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예배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27:4)
녹취자 : 윤은정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보이는 교회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입증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잘 증명하는 예가 바로 오늘 이 시를 남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생애입니다. 특별히 이 시편에 나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의 신앙은 성전 그 자체가 자신들의 모든 삶의 한 복판에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곤고한 일을 닥치거나, 국가적인 위기를 만나거나, 가정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거나, 영혼이 곤고할 때나, 그들이 찾았던 곳은 하나님의 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집에서는 언제나 이런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될 뿐만 아니라, 해결되는 그 과정을 통해서 자기에게 있어서의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새롭게 경험하고 인치는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시대의 교회가 회복하여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곳은 매우 특별한 곳이어야 합니다. 여기에 발길을 드려놓는 사람들이 이곳이 정말 내가 일생동안 돌아다녔던 하나님의 집이 아닌 다른 곳과는 다른 곳이다. 단지 건물을 올려놓은 교회당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다른 장소에서는 내가 쉽게 느낄 수 없는 하나님을 느끼고, 내 인생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털어놓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할 때에 주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 아니라, 해결해 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쳐 주시는 곳이라는 것이 내 마음속에 확증될 때에 성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는 교회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를 언제 썼는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 시는 다윗이 이 초기작품의 가능성이 많다 그렇게 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그러니까 다윗의 생애에서 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지만은 문맥 자체가 전쟁이에요. 그리고, 이 전쟁에 대한 가장 풍부한 경험을 다윗은 자기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 초기에 이 사울과 사울의 이 구세대들과 함께 싸우면서 생생하게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런 문맥에서 볼 때에 다윗이 두 개의 그림자가, 두 개의 그 그림이 동시에 다윗에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하면은, 한 편에 있는 그림이 뭐냐하면은, 그 처절한 싸움, 거기에는 평화가 없고, 고통, 갈등, 그리고, 투쟁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원수들이 수 없이 물밀듯이 밀려와서 자기와 자신의 왕국을 부수고자 하는 말하자면 강력한 군대들의 돌격이 있고, 그들과 대적하여 싸우면서 자신을 지키고자 하고, 또, 자신의 왕국을 수호하고자 하는 이 시인과, 시인의 군대들의 처절한 싸움이 있습니다. 그런 그림이 하나있고, 또 하나는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그림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의 집에서 이 시인 다윗이 조용히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그런 두 개의 그림이 동시에 이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엄격하게 말하면, 이 두 그림은 하나가 하나를 몰아내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신앙인격안에 동시 공존할 수 있는 그림이다 그런 것입니다. 다윗의 시대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니까 성막의 시대였습니다. 광야에서 생활할 때 치던 그런 성막을 쳐놓고, 그곳을 성소로 삼아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아와 하나님을 제사하고 예배하던 그런 때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집에서 이 시인 다윗이 하나님과 나눈 그 즐거움에 대한 소망을 필역하고 있습니다. 커다란 전쟁이 일어나고, 원수들이 자기를 향해 돌격하고, 군대가 군대와 맞붙어 싸우고, 왕국이 전쟁에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도, 그런 상황이 도저히 허물어 버릴 수 없는 이 시인의 세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 세계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의 세계였는데, 그 하나님과의 관계의 세계가 구체적으로 이 하나님의 집에서 보존되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더욱이 그 시대의 사람들은 오늘날 신약시대에 우리들이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생각보다는 훨씬 더 폭이 좁고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뭐냐하면, '하나님 앞에는 오직 한 곳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고,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올리는 기도가 하나님께 가장 잘 상달될 수 있다'라고 하는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단 말입니다.
제사가 성립되지 않으면, 용서함이 있을 수 없고, 죄 사함이 없다 면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깨어지고, 상하고, 아버지 앞에 녹아지는 그 심령만으로는 이런 죄와 용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앙이 여호와의 집, 곧, 성막에 의해서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의 성전, 성막을 향해서 그렇게 뭔가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소원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왕국이 영토을 넓히고, 대적들을 짓눌러서, 수많은 나라를 복종시켜 조공들을 들어오게 하고, 백성들의 수가 수없이 늘어나고, 군대의 수가 한없이 증가해서, 강력한 나라의 훌륭한 임금이 되는 그런 이 세상의 왕국에 대한 비교될 수 없는 완전히 신앙적이고 영적인 소망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집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께 품고 있었던 한 가지 소원, 그것을 하나님 앞에 아뢰겠다. 그 한가지라고 그래놨는데, 사실은 세 가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입니다. 평생에... 주께서 자신을 거두실 때까지, 숨질 때 되도록 영원히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것과,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의 그 아름다움, 하나님 아버지의 그 아름다움을 간절히 앙망하는 것과, 거기서 그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있었는데, 시인은 오늘 한 가지를 구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가 또,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이냐, 두 번째 것부터 생각을 해보면은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한다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이야기 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도덕적인 완전한 성품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거룩하심입니다. 거룩하심... 그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거룩하신 성품, 그 거룩한 성품의 아름다움을 앙망함,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이에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아름다움이 있는데, 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거룩한 도덕적 성품을 이야기하는 건데, 그 도덕적 성품을 앙망한다는 것은 무엇을 이야기 하냐면은, 이 땅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그 도덕적인 완전함을 자신의 삶에 가치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 자비, 은혜 이런 많은 성품들이 있는데,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유일한 소망이잖아요. 무슨 뜻인지 아세요?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있는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죄 가운데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이시라고 하는 도덕적 성품을 묵상할 때에 위로를 주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내 죄를 어떻게 하실지는 모르지만은 ‘내가 죄를 지었으나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이시다’ 라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면, 그 성품에서 자연스럽게 나를 용서해 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이 미리 감지가 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아요?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것 같고, 홀로 버려진 존재와 같이 그렇게 깊은 외로움을 느끼면서 아파할 때에,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이라고 하는 도덕적인 성품을 깊이 묵상하면, 멀리 계시던 그 하나님이 바로 내 곁에 계신 것처럼 느껴진단 말입니다. 왜 그 하나님이,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으로부터 모든 사람에게 버림을 받아서 홀로 외톨박이가 된 것 같은 나를 그냥 내버려두실 이유가 없다. 오셔서 나를 사랑해 주실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만 더 해볼까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너무 도덕적으로 혼란합니다. 사악하고 악한 자들이 번영하고, 잘 살고, 흥해. 믿음을 지키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면서 아파해. 그 현상만을 바라보면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시편 73편에서 시인이 뭐라고 그랬어요? ‘내가 이렇게 아침마다 손을 씻어 나를 정결케 한 것이 다 허사로다. 쓸모없다. 내가 이렇게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깨끗하게 살아보려고 애를 쓴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도 막 살아 버릴껄...’ 그리고 후회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그 상황밖에는 우리에게 돌아갈 곳이 없다 이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볼 때에는 막 부패하고, 악한 자들이 번성하고, 의롭고,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는 것 같애요. 그 때에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묵상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깊이 묵상하면 이것은 잠시 있는 현상이고, 주님이 이 모든 것을 기억하셔서 이러한 부조화와 불의 속에서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반듯이 상을 주실 것이고, 그리고, 이 시대에서 잠시 편리하게 살기위해서 믿음을 버리고 타협하는 많은 사람들은 후일 곤고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결론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큰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거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무리 많이 믿고, 교회를 아무리 많이 다녔다고 할지라도, 교회 다니는 문화생활로서의 교회출석이 익숙해지는 것, 일로서의 교회에서 주어지는 다양한 직무를 수행함으로서 일에 익숙해지는 것, 이것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조용히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해 봅니다. ‘하나님이 성실하시구나! 당신이 창조해 놓으시는 세계와 사람들을 무책임하게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아침마다 오셔서 광명을 주시고, 그리고, 계절이 되매 이 세상에 있는 만물들을 소생하게 하시고, 꽃피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시고, 이렇게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분이시구나! 그리고 이것은 우유부단하거나, 불규칙하지 않고, 성실하구나!’ 그것을 깨달을 때에 부조화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나의 상황을 붙들고 계시다고 하는 신실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모두 멸망당하는 그 위기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낙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무엇 때문이냐면, 그런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성실하심을 본 것입니다. 성품이에요. 성품... 악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요? 악하게 삽니다. 착한 사람은 착하게... 열정적인 사람은 열정적으로... 게으른 사람은 게으르게... 성품과 삶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 성품을 가지신 분인가 그것을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고 있는 일, 행하신 일들에 대한 강력한 소망을 갖게 되고, 그 소망을 가르켜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시인이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워요? 그의 꿈은 강력한 군대를 일으켜서 엄청난 땅덩어리를 차지하는 데에 그것에 꿈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작은 나라들이 자기에게 와서 자기의 이름을 높이고 조공을 드리는 것이 이 시인에게 있어서 가장 절박한 소원이 아닙니다. 그건 모두 하나님이 주셔서 하게하는 일이고, 그에게 있어서 간절한 소원은 그가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하는 그 일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행복한 일이 뭐냐하면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죄 가운데 있을 때에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보며 희망을 가집니다. 위기가운데 있을 때에 지혜로운 하나님의 성품을 보면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우리를 이런 시련들을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이게 앙망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신앙생활의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은 엔진과 같은 것입니다. 엔진... 이게 없으면 다른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 시인이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 일을 사모한 것입니다. 그것을 간절히 앙망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앙망했던 것은 거기에다가 희망을 둔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거기에다가 희망을 둔다는 것입니다. ‘종이 상전의 손을, 여종이 주모의 손을 바람과 같이’ 거기에다만 모든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 시인이 간절히 갈망했던 또 한 가지의 일은 무엇이냐 면은, 거기서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성공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목회에 있어서 성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성장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성화를 위해서 애를 쓰고 자기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까? 그렇게 자기를 죽도록 복종시키고, 자기를 부인해서, 마지막에 얻게 되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가 죄와 더불어 싸워야하고, 자신이 육체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욕망들을 잔인할 정도로 혹독하게 짓누르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무엇을 얻기 위해서 우리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죠?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늘 간간히 했었는데 요새는 정말 가슴 깊이 밀려옵니다. 나는 요새 우리 전도사님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뭐가 부러웠겠냐 면은 학교 다니는 게 그렇게 부러워요. 학교 다니면 되지 않겠느냐? 뭐, 어떻게 다니겠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학교 다니는 게 부럽냐 하면은 학교 다닐 때에 전도사님들과 같이 신학대학원시절에 저는 완전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여튼 숨이 턱에 달 정도로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공부했습니다. 많이 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는데 최선을 다해서 할려고 애를 썼습니다. 가슴에 딱 있는 간절한 소원은 한번 마음껏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보다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그런 마음, 다시 말하면 뭐냐하면은, 그 두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뭐냐하면은 교회를 섬기는데, 우리 교회처럼 교회가 크진 않아도 적정한 규모가 되고, 교회 자체가 합리적인 생각을 가져서 적절하게 자신의 일들을 구획을 지워놓고 교회를 섬기게 하면은 힘이 덜 들지는 않지만 초점은 맞춰지는데, 저는 교인이 한 150명 모이는 교회에서 전도사생활을 했는데, 전천후 폭격기 같은 교역자생활을 했습니다.
성가대부터 시작을 해서, 뭐 하다못해 새벽에 난로 피는 일까지, 약방의 감초처럼 끼지 않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 속에서 오는 시간적인 압박이 굉장히 힘들었고, 그러면서도 섬겨야하고, 한편으로도 공부하고 싶고, 그 사이에 끼어있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껴서... 그런데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픕니다. 학교 가면은 성경책과 책들을 보기에 너무 민망해서 가슴이 아프고, 교회에 와서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보면 ‘목장이 이지경인데 무슨 놈의 공부를 하는가?’ 하면서 마음이 아프고, 그 사이에 끼어있었습니다. 지금 가만히 생각하면 말이죠? 그랬기 때문에 3년을 눈물로 학교와 교회를 오고갈 수 있었던 것 같고, 그렇게 살았던 삶 속에서 유일한 위로가 있었다면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께서 내가 이 두 사이에 끼어서 몸부림치는 모든 고통을 하나님께서 아실 것이다.’ 라고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보면은 그때보다는 훨씬 유명한 사람이 되고, 그때보다는 뭐 교회도 더 커지고, 담임목사가 되고, 또, 뭐, 교수도 했으니까 그때보다는 아는 것도 더 있고, 그렇게 됬고, 이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법 전문가처럼 보일진 모르지만은 점점 그런 걸 느껴요. 그게 뭐냐하면은 이 어쩔 수 없이 인생이 기울어져가면서 끼게 되는 내 영혼의 때들, 내 마음의 찌끼들 말이죠... 정말 순수하고 진실한 무엇에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자의 의무이고 도리인 동시에 그것이 신자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그런데, 어떤 때 가만히 생각하면은 그때가 너무 그리워지는 것입니다. 딱 그때보다는 훨씬 바쁘고, 그땐 지금보다 훨씬 가난하고, 고단하고 그래도 그때는 정말 인격적이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사랑한 것 같은데, 그때보다 일은 훨씬 더 많이 하고, 잘 하는 것 같은데, 그때에 하나님을 사랑하던 그 사랑에서 내가 더 많이 주님을 사랑하게 됬느냐고 물을 때에는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 시인이 벌써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찬양)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우린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가끔 그런 기도 합니다. 뭐 별로 그렇지도 않지만은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나는 유명한 것도 싫고, 큰 교회도 싫고, 저술가로서의 이름을 날리는 것도 싫고, 많은 돈도 싫고, 주님이 나를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시면서 구원하기 위해서 이 낮고 천한 세상에 내려오신 것처럼, 주님도 내 마음에 전부일 수 있다면, 그래서 내가 주님을 뵈올 때 주님의 마음에 내가 전부인 것처럼, 내가 느낄 수 있고, 주님이 나를 보실 때에 내 마음에 주님이 모든 것임을 주님 자신이 확인 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린 다 두고 가는 것입니다. 다 두고 가요. 마지막에 하나님께 갈 때에 가지고 가는 단 하나가 있는데 사랑입니다. 우리 육체가 있든지, 없든지, 우리가 영혼만 남든지, 부활해서 다시 새로운 육체를 입든지 간에, 우리의 인격 속에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는 것이 무엇이냐 면은 하나님을 향한 인격적인 사랑입니다. 그것이 이 시인이 그게 바로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최대의 목표이고,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양보할 수 없는 궁극적인 목적지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시인이 하나님 앞에 일평생 살면서 늘 사모하던, 추구하던 그 일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 그것을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주님을 사랑하면 여러분들은 작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죄 가운데 있든지, 고난가운데 있든지, 이겨야할 시련을 만나든지, 여러분들이 마음진실하게 주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 없이 살 수없는 존재들임을 고백하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지 않으면 여러분들의 만족이 없고, 그리고 주님을 깊이 사랑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버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한 여러분들은 결코 작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게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아무리 반듯하고, 도덕적으로 의롭고, 어떻게 살고,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고, 그 사랑이 자신의 인생의 목표도 되지 않고,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신 하나님과의 풍성한 만남이 결핍된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이, 그 삶이, 그 무슨 의미가 있는 삶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시인은 그러한 모든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 그것이 한 장소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뭐냐하면, ‘여호와의 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고 싶다.’고 하는 소망을 마지막으로 갖습니다. 이건 벌써 시편 23편에서도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교회를 하찮게 생각하고, 거의 교회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이기적인 삶을 계속해 나아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죠? 이 시인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는 일과, 그리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그 일이, 자신의 인생의 중심자리에 오게 되면은, 그렇게 하나님을 가장 잘 만나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그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그 교회에서 살고 싶은, 그런 사모함이 있는 것입니다. 깊은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가만히 보면은 우리의 신앙의 때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풍성하고, 주님의 그 도덕적인 성품을 사모함으로 우리들이 영향을 받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던, 풍부한 은혜가 있었던 그때에는 항상 우리들에게는 교회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었습니다. 왜? 거기서 내가 하나님을 만났고, 거기서 나처럼 하나님을 만나는 지체들을 보았고, 그렇게 하나님을 만난 지체들과 함께 형제처럼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압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오늘날의 정해진 교회도 없이 이리저리 유리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깊이 경험한 사람들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교회에 대한 그리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는 시인이기도 했고, 위대한 장군이기도 하고, 선지자이기도 했고, 왕이기도 했고,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권력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원은 너무나 소박한 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있고 싶다.’ 라고 하는 소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이 그런 사모함들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하나님의 집에 대한 깊은 사랑을 가지고, 그리고, 이 하나님의 지혜의 상태가 내 영혼의 상태와 밀접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보이는 하나님의 교회를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이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해서 숨질 때까지 뜨겁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교회를 사랑하고, 이렇게 우리처럼 이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을 기대하고, 그들을 또한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가장 중요한 삶의 방식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