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곳에 나타나는 능력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 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7-9)
녹취자: 손미자
성경을 볼 때에 신약에서 사도바울처럼 그렇게 그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도리뿐만 아니라. 그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신앙세계에 대해서 깊이 체험한 사람이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 사도는 말하기를 자기가 받은 그 계시가 정말 크고, 그리고 계시를 받은 것이 내가 교만할 정도로 너무 크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그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많이 통찰했고, 또 하나님의 그 계시의 세계에 대해서 많이 이해를 했기 때문에 그렇지 못했던 사람들을 이렇게 볼 때에 참 수준이 어리다. 우리도 맨 처음에 신앙생활 할 때는 자기가 신앙생활에 열심을 낼 때는 자기만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최고인 것 같고, 그리고 제법 자기가 잘 하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을 하잖아요. 그렇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가고 그리고 신앙의 체험들이 쌓이고, 자기가 영적으로 깊어지게 되면 이제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수준이 어리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수준의 진보가 있어져야합니다. 그런데 수준을 가히 정말 하나님의 영광의 세계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깊은 그런 사도로서의 영적인 체험을 가지고 또 영적인 체험뿐만 아니라. 계시를 보았죠. 그런 많은 소위 얘기하는 자기를 향해서 신비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과연 사도바울이 주님을 만난 적도 없는데 그가 과연 주님의 사도되겠느냐. 이렇게 물을 때에 신령함에 있어서 자기가 다른 사도들에 버금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통해서 증거 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증하기 위해서 그렇게 변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렇게 많은 소명을 받고, 그리고 많은 세월동안을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목회를 하게 되고, 또 선교를 하게 되고,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리고 기적을 행하게 되고, 많은 일들로 하나님을 섬기면서 온갖 체험을 쌓아왔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성숙이 아니더라도 경험적으로 우리를 성숙하게 하죠. 그래서 그렇게 깊은 경험, 하나님을 섬기는 충성스러운 삶을 산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의 또한 성숙이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 속에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볼 때에 사도바울은 얼마든지 자기가 가고해지고 교만해질 수 있는 그런 소지가 있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몸에 가시를 두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사람들이 몰라요. 그렇지만 그저 추측하건데 안질이었을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보죠. 왜냐면 하나님이 그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셨는데 그렇게 바울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마주칠 때에 강한 빛을 받게 되죠. 그리고 그 눈에 비늘 같은 것들이 떨어지면서 나중에 눈을 뜨는 장면들이 사도행전에 나오잖아요. 그렇게 눈을 뜨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사건 이후로 아마 이 사람에게는 교회에 자기가 직접 편지를 쓸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눈이 나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더디오라는 사람이 사도바울의 그 편지를 대필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게 대필할 정도로 그렇게까지 깊이 말하자면 눈이 안 보일정도로 눈이 어둡고 고통 하는 가운데 있는데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고통이 되었겠는가 한번 생각해보세요. 눈이 저도 많이 나빠서 아주 심하게 나빠서 안경을 벗으면 몇 명이 모였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눈이 나쁩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안경을 쓰면 해결이 되거든요. 그런데 주위에 보면 안경을 써도 해결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무 나쁘거나 아니면 눈 자체에 병이 있어서, 그 사람들이 고민과 번민은 참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 시간 이상만 책을 보면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핏발이 서는 것이죠. 이런 식의 질병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방해거리가 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더 커다란 방해거리가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린도 교회 안에도 사도바울을 사도로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도를 사도로 믿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는 사도가 전해주는 이 가르침을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고 받기를 싫어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얼마나 좋은 빌미거리가 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왜요?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쫓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이적을 일으키는데 그것이 정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라면 왜 자기는 안수해서 눈 하나 못 고치느냐? 이거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섬기고 사역을 해나가는데 있어서 아주 커다란 걸림돌이었습니다. 오늘 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잣대를 가지고 잰다면 참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는 것이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세계라는 것이 참 이상해요. 예배를 드리다가 아니면 생활을 하다가 평신도가 쓰러지면 “아, 얼마나 주일 날 나와서 주의 일을 열심히 했으면 저렇게 쓰러질까?” 이렇게 생각하고, 또 얼마나 건강이 안 좋으면 저럴까. 그렇게 생각하는데 만약에 설교를 하다가 설교자가 쓰러진다든지 그러면 딱 떠오르는 생각이 ‘야,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으면 하나님이 저렇게 쓰러지게 하실까?’ 그렇게 사고가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이 교회가 사도에 대해서 일부의 사람들이 강한 반발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사도바울의 그것이 어디가든지 스켄달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도바울이 몰랐을 리가 없죠. 바울은 생각보다 아주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죠. 로마서 같은 곳에 보면 뒤편에 가보면 좋게 이야기 하면 인정이 많은 것이고 어떻게 보면 소심한 것입니다. 뭐 다 고맙다. 그래라 그러면 되는데 16명이나 이름을 불러가면서 누구에게는 왜 고맙고, 누구에게는 뭐 어떻고, 뭐 누구는 잘 있어야 될 것을 하면서 써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가시를 뭐라고 합니까. 사단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무슨 이야기냐면 자기에게 있는 그 질병이 그 근원이 결국은 사단이 준 것이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얘기냐면 그 질병의 근원이 자연적인 질병이 아니라. 사단이 자기를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믿고, 그다음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위하여 살려고 하는 자신을 삶을 방해하기 위해서 준 것이었다. 그러면 만약에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거기에서 만나서 만약에 그렇게 눈이 어두워졌다면 그것이 어떻게 사단의 가시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이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강한 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었지만 그 때는 눈을 떠서 아나니아가 안수하고 그래서 이렇게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다가 나중에 세월이 흐른 다음에 다시 안질이 생겨서 그래서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하나는 해석상의 문제죠. 예를 들자면 빛으로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서 그렇게 눈이 어두워지게 되었고, 그래서 안수를 해서 비늘이 벗겨지고 이렇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었을 때에 처음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지만 그것이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자기에게 머물러서 자기의 사역과 모든 것을 방해하니까. 이 바울이 이것을 사단의 가시라고 해석한 것이 아니냐. 이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이 병에 대한 사도의 이해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뭐냐면 어쨌든지 간에 그것은 사단의 가시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자기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들을 방해하기 위해서 질병이 자기에게 걸려서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아주 심각한 방해를 하는 것이죠. 일생을 두고 이 문제를 두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해야 될 정도였다고 하니까 세 번을 기도했다는 것은 한번 기도해도 응답이 없으니까 또 하고, 응답이 없으니까 또 하고, 그래서 세 번을 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때는 이 문제가 얼마나 자기의 사역과, 섬김과,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였는가 하는 것을 오늘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커다란 문제가 되었었는데 그런데 육체에 이런 사단의 사자를 주셔서 자기를 이렇게 하게 되었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한까지는 언제나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방해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언제나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랬는데 어느 순간에 오히려 이 약한 것을 인하여서 크게 감사할 수 있는 그런 변화가 사울의 마음속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이나 주님께 간구하였는데 알다시피 이 사람은 사도는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기도해서 바울로 하여금 희 안한 능을 행하게 하시고, 그리고 안수하게 하시고, 그리하여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까지 살게 하시는 그런 놀라운 어떤 역사를 이루어 놓으셨어요. 그런데 그는 기도하면서 직감적으로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 그리고 응답되지 않는 이유 그런 것들에 대해서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는 것을 보아서 얼마나 절박한 문제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죠. 세 번을 간절히 기도했는데 결국은 하나님의 응답이 왔습니다. 그 응답은 뭐냐면 어떻게 보면 매어 섭섭한 것이었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그 얘기는 무슨 얘기입니다. 이제 꽉 차서 더 이상 내 은혜를 부을 때가 없다.
왜 하나님이 사도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셔서 그 병을 고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이르시기를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이것을 사도가 지금 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사도에 대해서 그 바울이 정말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겠는가? 그러면서 아마도 그가 사도가 아닌 것 같다는 여러 가지 증거를 이야기 하는 가운데 이제 사도바울이 이렇게 질병에 걸린 것조차도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여튼 목회자들은 건강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사람의 부담이 됩니다. 그런데 이제 이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 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도의 신체를 바꾸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마음과 생각을 바꾸시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사도에게 있어서 더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하나님께서 네게 주신 은혜가 족하다. 내가 네게 준 은혜가 족하다. 바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이 은혜가 족하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 아마 이해를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설명해주신 것을 오늘 회상하고 있는데 이 내용을 그렇게 수없이 기도하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을 것인데 그렇게 오래된 그 기도를 아직까지도 주님이 응답해주신 내용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질병에 걸려서 고통하고 또 그가 그 질병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을 정상적으로 섬기고, 섬기는 일에 지금 명백하게 방해를 받고 있어요. 대적들에게 빌미를 제공해주고 그것이 스켄달이 되어서 자기에게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합당하지 않다. 라고 하는 비난들을 받는 빌미가 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도가 자신의 눈에 손을 얹고 믿습니다. 라고 할 때 만약에 눈이 벗겨지고 그리고 완전히 성케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면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네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할지니라. 주님이 원하셨던 것은 사도가 얼마나 강한 사람이고, 그가 얼마나 능력이 많은 사람이며, 그가 얼마나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인가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한 사람도 들어서 사용하시는구나.
글쎄 저는 아직까지 그런 믿음이 없는지 모르겠는데 어떤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어떤 분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도 보면 아주 경건하고 그리고 한참 일할 나이고, 그리고 정말 유능하고, 기도 많이 하고 그런데 하나님이 불시에 데려가셔요. 특히 금년에는 내 주위에서 아주 너무 많이 데려가셨어요. 나로 하여금 뭔가를 새롭게 생각하게 하시기 위함인가 봐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직 누가 봐도 때가 안 된 사람들을 많이 데려가셨어요. 어느 젊은 일꾼이 아주 신실한 사람이 한국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또 미국에서 유학까지 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이나 심성, 신앙이나 경건, 모든 걸로 볼 때에 모든 사람이 기대하기를 아마 저 사람이 나와서 뭐를 좀 하겠다. 아마도 한국교회에 나와서 뭔가를 좀 하겠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 온지 며칠 안 되었는데 옛날이야기죠, 기차를 탔데요. 그래서 서울역인가 어느 역인가를 들어오는데 그 후에 그래서 서울역을 가서 이렇게 정말 그런 사고가 날 수 있나 하고 보니까. 요즘은 그렇지가 않아요. 그런데 옛날에는 하여튼 사고가 났데요. 창문을 열고, 자기 가족인가 누가 마중을 나온다고 해서 고개를 내밀고, 고개를 내민 정도가 아니겠죠. 몸을 내미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손을 흔들고 이러다가 그냥 기차가 달려오면서 머리가 기둥에 바쳐서 그 자리에서 즉사해버렸습니다. 그렇게 죽으면 보상금도 안 나와요. 그렇게 해서 죽었어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철저할 정도로 하나님이 준비시켜 놓으시고, 그다음에 데려가시나. 그런 일이 걸림이 되어서 고민 고민 했는데 그중에 한 사람이 나중에 자기는 정답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 대답이 무슨 대답인가 한번 들어봤더니 대답이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하는 있다. 그것이 뭐냐 나는 그 사람 없이도 일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보이기 위해서 데려가신 것 같다.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믿어지지 않지만 하여튼 이 세상에는 그렇게 우리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논리와 생각으로서는 그 능력의 대 사도에게 이런 연약한 부분들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그것을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어느 순간이 되어서 말이죠. 자기의 그러한 신체적인 결함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조금도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약한 것이 오늘 은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앞에 그 자기의 인생을 다스리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알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내 능력이 네가 약한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많은 은혜를 입었지만 이것은 사도에게 있어서 아주 굉장히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이제껏 까지는 내가 이런 연약함에 있는 것이 나의 부덕의 소치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혹은 내가 이런 연약한데 있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또 하나님께서 온전히 나를 통하여서 영광 받지 못하도록 내가 방해가 되고 있다. 라고 하는 이런 의식 속에서 살았는데 그러나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기를 뭐냐면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이 속에서 하나의 인식이 열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뭐냐면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 연약함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문제다. 오늘도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만은 하나님의 능력이 장막처럼 연약한 부분을 덮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약한 것을 인해서 오히려 강하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여러 곳에서 오히려 병이 있을 때 기도해서 물러가고, 그리고 고통이 있을 때에 간구해서 기쁨으로 바뀌고, 결핍이 있을 때 부르짖어서 그 결핍이 풍부로 바뀌고, 연약한 것이 있을 때 부르짖어서 강한 것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막힘이 있을 때 오히려 간구해서 그 막힌 것이 뚫리게 되는 이러한 역사를 약속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능히 이런 일들을 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있어서 이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가 그냥 필요 없다. 그리고 인생에 있어서 이것이 너무나 짐이 된다. 그리고 나는 왜 이럴까? 라고 하는 것, 그것이 사도에게 있어서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그리고 그 문제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응답을 듣고 나니까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머무는 자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늘 약하고, 그리고 자기는 너무나 약하고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의 그 약한 것을 인하여 손가락질 하고, 그리고 온전하지 못하다고 사람들이 말을 해도, 오히려 이 약한 것에서 하나님의 능력은 온전하여 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자기의 이 약한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아무런 방해도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도는 이 일을 계기로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 했습니다 .무엇을? 자기의 약한 것을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죄인 중에 괴수요.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봐라. 참지 못한 혈기의 사람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봐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오해했던 사람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라. 예수를 섬기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를 미워하고, 그리고 그 예수를 박해하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물을 것입니다. 그러던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했습니까. 예수를 박해하던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뜨겁게 예수를 사랑하고 그 예수를 위해서 수고하고, 애쓰고, 자기 못하고 목마르고, 굶고, 춥고, 헐벗고, 이러면서도 여전히 마음속에 교회를 향해 염려를 가지고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혈기에 가득 찬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온유한 사람, 오래 참는 사람으로 변해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사도된 표가 나에게 있다. 그것이 뭐냐면 능력과 기사가 먼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오래 참는지를 봐라.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니라면 이렇게 오래 참을 수 있겠느냐. 완전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약한 것이 모두 강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연약했던 것이 모두 강력하게 되었습니다. 그 모자라던 것이 모두 온전하게 되었어요. 그 미치지 못하던 모든 것들이 모두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 되었습니다. 사도가 약한 것을 자랑할 때마다 사람들은 어떻게?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사도는 말하기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음이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 때문이다. 이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그 자체를 보고, 이 사도의 말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사도의 연약한 것 그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가 누구이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때로는 말이죠. 우리로서는 용납하기 어렵고, 납득하기 어려울 사람들을 하나님은 가끔 사용하십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찬송을 지은 사람도 아프리카에 총 들고 가서 그물을 치고 검둥이들을 사냥 해다가 닭장 속에 집어넣어 미국에 와서 팔아먹던 그런 아주 못돼 먹은 노예 장사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쓰십니다. 질그릇처럼 깨지기 연약하고 유리그릇처럼 약해서 무엇에다 쓸데가 있는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요. 성격이 괴팍하고 이상한 사람, 하나님이 사용하셔요. 아집이 강해서 도저히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이 단단한 고집덩어리를 사용하셔요. 매일 상처받기 잘해서 어디 그렇게 살아 가지고 누구를 세워줄 것 같지 않은 사람들, 하나님이 사용하셔요. 왜 그렇습니까? 왜 결함 많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요. 그 이유는 무엇이냐면 그가 자기의 결함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던 모든 사람들을 보세요. 자기의 결함을 몰랐던 사람은 하나님이 아무도 쓰신 적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깊이 쓰임 받았던 사람은 한 사람도 자기가 그 하나님의 쓰심에 합당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선지자들, 부르셨어요. 예레미야에게 다가오셨어요. 예레미야야 네가 선지자로 세웠다. 예레미야가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그것을 이제야 아셨습니까. 역시 하나님은 사람 볼 줄 아시는군요.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자기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못나고, 그리고 자기의 힘으로는 극복될 수 없는 결점을 지니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쓰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쓰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결점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것이다. 라는 소망을 가질 수 없을 정도로 오히려 이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이 쓰시려고 할 때 아마 내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쓰임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는 이러한 결함들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사용하시기를 좋아하셔요.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기가 누구인지를 비교적 잘 깨닫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느냐면 자기를 잘 모를 때에는 그 때는 하나님이 자기를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면 처음에는 그 하나님을 찬송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들어서 사용하실 수밖에 없는 그 선한 무엇이 내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할 때에는 하나님과 가까웠으나 유명해지면서 하나님이 크게 쓰시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늘 생각하고, 그러니까 어때요. 사울은 막 수많은 사람, 그도 사람 아니겠어요. 바울도, 수많은 사람이 뭐 그런 정도로 위대한 일들을 했으니까 그에게 얼마나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바울을 사모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그들을 쳐다보고, 성경을 보고 무엇인가를 볼 때 언제나 눈으로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보이지 않고 눈물이 질금질금 나오는 회복될 수 없는 안질을 늘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그것을 통해서 무엇을 보느냐면 역시 하나님의 은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그 사실을 깊이 깨닫고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하나님 앞에 바로 이것이잖아요. 자고하지 못하게 하도록, 예수를 믿어도 말이죠. 물론 변하죠. 변하는데 그 바탕이 하여튼 살아있습니다. 사도가 그 옛날에 누가 가서 다메섹에 가서 사람을 잡아오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자청해서 가서 영장을 달라고 해서 받아가지고 그리고 다메섹으로 달려갈 정도로 그렇게 다혈질 적이고 혈기 왕성하고, 뭔가 잘못된 것에는 참지 못하는 그 판단이 틀렸다고 할지라도 그런 사람이었잖아요. 그런데 사도가 된 다음에도 그대로 나타나잖아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나바하고, 마가 문제를 가지고 심하게 다투는 장면 같은 경우, 그렇죠. 뭐 약한 사람들이 전도여행하다 힘들면 중간에서 도중하차 할 수도 있는 것이지 한 번 더 기회를 주면 되는 것이지 바나바가 누구입니까. 자기가 회심했다고 얘기하니까 사람들이 아무도 믿어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때에 보증서를 써준 사람이 누구냐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4장에서 바나바는 이미 저명인사였고, 자기는 지금 겨우 9장에서나 나오는데 그런 처지가 되었는데 바나바에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게바라고 했죠.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유대인들이 걸어오니까 흠짓 하고 자리에서 놀라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몰론 잘못된 것은 사실입니다. 잘못 되었는데 사도는 뭐라고 했느냐면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내가 사도베드로에게 면박을 주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러나 꼭 그래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예루살렘 교회 말하자면 지도자였는데 얼마든지 그 문제를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었는데. 바탕이 그렇게 살아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이전에 이름 자체가 사울이었습니다. 원래 큰 자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자기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뭐라고? 파울로스 작은 자로 왜 그렇게 바뀌게 되었습니까. 바탕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바탕이 살아있다는 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예수를 믿고 복음 안에서 거듭났지만 세상 밖에서 다혈질 적인 사람은 교회와도 다혈질입니다. 사업할 때 다혈질인 사람이 오락 할 때도 다혈질적인 것입니다. 예수 믿을 때도 다혈질적입니다.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하던 사람은 신앙생활을 해도 맺고 끊는 것이 확실합니다. 분명합니다. 집어치우면 집어치우고 하면하고,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기분 퍽퍽 쓰던 사람은 교회 와서도 퍽퍽 써요. 단 그것은 은혜를 받을 때 한해서입니다. 은혜 안 받으면 안 쓰죠. 그러나 세상에서 20원가지고 달달달 떨던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도 달달달 떨어요. 그런데 그 은혜를 받으면 그 사람이 안 떨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가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바울 자신이 자기를 아는 것보다 사도를 더 잘 알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바울은 온전하여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파수꾼을 몸에 세우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자고하지 않게 하려고, 나중에 깨닫는 것입니다. “아, 나로 하여금 자고하지. 스스로 교만해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파수꾼을 세워놓으셨구나.” 베델성서 교재인가요. 지금은 한물갔습니다. 만은 그게 70년대인가 나왔을 때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 교제가 그러니까 어느 정도냐면 베델 성서교제를 가지고 공부를 한다. 그러면 목회자들은 10만원을 내면 1주일 동안 호텔에서 먹여주고 재워줬습니다. 그 10만원 가지면 숙박비도 안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먹여주고, 재워주고, 교제주고, 간식주고 다 줘요.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각서를 하나 씁니다. 그것이 뭐냐면 끝나고 교회에 돌아가면 이 베델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교제가 하나에 2만원입니다. 200명 모이는 교회에 목회자가 가서 그것을 듣고 나오면 그러니까 거기에서 한 사람을 그렇게 훈련시키는데 그렇게 들것입니다. 호텔에서 묵으면서 말하자면 6일 동안 공부하니까 그런데 200명 모이는 교회다. 그리고 갔다 오면 200권이 팔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400만원입니다. 2000명이 모이는 교회는 4000만원입니다. 이것이 어마어마하게 전 세계적으로 퍼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쓴 목사님이 아주 젊은 목사였는데 그것을 쓰고 일약 스타덤에 올라선 것입니다. 왜? 너무너무 훌륭하게 잘 되어 있거든요. 그러나 각 교회에서 특별히 미국은 교육을 강조하는 교회니까 그 목사님을 모셔오기 위한 쟁탈전이 벌어졌습니다. 결국은 어느 교회에서 밤에 승용차를 가지고 가서 납치를 했어요. 그리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서 중직들이 통사정하면서 매달려서 우리 교회에 와서 제발 소신껏 글을 쓰고 가르질 수 있게 해 줄 것이니 우리 교회에 와서 교육을 담당하는 사역자로 일해 달라는 간청을 받고, 결국은 어느 한 교회로 낙찰이 되어서 갔습니다. 갔는데 그 목사님을 모셔가서 그 교회에서 하여튼 우리는 이 목사님을 최고로 대우한다. 그래서 이 목사님을 위해서 사택을 새로 지었어요. 그야말로 저 푸른 초원 위에다 하얀 화강암을 깎아서 저택을 지었어요. 그리고 이제 입주를 시켰어요. 그러니 이 목사님을 절지에 무명에서 말이죠. 완전히 교계에서 알아주는 저명인사가 되어서 그 교회 사택으로 들어갔어요. 그런데 한 일주일쯤 사는데 이 목사님이 건축업자를 불렀어요. 그래서 왜 그러시냐? 이 담장 옆에다 헌 막대기로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헛간 같은 것을 하나 짓고, 그리고 낡은 함석 같은 것으로 지붕을 만들어 달라고 그랬어요. 그랬더니 건축업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이것이 얼마를 들여서 이렇게 잘 지었는데 그 옆에다 개집 같은 것을 붙여 놓으면 이 집의 스타일이 뭐가 되느냐? 그러니까 그것은 개의치 말고, 내가 해 달라는 대로 해 달라고, 그러니까 할 수 없이 교회의 허락을 받아서 용도도 모르고 사람들은 이제 만들었어요. 그래서 부셔진 나무 같은 것으로 방을 하나 만들고, 그리고 그 벽과 천장을 함석, 구멍이 다 송송 뚫어지고, 새빨갛게 녹이 슨 그 함석을 두루두루 붙여 놓았습니다. 그리고 뭘 하나 그랬더니 밤이 되면 거기에 나와서 지푸라기 소여물 주는 짚, 그것을 쭉 깔아놓고 거기 앉아서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이유인 즉슨, 뭐냐 이 목사님이 어렸을 때에 머슴처럼 목동 생활을 하다가 예수를 알게 되었고,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집도 없고, 절도 없는 것이죠. 그리고 낮이면 짐승들을 치고, 밤이면 짐승들을 늦게까지 지키다가 새벽이면 그 건초더미 위에 누워서 잠을 청하게 되었는데 그때에 하늘을 쳐다보면 그 하늘이 뚫어져서 뚫어진 함석 사이도 밤하늘의 별들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 별빛을 받으면서 거기에서 무릎을 꿇고 어찌하든지 내 인생이 정말 하나님이 사용해주시는 인생이 되도록 그렇게 기도했죠. 그러면서 신앙생활을 해 와서 가난하게 신학을 하고, 그리고 목사가 되었는데 너무 화려한 저택에 살다보니까 이것이 옛날 생각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그는 그 함석으로 만든 헛간에 들어가서 건초더미 위에 엎드려서 기도하면서 이전에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만났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보잘것없는 그런 머슴이었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그 은혜들을 새기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사도에게 이런 연약한 것들을 주셨을 때에 사도는 그것이 없이 오히려 하나님을 더 잘 공경하리라고 생각했지만 모세를 보세요. 누가 그로 하여금 애굽에서 교육을 받게 만들었습니까. 누가 거기에서 신앙을 갖게끔 만들었습니까. 누가 유모의 젖을 먹게 만들었죠. 거기에서 모든 학술과 말을 통달하면서 40면을 보내게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항상 자기 속에 뭐냐면 내가 아니면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서 이 민족을 살리실 것이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이 모세의 생각이 맞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에 동의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언제까지? 자기가 얼마나 무가치한 인생인가 하는 것을 깊이 알 때까지 그러니까 그에게도 말하자면 이런 자고하지 못하게 하는 가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다 늙은 육신, 백발이 다 늘어지고 수염이 길게 자란 그런 노인으로서의 그 육체. 그 손에 들린 말라깽이 지팡이 하나, 그것을 바라보면서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게 되었죠.
사도를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자기를 확인시켜주셨어요. 그런데 오히려 어느 순간에 자기가 이 약한 것을 인해서 전에는 고통이더니 이것을 인해서 크게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그 약한 그것이 바로 나의 능력이 머무는 자리니라. 내가 거기에서 머문다. 내 능력이 거기에 있다. 그러니까 그다음부터 사도는 오히려 자기의 약한 것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왜? 그렇게 약하니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강함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오히려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저렇게 약한 몸으로 어떻게 그 위대한 복음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저렇게 약한 처지에서 저렇게 연약함 속에서, 저런 질병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오히려 이전에는 자기의 인생에 있어서 군더더기처럼 느껴졌고, 그것만 없으면 자기 인생이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은 그 고통이 오히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고,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을 가깝게 해주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구로 쓰임 받는 그런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끝까지 예수만 자랑했던 이유입니다. 왜? 자기를 볼 때에 자기 속에 오늘 12장 12절에 보면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다. 그가 사실 잘 참는 사람이었느냐면 잘 참는 사람이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참게 된 것이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그래서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참으신 그것을 보면서 참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 왜? 그를 통해서 온전히 그 능력을 나타내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사도가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철저하게 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자기를 통해서 강하여지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이 바뀌게 되자. 오히려 그로 하여금 고통스럽게 하던 그 문제는 오히려 크게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숙명입니까? 숙명적인 사실을 어떤 불행을 그냥 숙명적으로 받아들이는 포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생각할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믿음에 모든 일이 안 되는 일이 없는데 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굳게 믿어버리지 왜 이렇게 포기하는 것일까? 이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어요.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오히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오히려 이 약한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면 우리의 약한 것을 인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 가운데 머물면 우리가 오히려 참을성이 없고, 연약하고, 그리고 깨지기 쉬운 성품이고, 상처가 많고, 이런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귀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서 우리의 연약한 것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그것을 자랑할 때에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정의 정의는 뭐냐면 성공사례 발표하는 것이 간증이 아니라. 자기의 약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자기의 약함을 드러냄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그 약한 간증을 들으면서 그를 위하여 역사하신 그리스도가 얼마나 능력이 많으신가 하는 것을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것이 간증입니다.
오늘 이 바울은 자랑거리가 될 수 없는 것들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의 여러 약한 것에 대하여 나는 부득불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반드시 나의 약한 것을 인하여 이전에 나에게 내가 사단의 가시라고 생각했던 그 많은 것들을 오히려 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자랑한 그 사람이 또 무엇을 자랑했습니까. “내게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사도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하는 그것이 곧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왜? 약한 것에도 불구하고 그 약한 것에 메이지 않고 약한 것에 넘치도록 하나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게 만든 그것이 그 힘이 무엇인지를 사도가 약한 것을 자랑할 때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뭐냐면 그리스도 예수가 나를 완전케 하셨도다. 그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완전케 하셨도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나로 하여금 나를 완전케 하였도다. 그러니까 거기에서부터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슨 하나님의 은혜, 나는 미칠 수 없고, 나는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그러한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결점이 많고, 그렇게 사단의 가시가 내게 있어서 그래서 나에게 끊임없는 고통이 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들을 행하시는 그것을 보면서 사도는 오히려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할 수 있었습니다. 왜? 사도의 관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를 알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그 그리스도의 위대함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도의 소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도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만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을 가지고 후회하는 것을 소용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여러분들이 그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그리고 남에게는 없는 나에게 있어서 그것이 고통스러운 상처라고 생각하는 것들, 나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도 아니요. 나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내가 겪게 되는 이런 나의 약함들, 이런 것들을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그것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여러분들을 통해서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실 기회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믿습니까? 기회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역설적인 이야기 이지만 사도바울이 이 사단의 가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시는 능력의 힘이 크신, 자기는 질그릇과 같지만 자기는 비록 죄인과 같지만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드러내시는 그 놀라운 은혜를 바라보면서 오히려 이것을 인하여 자기가 하나님 앞에 그 능력이 온전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면서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는 이 고통이 오히려 그에게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났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아니면 풀 수 없는 한계상황에서 몸부림 쳤던 사람들입니다. 증거를 댈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났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면 풀 수 없는 한계 속에서 몸부림 쳤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아, 나는 이 짐이 없으면 나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나아갈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너무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시죠.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9절 이전까지 보기만 해도,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사단이 주고 간 바울의 육체 속에 있는 가시였는데 9절가지 읽고 난 다음에 깨닫게 되는 것은 뭐냐면 사단의 가시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 지는 것이구나. 야, 정말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 지는 것이구나. 그래서 자기의 부족을 알고,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소망이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정말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모두 자기가 하나님의 일꾼에 합당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언제나 자기의식 속에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일꾼 되기에 이렇게 부적합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나님의 일꾼으로서 살아갈 수 있고,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에 적합하지 않는데 하나님을 섬길 수 있고, 심지어는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하기에 부적합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여겨주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 때에 그 때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 그 능력을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싶어도 교만할 시간이 없습니다. 자기를 과대평가 하고 싶어도 과대평가할만한 건더기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없이 낮아지는 가운데 낮아진 우리를 통해서 오히려 온전해지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결점이나, 상처 그 자체가 문제가 되어서 불행해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약점이나 타고난 결점이나 그런 환경 때문에 그래서 불행해지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불행의 원인은 그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삶 속에 머물지 아니한 것이 불행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서 우리들은 다시 한 번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오히려 이렇게 세 번이나 간구하면서도 응답이 없는 것을 인하여 낙심하지 아니하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이 문제를 인하여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아내고, 고통에 대한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그러면서 오히려 이제 자기의 고통을 직시하던 그 눈이 그 고통을 뛰어넘어서 나를 온전케 하실 수 있는 단 하나의 비결,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머무는 것, 이것에 대한 사모함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동행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와 함께 머무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그것과 바꿀 수 없습니다. 왜? 그것만 하나님께서 가지고 가시고 나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성질 급하고 못돼먹고, 교만하고, 잘난 채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보지 못하고 영혼을 사랑할 줄 모르는 그 옛날의 자기 자신의 아집 덩어리 밖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 사람은 여기에서 믿음의 비밀을 깊이 채득하면서 오히려 자기의 약한 것을 수많은 사람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들이 자기의 약함을 드러내고, 자기의 약함을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자기의 약함을 떠들고 돌아다니면서도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자기의 약함을 모두 알게 될 때조차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삶을 통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울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스스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예수 믿고 나서 이전에 있던 많은 불행들이 행복으로 바뀌고 가난하던 것들이 부요함으로 바뀌고 이전의 못된 성품들이 온유하고 좋은 성품으로 바뀐 것, 그것을 자랑함으로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려고 합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당신을 바라면서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거룩하게 만드셔요. 새롭게 하시죠. 변화시키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믿습니까? 변화시키십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크고, 더 놀라운 것은 그런 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더 큰 것을 사도는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능력으로 자신의 인생 가운데 임하신 그리스도 예수가 살아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성질 급하고 말하자면 스데반이 돌에 맞으며 피가 터지며 죽는 그 장면에서 증인이 되어서 옷을 지키고 있던 그 사람이 나중에는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으로 사랑은 언제나 오래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그러면서 사랑 장을 쓰는 사람으로까지 변화된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를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의 상처와 자기의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을 돌아보며 부여안고, 슬퍼한 것은 그리스도를 거절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히려 그 문제만은 그 속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더 큰 능력을 보여주셔야만 된다. 라고 그러한 절박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각성의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를 이렇게 필요로 하고 그리고 그 그리스도가 내게 능력으로 머무는 것이 정말 우리에게 얼마나 절박한 소원이고, 그리고 그리함으로만 이 많은 약점과 결점과, 불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여러분의 약함 가운데 머물러서 어디서든지 다니면서 자기의 약함을 떳떳하게 자랑하고 그래서 자기의 약함 때문에 오히려 그리스도의 강함이 드러나는 그러한 현장이 바로 여러분 자신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