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신대 섬김의 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
녹취자: 박지성
하나님께서는 두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가 그것입니다. 천상의 세계에는 당신이 직접 통치하시며 천사들의 섬김을 받으셨고 지상에는 당신을 닮은 존재인 인간을 창조하셔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지성으로 이해하고 의지로써 그 이해한 바를 따라 살 수 있도록 영혼의 능력을 주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 일은 원래 하나님이 직접 하셔야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인간은 모든 피조물들 위에 뛰어난 탁월한 영혼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영혼으로써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 속에 이 모든 만물들과 함께 상호교통을 이루면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은 창조와 시간, 이 문제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육일 째에 모든 창조를 끝내시는 기록이 보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루하루 창조하실 때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바이아레 엘로힘 키토브”라고 후렴구처럼 반복되던 구절이 육일 째 와서는 히브리어의 “메오드”라는 부사를 동반하며 심히 좋았더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뭔가 하나님이 새로운 것을 보신 것처럼 좋았더라도 아니고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시는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칫하면 과연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분이신가라는 의심을 갖게 됩니다. 이제 여기에서 “아이떼르니 따스” 즉 영혼과 “템퍼랄리타스” 시간성의 문제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매우 미묘한 대목이고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창조 세계와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해야하는가라는 심오한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질문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판데이즘이나 엔판데이즘 쪽으로 가게 되고 또 자칫 잘못하면 데이즘, 이신론이나 혹은 보네프의 성숙한 세계관 같은 쪽으로 가게 될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시면서 이 만물가운데에 계시며 이 만물가운데 충만하게 계시면서도 또한 이 모든 만물가운데 모든 만물을 초월하여 계시다는 사실을 훌륭하게 진술해서 이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할 것인가라는 아주 중대한 신학적인 문제가 우리 앞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많은 담론가운데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을 여러분들에게 오늘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자, 그러면 한번 우리의 마음을 열고 사유해봅시다. 하나님은 이 모든 창조세계를 시간 속에 만드시기 전에 이미 당신의 지성 안에서 이 모든 창조세계에 대한 완전한 지식과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으며 의지적으로는 그 계획을 완벽하게 실행에 옮기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이 지적한 바와 같이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와 한없는 능력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현재, 과거, 미래라는 시간의 구분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지성 안에는 일어날 계획들이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과 함께 그 계획들이 전개가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게는 전개라는 말조차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을 초월해서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의 지성 안에 있는 것들이 시간세계 속에 새롭게 펼쳐진다기보다는 이미 하나님의 지성 안에 모두 들어와 있는 것들이 현실화 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것이 하나님에게 새로운 것 일수 있겠느냐는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성경도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혹은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근본적으로는 틀린 언급입니다. 왜냐면 거기서 말하는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의 끝없는 연장에 불과한 것이고 사실 하나님의 영원은 그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영원 그 자체이시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아이떼르니 따스” 영원을 이야기 할 때 저는 이것을 본체적 영원과 효과적 영원 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야한다고 제안을 하는 것입니다. 이 본체적 영원이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본체적 영원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래서 영원 그 자체는 시간의 길이로 잴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이라고는 것입니다.
이 영원에 대한 인류의 생각은 두 가지 뿐이었습니다. 하나는 선적인 영원이고 또 하나는 원적인 영원입니다. 선적인 영원은 끊임없이 긴 시간의 연장과 길이로써 계속되는 그런 종류의 영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원관은 선적영원인가 아니면 원적 영원인가 원적 영원은 윤회로서의 끊임없는 회귀하는 영원입니다. 기독교의 영원은 직선적인 영원인가 아니면 회기적인 원적영원인가라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영원은 직선적 영원관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영원의 저쪽 오메가의 끝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선적인 영원이 되겠지만 그러나 시작부터 이야기한다면 그 영원 자체를 말해야하는데 그 영원 자체는 선도 아니고 원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초월한 것입니다. 선적이다 원적이다 하는 이 모든 것은 지금 우리의 이 차원에서 시간을 이야기하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 안에는 무한한 차원속의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이해가 분명하지 않으면 이런 문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영원에 대한 대개념으로서의 대개념은 존재와 관련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아닌 모든 존재들은 시간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소멸함으로써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 이외의 모든 존재들이 시간 세계 안에서 자기를 드러내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영원자체이신 하나님은 그런 모든 시간을 초월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 그 과거라는 시간은 이미 흘러가 버렸기 때문에 누릴 수가 없고 미래라는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누릴 수가 없으며 방막의 현재만을 누리고 그 방막의 현재를 끊임없이 과거로 흘려보내면서 순간순간 존재하는 그 것이 바로 하나님 이외의 시간 속에 있는 모든 사물들입니다. 인간의 육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을 초월해서 자신의 전 존재를 한꺼번에 영원히 누리신다는 점에서 이 하나님의 존재는 시간세계 안에 있는 모든 존재와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체적인 영원입니다.
효과적인 영원이라고 제가 부르는 것은 영원히 계속되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영원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것을 영원하도록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영원하게 되는 것, 즉 하나님 자신이 그 사물을 영원히 존재하도록 덕을 입하시기 때문에 영원히 존재하게 되는 것을 가리켜서 효과적 영원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점에 있어서 이 두 영원사이의 구별을 분명하게 하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숨마페올로지 카이에서 이 영원을 아우구스티누스를 해결하는 가운데 아이붐이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영원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제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말하기를 이런 의미의 영원, 즉 “아이붐”의 영원은 시간과 영원 그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종류의 영원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 효과적인 영원이 시간에 속박이 되느냐하는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한 권씩 선물로 받게 될 그 책 속에서 이 문제를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그 효과적인 영원이 어떤 것이냐면 예를 들어서 천국과 같은 것입니다. 천국에 있는 성도들 그리고 천국의 성도들과 함께 있게 될 어떤 영원한 사물들. 이런 것들이 바로 효과적인 영원입니다. 그 한 예로 인간의 영혼은 육체는 사멸하지만 인간의 영혼은 불멸합니다. 그리고 영화 시에 입게 될 인간의 육체도 불멸할 몸이 되어서 인간은 영육 간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불멸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질문이 제기가 됩니다. 어떻게 해서 이 지상세계 속에서는 끊임없이 소멸해야할 존재인데 그 세계에서는 소멸하지 않고 계속해서 존재하는 영원한 존재가 될 것인가라는 두 가지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영원세계 속에는 시간이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또다시 제기가 됩니다. 우선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말하자면 어떻게 해서 그 세계에서는 지상에서는 유한하고 소멸되던 사물이 거기에서는 영원할 수 있겠는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것을 덕 입히시기 때문입니다. 원래 처음부터 인간의 존재가 그렇게 불멸하지 않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영혼과 함께 불멸할 수 있는 몸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창조되었지만 불멸하지 않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지만 불멸하도록 창조되지도 않았고 또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지만 죄를 짓지 않도록 창조되진 않았습니다. 그런 가변성 때문에 인간은 결국 타락하고 그 타락으로 말미암아서 이제 이 모든 인간의 영혼과 피조세계 속에는 죽음이 밀물처럼 들어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피조세계가 시간성 속에서 잠식되어가는 그런 불행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의 질문은 그 천국, 영원한 세계 안에서는 과연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가 됩니다. 저는 시간이 있다고 봐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지상에서의 시간이 마모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천국에서의 시간은 형성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가장 탁월하게 설명했던 사람이 18세기의 미국의 신학자인 조나단 에드워즈입니다. 그의 방대한 저작은 바로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이 새로운 해석, 교부들과 개혁주의 신학을 전승하면서도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부여함으로써 역동성을 부여했습니다. 이것을 다 말씀드릴 시간은 없습니다만 핵심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천국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점증한다는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구속의 완성과 함께 점증하는 영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천상의 세계에서 실증이라는 것이 존재합니까? 안합니까? 그러면 천사의 타락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하나님을 열렬히 사랑하던 천사가 칼을 들고 하나님의 보좌에 도전을 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정신의 대역을 이렇게 그린다면 여기는 사랑의 감정이고 여기는 미움의 감정이라면 이 사랑의 감정과 미움의 감정의 대역, 중간 지점이 실증입니다. 이 사랑의 대역에서는 이 존재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고 미움의 대역에서는 어떤 이유든지 추함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추함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뭔가 판단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 사이를 대역을 오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감정의 체계입니다. 인간 감정의 체계는 의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사이가 실증의 대역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지상세계에도 실증이 존재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가 그 찬란한 창조의 영광 속에서도 결국은 하나님 앞에 범죄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열렬히 하나님을 사랑하다 어느 순간에 배역하는 일은 없습니다. 반드시 타락하기 전에는 은혜가 식는 일이 먼저 있고 죄에 대한 저항력과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고갈된 다음에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 성령 충만하게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구속의 완성과 함께 이루실 그 나라에서는 이 하나님의 영광이 점증한다고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 근거는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천국에서도 모든 성도들이 시간을 초월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왜냐면 만약에 시간을 초월한다면 그러면 이것이 존재론적으로 삼위하나님과 같이 되어버립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어느 신학교에서 조직신학교재를 만들었는데 보니까 천지창조를 시간으로 그래프를 그려놓고 첫째 날 이전을 알파, 그리고 심판 이후를 오메가라고 그려놓고 알파 그 안쪽에다가 영원세계 속에서 영물들의 창조라고 적어놨습니다. 그래서 내가 정신 나간 교과서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면 아주 복잡한 문제가 생겨나게 됩니다. 성부 홀로 계셨습니다. 그 성부에게서 성자가 낳으셨습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에게서 성령이 발출하십니다. 그랬다면 논리적으로 성부 혼자 계시던 때가 있었고 성부와 성자가 계시던 때가 있었고 마지막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함께 계시던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고 말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시간세계 속에서의 사고방식이고 영원 속에서는 시간이 없기 때문에 성부에게서 성자가 낳으셨지만 성자 없이 “성부가 홀로 계시던 때”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 모든 영물들이 존재했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중대한 모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이냐.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완전히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 차원의 평면에서 같은 크기의 사각형 두 개가 포개어 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겠지요? 왜냐면 선의 정의 자체가 굵기와 부피가 없는 점의 무한한 연결입니다. 그 무한소 위에 무한소의 선이 올라갔을 때 그것은 무한소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결국은 이차원의 평면에서 같은 크기의 사각형은 다른 사각형을 얹을 수 있다 없다? 없다가 됩니다. 그러나 삼차원에서는 가능합니다. 두 개가 얹어 있습니다. 차원이 다르면 생각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천국에 시간이 없다고 한다면 그런 식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간이라는 것은 시간 자체로만은 파악이 안 됩니다. 사물이 있어야지만 시간이 파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창조세계 속에서의 시간의 도입은 창조와 함께 도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세계가 영원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이 시간세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지상세계에서의 시간은 있음이 끝나고 없음에서 있음이 생겨나고 있음이 사라지고 없음으로 이어지고 하는 그 소멸의 과정을 통해서 시간이 측정이 됩니다. 그러나 천상에서는 영원하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사람은 천사들도 언젠가는 하나님이 다 정리해서 없애버리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지만 천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지상세계에서는 사물들이 있음을 상실하면서 소멸되어가는 가운데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보여주지만 천상은 영원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천상에서는 마모됨으로써 시간이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형성됨으로써 시간이 측정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자신에 대한 계시를 천국에 있는 백성들에게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느끼는 천국에서의 그 기쁨이 결국은 “인텔렉츄얼 유다이 모니즘” 지적인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지적인 행복.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 대해서 매순간 새롭게 계시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의 영혼은 그 하나님의 찬란한 계시에 접하면서 새로운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의 전달과 함께 인간의 온 영혼은 기쁨으로 전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지식의 전달과 함께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그 삼위의 영광을 천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통해 날마다 새롭게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충만한 영광의 점증을 통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당신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발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매순간 새로운 지식의 세계와 점증하는 영광의 세계 속에서 신자들이 한없는 행복을 느끼게 되는 세상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깊이 회개하고 은혜만 받아도 사람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고 얼굴에 용모까지 변하는데 하물며 천상에서 아무 것도 방해하는 죄의 거침이 없이 그 점증하는 계시와 점증하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온 세계가 가득하게 될 때 신자들이 그 안에서 행복해지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구도를 가지고 지옥이 설명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면역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똑같은 일이 계속 반복이 되면 그러려니 하고 살아갑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공부를 세게 시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많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기독교사상과 지식이 있는 목회를 하고 싶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가하는 설교와 내가 쓰는 책이 150년 뒤에도 읽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비로소 제가 깨닫는 것은 뭐냐면 그렇게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나의 이 지난날의 공부가 너무 빈약했다 물론 저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왔습니다. 신대원 3년을 살았는데 졸업하고 나서 제가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부끄러운 게 너무 많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1학년을 입학시켜줘도 그 이상을 살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랬는데 후에 반성을 하고보니 열심히는 살았습니다. 제가 제일 혐오하던 학생들이 풀밭에 앉아가지고 새우깡 먹으면서 담임목사 욕하는 전도사들이었습니다. 그럴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랬는데 지나고 보니 그 공부는 그렇게 열심히 할 필요가 없는 공부였는데 너무 열심히 했습니다. 또 어떤 것은 그것은 더 자신을 쏟아부었어야했는데 혹은 시간이 없어서 혹은 여러 가지 일에 밀려서 못했습니다. 신대원 3년 동안 저는 학교와 교회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집도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뼈저리게 후회가 됩니다. 어느 정도 공부해야하냐면 신대원에서부터 시작해서 목회하기 전까지 목숨이 위태로울 정로까지 한번쯤 공부했다가 나와야합니다. 건강을 해쳐서 생명에 위험이 느껴질 지경까지 한번 들어갔다 나와야합니다. 길면 10년 정도 짧으면 5년 정도 도저히 그것도 할 수 없으면 최소한 3년 정도 건강에 심각한 이상이 생길 정도까지 공부에 몰입했다가 나와야지만 눈이 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세계는 점증하는 영광의 세계입니다. 지옥은 똑같이 설명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고통에 대한 면역이라는 것이 있는데 지옥에서는 그런 고통의 면역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순간 새로운 공포 그리고 새로운 두려움과 전혀 익숙해지지 않는 아주 새로운 고통 속으로 매순간 영원히 들어가게 되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천국과 똑같이 하나님 당신 자신이 보여주시는 당신 스스로에 대한 계시를 통해서 이런 일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있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이 한없는 기쁨을 가져다주지만 지옥에 있는 백성들을 하나님의 엄위하심이 드러날 때마다 그들은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공포에 떨게 됩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성품을 보여주시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점증하는 계시는 영원히 지속이 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충분히 보여주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무한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거기가 바로 영원세계입니다. 거기에서도 인간은 먹고 입고 마시는 것과는 상관이 없는 삶을 살지 모르지만 우리의 지성은 그대로 사용이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계시의 빛을 오성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지성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존재와 이런 영원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이러한 존재와 시간의 관계가 우리에게 화두로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은 이렇게 여기에 사람이 서 있으면 과거, 현재, 미래 또 더 미래의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T라는 시간의 축 속에서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과거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데 미래는 우리들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와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인과관계의 그래프로 되어있는 이것들이 확 우겨서 여기 들어가게 되면 여기에는 마치 거미줄처럼 복잡한 사물들의 인과관계만 평면에 남게 됩니다. 이것을 모두 아시는 그것이 하나님의 예지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렇게 시간 속에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것을 가리켜서 예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예정의 개념도 그렇게 어려운 개념이 아닙니다. 인과관계가 딱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이런 식으로 시간을 초월해서 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에게서도 이런 종류의 앎의 방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면 과거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래서 현재로부터 시작을 해서 미래에까지는 이런 시간의 축으로 인식이 되지만 현재라는 시간이 지나서 과거 속으로 들어가게 돼버리면 기억은 평면의 상태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이 머릿속에는 10년 전의 기억 20년 전의 기억 1년 전의 기억, 1개월 전의 기억, 한 시간 전의 기억, 10초 전의 기억까지 한꺼번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평면 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10년 전의 기억을 회상하는데 1년 전의 기억을 회상하는 것의 10배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수많은 기억들이 평면 속에 존재하면서 물처럼 출렁거리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그것들이 줄을 서면서 우리 속에서 그 기억이 우리의 뇌 속으로 마음속으로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학문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억을 많이 저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미 주신 우리의 기억들을 거기에서 이끌어 내어서 사물의 인과관계들을 파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학문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학문과 공부의 마지막 목표는 결국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식의 세계를 이야기할 때 세 분야를 이야기합니다. 피지카-자연학, 로기카-논리학 그리고 에티카-윤리학입니다. 그래서 자연학을 통해서 모든 사물들을 이해하고 그것들의 논리를 세워서 마지막에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그것을 설정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기독교는 그러한 모든 인간들의 고민을 한꺼번에 싸안고 그 모든 자연학의 기초가 하나님의 창조에 있으며 그 모든 논리의 기초가 하나님의 지성 속에 있으며 그 모든 윤리의 목표가 하나님이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그 목적에 부합하며 사는 데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오늘은 이 기독교 신학이 그런 우주적인 장엄함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주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그런 신념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문제를 가지고 근본적으로 깊이 고뇌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처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공부를 안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사유의 체계 자체가 아주 졸렬하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인생을 살아도 교회 와서 박수치면서 찬송이나 불러야지 하나님이 겨우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교회 밖에 뛰쳐나가면 완전히 다른 삶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서 고민하는데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 기독교 진리의 어떤 근본적인 문제를 붙들고 처절하게 씨름하는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지성 안에 모든 창조세계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이 시간세계 속에 펼쳐졌을 때 하나님 자신이 깜짝 놀라면서 감동을 받으셨을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미신적인 신관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이 이 세계에 대한 모든 창조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그분이 그 창조의 계획에 대해서 아시는 것은 계획 따로 실행 따로 알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경우에는 건물을 지으려고 도면을 다 그려놓아도 마지막에 이것이 완성될 때 어떤 모습이 될 것인가는 모릅니다. 상상만 할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완벽하게 시간세계 속에서 전개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당신의 지성 안에 가지고 있는 계획이 시간세계 속에 실현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확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미묘한 점에 대해서 교부 중 한 사람인 안셀무스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에스퀴뻬세쿤둔 누스투룸 센숨 에트논 에스세쿤둠 뚬 에떼닌 뚬 뛰레스삐기스 노스 미제로스 노스 센티무스 미제르 꼬르디스 에팩툼 뚜 논센티스 아펙툼” “진실로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자비로우시지만 당신 자신의 경험에 따르면 자비로우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우리가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을 보실 때 우리는 당신의 자비의 효과를 느끼나 당신은 어떠한 정동도 느끼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은 인간의 모든 존재,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이렇게 새로운 사물을 보고 충격을 받거나 놀라고 분노하거나 기뻐 뛰거나 하는 그런 것을 하나님의 존재에 적용할 수 없지만 그 대신 하나님은 인간들이 끊임없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하나님의 존재의 효과를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여기에 있는 모든 식물들이나 인간들이 태양과 접촉하지는 않지만 태양으로부터 방사되는 그 빛에 의해서 살기도 하고 생명을 유지하기도 하고 열매를 맺기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존재의 효과를 이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피조세계 속에 하나님이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알렉산더의 클레멘트”나 “막시무스”같은 동방교부들은 하나님에 관한 진술을 할 때에 페올로기아의 언어와 오이코노미아의 언어를 철저히 구분해서 제시하게 됩니다. 그것은 페올로기아의 언어로 말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묘사되실 수 없는 분이시지만 오이코노미아의 언어로 본다면 하나님은 악한 자들에게는 의로우신 하나님, 원한 맺힌 사람들에게는 복수하시는 하나님,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에게는 긍휼히 여기는 하나님 등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프리즘이 있는데 빛이 들어올 때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들어오지만 프리즘을 통과하고 나면 빨주노초파남보로 찬란하게 분광이 일어나듯이 그러면 이 햇빛 속에는 이 빨강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없었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창조세계 안에 당신의 놀라운 존재의 효과를 찬란하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서 열심히 공부하지만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신학교를 다니지만 10년 후에 만나면 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를 착실하게 잘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계속 교회와 분쟁하면서 이교회 저 교회 쫒기며 다니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직업을 아예 바꿔버리는 사람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게 다양한 층차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안에 그 모든 계획을 가지고 계셔도 그것이 시간세계 속에 전개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그것을 통해서 인간들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시간 속에서 그것이 전개되지 않는다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전개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고 인간들이 자신의 분수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게 되면서 아직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미래의 시간들을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드려야 하겠는가라는 도전을 받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의 자세는 매순간 새롭게 전개되는 그 시간의 궤적 속에서 우리는 마치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모든 완전한 계획이 우리가 완전히 자신을 드리는 최대의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이 완전히 드러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미래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게 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완전하고 아름다운 계획이 시간세계 안에서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이 헌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획이 시간세계 안에서 펼쳐지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에게는 그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효과가 전달이 되어서 우리에게는 행복이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들이 매일 매일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제가 가르친 여러 학생들 가운데 많은 학생들 가운데 여러 명이 목회 사역의 꽃을 피워보지 못하고 신학교 시절에 죽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준비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도대체 이 신학교 과정 속에서 매일매일 살면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전개되는 것과 그 무대가 목회라는 현장으로 옮겨져서 전개되는 것 사이의 무대가 틀릴 뿐이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는 그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을 시간세계 안에 드러내는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 학생들은 목회의 준비를 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목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살았던 그 삶 자체가 하나님 앞에 그대로 올려진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때 이 시간성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공간은 우리에게 사랑할 대상들을 끊임없이 제공하지만 시간은 그 대상들을 끊임없이 빼앗아 감으로써 우리의 사랑이 목적을 잃어버린 사랑이 되게 만들어 버립니다. 여기에 인간의 비참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간이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모든 것들을 우리들이 사랑해도 되는 것인 것처럼 생각하면 우리는 매우 비참한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시간 속에서 소멸될 수 없는 것. 공간속에서 사랑하라고 제시되지 않아도 시간 속에서 소멸될 수 없는 영원한 가치 있는 존재, 그 하나님을 불멸하시는 그 하나님을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면서 살아가게 될 때 우리는 시간세계 속에 영원의 계획이 드러나는 것을 기뻐하게 되고 시간세계 안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는 일들이 끝났을 그때에 우리는 상실이 아니라 더 완전한 영원의 세계 속에 들어가 점증하는 영광에 들어가게 된다는 소망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 속에서 살아가야합니다.
(찬송) 주의 영광은 세계 위에
그러면서 지금부터 하나님을 인하여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공간과 시간 속에 제시되는 가변적인 것들이 아니라 불변하시는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 모든 만물 가운데 계시지만 그러나 어디에도 계시지 않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그분을 깊이 사랑하고 아침마다 새롭게 이 진리를 통해서 그분을 깨달아가는 기쁨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잇대어 사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회 사역은 바로 그렇게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을 깨우고 영원을 향한 존재인 인간이 누구이고 영원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지혜자가 되게 하기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역이 이 목회자의 사역입니다. 그런 구도의 길을 매일 매일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이 우리를 혼자 버려두시면 그 길을 갈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그렇게 갈수 없는 그 길을 갈수 있도록 십자가의 피로 구속해 주시고 십자가의 피로 구속해 주셔도 그 길을 알아도 그렇게 살 힘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늘을 열고 성령의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 지혜를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능력과 사랑과 생명 속에서 걸어가신 그리스도 예수의 모본을 보면서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충실하게 그 한분만을 사랑하고 그분의 뒤를 전심으로 따라갈 때 연약한 성도들이 진리를 따라 사는 것이 무엇이고 그 진리를 따라 살 때에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뵈올 수 없으니 우리 목회자를 통해 보면서 자신도 추루한 이 세상 사랑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게끔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한순간에 우리를 찬란한 불꽃처럼 이 어두운 세상 속에 산화시킬 그날을 기다리면서 이 광야와 같은 신학의 시기를 지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