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처럼
또 유대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 2:6)
녹취자 : 김세나
오늘 우리들이 이 본문은 원래 미가서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이 성경 구절이 인용되게 된 것은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찾아 왔기 때문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찾아 온 이유는 동방에서 별을 보고 그들이 예루살렘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마 별빛이 그들을 인도해 오다가 예루살렘 가까이 왔을 때에 별빛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별빛이 사라지고 그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아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다고 했으니까 틀림없이 이들 가운데 이 예수님이 태어나시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라 그 생각을 하고 예루살렘 성에 와서 그래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이가 어디서 태어나시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이렇게 물어보게 되자 당시 그 지역의 왕이었던 헤롯과 온 성에 있는 사람들이 소동이 났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큰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헤롯과 그의 일당들은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까 자신들의 왕권의 위협을 느꼈을 것이고, 백성들이 소동을 느낀 것은 바로 그렇게 태어날 유대인의 왕이 자기들이 오랫동안 기다려 오던 메시야 였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소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던 메시야는 전혀 다른 메시야였습니다. 즉,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이 세상에 와서 자신들이 압제 받고 있는 이 로마의 포각에서 자신들을 구원해 줄 정치적인 메시야라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래서 그 성에 큰 소동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것이 궁금하자 이제 헤롯은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을 불러서 너희 가운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시는 분에 대한 예언이 있느냐.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시느냐. 이렇게 물었을 때, 성경을 연구하던 박사들이 미가서 5장 2절을 인용하면서,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모든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한 목자가 태어나리라고 하는 미가서의 예언을 말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이 거론하고 있는 배경입니다.
이렇게 선지자 미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시기 훨씬 전에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예고해 주셨습니다. 실제로 이 미가서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지만, 그의 근본은 태초요, 상권이라고 덧붙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지만 그러나 그분의 근본이 하나님과 본체이시며 사람과 같은 본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 보여 주었습니다.
미가 선지자가 메시야 오심에 대해서 성경에서 예언한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우선 첫째는 메시야가 태어나실 것이라고 하는 예언이었습니다. 메시야는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자의 뜻이고,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고 어떤 임무를 향하여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름부음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가던 가장 중요한 직분인 세 가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행하던 의식이었습니다. 이 왕과 선지자,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 주실 때에 하나님이 계획하셨던 그 선택의 계획을 따라서 살도록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일꾼들이었습니다. 왕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고, 주님의 통치가 구현되도록 그 백성들을 치리하여야 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대신 제사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으며, 선지자는 주님의 계시의 말씀을 가지고 와서 그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고 그 마음을 보여 줌으로 그들이 잘못된 길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순종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당신 안에 가지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죠. 바로 이렇게 메시야는 이 세 가지 직무를 모두 수행할 분으로 구약에서 지정되었고, 그러므로 이 메시야는 한편으로는 왕처럼 하나님을 대신해서 언약의 백성들을 다스리시고, 그들에게 진리를 일깨우고, 그들의 죄를 위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 그 세 가지 기능을 함께 가지고 이 세상에 오기로 예고 되었습니다. 왜 이러한 메시야가 이 세상에 필요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이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이런 메시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죄가 들어온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와 모든 좋은 것들을 파괴해 버렸고 주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잘 돌보도록 사명을 부여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가장 나쁘게 망가뜨린 장본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망가뜨린 인간을 커다란 형벌로 벌하시고, 영원한 죽음으로 그를 몰아넣으셔야 마땅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이 세상을 창조한 목적대로 돌아가게 하고 인간으로 본래의 섬김을 다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작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구원을 위한 선택으로 나타난 것이죠.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고통스러운 상태로부터 구출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곤란을 당하거나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누군가가 도와주어서 그 어려움에서 건져주면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구출되었다고 말하고 자기를 그렇게 도와준 사람은 구원자요 구출자가 되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이 구원의 개념은 우리가 신앙 밖에서 사용하는 이 구원의 개념하고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가 구원의 개념을 이야기 할 때는 대부분 이 땅에 있는 자원의 결핍이나 혹은 강력한 고통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것을 포함하고 있지만, 이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죠. 그래서 인간이 이 세상에 있는 물질의 부족이나 어떤 고통으로부터 건져냄을 받는 것도 구원이지만, 성경은 그러한 고통과 괴로움을 가져다 주었던 보다더 궁극적인 원인으로부터 구출받는 것을 성경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구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고 있는 모든 고통과 괴로움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곤고함과 분쟁, 시기와 전쟁, 그리고 이 모든 다툼과 피곤한 모든 이 세상에서의 일생사의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죄입니다.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결단내었고, 그 죄는 우리 영혼의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경험하는 육신의 질병과 인생의 단명함, 그리고 우리들이 느끼는 마음의 많은 고통과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의 결핍으로부터 오는 모든 괴로움과 불균등 이 모든 것들은 바로 이 죄라고 하는 질병에 걸린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의 질병의 모든 근원이 되고 있는 이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형식적으로 남아있는 이 외관상의 고통을 해결해 보려고 해도 여전히 계속해서 그 뿌리는 살아있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은 아마 어렸을 때에 고약을 발라 보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꼭 송진처럼 생기기도 하고 코올타로처럼 생긴 시커먼 것을 그 곪은 것에다가 붙이고 다니면 그 속에서 고름이 빠져 나오고 부기가 내리는 그 고약 말입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그런 고약으로 우리의 종기를 다스려 왔습니다. 그런데 종기의 어려움은 뭐냐 하면 겉으로 약을 발라서 잘 치료해도 저 깊은 곳까지 곪아있는 뿌리가 있기 때문에 겉이 치료되는 대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곪기 시작해서 우리에게 고통을 많이 가져다 줍니다.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는 이 죽은 우리에게 그런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이죠. 그래서 거기에서 수많은 고통과 악들이 생겨나게 하고, 그것들이 우리 인간을 곤고하게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 모든 인생의 고통과 괴로움의 궁극적인 원인이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의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상에 있는 자원들을 뺏고 빼앗기는 혈투를 벌입니다. 그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그들이 인간의 고통스러운 증상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그러나 실제로 그 모든 것들을 소유한 사람들 가운데 아무도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처럼 이 지상에 있는 자원은 우리의 인생의 고통과 악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면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 명백해 집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만물들 땅에 기어다니는 짐승들과 벌레들, 하늘에 나는 새와 바다의 고기들, 이 땅에 있는 풀과 나무와 많은 꽃들은 하나님이 이 땅에서 만들어지게끔 하나님이 섭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있는 것은 모두 이 땅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자원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몸은 이 세상에 있는 흙으로 만들어 졌지만, 영혼은 하늘로부터 불어내어진 하나님의 영의 기운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땅에 있는 자원으로부터 공급을 받아야 자기를 유지하고 동시에 똑같이 하늘에 있는 자원을 공급 받아야만 참으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끔 그렇게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죠.
이 땅에 있는 짐승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돼지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 있습니까. 소가 자신의 삶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다가 자살했다는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한 끼 먹고 배 부르면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도저히 그렇게는 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영혼은 하늘로부터 육체는 땅으로부터 빚어졌기 때문에 하늘 자원으로 만도 살수가 없고 땅의 자원으로만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땅의 자원도 필요하고, 하늘의 자원도 필요합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하늘의 자원은 끊겨 버렸습니다. 오직 이 땅에 있는 자원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탐욕과 경쟁심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을 긁어모았지만, 누구도 그것 때문에 행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돈을 많이 번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돈도 조금씩 힘들게 벌 때 재미있지 저절로 한 꺼번에 많이씩 돈이 벌리면 돈을 버는 재미가 하나도 없대요. 진짜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힘들게 벌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싸이는 게 그게 인생이 돈을 버는 재미를 거기에서 느끼게 만들지 뭐 한번에 투자를 했더니 집에서 왔다갔다 하고 골프나 치는데, 매달 뭐 엄청난 돈이 통장에 쌓인다. 주가가 올라서 갑자기 부자가 되고 저절로 재산이 늘어난다라고 하면 재미가 하나도 없다는 거죠.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만을 가지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들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상황에서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지만, 부유하고 여유가 있는 곳에서 많은 정신병과 자기 파괴적 현상, 자살 같은 것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인간은 이런 자원만을 가지고는 살 수가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구원은 바로 이 두 가지로부터의 이 두 가지의 결핍으로부터 구원받는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구원이 되는 것이죠.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가리켜서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회개하고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하나되는 것, 그래서 영혼이 영이신 하나님과 다시 연결되고 거기로부터 이제껏까지 한번도 받아본 적이 없던 하늘나라의 자원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는 그래서 거기에서 위로와 용기와 기쁨을 얻고 살아가는 삶, 예전에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부족하면 나가서 혼자 열심히 일하고 다른 사람과 치열하게 경쟁해야 했고, 그런 공정한 방법으로 도저히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손에 넣을 수 없으면 불법한 방법으로 게임을 해서 그러한 이 세상의 자원을 손에 넣으려고 했고 그래서 죄도 지었습니다.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열렸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것이 영원에 속한 것이든 혹은 우리의 육신에 속한 것이든 하늘의 자원이든 이 땅에 있는 자원이든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도록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영생의 통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죠. 마음이 낙심이 되고 깊이 좌절할 때는 주님께서 넘치는 위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런 위로와 기쁨은 이 세상에 있는 물질로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기쁨과 하늘의 자원들입니다.
경제적으로 곤궁하고 너무 어렵기 때문에 우리들이 도저히 하나님이 기쁘신 뜻을 따라서 살기 어렵습니다. 이 때 우리는 지상에 있는 자원도 하나님께 구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하늘의 자원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이 땅의 자원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면서 척박한 세상을 강물처럼 흘러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있는 자원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 세상에서의 자원이 없으면 고민하고 경쟁하고 불공정한 게임을 생각했지만, 이제는 정당하게 하나님을 의존하고 그 하나님께 축복받기를 구합니다. 이러면서 살아가는 삶이 바로 구원받은 자의 삶입니다. 바로 그러한 구원을 위해서 메시야가 필요했고, 메시야는 이러한 구원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이죠. 미가 선지자는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미가 선지자는 이 메시야가 베들레헴에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은 가공의 도시, 전설상의 마을이 아니라 그 당시 실제 존재하던 동네의 이름이었습니다. 이 베들레헴은 히브리 말로 베이트레헴이라는 단어인데 베트는 집이고, 레헴은 떡입니다. 그래서 직역을 하자면 떡의 집이 되는데, 이 떡 레헴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말하는 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먹던 빵을 의히마는 것이었고 이 빵은 유대인들의 간식이 아니라 주식이었기 때문에 베들레헴을 만약에 등가 번역을 한다면 우리 문맥으로 가져와서 등가번역을 한다면 떡집이 아니라 밥집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매일 매일 우리들이 먹고 사는 주식인 이 밥, 그것의 집, 이것이 베들레헴인 것이죠. 이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나는 하늘로부터 온 산 떡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 떡은 희랍어로 알토스인데 이것이 바로 히브리어로 레헴이라고 하는 단어이고, 역시 등가 번역을 하자면 그것은 빵이나 떡이 아니라 나는 하늘로 온 밥이다라고 하는 번역인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밥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이죠.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빵이 없이는 한끼도 살 수 없듯이 예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그런 분으로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참으로 이 세상에 살기 위해서는 주님을 믿어야 하고 더욱이 이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수가 없고 그분 없이는 누구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참 사람답게 살수가 없다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바로 베들레헴, 즉 밥의 집에 오셨습니다. 이것은 가공의 도시가 아니라 실재하는 한 마을의 도시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죠.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은 이 모든 죄가 실제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인간들이 죄를 지었고, 그 죄의 결과로 인해서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인류들은 끊임없이 범죄하며 불순종하며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감으로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더럽혔고 자신을 망가뜨렸습니다. 이 모든 세상 안에서 일어났고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실행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지은 이 모든 세상 위에서 세상 안에서 이 죄를 용서받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가공의 인물로서가 아니라 실제의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다. 참 사람으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야 했고 시간과 공간 안에 사시면서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자신의 몸을 시간과 공간 안에서 죄 지은 사람들을 위한 속죄의 방법으로 바로 그 시간과 공간 안에서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이 세상에 고향이 있으십니다. 영으로 환상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실재하는 마을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고, 지금도 그 분이 태어나신 그 마굿간 그 장소가 보존되어 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자리에 기독교의 자유를 인정한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역사속에 실재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습니까. 왕으로 오셔서 예전의 왕은 창과 칼, 그리고 말과 병사들로 우리들을 다스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왕으로 오셔서 우리 구원받은 각 사람 안에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왕처럼 다스리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그 은혜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죠. 왕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는 전심으로 높이고 싶어하고 그분의 이름을 경배하고 싶어 합니다. 은혜가 사라지면 막 사는 거죠. 자기가 왕이에요. 그리고 제 멋대로 사는 거예요. 그게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예요. 바로 그러한 죄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거예요.
신자인 우리들도 마찬가지에요.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면 주님을 왕처럼 높이면서 삽니다. 그 안에서 행복해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통치하시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주님께 순종하고 은혜 생활하는 것이 힘들다고요. 그 은혜를 잃어버리고 세상으로 나가본 사람들은 사실은 신자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사는 삶의 어려움과는 비교될 수도 없는 그 무서운 어려움이 타락한 길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탕자가 아버지와 함께 섬기면서 있는 동안에 견딜 수 없는 속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 아버지가 아들을 해고지 한 것도 아닌데 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이 그렇게 괴로움이 되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아버지가 옆에 있는 것이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는 자유를 찾아 떠났습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유하게 되어 버린 것이 아니라 속박된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가난에 속박되고, 외로움에 속박되고 비참한에 속박되어서 그래서 결국은 쥐엄 열매라도 먹으려 했지만, 그것도 주는 사람이 없어서 돼지와 같은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의 통치를 거절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신 가장 큰 일 가운데 하나는 우리에게 절친하게 하나님의 나라의 아름다운 가르침들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입에서는 언제나 진리의 말씀이 흘러 나왔고, 그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의 어두운 눈을 뜨게 만들어 주시고 우리 지성의 눈 먼 상태를 벗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둠 속에서 그릇 행하였던 어리석은 모든 것들을 벗어 버리게 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매일 매일 살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 분이 하신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일은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인간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고난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는 용서되었고, 그토록 이 모든 세상과 함께 흐느끼며 기다리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바로 역사 안에서 일어났고 현실 세계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분이 이 세상의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도 바로 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죄인들이 몸담고 있는 이 현실 속에서 오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현실 속에 오셔서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고 그 현실 세계 속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진짜로 존재하는 마을, 베들레헴에서 오실 것이라고 선지자는 예언하였던 것입니다. 이 선지자가 옴으로 말미암아 베들레헴은 영광스러운 마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베들레헴의 영광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선 제일 먼저 베들레헴은 원래는 낮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아주 초라한 동네에 불과하였습니다. 베들레헴은 작은 고을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아주 작은 고을이었고, 많이 알려지지 않은 초라한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작은 고을 베들레헴, 사람들이 기억해 줄 만한 특별하지 않은 이 초라한 동네가 영광을 얻게 된 것은 바로 거기에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은 바로 실재의 역사 속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 예수님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도록 그렇게 역사 속에 주님께서 찾아오시고 내려오신 것이죠.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는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그리고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하찮은 고을에 불과하였지만, 예수님께서 그 곳에 오셔서 이 세상과 인류를 위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자 이 베들레헴은 아주 매우 중요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중에 예수를 믿기 전에 이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예수를 믿기 전에 우리 중에 이 세상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들,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뭐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진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중요하게 된 것은 우리같이 더러운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렇게 참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며 성도가 죽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신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을 우리에 내버려두고 돌아오지 않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는 선한 목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은 우리에 있으나 돌아오지 않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그 목자의 모습 속에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자기의 택한 백성들에 대한 마음이십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매우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렇게 귀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 구원해 주신 것도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귀한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죠. 바로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데, 하물며 그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신 사람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는 하나님 앞에 얼마나 더 소중한 사람일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각 사람 마음속에 와 계실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 예수님 때문에 가장 존귀한 자들이 됩니다.
베들레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에 이제는 작은 동네의 베들레헴이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보다도 더 중요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오신 아기 예수를 뵈옵기 위해서는 오히려 예루살렘을 지나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동네로 걸어 나와야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받은 우리를 존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진정으로 영광스럽게 하고 소중한 존재가 되게 하는 것은 우리의 높은 지위나 많은 재물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그 주님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고 그 주님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 생명적으로 연합된 삶을 살 때, 그 안에서 우리는 존귀한 자가 됩니다. 예수님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그 예수님을 정말 소중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내 마음 안에 모신 그 예수님이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내 안에 주님이 어찌하든지 충만히 사시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느냐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의 육신의 잠시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진정으로 존귀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눈 앞에 있는 작은 이익을 위해서 생명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고 그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신 그 예수님을 멸시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베들레헴이 거기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영광스러워 졌듯이 우리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앞에 소중하고 받아들여질 만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자기 안에 예수를 모시고 그 예수가 충만히 사시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에요. 내 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만히 사실 수 있다면 무엇이든지 주님께 양보하고 복종하며 사는 그러한 섬김의 삶,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이고,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우리 마음속에 오신 이유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태어나셔서 이스라엘의 목자로 다스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베들레헴은 더욱 유명한 동네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 태어나셨지만, 베들레헴 동네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인류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나 베들레헴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생애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생애였습니다. 나시기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으나 나사렛에서 자라셨고, 자라기는 나사렛에서 자라셨지만, 나사렛과 사마리아와 온 유다와 요단강 건너편을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하셨고, 그리고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시며 무지한 자의 마음에 가르침의 빛을 주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베들레헴 작은 동네에서 태어나셨으나 그 분은 베들레헴은 물론이거니와 유대와 사마리아와 나사렛과 온 땅을 두루 적시는 강물처럼 흐른 생애를 사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분의 빛을 받았고, 모든 사람이 그 분의 자비와 은혜를 입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그분으로부터 사랑과 고임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눈길 한번 주실만한 가치가 없는 아무것도 아닌 쓸모없는 우리들을 자기 스스로 좋아서 빠진 죄악의 어둡고 깊은 늪에서 우리를 건져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주님을 만나고 구원을 받게 된 우리 나름대로의 삶의 정황이 있습니다. 어쩌면 거기가 우리의 영적인 베들레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를 그렇게 구원받게 만들어 주시고 꼭꼭 숨어 있는 것처럼 이 세상 한 구석에 하나님 없기 때문에 불행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우리 마음 가운데 오시고 우리 안에 빛을 주셔서 우리 가운데 왕으로 좌정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베들레헴에 머물지 말고 이제는 예수님처럼 온 천하를 두루 다니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신 생애처럼 흐르는 강물처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뒤 잇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실 때에 수많은 사람들을 섬기시고 생애 전체가 자기를 사람들에게 떡 떼어 나눠 주심 같이 베풀어 주신 생애였던 것처럼, 바로 우리를 그렇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 베들레헴같이 낮고 천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오신 예수님 때문에 이제 우리는 천하고 이름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 앞에 유명하고 존귀한 자녀들이 되었으며, 이제 우리의 남은 생애는 그 분을 그렇게 우리 안에 충만히 모시고 예수님이 사셨던 것처럼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이 세상에 고립되고 버림받은 것 같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 빛이 아직 없어서 참으로 주님을 섬길 줄 모르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이 빛을 나눠 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같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리 안에 오신 것 같은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님을 오시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어둠 가운데서 구해 주셨고, 우리의 마음속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아닌 더러운 저희들에게 주님이 오셔서 끊임없이 신자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모든 은혜는 우리의 배에서 솟아나는 생수의 강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까. 왜 값없이 은이나 금이 필요 없이 값없이 공로 없이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거기에서 다스리는 목자가 나와서 온 이스라엘을 다니시며 섬기셨던 것처럼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예수님이 살아계신 삶을 뒤이어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섬기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말구유 같은 우리의 낮고 천한 마음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신자가 진정으로 영광스러워지고, 존귀해 지는 것이 무엇일까요. 많은 재물이나 높은 지위를 통해 존귀해 지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신자가 진정으로 존귀해 지는 비결은 자기 안에 주님이 충만히 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충만한 은혜와 생명을 가지고 궁핍한 자들과 하늘 자원이 끊어진 사람들, 이 세상의 자원이 고갈되어서 더 이상 살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내 안에 있는 자원을 나누어주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장 영광스럽게 하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주님께서 베들레헴 같은 여러분 속에 오셨으니 이제 여러분들은 낮고 천한 동네의 베들레헴 같았지만, 여러분 안에 오신 주님 때문에 영광스러워 지십시오. 그래서 그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이 세상을 고치는 주님의 강물이 되기를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