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25
목 차
주를 의지하는 자(시 25:1-4) 53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시 25:5-7) 56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인지하신 하나님(시 25:9-10) 58
경외하는 자에게 친밀함을 보이시는 하나님(시 25:11-14) 16
앙망하는 자를 건지심(시 25:15-17) 66
새벽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시 25:18-22) 69
주를 의지하는 자
“[다윗의 시]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시 25:1-4)
신앙의 특성
신앙은 우리를 하나님께 묶어줍니다. 그저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막연히 아는 것을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신앙의 특성은 우리를 하나님께 묶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속박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관계를 맺고 묶고 계신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해서 불순종하고 거스르면 그렇게 하나님과 묶여있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 묶임이 고통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분 안에서 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갈 길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갈 길을 정하시고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때 이 속박은 고통이 아니라 행복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받기 원하시는 영광의 첫 번째 것입니다. 온 세계에서 영광 받으시기 전에 인간의 의지하는 마음을 통해 영광 받으시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시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함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갖고 계신 뜻을 열심히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점에 문제가 있습니다. 각자 자기의 이기적인 자아를 중심으로 해서 자기 나름대로의 사랑의 질서를 그려가기에, 하나님을 믿고 살아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위로와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참으로 안타까워하십니다. 시인이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과 도움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죄는 우리를 점점 더 독립적이게 만들지만, 은혜는 점점 더 의존적인 인간이 되게 합니다.
사실 완전한 독립이라는 말은 엄밀히 말해서 있을 수 없습니다. 은혜가 떨어져 독립적이 된다고 것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 의존적, 자아 의존적이 된다는 것이기에 완전한 독립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무나 추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가 의존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어느 정도 섬기지 않을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랑이고 우상숭배입니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만을 바라고 의존하고 사랑하게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바라시는 뜻입니다. 다윗이 가진 신앙의 많은 모습들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주님을 의지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범죄 할 때조차도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하나님과 독립적이 되고, 은혜에 가까워질수록 하나님 의존적이 됩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의존하는 것을 기뻐하실까요? 이는 의존하는 자들만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가 순종한다는 것은 그분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
또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인간은 인간에게 합당한 영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근원적인 영광이 아니라 의존적인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그가 존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럽게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영광은 아름다운 외모와 높은 지위와 명예, 많은 물질 등을 꼽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은 “당신 자신을 의존할 때에 그 사람을 영화롭게 하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영광을 주께서 좋게 바라보시는 이유는, 그것이 곧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한 인간이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돌려드리는 영광을 기뻐하십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 있는 사람들의 소원은 하나님을 의존하여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합니다. 그러하기에 그 영광을 상실하고 빼앗기게 되는 것을 수치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광은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이 진리를 시인이 알고 깨닫게 하사 그를 변화시키고 새롭게 함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진리를 가르쳐 주고 싶어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호기심이나 만족을 채워 주시려고 그 진리를 여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아는 것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알고, 거기에 합치하는 삶을 살며, 그것이 자신을 주장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집중하고 그 진리 속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을 깨닫는 것을 우리 삶의 즐거움으로 삼아야합니다. 그렇게 될 때에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시 25:5-7)
진리의 빛을 따라서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의존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곧 자기의 인생을 지도해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보다 더 잘 아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받은 대로 기꺼이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시인은 ‘진리’로 자신을 지도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시인이 진리를 따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임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동시에 진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라고 나타났을 때에는 거기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어떤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의 그분의 계획과 의도를 따라서 살아가려면 바로 이 진리를 필요합니다.
시 119편에서도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깜깜하고 어두운 길이라 할지라도 환하게 비춰주는 빛이 있을 때에는 두려움 없이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걷는 것이 믿음의 생활입니다. 인생에서 우리는 수많은 고통을 경험하지만 그 근본을 캐들어 가보면 그 속에는 언제나 진리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무지가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이 있더라도 진리를 깨닫는 자는 인생에서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미 그 터널의 길이를 알고 지나는 자와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지나는 자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진리의 말씀은 의존하면 할수록 더 잘 깨닫게 되고, 반대로 교만하면 할수록 더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주의 인자와 자비를 따라서
이어서 시인은 고백합니다. 주님의 인자하심과 자비를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인자하시고, 특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자비로운 분입니다. 시인은 한 가지 소원을 비는데 자신이 소시 적에 지은 죄를 기억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믿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었는데, 지난날에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았을 리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진지하게 다시 이를 고백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면 할수록, 사랑하면 할수록 자기가 그런 사랑 받기에는 얼마나 합당하지 못하는 죄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깊이 회개하며 뉘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의지하고 사랑하고 따라가는 주님의 자녀의 모습을 시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소시 적의 많은 죄들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따라 관대하게 대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성도 여러분 매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사람임을 늘 고백하며 삽시다. 그 속에서 우리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인자하신 하나님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
여호와의 모든 길은 그 언약과 증거를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로다”(시 25:9-10)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
하나님이 아무리 많이 말씀해주셔도 모든 사람이 그 말씀을 잘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은 마치 흙 위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과 같습니다. 먼지가 풀풀 일어나는 메마른 땅에는 아무리 많은 사람이 걸어가도 자국이 남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가 와서 진창이 되면 발자국들이 선명하게 남습니다. 인간의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하셔도 우리 마음이 적합한 상태가 되지 않으면 결코 말씀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진흙과 같은 상태의 마음은 온유한 심령이 된 상태, 부드러운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러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집니다.
여기서 온유한 심령이란 무골호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꺾인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려고 하는지 간에 그분의 손에 의해 잘 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고는 하나님의 생각에 예민하고, 감정은 하나님의 마음에 따라서 쉽게 움직이고, 의지는 하나님의 명령에 잘 순복하게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무조건 굽실굽실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들어있을 때, 심지어 그것이 원수를 통해 들어오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마음을 꺾고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온유한 심령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타인을 향해 관대할 수 있음과 동시에 단호함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향해서 그 마음이 꺾인 자이기에 그러합니다. 온유함이 지면에 승한 모세가 좋은 예입니다. 그의 온유함 때문에 지도력이 부족하여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린 적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옳지 않은 일을 볼 때에는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기독교의 온유함은 모든 자에 대해서 무골호인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에게 자비와 친절을 베풀기는 하였으나 그것 때문에 지도력이 손상당하거나 굽실거리거나, 온유하기 때문에 우유부단해서 처리해야 할 일을 못하면서 미적미적 살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그분의 목회에는 성경을 주신 목적을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우리는 성경을 주신 목적을 첫째도 위로요, 둘째도 위로라고 어리석은 생각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라는 창살에 갇혀서 눈물만 흘리셔야한다고 여기십니까? 아닙니다. 아이들을 교육하는데도 따뜻하게 가르치되, 잘못했을 때에는 단호하게 야단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미 굽어졌을 때에는 호되게 매를 들기도 하고 바르게 하기 위해 가르치고 함께 움직여야 합니다. 존경받는 선생님은 세 가지 덕목을 갖춰야 합니다. 실력과 적절한 때에 학생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권위와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육하실 때에 우리가 온유해진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기에 유연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
또한 여호와의 모든 길은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인자와 진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순풍에 돛을 단다’는 말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같은 방향으로 바람이 불어 배가 힘차게 앞으로 항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역풍이 분다면 차라리 돛을 거두고 노를 저어야 하는 것이 낫습니다. 우리 인생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하나님이 가게 하시고 싶은 길이라면,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하나님이 밀어주시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뜻을 거스르면 모든 환경들 역풍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를 끊임없이 포기하는 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주님과 맞서면 자신은 원하지 않는데도 인생의 고난이 계속 닥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항상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선하고 사랑이 많은 분이시라는 것은 순종하는 자들만이 드릴 수 있는 찬송입니다. 그러나 불순종하며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께 항상 불만이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상식을 깨는 귀중한 진리였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이 귀한 진리를 깨닫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외하는 자에게 친밀함을 보이시는 하나님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저의 영혼은 평안히 거하고 그 자손은 땅을 상속하리로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1-14)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본문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 앞에서 자신은 너무나 죄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죄를 깨닫는 것은 율법을 통해서입니다. 잘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우리 죄를 알 수가 없습니다. 자신 밖에 있는 법과 자신 안에 새겨진 양심의 법이라는 두 거울에 비추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참으로 죄인임을 깨닫는 변화는 복음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바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깊이 깨닫고 나서 자신이 크나큰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다시금 주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 때문에 나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백성을 버리지 않으시며 그 관계는 영원하니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구원해 달라는 호소입니다. 주님이 오늘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은 사명 때문입니다. 살아 있어야 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필이면 이 시대, 이 장소에 두셨는지의 그 의미를 깨닫고 거기서 주님께 하명 받은 일들을 이루는 것을 기뻐하면서 사는 것이 신자의 행복입니다. 왜 나를 이렇게 문제가 많은 가정 속에 두셨는지, 수많은 교회 중에 우리 교회에 두셨는지를 생각하며 그 뜻을 받들어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그것이 없는 자는 죽은 사람과 방불합니다. 일이 크기는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를 움직이는 위대한 대통령, 세기적인 선교사, 세기적인 목회자가 되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사명의 크기가 아니라 자기의 사명을 깨닫고 그것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그 영광을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살아야할 사람이 죄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기에 시인은 자신의 죄를 사해달라고 간절히 구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깊이는 그가 행하고 있는 외적 행실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죄에 대한 깊은 반성과 성찰을 불러옵니다. 이것이 없이는 누구도 신앙의 깊이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영성이 깊고 신앙이 온전하다고 말할 때, 그 사람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합니까? 남들은 모두 자신의 마음속의 죄가 발현될 때에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나, 온전한 신자는 마음과 영혼의 작은 움직임만을 감지하고서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닫습니다. 또한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 앞에 깊이 참회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를 발견하였을 때에는 그 사람이 죄의 피해자나 된 것처럼 긍휼하고 애통해합니다. 이러한 사랑이 바로 한 사람의 영성의 깊이를 이야기해줍니다.
경외하면, 진리를 배우게됨
시인은 말하기를 “여호와 경외하는 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받는 유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첫째, 하나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진리를 잘 배우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인간의 영혼 안에서 그리고 영혼 밖에서 그렇습니다. 먼저 영혼 안에서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데는 지성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 지성은 하나님께로부터 비치는 진리의 빛을 일방적으로 받는 부분이 있고(총명), 하나님의 진리를 알기 위해 우리 스스로 그것을 찾아가는 기능(이성)이 있습니다. 아무리 여러 가지 색깔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눈을 감고 있으면 그것을 보여주나 보여주지 않으나 똑같은 결과를 초래합니다. 또 눈을 뜨고 아무리 보려고 해도 빛이 없으면 깜깜해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의 영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 안에 어둠을 물러가면, 진리의 빛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변화보다도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이 순종입니다. 순종하게 되면 모든 지성들은 명정해지며, 이미 있는 진리들을 잘 볼 수 있는 눈들이 열리게 됩니다. 요즘 하나님의 말씀이 잘 안 들어온다는 식의 말은 현재 현저하게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미각이 떨어집니다. 예전에 꿀같이 달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사라집니다.
다음으로 영혼 밖에서 진리를 배울 수 있다는 말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면 그분은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깨닫게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명정한 지성은 뜨거운 사랑 안에서 가장 잘 보존됩니다. 세상사랑은 뜨거울수록 지성은 혼란스럽게 됩니다. 그들의 지식은 마음의 격정을 줄여야 얻을 수 있으나,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될 때에만 진리에 대한 명정한 지성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진리의 비밀을 더 많이 보여주십니다.
경외하면, 영혼의 평안을 누림
둘째, 영혼이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에서 비롯되는 내면의 평강을 말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조바심내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절망하는 것과 같은 희로애락, 오욕칠정의 수많은 변화는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 끊임없이 뜬 구름 같은 수많은 사물들을 있는 것으로 알고 붙들기 때문이 아닙니까? 성경은 이런 것들은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있는 것 같으나 엄밀히 말하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웃을 때 기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영원합니까? 그것을 잃어버릴 때 슬픔에 잠기지 않습니까? 따라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물로 인해 우리의 삶이 흔들린다면 그 인생이 참으로 행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소유해야 할 대상은 잃어버릴 염려도 없어야 하며, 언제나 소유할 수 있는 한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많은 사물들은 실제로 있는 것 같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사랑을 다 바치기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면 평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진리이신 하나님께 귀의하는 자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경외하면, 자손의 복음 주심
셋째, 자손의 복을 주십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자식의 복은 그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올바르게 사는 그런 훌륭한 자가 아니라 돈도 많고, 지위도 높고, 질병도 없으며, 가족들과 화목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을 머릿속에 그립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그런 복도 포함하기는 하나, 훨씬 더 영혼 쪽에 가까이 다가가 있습니다. 그 복의 핵심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모든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발견하고, 죄를 뉘우치며, 하나님의 진리를 명정한 지성으로 더 많이 알아가고,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따라 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를 본을 삼아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언약 백성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큰 재산을 물려주지 않아도 복을 빌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훌륭한 부모 밑에 악한 자녀들이 태어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신앙이라는 것은 부모가 자식에게 잘 보여준다고 저절로 전수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올바르게 하나님 앞에 잘 살면서도 그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고 사랑해줘야 합니다. 사랑은 부모의 신앙이 자식에게로 흘러가게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대개의 경우 자신의 사명에 너무 열중하다보면 그것을 잘하지 못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신앙은 너무나 개인적인 것이기에 이러한 경우를 벗어나는 사례도 참 많습니다. 아무리 사랑하고 훌륭한 모본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대로 배우지 못하는 자녀들도 있고, 특별한 간구를 하거나 특별한 신앙을 가진 것도 아닌데 신앙이 매우 훌륭한 자식들이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너무나 개별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본분은 어찌하든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경외하면, 친밀함을 보이심
이 모든 복을 시인은 한 마디로 일축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언제나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친밀함, 곧 사랑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몫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친밀함을 보이십니다. 모든 인간의 행복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것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니,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큽니까? 그렇게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얼마나 크게 회개합니까? 하나님 앞에 서는 비결은 매일매일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참회의 연속입니다.
터툴리안은 말합니다. “나는 참회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어쩌면 목회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양들을 보며 가슴을 졸이다가 죽어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디 간들 십자가가 없고 고난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 세상의 죄 짐을 지고 갈 때에는 아무 상급이 없지만, 자신과 영혼들의 위해 인내로서 모든 고난을 이기면, 이 순례의 길이 끝날 때에는 아름다운 영혼으로 주님 앞에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의 기쁨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분께 순종함으로써 그분과의 친밀한 교제 가운데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길 바랍니다.
앙망하는 자를 건지심
“내 눈이 항상 여호와를 앙망함은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 내소서”(시 25:15-17)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항상 하나님을 앙망하며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우리의 영혼이 하늘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육체의 고향인 이 땅의 일에 자주 마음이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오웬은, “하나님이 하늘나라를 창조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하늘나라를 계속 묵상하며 살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일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마음을 수시로 이 땅에 빼앗김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앙망하며 살았던 이유에 대해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 발을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실 것임이로다” 하나님은 자신을 그 어려움 가운데서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쓰러짐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지상의 삶의 모든 전개가 하나님 앞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전개되도록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삶이 지상 세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면 밥을 먹고 움직이며 기동만 하면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하늘나라 기준으로 볼 때에 살아있음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의미가 있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의미 있는 삶은 무엇입니까? 내가 살아가는 일이 나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께 어떤 유익이 되는지를 대답할 수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육신의 즐거움과 향락을 위해 쓰는 시간들은 하나님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 앞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위한 고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자는 항상 평안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 때에는 바르게 살 길 원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고통당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잘 살 때에도 그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이 세상의 굽은 질서 때문에 고통당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앙망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만이 가득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합니다.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앙망하며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이런 외로움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기 위해 당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도움을 입을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그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인생의 길은 반드시 막으십니다. 그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따라서 걸어갈 때 당하는 고난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시인은 17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마음의 근심이 많사오니 나를 곤난에서 끌어내소서” 우리의 삶은 결국은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식들은 마음을 통해서 표출되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삶을 만들어내는 공장과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항상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마음을 공격해서 하나님을 거슬러 살게 하는 죄의 영향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는 은혜의 영향이 지속적으로 싸우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마음의 흔들림을 경험합니다. 그것이 우리 마음의 실체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해도 이런 마음의 동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은 아주 분명한 목표가 있는 투쟁이고,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주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항상 주님의 도움이 있습니다. 은혜를 체험을 하고 사는 자에게는 모두 목표가 있고,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고, 마음을 모으는 간절히 매달림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놀랍게 환경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마음도 바꾸어 주십니다.
결론과 적용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당신을 의지하며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들이 타락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지하지 않으려는 자들을 의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사람의 마음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고난이 많은 이유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썩어버리기에 주님께서는 적당한 고난을 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다시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인생에게 고난이 있고 시련이 많지만 하나님을 앙망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반드시 지켜주시기 때문이고, 목표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입니다. 목표를 가지고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며 살 때에 환경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요동치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나의 곤고와 환난을 보시고 내 모든 죄를 사하소서
내 원수를 보소서 저희가 많고 나를 심히 미워함이니이다
내 영혼을 지켜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수치를 당치 말게 하소서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시 25:18-22)
환란은 반성의 기회
시인의 태도가 얼마나 신앙적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내적으로는 곤고하고 외적으로는 환란을 많이 당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시련이란 것이 그런 것입니다. 그냥 외적으로만 힘이 들뿐 내적으로는 맘이 평안하고 아무런 근심이 없고 괴로움이 없다면 수고이지 환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군가가 땀을 뻘뻘 흘리며 노동을 한다고 해서 환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환경적인 환란은 항상 당하는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고통과 곤고함을 가져다줍니다. 이때에 우리들이 지혜가 부족하면 이런 환란과 어려움을 만나는 이유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이차적이고 삼차적인 다른 원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을 원망하게 되고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게 됩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기의 죄를 사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는 환란과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물론 환란은 자신의 죄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전부 자신의 죄 때문에 오는 것이겠습니까? 그래도 시인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환란과 고통을 자기정화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지상에 살 동안 우리의 영혼은 온갖 죄와 더러움으로 가득 차 있기에 끊임없이 정화되고 순화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인은 자기를 괴롭히는 자들로 인해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시련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보며 자기 안에 죄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환란과 시련은 괴로움을 위해 찾아 온 것이지만, 괴로움을 대하는 태도를 시인과 같이 바꾸면 거기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는 유익을 얻게 됩니다. 이러한 유익은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는 자들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
시인은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호소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삶의 상황에 있든지 거기에서 우리를 건지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건져내실 수 없는 너무 절망적인 상황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건져주실 때 그 소망의 근거를 어디에 두는가 하면 바로 자신들이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가진 백성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리는 독특한 방법을 보여주십니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자식을 대할 때와 남의 자식을 대할 때는 매우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녀의 명분을 주시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값없는 구원을 허락하시고 하나님과 특별한 언약 속에서 살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특별한 언약관계에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환란을 만났을 때 큰 위로가 됩니다. 나의 일생이 하나님의 계획아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계획을 내 삶에 펼쳐주시는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롭고 사랑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믿으면 살아갈 희망을 얻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은 의지하는 자에게 그늘이 되시고 피할 바위가 되시고 도망칠 산성이 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백성들의 유익입니다.
결론과 적용
그러므로 우리는 매순간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깊이 확신하고, 나의 인생은 생사 간에 주님을 의지하며, 나는 주님의 언약백성이고, 하나님은 나의 인생의 모든 계획을 알고 계시고,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주님을 사랑하면 그것을 모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 여러분, 인생의 위기와 난관에 봉착했을 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라고 이런 시련을 주시는구나.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돌아보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시편25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