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27 서울신대 섬김의날
서울신대 섬김의날
에베소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계 2:1)
녹취자:이경순
오늘 여기에 나오는 우리들이 읽은 본문은 요한 계시록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도요한에게 주시는 각 교회에 대한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기록해서 전달하도록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사도요한에게 지시하셨습니다. 이 일곱 교회는 칭찬을 받기도 한 교회가 있고 책망만 받은 교회도 있고 두 가지를 아울러 받은 교회도 있는데 어느 교회이든지 간에 그 메시지가 주어지기 전에 먼저 그 판단을 언표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계시가 도입부에 등장을 하게 됩니다.1장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그 묘사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연속선상에서 이장에서 삼장 사이에 계속되는 일곱 교회에 주어지는 메시지 앞에 예수의 자기계시가 등장합니다.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메시지 앞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자기계시입니다. 즉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에 다니시는 이 이것이 바로 자기계시 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서머나 교회에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 라고 묘사가 되어있고 버가머 교회에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이 라고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일곱 교회에 각각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계시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 교회의 영적인 사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교부의 시대에 올라가 보면 교부들중에 어떤 사람은 이 자체가 당시에 있었던 소아시아에 일곱 교회 이지만 이것은 일곱 시대의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다 라고 생각을 하려고한 사람들도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는 초대교회 그렇게 해서 속사도 교부 중세시대에서 오늘날 현대에는 우리들이 라오디기아 교회 시대에 살고 있다 라는 식으로 이렇게 해석하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소아시아에 흩어져있던 일곱 교회의 영적인 상황을 다루면서 모든 시대를 뛰어넘어서 교회들이 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그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시의 말씀을 전달해 주셔서 모든 교회들로 하여금 격려하고 오류에 빠질 수 있는 가능성들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의 방식입니다. 제가 오늘 본문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이렇게 교회가 처한 다양한 영적인 상황 그리고 현실과의 관계 속에서 교회는 늘 언제나 이 시대를 많이 연구하고 그리고 이 시대 속에서 교회가 살아남는 방법 그리고 나름대로 영향력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교적인 칸텍스트에서 볼 때에 꼭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의 선교는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 선교이지만 그 텍스트는 칸텍스트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교이기 때문에 두 개의 텍스트에 대한 연구가 없이는 우리들이 선교의 소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서 불구하고 우리들이 눈여겨야 될 것은 시대의 문제점들은 시대를 통해서 유리들이 확인 할 수 있지만 사실 그 시대의 문제점에 시대의 문제에 대한 답은 시대 안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지금 이러저러한 영적인 형편에 처해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리고 예전에는 아주 놀라운 신앙을 가지고 있던 교회였지만 아름다운 처음 신앙을 잃어버리고 그렇게 미끄러진 교회가 되었을 때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들을 살피는 것이기도 했지만 더 중요하게는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계시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공부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시대건 간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자신의 존재와 성품에 관해서 우리에게 계시를 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 교회가 처한 문제들을 다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이 교회의 현실의 문제는 현실 속에서 문제는 확인하지만 그 답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들이 귀를 기울여야 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미중요의 어려운 선교 상황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제 근대 이성주의 시대가 지나가고 후기 근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시대가 들어오면서 어떤 진리의 절대성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그러한 사회의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스피노자이후에로 이어지는 이 서구에서의 범신론적인 사고방식들이 결국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성과 만나서 그래서 이제는 진리를 거부하면서도 자신이 그런 어떤 종교적인 깊은 체험 속으로는 들어가고 싶어 하는 현대인의 신비적인 욕구들은 다양한 신비주의와 그리고 범신론적인 세계관에서 기독교에 대한 전체적인 재해석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고전적으로 기독교 안에서 유지되었던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문제에 관해서 균형 축들이 깨뜨려지면서 그러면서 기독교가 법신론적으로 모든 종교와 차별이 없다고 하는 이러한 종교다원주의 사상 같은 것들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이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성품이 성경을 통해 발견하고 깨닫는 것에서 귀착된 결론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주어진 현대적인 사고의 방식과 그리고 이러한 모든 그 잘못된 인본주의적인 사고들을 끌어안으면서 뭔가 기독교와 그리고 이세상의 상대주의적인 종교와 사상 그리고 오늘날 현대인들의 정신 구조 속에서 일치를 이루어보려고 하는 그런 종류의 타협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소산들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명백히 슈라이어 마흐가 당시에 그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사조에 대해서 어떠하던지 이것을 끌어안고 그리고 기독교적으로 소화해 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내어주고 그리고 객관적인 진리의 절대성 보다는 인간의 체험을 우위에 두는 그런 방식으로 대타협을 이루어서 결국은 후에 이루어질 자유주의 신학과 그리고 성경의 절대적인 기준들을 하찮게 여기는 인간 중심적인 이러한 기독교 사상들을 만들어 내는 수문을 열었던 것과 같은 그런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들이 접근을 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우리는 오히려 이런 상황일수록 온 땅과 하늘위에 높으시고 그리고 모든 창조세계를 당신 스스로 창조하시지만 그러나 당신은 이 모든 것들을 초월해 계시면서도 이것들을 질서 있게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에 대한 전통적인 균형들을 다시 회복 해야 할 때가 왔다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은 이제 이 세상 자체 안에 있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성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성품을 아는 지식을 모든 교회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시대에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위로에 대해서 커다란 도전을 받게 만드시고 어떤 시대에는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강력한 도전을 받게 만드셔서 그 족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탐구하고 발견된 교리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면서 교회와 이 세상을 쇄신할 수 있는 그러한 중대한 모멘트들을 만들어 나갑니다. 그렇지만 그중에 자기시대에 발견한 하나님을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은 진실이면서 또한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한 깊이의 스펙트럼 로서의 하나님의 성품중 어느 한 부분을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시대를 보면 한 시대마다 성실하게 하나님을 탐구하고 그리고 부지런히 그 진리를 연구해서 성경에 해석을 풍부하게 남겨놓은 세대가 있고 게으르고 나태하고 현실에 안주하고 그리고 이 세상의 문제에 대한 답들을 성경에서 찾으려는 노력들이 현저히 약했기 때문에 결국은 이 세상과 동화된 가운데 세상에 대해서는 많이 연구했지만 하나님 말씀에서 답을 찾으려 하지 않던 빈약한 세대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시대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과 기독교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 안에서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 아는 이런 신학적인 노력은 사라지지가 않고 계속 이어져 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과거에 이루어진 신학적인 유산들을 부지런히 공부해야지만 우리들이 그 토대 위에서 우리의 신학들을 구축해 나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학은 정상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성품을 그 시간과 공간인 역사 안에서 발견하고 해석해온 역사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충고를 드리자면 우선 성경을 성실하게 읽고 탐구하셔야 되겠고 그리고는 고대 교부들을 초대교회 교부들을 충실하게 연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 많은 교부들을 다 연구할 수 없어도 괄목할만한 교부들 이레노우스나 히폴리투스 그리고 테르틸리아노스 그리고 중세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던 아우구스투누스 정도 같은 사람들은 상당한 시간을 가지고 깊이 탐독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들의 사상이 오늘날 우리 개혁신앙과 다르다는 사상 때문에 거의 가치가 없는 책들이라고 매도하는데 상당한 식자들도 이러한 발언들을 해서 우리의 마음을 좀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은 인문학에 있어서 기초를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 시대와 우리들의 시대는 짧게는 1600년 그리고 더 멀게는 1800년 이상의 차이가 납니다. 그들의 신학은 이제 막 유대교 안에서 태어난 걸로 서로 여겨지던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그래서 희랍의 철학과 유대교 사상과의 많은 접촉 속에서 기독교의 교리들이 완성되어가고 있는 이런 지점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거기에는 진리의 아름다운 요소들과 잘못된 찌꺼기들이 함께 석여있기 마련입니다. 마치 금에 모래가 함께 섞여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원천입니다. 이것들을 공부 하므로서 받는 유익은 무한한 창의적이고 신학에 있어서 창의적이고 그리고 건설적인 생각들을 발전시킬 수 있는 그러한 중요한 원천 들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도 이 원천들에 대해서 꾸준히 공부를 하고 그리고 잘 하지 못하지만 나이 50이 넘어서 이 원천을 공부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라틴어도 공부를 했습니다. 그래서 떠듬떠듬이나마 그 오리지널 텍스트들을 읽어가면서 그렇게 하면서 진작 내가 왜 이 공부를 안했을까 하고 많은 후회를 하게 되는데 그런 원천들을 풍부히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천이 있는데 그것은 중세시대의 교부들입니다. 이 부분들은 상당히 종교개혁자들의 신학과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는 초대교회 교부들과도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읽어야 될 부분이지만 그러나 거기에서 지적인 자양분들을 흠뻑 섭취해야 될 필요는 있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분명히 말씀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러한 중세시대를 거쳐서 종교개혁시대로 들어오기 전에 보면 결국은 종교개혁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성경해석과 신학적인 담론들의 종자 씨가 사실은 중세의 신학의 발전사속에 다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심지어는 중세 이후 근대이후에 발생하게 된 데카르트의 철학이나 칸트의 철학 이렇게 철학적 근대의 시대를 여는 이성주의시대를 여는 커다란 대변혁이 사실은 허공에서 그냥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의 그런 철학의 사고방식과 사고의 놀라운 전환들을 교회 안에서 중세에 이 교부들 속에서 내려오는 이런 착안점들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대단히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종교개혁시대로 들어오게 되면 종교 개혁시대때에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이나 마틴 루터 블링거를 비롯해서 스빙글리 같은 베자와 같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종교개혁의 토대가 놓이고 베자와 멜랑히통 이후로 이제 소위 얘기하는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가 열리면서 기라성 같은 적어도 200명 가까운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이 등장해서 어마어마한 양들의 책을 토해놓게 되는데 우리는 이것을 역사적으로 개신교 교부시대 라고 부르는 거예요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양들을 토해놓게 되고요 그 자료들을 접하게 되면 여러분들이 깊은 감동을 받게 됩니다. 제가 그 자료를 여러해 전에 접하고 나서 깊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제일먼저 고백한 게 아우구스티누수를 읽고 나서 내가 기독교인 된 것이 자랑스럽다 리고 말했고 개신교 교부들인 정통파 신학의 유산들을 접하면서 나는 개신교 교도 중에서 개혁파 정통주의에 후예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자료들이 결국은 지금은 거의 들여다보지 않는 자료들이 되었습니다. 그 케케묵고 이제 거의 사람들에게서 외면당하고 있는 자료들이 지금 이제 리챠드 먼로의 새로운 테제의 제안 이후로 구라파 쪽에서 광범위한 호응을 얻으면서 이제 다시 연구되고 있는 오늘날의 신학의 변천사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대충 감을 잡고 계실겁니다. 그런 유산들을 공부를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죠. 목회를 하면서 제가 느끼는 즐거움은 교회 목회하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런 유산들을 탐구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저에게 말할 수 없는 커다란 감동을 주고 그리고 우리들이 얼마나 큰 산에서 어마어마한 뿌리를 가진 후예들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요즘도 여러 개혁파 정통주의 교부들을 오리지널 텍스트 들을 읽으면서 저 나름대로 우리가 얼마나 무책임하게 오늘날 신학을 하고 있고 그리고 신학의 본질로부터 외도를 하고 있으며 그래서 결국은 이 시대에 있는 많은 그리스인들에게 참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깊은 자책감을 느끼면서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고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모든 교회의 역사 그 이후에 이어지는 여러 개신교 정통주의 끝나고 들어오는 이성주의 시대 그 후에 벌어지는 각 교파별 신학의 발전 이렇게 하면서 미국으로 넘어간 신학 그 신학이 한국으로 넘어오는 과정 구라파에서 자경화의 경향 이 모든 마지막의 사실 신학에 이르기 까지 이러한 모든 과정들은 결국 크게 놓고 보면 학자들 간의 싸움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교회가 성경을 해석해온 역사예요 때로는 잘 때로는 잘 못 때로는 그릇된 방향으로 때로는 올바른 방향으로 때로는 풍부하게 때로는 아주 미약하게 쇠퇴한 분위기 속에서 해오던 그런 것들이었다고 나는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신학을 해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신학자 이기전에 한사람의 진실한 신자가 되고 싶어 하는 열망하는 크리스천이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학은 결국 고전적인 논의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은 신학의 모든 역사 속에서 이 두 개의 바퀴에 의해서 이 신학과 우리의 목회사역이 굴러간다 라고 하는 것이 합의를 이루어 왔단 말입니다. 이 배경을 이야기 하면 너무 길지만 그러나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교회의 사역 그담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이 진리의 사역들 이것들은 수레라고 한다면 두 개의 바퀴가 함께 달려 있을때에 이 사역이 정상적으로 수행된다고 믿었던 것이죠. 이 두 개의 바퀴가 뭐냐면 하나는 삐에따스 경건이고 또 하나의 바퀴는 스키엔 띠야 학문입니다. 그래서 이 학문과경건의 두 바퀴가 함께 매달려 있어야지만 이것이 온전한 신학이 되고 그리고 교회를 섬기는 방편이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학문은 결국 이미 주어진 창조 세계안에서 물질사이에 있는 인과관계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물질과 물질사이에 있는 인과관계를 찾아내어서 그 물질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이 학문이고 그것이 자연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죠. 고대 그리스에서는 사람이 배워야할 학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뉘었는데 피지카 자연학 로키라 논리학 에티카 그담에 윤리학 이었어요 그래서 사물의 이치가 어떻게 되었는지 살피고 그것들을 논리적으로 규명해서 자신의 삶에 적용하고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선한 것인가 하는 것이 에티카 였지요 초기의 신학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포괄하면서 우리에게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모든 철학들이 추구하고 생각하던 전 포괄적인 삶과 진리에 대한 인식들을 우리에게 가져단 준 것이 신학의 총 포괄적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근대에 들어서면서 이 모든 것이 토막이 나버리고 이제는 결국은 목회사역을 위한 아주 협의의 소수의 사람들이 배우는 그런 학문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어쨌든 간에 물질과 물질사이에 있는 인과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 같은 것들끼리 모으고 다른 것들끼리 구별하는 분석과 종합의 과정을 거쳐서 어떤 논리들을 형성해 가고 미래를 예측하게 하는 것이 자연학이라면 사회학은 사회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과의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어서 미래를 예측하고 과거를 해명하고 그러기 위해서 같은 것들은 종합으로 모으고 다른 것은 각각 분석으로 나누어서 그것을 학문적으로 구획을 짓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인문학이고 사회학 이예요. 그러면 우리들이 이야기하는 이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되어가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당신자신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닮은 우리 인간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지식이 있죠. 이것이 바로 삼중의 지식입니다. 하나님과 창조세계와 자기 자신에 관한 이 지식의 틀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지 알아야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지식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신학의 목적입니다. 이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개개인을 부르지 않고 공동체를 부르셨으니 그것이 우리들이 교회를 위한 학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도 역시 학문이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들이 이 교회와 인간과 그리고 사회와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이 틀 안에서 원인과 결과를 찾아내고 이것들을 이성적으로 연결해서 그렇게 해서 학문을 구축해 간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신학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다른 학문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여기에 도입돼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학문에 있어서 질료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많은 학문들은 이미 현상 속에서 이러 났거나 혹은 물체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그것들을 질료로 해서 그래서 학문을 해 나갑니다. 이미 주어진 것이고 그리고 인간에게 알려진 것들을 가지고 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학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미 알려진 것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이성으로는 도저히 추론해서 옳다고 이성적으로는 동의되지 않는 그런 지식의 내용까지 학문의 질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질료는 신앙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존재하고 있는 지식들이니까 이성적으로 동의가 되어서 끌어들여서 학문을 위해서 비빌 수 있지요 그러나 신학은 이 재료는 오히려 부재료예요 주 골격은 신앙으,로 받아들여져야 세워지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 이것은 우리들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일수 없죠.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말하기를 보이는 것들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니 그러면서 신학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학문이 이 세상에 있는 학문을 해 나가는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지평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명확히 구획을 그어주는 것이지요. 그러면 보이는 것들은 보이는 것들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요 했으니 보이는 것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원인과 결과들은 보이는 것 만들어 갈수 있지만 그것이 왜 창조되었고 어떻게 창조 되었는가 라고 말할 때에는 그것은 이미 그 원인 자체가 보이는 세계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이성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바로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신앙은 이제 학문이 아닌 종교에 속하는 영역이라 이겁니다. 그러면 믿음 좋은 사람이 신학도 잘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들이 좌우 한쪽에 치우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좋아서 이렇게 명제가 될 만한 신학의 중요한 테제에 대해서 믿음이 충만해서 아멘 아멘 아멘 하고 받아들였다고 하더라도 골조만 세운다고 해서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골조를 세웠는데 골조만 세워졌으면 거기 가서 밥 먹고 이층 올라가고 삼층에서 자고 사층에서 소변보고 그러수 있습니까 안되죠 그러니까 그 신앙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문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반지식주의가 있는데 그것은 대단한 잘못입니다. 이번에도 제가 총신에 가서 아주 심하게 나무랐습니다. 교수님들이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공부를 하기 싫은 것은 소명을 받았지 않았다는 자의적으로 신학교 왔다는 아주 훌륭한 증거다. 그러니까 빨리 가서 떡복이 장사를 하던지 자동차 외판원을 하던지 신학교에 다니지 말고 신학교 앞에서 분식집을 하던지 그렇게 해야지 되겠냐고 그래서 강력하게 도전을 했더니 폐강위기에 있던 세과목이 정원을 초과했습니다. 라틴어 조나단 에드워드 특강 , 존 오웬 특강 15명 이하면 폐강인데 70명이 넘게 와서 나머지 사람들은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공부해야 한다 이겁니다. 그러면 믿음은 내일이라도 생길수 있어요 물룐 절대 안 생길수도 있어요 그러나 공부는 오늘 맘 먹는다고 해서 학문이 내일 생길수는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공부를 해야되요 여러분들은 항상 묻고 싶겠죠 얼마나 해야 됩니까 그러면 교수님을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이 공부를 해야 되겠지요 그렇지만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시대를 보면서 영적인 지도자가 되기위해서는 어느정도 해야 되겠습니까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제 경험에 의하면 양보할수 없는 기간이 5년이예요 5년정도는 사역없이 사역을 한다고 하면 7년쯤 해야 겠지요 공부를 너무나 열심히 해서 건강에 위협이 와서 생명에 지장이 있을정도에 까지 갔다가 와야 한다 이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렇게 웃는데 저는 마음으로 눈물이 나와요 동의하지 않는 웃음이거든요 교수님들이 이말을 하면 별로 가슴에 와닿지 않겠지요 저는 아무 학교도 강의나가지 않고 있습니다. 열린교회 그것도 시골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뿐이예요 그러나 절실하게 느껴요 그래서 공부해요 나이 오십이 넘어서 중세불어를 배우기 시작했다면 여러분 믿겠어요? 공부를 해야 됩니다. 절대로 공부해야 됩니다.온 마음을 쏟아부어서 공부하세요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몇학년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여태까지 읽은 책중에서 레포트 쓰기위해서 중간에 읽은거 레포트 쓰기 위해서 짜깁기한것 빼고 자기의 지성적인 유익을 위해서 카바에서 카바까지 읽은 책이 쌓아 좋을때 3년 여러분 다녔다고 하는데 낼모래 졸업인데 얼마큼 올라 올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제가 대학에서 교수로 있을때 열심히 학생들에게 책을 소개 해주었더니 어느 학생이 저한테 마지막에 만나서 그래요 교수님이 책을 소개시켜주셔서 저는 독서생활에 방향을 잡을수 있었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책을 소개시켜주셨는지 아십니까 난 모르지 제가 교수님이 소개시켜주는 책을 열심을 다했는데 다 못읽었는데도 1년에 한키씩 읽었습니다. 이렇게 세워놓은거 아니고 한 키씩 읽었습니다. 졸업하기전까지 4키를 읽을것입니다. 이게 목회자들이고 신학생들하고 만나서 대화를 해보면 가슴이 허해요 어떻게 저 가슴을 가지고 설교를 할까 하다 못해 약을 팔아고 그 약을 공부를 해야 되는데 우리도 약이지만 구약신약 약이지만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몸을 아픈사람을 제외하고 6시간 이상 자면 죄짓는 겁니다 그럴수가 없어요 조셉 얼라인이라고 하는 청교도는 29살에 죽었어요 이 사람이 새벽에 일어나면 우유장수 종소리가 들리면 이러나자 잠을 깨자마자 눈물로 회개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소젖을 파는 사람도 이렇게 일찍 다니는데 진리를 전파해야할 내가 늦잠을 잤습니다. 제가 15년을 열린교회를 7명데리고 개척해서 이제것 왔는데 요즘도 5섯간 이상 안잡니다. 제 평생 소원은 바람 잘 붇는 언덕에 창 큰 집에서 런닝 셔츠 바람으로 하얀이불덮고 푹자는게 소원입니다. 각성을 해야 됩니다.
오늘 여기에 성경에 보면 여러분들이 이 두 바퀴 하나는 경건 하나는 학문 이게 참 어려운데 이 바퀴가 잘 굴러가는 학생들은 이 바퀴는 없어 이 바퀴가 있는 학생들은 이 바퀴를 안 끼워 무거운 짐을 싣고 바퀴하나밖에 없는 마차를 말이 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자리에서 계속 돌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좀 열심히 있어서 기도 많이 하고 뜨거운 학생들은 맨날 기도원에 올라가서 불만 때는 겁니다. 그리고 요즘 새로운 형태가 하나 더 생겨났는데 사역에 빠진 사람들이예요 그 기술 익히고 하느라고 공부도 안하고 기도도 안해 그리고 새 방법만 찾으러 열심히 다녀 그러다 신천지까지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매요 그런가 하면 또 반대 공부 하는 사람은 평생소원이 유학하고 와서 교수님 되는 거예요 교수님 그렇게 좋은거 아니예요 저분들 얼마나 고달픈지 아세요 공부 해야죠 여러분은 그렇게 하고 그담에는 기도도 안하고 그담에는 교회가서 봉사도 안하고 그러니까 대교회에서는 신학생들이 교회모이면 교회 문 닫을 징조라고 한답니다. 그렇게 하면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두 개의 바퀴가 같이 굴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그담에 또 한편으로는 열심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가서 이 바퀴두개가 축으로 연결 된것처럼 하나님을 믿는 종교적인 감동과 그 다음에 주님께 대한 새로운 경험이 학문 속에서 해명이 되고 학문적으로 깨달은것들을 자기의 영적생활에 적용을 하고 하는 가운데 이것이 하나의 축으로 흘러 움직여야 되는 겁니다. 그 지식만 목회를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그렇게 소화된 지식만이 목회를 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신학적인 입장이 틀리고 인생관이 각각 틀리고 선교사냐 목회자냐 사회사업가냐 비젼이 각각 상이하다고 할지라도 아마 이 한 가지 명제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모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거예요.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살고 싶다 별로 뭐 그렇게 감동이 안 되는 모양이죠?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살고 싶습니다. ‘아멘’ 그렇죠 그러면 도대체 그 말이 뭐냐 이겁니다. 주님의 손에 붙들려서 산다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겁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의 자기 계시가 일곱별을 손에 붙잡고 계신분으로 나타나요 만약에 그 앞절이 없었으면 또 이것을 놓고 해석이 많았었는데 앞절에서 해석의 논란을 다 없애버렸어요.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쉽게 얘기하면 목회자다 이거죠 물론 이것을 천사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목회자예요 그럼 목회자가 일곱 교회의 종들을 붙들고 계시다 그러면 이것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뜻이냐면 여러분들이 생각할때 나는 주님의 손에 붙들러 살고 싶다 라고 할때는 긍정적인 의미에서만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꽉 붙들려 주님은 날 사랑하고 나는 주님을 사랑하고 그렇게 해서 붙들려서 살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왜 사대교회 같은 교회는 주님의 손에 붙들렸는데도 사실상은 죽은자라 이런 평가를 받아야 되었을까요 그러니까 이것은 어느 하나 긍정적인 것만을 의미 하는것이 아니라 교회의 목회자들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붙들고 계서서 원하는 사람에 교회를 목회를 잘 되게 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을 버리실수도 있고 하는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주권이 당신의 종들을 사로잡고 있는 주권으로 나타난것입니다. 그것이죠 그래서 이제는 우리에게 항상 떨림을 주는 것입니다. 자기는 아무렇게나 살고 사역하면서 주님은 나를 붙들고 계시고 주님은 주의종 편이다 이런식으로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제일 비참하게 버림받았던 사람들은 제일 존귀하게 주님께 쓰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주님이 주의 종들을 붇들고 계시는 이 주권을 깊이 인정하면서 동시에 나와 그리스도 사이에 있는 철저한 붙들림 이연합 이것에 정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워갈 필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산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주님의 손에 붙들려 산 사람의 대표적인 본보기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 예수께 구원을 받은 다음부터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절한 열망을 숙명처럼 가지고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도 사울아 너 예수의 복음 전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그렇게 협박 하신적 없어요 그런데 뭐라고 그랫냐면 내가 이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런 강한 이 마음에 압박을 느낀 거예요 이것을 가르켜서 신적인 강제력이라 합니다. 그 신적인 강제력이 소명의 정체 였어요 그 신적인 강제력은 무엇이냐면 주님이 그에게 주신 소명이 있는데 그 소명 의식에 강력하게 사로잡혀있는데 그 사로잡힌 상태가 어떤 경우에는 자기도 어찌할 수 없는 도덕적인 필연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보든지 예수를 생각하고 무엇을 생각하던지 구원받을 영혼들에 대한 열망이 가슴속에 불타올랐던 것입니다. 그런 이런것이 바로 주님게께 붙잡혀 산다라고 하는 의미예요. 그러나 이제 이 붙잡혀 사는 신적인 강제력을 소명의 정체성이라고 보고 그 근원을 캐 들어가 보면 다메섹의 체험에서 만나는 것입니다.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기전 사도바울은 세 가지의 백 그라운드속에서 성장했던 사람입니다, 정치적으로 로마니즘 에서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에서 그리고 종교적으로 주다이즘의 배경을 가지고 성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학문의 상당부분은 주다이즘과 그리고 헬레니즘을 걸쳐있는 지식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로마니즘에 상당히 많은 지식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도행전에서 연설한 그 연설의 어느 부분을 보면 희락의 희곡인 아리트라스의 본문이 나와요 그 이야기는 그가 희랍에 있는 희곡과 그리고 많은 철학 그리고 사상서들에 대해서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폭넓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 지식들은 쪼가리 쪼가리 돌아다녔고 두가지 편견에 사로 잡혀있었어요 나사렛의 젋은이는 메시아 일수 없다는 신학적인 편견과 이방인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심리적인 편견이었어요. 다메섹에서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그의 생각은 바뀌게 된 것이지요. 그는 예수는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었다고 믿었지만 영광가운데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직접 뵈 오면서 이분은 하나님이 살리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면 저주받고 죽은 십자가의 죽음과 그리고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다시 살리시는 영광스러운 부활 사이에 신학적인 모순점들을 해결 해야만 되었어요. 도달하게 될 결론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저주를 받은 죽음이지만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것은 아니라는 신학적인 해결 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찬란한 그리스 예수와의 만남에 경험에 있게 되었고 그 만남의 경험을 통해서 지성에 벼락이 치는것 같은 누부신 진리의 빛이 밀려들어오게 시작 했어요. 그리고는 이 기존에 쪼가리 쪼가리 돌아다니던 수많은 주다이즘에 대한 지식 그리고 헬레니즘에 대한 지식 로마니즘에 대한 지식 이 많은 습득된 수많은 지식들이 한꺼번에 연결을 이루면서 우주적인 지식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라는 렌즈를 통해서 인간 자신을 세밀하게 들여다볼뿐만 아니라 온땅과 하늘위에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섭리의 미세한 조직들 그리고 우주에 까지 가득찬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 그리고 섭리에 철저하고 치밀한 조직까지를 발견하게 되면서 온땅과 하늘 어디에도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가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목적과 방향도 함께 정리하게 된것입니다. 그것이 학문의 세계속에서 일어난것입니까? 경건의 세게에서 일어난것입니까? 대답해보세요 경건의 세계속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부터 개혁파에 이르기까지 신학자들의 최고의 관심은 두가지로 집약이 되었습니다. 공부를 잘 하는 것과 예수를 잘 믿는 것 이 두가지가 신학자들의 한꺼번에 끌어안고 가야하는 숙명적인 화두였단 말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가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한 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독서 하고 명상하므로서가 아니라 진리를 향해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통해서입니다. 그것은 명상하고 독서하는 것은 학문의 세계이지만 진리를 향해서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은 경건의 세계입니다. 그 두가지가 한 지평으로 이루어 지면서 그러면서 진정한 신학을 하게 되는 거라 이겁니다. 그러면 그러한 학문이 많은 책들이 우리에게 학문을 가르쳐주지만 이 많은 책들은 원심과 구심의 관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한권이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진리의
찬란한 빛들을 성경을 통해서 보고 이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 밖으로 나가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과 인접된 학문들의 책들을 배워나가는 겁니다. 그러나 이 많은 책들이 많이 휘돌면 휘돌스록 아주 놀라운 성경을 아는 지식들을 제대로 가져다주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 원심력과 구심력의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라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는 것처럼 학문이 능력에 따라서 계속 펼칠수 있습니다. 신학과 가까운 철학이나 아니면 사회학이나 이런것뿐만 아니라 심리학 문리학 천문학 그리고 의학 생리학 그리고 생물학 그리고 천체 물리학 뭐 이런 쭉 뻗어나갈수 있어요. 광학가지 그러나 이것이 갈대는 항상 이쪽에서 잡아 댕기는 성경진리가 잡아 댕기는 힘의 영향을 계속 받으면서 자기 능력에 맞게 학장되 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놓고 가면 끈 떨어진 연처럼 되어서 곤두박질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신 성경만 공부하면 안되죠 이단에 속한 교파일수록 성경이외에 아무것도 못 읽게해요 대표 적인게 구원파입니다. 그쪽에서는 제 책이 금서목록에 들어있어요 왜냐하면 상당한 수의구원파 신자들이 저의 성화론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탈출구를 찾았어요 그래서 우리교회도 오고 다른교회도 갔어요. 못읽게 해요 그러니까 목사가 되려면 성경을 백독해야 된다 물론 성경이 중심이 되야 한다는 면에서는 백독이 아니라 삼백독도 해야 되겠지만 그러나 이것이외에 다른것들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독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공부를 해 나가는 것입니다. 원심력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으로부터 받는 감화와 감동이 일반책 으로부터 받는 감동과 감화보다 뛰어나서 또 일반 책으로부터 감동을 받았다면 그것은 결국은 성경을 풀어낸것인데 그것이 감동이 되었다면 풀어낸 성경을 내가 대면하면 더 놀라운 깨달음이 있을것이다 라고 생각해서 그것을 토대로 삼아서 원천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성경읽기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신학에 있어서 중심자리에 오는 문제 것입니다. 이런점들을 놓친것이 중세 시대입니다. 그래서 중세시대의 박사들은 성경도 한 번도 안읽은 사람들이 박사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요즘도 그런 상황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여기가 성경학교냐 그러고 경멸하는 분위기는 아주 분명하게 개혁파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칼빈이 제네바에서 목회하던 목회사역들이 대부분 성경을 차례대로 그것도 중세의 방법론에 따라서 강론 하던것을 기억하던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기록에 보니까 칼빈이 월 수 금 이렇게 예배를 드렸고요 이 주 건너편에 한 번씩은 매일 예배를 드렸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부흥회를 이 주에 한 번씩 한 것이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아침 일찍 모든 교인이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일터로 나가는 겁니다. 그때에도 그는 우리가 생각할때 칼빈이종교개혁에 관한 로마서만 디립다 강해했을 거 같지만 그렇지 않고 성경 전체를 골고루 강론했고 쫒겨났다가 다시 제네바에 청빙되어 왔을때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지난번 했던 그 다음입니다. 그리고 설교를 계속해 나가는 겁니다. 그렇게 성경을 성경으로부터 받는 감동이 이 중심에 와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성경읽는 무엇이지요 매3주5하면 한번 띨수 있다면서요 신약은 두 번읽고 구약은 한번 읽는다면서요 ?그러나 그렇게 분량에 문제가 아니라 깊이에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해석학적인 수난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한 사람이 어떤 글을 보고 받는 감동은 글 자체에도 있지만 이 사람이 어떤 상태와 수준에서 이것을 보느냐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찬송 가운데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괴로운 인생길을 가는 몸이 편안히 쉴 곳 아주 없네 산넘어 눈보라 재우쳐 불어도 돌아가 내 고향 하늘나라 초등학교 1학년이 이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흘린다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해요 자기가 이 세상이 고달픈지 알긴 뭘 알아요 그러나 오십 육십이 되어서 산전수전 다 겪어서 교회 다니는데도 이 찬송 부르면서 눈물을 안흘린다면 그사람은 은혜가 없는 사람입니다. 찬송가가 바뀐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꿔었기에 새롭게 다가오는것이지요 이안에 학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성경은 언제나 기껏해야 이것을 바라보는 즉각적인 자기의 느낌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해요 그 해석이 그러나 자기가 비옥한 학문을 건전한 학문을 많이 습득하고 그리고 충분한 지성을 갖게 되었을때 이 한줄기의 성경의 빛은 그 자신속에 있는 지성을 줄달음질 하면서 다른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성경속에 놀라운 진리들을 길어내겠금 만들어 준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만 읽으면 안되고 학문을 해서 탄탄하게 신학교에서 배우는 학문들을 탄탄하게 공부해서 올바를 학문들을 축척하면서도 계속 성경을 꾸준히 경건의 목적을 가지고 학문에 목적이 아니라 경건한 목적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순종하면서 살기위한 목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그속에서 성령을 음성을 듣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를 계속 병행하면 성경을 읽으면서 계속 은혜를 받으면 학문이 촉진이 되고 학문을 계속 섭렵해 나가면 성경을 대할때 나의 지적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에 새로운 감동으로 성경이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로마서는 누가 썼죠?바울이 쎴죠 베드로서는 누가 쎴죠 베드로가 쎴어요 그런데 풀릴수 없는 의문이 희랍어의 문체상으로 보면 사실은 로마서 보다는 베드로서가 더 고급 희랍어를 구사하고 씌어져 있어요 학자들간에 논란 가운데 하나죠 단서를 주는 제목이 있어요 왜냐하면 로마서 마자믹장에 보면 나 더디오가 이 글을 대필하고 있다 사도바울이 불어준것이지요 그러면 왜 베드로가 만난 그리스도가 더 크냐 바울이 더 깊은 신앙의 경험을 했냐 이렇게 물어보는 것은 바보 같은 질문이죠 똑같이 위대하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영광을 보았던 사람이지요.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찬란한 빛이 들어왔지만 줄달음 치고 스쳐 지나갈 정도의 커다란 지성이 없었기 때문에 로마서를 안쓴게 아니라 쓰고 싶어도 쓸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바울은 달랐어요 늦게 예수를 믿었지만 그에게는 상당히 많은 지성적인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진리의 그빛이 그의 지성속에 달음질치게 되었을 때 인류가 그토록 찾아 헤멨던 진리가 무엇이고 그리고 선과 악의 기준이 무엇인가하는 것들을 모두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에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해서 아리스토텔레스나 그이후에 에피큐리언 스토아 학파 이런사람들이 떠드는 철학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들을 이 복음을 통해서 한 번에 날려 버릴수가 있었어요 장엄하고 굳건한 확신이 그에게 사로잡혀있었어요 그것은 뭐냐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그 지식의 빛이 그로 하여금 그 자신의 지성안에 있던 놀라운 빛속에 달음질 치면서 우주와 세계와 인간과 하나님을 한번에 보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공부하지 않고 베드로 처럼 고기나 잡던 사람이었다면 아마 그랬을것입니다 믿어야 구원을 얻는 거야 아 답답하네 믿어야 된다니까 그렇게 편지를 썼을 겁니다. 일단 믿어봐 내가 거짓말 하는거 아니야 그렇게 끝났을겁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공부해야 됩니다. 지금은 둘다 안하죠 최근에 여러분들이 다른이유말고 성경을 읽다가 눈물을 흘리고 성경에 엎드려본적이 언제였는지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신학은 그런 과정이 없으면 반드시 경건을 이기게 되어 있어요 결국은 신학의 무너짐은 어디에서 나오냐면 경건을 통하지 않고는 습득될수 없는 것들을 이성으로 대치하려고 하는데서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깊이 자기가 깨뜨려 지고 그래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수시로 깨닫게 되는 은혜의 경험 이 은혜의 경험이 이 지식의 상승을 앞질러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모든 지식은 그것이 비록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라고 할지라도 지식의 특성 그 자체는 교만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신학공부하면 교만해져요 나쁜사람이 되어야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공부를 하면 계속 교만해지게 되는거예요 그것은 공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예요 겸손하게 하게 되기 위해서는 은혜의 물에 잠기게 되는 겁니다. 우리들이 일반학문을 하면서도 대가를 만나게 되면 아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일평생 심리학을 했지만 이사람 이야기를 해보니까 내 심리학은 완전히 종이 호랑이였어 라고 무릎을 꿇는 것을 보면 그것도 겸손해 지는것 같지만 그러나 그렇게 무릎을 꿇어보지 않앗던 사람들을 향해서는 교만해지는 거지요 너도 심리학 하고 나도 심리학 하는데 난 대가 앞에서 내가 아무것도 아니고 비참한 인간 이란것을 깨달았어 너 그런거 해봣어 못해봤지 자식 그것도 못해봤으면서 그런데 신학에서는 안그래요 내가 신학을 공부하다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정말 쓰레기 같은 죄인이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에 대해서 터럭만큼도 알수없는 비참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그것을 못 깨달은 사람들이 불쌍해서 눈물이 날 지언정 너 하나님앞에서 회개해 봤어 자식 그것도 못하고 난 세 번이나 했어 임마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의 특성입니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여태까지는 다 사설이고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될것인가 성경은 우선 통일성을 터득하는데는 통독밖에 좋은게 없어요 시간을 정해서 많은 양들을 읽어가는 것입니다. 들어도 되고 그러나 영적생활을 위해서는 정독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놓고 성경을 쭉 읽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어디서 배운것은 아니고 설교자의 삶을 살면서 이미 이십년전에 터득한 방법이예요 그래서 천천히 성경을 읽어가는 것입니다. 요새는 제가 디모데서를 읽고 있습니다. 천천히 읽으면서 아무것도 걸리는 것이 없으면 계속 진도를 나가는 것입니다. 그대신 몇장까지 읽어야 겠다그런것은 가지면 안됩니다 읽어나가는 거죠 그러다 무엇인가 깨달음이 와요 그러면 거기서 멈춰요 다시 뒤로 돌아가서 반복해서 읽는것입니다. 한번,두번,세번 네 번 읽었는데 처음에 뭐가 깨달음이 있는것 같더니 그담에는 희미해 지고 별고 없어요 그러면 다시 진도를 나가는 거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깨달음이 와요 두 번읽으니까 더 흥분되는 깨달음이 와 세 번째 네 번째 반복해서 읽는거죠 다섯 번째 옆에는 반드시 오리지날 텍스트가 있으면 좋아요 희랍어 본문 히브리어 본문 그래서 번역이 틀렸거든요 틀린것 많아요 그러니까 번역이 잘못되엇는데 그것을 보고 꽂혀서 은혜를 받으면 근거가 없는그 본문에서 받을게 아니잖아요 펼쳐놓고 그담에 읽어 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는 누가복음 11장 한절을 세신간동안 읽었어요 아홉시부터 읽었는데 12시에 끝났어요 예수께서 한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그게 다예요 세시간을 읽었어요 거기서 무엇을 찾았을까요 한달 설교했어요 그리고 커다란 감동이 있었어요 그런식으로 읽어가는 것입니다 천천히 읽어가다가 절대로 성경을 읽을때 설교할 요량으로 읽지말라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매춘행위예요 직업행위에요 그렇게 하지 말고 자기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그리고 천천히 읽어요 그때에 잘 들으세요 성경을 처음 읽을때는 내가 성경을 읽지만 깊이 읽으면 성경이 나를 읽기 시작해요 그게 바로 성령이 조명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이 나를 어떤사람인지를 드러내는것입니다. 밝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성경의 기능이 발휘가 되는 것이지요 성령의 작용안에서 그것은 모르던 것을 가르쳐 주고 교훈과 잘못한 것들을 혼내키고 책망과 그릇된것을 꺽어서 바로잡고 바르게 함과 그리고 의로 교육하게 하는 효과들이 이 성경을 읽으면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더 깊이 들어가면서 그러니까 시간의 여유가 필요해요 그러면서 그것들이 가슴에 다가오기 시작해요 회개가 나옵니다. 혹은 격려를 받게 되요 책망을 받게 되요 그런데 그것을 충분히 그 성경이 나에 내면의 세계를 읽도록 자신의 삶 전체를 읽어나가도록 그렇게 자기를 개방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자기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요 자신의 잘못 편견 이런것들이 깨뜨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깨어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기도가 나오게 되어있어요 우리들의 대부분의 기도는 청구형 기도에요 하나님이 이런걸 기도하길 원하신다 라고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돈 주시오, 교회주시오 사역주 주시오 마지막에 은혜주시오 그런 종류의 기도예요 사실은 기도의 진실한 의미는 하나님의 의지와 나의 의지를 합치시키는 것이예요 그러면 나한테 그분이 합치해야되겠어요 내가 그분께 합치되어야 겠어요 너무나 분명하지요 그러면서 자기를 꺽고 주님앞에 깨뜨려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흠뻑 섭취해요 그래야 기도가 나오지요 충분히 기도하는 것이지요 어떤땐 그 기도시간이 거의 부흥회가 되는거예요 눈물이 흘리면서 한없이 자기의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몇시간이 흐를수도 있어요 그리고 나서 그다음에 해야될일이 있어요 무릎쓰고 머릿속에 있는것이기 때문에 뼈대야 남겠지만 사라져 간다는 거죠 그러니까 빨리 이것을 내가 누구에게 내가 오늘 하나님 여기서 만났는데 이것을 전한다면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정리를 하자 그리고 정리를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시간이 지나면 정리 어려워요 노트 중에 하나를 제가 복사를 해가지고 지금 급히 가지고 왔는데 여기에 보니까 이렇게 씌여있어요 2005년 1월 13일 아침에 일어나서 민수기 28장 3절에서 5절을 읽었어요. 제사에 대해 나오는 지루한 본문 이예요 그것을 읽다가 강한 은혜를 받게 되었어요. 그리고 새벽시간서부터 그 본문을 가지고 씨름을 해서 깊이 은혜를 받고 기도를 끝난 다음에 이것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메모를 했는데 여기에 보니까 아침 10시경에 메모를 하기 시작했는데 21시 24분에 끝났다고 되어 있어요. 그래서 이것들을 이렇게 하게 되면 한 6개월 정도를 설교할 수 있는 분량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15년을 목회를 했는데 한 번도 다음 주에 뭘 설교해야 되지 그런 적이 없다 그러면 거짓말이겠지만 거의 없었어요. 그리고 오히려 항상 주일날 성도들이 흩어져 갈 때에는 안타까운 마음이었어요. 설교하려면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되는구나. 그래서 요즘은 목회도 설교가 분업 체제이거든요 수요일은 부목사 전도사 주일날 오후 하고 담임목사가 설교 한편만 하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통일적인 신학을 가지고 계속 같은 꼴을 먹여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좀처럼 설교할 기회를 부교역자에게 많이 주지 않았어요. 금요일 같은데 이럴 때 주지만 도 제가 출타했을 때 어쩔 수 없이 주지만 나머지는 거의 제가 다 했어요. 결국은 15년 동안 3200본울 설교했어요. 그런데 그것들을 어떻게 하냐면 이렇게 해서 이중에서 3분에1에 해당하는 부분을 너무 아까워서 잘 정리해서 책으로 쓴 것이 지난번에 여러분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자기 깨어짐이라는 책입니다. 아직까지 시간이 없어서 그러는데 세권정도는 여기서 서 쓸 수 있어요 .이렇게 놓고 이것을 써먹으려고 하지 말고 그리고 그냥 적어둬요 그리고 계속 진도 나가는 거예요 그러다가 저보고 어떤 사람이 도대체 설교준비에 얼마나 시간이 걸리냐 그러는데 제가 만약에 설교준비를 뭐 하루씩 매달려서 했다면 공부 거의 못할 겁니다. 일이 너무 많아서 여러분들에게만 비밀인데 전 설교준비를 한 시간 넘은 적이 많지않아요 스펄 전에게 프럼플넌 스피치 즉석 설교 이었어요. 대부분 어떤 사람이 물었어요. 스펄전 목사에게 목사님 설교한편 준비 얼마 걸리십니까. 몇 시간인지 알고 싶어서 질문을 했는데 20년 걸립니다. 왜냐하면 20년 전에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살아온 삶 전체가 설교준비예요 그래서 이렇게 놓고 설교를 할 기간이 되면 이 부분을 요즘 교인들이 기도를 안한다 쭉 찾아보니까 여기에서 기도에 대해서 엄청나게 도전받은 게 있어요. 이것을 찬찬히 읽기 시작해요 그리고 다시 묵상을 하면 그때의 감동이 그대로 살아나요 그때에 이게 신학적인 문제가 많이 걸려있으면 시간이 걸리는 거죠 한 시간에 못합니다. 그런데 신학 책들을 찾아서 그 신학적인 문제를 묵상할 때 못 푼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죠. 때로는 그것이 몇 달걸릴수도 있어요. 신학적인 문제를 푸는데 풀고 나서는 그담에는 이제 정리를 해서 그렇게 해서 설교를 하러 올라갈 때 90분 정도 설교할 수 있는 양입니다. 처음에는 이것도 없었는데 요새는 기억력이 깜박깜박해서 이렇게 써가지고 여기다 놓고 볼일이 없죠. 골격 거의 외우니까 자유롭게 쭉 설교하면서 나가는 거죠 교인들이 듣기에는 막 퍼부었는데 나중에 집에 가서 다시 테이프를 들어보면 이게 서론 본론 그 항목 일번 이번 에이 비 그러므로 왜냐하면 다 나오고 마지막 결론까지 딱 나옵니다. 그것을 계속해 나간 겁니다. 이런 것들이 계속해서 십년 이십년 쌓인다고 생각을 해보세요. 매일 설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왜 매일 주시는데 말씀을 그래서 한번 말씀에 잠겨서 깊이 은혜를 받게 되면 그럼 보통 짧으면 두 주 세 주 길면 한 6개월 치가 나오는 거지요. 그러면 그것을 계속하니까 항상 발견하는 것이 설교하는 양보다 훨씬 많죠. 그러니까 설교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이유가 없는 거지요. 그리고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사실 자기가 은혜 못 받고 설교할 때도 있잖아요. 이런 식으로 하면 말씀이 자기 속에 들어와서 나가는 것이니까 내가 먼저 변화되고 그 경험에 의해서 성도들도 변화되게 하는 거죠 그렇게 하면서 학문과 성경 읽기가 경건과 학문의 이 두 축이 신학서적과 성경책 사이를 돌면서 이 경건과 학문의기능이 조화를 이루면서 그러면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깨닫고 나면 성경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성경을 잘 깨닫고 나면 그담에 학문에 대한 이해가 높아져서 논리는 복잡하지만 내용은 별로 없구나. 깨닫게 되는 거죠 박사논문 보면서 결국은 중요한 얘기가 아닌 것을 하고 있구나 하면서 깨닫게 되죠. 그러면서 이렇게 짚어 나가는 거지요 그렇게 하면서 나름대로 설교의 세계를 굳혀 나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