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2005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5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소성케 하는 말씀(시119:25) 2005.10.23 주일오전 1
2.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라(삼상16:7下) 2005.10.30 주일오전 16
3. 영혼의 파괴와 회복(시51:2) 2005.11.6 주일오전 37
4. 영혼의 두 아름다움(시8:1) 2005.11.13 주일오전 57
5. 영혼의 아름다움과 사랑(시18:1) 2005.11.20 주일오전 72
6. 영혼의 아름다움과 은혜(시35:9) 2005.11.27 주일오전 86
7. 영혼의 아름다움과 선한의지(시119:1) 2005.12.4 주일오전 102
8. 영혼의 아름다움과 진리(시119:19-20) 2005.12.11 주일오전 121
9. 영혼의 아름다움과 순종(시119:102-103) 2005.12.18 주일오전 137
1. 소성케 하는 말씀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시119:25)
Ⅰ. 본문 해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다가보면 때로는 영혼이 곤고해지는 때가 있습니다. 깊이 영혼이 곤궁해지고 고통스러워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영적인 침체라고 부릅니다. 이 영적인 침체는 영혼의 활기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향해, 더 신령한 것들을 향해 본래에 가지고 있던 영혼의 감각을 상실해서 무기력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것을 우리들이 영혼의 침체라고 부릅니다. 이런 영혼의 침체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하기가 매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영혼의 침체 속에서 시인이 어떻게 극복하며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었는지를 이 본문에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119편은 176절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작식법에서 알리트레이션이라고 하는 두음법이라고 하는 기법을 이용해서 만들어진 시입니다. 히브리어의 자음이 22자로 되어 있는데 그 22자를 각각 맨 앞머리에 놓고 같은 글자를 8번 반복해서 8절을 만드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가’라고 하는 말로 1절부터 8절까지 ‘나’라고 하는 말로 9절부터 16절까지 이런 식으로 해서 하까지 나갑니다. 그렇게 시를 만드는 이유는 외우기 좋게 하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니 이 시가 그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외울 가치가 있는 시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119편은 어느 한 지점에서의 경험이 아니라 시를 지은 시인의 전체 일생을 거의 회고하다시피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와 어떻게 관계했는지 또 환경 속에서 그 말씀이 어떻게 자기를 구원하기도 하고 힘을 주기도 하고 위로를 주기도 했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현재형으로 나오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과거적 현재입니다. 지금 현재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일인데 현재화해서 그래서 그것들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 저자는 다윗일 것이라고 구약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일치하게 생각합니다. 두 가지 근거인데 하나는 문체상의 특징이 다윗의 고유한 글이라고 판단하고, 두 번째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광에 관해서 이렇게 깊이 있는 경험을 한 시인이 아마 다윗 이외에 다른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판단이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사랑과 놀라운 은혜를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이런 깊은 영혼의 침체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혼의 깊은 침체는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영혼의 침체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 아마 어떤 분들은 나는 그런 침체를 거의 모른다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거듭나지 않은 분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영혼의 깊은 침체는 영혼의 고향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느끼는 것이지 한번도 그 영혼의 고향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사람들은 침체가 무엇인지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체험한 신자는 한결같이 이런 영혼의 깊은 침체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인이 영혼의 침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Ⅱ. 영혼의 침체
A. “진토에 붙었을 때”
이 영혼의 침체된 상태에 대해서 시인은 뭐라고 말하는가 하면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하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진토”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아파르”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 단어가 제일먼저 사용된 것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아담을 만들 때 이 단어가 등장을 합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니 할 때 그 흙은 사실은 흙이 아니라 여기에 나오는 아파르입니다. 이 아파르 라고 하는 단어는 땅하고는 틀리고 엄격하게 말하면 흙하고도 틀립니다. 이 아파르는 정확하게 말하면 흙을 이루는 먼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황토 같은 그 위를 자동차가 막 달려가면 공중에 먼지가 뽀얗게 날립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아파르 라고 합니다.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또 성경에 보면 먼지, 혹은 티끌을 무릅쓰고 할 때 그것도 아파르 라고 부릅니다. 재 같은 것이 있는데 그 재를 밟으면 푹푹 날리는 재, 먼지 이런 것들도 아파르 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이 아파르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의미 없는 것, 가장 존재에 있어서 가볍고 하찮은 것, 이런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아파르 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은 특별하게 만드셨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피조물은 틀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좀 바르게 창조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땅은 나무를 내고 그 다음에 채소를 내고 이렇게 해서 땅에서 모든 것들이 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짐승들도 땅으로부터 다 나옵니다. 그런데 그 땅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이 아파르입니다. 그 아파르를 가지고 사람을 만드셨다는 이야기는 무슨 뜻인가 하면 똑같은 본질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해서 그 아파르를 가지고 사람을 만드신 까닭은 무엇인가? 결국은 존재에 있어서는 인간 자체가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이 존재는 그 존재의 본질에 있어서 짐승이나 풀이나 나무 이런 것들과 다를 바가 없는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 철학에서 보면 기본적인 인간의 이해가 자연 속에서 이해가 갑니다. 그래서 그 자연 속에 뛰어난 어떤 지배적 존재가 아니라 함께 그 자연과 함께 흘러가는 그런 존재 중에 하나라고 인간을 자리매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인간이 자기의 본래의 이치를 이탈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뭘 보기는 봤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들을 창조하셨을 때 아파르에서 인간을 만드심으로 말미암아 이 육체 자체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과 동일하다고 하는 그 진리를 그들도 발견을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밖에도 진리는 많이 있기 때문에 성경을 모르는 사람도 그 진리를 본성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순수지성으로 그런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발견하기는 했는데 발견된 지식을 다른 잘못된 지식과 함께 섞고 엮는 과정에서 이제 매우 그릇된 결론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런 잘못된 것들은 모두 사람 때문에 잘못된 것들이고 올바른 지식이 그 안에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빛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진리는 모두 한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닌 모든 흙, 먼지 속에서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인간 존재 자체가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것이 인간의 육체나 인간의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엇을 인간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별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별다른 존재가 되게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인간을 구별지어준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이 흙으로 모두 태어나게 하셨지만 인간은 하나님이 손으로 빚으셔서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영혼이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그 영혼과 닮은 영혼을 인간 안에 주셨는데 그 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 형상을 했으니 지식과 사랑입니다. 그런 형상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영혼 안에 있는 형상 때문에 그 모든 다른 피조물들과 다른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시인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나의 영혼에 진토에 붙었사오니” 라고 말합니다. 진토에 붙었다고 하는 말은 동일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흙은 이탈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땅을 기어 다니지 않고 배밀이를 하면서 살지 않고 두 발로 땅을 딛고 그 다음에 이렇게 머리가 서서 생활합니다. 우리 신체의 각 부분에 가장 그래도 이렇게 사랑받는 가치에 있어서 더한 부분이 어느 부분입니까? 생각도 안 하고 삽니까? 우리 몸의 신체 중 가장 그래도 비교적 덜 귀하게 여기는 부분이 어느 부분입니까? 발입니다. 그래도 손등에라도 로션은 바릅니다. 물론 발로 열심히 바르는 자매들이 있습니다만 발에도 로션을 많이 바른다고 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럼 발이 그런 대우를 받는가? 이것은 굉장히 철학적인 이야기입니다. 땅하고 가까워서 그런 것입니다. 이게 그런 질서 속에서 인간이 창조되어서 생활하게끔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게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게 거꾸로 되면 굉장히 불행한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전철 같은 곳에 보면 무슨 일 때문이 모르지만 다리가 잘려서 그렇게 배로 밀고 다니면서 물건을 팔고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모습들은 장애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렇게 생활한다면 결코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누가 뛰어난 재주가 있어서 물구나무를 했다고 칩시다. 다른 사람들은 똑바로 사는데 이 사람은 항상 물구나무를 선 채로 사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얼마나 썰렁하겠습니까! 밥 먹을 때 남은 삼켜야지 되는데 이 사람은 위로 올려야 합니다. 결국은 이 진토, 아파르 라고 하는 것은 그런 비천의 삶이니까 여기에서 시인이 지금 진토에 붙었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영혼이 원래의 그 탁월함과 가치를 잃어버리고 비참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굉장히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된 것입니다. 저에게는 하나의 그림이 있는데 40년 전에 제가 초등학생이었습니다. 국민 학교 라고 했는데 그때는 가난했습니다. 정말 엄청나게 가난했습니다. 학교를 끝나고 친구들과 집에 오는데 길거리에 애들이 동그랗게 둘러싸여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어느 아저씨가 우리만한 애를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골목에 보도블럭이나 뭐 이런 것이 없었습니다. 전부다 서울시내에도 저 제기동 같은 곳은 신작로라서 버스가 지나가면 먼지가 막 날리고 돌맹이가 튀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아저씨가 애를 때립니다. 꼼작도 못하면서 울며 맞고 있는데 마지막에 이 아저씨가 애를 쓰러트려서 얼굴이 땅에 딱 닫는데 그 반대편 얼굴을 발로 밟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잘못했다고 계속 그러는데도 밟습니다. 그러니까 얼굴 한쪽이 더러운 땅에 닿았습니다. 왜 그런가? 그랬더니 그 아저씨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하면 그때는 구루마도 엄청난 재산이니까 없고 사과궤짝을 놓고 소라, 번데기가 있고 비싼 계란 삶은 게 있었습니다. 애가 그것을 하나 훔쳐 먹었습니다. 그래서 개 패듯 때리는 것입니다. 그 아이의 머리를 땅에 머리를 딱 밟고 그리고 너 이놈의 자식 계란 값 어떻게 할거야. 지금 시인이 그런 상태에 놓인 것입니다. 이 진토위에 자기의 존귀한 영혼이 엎드려져서 뭔가에 의해 밟힘으로 이 하찮은 진토와 자신의 영혼이 거의 동일가치가 되어버린 그런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시인이 한없이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회심하는 그 순간에 최소한 세 가지의 탁월한 감각이 우리의 영혼 안에 들어오게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입니다. 이 영광에 대한 감각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그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 회심과 함께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 비슷한 것이 나타나면 아!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그런 감각이 회심과 함께 생겨납니다. 시간은 없지만 좀 상세하게 설명을 조금만 하겠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원래 영광은 성경에서 가지고 있는 재산, 명예, 큰 권세 이런 것을 전부다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말하는 영광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하여금 그것 때문에 바로 그 존재라고 인정하도록 만들어주는 효과, 그게 영광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어떤 사람이 어떤 존재인데 그러면 그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그 어떤 것이 그에게 있습니다. 그 효과를 발생시키는 게 있습니다. 그 효과가 바로 영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뭔지는 잘 모르지만 어떤 효과가 거기로부터 비추는데 그 효과 때문에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럼 별을 별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별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죄인을 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가, 그럴 때 죄인의 영광,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영광이라는 말을 안 씁니다. 그게 영광입니다. 그런데 그런 영광에 대한 감각이 깨어난 것입니다. 처음으로,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것을 통해서 아!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감각이 회심과 함께 생겨납니다.
두 번째는 사죄에 대한 감각이 생겨납니다. 전에는 중생하지 못했기 때문에 용서받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용서받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세 번째는 사랑의 감각이 생겨납니다. 전에는 교회에 나오거나 혹은 생활을 해도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이야기는 개념적으로 알고 있지만 그분이 바로 나를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데 그런 사랑을 깊이 아는 감각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 감각은 각각 다음의 반응을 불러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감각이 깨어나고 나면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니까 그 영광의 빛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자각이 생겨나게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사죄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게 되니까 죄가 얼마나 더럽고 잘못된 것인가를 깨닫는 감각이 생겨나게 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의 경험이 생겨나게 되니까 그 다음에 반응으로서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감각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내가 참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구나. 또 시간이 지나면 지금은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구나. 이런 것들을 자각할 수 있는 감각들이 회심과 함께 들어오게 됩니다. 이게 영혼이 고양되어있을 때는 이런 모든 감각들이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교만하게 행할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감각이 있으니까 그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서 자기가 얼마나 존재에 있어서 아무 것도 아니고 도덕에 있어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매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이 겸손해지지, 은혜 받지 않은 사람은 교만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죄에 대한 감각이 생겨나니까 죄를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그것이 멀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니까 사랑의 감각 안에서 자기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영적으로 고양된 상태에서 늘 신자가 누리면서 사는 영적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영혼의 침체가 오게 되면 이런 모든 것들이 감퇴됩니다. 현저하게 감퇴가 됩니다. 그래서 거의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영혼이 무감각하게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영혼은 매우 지성적으로는 혼란스러워지고 감정적으로는 아주 충동적이 되고 질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에 불복종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안에서 혼란스러운 질서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 사람의 영혼은 깊이 침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런 영혼의 침체는 회심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회심한 사람들은 영혼에 깊은 침체를 경험하게 될 때 자신의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같이 비참하게 되었다고 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통을 안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그 사람이 거듭나지 않았을 경우에 이런 영혼의 침체의 고통을 안 느낍니다. 또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영혼의 고통을 못 느낍니다. 그럼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거듭났는데도 목사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실체 속에서 영혼의 깊은 고통 같은 것 잘 못 느끼고 있는데요. 그 사람은 거듭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럼 또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럼 목사님 그렇지 않고 저도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했는데 제가 거듭나지 않았습니까? 하고 물어보면 저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설명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실 것입니다. 자유민주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왔습니다. 그래서 투사는 아니지만 자유민주주의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누구에게 얘기를 들었는데 그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이 혹독하게 고통을 당하고 돈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럽게 위세를 부려서 그 사람들을 짓밟는지를 누군가가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때 순간적으로 돈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미움과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민주주의 사상을 버리지 않았는데도 순간적으로 공산주의자가 느끼는 그런 분노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그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다시 태어나는 중생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정서가 움직여서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아니라 영혼 밖에서 일어나는 인간 정서 안에서만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더 이야기하면 길어지니까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자기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후에 실체도 아니고 영혼 자체가 죽어있는 상태에서 거의 고통을 못 느끼는 무감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하나의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하면 거듭났지만 이런 영혼의 침체 가운데 있어서 생기를 잃어버렸는데도 고통을 거의 못 느끼는 때가 있습니다. 어느 날 엄마가 어린아이를 뒷집에 맡기고 시장을 갔습니다. 애가 눈을 떠보니까 전혀 낯선 집이고 자기 엄마는 없습니다. 그럼 막 울기 시작합니다. 뭐라고 달래도 말을 안 듣고 너희 엄마 시장에 갔다고 그래도 이 애는 아직까지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그냥 막 웁니다. 뭘 주어도 다 필요 없다고 하면서 웁니다. 그때 아줌마가 딸랑이 하나를 흔드니까 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그 딸랑이를 한참 쳐다봅니다. 그게 얼마쯤 가겠습니까? 한 10초 쳐다보니까 똑같이 딸랑거리니까 다시 울기 시작합니다. 엄마 내놓으라고,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이제 이해가 가시지 않습니까? 고맙습니다, 눈만 껌벅이고 있으니까. 뒤편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신자가 자신의 영혼이 깊은 상태에 빠져있으면서도 자각을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영혼의 주위가 분산되었을 때 그때는 이 시선이 빼앗겼기 때문에 그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잠시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오래갈 수는 없습니다. 잠깐 동안 그렇습니다. 가끔 여러분들은 신실하게 예수를 믿었던 사람인데 흔하지 않은 죄에 깊이 빠진 것을 발견하는 때가 있습니다. 굉장히 신실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한 사람인데 순식간에 깊이 타락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저런 일이 있을까 하고 의아해하지만 역설적으로 그가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깊은 타락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그러면 왜 그렇게 깊은 타락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는가? 불현듯 그런 타락 속으로 들어간 이유가 무엇인가? 퀴즈를 내겠으니 알아맞혀보십시오.
부부 둘이 살고 있습니다. 두 커플이, 한 쌍은 아주 열렬히 사랑합니다. 닭살이 돋을 정도로 아침에 일어나서 마지막 잠자리에 들 때까지 늘 붙어답니다. 잉꼬부부입니다. 그런 사람이 20년 넘는 세월을 함께 살았습니다. 한쪽은 완전 찬밥입니다. 닭 소 보듯이 소 닭 보듯이 그렇게 삽니다. 가끔 싸우고, 한날 두 남편이 동시에 죽었습니다. 여자 둘이 각각 이제 홀로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빠른 시일 내에 시집갈 가능성이 많은 사람 중에 둘 중에 누구겠습니까? 후자가 아닙니다. 대게 전자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후자의 사람은 원래 남편으로부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안 받고 살아도 큰 불편을 느낍니다. 남편이 너무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어떻게 시집을 갈 수 있겠는가는 그것은 삼자가 하는 이야기고 본인은 안 그렇습니다. 이 여자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신문지로 입을 가리고 웃었을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큰일 납니다. 요즘은 화장실까지 안 갑니다. 옛날에는 화장실에 가서 웃었다고 하는데 80년대는 병풍 뒤에서 웃다가 요즘2000년대에는 신문지로 가리고 웃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을 때 이 여자는 혼자 살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살 깊은 사랑을 많이 받은 여자는 남편을 배반한다는 면에서 다른 남자를 찾아간다고 이렇게 보면 안 됩니다. 그 사랑의 간격을 메 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어버리든지 다른 데로 시집을 가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해야지 됩니다. 일반적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이런 비유를 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의 감격을 놀랍게 맛본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인해서 영혼이 깊은 침체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과 사죄, 사랑에 대한 감각을 모두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때에 신자는 하나님께 자신이 소외되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을 안 해주십니다. 그러면 이제 뭐만 남았는가 하면 자기가 자기를 사랑한 것밖에 안 남았습니다. 자기 사랑의 방식이 이제 그런 극단적인 쾌락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서갑숙씨라는 탤런트가 유명하지는 않았는데 책을 하나 써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났습니다. ‘나도 때로는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일년에 50억 원 어치의 책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잡지사에서 그 책을 읽고 서평을 해달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서점에 갔습니다. 그래서 그 책을 하나 달라고 그랬더니 다른 책은 펼쳐보고 중간쯤 읽어보고 사게 되어 있는데 이 책은 비닐로 뜯지 못하게 딱 봉해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서 읽어보는데 뭐 그렇게 비밀로 봉해놓을 정도로 비밀스러운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남자와 9시간을 성관계를 가진 이야기, 자기 친구하구 둘이서 자기 애인을 찾아가서 셋이 같이 잔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덤덤하게 써내려간 그런 내용입니다.
다 읽고 나서 혼자 막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한동안 기도했습니다. 난 그 사람이 크리스천인지 아닌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왜 눈물이 났는가 하면 그 속에서 사랑에 굶주린 영혼을 보는 것입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엄마 젖이 아니라 동리 아줌마 젖을 물고 있는 그 아이,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써서 호산나인가 어딘가 인터넷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생난리가 났습니다. 가짜 목사 물러가라. 화냥년 같은 여자를 두둔하는 목사는 도대체 얼굴 좀 보고 싶다고 하면서 떡칠을 해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서 올렸더니 이번에는 자기들끼리 막 싸웁니다. 가짜 목사 물러가라고 그러니까 진짜 목사지 가짜 목사가 아니라고 자기들끼리 막 싸우고 그 다음부터 다시 안 들어갔습니다. 아직까지 제 방에 남아 있습니다.
신자가 이제 하나님의 영광에 사죄의 사랑의 감각이 사라지고 나면 그 다음에 영혼의 곤궁함을 달래기 위해서 딸랑이를 흔들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자신의 영혼 안에 진토에 붙은 것 같은 고통스러운 상태를 그게 궁극적으로 해결 못해 줄 것은 뻔합니다. 그 다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죄가 점점 더 자극적이 됩니다. 이 정도에서 자극을 받았는데 그 정도 가지고는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와 똑같은가 하면 마약중독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즐겁기 위해서 맞는 사람도 있는데 그 사람은 정신병자고 대부분의 많은 사람의 마약중독은 고통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너무 아프니까 맞는데 5번만 맞으면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많은 양을 투여해도 이 고통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죄 속으로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이 시인이 저는 다윗이라고 굳게 믿는데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을 생각해보십시오. 그것도 결국은 이런 침체의 와중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다윗이 주의 영광은 온 세상 위에 눈물로 노래를 부르면서 밧세바와 함께 침대에 올라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은혜로부터 소외되고 아주 멀어지는 영혼의 암흑기가 있고 그 암흑기를 통해서 그가 이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던 하나님의 영광과 사죄에 대한 사랑의 감각들을 상실하고 결국은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제 그렇게 영혼의 침체 가운데 잘못하게 되었을 때 이제 비난을 받게 됩니다. 자기 양심이 비난을 받고 또 다른 사람이 알게 되었으면 다른 사람들이 비난합니다. 그때 평생 곤란한 처지에 처하게 됩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현실적으로는 분명히 자기가 지은 죄인데 이상하게 자신의 마음속에서는 자기가 죄를 지었다는 느낌이 안 들고 자기가 피해를 당했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소위 이야기하는 신자 안에 있는 복합의지입니다. 불신자는 단일한 의지의 작용으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경우에는 극단적인 죄를 선택하는 순간에도 죄를 지으려는 의지와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려는 두 개의 의지가 공존합니다. 이 법은 의지의 편에서 생각하면 그렇게 죄를 지은 것이 죄에게 습격을 당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혼란들이 영혼이 진토에 붙은 것과 같은 상황 속에서 발생하게 됩니다. 시인이 이런 영혼에 깊은 침체 속에서 진토에 빠진 것과 같은 상태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B. 영혼의 아름다움
존재의 아름다움은 인간다움에 있고,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에 있고 그리고 이제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가 되는가에 따라서 영혼의 상태가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이 미학적으로 뭘 의미하는가?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이 첫째로 바른 사물과 어울리는 속에서 그 존재의 아름다움이 규정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여기 이렇게 꽃이 있습니다. 어제 결혼식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풍성한 꽃이 두개가 있는데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여기에 와서 여기를 다 보고 꽃을 만든 것입니다. 하얀 개 이렇게 예뻐 보이는 것은 천장이 흰색이어서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얀 게 또 예뻐 보이는 이유는 뒤에 푸른 풀이 있어서 흰색이 예뻐 보이는 것이고 흰 게 돋보이는 이유는 그 앞에 분홍색 꽃이 있기 때문에 돋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꽃이 예뻐 보이는 것은 꽃 같은 사람이 여기 있기 때문에 돋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할 때는 얼굴이 빨개집니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울림 속에서 아름다워지는 것이고 그 다음에 또 아름답게 되는 것은 개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완전성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보십시오. 이 꽃이 아름답지만 똑같은 꽃이 2주가 지나서 다 시들었다고 그럴 때는 똑같은데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꽃은 그대로 꽃인데 완전함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안 예쁩니다. 이것이 아름다움입니다. 그럼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아름답다기보다는 특별히 아름다운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들 속에는 영혼을 주셨기 때문에, 그러나 인간이 단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어제도 밤에 들판에 나갔습니다. 날이 흐려서 별이 안 보이는데 그래도 저기에 별이 여러 개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유난히 환하게 빛나는 별에 눈이 고정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 사람의 아름다움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표상에 매입니다. 실제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영상에 매입니다. 그래서 돈이 많으면 아름다워 보이고 얼굴이 예쁘면 그 사람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압구정동에 가면 똑같은 여자가 많이 다닙니다. 매트리스처럼, 그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같은 병원에서 같은 날 수술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가 얼마나 자연주의 교회입니까? 청정지역입니다. 얼굴이 청정지역입니다. 자연 그대로,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영혼자체가 죽어 있기 때문에 조금밖에 아름답지 않습니다. 거듭난 사람들은 좀더 아름답습니다. 그런데 거듭난 사람들의 영혼의 상태가 부패성이 많이 들어간 사람이 있고 침체에 빠졌을 때 그것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영혼이 인떼그레따스 전일성, 순수성이 꽉 차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그 영혼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영혼도 하나님이 보실 때 아름다울 때, 좀 덜 아름다울 때, 매우 아름답지 않을 때, 그리고 다시 뛰어나게 아름다울 때 이게 시간이 흐름에 지남에 따라서 영혼의 아름다움이 변천하는데 하나님은 아름다운 영혼에게 말을 거시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에게 자기의 사랑을 보이십니다. 아름다운 영혼에게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셔서 더 아름다워지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아름다움의 기준을 어디다 두어야 되겠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결혼할 때도 절대로 외모만을 봐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 눈에 보이는 표상을 넘어서서 진짜 그를 아름답게 하는 그것이 정말 아름다운지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위로가 되셨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런 아름다움이 영혼에 있습니다. 지금 이 시인이 그런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침체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침체에 빠진 게 죄입니까? 예 죄입니다. 죄 때문에 침체에 들어오게 되고 죄 가운데 탈출하지 않으면서 계속 머무는 것은 더 큰 죄입니다. 그리고 더 큰 죄로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기에서 자꾸 정직해지지 않고 자꾸 거짓되게 행동하기 때문에 이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들은 자신이 그렇지 않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이 거듭났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영혼을 하늘로 별처럼 모두 뛰어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한번 눈을 감고 생각해보십시오. 캄캄해서 구름한점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완전한 캄캄한 하늘에 여러분들의 영혼을 별로 만들어서 모두 띄워버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생각했습니까?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십시오. 그대들의 영혼의 별을 한번 찾아보십시오. 찬란하게 빛나는 별입니까?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하늘에 흔적도 찾기 힘든 그런 종류의 별입니까? 영혼의 아름다움을 침체 속에서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그 침체 속에서 벗어나야지 됩니다. 그런데 그 벗어나는 길이 뒤에 나오는데 그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서 맑고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가 될 때, 그때 하나님이 그의 지성에 말을 거시고, 그의 정서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시고, 그의 의지를 사용하여서 하나님 당신 의지에 합치하게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주님 안에 산 것처럼 주님이 내 안에 산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게끔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에 이 본질적이 것들을 해결하지 않고 방치합니다. 내가 요즘은 영혼이 곤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게 전부다 직장 때문입니다. 직장에서 계속 구조조정이니 뭐 명퇴니 하면서 저를 괴롭히는데 목사님이 직장생활을 안 해보셔서 그렇지 목사님도 거기에 들어가시면 영적침체를 경험하실 것입니다. 또 대답합니다. 제가요. 침체에 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다 남편 때문입니다. 도대체 일을 해야지 가족에 대해서 부양의 의무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내 자리에 와있으면 침체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전부다 비껴갑니다. 그런데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첫 번째 제일 중요한 것은 honest god 하나님 앞에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핑계를 댄다고 해서 사람들은 들을 때 위로가 됩니다. 그 남편 인간도 아니구나. 그 회사 어떻게 그따위 회사가 있나. 요즘 세상에 어떻게 그렇게 나쁜 회사가 있나. 너희 회장은 진짜 악덕이구나. 위로가 되지만 그게 자신의 영혼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정면 승부를 하십시오. 확실하게, 그게 뭡니까?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는 아! 진토에 붙은 영혼, 내 영혼이 그런 상태구나. 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얼마 되셨습니까? 그렇게 된지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한 1-2달 정도 되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1년이 넘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매우 특별하면 어떤 분들은 10년 이상 계속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내 주위에 15년을 넘게 침체에 걸려 있는 분들을 여럿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의 중생을 의심해본 적이 별로 없는데 그런데 어째든 그렇습니다. 마지막에 중생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하늘나라에 가봐야 알겠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청년으로 영혼의 침체에 있는데 손자 볼 때까지 계속 그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된다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냅두세요. 이대로 살다가 죽어버리겠습니다. 하고 기도하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왜 가만히 있습니까? 그러면 그런 식으로 계속 그런 상태에 머물게 되면 마지막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한번 보십시오. 둘 중의 하나입니다. 결국은 다윗처럼 그 영혼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서 극한 범죄로 치달아가든지 언젠가는, 그렇지 않으면 아주 가식적인 삶을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도 성공해야지 가식적인 삶입니다.
이 온 교회당을 예쁜 꽃으로 가득 채웠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조화라면 활짝 핀 조화로 헝겊 냄새를 가득 풍기면서 예배당 가득 꽃이 있는 것보다도 한 송이 시들어가는 꽃이 더 예쁘다는 사실은 누구든지 인정을 합니다. 왜 거기에는 생명이 없으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말도 안 거십니다. 주님이 없습니다. 주님은 자신이 길이오,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그곳에서 주님이 느껴지는 것이지 생명이 없는 곳에서는 주님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지만 술집에서 회심한 사람은 거의 없고 그래도 교회에서 회심한 사람은 많습니다. 왜 거기에는 생명이 없는 곳입니다.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여기 술집보다 더 낡고 후진 건물이라도 여기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생명이 느껴지니까.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영혼이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가 있는데 왜 그렇게 삽니까? 그렇게 살면 안 되잖아요. 불편하지 않습니까? 자, 이렇게 얘기해봅시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습니다. 그럼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그렇게 물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힘들어죽겠는데 하나님께 내가 영광까지 신경 쓸 처지입니까? 그럼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럼 내가 묻고 싶습니다. 그럼 영혼의 침체 속에 있는데 행복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상태에 대해서 만족스럽습니까? 충분합니까? 만족스럽고 충분하다면 그냥 사십시오. 그런데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족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 영혼이 침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루하루 와서 그 본질적인 문제는 회피한 채 그냥 꾸역꾸역 교회에 나옵니다. 시간이 되면 꾸역꾸역 가고 예배를 드리면 빨리 끝나기를 바라면서 시계나 쳐다보고 앉았고 그리고 친구들하고 교회에 와서 노닥거리다가 가고 영혼에 도움이 됩니까? 왜 사람들이 진지하지 않습니까?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진지하게, 도대체 내 영혼의 상태는 어떤가?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무엇인가? 그럼 내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있는가? 그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이 지성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을 생각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무엇을 위해 존재하십니까?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들의 행동은 매일매일 논리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성으로 추론합니다. 시간이 되었구나. 밥을 먹자. 늦겠다. 전철을 빨리 타야지, 직장에 도착해서 오늘 일을 처리해야지. 일을 하면서 오늘 저녁에 누구를 만나야지, 내일은 누구를 만나야지, 거래처를 만나야지, 이것을 하니까 이것을 해야지 하면서 굉장히 논리적으로 추론하면서 그 틀에 맡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이렇게 논리적인 추론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도 그 이성의 추론을 가지고 도달하지 못하고 그 이성의 추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 그 미의 본질은 그 매일매일 여러분들의 머리에서 반복되는 이성의 추론을 가지고는 찾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의 추론을 가지고 논리를 통해서 겨우 찾아낼 수 있는 그것을 믿는 것보다는 소위 이야기하는 순수지성, 즉 세상의 욕심과 모든 것으로부터 다 벗어나서 하나님을 앙망하는 가운데 도달하게 되는 약간은 논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결론이 훨씬 신뢰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
왜 이렇게 내가 고통스럽고 어려운가. 남편 때문에, 아주 논리적입니다. 직장 때문에, 아주 논리가 그 사이에 서있습니다. 개별의 두 가지 사실 사이에 영혼이 침체에 빠졌다는 사실과 직장이 나쁜 직장이라는 사실 사이에는 아주 논리적인 인과관계가 성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성의 추론을 통해서 겨우 도달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은 그게 아니라 내 영혼이 정말 곤고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이야. 이것은 입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패한 이성을 가지고는 입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쁜 사람을 만든 것입니까? 아니면 기업을 악덕 기업주로 만든 것입니까? 논리적으로 안 됩니다. 그런데 후자의 발견이 전자보다 더 정확한 발견입니다.
Ⅲ. 성도의 희망
그럼 나는 오늘 설교를 계속 하기에 앞서서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결정을 하십시오. 그냥 살려면 다음은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전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내가 행복하지도 않다. 그러면 나는 여기에서 무엇인가 결단을 하고 내 영혼의 상태를 이렇게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만 이 후편을 들을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여기에서 성도의 희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무엇인가 하면 “주의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말씀대로 하는 말은 히브리말로 어코딘 투더 월드 오브갓 혹은 어코딘 투어 유어 월드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코딘 투 무엇 무엇을 따라서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나를 소성케 해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A. 하나님의 약속
여기서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소성하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의 근거로서의 말씀입니다. 아주 쉽게 얘기하면 약속입니다. 주님이 이렇게 영혼의 침체에 빠졌을 때는 구해주시겠다고 예전에 말씀해주셨으니까 그 하신 말씀을 따라서 나를 소성시켜주십시오. 그 뜻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침체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 침체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신다는 약속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게 용서의 약속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은혜언약 안에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사는 동안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장엄한 특권 가운데 하나가 무엇인가하면 용서받을 수 있는 권리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무한히 용서해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단 진실하게 참회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언제나 용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죄의 사상은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 잘 나타납니다. 제자가 예수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도 사랑과 용서를 강조하시니까 예수님 우리 이웃을 얼마나 용서해 주어야할까요? 그러면서 자기는 평소에 상상하지도 못했던 큰 인심을 예수님께 한번 써본 것입니다. 일곱 번 용서해주면 됩니까? 예수님이 네 믿음이 크도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가지고 안 된다. 그러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내가 일곱 번을 남을 용서해본 적이 있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물론 이 사람 한번, 저 사람 한번 이렇게 하면 일곱 번 될 것입니다. 그것 말고 같은 사람에 대해서, 또 한 발짝 더 나아가서 같은 사람의 연속되는 같은 죄에 대해서 자기에게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해서 연속해서 같은 사람에게 일곱 번 용서하는 사람은 사람 가운데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게 아니라 애야 70번에 7번이라도 용서해주어야 한다. 그것을 볼 때 아! 이게 7번이 아니라 77 49, 490번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완전수가 세 겹으로 겹친 것입니다. 7이라는 완전수가 두 번이 겹치고 거기에다가 10이라는 완전수가 한 번 더 겹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무한히”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순수한 까리따스 지순의 사랑을 가지고 이웃을 용서하며 살려고 할 때 그 기준은 무한히 라고 정하신 것은 예수님이 정확하게 하나님께 배워 오신 바로 그 사랑입니다. 그 용서입니다. 그게 약속되어있는 것입니다.
침체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종종 세월이 흘러가면 뭔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상당히 그들을 설득시킵니다. 왜 설득시키는지 여기서 다 이야기할 수 없지만 설득시키는데 그 설득은 설득시키는 게 아니라 속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고백을 하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이렇게 설교를 들을 때 벌떡 일어나서 목사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난 영혼의 침체를 15년 동안 겪고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들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일어나지 않아서 그렇지.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세월이 약입니까? 세월이 약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혼의 치료제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셨을 리가 없습니다. 절대 세월이 약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살다가보면 ‘무슨 수가 나겠지’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삼태기에다가 영혼의 침체 가운데 있는 여러분들을 번쩍 떠다가 은혜가 쏟아지는 그 장소로 여러분들을 옮기실 것이라고 여러분이 생각하시겠지만 기대하지 마십시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통해 말씀하시고 설복하심으로서 이런 일들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진실하게 참회하고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까 결국은 두려움과 세상에 대한 기대, 하나님 앞에 돌아갈 때 잃어버리게 될 즐거움, 하나님 앞에 서는 두려움 이 모든 것들이 함께 범벅이 되면서 혼란 속에 빠져서 무기력하게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날은- 기억하십시오.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마음 안에 행복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에 살아있지만 그러나 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살았다는 이름은 가진 자나 실상은 죽은 자라”고 말씀하신 계시록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침체에 빠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잊을 수없이 또렷하게 약속하셨으니 하나님이 반드시 그들을 건져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하나님께 사랑받았던 첫사랑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또 첫사랑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첫사랑과 방불한 풍성한 사랑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신다는 아주 뛰어난 사랑을 경험하게 된 것은 일반섭리 속에서가 아니라 뭐 자식이 대학 들어가고 좋은데 취직하고 이런데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 가운데 있을 때 바로 그런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는 참회의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져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느꼈고 그래서 하나님의 아주 탁월하고 각별한 사랑이 자신 속에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자기 속에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영혼의 침체에 빠진 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그러나 차선책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침체에서 벗어나면 이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에게 진실한 참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누구도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설교를 하는 순간에도 핏기 잃은 얼굴로 교회를 다니는 수많은 영혼들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무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우리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참으로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고 믿어야 되는지 생생한 모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결핍이 많은 이 땅에서 멸시와 욕을 받으시면서 일평생 동안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여러분 한사람 한 사람을 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의 순전한 몸을 깨트려 못 박아 죽게 하시고 그렇게 고난을 받으시면서 까지 우리에게 주시고 싶으신 삶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요? 세상과 교회 사이에 끼어서 박쥐처럼 살아가는 애매모호한 정체성을 가진 그런 삶, 영혼의 아름다움, 본래적인 아름다움은 상실한 채 진토에 붙은 것 같은 추루한 영혼으로 살아가는 그런 존재의 탁월함을 잃어버린 그런 삶,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 까지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서 고난당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르시고 우리가 맛보아야 할 죽음과 사망의 고통을 맛보신 것은 우리가 이제는 그 영혼의 추루함을 벗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하나님 창조하실 때 그 영혼에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서 그 아름다움 영혼 때문에 인간 존재 자체가 아름다워지는 사람으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사랑으로서 다시 그런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인간들을 그 아름다움을 되찾아주는 도구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선교하게 하시고 전도하게 하시고 그 영혼을 위해서 일하게 하시고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예수님처럼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섬기기 하셨던 것입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그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우리가 회심할 때 그렇게 울었던 것입니다. 어디에 갔습니까? 그 눈물과 선명한 태도, 진리에 전율하며 떨던 지성,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졌을 때 열렬하게 횃불처럼 타올랐던 마음, 이게 이 세상에 빛나는 어떤 것보다 더 좋은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가치들이 여러분들에게 가장 사랑받을 만한 참된 값어치를 지는 것들입니다. 세상 사랑했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을 것입니다. 매일매일 진리의 말씀이 자신의 영혼이 움직이는 것보다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의 자랑들이 자신의 영혼을 휘감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입술로는 진실한 삶을 살기를 원하지만 삶으로는 피 흘리기까지 분투하며 살도록 촉구하는 진리를 버린 거기에서 거짓과 허위의 삶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껍데기밖에 없는 영혼을 안고 오늘도 무슨 한조각의 부스러기라도 교회에 떨어지는 상에서 한번 주울까 하고 나온 사람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대들의 영혼의 참된 모습을 하나님 앞에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많이 용서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얼마 안 되는 믿음이지만 살아오다보면 회개할 때 많았습니다. 그런데 언제든지 보면 각각 다른 삶의 상황 속에서 참회하고 하나님께 돌아갔는데 자기가 깨트려져서 주님을 발견하고 나면 주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셨습니다. 거기 계시고, 거기 계셨고 앞으로도 거기 계시고 또 지금 말씀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약속을 하셨습니다. 용서를 경험해본 모든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 많은 죄를 그렇게 한순간에 용서해주실 수 있을까? 그런데 사실입니다. 그래서 용서받은 사람들은 모두 한 가지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자기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의 나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여러분들을 많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지금도 누구든지 당신 앞에 나와서 진실하게 참회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주십니다. 12년 동안 스며들어왔던 영혼의 침체를 하나님이 거두어가십니다.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기 환한 곳에서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좀 어두웠으면 좋겠다고 한다면 어두움을 만드는 기계로 들여와서 여기에다 장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불을 앞에서부터 차례로 끄면 됩니다. 그럼 저 뒤에 있는 사람은 무슨 느낌을 받는가 하면 어두움이 앞에서부터 막 달려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어두움이 달려오는 게 아니라 빛이 사라지고 나니까 어두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있는 게 아닙니다. 없는 것입니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두움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침체의 영혼의 깊은 어두울 때가 무섭고 엄청난 것 같아도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비추면 한순간에 모두 물러갑니다. 수많은 세월동안 양심의 가책 속에 괴로워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 죄에서 자유해집니다. 왜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니까. 거기로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돌아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을 좀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그럼 사고와 모든 것들이 훨씬 제 자리를 잡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그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B. 말씀의 힘
그런데 이제 또 하나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뭔가 하면 말씀의 힘입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하고 싶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나오는 탕자가 허랑방탕한 삶을 모두 청산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와서 회개했습니다. 아버지가 잘 씻어서 옷 입혀주고 가락지까지 끼어주고 신발까지 신겨주었습니다. 그날 밤에 깨끗한 방에 가서 잠을 잤습니다, 그날 밤에 술 생각이 났을까요, 안 났을까요? 왜 대답을 못합니까? 안 났을 수 있습니다. 왜? 그 날은 첫날이니까. 잔치까지 벌려주었으니까 벼룩도 낯이 있지, 그 다음날은 났을까요, 안 났을까요? 여자 생각은 났을까요, 안 났을까요? 그것입니다.
가끔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런 영혼의 침체 가운데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어떻게 하다가보니까 몸부림치러 나오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또 말씀의 은혜를 받으니까. 그리고 막 열심히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확신을 주십니다. 내가 널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용서해주마. 그런데 그 다음날이 되었는데 자신의 영혼의 상태가 새벽이 안 왔습니다. 아직까지 계속해서 똑같은 죄에 빠지고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셨나, 안 해주셨나.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시는 것 같더니만 왜 나를 안 건져주시나. 그래서 무지한 속에서는 우리가 헤어 나오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 집이 하나 있는데 여러분 중에 새 차를 하나 뽑아서 신나게 오다가 우리 집 담장을 우지직 박았습니다. 얼마나 세게 박았는지 담장이 구멍이 뚫릴 정도로 박았습니다. 그러니 저쪽에서 내가 야구방망이를 가지고 연습을 하다가 그 방망이를 들고 왔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게 아! 집주인이 엄청 화가 났구나 방망이를 들고 오더니 옆에 세우면서 문을 열고 아주 바짝 긴장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어디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 너무 감격해서 아! 괜찮습니다. 그런데 담벼락을 구멍을 뚫어났으니 어떻게 하지요? 뜻밖에 제가 하는 말이- 사실은 그럴 일은 없지만 -자매님,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중요하지 그 담벼락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안 다치셨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다음부터 정말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냥 보내주었습니다. 그 순간에 찌그러진 범퍼가 튀어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실 것입니다. 죄에 대한 책임은 면죄를 해주었는데 사고를 일으킨 흔적은 차안에 그냥 남아 있습니다. 본네트도 찌그러지고 범퍼도 다 찌그러진 것입니다. 어떻게 됩니까? 집에 와서 돈 들여서 펴야 합니다.
아들이 돌아왔습니다. 그 순간에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서 사랑을 받고 그날 밤 홀로 깨끗한 방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그날 밤에 또 술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결국은 어떻게 됩니까? 계속 그 아버지의 집에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고쳐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깊이 회개하면 그때가 이제 뭔가 하면 그 회개한 것을 기점으로 해서 자기를 부인하려는 의지가 계속되어서 발동이 되어야 합니다.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서,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계속해서 살면 안 된다.’ 라고 확! 자기 자신의 의지를 발동하면서 그러면서 아닌 것을 버리고 옳은 것을 택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더 많이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다 그런 것들을 버리고 그리고 온 몸과 마음이 일치된 가운데 영혼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주님을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와 그 능력 안에서 계속 고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자, 이제 여러분들이 결단을 해야 합니다. 둘 중의 하나 그냥 살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깊이 변화되든지 둘 중의 하나를 해야지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眞善美
2.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라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하)
Ⅰ. 본문의 배경
먼저 우리가 읽은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때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로 접어든 초기였습니다. 사울을 첫 번째 왕으로 세우셨지만 후에 그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마음이 변하여 주님께 패역하게 하는 사울을 폐하시고 새로운 왕을 세우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런 역사의 전환점에서 주님이 귀히 쓰시던 일꾼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사무엘 선지자입니다. 이 사람이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사사시대에 마지막 사사인 동시에 왕정시대를 연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도 사무엘하에서 사무엘에 의해서 세워지고 또 이제 그 뒤를 이을 다윗도 사무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집에 아들들 중에 당신이 세울 왕이 있음을 선지자에게 가르쳐주셨고 선지자는 이새의 집에 당도하게 되었습니다. 이새는 자기의 일곱 아들을 선지자 앞에 데려왔습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은 과연 그 용모와 신장이 왕이 되기에 충분한 것 같았습니다. 기름을 부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싫다고 하셨습니다.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둘째 아미나답도 또 상당히 수려하고 왕이 될만한 용모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마다하셨습니다. 셋째 아들 삼마도 그리하시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외모로 취하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아들이 모두 그렇게 지나가고 그리고 선지자가 물었습니다. 이제 다냐. 분명히 이 집에 하나님이 세우실 왕이 있다고 했는데 하나님이 다 아니시라고 하니까 이제 이새에게 물어본 것입니다.
그때에 이새가 대답하기를 마지막 아들이 하나 있기는 한데 지금 들판에서 짐승을 치고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이 마지막 아들은 이새의 눈 밖에 난 아들이었습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눈 밖에 난 아들이었고 그래서 이 사람을 데리고 왔더니 이제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여기에 보니까 “그는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다웠다”고 되어 있다고 그랬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까 우리는 그런가보다 합니다만 그러나 용모에 있어서는 앞에 있는 형들이 뛰어났음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버지의 눈에도 마지막 아들은 절대로 사울을 이어 왕이 될만한 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내적인 사랑이 없음과 그리고 그를 보면서 왕이 될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안 느꼈기 때문에 어째든 선지자 앞에 세우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을 보시면서 크게 기뻐하셨으나 이 사람의 외향은 그냥 들판에서 짐승이나 치는 그런 평범한 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이 다윗을 보시고 매우 기뻐하시고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성경에 나오는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이 표현은 히브리말로 하나님 마음 뒤에 있는 자라. 아하레 라는 전치사가 사용되는데 영어로 번역하면 being after heart of god 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 뒤에 있는 것, 그래서 아하레 라는 전치사는 뒤에 있다. 쫓아온다. 닮았다.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 마음 바로 뒤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오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Ⅱ. 영혼의 아름다움
우리는 여기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여기서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외모로 그 사람을 취하지만 그러나 나 여호와는 사람의 중심을 보느니라.” 여기 “중심”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바로 “레바브”라는 단어인데 히브리말로 이 레바브는 정확하게 영어의 heart 입니다.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이 “나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고 그의 마음을 보느니라”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을 하나님이 보신다는 이 구절 속에서 어떻게 우리들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마음이라는 것은 영혼의 작용인데 다시 말하면 실제가 아니라 기능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에 우리의 육체를 흙에서 지으시고 그 코에 훅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영혼을 주입하셨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만나니까 이제 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으면 육체는 이 땅에 남겨두게 되고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게 됩니다. 두개만이 실제이지 나머지는 실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바로 그렇게 실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철학자를 비롯해서 현대의 심리학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이 마음이 지성의 작용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일치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두뇌의 작용이다. 두뇌가 하는 일이 바로 인간의 마음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까지 표현을 합니다. 그들도 마음이 실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기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영혼과 육체는 실제인데 마음은 실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영혼의 투사이기 때문에 영혼이 아름다우면 그것에 의해서 투사되는 마음도 아름답고 영혼이 추루하게 되면 그 추루한 영혼에 의해서 투사되는 마음도 추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 여호와는 사람의 마음을 보느니라” 말씀하신 것은 곧 투사된 것을 보는 것이니 이 투사된 마음이 하나님 앞에 합치하기 위해서는 그 영혼이 하나님의 성품에 합치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눈을 껌벅이는 분들을 위해서 아주 쉬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옛날에 시골에 가설극장이 생깁니다. 그러면 하얀 천을 쳐놓고나 아니면 담벼락에 하얀 종이를 걸어놓고 그리고 활동사진을 돌립니다. 처음 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신기하기 짝이 없으니까 살금살금 가서 그 벽을 한번 만져봅니다. 사람이 막 뛰어다닌 것을 만져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영사기에서 빛이 뿜어져나가니까 사람도 뛰어다니고 전쟁도 일어나고 풀도 바람에 나부기고 바람이 불고하면서 이 광경들이 연출이 됩니다. 똑같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영혼의 투사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이 영사기라면 인간의 마음은 스크린에 맺힌 그 활동사진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순결한 영혼으로부터 그 순결한 마음의 작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을 때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시고 그를 임금 삼아서 당신의 뜻을 이루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A. 아름다움이란?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우리들이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그러면 도대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야지만 그 다음에 이제 영혼이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영혼에 적용할 것입니다. 조금 사유에 익숙하지 않은 여러분들에게는 조금 어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목숨을 걸고 쉽게 할 테니까 장년들도 충분히 이해를 했으니 여러분들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대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저의 설교의 논리를 따라오기를 바랍니다. 이 아름다움은 철학에서도 매우 난해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아름다움에 대한 개념을 아주 올바르게 이해를 한다면 성경을 보는 매우 탁월한 눈이 열린다는 것을 저는 체험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아름다움은 두 가지 아름다움으로 이루어집니다. 아름다움이란 곧 무엇인가? 완전성입니다. 두 가지 완전성이 아름다움을 이루는데 첫째는 보편적 질서의 아름다움입니다. 두 번째는 개체의 완전성입니다. 이 두 가지의 완전성이 합쳐져서 어떤 사물의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1.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
그러면 이제 하나씩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이라고 하는 것이 아름다움의 정체인데 그러면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창조하신 다음에 쓰레기 버리듯이 공중에 확 던져버리니까 이 우주가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방신하에서는 세상의 창조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이방신화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뢰할 수 없는 신화이고 성경은 분명하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에 의한 계획과 하나님의 견줄 수 없는 능력에 의해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대답을 해도 설교에 기여하니까 답을 한번 해보십시오. 생각을 하자는 이야기입니다. 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도 있었을까? 아니 왜 대답을 못할까? 질문을 이해를 못해서 그럴 것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성삼위 일체에 하나님만 계셨습니다. 그때도 아름다움이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 대단한 사유의 능력입니다. 대단합니다.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한 철학자들도 많은데 대단합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고 성삼위 하나님만 계셨을 때도 아름다움이 존재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없었던 것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 자신이 발로이기 때문에, 물론 이제 죄 같은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것을 지금 이야기하면 한참 시간이 가니까 어디까지 갔는지도 모르니까 그것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그리고 성삼위 하나님 안에 아름다움이 있었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따라서 창조된 것입니다. 아직도 명쾌하게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제가 이 비유를 들면 모든 의심이 싹 물러가고 진리를 믿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며 칠 날 창조되었습니까? 마지막 날 6 째날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인간을 첫째 날 창조되었다고 칩시다. 여러 가지 무리가 있지만 그래도 어째든 상상을 해보는 것이니까 첫째 날 인간을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게 인간을 창조해놓고 주님이 인간을 여기 세워놓고 빛이 있으라. 그러셨습니다. 빛이 비추었습니다. 인간이 눈이 있으니까 봤을 것입니다. 둘째 날, 또 셋째 날, 공중에 나는 새, 바다의 물고기, 육축과 그 다음에 씨 맺은 과일과 열매와 채소들 막 창조하시고 짐승들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이 어떤 태도로 그것을 보고 있었을까? 1번, 왜 다 처음 보는 것이니까. 2번째 빛이 있으라. 와! 빛이다. 물은 갈라지고 육지가 드러나니 와! 땅이다. 공중에 새가 날아다니고, 야! 예쁘다. 바다에는 물고기가 다니고 와! 멋있다. 1번입니까, 2번입니까? 대답을 하십시오. 그러면 자기가 처음 보는 것인데 뭘 보고 아! 빛이다. 아! 예쁘다. 이렇게 얘기를 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추론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2번이라는 답에 대해서는 여러분 모두가 동의를 합니다. 이성적으로. 2번이라고 하는 것은 모두 동의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랬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틀림없는데 그런데 뭘 기준으로 지가 뭘 안다고 아! 예쁘다. 아! 멋있다. 아! 물이다. 이렇게 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번도 못 봤는데. 그럼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미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혼 안에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이게 성경의 이치입니다.
이것을 프라톤 같은 사람이 뭘 조금 본 것입니다. 그래서 뭘 이야기하는가 하면 이데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 꽃을 보면서 예쁘다. 하고 이야기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이미 너희 영혼 안에 꽃에 대한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데아가 뭔지 모르지만 존재하는데 이것을 보는 순간에 이데아가 떠오르고 이데아가 두개가 이렇게 딱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합치될수록 아름답다고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개체로서 이데아가 존재한다, 안 한다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공간과 색깔, 그리고 거리와 그 다음에 크기,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한 감각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 감각들을 주셔서 어떤 조건하에 어떤 것이 놓이게 되었을 때 그것들이 이 안에서 작동을 하면서 감각이 거기에 딱 맞추어질 때, 그 감각과 들어맞을 때 그 감각에 의해서 사물의 미추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치가 그런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에 감각을 이미 영혼을 인간에게 주실 때 그런 감각을 주셔서 그래서 그 감각을 가지고 아름다움을 판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최초로 하나님밖에 있는 어떤 사물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구현이 되었을 때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가시적 범형은 가시적인 틀은 창조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게 최초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후에 창조의 모든 세계의 하나의 범형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창조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창조된 모든 사물이 완전히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아름다움과 완전한 선함, 완전한 탁월함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진선미,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진선미가 뭔가 그럴 때 미스코리아라고 그러는데 이게 인류역사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진선미가 이게 미스코리아처럼 세 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진이 제일 낫고 미가 제일 후지고 그런 것이 아니라 이게 원래 하나입니다. 하나를 어느 쪽에서 보는가에 따라서 진이 선, 선이 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참 진리이신 동시에 참 선이시며 참 아름다우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 최종적인 진이시며, 최종적인 선이시며, 최종적인 미이시며, 창조된 모든 세계의 진실과 선함 그리고 아름다움은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진선미의 모상입니다. 그러니까 이 미도 선과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끊임없이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증진할 수 있는 상태로 창조되었지만 불안전하게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그 창조의 세계의 수준에서는 하나님이 만들고 싶은 완전한 작품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창조된 세계가 최초의 아름다움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그런 하나님밖에 있는 아름다움의 표출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 안에 있던 아름다움이었는데 창조를 통해서 밖으로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과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수준에 있어서는 틀리지만 동질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면서 아름다워 하시고 기뻐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셔서 세상을 가꾸시는 그 아름다움이 증진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럼 처음 창조된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둘로 집약이 되는데 첫째는 보편적 질서의 아름다움입니다. 보편적 질서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하나하나가 다른 모든 것과 함께 어울리는 제자리에 있는 아름다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실 때 이 모든 창조물들을 아무렇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이 우주 전체를 창조하시면서 하늘에 떠있는 커다란 천체로부터 시작해서 그리고 도저히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게까지 그 피조물이 있어야 할 물리적인 장소뿐만 아니라 있어야 할 존재론적인 질서까지 하나님이 정해놓으셨는데 그 자리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세계가 아름답게끔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보편적이 질서를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그 보편적이 질서 안에 개개의 사물들이 다 존재하게 되는데 이 개개의 사물들을 형상하고 존재하고 배치하게 하는 세 가지 원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화와 균형과 절제입니다. 이 조화는 무엇인가 하면 다른 것들과의 어울림입니다. 그리고 이 균형은 다른 것들과의 대칭 속에서 나타나는 이 보편적 질서의 아름다움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사람이 이렇게 막 생긴 것 같아도 아니 내가 막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생겼어도 줄을 그으면 그대로 대칭이 이루어집니다. 데칼코마니 하면 그대로 똑같이 나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대칭이 되었을 때 이 균형을 이루면서 그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쪽에다가는 의자를 저만큼 만들어놓고 저 구석에다 통로를 만들어놓고 이렇게 한쪽은 많이 한쪽은 작게 이렇게 가운데다 통로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가운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모든 것들이 물질들이 대칭을 이루고 있을까? 남자와 여자, 양과 음, 그 다음에 많고 적음, 심지어는 하늘에 별의 위치까지도 다 대칭이 되어 있습니다. 심지어는 벽에 걸려 있는 활 하나도 틀어지고자 하는 힘과 붙잡으려는 힘이 붙잡을 때 활이 딱 걸려 있는 것입니다.
이 물체 하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물체 하나는 형체를 잃어버리게 하는 해체하는 힘과 그 다음에 이것을 원형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대치 상태에서 균형을 이루면서 물질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절제입니다. 절제에 대한 저의 정의는 그것이 그것으로 존재하게 하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것, 그게 절제입니다. 그런 세 가지 원리 속에서 우주의 보편적이 질서가 다 정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들이 쭉 질서 있게 배열이 되었는데 그 배열 안에서 각 피조물들은 자기의 위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위치에 있을 때 그것이 다른 모든 사물과의 어울림을 통해서 완전성을 갖게 될 때 그것이 곧 사물의 아름다움이고 보편적 질서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 지금 일곱 개 기둥이 서있습니다. 그런데 이 중에 두개의 기둥을 하나는 아주 누런 똥 색칠을 하고 하나는 거무틱틱한 시커먼 칠로 두 개를 했습니다. 물론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와서 칠해놓고 갔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은 들어오면서 색이 바뀌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워낙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 그리고 기둥이야 무너지지 말라고 해났지 무슨 색깔이든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하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미적 감각이 많이 상실된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대게 보기 싫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문제가 되는 것은 저 기둥뿐인데 이 실내 전체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신 감각 가운데 하나가 모양과 색깔에 대한 감각과 그 다음에 냄새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윗도리하고 아래쪽 옷이 색깔이 안 맞는 옷을 입고 다니면 내가 학대받는 느낌입니다. 안 그러려고 애를 많이 쓰는데 그런데 참 심하게들 학대를 합니다. 자, 얘기가 나왔으니까 한 번 더 하겠습니다. 머리를 호텔에 가서 15만원을 주고 머리를 했습니다. 폼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화장을 전문 미용 가에게 예쁘게 화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블라우스는 프랑스제를 입고 그리고 목걸이는 이태리제 목걸이를 했습니다. 외투는 영국제 외투를 입고 그러니까 기가 막히게 꾸몄습니다. 머리도 반짝반짝 평생에 그래본 적이 없이 했습니다. 구두도 이테리에서 직 수입한 아주 좋은 새 구두를 프랑스제 양발과 함께 신었습니다. 그런데 바지가 찢어진 청바지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아름다움이 바지가 차지하는 면적이 25%니까 75점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하나가 거기 입었기 때문에 빵점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는 최소한 위에 자켓에 어울리는 치마를 입었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입니다. 그 안에서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을 적용하겠습니다. 보편적 완전성에 대해서 두 가지로 적용을 하겠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에게 주신 보편적 질서에서의 인간에게 주신 위치가 있습니다. 거기에 있을 때 그 사람이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에 질서 속에서 인간이 차지해야 할 위치가 있습니다. 동물보다는 위고,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 대해서는 동등이며,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그 존재가 보편적 질서 안에서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렇게 자기의 분수를 알고 하나님이 지정해주신 자리에서 비굴하게 굴러 떨어지지도 아니하고 오만하게도 그것을 밟고 올라가지도 아니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부여된 그 위치에 그 영혼이 있을 때 그 영혼은 인간 존재에 있어서의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이탈하게 되면 그러면 그 영혼이 아름다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럽습니까, 깨끗합니까? 더럽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균이 많으니까. 멸균을 했습니다. 균을 다 죽였습니다. 더럽습니까, 깨끗합니까? 균이 하나도 없으면 더럽습니까, 깨끗합니까? 여기다 넣으면 눈에 거스릅니까? 이렇게 났는데 더럽다고 그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멸균한 상태에서 비빔밥 위에 올려났습니다. 그러면 더럽습니까, 안 더럽습니까? 멸균했으니까 여러분이 밥을 먹으려고 식탁에 앉은 손보다 깨끗합니다. 더군다나 여기에서 원적외선이 나와서 그런데 아름답습니까, 안 아름답습니까? 아름다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름답다, 더럽다가 같은 이야기입니다. 반대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아름답다. 추하다. 깨끗하다. 더럽다 인데 결국은 더러운 것은 추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깨끗한 것입니다. 불결하지만 아름답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또 깨끗한데 추하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추하면 이미 불결한 것이고 불결하면 추한 것입니다. 순결한 것은 아름답다고 합니다. 자, 이것을 비빔밥 위에 올려놓으면 더럽다고 얘기합니다. 멸균했다고 그래도 싫다고 합니다. 그렇게 좋으면 너나 먹어라. 나는 안 먹는다. 이게 다 위치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이치를 이탈한 것입니다. 비빔밥 위에 올라가있을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멸균이 아니라 멸균 할아버지를 했어도 거기에 올라갈 물건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주 기가 막힌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정말 지금 막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비빔밥을 했는데 빨간 고추장에 노란 국화꽃잎 하나를 얹어났습니다. 더럽습니까, 안 더럽습니까? 더럽습니까? 그럼 여러분들은 일식집 같은데 안 가봤구나. 양식집에도 가면 그런 것 많습니다. 이렇게 다 자기 수준이 탄로가 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꽃이 거기에 올라가 있는데 더럽지 않은 이유는 그 꽃이 거기가 있는 것이 고유한 자리가 아니지만 거기에 이렇게 꽃이 올라갔을 때 이것보다는 훨씬 잘 어울린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 꽃을 덜어내고 먹더라도 음식에 그런 것 많습니다. 꽃을 이렇게 덜어내고 먹더라도 그런 위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편적인 질서 안에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이것만 들면 다 이제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둘째 날, 셋째 날 계속해서 다 창조하신 다음에 마지막에 인간 창조까지 끝내셨습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그러신가 하면 "보시기에 좋았더라." 그렇게 하지 않고 히브리 성경에 이렇게 나옵니다.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셨다. 그때 보라. 매우 아름다웠다. 여기에서 '핸' 이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는 간투사라고 그래서 영어의 비 홀드에 해당됩니다. 뭔가 장엄한 사실을 도입할 때 사용되는 간투사입니다. 보라. 팔이로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밥상을 다 차려놓고 보라, 국수로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뭔가 장엄한 게 도입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하면 하나 하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는데 그 모든 창조가 끝나서 제 자리에 가고 나니까 좋았는데 심하게 좋은 것입니다. 너무 심하게, 번역이 좀 그렇습니다. 심히 좋았더라. 이게 바로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이 아름다움을 이룬다고 하는 한 예입니다. 더 하고 싶지만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우리가 인간으로서 자기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그때 그 영혼이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인생의 허무함과 모든 슬픔에 대해서 이야기한 다음에 그러므로 사람의 본분은 이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하면 네 분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게 거기에서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이 세계가 지금 다 보이는 것입니다. 별 인간들이, 별 거지깡깽이 같은 인간들이 다 튀어나와서 돈버는 것에 있어서 내가 최고다, 경영에 있어서는 내가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 바둑은 내가 제일 잘 둔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그러고 까불고 다니지만 이게 전부다 다 더러운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으로서의 위치에 기본적인 위치를 이탈한 채 떠들고 돌아다닙니다. 이게 전부다 사람이 보기에는 화려한 영광일지라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는 이 세상에서는 너무 추루한 영혼들입니다.
또 하나는 두 번째로 적용을 하자면,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에 두 번째로 적용을 하는데 이렇게 인간이 기본적으로 인간 본연이 있어야 할 위치에 있을 때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 안에서 그 영혼이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이 기본적인 질서를 지킬 뿐만 아니라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다른 양태로 이 세상에 두십니다. 지금은 여기 있지만 언젠가는 형제를 만나서 결혼을 하면 자기 집에서 떠나서 시집으로 갑니다. 그리고 지금은 엄마 딸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여섯 딸의 엄마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딸들에 어머니가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양태에 따라 다릅니다. 이 직장에 있다가 하나님의 뜻이면 저쪽 직장으로 가기도 하고 평범하게 직업에 종사하며 살다가 선교사로 가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그를 하나님께서 두시고자 하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나는 왜 갔는지 모르지만 거기 그 사람이 있을 때 그 시점 안에서의 다른 보편적인 질서 속에서 그 사람의 존재 때문에 다른 것들의 아름다움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습니다.
내가 왜 여기에서 설교하고 있나. 아무 이유 없습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하나님이 지금 시점에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피할 수 없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내가 여기에 있기를 원하시는데 여러분하고 작별을 하고 닫힌 교회로 갔다고 합시다. 그러면 내가 닫힌 교회에 가서 거기서 무슨 사기를 치겠습니까? 아니면 무슨 사업을 하겠습니까? 거기서도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입니다. 그래도 더러운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여기에 있으라고 그러셨으니까. 그런데 내일이라도 열린 교회 말고 원래 있는 교회로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 보내시려고 하는데 내가 저항을 하고 안 가려고 하면서 그래도 내가 여기서 비벼보겠다고 그런다. 그 자체가 추해보이는 것입니다. 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여러분들에게 다시 적용을 시켜보겠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시기마다 자기를 두시려고 하는 곳입니다. 그런 곳은 없는 쪽이 없고 항상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역지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어디든지 하나님이 정하신 위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금년에 교사로 삼기로 원하셨다. 거기 있을 때 그 인간이 제일 아름다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두시려고 하는 위치가 있는데 하나님의 뜻은 그런데 자기가 거기서 이탈합니다. 이탈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불순종이라고 그런 것입니다. 불순종하면 어떻게 됩니까? 기도도 안 되고 말씀도 귀에 잘 안 들어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힘들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에 추루한 영혼이 된 것입니다. 추루한 영혼은 하나님과 만나기 힘듭니다.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보편적 질서 가운데서 두시려고 하는 그 자리를 이탈하고 열렬히 기도해 봐도 소용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있을 때 그 사람이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숙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계명,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자기를 두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숙명의 삶을 살 때 그 영혼이 보편적 질서 안에서 안전성을 갖게 되어서 아름다운 영혼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개체적 완전성(아름다움)
두 번째는 개체적 완전성입니다. 자, 여기 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꽃이 예쁩니다. 그런데 한 삼주 내버려두었더니 꽃잎에 다 시들고 열매도 새카맣게 썩기 시작합니다. 그 썩은 꽃도 꽃이고 이 싱싱한 꽃도 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은 아름답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름답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유는 둘 다 꽃이라는 동일본질에는 차이가 없는데 이것이 완전성을 더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이 꽃이 더 아름답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이제 들어보십시오. 젊은 사람들이 아름답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아름답다고 그런 것은 나이든 사람들끼리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젊은 것은 아름다워, 그리고 또 왜 그런가 하면 생명의 기운이 그 속에 많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우리 집 사람이 제일 싫어하는 이야기 중에 하나인데 난 상당히 철학적으로 얘기하는데 허리가 어때. 응, 죽음의 기운이 계속 들어오네. 우리 아들도 싫어합니다. 아빠, 제발 그 이야기 좀 하지 말라고, 아, 목사님 하나도 안 늙으셨습니다. 안 늙기는 그런 모욕적인 말이 어디 있나. 죽음의 기운이 계속 스며들어오는데 어떻게 안 늙을 수가 있는가. 태어나자마자부터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여자도 23세부터 늙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죽음의 기운이 스며듭니다. 목사님, 시집갈 길 막히겠네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삶과 죽음의 경계가 없는 사람들이니까.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어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완전성이 자꾸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게 아름답지 않은 것이 됩니다.
또 드라이플라워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꽃 선물받자마다 거꾸로 걸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난 항상 하지 말라고 그러는데 너무 잔인합니다, 그냥 그대로 살다가 시들게 두십시오. 이렇게 해서 활짝 핀 채로 그대로 있습니다. 거꾸로 꼭 매달아야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대로 있는데 그것은 시들어있는 꽃이 더 아름답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개체로서 완전성이 현저히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창조하셨을 그때에는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과 함께 우리의 영혼의 개체 안에서의 완전성도 있었습니다. 이 완전성은 무한한 완전성은 아닙니다. 무한한 완전성이라고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무한한 완전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대하셨던 인간 존재로서는 더 할 나위가 없이 완전 하에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아름다움은 더 증진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은 증진될 여지가 있는데 이 영혼의 아름다움은 증진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멕시엄이 되도록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인간의 영혼을 그렇게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그때에 그 인간의 영혼의 아름다움은 곧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 되는 것입니다. 찬란한 그 아름다움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회복되는 것이 언제인가 하면 영화의 상태에서 회복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부활한 몸과 영혼이 만나서 그래서 그 생명의 부활로 나아가게 될 때 그때 그 모습이 바로 맨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 모습과 맞먹는 그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을 아주 아름다운 영혼으로 선함으로 꽉 찬 영혼으로 창조하셨을 그 인간 존재를 완전함에 빛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불멸하는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서 불멸의 존재로서 죽음의 기운이 침투할 수 없는 피조물로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아름다움은 인간만 상실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세계가 함께 상실한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진짜 너희들을 창조한 나의 창조의 원성이 어떤 것인지 마지막에 완성될 그 원형이 어떤 것인지를 너희들에게 보여주마. 그래서 한번 딱 인간에게 볼 수 있도록 보여주신 것인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그 부활의 찬란한 모습이 바로 창조의 영광이고 그리고 구속에 의해서 완성되는 재창조의 영광입니다. 변화산에서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의 그 신비한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또한 부활체의 모습과 함께 우리가 장차 돌아가게 될 영화의 상태에서의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 아름다운 상태로 신자들이 모두 영화롭게 되고 그것과 함께 창조세계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이 본래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되는 때가옵니다. 그때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의 새 식입니다. 그때까지 인간들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흐느끼면서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신자로서의 소명이라고 하는 것을 한번 거기와 연관지어서 생각해본다면 예수를 믿고 살아가는 이 일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이렇게 누가 지난번 목요일 마당에서 특강을 한 것을 듣고 참회가 이렇게 우주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몰랐다고 그러는데 그것은 기본입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 이 자체가 우주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오늘 하나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이것이 우주적인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그러신 이것은 단순한 목숨을 이야기하는 것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고 사는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놓고 보면 그러면 죄 때문에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 개체로서의 완전성이 완전히 하나도 안 남고 사라진 것입니다. 완전히 깡그리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게 중생입니다. 회심과 중생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 영혼이 완전히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수리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완전히 다시 태어나서 개체로서 완전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중생을 통해 재창조된 영혼 안에 두신 아름다움입니다. 문제는 처음 창조된 인간의 영혼은 완전했기 때문에 어떤 오류나 어떤 불결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재창조하신 인간은 그 안에 여전히 온전함을 회복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 안에 죄와 부패의 요소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죄와 부패의 요소가 개체의 완전성을 깨트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일성을 감퇴시킵니다.
전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한 물체의 그 물체 되게 하는 성분입니다. 그러니까 물은 물로서의 전일성이 있을 때 가장 좋은 물입니다. 물은 물 고유에 성분을 가진 물질만 꽉 차있을 때 그때 그것이 가장 순수한 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영혼의 전일성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영혼이 영혼 됨으로 꽉 차있는 것, 그렇게 됨으로서 그 영혼은 하나님 앞에 완전성을 지니게 되어서 아름다움을 가진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영혼 됨으로 가득 찬다고 그럴 때 앞에 있는 영혼은 우리 구속받은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고 뒤에 있는 이 영혼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그 완전한 영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자를 포함한 인간의 이 영혼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 영혼이 가지고 있었던 그 순수한 영혼 됨으로 영혼이 꽉 찰수록 하나님 앞에 이 영혼이 개체로서 완전성을 가진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 개체로서의 완전성을 가질 때 그 영혼은 아름다운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아름다움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결국은 우리 인간의 영혼의 전일성의 회복에서 오는 것입니다. 영혼이 영혼다움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 개체의 완전성과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은 두개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엮어져있습니다. 이제 논증을 해보겠습니다. 이런 영혼을 영혼 됨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영혼이 본래의 영혼 됨으로 꽉 차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영혼이 아름다움을 갖게 됩니다. 은혜를 받게 되면 이 영혼의 완전성을 방해하던 죄, 그 다음에 불결, 더러움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그 은혜에 의해서 자연히 죽으면서 이 속이 하나님의 지순의 사랑으로 꽉 차게 됩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하는 역할 자체가 까리따스의 사랑을 인간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런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인간의 영혼이 꽉 차게 될 때 인간은 인간 영혼 안에 있는 고유하지 않은 특질들, 죄와 불결들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영혼은 영혼 됨으로 꽉 차게 됩니다. 그래서 영혼이 개체적인 완전성을 갖게 됩니다. 아름다움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태어난 이래 이제까지 가장 아름다웠던 때가 있습니다. 그게 언제인가 하면 첫 번 회심 때, 그때 자기의 죄를 뼈저리게 깊이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그 속에 하나님만 사랑하는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꽉 채우셨습니다. 그때 영혼이 가장 많은 전일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혼이 전일성을 소유하게 됨으로서 영혼은 개체의 완전성을 갖게 되는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순전한 사랑으로 꽉 차서 영혼이 완전성을 회복할 때 자기가 있어야 할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가고 거기서 인간이 만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슨 이치인가? 인간에게는 이 둘이 분리될 수 있습니다. 개체 하나는 아주 불안전하기 짝이 없는데 이것을 보편적으로 있는 질서 속에다 살짝 집어넣었더니 이것만 있을 때는 별로였는데 거기다 딱 놓으니까 아! 멋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착시현상입니다. 미학적 착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게는 그런 착시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 하나를 아주 완전하게 하시는 것과 그것이 보편적 질서 안에서 자기를 찾아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것, 사이에는 구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체적으로 완전성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 보편적인 질서 안에서도 완전성을 갖게 되어서 두개가 나누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정도까지 하면 여러분들 가운데 그래도 설교를 귀담아 들었던 어떤 사람은 즉시 의문이 떠오를 것입니다. 저것은 아니다. 저것은 지금 모순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하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뭔가? 지금 말씀하신 것은 틀렸습니다. 왜? 목사님이 예전에 말씀하신 것과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 목사님이 죄와 은혜의 지배에 대해서 설교하시면서 그 시리즈가 마지막 끝나기 직전에 죄 때문에 넘치는 은혜라는 설교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분명히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죄는 나쁜 것이지만 그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고 결국은 그 죄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이 죄가 쓰임을 받는다. 그러면서 예를 든 것이 단수라고 하는 바닷물의 농축액인데 마시면 죽지만 그것을 콩에다 넣지 않으면 두부가 안 된다.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하고 안 맞지 않습니까? 그러면 제가 오! 정말 제자가 될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입니다. 오! 정말 뛰어나다. 어쩌면 그런 것을 기억하나. 아마 칭찬해줄 것입니다. 그런데 틀렸습니다. 왜 틀렸는가 하면 죄가 이 세상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넘치게 하고 인간이 설명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 죄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맞습니다. 거기까지는 맞는데 이렇게 되는 것이 영원한 원리는 아니라 한시적인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최후의 심판이 필요 없습니다. 놔두면 하나님이 저절로 영광을 받으시는데 왜 모든 악한 무리들을 심판하시고 완전히 분리해서 지옥으로 보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속권을 주어야지 계속 비빔밥을 만드시면서 영광을 받으실 텐데, 그러니까 그것은 영원한 원리가 아니라 잠세적인 원리입니다. 잠깐 세상에 있는 동안에 통용되는 원리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그럼 됐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렇게 되는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고 자기와 죄와 악함을 발견합니다. 진실한 통회 속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서 생겨납니다. 아, 정말 하나님 밖에 없다. 주님 밖에 없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을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따라 난 알았네 내게 주밖에 없네
그러면서 정말 하나님 밖에 없네. 그런 마음이 스며듭니다. 그러면 영혼이 그 사랑 안에 완전성을 회복하게 됩니다. 구겨졌던 것이 다 펴집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인간이 인간의 원래에 본연에 있어야 될 자리로 돌아갈 정도로 충분히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겨졌던 마음은 격려 받고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하고 그 자리로 갑니다. 그리고 자기가 버려두었던 사명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러니까 이게 영혼의 성화에서 오는 개체적 완전성의 회복과 보편적 질서 속으로 돌아가는 두 개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탕자의 비유가 그렇게 감격적인 이유는 결국은 그 탕자가 더러운 인간이었는데 우리 모두 탕자가 되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집 나간 탕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돌아온 탕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항상 이름을 붙일 때 나간 적도 있고 돌아온 적도 있습니다. 집나간 탕자라고 안 그러고 돌아온 탕자라고 그렇게 합니다. 그 이유는 미학적 관점이 나간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없애버리고 그리고 다 탕진하고 건강까지 다 잃어버린 다음에 알거지가 되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의 아름다움이 재산을 다 모아서 먼 나라에서 잘나가며 허랑방탕할 때보다 더 아름다우면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게 알거지인데, 진짜 똥 퍼 수준인데, 이건 그래도 재벌 2세쯤 되었는데 그런데 왜 이게 더 아름답습니까? 있어야 할 제 자리로 돌아왔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 마음이 온전함을 회복하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온전함을 회복이 무엇으로 나타납니까? 회개로 나타납니다. 하늘과 아버지께 내가 죄를 얻었사오니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품꾼 중에 하나로 여겨주십시오. 그래서 깊이 회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탕자의 비유인 15장을 다시 써보겠습니다. 뼈저리게 회개했는데 계속 거기 살았더라. 그러면 제목이 그럼 거기 그냥 있었던 탕자. 이렇게 해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그러니까 의미가 없습니다, 회개를 하니까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영혼이 성화를 통해 개체적인 완전성을 회복하는 것과 보편적 질서 안으로 들어가서 완전성을 회복하는 이 두개가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왜 그렇게 자꾸 불순종하며 살까? 그것과 내가 왜 이렇게 계속 내 영혼이 곤고할까? 이 두개가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일치입니다.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결심 문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종말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하고 있어야 할, 내가 할 그 일을 하기로 힘쓰자. 그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두셨습니다. 여러분들의 여기에 두셨지만 여러분들의 눈으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합니다. 제는 나보다 공부도 더 많이 하고 빛나. 그래도 제는 그래서 나보다 얼굴은 예쁘잖아. 빛납니다. 제 아버지는 돈도 많데. 나는 이게 뭐야. 우리 아버지는 돈도 없고, 그리고 나. 제는 어떻게 그렇게 재주도 많아. 어학도 잘하고 자격증도 많이 가지고 있고 나보다 참 낫다. 세상에 이런 모든 것들이 그 사람을 평가하게 하는 자료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움을 먼저 보십니다. 그 존재의 아름다움을 보시는데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오직 영혼의 아름다움에 달려있습니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은 똥을 퍼도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추루하면 제국의 황제가 되었어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쓰레기입니다. 경멸스러운 존재입니다.
B. 아름다움과 행복
그러면 여러분,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참 어려운 것이라고 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전 존재를 건 노력이 필요하구나. 정확하게 보는 것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은 전존재를 건 일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제가 늘 쓰는 말로 구도의 삶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그렇게 영혼을 아름답게 하면 뭐가 생깁니까?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아름다움과 행복의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존재의 진정한 행복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영혼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복의 상태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지복의 상태를 누릴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도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도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다 나오지만 이건 정작 다 영혼 안에 있는 특징들입니다. 그의 영혼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복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파트 두 채를 가진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좋은 대학 나오고 부모가 빵빵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영혼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복이 있도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 것도 결국 무엇인가 하면 영혼의 성향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지 마. 그런데 왜 죽어. 알았어. 그게 무엇입니까? 영혼의 성향이 아닙니다.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그것을 고집합니다. 붙잡고 살려고 합니다. 죽이려면 죽여, 나는 예수 믿어야 되겠어. 그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의를 위해 핍박받고 고난 받는 것도 영혼의 특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을 보시면서 주님이 복 되도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영혼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을 때 얻게 되는 유익을 얻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름다운 영혼의 지성에 말을 거시고 그 애성의지가 느껴지게 하시며 그 마음에 당신을 향한 까리따스를 채우시고 아름다운 영혼에게 자기의 계획을 알려주십니다.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결국은 그 천국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위로를 받을 것이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작용입니다. 이 위로를 받고 그 다음에 땅을 유업으로 차지하고 하는 등등의 모든 것들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교통적 사랑에서 누리는 특권들입니다. 그것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아름다운 영혼을 좋아하시나. 이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증할 필요가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논증을 안 느끼는 명제입니다. 왜 하나님 자신이 아름다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동일한 아름다움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영혼들과 더 많이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되는가? 똑같이 거듭난 영혼인데 왜 어떤 영혼들은 하나님이 교통해주시지 않는가?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영혼,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 개체적 완전성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영혼이 된 그 영혼은 결국은 그 완전성 자체가 어떻게 해서 오는가 하면 까리따스의 사랑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 본분을 모르고 까불고 다니다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회개를 뼈저리게 회개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꽉 찹니다. 그러니까 비로소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아, 이게 인간으로서 가는 길이 아니구나. 인간본분의 길로 돌아갑니다.
두 번째는 예전에는 마음이 더러워서 육욕대로 막 삽니다. 그것들을 깊이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자기가 꽉 차게 되니까 그 부패하고 추루한 일을 다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가 사라진 것만큼 자기 사랑이 역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꽉 채워지니까 자기사랑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을 버리니까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인생의 행복을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에 합치시킬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만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랑받는 대상과 자기의 목표를 합치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지난 시간에 아이 하나 남겨놓고 남편을 잃어버린 부인이 끝까지 수절을 하고 아이를 지킨 것은 그 아이를 위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라고 결론이 지어진 것이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합치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찬 가운데 그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이 사람 안에 당신을 향한 사랑이 꽉 차 있고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의 천지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니까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삼위 안에서 교통하던 사랑이 이제 이 사람의 마음에까지 교통하면서 하나님과의 물 흐르는 것과 같은 교통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입니다. 영혼의 침체라고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런 관계에서 이탈되어버린 것입니다. 개체적으로 완전성을 상실하고 보편적 질서 안에서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그 제대로 된 분수를 뛰어넘게 하는 것입니다. 교만해서 그리고 자기의 질서를 사람들에게 막 강요합니다. 폭압적으로 강요합니다. 그러니까 나가서 돈벌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시집 장가가고 막 이런 것도 결국은 자기 질서를 사람들에게 강요하기 위해서 하는 짓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가 없고 영혼의 완전성을 상실한 사람들은 무엇을 해도 하나님 앞에 언제나 기쁠 수가 없고 항상 오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뭘 가지고 오는데 항상 더럽습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에 깊이 원수 맺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사과 한마디 없이 어느 날 선물을 가지고 여러분들 앞에 내밀 때 얼마나 더럽겠습니까? 정말 불결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필요 없다. 내가 거지인줄 아나. 필요 없다. 너나 먹어라. 나는 그런 것 필요 없다. 선물이 크면 클수록 모욕을 느낍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마음과” 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Ⅲ.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길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이런 아름다움을 늘 가지고 있으면 좋은데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A. 아름다운 상태가 변함
우선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이 아름다움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상태는 가변성입니다. 아름다운 상태는 항상 변합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이 변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은혜의 상태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상태에서 멀어져서 죄의 지배를 받는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정체 자체가 결국은 자기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적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영혼은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구원은 일수불퇴이지만 아름다움은 아름다웠다. 더러웠다. 이렇게 계속 출렁거리면서 이렇게 변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지금 보면 똑같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강력하게 붙잡혔을 때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여러분 자신이 꽉 찼을 때 그때가 가장 아름다웠을 때입니다. 그리고 은혜가 떨어지면 더러워지는 것입니다. 왜 더러워지는가 하면 결국은 은혜가 떨어지면 순전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들이 부패하고 자기 사랑이 고개를 들게 됩니다. 자기 사랑이 고개를 드는 것만큼 인간으로서 있어야 할 원래 자리에서 이탈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자리에서 이탈하거나 이탈하지 않았으면 자리만 지키면서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 자체 안에 있는 아름다움도 상실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런 식으로 생활을 하게 되면 교회생활 자체가 도움을 안 줍니다. 교회는 꾸역꾸역 나오는데 하나님의 말씀도 부딪히지 않고 무엇보다도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기도할 수 있고 해야만 하고 하고자 하는 욕망이 이 속에서 꽉 차면 그가 기도하는 것은 막을 수가 없습니다. 복잡한 전철 안에서도 뛰어가면서도 그 다음에 앉아있을 때도 어디에서든지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왜 그 아름다운 영혼과 하나님이 교통하시기 위해서 대기 중인 상태이니까. 어디서 주님을 불러도 주님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몇 년 전에 통계가 나온 것을 보니까 대학생 가운데 크리스천 가운데 55%가 10분도 기도를 안 한다고 나왔습니다. 전부다 추루한 존재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끊임없이 자기가 깨어지고 아파하고 울어도 이래도 이게 창조의 목적으로 잘 안 돌아가려는 강인한 자아가 내 안에 발견되는데 이게 1,2,3년이 지나가도 회개가 거의 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전부다 추루한 영혼을 가지고 보편적 질서 안에서 이탈하고 개별적 완전성에서 멀어진 그런 추루한 영혼의 상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인간의 모든 즐거움과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영혼의 아름다움 안에서 우리의 영혼의 원 저자이신 영이신 하나님과 그 까리따스를 통해 교통적 사랑을 느끼는데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인간존재의 이유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인간의 두 번째 본분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enjoy god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뭘 해주셔서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거기 있는 존재 자체로 나에게 즐거움이 되는 것, 그것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 영적인 교통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누리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입니다. 왜 영혼이 아름답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고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추루한 영혼이 된 상태에서 교통을 갈망하기 때문에 말씀을 들어도 깨달음이 없고 하늘을 향해 부르짖어도 하나님의 응답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교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완전한 자에게 당신의 완전을 보이시며 시편에 여러 번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보이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인자하심을 보이십니다.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오. 오늘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여러분들을 방해하고 있는 많은 어려움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도 잃고 그러나 그것이 진짜인간존재에 있어서 본연의 가치를 가진 본질적인 것인가 하고 여러분들에게 되물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사는 즐거움을 어디서 얻습니까? 남이 살지 못하는 큰 집에서 사는 것입니까, 남이 못 들어간 좋은 대학에 다니는 것, 남이 부러워하는 직장에 다니는 것,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못 나서 집에서 놀고먹는 것, 그래서 육신이 편안한 것, 이런 데서 행복을 느낍니까? 좋은 옷을 입고 그래서 거기서 만족감을 느끼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한순간 동안 행복을 느끼고 이런 것이 인간의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너무 더럽고 추루한 것입니다.
결국은 이 세상에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습하고 다를 것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먹는 것을 사랑한다. 거기에서 행복을 느낀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러면 그는 결국은 먹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 배고파지기를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편한하게 잠자는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럼 결국 무엇인가 하면 고단해지기를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왜 고단해야지만 언젠가 잠이 오니까. 사람들과 성행위나 하고 이런 생활에서 만족을 느낀다고 하면 욕망으로 가득차는 것을 목표로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 욕망이 꽉 차야지만 그런 범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어디로 달려가는 것입니까? 목표가 있습니까? 아무 것도 목표가 없습니다. 그래서 악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적으로도 비 실제입니다. 신학적으로도 그렇고, 실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가는 것입니다. 어디? 끝이 없습니다.
그럼 목표가 어디인가? 아무 목표가 없다니까. 목표가 없는데 어디로 가나. 그냥 가면서 파멸로 가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입니다. 목표가 아닙니다. 그럼 왜 그렇게 사는가? 자기 충동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자기 충동에 순종할 때 순간적으로 누리는 만족에서 그렇게 개처럼 사는 것입니다. 짐승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거룩한 성자들이 와서 꾸짖을 삶이 아니라 이방의 개똥철학자들도 꾸짖을 삶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신자이기는커녕 야, 임마 인간이 그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 네가 삶이 개와 틀릴 것이 뭐가 있나. 개도 주님이 창조하셨는데,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책임을 지십시오. 절대로 짐승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왜 사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아, 그럼 영혼만 아름다우면 되니까 나머지는 다 상관없구나,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아니 삶이 양태의 문제가 아니라면서요. 그렇습니다. 양태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렇지만 주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하다가 보니까 아무 할 일이 없어서 밀리고 밀리다 보니까 똥 푸고 있다. 그럼 그냥 똥 푸는 사람의 수준입니다. 그 사람은, 그런데 주님이 똥 푸는 기계를 소명을 주셨습니다. 너는 똥 퍼라. 그게 내 마음에 너를 둔 위치다. 그러면 그 사람은 거기서 창조의 세계를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공부하는 학생은 열심히 공부해야지 됩니다. 매일 놀면 안 됩니다. 돈버는 사람도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합니다.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도 열심히 해서 그 속에서 뭔가 새로운 경지를 자기가 개척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지만 이 세상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백성들이 차지하지 않으니까 어떻습니까? 인간이 치열한 경쟁을 통해서 자기가 땅을 차지하고 돈을 차지하고 권력을 차지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질서를 강요하기 위해서 그 짓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돈과 그 권력과 그 재물을 가지고 애매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더러운 질서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왜 자기가 그 안에서 제왕이 되어서 그렇게 살아보려고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질서를 강요한 것입니다. 말을 안 들으면 직장에서 쫓아내고 빌려주었던 돈 빼앗고 회사를 망가트리고 고용된 사람들을 해고시켜버리고 그럴 힘도 없으면 쫓아가서 한번 때려서 길바닥에 뻗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단 3분 동안이라도 자기의 질서를 강요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서 사업해서 돈을 많이 벌고 그래서 권력을 얻게 되었다고 그러면 우리도 그렇게 살면 진짜 더러운 인간입니다. 인간도 아닙니다. 어느 때 막 돈을 많이 벌고 권세를 가지니까 사람들이 알아서 깁니다. 저 분 돈도 많고 권세도 많고 아는 것도 많으니까 우리가 저 사람의 질서를 따르자. 그랬더니 나둬라. 내 질서대로 사는 게 아니다. 너희들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따라 살아야 한다. 그래서 풀어지는 것입니다. 창조의 질서를 따라 사는데 쓸 수 있도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권세와 물질들을 그들에게 공급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이 세상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거스르며 일그러졌던 세상들이 펼쳐집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나마 보편적 질서로 돌아갑니다. 개체로서의 완전성을 가지게 되어서 아름다움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안 하고 그냥 공부합니다.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은혜를 주셨군요. 그리고 가서 그냥 아무렇게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적인 사랑입니다. 아모르 쁘라디투스 사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통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럼 그런 사랑이 까리따스 일 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까리따스의 사랑 자체가 교통의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증명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게 되면 즉시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이런 사랑을 모르는 사람 때문에 계속 눈물이 흐릅니다. 이게 사랑이 가지고 있는 교통적 특성입니다. 이 사랑이 내 안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이 안 됩니다. 내 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이 되면 이게 까리따스가 아닙니다. 저 사람이 이런 사랑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에서도 가끔 보면 새가족반에서 공부하다가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주면서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니까 막 울기에 왜 그런가 하니까 그럼 목사님, 이것을 모르는 내 친구들은 어떻게 됩니까? 전도해야지 됩니다. 이게 사랑을 가지고 있는 교통적 특성입니다. 그런 사랑으로 가득 찬 가운데 아름다운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이 거기서만 행복을 느낍니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느끼면 모두 죄입니다.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B. 아름다움의 회복
만약에 이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면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이겠는가? 잘 들으십시오. 두 번을 반복하겠으니까 잘 들으십시오. 영혼이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길은 두개나 세 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딱 하나밖에 업습니다. 두 번을 반복하겠으니까 잘 들으십시오. 영혼의 아름다움은 그 영혼이 진리를 붙들고 있을 때만 그 진리 때문에 영혼이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영혼의 아름다움은 어떻게 회득되는가? 영혼의 아름다움은 그 영혼이 진리를 붙잡고 있을 때 그 영혼은 아름다울 수 있는데 이외에 방법은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그 영혼은 아름다운 영혼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 때문에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진리, 베리따스 진리 그것을 붙들고 있을 때에만 그 영혼이 아름답게 됩니다. 그것을 붙듦으로서 아름다움을 되찾게 되고, 붙들고 있을 때만 아름다움을 유지하게 되고, 그것을 놓음으로서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면 핵심적으로 궁금한 것이 이제 우리가 하나의 초점으로 모아졌습니다. 그러면 진리를 붙잡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것으로 집약이 되었습니다.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식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붙잡는다 하는 것은 진리를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진리를 인식하고 진리가 가지고 있는 그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악했다는 뜻입니다. 보이는 것과 보는 것은 틀립니다. 보이는 것은 그냥 이렇게 쳐다보면 의지와 상관없이 스쳐지나가서 지각되는 것은 모두 보이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물을 응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는 것입니다. 이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지각을 통해서 이렇게 스쳐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어떤 사실이나 사물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뜻을 알기 위해서 시선을 집중시키고 그 의미를 파악한 것, 그것이 인식입니다. 그것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진리를 붙들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생각해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곤고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곤고함이 어디서 해결되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어디서도 그 곤고함이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떡이 없어 기근이 아니오, 물이 없어서 기갈이 아니라 영혼의 참다운 자유와 기쁨은 거기에서 얻어지는데 사람들이 그 진리를 붙들려고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늘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의 기능이 오늘날 너무 감상적입니다. 죽도록 찬양하고 싫도록 교제하고 항상 바쁩니다. 곤고한 영혼이 늘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진리를 붙들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제일먼저 헌신해야 할 것이 그대들의 지성입니다. 지옥 간 사람들은 모두 지성에 헌신하지 않아서 지옥 간 사람들입니다. 지성만 헌신했더라면 그렇게 안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나오는데 뭐라고 부탁합니까? 하나님, 저 나사로에게 명령해서 우리 집에 가서 이런 데가 있다고 이야기하게 해달라고, 지성에 그들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멍하게 교회에 나와서 눈에 초점을 잃은 채 그냥 예배생활을 합니다. 그게 누구를 위한 예배입니까? 여기 이렇게 나와 있는 여러분들에 대해서 내가 오늘 묻고 싶습니다. 무슨 기대를 가지고 여기 나와서 이 긴 설교를 듣는지, 전 지금 여기서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이 긴 설교를 하고 긴 설교를 해야지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이것을 말해야 하고 여러분들은 온 힘을 다해서 들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그 영혼이 죽어도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끊임없이 창조의 목적을 떠나서 있지 말아야 할 자리로 떠내려가고 영혼의 완전성을 상실한 채 존재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 되는 존재로 이 세상을 일평생 살다가 어느 날 하나님이 정리하십니다. 이게 인간의 모습입니다.
몇 주 전에 청년들이 한 1,200명 모이는 곳에 집회를 하는데 놀랬습니다. 찬양을 하는데 장난이 아닙니다. 다 일어나서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습니다. 무서웠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해서 뭘 얻는 것이 있습니까? 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인식하는 것이 진리를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붙들고 살 때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주의할 게 있습니다. 지성에는 사변적 지성과 실천적 지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나누어지는가 하면 어떤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을 했는데 이 정신작용 속에서 정리만 되었을 뿐 자신의 삶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거기에만 그냥 그친 것입니다. 이게 사변적 지성입니다. 이 사변적 지성이 있는 반면에 실천적인 지성이 있습니다. 뭔가 사실을 인식했는데 그 사실이 삶으로 반드시 적용이 되어서 흘러가게끔 되어있는 지성이 있습니다. 이게 실천적 지성입니다.
차이는 사변적 지성은 머리로 무엇인가 인식하는데 있어서 실천적 지성과 동일한데 이것이 이성에 가치로 마음에 내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투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은 영혼이 직접 움직이는 게 아니라 영혼이 마음에 투사하여 마음에 작용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가고 싶은데 가고 마음으로 먹고 싶은 것 먹고, 마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투사가 안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정리가 되었는데 이 마음에서 역사하지 못해서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고 사변적 지성으로 딱 그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천적 지성은 마음을 움직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뭔가 하나님의 진리를 붙들고 산다고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적용을 해봅시다. 진리를 깨달으려고 해야지 됩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에 나와도 소용이 없습니다. 수없이 예배에 참석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소용이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아무리 참석해도 소용이 없고, 두 번째는 여러분들이 아무리 길다고 불평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갑니다. 나는 너무 불쌍합니다. 그 영혼을 만족케 해주고 싶은데 기도해도 응답이 안 됩니다. 왜 하나님 자신도 그것을 뛰어넘으실 수는 없습니다. 영혼이 진리를 붙잡을 때 그 영혼이 아름다움을 회복한다는 원리는 하나님도 뛰어넘을 수 없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인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2-3년 교회를 다녀도 10편도 설교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왜 예배는 참석했는데 다른 생각을 하니까. 그러니까 인식이 안 된 것입니다. 한번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추루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을 때, 두 번째 영혼이 진리를 붙잡는다. 라고 하는 것은 그 진리에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와 동의어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이 진리를 통해서 계속해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또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얘기하면 너무 길어지지만 시간이 많이 가서 끝내겠습니다. 영향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진리 안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진리는 마음이 담겨지지 않은 순수한 객관적인 진리는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진리로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것에 사변적으로만 인식하는 사람은 그 속에서 정보는 얻었지만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에 영향을 안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하나님의 마음이 진리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돌아오라. 너희는 나를 떠났으니 회개하고 나에게 돌아오라.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돌아오라고 그러시네. 왜 돌아오래. 가끔 그렇게 합니다. 목사님, 너무 좋아요. 뭐가 오늘 말씀이 좋아. 오늘 우리 남편이 꼭 말씀을 들었어야 하는데. 그런데 내가 항상 하는 말이 너나 잘해라. 진짜 말씀에 압도되면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목사님, 너무너무 말씀이 좋습니다. 우리 언니 꼭 와서 들어야 하는데 너나 잘해라. 진리를 듣게 되면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그런데 제일먼저 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얘기하면 길지만 말씀 안에 있는 교통적 사랑 안에 있는 특성입니다. 진리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처음 주실 때부터 냉담한 마음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속에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흔적들이 그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그 진리를 자기의 삶에 끊임없이 적용하며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진리를 붙들고 있다고할 수 있는 삶입니다. 즉 하나님이 정직하여라. 그러면 아멘, 할렐루야 그리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그냥 붙들고 사는 삶이 아닙니다. 이런 영혼은 절대로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어떤 영혼이 깨끗해지는가 하면 내가 정직해진다고 하는 것이 뭘까? 내가 오늘 정말 정직했을까? 아! 이런 점에서 찔리는구나. 아! 정말 마음이 아프다. 왜 하나님의 표준이 있는데 하나님의 표준에 난 그대로 안 살려고 했을까? 내 안에 부정직해짐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이득을 사랑하는 집나간 자기 사랑이 있구나. 이것을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참회하고 그 기준에 맞추려고 해야 합니다. 이게 진리를 붙들고 산다는 말에 세 번째 의미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이 세 가지 모두 있어야지만 진리를 붙들고 산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영혼은 계속해서 깨끗해져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오직 이 진리 하나를 통해서만 아름다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마치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고 행복하게 할 뭐 영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신경 쓰는 것은 많지 않지만 행복해지는 길이 많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행복해지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그것이 행복입니다. “하늘에서는 주밖에 누가 내게 사모할 자가 있으리요. 주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하늘에서는 주님 밖에는 사모할 자가 없는데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사랑하라고 손짓하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하늘에 가면 지금 나보고 사랑해달라고 손짓하는 모든 것은 없다. 하나님 한분 밖에 안계시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런 것들을 사랑하면 사랑의 일관성이 없습니다. 죽음과 함께 막 내리는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많은 유혹하는 것들이 나를 사랑해달라고 해도 이런 것들을 모두 잠세적인 표상들이고 지나가는 것들이기 때문에 영원을 잇대어서 사랑할 수 있는 단 한분 여호와 하나님 그분을 향해 나는 사랑하리라. 하늘나라에 들어가면 모든 유혹하는 소리도 없겠지만 이 세상에 험한 나그네 길을 가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나를 유혹하는 음성들이 들리리라. 그러나 나는 이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서는 내가 유일하게 사랑할 수 있는 한분, 그분을 향해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삶과 죽음 사이에 경계를 무시한 채 내가 마땅히 사랑해야 할 그 한분을 향해 지순의 사랑으로 가리라. 그것을 보여주는 게 시편 73편에 나오는 시인의 결심입니다. 그게 바로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게 바로 진리를 파수하는 삶입니다. 이것 이외에는 어느 곳에서도 그 무엇을 통해서도 그대들의 영혼이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없다면 여러분들의 존재는 한없이 추루하고 불결한 존재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참된 행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큰 행복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찬양하고 주님이 세상을 내려다보실 때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행복해하시는 것, 그런 존재가 되는 것, 이것이 인간만이 도달할 수 있는 행복입니다. 이 길로 가기 위해서 많은 자기 죽임과 그리고 극기의 길, 그리고 그 진리를 통해 자유케 되는 일들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매일 갑니다. 거기에서 행복을 느끼면서 사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기 때문에 결국은 다 떠내려가는 것들입니다.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순한 사랑으로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그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살아서는 행복합니다.
그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지 내가 한번 묻고 싶습니다. 한번 얘기해보십시오. 그런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납니까?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그런 아름다운 영혼이 되었다고 할 때 그에게 무슨 불행한 일이 일어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무 것도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무슨 불행한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나 반대로 그런 영혼의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추루하게 삽니다. 너절하게 쓰레기 같은 곳에서 기쁨을 찾으면서 마치 쓰레기통에 썩어가는 생선뼈를 뒤지는 그 똥개처럼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게 추루한 영혼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쓰레기 같은 기쁨에 코를 들이대고 그리고 살아가고 혀를 날름거리면서 골목으로 돌아다닙니다. 똥개처럼, 그럼 묻고 싶습니다. 그 사람에게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날지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큰 쓰레기통을 만나서 생선뼈 잔뜩 만나는 것 정도는 해결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에게 그런 추루한 영혼을 가지고 이 세상에 쓰레기통을 핥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뭘 행복하게 해주실 수 있는지를 내가 묻고 싶습니다. 이 진리를 떠나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전능하시지만 어떻게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어떤 좋은 일이, 어떤 행복한 일이, 어떤 아름다운 일들이 그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지 여러분 한번 일어나서 한번 말해보십시오. 어떤 좋은 일이 그들에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Nothing happen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에 때로는 진리가 우리의 영혼에 하얀 폭포수처럼 세뇌시킨다고 그러는데 이게 영혼을 뚜껑을 열고 그 깨끗한 맑은 물에 한동안 씻어내야 합니다. 세뇌시켜야 합니다. 털어버려야 합니다. 거기에 생수 몇 통 부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머리를 뽀개고 그냥 폭포수처럼 맑은 물을 쏟아 부어서 확 씻어서 세뇌시켜버려야 합니다. 그때에 순결한 지성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그때에 자기가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헛된 일이고 바보 같은 일인가하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진리를 따라 걸어갈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기도하겠습니다.眞善美
3. 영혼의 파괴와 회복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51:2)
Ⅰ. 본문의 배경
몇 주째 영혼에 아름다움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가 읽은 본문에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시입니다. 구약에서 이 사람만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사람이었기 때문에 허물이 있었고 죄를 지었고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 참회의 삶을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많은 허물도 있었겠지만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통해 하나님께 크게 범죄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생애에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한 사건보다 더 크게 영혼의 아름다움이 파괴되는 경험을 가져다준 죄는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이 죄는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착한 사람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살해하도록 그를 이끌었고 결국은 침상의 범죄가 선량한 사람의 목숨까지 빼앗은 살인의 피까지 손에 묻히게 하였습니다.
Ⅱ. 영혼의 파괴: 아름다움을 상실함
다윗 안에 있던 영혼의 아름다움은 산산이 부서져버렸고 그리고 그는 모든 피조물 가운데 찌끼와 같은 상태가 되어서 비참하게 탄원을 올리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참회의 시가 여러분들 앞에 놓여 있는 시편 51편입니다. 다윗이 이런 범죄를 통해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다윗이 영혼의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의 파괴, 그것은 곧 영혼의 아름다움의 상실입니다. 여기서 영혼의 파괴라고 하는 것은 육체가 공격을 받아서 팔이 부러지거나 살이 찢어지거나 하는 근육이 해체되는 것 같은 그런 방식으로 영혼 안에 파괴가 일어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어쩌면 기독교 역사가 이천년이 넘었는데 영혼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오늘 들어오면서 누군가가 영혼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데 책을 소개해달라고 그래서 제가 없다고 그랬습니다. 2,300년 전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혼에 관하여’ 라는 책, 프로프시팩 이라고 하는 그 희랍어 책을 하나 저술했습니다. 논문입니다. 별로 가치가 업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이런 가구나 나무, 공중에 나는 새, 모두 영혼이 있다고 봤습니다. 별로 가치가 없습니다. 그 이외에는 영혼에 관해서 집중적으로 서술된 책이 철학 쪽에서라도 좀 나온 게 있는가 하고 전문가들에게 물어보니까 거기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현대 철학자들이 이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모두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있으니까 영혼이라는 말은 사용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철학적 용어가 아니니까. mind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mind 그래서 이 마인드는, 자세하게 해야지 되나. 그래서 이게 삼부 예배에 들어오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두 시간을 했습니다. 좀 무리했습니다. 여러분이 무리한 것이 아니라 내가 무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뭘 무리합니까? 가만히 앉아있는데. 그러니까 어째든 하나 이야기를 하면 연관된 것들이 계속 떠올라서 계속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좀 하고 가겠습니다.
마인드라는 단어인데 이게 근세 이전에 고대에서는 이게 전부다 영혼이 가지고 있는 생각하는 기능입니다. 지적 기능입니다. 그래서 마인드, 그러면 어떻게 번역할지 몰라서 쩔쩔 매는데 굉장히 어려운 단어입니다. ‘마음’이라고 요즘 많이 번역을 합니다. 그런데 옛날로 하면 ‘생각’으로 번역을 합니다. 문맥을 따라 생각으로 번역이 되고 오늘날 철학자들이나 심리학자들이 마인드라고 하면 우리 기독교적인 입장에 보면 ‘영혼’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영혼이라고 번역하면 그 사람들은 화를 냅니다. 그래서 그것을 마음이라고 번역하는데 하트는 어떻게 하나. 그렇습니다.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영혼이라고 합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가 하면 1900년 초까지만 해도 이제 기독교에 대해서 사람들이 극심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자유주의가 일어나고 합리주의가 일어나면서 그러면서 인간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좀비 정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좀비’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이 없는데 어떻게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이렇게 delicate 할 수 있는가. 사랑을 느끼고, 뭘 느끼고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인간이 기계를 좀 복잡하게 만들어주어서 그런 것이다. 그렇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없고 생명은 있는 그래서 개나 돼지가 느끼지 못하는 이 다양한 감정들에 체계와 지식들, 체계는 이 육체적 기관의 복잡성에서 오는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없는 좀비라고 보는 것입니다. 동양적 좀비의 대명사가 ‘강시’입니다. 이러고 뛰어다니는, 생명은 있는데 영혼은 없는 것, 그런 정도라고 봤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100년 정도의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제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상대도 안 합니다. 불신자들끼리도 상대를 안 합니다. 무식하다고. 인간은 분명히 영혼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 믿는데 영혼이라고 그러면 너무 자존심이 상하니까 마인드라는 말 하나 써놓고 다 때려 집어넣자.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뭔가 신비한 특성이 인간에게 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그것을 내가 보여주마. 그것이 영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철학자들이 100년을 헤매다가 겨우 깨달은 사실을 여러분들은 실체를 지금 배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설교 시리즈가 끝나고 나서 영혼에 관하여 책이라는 글을 쓰면 이게 아마 몇 백 년 내에 나오는 최초의 책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 함께 성경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마음으로 진짜 영혼이 무엇이고, 그리고 영혼의 존재에 거는 주님의 기대가 무엇이고, 이것이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이제 몇 주에 걸쳐서 우리들이 상세하게 공부해나갑니다.
자, 그런데 그런 영혼이 있는데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인간의 존재는 잘 들으십시오. 아름다울 때 선하고 선할 때 가장 탁월합니다. 다시, 인간의 존재는 아름다울 때 가장 선하고 선할 때 아름다우며 선하고 아름다울 때 가장 탁월합니다. 그러니까 이 셋은 따로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스코리아에서 진선미 뽑은 이것이 한국 사람들의 철학적 개념으로 엄청나게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사진 찍고 진, 옆으로 찍고 선, 뒤에서 찍고 미. 이렇게 해야지 됩니다. 하나하나를 똑같이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 진선미입니다. 아름답지 않은 선한 것이 없고 선한 것들 중 참되지 않은 것은 선한 것이 아니며 참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탁월한 것이며 탁월한 것치고 아름답지 않고 선하지 않은 것은 없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인생관이 아주 분명하게 해야지 됩니다. 지금부터 분명하게 해야지 됩니다.
여러분, 지난 일주일 동안 미친 듯이 살았을 것입니다. 아마 미친 듯이 논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디로 달려가는 것입니까? 요즘 서점에 보면 숨이 찹니다. ‘1분 경제학’ ‘40분 만에 뛰는 해결’ 해결이라는 철학자를 40분 만에 다 본다는 것입니다. 해결이 본다면 졸도할 일입니다. 참 기가 막힙니다. 뭐 이런 식으로 눈 깜박 할 사이에 1초도 쉬지 않고 몸부림치고 ‘연봉 2억 당신에게도 꿈이 아니다.’ 아니면 무슨 신문에 못 생긴 얼굴이 하나 나왔습니다. ‘이 사람 31살에 본부장이 되었다.’ 뭐 이런 것, 그것을 뭐 어떻게 하라고, 그래 자기가 본부장이 되고 그래 너는 연봉 2억 받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너희도 후지게 살지 말고 쫓아오라는 것입니다. 쫓아가면 뭐하는데, 그렇게 해서 31살에 회사에 충성해서 본부장이 되고 전무가 되면 인생이 달라지는가. 호박에다가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호박에다가 빨간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됩니까?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그런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에 질서에서 낙오되는 것에 대해서 아주 열등감을 느끼면서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고 가치관을 새롭게 정립하십시오. 그렇게 살면 뭐 합니까? 그게 더군다나 그런 것을 하나도 깨지지 않고 예수님 도움을 얻어서 한번 해보려고 그러니까 교회에 와도 되는 일이 없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늘 이야기를 합니다. 제일 싫어하는 것이 공부하지 않은 학생, 진짜 때려주어야 합니다. 공부하라고 사회에서 다 놀게 해줍니다. 돈 안 벌어도 되게끔 엄마가 보호해줍니다. 매일 용돈주고, 우리 아들도 내가 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합니다. 그런데 왜 공부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혼나야합니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직장에 다니고, 사업하는 사람들은 매일 되지도 않는 것을 해서 까먹고 직원들 고생시키지 말고 뭘 하든지 똑바로 해서 돈을 벌든지 사업을 일으키든지 그렇게 해야지, 똥을 퍼도 동네에서 일인자가 되어보십시오. 그러면 똥 퍼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왜 그렇게 사는지, 그럼 이런 이야기를 안 해도 되잖아요. 평소에 하도 많이 하는 이야기니까. 이런 것은 기본적으로 깔고 인간의 영혼이 아름다울 때 존재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이유는 아름답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가 가장 빛나는 탁월한 존재가 됩니다. 그때 그가 그 자리에서 그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 자리를 제외하고 다른 자리에서 행복해지면 어떻게 됩니까? 항상 비참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게 이 사람은 누구에게도 사랑을 못 받아본 사람입니다. 이 다윗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불쌍한 사람입니다.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았겠습니까, 엄마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습니다. 부모 사랑도 못 받고 형들에게도 사랑을 못 받았습니다. 아내가 있었는데 그 인간도 자기 신앙의 세계를 이해를 못 합니다. 그러다가 진짜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습니다. 함께 동침했을 때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진짜 날아가는 것 같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영혼의 비참한 파괴를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뭐가 변한 것이 있습니까? 왕이 되었다가 쫓겨났습니까? 뭐 변한 것이 있습니까? 그냥 왕의 아름다운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존경합니다. 말만 하면 만조백관이 그 다윗 앞에 무릎을 꿇고 명하십시오. 하고 대기 중입니다. 뭐가 바뀐 게 있습니까? 그런데 이미 이 다윗으로서의 존재의 아름다움은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인간존재의 아름다움이 인간의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데 무리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것은 양보할 수 있습니다.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는데 가난해진다든지 진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어서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데 가르침을 받는 위치로 내려온다든지 얼마든지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보해서는 안 되는 게 있습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런 영혼을 가지고 살아갈 때 이 세상에서 가장 그가 고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그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여기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예수 믿게 만드신 것은 그 아름다움이 회복으로 가게 하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A. 신앙의 유익: 쉼
그러면 영혼의 파괴가 아름다움의 상실이라면 우리들이 이것을 먼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신앙은 이정도로서의 쉼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은 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안 믿는 철학자들도 모두 공통적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들도 많은 사람이 왜 철학을 하는가?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피로써 폐인 그러니까 지혜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뭐 공부를 한다고 그런 것이 아니라 좀더 지혜롭게 인생을 사는 비결을 원합니다. 그러니까 이 철학은 학자들이 하는 게 아니라 인생에 대해서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잘 믿어보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철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짜로 지혜롭게 사는 비결이 무엇일까? 그 소피아, 지혜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생각하는 그것은 생각 없이 막 사는 것보다 얼마나 피곤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왜 그런다고 보았습니까?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지적이 그렇게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 많이 노력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여유를 위해서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양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양철학에서도 왜 그렇게 끊임없이 인간이 자기의 본분을 그 많은 자연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의 욕망을 줄이고 그 자연 속에 묻혀있는 한 존재로서 정말 자연을 따라서 살려고 자기를 부단히 자연을 부스고 깨트려서 자기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 자연 속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그 많은 비결은 거기에서 비로소 인간이 거기서 쉼을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아주 놀랍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뭐라고 초청하셨는지 아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러셨습니다. 그 쉼 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쉬게 하리라 그러셨는데 그러니까 노동의 후지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질서로 돌아갔기 때문에 느끼는 균형과 조화, 절제 속에서의 안정과 휴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이 왜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또 다른 사람을 섬기라고 그러는데 그냥 자기 일에 코 박고 기도를 해도 첫 대가리부터 마지막 꼬랑지까지 다 자기 기도입니다. 마지막에 내가 아는 모든 사람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아! 참 목사님도, 주님의 이름으로 비옵니다. 왜 그렇게 삽니까?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조금 오지랖이 넓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일도 아닌데 괜히 나서서 염장을 지르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뭐 도와줄 것이 없을까요? 그냥 왜 그런지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거든요. 제가 좀 도와드리고 싶은데 뭐 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이게 결국은 사랑입니다.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것 같은데도 이렇게 하는 것이 참 좋은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인정을 하실 것입니다. 아멘을 좀 하십시오. 인정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쉼이 없습니다. 안식이 없어서.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는 애들이 막 떠들고 뛰어 놀 때도 내주위에 사람들이 있구나. 그러고 새가 지저귀면 노래한다고 생각합니다. 풀벌레가 막 이렇게 소리를 내면 풀벌레들이 합창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에 여유가 있으면 그렇게 생각하는데 마음에 여유가 없으면 왜 이렇게 애들이 빽빽거리고 난리야. 새는 왜 저렇게 울어. 노래하고 있는데 운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풀벌레까지 난리를 쳐, 난리를 치는 게 아니라 즐거워서 가을날에 노래하는데 그렇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쉼, 영혼의 쉼, 거기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쉼, 이것이 너무 없는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신앙의 가장 큰 유익 중에 하나는 쉼을 주는 것입니다. 모든 두려움과 공포, 그 모든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겠습니까?
내가 지난주에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많이 울었습니다. 우리 선생님 94살의 선생님, 목사님, 혼자서 외로워서 어떻게 해요. 큰소리도 아닙니다. 아니 외롭기는 뭐가 외로워,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그 다음에 보태는 말씀이 재미있습니다. 내가 예수를 안 믿으면 몰라도 이것은 완전히 혼자 말로 중얼중얼 거리셨습니다. 내가 예수를 안 믿으면 몰라도, 예수 믿는 사람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데 뭐가 외로워. 그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의미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삶과 죽음 사이에 경계는 없습니다. 그게 신앙의 유익입니다.
그런데 한번 주위를 돌아보십시오. 이런 삶의 쉼을 누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끊임없이 쫓기고 불안하고 말할 수 없이 염려하고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건강에 안 좋고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한없이 게으른 삶을 살면서 불안한 사람이 있고 진짜 피 흘리듯이 분투하는 삶을 살면서도 쉼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신앙의 유익입니다. 그런데 이런 쉼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 아름다움을 갖고 있을 때 그 아름다움 속에서 이런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쉼을 이 시인이 많이 누렸던 사람입니다. 그 사울에서 쫓겨 다니면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이런 영혼의 쉼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이 늘 잘 쓴 표현이 무엇인가 하면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이 광풍이 지나기까지 주의 날개그늘 아래서 내가 쉬리로다.” 이런 식의 시를 많이 썼습니다. 그게 어디서 온 것입니까? 영혼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을 때 주가 자신의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곳으로 피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이렇게 담대히 말할 수 있을 때 언제인가 하면 영혼이 아름다울 때입니다. 그것을 죄로 말미암아서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영혼이 아주 비참 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십니까? “이새의 아들 다윗은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하다.” 그러면서 그를 깊이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그때에 그 아름다움 속에서 쉼을 함께 누리는, 그러면서 그 영혼이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잃어버립니다.
1873년도의 일입니다. 훨씨스 스파포드라고 하는 미국의 복음전도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대서양을 지나서 복음을 전하러갔고 그리고 부인과 네 자녀가 배를 타고 자기에게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사역을 하는 도중에 비보를 듣습니다. 풍랑을 만나서 배가 난파되고 자녀 넷은 모두 물에 빠져 실종되고 부인만 구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가 대서양을 건너며 그 딸들이 조난을 당해서 실종된 그 지점을 지납니다. 그 슬픔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 넷을 잃어버렸는데. 말할 수 없는 슬픔이 그에게 밀려옵니다.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순간에 아주 놀라운 위로와 평안을 주십니다. 그때 지은 시가 찬송가 470장입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그래서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게 신앙의 유효성입니다. 그래서 살아갑니다. 그런 놀라운 쉼이 다 상실되어버린 것입니다.
B. 영혼의 비참
그래서 영혼은 아주 비참한 지경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다윗이 바뀐 게 뭐가 있습니까? 그 왕위를 그냥 차지하고 있고 수많은 명령 한마디에 움직일 수 있는 군대들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큰 나라도 자기 손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보기에는 다윗의 영광이 아무 것도 사라지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의 영혼이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아주 비루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의 왕위, 그의 왕국, 그의 많은 부 아무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이제 영혼의 비참한 속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시인이 오늘 하나님 앞에 “주의 자비를 쫓아 긍휼을 쫓아 나의 죄를 씻기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하소서 제하소서.”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과 자비에 호소하는 게 무엇인가 하면 자기가 지은 죄에서 자기 자신이 정당화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이 긍휼, 자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속하는 것인데 특별히 이 자비와 긍휼은 뭘 가리키는가 하면 죄를 지은 모든 과정에 대한 정당한 고찰을 빼버리고 그가 지금 도달하게 된 영혼과 육체의 비참한 상태를 보면서 슬픔을 느끼는 것, 그런 슬픔을 동반한 사랑이 바로 이 긍휼과 자비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지 변명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추루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아버지가 먼저 발견하고 그를 끌어안고 영접을 합니다. 그때 아버지를 그렇게 탕자를 끌어안도록 만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저 놈이 내 재산을 반을 날렸지. 그렇게 수없이 연락해도 연락한번 안 했지. 괘씸한 놈이지’ 그런 생각을 했다면 정당한 생각이기는 했지만 그런 생각을 했으면 그를 긍휼히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런 것을 다 빼버리고 지금 저 몰골로 오는 저 놈이 내 아들이란 말인가. 얼마나 비참한 모습인가. 그렇게 슬픔을 동반한 사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과거를 불문하고 그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긍휼입니다. 자비입니다. 이게 까리따스의 독특한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 앞에 호소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얼마나 비참해졌는가를 보여줍니다. 아마 다윗은 수없이 자살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에게 무엇이 기쁨을 줄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런 낙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으니 끊임없이 회개하고 끊임없이 그것을 지워버리려고 하고 제사를 통해서 그것의 양심을 달래보려고 해도 계속해서 자신의 앞에 떠오르는 것이 자기 자신의 죄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참회하게 될 때 얼마나 참회를 했습니까? 밤마다 침상이 눈물에 떠내려간다고까지 고백을 했습니다. 과장이지만 시적인 표현이지만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면 그 눈물이 그냥 나왔겠습니까. 영혼의 말할 수 없는 비탄함 속에서 그 눈물이 쏟아져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폭포수와 같이 눈물이 쏟아져 나와서 얼마나 긴 세월동안 그렇게 살았는지 모릅니다. 이게 하루 이틀 사이에 회복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탄원과 눈물 속에서 그가 긴 세월을 보내면서 하나님 앞에 처절하게 참회한 것입니다. 그 영혼이 비참하게 된 상태를 매일매일 매순간 매순간마다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여기서 예배드리고 있는데 어떤 분들에게는 이 예배 시간이 굉장히 괴로운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진리가 선포될수록 괴로워합니다. 말씀이 흐릿하면 편하겠는데 명료해서 논리적으로 반항을 할 수 없을 정도라서 너무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왜 깨끗하게 닦은 거울을 그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매일 대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영혼은 아름다움을 상실했다. 그것을 매 순간마다 기도할 때, 설교를 들을 때, 묵상할 때, 성경을 읽을 때 모든 은혜의 수단에 참여하면서 그것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잔인한 고통인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게 모두 영혼의 비참함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받기위해 태어났습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높음이나 깊음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나 권세나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끊을 수 없는 예수의 사랑 그 안에서 우리들이 거듭났습니다. 그것을 누리면서 살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렇게 자리매김이 되는데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아름다움을 상실했을 때 영혼이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결국은 악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갈 때 우주적으로도 아름다움을 회복되고 자신도 아름다워지고 하나님이 기뻐하고 그리고 자신은 그 안에서 가장 행복한 존재가 됩니다. 거기가 도달하는 지점입니다. 목표입니다. 그것을 향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를 그리로 계속 데려갑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죄를 죽이고 욕망을 버리며 지순한 사랑으로 가득 차려고 하면 그쪽으로 갑니다. 그런데 지금 이 사람을 어디로 데리고 가는 것입니까? 어느 한순간에 욕망이 다윗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것도 웃깁니다. 얼마나 여자들이 많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내가 너에게 안 준 것이 무엇이 있는가. 너에게 많은 후궁을 주었고, 아내들을 주었고, 왕궁을 주었고, 보물을 주었고 하나님이 더 가슴 아픈 말을 하십니다. 그래도 부족한 것이 있어서 네가 더 달라고 그랬으면 내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랬는가.
욕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가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목적이 어디입니까? 악이라고 하는 것을 억지로 규정한다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이탈해서 도달하려고하는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허언입니다. ‘빌 허자’ 허언입니다. 성립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라는 자체가 존재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 속에서 그 까리따스로 가득 찬 가운데서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이 지극히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선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자신도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그 위치에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이 생겼습니다. 그 욕망이 미친 듯이 다윗을 끌고 간 것입니다. 어디로 끌고 간 것입니까? 그래서 다 욕망이 성취가 되었습니다. 어디로 간 것입니까? 가긴 어디로 가, 목표가 없는데 궁극적인 악의 목표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로 끌고 가면서 영혼의 아름다움이 산산이 다 부서져서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 앞에 가장 선하고 가장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장 탁월하던 인간존재 하나가 쓰레기와 같은 존재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이게 죄의 목표입니다.
여러분들은 흔히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고 그러는데 말을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포괄적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적 부성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인간들에게만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천사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것의 아버지도 되십니다. 내가 하나님이 아니시면 창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고 또 그 다음에 이런 창조된 모든 피조물 중에서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왜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영혼이 죽었다고 치더라도 그래도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영혼을 가진 개체가 인간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인간들 중에서도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더 사랑하십니다. 이것은 언약적 부성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언약관계 안에서 그들이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러나 같은 언약적 부성에 기초한 사랑에 있어서도 사람마다 사랑하는 정도가 다 다릅니다. 심하면 하나님이 당신이 너무 사랑하는 사람은 주인공으로 쓰시고 덜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엑스트라로 쓰십니다. 이해가 안 가십니다. 하나님이 그러면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를 덜 사랑하시는가. 영혼의 아름다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영혼의 지성에게 말을 건네시고, 아름다운 영혼에 감성에 당신의 사랑을 전달해주시고, 아름다운 영혼의 의지를 이끌어 당신께 순종하도록 만드십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인간 존재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셔서 그를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를 바로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십니다. 그를 하나님은 기뻐하게 하십니다. 그를 사용하셔서 자기의 뜻을 이루십니다. 그게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오늘날은 가치관들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 믿으러 교회에 들어왔으면 여기서는 그런 가치관에 뚜렷한 변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신도시 개발하는데 가면 사람들이 누가 부러울까? 그렇게 빨리빨리 안 돌아갑니까? 신도시가 막 개발되는데 가면 누가 부럽습니까? 땅이 많은 사람이 부럽지. 아파트 깨끗이 지어놓은 고급아파트 가면 누가 부럽겠습니까? 집 주인이 부럽겠지. 또 음악을 하러 음악대학에 가면 누가 부럽겠습니까? 피아노 잘 치는 사람이 부럽지. 한 사람은 계속해서 그저 풍금 치는 식으로 띵동거리고 있는데 관객이라고는 엄마 아빠밖에 없는데 어떤 사람 한번 피아노치고 들어가면 막 신문에 나고 전 세계가 위성중계를 하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면 더 많이 하고 싶으면 그 정도로 끝내고, 교회에 오면 누가 부럽습니까? 장로가 부럽습니까? 정신들 차리십시오. 그럼 누가 부럽습니까? 대답해보십시오.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이 부럽다고, 또 은혜 받은 사람이 부럽다고? 누가 가르쳐준 답이야. 사경회 때 배운 답 같은데. 진짜 그 가치관 안에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와서는 누가 부러워야 하는가 하면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송축하라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듣기를 주님을 만져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내 안에 있는 모든 것 주 송축하리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한번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나는지 한번 얘기 좀 해보십시오.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날까? 영혼의 아름다움이 상실된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뭐가 그 사람에게 좋은 것인데, 무슨 좋은 일이 그 사람에게 일어나겠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여러분들 중에서도 옛날에 나같이 열등감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나는 굉장히 열등감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복음 안에서 회복되었습니다. 나는 별 그지 같은 것을 가지고 다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나는 왜 그렇게 키가 클까? 하는 것에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웃지만 나 다닐 때 꽤 큰 키였습니다. 한반에 65명쯤 되면 내가 57번에서 60번쯤 되었습니다. 그런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왜 영어단어가 안 외워질까, 우리 집은 왜 가난할까, 난 왜 그렇게 감수성이 예민할까 이런 것까지 교회에 가면 그것이 보여야 합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보여야합니다.
그렇게 여러분이 시집장가를 갈 때 이제 벌써 지났는데 너무 아픈데 찔렀나. 어떤 사람이 후배가 사랑에 빠졌는데 삶의 좌절을 느꼈다고 해서 왜 그러나 했더니 후배가 10살 어린 자매하고 사랑에 빠졌는데 그 자매 나이에 두 배를 곱해도 자기 나이보다 어리다고 합니다. 안 웃을 줄 알았습니다. 하도 복잡하니까. 형제는 30살이고 그 부러워한 형제는 40살이었다는 뜻입니다. 시집장가를 갈 때가 훨씬 지났습니다. 그런데 지금이라도 회개하십시오. 회개하면 길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좇지 말고 영혼의 아름다움이 있는 사람을 찾으십시오. 그 기준을 맞추어서 찾으십시오. 그러면 굉장히 대상자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매에게 장가를 가면 감지덕지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왜 눈에 보이는 방법대로 사람을 고르지 말고 영혼에 아름다움의 기준을 보아야 합니다. 그게 행복해지는 비결입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가치관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뭘 부러워합니까? 열등감을 느끼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진짜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들을 보면서 왜 가진 것도 없지만 다 버리고라도 저 사람의 아름다움과 같은 영혼을 갖고 싶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면 자기가 같지 못한 이 세상 사람들의 질서 속에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고 좌절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바보같이 시간을 낭비하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아갑니다.
Ⅲ. 파괴의 원인
그럼 이런 파괴의 원인이 무엇인가?
A. 마음과 행동의 죄
첫째로 생각해야할 것은 마음과 행동의 죄들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자,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영혼이 있는데 그 영혼에 투사된 것이 마음입니다. 우리를 행동하게끔 만드는 것은 영혼이 직접 우리를 신체를 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우리를 생각하게 하고 움직이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영혼을 돌이키라, 영혼을 찢어버려라. 영혼의 할례를 받아라. 영혼의 악을 토해라. 이런 식으로 성경이 얘기하지 않고 항상 뭘 얘기하는가 하면 마음을 찢어라. 너희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너희 마음을 돌이키라. 그리고 마음에 할례를 받아라. 마음에 악을 버려라, 그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추천합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마음은 실체가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기능이라고 그랬습니다. 영혼이 아닌 마음을 공격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바로 마음이 온갖 행동들을 만들어내는 공장이기 때문에 거기를 공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들으십시오. 영혼이 있는데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대로 마음에 투사가 됩니다. 투사된 대로 마음이 움직이면서 그 마음이 가지고 있는 풍취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더러우면, 추루하면 그러면 그것이 투사한 마음의 빛이 더럽습니다. 추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더럽고 추하게 되면 이 사람의 풍취 자체가 순종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이런 것을 싫어합니다. 여러분 은혜가 뚝 떨어지고 바닥을 헤매는 지체가 있어 세상에만 눈이 뜨여 정신 못 차리고 음란 채팅이나 하고 까불고 다니는 애들을 잡아서 은혜가 많은 지체들 속에 갖다 놓아보십시오. 그러면 꼭 뭐와 똑같은가 하면 북극에 끌려온 토인 같습니다. 썰렁합니다. 다른 사람 다 이야기를 하는데 그 애는 마음에 와 닿는 것도 없고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간증하는데 나는 이렇게 살고 저렇게 살았는데 그렇게 살아서 정말 걱정이다.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애를 위해서 기도해주자고 하는데자기가 그렇게 사는데 썰렁합니다. 다들 이야기를 하기에 자기도 한번 재미있는 이야기를 한번 했는데 아무도 안 웃습니다. 너무 슬픈 이야기를 하는데 왜 웃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비유가 적합합니다. 북극에 끌려온 토인 같습니다. 그렇게 썰렁한 것입니다.
그렇게 영혼이 추하면 비치는 그 마음이 추합니다. 추한 그 마음이 작용하면 추한 행동을 만들어냅니다. 그래서 영혼과 마음과 행동 사이에 하나로 일관되게 흐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지니”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가끔가다가 이런 일이 있습니다. 추루한 영혼에서 추루한 마음이 투사되었는데 그 마음으로 추루한 행동으로 하게끔 되어 있는데 굉장히 많이 애를 써서 성해보이는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게 위선입니다. 반대도 있습니다. 영혼이 아름답습니다. 투사된 마음이 아주 아름다웁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무슨 이유인지 짐짓 행동을 해서 악해 보이는 행동을 억지로 만들어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좀 어려운 말인데 이것을 위악이라고 합니다. 위선이 더 좋은가, 위악이 더 좋은가 그것은 여기서 윤리학적인 문제라서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위선이고 그게 위악입니다. 어째든 꼭 그렇게 얘기할 수 없지만 대표적으로 다룬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 나오는 싱클레어가 자기 친구들이 다 나쁜 짓을 하니까 자기도 나쁜 짓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위악의 힘입니다. 왜 그런 일을 하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겠습니다만 그게 위악이고 위선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엇인가하면 오래갈 수가 없고 결국은 이것은 일치를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더군다나 신자의 경우에는 일치를 이룰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속에서 아무리 선한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아름다움을 상실한데서 오는 영혼의 비참함은 해결이 안 됩니다. 마치 열매가 계속 떨어지니까 실로 자꾸 묶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오늘날에 있는 윤리운동이나 도덕주의가 기독교에 절대로 득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문제들을 그 사람 깐에는 나름대로 공격받는 기독교를 보호하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거슬러 올라가면 원조는 임마누엘 칸트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도덕적 합리주의가 신앙을 대신하게끔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할 수없지만 이런 식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로 계속해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행동을 하게 되면 항상 마음으로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막 바로 여기 영혼에서 행동, 이런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를 안 믿는 사람도 다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것을 들어올려야겠다고 그러면 마음이 생각할 때 ‘저것을 들어야겠다. 하면 뚜껑을 열어야겠다. 목마른데 한잔 마셔야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배가 끝났으니까 이제 종을 칠까?’ 이런 생각을 하고 마음이 움직이고 행동이 가는 것입니다. 예외가 있습니다. 손이 엄청 뜨거운데 닿았습니다. 펄펄 끓어 불덩인데 모르고 딱 데면 마음으로 생각을 합니다. ‘지금 계속 데고 있으면 손이 탈수도 있는데 이성적으로 추론할 때 내가 이렇게 계속하는 것은 손가락을 태우는 행동이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또 다른 나의 정신아 나의 이 문제에 대해서 변론이 있으면 반론을 제기해보라.’ 그런 동안에 다 태워서 불구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이렇게 될 때 하나님이 이런 것을 대비해서 다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할 때 이 마음이 생각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딱 손을 떼게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럴 때는 마음을 안 거칩니다.
우리교회에 의사들도 많고 그래서 함부로 말을 못하겠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딱 떼는 것은 대뇌의 작용이 아니라 제가 기억하기로는 소뇌의 작용입니다. 맞습니까? 여러분도 모릅니다. 괜찮겠네, 어째든 모르니까. 그러니까 딱 뗍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대뇌의 추론적 기능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신경이 작용해서 이것을 딱 못하게 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나중에 마음이 생각합니다. 이런 기능을 제외한 모든 도덕적 행동은 도덕적 행동이라고 하는 것은 부도덕할 수도 있고 도덕적일 수도 있는 도덕적 평가가 내려질 수 있는 모든 행동은 특히 다른 행동도 그렇지만 도덕적 평가가 내려질 수 있는 모든 행동은 마음을 거치지 않고 오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 마음에 주인이 누구입니까? 자기 자신이니까 자기 자신이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바보 같은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지어놓고 어쩔 수 없이 그러면서 자기도 피해자라고 합니다. 그것은 이치를 잘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뭐가 나를 죄를 짓게 만들었을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해서 핑계를 대려면 누군가가 자기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게 작용입니다.
예를 들자면 도장을 찍으면 죄를 짓는 것인데 안 찍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팔목을 확 비틀어서 끌고 가서 지장을 찍었습니다. 저 사람은 변명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의지적으로 안 가려고 했는데 너무나 힘이 강한 사람이 나를 끌고 가서 빨간 도장을 찍어버렸다. 이것은 내가 저 사람으로 하여금 죄짓게 하는, 도장을 찍게 하는 작용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식으로 안 합니다. 죄는 그런 식으로 짓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의지를 가지고 자기가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는 이 의지는 어떤 힘이 와서 의지를 확 강요해버리면 그 의지자체가 파괴되어버립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어머, 죄의 강력한 힘에 이끌려서 목사님도 말씀하셨는데 죄의 강력한 경향성, 그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작용이 아니라 결함이라고 합니다. 마음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꽉 차있으면 문제가 안 되었을 텐데 이게 빠져나간 것입니다. 이게 없기 때문에 그 죄의 힘에 저항할 수 있는 그 힘이 없게 되고 의지가 아주 쉽게 죄의 욕구에 찬동을 한 것입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죄의 힘에 저항할 후 있는 그 힘이 없을 때 찬동한 것입니다. 마지막 찬동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십시오. 찬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자기가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죄를 짓게 되는데 이게 어떤 효과를 가지고 오는가 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가 마음으로부터 어떤 죄를 짓습니다. 마음에만 짓는 것도 있고 마음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도 있습니다. 마음에서 죄를 지면 그것이 행동으로 나옵니다. 그렇게 되면 그 다음에 마음의 변화들이 옵니다. 죄를 지을수록 이 마음이 악해지고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인 까리따스가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이번에는 반대로 영혼에 투사됩니다. 그래서 영혼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영혼을 추루하게 만듭니다. 아름다움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도대체 목사님이 이야기하는 영혼의 아름다움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영혼은 이렇게 칼로 때려서 칼로 찍어서 팔이 떨어져나가고 살점이 너덜너덜해지고 이런 물리적인 물체가 아닙니다. 영혼은 실제이기는 하지만 그 영혼은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영적인 실체입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반드시 존재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하나님도 영적인 실체입니다. 순결한 영이시니까.
그런데 그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양한 힘과 작용들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럼 그 영혼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다양한 힘과 작용들이 있는데 그 다양한 힘과 작용들이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할 때 그 인간에게 부여하신 영혼의 작용과 힘에 맞게끔 이것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 그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대 밑에서 범죄한 마음이 영혼에 계속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면 영혼 안에 힘과 작용의 변화가 옵니다. 그래서 아주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죄는 인간의 마음 안에 있고 죄의 경향성이 인간의 영혼 안에 깃들게 됩니다. 이 경향성이라는 것 자체가 힘과 작용입니다. 자, 물을 붓습니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집니다. 이게 작용입니다. 위로 안 올라갑니다. 이 작용은 똑같습니다. 무슨 그릇에 붓든지 간에 아래로 떨어집니다. 작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작용이 변화가 옵니다. 물이 위로 올라간다든지 옆으로 간다든지 이런 식으로 변화가 옵니다. 그것을 영혼 안에 경향성들이 맺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경향성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살고자 하는 경향성들이 영혼 안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그 영혼이 다시 마음의 영향을 미칩니다. 아까 설명한 공식입니다. 미치니까 마음이 다시 모든 것을 하나님을 대적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그런 식으로 상황을 해석하면서 그 마음을 가지고 인간의 행동을 거기서 유발시킵니다. 그래서 각양 죄스러운 행동들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인간의 영혼에 원래 가지고 있었던 아름다움이 파괴됩니다. 잊지 말고 다시 한번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작용과 힘의, 영혼 자체가 많은 작용과 힘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작용과 힘이 하나님이 인간을 맨 처음에 창조하실 때 세팅을 해놓으신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세팅을 해놓으셨는가 하면 창조의 목적대로 사는 것을 향해서 작동을 하도록 그렇게 세팅을 해놓으셨습니다. 이것이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뿔크름 아름다움입니다. 그 상태에 마음으로부터 영향이 오고 그 영향이 미쳐서 작용에 이상이 오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려고 하지 않는 강력한 경향성들이 마음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게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상태입니다.
인디언들을 보면 부메랑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부메랑은 아주 단단한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심지어는 돌맹이로 만든 것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보지 못했습니다. 나무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세게 던집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엄청난 정확성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던지면 바람을 가르면서 사냥감에 날아갑니다. 그러니까 사냥감에 급소를 칩니다. 머리통을 친다든지, 정수리를 친다든지, 다리를 친다든지 그런데 맞으면 거기에 떨어지지만 안 맞으면 다시 돌아옵니다. 또 던집니다. 이게 뭐 기가 막힌 지혜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번 해봅시다. 어떤 사람이 놀라운 괘력을 가지고 있어서 세 개를 던졌습니다. 그러니까 굉장히 멀리 나갑니다. 세게 던질수록 멀리 갔다고 돌아오니까 세 개를 단번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너무 세서 멀리 갔습니다. 그런데 던진 것을 잊어버리고 딴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냥감에 안 맞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 꽂히고 또 꽂혔습니다. 피를 쏟고 쓰러집니다. 그러면서 웬 놈이야. 부메랑이 네놈이다. 네가 던졌다.
우리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말, 마음을 오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 우리가 행하는 그 수많은 행동들은 상당히 많은 부분이 도덕적 평가가 내려질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죄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가 달려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게 어떤 것들은 양심에 찔림을 받아서 죄라는 것을 인식하고 어떤 것들은 인식을 못합니다. 못하게 되는 이유도 다시 논증을 하자면 굉장히 많은 부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 이 집단이 아니라 저 집단에 있었더라면 분명히 인식했을 텐데 그런데 이 집단이 아주 부도덕한 집단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다 아니까 담대해져서 양심이 무디어집니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합니다. 자기는 의식을 하건 못하건 상관없이 부메랑처럼 날아와서 자기의 영혼에 그대로 꽂히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은 피 흘리는 것과 같은 엄청난 상처를 남기고 어떤 것들은 살짝 찢어지는 상처를 남기지만 예외 없이 자기가 지은 모든 마음과 행동의 죄는 돌아와서 자신의 영혼의 상처를 냅니다. 그런데 문제는 회개를 하면 그런 게 치유가 됩니다. 그런데 이게 몇 달, 몇 년도 회개를 하지 않고 그냥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거의 짓이겨져서 아름다움이 완전히 상실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상대해주실 수 없는 아주 더러움으로 꽉 찬 인간으로 바뀐 것입니다. 다윗이 거기로 내려간 것입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아무렇게나 막 살면 안 됩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나님을 숭앙한다. 존중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을 섬긴다고 그럴 때 첫 번째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carefulness입니다. 주의 깊음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회개의 첫 번째 열매가 주의 깊음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깊지 않고 경솔한 사람이 회개하고 나면 주의 깊어집니다. 그게 존경심의 첫 번째입니다. 그게 존숭함입니다. 그것이 안 되니까 영혼이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름다움을 상실한 것입니다.
B. 이질적인 것의 개입
또 하나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영혼이 아름다움을 잃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뭘 의미하는가 하면 이질적인 것이 들어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단순히 영혼이 깨트려지고 부서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그 무엇이 들어오는 것을 가리킵니다. 영혼은 영혼 자체로 꽉 차있을 때 그때 가장 아름다운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영혼이 아름다움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는가 하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로 꽉 차서 꾸삐띠다스가 물러나야 합니다. 육욕적 자기 사랑이 추방되고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이 꽉 차있을 때 이것이 영혼을 향해서 투사되면서 영혼 자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잘못된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살려고 하는 이 죄의 경향성들이 힘을 잃어버리고 뽑혀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원래의 질서를 회복하게 됩니다. 이렇게 회복된 질서가 마음에 틀이 되는 것입니다. The frame of heart 마음의 틀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틀에서 수많은 영혼의 풍취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왜 그런지 기도하는 모임이 좋습니다. 왜 그런지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신도 사랑스럽습니다. 왜 그런지 찬양하는 모임이 좋습니다. 왜 그런지 교회가 가는 것이 좋습니다. 왜 그런지 하여튼 하나님과 관계된 일들로 섬기는 것이 기쁩니다.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즐거움이 됩니다. 여기로부터 멀어진 모든 것이 무관심해집니다. 이게 영혼의 풍취입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에 투영됩니다. 그것이 좋아하는 삶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모두 피나게 자기를 죽이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기 안에서 자기를 거스르는 풍취들이 생겨날 때 그때 그렇지만 아니 풍취를 따라서 사는데 그가 왜 나쁘겠습니까?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이 등산하러 가는데 왜 나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제일 신나지. 등산 좋아하는 사람이 등산 가방 메고 밖에 나설 때 더 신나는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데 일요일 날도 쉬지 못하고 어디 놀러 못가고 늘 교회에 가서 사는가 할 때, 그러게 말이야 그럴 때는 은혜가 떨어졌을 때입니다. 나도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것은 은혜가 떨어졌을 때입니다. 너는 참 좋아하지만 나도 산에 간다. 시온산에, 그리고 교회에 오는 것입니다. 이질적인 것일 수 없습니다. 이질적인 것들이 축출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자신이 다시 그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있어야 합니다. 자기 사랑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주님을 사랑하는 지순한 사랑으로 가득 차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항상 어떤 생각을 해야지 되는가 하면 하나님 자신에게로부터 오는 것이 기쁨의 원천이 되기를 힘써야 됩니다. 늘 살다가보면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것도 기쁨이 될 수 있고 만나서 가족들이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 떨어진 청바지 벗어버리고 새 바지 하나 사 입었는데 값도 싸게 주고 옷 스타일도 요즘 새로 나온 것이라고 그러니까 입었을 때 거울 보면서 예쁘구나. 하지만 너무 좋아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뭐 먹고 입는 것에 대해서 많은 기대를 갖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너무 많은 기대를 갖고 그래서 막 행복하고 거기에서 말할 수 없이 그 기쁨이 자신에게 굉장히 많은 만족을 주고 이게 다 너절한 삶입니다. 그러면 영혼을 아름답게 가꿀 시간이 없습니다.
Ⅳ. 아름다움의 회복
그럼 잃어버린 아름다움은 그럼 어떻게 회복되는가?
A. 영혼을 씻어 내리는 진리
우선 첫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영혼에 더러움을 씻어내는 것은 오직 진리뿐이다. 진리만이 그것을 더러움을 씻어내고 그 영혼에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 두개도 없고 딱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외우기도 쉽고 간단합니다. 진리 하나 이외에는 잃어버린 영혼의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표범이 반점을, 구스 인이 그 검은 피부를 아무리 비누로 문지른다고 해서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깨끗하게 할 수 있다면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본성자체가 이미 완전히 악해버린 상태에서는 선한 행실이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그토록 인간이 본질적으로 변화 받아야 된다는 사실을 그렇게 투철하게 강조하는 것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본성이 변화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의 아름다움은 삶의 질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의 영혼이 참다운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 가운데 도전적인 사람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아니 영혼의 아름다움도 알겠고 더러움도 알겠는데 다른 사람은 다 받아들이지만 나는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뭔가? 아니 왜 영혼의 아름다움은 진리가 회복을 합니까? 왜 영혼이 진리를 붙들 때만 아름다움이 회복될 수 있다고 말합니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설교를 멈추고 10번만 설교할 기회를 주면 내가 논증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질문하는 사람이 그 10번의 설교를 다 이해하는가 하면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쉽게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중학교에 가면 수학시간에 공식을 배웁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가면 공식이라고 그러면 너무 좀 유치하니까 정리라고 배웁니다. 원래 공리라고 그렇게 합니다. 정리라고 배우는데 정리를 증명해서 보여주어야 하는데 그런데 증명을 해주면서 정리를 가르쳐주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증명을 안 해주고 이것은 너희 고등학교 수학에서 몰라도 돼. 이것 외워, 그리고 식이 나오면 그 공식 외웠다가 거기다 막 대입을 합니다. 그것을 왜 그렇게 합니까? 증명도 안 된 것을 그렇게 믿을 수 있습니까? 인쇄되었기 때문에 그런 내가 설교도 인쇄해주겠습니다. 그럼 믿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교과과정상 어쩔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1학년 과정 수학에서 나오는 수일에 나오는 어떤 공식을 입증하기 위해서 증명할 수 있는데 대학 수학을 동원해야 증명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대학수학을 끌고 들어와서 증명해도 고등학교 1학년 밖에 안 된 학생이 그것을 이해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믿으십시오. 그냥 믿고 난 수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니까 잘 모릅니다. 수학을 전공한 사람들은 너무 혼내지 마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상식에 의하면 삼각형 네 변의 합이 180도라는 것이 증명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유클리드 이후로 정리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왜 정리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면 수없이 실험을 해봐도 180도밖에 안 나옵니다. 그런데 논리적으로는 정가 됩니까, 안 됩니까? 그런데 많은 수학자들은 인간의 이성이 더 뛰어나게 발달되면 언젠가는 증명을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아직 애기니까 있자.
그럼 지금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왜 진리만이 우리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가. 논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못 알아들을 수도 있으니까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합시다. 한 10주정도 합시다. 그러나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래서 내가 오늘 뭐라고 메모를 했는가 하면 영혼을 씻어내는 진리가 오직 진리뿐이라는 사실을 일단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으면 더 잘 알게 됩니다. 그럼 여기서 역설적인 명제가 성립합니다. 나는 알기 위해서 믿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는 믿기 위해서 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때 그것을 토대로 해서 그 다음에 지식들을 추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다가보면 내가 왜 영혼이 아름다움을 상실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를 믿을 수밖에 없는가, 그것만이 내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시킬 수없는가 하는 자연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B. 아름다움이 회복되는 방식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 아름다움이 회복되는 방식은 무엇인가?
1. 믿음으로 진리를 붙듦
첫째는 진리로 믿음을 붙들 때, 믿음으로 진리를 붙들 때 어떤 믿음으로, 오직 이 진리만이 내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진리만이 영혼 안에 들어온 영혼이 아닌 이질적인 것들을 축출해내고 파괴해서 사라지게 하고 나의 영혼을 참다운 영혼의 순수함으로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 진리가 오직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마음을 가지고 그 진리를 꽉 붙드는 것입니다. 이 붙드는 것이 뭔지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세 가지로 요약을 했는데 꼬고네스 께레, 인식하는 것, 그 다음에 페레,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것, 어프리케이션, 적용하는 것,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깨닫고 그것이 자신에게 계속 영향을 주도록 자기 자신을 그 진리 앞에 내어놓고 그리고 영향을 주고 있는 그 진리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삶의 중심에 오도록 그것을 숙고하고 자기의 삶 속에 개별적인 삶의 상황에서 끊임없이 적용하고 대입하고 그것을 중심축으로 놓고 자기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더 구체적으로 적용하려고 노력하는 것, 이것에 의해서 그 사람의 영혼이 더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그럼 한번 적용을 해봅시다. 오늘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가운데 진리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보십시오. 이제는 모두 춤추고 노래하는 데만 정신이 빠져있습니다. 도대체 도를 찾으려고 하는 진실한 구도자의 자세가 없습니다. 도대체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깃들려면 자신의 지성이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합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마음이라고 하는 단어 ‘레브’ 희랍어에서 이야기하는 ‘까르디아’ 라고 하는 이 심장, 혹은 마음이라고 하는 단어, 여기에 80%이상이 다 지적인 기능입니다. 그 지성이 헌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은 언젠가 여지까지 바람이 지나가는 것처럼 수없이 새겨듣지 않았지만 마지막 날에 죽음에 이를 때 제가 한 설교가 모두 기억날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리고 그 진리를 자신에게 적용시키지도 않고 그 진리의 영향을 받으면서 영혼의 추루함 속에서 끊임없이 벗어나 일자가 되신 하나님과 그 신령한 합의를 이루려고 하는 분투하는 노력이 없었던 사람들이 그들이 무엇으로 자신의 중생을 입증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당에 와서 오늘은 혹시 예배가 일찍 끝나려나, 그런 식으로 예배생활하고 뭘 가지고 갈수 있겠는지 난 말하고 싶습니다. 제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터지는 마음이 느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사십니까?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그것도 유의 부족하여 설교를 판단하고 여러분 가운데 누가 내 설교를 요즘 판단하고 있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어디를 가든지 마십시오. 판단하고 입맛 따라 설교나 찾으러 다니고 심지어는 그 설교에 대해서 평을 하고 여기 앉아 있는 사람은 여기 강대에 대해서 무엇을 설교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어긋나는 원리입니다.
무엇을 설교하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잠잠히 앉아서 듣고 그것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기를 고쳐야지, 그리고 설교 시간이나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해서 무슨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뭘 기대합니까?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는데 그것이 우리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그것을 버림으로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고 그것을 다시 붙드는 것과 함께 영혼이 변화되고 영혼이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데 그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데 무엇을 기대합니까? 드라마나 한편 보고 간 것과 여기에 와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리고 간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차이가 있으면 얘기해보십시오. 그리고 오늘날 한번 보십시오. 순 코미디 같은 설교나 좋아하고 말이지, 이벤트 같은 예배나 즐기고 그런 식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한번 잃어버린 아름다운 영혼이 회복이 되겠습니까? 쉽게 얘기해서 이런 식으로 진리를 떠난 채 살아가니까 그 마음속에 예수의 피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피가 없습니다. 예수 죽음의 정신이 없습니다. 그 진리와 함께 죽고 다시 살고 그 영혼이 죽임을 당하고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진리를 힘입는 작용이 그 안에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공하면 위선을 떠는 신앙생활이나 겨우 하는 것입니다. 사교적인 만족이나 함께 누리다가 지옥에 가서 동창회나 하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여기서 들은 모든 진리에 대해서 왜 반응하지 않았는지 언젠가는 주님 앞에서 모두 토설해야 합니다. 이유를 준비하고 계십시오. 무슨 기대가 됩니까?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1-2년 전에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아주 추루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영혼의 더러움은 마음에 비추고 마음의 더러움은 여러분들도 어찌할 수 없이 악하고 더러운 행동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메랑이 되어서 계속해서 여러분의 마음과 영혼에 꽂힙니다. 그래서 영혼이 계속 추루해집니다. 무엇이 그것을 막을 수 있는지 대보십시오. 아무것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수없는 결심, 결단, 헛된 결심과 결단을 수없이 했는데 밀려드는 홍수 앞에서 무너지는 제방 둑 같이 모두 다 허물어져나갔습니다. 무엇으로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또 어디에다가 기대를 합니까? 무엇을 기대합니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게 납니다. 뭔가 어째든 마지못해서 가족들의 평화를 위해서 교회에 나온 지체가 있었습니다. 주일 예배도 나오고 오후 예배, 수요 예배도, 금요예배도 나오고 그런데 내가 불렀습니다. 다 집어치워라. 나오지 마라. 수요예배도 필요 없고 주일 저녁 예배도 필요 없고 새벽예배도 다 나오지 마라. 어거지로 끌려와서 그런 식으로 하지 마라. 네 번만 참석하라. 그리고 주님을 못 만나면 가라. 나는 심방도 안 갈 테니까 세상으로 가든지 어디로 가든지 네 마음대로 가라. 다시는 교회에서 너 오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니 네 마음대로 가라. 그 대신 여기 앞자리에 앉아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그리고 세 번 예배를 드릴 것 한번에 집중해서 주일 예배만 드리고 가라. 한달 되지 않아서 회심했습니다.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진짜 한번이라도 예배를 나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드릴 수 없다. 예배를 드려보셨습니까? 난 여러분들이 그렇게만 된다면 여러분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이 주님을 못 만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성의 스위치를 끄고 예배 끝날 시간이나 기다리고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가 유일한 것인데 그것을 버리면 어디에서 해결책을 찾겠습니까? 고쳐야 됩니다. 구체적으로 여러분들의 삶 속에 적용을 해야 합니다. 숙고해보십시오. 말씀을 듣고 깊이 생각하고 적용하고 그리고 오늘도 그 말씀을 통해서 내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내 영혼의 추루함과 더러움을 벗어버리고 숙명처럼 반복되는 굴레의 실패에서 벗어나야지 되겠다. 나는 감히 한번 도전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 식으로 그냥 마음에도 없이 덜렁덜렁 교회에 드나들지 말고 결단을 하십시오. 10번만 열린 교회를 참석하고 그 다음에 아니면 다른 교회에 다니겠다고 하든지 아니면 세상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든지 뭐 정신이 나가면 무슨 결심을 못하겠습니까? 아무것이나 하십시오. 그 대신 사심과 뜻을 세우십시오. 제발 억지로 끌려나온 사람처럼 그렇게 예배를 드리지 말고 진리를 갈급하고 거룩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정말 그것 이외에는 자신의 영혼에 추루함으로부터 자기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주님을 만나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2. 은혜가 활동을 시작함
마지막으로는 은혜가 시작이 됨으로서, 은혜가 활동을 시작함으로서 이제 이 영혼의 아름다움은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진리에 말씀이 그에게 콱 와서 꽂히는 것 자체가 은혜가 함께 역사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성령이 아니면 그렇게 될 수없습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인간의 말은 인간의 머리 이상을 능가할 수 없고 혹시 마음에 와 닿는다고 하더라도 그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생각을 통한 모든 것이 마음에 닿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와 닿은 모든 말씀이 그 영혼을 변화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이 와서 콱 꽂히면서 그래서 성령의 은혜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성령의 무슨 활동을 합니까? 시간이 없어서 더 이상 논증을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무슨 활동을 시작합니까? 그 성령이 오셔서 은혜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것이 활동의 시작이 되면서 이게 돌아가면서 꾸삐띠다스가 다 토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까리따스의 사랑이 그 안에서 다시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의 작용 자체가 사랑의 창출입니다. 그래서 은혜 받은 사람 이외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현재적으로 은혜가 역사하고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활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활발하게 움직입니다.
똑같이 우리야의 아내를 딱 보는 순간에 죄가 딱 꽂혀서 이게 활동을 시작하면서 꾸삐띠따스의 사랑이 애성 속에서 움직이면서 그러면서 까리따스의 사랑을 다 토해내면서 영혼을 추루하게 만들었듯이 정 반대가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욕망들을 다 토해내게 합니다. 싫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채워지기까지 은혜가 계속 활동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도 그가 얼마나 꾸준히 올곧음을 가지고 많이 노력하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성화의 문제니까. 그러니까 한번 와서 충격을 받고 펑펑 울고 그 다음날 노래방에 가고 그러면 변화가 안 됩니다. 지속적으로 두들겨야 합니다. 박살이 날 때까지 계속해서 두들겨야 합니다. 언젠가 금방 부서집니다. 그래서 은혜가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게 그것입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자기의 지성을 굉장히 헌신해서 주의 진리를 깨달으려고 하고 예배시간에 자고, 조는 것 이것은 죄짓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전부 심판받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어떻게 그런 식으로 행동하십니까?
그렇게 깊이 은혜가 작용하고 역사하면 이 사람을 보십시오. 결국은 회복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어떻게 기록이 되었습니까? 그 끔찍한 죄를 지은 다윗, 그놈으로 기억된 게 아니라 위대한 회개의 사람으로 기억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의미에서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도저히 들어갈 수없었을 그 심오한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진리를 바라보며 나온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시리즈가 끝나기 전에 아니 다음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정말 변화를 받고 무엇으로도 여러분들이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영혼을 세팅해놓으셨습니다. 무엇으로도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냥 괜히 헛수고입니다. 빨리 포기하고 내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십시오. 그러면 이렇게 아팠던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너무 너무나 감사한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여러분들도 가장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난 요즘 아무리 묵상해도 진력이 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할까요? 이 순간에 우리의 육체는 검불처럼 타서 없어지고 우리 모두 어두운 하늘에 한꺼번에 하늘로 쏘아 올려져 우리의 영혼이 그 어두운 밤하늘에 박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밤하늘에 우리의 영혼이 찬란하게 빛나는 별빛과 같아서 우주가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찬란한 밤하늘에 빛나는 별 같은 마음들이 되어서 그 별빛 같은 영혼을 가지고 이 세상에 살 때 아주 놀랍게 하나님이 우리는 기대하지도 않았던 위대한 일들을 우리 위에 펼쳐보이 십니다. 그래서 나는 겨우 맑은 영혼, 아름다운 하나의 영혼을 지키면서 살았을 뿐인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아름다운 존재로 사용하셔서 은혜와 긍휼을 이 땅에 펼쳐 보이십니다. 주의 진리를 만방에 환하게 비추십니다. 상상할 수 없는 넓은 지경이 여러분들의 존재 하나로 하나님의 왕국이 오게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眞善美
4. 영혼의 두 아름다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시8:1)
Ⅰ. 영혼의 아름다움의 유익
시편 8편은 표제에 기록된 바와 같이 다윗의 시입니다. 그는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아름다운지요 하고 노래하며 그 온 땅에 있는 여호와의 아름다운 이름을 보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언제 이 시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이때는 다윗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웠던 때 그때 바로 이 시를 지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제 우리는 영혼의 아름다움의 유익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영혼이 아름다우면 우리들이 누리는 유익은 이루 말할 수가 없고 사실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말미암아 누릴 수 있는 유익 그 이외에 영혼이 아름답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유익은 사실은 우리의 인생에는 없어도 되는 유익들입니다. 영혼이 아름다울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아름다움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그 애성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그 애성과 지성으로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며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첫사랑이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첫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왜 돌아가고 싶습니까? 라고 물으면 아 목사님 첫사랑 때 얼마나 좋았습니까? 첫사랑 때는 하나님이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고 첫사랑 때는 기도도 잘되었고요, 예배에 가면 늘 감격이 있었습니다. 첫사랑 때는 내 마음에도 사랑이 많이 부어져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길 수 있었고요, 첫사랑 때는 하여튼 모든 것이 좋았습니다. 그러면 첫사랑 때는 그렇게 좋았는데 지금은 왜 그렇게 썰렁합니까? 그래서 첫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진짜 그럴까요? 저는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첫사랑으로 돌아가야지 되겠다고 하는 애절한 열망을 느낄 때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별로 없습니다. 많지 않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신앙생활을 보면서 돌아가고 싶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게 꼭 첫사랑 때는 아닙니다. 두 번째 사랑, 세 번째 사랑, 네 번째 사랑에서도 오히려 더 강렬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지금 입장에서는 나는 첫사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첫사랑 때보다는 지금이 훨씬 낫습니다. 행복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경험의 문제입니다. 그것이 첫사랑이든지 둘째 사랑이든지 셋째 사랑이든지간에 어째든 분명한 사실 하나는 그때는 하나님의 말씀도 잘 깨달아지고 기도도 잘되고 섬김도 있고 그랬습니다. 모든 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기에 첫사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럼 뭐라고 하는지, 목사님, 어차피 첫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아닐까요? 어디서 듣기는 들었는데 적용을 잘못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럼 오늘 이 시간에 마음을 가다듬고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봅시다. 그럼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믿어지면 아멘 해보십시오. 다시 한번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싶어 하는 열망이 더 강하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럼 하나님은 하여튼 기회만 닿으면 옛날 그 이상으로 사랑해주고 싶어 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동의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왜 그때는 하나님이 그렇게 첫사랑을 부어주셔서 나를 사랑해주셨는데 요즘은 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시지 않는 것일까? 왜 그럴까요?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모든 책임을 항상 하나님께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답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도 하나님은 더 많이 우리를 찾으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주님이 더 많이 사랑하고 싶어 하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온 마음으로 진리를 깨닫고 옛날처럼 감격하게 하시고 싶어 하시고 하십니다. 온 밤을 새워 기도를 해도 지치지 않는 그런 기도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시고 싶은데 문제는 영혼이 아름답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러니까 그런 것을 부어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말씀하실 때 그 복의 근원적인 관점을 영혼에 두셨던 것을 기억해보십시오. 영혼만 중요하고 육체는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육체는 파괴되어야 할 대상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구원에 있어서 통전적인 성격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은 영혼과 육체, 그리고 자신의 내적 삶과 외적인 모든 삶과 심지어 환경까지도 통전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복된 상태에 대해서 예수님이 많이 강조하신 이유는 그런 육체의 구원, 심지어는 환경으로부터의 구원까지 이 통전적인 구원이 완성되는 근원이 영혼에 있기 때문입니다. 1997년도의 일이었습니다. 책을 쓰는데 항상 책의 서문을 쓸 때는 바닷가에 가든지 산에 오르든지 해서 서문을 쓰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때 원주에 있는 치악산을 찾아갔습니다. 여러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바짝 가물었습니다. 겨울인데 가뭄이 들어서 진짜 물 한 방울 볼 수가 없어서 진짜 성냥불만 그어대면 훌훌 타버릴 듯한 건조기였는데 산에 들어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몇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았는데 어른 키 두 기름 될 정도로 보이는 물이 세찬 소리를 내면서 계곡을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곡의 물은 산 아래 자락을 타고 펼쳐진 온 들판을 물댄 동산과 같이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내가 생각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저렇게 깊은 산에서는 비가 오래되었는데도 그 많은 물을 머금었다가 흘려보내는구나. 그 산이 물을 토해내니까 그 산에 마주 닿아있는 수없이 넓은 들판들이 가뭄과는 상관없이 온 땅을 두루 적시게 되는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성경이 영혼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영혼이 복 받은 상태가 되어서 물이 넘쳐날 때 그때 그것이 흘러내려오면서 통전 적으로 우리의 육체와 온 삶을 두루 적시면서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도대체 오늘날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그 복됨을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되어야겠습니까? 돈 많은 사람들은 복이 있도다. 그래야 되지 않겠습니까? 진짜 그들은 많은 것을 누리고 있습니다. 얼굴이 예쁜 자매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시집을 빨리 갈 것이요. 돈이 많은 형제는 복이 있나니 자매를 빨리 만날 것이요, 배가 나와도 만날 것이요. 그런데 뭔 소리입니까? 심령이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랬습니다. 매일매일 슬프게 우는 사람들이여 그대들은 복이 있도다.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땅 한 평의 땅이라도 더 뺏어야겠는데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게 결국은 뭘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아름다운 영혼이 투사된 그 그림이 바로 가난한 자,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할 수 없는 마음, 자신의 죄와 이웃의 죄 때문에 쓰린 가슴을 부여안고 그 흐느끼고 아파하고 우는 그 마음, 원수와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위해서 섬겨야 하는 그 온유한 마음, 먹을 것이 있고 마실 것이 있어도 온 땅에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배고파하는 사람, 어떻게 하든지 정결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가장 큰 복으로 생각하는 그 마음 이런 모든 다양한 것들은 아름다운 영혼이 투사된 것입니다. 이 팔복을 우리들이 잘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행복은 to do,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뭘 얼마나 많이 소유할 것인가. 그것을 가지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그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경영학에 관한 책, 그다음에 처세술에 관한 책, 미래학에 관한 책, 그 수많은 것들이 결국은 제한된 시간과조건 안에서 어떻게 상대방을 모두 경쟁자로 생각하고 그들을 따돌리고 내가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겠는가 하고 그런 가르침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치열한 삶을 산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이 입지전적인 스토리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연봉 10억 도달해서 뭐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입니까? 나도 여자로서 2억을 연봉을 받는 사람이다. 그럼 뭐 어떻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까? 2억을 받아서 어쩌라는 말입니까? 좀 준다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당신도 40이전에 10억을 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게 삶의 질을 높여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삶의 질은 좋은 직장, 큰 집, 미래가 보장된 직업, 학문 그런데 삶의 질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붙들었던 이 세상의 질과 가치입니다. 그것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다시 돌아갑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소유하는가, 뭘 하는가, 이것이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to be’ 무엇이 될 것인가.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래도 그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가난해져야 복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염장을 지를 일이 있습니까? 그게 무엇입니까? 그 가난한 사람들이 팔복산에 모였는데 진짜 복 있는 사람들이 되려면 너희들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진짜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의 아름다움 안에서 하나님이 그 영혼의 지성에 말을 건네시고 그리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깊이 들어가서 진리의 세계를 알아가고 그런 사람의 애성에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참으로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 안에서 창조의 세계에 맞도록 자기 위치를 찾아가고 그 안에서 무엇을 하든지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그분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거기에 진정한 인생의 쉼과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가기 위해서 기독교의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두드리도록 선택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름다움은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Ⅱ. 창조와 아름다움
A. 하나님 안에서 : 단일함
이것을 우리들이 좀더 구체적으로 논의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이제 창조와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안에서 이 아름다움은 단일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이 아름다움이 하나입니다. 삼위일체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더 이상 쉽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인류 최초로 설명해주겠으니까 이것을 가슴에 깊이 간직하고 살면 혼돈될 것이 없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나님이십니다. 영원 전에 성부가 되셨고 그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셨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꾸 혼동을 일으키는 게 아 그러니까 제일 처음에는 성부 혼자 계셨고 두 번째는 성부와 성자가 계셨겠군요. 그리고 나중에는 드디어 성령이 합류하셔서 일위일체, 이위일체 하다가 마감 시간이 되니까 삼위일체가 되셨군요. 그런데 이것은 벌써 먼저 나중이라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시간의 개념을 물고 들어온 판단입니다. 이것은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설명이 안 됩니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것은 삼차원까지만 경험합니다. 자, 이 문제를 철학적인 사위로 여러분들을 초대하겠으니까 잘 이해를 하면서 여러분들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십시오. 백지가 있습니다. 백지 위에 정확하게 네모를 하나 그렸습니다. 그 그려진 위에 또 하나의 네모가 존재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왜 다 큰 사람들이 대답을 못합니까? 백지 위에 연필로 정확하게 사각형으로 네모를 그렸습니다. 그 위에 똑같은 크기의 사각형을 더 그려 넣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유치원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그려놓을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각형이 몇 개입니까? 두개입니까? 그린 것은 어디로 갔습니까? 두 번 그렸는데 두개가 있어야 되는데 어디로 갔습니까?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백지 위에 사각형을 그렸습니다. 그 위에 똑같은 사각형이 올라갑니까, 못 올라갑니까? 못 갑니다. 덧칠하면 되지, 왜 여기가 유치원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 이상의 개체가 선으로 그 이상에 표시될 수 없습니다. 이차원입니다. 사각형입니다. 위에 올라갑니까, 못 올라갑니까? 두개가 올라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이차원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게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어떻게 올라가나. 아니 선 위에 그리면 선인데 수학적 정리에서 선은 두께와 부피가 없습니다. 그리고 크기가 전혀 없는 점들에 연합입니다. 그것 자체가 사실 말이 안 되지만 인간이 그렇게 설정해놓은 것입니다. 선 위에 선이 올라가도 부피가 늘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가지 않습니까? 올라간다고 아무리 얘기를 해도 이차원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 설명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 성부에게서 성자가 나왔었는데 어떻게 두 분이 같을 수가 있는가. 혼자 계실 때가 있었지 그런 것이 없다고 이야기를 해도 이해를 못합니다. 시간 안에 이미 묶여 있는 사고 속에 있기 때문에 설명이 안 됩니다. 이해가 안가도 그런가보다 하십시오. 이해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또 그러면 처음에는 일인 일체 두 번째는 일이 일체 세 번째는 삼위 일체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됩니다. 시간을 초월한 것이니까. 그러니까 제가 어떤 부주의한 신학자들은 첫째 날 전에 천사들이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보 같은 생각입니다. 상식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천사 선제설이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존재의 근원이 동등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성자는 성부에게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셨지만 세 분 중 한분만 계시던 때는 없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부 성자 성령은 각각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한 인격이 아니라 세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부는 성자 성령이 없으면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성자와 성령이 없어도 성부는 하나님이십니다. 성자와 성령의 의지하지 않고 성부는 홀로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셨지만 두 분 때문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성령 자신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각기 인격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세분입니다. 그런데 이제 세분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게 삼신론이 되는 것입니다. 셋이 되어서 각기 돌아다니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끝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하고 얘기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세분이 각각 인격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시지만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첫째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세 인격이지만 그 하나님의 본질이라고 하는 면에 있어서 성부가 성자보다 낫다거나 성령이 성부와 성자보다 못하거나 하지 않고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 점에서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일체라는 이야기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삼각형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있습니다. 성자는 성자로서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성부도 그러하신데 이 세 분은 아무렇게나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되어서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세분이 신적본질에 있어서만 하나일 뿐만 아니라 활동하시는 면에 있어서 일체가 되어서 활동하십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를 제외한 성령의 활동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부의 고유사역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천지를 창조할 때는 성부, 성자, 성령이 성부가 주로 principally, 혹은 mainly 하게 주로 창조의 사역에 있어서는 성부가 관여하십니다. 그런데 성자와 성령을 배제한 채 성부가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거기에 성자와 성령이 계십니다. 우리를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서 구속하시고 죄를 속하시는 그 일은 성자의 일입니다. 그때는 성자가 구속사역에 주로 관여하셔서 당신의 일을 하시게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성부와 성령도 배제되지 아니하고 거기에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예수의 구속사역이 믿어지게 만드시는 믿음의 역사는 성령의 고유한 사역입니다. 성령이 주로 우리의 영혼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우리의 영혼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믿어지도록 만드십니다. 그렇게 해서 죄인의 마음속에 십자가와구원의 도리가 믿어지게 하시는데 성자와 성령을 배제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성령이 역사하시는 거기에 성부와 성자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체로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것을 삼위일체라고 부르고 따라서 하나님은 세분이라고 말을 해버리면 안됩니다. 그래서 한분이시라고 얘기를 해야 합니다. 이게 삼위일체입니다. 누구도 더 이상 쉽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추상명사의 형태이기는 하지만 그게 하나님 안에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보이게 나타난 지각할 수 있게 나타난 모든 보통의 사물과 추상적인 가치들은 그 선한 것이 하나님 안에 없던 것이 나타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아름다움은 삼위 하나님 안에 있었던 아름다움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삼위 하나님 안에 있었던 아름다움의 정체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시간이 없어서 제가 오늘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삼위 안에서 각위가 서로의 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이 즐거워하시고 행복하셨다고 보아야 하는데 그 말할 수 없이 즐겁고 서로에 대해서 행복해하셨던 그 기쁨의 원천이 각위의 아름다움에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각 위가 아름다우시고 삼위의 연합 자체 안에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느끼시고 기쁨을 그 안에 가지신 하나님이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 정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각위가 아름다우신 것, 각 위에서 연합을 이루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것의 그 정체는 신적인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의 완전성입니다. 그게 아름다움의 정체입니다. 왜 그 아름다움이 완전성인지에 대해서는 이 정도에서 만족하시고 그 다음 설교로 넘어갑시다. 그렇게 되는데 어째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은 단일한 하나의 아름다움이었습니다.
B. 창조세계 안에서 : 둘이 됨
그러나 이제 이것이 창조세계 안에서는 이것이 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하나의 아름다움이 창조세계 안에서는 둘이 되는 것입니다. 이 둘이 된다고 하는 것이 뭔가? 여러분들의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비유를 하나 제가 만들어냈습니다. 햇빛은 하나입니다. 하나의 햇빛이 비춥니다. 그런데 프리즘을 통과시킵니다. 그럼 여기에서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빛깔의 무지개가 생겨납니다. 무지개의 정체는 빛입니다. 그 일곱 개로 분광이 된 찬란한 색깔의 빛과 프리즘을 통과하기 전에 존재하던 햇빛 사이에는 어떤 질적인 차이도 없습니다. 동질의 것이 들어와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하나님의 단일한 아름다움이 투사되니까 분광의 현상을 일으키면서 두개의 아름다움으로 창조 세계 속에 확 깃들게 됩니다. 창조세계와 인간의 영혼 안에 깃들게 됩니다. 그 두 아름다움이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자연적 아름다움과 도덕적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이제 중요한 주제인 자연적 아름다움과 도덕적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오늘 성경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하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온 땅이라고 하는 것은 땅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 이외에 가시적으로 존재하게 된 이 모든 지상과 우주에 있는 모든 창조된 것을 가리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다 입니다. 주님이 무슨 명찰을 달아놓으셨습니까? 산봉우리에 바다위에 나뭇가지에 오렌지 꼭대기 위에 시냇물에 돌맹이에 우리 하나님이 명찰을 달아놓으셨습니까? 뭐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다고 그런 것이 무슨 뜻입니까? 시편을 우리들이 이해할 때 이것을 너무 시라고 생각하고 들어가면 안 됩니다. 이 속에는 계시 전달의 한 수단의 시일뿐이지 이 담겨져 있는 이 글은 굉장한 계시를 담고 있는 사유의 글입니다. 생각 없이 읽으면 아무것도 얻지를 못합니다. 온 땅에 이름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는 것입니다. 온 땅이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삼라만상 모든 것입니다. 존재하는 지각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물을 시인이 쳐다보는데 우선 느낀 것은 아름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서 동시에 느낀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구나 하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다는 것인데 산이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온 땅이 아름답다는 것이 아니라 온 땅위에 두신 하나님의 이름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이 아름다움은 신적 아름다움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시적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에 아름다움은 가지적 아름다움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게 아니라 지성으로 생각을 해야지만 알 수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런데 그 두개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느낀 감격을 지금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그랬는데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이름 사상을 알아야 되는데 구약과 신약 전체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여호와는 하늘에 계시고 하나님은 이 땅에 당신의 이름을 두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향한 태도는 여호와 자신을 향한 태도와 똑같습니다.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한사람이 열린 교회를 왔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지 않기에 너 어디서 왔니. 부산 아무개 교회에서 왔습니다. 그래, 속으로 신앙생활을 저따위로 하나. 뒤에 또 왔습니다. 똑같이 신앙생활을 하기에 너 어디서 왔나. 그러니까 그 교회에서 왔다고 또 그렇게 합니다. 세 명이 똑같습니다. 그럼 어떻게 됩니까? 교회는 부산에 있지만 이름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 교회 이름이 떡이 되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교회에서 또 온데. 안 왔으면 좋겠다. 왜 그렇게 오는 애들마다 교리적으로 정리가 안 되어있고 늘 헤매고 다니나. 그러니까 실체는 거기에 있지만 이름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곧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이름을 빼버려도 됩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우리 주여 주님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라고 말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C. 자연적 아름다움과 도덕적 아름다움
1. 죄가 들어오기 전
그러면 이것이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세상에서 느끼는 자연적 아름다움과 그것을 통해서 생각이 더듬어갈 수 있는 도덕적 아름다움, 그 두 아름다움의 원 저자이신 하나님을 교통하면서 느낄 수 있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가장 훌륭하게 되었던 때가 언제인가 하면 인간이 죄가 들어오기 전입니다. 이때는 모든 것이 교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타락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타락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자연적 아름다움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을 투사해서 자연적 아름다움을 만드신 것입니다. 자연적 아름다움을 만들어놓았는데 그것만 보면서 아 좋다. 와 좋다. 진짜 좋네. 그리고 끝나라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보면서 도덕적 아름다움을 생각하라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묵상을 하면 되니까. 제가 이제부터 문학적인 묘사를 하겠으니까 마음으로 눈을 조용히 감고 제가 이렇게 묘사하는 그림을 마음속으로 그려보십시오. 아직까지도 단풍이 다지지 않은 깊은 산속을 들어갔습니다. 오후의 햇살이 따갑게 내려쬐는데 바람은 산들산들 불면서 바람에 단풍잎이 스쳐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붉은 단풍은 발갛게 노란 나뭇잎은 노랗게 아직까지도 푸름을 자랑하는 잎사귀는 파랗게 이렇게 색깔과 색깔이 햇빛을 받아 대조를 이루면서 우거진 숲 사이로 마치 하얀 실타래를 풀어놓은 것과 같은 맑은 물이 소리를 내면서 바위에 부딪히며 흘러갑니다. 저 아래서는 그 물들이 폭포가 되어서 떨어지고 큰 연못을 이루었는데 그 연못 위에 떨어진 뒤집혀지기도 하고 바로 떨어지기도 한 단풍잎 몇 개가 소용돌이를 타고 흔들리면서 물결 위를 춤추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물이 흘러, 흘러 어디로 흘러가는지 따라 가보니까 넓은 들판이 나옵니다.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고개 숙인 벼이삭이 가득한 끝이 보이지 않은 넓은 곡식들로 가득 찬 평야가 보이고 여기저기서 허수아비들이 외롭게 깡통을 흔들며 참새를 쫓고 있었습니다. 더 걸어 내려가 보니까 바다에까지 이어지는데 바다의 그 넓은 해변, 우측에 높이 솟은 산위로는 바다의 해풍을 머금으며 자라온 수백 년의 굴곡의 세월을 지켜본 노송들이 어깨를 서로 겨누며 바다를 향해서 머리를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는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고 그리고 바람조차 없어서 잔잔한 그 바다 위에는 오후의 햇살이 내려쬐는 반짝임이 그 물결 위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며 반사하고 있었으니 마치 수많은 어린아이들이 가을운동회 때 은색종이로 카드섹션을 하는 것처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하나님의 창조의 이 자연의 미를 보면서 다 귀찮아. 삼겹살이나 구워먹자. 이런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야! 여기 산새도 좋다. 카바레나 짓고 제비들이나 모으자. 춤이나 한번 추고 흐드러지게 한번 육욕을 즐겨보자. 이런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깊이 다가갈수록 일종의 경건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17세기에 철학에서 떨어져 나와서 최초로 미학이라고 하는 것이 형성이 됩니다. 그때에 그 미학을 거의 초창기에 창시했던 독일사람 하나가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정의할 때 그 아름다움은 곧 숭고다 하고 정의를 합니다. 이것은 불신자입니다. 불신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숭고미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장엄미다. 장엄미가 무엇인가? 아주 어린아이가 집 채 만한 파도가 치는 바닷가에서 쾅 하면서 엄청난 충격과 함께 바위에 부딪혀서 산산이 흩어지는 그 무서운 엄청난 파도를 보면서 거기에 느끼는 그 엄숙함, 그 속에 아름다움의 본연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게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뭘 그렇게 생뚱맞게 그렇게 쳐다봅니까? 아멘 해야지. 하나님이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너무나 명쾌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것은 틀릴 가능성이 하나도 없는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무엇인가 그 속에서 자연미를 본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것들이 교통을 하고 있었는데 죄가 들어오면서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가 들어오기 전에 지금 얘기하는데 이게 교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흔적들이 사라진 것 같지만 좀 남아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 루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루소가 인류역사의 불후의 명작 한권을 남깁니다. 에밀 입니다. 교육사상서입니다. 그 에밀 속에서 루소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어린아이 하나에게 선악이 무엇인지를 하루 종일 가르쳐주는 것보다는 한 시간을 아름다운 숲 속에 있게 하면 그가 거기서 선악을 더 많이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100%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벌써 그것은 성경적인 사상을 토대로 합니다. 왜냐하면 그 자연미를 보면서 그자연미 속에서 도덕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는 것, 이것이 원래 인간이 가지고 있는 특권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 두개가 하나의 통합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 속에서 자연을 가까이 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은 인간이 되기 위한아주 필수적인 생활환경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하나 데려다놓고 자연적 아름다움을 뛰어넘어서 곧바로 도덕적 아름다움을 가르쳐주고 싶어서 그래서 설명합니다. 머리가 터지도록 집어넣습니다. 안 들어갑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 속에서 어진 것이 무엇이고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미국인가 캐나다인지 집회를 갔는데 집회 끝나는 날 마지막에 그 교회 목사님이 저를 데리고 케이블카를 타고 로키산맥을 올라갔습니다. 4천 미터 되는 꼭대기에 올라갔는데 아래는 여름인데 얼음이 어적ㅈ어적합니다. 올라갔는데 4-5천이 되는 영봉들이 980킬로미터나 되는 두께가 줄지어서 확 펼쳐진 봉우리들이 보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를 안 믿는 사람들은 와 멋있다. 박아, 박아, 사진 발 잘 나오게. 그리고 희죽 웃고 내려옵니다. 거기에 가니까 정말 기도가 저절로 나옵니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그렇게 아름다운 산인데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아! 저 봉우리 왜 튀어나왔을까? 여름에 왜 눈이야. 아니 구름은 왜 또 치마 걸치듯이 산허리에 가 있는 거야. 이런 생각 하나도 안 듭니다. 손댈 필요가 없이 아름답습니다. 아 아름답다. 그것을 보면서 주님의 위대하심이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은 개입니다. 닭대가리입니다. 그래서 도덕적 아름다움과 자연적 아름다움이 서로 인식에 있어서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애들도 난 그래서 너무나 미안합니다. 저는 이렇게 자연 이야기를 하는데 시골출신이라고 하는데 시골출신이 아니라 6살 때 떠났습니다. 그래도 감수성이 너무너무 예민하던 나이에 지워질 수 없도록 가슴에 팍팍 찍혀진 것입니다. 설교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서 시골을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애들은 도시에 자랐습니다. 그래서 같이 여행을 가도 “이슬아 저것 좀 봐라. 저 산 좀 봐라.” “봤어요.” “...” “영래야 저 개울 좀 봐라. 아 저 물 좀 봐라. 저 풀꽃 좀 봐라. 저 야생화 좀 봐라. 야 저것 좀 봐라.” “엄마 놀이기구 어디서 타.” “...”그런 속에서 도덕적 아름다움을 곧바로 가르치려고 하니까 이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연과 친근히 지내십시오. 그래야지 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여러분들은 모두 기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뭔가 하면 교회에 오면 맨 자연주의자들만 있으니까. 여기는 벌써 눈치를 챘습니다. 저 뒤에는 계속 껌벅이고 있습니다.
(예화: 어느 형제가 정말 예쁜 자매를 만나 결혼했는데 문제는 아이를 낳고 보니 아빠도 엄마도 안 닮아서 궁금해 하면서 세월이 흘러 처갓집에 놀러가서 우연히 앨범을 보니 거기에 자기 딸의 모습이 있었다는 이야기)
어느 형제가 나에게 전도사님, 제 진심을 얘기해도 되지요. 그래. 저는 못생긴 자매하고 일생을 평안하게 사는 것보다는 가끔 싸우면서 예쁜 자매하고살고 싶습니다. 굉장히 우울해지시는데 일단 자연 그대로입니다. 저도 칼 한번 안 댄 얼굴입니다.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하나님이 주신 것은 그 자연미에 탐닉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도덕미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도덕미를 다시통과해서 두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관상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2. 죄가 들어온 후
그런데 이제 죄가 들어온 다음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인데 여기서도 굉장히 복잡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이야기를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나중에 내가 꼭 하고 싶습니다. 기회를 언제 한번 주십시오. 내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는데 어째든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서인간이 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선 첫 번째 문제는 이 세 가지 아름다움이 다 끊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미를 파악도 못하는 인간들도 아직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그림을 그리고 아름답게 했다고 하는 이런 것들이 다 어디서 따온 것인가 하면 자연미에서 받아다 만들어낸 인공미입니다. 인공미에 빠져서 자연미는 못 보는 것입니다. 그 인공미는 자연미의 카피일 뿐입니다. 그러면 그 원천이 되는 것을 즐거워해야지 되는데 볼 수 있는 안목이 없는 것입니다. 또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연미까지는 보는데 그런데 그 자연미를 통해서 하나님이 보기를 원하시는 도덕 미는 못 봅니다. 도덕 미까지는 어떻게 보는데 엉터리로 보는 것입니다. 그 두 아름다움의 마지막 원천이신 하나님은 못 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려움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창세기 6, 7, 8장에 보면 노아 홍수가 일어납니다. 전 인류가 다 멸망합니다. 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다 죽습니다. 방주에 들어간 것을 빼놓고는, 그런데 그 땅을 그렇게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그들에게 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이고 사람의 딸들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인가? 아벨을 죽이고 가인과 아벨을 이어서 태어난 셋이 있는데 이 셋의 후손과 가인의 후손이 갈라집니다. 그래서 이 가인의 후손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일반은총 속에서만 살아가는 불택자의 계보를 이룹니다. 셋에게서 계속 빠져나가기는 하지만 셋의 후손에서 이 경건한 자손들이 보존되면서 인류의 구원의 계시가 그 계보를 따라서 담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승되어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집안입니다. 이 집안에 있는 아들들이 이 불택자의 계보인 사람의 딸들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안에는 딸들이 없었을까?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있으니까 시집장가를 가서 애들을 나낳아서 경건한 후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집안에서 태어난 딸보다 사람들의 집안에서 태어난 불택자의 계보의 딸들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끼리 이야기를 하니까 터놓고 얘기하십시다. 남이 안 듣는 것이니까. 인터넷으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믿는 사람들끼리 보는 것이니까 얘기할 것 없고, 톡 까놓고 얘기합시다. 진짜 교회에 안 다니는 자매들이 더 예쁘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매들, 예수 안 믿는 그 남자들이 더 화통하고 멋있지 않습니까? 아니 자매들은 어떻게 월급 받아서 모아서 한번 부수고 다시 건설해보려고 모았는데 얼굴 말입니다. 그래서 재건 작업을 했는데 그런데 설교시간마다 면상의 아름다움보다 중요한 것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하면서 공격을 합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헌금하고 말았습니다. 아름다워질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상실한 것입니다. 솔직히 평촌 촌구석에 예배당 여기에 온 것보다야 압구정동에 가면 진짜 예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사실입니다. 그렇게 애석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말은 바로 해야지,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그런 점에서 이제 자연주의자들입니다. 보람을 그런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 토종이다. 그리고 그대로 내추럴 합니다. 태어난 그대로라고 하는 것을 그렇게 우리들이 합니다. 그러니까 볼 때마다 다 자연미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들 중에는 참 저렇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거기 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아름다움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아들들의 누이들이 더 예뻤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고 그냥 고혹적으로 생긴 그것만 딱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혹 하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런 식으로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잠언 같은 것에서 끊임없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그 현숙함과 어짊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그것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의 그림자니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저자이기도 하고, 영혼이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그가 하나님이 그렇게 그 중심을 본다고 말씀하시면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을 때 그가 세상적으로 보면 그가 무슨 아름다움이 있었습니까? 아버지에게도 인정을 못 받고 형들에게도 따돌림을 받는 왕따를 당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양이나 치는 그렇게 대단할 것이 없는 시골목동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외모를 뛰어넘어서 그 아이를 그렇게 사랑하십니다. 그런 가치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으로 꽉 차있을 때는 그랬는데 이게 타락을 하니까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거기에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저녁 때 그랬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아침의 개념은 해뜨면서 아침입니다. 복게르입니다. 그리고 저녁은 해가 기울어지면서 해가 딱 떨어지기 전까지가 에레브 저녁입니다. 해떨어지면 그 다음에 라일라 밤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하면 저녁때라고 그랬으니까 몇 시인지 모르지만 벌건 대낮입니다. 자기 부하들은 가서 죽어라 전쟁을 하는데 그는 퍼질러 잔 것입니다.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일어나서 아직까지 햇빛이 남아있는 벌건 대낮인데 왠 가정주부가 목욕을 합니다. 그런데 심히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바보 아닙니까? 그게 뭐가 아름다웁니까. 대낮에 남사스럽지. 여러분, 형제들에게 묻습니다. 예배를 잘 끝나고 집에 갑니다. 가는데 옆집에 대문이 열려서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그 집 아줌마가 등목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아! 미가 여기에 있도다. 아름답도다. 정신과 진료를 요합니다. 아니 물어보는데 진짜 아름답겠습니까? 형제, 아름답겠습니까? 물어보잖아요. 아름답지 않잖아. 그런데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이 속에 정욕이 있으니까 정욕과 화합하면서 전혀 아름답지 않은데 아름답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미친 듯이 살아가는 이 삶의 방향이 어디인가 하면 결국은 자기 안목에 좋다고 생각되는 그것을 찾아서 미친 듯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애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름답다고 판단을 할 때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못 판단했어도 하여튼 그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선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게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다움이 자연미 자연미와 도덕미, 그러니까 자연적 아름다움과 도덕적 아름다음이 있으니 결국은 우리의 영혼이 그 두 가지를 감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죄가 들어와서 인간이 타락한 다음에는 심미안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게 망가지는데 그래도 자연적 아름다움을 보는 자연적 미감은 상당부분 건재합니다. 그런데 도덕적 아름다움을 관상할 수 있는 도덕적 미감은 거의 다 파괴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욕망을 다 버리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서 자연에 나타난 아름다움까지는 봤는데 그 다음에 그것을 어떻게 도덕하고 연결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이제 시문학적에서 두 가지로 제가 예증을 들겠습니다. 어떤 시인이 중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나는 기억하는데 그 사람이 대동강에 있는 모란봉에를 올라갔습니다. 그래서 그 대동강에 끝없이 흐르는 강물과 그 전경을 이렇게 보면서 하루 종일 감상하다가 시를 써야지 되는데 결국은 시를 쓰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다가 내려갔습니다. 왜 그럴까요? 시라고하는 것은 자연적 아름다움을 관상한 다음에 그 지각된 아름다움을 도덕미와 연결을 시키든지 삶에 가치와 연결시켜야지만 시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늘이 푸르다. 땅은 파랗다. 아! 좋다. 그게 시가 아닙니다. 꼭 뭔가를 인생에 생각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연적 아름다움은 봤는데 그 다음서부터 눈이 어두워서 그 도덕적 아름다움을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울면서 내려간 것입니다. 제가 이 시를 인용한다고 해서 목사님은 학문에 전문가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쩌다가 머릿속에 하나 기억되고 있는 것이니까. 당나라 시인 중에 진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시를 하나 남겼습니다. 전불견 고인이요 앞에서는 옛 사람을 볼 수 없고 후불견 래인이라. 뒤에서는 오는 사람을 볼 수 없도다. 염천지지 유효하니 천지에 끝없음을 생각하니 독창연이체하 홀로 외로워져서 눈물만 흐르는구나. 그러니까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이 우주의 끝없음과 천지의 무한함 그리고 그 장엄 속에 깃들어있는 아름다움을 본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아름다운지요 하는 단어도 아띠르 라고 하는 히브리 단어입니다. 아띠르가 무엇인가 하면 majesty 위엄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아름답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 자연적 아름다움을 그 속에서 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속에서 도덕적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눈물만 흐르는 것입니다. 한없는 외로움을 느낍니다. 앞에서는 옛사람을 볼 수없고 뒤에서는 이미 오는 사람을 볼 수없고 천지의 끝없음을 생각하니 아! 외롭도다. 홀로 눈물만 흐르는구나. 자기 혼자뿐이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우주의 이 속에서, 파스칼이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무한한 우주의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합니다. 팡세에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같은 경험입니다. 그런 동일한 경험들을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그런 자연적 아름다움 속에서 도덕적 아름다움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누군가 하면 동양철학을 하는 사람들, 불교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제법 연결을 합니다. 예를 들자면 물이 흐르는구나, 굽이쳐 흐르는구나. 물은 돌을 부수지 않고 장애물들을 건너면서 돌고 가는구나. 그런 속에서 인생을 배우는구나. 아 그래, 우리도 물처럼 이렇게 흐르면서 그래야지 되겠다. 등등 이렇게 비슷하게 도덕적 가치들이 연결을 합니다. 그게 딱 맞을 리가 있겠습니까? 어쩌다 맞으면 소 뒤발질에 개구리가 맞은 격이지. 가끔 맞지 그러나 대게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희미하게 느낀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게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이게 철학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게 되면 한사람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빛 된 삶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결국은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그 두 가지 아름다움을 잘 감지해내지 못하고 또 감지해도 그것을 연결시키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제 중생한 인간 안에서 이 두 아름다움의 교통이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영혼이 죽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힘과 경향성들로 이루어져있는데 이 경향성과 힘들이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며 살 수밖에 없도록 그 하나님이 주신 원래의 아름다움을 파악하기 어렵도록 다 망가져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께서 진리와 성령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로를 힘입어서 그것들을 완전히 다시 제생시키시는 것입니다.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중생을 통해서 다시 살리시니까 이제 그 살린 속에서 아름다운 감각들이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옛날에는 아름다운 산 같은데 가면 박아 사진 한 장 찍고 왔었는데 이제는 야 정말 하나님이 놀랍구나.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수박 한통을 먹으면서도 와 어쩜 하나님이 이렇게 맛있고 신기한 과일을 만드셨을까? 감자를 캐면서도 줄줄이 따라 나오는 감자를 보면서 야 정말 하나님이 정말 지혜로운 분이시다. 놀랍다. 영봉들이 이어진 산맥들을 보면서 그 속에서 주님의 광대하심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면서 자연적 아름다움을 보면서 도덕적 아름다움을 관상하고 그 뒤에 있는 하나님 자신의 그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세 가지 아름다움이 서로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이 한없이 행복해하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 것들을 지각하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신 것입니다.
Ⅲ. 영혼이 아름답게 되는 길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그러면 영혼이 아름답게 되는 길이 무엇인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A. 참 아름다움을 봄: 아름다움의 교통
첫째는 참 아름다움을 봄으로서 자신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속에서 가장 탁월한 모범을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불쌍한 인간들을 이렇게 보시면서 뭘 먹어야지. 뭘 입어야지 되나, 돈이 없어서 어떻게 하나. 고민하면서 사는 수많은 인간을 보시면서 애야, 주식시장을 봐라. 파랑새다. 애야, 은행을 봐라. 대부해준단다. 그렇게 말씀하셔야 되는데 아 오늘은 뭘 먹지. 정말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애들아. 나랑 백합화를 보러 가자. 지금 농담하시는 것입니까? 그게 농담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인생을 사는 원리입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과 같은 이 몸을 정금같게 하시네
우리 마음속 깊은 그곳에 영혼을 내리신 죽음 이기신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시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없네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 너무 아름다운데 내일이면 시들어서 아궁이에 던질 풀인데 아름다움을 보면서 뭘 생각하나, 그렇구나. 백합의 아름다움은 찬란하게 꽃피는 것이요,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우리들이 느끼게 되는 도덕적 아름다움은 그렇지. 저 꽃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니 그리스도 말미암아 구속을 받고 재창조된 우리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겠는가. 그러니까 나는 있는 것은 걱정 없어. 주님만 사랑하며 살거야, 이렇게 도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신앙이 교회에 와야지 겨우 하나님이 느껴지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한심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영혼의 추루함에서 오는 현상입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하고 나무 그늘아래서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는 눈물이 안 나왔는데 밤에 산책하면서 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집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살아있군요. 제게 아무 것도 해주시는 것이 없어도 주님이 거기 계셔서 저는 충분히 행복합니다. 하나님 나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할 수 있어요
어여쁜 화초가 비오다 개이면 하늘에 뻗힌 무지개 참 아름다워요
온 천하에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보아서 그 사람 알아요
어거스틴이라는 위대한 교부가 지은 동시입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온 천하 만물은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아요. 여러분들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간직하면 도처에서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도 시간이 기도시간 안에 칸막이 되지 않고 터집니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말씀 안에서만 묶이지 않고 터집니다. 설교를 듣는 시간만이 아니라 살아가고 숨쉬는 모든 시간을 통해서 진리가 파도치면서 자신의 영혼 속에 스며듭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서 가득 찬 하나님을 느낍니다. 안 계실 곳이 없는 하나님을 그 속에서 느낍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인간의 의무인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 깊이 하면서 아 그렇구나. 주님의 놓고 위대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늘위에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B. 세상의 아름다움에 탐닉치 말라
두 번째는 세상의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도 2차적이고 3차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 살 때, 우리로 하여금 누리면서 살도록 많은 것들을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면서 지나친 가책을 느끼거나 그럴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고행주의적인 삶을 살 필요는 없습니다. 돈이 넉넉하면 지하실에 살다가 큰 집 가세요. 젊었을 때는 걸어 다녀도 괜찮은데 나이 들면 버스 타는 것으로는 불편하니까 생의 자원을 보전하기 위해 자가용을 타고 다닐 수도 있습니다. 여유가 있으면 좋은 차타도 되고 말이죠. 옷도 처음에는 교복만 입고 다녔는데 여유가 있으면 얼굴이야 자연주의라고 하지만 옷까지 나뭇잎을 걸치고 다닐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제대로 된 옷을 사서 입으세요. 세벌 살 걸로 한 벌 사서 품위 있게 입으십시오. “좋다. 감사하다. 편하다.”라고 느끼는 것은 가책 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사랑하지 않던 것을 사랑하게 될 때에는 반드시 ‘좋아함’이라고 하는 반복되는 과정을 거쳐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에 묶이게 됩니다. 묶이지 않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같이 사는 데 “여보 나 당신 없이 못 살아. 당신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해.” 이래 놓고서, 아내가 먼저 죽으면 신문지 가리고 웃습니다. “당신이 날 만나고 여태까지 한 일 중에서 가장 칭찬받을 일이야. 왜? 다시 한번 장가가니까….” 50년대에는 화장실에서, 70년대에는 병풍 뒤, 90년대에는 신문지로 가리고 웃었는데, 요즘은 대놓고 웃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내에 대해서 의존적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의존적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독립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의존적입니다. 사람이 사랑하고 있는 대상이 하나님이든지 사람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모든 이 세상에 있는 아름다움과 만족들을 통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욕망을 방치하다가 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언제 하나님 보고 아들을 달라고 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하는 것을 싫어하셨을까요? “아 귀엽구나.” 이삭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생각이 나고 도덕적인 가치가 생각이 나는 겁니다. “아 나는 마른나무와 같이 아무 희망이 없는 나이에 주님이 기적으로 이 아이를, 핏줄을 주셨구나. 언약의 백성을 하나님이 끊어버리지 않으시려고 하나님이 뜻을 세우셨구나. 너무 감사하다.” 이삭을 볼 때마다 언약의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 날 통해서 언약 백성의 무리를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의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관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아름다움의 원체이신 하나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삭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의 마음을 꽉 채우는 것은 나도 자식이 있다는 생육적인 즐거움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 넘는 도덕적인 아름다움이 자기를 채우는 것입니다. 사라가 아이를 낳고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었을 때, 아브라함이 “나는 오직 하나님만 사랑해. 이까짓 게 무슨 소용이야.” 하면서 아이를 발로 뻥 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깡패 같은 아브라함이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에 대한 반복적인 ‘좋아함’ 속에서 이 아이가 궁극적 사랑의 대상이 되어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죽여서 바쳐라.” 하셨던 것입니다.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많은 즐거움을 얻는 것,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모두 소진시키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염려와 근심, 그런 것들로 소진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혼이 아름다워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즐거움의 근원을, 맛있는 것을 먹고, 예쁜 옷을 입고, 큰 집에서 살고, 돈 많은 형제한테 시집가고, 예쁜 자매한테 장가가서 사랑에 빠지는 것, 미래가 보장된, 출세가 보장된 직장에 붙는 것, 이런 것들에서 인생의 기쁨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가치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영혼이 망가집니다. 그 모든 것을 뛰어 넘는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관조하면서 살수 있어야 합니다. 즐거움의 원천 자체를 그런데서 찾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C.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하라
그래서 세 번째로 영혼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내 모든 기쁨이 하나님께 있도다.” 이렇게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도처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도덕적 미감이 그러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성이 진리를 굳게 붙들고, 그 광명의 빛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미감이 도덕적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도처에서 그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성이 진리를 붙들고, 그 진리에 영향을 받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진리를 붙들어서 이성이 그 진리의 빛 아래 있어야 그런 도덕적 아름다움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관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각한 아름다움을 우리 안에서 해석을 할 때, 즉 자연적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통해 도덕적 아름다움을 느껴서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에서 해석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여기에는 특히 이성이 많이 개입을 하게 됩니다. 지성과 애성이 다 개입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이성이 진리의 밝은 빛 아래서 판단력의 유지하느냐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미감능력을 가지고 자연적 아름다움에 너머에 있는 도덕적 아름다움, 두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고,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서 내가 충분히 즐거워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이 진리를 굳건히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의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다윗처럼 벌건 대낮에 목욕하는 여자를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한다든지, 영혼이 아름다운 자매들은 내버려 두고 얼굴 고친 자매들에게 혹하고 빠져 든다든지 하는 이런 바보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정신적 장애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말입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장애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사람의 딸들하고 결혼을 해서 마지막에 뭘 가져왔습니까? 자신의 영혼도 파괴되고, 가문도 파괴되고, 그리고 어마어마한 홍수가 들어와서 결국은 거기에 감염된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런데도 거기에 눈이 머는 것입니다. 육욕에 매여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비참한 삶입니까? 그것을 통해서 마지막에 얻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변화무쌍한 이 세상에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기업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환란이나 위협이나 적신이나 칼, 그리고 죽음과 이 세상의 모든 두려움의 공포가 이길 수 없는 가장 완전한 기업,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 그것을 관상하고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그 아름다움의 감각으로 그것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이고 특권입니다.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우리들만이 그것을 누리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110년 전 사람입니다. 아내가 있었는데, 아내가 늘 병약했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아내가 먼저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이 먼저 돌아가셨습니다. 아직도 50대 중반 나이에 이 세상의 모든 고단한 삶을 접고 주님께로 갔습니다. 그의 삶은 정말 험난한 인생길이었습니다. 그는 비록 내세울 학력이 없었지만, 탁월한 지성을 소유하고 아름다운 목회를 했습니다. 이런 목사님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예배시간에 사람들이 거짓말로 “불이야” 하고 소리 지르는 바람에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교회 건물 2층이 주저앉아서, 상당히 많은 수의 사람이 깔려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목사님은 우울증까지 왔습니다. 통풍이 와서 무릎을 펼 수 없을 정도의 고통스러운 밤을 지내면서 어느 날은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밤마다 악마가 나의 뼈마디를 후벼 팝니다.” 그런 속에서 고난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마지막에 운명하시면서 아내의 손을 붙들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여보 나는 일생 동안을 그분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다오.”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정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유언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며 하나님을 인해 행복해 하고 즐거워하면서 살아갈 때,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고난과 행복 사이의 경계, 시련과 평탄한 길의 경계선을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이 흔들 수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상 속에서 세상이 흔들 수 없는 주님의 사람이 되어서 어두운 세상을 딱 한 번만, 불꽃처럼 확 폈다가 살아지는 게 인생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眞善美
5. 영혼의 아름다움과 사랑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
Ⅰ. 본문의 배경
오늘 이 시간에는 영혼의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들이 읽은 본문의 배경을 잠시 살펴봅니다. 이때는 다윗이 사울에 박해와 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후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환난과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실 때에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찬 상태에서 주님께 경배와 찬송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한번도 왕이 되겠다고 주님께 부탁드린 적이 없었지만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신 하나님이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시기하는 사울의 의해 끊임없이 추격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며 그야말로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가시밭길과 같은 인생의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셔서 기름 부은 이 다윗을 고난으로 가득 찬 가시밭길을 걷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틀림없이 하나님이 그 모든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이 다윗의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아름다운 살을 사는 것을 훈련시킴으로서 많은 백성들을 끌어안고 그 백성들의 목자로 살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섭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가운데 살고 불순종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시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사람들을 항상 평탄한 길로만 인도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누군가 고난을 받는다고 그럴 때 모두 죄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영혼이 지극히 아름다운 다윗도 하나님이 그를 연단하기 위해서 가장 고난이 가득 찬 가시밭길을 걷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두 아름다움의 교통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난 시간에 원래는 하나님 안에 있는 한 아름다움이었는데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 안에 있는 하나의 아름다움을 자연적 아름다움과 도덕적 아름다움으로 이 창조세계에 투영시키셨다고 배웠습니다. 이 다윗은 바로 이 고백이 영혼의 참 아름다운 상태였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환난과 시련 속에서도 늘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름다운 영혼으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가 승리의 삶을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승리하게 하는 모든 삶의 위대한 힘은 인간의 꿈, 야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는 데서 큰 힘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끊임없이 그 하나님을 관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Ⅱ. 두 아름다움의 교통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이 세상에 자연의 이 탁월한 아름다움은 그 아름다움만을 즐거워하고 머물게 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그 너머에 있는 도덕적 아름다움을 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시고 거기에 아름다움이 깃들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도덕적인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궁극적으로는 이 두 아름다움의 최종적인 원인이신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도덕적 아름다움을 관상하고 그 자연과 도덕을 이해하는 가운데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직시할 때 인간은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게 되니까 아름다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름다우니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후자가 더 진실에 가깝습니다. 젊은이들이 요즘 계속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여러분들에게 죄송합니다만 저도 죄송하기는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손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참 이상합니다. 왜 젊은이들이 어떤 자매는 옆에 계속 있어도 아무런 좋은 느낌이 안 들고 또 어떤 자매는 살짝 지나가다가봤는데 사랑에 빠진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름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름다울 때 우리들이 즐거워하고 싶어 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바로 사랑하는 것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통해 도덕의 아름다움을,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신 원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많이 발견할수록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름답게 되면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제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편지를 많이 받는 사람입니다. 매주 몇 통씩 많이 받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여태까지 받은 편지 중에서 제일 기분 좋은 편지가 있습니다. 누가 보냈는지 대게 나에게 오는 편지는 이름 불명으로 오는 편지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쓴 글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목사님” 여태까지 들어본 말 중에서 기분이 제일 좋습니다. 여러분도 다음에 저에게 편지를 쓸 때는 그렇게 해주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일까? 누가 이렇게 물으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기 때문에? 아! 그렇습니다. 이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성도의 가장 큰 의무는 무엇인가 하면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많이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머리를 주신 이유는 디자인상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이 머리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많이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많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지식의 빛과 사랑의 열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름다움이 교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Ⅲ. 영혼의 아름다움과 사랑
그러면 이제 영혼의 아름다움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A. 사랑으로 가득찰 때 아름다움
우선 첫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영혼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그때 영혼이 가장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인간이 인간이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 존재가 아름답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소유했는가, 높은 지위에 있는가, 젊은가, 늙었는가, 혹은 병에 걸렸는가, 건강한가, 이런 신체적인 조건이나 정신적인 조건에 의해서 그 사람의 아름다움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 그 자신의 정신과 육체도 아닌 그가 붙들고 있는 이 무엇에 의해서 그 사람이 아름다워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매우 틀린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이렇게 아무리 붙들고 있어도 이것이 이 사람의 존재의 일부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있는 것이고 그 사람도 있는 것인데 있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없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혼이 아무리 세게 붙들고 있어도, 부서지도록 붙들어도 둘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붙들고 있는 이것은 붙든 그 사람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조건에 있는 사람인데 좋은 옷을 입으면 그 사람이 아름다워 보이고 자기의 존재도 아닌데 물질을 소유하고 있으면 그 사람이 아름다워 보이고 똑같은 사람인데도 높은 지위에 있으면 그 사람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모두 다 거짓 표상입니다. 그런 표상 속에서 매어 살던 삶이 예수님 없이 살던 삶입니다. 그런 표상에 매어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들이 주님을 모르는 삶을 살았고 너무나 긴 세월동안 그 헛된 것을 찾아다니면서 살았습니다. 자기도 이렇게 붙들며 자기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 올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다 헛된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육체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육체의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도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노래했습니다. 인간의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는 것입니다. 많이 늙었어도 그 사람의 존재가 젊고 싱싱한 청년들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정말 다 찢겨서 이제 곧 육신의 껍질을 벗고 운명할 처지가 된 병든 몸을 가진 사람들도 건강하고 튼튼한 사람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왜? 영혼이 아름다움이 그것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가장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선교사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거의 생각하는 수준이 짐승 같은 사람인데도 그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그들의 발을 씻기면서 그들이 참 신자가 되기를 우리들이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모두 사랑하시지만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은 신학적으로 틀린 이야기고 심리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틀린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는데 예수님을 믿고 살아온 인생의 기간이 얼마든지 간에 항상 동일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온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실 때가 있고, 적게 사랑하실 수도 있고, 심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것처럼 의심이 될 정도로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는가 여러분들이 젊고 건강할 때에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늙었을 때, 그럼 지위에 있을 때, 아닙니다. 그런 것들과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았던 때는 영혼이 아름다웠을 때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여러분들의 사랑을 받는 여부가 하나님 앞에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B.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이제 오늘 매일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그게 무엇인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잠자리에 누우면서 우리 집사람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여보, 사랑이 뭐야? 따뜻하고 친절하게 배려해주는 것, 뭐 그렇게 얘기하면 밤새도록 얘기해도 수없이 나옵니다. 사랑이란 마주 쳐다만 봐도 즐거운 것, 사랑이란 눈물의 씨앗, 사랑이란 많이 한 사람이 나중에 상처받는 것, 사랑이란 수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실에서 선생님이 애들아, 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지? 그러니까 애들이 물이라고 그랬습니다. 한 아이가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선생님,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되냐고요? 그래,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되지? 다들 물이요, H2O 요. 하고 얘기하는데 애 혼자만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오지요. 그게 광고카피에 쓰면 어울리는 말이지만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되는가를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는 빵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랑이 무엇인가? 여러분 가운데는 교리 반을 열심히 하신다고 그러는데 더 열심히 하십시오. 교리반 정도 마치면 사랑을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안 됩니다. 제가 한번 얘기해보겠습니다. 해보십시오. 사랑이란 세 가지로 나뉘는데 긍휼과, 자비와, 오래 참음입니다. 그것도 틀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는가? 하고 물을 때는 그런 대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무엇인가? 그렇게 애기할 때는 그렇데 대답하면 안 됩니다. 여태까지 제가 설교하다가 중요한 것이 나오면 몇 번 반복했습니다. 두 번, 오늘은 세 번을 반복하겠습니다. 사랑이란 어떤 대상을 목표로 정해놓고 그것을 계속해서 즐거워하려는 영혼과 마음의 움직입니다. 한번 했습니다. 두 번, 사랑이란 어떤 대상을 목표로 정해놓고 끊임없이 그것만 즐거워하려고 애쓰는 마음과 영혼의 움직입니다. 사랑이란 어떤 대상을 목표로 정해놓고 그것만 즐거워하려고 하는 마음과 영혼의 일체의 움직임을 가리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사랑은 그런 것인데 그렇게 어떤 대상을 목표로 정해놓은 그 목표가 세상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세상을 목표로 정해놓았으니까 마음과 영혼이 그것만 즐거워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세상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에서 나갔지만 세상 사랑입니다. 그럼 자식 사랑은 무엇일까요? 자식을 거기에 놓고 자식이 최종적인 목표인 것처럼 놓고 그 자식을 인해 그 자식에 대해서만 즐거움을 가지려고 하는 마음과 영혼의 모든 움직임이 바로 자식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유일한 목표라고 놓고 그 하나님에게서만 즐거움을 얻으려고 애를 쓰는 것, 그렇게 애를 쓰는 마음과 영혼의 작용이 하나님 사랑, 곧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 까리따스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신자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로 그 사랑의 정체가 하나님에게서만 끊임없이 즐거워하려고 하는 것, enjoy god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C. 사랑할 때: 영혼과 마음의 작용
사랑할 때 영혼과 마음의 작용을 살펴보면 그렇게 하나님을 최종적인 목표로 놓고 하나님 안에서만 즐거움을 찾으려고 마음과 영혼이 애쓸 때, 그때에 그 영혼은 가장 아름다운 상태가 되고 마음에는 선한 의지가 꽉 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기도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는 하지만 의무감만으로도 충만한 기도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기도생활이 진짜로 우리에게 이 신앙생활에 활력을 주는 영적인 공급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성향이 바뀌어서 기도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기도하는 그 시간 그때가 가장 즐겁다
이 세상 걱정 근심에 얽매인 나를 부르사
내 진정 소원은 주 앞에 낱낱이 바로 고할 때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즐거움이 꽉 찰 때, 그때 우리들이 기도하게 되듯이 똑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면서 그것이 내 영혼에 주는 즐거움들을 깊이 맛보게 되면 그 다음에는 내가 스스로 하나님이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끊임없이 생각이 나게 만드는 힘이 사랑 안에 있습니다.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무엇을 봐도 그 궁극적인 사랑의 대상을 자꾸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 대상은 하나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아름다움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로 그렇게 궁극적인 즐거움의 마지막 목표인 하나님을 계속해서 생각하게 될 때 특별히 하나님 중에서도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될 때, 그때 우리가 우리의 영혼이 아름다운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혼이 아름다울 때 마음에는 선한 의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선한 의지가 꽉 찬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순종하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매우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유익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반대로 그렇게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들을 사랑한다면 즉 궁극적인 즐거움을 또 다른 것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 매우복잡한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영혼은 이렇게 만져지는 물리적인 형체가 아닙니다. 영혼은 그야말로 영적인 것입니다. 영혼의 본질은 다양한 경향성과 힘들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게 영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즐거워하게 되면 이 영혼의 힘과 경향성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도록 방향이 한 방향으로 모두 정렬이 됩니다. 그 정렬된 영혼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마음으로 투사가 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아주 질서 있는 마음이 됩니다. 생각은 또렷해서 사물들을 잘 판단하고, 정서는 항상 하나님의 정서를 반영하고, 의지는 하나님의 뜻대로 자신도 살고 싶어 하는 소원을 갖게 합니다. 그러니까 마음도 가지런하게 정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질서 있는 내면세계의 상태입니다. 그런 질서 안에서 영혼은 비로소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한 집안에 애들 둘하고 엄마, 아빠 네 식구가 삽니다. 그런데 그 집안에 아버지는 성실하게 가서 돈을 벌어옵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엄마는 그야말로 조신한 가정주부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사랑하고 아이들을 사랑하고 집을 잘 꾸려나갑니다. 아이들 둘은 부모님들을 깊이 존경하고 열심히 공부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이 집안에 고통이 있습니다. 돈이 없습니다. 아버지가 열심히 벌어서 가까스로 먹고 살지만 돈이 없으니까 힘이 듭니다. 그런데 대박이 터져서 돈이 막 벌립니다. 그 돈이 집안에 막 들어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돈을 잘 버니까 아빠가 변한 것입니다. 바람을 자꾸 핍니다. 엄마는 돈이 많고 시간도 남으니까 가정을 돌보지 않고 사교모임에 나가고 개꾼들과 만나서 생선회나 먹으러 다니고 그렇게 합니다. 남편이 열심히 가서 일할 때 혼자 가서, 애들은 집안이 그 꼴이니까 학교가 끝나도 집에 안 돌아오고 밤새도록 PC방에서 놉니다. 용돈을 많이 주어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립니다. 돈이 많아져도 왜 이 가정에 행복이 깨졌습니까? 질서가 깨트려져서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아버지의 자리에 있고, 엄마가 엄마 자리에 있고, 자식이 자식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이게 깨트려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의 원인이 되었던 결핍의 문제가 해소가 되었는데도 그 가정에 쉼이 없는 것입니다.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그 다양한 경향성과 힘들이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목적, 내가 지금 살아있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 선한 목적에 맞도록 가지런하게 정렬되어 있고 그것이 마음으로 투사되어서 질서 있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질서 있는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하면서 머리를 벽에다 쥐어박고 그렇지 않습니다. 왜 항상 모든 것들이 가지런하니까 살아온 모든 삶들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가지런하게 움직이면서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저에게 설교자로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그렇게 1-2년 수많은 설교를 원고 없이 토해놓는데 목사님의 하신 말씀들이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면서 그런 위험이 없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이나 열심히 하십시오. 남 생각하지 말고, 안 일으키지 않습니까? 왜 그럴까요? 이 속에서 신학과 신앙적인 틀 속에서 뭐가 나오든지 그것을 걸러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설교할 때뿐만 아니라 열린 공간에서 차 마시면서 성경에 관해서, 신앙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도 충돌을 일으키면 안 됩니다. 이 틀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이렇게 막 쏟아져 나와도 그 틀 속에서 나오니까 하나가 이룬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럴 때 만약에 영혼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마음과 질서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면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많은 삶들이 안 미칩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죄 가운데 빠져보십시오. 죄 가운데 빠진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수많은 모순입니다. 그것들이 싸우고 뒤엉키면서 인생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 안에서 질서가 있게 됩니다. 그 질서 안에서 인간은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렇게 즐거워하고 끊임없이 그 하나님이 최종적인 목표가 되어서 그분에게서만 즐거움을 얻으려고 이렇게 계속해서 영혼과 마음이 움직이려고 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그것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가 하면 영혼의 힘과 경향성들이 하나님만 사랑할 때는 한쪽 방향으로 다 정렬이 되어 있지만 이 속에서 다른 것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하면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또 궁극적인 목표로 또 다른 것을 놓고 그것을 끊임없이 누리려고 마음과 영혼이 애를 쓰면 힘과 경향성들의 일부가 방향이 바뀝니다. 그래서 바뀐 것들이 이 안에서 충돌을 일으킵니다. 그 고백이 바로 로마서 7장에 나오는 사도의 고백입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리요” 탄식합니다. 그게 바로 정렬되지 않은 영혼의 힘과 경향성들의 고통입니다.
이게 마음으로 투영이 됩니다.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데 또 한쪽에서는 강력하게 자기 욕망을 따라 살라고 강하게 요구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욕망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 두개의 경향성이 영혼 안에서 충동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그렇게 되면 이제 머리가 복잡하게 되는데 영혼이 그렇게 복잡해지는데 그 복잡한 상태가 마음으로 투영이 됩니다. 그러니 이게 그림과 그림이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이상한 그림이 한꺼번에 겹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은 바로 이것을 사용해서 행동을 하는 공장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뒤범벅된 것을 주물럭거려서 행동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가서는 이 말하고 저기에 가서는 저 말합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행동했는데 나중에 가서는 자기를 쥐어박습니다. 그때 ‘너 왜 그랬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바보 같은 행동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영혼은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마음은 물론 정신 모든 기능은 물론 육체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래서 영혼이 곤고해지게 되면 육신이 시름시름 병듭니다. 이상이 옵니다.
몇 년 전에 일본 사람이 ‘물의 신비’라는 책을 썼습니다. 컵에다 물을 담아놓고 거기에다가 글자를 써났습니다. 사랑해, 보고 싶어, 네가 제일 좋아. 이런 것, 꺼져버려, 죽어버려, 넌 싫어, 넌 미워. 이렇게 써 붙여났습니다. 그렇게 놓고 그 물을 얼립니다. 얼리면 얼음이제 따뜻한 장소에서 녹을 때 딱 2-3초 동안 그 얼음이 물로 변하기 직전에 그 물의 결정체가 나타납니다. 현미경으로 찍었는데 그런데 사랑해, 네가 좋아, 이렇게 써 붙여놓은 것은 물의 입자가 거짓말같이 아주 정확하게 눈꽃모양으로 육각형입니다. 그런데 싫어. 꺼져버려, 나쁜 자식 이렇게 써 붙여놓은 것은 이게 형체가 반듯한 육각형이 없고 다 일그러졌습니다.
그러면 하나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의 몸이 대부분이 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논리입니다. 나쁜 자식, 난 네가 싫어, 거지같은 놈, 이런 식으로 욕을 하면 이 물의 입자가 그렇게 변형이 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과학이 다 규명할 수 없지만 육체의 건강이 뭔가 영향을 줄 것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밖에서 들어가는 인간의 언어, 생각 없이 쓴 글자 같은 것들도 그렇게 물리적인 몸에 영향을 준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 몸에 궁극적인 주인이 되는 영혼의 상태는 얼마나 더 많이 영향을 주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래서 여러분 집에서 생활할 때 많이 안아주십시오. 강아지만 안고 다니지 말고 강아지는 안 안아주어도 됩니다. 사람을 안아주십시오. 아이들을 말입니다. 아이들을 예쁘다고 이렇게 꼭 끌어안고 사랑해. 그럴 때, 그 속에 있는 물이 얼마나 출렁거리겠습니까? 배나 나와 봐, 물이 더 많이 차있지. 그래서 그렇게 사랑을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것을 잘못합니다. 그런데 고쳐야 합니다. 집에 가서 가족들을 모두 한번씩 끌어안으십시오. 왜 대답을 안 하십니까? 아멘, 개 끌어안지 말고 가족들을.
그러니 밖에서 들어가는 언어나 터치도 그렇게 영향을 준다면 그러면 그런 것들은 우리 몸과 이 마음의 주인이 아닙니다. 이 주인은 영혼입니다. 영혼이 그렇게 모순 된 상태에 있게 될 때 그것은 그 인간을 계속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그렇게 비춥니다. 지성은 어두워져서 분간을 잘 못합니다. 총명은 흐려져서 판단이 불가능합니다. 정서는 거짓된 욕망에 불붙어서 충동적이 됩니다. 의지는 이 지성에 굴복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족의 반란이 일어나듯이 정서와 지성과 의지와 질서가 없이 날뛰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영혼의 추루한 상태가 마음에 투사가 되어서 어떻게 하든지 인간은 그 마음을 움직이면서 공장처럼 거기에서 행동을 만들면서 살아가는데 그렇게 나오는 제품이 어떤 제품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무슨 단순한 복을 받는가, 마는가의 문제 이전의 문제입니다. 그 뜯물 통 위에다 계속 생수를 부어봐야 뜯물이지, 그런 식의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계속 축복을 부어주신다고 하면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이 영혼의 상태가 그렇게 되어서 마음이 수많은 모순으로 가득 찼는데 그게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것을 먼저 고치고 버려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해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행복을 모르는 그런 비참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맨 처음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몰랐을 때 바로 그런 혼란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지 않을 수가 없어서 믿게 되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되니까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 버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비로소 쉼을 얻고 기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바로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꽉 차있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그 하나님께만 붙어 있으려고 하는 방향으로 마음과 영혼이 작용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때문에 그 안에서 가장 질서 있는 삶을 살고 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그 행복을 왜 잃어버렸습니까? 결국은 사랑의 문제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하나님을 목표로 놓고 그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하려고 하는 마음과 영혼의 작용이 이게 변경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들을 그렇게 즐거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두개가 안에서 충돌을 일으키면서 인간의 영혼이 평안을 잃어버리고 수많은 고뇌와 그리고 고통 속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Ⅳ. 사랑과 즐거워함
그러나 사랑과 즐거워함에 대해서 좀더 상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A, 즐거워함과 사용함
즐거워함과 사랑함, 이 두 가지를 나누어서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로 즐거워한다. 라고만 이해하지 말고 그것보다 좀더 발전시켜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나.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목표로 여기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용하는 것은 바로 그 즐거움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가을이 되면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게 감나무입니다. 감나무를 보면 이파리가 다 떨어지고 났는데도 감은 거기서 영글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볼 때 아름답습니다. 자연적 아름다움입니다. 그것을 보면 마음이 싸늘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난 뭘 열매를 맺으면서 살았나. 바로 그런 것을 생각하라고 하나님이 자연적 아름다움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게 됩니다. 한번은 강원도 쪽에 무슨 일인지 기억은 안 나지만 가게 되었습니다. 혼자 차를 타고 가는데 가다가 차를 멈추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을이 깊었는데 이파리가 하나도 없는 나무에 감이 아주 주렁주렁 열렸는데 딱딱한 것이 아니라 말랑말랑해진 게 달렸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떨어진 것이 터져버렸습니다. 어떻게 그때까지 안 떨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없습니다. 사실 나라가 주인이지만 그것을 따먹으면 안 되는데 하나 먹고 싶어서 이렇게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그냥 쳐다만 보고 따먹으면 안 되지만 그래도 돌맹이를 하나 던졌는데 안 떨어졌습니다. 주님의 뜻인가 보다 하고 그냥 갔습니다. 제가 즐거워하는 것과 사용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평생 잊혀지지 않게 가르쳐드리려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손을 쭉 뻗었는데 손이 안 닿습니다. 그러면 두 번째 방법이 무엇입니까? 뛰는 것입니다. 뛰는데 끝이 살짝 닿습니다. 이게 감질이 나. 그런데 감나무에서 눈을 떼고 사면을 두루 살피며 무엇을 찾을까요? 그렇습니다. 작대기를 찾습니다. 작대기를 찾는데 짧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싫습니다. 왜냐하면 그 위에 더 많이 달려서 그것까지 따야지 되니까. 짧은 것도 있고 또 긴 것도 있는데 또 낚싯대 같은 것은 안 됩니다. 딱 봤더니 기가 막힌 기다란 사람 한 키 정도 되는 막대기가 있어서 쥐고 옵니다. 자, 이 사람은 막대기를 사랑할까요, 안 할까요? 사랑 안한다고?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럼 내가 물어보겠습니다. 아니! 도대체 왜 그렇습니까? 그럼 막대기를 가지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여보시오. 왜요? 그랬더니 그 막대기 좀 빌려주시오. 그러면 아! 그러시죠. 그러고 빌려주겠습니까? 그 막대기 뭐 하려고? 갖고 놀려고. 그럼 빌려주겠습니까? 사람이라도 구하려고 빌리면 빌려주겠지만, 그런데 갖고 나 갖고 놀려고 그러니까 네가 가서 구해 임마! 그리고 갈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이 나타나서 여보시오, 막대기 좀 빌려주시오. 날도 추운데 여기 모닥불에다 집어넣으십시다. 그럼 그러시지요, 그러겠습니까? 웃기지 말라고. 내놔. 그러면 한바탕 싸우고라도 가지고 갈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까, 안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감나무 밑에 가서 그 막대기를 끌어안고 너무 좋다. 이것을 내가 구하다니. 이제 집에 가자. 그러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막대기를 어디다 쓰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감을 따려고, 그래서 따서 하나도 안 남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획! 버립니다. 토사구팽입니다. 이제 다 끝난 것입니다. 그때 다 끝났는데 저쪽 사람이 와서 여보시오. 그 막대기 좀 빌려주시오. 그러면 뭐라고 합니까? 안된다고 할 것입니까? 가지고 가십시오. 이거 잘라서 모닥불에 넣으려고 한다고 하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왜? 이제 이용이 끝났습니다. 자, 그 막대기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감을 따는 게 그게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용한 것은 어느 정도는 즐거워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무슨 장인은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 한석봉은 붓을 안 가린다. 그거 전부다 글씨 못쓰고 일 못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이야기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사실 솔직히 돈도 돈이지만 너무 바빠서 사실은 책을 사러 나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글을 쓰는데 어느 날 어느 교수님 몇 분이 내 서재에 와서 그래서 같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신학공부 이야기를 하다가 내 사전을 보시더니 목사님, 아직도 이 사전을 쓰십니까? 그래서 나도 그래도 구약을 했다는 사람인데 이 사전 옛날 사전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산지가 20년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이 사전은 이미 다 물 건너갔고 그 후에 연구가 더 많이 되어서 더 좋은 사전이 많이 나왔다고 하기에 그 사전이 무엇인지 적어달라고 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전을 20년 만에 개비했습니다. 너무너무 비쌉니다. 한권에 제일 싼 게 2-30만원 합니다. 왜냐하면 그 책이 학자들이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연구를 해도 전 세계에서 사가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 안 됩니다. 그렇게 엄청나게 비싸게 팝니다. 그것을 갖다놓고 보니까 이게 20년 전 사전하고 완전히 틀립니다. 그 동안에 얼마나 연구가 이루어졌는지 보십시오.
그 진짜로 감을 따려는 사람은 아무 막대기나 가져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사용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집착을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뒤바뀌는 법은 없습니다. 뒤바뀌는 것이 거기에서 이제 인간의 모든 비극이 초래되게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을 뒤바꾸면서 인간의 모든 불행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나 이외에 모든 존재는 오직 둘로만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어떻게 나누어지는가 하면 즐거워해야 할 것과, 그 다음에 사용해야 할 것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특히 우리들이 사물 같은 것은 더 철저하게 사용되는 쪽에 많이 치우쳐있다고 보지만 사람 같은 쪽은 상당히 많이 즐거워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임마누엘 칸트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을 사귀되 수단으로 생각하지 말고 목적으로 생각하여라. 사람을 사랑할 때 이 친구를 어떻게 활용을 해볼까? 이러고 사귀지 말고 사귀는 그것이 사귀는 목표인 것처럼 그래서 서로를 향해 즐거워하고 사람을 사귀라. 그 이야기입니다. 그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열린 교회를 등록하니 환영합니다. 정말 환영합니다. 돈이 많다면서요? 그러면 되겠습니까? 열린 교회 등록했습니다. 아! 환영합니다. 정말 환영합니다. 젊으시군요? 힘세시군요. 교회 청소 많이 하시겠군요. 그러면 되겠습니까? 등록했습니다. 아고! 환영합니다. 별로 다 늙으셨군요. 돈도 없다면서요. 그러면 되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목적인 것처럼 해야 합니다. 저 돈이 없거든요. 아! 그러지 않습니다.
너의 영혼 통해 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을 찬양 오 할렐루야
그렇게 생각해야합니다. 사랑이 그런 측면을 안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용입니다. 그런 것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충분히 인정을 하지만 거기가 종착역은 아닙니다. 우리가 아내를 많이 사랑합니다. 남편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게 남편과 아내가 교회 자체를 위해서 사랑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은 다른 것들에 비해서는 즐거워하는 것이 되지만 그렇게 우리들이 서로의 교제를 즐거워하고 교회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은 결국은 더 큰 즐거움, 최종적인 즐거움의 대상이신,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 자신을 향한 즐거움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모이는데 서로 사랑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으면 그러면 교회가 교회 꼴이 되겠는지, 그렇지 않습니까?
가정의 각 식구가 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그러고 내게 있어서 엄마는 아무 것도 아니야. 아빠는 아무 것도 아니야. 그래 보십시오. 그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온전히 구현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도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랑이 통일체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우리들이 즐거워해야 할 대상과 그 다음에 사용해야 할 대상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B. ‘나’이외 모든 사물: 그 구분
그럼 이제 여기서 더 어려운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면 사랑이라는 것은 어떤 대상을 목표로 정해놓고 그것을 끊임없이 즐거워하려고 하는 마음과 영혼의 움직임이 사랑이라는 정의를 내렸는데 그러면 도대체 이렇게 즐거워하는 것이 뭐라고 물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 enjoy 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enjoy god 할 때 하나님을 즐거워함, 그럴 때 그 즐거워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 즐거워한다고 하는 최종적으로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즐거워한다고 하는 그 즐거움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 즐거움의 대상이 하나님뿐이 라고 할 때 그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그 즐거움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 반복합니다. 즐거워한다고 하는 그것은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을 사용해서 그 위에 있는 것을 더 이상 즐거워할 것이 없을 때. 다시 반복하겠습니다. 진정으로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사용해서 그것 말고 다른 것을 즐거워할 것이 없을 때 그것이 끝일 때, 그것이 진정으로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막대기를 얻어서 막 즐거워했지만 감을 딱 딴 다음에는 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성도들을 사랑하지만 그래서 즐거워하지만 그 즐거움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한 방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은 그 하나님을 가지고 뭘 하기 위해서 즐거워하는 것입니까? 없습니다. 그것을 가진 것이 무엇인가 하면 존재의 질서를 깨트린 사람입니다. 이게 악한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은 어떻게 하고 싶은가 하면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최종이 아니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막대기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이용해서 다른 것이 더 할게 있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 사랑의 정체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참된 즐거움이 없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하나님께 잘 보여서 그것을 이용해서 무엇인가 그 이상의 것을 즐거워할 것을 얻으려고 한다면 그 모든 신앙생활을 아무리 가지런해보여도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아첨이지 진정한 의미의 경외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둘로 나누어집니다. 사용해야 하는 대상과 그 다음에 즐거워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즐거워해야 하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1부에서는 여기까지만 했는데 시간이 여러분에게 조금 더 있으니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를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우리는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궁극적인 즐거움의 대상일까? 사용의 대상일까? 대답하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될까요? 굉장히 망설여지실 것입니다. 그러나 상처받지 마십시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우리도 사용하는 대상일 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그럴 것입니다. 목사님, 상처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도 결국은 사용할 뿐이라니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셔서 누구를 끝까지 즐거워하시려는 것입니까? 대단합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우리도 하나님에게 사용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즐거워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만물이 그에게 말미암고 그를 통하여 마지막으로 그분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런데 너무 섭섭해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금방 알게 됩니다. 자,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정말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제가 여러분들을 깊이 사랑을 하는데 그게 내가 하나님을 올바로 사랑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여러분들이 내 사랑을 거절하겠습니까, 거절하지 않겠습니까? 거절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람의 사랑일 뿐입니다.
그러면 내가 여러분들을 사랑하는데 그 사랑이 내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데 방해가 된다면 여러분들은 내게 사랑받는 것이 좋아도 그 사랑을 거절해야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면 그 사랑하는 당사자가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는데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즐거움의 끝이면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보고 뭐라고 그러셔야지 됩니까?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십시오. 저 같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 것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시는 것의 방해가 되다니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성품상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면 결론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여기가 중요합니다.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는가 하면 우리도 하나님에게 사용의 대상이지만 두 가지로 위로를 받을 수 있는데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순전한 도구로만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 이용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도 우리를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어느 정도는 우리를 마지막 목적인 것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런 것들이 구속 역사에서 수시로 보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다 버리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 하나님이 정말 나만 사랑하시는 게 느껴집니다. 위로를 받으시고 두 번째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것도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시는 방식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유익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만물이 하나님 안에 있었는데 다 휘돌아서 마지막에는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갑니다. 존귀와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성삼위 하나님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나머지는 다 사용하는 것입니다.
C. 즐거워할 대상: 성삼위 하나님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바뀌게 되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배를 타고 항해를 합니다. 배가 짐을 가득실고 출발할 때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그 배를 이용해서 그 목적지까지 가야지 되는데 그러나 관심이 온통 배에 팔렸습니다. 아! 푹신거리는 쿠션도 좋고, 아! 이 바닥 봐! 나무네. 아! 색깔은 어디서 칠했나. 아! 갑판에 나가니 엄청 크네. 조종실은 비워났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아! 좋다. 그런다면 그가 목적지에 도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옛날에는 택시를 타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다닐 때, 늦게까지 기도회를 하고 우르르 내려왔는데 넷이 내렸는데 셋이 방향이 맞고 하나는 정 반대인데 자, 빨리빨리 가자하고 택시를 타고 한참 가다가보니까 길 건너에서 타야할 친구가 거기 앉아있기에 아니 밤도 늦었는데 막차도 끊어질 텐데 너 여기가 아니라 저쪽이잖아. 알아. 그런데 왜? 차는 계속 달립니다. 택시잖아. 그 친구는 한참 거꾸로 내려와야 됩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절대로 그렇게 되면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들이 즐거워해야 될 궁극적인 대상은 성삼위 하나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나무 열매가 없어도 우리에 송아지 없어도 외양간에 양이 없어도 그 하나님을 한없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자신이 나의 즐거움의 대상이기 때문에,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인해서 한없이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태어나고, 죽고, 흘러가고, 소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외에 무로부터 창조된 모든 것들은 그런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그것이 영원히 변하지 않고 스스로 오래도록 존재할 것처럼 거기에 인생에 모든 것을 거는데 인간의 비극이 거기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보십시오. 그렇게 태어나고, 죽고, 흘러가고, 소멸하는 끊임없이 출렁거리며 변천하는 여기에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궁극적인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면 이 변천하는 것과 함께 우리의 마음이 즐거워했다가 슬퍼했다가, 다 얻은 것 같다가 잃은 것 같다가 이렇게 출렁거리면서 살아가야지 됩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게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되지 않고 이 세상에 일어난 각종의 변화와 그 다음에 출렁거리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는 진정한 안식과 쉼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만을 사랑해야지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목표로 놓고 그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려고 하는 끊임없는 마음과 영혼의 작용입니다. 그 안에서 살아갈 때 인간은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고 신앙의 진정한 유익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이렇게 노래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망을 버려야 합니다. 다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참된 즐거움은 하나님 자신에게 있고 그 하나님이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끊임없이 즐거워하려고 마음과 온 영혼이 쉼 없이 움직이게 될 때, 바로 거기에서 최종적인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이런 삶을 살게 될 때 그에게는 삶과 죽음 사이의 경계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그렇게 큰 의미도, 또 헤어지고 만나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이런 깊은 복종의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런 것들을 초월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 주는 유익이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쉬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고 싶으셨던 그런 쉼입니다. 그 속에서 살아갑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입니다. 어떻게 생겼는지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해마다 말씀을 들어도 진력이 나지 않습니다. 가서 일년 동안 죽어라 농사를 지었는데 흉년이 들었습니다. 먹을 것이 도저히 일년 동안 될 수가 없습니다. 침통한 분위기에서 어떤 사람이 우리가 회개합시다. 그러자 한 사람이 일어나서 난 싫습니다. 우리가 뭘 잃어버렸습니까? 우리가 여기 농사가 잘되어서 배불리 먹으려고 대서양을 건너서 죽을 각오를 하고 여기에 건너왔습니까? 우리가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 예배하고 경배하고 싶어서 이 황무지 같은 땅에 왔는데 우리는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고 이제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즐거워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오히려 금식하지 말고 우리 모두 일주일동안 우리에게 도움을 준 인디언들을 초청해서 축제를 벌이자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감사했습니다. 이게 (?)감사절의 유례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저는 오늘 설교준비를 하면서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어제 밤에도 1시에 벌판에 나가서 하늘을 쳐다봤습니다. 어제 밤에는 별이 가득했습니다. 안 계신 곳 없이 계신 하나님이 안 주신 것이 없이 모두에게 주신 일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런 기도가 울려나옵니다. 하나님 우리의 잔이 넘치나이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고 나의 머리에 기름을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주님이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 살아있습니다. 충분합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사는 아름다운 영혼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眞善美
6. 영혼의 아름다움과 은혜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35:9)
Ⅰ. 본문의 배경
오늘 이 시간에는 영혼의 아름다움과 은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자면 본문은 탄원시입니다. 시인이 무엇인가 깊은 고난 중에서 괴로워하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다가 “내 영혼이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이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였음이로다.”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장면, 구원을 기뻐하는 장면을 오늘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면 참 행복하고 기분이 참 좋을 거야. 평탄한 길이 주어질 거야’ 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께 사랑을 받아본 사람으로서 난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데 주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결코 평탄한 길을 걸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늘 이 이새의 아들 다윗에 대해서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셨습니까?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여기까지는 하나님이 많이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내가 저를 안락하고 평안하게 하리라.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내가 저를 통해 나의 뜻을 다 이룰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고달프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랑을 받고 싶으십니까? 물어보잖아요? 이럴 때는 아멘! 해야 됩니다. 이 양반들아! 그런데도 사랑을 받고 싶으신가요? 아멘!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가치관의 문제가 대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참된 행복이 그냥 편안하고 안락한데 있다고 믿는 가치관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이런 사랑의 계획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전 21살 가을에 회심을 했습니다. 그런데 헤르만 헤세 같은 사람의 소설에 보면 청춘은 아름다워라. 또 이양아씨의 수필에 보면 청춘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말이라고 하는데 나는 안 그렇습니다. 너무너무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없이 청소년기와 청년기를 들어가면서, 우리들은 흔히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즐거움에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사색하는 사람들은 즐거울까요, 고통이 기다릴까요? 고통이 뒤따르지만 그래도 행복합니다. 사실 성립을 안 하는 것입니다. 저는 21살에 회심하기 전까지는 불신자였습니다.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한번도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난과 시련, 어린나이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한번도 돈 많이 벌면 행복하겠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오르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불신자였는데도 없습니다.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면서 그렇게 고통스럽고 무겁게 느껴졌던 것은 왜 살아야 하나. 과연 인생을 살 가치가 있는 것일까?
고등학교 졸업하고 회심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고민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진짜 살 가치가 있는 것일까? 누군가가 나에게 왜 살아야지 되는지 이유를 가르쳐주면 나는 그 사람의 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에 저는 저 나름대로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철학, 사상, 문학, 이것은 다 쓸데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 지금 제가 던지고 있는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거기 가까이까지만 가고 그런 문제를 왜 외면하고 사는가 하고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은 문학이 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이렇게 가는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면 될 수도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사상입니다. 그런데 근처까지는 가지만 그러나 마지막 그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가르쳐주지 못합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셔서 복음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아! 그렇군요. 하나님이셨군요.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이었군요. 그리고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던 나의 철학적 사유는 거기서 멈추었습니다. 생각 없이 여러분과 똑같이 침체되기도 하고 은혜도 받으면서 교회당에서 어울리면서 긴 세월을 보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궁금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내가 불신자였을 때 인생을 그렇게 치열하게 고민하던 것처럼 이 사람들도 이렇게 고민할까? 안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심오한 진리를 발견해서 안정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도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 뭘까? 생각 없이 사는 사람들처럼 느껴졌습니다. 교만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 속에서 정말 치열하게 사색하면서 참으로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사유하고 고민하던 그것들을 사실 교회당에 들어오면서 그렇게 사유하는 동지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나를 포함해서 교회에 오는 많은 사람들이 가치가 없는 것들에 대한 많은 사랑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가치관이 바뀌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 크신 사랑, 그것은 우리에게 뭘 의미하는지를 올바로 깨닫고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인생의 행복이 밥통에서 실컷 꿀꿀이죽을 먹고 햇볕이 따스하게 비추는 돼지우리 간에서 배를 드러내놓고 푹 퍼질러 자는 양돼지 같은 팔자에다가 만약에 우리의 행복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올바른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Ⅱ. 아름다움과 사랑
그래서 이제 여기서 우리가 영혼의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과 사랑에 대해서 이게 바로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때, 그 지순의 사랑 안에서 영혼이 가장 아름답게 되고 또 아름다운 영혼일 때 하나님께 사랑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존재 자체가 통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인간의 요소들이 하나하나 나누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로 흐릅니다. 그러니까 영혼과 육체가 다르고 마음은 영혼도 아니고 육체도 아니지만 이 세 가지는 모두 하나로 통전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 그 영혼에 일어나는 일들이 마음에 작용하고 작용된 것들이 삶을 통해서 흘러나와서 결국은 그 사람의 존재와 삶이 분리될 수 없도록 하나 되게끔 되는 것이 이것이 바로 인간의 영혼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영혼을 보면 마음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고 마음을 보면 그 행동이 어떨지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의 행동을 통해 그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는 여실하게 드러나고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존재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인간의 존재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물질이나,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 그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 이런 것에 의해서 인간 존재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의해서 그 사람의 존재의 가치가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결국은 아름다움을 지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형제 중에 미생물학을 하는 형제가 있었는데 여러분, 병균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목사님, 박테리아가 너무 사랑스럽다고 하기에 왜 그런가했더니 너무 예쁘다고 합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꼬물꼬물하는 게 너무 예쁘다고 합니다. 한번 대공원에를 갔는데 전시회를 하는데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똥 전시회. 그렇게 놓고 포스터에다가 굵은 글씨로 ‘똥이 더럽다고 생각되는 당신의 생각에 똥 침을 박아주마.’ 그렇게 놓고 똥 전시회입니다. 아니 사실은 아무래도 선입견이 가시지 않아서 내가 전시회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그 똥은 어떻게 전시를 했을까? 지금도 그것이 궁금합니다. 그러니까 묽은 똥, 된 똥, 콩을 먹고 싼 똥, 고기 먹고 싼 똥, 서양 똥, 동양 똥, 애 똥, 어른 똥, 뭐 그렇게 구분을 했든지 아니면 누런 똥, 하얀 똥, 검은 똥, 이렇게 구분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보는 순간에 한 가지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이 똥을 누어도 그 모양이 같을 수는 없겠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뭔가 우리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그런 아름다움을 그 똥 속에서 발견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제야 사랑하게 되었고 모을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니 굉장히 심오한 철학적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 아름다움을 지각함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대상이 무엇인지 간에 아름다움을 거기서 발견하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제 영혼에 아름다움에 관하여 창조와 사랑을 설교하고 나니까 게시판에 신학적인 질문들이 많이 떠오른다고 하는데 질문하지 말고 좀 기다리십시오.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인간의 지각과 관련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성경적으로 보면 이 인간이 사물을 지각하는 것은 육체의 일입니다. 육체가 지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조심해서 생각할 것은 색깔을 보고, 냄새 맡고, 촉각을 느끼고, 그 다음에 입맛으로 느끼고 하는 모든 것들은 육체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그것을 감지하는 것입니다. 지각하는 것입니다. 이 기능은 영혼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육체에 속한 것입니다. 그렇게 말을 안 하면 개나 돼지도 보고 촉감을 느끼고 냄새를 맡고 하니까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를 해야지 되기 때문에 이것은 육체에 속한 기능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육체의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이 기능이 있고 육체의 생명이 끝나면 그 생명이 사라짐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육체의 지각기능입니다.
그런데 이 육체의 지각기능 말고 영혼의 지각기능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것을 부인한다면 육신을 벗어두고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을 때는 아무 것도 지각을 못하는 휴면상태라고 이야기를 해야지 됩니다. 육체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두개가 같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의 감각기능을 통해서 보고, 듣고, 냄새를 맡고 등등의 오감에 의해서 사물을 지각하고 영혼도 똑같이 사물을 지각하는데 영혼이 지각하는 방식은 육체가 지각하는 방식과 틀립니다. 틀리지만 각각 다른 결론을 내리지는 않고 동일한 사물을 영혼으로도 지각하고 육체로도 지각하는데 육체로 지각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모든 동물들의 수준입니다. 인간은 사물을 영혼으로 지각하게 될 때 이 영혼의 지각은 인간들만 가지고 있는 지각활동입니다.
무엇으로 지각을 하는가 하면 지성으로 지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 설명을 못합니다. 그런데 지성으로 사물을 지각하게 되고, 그 다음에 사물을 인성으로 지각하게 되고, 그 지각을 하게 되어서 그 지각 속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면 애성을 가지고 사랑을 하게 됩니다. 지성으로 지각을 하고, 애성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이 안에 인간의 영혼에 지성적 기능, 애성적 기능 말고 의성적 기능이 또 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의지입니다. 그래서 지성을 기능으로 영혼이 사물을 지각하고 판단하고 그것을 애성이 사랑하고 그리고 그 지성과 애성이 받아들인 것이 이 의지가 그 결과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으로 가자고 하면 의지가 작동을 해서 우리의 몸을 끌고 가서 거기에 가기도 하고 또 거기에 있기도 하는 이런 의지적인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본질은 경향성과 힘, 영혼의 기능은 지성과 애성과 의성, 혹은 의지, 이렇게 되고 그 영혼이 작용하는 것이 무슨 작용을 하는가 하면 지각작용과 마음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은 바로 영혼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작용하는 방식입니다. 영혼이 투사되었다고 이야기한 이유는 영혼의 상태가 그대로 마음에 투영되어서 그 마음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사용하고 작용해서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 마음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자, 봅시다. 이제 육체의 눈으로 아름다운 산과 들을 지각했습니다. 육체가 보고 아름다운 산과들이다. 저 산과들이 아름답구나. 이것은 동물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산과 들이라고 하는 것은 인식할 수 있지만 아! 아름답다. 이렇게 느끼는 것은 동물은 못합니다. 만약 한다면 집에 돼지가 색깔을 잘못 칠해놓으면 돼지가 안 들어가려고 합니다. 디자인이 구식이면 거기서 안 살려고 할 것입니다. 밥그릇이 구식이라면 밥을 안 먹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돼지지, 그러니까 그렇게 보면서 산을 보면서 아! 저게 산이구나. 들이구나, 이렇게 되는데 이 속에서 아름답다. 이렇게 지각을 하는 것은 지성이 이 안에 무슨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딱 볼 때 아름답다고 판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그것을 아름답다고 판단하는지 이것은 별도인데 이것은 아주 굉장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제쳐놓고 어째든 그것만 아는 것으로 만족을 하십시오.
지성이 그것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면 지성 중에서 이성이 가지고 있는 생각의 기능이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성이 추론의 기능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뭘 추론하는가 하면 산과 들이 저렇게 아름다운데 나도 정말 아름다운가. 나도 저렇게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지각해낸 자연적 아름다움을 해석함으로서 도덕적 아름다움 속에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지성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입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 다음에는 그렇다면 이 자연과 그다음에 도덕의 아름다움의 원 저자이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이렇게까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이 지성에서의 일입니다.
그런데 일단 단계 단계마다 아! 아름답다. 이렇게 느끼게 되면 이 안에서 애성이 쿵쿵 뛰기 시작합니다. 자연적 아름다움을 보면서 가슴이 뛰기 시작합니다. 아! 예쁘다. 도덕적 아름다움을 보면서 아! 나는 왜 저렇게 못살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 아! 나도 그분의 성품을 본받고 싶다. 이 속에서 사랑이 생겨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자연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고 그것이 해석되어서 지성 안에서 도덕의 아름다움을 관상시켜줄 때 도덕적 가치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고 그 도덕적 가치와 자연적 가치를 통해서 그 가치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대한 아름다움이 드러나게 될 때 그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이 정도로 아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그러면 애성이 그렇게 끌리게 되면 그다음에 이제 의성이, 의지가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는 제일 맏형이 지성입니다. 둘째형이 애성, 막내가 의성, 혹은 의지입니다. 이렇게 차례대로 되어있어서 맏형이 먼저 하는 대로 따라하는 것입니다. 맏형이 딱 보면서 참 아름답다, 그러면서 가슴에 품는데 품어야할지 말아야할지는 이 첫째 형 의지 안에 있는 총명이 판단을 시켜줍니다. 2부 시간에는 안 했는데 이번에는 좀더 하겠으니까 집중해서 들으십시오. 두 번 안 하겠으니까. 지성 안에는 이성과 총명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자꾸 나에게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가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성과 총명이 있는데 이성은 생각하고 추론하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밀접하게 연관되어있고 총명은 분별하는 기능입니다. 딱 봤는데 저것을 내가 받아들여야지 되는가. 말아야지 되는가는 총명이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성이 작동해서 생각이 먼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하지 않는 것은 인간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 혹은 보지 않고 상상에 의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떠오른 것은 이성 안에서 생각이라는 작용이고 그것을 앞뒤로 연결시키면서 추론을 해나가는 것도 이성 안에 있는 작용입니다. 총명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라고 판단이 되면 그러면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추론해가는 것입니다. 그 추론의 작용에 의해서 도덕적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 지성과 애성이 움직이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막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지에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가 하면 사랑하는 것을 끊임없이 고착되어 있으려는 의지적 작용이 생겨나게 됩니다. 나란히 작동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 이 질서가 다 무너진 것입니다. 그래서 못되어 먹은 집안처럼 형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성하고 의성하고 둘이 짝짜꿍이 되어서 형을 왕따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대 분명히 형은 저것이 아닌데 하고 이야기를 했는데 둘째 형이 그냥 막 날뛰면서 형이 뭐라고 그래도 난 저게 좋아. 그게 바로 여러분들이 죄인 줄 알면서도 마음에 이끌려서 범하는 것입니다. 형 말을 안 듣고 애성이 극대화되어서 뜨겁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의지는 큰형 말을 잘 듣는 게 아니라 둘째 형 말을 잘 듣습니다. 원래 집안에서도 그렇습니다. 둘째 셋째가 붙어 다닙니다. 그래서 형을 왕따를 시킵니다. 왕따를 철저하게 시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죄의 속이는 작용입니다. 그게 작년 이맘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애성과 의성을 사용해서 죄가 계속해서 이제 지성을 속이게 되는 것입니다. 어째든 그렇게 되어서 결국은 아름다운 것을 보게 될 때 인간이 사랑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될 때 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대상을 인간의 영혼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회심과 관련시켜서 이야기를 해보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하면 처음 시작이 어디로부터 되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성의 작용에서부터 시작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묻고 싶을 것입니다. 죄가 사람들에게 역사할 때 지성부터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애성을 자극해서 열렬한 사랑을 가지고 죄에 탐닉하게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 돌아가게 될 때도 그렇게 될 수 없을까요? 그렇게 안 됩니다. 무엇인가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애성은 느꼈지만 지성이 없었던 사람들의 모습이 무엇인가 하면 사도행전에서 아데네에 갔을 때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들을 탄핵합니까? 내가 돌아가는데 보니까 어떤 우상들에게는 알지 못하는 우상들에게 라고 쓰여진 것을 봤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어떤 우상에 대해서 사랑을 느꼈는데 그게 뭔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게 온전한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경배를 받기를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지성으로 이해된 만큼 애성으로 경배하고 의성으로 그분께 순종하는 이런 종류의 신앙을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이것을 쉬운 말로 이야기를 하면 인격적 신앙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 시작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지성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지성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영혼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어야지만 아름다움이 회복될 것입니다. 그 영혼이 거듭난 영혼이건, 거듭나지 않은 영혼이든지 간에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하면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거나 발견했지만 지금은 잊혀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성이 발견할 수 있을 때, 그때에 이 애성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의성이 하나님의 뜻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종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아는 것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 지성적인 헌신이 없이 뜨거워지려는 사람, 지성적인 헌신이 없이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불신자 다음으로 허무한 세월을 교회에서 보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Ⅲ. 은혜 : 사랑의 작용
그래서 이제 여기에서 우리들이 오늘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이런 의문이 풀리게 됩니다.
A. 은혜란?
그러면 이 은혜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게 사랑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무엇인가? 은혜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좋은 것이야. 맞습니다. 은혜라는 말의 원리 히브리어 뜻이 좋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대답하면 너무 유아적인 대답입니다. 그럼 은혜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선 성경은 구원과 관련시켜서 은혜를 이야기할 때와 성화를 관련시켜서 이야기할 때 은혜가 조금씩 의미가 다릅니다. 먼저 구원과 관련시켜서 이 은혜를 이야기한다면 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모든 은혜의 계획의 나타남 자체가 은혜입니다. 예수님 오시는 길이 예비 되는 것도 은혜이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나타남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이제 구원과 직접 관련시켜서 이야기할 때는 ②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친절입니다. 호의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런 용도로 사용되는 말이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라고 할 때 그 은혜가 바로 이 두 번째 해당되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애쓰는 것으로 우리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주님의 가치 없는 죄인을 향해 베푸시는 주님의 따뜻한 친절, 호의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여기에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은혜를 이야기할 때는 구원과 관련된 서술이 아니라 성화와 관련된 서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화와 관련할 때 이 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 두 번 반복해서 말씀을 드리겠으니까 적으시든지 외우시든지 둘 중에 하나를 하십시오. ③ 은혜란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할 바를 사랑을 가지고 행할 수 있도록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시는 사랑의 감화입니다. 다시, 은혜란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 할 바를 사랑을 가지고 행할 수 있도록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묻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이렇게 은혜가 떨어졌거든요. 그래도 보십시오. 보라. 내가 교회에 출석하였도다. 보십시오. 제가 요즘 은혜가 떨어졌거든요. 그래도 주일학교 교사를 씩씩하게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은혜가 떨어진 것은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은혜의 힘이 없어도 헌금하는 것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빠진 게 있는데 사랑을 가지고가 안됩니다.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사랑을 가지고 행할 수 있도록 내면 깊은 곳에서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라고 했는데 은혜가 없으니까 여러분이 교회는 출석하고 헌금하고, 교회봉사는 하고 있지만 지식의 사랑을 가지고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예배에 참석해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의 감사가 없습니다. 감격이 없고 영혼을 섬기지만 까리따스의 사랑만이 교통하는 사랑이니 교통하는 사랑이 없으니까 영혼을 섬기는데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영혼의 곤고함을 보고도 눈물을 흘려줄 줄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행하는 올바른 방식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안한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앞에 또 칭찬받은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럼 안 한 것이 없으면서도 다 했는데 예수님께 칭찬을 안 받고 책망을 받았다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행동을 나무라신 것이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이 마땅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그 방식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의무를 이행한다고 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중대한 결함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덕적 윤리운동이 해결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없이는 이 은혜는 영혼의 작용입니다. 영혼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작용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은혜의 작용이 영혼의 질서를 변경시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인간이 비로소 하나님에 의해서 요구되는 의무를 올바른 방식으로 충분히 그분의 의도에 맞게끔 봉사할 수 있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B. 은혜와 의지의 신비
그러면 두 번째로 여러분 가운데 영특하신 분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그럼 이제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내 안에 있는 선한 의지가 이끌어내어질 수 없다. 바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군요. 맞았습니다. 목사님. 그래서 말인데요. 결국은 내가 이 모양으로 사는 것, 다 우리 예수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왜 안 이끌어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당신이 끌어내시면 되는데 왜 안 끌어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더욱 주님이 비난을 받으셔야 할 이유가 있는데 왜 누구는 끌어내시고 누구는 안 끌어내시는지. 애는 끌어내셔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순종의 삶을 살게 해주시고 나는 매일 나왔는데도 안 끌어내시고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왜 말도 안 되는지 이성적으로 논증하겠습니다.
이제 두 가지 점에서 그렇게 되는데 우선 첫째는 이제 하나님이 은혜를 통해서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성경은 강력하게 이 의지의 행사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음을 반복해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더 확실한 사실 하나는 우리의 의지가 은혜를 이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우리의 의지를 이끌어내는 것이기는 한데 성경은 이것이 은혜 하나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의지는 배제되었다고 선언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는 이 은혜는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으로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전달하시는 방편들을 통해서 인간에게 그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방편에 믿음을 가지고 순종하면서 참여해야지만 이렇게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시는 성령의 은혜가 그의 영혼에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들이 바로 무엇인가하면 예배, 설교, 성경읽기, 기도, 그리고 진리를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과의 진리를 아는 교제. 이런 것들을 통해서 통로는 다양하지만 어째든 진리가 흘러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갖게 될 때, 그것이 은혜를 전달해주는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거룩한 예배당에서 그 사람의 영혼에 은혜가 부어질 가능성보다는 진리의 말씀이 들리는 술집에서 그 영혼에 은혜가 부어질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전혀 충격이 안 되십니까?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진리가 들리지 않는 아름다운 예배당에서보다 진리가 명료하게 들리는 술집에서 그 영혼에 은혜가 부어질 가능성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 최소한 그 사람의 선한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이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그 사람은 그런 은혜가 전달되는 방편에 참여하려고 애쓰지 않고 유익을 이루려고 마음을 다하지 않았다는 비난은 최소한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이중적으로 그 책임을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의지 자체가 인간에게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은혜의 방편의 문제 때문입니다. 인간이 피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제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아주 치명적으로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아주 태산같이 중요한 교리 하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은혜와 의지의 신비입니다. 은혜의 자유의지의 신비입니다. 인간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감제될 수가 없습니다. 힘으로서 인간의 의지가 감제되면 의지는 파괴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니까 성경적으로 볼 때 이 의지는 자유의지이고 (?) (뒤편으로 넘어가면서 끊긴 것 같습니다.) 음욕을 느꼈습니다. 한 사람은 동일한 조건에서 범죄 했습니다. 한 사람은 동일한 조건에서 범죄 하지 않고 자기를 지켰습니다. 그러면 범죄 하지 않은 사람이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틀림없이 꾹 참았네. 내가 이겼네. 이렇게 말하지 않고 어떻게 그 음흉스러운 유혹받는 환경에서 당신이 이길 수 있었습니까? 라고 말하면 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나를 지켜주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그 말이 액면 그대로 전부라고 한다면 그러면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칭찬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경우에 주님께서 오신다면 유혹을 이기고 범죄 하지 않도록 자기를 지킨 사람을 주님이 도덕적으로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칭찬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 뭐 때문에 칭찬을 받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칭찬받을 수 있는 이유는 이 사람 안에 있는 선한 의지 때문에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이 선한 의지가 은혜에 의해서 이끌려지기는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이 은혜에 의해서 선한 의지가 이끌려지는 것이 이 사람의 의지적인 경향을 초월하는 강제적인 방식으로 선한 의지가 이끌려진 것이 아니라고 책임지고 기여할만한 방식으로 이 의지가 이끌려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뭐가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왜 그렇게 뻥합니까? 아름다운 사람은 뭐가 아름다운 사람입니까? 아시아나에 다니는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람은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면 내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선한 사람은 뭐가 선한 사람입니까? 선한 사람은 의지가 선한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선한 사람이라고 할 때 이 선함은 의지에 맞추어져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명제가 성립을 하게 됩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이 아름다움에 있다. 영혼의 아름다움은 필연적으로 의지의 선함을 내포한다. 뒤집어 말해서 인간의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은혜의 작용이다. 이끌어내어진 선한 의지는 아름다움 안에서 보호된다. 이런 명제가 성립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이 영혼의 아름다움과 의지의 선함이 나누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이제 사무엘상 16장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 그리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셨습니다. 자,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그는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뭘 보신 것입니까? 그의 영혼을 보신 것입니다. 중심, ‘레브’ 마음이라고 그랬습니다. 마음을 통해서 그 사람의 영혼을 보신 것입니다. 내면을 보신 것입니다. 마음 자체가 영혼의 작용이니까. 그러니까 마음을 봤다는 것은 영혼을 봤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혼을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뭐라고 그러시는가 하면 “내 마음에 합한 자라. 내가 그에게 나의 뜻을 다 이루리라.” 그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아직 무슨 일을 이룰지 다윗은 알고 있습니까, 모르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 이미 그렇게 하고 싶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다윗이, 그럼 모르는데 어떻게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보여주시기만 하면 그쪽 방향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종류의 의성, 즉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명제에 도달하는가하면 다윗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 아름다운 영혼 안에서 이 다윗은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선한 의지의 정체는 하나님이 그를 창조하시고 그를 구원하심으로 이루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그 일을 향하는 선한 의지였다. 라는 명제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이 존재의 아름다움이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다면 이 땅에 살아있는 인간의 또 다른 가치가 그의 선한 의지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이 선한 의지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혼의 아름다움과 의지에 선함은 결코 충돌하지 않습니다. 영혼이 아름답지 않은데 의지가 선하다거나 의지는 악하지만 영혼은 아름답다거나 이런 것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영혼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선한 의지의 정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자신의 존재의 이유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하나님이 지식이 많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고 또 육체의 아름다움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아무리 많이 쌓아올려도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지의 선함과 바꾸지 않으십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즉 무슨 뜻인가 하면 선한 의지 이외에 다른 것을 아무리 많이 쌓아올린다고 하더라도 선한 의지 자체와는 가치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많은 특징들이 있고, 많은 재능들이 있고 훌륭한 학문과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선한 의지를 가지지 않은 사람을 버리고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이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행해주십니다. 따라서 영혼의 아름다움이 존재의 아름다움이라면 의지의 선함은 그 사람의 존재의 가치입니다. 가치와 관련됩니다. 그러면 좀 가슴이 아프지만 좀더 그 말씀을 우리의 삶과 적용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영혼이 아름답지 않은 사람들은 존재가 아름답지 않고 추루한 사람이라서 그 사람들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에 아름다움을 감소시키는 존재들입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의지의 선함이 결핍된 사람들은 가치가 현저히 적은 사람들입니다. 선한 의지가 결핍된 것만큼 악한 의지가 존재하게 되는데 선한 의지가 많이 결핍되면 악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가치가 적은 사람이기는커녕 존재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처리방법은 이 땅에서 존재를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더 이상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그 사람의 생명을 거두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니까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여기서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우리 모두 똑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경험적으로도 사실이 아니고 신학적으로도 틀렸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 논증했습니다. 몇 시간에 걸쳐서, 그러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하면 들어보십시오. 우리가 모두 하나님이 보시기에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또 편견이고 신학적으로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그래도 가진 동물과 식물들과는 비교될 수 없는 피조물이라는 사실, 또 그 위에 하나 더 나아가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면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이야기해서 우리각자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그 일반적인 것을 인정을 하더라도 개별적으로 존재의 가치가 모두 똑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 가운데는 거의 가치가 없는 사람도 있고 그 가치가 매우 뛰어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경험적으로도 보면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그 가치가 뛰어난 사람들을 위해서 가치가 적은 사람들을 엑스트라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못 느끼십니까? 왜 못 느낍니까?
이스라엘에 3년 6개월이나 비가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농경사회에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가 기도를 안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섭섭하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하늘 문을 닫고,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하늘 문을 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하나님은 세상에 사람이 엘리야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실제로 엘리야 한 사람밖에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이게 뭘 보는가 하면 하나님이 그 한사람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이 많은지에 대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참 은혜를 받을 때는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나를 주연으로 쓰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까? 받은 분이 있다면 한번 아멘 해보십시오. 그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너무 설교자로서 실망스럽습니다. 겸손하셔서 그럴 것입니다. 영혼이 아름다우시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우리 모두 귀한 존재들이지만 개별적으로는 우리의 존재 가치가 하나님이 인식하시는 게 각기 다릅니다.
그러면 그것을 여러분들이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면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위로하는 뜻에서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승복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깊이 영혼이 침체에 빠져서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을 거의 잃어버리고 육욕에 가득 찬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의 앞길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계속 살다가 아끼는 자가 없이 죽는 자도 있고, 또 하나는 깊이 회개하고 은혜를 받아서 하나님을 향한 지순한 사랑으로 꽉 차고 진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자와 후자를 비교할 때 하나님 앞에 존재의 가치가 동일합니까? 물어봅니다. 동일하다면 이렇게 앉아서 장시간동안 설교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마찬가지인데 뭐 이렇게 복잡하게 살겠습니까. 쉽게 살면 되지. 구도고 나발이고 뭐가 필요가 있겠습니까! 욕심이 내키는 대로 살면 되지, 어차피 마찬가지인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게 이제 은혜와 의지의 신비한 관계입니다.
그런데 경험을 해본 사람에게는 아주 명쾌하고 쉬운 설명입니다. 아무 것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렇습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그래서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부득불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왜냐하면 내가 약한 거기에서 주님의 은혜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노래합니다. 그 표현에 의하면 그냥 나는 주님의 은혜에 이끌려왔을 뿐이기에 바울 선생님, 당신 어쩌면 그렇게 훌륭해. 그렇게 하지 마라. 주님의 은혜가 나를 이끌어왔다. 나는 원래 정체가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고 핍박자고 포행자였다. 정말 쓸모없는 짐승과 같은 존재인데 그런데 아무것도 선한 것이 없는 나에게 임하신 내 영혼에 다가오신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서 그 모든 의지를 선하게 창조하셔서 이끌어내셨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를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내가 행할 수 있었단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고 있다가 사도 바울의 뒤통수를 한대 때리시면서 당연한 얘기를 왜 계속 하고 있나. 네가 한 게 뭐가 있나.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아닙니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말씀하십니다. 그 신비는 하늘에 가야지 우리 모두 다 풀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이 정도로 아는 것으로 만족을 하십시오. 더 많은 이야기들이 남아 있지만 이 정도에서 이 의지의 은혜의 신비 사이의 관계는 이정도로 그치겠습니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적용을 하자면 어떻게 됩니까? 결론이 어떻게 도달하게 되는가 하면 그럼 우리는 너무 연약하고 구원받았지만 여전히 내적인 부패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한번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럼 어떻게?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그 은혜가 우리의 지성을 새롭게 하고 우리의 애성을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고 우리의 의지에 혹은 의성을 일깨워서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며 그분께 순종하며 살도록 만들어주도록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영혼에 부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의 전달의 주체는 삼위 하나님 중에서 우선적으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님의 사랑의 작용, 이것이 은혜의 작용입니다. 은혜의 작용이 사랑이고 사랑의 작용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에 의해서 이 사랑이 우리에게 불러일으켜지고 그리고 이 은혜의 작용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지성과, 애성과, 의성, 혹은 의지가 하나님 앞에 전폭적으로 올바르게 기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기능 안에서 마음이라는 작용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기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런 은혜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져서 우리가 지존하신 하나님을 날마다 사랑하게 되어야 합니다. 날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러면 그 은혜가 사랑의 작용이라면 끊임없이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이것이 결국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는가. 사랑 자체가 어떤 대상을 목표로 정하고 그것만 끊임없이 즐거워하려고 하는 마음과 영혼의 작용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하게 됩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게 될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각하게 될 때 그때 인간의 영혼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꽉 차게 됩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지각이 사랑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가 하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접하는 이 오감의 많은 접촉점들을 통해서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접하게 되면 접하게 될수록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도덕적 아름다움은 신적 아름다움을 본뜬 것이고 자연적 아름다움은 도덕적 아름다움은 보이는 표상이고 이 자연적 아름다움을 흉내 낸 것이 이 세상의 존재하는 수많은 인공미입니다. 그러니 이 인공미에 대해서 우리가 아름다움을 느껴서 우리의 애성이 자극을 받게 되면 받으면 받을수록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고 그 세상을 즐거워하고 거기에 고착되려고 합니다. 그것을 더듬어, 더듬어 올라가서 그 모든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고 그분을 목표로 정하고 그분만을 즐거워하려고 영혼이 작용하지를 않습니다. 그게 바로 사도가 이야기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너희가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거기에 없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그 언명이 바로 그런 논리 때문입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한 주간을 살면서 예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발견했습니까? 발견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달콤함을 맛보셨습니까? 그렇게 끊임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관상이 없이는 예전에 한번 사랑한 하나님을 날이 갈수록 더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차피 싫증나게 되어있습니다. 절대로 한번 하나님과 만난 생애적인 사랑의 경험이 그를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Ⅳ. 영혼의 아름다움과 은혜
A. 선한 의지의 회복
그래서 결국 우리들은 여기서 영혼의 아름다움과 은혜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게 선한 의지의 회복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의지를 회복시켜주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이 땅에 정말 살게 하시고 싶은 가치 있는 사람들은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세상을 많이 소유해서 자기 사랑의 질서를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 있도록 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세상에 하나님이 참으로 두고 싶은 사람은 존재가 가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의 개별적인 가치는 의지의 선함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지워버릴 수 없는 특징이 선한 의지입니다. 자기 존재의 가치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다가 두고 그리로 끊임없이 향하고자하는 그 착함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집사들을 세우고 장로들을 세울 때 착한 사람이 매우 중요한 조건으로 등장한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또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도 사랑으로 모든 선을 행하기에 완전한 사람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목표가 선함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목표 자체는 궁극적으로는 아름다운 영혼 안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봉행하는 합치된 선함을 갖게 하시게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시고 (?)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았는데 영혼이 아름답지 않고 따라서 그 속에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가 없이 자기가 거의 내면적으로 방치된 채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그 사람은 가치 있는 구원을 받았으나 스스로 쓸모없게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았으나 그 영혼에 아름다움도 없고 의지의 선함을 갖지 않은 사람, 그래서 욕심에 이끌리는 대로 사는 것이 몸에 배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가치 있는 구원을 받아서 존귀한 존재가 되었으나 스스로 쓸모없게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인내하시면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지만 그러나 그런 쓸모없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재적으로는 그렇게 쓸모없는 인간이 되기를 열망하는 동안에 그치지 않는 영혼과 육체, 마음의 번민과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징벌이 주어지고 미래적으로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섭리 가운데서, 혹은 지옥의 심판 가운데서 그들을 하나님이 징벌하십니다. 물론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선한 의지는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우리의 전 존재를 걸고 파수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훌륭한 가치, 그것을 빼버리고 나면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의지의 선함을 제거해버리고 나면 인간은 짐승과 똑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이 땅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시면서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면서 책망하는 사람들이 있고 사랑하는 내 종아. 착하고 충성되도다. 너는 정말 내게 사랑스럽구나.
일평생 기도제목이 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 제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해주십시오. 이 넓은 세상에 나는 미물과 같은 존재이지만 내가 이 땅에 없는 세상보다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이 세상에 있는 그것이 주님에게는 이 세상이 더 어울리는 세상이 되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람이 되게 하소서. 이게 여러분들이 시집가고 장가가고, 좋은 직장을 취직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이 은혜로 말미암아 영혼이 아름다워짐으로서 마지막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이 즐거워한다고 하는 것은 끝입니다. 더 이상 그것을 사용해서 도달하고자 하는 추가적인 목표가 없습니다. 거기가 끝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계속 머무르며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 그것입니다. 그게 바로 주님이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의 상태입니다.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고 그러지 말았어야지 되는데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때리십니다. 그런데 뭐라고 고백을 하는가 하면 내가 주 앞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나는 예루살렘을 바랄 수밖에 없나이다. 주여 내가 새벽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의로운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내가 주의 낯을 피하여 어디로 가오며 주께서 나를 박대하시면 제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B. 하나님을 즐거워함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생활이 우리를 속이고 우리 눈앞에 어른거리는 수많은 이 세상의 표상들이 우리를 어지럽힙니다. 그러나 이 한가지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즐거움은 하나님 안에만 있고 그분 이외에 곳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은 모두 신성모독 죄이며 주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분 때문에 다른 곳에서도 어느 정도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마치 꿀샘을 향해 달려들고 정신없이 꿀을 빠는 벌처럼 그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목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파괴하고 우리의 의지의 선함을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모두 우리 각 사람을 당신의 저울에 달아보고 계십니다. 세상에서는 돈이 많고, 얼굴이 잘생기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공부를 많이 하고, 젊은 사람이 무게가 많이 나갑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비록 들판에서 양을 치며 아버지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형들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목동에 불과했지만 하나님의 저울에 그를 달았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 가장 무거운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그를 많이 사랑하셨습니다. 학문과 용모, 기술과 재산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영혼의 아름다움 때문에 아름다운 영혼 속에 깃든 의지의 선함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매우 귀한 존재로 여기시고 가치 있는 존재로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역사의 주역으로 사용하셨습니다. 그에게 빈기 거의 없이 당신의 뜻을 보이시고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으신 하늘에 가득하고 궁창에까지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얽매이기 쉬운 모든 것을 벗어버리기 전까지는 우리들이 자유를 느낄 수가 없고 그리고 우리의 이 지성이 정말 하나님 자신의 그 아름다움을 관상할 수가 없습니다. 순수한 애성으로 가득 찬 가운데서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진리를 관상하고 우리의 의성, 혹은 의지가 우리의 지성과 애성의 작용에 온전히 추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야 합니다.
나는 오늘 이 시간에 주님이 내게 주신 언어와 내게 주신 상상력으로는 이정도 밖에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서 깊이 슬픕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무엇을 행하든지 하늘에 태양이 구름에 가려서도 빛나가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정말 제 말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은혜와 긍휼에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모든 죄인들이 욕망에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는 주님을 우리들이 보여줄 수 있다면 그래서 주님이 없이 피곤하게 살아가는 이 모든 세상이 그 창조주를 즐거워하고 그 창조주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태어나고, 죽고, 흘러가고, 소멸하는 것이 사람을 많이 사랑하면 배신당할 때 슬퍼할 것이요, 물질을 많이 탐닉하면 없을 때 고통이 가중할 것이며, 육체에 쾌락을 탐닉하면 탐닉할수록 그 쾌락에서 차단될 때 그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태어나고, 죽고, 흘러가고, 소멸하는 것들입니다. 잠시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살아서 살아있는 한 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있지만 미구에는 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어쩌면 생각보다 아주 빨리 올지도 모릅니다. 그대들은 내 마음에 사랑이지만 내 마음에 영원히 묶여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언젠가는 헤어지고 만나고 떠나고 돌아오지 않고 죽음의 강을 건너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이외에 모든 것은 우리의 항구적인 즐거움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제 이성적으로도 너무나 분명하고 그것이 마치 가능한 것처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결국은 없는 것을 사랑하는 열애의 삶입니다. 그 혼란과 비참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즐거움을 최종적인 은신처는 우리 하나님 한분 이외에 아무데도 없는 것입니다. 그분은 태어나지도 아니하시며 죽지도 아니하시며 흘러가시지도 아니하시며 소멸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세세무궁토록 그에게만 존귀와 영광이 있어지리라. 그러면서 감격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그 수없이 흐르는 영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로 이 때에 우리 같은 티끌만도 못한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 이외에 누구도 보지 못하는 그 창조의 진리를 보게 하시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지성을 주시고, 그분을 끝까지 사랑할 수 있는 애성을 주시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의성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공경하고 경외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눈을 들어 주를 보라 주의 영광을 보라
주의 자비와 그 큰 긍휼히 이 세상에 모든 꿈을 묻고 살아가다가 버림받은 짐승처럼 죽어버리고 말 이 하찮은 인간들을 위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예수로 오셨으니 이는 우리로 지혜자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없던 때에 살던 그 삶을 계속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그분이 친히 오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시대에는 빛이 적었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다 하더라도 이제는 광명한 대낮과 같은 진리가 있는 세상이니 이제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형제자매 여러분, 깊이 주님 자신만 즐거워하십시오. 마치 그분만 즐거워하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인 것처럼, 그분 이외에 모든 중심은 싫어하는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그분만 즐거워하고 그분 안에서 안식하며 그분과 동행하며 그분과 더불어 아파하며 주께서 우리의 코에 호흡을 하는 동안에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놀라운 은혜를 생각하면서 잠시 주를 위해서 당하는 고난을 두려워하거나 우리를 성화되게 하기 위해서 짊어지게 하시는 십자가를 무겁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매일매일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의지의 선함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眞善美
7. 영혼의 아름다움과 선한 의지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시편119:1)
Ⅰ. 본문의 배경
오늘 이 시간에는 영혼의 아름다움과 선한 의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시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1절은 이후 마지막 절까지 이어지는 시편 119편의 총론적인 경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마도 이 시를 모두 기록한 후에 아마 이 첫 자리에 이 1절을 놓기로 결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이후에 풀어지는 모든 시편에 노래들이 이 1절에 초점을 맞추어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이 119편에서 아주 다양한 삶의 환경들을 만나게 됩니다. 고난과 역경은 물론이고 배신과 외로움, 그리고 유혹과 실패, 좌절과 고통 같은 것들을 풍부하게 경험하고 그 각 환경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마지막 도달하게 된 결론이 행위가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그 사람이야말로 복된 사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 것입니다. 돈이 많고 그리고 높은 지위를 소유하거나 혹은 육체의 아름다움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그런 인물이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완전해서 하나님의 법인 그 율법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복된 사람이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양한 삶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 하나님과의 만남은 반드시 그를 진리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었고 또 하나님과의 만남은 진리에 대한 새로운 지평들을 그의 인식 속에 확장시켜왔던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진리를 그 모든 삶의 환경 속에서 맛보면서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역경과 외로움, 고난과 배신, 시련과 유혹 이런 많은 굴곡이 있는 삶을 살면서도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그 모든 굴곡이 있는 삶의 환경들을 통해서 마치 흐르는 시냇물에 조약돌이 계속 연마되어지며 세련되어가듯이 영혼이 점점 하나님 앞에 아름다워져 갔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고난 자체가 그를 그렇게 만들어준 것은 아닙니다. 외로움 자체가 그렇게 만들어준 것도 아니고 시련이나 고통들이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환경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Ⅱ. 은혜와 선한 의지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그 은혜와 선한 의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이 은혜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마땅히 하여야 할 바를 사랑을 가지고 행할 수 있도록 그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인을 그렇게 끊임없이 그 영혼 안에서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어 주시는 은혜의 작용이 계속 있었기 때문에 이 사람이 삶의 다양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정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선하게 살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이 소유나 지위, 외모나 젊음에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합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습니다. 인간 존재가 영혼이 아름다우면 아름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혼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유일하게 부여받은 피조물들이고 그들이 비록 허물과 죄로 죽은 영혼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그 사람의 존재 가치와도 관련됩니다. 그 영혼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무한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온 천하를 주고도 한 영혼을 바꿀 수가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 의미입니다. 이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러나 우리는 보다 깊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한 발짝 더 들어가야 됩니다.
한 사람의 존재의 아름다움은 미적인 측면에서 관측한 것이고 한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그런 점에서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한 존재의 가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름다움과 가치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이란 한 존재를 미학적 측면에서 보는가, 윤리적 측면에서 보는가, 혹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보는가, 이런 다양한 각도에 따라서 각각 같은 존재를 다른 각도에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학적 측면에서 보면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라고 명제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만약에 가치론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이 참으로 거기에 있어야 되는 가치가 무엇에 의해서 설정되는가, 라고 말할 때 우리는 서슴없이 ‘Goodness’ 선함이라고 말해야 됩니다.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는 그 사람의 선함에 달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선함은 무엇인가? 이 선함은 누구도 올바로 정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준이 전해지지 않으면 선악을 판단할 수 없고 선악을 판단할 수 없으면 선함과 악함도 동일하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선함이라고 하는 것은 선을 지향하는 상태나 조건을 가리키고 악함은 악을 지향하는 상태나 혹은 성향을 가리키는 판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선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의도와 목적입니다. 거기에 부합하는 상태와 조건이 경향성이 선함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많은 물질을 소유했는가, 혹은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가, 젊은가 늙은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피부색깔이 흰가, 검은가, 이런 것에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창조의 목적, 인간을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에 얼마만 기여하는 상태, 기여하는 조건을 가지고 있는가, 그것에 의해서 한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녀임에는 틀림없지만 여러분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 동일하게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모두 동일한 가치를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하나님 앞에 너무 가치 있는 그런 존재도 있고 또 여러분들 중에는 거의 가치가 없는 존재도 있습니다. 그 격차가 매우 커서 어떤 경우에는 어떤 사람 백 명을 주고도 하나님이 바꾸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사람 백 명을 버리시더라도 보호하고 싶은 한 사람이 하나님에게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말씀드리면 대부분의 경우에 여러분들이 불쾌하게 느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우열을 가리는 게 질렸는데 교회에 오니까 또 등수 얘기냐. 그런데 행복은 성적순은 아닌데 행복은 선함의 순서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 안에 선함이 가득 있다면 여러분들의 존재의 가치는 매우 뛰어납니다.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친 존재들은 영향력의 크기가 그 사람의 존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에 황제도 동양에서 얼마나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까? 히틀러나 무솔리니 같은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 수천 만 명이 미칠 수 없는 영향을 인류 역사에 미쳤습니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이든지, 좋아하는 사람이든지 그 시대에 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은 유럽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의 가치가 뛰어났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선함이 그들에게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존재 가치가 뛰어나지 않았습니다. 바로 눈에 보이는 이 모든 표상들을 걷어버리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진짜 주님 앞에 우리의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살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내가 어떤 존재가 되어야지만 이 선함이 내 안에 가득 차서 주님 앞에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는가를 가지고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인간의 본분입니다. 이것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람들은 거의 짐승과 방불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이 무엇을 보시고 어떤 사람들은 존재하는 그 자체가 주님에게 피곤해서 언젠가는 한번에 다 쓸어버리실 밖에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게 만들어드리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하나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온 천하를 두루 살펴보아도 그 사람만 하나님의 눈에 띄는 것 같은 그런 사랑스러운 존재의 가치를 느끼게끔 하나님으로 하여금 만들어드리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 이런 질문에 대해서 조금도 서슴없이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지의 선함이 결정한다고 말해야 됩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왜 하나님이 똑같이 당신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인데 수많은 사람보다 그 한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가치 있게 여기시는 인간이 존재하는가? 무엇이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매우 가치 있는 존재로 또 다른 많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거의 쓸모가 없는 그런 존재로 심지어는 그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주님에게 괴로움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게끔 그들을 구별을 짓는가. 후자인 경우에 존재하는데도 오히려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훨씬 더 좋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이 존재했고 또 해왔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슬픈 일이지만 여러분들 가운데는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그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 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어디에 가서 이 설교를 했더니 사람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두 가지인데 하나는 우리 모두 똑같이 하나님에게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명제와 또 하나는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모두 소중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 굉장히 커다란 충격들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감탄을 하는데 나는 통탄을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은 엉기덩기 신앙입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목회자도 좋고 평신도도 좋고 함께 어울리며 부담스러운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기로 하지 말자. 그리고 가는 신앙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병자는 빨리 데리고 병원에 가서 침대에 눕히고 그리고 치료를 해야지, 요리 집에 데리고 가서 먹고 싶다는 음식을 사주는 것이 급한 일이 아닙니다. 이게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 끊임없는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그 진리에 대한 열애를 소유한 사람, 이 사람은 우리 모두의 스승입니다. 한 사람의 존재의 가치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의지의 선함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이 시인은 정말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은 영혼이 아름다운 존재가 되어서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면 평탄한 길을 갈 것이라고 예측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동방에 의로운 사람이요, 이미 이 지상에서 그렇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당신을 경외하는 사람이 없다고 칭찬하신 욥이 뭐라고 그러신 줄 아십니까? “오직 그가 나의 가는 길을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 정금과 같이 나아오리라”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영혼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단련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주님께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그 대가를 치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고난의 길을 걸어갑니다. 시련의 빈들을 지납니다. 고통의 폭풍의 한가운데를 지납니다. 살을 에는 것 같은 고난의 밤길을 지납니다.
교회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전도지를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가난했으니까 그냥 컴퓨터로 쳐서 프린터 한 것을 가서 복사해서 반씩 잘라서 그래서 나누어주었습니다. 어느 자매가 그 전도지를 들고 우리 교회에 왔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고백했습니다. 저는 이 전도지를 보는 순간에 내 자신의 영혼이 너무 비참하게 느껴져서 울컥 하는 마음에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고, 전도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었는가 하면 제가 직접 작문을 한 것입니다. “순종하고 싶어도 그 길을 알 수 없고 그 길을 알아도 순종할 힘이 없는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정말 순종하고 싶은데 길을 모릅니다. 더 큰 문제는 이제 길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순종할 힘이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을 소망시키는 것은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대 자신들입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실망을 안 느끼면 여러분이 여러분하고 똑같은 사람이 된 것입니다. 냉철하게 생각을 해보십시오. 나는 나 자신에게 최대의 실망을 주는 걸림돌입니다. 한해가 시작될 때는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런데 며칠 안 갑니다. 교리묵상을 손에 받아들고 이제 매일 교리를 묵상할 수 있겠다고 좋아하던 때가 엇 그제 같은데 이제는 교리 묵상하는 사람이 절반도 안 됩니다. 매일 기도하겠노라고 결심했는데 작심삼일입니다. 이게 우리 자신의 실망스러운 모습입니다. 우리 인간 안에는 선한 의지가 처음에는 하나님이 주셨지만 그러나 타락과 함께 이 선한 의지가 산산이 부서져 날아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주셔야지 만 그 은혜의 작용을 통해서 의지의 선함이 끊임없이 이끌어져 나아오고 그 사랑의 감화 안에서 그 의지의 선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삶의 지속적인 반복이 그 사람의 존재의 가치를 뛰어나게 만들어줍니다.
둘 다 구원받은 사람인데 한 인간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그 은혜를 방탕하게 살면서 다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방탕함이 그를 이끄는 대로 종횡무진 아무렇게나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끊임없는 의지의 선함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분투합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그런 의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매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처음 주신 그 은혜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그 계명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 힘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사랑을 가지고 그 일을 행할 수 있도록 선한 의지를 끊임없이 이끌어내어 달라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그 주신 의지를 마음을 다해서 활용하며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 의지가 아직도 상당히 많이 남아있는데도 선한 의지를 더 많이 이끌어 내어주시도록 어린아이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힘닿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갑니다. 두 사람의 존재 가치가 같습니까? 두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똑같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렇게 만약에 하나님이 판단하신다면 우리가 그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똑같습니까? 오히려 성경은 정 반대로 이야기를 합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 있는가 하면 착하고 충성된 종이 있습니다. 똑같은 종이었는데 주님이 내리신 판단은 다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악한 상태에 떨어져도 기본적인 존귀함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밖에는 없고 그 이상은 어떻게 살든지 인간의 존재는 더 이상 존귀해지지도 않고 더 이상 비참해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의 많은 진리들을 근본적으로 거절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자기 뱃속으로 아이를 낳았는데도 어떤 애보고는 대놓고 ‘내 인생 최대의 실수는 너 같은 놈은 낳은 것이다.’ 이런 부모가 있는가 하면 ‘애야 내 인생 최고의 기쁨은 너였단다.’ 똑같은 뱃속으로 낳은 자식인데 자기 자식보고도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하물며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한 사람은 끊임없이 완전한 행위로서 여호와의 법에 거하며 그래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채 힘닿는 대로 호흡이 끊어질 때까지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한 사람은 욕망이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삽니다. 그런데 그 두 존재가 하나님 앞에 똑같은 가치가 있다고 어느 천치 바보가 그런 소리를 하고 다닙니까? 후자는 존재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님이 진짜 그 사람이 돌이키고 새로워질 기회를 하나님이 주시기 위해서 존재하셨는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존재하게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그 사람으로 인해서 자꾸 파괴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아까 얘기한 그 사람하고 존재의 가치가 똑같은가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존재가 똑같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 가치가 틀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다음 진도를 나가야 합니다.
오늘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행복하십니까, 불행합니까, 만족합니까? 아니면 만족스럽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에게는 그것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존재를 달아보실 때 여러분들의 존재의 가치는 어느 정도입니까? 혹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살아있게 하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게는 무거운 부담이 그런 존재들이 됩니까? 아니면 여러분들의 존재 그 자체가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세상에 많은 사랑을 주고도 나는 너와 바꿀 수 없다. 그런 존재입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인정할 것은 우리들이 정직하게 인정하고 넘어갑시다. 세월이 흐를수록 쉬운 신앙의 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환영을 받습니다. 제가 죽고 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악한 시대가 올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어떻게 신앙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지금부터 진지하게 고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때가 가까워올수록 사람들은 진리를 듣고 어려운 믿음의 길을 가기보다는 진리를 버리고 쉬운 불신앙의 길을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인간 안에 있는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그러니까 시인이 이런 다양한 삶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 앞에 고난을 당할 때도 아주 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고 광야에 버려진 것 같은 외톨이가 되었을 때도 하나님 앞에 가치 있고 소중한 존재로 형통할 때도 그분을 찬송하고 경배하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게 만들어주었던 것은 환경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선한 의지가 그 안에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한 의지가 가득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끊임없이 그 사람의 영혼 안에서 작용했기 때문이고 의지의 선함을 이끌어내는 이 신령한 의지의 작용은 이 시인의 고백에 의하면 항상 진리를 통해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왜 그랬다는 것입니까? “고난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당하고 난 후에는 주의 율례를 깨달았나이다.” “주의 진리의 말씀이 내게는 천 천의 은금보다 더 소중합니다.” 라는 이 고백이 이 시인의 고백 속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시인은 우리와 같은 곤궁하고 괴로운 유혹을 받는 수많은 환경을 지났지만 그러나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는 의지의 선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매우 가치 있는 존재로서 일생을 살수 있었습니다.
Ⅲ. 영혼 안에 있는 의지
그러면 이제 여기서 우리들이 영혼 안에 있는 의지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많은 철학적 논쟁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여기서 이 모든 것을 여러분들에게 상세하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큼만 이제 이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성경과 그리고 이성에 사이에 입각해서 이제 여러분들에게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영혼의 본질은 경향성들과 힘으로 이루어져있는 영적 실체입니다. 영혼의 본질은 경향성들과 힘들이라면 그 영혼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인식하고 사랑하고 실천하는 기능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저는 지성, 그리고 애성, 그리고 실천하는 기능을 의성이라고 부릅니다. 지성, 애성, 그리고 의성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의 기능입니다. 그리고 이 영혼이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 영혼의 작용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요약을 하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영혼의 작용입니다. 그 영혼이 마음이라는 것에 투사되어서 그 마음을 형성해서 그 마음이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지성과 애성과 의성을 사용하여 실제로 어떤 행동들을 만들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은 이런 마음이 무엇인가를 결정하고 움직이는 이런 작용들에 있어서 주의는 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A. 영혼의 한 기능: 意性
그런데 이제 이 의성이리라고 하는 것이 영혼 안에 있는 한 기능인 의성, 이 의성인데 이 의성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의지 능력과 의지 자체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마치 지성이 지적 능력과 지식 자체로 이루어지고, 애성이 애적 능력과 사랑 자체로 이루어지듯이 의성 또한 의지 능력과 의지 자체로 이루어집니다.
1. 의지능력
창조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의지능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 능력이 있었기에 인간은 하나님이 주신 명령을 쫓아 창조의 목적에 기여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죄가 들어오면서 파손되기는 했지만, 그 능력 자체는 아직도 상당부분 건재하게 남아있다.
a. 이행능력
이 의지의 능력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이행 능력입니다. 의지능력 안에는 이행 능력이 있습니다. 이 이행 능력은 자기가 욕구하는 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행 능력입니다.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지성이 제일 맏형입니다. 지성이 생각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때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합니다. 옳은 것은 둘째 형 애성이 사랑을 하게 됩니다. 사랑을 하게 되면 욕구를 하게 됩니다. 그 사랑에 부합하는, 그 욕구를 받은 셋째인 의지가 그 욕구를 받들어서 어떤 하고 싶은 것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행능력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성의 판단과 애성의 사랑, 그리고 의성의 실천을 통해서 한 사람의 존재가 인식하고 사랑하게 된 바가 행동으로 흘러나와서 흘러나오는 행동들 때문에 이 사람의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입증되는데 이 둘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존재 자체가 많은 존재에 맞는 행동들을 산출해내고 이 사람의 행동에 의해서 이 사람의 존재가 어떤지를 파악하게 되는 연속성이 있는 이런 유통관계를 형성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지니 열매를 보면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안다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가, 좋은 나무에서는 좋은 열매가 나쁜 나무에서는 나쁜 열매가 맺게 됩니다. 그러니까 열매가 틀리고 나무가 틀리지만 열매는 나무의 연속이고 나무는 열매의 연속이기 때문에 양자 사이에 존재와 그 다음에 그 생산 사이에 일치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구도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까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싶어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 자신을 하나님이 충만하게 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 충만한 인간의 삶을 통해 드러내는 행동과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천지를 통해서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 사이에 이게 논리적인 일치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이 땅을 섬기면서 살지만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이 땅을 돌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지능력을 주십니다. 이 의지능력 안에는 바로 이행능력이 있습니다. 이 이행능력은 느끼고 욕구하는 바를 계속 실천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게 인간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타락한 후에는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타락을 하고 나니까 이 의지능력 자체에 손상이 온 것입니다. 손상을 입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상당부분 아직까지 건재합니다. 문제는 의지능력 자체가 손상을 입은 것도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전에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향해서 이행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악한 이행능력을 인간이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행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가치적으로 중립적인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자기 사랑이 가득 담기니까 이성능력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쪽으로 이행능력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사는지 한번 보십시오. 난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본받아야지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친 듯이 살아갑니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해서 진짜 뼈 빠지게 인간들이 삽니다. 물불 안 가리고 삽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미친 듯이 살아가는 그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이성능력이 최고로 발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듭난 후에는 어떠한가. 거듭난 후에는 하나님이 이행능력을 다시 원상태로 돌리시는 것입니다. 거듭나면 영혼에 하나님을 향한 까리따스의 사랑이 충만하게 되니까 그 다음에 이성능력이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사용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 게으르게 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그가 누구든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 열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지루함과 피곤함, 말할 수 없는 만물에 대한 싫증 속에서 그렇게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던 노래 가운데 하나가 있는데 유행가입니다. 60년대 엄청나게 유행했던 팝송입니다. 이 자리에서 부를 수는 없지만 그 가사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맞는지 모르겠는데 머릿속에 기억나는 대로 미리 준비한 원고가 아니니까 이해하십시오. “왜 태양을 빛나는지, 왜 파도는 끊임없이 해안으로 밀려오는지, 왜 새들은 노래하는지, 왜 하늘에 별들은 빛나는지 저들은 모르는가봐 나의 사랑이 끝이 난 것을” 그러니까 사랑이 자기에 의해서 끝나니까 온 세상에 의미가 다 변한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숙해지기 위해서는 반듯이 목숨을 걸고 사랑해가야 합니다. 아! 그러면 옛날에 떨어졌는데 연애나 한번 해볼까? 가소롭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면 수십 명의 남자와 그런 사랑에 빠진 것보다 훨씬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죄 속에서 깨닫는 진리라고 하는 것은 하찮은 것입니다. 한 번 더 반복하겠습니다. 죄와 타락 속에서 진리를 깨달을 수 있지만 그 가운데서 깨닫는 것은 아주 하찮은 것들입니다. 은혜 안에 있으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입니다.
b. 저항능력
또 하나의 능력이 무엇인가 하면 저항능력입니다. 이것은 하기 싫은 것을 끝까지 안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역방향입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이행능력과 똑같은 정도의 저항능력을 주셨습니다. 이 능력은 싫어하는 바는 자기가 안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무엇에 의해서 강요를 당해도 안하도록 버틸 수 있는 내적인 강압을 느껴도 안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죄가 들어와서 상당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아직 상당부분이 아직 건재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끊임없이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고 사랑을 주셔도 그것을 거절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이 완강함을 보십시오. 이 저항능력을 극도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배에 나왔지만 만감이 교차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에 관한 시리즈를 들으면서 만감이 교차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정말 부담스럽다. 그런데 외면할 수는 없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서 아름다운 영혼이 되자니 세상이 주는 즐거움을 잃어버릴 것 같고, 영혼이 아름다워지는 길을 포기하고 세상에 탐닉하자니 진리를 통해 깨닫는 그 삶의 마지막 결국이 너무 비참하구나. 미묘한 갈등을 막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너무나 택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진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바로 핵심이 그것입니다. 호시탐탐 그 진리를 부인할 수 있는 그 무엇인 구실들을 찾아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될 때 영혼은 매우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로와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인데 마약에 의한 안식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저항능력은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원래 저항능력을 주셨던 의도와는 정반대로 인간이 사용하는 것인데 그런데 은혜를 주시면 이 저항능력이 다시 회복이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는가 하면 내적으로 아주 심하게 강요를 받습니다. 유혹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놀랍게 버티는 것입니다. 그 의지능력이, 저항능력이 대단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정말 놀랍게 뛰어난 능력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저항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안에 있는 의성능력입니다.
2. 의지자체
이것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것이 또 하나가 있는데 의지자체입니다. 이 의지자체와 의지능력이 합쳐져서 의성이라고 불립니다. 처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는 의지의 능력만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의지자체가 충만했습니다. 이런 것은 어떤 논리에 의해서 논변이 될 수 있는가 하면 지성이 바로 지적인 능력과 지식 자체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지적능력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눈을 뜨고 창조되자마자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하나를 학습하면서 그 창조세계를 전부다 배워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세살 먹은 아이도 철학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소위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선지식이 인간에게 있었습니다. 지식 자체를 넣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딱 보았을 때 물론 그것은 생전 처음 본 것이었지만 봤을 때 창조된 것을 보면서 마치 대자비유라고 하는가, 마치 자신이 인식하거고 있는 것들이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는 것들이 실제로 창조된 속에서 딱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두개가 일치를 이루면서 보이는 가시적 사물을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인식의 페러다임들이 작동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다른 모든 짐승보다 뛰어난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논리에 의해서 애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맨 처음에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가슴이 텅 빈 공허함 속에서 창조되었습니까? 그리고 하나씩, 하나씩 사물을 보아가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기 시작해서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하면 그런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을 정말 이성적으로 창조를 추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우리가 인정해줄 수 있겠습니까? 4살 먹은 아이보고 물어봐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 기본적인 논쟁들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눈을 딱 뜬 그 순간에 이미 벌써 이 사람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창조의 세계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애정이 꽉 차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내가 사랑해야지 돼, 말아야지 돼, 이것 뭐 사랑할 가치가 있나. 몇 번쯤 해야지 돼. 그러면서 툭툭 발로 치고 나니까 장구한 세월이 걸쳐서 아담 속에서 만물에 대한 사랑에 대한 질서가 생겼단 말입니까?
그러면 결정적으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와가 창조되었습니다. 그때 그를 보자마자 마치 그것은 사랑이 생겨났다기보다는 이미 그 사람 안에 가득 있던 사랑이 바로 그 하와의 모습을 딱 본 순간에 바늘로 찔러서 터지는 것 같은 고백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이런 사랑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와가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사랑이 있는가. 그래서 내가 교통적 사랑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직 하와가 존재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이미 그 충만한 까리따스의 사랑이 하와가 창조되자마자 이미 벌써 그 사랑이 하와가 태어나면 흐르도록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청년이니까 해도 되겠습니다. 잠재패의 방식으로 그 사랑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잠재패는 가능패는 조건이 갖추어지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만 있는 것이 가능패입니다. 잠재패는 조건이 완성되면 반드시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 잠재패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밖에 없었을 때 아담 안에 있는 하나님 사랑은 이미 사람을 향해서 잠재패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하와가 생겨나니까 그대로 흐르는 것입니다. 따로 그 사랑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그냥 딱 존재가 태어나니까 그냥 그 속으로 흘러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던 거의 동질의 사랑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런 논리에 의해서 하나님이 의지의 능력만 주신 것이 아니라 창조될 때 인간 안에 의지자체를 가득 담아주셨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상태로 인간이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해하고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의해서 저항할 수 있는 꽉 찬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을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그때에 그 의지 능력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위해서는 이행하는 능력으로 거스르는 것에 의해서는 저항하는 능력으로 나타났고 그리고 의지자체는 선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면서 부서져버렸습니다. 그래서 의지의 선은 사라지고 악의로 가득 찬 상태가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께 순응하는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께 끊임없이 대적하는 의지로 인간이 꽉 채워지게 된 것입니다. 의지의 능력에 있어서는 저항할 것에 대해서는 이행하도록 이행할 것에 있어서는 저항하도록 인간이 파괴된 인간의 영혼이 그 의지라는 기능 속에서 그대로 반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마음으로 쏟아져내려오면서 마음이 그것들을 사용해서 일을 하니 거기서 나오는 것이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살아가는 수많은 육체의 열매와 정욕들입니다. 거기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B. 마음과 의지의 작용
1. 마음과 의지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여기서 모두 궁금할 것인 마음과 의지의 작용의 문제를 우리들이 여기서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여러 번 반복해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의 마음은 실제가 아니라 하나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영혼이 활동하는 이 작용이 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사용해서 이 마음이 지성이 반영되고, 애성이 반영되고, 의성이 반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마음을 인간이 사용해서 그래서 이 마음이 그 지성과 애성과 의성을 사용해서 인간의 수많은 행동들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마치 영혼 안에 있는 지성과 애성과 의성이 마음 안에도 그대로 투영되어서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마음이 정말 비실제인가? 비실제이면 어떻게 그 속에 이런 지식적 작용, 그 다음에 사랑의 감정 작용, 그리고 또 여기에 실천하는 의지의 작용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는가 하고 혼란을 느끼는데 혼란을 느낄 것이 전혀 없습니다. 기능입니다. 지성이라든가 애성이라든가 그 다음에 의성이라고 하는 자체는 영혼이 세 쪼가리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희랍 철하자들은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세 쪼가리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힘과 경향성들이 일로 이루어져있는 그 영혼의 기능입니다. 그 기능이 마음을 통해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통해서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지성이 아주 둔하면 미련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애성이 미움으로 가득차 있으면 상처를 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의지가 악함으로 가득 차 있으면 무엇을 하든이 악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의지의 선함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의 아름다움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에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은 단일하고 포괄적입니다. 단일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하면 은혜의 효과가 영혼에 미쳤을 때 지성에 작용할 때는 은혜가 A 라는 방향으로 애성이 작용할 때는 B 라는 방향으로 의지의 작용할 때는 C라는 방향으로 작용해서 이 세 가지가 도대체 영혼을 받기는 받는데 방향성에서는 일치하지 않는 이런 식으로 은혜가 작용한다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영혼에 작용하게 되면 단일하게 작용을 합니다. 그 미치는 효과는 각각 양태가 틀리지만 지성으로 하여금 선을 바라보도록, 애성으로 하여금 선을 사랑하도록, 의지로 하여금 선을 추구하도록 이렇게 단일하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또 포괄적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영혼에 미치는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는 지성만을 새롭게 하거나 그리고 의성과 애성에 대해서는 아무 효과를 못 미치거나 애성에는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지성과 그리고 의성에는 더 영향을 못 미쳤다거나 또 반대로 애성과 지성에는 거의 영향을 못 주었는데 의성에는 엄청난 영향을 주어서 선한 의지를 회복하게 했다는 그런 식으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혼에 대한 은혜의 작용은 포괄적입니다. 은혜가 크면 큰 영향을 세 기능 모두에게 미치고 그러니까 은혜가 작으면 작은 영향을 세 기능 모두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영혼은 아닌데 선한 의지로 충만하다. 그런 것을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또 비록 지성은 흐리멍덩하고 의지에는 충만함이 없지만 애성에는 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하다. 그런 기형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렇게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경험하는 많은 눈물을 흘리고 열광하는 행동을 보고 그 사람 안에 애성이 가득 찼다고 판단할 것인데 그것은 성경적적인 진정한 영성 안에 있는 애성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교회에 와서 주님을 만나야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 겨울 연가를 보면서도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의 질이 틀리겠습니까? 똑같습니다. 그런데 무슨 차이가 있나. 그것은 가짜 사랑입니다. 가짜 사랑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그 덕분에 한류가 퍼져나가기는 하지만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영혼, 그 사람 안에 의지의 선함이 있고 그 아름다운 사람이 선한 사람이고 선한 사람이 가치 있는 존재이고 가치 있는 존재인 그 사람이 탁월한 존재가 된다고 하는 것으로 우리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바로 영혼에 있는 기능들이 마음에 투영되었습니다. 마음이 그것을 사용하는데 성경은 이 마음의 주인을 우리로 부릅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경건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르기를 “아들아, 네 마음을 나에게 주며” 그 아버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의 계명을 어린아이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는 그 아들입니다. 그런데 “네 마음을 나에게 주며” 왜? 그래야지만 아버지로부터 흘러나가는 경건한 교훈이 그 속에 스며들 수 있으니까. 그래서 또 뭐라고 말씀합니까? “무릇 지킬 만한 모든 것보다 너희 마음을 지키라. 이는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서 남이니라.”까지 말씀하셔서 마치 우리가 육체와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엄청난 중요성을 마음에다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은 굉장히 중요한 화두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마치 그래서 우리의 인생 전체를 움직이는 마치 사령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에 따라서 결국은 삶도 그렇게 가고 결국은 마음이 영혼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이 마음과 영혼은 연결이 됩니다. 인간의 의성과 선한 의지, 그리고 인간의 마음도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그러니까 영혼 안에 있는 의성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선한 의지로 가득 찬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면 마음이 잠깐 미끄러져도 돌이키기가 매우 쉽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미끄러지지 않도록 굳게 붙들어줍니다. 그러니까 이게 총체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누가 기도하면서 영혼의 변화, 영혼의 깨어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영혼이 변화된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게 결국은 잘못되어 있는 이탈한 힘과 경향성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변화가 빨리 일어나서 마치 그것이 자기 안에서 아주 획기적인 변화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영적인 쇄신입니다. 이런 쇄신이 일어나게 되면 지성과 애성과 의성의 작용에 변화가 오게 됩니다. 당연히 그 사람의 마음의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과 의지의 관계입니다.
2. 인간의 책임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책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의지의 선함은 은혜의 소산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는 신비적인 작용을 우리들이 여기서 보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상당부분을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 가치가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의지의 선함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의지의 소중함을 거의 상실해버리고 바닥이 나게 되면 가치 없는 사람이 되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사울과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이 그를 존귀하게 여기셔서 그를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으로 세우십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이 어떻게까지 말씀하십니까? “내가 저를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그 이야기는 그 사람의 존재가 존재로서의 가치의 평균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존재 하나, 안 하나 마찬가지인 인간의 도를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 계속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파괴하는 단계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열왕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의 많은 왕들이 처음에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는 육체로 마칠 때 가장 우리를 슬프게 한 기록은 “그는 아끼는 자 없이 죽었더라.” 하나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도 그 사람이 거기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그리고 죽습니다. 아끼는 자 없이 죽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것도 우리들이 성화에 있어서 아주 중대하게 우리에게 적용을 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적응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 이야기는 좀 있다가 하고 여러분들 이야기를 먼저 합시다. 자, 우리는 흔히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의지의 선함을 거의 잃어버리고 영혼은 추루한 상태가 됩니다. 그때 뭘 회상하는가 하면 하나님과 은혜를 나누었던 상태를 회상합니다. 자기가 생애에서 하나님께 가장 사랑을 받던 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며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는 매우 중대하고 특별한 계획 속에 자기가 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려면 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런 생각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지금의 추루하고 선함을 잃어버린 자신의 악한 의지의 상태에 대해서 개탄하게 만들어주어야 되는데, 내가 적어도 이렇게 하나님의 계획 속에 부름 받은 사람인데 내가 이렇게 추루한 영혼이 되었다니 그리고 개탄해야 합니다. 그런 특별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는데 내 의지의 선함이 없구나, 아! 정말 원통하다. 내가 어떻게 그 선한 의지를 다 잃어버렸을까. 이것은 정말 나답지 않은 것이다. 이런 쪽으로 적용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참회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특별한 남들과는 구별되는 특별한 계획 속에서 나를 불렀고 옛날에 나를 그렇게 소중히 여기셨으니까 어떻게 되겠지. 거기서 안정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선한 의지가 촉발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겠지. 그러면서 점점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끊임없이 구합니다. 유혹을 피하면서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져 들어가면서 은혜를 구합니다. 자기 의무를 이행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리로 나아오려고 끊임없이 분투하면서 은혜를 구하여야 할 텐데 그 은혜의 방편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성경을 보면 한때 탁월한 계시의 빛을 받았던 사람이 비참한 말로로 마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사나 히스기야 같은 사람들도 그런 임금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인간의 책임이 대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의 경우 고난과 시련, 위기와 괴로움을 모두 지납니다. 그렇게 힘든 길을 걷습니다. 그런데도 어째든 쓰러질 때도 있고, 웅덩이에 빠질 때도 있는데 그러나 일관되게 전체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 앞에 선한 사람으로 판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죽은 후에도 다윗이 걸어갔던 길은 다윗의 길이 됩니다. 그 길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걸어가는 대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선하였으면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 누가 아주 배역한 삶을 살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 이렇게 두 사람이 하나의 척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그가 비록 넘어지고 깨트려지고 이런 길을 걸어가기는 했지만, 죄에 빠지는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인간이었지만 그 다양한 삶의 모든 환경 속에서 계속해서 가치 있는 존재로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바로 그가 의지의 선한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단호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보다 아주 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우리자신이 얼마나 약한지를 알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아마 기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약한 존재입니다.
때로는 넘어져도 최후 승리를 믿노라
그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어두움 밤에도 주의 밝은빛 인도하여 주신다
때로는 넘어져도 이게 우리 인간입니다. 다윗이 똑같은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삶의 굴곡 속에서 의지의 선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의지의 선함을 너무 쉽게 포기합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이 의지의 선함을 포기합니다. 그리고 신속하게 악해집니다. 그리고 여건에 핑계를 댑니다. 때로는 사람 때문에, 때로는 환경 때문에, 때로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수없이 핑계를 댑니다. 그리고 이 의지의 선함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존재의 가치를 아주 격하시키는 것이고 심하면 말할 수 없이 하나님이 사랑하던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에게 괴로움이 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창조의 목적에 보탬이 되는 사람으로까지 전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나는 여전히 하나님에게 동일하게 가치 있는 존재라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아주 명백한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쉐안 키에르 케고르라고 하는 실존주의 철학자는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한 사람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단독자로서 홀로 서는 것입니다. 누구도 친구가 없습니다. 누가 어떻게 한다고 하는 것이 내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혼자 하나님 앞에 서서 그 주님의 임재의 빛 앞에서 홀로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본질입니다.
그러면 이런 의지의 끊임없는 선한 상태는 어떻게 올 것인가.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의 의지의 끊임없는 활용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말고 굳세어라. 의지가 그렇게 작동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목표를 따라 가게 하기 위해서 이행능력을 행사하고 거기로 가지 못하게 하는 많은 요인들에 대해서 저항능력을 발휘하면서 일정한 그 목적을 따라서 가라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이런 선한 의지를 끊임없이 유지해서 우리들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되는 길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우리 안에 있는 선한 의지가 끊임없이 이끌어져내어야 됩니다. 그래서 의지의 선한 상태를 유지한 모든 사람들은 눈물이 고인 사람들입니다. 그의 눈이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그의 눈에 고인 눈물은 무엇을 향한 눈물일까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내 속에는 내가 너무 많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준행하고 이행할 수 없기 때문에 나에게는 내 안에 있는 모든 악한 의지를 누르고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시는 주님의 은혜의 작용이 매우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내 모든 것을 다 가져가셔서라도 나는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을 갈망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그들만이 선한 의지를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으십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인데 우선 첫째는 은혜를 구하는 사람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대항하던 길에서 돌이켜 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의 마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던 길에서, 그 배향하던 길에서 되돌아서야 합니다. 은혜를 필요로 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이미 하나님을 배향하던 길에서 돌이켜 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사랑을 가지고 욕망을 따라서 살아가는 데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능력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지 자체가 악한 것으로 가득 채워지면 그러면 그냥 가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도 자기의 책 속에서 말하기를 인간에게 자기 사랑을 가리킬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인 자기 사랑으로 꽉 찬 존재로 태어나기 때문에 학습하지 않아도 인간은 훌륭하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과 타인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는 아주 엄격하도고 일평생동안 치열하게 지속되어야 하는 교훈과 학습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욕망을 따라서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욕구로 꽉 차있고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런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은혜가 필요가 없습니다. 은혜는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갈등을 많이 불러일으킵니다. 여러분들이 언제 갈등을 일으키는가 하면 두 가지 경우인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자기 사랑의 유혹을 받을 때, 충분히 자기를 사랑하며 육욕적으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일부 시작되었을 때 갈등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라고 기도할 때는 이미 그 사람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던 이 배향의 길에서 돌이켜선 것입니다. 전환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렇게 은혜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는 그 은혜를 부어주셔야지 만 그가 비로소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끊임없이 베풀어주실 때 의지의 선함을 그 은혜의 작용에 의해서 의지의 선함이 계속 이끌어내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차이는 엄청납니다. 그러니까 바탕이 좋은데 회개를 안 하는 신자보다는 바탕이 다 망가졌는데 끊임없이 깨어지는 신자가 훨씬 생명을 풍부하게 누리면서 살아갑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본성적 바탕이 매우 좋지만 자기 깨어짐이 없는 신자보다는 본성적 바탕이 매우 악하지만 끊임없이 고통 속에서 깨트려지는 신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 안에 더 많이 누리면서 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를 놀랍게 고치십니다. 그러니까 세리가 바리새인이 못 만난 하나님을 만난 것은 바리새인보다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바리새인에게는 없는 마음의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입니다. 은혜를 갈망하니까 실제로 바리새인보다도 악한 인간이었는데도 하나님이 그를 만나주시고 그에게 오히려 의롭다 여김을 받게끔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Ⅳ. 아름다움을 보호하는 의지
그러면 우리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의 존재의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이 훌륭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여러분들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일이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일이 여러분들의 존재의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존재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은 여러분들의 삶의 양태와는 상관없이 얼마나 의지의 선함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그것에 의해서 여러분들의 존재의 가치는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미모가 없고 그리고 많은 재물이 없고 꽃처럼 아름다워서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그런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더라도 여러분들이 이 세상 어느 한구석에 있든지 간에 의지의 선함을 가지고 나 같은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시고 이 창조된 세계를 섬기도록 나를 빚으신 그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살든지 죽든지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그분이 나를 창조하신 뜻에 부합하게 되도록 창조의 큰 목적에 기여하게 되도록 그렇게 살고 싶은 의지의 선함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이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탁월하게 보이는 모든 사람보다 귀한 사람입니다.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멸시와 욕 가시관 쓰셨네
우리 예수님이 바로 이런 의지의 선함을 인간이 얼마나 충만해가지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수 있는지 모본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분에게는 악이 조금도 없으셨으니 그분의 의지에는 선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멸시를 받는 이 세상 때문에 많이 우셨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 땅에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인데도 인간들이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는 이 세상을 보시면서 많이 슬퍼하셨습니다. 선한 의지를 갖고 계셨기 때문에 악한 의지를 가진 이 세상과 싸우셨고, 선한 의지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그 선한 의지를 펼칠 수 없는 이 세상을 보면서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많이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선한 한 인간 예수의 삶입니다. 바로 그런 삶의 방향으로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가치관이 아주 분명해지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바라는 많은 것들을 이 기독교 신앙 안에서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치관이 올바로 정립되기만 하면 여러분들이 원하는 모든 것이 이 기독교 신앙 안에 다 있습니다. “모두 주어서 모두 받을 수 있어서 부족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라고 하는 시편 23편에서 시인의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의 가치는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고통스럽고 더 이상 땅을 더럽히실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남아있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쓸어버린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가 이 세상에서 존재를 끝내었을 때 그 영혼을 받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보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스데반의 영혼이 순교할 때 바로 그런 경험을 우리들이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교회의 집사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유명한 인사였는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그냥 필부였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서 교회의 집사가 되었을 뿐입니다. 열왕이 죽어도 보좌에서 일어난 적이 없으신 예수님이 이름 없는 전도자가 죽자 보좌에서 일어나셨습니다. 그 영혼을 받으시기 위해서 일어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의 존재의 가치가 같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허위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끊임없이 영혼의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그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고 그 안에 있는 선한 의지가 끊임없이 이끌어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모두가 이 세상에서 정말 훌륭한 가치를 지닌 사람, 없어서는 안 되는 매우 소중한 존재로 잠시가 아니라 일생동안 살다가 마지막에 우리의 인생을 마름할 때 주님이 비록 명령하셔서 이 땅에 우리의 목숨을 거두시기는 했지만 그 영혼이 수고를 끝내고 당신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 때문에 주님 자신이 감동을 받으셔서 보좌에 일어날 수 있는 나시고(?) 싶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우리의 가치라고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정말 그렇게 우리의 존재를 선하게 만들어주는 우리 자신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고 영혼의 아름다움 안에서 의지의 선함을 이끌어 내어주는 그 신령한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들에 대해서 우리가 정말 끝없이 목말라했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주님의 부어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도저히 살수 없어 하나님 제가 여기에 살아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에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뼈 속 깊이 악이 배인 인간입니다. 도저히 선을 행하기에는 철저하게 무능하고 본성은 뼈 속까지 부패하여서 주 하나님을 기뻐할 수 없고 더욱이 그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수 없는 인간입니다. 나의 전 존재가, 나의 온 영혼이 그 주님께 기대오니 하나님 나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나에게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만약에 주님이 저에게 더 이상 베푸실 은혜가 없다면 은혜 없이 이 세상에서 추루한 존재로 목숨을 연명하니 차라리 나를 거두어 은혜의 왕국 안에서 살게 해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됩니다.
지난주 중국에 가서 사역자들을 섬겼습니다. 무엇인가 도움을 구하기에 제가 얘기했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습니다. 참고 또 참고 참으십시오. 인내하고 또 인내하고 견디고 또 견디십시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끊임없이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부족과 무능을 뼈저리게 느끼며 주님의 손에 붙들리는 것만이, 시시때때로 분초마다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이 나를 선한 목적을 따라 살게 할 수 있고 나는 결코 신뢰할 수 없다고 믿는 그런 사람 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이런 은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최근에 어느 잡지사에서 온 어느 기자가 저에게 그런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열린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에 대해서 논평가들이 논평하는 가운데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우시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봤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한 사람은 스스로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있는 사람들이 있고,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스스로의 영혼을 위해서 울지 못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울어주어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배 시간에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예외 없이 우는 날, 나는 여러분들에게 약속하겠습니다. 그날 제가 웃겠습니다. 도대체 우리의 인생이 무엇일까요? 있지도 않은 악을 향해 그리고 공허한 충동을 따라서 악하게 산 인생의 마지막의 결국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줄까요? 진리를 외면하고 그렇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거짓 기쁨들이 우리의 영혼에 무엇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선한 의지를 잘 지키며 살아가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 뭐 말라빠진 행복인지 한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그 쓰레기 같은 행복과 보람 속에서 우리의 영혼에 닻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도 책임질 사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그 은혜 속에서 의지의 선한 상태를 유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치 없는 비루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결국은 누구도 그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없고 자신의 존재의 무가치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바로 이 아름다움이 의지에 의해서 보호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바로 이 의지의 선함 안에서 보호되는 것입니다.
유혹을 만나 육욕에 떨어져서 큰 죄를 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합니다. 선한 의지가 발동합니다. 그래서 온 힘과 마음을 다해서 유혹의 때를 지납니다. 그러면 영혼의 아름다움이 파괴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폭풍이 흔들고 지나가서 큰 유혹을 받았지만 영혼은 안전합니다. 고난이 옵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을 할 법도 합니다. 그런데 의지의 선한 상태를 발동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정말 원망하고 싶은데 끊임없이 자기 그를 꾸짖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불안하느냐. 나는 나의 도움이 주님께로부터 만 옴을 믿노라 나는 비록 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고 신앙의 폭풍 가운데를 지나도 그분은 선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내 인생은 그분의 계획안에 있다는 것을 나는 믿노라.’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지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시련과 고난 속에서 자기에게 고통을 주고 그리고 자기 사랑의 질서를 강요합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배신하고 친구했던 사람들이 발꿈치를 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외톨박이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향해 미움의 칼을 갈만도 합니다. 속에서 끊임없는 혈기와 인간의 정욕들이 솟아오릅니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 다 쓸어버려야 할 찌꺼기들 끊임없이 솟구칩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의지의 선한 상태로 이것을 누릅니다. 그대들은 나에게 악을 행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이 그대들의 악을 내게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나이다. 하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요셉을 생각해보십시오. 혹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혹은 깊이 모함을 받을 때 그것을 기회로 삼아서 자신 안에 있을지도 모르는 죄악들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섭리에 도구 속에서 나를 깨끗하게 하는 그런 수단으로 사용해주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깊이 찬송하도록 마음을 갖습니다. 선한 의지를 끊임없이 붙듭니다. 끊임없이 솟구치는 악을 계속해서 통제하며 그러며 악을 선으로 바꿉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원수까지 사랑하기에 이릅니다. 그런 선한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혼은 악마의 궤계가 아무리 뛰어나고 죄의 능력이 하늘을 찌른다고 할지라도 그 영혼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그 영혼은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그 선한 의지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의 비틀거리던 신앙의 발자취를 돌아보십시오. 정말 우리에게 선한 의지가 있었나요?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피 흘리기까지 예수님처럼 믿음의 사람들처럼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왔나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은혜는 우리의 선한 의지를 지키지 못하는 이 패역함 속에서 색욕거리와 바꾸어버렸고 주님이 주신 많은 은혜는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까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워졌다가 추루해지고 다시 아름다워졌다가 다시 더러워지는 이 의미 없는 반복들을 계속 하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싫증 속에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이 모두 우리의 악함이지 하나님의 능력의 부족함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젊은 날에 그대들이 주님을 믿고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 안에서 살아가게 된 것은 매우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젊은 나이에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나이가 많이 든 노년에 하나님을 믿게 된 사람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만에 빠지지는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인생의 길이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가치, 의지의 선함의 여부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여러분들이 끊임없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선한 의지로 충만해지지 않는다면 젊은 날에 예수님을 믿은 그것이 더 많이 주님의 마음에 못 박을 수 있는 시간들을 여러분들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인정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눈을 들어서 예수를 바라보십시오. 그분이 바로 이런 선함을 가득 지으신 채 일생을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자기를 다 버리시며 철저한 헌신의 삶을 사셨던 이유도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선한 의지를 가지며 분투하며 사람으로서 참으로 살아야 할 삶을 주님이 사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그대들 모두가 이 세상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런 착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유명해지는 사람도 있고, 무명해지는 사람도 있고, 섬기는 사람도 있고, 섬김을 받는 사람도 있겠지만 삶의 양태가 어떠하든지 간에 이 땅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님의 마음에 큰 기쁨이 되는 선한 의지를 가득 가진 존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은혜에 의해서 분초마다 선한 의지가 이끌어내어지고 그 은혜에 의해서 그 선한 의지가 굳게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 있는 날 동안 살아있는 사람이 숨을 쉬듯이 여러분들이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眞善美
8. 영혼의 아름다움과 진리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시119:19-20)
Ⅰ. 본문 해설
이 시간에는 영혼의 아름다움과 진리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시편 119편에 저자는 구약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다윗의 시일 것이라고 믿고 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편 119편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서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지만 늘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한 가지 진리를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나그네길이라고 하는 사실은 조금 현명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이미 다 알고 고민하던 문제들이었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라 이름 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 세상이 자신의 영원한 본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누가 그에게 굳이 이것을 매일 상기시켜주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진정으로 자신이 영원히 바라보아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나면 정말 이 세상에 나그네길일 뿐이라는 사실을 아주 깊이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 시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이 시를 언제 지었을까 하는 것은 또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사실 시 안에 나오는 내용으로 보아서 이 시가 언제 지어졌을까 하는 것을 대충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여러모로 판단을 하겠지만 제 생각에는 이 시편 119편의 내용으로 볼 때 이것은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어린시절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산전수전을 다 겪고 인생을 많이 고난의 골짜기를 통과한 원숙한 신앙의 인격을 가지고 쓴 것입니다. 척 보면 알지 않습니까? 많은 원수들에게 시달리고 고통을 당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우여곡절이 나오는데 제 판단으로는 아주 어린시절에 쓰여진 그런 목가적인 시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저의 판단이 상당부분 사실에 기초한다면 그러면 이게 얼마나 이상한 고백입니까? 한 나라의 임금이었고 그리고 왕이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자기를 좋아하고 따르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의 군사들이 언제든지 자기가 명령만 하면 복종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때였는데 그때 자기네 나라 안에 살면서 자기가 “나는 이 땅에서 나그네이오니”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고백입니까? 만약에 그런 임금이 자기가 이 땅에서 나그네라고 고백을 하면 백성들의 마음은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이것은 뭘 보여주는가 하면 시인이 가지고 있던 영적인 고민과 관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바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생각하고 추구하고 있는 바를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기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바를 다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옆에 있어도 이 시인이 이 세상에서 나그네가 된 것을 면하게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나그네의 길을 가는 사람의 가장 시급한 문제 두 가지는 하나는 외로움이고, 또 하나는 안전하게 자신이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들이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이 시인은 자신이 바로 그런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땅에서 객이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을 나에게 숨기지 마옵소서.” 주님의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숨기지 말아달라고 하는 것은 깨닫도록 도와달라는 간청과 다름이 아닙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나그네이기 때문에 외롭고 그리고 가야할 목적지를 생각하면 능력이 없어서 불안해할 때에 그때에 이 시인은 그 답을 하나님의 계명에서 찾았습니다. 이 계명은 시인에게 그런 나그네 길의 외로움도 이길 수 있도록 위로를 주고 또 한편으로는 이 나그네 길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이 다윗의 마음에 갈 길을 밝혀주는 역할도 말씀이 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숨기지 말고 자기가 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이 시인이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바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정체 자체가 나그네입니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은 마치 한 항구에서 출발해서 다른 항구로 이동하는 배가 지나는 바다와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없이는 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지만 어떤 식으로도 이 세상과 떨어질 수 없이 이 세상을 항해하고 있지만 이 세상은 그곳이 어디이든지 그 사랑은 영원한 본향, 영원한 목적지가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도가 되어서 하늘의 가치를 찾아서 이 세상에 매이지 않는 영원한 가치를 찾아서 순례의 길을 가는데 그 순례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라는 곳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자기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하는 도장입니다. 세상이.
그러나 또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걸어가려고 할 때 이 세상에서 만나는 부단한 시련과 시험, 유혹과 끊임없는 세상사랑의 욕심들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고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이 바로 신자가 주 안에서 태어나서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통과하고 그래서 결국은 그 목적지에 이르게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백리쯤 가다가 갈 길을 포기한 사람이나 그 다음에 천리쯤 간 다음에 더 이상 가기를 포기한 사람이나 객지에서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홍해를 건넌 후에 즉시 광야에서 죽은 사람이나 40년 동안이나 끌려 다니다가 마지막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죽은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날 수 있겠습니까? 모두 그 본향에 도달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런 인생의 길에서 가장 큰 어려움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길이 어둡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눈을 떴는데 왜 길이 어둡습니까? 문제는 그 두 눈이 오히려 없었으면 오히려 밝은 길이 멀쩡히 뜨고 있는 두 눈 때문에 진짜 영혼의 눈이 어두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들은 이야기인데 한참 우리나라 선교회에서 개안수술을 해주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개 눈을 집어넣는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시력은 살아있는데 여러 가지 원인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시신경은 살아있는데 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부부가 장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교회에서 그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서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수술을 하고 나니 세상이 얼마나 신기한지 이들이 석 달이 채 안되었을 때 아주 근심어린 모습으로 의사를 찾아와서 우리를 다시 옛날 상태로 되돌려줄 수 없겠는가 하면서 주님을 믿기가 너무 힘들다고, 이해가 가십니까? 장님이었던 적이 없으니 이해가 안 가시겠지만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저는 그것이 그 사람들이 많이 배운 사람들은 아니지만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는 수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그 욕망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의 영혼의 눈이 어두워집니다. 바로 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면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한가 하면 빛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Ⅱ. 인간을 위한 두 광명
제가 21살에 회심을 했습니다. 회심을 하고 나니까 이제 막 열심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보통 기도는 교회에서 하고 특별한 기도는 아무래도 높은데 올라가면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서 기도원을 다녔습니다. 지금 보면 뭐 잘한 것 같지는 않은데 어른들이 하여튼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보통기도제목이 있을 때는 교회에서 하고 특별기도제목이 있을 때는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기도원에 올라가려면 그래도 하늘 높은 곳에 가야지 되니까 그래서 즐겨 찾았던 곳이 삼각산 꼭대기에 있는 기도원이었습니다. 불꽃(?) 건물이었는데 당연이 불꽃건물인데 7번을 허물었는데 8번째 지은 기도원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다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높은가 하면 거기 올라가면 저기 태릉 육군사관학교 있는 곳부터 시작해서 인천 앞바다까지 날이 좋으면 보입니다.
그렇게 높은데 거기를 이제 갔는데 왜 그런데 누구하고 같이 가지 않고 혼자 가면 은혜를 독차지할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이제 밤 10시에 세검정에 내려서 짬뽕 한 그릇 사먹고 그리고 이제 문방구에서 그때 돈도 별로 없어서 초등학교에서 쓰는 꼬마전구가 들어있는 간이전구 하나를 사서 올라갑니다. 젊은 걸음으로 부지런히 올라가면 1시간 20분쯤 걸립니다. 그런데 때가 그믐 때입니다. 캄캄해서 찬송을 부르면서 10쯤 지나서 산 아래서 출발해서 올라갑니다. 정확하게 삼분의 일쯤 올라갔는데 이게 불이 안 들어옵니다. 그때 국산이 오죽했습니까. 당장 뛰어 내려가서 문방구에 가서 항의를 할 수도 없고 애매합니다. 눈까지 온 아주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내려가면 어려울 것 같은 게 내려가다가 미끄러지면 더 많이 다칠 것 같고 내려가면 통금입니다. 그럼 어디에 가겠는가, 그래서 죽으나 사나 올라가자. 올라갔는데 일 미터 앞도 안 보입니다. 불빛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 멀리 기도원 불빛이라도 보이면 겨냥하고 가면 되는데 안 보였습니다. 그래서 한참 가다보면 길이 없습니다. 풀숲이라 다시 돌아가고 미끄러지고 넘어지면서 이제 걸어가서 얼마나 가니까 저쪽에서 무슨 사람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기도원이 있나 하고 가보니까 무당들이 궂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는 은혜로운 곳이 아니구나 하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숲 속이라 어딘지도 모르고 길만 찾으면 되는데 길이 그렇게 안 보입니다. 낮에도 사실 잘 안 보입니다. 조그만 샛길이고 올라가는 사람도 많지 않으니까 그런데 한참 가다가보니까 키가 큰 사람이 하얀 옷을 입고 쓱 나타나서 깜짝 놀라서 보니까 고드름입니다. 왜 바위에 물이 흘러서 얼은 것입니다. 그때는 하다가 통성기도를 했습니다. 기도원에 도착했을 때 3시 20분이었습니다. 산속에서 5시간 반을 헤맸습니다. 그때 제가 느낀 것이 그것입니다. 그 불이 희미하게만 들어와도 찾아갔는데 그래서 시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들이 진짜 순례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안전하게 순례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두 가지 광명이라고 부릅니다.
A. 파생적 광명: 지성
이 광명 중 첫 번째 파생적 광명입니다.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파생적 광명인데 이것은 지성입니다. 그게 파생적 광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원래의 광명이 또 있는데 그것을 힘입어서 나오는 빛을 가리키는 것이 이게 파생적 광명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광명은 광명인데 원래의 광명 없이는 빛을 비출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광명입니다. 물론 이제 일반은총적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아도 어느 정도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이성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영향을 많이 받는 불신자가 있고 거의 못 받는 불신자가 있습니다. 많이 받는 사람은 그래도 하나님을 안 믿지만 사람 사는 도리를 어느 정도 알면서 살아가는 사람이고 거의 못 받는 사람은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주신 것입니다.
정확하게 비유를 들어서 말하자면 이럴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볼 때 빛을 직접 뿜어내는 것을 발광체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 빛을 받아서 비추어지기 때문에 빛이 나는 물체를 암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태양에서 비추는 그 빛은 발광적 광명입니다. 그러나 발광체적 광명인데 그러나 달에서 비추는 그 빛은 암체적 광명이라고 저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 달빛도 굉장합니다. 그 밤이 보름날 밤이라도 했으면 제가 그렇게 고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추호도 안 보입니다. 일 미터도 안 보입니다. 전 세계에서 비추는 달빛이 가장 아름답고 풍부한 곳이 미국에 콜로라도입니다. 나도 가보지 않았는데 그 콜로라도에 비추는 달빛은 얼마나 밝은지 날이 밝은 날이면 달빛이 환하게 비추면 충분히 배위에 앉아서 책을 읽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빛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성은 바로 이런 암체적 광명입니다. 파생적 광명이라고 그랬지만 암체적 광명입니다. 그래서 그 빛을 쭉 비추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인생의 길을 같이 걸어가는 동반자로서 그리고 또 신앙의 선배로서 여러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리스도인은 좀 품위가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그래서 교회를 하면서 제일 감당하기 힘든 사람들이 교양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무례하고 사랑하는 도리를 막 아무렇게나 넘나드는 사람이 있는데 너무 힘듭니다. 더군다나 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취급을 받을 때는 굉장히 힘이 듭니다. 이게 다 어떻게 보면 없어져야 할 옛 성품에 속하는 상당부분이기는 한데 그런데 하여튼 그런 게 굉장히 힘이 듭니다. 자존감이 막 상하는 이런 것들이 아주 굉장히 견디기 힘든 그런 것입니다.
내가 간절히 바라는 바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좀 틀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선교를 위해서 불같이 헌신한다든지,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을 주었다든지, 콩팥을 떼어서 외국인 근로자에게 나누어주었다든지 그런 것 말고, 그런 것은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면 하고 그런 것까지 안 가다더라도 기품이 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 이렇게 보면서 예수님의 사람이구나. 왜 품위가 있으니까.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그 품위는 외부적인 것이 아닙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옷만 좀 좋은 것 입고 그래도 사실 품위가 좀 틀려지지 않습니까? 그리고 머리도 좀 폭탄 맞은 것처럼 하고 다니다가 조금 이렇게 정리를 하고 얼굴도 좀 예쁘게 위장, 변장, 분장 그렇게 하고 그리고 외모도 차려입고 이렇게 하면 품위가 좀 있습니다. 그런 것에도 품위겠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원판이 뭐 그렇게 안 바쳐주어서 그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이렇게 인격적인 그 기품과 품위를 갖추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 신앙의 특별한 가치라고 하는 것은 보편가치위에 서는 것입니다. 물론 보편가치를 뒤집을 때도 있지만 보편적인 가치위에 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여러분들이 이렇게 좀 예의바르고 기품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례하지 말고 회의를 하던, 대화를 하던, 밥을 먹던, 행동을 하던 이게 정말 교양이 흐르는 사람이구나. 그게 느껴질 수 있게끔 품위 있게 행동을 하면 좋겠습니다. 아멘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기품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품격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판이야 못 바꾸지만 그래도 품위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품위, 그리스도인의 품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품위가 만약에 그리스도인에게 있다면 또 있어야 한다면 그 품위는 무슨 품위일까? 어디에서 오는 품위일까? 몇 사람에게 물어봤는데 신통한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품위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인격의 품위가 아닙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사람에게 나타났는데 멋있는 옷 때문에 나를 품위 있다고 생각하거나 돈이 많기 때문에 나에게 무릎을 꿇고 나를 존경할 수 있는 사람들은 내가 그것을 잃어버리면 나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고 발아래 놓고 밟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교제의 대상이 아니라 교화의 대상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라면 사람들을 대할 때 그런 표상들을 세상에서는 그런 표상에 묶이지만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그런 표상을 걷어내고 그 사람 자신에게서 풍기는 품위와 기품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교제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많이 배웠는가. 가방 끈이 얼마나 긴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도 공부를 못한 것을 스트레스 받는데 교회에 왔는데 또 교양 이야기를 하네. 그래 나는 교양이 없다. 어쩔래. 그렇게 막 가지 말고 이것을 여기서 이야기하면 그리스도인의 품위가 지적인 품격이라고 한다면 그 지적인 품격은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지식과 그 다음에 지혜, 이것이 지적인 품격을 이루고 이 지적인 품격에서 경건에서 인격이 흘러나오면서 그 사람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그런 품위를 가진 사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구겨지면 안 됩니다. 품위 있게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삽시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람들을 이렇게 대하면 정말 조금 영적인 침체가 오더라도 하여튼 이 기품과 품위의 기본 틀이 상실되지 않는 확실히 망가진 사람이 되지 마시고 품위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간절히 여러분들에게 부탁합니다. 품위가 있는 사람들은 함께 있으면 참 좋습니다. 얼마나 좋은데, 그런데 그러면 그 지적인 품위가 지식과 지혜로 이루어지는데 지식은 무엇에 대한 지식인가 하면 이것은 최신학술 정도, 아이티 정도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너무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 나 가방 끈 짧다. 그래서 나는 아이티도 모르고, 뭐 국내정세도 모르고, 그래 물가동향도 모르고 나는 모르는 것 많다. 그런 것이 지적인 품격을 형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근에 나온 책 이름을 다 줄줄 꿰지 못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면 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 흘러가는 세상에 대한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로 구성이 되는데 삶을 사는 방식에 관한 교훈입니다. 프라이께따 비겐디 (?)라고 하는데 실제로 살아가는 삶의 교훈들, 그것을 알고 있는 지식입니다.
두 번째는 믿음의 규칙들을 알고 있는 지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규칙,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이 믿음의 규칙을 많이 알고 있는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무슨 세상이 돌아가는 정보나, 통신이나, 최신기술이나, 국내정치, 해외정치 무슨 그런 동향을 아는 지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이제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인의 지적 품격으로서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들에 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지혜는 무엇인가 하면 이 지식들을 모두 사용해서 그래서 실제로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그 능력, 특별히 판단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게 총명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지식이 삶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에 대한 지식이 구슬이라면 이 지혜는 그것을 모두 꿰미에 꿰는 것을 의미합니다. 흩어져 방안에 굴러다니는 구슬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꿰매어서 목에 겁니다. 그러면 이게 삶에 훌륭한 총명을 더해줍니다. 이런 총명을 더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교리공부입니다. 지금 설교하는 것 같은 이런 교리적인 가르침들이 그런 총명을 더해줍니다. 지식과 그리고 논리를 한꺼번에 제공하기 때문에 이 총명을 더해줍니다. 그 지식과 지혜를 소유할 때 그리스도인의 지적인 품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거룩한 자존감을 가지십시오. 그러니까 오늘 세상일이 좀 안 풀린다. 그렇다고 막 사람들에게 주눅 들고 그러지 마십시오. 도시에서 좋은 학교 나와서 돈 많이 벌고 잘 뜨는 젊고 활기찬 사람이 지식이 많고 잘 나가는 사람이 저 시골에서 배우지 못하고 신앙생활은 열심히 하고 있는 할머니만큼도 삶의 질을 이어갈 수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래전에 나온 영화인데 "the devil's advocate" 이라고 하는 영화가 있습니다. 오래전에 본 영화인데 기회가 닿으면 여러분 꼭 한번 빌려다가 한번 보십시오. 난 그 영화를 보고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주 굉장합니다, 선교영화 비슷합니다. devil이라고 하는 것은 악마인데 advocate 은 변호사, 그런 법적인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돈만 주면 말을 잘해서 거짓을 진실로 바꾸어서라도 말하자면 세상에서 성공하면 그것이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는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그럼 어떻습니까? 그렇게 해서 어마어마하게 성공을 해서 엄청난 빌딩을 소유하고 그렇게 재산을 갖고 보통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호사스러운 삶을 산다고 해도 그냥 삶의 양태이지 질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좋은데 시집을 가고 좋은 학교 들어가고 커리어우먼이 되고 아니면 엄청난 직장에 취직해서 연봉을 뭐 8, 9천 1억씩 받고 그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삶의 질을 높아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삶의 질이 아니라 삶의 양태입니다. 삶의 양태도 목사님 중요하지 않습니까? 중요하다고 그러면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러니 시집갈 때도 그렇게 고르지, 말로는 신앙 하나면 된다고 그러지만 신앙도 있으면 좋다는 식으로 거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열린 교회 청년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시집장가를 못 간 것에 대해서 주님이 하늘나라에 상급을 예비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신앙적으로 하려고 그렇게 못가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물론 어떤 분들은 상당히 찔리실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십시오. 그런 지적인 품격이 바로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그런 외모나 아니면 돈이나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아까 이야기한 지적 품격이 그 사람의 삶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삶의 교훈과 그 다음에 믿음의 규칙들, 그것들을 모아놓은 보고가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연구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이것을 빼놓고 다른 곳에서 이것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와 똑같은가 하면 금을 캐는데 금광을 버리고 아무 땅바닥에 가서 여기도 금가루가 조금은 있다 하면서 캐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물론 어느 흙에서든지 캐들어 가면 조금씩이야 금가루가 나옵니다. 10년 금가루를 캤더니 애기 돌 반지 하나 만들었다. 잘났네. 금광에서는 하루아침에도 그것을 캘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을 제쳐놓고 다른 곳에서 인생의 지혜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들입니다. 바보들입니다.
B. 원초적 광명: 진리
그런데 이것이 파생적 광명이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주신 광명이 있는데 원초적 광명, 혹은 발광체적 광명이나 이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이 진리는 신비한 것입니다. 이 진리는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이 진리라고 하는 것이 없다. 그리고 우리 각자가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 진리는 인간 내부에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것이 아니라 진리는 객관적으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인류의 철학사 속에서 누구도 이런 식으로 얘기해본 적이 없는 아주 특이한 독창성을 가진 언급입니다.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시는가 하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길은 이미 들어선 길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거기에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진리는 아직 소유한 것이 아닙니다. 저 멀리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가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를 소유하지 못했으면 생명은 없어야 되는데 생명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철학자들이 아무리 이 말씀을 들여다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아주 탁월한 논쟁을 가 진 주님의 언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특이성을 발견합니다. 이미 우리는 그 길에 들어섰는데 그런데 진리는 우리 밖에 있습니다. 아직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진리는 아직 붙잡지 못했는데 생명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게 신비입니다. 이 신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경험해본 사람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인간의 지성이 우리 인생에 광명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이 지성이 독자의 힘으로 광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맞닿아있을 때 비로소 그 지성이 우리를 위한 광명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성은 암체적 광명이고 그 광명이 있지만 그러나 원초적인 광명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러니까 그 진리가 우리의 지성과 연결이 되어 있을 때 그때에 우리는 아주 탁월하게 많은 빛을 소유하게 됩니다.
바둑을 두어봤습니까? 한때는 나도 바둑을 좋아했는데 바둑을 이렇게 두는데 적어도 7,8,9단 정도 되면 한점을 딱 두면 20개의 수를 읽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이렇게 두면 저 사람은 이렇게 놓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이렇게 두어야 되고 그러면 이렇게 둘 것이고, 이것을 20개를 추측을 하고 1점을 놓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빛이 없으면 여기만(?) 보입니다. 그런데 빛이 많으면 발에 등이 아니라 길의 빛이 됩니다. 저 멀리까지 빛을 뿜어서 갈 길을 다 보여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고 이 삶의 교훈과 믿음의 규칙들에 대한 지식과 체험, 거기서 얻게 되는 지혜와 풍부한 사람들에게 가서 종종 우리는 상담을 합니다. 그러면 나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것들의 내 인생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이 길로 가라고, 가보면 그 길이 맞습니다. 그래서 진리로부터 영향을 받아야지만 그 원초적 광명에 의해서 파생적 광명이 빛을 발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게 연결이 안 되어있다. 연결이 되어있지만 아직 희미하다. 그러면 뭐 불이 거의 안 들어오는 것입니다. 어두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번 이루어지면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상태가 가변적입니다.
그래서 무슨 뜻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예전에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은혜 받고 말씀을 많이 깨달으면서 은혜를 막 받을 때는 이 지적인 능력이 최고도로 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대해 많이 사유하고 생각하면서 이게 발전을 하게 됩니다. 환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때는 비록 세상에 학문적인 지식이 뛰어나지 않지만 이게 보입니다. 사람들을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저렇게 살면 지금은 웃으면서 살지만 나중에 넘어지는데 하면 어김없이 넘어집니다. 아! 저렇게 살면 결국은 자기 위해서 저렇게 사는가본데 결국은 그렇게 살면 마지막에 자기가 굉장히 커다랗게 해를 입게 되는데 그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회개할 것입니다. 그 회개하게 해야 할 죄가 무엇입니까? 예전에는 그게 옳은 줄 알고 살았던 것, 그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와서는 잘못했다고 하면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물론 택할 때도 그게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택한 죄가 없지는 않지만 더 혼나야 됩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게 옳은 줄 알고 택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까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을 회개하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빛이 없으면 어두움 가운에 다니면서 하나 죄를 지을 것을 수없이 죄를 지으면서 그렇게 악한 삶을 살게 됩니다. 부끄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진리의 말씀이 이 진리에 우리의 지성이 연결되어 있어서 그 진리에 영향을 받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들이 이 지성 안에서 참된 빛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진리는 우리에게 직접 영향을 미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지성을 통해서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이해가 안 가실 것입니다. 안 가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이게 진리의 말씀인데 베고 며칠을 자도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진리고 주관은 따로 있습니다. 이것을 펴서 뭔 소리인지 알아듣고 아하! 그리고 회개하고 깨닫고 눈물 흘리고 그래야지만 그 사람이 지혜로워집니다. 너무 명료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을 수없이 베고 잔다고 지혜로워지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는 저절로 빛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 속에 이해되면서부터 그 빛을 뿜어 나오는 것입니다. 원초적 광명을 우리가 바로 받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통해서 우리가 광명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진리가 선포되면 어떤 사람은 눈에 비늘이 벗겨지면서 내가 헛되게 살았구나. 내가 어두움 속에서 살았구나. 내가 벌거벗은 것을 지금 본다. 나는 그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깨달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람이 지나갔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우리의 인간의 지성 속에 깊이 그 깨달아지도록 만들어주시는 분이 계신데 그 분이 바로 그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원초적 광명을 우리의 지성 속에 심으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파생적 광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일차적인 역할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를 그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이 성령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진리의 영이라고 명백히 불립니다. 오직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그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시고 또 하나님 안에 있는 능력을 그 진리를 통해서 인간의 영혼 속에 불어넣어주시는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을 끊임없이 의지하면서 진리를 이해하고 탐구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Ⅲ. 진리가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방식
그러면 이제 그러면 그 진리가 영혼을 아름답게 하시는 방식이 무엇인가? 어떤 식으로 진리가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가?
A. 지성: 빛을 줌
첫째는 지성의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이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로 이어집니다. 세 토막, 네 토막으로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하나의 실제입니다. 하나의 실제인데 하나인 이 영혼이 진리를 통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혼에 은혜가 부어집니다. 다시 영혼은 하나의 실제인데 진리를 통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혼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영혼에 부어지게 되면 그 영혼이 은혜를 깊이 받으면서 이제 그 은혜의 진리에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영혼 안에 있는 세 가지 기능이 모두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제일먼저 지성에 영향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지성의 기능이 영혼의 세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가장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그 진리를 붙잡고 깨달을 때 그때 그것과 함께 어느 것이 먼저라고 이야기할 수 없고 이 진리를 사용하시는 성령님에 의해서 영혼에 영향이 미쳐질 때 이 지성에 계속해서 빛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지성이 명료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 보면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머리가 아픕니다. 모든 게 복잡해집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고 나면 분주하기는 하지만 명료합니다. 회개를 깊이 하고 난 다음에 새로워지는 느낌을 어디에서 받는가 하면 이 지성에서 받는 것입니다. 머리가 맑아지고 이제 내가 무엇을 하고 말아야 할지 아주 분명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주 명료해지게 됩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지성이 아주 맑아집니다. 그런데 이 지성이 맑아지게 될 때 생각은 뚜렷해지게 되고 이성의 추론은 아주 활발하고 정확하고 총명은 정확한 판단력을 갖게 되어서 생각으로 하여금 무엇을 받아들이고 말아야지 되는지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래서 맑아집니다. 그런데 이런 지성을 맑게 하는 밝은 빛에 의해서 성도의 사랑이 계속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이런 기도를 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지식과 총명으로 말미암아 너희 사랑이 점점 더 풍부해져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너희가 흠 없이 이르게 되기를 기도하노라” 그러니까 이 지성은 사랑의 불을 끄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B. 애성: 사랑을 불러일으킴
두 번째로는 애성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 애성에는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진리가 그 영혼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때는 자기 사랑에 매어 있었던 사람이 은혜를 깊이 받게 되면 그러면 이제 자기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깊이 불타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불타오르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을 소유하고 있으니까 이 애성은 또한 지성에 좋은 효과를 미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애성이 헛된 것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이 지성이 그 사랑 때문에 올바로 판단을 잘 못 내립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많이 사랑하면 허물이 안 보입니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허물이 안 보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위험성 같은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진리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서 영혼 전체에 은혜가 부어질 때 애성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함으로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게 됩니다. 기능 자체를 회복이 됩니다. 그 기능의 회복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영혼 안에 직접적으로 일어나는 그 변화가 그 기능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경향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향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작용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쪽으로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 싶고, 주님을 위해 소중한 것을 바치고 싶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C. 의성: 선한 의지를 이끌어 냄
세 번째로는 의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의지인데 의성에 영향을 미칩니다. 의성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면 선한 의지를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능력을 부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혼 전체에 영향을 미칠 때 그 영향력이 의성에 기능에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가 하면 악한 의지를 죽입니다. 그 악한 의지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의지는 애성에 말을 듣는 것입니다. 애성의 말을 듣는데 그 애성이 그 사랑을 자꾸 버리는 것입니다. 의지가 욕구가 없으니까 행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욕구가 애성 속에 가득하게 되면서 그것이 이제 이 의성에 영향을 주고 지성도 총명을 회복해서 이제 무엇이 올바른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동생들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성도 계속해서 그 은혜에 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조의 목적을 받아들이고 선하게 살고자 하는 쪽으로 의지가 계속 발동이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저항을 하는 능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뜻을 행하도록 강요받을 때는 거기에서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이제 살아갑니다.
※영혼의 기능적 변화
그렇게 되니까 지금 영혼의 기능의 변화라고 그랬는데 이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본체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설명한 말씀에 은혜를 받으면 지성이라는 기능은 이렇게 변하고, 애성이라는 기능은 이렇게 변하고, 의성이라는 기능은 이렇게 변한다고 할 때 이 기능의 변화라고 할 때 이 은혜에 의해서 일어나고 있는 영혼의 변화가 반영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사유적으로 이해가 가십니까?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용기를 주십시오. 그러니까 다시 한번만 더하겠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있는데 성령이 이 진리를 사용해서 인간에게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 은혜가 부어지는데 이 은혜는 영혼의 어느 한부분에만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혼 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영혼에 우리가 뭐라고 형용할 수는 없지만 그 은혜가 부어지면 인간의 영혼의 경향성과 힘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쪽으로 우리 인생전체를 작용하도록 그렇게 경향과 힘들이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힘들도 새롭게 형성이 됩니다. 이렇게 된 것들이 인간의 지성에서는 빛으로, 그리고 애성에서는 사랑으로, 의지에서는 선한 의지와 능력으로 나타나서 영혼 전체가 아름답게 회복된 것이 그 기능에 반영됩니다.
※영혼의 아름다움과 사람으로서의 덕
아름답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본래의 그것이 만들어졌을 때 목적에 합당하도록 존재하거나 작용하면 그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군인의 아름다움은 시를 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과 싸워서 이기는데 용감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군인의 덕목은 정의와 용기입니다. 도자기를 굽는 사람들의 아름다움은 도자기를 잘 구워서 예쁜 도자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철학들이 한계를 가진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군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를 설정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적군과 싸워야 하는데 그러면 군무에 종사하는 사람의 덕목은 용기와 그 다음에 훌륭한 전투대원이 되는 것이다. 도자기를 굽는 사람은 도자기를 잘 굽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학교 선생님은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름답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잘 가르쳐야지 된다. 그런데 사람은 무엇인가? 할말이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사람은 그러면 누구인가?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야지만 그 정체를 알아야지만 그 사람이 본래의 사람다움에 가까이 갔는지 안 갔는가에 그 사람이 좋다. 나쁘다. 아름답다. 보기 싫다. 판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해가 가십니까?
이것은 결국은 모든 인간에 사상과 철학 속에서 풀 수 없는 일입니다. 인간이 누구인가? 누가 얘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얘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름답다. 선하다고 아무리 얘기해봐야 기준이 애매모호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답이 안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답이 명료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이 있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고 사람을 구속하신 목적이다. 거기에 합당하도록 작용하고 행동하면 아름다움 살아납니다.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영혼이 아름다움을 회복해야 됩니다. 진리가 그 영혼을 아름답게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그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아주 명료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지루할 정도로 자주 우리 왜 태어났는가? 사람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다. 강은 강이기 위해서 만들어졌고 물은 물이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이방 종교에서 뭔가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한 이야기를 한 것인데 그 당연한 이야기가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사람이기 위해서 태어났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성경이 가르쳐준 것이고 본 것입니다. 우리 머리 속이 상상의 멤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 사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 그 참다운 사람이 되는 지름길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 이렇게 진리를 통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혜가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유일한 길인데 다른 것에 의해서는 아름다워지지 않습니다. 넉넉한 가정환경과 좋은 미래, 보장된 직장, 이런 것들이 그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Ⅳ.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으라
그러면 결국 우리는 어떻게 해야지 될 것인가? 결국은 우리 신자의 가장 이 치명적인 사명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음으로서만 이 구도의 길을 올바로 갈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은혜를 받음으로서만 구도의 길을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는 나오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영혼에 부딪힘이 없습니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건만 일어나면 안 되고 진리가 영혼의 젖줄이 되어서 그 영혼의 진리가 계속해서 영향을 미쳐야 되는데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아주 빠른 속도로 영혼의 아름다움을 상실할 것이고 원래부터 추루한 상태를 가진 사람이었다면 무엇으로도 그 영혼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나면 곤고해지게 됩니다. 왜 하나님이 더러워진 지성을 향해서는 잘 말씀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을 상실한 애성에는 하나님과 적대적인 자기 사랑이 불일 듯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계명을 행하기에는 게으르고 나태하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을 행하기에는 발이 빠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작년인가 언제 계속 시리즈를 듣고 지금도 계속 책으로 나오고 있는 게으름이 그게 아름다움을 잃어버린 영혼에 대해서 흘러나오는 체액과 같은 것입니다. 시체가 죽으면 시체에 국물이 흘러나오는데 더러운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국물이 게으름입니다. 그게 죄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가사상태에, 죽음의 상태에 있는 것을 보여주는 국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너무 더러운 것입니다. 게으름에서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에서 그런 것이 흘러나와서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가 되어서 이렇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를 삼는 것은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행복하다면 그 길을 택하는 사람을 굳이 비난할 수 없겠는데 행복한가 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들이 어떤 생각을 해야지 되는가 하면 우리의 신앙의 표준을 이 시대에 맞추면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사도가 뭐라고 하는가 하면 "너희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언제나 이 계명은 영원히 진리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든지 그 시대는 우리들이 본받을 것이 없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고 진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진리를 찾아가는 이 구도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대중적일 때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사역자로 일하실 때도 대중적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대중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붙들고 이 불변하는 이 진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세에서는 만족될 수 없는 영원한 세계의 가치가 현재적으로 내 안에서 경험되지 않으면 그 구도의 길을 걸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기독교가 난장이처럼 되어버린 이유, 역사 속에 거목처럼 자라야 할 기독교가 이렇게 묘목처럼 되어버린 가장 큰 이유는 교회 안에 묶여버린 신앙입니다. 인생 전체를 보면서 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결국은 우리를 그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방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이 성경의 진리를 가지고 인생전체에 지혜를 배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사람 사는 도리, 그리고 삶을 위한 교훈과 무엇을 믿어야 될지 믿음의 규칙들을 발견하고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주님을 만나야 되고 그 주님을 만난 다음에는 세 가지에 의해서 그 사람이 점점 그리스도인으로서 품격을 갖춘 현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만나고 거듭난 이후에 그 다음부터는 배우고, 사유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 자체가 구도의 길입니다. 그러니까 진리이신 예수님을 내 인생에서 나의 가는 길에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 정도로 해석해서는 결코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온전함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방식을 가지는가 하면 그분이 나의 영원한 진리이며 그리고 나의 전 생은 그 진리이신 그분을 찾아가는 삶이다.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나의 의는 율법에서 난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말미암은 그 의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와 부활의 능력과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여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달려간다. 그러면서 간절히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신앙의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 기도해보신적이 있습니까? 내가 이것을 깨닫고 싶습니다. 몇 달 전인데 사유를 하다가 아름다움이 뭔가에 대해서 딱 막혔습니다. 아름다움이 뭔가? 책도 좀 들쳐봤지만 속 시원한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근대 이후에 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철학은 그런 것 가지고 고민을 하지 않습니다. 나타나는 우리의 삶의 형성들에 관심이 집중되어있는 허리 잘린 철학들입니다. 사실 우리가 원하는 정보들은 현대의 사유에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름다움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름다움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아름다움의 주인이시고 아름다움의 모든 비밀을 갖고 계시니까 나에게서 감추지 마시고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게 너무 그러시면 저에게만 조금 보여주십시오. 이틀 만에 딱 응답이 되었습니다. 사유가 확 열리면서 빛들이 막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기도원에 있었습니다. 밤을 새웠습니다. 새벽에 기도원 마당에 나갔는데 하늘을 향해서 고백을 했습니다. 캄캄한 하늘이 나에게는 막 찬란한 빛이 쏟아집니다. 내 눈에 들어온 모든 것은 태어나고 죽고 흘러가고 소멸하는데 아름다움의 원천이신 그분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아름다우십니다. 그러면서 그 아름다움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 지식의 빛들이 막 쏟아져 내렸습니다. 지성의 영혼이 감당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지혜들이 막 쏟아졌습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막 쏟아집니다. 그 밤에 마치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에게만 알려줄게. 그런데 그 아름다움에 관해서 막 쏟아지는 그 예지의 빛들이 막 나의 지성 속에 내려오니까 그 아름다움을 뿜어주시는 그분만 사랑하는 것 이외에 무슨 가치 있는 것들이 있을까? 그분 자신 이외에 모든 것들은 미워한다고 말해도 충분할 정도로 사랑이 확 솟아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과 이별할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나님, 변천하는 이 세상, 이 무한한 우주 안에 하나님 제가 살아있습니다. 제가 여기 있거든요. 나는 스스로 존재 할 수 없는 그 영이(?)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 옆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억해주십시오. 내 간절한 소원인데 이 무한한 우주 한구석에 제가 살아있음을 주님이 잊지 말아주십시오. 아무것도 필요 없고 저는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때 저는 정말 오래간만에 시인 다윗 같은 사람의 크기에 있어서는 비교도 안 되지만 이런 유의 사유의 체험 속에서 살았구나. 그것을 정말 오래간만에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계명을 감추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서 오히려 열망을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시인이 뭐라고 그렇게 합니까? “주의 규례를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였나이다.” ‘상하다’는 히브리 단어는 ‘가르세아’ 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게레스’라는 명사의 원천입니다. 게레시는 절구에 곡식을 넣고 공으로 빻은 상태입니다. 다 깨트려져서 으깨어진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그 진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공이 같은 것으로 두들겨 맞아서 그래서 다 으깨어져서 건드리기만 하면 아주 예민한 고통의 감촉이 느껴지는 그런 상태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30년 전에 구도의 길을 떠났습니다. 반 이상의 세월을 헛되게 보냈습니다. 거의 빛이 없이 어두움 가운데서 그냥 헤맸습니다. 15-6년 전 쯤 전에 저에게 큰 빛이 임했는데 그 이후에도 상당히 구도의 길을 열심히 걷느라고 왔지만 그러나 역시 현저한 빛의 부족을 느꼈습니다. 지금도 부족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여러분보다 더 많이 구도의 길을 가도록 하나님이 저를 부르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을 목양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구도의 길을 갈 때 하나님 앞에 매일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살아있습니다. 주님이 이 지구 한 모퉁이에 제가 살아있는 것을 기억해주시고 주님이 내게 해주실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그것을 내게 주십시오. 좋은 집도, 많은 재산도, 명예도, 긴 수명도, 건강도 내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의 율례를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니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인가 해주실 수 있거든 나에게 진리를 보여주시고 그 진리는 내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인생의 문제에 대한 모든 해결이며 전부입니다.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 속에서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진리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은 헛된 망상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진리에 위로를 얻고 그 진리에서 비쳐오는 수많은 뿜어내는 그 빛 때문에 거친 바다를 지나고 풍랑을 지날 때 그 빛을 찾아서 가는 것입니다. 도를 찾아가는 이교도들의 열심을 보십시오. 그들은 헛된 것들을 그렇게 찾아갑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우리는 얼마나 더 깊이 사유하고 고민하고 그리고 그 진리를 따라서 사는 삶이 아니면 사실은 그것은 죽음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을 믿고 교회를 다니는 이 신앙이 여러분들의 인생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형식에 그치는 신앙생활로서는 여러분들이 위선을 행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뿐이지 절대로 참된 신자가 될 수 없고 따라서 참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깊이 자신을 성찰하고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성경책을 읽으십시오. 멕체인 읽기 표에 줄을 치는 재미로 읽지 말고 매일매일 이것은 내가 단지 진리에 접할 뿐이고 이 진리를 내 영혼에 은혜가 되게 하셔서 아름다움을 회복하시는 분이 주님이시라고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을 펴고 읽어야 됩니다. 매일 그럴 수 없지만 적어도 며칠에 한번쯤은 성경을 읽다가 펑펑 울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그리고 그 속에서 빛을 발견하고 하나님, 나는 짐승처럼 살았군요. 주님이 내게 원하시는 삶의 교훈이 이것이었군요. 내가 믿어야 할 규칙들이 이것이었군요. 지혜로운 인생을 사는 길이 바로 이런 것이었군요. 그리고 이것을 모르면서 살아온 날들이 한없이 원통한 느낌을 며칠에 한번씩은 받아야 합니다. 예배에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여러분 15분만 설교하고 내려가라면 제가 못할 것 같습니까?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들여서 이렇게 긴 시간동안 외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여러분들이 그것이 길인가 하고 머뭇거린 그 길을 내가 가본 사람입니다. 모두는 아니지만 많이 깨트려지고 영혼이 망가져본 적이 있는 길은 여러분들이 가려고 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버려두겠지만 사랑하는데 어떻게 내버려둘 수가 있겠습니까? 눈물을 찍어서 내 입술을 붓 삼아 그대들의 가슴에 진리를 새길 수 있다면, 내 피를 입 끝으로 찍어서 그대들의 가슴에 진리로 새길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예배 속에서 선포된 이 말씀이 영혼이 큰 위로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것은 구도자에 있으나 그러나 놀다온 사람들이 길고지루하고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 쇼나 한번 보는 것이 훨씬 낫고 아침마당 한편 보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연속성이 없는 것입니다. 삶과 내 귀에 들어오는 이 진리의 정보 사이에 연속성이 없는 것입니다. 연속성이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지 됩니까? 일주일동안 구도자로서의 삶을 삶의 전 방향에서 살다가 와야 합니다. 눈뜨는 아침부터 밤까지 하나님, 제가 그 진리를 따라서 살고 싶거든요. 나를 이 어두움 속에 버려두지 마시고 호의호식하며 짐승과 같이 살기 보다는 고난을 받으며 내가 참 사람으로 살고 싶습니다. 이게 구도자의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지난주에 교역자 수련회를 갔습니다. 화요일인가 언제 자, 나를 따라서 숲 속에 산책을 나가자 그랬더니 잘 사람들은 자고 따라올 사람들은 따라왔습니다. 한참을 캄캄한 숲 속에 들어갔습니다. 자, 이쯤에서 모두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그러니까 태어나서 아마 처음 본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나도 두 번째입니다. 별이 덩어리가 져있습니다. 그게 별 떨기인데 별이 떨어진 나무가 사이로 까만 하늘에 찬란한 별들이 떨기가 되어서 그래서 방금이라도 머리에 떨어질 것처럼 어우러져있습니다. 그 별들을 보면서 내 마음이 그랬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언젠가 하나님이 이 슬픔이 많은 세상에서 내 육신을 벗게 하실 그때에 선한 믿음을 가지고 좋은 싸움을 다 싸우다가 언젠가 하나님이 그렇게 그리워하는 그 나라로 내 영혼을 부르실 텐데 그때 저 빛나는 별들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답게 한 일이라고는 교회를 세우는 도구가 되어서 그대들을 말씀으로 섬긴 것인데 그 말씀을 받은 여러분들이 모두 단번에 들림을 받을 때 저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저렇게 우리 모두가 어두운 하늘에 별 떨기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기서 우리 모두가 가슴에 손을 얹고 하늘을 우러러보면 찬양했습니다.
찬양하라 내 영혼아 찬양하라 내 영혼아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찬양하라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소멸하게 마련인데 너무 많이 사랑하면 그분의 진리를 끊임없이 사모하고 그 빛 하나를 얻기 위해서 한점의 살을 도려낼 수 있다면 기꺼이 아멘 할 수 있는 사람, 한점의 진리를 깨닫고 온 몸이 온전해질 수 있다면 불구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구도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에 깊이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래서 제발 이 세상이 너무 어둡고 그래서 빛을 가진 현자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두움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빛을 나누어주고 그 참 빛인 예수 그리스도께 그들을 인도할 수 있는 또 다른 암체적 광명의 역할들을 감당해나가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래서 그분이 무지한 여러분들을 위해서 지혜이신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죄는 여러분들이 지으셨는데 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고 그 피로 속죄하셔서 무지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여러분들을 건져내셔서 복음의 진리 가운데 살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를 살든 빛의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眞善美
9. 영혼의 아름다움과 순종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나이다”(시119:102-103)
Ⅰ. 본문 해설
우리들이 흔히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말합니다. 사실 그 이야기는 교회에 출석하는데 어렵다든지, 헌금 내는 게 힘들다든지, 교회에 와서 봉사하는 게 너무 고달프다든지 그런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틀림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가 힘들다고 하는 뜻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것이 매우 어렵다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영혼이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본질’이라는 말, 영어로 말하면 essence입니다. 그리고 혹은 ‘본성’이라는 말, nature 라는 단어를 씁니다. 이 본질과 본성의 차이에 대해서 우리들이 잠깐 생각해보면 아마 이런 의문을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본질이라는 것은 그것 없이는 그것일 수 없는 바로 그것을 가리켜서 본질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물이 있는데 그것 없이는 그것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물의 핵심을 이루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본성은 본질과 연관이 있기는 하지만 본성은 어떤 존재가 기능을 하고 작용을 하고 어떤 행동들을 하게 될 때 그런 기능과 작용과 행동을 흘려보낼 수밖에 없는 그 사물 안에 있는 원천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본성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본질과 본성의 차이를 구별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다고도 말을 하지만 그러나 제 생각에는 둘을 구별하는 것이 나름대로는 우리에게 사유의 유익을 주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자면 게는 큰 게도 있고 그리고 떨 밭 위에 기어 다니는 작은 참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게는 옆으로 갑니다. 그것은 그 게 안에 옆으로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어떤 행동의 원천의 본성이 있기 때문에 옆으로 갑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이 힘들기는 하지만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본성의 변화 없이 순종의 삶을 살려고 애를 쓴다면 할 수도 없거니와 또 백번 양보해서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순종의 삶이 아닙니다. 순종의 삶은 순종하기에 적합한 영혼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영혼이 하나님께 순종하기에 적합하도록 힘과 경향성들을 갖게 되면 순종하는 삶을 산출해낼 수 있는 새로운 본성이 형성이 됩니다. 그 본성을 원천으로 하여 거기에서 순종하는 삶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본성의 변화는 영혼의 변화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영혼의 변화를 통하지 않고는 본성의 변화를 진실하게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영혼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혼의 변화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가지고 있는 힘과 경향들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같은 방향으로 질서가 지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영혼의 변화입니다. 그렇지 않은 영혼이 그렇게 되는 것, 그것이 영혼의 변화입니다.
반대로 그렇게 질서 지어졌던 영혼이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수밖에 없도록 그 형태가 변한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혼의 파괴, 혹은 영혼의 부패라고 말합니다. 그런 영혼의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굳윈’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자신의 글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기에 적합한 본성을 갖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야말로 우리가 모든 삶에 있어서 하나님께 순종하기에 적합하도록 본성을 갖게끔 만들어준다.
영혼의 변화는 새로운 본성을 갖게 되고 그 새로운 본성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이면 그 본성을 가진 사람 속에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순종하는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내면과 외면의 세계가 하나로 통합될 때 이때 하나님을 믿는 것은 참 즐겁고 기쁜 일이 되지만 이것이 분리현상이 일어나게 될 때 이때 우리는 내적인 평안을 잃어버리거나 또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실제적으로 하나님 앞에 진정한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쉼 없이 영혼의 변화를 촉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런 영혼의 진실한 변화만이 참된 본성의 변화를 가져오고 그 참된 본성의 변화만이 변화된 삶을 이끌어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게 만들어줍니다.
Ⅱ. 아름다운 영혼의 풍취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이 영혼의 아름다움과 순종의 관계를 마지막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 문제를 우리들이 생각하기 위해서 먼저 아름다운 영혼의 풍취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풍취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좋아하고 거기에 이끌리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 작용은 상당히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좋아하고 거기에 마음이 이끌리는 이 영혼과 마음의 풍취는 이렇게 하루아침에 급변하고 그러지 않고 일반적으로 지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 가지고 있는 마음과 영혼의 풍취가 오늘 바뀐 것은 그런 예가 있기는 하지만 별로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영혼의 풍취가 있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아름다운 상태일 때는 그 아름다운 영혼의 상태가 좋아하는 풍취가 있으며 영혼이 추루해질 때는 추루한 상태에서 그 영혼이 좋아하는 풍취가 있습니다. 그것은 각각 틀립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쇄신되었을 때 가지는 마음의 풍취와 마음이 부패해진 욕망에 사로잡힐 때 갖는 풍취가 각각 틀립니다. 정말 틀립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려도 잘 이해가 안 가실 것 같아서 제가 아주 쉬운 비유를 하나 들겠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의사들이 저를 보고 체질이 산성체질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안 좋은 것이라고 합니다. 뭐 산성체질이라고 하는 것이 살에 신맛이 많이 나는 것인지 그것은 모르겠지만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려서부터 몸에 종기라든지 여드름이라든지 그런 것이 많이 났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 체질을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해서 체질을 좀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예수님 믿기 전까지는, 변화받기 전까지는 육식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고기를 하도 먹고 싶어도 두 점 정도 먹으면 느끼해서 구토가 나고 그래서 고기를 그렇게 나빠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좋아하지 않았고 먹는 것 자체를 별로로 생각했습니다. 제가 56킬로그램에 허리가 27인치였습니다. 174센티에, 그러니까 그렇게 날씬했습니다. 여러분은 상상이 안 간다고 그렇게 생각할 텐데 증거가 제 앨범에 있어 언제든지 공개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런데 술 담배를 끊고 나서 이상하게 식욕이 굉장하게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고기를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세월이 많이 흐르니까 한참 심할 때는 3일에 한번씩 조금이라도 고기가 들어가지 않으면 몸이 고기를 굉장히 원했습니다. 그래서 살이 살을, 지방이 기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 사람이 없어서 혹시 제가 저녁을 준비하게 되면 고기가 없으면 소시지라도 먹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슈퍼에 가서 하다못해 고기를 300그램이라도 사가지고 가서 김치하고 볶아서 먹어야지만 몸에 안정이 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 하고 체질을 바꾸어야지 되겠다고 하면서 노력을 해서 꾸준히 체질개선을 위해 시도를 했습니다. 지금 한 3년 정도 되었는데 2년 정도 지나서부터 아주 놀라운 체질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게 어떻게 느껴졌는가 하면 밤에 잠을 자면 모기가 날아와서 나에게 앉지만 절대로 무는 법이 없습니다. 냄새만 맡고 우리 집 사람을 공격합니다. 저희 집사람은 생선도 거의 먹지 않는 채식 위주의 생활을 합니다. 그러니까 피가 훨씬 달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제가 채식을 개선하고 나서 변화가 일어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선 식욕이 틀려졌습니다. 고기를 안 먹어도 먹고 싶은 마음이 별로였습니다. 물론 먹으면 먹는데 그렇게 찾아서 먹고 싶은 그런 마음은 없어졌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설교하는 시간에도 아주 신선하고 얼음물에 담갔던 양 상치, 그 다음에 신선한 오이, 그 다음에 약간 단단한 토마토, 그리고 피망, 그 다음에 신선한 양파, 그 위에 양파소스나 이런 소스를 버무리면 한 보울을 갖다 주어도 먹을 때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옛날 같으면 그런 것 상상도 못할 텐데 그런데 그렇게 몸에 받고 지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습니다. 확실히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되는가 하면 여름에 같이 누워서 자면 이제는 모기가 우리 집 사람은 안 물고 나만 공격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하면 체질이 변해서 저의 몸에 피가 우리 집 사람의 피보다 훨씬 더 맑아진 모양입니다. 와서 우리 집 사람의 물을 수 있는 부위가 많은데도 제가 혹시라도 발만 내놓고 자면 발만 와서 공격을 해서 그것도 모기끼리 소문을 내는지 어디 가니까 피 맛이 좋더라. 그래서 우르르 몰고 와서 뭅니다. 그러니까 피부에 뭐가 난다든지, 입안이 터지고 곪는다든지 이런 현상들이 아주 현저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이게 체질입니다. 그런데 체질이 변하면 식욕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A.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함
영혼의 상태가 변하면 그러면 그 영혼의 취향도 함께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 영혼이 아름다울 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영혼이 아름다울 때 그 아름다운 영혼이 가지는 풍취가 있는데 그 첫 번째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한자어로 말한다면 신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하는 것 그래서 그 즐거워한다는 말은 그것이 더 이상 수단이 되지 않고 즐거움의 마지막 목적지가 되는 것이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름답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그것이 자신에게 행복하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을 최종적인 목표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향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유하는데서 오는 즐거움을 대치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것도 갈망하지 않는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성공하고, 예수님 때문에 복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돈이 생기고, 예수님 때문에 일자리를 얻고, 예수님 때문에 좋은데 시집장가가고 그래서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좋아서, 예수님 자신을 내가 좋아해야 할 이유를 만약에 설명할 수 있고 그 목적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에 이유를 댈 수 있고 그리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차상위의 의도된 목표가 또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추루한 영혼은 항상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즐거워하는 것이 끝일 수가 없습니다. 항상 그 이상의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추루한 영혼은 결국은 하나님보다도 자기를 사랑하는 영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최종적인 즐거움의 대상이 되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것들이 하나님 위에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영혼은 다릅니다. 아름다운 영혼은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중생한 신자의 영혼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바로 이런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생한 신자의 가장 두드러진 본성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거워하고 그 안에서 행복해하는 것,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것이 바로 중생한 신자의 가장 중요한 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런 본성을 가질 수가 없고 이런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한번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적용해보십시오. 오늘 여러분들의 영혼 안에 있는 풍취는 어떤 것입니까? 정말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확 끌립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싶어 하고 하나님 아름다움 안에서 행복해하려고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끌리고 계십니까? 이것이 바로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향입니다.
B. 진리를 즐거워함
두 번째는 진리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진리를 즐거워하는가 하면 진리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보여줍니다. 그 완전성이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면 거기서 반드시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그 완전하심이 곧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면 사람들은 좋아하게 되고 좋아하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에 대한 발견이야말로 우리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끄는 동기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진리를 농축해서 담고 있는 보고가 성경입니다. 성경이 모든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분을 섬기며 인생을 살아가기에는 충분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진리를 얻기 위해서 성경을 버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성경은 진리의 보고이니 이 성경의 진리를 통해서 우리들이 더 많은 진리를 볼 수 있게 되고 성경에 이 진리를 이해함으로서 오히려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진리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진리를 즐거워하는 것이 아름다운 영혼의 풍취입니다. 아름다운 영혼에게는 그런 풍취가 있습니다. 그런 이끌림이 있습니다.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게 되면 아름다움을 알게 되고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진리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지각하게 되는 통로입니다. 당연히 그런 통로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진리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고 진리 하나를 얻고 깨닫는 그것을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제물과 보화를 얻는 것보다 더 행복해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영혼의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들의 풍취입니다. 또 그런 사람들의 영혼이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럼 한번 여러분들 자신에게 이 진리를 적용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정말로 이 진리를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많이 알고 싶어 하고 주님의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그래서 여러분들의 사랑이 더 깊어지고 그래서 여러분들의 영혼이 더 아름다워지고 그래서 여러분들 자신 안에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르고 싶어 하는 본성이 생기기를 사모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들의 모든 삶이 그 아름다운 본성에 부합된 삶이 되어서 여러분들의 삶과 내면의 세계가 일치되는 이런 삶을 여러분들이 정말 살고 싶어 하십니까? 이유를 깊이 한번 반성해보시기를 바랍니다.
Ⅲ. 영혼의 아름다움과 순종
※영혼의 두 가지 성질: 목적인과 발생인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에서 영혼의 아름다움과 순종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런 영혼의 경향을 가지고 있을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은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일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기쁨이고 행복일 수 있으니 이는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완성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세하게 말씀드릴 시간은 없으나 영혼 자신 안에는 스스로 완전해지를 갈망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영혼은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고 완전해지기를 갈망하는 성질이 영혼 자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자기의 뜻대로 막 살아서 영혼의 전일성들이 파괴되면 그때에 죄 된 인간의 본성은 그것을 좋아할지 모르지만 영혼 자신 안에서는 깊은 파괴현상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영혼 자체가 고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으로는 정욕을 만족해서 즐거움을 누릴지 모르지만 영혼 깊은 곳에서는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게 영혼이 가지고 있는 영혼의 목적인이라고 하는데 영혼에 크게 두 가지 성질이 있는데 하나는 발생인으로서 역할을 영혼이 하고 또 하나는 목적인으로서 역할을 합니다. 발생인이라고 하는 것은 영혼이 무엇인가 행동하고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많은 것들의 원인이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다 행동이 틀리고 생각하는 것이 틀린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영혼이 다 각각 개별적으로 틀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문과 같이 똑같지 않습니다. 다양합니다. 그러니까 그 영혼이 각각 발생인으로서의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개별적인 사람이 개별적인 영혼을 가지고 개별적인 행동들을 합니다. 누구도 똑같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또 하나는 목적인으로서의 경향을 갖는데 그 목적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영혼 자체가 어떤 목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 하나가 끊임없이 온전해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 자신은 언제 가장 행복해하는가 하면 영혼 자신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기를 창조하신 그때의 상태에 완전성으로 돌아갈 때 그때 영혼은 가장 행복해합니다. 그리로 끊임없이 돌아가려고 하는 목적으로 회기하려고 하는 성격을 영혼 자체 안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스스로 영혼으로서 영혼 됨으로 가득한 상태가 되려고 하는 것이 한편으로는 자기 완전성이고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창조의 목적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자신의 영혼에 모든 힘과 경향들이 정위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이 가지고 있는 목적인으로서의 성격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영혼은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자신의 창조당시에 그 온전한 영혼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고 물론 이제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 하나님께 들림을 받을 때 그 영혼의 상태는 창조 당시에 그 완전함을 훨씬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갖게 됩니다. 그쪽을 향해서 끊임없이 그렇게 완전해지려고 하는 그런 끊임없는 성격을 영혼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영혼이 온전해지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렇게 삶이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불순종해서 그래서 그것들이 영혼을 공격해서 파괴적인 효과를 가지고 오는 것을 영혼 자신이 매우 싫어합니다. 그럼 여러분 자신이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자 하는 것들은 영혼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까? 영혼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혼 안에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경향성과 그 다음에 자기의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려는 경향성들이 항상 혼제(?)합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려는 그 힘에 의해서 압도적으로 지배를 당하면서 살아갈 때 부분적인 것들이 남아 있어도 인간의 영혼은 쉼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고 이것들이 힘을 팽팽하게 맞서면서 내 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것과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살려는 경향성들이 좌충우돌해서 어떤 때는 행동하고 어떤 때는 불순종하고 어떤 때는 육욕에 이끌리고 어떤 때는 은혜를 사모하고 이렇게 막 삶이 뒤섞여서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매우 혼란스럽게 됩니다. 어느 순간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 같다가도 어느 한순간에는 육욕을 따라 사는 사람으로 돌변합니다. 영혼 안에서 이것들이 막 싸웁니다. 그러면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정한 순종의 삶이 아닙니다. 그래서 순종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은 도덕적 결단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마 그런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고 정말 그러면 안 되겠다. 이제 내가 똑바로 해야지 되겠다. 결심을 했는데도 이상하게 그 결심을 이행하려고 하면 매우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고 또 넘어지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자신의 삶의 실천과 영혼 사이에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끊임없이 감정적으로는 복받치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서 결단을 남발하는데 영혼의 상태가 죄에 훨씬 더 많이 기울어져있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이 결심이 아무리 진지하고 놀라운 결단을 남발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이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의지 안에 이행하고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이 현저하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순종하려고 하면 할수록 영혼이 아름다워야 할 필요를 많이 느끼고 영혼이 아름다움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순종하며 살아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렇게나 막 살고 죄를 짓게 되면 영혼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항상 이렇게 일체를 이룹니다.
오늘 성경에서 이 영혼이 그 진리를 즐거워하는 것을 뭐라고 묘사하는가 하면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그 맛이 꿀과 같습니다. 이게 바로 진리를 즐거워하고 그 진리를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의 행복해하는 성도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 다음에 시인이 어떤 고백을 하는가 하면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음으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게 그 앞부분이 신자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 뒷부분의 영혼의 상태와 풍취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A. 가르침을 받음
그래서 이제 이렇게 아름다운 영혼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는데 그 순종하는 모습이 여기에 첫째로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기 때문에 내가 주의 규례를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늘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시인의 모습은 헐떡이면서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사모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순종하고 싶으니까.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게 여기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한없이 즐거워하는 성향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것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렇게 내 안에 가득 품은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행복감들을, 복된 상태를 그대로 삶으로 흘려보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일체를 끊임없이 이루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도 이것을 원하고 죄도 이것을 원합니다. 죄도 마음에 품으면 마음에 풍겨져있는 상태로 죄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 죄를 행동으로 산출해내기를 원합니다.
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시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그 깊은 맛을 느끼면서 그것이 그렇게 달콤하게 느껴지니까 그 다음에 이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밖으로 여기에 부합하는 삶을 하나님 앞에 구현하고 싶은 사모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순종의 삶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기 원하는 동기입니다. 이것을 학습에 있어서 수용성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나라 애들이 5세만 되면 모두 대부분 피아노 학원에 보낸다고 부모들이 난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음악에 엄청난 발전이 와야 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이 하는 이야기는 한 아이가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려면, 음악가로서 대성할지 안할지를 보려면 가르칠 때 얼마나 그것을 잘 이해하고 습득하는가에 달린 게 아니라 혼자 있을 때 그 악기를 연주하고 싶어 해야지만 대성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똑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다 이성의 능력이 각각 차이가 나고 지적인 호기심에 있어서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가르칠 때 아주 잘 알아듣는 사람이 있고 또 잘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사람이 앞으로 신앙생활을 잘 할 것인가를 가늠해주는 게 아닙니다. 관계가 있지만 관계가 있을 뿐이지 절대적인 변수는 아닙니다.
그럼 어떤 차이인가? 혼자 있을 때 이해되는 것이 적어도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그것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홀로 그렇게 해보려는 사람들이 많이 깨달았지만 가르쳐줄 때만 깨달을 뿐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스스로 사유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보다 훨씬 질적으로 높은 질의 기독교적인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도 일단 이성적인 것들이 많이 좌우를 하니까 이성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교회 안에 섞여 있습니다. 지적인 호기심에 있어서도 그 강도가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그냥 어떤 상황이든지 연설만 나오면 무조건 잠부터 자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든지, 회화든지, 조회시간이든지 어디서든지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뭔가 남이 하는 새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듣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잘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으로서 더 이상 사유와 실천이 지속되지 않고 혼자 있을 때 더 이상 신앙과 진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높은 질의 삶을 살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성의 강도나 모든 것들이 취약해서 조금밖에 못 알아들어도 그것을 교회를 떠나서도 계속 그 진리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고 실천을 하게 되는 그것을 통해서 점점 더 기독교적인 삶을 살수 있는 질이 높은 신앙적인 삶을 살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받아들이고 깨달으려고 하는 수용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를 가르칠 때 아주 빨려들 듯이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갑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이성적으로 설명을 하고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어도 그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자기가 하기 싫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끌어다 여기 교회에 데리고 올 수는 있지만 신앙이 들어가게 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책임져야 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가르치고 섬겨야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주 적은 성과밖에는 거둘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시인은 그 아름다운 영혼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그는 먼저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또 받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이 깨닫고 그 진리에 대한 간절한 말씀에 대한 미각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질 때 그때 그 말씀을 그렇게 기뻐하고 좋아하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그렇게 목말라하던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에 진리에 대해서 아주 냉담해지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 사랑이 식습니다. 그래서 말씀에 대한 미각을 가지고 있을 때는 이성적인 논쟁으로 말씀 사이에 있는 하나하나를 상세하게 설명할 때 이성의 눈이 뜨여지면서 내가 이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과 결론에 도달하게 될 때 그의 영혼에 환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유 없이 믿어야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믿을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은 기쁨이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될 때 그때 말할 수 없는 기쁨이 그에게 파고듭니다. 그래서 탄탄한 사상을 소유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사라지고 나면 상세하게 설명해주면 설명해줄수록 번잡스럽다고 생각을 합니다. 왜 어차피 영혼이 그 진리에 논변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결론, 그런 결론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자신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들을 왜 믿을 수밖에 없는지를 이성을 논변하고 논증하는 것이 기쁨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말할 수 없는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나 이 진리가 여러분들에게 전해졌는지 모르겠는데 말이 좀 어렵지만 항상 우리에게 경험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설교를 듣는 것이, 그래서 설교를 통해서 진리의 높은 세계를 보고 그 깊은 진리의 세계를 알게 되는 것이 말할 수 없이 귀합니다. 정말 귀합니다. 그렇게 해서 눈이 열리면 그 다음에 어떻게 되는가 하면 성경을 보는 눈도 열리게 됩니다.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니까 삶을 보는 눈도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많은 것들을 깨닫게 됩니다. 옛날에 철학자들이 인생에서 인간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합니다. 그때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인생을 좀더 높은 가치가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이런 철학적인 사유의 목표였는데 사람들이 거기에 그렇게 사람들이 지혜롭게 되는 것이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첫째 학습입니다. 우선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지혜로운 사람으로부터 일단 많이 배우고 두 번째는 자기가 끊임없이 그것이 과연 그러한지를 사유하고 (뒷부분으로 넘어간 부분입니다.)인간이 지혜로워지는 것이 배우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고 깨달았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우리들이 배워야한다고 강조합니다. 오늘 이 시인도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주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순종하는 삶을 살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배웠어도 자신이 끊임없이 사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내 인생의 전부를 걸고 완성해야 할 내 인생의 목표인 것, 그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리고 신앙에 대해서 눈뜨면서 밤늦게 잘 때까지 이 신앙에 대해서 사유해야 합니다. 그 신앙에 대해서 사유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사유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든지 그것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름다운 숲 속을 지나면서 예전 같으면 아! 좋다. 진짜 신나는구나! 여기서 삼겹살이나 구워먹으면 참 좋겠다.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제 이렇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한 사람들은 아름다운 숲 속에 있을 때 생각하는 게 아! 정말 좋다구나. 눈을 조용히 감고 아름다운 숲 속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 정말 좋구나. 이 아름다운 숲 속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하면서 이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아름다우실까? 그것입니다. 개울물이 졸졸 흐르는 아름다운 시냇가에 넓은 반석을 발견하면 옛날에는 거기에 올라가서 그저 오락회나 할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그 아름다운 그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없게 하는 동기를 부여받는 것, 이것이 바로 마음이 하나님을 끊임없이 관상하는 경향성들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유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진리를 실제의 삶에 적용해서 자신의 존재와 삶 전체를 그 진리에 합치시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않고 인간이 행복해질 수 없다고 하나님을 모르는 철학자들도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가르침이 바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이 바로 그런 가르침을 갖고 있습니다. 뭐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너희는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쉼을 얻으리라”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받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 안에 유지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은 너무 귀한 일입니다. 또 성경을 읽고 그 성경 속에서 진리를 터득하는 일은 너무나 소중한 일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끊임없이 순종하는 삶으로 적용하고 거기에 자신을 합치시키려고 할 때만 말씀에 대한 그 달콤한 맛을 잃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때는 그렇게 달고 내 입에 꿀처럼 달콤했던 하나님의 말씀인데 어느 날 그 말씀의 미각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영혼을 기쁘게 하던 하나님의 말씀은 아주 번잡하고 골치 아픈 내용들이 되어버리고 그리고 자기를 그렇게 행복하게 하고 자신의 삶을 비추어주던 진리의 말씀들은 자기 안에서 아름답고 달콤한 맛을 상실했습니다. 아마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잘 들어보십시오. 가슴에 깊이 새기십시오. 많은 진리를 깨닫는 것은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공부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복이고 사실 그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사실은 모든 것들을 포기해도 좋을 정도로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학습일 뿐입니다. 뒤에 삶과 실천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때 학습의 욕구는 증대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아이러니가 있는데 그것은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자신 안에 자신 안에 사랑이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정말 선한 사람이 되려고 분투하는 사람들만이 자기가 끝없이 악한 사람이라고 하는 악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빛을 간절히 열망하고 그 진리를 얻기 위해서 헐떡이면서 그 진리를 찾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만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게 신앙에 있어서 paradox, 역설입니다. 그러니까 반대로 이야기하면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런 사랑이 없이 그냥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사랑이 없이 그냥 자기의 욕망을 따라서 이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사랑이 없는 존재인지를 한번도 못 느낍니다. 무지와 편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 진리를 잃어버린 어두움 속에 살고 있는 소경과 같은 존재인지 모릅니다. 이게 역설입니다. 그래서 온전케 되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더 헐떡이면서 그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끊임없이 실천합니다. 끊임없이 그 사랑을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그 사랑에 합치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해보니까 자기 안에 정말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이기적인 욕망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자기 안에서 발견합니다. 자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다 바치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어느 한순간에 하나님이 자기의 기대와는 어긋나게 자기의 인생을 인도할 때 하나님께 대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은 자기 사랑입니다. 자기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 사랑을 발견하게 될 때, 그때 자기 사랑을 버려야 되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게 됩니다.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내게 보내셔서 나로 자기 사랑의 억압을 풀고 진짜 주님을 향한 지순의 사랑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그런 이치입니다. 그런 이치로 인해서 온전해지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아니면 이 진리에 빛을 갈망하지 않습니다. 그런 갈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주 지방질이 높은 하나님의 말씀이 공급이 된다고 해보십시오. 배탈이 납니다. 소화를 못 시키니까.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의 진리를 많이 깨닫고 은혜의 세계를 본 사람들에게는 아주 막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현자로서 살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혼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을 많이 소유했는데 그대로 안 살아서 영혼이 곤고한 것과, 원래 진리를 몰라서 짐승처럼 살아서 곤고한 것과 전자가 더 곤고한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전자의 사람이 훨씬 더 영혼이 곤고합니다.
B. 이중의 적용
그러면서 시인은 이것을 자신의 순종하는 삶의 이중적으로 적용합니다.
1. 규례를 발견함-
첫째가 규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음으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규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 전체, 특별히 시편에서 보면 이런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율법, 계명, 규례, 율례, 증거, 법도, 말씀, 진리 이런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비슷비슷한 말들인데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세부적인 차이가 각각 어떻게 나는지 다 분별한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짝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하면 규례와 율례입니다. 그런데 이 규례는 아마도 율법은 모세 오경, 혹은 흠 없는 하나님의 계시 전체를 가리키고 계명은 그 오경 속에 들어있는 구체적인 하나님의 생활의 영역, 생활과 믿음의 구체적인 명령들, 예를 들면 십계명과 같은 것, 이런 것이고 그 다음에 이제 규례, 율례, 법도 이런 것들은 그런 계명을 준수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다가 보면 하나님의 세부적인 뜻들을 깨닫게 됩니다. 말하자면 신앙의 이치들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치들을 터득한 것을 여기서 규례라고 표현합니다.
이런 신앙의 이치들은 오늘날 우리들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들이 너희들이 정말 내 앞에 나만 사랑하는 삶을 살아라. 이렇게 명령을 받았습니다. 계명입니다. 그 계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많이 애를 쓰다가 보면 다른 성경과 그 다음에 성경의 지식, 사유 하나님만 사랑하기 위해서 매순간 분투하다가보면 하나님만 사랑하는 방법들을 많이 터득하게 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믿음의 이치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이치들이 바로 규례입니다. 그런 것들을 잘 조직해서 모아놓으면 그것들이 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류의 규례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규례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많이 분투하고 애쓰는 가운데 획득되는 새로운 지혜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바로 하나님의 계명을 그대로 순종하게 하는 그런 지혜입니다. 그런 믿음의 이치들을 순종하고 그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가운데 발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는 받았지만 더 이상 그것에 집착하면서 거기에 자신을 합치시키고 그 진리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 이후에 발전되는 지식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멍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와 닿을 때만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고 하는데 진정으로 그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가져야 하지만 올바르게 사랑하는 비결이 무엇인지 우리가 터득해야지만 우리들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중세시대 때 페스트가 만연했을 때 왜 그렇게 페스트가 급속하게 번졌는가 하면 이럴 때일수록 모여야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한 것입니다. 특히 교회당에서, 그러니까 모이면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는 것입니다. 그때에 안 죽었던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왕족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데 잘 나가지 않고 또 특별히 어느 정도나 가능성이 있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이 거의 은그릇과 은 식기로 사용했습니다. 거기에서 이제 많은 살균작용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뭐 신빙성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지만 어째든 그들은 보호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대중들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복받쳐서 그에게 가득 차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진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기여할 가능성이 매우 적어집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바로 그런 규례를 끊임없이 배워간 것입니다.
2. 선한 의지로 순종함-
마지막 두 번째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무엇이라고 그런가 하면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누가 안 떠났다는 것입니까? 자신이 안 떠난 것입니다. 그런 의지를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은혜의 작용을 통해서 이끌어내어 주셔서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규례를 떠나지 않고 살려고 하는 그 마음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끊임없이 그를 붙들어주신 것입니다. 이게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아야 할 필요성입니다. 매순간 우리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정말 매순간 절망하지 않습니까? 정말 내 안에 항구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것이 내 안에 있습니까? 수시로 변하는 우리의 마음의 상태, 그리고 주님만을 사랑하겠다는 진실한 그 눈물의 고백들이 아주 쉽게 사라지고 이것은 너무나 자주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 독립해서 살려고 하는 이런 악한 경향성들이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우리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식하게 될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 시인은 그래서 끊임없이 그 하나님의 말씀의 미각을 소유하며 살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영혼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 그때 그는 정말 순종의 삶을 아름다운 영혼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서 더 많은 신앙의 이치들을 터득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 이치를 터득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자기로 하여금 그 규례를 떠나지 않고 그 규례를 따라서 하나님 앞에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아가게 하는 은혜의 작용들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리를 많이 소유하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그 진리를 간절히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참 많습니다. 넓은 뻘밭에 사람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점점 그 뻘밭에서 자기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 늪 속으로 계속 빠져 들어갑니다. 스스로 헤어 나오기 위해서 막 몸부림을 쳤더니 뻘과 몸 사이에 간격이 생기면서 더 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사방에 소리쳐 불러도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슴에서 목으로, 목에서 입으로, 입에서 코로 점점 빨려 들어갑니다. 그때 누군가가 만약에 밧줄을 던져주었다면 그 사람은 그 밧줄을 붙들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력을 다해서 그 밧줄을 붙들 것이고 그리고 결코 놓지 않을 것이며 그리고 결국은 그 밧줄을 의지해서 그 늪에서 헤어 나오고 말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이 늪처럼 빠져 들어갈 때 우리를 그 깊은 수렁에서 건져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금이나 은이었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의 명예나 내 귀를 즐겁게 하는 사람의 목소리였습니까? 진리의 말씀만이 나를 그 깊은 인생의 수렁에서 건져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를 사랑하고 그 진리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진리의 밧줄을 던져주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들이 영혼에 대한 사랑의 정체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간절한 사모하는 목마름들이 점차 감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은 순종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니까 영혼의 아름다움이 파괴된 것입니다. 마음속의 본성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를 사랑하고 흠모하고 그 진리를 향해 가지고 있었던 그리운 풍취들이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움의 풍취들이 점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진리에 대한 깊은 목마름과 사모함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맨 처음가지고 있었던 영혼의 독특한 성향들을 모두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진리의 빛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또 그 진리의 빛을 많이 소유하고 있다면 그런 빛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그 진리를 선용하고 그 진리를 자신을 온전케 하는데 사용하고 그 진리를 통해서 자신을 끊임없이 깨트려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여러분들의 인생이 쓰여지도록 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자신을 깨트려서 우리 모두에게 생명을 주신 것처럼 그 진리 때문에 여러분 자신을 한없이 희생하고 부수어서 그래서 여러분들의 그 부서진 자아 속에서 흘러나오는 그 모든 진액들로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만족을 주고 그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나누어주고 싶어 하셨던 것들을 전달해주는 통로로 여러분 자신을 사용하고 있는가 하고 지금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죄와 슬픔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살면서 진리를 붙들고 깨달은 것은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만약에 이 빛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어두움 속에서 짐승처럼 살아가고 있었을 것이고 우리는 결코 하나님 없이 행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처럼 우리를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건져주셔서 주님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믿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지식의 세계, 은혜의 세계들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이것이 늘 우리의 마음에 무거운 부담이 됩니다. 만약에 우리들이 이런 진리의 빛을 많이 받고도 우리의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에서 미끄러진 채로 발견된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 일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구도의 발걸음을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너무 많은 즐거움을 기대하지 말고 그리고 삶의 양태보다는 삶의 본질에 대해서 깊이 마음을 쏟으며 곧 주님께로 갈 사람처럼 그렇게 우리들이 진리를 붙든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지하고 순종하는 길은 예수 안에 즐겁고 복된 길이로다
부디 순종하며 사십시오. 그래서 영혼의 아름다움을 끝까지 유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구도의 길을 걸어가는 언약의 백성들에게 변치 않는 신실하심으로 무한히 약속하셨습니다. 첫째는 끝없는 은혜의 공급입니다.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데 만약에 우리들이 순종하기 위해서 주님 앞에 은혜를 구하면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색함이 없이 그 은혜를 공급해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거짓으로 은혜를 구하면 주시지 않으시지만 진정으로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를 모두 꺾고 주 뜻 이루어지이다 하는 열망을 가지고 나는 죽어도 주님은 내 안에 사시고 내 의지는 모두 꺾여도 주님의 뜻은 펼쳐지리라 하고 그렇게 순종할 수 있도록 은혜를 간절히 구하면 그렇게 꺾을 수 없었던 자기도 꺾고 유혹도 이기고 고난과 시련의 아픔도 능히 이길 수 있도록 극복할 수 있는 은혜의 능력을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이 은혜의 능력은 구하나 얻지 못하는 이유는 순종하기 위해서 이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순종하기 위해서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님이 사시도록, 나는 꺾고 그분이 내 안에 서시도록, 나는 허물어지고 예수님은 내 안에 서시도록 간절히 하나님 앞에 간구할 때는 그리고 이 일이 내 힘으로는 내 능으로는 불가능하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많은 은혜를 주셔서 그래서 나의 악한 의지는 소멸하시고 내 안에서 선한 의지를 끊임없이 이끌어주시도록 진지하게 간구하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하나님이 무한한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십니다.
또 하나는 무한한 죄의 용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자만하지 말고, 영혼이 추루하게 된 사람들은 절망하지 말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의 백성들에게 무한히 범죄 해도 무한한 용서를 약속하셨습니다. 만약에 그가 진실한 마음으로 그 죄의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한없는 죄의 용서를 약속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너무나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그렇게 주님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람처럼 이 땅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향한 사랑 안에서 아름다운 영혼이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시적인 이 세상에서 변천하는 수많은 세상에 사물 속에서 그것에 대한 사랑을 뿌리치고 그렇게 주님만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래서 영혼에 온전한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한때는 그들의 영혼이 추루하고 더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위대한 하나님과의 교제를 맛보며 살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 때문이었고 그들이 경험한 그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용서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로 부름을 받고 일생동안 신명을 바쳐 살던 사도 바울에게 전설 같은 일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얼마나 다양한 방법을 맛보았겠습니까? 죽을 고비에서 살아났을 때, 핍박 속에 구원을 받았을 때, 굶고 춥고 주리고 배고프고 목말랐을 때 그 위기에서 건져주시던 그 수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마지막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그 옥 속에서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람이 무엇이라고 고백했습니까? “미쁘다이 말이여 예수께서 죄인들을 구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 함이로다.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이니 나는 핍박자요 포행자니 나를 충성되이 여겨 주의 일꾼으로 삼으시니”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언약백성들에게는 끊임없는 용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이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눈물을 찍어서 여러분의 가슴에 새기고 싶습니다. 온 천지가 변하고 일년 사시의 계절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불변하는 것이 있으니 용서를 비는 언약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입니다. 그게 용서입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렇게 추루해진 자신의 영혼을 보고 정말 그 아름다운 영혼으로 변화된 본성으로 진실한 삶으로 하나님 앞에 주님과 합일된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고 원하며 주홍과 같은 죄를 용서해달라고 비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용서의 은혜를 주셔서 다시 아름다운 영혼이 되게 하시고 순종의 길을 걸어가게 하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영혼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