. 자기 핍박하는 남편,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자식들도 속 썩이고 경제적으로도 어렵고 별루 변하는 것 없어도 어느 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들어요. 그래서 그 은혜의 말씀의 자기를 깨우쳐 성령님이 역사해서 가슴을 찔러. 그러면서 변화가 일어나요. 자기의 죄를 회개하게 되고 이제껏 자기가 하나님 거스르고 살았던 불순종했던 과거의 사건들이 눈에 쭉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프도록 회개를 하고 아리도록 하나님 앞에 뉘우쳐요. 그러고 나면 하나님이 그 아픔 뒤에 하나님의 위로를 공급해 주세요.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많은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이 이제까지 내가 살아왔던 모든 삶을 지켜보셨구나. 지금도 나를 사랑하시는 구나. 하는 이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가슴속에 쭉 밀려오고 그러고 이제껏 까지 마음에 있었던 근심이나 염려들이 쭉 물러가면서 마음속에서 그렇다 이제 내가 사랑할 분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밖에 없구나. 이제는 내가 한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지. 하는 이 은혜의 마음이 가슴속에서 꽉 밀려오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이 영혼에 직접 간섭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방법이에요. 근데 말이에요 잘 들어 보세요. 이렇게 영혼에 직접 개입하셔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많이 있어야지만 일반 섭리를 통해서 들어오는 하나님의 많은 축복들이 영혼을 어루만지고 지나가는 효과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면 영적으로 생각하는 기질이 신자의 마음속에 은혜로 말미암아 생기게 될 때 그때 모든 것들을 일반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물질을 주시거나 환경 변화를 주시거나 심지어 고난을 당하게 하실 때도 그것이 고난과 그 축복의 사건을 통해서 신자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영혼의 축복으로 이어지게 되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기도도 안하고 은혜도 안 받고 그러고 까불고 신앙생활도 안하고 말이지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이 큰 축복을 주셔도 아이고 진짜 금년에 재수 참 좋네. 그러고 끝난데 이 얘기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많은 걸 주셔도 그 배후에서 공급해 주시고 그 공급해 주시는 것을 통해서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느껴요 못 느껴요? 못 느낀단 말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배은망덕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은혜에요. 은혜.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에 반응하는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되겠는가? 이게 오늘 우리의 결론들입니다. 이렇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성도의 반응으로서의 삶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이게 바로 헌신의 삶이에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인간의 삶의 반응은 헌신이어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그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셔서 그래서 은혜를 물 붓듯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잡히게 된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살 수 밖에 없는 거예요. 주님을 섬기며 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고통이에요. 고통. 오죽 했으면 예수님이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양식이 있으니 그 양식은 내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양식이라고 할 것 같으면 예수님에게 만약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시지 못하게 했다면 양식이 없는 삶의 고통이 예수님의 마음에 밀려올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당신의 양식이라고 한 그 말씀의 표현은 그것이 곧 자신의 생명이라고 하시는 것과 동일한 말씀이라는 것이죠.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지 않을 수 없는 헌신의 이유가 마련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속에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을 거예요.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소명이군요. 그러면 저는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야 될 이유가 별로 없겠군요. 왜? 하나님이 은혜를 전 좀 안주시거나 덜 주셨거든요. 내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어요.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셨어요, 주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여러분들이 거절했어요?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이겠어요. 하나님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죄에서 건져 놓으셨을 때에 그 한사람 한사람이 강물처럼 이 세상을 흘러가면서 이 척박하고 메마른 땅을 두루 적셔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고 그래서 망가진 이 창조의 세계를 고치는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셨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얼마나 이 은혜를 퍼주고 싶어 하실 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같이 악한 죄인들도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서 새사람이 되었다 그러면 이렇게 기쁜데 이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그를 창조하신 주인이신 하나님, 그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실 목적을 가지신 하나님이 그들이 변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그들이 은혜를 받고 그들이 새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을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리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알잖아요.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서 보면 하나님의 이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퍼서 나누어 주는 그런 것으로 묘사가 된다 이거죠. 너희는 이제 금이나 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가져가라. 이게 배에서 생수의 강처럼 넘쳐서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흘러들어갈 때 그것이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라고 할 것 같으면 무슨 자격을 가지고 거기에 나와서 그것을 먹고 마실 수가 있겠어요? 더군다나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예수님이 그들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그 피로 그들의 죄와 더러움을 씻어주신 사람들인데 그들이 나와서 그 샘에서 은혜의 물을 마시고 모든 사람이 하늘의 새 힘을 얻어서 주님의 영광과 그 은혜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겠어요? 하나님은 절대로 은혜에 인색하신 하나님이 아니에요. 만약에 은혜에 대해서 인색하신 하나님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이 더러운 인간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셨을 리가 없죠. 성령님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을 리가 없죠. 하나님은 절대로 은혜에 박절하신 분이 아니에요.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넉넉히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란 말이죠. 문제는 뭐냐.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한 삶을 살지 못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은혜에 박절하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주님이 주시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그 은혜가 우리에게 많이 주어지고 하나님은 간절한 기대를 가지고 지금이라도 여러분들이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리고 핍절한 삶에서 변화되어서 하늘에 있는 은혜의 자원과 이 땅에 있는 물질의 자원을 함께 누려서 그 두개를 함께 섞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깊이 공경함으로 이 어두운 세상을 흘러가는 강물처럼 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거절해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아가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순종이 필요해요. 그게 싫은 거예요. 자기는 자기의 뜻대로 살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살아서는 어느 곳에서나 풍성한 삶이 있을 수 없는 거예요. 불순종하고 죄악 가운데 살면서 하늘의 자원을 누리는 사람들 봤습니까? 죄악 가운데 살고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계획을 따라 살지 않는 배역한 길 걸어가면서도 그가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 은혜의 자원을 누리면서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는 사람들을 봤어요. 그런 예는 없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이 은혜를 누리고 이 은혜 속에서 살아가기를 하나님이 너무나 간절히 바랍니다.
요즘은 뭐 교회에 매여서 어디 나가지도 못하지만 예전에 가끔 부흥회 다니고 집회 다닐 때 보면 참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에요. 지금도 참 잊혀지지 않는데 어딘가 집회를 갔더니 진짜 설교가 끝났는데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를 막 부어 주셔요. 근데 말이죠. 그 양복입고 점잖게 앉은 사람들 다 빗겨가고 말이죠. 그 머리를 빡빡 깎고 거의 티셔츠라기보다는 러닝에 가까운 차림으로 앉아서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데요. 나중에 제가 물어봤어요. 몇 학년이냐고. 중학교 1학년이에요. 그 또 먹지도 못해서 꽤 재재하고 말이에요. 키도 조금해요. 국민 학교 4학년이나 될까 보여요. 그런데 그냥 하나님의 은혜가. 그 어린 아이가 가슴을 치면서 목 놓아 울면서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니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은사가 임해요. 하나님은 말이죠. 진짜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은 모두 그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모두 그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자신들이 그 은혜를 거절하고 불순종하니까 그 은혜를 못 받는 거예요. 오늘도 여러분 회개만 해봐요.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교만을 버려요. 뭐가 그렇게 교만할 게 뭐가 있어요. 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인데. 하나님 전 쓰레깁니다. 전 정말 걸렙니다. 아무 쓸모없는 이 비천하고 더러운 죄인입니다. 하나님 할 말이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 위해서 당신의 고귀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죠. 하나님 제가 어떻게 그 사랑을 감당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도해 봐요. 그러면 회개가 쏟아질 거예요. 나머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나머지는. 그렇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려 봐요. 하나님이 뭐는 안 주시겠어요. 그렇게 사랑스러운데 하나님이 뭐를 안 주시겠어요. 뭐가 아까우시겠어요. 사랑스러워 봐요. 뭐가 아까워요. 우리같이 악한 사람도 사랑스러우면 뭐든지 다 주고 싶으신데 사랑스러워 봐요. 그 하나님이 무엇을 아까워하시겠어요.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주시는 데 자기가 거절한 거죠.
또 하나 이런 경우도 있어요. 하나님이 이미 은혜를 주셨는데도 이거를 제대로 알고 감사할 줄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떻게? 은혜를 받아서 이미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도 마음속에 감사함이 없어요. 그러니까 어떻게? 흘러갈 수가 없는 거예요. 은혜를 많이 하나님이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중에 하나가 뭐냐면 성도가 회상하는 거예요. 뭐를 회상 하냐면 곤고한 날에 이제껏 주신 주님의 은혜를 회상하는 거예요. 은혜를 많이 회상해서 주님 앞에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주님이 나에게 안주신 것이 없구나. 깨닫게 되는 거예요. 한번 가만히 이 시간에도 마음속에서 헤아려 보세요.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이 무엇인가? 내게 주신 생명, 내게 주신 은혜, 내게 주신 가족, 내게 주신 사랑하는 사람들, 내게 주신 교회, 내게 주신 이 목양의 은혜, 이걸 생각하면 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하나 둘씩 헤아리다 보면 내게 없는 것이 없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가슴속에 살아 역사할 때는 이런 거를 깨달아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요. 아 정말 하나님이 내게 안 베풀어 주신 것이 없어요. 이걸 깨달아요. 은혜가 사라지면 배은망덕하게 되는 거예요. 이런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의 사명은 뭐냐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을 살아가는 날면 우리의 인생에서 남는 것이지 하나님 섬기면서 살다가지 않는 날은 우리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어요. 그걸 여러분 기억해야 됩니다.
언젠가 한번 국군 장교들이 별들도 보이고 거기에 가서 한번 집회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그 어느 별 둘인가 달았는데 별 둘이였던 어떤 장군이 간증을 하는 거예요. 그 간증이 뭐냐면 참 그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사실 별 둘이나 단다는 것이 요즘도 물론 어렵지만 옛날에는 더 사람이 적었으니까 더 어려웠잖아요. 그래서 그 별 둘을 달고 휘하에 몇 만 명의 부하를 거느리면서 이제 사단을 지휘하니 그 사람은 얼마나 바쁘겠어요. 근데 이분이 어느 교회의 집사님이셨어요. 어느 날 처음엔 그냥 별 하나 더 달고 나니까 날아갈 것 같지 않겠어요. 그렇죠. 별 두개 딱 달고 별 하나 달고 다닐 때 그랬는데 두개를 다니까 벌써 그 별만 해도 양쪽에 두개면 네 개 아니에요 그 얼마나.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어요. 내복에다가도 달고 싶었겠죠. 이 대령에서 별 하나로 올라가면 군인들 얘기 하는 게 아흔 아홉 가지가 달라진대요. 그러니 별 하나에서 별 둘 올라가면 몇 가지가 달라지겠어요. 그러니까 그렇게 장군이 별 둘을 달고 이제는 사단장이 되어서 말이죠. 몇 만 명의 군인들 이끌고 지휘하고 하니까 이 사람이 얼마나 감격했겠어요. 그런데 그 감격이 사라지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래요. 은혜를 받은 거죠. 어느 순간에. 내가 대한민국의 별 둘인데, 이게 참 이 땅에 살아 있을 때는 참 중요한 거다 이거죠. 그렇죠? 그리고 시골에 특히 지나가면 별 두개 달고 그냥 쫙 달리면 그냥 정신없이 들 경례를 붙이잖아요. 이건 참 좋은 건데 근데 하늘나라에 갔을 때 하나님이 너 뭐하다 왔니 하면 이렇게 물으실 때, 아 나 별 둘 달다가 왔습니다. 얘기하면 하나님이 난 너보다 별이 더 많다 그러실 거 같다는 거예요. 그거는 하나님 앞에 가서 내세울 수 있는 게 못 되겠더라 는 거죠. 그러면 도대체 뭘 할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너무 시간이 없고 바쁘니까 별 두개쯤 되면 외출도 맘대로 못합니다. 그렇게 바쁘고 정신이 없으니까 뭘 시간을 내서 교회를 봉사할 수도 없고 그런 거야. 그래서 인제 곰곰이 생각했대요. 그래도 하나님 나라에 가서 좀 뭐하다 왔냐? 그러면 이런 것 좀 했습니다. 말씀을 드려야 할 텐데 할 게 없더라는 거죠. 가만히 생각하니까 생각이 났대요. 뭐냐면 별을 단 사람들은 차가 두 대가 나옵니다. 찜차가 한 대 나오고 좋은 승용차가 한 대 또 나옵니다. 근데 보니까 자기네 부대에 군목이 계시는 데 이분이 얼마나 일이 많은 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이 부대에서 설교하고 그다음에 저 부대로 저 부대에서 설교하고 이 부대로 주일날 다섯 군데를 옮겨 다니면서 설교를 하는데 뭐 그 가난한 군목이 차가 있을 리가 없죠. 그러니까 자기 군인 기사를 불러서 그랬대요. 야, 임마 너 내말 잘 들어. 넌 일요일만 딱 되면 아무소리 하지 말고 내 승용차를 몰고 그 목사님한테 가서 하루 종일 그 목사님 운전병 노릇을 해라. 그래서 이 교회 끝나면 저 교회로 저 교회 끝나면 이 교회로 가라. 그래가지고 그 차를 보냈어요. 그런데 거기 마침 온 군목이 밥풀떼기 두개였대요. 중위. 출근한 일요일 아침에 보니까 웬 사단장 차가 오는 거예요. 경례를 정신없이 부쳤지. 그런데 사단장은 없고 운전병만 내리는 거예요. 목사님 타십시오. 그러니까 내가 이거를 왜 타냐고 그랬더니. 사단장님이 목사님을 태워서 이 부대 설교 끝나면 저부대로 하루 종일 기사노릇 하라 그러셨습니다. 그게 밥풀떼기 두개자리 중위가 그걸 타겠어요? 내가 중위라 그래도 절대 안타지. 그게 가시방석이지 그게 가시 방석이지. 그렇다고 해서 자동차 앞에 별 두개 떼고 밥풀 두개 붙일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절대로 나는 안탄다고 잔소리하지 말고 빨리 사단장님한테 가져가래요. 사단장한테 가져갔더니 사단장이 더 바가지로 욕을 한 거예요. 넌 별 둘 얘기를 들을래, 밥풀 둘 얘기를 들을래. 빨리 가라고! 그래서 그분은 간증을 하면서 그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도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너 뭐했냐? 그러면 전 평생 군인 했고요 마지막에는 별 둘 달고 군대 생활 했습니다. 그래서 날 위해서 뭘 섬겼냐? 제가 좋은 승용차가 있었는데 주일날마다 목사님 빌려 드렸습니다. 그러면 그건 하나님이 그래도 별 두개 달았다는 거보다는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하실 거 같다는 직감이 들더라는 거죠.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임금이 된 들 만왕의 왕이 하나님이신데 그게 하나님 앞에 훌륭한 것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역사를 보면 쓰레기 같은 임금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그들 중에 하나가 된 들 하나님이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겠습니까? 또 돈이 많아서 한번 누렸다고 칩시다. 돈 그렇게 많으면 그거 뭐 가지고 갑니까? 그리고 돈 그렇게 많아도 아이고 돈 만들어 봐야 하나님 창조하신 세상에서 펄프 꺼내가지고 찍어서 그림 그려 놓은 종이 짝인데 하나님이 그거보다 더 많으시지. 그러니까 부자로 살았다는 것도 하나님 앞에 자랑거리가 될 리가 있습니까? 호의호식하고 영화를 누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런 거 하라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놓으셨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사람들에게 영광이 되고 영화가 되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님 나라에 가면 그런 것들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단 말이죠. 아무것도 아니란 말이죠. 그러면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이제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은 하나님은 여러분들에게 뭔 지위를 누리다가 왔냐? 그거 물어보시겠어요? 그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나님 섬기면서 살아 왔나. 하나님이 그 성적표를 보시지 않겠어요. 그래서 하늘나라에는 내 생각이 그래요. 아 뭐 성경도 어느 정도 근거가 있어요. 하늘나라에는 그 사람이 구원받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은 생명책도 있지만 또 하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면서 일생을 살았는가 하는 게 기록 돼 있단 말이죠. 그 기록을 볼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 어떻게 살았나하고 한번 보니까 모두 다 빨간 걸로만 기록이 되어 있어요. 이게 전과에요. 은혜 받고 탈영하고 말이지 사명 맡겨 놓으니까 도망가고 말이지 요나처럼. 다시스로 가다가 풍랑을 만났음. 그리고 회개했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음. 며칠 후에 다시 도망쳤음. 이렇게 해가지고 계속 그렇게 점철되는 거야 인생이. 그럼 그 인생은 얼마나 고달픈 인생길이겠어요. 그리고 고달픈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그는 또 얼마나 고달픈 삶을 살았겠어요. 우리들이 말이 하나님 앞에 얻어맞고 다시 돌아왔더니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다. 그게 딱 두 문장 밖에 안 되지만 그러나 실제 한번 그걸 우리의 이력으로 진짜로 한번 실험해 보려고 해보라고 이게 얼마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고민을 해야 하는지 어디 한번 생각을 해보라 이 얘기에요. 이렇게 설교하니까 곳곳에서 한숨을 쉬면서 아 내가 지금 그 소리가 내 소리네 그런 사람 있어요. 그런 건 하나님 앞에 기록에 남지 않아요. 중요한 건 뭐냐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한 모퉁이에 살아서 주님이 베풀어 주신 큰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뭘 하면서 살았느냐? 그게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한 구석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산 사람들, 그 사람들은 정말 복이 있는 사람들이에요. 주여 꽃처럼 향기 나는 나의 생활이 아니어도 나는 주님이 좋을 수밖에 없어요. 주 예수 나의 당신이여.
그래서 인생의 참다운 가치는 삶의 양태에 있는 게 아니에요. 얼마나 높은 지위를 누리느냐 얼마나 많은 소유를 갖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 있느냐 그런 거에 달린 게 아니에요. 비록 알아주는 사람 없고 이름도 없고 빛도 없어서 누구도 그 이름 석자 하나 기억해 주는 사람 없어도 주님의 마음에 기억되는 사람, 이 망가진 세상 한 구석에서 주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흐느껴 감격하면서 망가진 세상을 한 구석이라도 고치기 위해서 애썼던 사람 그래서 그곳에서 주님의 이름이 나타나게 해 주었던 사람 그런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크게 존 귀히 여김을 받는 거예요.
오늘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이 마음 아파하시는 것을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잖아요. 그 넓은 땅과 기름진 땅을 하나님이 주셨지만 그러나 그들을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기억하셨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셨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누리게 하셨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다 불어버리셨어요. 그래서 그들은 껍질만 가진 사람들이 되어 버렸던 것이에요. 그래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쓰신다고 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은혜요 말할 수 없는 감격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쓰시면 하나님이 거저 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쓰시면 쓰실수록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물 붓듯 부어주셔요. 물질을 하나님이 여러분 것 빌려서 쓰시면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겠어요? 하나님이 갚아 주시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구원 받은 백성들이 세상을 두루 적시면서 흘러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자원이 필요해요. 하늘의 자원과 이 땅의 자원이 함께 필요해요. 누가 그 자원이 되겠어요. 원 공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각자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자원을 공급받은 사람들이에요. 그러면 내 영혼에 베풀어주신 이 놀라운 은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내게 주신 재능, 내게 주신 물질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에요. 원래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인데 창고를 열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이에요. 그 맡겨주신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훌륭하게 사용하면 하나님이 더 많은 것을 맡기시고 또 그것을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거죠.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데 그것만 해도 하나님 앞에 한없는 감사의 제목 아닙니까?
우리 옛날에 초등학교 다닐 때는 선생님이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야, 너 가서 걸레 하나 빨아 올래? 그것만 시키면 가슴이 벌렁벌렁 뛰죠. 야, 선생님이 나보고 걸레를 빨아 오라고 시켰다. 그 많은 학생 중에서. 요즘은 어떠냐? 그랬더니, 야 너 가서 이것 좀 해 올래? 그러면 애들이 그런데요. 싫어요. 그런대요.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데 얼마나 영광스러워요. 하나님이 쓰시겠다는 데. 경기도에 가면 신학교가 하나 있습니다. 다른 신학교들은 교단이 있으니까 교단에서 교회가 돕기도 하고 교회가 장학금도 내고 이러죠. 그 학교는 교단이 없어요. 거기에 이사로 계신 목사님을 제가 아는데 그 교회에서는 그 학교에 일년에 일억씩 내 놓는 답니다. 참 교회도 크지만 하나님 앞에 놀라운 은혜죠. 근데 그분이 얘기하는 거예요. 다른 학교의 이사회에 가면 싸움박질 할 때가 많은 데 이 학교 이사회만 가면 자기는 은혜를 받고 온대요. 아니 목사님 어떻게 그렇게 은혜를 받고 오십니까? 이번에도 이사회가 있어서 갔대요. 그러더니 그 이사들이 장로님들이에요. 기업체도 하고 이러는데 자기 자녀들 때문에 모여서 인제 이사를 하는데 학교의 총장이 보고를 하는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해서 학교를 운영해 왔습니다. 그러니까 이사들이 잘했다고. 그리고 얘기가 시작되는데.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습니까? 학생들이 많이 오는 데 그 학생들이 묵을 방이 없어서 기숙사가 없어서 학생들이 동네를 헤매고 있습니다. 기숙사가 하나 필요합니다. 저 뒤에 있던 정로님이 그게 얼마나 든답니까? 그저 뭐 땅은 있고 그 위에 건물을 짓고 해야 하는데 그저 아쉬운 대로 한 15억 있으면 기숙사 하나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더래요. 그러니까 그 총장님 그러면 그거 뭐 제가 하죠. 이번에는 제가 한번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뭐 다른 학교 같으면 15억을 거두려면 네가 얼마 내라 내가 얼마 내겠다. 뭐 어떻게 하자. 그러는데 저 제가 하죠. 하나님이 이거 지으시라고 오늘 저를 보내셨나 보네요하고 자기가 짓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일 때 마다 그렇게 이사들이 헌신을 하니까 이제 이 목사님이 가면서 은혜를 받는다고 그래요. 하나님의 성도의 가장 큰 축복이 뭡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 주님이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이 섬기게 하시는데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하늘의 자원들이 있죠. 기쁨과 희락, 은혜와 평강 등. 이걸 가지고 사람들 찾아가서 그 사람들을 어루만지고 그 영혼들에게 공급해 주면서 그들을 살게 하는 것 이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목적이고 은혜의 계획이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물질, 우리에게 주신 지위,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이렇게 섬기도록 하나님이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다시 회복해야 될 것이 있어요. 우리가 처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우리가 아낌없이 우리의 재능과 시간, 우리의 건강, 우리의 물질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겼던 그 처음 사랑의 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첫사랑. 섬김 없는 첫사랑의 때 아무도 없습니다. 그 첫사랑의 때가 바로 감격적인 섬김이 있는 첫 섬김의 때였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이 메마른 세상을 보시면서 이렇게 자기를 부어 흐를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사심 없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님을 섬길 사람들을 하나님이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그 아름다운 섬김을 회보하고 남은 생애를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은혜 가운데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섬기며 사는 복된 생애가 되기를 바랍니다.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3. 그 순종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이 아침마다 성경공부 시간에 회복해야 할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첫날을 우리가 뭘 회복해야 된다고 했죠? 첫사랑을 회복해야 된다. 그리고 둘째 날은 우리가 뭘 회복해야 된다고요? 그렇죠. 그 섬김을 회복해야 된다. 그랬죠. 오늘 또 회복해야 될 것 하나를 공부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입니다. 순종. 그래서 첫사랑을 회복하고 그 섬김을 회복하고 오늘은 순종을 회복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은 바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사람이었고 하나님이 처음 그를 왕으로 세우셨을 때 그는 참 겸손하고 어진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외모도 출중했겠지만 그러나 그 성품이 참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엇 때문인지 이 사람이 점점 더 부패한 사람이 되어지고 나중에는 아주 패역한 사람으로 변해서 결국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름부음과 함께 그에게 임하게 하셨던 성령은 거두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여 비참한 인생의 말로를 살다가 버림받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본문을 해설하기 전에 먼저 이러한 스토리를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시작된 것을 육체로 마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깨어 있고 겸손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이러한 본을 잘 받아서 성령으로 시작한 것을 끝까지 성령으로 마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거죠. 그런데 이 사울이 이미 벌써 하나님의 눈에 났고 그리고 결국은 사무엘도 하나님이 이 사람을 이미 버리신다고 하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 결정적으로 사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고 사무엘에게로부터 도 그 버림받은 사실을 선고받게 된 것은 아말렉과의 싸움 때문이었습니다. 아말렉은 가나안의 원주민이었고 그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에 모두 진멸했어야 하는데 그걸 모두 진멸하지 못하고 결국은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산지로 도망을 쳤고 그리고 그들을 끝까지 따라가서 공격하기에는 너무나 전쟁에 지치고 피곤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산지에 그들이 살고 있지만 내려와서 이스라엘을 위협할 정도는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버려 둔 거죠. 그랬더니 어느 한 순간에 그들이 다시 세력을 얻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이죠. 이것은 마치 신자가 거듭난 후에 이 내면의 세계에 남아 있는 죄가 우리가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그 은혜에서 멀어지고 틈새가 벌어지게 되면 산 아래로 내려와서 공격을 하던 아말렉과 같은 것이 바로 우리의 죄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려와서 공격을 하는 거죠. 하나님이 이미 선지자 사무엘을 통해서 이 싸움에 나가는 사울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아멜렉과 싸우면서 이제 그들을 내게 네게 붙여서 이기게 할 텐데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짐승들을 사람은 물론이고 짐승들은 모두다 죽여라. 그래서 그 아말렉에 있는 어떠한 하나님의 저주도 너희들 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분부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 전쟁에서 훌륭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를 거두게 되자 사울의 마음이 달라진 것이죠. 자. 전쟁터에서 왕도 죽이고 거기에 있는 모든 백성들도 죽이고 짐승들조차도 모두 죽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명령이었는데 사실 그렇게 모두 죽이고 돌아가자니 두 가지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죠. 우선 첫째는 왕을 산 채로 끌고 이 성에 입성을 해야지만 왕의 영광이 드러날 것 아니에요. 그렇죠? 한번 전쟁이 끝났는데 그 전쟁에서 적국의 왕을 포로로 줄을 묶어서 끌고 들어오면 그 백성들의 환호성이 얼마나 놀라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사울이 왕 아각을 죽이지 못했고 또 하나는 경제적인 이유에서였습니다. 소와 양을 비롯한 많은 짐승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보니까 진짜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정말 살지고 탐스러운 짐승들일 많이 있었어요. 그 많은 우양을 모두 죽여 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온다고 하는 것은 전쟁에서 노획물이 없이 귀환하는 건데 전쟁하고 승리한 군인들에게 노획물이 없다고 하는 것이 전쟁에 무슨 재미겠습니까? 전쟁의 승리자의 기쁨은 노획물에 있는 거죠. 명예와 노획물에 있는 거죠. 그래서 명예는 명예대로 왕을 잡아와서 높이고, 노획물은 노획물대로 끌고 와서 많은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고 전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게 공로를 따라서 상을 주되 그 노획물을 나누어 주는 것이 전쟁의 예란 말이죠. 그런데 그거를 하나도 남기지 말라고 하니까 결국 가서 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거를 끌고 온 거죠. 그랬더니 사무엘이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제가 가지고 왔습니다. 이건 하나의 변명이죠. 그 많이 끌어온 수많은 우양을 하나님 앞에 다 제물로 드리겠어요. 하나님께 받친다는 빌미를 삼아서 그래서 결국은 자신이 그것을 챙기게 하기 위해서 그 짐승을 가지고 온 것이죠. 이러한 상황을 보게 되자 이제 선지자는 그를 하나님이 버리신 것을 선고하고 그리고 다시는 네가 왕이 되지 못하리라고 정죄함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사울의 시대가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모든 은총에서 멀어지고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사울에게서는 하나님의 성령이 떠나가고 여호와의 부리시는 악신이 임하게 되는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무엘이 이 순종의 문제를 거론하는 거예요.
이 사무엘은 선지자 중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에요. 그래서 모든 선지자의 비조는 모세라고 할 수 있고 이 사무엘은 직분으로서의 선지자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사무엘의 때부터 이 선지자가 직분 화되고 그리고 선지학교도 만들어지게 되는 거죠. 물론 그 선지 학교에서 나온 사람들은 모두 선지자로서의 탁월함의 정도에 있어서는 각각 다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이라고 해서 전부 다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에요. 예를 들자면 선지자 중에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에스겔이나 이런 사람들은 그야 말로 최고의 정상급 선지자에요. 정상급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 신령함에 있어서 거의 일등급에 속하는 그러한 선지자들이었다 이거죠. 그에 비해서 하박국이나 이런 사람들은 이 등급쯤 된다고 볼까? 물론 천국에서 그분이 들으면 기분이 좀 안 좋으시겠지만 하여튼 그렇지만 또 요나 같은 사람들은 삼 등급 쯤 된다고 봐야죠. 신약에 있어서 사도들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바울이나 베드로 같은 사람들은 일등급 사도죠. 요한 같은 사람. 그러나 마태나 마가나 이런 사람들, 마가는 물론 직접적 제자는 아니지만 그저 한 2등급 쯤 된다고 볼까요. 또 직접적인 제자는 아니지만 야고보 같은 사람은 한 3등급 된다고 볼까나. 물론 천국에서도 그 등급이 통할지는 모르지만 제 생각에 그렇다 이거죠. 또 직임으로서의 선지자로서의 시조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선지 학교가 있었지만 그 학교에서 졸업한 많은 학생들은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어요. 오늘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가지만 한 20년 후에 교계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지 않듯이 그랬어요. 그러나 그 중에 예외도 한 사람 있죠. 엘리사 같은 사람 말이죠. 그는 엘리야의 제자였잖아요. 그런데도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 됐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많은 선지 생도들이 있었지만 모두 그렇게 두각을 나타낸 건 아니고 신령함에 있어서 모두 정도가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는 이 얘깁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 등급이 있다 이 얘깁니다. 몇 등급 신자요? 3등급이요 4등급이요. 이 세상에서는 내신 성적 좋게 하려고 그저 뭐 100명의 학생이 있다면 90명 쯤 1등급을 준다고 그러면 그런 엉터리 같은 나라가 어디 있어요, 그래. 원래 1등급은 100명 중에서 열 명도 많은 거예요. 열 명도. 그렇게 하면 되겠어요? 다 속여서 해가지고 애들 가르치면 되겠어요? 그러나 이 하나님께서 평가를 내리시는 신자의 1,2등급은 그런 거 없어요. 그런 거 없고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만드시는 거죠. 정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좋은 교회라는 것이 뭐냐, 건물이 크고 담임 목사가 박사 학위를 몇 개 가지고 있어서 좋은 교회가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1등급 신자가 많은 교회가 그게 좋은 교횝니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예배드려도 1등급 신자가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다 이거죠. 어떻든 그랬어요. 그랬는데 오늘 이 선지자 사무엘이 이 순종을 아주 영적인 의미로 재해석하는 거죠. 그러면서 이 선지자가 이 성경 전체에서 아주 유명한 명언 하나를 남갑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사실 이걸 그 당시의 맥락에서 본다면 폭탄적인 선언이에요. 제사장이 들으면 펄쩍 뛸 노릇이죠. 제사가 얼마나 중요한데 제사가 이스라엘 언약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잖아요. 그런데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사실 제사장이 들으면 펄쩍 뛸 노릇이죠. 그런데 이 사무엘 선지자는 제사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제사가 중요 하냐 순종이 중요하냐는 문제를 경쟁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제사가 순종을 내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여러분 제사를 어떻게 드립니까? 제일 먼저 짐승을 끌고 와서 그 제사장이 손을 얹고 기도를 하잖아요? 그러면 헌제자의 죄가 제물에 옮겨지죠. 그때 그걸 죽이는 거죠. 그때 이 제물로 끌려온 짐승은 거기서 조용히 죽는 거예요. 그렇게 조용히 죽는 짐승만 하나님이 제물로 받으셨어요. 만약에 죄인들 위해서 속죄하는 짐승이 호랑이였다면 이 제사 현장이 얼마나 복잡했겠어요. 그 호랑이가 끌려와서 순순히 죽으려고 그랬겠어요? 아마 호랑이 서너 마리 죽일 때마다 제사장 서너 명씩 죽었어야 되죠. 그래서 그 제물로 끌려온 짐승은 수양이나 수 염소 그리고 소, 송아지, 혹은 비둘기, 여러분 생각해 봐요. 모두 죽이면 죽임을 당하는 온순한 짐승들이고 심지어 자기의 이전의 주인이 되는 헌제 자들이 자기를 끌고 갈 때 그 주인의 손이 이끌려 겸손하게 따라온 짐승들만 제물이 됐다 이거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너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사자 두 마리를 받칠지니라. 사자는 어디서 사가지고 온다고 하지만 그걸 어떻게 죽이냐 이거죠. 아마 진짜 보통일이 아니었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짐승이 아니라 온순한 짐승을 하나님이 제물로 택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주님을 믿고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됐습니다. 하는 그 순간부터 신자가 배워야 할 것은 온 맘과 온전한 온순함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을 잘 듣는 자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끌고 오잖아요? 죽여요, 그러면 죽임을 당하는 거죠. 그리고는 사지가 잘라지고 머리가 떼어내 지고 기름이 떼어내 지고 그리고 그것을 물로 깨끗이 씻어서 그래서 번제 단에서 태워 드리는 거예요. 그게 제사에요. 그게 제물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제사를 드리는 것 자체가 이미 제사를 드리는 헌제 자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지만 하나님께 용납이 되느냐 하는 것을 그림처럼 하나님이 보여주신 거예요. 이걸 가리켜서 교육학에서 실현식 교육법이라고 한단 말이죠. 실제로 교육을 받을 사람이 실제의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연출하면서 거기에서 메시지를 찾아내고 하나님 앞에 배우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실현식 교육법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을 가르쳐 주신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 먼저 자신이 온순해 져야 하고 죽어야 하거든요. 그래야지만 비로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제사가 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하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오랫동안 하나님을 믿었어도 하나님께 진정으로 자기가 드려져 본적이 없어요. 제사는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분여받는 수단이에요. 제사를 잘 드리고 나면 하나님과 교통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생명이 그 헌제자의 마음 안에 가득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세상을 이길 힘을 얻어가지고 자기의 현실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에요. 예배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시험에 들고 말씀에 깨어짐이 없으면 예배시간에 와서 억수로 졸죠. 어떤 사람은 아예 코까지 골면서 자는 사람도 있어요. 근데 뭐 그러면서도 늘 인용하는 성경구절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도다. 그것은 밤중에 쓰는 성경구절입니다. 밤중에. 예배당에 와서 예배시간에 자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영혼이 잠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유두고 는 왜 떨어져서 죽었어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데. 그러니까 그렇게 자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졸죠. 졸다 깨다 졸다 깨다. 설교 시간에 아무리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전혀 방해를 안 받고 자요. 그렇게 아무리 많이 자다가도 마지막 작은 소리에 모두 깨어나요. 우리 모두 함께 기도합시다. 하하하. 그리고 깨어나요. 그 소리는 조그맣게 해도 참 천청 벽력같이 들려요. 그리고 예배랍시고 마치고 가요. 어때요? 그냥 예배 한 시간 반 동안 드리는 동안에 피곤이 확 밀려와요. 예배당에 올 때는 우울했던 사람이 돌아 갈 때는 불행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가요. 피곤이 확 밀려오고 점심이고 뭐고 다 귀찮고 여전도회고 남전도회고 구역예배고 다 집어치고 파자마 바람으로 벌러덩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에요. 아 내가 일주일 동안 진짜 고단하게 살았구나. 그러고 돌아가요. 그러고 가서 파자마 바람으로 벌렁 드러누우면 어쩜 그렇게 정신이 말똥말똥 해지는지. 왜 그래요? 사람이 육적이니까 신령한 환경을 견디지를 못하는 거예요. 예배를 통해 맞볼 수 있는 하나님과의 교통과 신령한 은혜가 주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견딜 수 없는 피로감이 밀려오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 은혜를 받고나 보면 말이죠, 얼마나 놀라운 지 알 수가 없습니다. 확 밀려오는 그 하나님과의 교통, 하나님과의 놀라운 생명의 분여. 이것이 자기의 마음속에서 남게 되는 거예요. 교회 올 때는 이세상의 근심과 염려로 마음이 다 찢어지고 들어왔었는데 들어와서 말씀의 은혜를 받고 보니까 눈물을 흘리고 회개를 하게 되고 그렇게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니까 거기에서 그 이전의 모든 육체의 피로가 사라지고 맙니다. 심령에 은혜가 확 밀려오고 주님을 만난 은총의 감격이 자신의 마음 안에서 생겨나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생겨나는지 너무나 기뻐하는 거예요.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너무 행복하고 너무나 기쁘고 즐거운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소생하게 되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요. 할렐루야. 옛날의 제사도 그랬단 말이죠. 벌써 오래된 일이에요. 초창기에 은혜를 받고 열심히 설교하러 다닐 때, 하여튼 여름이면 스케줄이 빡빡하게 짜져 있어서 충청도에서 아침에 설교하고 저녁땐 전라도로 가고 전라도에서 설교하고 강원도로 올라오고 하여튼 그랬어요. 오죽했으면 말이죠, 제 새로 산 차를 카센터에서 보고 아저씨 차산지 얼만 안됐는데 왜 그렇게 많이 뛰었어요? 밤에 영업하세요? 그때도 충청도에서 집회를 하고 밤새도록 차를, 밤새도록은 아니지만 하여튼 새벽에 집회를 하고 그리고는 차를 몰고 올라와서 경기도로 올라와서 경기도에서 아침 집회부터 하기로 돼 있었거든요. 아침에 가니까 그 젊은 청년들일 쭉 모여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찬양을 부르고 있어요. 그런데 그 여름이긴 한데 비가 와가지고 말이죠. 아주 날이 을씨년스럽게 추워. 그런데 그 차가운 마룻바닥에 앉아 있는 거예요. 아니 왜 방석도 안주냐 그랬더니. 수양 관에서 여름에는 방석 깔고 앉지 말라고 뺏어갔대요. 아이고 무슨 수양관이 그렇게 좋냐 그러고. 완전히 차가운 마룻바닥에 비는 많이 와가지고 춥고 을씨년스러운데 형제들이 또 여름이니까 바지는 반바지나 아니면 칠보바지 이런 거 입고 얇은 티셔츠 바람으로 그 얇은 잠바하나 걸치고 그러고 듣는 거야. 그래서 올라갔어요. 설교를 시작했어요. 그 뭐 내가 눈이 나쁘니까 뒤에 있는 시계도 안보이고 내 시계는 풀어서 주머니에 집어넣고 그러고서 설교를 했어요. 그러니 잘했건 못했건 그 전날까지 3일, 4일을 집회를 해 놓고 새벽기도회까지 인도해 놓고 그 새벽기도는 왜 했는지 아세요?
저녁 때 원래 끝나기로 돼 있었는데 이게 성에 안차니까 새벽에 한 번 더 하자고 그래가지고 거기서 자고 예정에 없이 새벽에 하고 거기서 기도까지 해 주고 그러고 올라 왔으니 사실 인간적으로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그 학생들을 또 얼마나 고단하겠어요. 올라 가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쭉 전하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내려 주셔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 줄줄 줄줄 전해져요. 그래서 이제 한참 하고 났더니 배도 고프고 허기가 져요. 저는 배고프면 설교를 끝내거든요. 이제는 당이 딸려서 도저히 더 못하겠어요. 그러고 이 정도는 충분히 한 거 같아요. 그래서 다 같이 기도를 하고 마치는 데 여러 청년들이 거기서 회심을 하면서 울면서 기도를 해요. 그래서 인제 내려오면서 내 신발을 딱 신으면서 아 오늘 조금 길었지 한 100분 했나 그러고 시계를 딱 봤더니 3시간 30분을 설교를 했어요. 근데 제가요 제주는 별로 없지만 어디 가서 눈치 없다는 소리는 잘 안 듣거든요 제가 자라면서도 어른들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어요. 아부는 지겹게 못하지만 그러나 사실을 눈치는 제가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많이도 아니고 그까짓 것 한 60명 모였는데 걔네들이 막 비비꼬고 한숨을 쉬고 시계를 꺼내서 보고 성경책을 뒤적거리고 노트를 펄럭거리고 난리를 쳤으면 나도 인간인데 나 싫어하는 거 알지 그리고 보따리 싸가지고 내려오죠. 그 뭐 일찍 끝냈다고 나를 죽일 거요 살릴 거요. 뭐 또 다시 볼 사람들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데. 그러고 나서 설교하기 전까지 올라갈 때는 말이지 잠도 못자고 충청도부터 차를 몰고 올라와가지고 지쳐서 죽겠는데 근데 설교가 딱 끝나고 나니까 배는 좀 고프고 힘은 없지만 몸과 마음이. 그래서 우유 한 잔만 마시면 다시 4시간을 설교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누구도 원하지는 않지만. 그게 어디서 오는 거냐. 청년들도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요. 하나님 앞에 예배를 잘 드리면 거기에서 생명과 그리고 은혜의 교통이 있게 된단 말이죠.
이게 바로 제사거든요. 이 제사가 그렇게 중요하니까 제사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 당시로 보면 이건 충격적인 발언이고 신성 모독적인 발언이다 이거에요. 그런데도 이 뛰어난 영적인 선지자 사무엘은 제사보다도 중요한 게 있다. 그게 뭐냐면 제사를 드리는 헌제자의 순종하는 삶이다 이거에요. 그러면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이렇게 얘기한 거죠. 그리고 이어서 똑같은 말이 반복되긴 하는데 그게 뭐냐면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며. 이 기름은 동물의 기름은 하나님이 일체의 성전 바깥에서 사람들이 이 기름을 먹거나 사용하지 못하게 했어요. 동물성 기름 그건 오직 하나님 앞에만 바쳐지는 제물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그 기름을 태워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아주 훌륭한 향기로운 제사였어요. 그런 의미에서 수양의 기름은 제물 가운데 가장 베스트였단 말이죠. 그런데 그거 보다 더 훌륭한 것은 뭐라고요? 듣는 거. 듣는 게 뭐예요? 지금 이렇게 하는 거. 이게 짐승을 잡아서 바치는 제사보다 훨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얘기에요.
그러면 이렇게 듣는 게 뭐 어려우냐? 그런데 그것은 일반적인 듣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순종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듣는 것. 그걸 가리키는 거예요. 순종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듣는 것, 그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렇게 순종이 하나님 앞에 중요하단 말이죠. 그런데 이제 궁금한 거는 그러면 그렇게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사랑해 주시죠. 순종하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큰 은총은 두 가지로 나타나는데 사랑을 받는 것과 축복을 받는 것으로 나타나요. 개인적으로 순종을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요.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순종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요.
여러분들 이렇잖아요. 누군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생각만 해도 너무 사랑스럽고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 참 기쁜 사람 있잖아요. 그렇죠? 그 사람이 만나자 그러면 좀 바쁜 일이 있어도 재껴 놓고 만나고 싶은 그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 사람은 뭐냐면 그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부합하고 어울릴 때에 그 사람이 그 사람에 대해서 인간은 호감을 갖게 되고 그 사람이 참 좋은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사람이 좋게 되면 모든지 주고 싶어 하게 되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과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 주시는 것은 나눠지려야 나뉘어 질 수가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그들이 누리는 모든 좋은 것들이 이렇게 다 하나님의 축복을 통해서 오는 것은 아닐 수 있어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머리 좋은 사람이 돈 많이 벌 수 있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이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경험과 함께 그 축복이 다가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생각한 삶이 뭐냐고 할 때 물론 원론적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고 그래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에게 행복이지만 그러나 내면적으로 본다면 우리들이 행복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는 그 삶이 바로 행복한 삶이 아니에요. 그 이상 뭐가 있어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셔요. 그리고 그 사랑이 계속 되요. 그리고 하나님이 내 인생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하나님이 공급을 해주셔요. 그리고 그것을 누리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셔요. 그러면 되잖아요.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하나님이 당신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도 가르쳐 주고 위기를 만날 때에 원수들과 대신하여 싸워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고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일으켜 주시고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 살게 해 주시죠.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도 주님의 손에 맡기면 하나님께서 정말 놀랍게 그들을 축복된 길로 인도해 주신단 말이죠. 그거를 받으면서 사는 거, 한편으로 하나님의 사랑 받고, 한편으로 축복받으면서 사는 것이 그게 진정한 행복한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어요. 그러게 되고 싶으면 아멘 해보세요. 아멘. 될까? 돼야죠. 근데 그것이 행복한 삶인데 오늘 옛날에 그렇게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주님이 귀하게 여기셨던 사울도 사실은 그 자리에서 미끄러졌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불순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울의 이 실패를 보면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참으로 사랑을 받고 축복받으며 살게 하는 비결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인데 그렇게 신자가 순종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여기에서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신자가 그렇게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오늘 우리는 사울의 실패 속에서 두 가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를 발견하게 되요. 이것을 뽑아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가게 되는 것이에요.
첫째는 뭐냐면 자기의 이성의 생각을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보십시오, 오늘 이 사울이 사무엘에게 변명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말렉을 그 손에 붙여 이기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그 계시가 있었을 때 그걸 싫어 할 사람이 아무도 없죠. 사울은 더군다나 한 나라의 임금이었으니까 전쟁의 승리와 패배는 자신의 안위에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겼습니다. 전쟁을 하고, 이길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겠다고 하는 마음이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것은 뭐냐면 교묘한 인간의 지혜가 떠오른 것이죠. 어떻게 하든지 이 실하고 좋은 짐승들이 큰 재산이요 왕실의 큰 보배인데 이것들을 굳이 죽여야 하는가? 그러지 말고 무슨 방법이 없을까? 라고 생각을 하니까 그다음에 선지자에게 핑계를 하면 이런 식으로 논리를 세워서 핑계를 하면 되겠구나 생각을 한 거죠. 그리고 살지고 좋은 짐승들을 끌고 가면 분명히 선지자가 왜 그랬습니까? 그렇게 물어 볼 텐데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이것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야기 하면 선지자는 뭐 할말이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한 거죠.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사람의 이성의 추론이었고 인간적인 생각이었어요. 때로 하나님의 명령은 불합리해 보이고 그리고 사람의 이성의 추론은 그럴 듯 해보일 때가 있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는 부패한 이성의 추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단선적으로 받아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실 때 어떤 때는 왜 그렇게 해야 되는지를 모두 가르쳐 주시는 때도 있지만 어떤 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안하시고 단선적으로 나는 너에게 이걸 원한다. 너는 이걸 행하라. 이렇게 단적으로만 말씀하실 적이 있다는 거죠.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렇게 하심으로서 하나님이 그에게 있는 믿음이 정말 당신을 향한 온전한 믿음인지를 보시고 싶어 하시는 것이죠.
아브라함에게서 이런 예를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에게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쳐라. 하나님이 이렇게 단선적으로 명령하셨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설득시켜서 아브라함에게 가르쳐 주시면서 지시를 했다면 진짜 아브라함 속에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믿음을 확인 할 수가 있겠어요? 아브라함아 너 독자 이삭을 바쳐라. 네? 그래 네가 놀랠 줄 알았다. 백세에 낳은 아들이고 금지옥엽 네가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냐. 그런데 너무 염려하지 말아라. 끌고 가서 산에 가서 재물로 받치려고 목에 칼을 댈 찰나에 내가 그러지 말아라! 그럴게. 그러고 저기 보면 뿔이 걸려있는 짐승이 있을 텐데 그걸 가져다가 받쳐라. 그러면 내가 그때 너한테 말할게.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구나. 그리고 네가 믿음의 조상이 되게 만들어 줄게. 그러면 아브라함이 싫다 그럴 이유가 뭐가 있어요? 고민도 안할 거예요. 아 뭐 그 정도야 제가 해드릴 수 있죠. 종종 부탁하세요. 늘 해드릴 테니까요. 그리고 이제 덜렁 덜렁 덜렁 모리아 산으로 가는 거예요. 아버지, 불도 있고 나무도 있고 칼도 다 있는데 바칠 재물은 어디 있습니까? 그래도 아버지가 설명을 안 해주는 거예요. 너무 걱정하지 마라. 니가 가면 아빠가 네 목을 칼을 댈 텐데 놀래지 마. 그때 주님의 음성이 들려 올 거거든. 아무 일도 하지마라. 그리고 이제 너와 나는 성경에 영원히 순종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거야.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질 않으신단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를 하나님이 가끔 시험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의 기로에 두시는 적이 있거든요. 그때에는 대부분 이렇게 모든 것을 이해 할 수 있게끔 하시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명령하시질 않고 도저히 이해가 안 가게 밑도 끝도 없이 명령이 주어지는 적이 많다 이 얘기에요. 뭐 본토 아비의 집을 떠나 내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그러면 내가 이렇게 말은 하지만 가다보면 어느 지점에 좋은 사람 만나고 이렇게 이렇게 해서 다 먹고 살게 되고 그렇게 설명을 해 주시지 않으세요. 가라 이거에요. 현실과 가라고 하는 이 명령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 것은 이성의 추론이 아니라 뭘까? 그렇지.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믿음이에요. 하나님이 가라고 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은 책임지실 것이다. 어떻게 하시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해주실 것이다. 그것을 따르는 마음이 믿음이에요. 제가 교회 개척할 때도 그랬어요. 사실 어느 모로 보나 제가 개척을 할 사람같이 보입니까? 그땐 더군다나 신학대학의 교수로 있어서 그때 받는 봉급이 지금 교회에서 받는 봉급보다 많았어요. 11년 전인데. 그렇게 하고 인정받으면서 교수 생활을 했는데 11월 15인가 쯤 됐어요. 밤에 자는데 잠이 안 오는 거예요. 가슴이 막 타는 거예요. 왜 가슴이 타나? 개척을 해야 될 텐데. 그래서 속에서 둘이서 막 싸우는 거예요. 야, 니가 미쳤냐? 무슨 놈의 개척이냐? 꼴에 무슨 개척을 하냐? 아무나 개척을 하는 거냐? 했다가 만약에 되지도 않아서 교회 문 닫으면 하나님의 영광 가리지. 그래서 스스로 쓰다듬으면서 중심 잡고 자자. 근데 이래도 잠이 안와요. 그러고 개척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막 드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잠이 안 오는 데 어떻게 해요. 그래서 내려와서 침대 머리맡에 혼자 엎드려서 기도를 해요. 어, 근데 막 기도가 되는 거예요. 개척은 무슨 개척! 그러면 기도가 안 되고, 해야지 그러면 기도가 막 되는 거예요. 막 쏟아지는 거예요. 그렇게 한 3일 밤을 새웠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야 이 현실적인 문제가 있어요. 신학교 교수로 갈 때 개척을 안 하겠다고 각서를 썼습니다. 물론 개척이란 말이 있는 거는 아니지만 교회나 어디든지 이 학교 이외에 다른 곳에 밥솥을 걸지 않겠다고 도장을 찍었단 말이에요. 풀타임으로 어디선가 봉사하지 않겠다고 도장을 찍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개척을 하면 학교는 뒷전이고 개척이라는 것이 무슨 가끔 와가지고 교회 드려다 본다고 되는 겁니까? 이게 윤리적으로 이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해요. 하나님이 강력하게 이 그 말하자면 개척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학교 가면서 다른 학교 강의 나가고 그러는 거 다 끊었어요. 그러고 그 학교 하나만을 위해서 봉사했죠. 그런데 하나님이 개척하게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는 거예요. 개척을 하면 무슨 개척 동지기 있다며. 아무리 봐도 동지는커녕 아무도 없고, 그다음에 개척을 하면 아니 아무것도 없이 개척을 한다. 그러지만 그래도 장소는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래야 사람이 올 거 아니에요. 의자는 사다 놓고 강대상도 있고 그래도 피아노라도 있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런데 뭐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렇게 개척을 하는데 가만히 기도하면서 생각해 보니까 이게 미루면 안 되고 빨리 해야 될 거 같아요. 그래서 12월 12일 1212사건이 일어난 때이고 그날이 또 제 생일이에요. 그래서 기왕이면 생일날 우리를 주님 앞에 드리자. 12월 12일 날로 정해 놨으니까 보름밖에 안 남았단 말이죠. 그 사이에 어떻게 할 것인가 기도하면서 시작을 했습니다. 현실과 해야겠다는 기도 응답 사이에 간격을 어떻게 메울지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 그런데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고 나니까 전혀, 이 장소 저 장소 찾아가 봐도 전혀 아니에요. 안 빌려줘. 근데 딱 가보니까 하나님이 장소를 예비해 놓으셨어요. 두 번 교회가 문 닫고 나간 자리에요. 그래서 우리가 거기 가가지고 거기다 인제 다 페인트칠을 하고 열심히 했더니 주변에 있는 교회 목사님이 오셨어요. 그러면 그 목사님도 참 썰렁하시더라고. 거 오면 은 아이고 이렇게 개척을 하게 되셔서 참 축하드리겠습니다. 고난이 많으시겠습니다. 제가 기도나 한번 해드리고 가겠습니다. 그러고 축복기도 하면 좋잖아요. 오자마자 혀를 끌끌 차는 거예요. 에이 뭘 모르는구만. 여기는 안 되는데. 교회가 둘이나 문 닫고 나갔고 여기는 여름이면 물이 꽉 차. 은혜의 물이 아니라 개천 물이 꽉 차는 곳이야. 그러고 가요.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고 했어요. 근데 착착 착착 하나님께서 다 예비해서 하나님이 하늘의 창고에 번호표를 붙여서 필요한 때가 되면 하나씩 하나씩 손가락으로 밀어서 날려서 보내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씩 둘씩 들어와요. 예배당을 다 짓고 나니까 강대상을 놓겠다는 사람도 있고 또 그다음에 해 놓고 나니까 피아노 내 놓겠다는 사람도 있고 또 해놓고 나니까 그다음에 또 뭐 밥솥 걸어주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하면서 다 하나님께서 진행해 오시더라 이 얘기에요. 눈에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 그게 믿음이에요. 그 사고력에는 이런 믿음이 없었어요. 하나님의 명령보다는 자신의 부패한 이성의 추론을 더 믿었어요. 그게 순종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사람은 머리를 굴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뿐 아니라 또 마음을 굴려서 그 마음이 쇄신되고 뜨거워진 사람들이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하고 믿음으로 살지 마음에 불은 꺼지고 머리로 달그락 달그락 거리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될 것인가? 고난이 없는 십자가 지는 방법 어디 없을까? 글쎄 순교는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죽지 않고 순교하는 비결이 어디 좀 없을까? 하나님께 나도 받치고 싶지. 그러나 내가 손해 안 나고 한번 받치는 길은 없을까? 아 정말 그럴 수는 없을까? 이러면서 부패한 이성의 추론을 의지하니까 그 사람이 순종할 수 없는 것이에요. 여러분 그 머리에서 무슨 좋은 생각이 나오겠어요? 인생이 위기에 처하고 어려움에 처하면 머리가 쥐가 나요. 어떻게 꼼수를 부려서 이 위기에서 한번 벗어나 볼까? 그러고 막 굴리는데 굴려봐야 부패한 이성의 추론이니 자기가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나타나 보일 리가 없어요. 영안이 열려지기 전까지는 소용이 없다 이 얘기죠. 그래서 순종하기 위해서는 이 부패한 이성의 추론과 결별해야 되요.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보여도 내가 믿음으로 그 길을 걸어가리라 이런 마음을 가져야 된다 이겁니다. 마지막 두 번째로 사울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죽여라고 명령하시는 것은 심판의 개념이에요. 그러니까 죽이면 그 죽인 것 자체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서 죽은 거예요. 죽어도 그것은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에요. 만약에 짐승을 죽이기만 하라고 그랬으면 아마 그때는 그런 공장이 없기는 했지만 아마 이 머리 좋은 사울이 아 죽이지요. 다 때려죽이겠습니다. 그래서 냉장고에 다 가죽 벗겨서 넣어 놓거나 아니면 통조림으로 만들어 버렸을 거예요. 근데 뭐냐면 딱 죽이고 나면 이제 그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그 짐승들도 고기를 사용할 수 없었어요.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고 죽은 더러운 거기 때문에 막 죽이고 나면 그다음엔 그 재물이 그냥 날라 가는 거예요. 그 재물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거예요. 그 기름진 짐승. 그걸 왜 죽여서 낭비하니. 저걸 데려 가면 제사는 무슨 제사에요. 저걸 갔다가 돈으로 바꾸면 왕실에 얼마나 커다란 보탬이 되겠는가? 그렇게 해서 짐승이 있고 그 돈이 있으면 자기에게 충성하지 않는 신하들도 그 돈으로 꼬여서 충성하게 할 수 있고 그리고 자기에게 헌신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고 하여튼 왕실의 부가 쌓여서 어쨌든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고 자신의 일신도 평안하지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 물질에 대한 집착과 사랑이 사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하는 것은 그거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을 때는 순종하는 일일 매우 쉬워요. 왜냐면 사랑은 하나님의 뜻을 모두 받아들이게 하는 힘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특별히 자신의 재물을 깊이 사랑하게 될 때 그때에 하나님 앞에 절대로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하나님 앞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순종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교훈의 핵심이에요. 여러분 자신도 사실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잘 모를 때가 있죠. 그래요. 그럴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열이 나도 잘 모를 때 있지만 체온계를 넣어 보면 우리의 체온이 몇 도인지 알 수 있듯이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작년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지 안하는지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있는지 안하고 있는지를 재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잘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 이 세상이나 물질에 대한 사랑 때문이라면 그런 불순종의 끝이 무엇이 되겠어요? 그렇게 불순종해서 하나님과 생명적으로 교통하고 은혜가 부어질 기회를 가로막는다면 그래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대신 불순종 때문에 그렇게 물질을 움켜쥐고 있다면 그 물질은 온전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사울이 이날 바치지 않은 우양을 가지고 얼마나 누리고 살았는지 나는 묻고 싶어요. 결국 미치광이가 되어 버려서 저주를 받고 죽지 않았습니까? 이게 불순종한 사람이 재물을 움켜쥐고 산 마지막 결국이에요. 우리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시죠. 순종을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장애요인 하나가 뭐냐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사랑하는 회개는 바로 이런 사랑을 뉘우치는 거죠. 그리고 마땅히 사랑하지 아니할 것을 사랑한 것을 회개하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은 신자를 사랑하셔서 그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고임을 받으면서 일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삶. 이게 바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된 삶이에요. 여러분 하나님 없이 번영해 보려고 몸부림치지 마십시오. 하나님 없이 성공해 보려고 하나님 없이 환란과 고난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치고 신앙 다 팔아서 위기를 극복해 보려고 몸부림쳐보지 마십시오. 그 위기를 극복하고 나면 그보다 더 큰 심판의 위기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사랑했던 것을 깊이 회개하고 이 세상에 있는 물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마음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그를 소중하게 생각하시고 그렇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모든 번제보다 낫고 그렇게 순종하기 위해서 오늘 여러분처럼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도 주님을 더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그 기도
“저가 환난을 당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비하여 기도한고로 하나님이 그 기도를 받으시며 그 간구를 들으사 저로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거하게 하시며 므낫세가 그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대하 33:12~13)
오전마다 회복해야할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던 첫째가 첫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두 번째는 그 섬김을 회복해야 한다. 세 번째는 그 순종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 이 시간에는 그 기도를 회복하자.
므낫세는 남왕국 유다의 왕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히스기야였죠. 사실 이 히스기야는 구약역사에 있어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샛별처럼 빛나는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런 훌륭한 임금, 일평생 다윗의 길로 행하였던 아버지 히스기야에게서 므낫세라는 자식이 나온 걸 보면 참 신기합니다. 이 자식은 아버지의 그 경건한 신앙과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사랑을 티끌만큼 본받지 아니한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이런 생각이 들죠.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아버지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어서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나라의 환난을 만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경건하고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서 이런 못된 자식이 나오느냐 이거죠.
성경이 그것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으니까 우리가 남의 집안 사정을 파헤칠 수 없지만 저의 추측이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므낫세가 위에 오를 때 12살 이었고 55년을 왕으로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가 젊은 날에는 하나님을 많이 의지했고 죽기 15년 전에 하나님이 그를 부르시려 그러죠. 그랬더니 면벽을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더 살려달라고 간구하죠. 그때 기도한 것을 보면 그가 그때 까지 얼마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기의 애타는 마음을 호소하는 가운데 내가 어떻게 주님 앞에 선을 행하며 일평생 살아온 것을 주님이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내용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가 집에 돌아오기 전에 다시 그 목숨을 연장시켜준다고 통보하라는 하나님의 분부를 받게 되죠. 그래서 15년을 더 살고 일령표의 그림자가 뒤로 물러가는 이적의 역사까지 표징으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던 사람이죠. 그런데 이 므낫세는 이런 좋은 신앙을 가지고 있던 히스기야가 사실 마지막에와서 신앙이 미끄러지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게 교만 아닙니까? 히스기야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예루살렘의 군기고를 보여주고 자랑한 것이 하나님 앞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이 므낫세가 위에 오를 때 12살이었으니까 이 자식은 아버지의 충만하고 그 첫사랑 그 섬김 그 순종이 있던 때 그런 아버지를 보지 못하고 말년에 신앙의 깊은 침체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일괄 성을 잃은 아버지를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신앙의 감화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틀림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므낫세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므낫세에 대한 평가는 55년이나 길고 지루할 정도로 그렇게 오래도록 나라를 다스렸지만 그러나 그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그가 악을 행하였더라 악한 임금이었던 것이 하나님 보신 평가였습니다. 55년이나 왕권을 누리면서 호위호식하고 온갖 권세를 휘둘렀지만 하나님은 아주 간단하게 그는 여호와 앞에 악하였더라, 끝난 거죠. 그 영광이 어디로 갔어요? 그 권세가 어디로 갔어요? 제왕으로 누렸던 그 호사스러움은 어디로 가버렸어요?
제왕으로 누렸던 그 호사스러움과 권위, 영광, 위엄,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는 경배와 찬양, 어디로 가버렸죠? 없어져 버린 거죠. 모두 이 세상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살아져가는 거예요. 그래서 오죽 했으면 이사야 선지자가 그랬어요. 모든 육체는 불이요 그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도다. 젊은 날에 가슴을 뛰게 했떤 예쁜 배우들이 한참 바쁘게 살다가 어느 날 영화나 TV 한번 보면 완전히 딴 사람으로 변했어요. 그때 인생의 서글픔을 느끼죠. 아 인생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니구나, 그래서 얼굴이 아주 예쁘게 생기고 인기를 모았던 사람들이 이때 딱 나타나고 많은 사람들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아요. 그때의 아름다운모습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그대로 아로새겨져 있도록 만들어주기 위해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살아지는 거죠. 여러분은 그렇게 안 해도 괜찮아요. 우리는 그렇게 복잡하게 살 필요 없어요. 그냥 보여주다가 죽으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가슴에 아련하게 남을 아름다운 미모도 없으니까. 사는 거죠. 평가는 딱 한 줄로 남아요. 뭐냐면 악하였더라.
다윗보고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 또 훌륭한 임금들의 평가가 뭐였죠? 일평생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 가지고 있는 지위, 삶의 다양한 양태들, 어떤 신분으로 사느냐 이런 것들은 모두 풀에 맺힌 꽃처럼 사라지는 것들이에요. 마지막에 남는 것은 인생을 산 그 인생의 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만이 남는 거예요.
똥을 퍼도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사람은 일평생 나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였더라. 그가 진짜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삶을 산 사람이에요. 제왕의 자리에서 떵떵거리고 온갖 영화를 누렸지만 그는 일평생 악을 행하였더라. 악을 많이 행하였더라. 그러고 끝나요. 그게 인생이에요.
그래서 신앙은 뭐냐면 보이는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 보이는 이 세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그 시선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그 시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제 그 므낫세가 행한 악을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55년 동안 아주 나쁜 짓을 많이 했죠.
그런데 역대기에 기록된 것은 말이죠. 그가 행한 악 중에서 핵심적인 악만을 기록을 하고 있는 거예요. 그가 행한 악이 크게 세 가지로 등장을 하는데 모두 우상숭배와 관련된 겁니다.
첫째는 뭐냐면 아버지가 헐어버렸던 산당들을 다시 세운 거예요. 그 산당은 뭐냐면 바알 신들이나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그러한 우상을 숭배하는 신당이었어요. 왜 이스라엘 우상을 신당을 섬기는 것이 많게 되었느냐면 가나안 원주민들을 하나님 명령대로 모두 진멸하였으면 괜찮았을 텐데 그렇게 못하고 결국은 그 원주민들이 높은 곳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러고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자연스럽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배한 나라에서 삽니다.
그들과 접촉하는 것을 꺼려했지만 같은 땅에 살면서 어떻게 접촉을 안 하겠어요? 그런데 그들은 종교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는 여호와의 종교에 의해서 선교가 된 사람들은 다시 이스라엘 회중으로 들어왔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종교를 섬기며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을 믿다 싫증난 사람들이 그리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산에다가 산당을 만들어 놓고 거기서 바알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는 거죠. 그렇게 바알을 섬기고 우상을 숭배하면 농사가 잘된다, 자식이 잘된다, 이런 풍설들을 믿고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바알 종교와 관련된 고고학적 출토된 물건들을 보면 말이죠, 신상들이 많아요. 짐승들의 상도 많고 특히 여자의 상들이 많아요.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여자가 엉덩이 펑퍼짐하고 가슴이 축 늘어지고 얼굴이 살이 붙어서 풍물을 상징하는 그런 나신들이 많이 나오고
심지어는 가슴에 젖이 일곱, 여덟 개쯤 달린 여자들도 등장을 하죠. 그게 뭐냐면 많은 아이들을 먹이면서 풍요롭다고 하는 것을, 풍요의 신이란 말이죠. 그래서 그 신이 자기네 인생을 주관해주면 농사를 특별히 주관해주면 그 풍요의 신이 좋아하는 것이 뭐냐면 이 땅에 소출이 많아지고 곡식이 많아지는 그런 것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고 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런 성향에 맞게끔 그들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을 축복한다고 하는 거죠. 그래서 그들을 잘 섬기면 비가 제때 내리고 결실을 해서 탐스러운 곡식들이 열고 그걸 통해서 자신들이 부요하게 될 것이 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결국은 산출의 개념 아니에요? 이런 산출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제 성적 타락이 함께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교리에 의하면 바알종교 같은 경우는 산당으로 올라가면 수많은 쪽방들이 있어요. 거기에는 그 산당 안에는 제사 드리는 것을 돕는 말하자면 동자동녀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제사 드리는 것을 돕는데 그 사람들을 성녀라고 불렀어요. 그런 전통이 나중에 헬라시대까지 이어져요. 그 속에 아폴로 디테라든지 그다음에 신전에서 행해지는 제의라든지 다 이어지거든요. 농사와 관련되었어요. 그렇게 해서 거기에 제사 드리러 간 사람이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고 바알에게 예배를 드리는 그 일종으로 그 쪽방 속에 들어 가가지고 그 속에 있는 성녀들과 함께 말하자면 성관계를 가집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들이 말하자면 출산, 다산의 개념을 가진 그런 성적인 행위를 함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바알에 의해서 비를 내리는 주기를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런 교리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바로 그래서 구약학자들이 생각하기는 호세아에 나오는 고멜이 간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을 거다. 그래서 거기에 성녀로 들어가서 아마 거기에 오는 수많은 헌제 자들과 그런 난잡한 생활을 했을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모든 죄악의 온상이었어요. 거기서 하나님이 금하신 원주민들과 접촉이 이루어 졌죠? 거기서 하나님이 금하신 우상숭배가 이루어지죠. 거기서 하나님이 금하신 간음이 이루어지죠. 또 그런 모든 것들은 물건을 주고받는 상행위를 동반한단 말이에요. 거기에서 탐욕이 이루어지죠.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아주 뿌리 깊은 죄악의 근원이 된 거죠.
그래서 심지어 구약의 선지자들의 탄식을 보면 말이죠. 그런 기방을 드나드는데 오늘은 아버지가 간 기방에 내일은 아들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성결의 뜻에 비추어서 볼 때 이것은 하나님으로는 참을 수 없는 분노였거든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히스기야였어요. 그래서 그 모든 것을 헐어버렸어요. 담대하게 종교개혁을 하는 거죠. 그렇게 타오르고 그랬는데 그걸 다시 세운 장본인이 누구냐면 므낫세였단 말이죠. 그러니 그것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가증하고 나쁜 것이었느냐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두 번째는 살인의 죄에요. 이것도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는데 힌놈의 골짜기라고 하는 곳, 이것이 지금도 있고 예수님 시대에도 힌놈의 골짜기라고 불렀었는데 이게 헬라어로 게헨나라고 하는 곳이고 이 게헨나가 결국은 뭐가 되냐면 나중에 지옥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되요. 그런데 이 힌놈의 골짜기 게헨나 비슷하잖아요. 음이. 게는 히랍어로 땅이란 뜻인데. 그 힌놈의 골짜기인데 거기에서 무슨 일이 행해졌냐 하면 우상을 섬기는데 바로 그곳에서 자기들이 축복받기 위해서 인신제사가 행해졌던 거예요. 그래서 그 기록에 보면 거기에 출토된 고고학적인 기록을 보면 어떤 이야기가 나 오냐면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그 우상을 철로 만들어요. 쇠로 만들고 배에다 구멍을 뚫어요. 그래서 뚜껑을 열면 배가 이렇게 푹 파져 있어요. 그 우상을 놓고 밑에다 계속 불을 떼는 거예요. 그 쇠가 펄펄 달아오르지 않겠어요? 그러면 이제 거기에 제사를 드리다가 순서가 되면 배의 뚜껑을 열고 거기다가 아주 어린아이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리고 뚜껑을 닫는다는 거예요. 죽여서 거기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거기에서 막 불타는 거죠. 그 아이는 어떻게 공급했느냐?
확실 친 않지만 일설에 의하면 그 아이들을 사서 그렇게 하기도 하고 혹은 사람들이 말하자면 뭐랄까 제비를 뽑는다고 할까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식을 거기에 바치기도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함으로써 동네 전체가 복을 받을 수 있고 재앙을 면할 수 있다고 하는 속설을 가지고 있어요. 그 일을 주도한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이 므낫세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했다는 말이 그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인신제사를 절대 금하셨죠. 그런데 이방에선 이 인신제사가 말하자면 가장 사람의 피를 흘리고 죽여서 드리는 그 인신제사가 자기의신을 가장 기쁘게 하는 제사라고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섬기는 데 배경이 된 게 몰렉이라는 우상이에요. 그렇게 섬기는 거예요. 그 일을 주도한 사람이 바로 므낫세였다는 것이죠. 그 악함이 얼마나 극에 달하는 지 알 수 있잖아요. 그뿐만이 아니죠.
하나 더 그의 악이 있는데 뭐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거룩하게 생각하는 성전에까지 우상을 끌어드린 거예요. 하나님을 아주 공개적으로 능욕한 거죠. 그러면 사실 이런 사람은 한 칼에 베어서 생명을 거두시는 것이 당신의 영광을 보존하는 길이셨을 텐데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살려주시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으니 왕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으니 얼마나 엄청난 고생을 했겠습니까. 거기에 끌려가서 그 고생을 하고 환란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뭐냐면 오늘 여기에 므낫세 왕이 그렇게 포로로 끌려가서 거기서 회개하고 참 신자가 되는 이야기가 여기 나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메시지는 뭐냐면 이 세상에 아무리 악하고 더러운 죄인이라도 기회는 있습니다. 하나님 그들이 살아있는 한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거죠. 그게 하나님의 마음이고 또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 외경에 보면 외경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 들어가지 못한 또 다른 문헌이에요. 거기에 보면 므낫세의 기도라고 하는 책이 나옵니다. 그거에 보면 그가 어떻게 끌려가고 끌려가서 그가 행한 이야기, 그리고 그가 하나님 앞에 참회한 이야기, 하나님 만나는 이야기 등이 상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므낫세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깊이 회개하고 그 다음에 도달한 결론이 있어요.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더라.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더라.
결론적으로 예전에 왜 그렇게 우상을 섬기고 살인을 하고 그리고 여호와의 전을 능욕해서 이방의 신을 끌어드리고 그렇게 방탕하고 악하게 살아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다고요?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산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가장 많이 힘써야 될 의무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인생의 모든 행복과 그리고 삶의 모든 기쁨은 오직 거기에서 오는 거예요. 어떻게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하는 것을 아는 것 우리가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그것을 아는 지식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고 의지하고 따라가게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호와가 하나님이 신 줄을 알았더라는 거예요. 좀 일찍 알았더라면 12살 때에 그걸 알고 왕이 되었고 왕이 된 후에도 신앙생활을 잘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날마다 더 많이 알아갔다고 할 거 같으면 그러면 그가 얼마나 많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왕이 되었겠습니까? 그러니까 통탄할 노릇이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이 은혜의 세계에 대한 지식은 돈 주고도 살 수 없고 이 세상에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그렇게 소중한 것이란 말이죠. 왜냐하면 이 땅에 있는 자원은 이 세상에서만 대단한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땅에 있는 자원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필요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고 깊이 깨닫게 되면 그러면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지를 모르는 사람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준 높은 신앙의 삶을 살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우리를 판단하실 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이 이 땅에 자원들을 흔들어 쓰면서 살았느냐 또 얼마나 높은 지위를 누렸느냐 나이가 많아도 얼마나 건강하게 살았느냐 이런 것을 가지고 판단하시지 않을 거란 건 너무나 잘 알잖아요. 그러면 이 땅에 있는 많은 자원들로 자기 자신을 가꾸고 치장하고 그것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살아질 영광들이에요. 그런데 그가 정말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살고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으면 그가 후일에 하나님께 칭찬받는 거예요.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인정을 받는 것 그러니까 이 땅에 있는 자원보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은혜의 지식이 더더욱 소중하다고 하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생명이 있는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뭐냐면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잖아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러죠. 힘을 써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를 힘써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모두 이 므낫세처럼 악하게 살수 밖에 없는 것이에요.
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히스기야라고 하는 좋은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나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가지고 있었던 그 아름다운 신앙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아는 지식을 물려받지는 못했어요. 그래서 전혀 그 아버지의 아들 같지 않은 삶을 살게 된 거죠.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해야 되요.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줄 알려고 애를 쓰지 않았던 날들을 깊이 회개하고 힘써서 이 세상에 재물을 모으는 것보다 더 탁월한 열심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는 일에 열심을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면 이 므낫세가 어떤 계기를 통해서 이렇게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하는 거죠. 그게 뭐냐면 기도를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 기도가 그냥 이루어진 기도가 아니라 두개의 요인에 의해서 이루어진 기도였어요.
첫째는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왕으로서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고 그리고 두 눈까지 뽑혔다고 하니 그가 당한 고난과 수모가 얼마나 컸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므낫세가 그렇게 커다란 고난을 당하면서 그러면서 이제까지 누렸던 왕의 아름다운 영광과 비교될 수 없는 치욕과 모욕을 남의 땅에 포로로 끌려가서 비참한 죄수의 몸으로써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이 므낫세로 하여금 기도하게 한 것이죠. 사실 그러한 뼈저린 고난과 치욕스러운 수치가 왜 생긴 것이었죠? 자업자득이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악을 행하고 하나님 앞에 평안할 리가 있겠습니까? 언약백성들의 삶을 그렇게 망가뜨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잘 통치해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나라가 되도록 하나님이 세워주신 임금의 자리에서 그렇게 심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능욕하고 더럽힌 그런 삶을 살았는데 그가 하나님 앞에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를 인해서 그가 당한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게 되면 반드시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찾아오게 됩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깊이 인정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은혜의 세계에 깊이 들어갈수록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요구는 아주 세밀해 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향해서 가지고 있는 우리의 삶의 태도뿐 아니라 우리의 드러나지 않는 마음까지도 문제를 삼으시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대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 것이 대해서 책망하시죠. 그때 신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고 자신에게만 매우 엄하시다는 인상을 받게 되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그것은 뭐냐면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신 분량만큼 그 사람에게 온전함을 요구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앞에 혼도 많이 나요. 은혜를 쪼금 받은 사람들은 쪼끔 혼나요. 그래서 우리도 신자들을 보면서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 보면 예배당에 오는데 화유 정말 그럴까 겨울 되면 슬리퍼 끌고 짧은 반바지에 털 달린 다리 혁대도 안하고 런닝셔츠 차림에 배는 불쑥 나오고 그런가 하면 머리는 알록달록하고 하여튼 참 우리는 일부러 그렇게 하면 교회가라고 해도 사실 못할 텐데 그러고 나오잖아요. 권사님이나 장로님이 그러고 나왔으면 혼내야죠. 집사님이나 주일학교 선생님이 그렇게 나왔으면 그러지 말라고 혼내야죠. 그렇지만 오늘 한번 어떻게 교회 좀 나와 볼까하고 온 사람이 그렇게 왔어요. 그러면 이제 팬티바람으로 나와도 환영을 해야죠. 그까짓 털 달린 다리가 문제에요? 털 좀 많이 났으면 어때요? 그냥 정말 그 와주기만 하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진짜 말이지 누워서라도 예배드린다고 하면 오라 그러겠어요. 정말. 저 이층에다 환자실 하나 만들어 놓고 누워서 천장에다 TV 하나씩 걸어주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만 하면 변화되잖아요. 어떻게 하면 어떤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든지 그 뭔 상관이 있어요. 어차피 신앙 없는 사람인데. 지금 뭐 우리교회 다니지 않지만 옛날에 우리교회 지체 중에 하나는 절간에 중이였던 사람도 있었단 말이죠. 거기서 설교 테이프 듣고 은혜 받고 그거 옷 벗고 열린 교회에 내려온 사람도 있어요. 그것도 듣다가 주지스님한테 들켜가지고 그래서 가서 혼났어요. 너는 진짜 이상한 놈이다. 중 되겠다는 사람이 여기 와서 왜 목사 테이프를 듣고 있냐? 주지스님 심부름 하려고 읍내에 내려갔다가 김남준 목사 설교 테이프를 하나 사가지고 듣고 올라간 거예요. 그래 사정 얘기를 다 하고 제가 아무래도 열린 교회로 가야겠습니다. 그러니까 주지스님이 그래요. 그래 나도 옛날에 신학교 다녔는데, 아 주일학교 선생까지 했는데 그러더라고. 근데 그게 네 길이면 내가 생각해도 니가 거기로 가는 게 좋겠다. 아주 신사적으로 옛날에 성도 였다고 말이지. 옛날에 같은 기독교인이었다고 보내 주는 거예요. 그런 사람도 있고 별사람 다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고 은혜를 받으면 변화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때로는 어려운 고난의 환경을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하나님 만날 기회를 허락해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이 올바로 안 살면 반드시 우리에게 고난이 오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은 은혜를 받으면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좀더 온전한 삶을 원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또 우리가 적은 은혜를 받으면 조금이라도 온전한 삶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를 엄격하게 다루신다, 이렇게 생각할 때 감사하세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이제 사람이 되어 갔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감사해요. 그러면서 점점점점 은혜 받고 하나님 앞에 변화되고 새로워가는 것. 주님이 원하시는 건 바로 이 변화에요. 어제도 우리 성도 한 사람이 고생한다고 점심을 사주는데 정말 재밌는 얘기였어요. 일곱 살 먹은 꼬마가 아빠를 열린 교회로 인도했어요. 뭐라 그랬냐면 아빠 변화도 안 되는데 열린 교회로 가자 그러더래요. 아빠 변화 받아야 돼. 그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 변화되기를 원하세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변화되지 않으며 하나님이 때로는 우리 죄의 결과로 큰 고난을 당하게 하시죠. 그래서 하나님 없이 교만하게 살았던 날들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신단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니 앞에서 항상 경성한 가운데 살아야 해요. 깨어서 살아야 된단 말이죠. 죄가 몰고 올 결과와 인생의 위기를 깊이 생각하고 그리고 죄의 끝은 반드시 있다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하는 것이죠.
두 번째는 뭐냐면 히스기야가 기도하기 전에 먼저 마음이 겸비해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교만의 끝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교만한 자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하느니라. 하나님이 어디 있냐? 그리고 제 멋대로 사는 거예요. 바로 이 므낫세가 그런 사람이에요. 그러니깐 감히 여호와의 거룩한 성전에 이방 신상들을 세우고 이스라엘 언약백성들의 자식들을 힌놈의 골짜기에서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고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었던 산당을 대담하게 세우지 않았겠어요. 죄는 이런 대담함이 있어서 그렇게 악을 행하며 그렇게 담대하게 만드는 거죠. 그렇게 나쁜 일을 행하면서 악을 행하죠. 그게 바로 교만해서 그런 거죠. 그렇게 교만한 동안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도 없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도 없었어요. 여러분 고난을 많이 당하면 기도하게 될 거 같습니까? 안 그래요.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면 기도하게 될 거 같습니까? 안 그래요. 근심이 생기면 기도할 것 같습니까 근심이 물러가면 기도할 것 같습니까 몸이 아프고 병이 나면 하나님께 매달릴 것 같습니까 건강하면 주님 앞에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에요. 기도라고 하는 작용 그 자체는 신자의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작용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이 기도자체가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에 마음이 기도해야 하는 영혼의 욕구와 맞는 틀을 가지게 되면 기도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의 은혜가 충만할 때는 사실은 기도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죠. 기도가 계속 흘러나오니까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막지만 않으면 기도가 계속 흘러나오는 것이죠. 수도꼭지를 틀어서 그래서 물이 줄줄줄줄 나오는 것처럼 계속해서 나오죠. 계속해서 흘러나오죠. 그것이 바로 기도생활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마음은 뭐냐면 하나님 앞에 겸비한 마음이에요.
오늘도 우리 권사님이 기도를 은혜롭게 하셨는데 나는 이 주일날 우리들이 대표기도를 하잖아요. 그 기도하는 분들에게 내가 이 자리를 빌어서 정말 권면하고 싶어요. 어떤 때는 말이죠, 아직 집사 된지도 얼마 안 된 아주 어린 자매들이 그 주일날 1부 예배나 혹은 청년들 예배 때 그 어린 청년들이 기도를 해요. 얼마나 은혜를 받는지 몰라요. 그래서 은혜를 많이 받으면 내가 작년 까지만 해도 전화를 했어요. 내가 직접 하지 않고 누가 기도했는데 그 사람이 나한테 은혜 끼치려고 전화한 건 아니지만 전화를 좀 해줘라. 목사님이 그 기도시간에 은혜를 많이 받으셨답니다. 전화를 해주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건 뭐냐면 바른 기도 청산유수 같은 기도. 그런 기도의 의해서 감동을 받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그 뭐냐면 기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마음이 하나님 앞에 깊이 낮아지고 그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식하면서 자기는 비천한 존재 일뿐이라고 하는 겸비한 의식이 그 기도 속에 배여 있어야 되요. 그리고 마음에 없는 용어 같은 것은 쓰는 게 아니에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사랑이 충만하시고 그 옛날에 조상들이 하던 기도지 자기 마음에서 흘러나온 기도 아니잖아요. 그러고 기도하는데 웬 아버지는 그렇게 많이 불러요. 생각을 좀 하고 말해요. 아버지 아버지 그런데 아버지. 하늘의 아버지. 그게 뭡니까? 다 중언부언하는 기도에요. 천천히 하면 어때요? 누가 재촉 하는 사람 누가 있어요? 천천히 하면 누가 뭐라 그러고 또 하다가 우리는 써가지고 나와서 기도하지만 바로 하는 경우에 하다가 생각이 좀 안 나서 한 몇 초 멈춘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됩니까? 생각을 하면서 마음에과 하나 된 가운데 한 단어씩 한 단어씩 흘려보내는 거예요. 원고지 30장 기도 안하면 무슨 상관있어요? 두장만 기도하고 끝내도 그 얼마나 아름다운 기도가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청교도의 역사에 한번 보니까 그런 이야기는 나오더라고요. 목회자들이 모여서 어느 목사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를 못하는 거예요. 오 하나님 그러는데 성령이 임하셨어요. 그 사람들이 성령의 강력한 은혜가 임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됐어요. 한 문장도 못했는데 말이죠.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 거예요? 마음에서 나오는 거예요. 마음에서. 마음자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마음을 보시고 임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 그 중심에서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뭘 그렇게 기도를 빨리합니까? 여기가 무슨 속독 경연대회입니까? 다다다다다다다다 괜찮아요. 양을 줄여요. 양을. 절반만 해요. 꼭 필요한 말을 하고 그다음에는 거기에다 자신의 마음을 실어서 또박또박 천천히 내가 정말 은혜 받는 건 뭐냐면 말이죠. 그 마음이 전해지는 거예요. 기도를 하다가 기도를 멈춰요 그리고 흐느끼는 거야. 그러면서 언어가 묻어져 나오는 거예요. 모든 사람을 위한 대표기도는 기도의 거장 바운즈가 이야기 했듯이 간결하고 짧아야 해요. 그게 생명이에요. 길게 하는 건 혼자 할 때 그렇게 해요. 간결하고 짧고 모든 사람을 함께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마음이 되야 해요. 그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겸비한 마음이에요. 기도 속에서 자기가 말하자면 높은 단상에 올라 앉아 있고 자기 기도를 듣는 사람들이 자기한테 한 수씩 배워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기도 속에서 사람 야단치고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추궁하고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시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해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런 결론에 도달할 텐데. 하나님 왜 요렇게 하십니까? 한번 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코너로 계속 몰고 가는 거예요. 맞아야 돼요. 겸비함이 없어요. 깊이. 그런데 이 므낫세가 그런 겸비한 마음을 갖게 되는 거예요. 고난을 통해서 겸비한 마음을 갖게 된 거예요.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마음은 어떤 마음이겠어요? 때리시면 하나님이 자기 새끼들인데 죽으라고 때리시겠어요?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사납기도 하니. 집을 나간 자여. 어서와 돌아와. 어서와 주께 오라.
하나님이 때리시고 집을 나간 자가 외롭도록 내버려두시면 왜 그러겠습니까? 마음을 바꿔라. 왜?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없고 자기가 누구인지도 알 수가 없어요. 오늘아침에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 인생이 고달프고 왜 그런지 뭔가 뒤엉켜서 고난으로 꽉 차고 앞으로 가자니 길이 없고 뒤로 서자나 다리가 끊어졌고 그리고 옆으로 가보자니 가시밭엉겅퀴가 가득해서 고립되어 있고 어떻게 행할 수 없는 인생의 고난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미워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겸비해진 마음이에요. 낮추세요. 그리고 고백을 하세요. 하나님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고 능력도 없고 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나가서 내안에는 더러움과 일체의 부패함이 꽉 찬 죄인입니다. 주님이 나를 이 죄에서 건져 주시지 않으면 어떠한 희망도 없습니다.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기도해보십쇼.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므낫세가 이러한 겸비한 마음이 되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이 어떻게 보면 일평생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한 적이 없는 사람이죠. 아마 이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믿지도 않았던 것 같아요. 또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했다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을 하찮게 생각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어요. 왜 그렇죠? 기도하는 과정을 통해서 알게 된 겁니다.
이방에 포로로 끌려가고 죽은 목숨이 되어서 아무 희망이 없을 때 그 므낫세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고난을 당하고 마음이 겸비해졌을 때 그가 하나님께 부르짖는 그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아마 그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아마 자신이 언약백성의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거예요. 그리고 살아온 모든 삶이 죄로 가득한 더러운 삶이었음을.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몸부림치면서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런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인생이 힘들고 고난에 직면했을 때 거기서 온 밤을 하얗게 세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끊어져라 기도하던 때도 있죠. 그래서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건져내 주셔서 환난을 면하여 복이 되게 하시고 고난을 피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기회로 삼으신 적이 있잖아요.
인생의 벼랑 끝과 같은 위기 속에서 누구도 이 세상에 도울 이가 없는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서 하나님 원망하고 세상 한탄하다가 그 고난 속에서 마음이 겸비해져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매달렸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직 구속한 주만 보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렸죠. 생사를 걸고 주님이 나를 지켜 주시고 나를 이 인생의 위기에서 건져주시든지 아니면 내 생명을 건져 주시든지 하나님 앞에 매달렸고 그리고 이 환난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건져주시기만 하면 이제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겠습니다. 그런 신앙을 가졌던 적이 있는 거예요. 그 하나님께 간절하게 매달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던 그때가 있었잖아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게 되었잖아요?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마음은 그런 하나님 앞에 인생의 위기 속에서 간절히 몸부림치던 기도의 간절함을 잃어버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건져달라고 인생의 위기 속에서 몸부림치며 기도할 때 하나님 앞에 했던 수많은 신실한 약속들을 배반했어요. 그래서 인생의 또 다른 위기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이제 우리들이 회복해야 될 것이 무엇이겠어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이 가지고 계신 사랑을 무한한 용서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성경에서도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모두 하나님 앞에 용서받는 경험을 통해서 계시 되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여러분들이 인생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던 때 그리고 하나님 앞에 드렸던 그 아름다운 서원 땅도 듣고 하늘도 듣고 하나님도 듣고 천사도 들었어요. 그 하나님 앞에 한 약속대로 다시 신실하게 살아가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예요. 다른 길이 무엇이 있겠어요. 그래서 깊이 회개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는 사람들이 되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시 그 인생의 벼랑 끝에서 주님께 매달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던 그 간절한 기도를 회복해야 해요. 그래야지만 다시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다시 돌아갈 수 있어요. 다시는 또다시 하나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범죄하고 그리고 주님을 멀리 떠나고 그래서 주님 앞에 약속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자행자지하면서 주님께 불순종하는 그런 방종한 삶을 이제는 살지 않도록 다짐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그 인생의 고난의 벼랑 속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주님이 건져 주셨어요. 하나님이 잘못하신 게 뭐가 있어요. 거기서 그렇게 건져 주시고 그 후에 끊임없는 은혜를 주셨어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치시고 그리고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시시각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훌쳐내서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어 하셨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이 식었어요. 자기 생긴 대로 살고 싶었고 마음에 악한 고집과 그리고 심령의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간섭을 거절했어요. 하나님의 뜻대로 끊임없이 살게 하시고 그래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그 뜨거운 음성과 하나님의 그 간섭을 스스로 거절했어요. 그리고 부르면 부를수록 하나님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졌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그들을 바르게 살도록 인도하시려고 하려면 할수록 완강하게 뿌리치고 제 길로 갔어요. 오늘 당한 많은 고난과 시련, 가슴을 에는 슬픔들이 바로 하나님을 뿌리친 결과에요. 그러나 어디까지 가겠어요? 므낫세는 일평생을 악하게 살았던 임금인데도 고난을 만나자 겸비하게 하나님 앞에 회개했어요. 여러분들이 므낫세 보다는 나은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면 얼마나 더 하나님 앞에 뉘우치고 돌아와야 되겠어요? 므낫세 같은 악한 사람도 그렇게 간구할 때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 또한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실 겁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그 기도를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다시 찾아야 할 것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