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위기를 극복한 교회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베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행6:1-7)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성경의 본문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부흥이 있었을 때 일어난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강림 사건이 있고 난 후 교회는 놀라운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핍박이 두려워서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이 그 성령을 경험하고는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나와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선포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 교회가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4장에서는 이런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시기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베드로와요한을 잡아다가 문초하고 교회는 큰 위기의식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5장에서는 교회 내적으로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는데 성령을 속이고 자신의 재산을 처분하던 것을 감추려고 하던 아나니와 삽비라가 심판을 받고 들것에 실려 나가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같은 장에서 사도들 모두가 붙들려가서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무슨 연고인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그 감옥 속에서 기적적으로 나와서 감옥에 갇혀있어야 할 시간에 거리에서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희한한 일도 일어났습니다.
II. 부흥 속에 찾아 온 영적인 위기
이러면서 5장까지 달려온 이 예루살렘 교회가 6장에서 커다란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이때는 사도들이 헌신적인 복음전파로 교회가 매우 성장한 때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수가 많아졌는데 여기에서 제자는 12제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한 신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예루살렘 교회에 생겨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때에 위기가 찾아오게 되었으니 이는 부흥 속에서 찾아온 위기입니다.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을 두고 이 위기가 발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히브리파 사람들과 헬라파 사람들이 있었다고 나옵니다. 이것은 인종에 따른 구분이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에 의한 구분이었습니다. 즉 동일한 유대인이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일찍 고향을 떠나서 모국어를 잃어버리고 그 당시에 공영어로 통하던 헬라어, 즉 그리스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있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원래에 자기 모국어를 잊지 않고 히브리말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두 사람들 사이에 이제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교회의 중요한 섬김 가운데 하나는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특별히 의지할 것 없는 과부들을 돌보는 일은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 사역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시던 그 섬김의 정신을 이은 섬김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일은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매일매일 그 과부들에게 아마 먹을 것과 필요한 것을 해주는 것을 교회가 해주었는데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헬라파 과부들은 빠지고 히브리파 과부들은 제대로 공급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들에 사도들 자신이 깊이 개입되어서 이 일들을 주도해나갔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이제 그 구제에 빠지는 헬라파 과부들은 헬라파 사람들과 함께 히브리파 사람들 그 과부를 돕는 사람들을 주관하는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강림 사건 후에 이루어졌던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이 너무나 많이 변한 것을 6장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의 강림이 있고 그들이 사도의 말씀에 은혜를 받았을 때 그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신들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공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쳐서 하나님 앞에 내놓은 것은 누구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었고 그것으로 많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도 자신들은 만족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런 이해와 사랑에 넘치던 은혜로운 분위기는 사라지고 그까짓 것 식물 몇 조각에 마음이 상하고 갈리어져서 서로 원망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III. 위기의 원인: 그릇된 사역의 질서
이런 속에서 사도들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모두 모아서 고백하기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제쳐놓고 있다. 이런 충격적인 고백을 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고백 속에서 우리는 이런 예루살렘 교회의 영적인 위기가 사역의 질서의 혼란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즉 위기의 원인이 사역의 질서가 무너진 데서 온 것이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이 말씀을 제쳐 놓았다고 할 때 이 말씀이라는 것이 무슨 말씀일까?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으니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비 기독교인들에게 설교하고 선포하는 일이었고, 또 하나는 이미 예수를 믿고 교회 안에 들어온 신자들에게 그들이 더 좋은 성도로 자라기 위해서 가르치는 그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았다고 하는 이 대목에서 사실은 우리는 별로 잘 동의가 되자 않습니다. 설마 그 중요한 사명을 맡은 12명의 사도들이 그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매일 나누어줄 때 설교를 안 하고, 성경을 안 가르치고 그런 빵 바구니를 이고 다니면서 그 일을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이 사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았다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말씀을 제쳐놓은 그것이 사도들이 자신의 사역에 반성일 뿐만 아니라 사도들 자신이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고 하는 그 사역이 이 성도들의 실제적인 영적생활 속에서 그 열매로 나타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말씀을 제쳐놓았다고 했지만 사실 사도들이 빵 바구니를 들고 다니면서 과부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거나 또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예배시간에 설교를 못했다고 우리는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은 그런 결과는 성도들의 이 모습 속에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고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을 때 성도들이 그 말씀을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그들은 이 세상의 제물과 육신의 필요 외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되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에 매우 목마른 사람들이 되었고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유와 기쁨을 누리면서 이웃에게 칭찬받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과부를 구제하는 일로 마음이 갈려서 사도들이 예전같이 설교해도 그 설교에 감동을 받지 않고 그렇게 딱딱해진 심령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구제하는 이 일은 옳은 일이고 교회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지만 그 일들이 질서를 따라서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이 오히려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고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분을 맡고 사명을 받을수록 더 많이 기도해야지 됩니다.
A. 말씀을 떠나는 회중들
오늘 성경에 보면 이미 이 사람들이 말씀을 떠나는 회중들이라는 사실을 이미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매일매일 구제하는 것에 자신들이 빠지는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예전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은혜로 갈망하고 그 말씀에 의해서 자신들이 새롭게 빚어지는 사람들이 되는 것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는 차갑고 냉담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에게 얼마나 많이 해당되는 말씀인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맨 처음 인생의 벼랑 끝에서 열린 교회를 만났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을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혼자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없기 때문에 인생의 벼랑 끝에서 만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입에 얼마나 달았습니까? 어떤 사람은 말씀에 은혜를 너무나 받은 나머지 자기가 교통사고가 나서 병원에 입원해서 직장도 안 가고 다른 일도 안 하고 설교만 들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깊이 받으면서 기뻐할 때 여러분들의 마음이 나뉘었습니까? 세상에 있는 것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그 은혜에 깊이 붙들려서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 이외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완악하고 이름난 죄인들인 사람이었던 사람들이 깊이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자 그들의 마음은 어린아이처럼 부드럽고 유순한 마음이 되었고 한때 주의 가까이 가본 사람도 아닌 것처럼 여러분들은 단정하게 진리를 사모하는 그 일에 자기를 드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서 기갈 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훈련도 받은 적이 없고 프로그램도 없었지만 여러분들은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어떻게 그들의 영혼을 다루어야할지 몰랐기 때문에 설교 테입을 나누어주고, 자기 돈으로 책을 사서 부쳐주고, 그들을 위해서 온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그 영혼들을 섬겼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까?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목회자인 제가 감탄할 정도로 시종일관 올곧음으로서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여러분들 대다수는 늘 미끄러지고 다시 일어나고 하는 일들을 반복하면서 여러분들이 이 신앙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전하는 가운데 오늘 이렇게 자신의 인생 전체를 움직여서 자신의 재산과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바치고 이제는 이 신앙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었는데 오늘은 자신에게 나누어주는 떡 몇 조각, 포도주 몇 모금이 불공평하다는 것 때문에 실족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과부들과 같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마음속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말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씀의 은혜가 시든 것은 내 인생 많은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도 알지 못하는 아프고 쓰라린 일들이 내 인생에 많이 일어났고 심지어는 교회에 오면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나를 고통스럽게 했기 때문에 내가 예전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에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 모릅니다. 실제로 오늘 이 과부들도 뭔가 불공평한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사건을 통해서 이 과부들이 은혜가 떨어진 것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많은 것들을 핑계되는 것은 비겁한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여러분들의 영혼에는 문제가 없고 건강하고 단지 인생에 어려움이 생기고 문제가 생겼다면 여러분의 사업과 가정에 어려움이 생겨도 기도는 언제나 하늘을 향해서 솟아오르는 날개를 달아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지체들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펑펑 쏟아져야 되지 않습니까? 자신은 올바르고 자기는 무엇인가 핑계를 대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버린 사람들, 과연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너는 완전히 피해자다. 네가 나와의 교제가 막힌 것은 너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인간들, 그리고 너의 환경 그것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설마 말씀하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우리 모두 겪게 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가끔 저에게 교회 성장에 대한 포부를 묻는 사람이 있는데 저의 관심은 교회의 양적인 성장이 아니라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참되고 진실한 신자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관심사도 모든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능력 있는 목회자가 되는 것이 제 꿈이 아닌 것은 주님이 나의 증인이십니다. 어떻게 하든지 저는 목회자로 교회에 부르심을 받고 여러분들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아서 일정하게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성도들이 되었습니다. 그 헤아릴 수 없는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여러분들도 좋은 신자가 되어가고 목양을 받음으로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고, 성도가 되어가고 나는 여러분들을 고난 속에서 목양하면서 나도 온전한 신자의 길을 걸어가고 싶지, 여러분들에게 목회만 잘하다가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성장하면서 이제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가운데 예배 시간마다 회심의 은혜를 주시지만 그러나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요동치도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한번도 회심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도 있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불꽃같은 회심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지금은 무엇인가 이 세상의 일, 여러분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어려움으로 인해서 미끄러진 채 냉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흔히 잘 쓰는 말이 왜 그런지 요즘은 말씀의 은혜가 안 들어옵니다. 왜 그런지 모르십니까? 그대들의 죄 때문입니다. 남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정직하게 지켜보십시오. 미끄러진 채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그런 불쌍한 사람들이 여러분들 가운데 있습니다. 훌훌 털고 다른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은데 들은 것은 많고 귀는 높아져서 이제는 그것도 또 마음대로 안 된다고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교회에 등록하고 새가족 공부도 안 하는 사람들도 생겨납니다. 저는 아주 깊은 위기를 느낍니다. 문제는 그렇게 안일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밖에 나가서 하나님 욕을 다 먹이고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허울을 입고 교회 안에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려는 교회의 영성에 발목을 잡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이것은 정말 순교의 각오를 하고 이 문제를 대응하지 않으면 우리들이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도 이 교회를 통해서 정말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보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 내내 이 예배에 은혜를 위해서 간구하고 준비된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또 많은 다른 사람들은 냉담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몇 해 전에 저희 교회를 다녀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전혀 교회를 다녀본 적이 없는 불신자였는데 어떤 일이 있었는지 누군가에 의해서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을 먼저 했다고 합니다. 그러는데 어느 교회를 다닐지 여러 교회를 두루 다녔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우리 교회도 다녀갔습니다. 집이 가깝지 않아서 그런지 우리 교회는 나오지 못했지만 그 불신자에게 열린 교회의 교인 하나가 소감을 물었다고 합니다. 우리 항상 묻는 질문이 예배를 드리고 나면 오늘 예배를 드리시면서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그 사람이 똑같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했는데 자기가 신자가 되기를 결심하고 몇 교회를 다녔는데 나는 아직 처음이라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 느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열린 교회가 꼭 좋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하여튼 나는 이 교회에서 예배를 몇 번 드리면서 이 교회에 계속 다니면 믿든지 말든지 둘 중의 하나는 선택을 해야지 될 것 같다고 절대로 그냥 그렇게 다닐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못한다는 일들을 여러분들은 하고 있습니다. 그 불신자가 웃을 일이 없습니다. 그 불신자가 믿든지 말든지 양단간에 선택을 해야지 그냥 무심한 마음으로 이 교회에 다닐 수는 없겠습니다. 불신자가 없다는 일이 신자인 여러분들 속에서는 가능합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무 기대함도 없는 예배의 참석, 상습적인 예배시간 지각,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없는 예배의 참석, 상습적인 졸음과 태만함, 생각과 마음을 모으지 않는 예배의 형식적인 참석,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그것을 이해하려는 지성의 노력이 없는 부주의함,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후에도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결연한 의지가 없는 의지박약한 삶, 그리고 언젠가 하나님께서 나를 회복시켜주실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서 오늘의 불순종을 합리화시키는 비겁한 삶, 이런 것들이 오늘날의 그림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불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성령의 충만을 경험했다고 해도 이들이 다락방에서 받은 것 같은 그런 불을 경험했습니까? 여러분들은 이렇게 후진 설교자에게 더듬더듬 설교를 듣고 있지만 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던 사람들은 일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다니고 그의 생애를 목격한 증인들이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운 능력을 받은 사도들이었습니다. 한때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갖다 놓았던 사람들이 오늘은 하나님의 말씀과 이해와 사랑은 간곳이 없고 나누어주는 떡 몇 조각에 마음이 상하고 미끄러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래도 여러분들 자신의 모습을 이 속에서 읽어낼 수가 없습니까?
어떻게 하면 될까요? 나는 이것이 최고의 숙제입니다. 열린 교회가 지하실에서 7명이 시작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무슨 특별한 전도의 프로그램이 있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열린 교회의 성장의 비결을 묻는데 나는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으로 교회가 성장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었습니까?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사람들이 주님을 만났습니다. 전도 훈련도 받지 않고 누가 시킨 사람도 없는데 기도하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 우리 엄마, 그리고 하나님을 믿다가 미끄러진 내 동생,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 없이 살아가는 이웃집 아줌마들이 생각났습니다. 누가 시킨 사람이 없어도 그들이 집안에서 골방에서 그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그리고 백리 길이 멀다않고 찾아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번에도 대구에 내려갔는데 여러 사람이 서울에 있는 교인들이 권해서 거기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미국에 가서 집회를 하면 미국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옵니다. 너무나 안타까우니까 그들에게 국제 전화를 하고 편지를 쓰고 이메일을 보내서 우리 목사님 가시니까 꼭 가서 하나님 만나라. 누가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초창기에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의 주머니에는 만 원짜리가 남아날 수 없었습니다. 수없이 태입을 사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성장한 것입니다.
B. 마음과 말씀의 능력
정말 여러분들 속에 이런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되고, 안수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이런 저런 직분을 맡고 꾸역꾸역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붙잡혀 산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4-5년 교회를 다니고 뿌리를 내렸는데 이 나이에 내가 무슨 배를 다시 갈아타랴. 난 그런 동기로 신앙생활 하는 것이 너무나 싫습니다. 여러분들의 영혼이 살아날 수 있는 것이 여기가 아니면 살아나는 곳으로 가십시오.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교회에 사람의 숫자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영혼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 갈망이 없이 살아가는 성도들의 이 모든 삶이 한때는 어떻든지 모르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은 삶이 아닙니까? 반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과 하나님의 말씀의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신 속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떠한 마음으로 그 말씀을 듣는가가 관건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을 뿌린 비유가 나옵니다. 그 씨는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길가와 같은 마음에 떨어질 때는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돌작밭에 떨어졌을 때는 잠시 싹이 나는가 하더니 뿌리가 말라서 죽어버렸습니다. 가시나무 떨기에 떨어진 씨앗도 완전한 씨앗이었지만 뿌리가 내리고 자라나는가, 했더니 이제 그 가시덤불에 싸여서 더 이상 성장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지줄기가 성장하지 못하니 양분을 공급해주지 못해서 뿌리가 자랄 수 없고 뿌리가 자라지 못하니 습기와 양분을 빨아들이지 못해서 줄기가지가 자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결국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말씀의 마지막 궁극적인 목표는 열매를 맺어서 씨를 내는 것입니다. 인격 안에서 예수를 닮은 인격이 맺히고 삶 속에서 예수를 닮은 삶의 열매가 맺히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으로 이 예배에 참석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사모합니까?
주님께 나와 경배드립니다 주 계신 곳에 기쁨 가득
누구와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배드림이 기쁨됩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 있습니다. 그들이 그 은혜 속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여러분 안보는 곳에서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신기하게 서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예배당이 넓어져서 사람을 일일이 관찰할 수 없고 눈도 더 나빠져서 점점 더 보이지 않지만 예전의 생각이 납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배의 시간이 되면 몸의 모든 완고한 기운이 빠져나가고 천사같이 힘이 없지만 기쁨이 있는 얼굴이 되었던 그 수많은 성도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든지 다 빨아들여서 그래서 그 말씀에 합치하고 싶었던 그 사람들, 그들에게 한번의 예배는 사막과 같은 인생의 길에서 한모금의 물이었습니다. 듣고 지금 우리와는 비교되지 않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저녁에 눈을 감으면 뜨고 싶지 않은 고난 속에서도 진리의 말씀을 듣고 험한 세상을 이겼습니다. 시련과 박해를 이기고 굽은 자기를 이기면서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IV. 위기의 해결: 일꾼을 세우심
지금 여러분 그 마음입니까? 정말 그 마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은 그 일들이 교회적으로 모두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위기에 해결을 시도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사역의 잘못된 질서를 바로 잡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한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이 구제의 일을 위해 교회의 일꾼을 뽑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유명한 초대교회 첫 번째 집사 선택의 장면이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이 집사가 바로 오늘날 안수집사의 기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조금만 관련이 됩니다. 이 당시에 이 집사들은 오늘날에 이런 집사가 아니라 거의 목사와 같은 소명을 지닌 집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이런 집사와 틀립니다. 그 증거가 여기에 뽑힌 이 집사들, 그 중에 한사람 스데반이라는 사람이 6장에서 완고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설교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장쾌한 신학적인 그리스도의 설교였습니다. 영혼들을 얼마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리에 대한 불붙는 마음으로 외쳤는지 그는 이 말씀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고 그 속에서도 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가 있었던 영성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이렇게 투표를 해서 절차를 걸쳐서 당선이 되거나 어떤 직분을 맡게 되면 자신이 엄청난 지위에나 오른 것처럼 스스로 자고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온 사상이 아니라 군사독재 시대에 있었던 반장선출 문화에서 온 세속적인 생각입니다. 자신들이 이렇게 투표를 하고 당선이 되면 무슨 교회의 권력이나 목회자와 나누어갖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교회는 그런 권력이 없습니다. 교회에 있는 권력이라는 것은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병들고 고통 받고 무지한 자들을 위해서 섬기는 그 봉사의 권한이 교회의 권한이니 그런 섬김의 권한이 어떻게 권력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래전에 일입니다만 어떤 사람이 우리 교회에 등록하고 다니는데 새해가 되어서 집사로 임명을 해주었습니다. 그 사건 때문에 그분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집사로 임명을 하는데 교회를 떠나는가? 전 잘 몰랐는데 이분이 옛날에 있던 교회에서 안수집사를 하셨답니다. 그래서 안수집사인데 교회에서 집사로 임명했더니 논리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운 종이 어떻게 교회에서 또 서리집사로 임명할 수 있는가. 그러면서 교회를 나갔습니다. 그래서 안수집사라고 하는 것은 노회에서 주는 것도 아니고 총회에서 주는 것도 아니고 교회에서 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안수집사를 받는데 교회를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냥 명칭이 그러니까 안수집사라고 불러주는 것이고 한 사람을 두 번 안수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안수집사라고 불러주는 것입니다.
장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섬기는 그 교회를 떠나면 그는 더 이상 장로가 아니라 평신도입니다. 왜? 그 장로가 되는 것은 그 교회에서 그 교인들의 동의를 통해서 장로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교회에 있는 한도 내에서 장로가 되는 것이고 다른 교회에 가면 장로가 되기 위해서 또 안수를 받는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적으로는 교회를 옮기면 그 사람이 법적으로는 장로가 아니지만 안수를 두 번 받을 수 없고 또 이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잘하면 장래에 장로로 피택 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장로라고 부르고 그래서 교회법상의 정식적인 명칭은 무임장로라고 부릅니다. 맡은 임무가 없는 장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안수집사라는 사람이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기름을 부었는데 어떻게 당신이 다시 또 집사로 임명할 수 있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은 안했습니다만 속으로 그랬습니다. 여호와께 기름 부은 사람이 왜 가끔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가는지, 삶은 그렇게 너절한지 그러니까 전에 있던 교회에서 안수집사를 주면서 어마어마하게 바람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기름 부은 것이고 마치 진실이나 된 것처럼 그렇게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꿈 깨십시오. 그게 아닙니다.
목회자의 부르심과 그 다음에 교회에서 이렇게 선출된 일꾼들의 부르심은 같은 점이 있고 틀린 점이 있습니다. 같은 점은 넓게 생각하면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교회에 비롯된 직분이라는 점에서 동일하고 틀린 점에 있어서는 목사의 부르심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르시는 직접적인 부르심입니다. 그러니까 목사는 목회를 시작하고 나서 목사가 될까 말까 고민하다가 목사가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목회의 부르심은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피할 수 없는 부르심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예수의 사랑을 알게 되니까 그것이 너무나 감격해서 이제는 자기가 무엇인가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 땅의 영혼들을 위해서 신명을 바치지 않고는 다른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소명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자기를 포기할 것인지 말 것인지 끊임없는 씨름 속에서 결국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목회의 소명은 아직 목회지가 없는데도 목회의 소명이 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일반적입니다. 누가 자기를 투표해주어서 청중해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그 소명은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나 안수집사나 권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 누가 나에게 와서 목사님, 제가 며칠 전에 기도하는데 이 교회에 장로가 되라고 주님이 부르셨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전 빨리 그 사람 손을 이끌고 정신병동으로 데리고 갈 것입니다. 그런 소명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께 그런 확신을 받았어도 교인들이 투표해서 당선시켜주지 않으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목회자의 부르심은 이 섬길 아직 장소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직접적인 부르심이고 이렇게 투표를 해서 당선이 되는 교회의 임직자의 부르심은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이 부르셨지만 교회에 필요의 의해서 교인들의 동의에 의해서 불려지는 간접적인 부르심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의 장로된 것은, 나의 안수집사된 것은 우리 교인들이 나를 세워준 것이다. 그렇게 고백을 해서는 안 됩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모두 하나님이 세워주셨습니다.
A. 목회자를 돕게 함
그래서 여기에서 일꾼을 세우는 세 가지 원리를 보게 되는데 첫째는 그 목회자를 돕기 위해서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한 교회는 한 사람에게 설립이 명령이 됩니다. 사도 베드로에게 예루살렘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물론 그 주위에는 11명의 다른 사도들이 있었습니다만 실패한 베드로에게 갈릴리 바닷가에서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는가. 네 주님을 제가 사랑합니다. 부끄럽지만 사도 베드로가 온 마음을 다해서 세 번을 고백했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 이것이 목회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그에게 맡겨주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가 소명을 받을 때 어떤 교인들이 모여서 어떤 교회를 이룰지 아무 계획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목회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고 부족하든지, 넘치든지 간에 그의 섬김을 통해서 많은 양떼들이 주님을 만나고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이런 은혜 없이 교회가 되는 것은 사실상 진정한 의미의 교회가 아닙니다.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한 목회자에게 명령하셨을 때 처음에야 목회자가 모든 것을 다해야할 것입니다. 설교도 하고, 기도는 물론이고 그리고 성도들 심방도 하고, 새로 나온 사람 새가족 공부도 시키고, 아프면 병문안도 하고, 심지어 돈이 없으면 자기 돈 들고 가서 밥도 사주고, 쌀도 사주고, 심지어 몸이 아프면 자기가 침 나주고, 고쳐주기도 해야지 되고 교회의 일꾼이 없으면 자기가 빗자루를 들고 쓸기도 해야지 됩니다. 모두 목회자에게 하나님이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커질수록 목회자는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의 질서를 미리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한사람 목회자의 부르심을 구현하기 위해서 교회는 많은 일꾼들이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인데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목회자를 대신해서 구제하고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인데 어떤 사람은 목회자를 대신해서 다른 사람을 위한 섬김의 기도에 힘을 씁니다.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인데 새가족을 다 돌볼 수 없어서 어떤 사람들이 새가족을 위한 교사가 되고 그리고 심부름꾼이 되어집니다.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것은 하나의 부르심에서 퍼져 나온 갈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갈래에서 퍼져 나와서 목회사역을 돕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이 목회자와 자꾸 부딪힙니다. 말을 안 듣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을 일꾼으로 세워주신 아주 성경적이고 기본적인 원리를 지금 어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영혼이 부흥을 경험하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일할지는 모르지만 그 영혼은 심히 곤고하고 교회에 대한 온갖 불만과 그리고 고통들로 가득차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섬긴 모든 것들이 처음에 섬김을 받았던 그 원리,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목회자를 통해 세우신 교회에서 목회자를 도움으로 일치를 이루는 그 부르심에 어긋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명백한 성경의 원리를 한번 직시해보십시오. 사도들이 지금 과부들을 구제한 일들에 대해서, 자기가 관여한 일들을 인해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맡기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그것을 직접 하는 것은 선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맡긴 것입니다.
지금 생각이 났습니다만 성경의 증거를 하나 더 대겠으니 저에게 설득을 당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에 보면 모세가 수많은 사람들이 남전도회원만 60만이 넘었으니까 그 인간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모든 분쟁이 나면 재판을 받겠다고 끝이 안 보이게 줄이 늘어섭니다. 그때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왔습니다. 그러면서 얘기했습니다. 넌 정신이 정말 없구나. 어떻게 그렇게 어리석은가. 네가 이 많은 사람들을 재판하다가는 네가 기진해서 쓰러져 죽을 것이다. 그러면서 내가 한 지혜를 너에게 알려줄 것이니 오십 부장, 백부장 이렇게 일꾼들을 세워라. 그래서 가벼운 일은 그들에게 맡겨서 하게하고 그들에게 판결이 되지 않거나 중요한 일은 네가 하도록 하라. 그리고 이방 사람인 이드로가 지혜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 모세에 의해서 오십 부장, 백부장이 임명이 되어서 그 사람들이 가서 백성들을 이제 재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 그들이 재판하고 있는 일이 원래는 그 사람들에게 주어진 일입니까, 모세에게 주어진 일입니까? 묻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런 지혜를 하나님이 주셔서 갈라놓으셔서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게 무슨 권력을 나누어갖는 것입니까? 끄덕 하면 그렇게 하려면 목사님은 왜 일꾼을 세웠는가 하고 가끔 어느 교회에서나 나오는 법인데 교회는 그렇게 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섬기는 사람의 영혼을 뚜껑을 열고 들어가면 시커멓게 썩어서 곤고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었을 때 그때 그 마음에 얼마나 감격이 밀려왔습니까? 그때 무슨 여러분들이 임직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돈을 받으려고 했습니까? 아니! 지위가 높아지려고 했습니까? 아니면 한번 그 교인들이 자기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면 담임목사 한번 해보려는 야망을 가졌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방황하는 그때 이 교회에서 주님을 만났는데 전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고 싶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면서 임직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첫 번째 원리를 어깁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임직하고 교회의 직분을 맡으면 담임목사하고 무슨 교회의 권력이나 나누어갖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교회는 좀 어렵지만 그냥 갈 길로 가십시오. 목회자도 괴롭지만 끊임없는 자기 죽음 속에 성화의 길을 생각하고 믿음으로 극복하면 그런 사람 때문에 목회자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본인은 너무 비참해집니다. 그러니까 오늘 보십시오. 과부들을 섬기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안 하면 욕먹어야 될 일인데 그런데 했기 때문에 지금 교회는 더 어려워진 것입니다. 왜 원리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세워지는 일꾼들은 사도들을 돕기 위해서 뽑혔습니다. 한번 정직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십시오. 사도들이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까? 물론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에 회개와 능력을 받는 것에 있어서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어부들이었고 세상의 지위나 학벌로 보면 내놓을 것이 없는 무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성경묵상을 잘하시니까 내가 한번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해서 뽑혀진 이 집사들이 사도들과 부딪히는 것을 상상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들하고 싸움이나 하고 다투기나 하는 이런 일들을 상상이나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찾아가서 그렇게 당신들이 하려면 우리들을 왜 뽑았습니까? 우리 뒤에는 수천 명의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점에 매우 잘못된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목회의 지도력이 약화되니까 이제는 이런 많은 오해와 어리석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성경의 원리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어떻게 하든지 그 원리를 올바르게 붙들고 섬기려는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목회자를 돕기 위해서 세워진 사람들입니다. 목회자가 진리의 길을 안 가려고 할 때는 목숨을 걸고 그 길을 막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의 의무니까 쫒아내십시오. 그것도 여러분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한 그 리더십과 권위에 복종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주신 목회의 소명을 존중하고 그 모든 것 속에서 하나의 일치를 이루어가려고 하는 그런 배승적인 안목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만 오늘 투표를 하십시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무엇이라고 합니까? 세 가지 조건을 이야기합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하고, 세 번째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하나는 영성을 보여주고 하나는 지성을 보여주고 또 하나는 인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목회자의 소명을 따라서 생겨나는 수많은 일들이 생겨납니다.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교회가 더 성장하고 목회자가 비전을 가지고 앞으로 전진 하면 진짜 더 많은 일들이 생겨납니다. 언젠가 제가 얘기했습니다. 제 꿈은 몇 년 후에 비행기도 사고, 배도 사고 싶다고 내가 얘기했습니다. 그래서 먼 섬에 선교하기 위해서, 그럼 얼마나 많은 일들이 생겨나겠습니까? 앞으로 전진 하면 전진할수록 수많은 사람들이 필요하고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이 생겨납니다. 그 사람들이 각각 목회자와 어긋나고 자기 권위나 주장하고 그리고 사소한 것을 가지고 다투고 혈기나 부리고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의 영혼이 너무 비참해집니다. 고통 받으면서 교회는 전진하겠지만 그러나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이 세상에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고 이 교회 안에는 끌어안고 가야 할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데 거기에 쏟아야 할 수많은 에너지들을 그렇게 하면서 거기에 소진하면서 살아간다고 할 때 하나님께 칭찬받는 일꾼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일꾼은 목회자에게 주신 단일한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서 주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한 교회에서 목회자가 목회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떠날 수가 있습니다. 남들 보기에는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지만 같은 싸움이 목회자의 마음 안에서 수없는 날 동안 반복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이 주어집니다. 그러면 여지없이 그것을 붙들고 교회와 결별합니다. 왜 그의 꿈은 교회를 크게 하여 호의호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자신에게 주신 그 목회의 소명을 온전히 이루는데 그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것을 그 교회가 구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는 한 그는 결코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투표를 통해서 세워지는 일꾼들은 자신의 정체를 아주 분명히 해야지 됩니다. 그 정체가 의심이 되는 사람이 있으면 여러분들이 투표를 해서 당선이 되면 책임을 져야지 됩니다. 정말 그 부르심 속에서 담임목사에게 주신 이 교회에 소명이 무엇인지, 목회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래서 한 부르심을 구체화하여 할 수많은 섬김이 등장할 때 그곳에서 그것을 자신의 생명처럼 여기며 충만한 성령의 은혜 속에 지혜를 다해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격으로 그것을 위해서 봉사하고 그래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 죽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고난을 받으며 교회는 세워져야지 됩니다. 이게 첫 번째 원리입니다.
B. 말씀에 전념하게 함
두 번째는, 말씀에 전무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꾼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회자에게 요구하는 자질들이 얼마나 많은지 누구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우선 분명한 소명을 받은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뛰어난 행정능력, 그러면서 경제에 대한 해박한 지식, 그래야지 교회를 계속 발전시키면서 빚도 얻어오고 그럴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위에 교회도 조직이니까 그 조직을 통하여 나갈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 목회자가 공부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미 많이 공부한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목회가 자신들과 끊임없이 어울리고 친구처럼 지내면서도 깊은 영성과 모르는 것이 거의 없는 탁월한 지식의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할 수 있으면 웬만하면 자기 교회의 목사님은 박사이기를 원할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랑으로 충만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몰라도 자기에게는 친절하고 자애롭게 대해주기를 원하고 교회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우유부단하지 않고 강한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으면서도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한번도 아파서 강단에 서지 않는 적이 없고 무슨 일을 소화해내면서도 끊임없이 목사님 힘드시겠어요. 피곤하시지요. 하는 말만 하지 한번도 쉬셔야 한다는 말은 없습니다. 지치지 않는 황소 같은 체력의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무엇이든지 잘 먹고 잘 소화시키기를 원하지만 배나오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데 가서 힘 빼지 않고 자기들에게만 힘쓰기를 바라면서도 어떻게 하라는지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들이 자기네 담임목사를 스승처럼 존경하기를 바랍니다. 갈수록 깊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를 소유하지만 그러나 절대로 공부하기 위해서 매달리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러면서도 고색창연한 경건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끔은 노란 물을 들이고 귀에다 귀를 뚫고 등장하는 젊은 남자 청년들까지도 품에 안고 이해할 수 있는 문화적 탁월한 아량과 적응력을 가진 사람이기를 원합니다. 없습니다. 늘 말하지만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왜 여기서 목회를 하겠습니까? 천사들을 교인으로 찾아다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한 가지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말씀의 사람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한때 나는 목회에 대단히 소질이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여러분들 덕에 겸손해져서 전혀 그런 생각을 안 하고 날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나는 이 일에 적합하지 않다. 하나님이 실수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적합하지 않습니다. 나의 주제를 여러분들이 스스로 깨닫도록 여러분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칭찬인가, 욕인가? 외국 교회는 잘 모르지만 한국교회를 보면 이렇게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이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쏟아져 들어오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 교회들 중에 어떤 교회들이 교인들이 잘 들어올 뿐만 아니라 이미 있는 교인들도 튼튼히 말씀에 세워진 교회들이 드물기는 하지만 있습니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경우에 처음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부담 없이 너무나 행복하게 교회생활을 하는 교회들의 경우에 예외는 있지만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교회를 오랜 다닌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목마름과 고통 속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은혜를 받고 성령 충만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데 항상 새로운 사람들에게서 일어납니다. 그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집사가 된 사람들은 옆에서 그 광경을 쳐다보면서 메뚜기도 한때지, 우리도 옛날에는 저랬는데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은혜가 떨어졌는데 그 사람들이 임직을 했든 뭘 했든 은혜가 다 떨어지니까 자, 은혜 받을 수 있는 교회로 떠나자, 가는가 하면 안 갑니다. 가도 문제겠지만 안가니까 또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정작 교회에서 목회자 옆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영적인 변화가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제대로 갈 리가 있습니까? 새벽기도 안 하는 장로, 회개할 줄 모르는 안수집사,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교리적으로 정리되지 않은 권사, 심지어는 같은 문제가 있는 교역자, 어느 때건 깨트려지고 눈물을 흘리고 참회할 줄 모르는 사모, 이 다섯 여섯 집단들이 목회자를 에워싸고 교회의 대세를 형성합니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겠습니까? 어림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깊어져가야지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뭐하지만 오늘 처음 온 사람들은 몇 사람 와서 뭔 소리인지 설교가 어렵습니다.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하고 다른 교회에 가도 자기네 맞는 교회를 찾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 교회를 안 떠나려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도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가서 전도를 합니다. 교회가 그래야 살아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의 중심자리에 목회자와 친분이 두터워집니다. 청교도들이 두려워했던 것이 이것입니다. 목회자와 인간적으로 친분이 두터워지면 두터워질수록 점점 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이 됩니다. 죄나 여러 가지 많은 문제들을 인간적인 관계 속에 자꾸 덮습니다. 하나님 앞에 말씀에 움직여서 결단하는 게 아니라 목사님과 끈끈한 정에 못 이겨서 협조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서는 방식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되겠습니까? 목회자가 깊이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계속 들어가야지 됩니다. 나는 정말 추호도, 나는 겸손한 사람도 아니고 추호도 나를 겸손하게 포장하기 위해서가 이게 참말이라는 것을 주님이 증인이십니다. 난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매일매일 빈들에 나아가 한 사발의 만나를 거두어서 먹고 살던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와 같은 사람입니다. 석 달만 하나님이 내 마음에 말씀에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전도 안 합니다. 난 나 자신의 처지를 한동안 안 하던 일인데 요즘 다시 습관이 생겼습니다. 다시 책꽂이 앞에서 눈물이 납니다.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내게 아무것도 없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목회하기 전에 십수 년간 하나님의 학문에 전념했던 사람도 아니고 노가다처럼 보따리장수처럼 일생을 살아온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설교하는 기계가 아닙니다. 지난 3월부터 8월까지 거의 하나님의 말씀의 탐구가 결핍된 채 내가 사역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날 좀 도와주십시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눈물로 애원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전념해서 이 진리를 탐구하고 이 진리를 깨닫고 이 진리대로 살고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피를 머금고 와서 이 진리를 토해놓는 이 일을 위해서 내가 헌신할 수 있도록 제발 나를 도와주십시오. 내가 애원합니다.
나는 기껏해야 매일매일 여러분들에게 섬기기 위해서 막장으로 내려가는 시골의 광부와 같은 사람입니다. 아무도 없는 그 추운 막장에서 깜박이는 등불 하나를 의지해서 곡갱이질을 해서 한 바커스 탄을 캐 와서 성령의 은혜에 불붙여서 그대들의 가슴에 불 피우고 나는 다시 빈 바커스를 들고 지하로 내려가야 하는 그런 정도의 그릇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말씀에만 전무할 수가 없습니다. 원래 이 투표를 내년쯤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결단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너무 일이 많아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들을 설득했습니다. 기쁘게 동의들을 해주셨고 그래서 오늘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가 끊임없는 연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하도록,
오늘 보십시오. 이 사도들이 누구였습니까? 말씀에 전념안 하면 설교를 못할 사람들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인데 불같은 성령을 경험하고 죽은 자도 외치면 살아날 능력을 가진 사람인데 아니 말씀에 전념하지 않으면 어디에 가서 설교하지 못하겠습니까? 가끔 우리 집사람도 비난하는 것도 좀 안 됐습니다만 여보, 그만 좀 연구해. 뭘 그렇게 할 게 있어. 저 사람이 내가 굉장히 많은 뭐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내가 그때마다 그랬습니다. 여보, 난 아무 것도 없거든,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나를 너무나 잘 알아. 아무 것도 없어. 목회를 하면 할수록 설교 준비하는 시간이 짧아지는데 저는 요즘 성경에서 진리를 찾아내고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데 6-8시간이 듭니다. 나를 좀 이렇게 마음 편하게 말씀에 깊이 전념해서 내가 그것을 찾아내서 혼자 살겠다는 것입니까? 그 말씀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내가 깨트려지고 내가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여러분들에게 개념뿐인 설교가 아니라 진짜 가야하는 참 신자의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실망하기 전에 한번 그런 원리를 따라서 주님의 교회가 목회자를 돕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C. 기도에 전념하게 함
마지막 세 번째는,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일꾼을 세우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이 맨 처음에 일꾼들을 뽑으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는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뽑았습니다. 말씀을 제쳐놓지 않기 위해서 뽑았습니다. 그런데 뽑기로 결심한 다음에는 말이 바뀌었습니다. 없던 것이 새로 하나 들어오게 되는데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일에 전무하여야 하리라. 그러면서 기도가 다시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목회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과 기도가 얼마나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무엇으로 합니까?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누구든지 할 것 없이 이 기도는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몸도 건강해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과부들을 구제하는 이 일은 하나님이 교회에 위탁하신 일이었지만 사도들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에 마음을 쏟아야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선지자의 중요한 직무 둘이 있었는데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여기에서 사도들이 자신의 의무를 발견하게 된 것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구약시대에 선지자들이 하던 그 일로 돌아가야지 된다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누구입니까?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피 뿌려 죽어가는 선지자들과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다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입니다. 그러면 그 두 가지 일을 계승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 일에 자기를 다 바침으로서만 살아있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설교가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수많은 일들이 목회자를 에워쌉니다.
이번에 제가 대구에 집회에 내려갔습니다. 주체측에서 생각한 것보다 네 배의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그 중에 몇 십 명은 생애 처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광경을 지켜본 우리 교회의 남자 집사님 한분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잠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이 살리시는데 우리 교회는 목사님을 너무 자기 소유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넘어야할 수많은 일들이 이 세상에 수없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일,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변화되고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받는 그 일을 위해서 한평생 봉사하다가 죽어도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기만 하면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어림없습니다. 그러면 이 일이 영적인 일이 아닙니다. 기도에 목회자가 자기 자신을 다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방해요인들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교회의 살림살이에 대한 걱정, 이루어져가고 있는 일에 대한 걱정, 그 다음에 여러 가지 많은 일들 거기에 나이가 들면서 건강까지 어려워지고 나면 육체는 자꾸 쉼이라는 카드를 내밉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 자꾸 내밉니다. 이틀이나 삼일에 한번씩 가서 허리를 치료받으면서 2-3시간 심지어는 4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이 시간을 기도에 바치든지 말씀을 연구하는데 바치면 내가 얼마나 좋을까?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편하지 않으니까 기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투표를 통해서 세워진 일꾼들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목회자의 마음이 기도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언젠가 제직회로 모였습니다. 거기에서 돈을 얼마나 쓰는가. 뭐하는가 하는 예산의 문제를 놓고 다툰 것은 아닌데 하여튼 밀고 당기는 회의시간이 지루할 정도로 2-3시간씩 흘러갔습니다. 끝나고 나서 그랬습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어야 되는가. 그랬습니다. 아니! 그렇게 교인들에게 지지를 받고 동의를 받아서 세워지고 세상에서 과장, 부장, 사장까지 다 하고 다 경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래서 담임목사의 목회적인 생각이 무엇인지 이해를 하고 협의하고 사랑하고 설득하고 또 설득되고 그러면서 조정하고 그래서 하면 되지 그것 백만 원, 이백 만원 십 만원, 이십 만원 쓰는 그 숫자 놀음하는데 담임목사를 불러놓고 2-3시간 거기서 피를 말려야겠는가. 여러분 그럼 목양을 못 받습니다. 내가 새로 임직되는 사람에게 거울이 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거기 담임목사는 없어도 됩니다. 그 중에 누가 교회 돈을 이상하게해서 한곳에서 쓸어 넣어서 위기가 오게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거기에 마음을 다 빼앗기면서 목회하기를 원하십니까? 그 시간에 내려와서 세계평화와 선교와 여러분들을 영혼을 위해서 한편의 설교를 위해서 기도하면 다음날 불이 내립니다. 그게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리고 목사님 꼭 계셔야 합니다. 뭔데? 그게 아니! 그럼 뭐 하러 세움을 받았습니까?
V. 위기의 결말: 말씀의 부흥
보십시오. 그게 중요하다고 그러는데 과부들을 섬기는 이 일은 안 중요했습니까?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구제하고 선교하는 것 말고 뭐가 있었습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런데 원리에 어긋나니까 교회에 위기가 생깁니다. 거기 무엇 때문에 담임목사를 앉혀놓고 2-3시간을 피를 말립니까? 뭐 하러 그렇게 합니까? 어떻게 하든지 목사가 목사의 고유한 그 일에 자기를 다 헌신할 수 있도록 그렇게 시간을 만들어주면 놀러 다니지 않고 그런 마음의 여유를 주어도 나 자신이 즐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게 목회자의 삶입니다. 그렇게 해서 목회자의 마음이라는 것은 옹달샘과 같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가득 채워주시면 거기에서 설교할 때 그 설교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고 그 은혜의 마음으로 기도할 때 여러분들이 기도하면 일어나지 않는 역사가 목회의 기도에 일어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걸어갈 때 여러분들이 자주 실망하는 목회자가 아니라 본받고 싶어 하는 목회자의 삶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어지럽게 만들고 흐트러트려서 그래서 목회자로 하여금 자신의 사역지에서 일생을 마쳐야 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만드는 교회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매우 잘못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사도들이 우리는 구제하는 일이 너무나 중요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이지만 우리는 더 중요한 일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그러면서 기도와 말씀으로 돌아갔습니다. 사도들이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교회가 다시 그 일들 때문에 갈등한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빠져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맡은 일꾼들이 못해낸다. 엉터리로 해낸다. 그리고 일을 해나가기는 해나가는데 일을 한줌 하고 다툼과 분쟁이 세배 네 배로 일어난다. 그래서 교회에 평화가 깨트려지고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사도들이 다시금 개입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훌륭하게 해내야 합니다. 투표를 해서 임직을 하고도 직분을 맡겨주었는데 그것을 온전하게 수행을 하지 않고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서 자기의 직무를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들이 끝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도외시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평화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사람들에게 행복과 축복이 있다면 하나님은 불공정하게 사람들을 다루시는 것입니다. 맡겨달라고만 하지 말고 맡겨준 것을 마음 써서 근심하지 않을 수 잇도록 훌륭하게 최선을 다해서 교회를 다스려나가야 합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가 되겠습니까?
오늘 보십시오. 이런 원리 속에서 일꾼들을 세웠을 때 사도들이 발휘를 하였지만 온 교인들이 이외에 없이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잠시 멈추는 것 같았던 복음의 역사 말씀의 강력한 역사가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교인들이 회심하고 주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심히 많아지고 그랬습니다. 심히 더 많아지고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다시 부흥의 물길에 떠밀려서 교회 속으로 들어와 주님을 믿는 회심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에 비추어볼 때 적어도 네 가지 요소를 갖고 있는데 회개와 세례와 죄 사함과 성령 받음 이 네 가지 사건을 경험한 신자들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들이 누구입니까? 자기 고집에 사로잡힌 완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굴복시키는 역사가 나타나서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들이 복음의 도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되어있습니다. 가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고 주님이 세우신 이 교회가 앞으로 전진 하고 섬겨야 할 일들이 수없이 많은데 교회 안에서 복닥거리고 다툼과 분쟁, 혈기와 비효율 목회자에 대한 이기적인 소유욕, 이런 것들 속에서 교회가 병들고 있을 때 주님이 그 교회를 바라보실 때 주님의 마음이 어떠시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전진해야 합니다. 병든 이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는 떨치고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다 드려 섬기셨던 한 분신으로서 이 교회 전체가 그렇게 자기 자신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선교지 죽어가고 있는 수많은 영혼들 그들을 위해서 자신을 다 드리면서 섬기면서 살아도 모자라는 시간입니다. 세워지는 일꾼들이 이렇게 유용한 사람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들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