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으로 사는 길
(2018년 주일오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8년 7월 29일-8월 12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8년 10월 2일
목 차
1. 자유란 무엇인가(요 8:32) 2018.7.29 주일오전 1
2. 자유와 행복(요 8:32) 2018.8.5 주일오전 12
3. 참된 주체로 사는 길(갈 2:20) 2018.8.12 주일오전 21
자유인으로 사는 길1 2018. 7. 29 주일 낮 예배
< 자유란 무엇인가?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I. 본문해설
-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제자 됨을 가르치심.
- “내 말 안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31)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32)
- 인간이 자유하게 되는 길.
a. 예수 그리스도 믿음으로써.
b. 하나님의 진리를 앎으로써.
c. 말씀 안에 거함으로써.
- 진리를 알고, 그 안에 거함으로 제자가 됨.
- 따라서 예수의 제자는 곧 사상과 삶에 있어서 제자임.
-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인데도 미래형으로 말씀하심.
- 신자의 삶이 끊임없이 자유를 찾아가는 것을 보여줌.
- eleutherosei “자유롭게 하리라” eleutheros "노예가 아닌“
- “set free” 노예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됨. 의무가 면제됨.
- 이것을 사용하여 더 본질적인 속박을 보여주심.
II. 자유란 무엇인가?
- 자유란 무엇인가?
- “제약 받지 않고 원하는 바를 선택, 실행할 수 있는 능력”
- “자유롭다” : 언제나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는 상태.
A. 자유에 대한 설명
- Aristoteles : 고의적+비고의적 행위. <Nicomachos의 윤리학>
a. 비고의적 행위 : 무지하거나+강제로 당한 것.
b. 고의적 행위 : 행위의 원리가 자신 안에 있음→자유.
- 자유의 문제를 자유의지의 문제로만 봄.
- T. Aquninas : 예정은 하나님의 자유+그 안에서 인간도 자유.
- 그의 견해는 정신적 측면, 의지의 자유에 치중했음.
- 카톨릭 : 하나님과 인간 사이 중재자 교회가 자유를 줌.
- M. Luther : 자유는 인간의 정신 원리 안에 성립되지 않음.
- 의지는 노예상태며, 하나님의 은총, 사죄 안에만 성립됨.
- J. Roussean : 자유는 인간의 자연 상태임.
“자유는 다른 사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무엇이 든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립한다”
- 유물론자들에 의지를 기계처럼 보는 결정론으로 발전.
- I. Kant : 인간은 감각너머의 세계에 부분적으로 관여함.
- 인간은 도덕 법칙을 구체화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음.
- 실종주의자들 : 객관적 도덕규범 부인하며 절대 자유 주장.
- 최근 관심사는 대체로 사회적 자유로 이동하게 됨.
- 자유에 대한 올바른 생각.
a. 인격적 자유 : 영혼과 정신.
b. 사회적 자유 : 사회와 환경.
- 인간에게 본성과 사회의 자유에 대한 포괄적 소명이 있음.
B. 자유를 위한 구원
- 참 차유에 대한 판단 : 그 자체+결과들.
- 자유는 참으로 자신 행복하게 하는 것이어야 함.
- 그것은 그릇된 판단에 따른 비이성적 끌림이어서는 안 됨
- 인간의 행복은 주관과 객관에 걸쳐있음.
a.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낄 뿐 아니라.
b. 그것이 옳다고 인정 받아야 함.
- 궁극적으로 그것이 옳다는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 가족, 사회, 국가…확장해도 궁극적 근거가 아님.
-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으로 귀결.
- 우주 안에서 모든 관계는 정점으로 수렴됨→“하나님 안에”
- “당신 안에서”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심.
- 인간은 참 자유를 잃어버리고, 속박을 자유로 여김.
-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임.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 일 4:15)
- “하나님 안에 거한다”
a. 영적 생명을 소유함.
b. 하나의 질서 안에 있음.
- 죄인들로 하나님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실현됨.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 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 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 인간은 본래적 자유를 끊임없이 갈망하나 스스로 찾지 못함.
- 자기 밖으로부터 오는 구원을 통해서 자유를 얻게 됨.
III. 적용과 결론
-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속박 받는 존재가 되었다.
- 인간이 올바르게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자유다.
- 죄로 잃어버린 자유를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되찾게 하신다.
-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심으로 그 자유를 누리게 하신다.
자유인으로 사는 길2 2018. 8. 5 주일 낮 예배
< 자유와 행복 >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I. 본문해설
- 자유란 속박 없이 원하는 바를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음임.
- 하나님은 인간이 자유롭게 살도록 창조하셨음.
- 자유에 대해 관심 갖는 것은 그것 없이 행복할 수 없기 때문임.
II. 자유와 인간의 행복
A. 자유로운 주체
1. 주체(主體)란 무엇인가?
a. 개별적으로 인식하는 능력, 기능을 가진 지성적 존재(주관)
b. 사회적으로 목적 가지고 환경에 변화 가하는 인간(주체)
- 단순히 의식에 한정되지 않고, 신체로써 실천하는 실체임.
- Aristoteles “객관적이고 고유한 성질의 지속적 담지자”
- 스콜라주의 :
a.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인 실재 대상.
b. Aquinas 영혼으로 의지와 생각의 주인 됨(Summa Ia 87.4)
- 관념론: 순수 정신적인 것, 의식, 의식(혹은 감각)의 복합물.
“주관은 주관적인 감각들로 구성되지만, 구성되고 난 후에 는 다시 감각에 반작용한다.”마흐, <감각의 분석> 21.
- K. Mark : 주체는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사회적” 인간 뿐임.
- 주체의 실현을 통해 물질적 세계 → 인간적 세계가 됨.
-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로 창조됨 : 하나님의 형상.
- 그 형상 안에서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결정함.
- 하나님 안에서 타인과 관계 맺으며 자기를 실현해 가는 임자.
-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창조 목적을 실현하며 살아감.
2. 자유로운 존재
- 자유로운 존재는 인식, 판단, 행위에 있어서 독립적임.
- 하나님의 절대적 독립성과 인간의 상대적 독립성.
- 더 큰 자유를 욕망하고 독립함으로써 범죄 함.
- 왜 하나님은 최초의 인류가 악을 행하게 허락하셨는가?
- 그 형상의 완전함 안에서만 자유로운 존재일 수 있음.
- 인간을 자기 사유적, 결정적 존재로서 창조하심.
- 자유로운 의지로 악을 선택할 수 있었음.
- 그 자유의 범위가 얼마나 컸는가? 얼마나 존중되었는가?
- 악한 의지로써 당신 뜻 거스르고 창조세계 파괴하였음.
- but, 악한 의지의 행사를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두심.
- 인간을 처음부터 자유로운 주체로 창조하셨기 때문임.
- 여기에서 하나님의 탁월함과 인간의 위대함을 보게 됨.
- 자유로운 주체로 창조하신 뜻을 중요하게 여기심.
- 죄를 범하고 악이 들어오는 것 못지않게 존중하심.
- 선악을 행함에 있어 수동적 기계로 창조되지 않음.
- 인간의 자유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누릴 수 있음.
a. 타락 전 : 불안전한 완전성 때문에.
b. 타락 후 : 본성적인 죄의 성향 때문에.
- 그래서 인간은 진리를 따를 때 자유를 누리게 됨.
“우리의 자유는 우리가 자신을 진리에 복종시킬 때 옵니 다. 이 진리는 우리를 죽음, 곧 죄의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영혼은 평화 안에서 진리 를 누리지 못하는 한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합니다.” <자유의지론> 2,13,37.
- 그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만물을 선의로 대하게 하심.
- 그러나 인간은 어떻게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가는가?
B. 인간의 행복
- 하나님께 무엇이 부족하시겠는가?
- 우리가 믿고 사랑 하지 않아도 충족하심.
- 그런데도 당신을 사랑하도록 명하신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5)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 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 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 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 13:3)
- 인간이 누구인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규정됨.
- 하나님께로 났고, 향해서 살고, 의미를 부여 받음.
-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당신을 향해 살도록 창조됨.
a. 배우고 : 하나님, 인간, 자신, 자연.
b. 따르고 : 창조 목적.
c. 살아감 : 자유로운 주체로 살게 하심.
- 우리를 속박 받지 않는 주체로 살게 하심.
- 모든 인간을 지문처럼 서로 다른 사람으로 창조하심.
- 나의 행복은 나 자신의 고유한 인생을 사는 것.
- 자신이 온전해지기 위함이 아닌 한, 타인과 비교될 필요 없음.
- 나의 인생은 아무도 산 적 없고 살 수 없는 인생임.
- 진정한 삶의 가치는 자유로운 주체로 사는 것임.
- 인생의 참된 만족은 감각에 있지 않음.
- 우린 먹고, 마시고, 보고, 듣는다.
- but, 인생의 의미는 그 자체에 있지 않음.
- 감각 세계에만 묶여서는 자유로운 주체로 살 수 없음.
- 삶의 현상은 감각으로, 의미는 진리와 영원의 빛으로 판단함.
- 인간의 탁월성은 감각적인 것을 판단하는 능력임.
“비이성적 동물에게 생명과 감각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지만, 인간 정신의 탁월한 점은 감각적인 것을 감지하는데 있지 않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 능력 에 있다.”<참된 종교> 29.53.
- 시간과 공간에 살고 있으나 행복은 거기에 매이지 않음.
- 말씀은 감각 세계를 넘어서 하나님과 관계 맺게 함.
-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왔기에 그 안에서 행복함.
- 하나님 자신이 무한한 행복이심.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 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 며 만주의 주시요”(딤전 6:15)
- 그 분 안에서 모든 사람이 행복을 누리기 원하심.
- 하나님의 진리만이 인간을 자유로운 행복으로 인도함.
-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인간을 행복하게 함.
III. 적용과 결론
- 어떻게 영혼을 가진 인간을, 자기 안에 두시는가?
-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우주적 질서로 돌아오게 하심.
- 진리의 말씀과 은혜로써 행복하게 살아가라.
자유인으로 사는 길3 2018. 8. 12 주일 낮 예배
< 참된 주체로 사는 길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I. 본문해설
- 두 가지 극단 : 율법 행위로 구원 + 율법 폐기론.
-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으며 주 뜻대로 살기를 권함.
- 의롭다함은 율법 행위 아닌 그리스도 믿음으로 됨.
II. 인간의 참된 주체성
A. 내가 산 것 아님
- “내가 산 것” 아닌데 어찌 주체성 있나?
- 주체성이란 곧 자신이 주인 된 성질 아닌가?
- 문제는 “내가”란 무엇인가이다.
- 이 “내가”는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던 자기다.
- 참된 주체성은 순수한 자기로 사는 것이다.
- but, 하나님 사랑에서 떠나 죄에 빠져 주체성을 잃음.
- 죄와 욕망에 매임으로써 참 주체를 상실함.
- 인생에 대한 두려움은 주체됨에 대한 두려움.
- 하나님 은혜로 충만한 상태에서 주체적이 됨.
B. 그리스도께서 사심
-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음.
-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됨.
-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죄와 불순종을 버리게 함.
-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림.
- 성령 충만한 생활이 가장 주체적인 삶임.
- 예수 그리스도는 참되고 자유로운 주체성을 보여줌.
- 나의 나됨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가장 빛나게 하심.
- 성령 충만한 것만큼, 예수 본 받는 것만큼 참 ‘나’ 됨.
-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심으로 거짓된 나 버리고 참 나로 살아감.
III. 믿음 안에서 살아감
- 자기가 처한 환경과 상황 탓만 하는 사람들이 있음.
- 그러면 자기 인생에 대한 주체성은 어디서 찾나?
- 한 번 구원 받은 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함.
- 신자가 되었으나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아감.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감.
- 그는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분임.
- 믿음으로 사는 자를 붙들어 주심.
IV. 적용과 결론
-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한다.
-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임을 알라.
-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 말씀과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살라.
자유인으로 사는 길(2018.7.29. 주일오전1)
자유인으로 사는 길(2018.7.29. 주일오전1)
자유란 무엇인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예수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인간이 자유하게 되는 길은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둘째로 진리를 알고, 세 번째로는 하나님 말씀에 거함으로써 인간이 자유롭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피할 수 없이 진리와 관련되는 것입니다. 즉, 그의 사상과 삶에 있어서 제자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로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인데도 자유롭게 되는 것, 제자가 되는 것을 모두 미래형으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신자의 삶이 끊임없이 자유를 찾아 완성되어 가는 삶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리라’ 라고 번역된 이 단어는 희랍어 성경에서 ‘엘로데로세이(eleutherosei)’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원래 형용사인 ‘엘유데로스(eleutheros)’에서 왔는데 이것은 ‘노예가 아닌’ 그런 뜻입니다. 혹은 ‘부채로부터 탕감 받은’ 이런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하리라’ 라고 한 이 말씀은 의심할 여지없이 당시의 노예 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된다는 말은 노예적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고 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당시의 노예 제도로부터의 해방을 이용해서 그 그림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더 본질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임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저는 이 32절을 기초로 몇 주간에 걸쳐서 자유인으로 사는 길에 대해서 강론하고자 합니다.
II. 자유란 무엇인가?
그러면 자유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흔히 쓰는 자유라고 하는 것은 엄격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한 마디로 이런 뜻입니다. 제약받지 않고 원하는 바를 항상 실행할 수 있는 능력, 혹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유롭다는 것은 언제나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힘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A. 자유에 대한 설명
우리가 자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우리 맘대로 규정하는 것도 좋지만 이 인간에게 있어서 커다란 관심사였던 자유에 대해서 이제껏 인류가 어떻게 설명해 왔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유익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유명한 책,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위를 고의적인 행위와 비고의적인 행위로 구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의도된 행위와 의도되지 않은 행위로 나눈 것입니다. 비고의적인 행위는 무지하거나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 강제되어 행하는 것인데 여기에는 자유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 아리스토텔레스 자신도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보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고의적 행위는 자신이 선택하고 실행하는 것인데 알고 선택하고 실행하는 모든 과정에서 행위의 원리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이것을 자유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위대한 철학자는 자유의 문제를 자유 의지의 문제로만 보았습니다.
기독교 세계에 들어와서는 큰 사상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정하시는 예정은 하나님의 자유대로 하신 것인데 그 하나님의 예정은 인간을 노예적으로 속박하지 않으며 인간은 그 예정 안에서 하나님이 자유로운 것처럼 자유롭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사람의 견해는 의지를 말함에 있어서 그것이 갖는 정신적인 측면에 치중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이후에 가톨릭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로서 교회가 바로 이 자유를 준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중세의 가르침에 반기를 든 마르틴 루터는 자유란 누가 우리를 위해 주는 것이나 혹은 인간 본연의 정신 안에 성립되는 원리가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자유롭지만 노예의 상태에서 의지를 가지고 태어나며 따라서 자신으로서는 아무리 원해도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사죄에 의해서만 자유가 성립한다고 믿음으로 기독교의 자유에 대한 중요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이후에 합리주의가 퍼지면서 장자크 루소 같은 사람은 “자유란 인간의 자연의 상태다. 그러므로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연의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 라고 했으니 그의 자유의 개념에는 다분히 사회적 자유의 개념이 들어온 것이었고, 그래서 그의 견해는 상당한 무정부주의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계약을 통해서 국가와 사회에 자신의 자유를 어느 정도 양도하는 것은 질서와 안정을 통해 더 큰 자유가 방해받지 않기 위함이라고 보았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는 자유에 대한 다음 언급에서 자기의 주장을 요약합니다. 자유는 다른 사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성립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후에 유물론자들이 등장하고 인간의 의지의 작용을 자연 법칙에 의해서 작용하는 것 같은 기계론적인 결정론에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극단적으로 간 것이 운명론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 모든 의지 작용에 있어서 인간의 중심성을 강조했던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이 감각 너머의 세계에 부분적으로 관여하고, 또 그런 도덕 법칙을 구체화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강조했습니다. 그 후에 실존주의자들은 객관적인 도덕규범 자체를 거부하며 인간의 절대 자유를 주장했으나 하이데거 같은 사람은 그 자유가 무시무시한 자유라고까지 표현함으로써 자유와 속박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였습니다. 최근 철학계의 관심사는 대체로 이런 개인의 영혼 안에, 마음 안에 있는 자유보다는 사회적인 자유로 관심을 이동해 가면서 사회 구조와 국가의 권력에 의해서 제약 받는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신장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참고로 할 만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면 성경으로 돌아가서 자유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자유에 대한 두터운 성경의 가르침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데 하나는 인격적인 자유입니다. 즉, 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격체로서 마음과 영혼에 많은 속박들을 받아 자유를 잃어버리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삶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복음의 능력과 성령의 역사로 인간의 영혼이 변화되고 마음과 정신이 올바른 질서를 찾아 죄와 악한 힘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유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믿음과 성화에 의해서 이루신다고 봅니다.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이렇게 우리의 인격적인 자유를 위함입니다.
두 번째는 사회적인 자유인에 이것은 사회와 환경의 자유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로 얽매였던 우리 영혼이 자유케 되고 하나님이 행복을 누리게 하신 것은 그렇게 자신의 영혼의 구원에 만족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러한 자유롭게 창조하신 인간들이 하나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사는 세계가 되도록 이바지합니다. 정치와 사회, 경제, 그리고 환경, 이 모든 것들을 탐욕적으로 이용함으로써 타인에게 제약을 주고, 하나님이 주신 천부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구조와 악에 대해 항거하고 싸우며 올바른 정의를 실현해 가야하는 것이 바로 사회적인 자유입니다.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전 포괄적인 소명에 비추어볼 때 우리가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영혼의 자유와 사회의 자유, 곧 인격적인 자유와 사회적인 자유를 함께 생각하며 자신 안에 또 다른 사람 안에 자유를 되찾게 해주고 이 모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권력과 지식, 그리고 재물에 의해 누군가의 자유가 부당하게 억압당하거나 침탈당하는 일에 항거하며 살아야 할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자신의 본성과 다른 사람의 본성, 그리고 그들이 함께 사는 사회의 자유에 대한 소명이 있는 것입니다.
B. 자유를 위한 구원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이 자유를 잃어버린 이 세상에 자유를 주시려고 하였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를 위한 구원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사회가 모든 것이 자유롭게 된다 할지라도 스스로 속박되기를 원하는 정신 구조를 가진 사람이 살고 있는 한 그 모든 자유는 그를 더더욱 속박되게 할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자유를 생각할 때에는 거짓된 자유와 참된 자유를 구별할 지혜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자유가 어떻게 참 자유가 될 수 있는가, 혹은 거짓된 자유일 수 있는가에 대한 판단은 두 가지를 기준으로 생각 하여야 하는데 하나는 그 자유 자체를 고려해야 하고 또 하나는 그 자유가 가져오는 결과들을 고려하면서 그 자유가 참 자유인지를 판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판단의 지혜를 얻도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1차적으로 자유는 행복하기 위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지 불행해 지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즉,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살고 싶으냐고 질문을 받을 때 모두 그렇다고 대답하는 이유는 자유롭지 않으면 자신이 스스로 자기의 행복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 자유는 그릇된 판단에 따른 비이성적인 끌림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유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자유와 속박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어느 곳으로부터 먼저 시작 한다고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밀접하게 붙어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쉽게 비유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남이 누리지 못하는 대단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은 그 사람 자신으로 하여금 자유의 기쁨을 맛보게 합니다. 우리 모두 어렸을 때 담배를 배웁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그렇게 기쁘고 좋아서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선배들이 하나씩 주면 담배를 피웁니다. 연기가 눈으로 들어가면 눈물이 쏟아지고 재채기가 나고 기침을 합니다. 어른들은 왜 이 이상한 것을 입에다가 달고 살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만의 아주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특히 음식을 맛있게 먹고 난 후 습도가 알맞은 날에 창밖의 비 오는 소리를 들으며 피우는 한 개비의 담배는 그것을 피워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입속으로 니코틴이 번지며 혈액을 타고 온몸을 돌면서 약간 몸을 나른하게 하면서 알 수 없는 이완된 느낌을 우리의 몸에 가져다줍니다. 때로는 우리의 뇌가 매우 가벼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고 마취의 상태에 잠시 빠지게도 만들어 줍니다. 그 사람은 생각합니다. 이런 즐거움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속박을 받고 있는 것이고, 나는 더 큰 자유를 가지고 흡연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건강에 해가 되지 않도록 가끔씩 피운다면 그리 나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은 대부분 담배의 참 맛을 모릅니다. 그 정도 느끼려면 하루에 한 갑은 피우고, 그래도 한 3년 이상 된 사람들이 그 묘미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흡연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처음에는 내가 담배를 선택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니코틴을 요구하는 성향이 몸에 생겨납니다. 제때에 이것이 들어오지 않으면 불안증을 느끼게 되고 돈이 없으면 쓰레기통을 뒤져서라도 남이 피우던 담배를 찾고 그 꽁초에 불을 피워 한 모금이라도 마셔야지만 생활을 할 수 있게끔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그것을 선택하고 절제할 수 있을 때까지 그것을 누리는 동안에는 더 큰 자유를 흡연자가 비흡연자보다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그러나 중독의 상태에 들어가고 난 다음에는 그 생활은 그 담배의 노예가 된 삶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담배를 아주 즐기셨습니다. 특히 빨뿌리에 담배를 꾹꾹 눌러 서 피우는 독특한 방식의 여송연을 즐기셨습니다. 어느 날 담배가 떨어졌을 때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담배를 끊기로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런 예는 음주에도 해당이 될 것입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는 것 그리고 그것이 주는 정신과 몸의 유쾌함에 대해서 아마 술을 즐겨보지 않는 사람들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저녁, 마음이 이완되고 조용한 시간에 한잔을 마십니다. 알코올 기운이 온몸을 퍼지며 독특하게 몸에 열이 나고 혈액 순간이 빨라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상상력이 빨라지게 되고 우리의 몸은 아주 독특한 이완을 경험하며 무엇인가 외부로부터 들어온 물질에 의해서 몸과 마음이 안락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물론 그렇게 한두 잔 하는 것은 건강에 문제가 안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거기에 인 베기고 난 다음에 알코올 중독으로 들어간 다음에서는 그가 술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술이 그를 선택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술에 묶여서 마지막에는 제때 공급되지 않으면 손을 벌벌 떠는 사람이 됩니다. 마약은 더 심각합니다. 흡연의 200배라고 하니까 중독성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유에 대해서 판단할 때에는 억압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느냐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또 그것이 가져온 결과가 그를 속박하지는 않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은 반드시 주관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주관과 객관에 걸쳐 있습니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껴야만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옳다고 인정될 때에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무리 무서운 악을 행하는 사람도 모든 사람이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해도 그것을 행한 당사자는 안하는 것보다 그것을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악이라고 하는 것은 보다 넓은 범위에서 통용될 수 있는 선의 개념에서 소수의 사람만이 동의할 수 있는 좁은 선으로 이행하는 것이 곧 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자신이 주관적으로 행복하다고 느껴야 하고 동시에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옳다고 인정을 받아야만 그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여기에서 궁금한 것은 도대체 어떤 행복을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은 개인이 하는 것이지만 그것에 대해서 옳다고 판단해 주는 궁극적인 근거는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행복에 대해서도 온 인류가 만장일치로 동의할 행복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장수를 원하지만 그러나 인류 모든 사람이 120세까지 살겠냐고 질문을 받을 때 모두 그렇다고 대답할 리는 없습니다. 모두 부자가 되고 싶지만 이 인류 모든 사람이 억만장자가 되겠다고 동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름다운 미모를 꿈꾸지만 그러나 천하의 절색이 되겠느냐고 물을 때 나는 결코 모든 여자가 거기에 사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동의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선이나 혹은 행복에 대해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오늘 사람들이 어떤 합의를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내일이면 그것이 바뀔 수 있으니 오늘 많은 대중들과 정반대의 의견을 낸 사람은 어쩌면 다가올 날의 다수가 될 의견의 선구자가 될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변하고 그리고 소멸해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사상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복이냐고 할 때에 내가 그것을 행복하다고 느낄 뿐 아니라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궁극적으로 그 판단은 어디에 달려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혹은 그것을 가족으로 확대하고 사회로 확대하고, 국가로 확대하고, 혹은 그것을 아시아 대륙으로 확장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궁극적인 근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옳다고 판단하는 세상조차 여전히 변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임금 섬기기를 어버이보다 더 어버이같이 그렇게 섬기기를 그렇게 교육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누가 그런 교육을 가르치고 또 누가 그런 교육을 신봉합니까? 그것은 하나의 일시적인 윤리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도덕의 궁극적인 근거를 인간 안에서도 발견할 수 없고, 그리고 사회의 약속 안에서도 그것이 궁극적인 근거가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나를 포함해서 이 모든 세계가 누구에 의해 어떤 의도로 창조되었는가 하는 질문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과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생각 없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뿐 아니라 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사물들이 행복해진 상태이고,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이 모든 사람과 사물들 사이에 일정한 질서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질서 안에서 하나의 폭압적인 압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가 되며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질서에 동의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이 질서를 깨뜨린 자들과 인류의 죄 때문에 죽으셨으니 이제는 이 질서대로 살지 않겠다는 서약이 포함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질서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그 안에서 인간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믿으며 하나님 앞에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신앙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들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그 분이 누구인지 지식도 없고 그리고 이러한 의지에 대한 올바른 성찰도 없이 온몸으로 부딪치며 무지 속에서 혹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질서를 깨뜨리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고통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무지 속에서 자유를 찾기를 원하는데 실상은 속박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인간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떠실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사람들이 야생 동물을 포획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싼 고기들이 많이 있는데 아직도 하필이면 아직도 덫을 놓아서 불쌍한 짐승들을 잡아서 먹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위험한 행동입니다. 거기에 어떤 균이나 혹은 바이러스 같은 것들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심지어 그런 짐승들을 죽여서 저는 어렸을 때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노루를 잡아서 바로 죽여서 배를 갈라서 그 속에 장기를 꺼내 먹는 입가에 피를 묻힌 어른들을 보았습니다. 지금은 그 정도까지야 아니겠지만 정말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언젠가 이런 자연 야생 동물들의 무분별한 포획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나왔습니다. 아주 어려 보이는 불과 한 6개월 정도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아주 어린 멧돼지가 덫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얼마 후에 취재진들이 찾아가 보았을 때는 덫에 걸린 채 죽어 있었습니다. 먹이를 발견하고 먹이를 건드리니까 여기에서 덫이 올라와서 발을 콱 채워버린 것입니다. 아주 날카로운 톱니처럼 된 큰 것이 스프링으로 콱 채워버린 것입니다. 그 어린 멧돼지가 살기 위해서 그 겨울에 얼마나 몸부림을 쳤는지 취재진이 시체가 된 그 멧돼지를 찾아갔을 때에는 그 살이 긁히고 긁혀서 하얀 뼈가 갈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눈에는 눈물이 얼어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속박입니다.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쳐도 죽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돕는 자 없이 그렇게 멸망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울컥하는 눈물이 났습니다. ‘인간의 이 포악함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을까? 그냥 자유롭게 살게 두지. 더욱이 거기에 사람의 발이 끼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모든 인간의 속박은 결국 이러한 인간의 모든 속박은 옳지 않은 자유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을 때 돌아오게 되는 자유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인간의 위대함이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자유를 부여받은 것인데 이 자유 때문에 인간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난 존재가 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자유 때문에 인간은 동물만도 못한 비참한 삶으로 굴러 떨어지게 됩니다.
결국 무엇이 옳은가 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으로 귀결되고 따라서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사물들 사이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하나의 정점으로 수렴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 모든 세계를 지으시고, 지금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 안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죄는 그 바깥에서 자유를 누려보고자 하는 유혹이었으며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기가 원하지 않으면서도 혹은 원함으로 스스로 하나님 바깥에서의 자유를 찾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참 자유를 잃어버리고 속박 받을 강요를 자유로 여기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니 그렇게 속박을 받으면서 그는 고귀한 인간의 자유를 반납한 채 노예처럼 일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인간은 너무나 존귀한 존재이고, 그리고 누구에 의해서도 자유를 침탈당하지 않을 고귀한 존재로 창조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과 마음의 속박으로부터 우리에게 자유를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누르고 있는 모든 죄와 그 뒤에서 이 모든 것들을 조정하는 하늘의 정사와 권세와 사단의 세력들을 깨뜨리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역사 속에서 죽으신 것은 구속의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환상 속에서가 아니라 바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잃어버린 삶을 당연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인간의 부정적인 적응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억압받고 자유를 박탈당할 때 처음에는 불편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자유의 정신이 박탈됩니다. 그러면 노예적인 속박의 상태에 순응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온 우주에서 단 한 사람, 여러분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피조물도 닮지 않은 당신의 형상을 닮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처럼 모든 일을 결정하고 행함에 있어서 인간이 주체가 되도록 당신이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우신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잃어버린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어제 바로 이 자리에서 청년 순장들에게 공과 공부를 가르치면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어떤 새의 종류 중 단 한 마리가 남은 개체가 있다고 치고, 원숭이의 한 종류 중 이제 모두 죽고 딱 한 마리만 남았다고 치고, 흰 코뿔소가 다섯 마리 정도 남았다고 하는데 네 마리가 모두 죽고 단 한 마리가 남았다고 치자. 그 중에 세 개중 어느 것이 더 소중하겠습니까?” 물을 때 청년들은 “모두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만약에 그것을 판단하는 사람이 고기를 먹는 것으로 기준을 한다면 더 큰 코뿔소가 1번일 거고, 원숭이가 2번일 거고, 새가 3번일 것입니다. 그 사람이 유난히 조류를 좋아한다면 당연히 새가 1번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전제조건 없이 한 개체가 유일하게 남았기 때문에 이제 인류에게 있어서 그것이 너무 소중하다고 할 때에는 그 개체는 비교 불가능한 소중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바로 인류 역사에 그리고 미래의 역사에, 지금의 현재에 다시 반복되지 않을 하나 남은 천연기념물 같은 존재입니다. 예전에도 여러분 같은 사람은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태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닮은 사람이 태어나지만 그 사람은 다른 삶이 할당되었고 다른 삶을 살아갈 것이니 여러분들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오케스트라가 있다고 칩시다. 모든 악기를 갖추고 그것들이 연주함으로써 교향곡이 울려 퍼집니다. 값비싼 스트라디바리우스 45억짜리 바이올린이 값이 저렴한 비올라를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교향곡이 울려 퍼질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다 독특한 가치를 가지고 비교 불가능한 절대적인 소중함으로 함께 어우러져서 고유한 소리가 모아져 교향악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 2주간동안을 묵상 속에 지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열등감에 시달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열등감을 느껴야 될 필요도 없는 것들에 대해서까지 열등감을 느꼈으니 저의 자화상이 잘못되었던 모양입니다. 저는 중학교 다닐 때 나를 열등감 느끼게 하는 것 중 하나는 ‘나는 왜 꺽다리처럼 키가 클까?’ 이었습니다. 그때 70명이 한 학급에 모이면 저는 항상 60번에서 63번, 65번 사이였습니다. 키순서대로 번호를 정하니까요. 그런데 너무 싫었습니다. 키가 좀 약간 작고 몸집이 탄탄한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꼈는데 여러분들이 웃으시는 것처럼 누구도 동의할 수 없는데 열등감을 느꼈습니다. 심지어는 중학교 때로 기억이 되는데 세계적인 테너 가수의 노래를 듣고 ‘나는 어떻게 이렇게 노래를 못할까?’ 하는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그럴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열등감에 계속 시달렸습니다. 그런데 몇 주 동안 이 자유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면서 엊그제는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이제는 제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제 느낌으로 그 모든 열등감에서 벗어났고, 그리고 누구도 부러워하지 아니하고, 나를 나로 만드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 수 있게 되었나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봅시다. 어느 날 가족들이 모여서 남편과 함께 의논을 하였습니다. “우리 여행가자.” 그랬더니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래. 우리가 오랫동안 여행 못했으니 이번에 비행기 타고 제주도를 가자.” 그리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온 식구들이 마음에 들떠서 이제 제주도 가는 여행 준비를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옆집 아줌마가 마실을 왔습니다. 그리고 자기네도 여행을 간다고 자랑하니까 그러냐고 자기도 여행을 가겠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유럽을 럭셔리하게 크루즈를 포함한 그것도 1등석에서 그렇게 여행하는 계획을 설명하며 가이드 자료를 보여주었습니다. 갑자기 제주도로 여행가는 모든 기쁨은 사라지고 너무 초라하게 느껴서 남편에게 성질을 부렸습니다. 이게 뭡니까? 비교는 끊임없는 속박을 우리에게 강요합니다.
그래서 예전에 나 자신을 포함해서 여러분들에게 이런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여러분보다 잘 산다면, 노력하십시오. 여러분도 잘 살 수 있습니다. 누군가 나보다 지식이 뛰어나다면, 도서관 다니십시오. 책을 좀 읽으세요. 그러면 여러 해 후에는 그 사람처럼 될 수 있습니다. 미모가 떨어진다, 화장품 좀 잘 바르고 그리고 옷도 신경을 좀 쓰십시오. 그러면 어느 정도 그 사람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러한 실현 가능한 열등감 때문에 우리들이 좌절하고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인생을 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노력한다고 해서 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경지로 올라가서 이미 재산을 모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오늘 아껴 쓰고 내일 슈퍼에 가서 싼 물건을 사도 거기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냥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나처럼 가난하게 만들지 않으시고 저런 부자도 두셨으니 감사하다. 짝짝짝. 충분히 박수를 쳐줍니다. 그리고 마음으로 빌어줍니다. 그 많은 재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니 저가 육욕에 치우쳐 헛된 짓하지 않고 그 물질로 자신의 가족 뿐 아니라 모든 이웃을 잘 살게 하고 그리고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그런 사람을 주신 것이 감사하다 하고 힘차게 박수를 보내는 것입니다. 학업에 있어서 뛰어나다. 내가 노력해서 따라 잡을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 워낙 높은 수준의 학문에 도달해 버렸는데 내가 노력을 해도 못 따라갈 것 같다 그러면 감사하는 것입니다. 나같이 똑같은 인간들이 있었으면 도토리 키 재기처럼 무지하게 살았을 텐데 저런 탁월한 지식의 사람이 있어서 우리에게 학문에 대해서 혹은 진리에 대해서 빛을 던져주니 당신과 동시대에 살게 된 것이 참 다행이다, 그러고 박수를 쳐주는 것입니다. 하나도 자존심 상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지식이 10배나 뛰어나서 신의 경지에 이르고, 돈이 너무 많아서 온 세계를 그 돈 주고 살 수 있을 정도가 된다고 해도 내 인생은 그 사람이 대신 살 수도 없고, 그리고 우리 인생의 가치는 소유나 명예, 권력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독특한 삶이 나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 비교 의식 속에서 사니까 끊임없이 자유가 박탈됩니다. 그리고 끊임없는 속박을 느낄 뿐 아니라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긴 세월을 살고 보면 살고 싶어서 산 것도 아니고, 살기 싫은데 억지로 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남 위해 산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나 위해 산 것도 아닙니다. 선하게 산 것도 아닌데 나쁜 짓하면서 산 것도 아닙니다. 결국은 뭐냐 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또 다시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 안 살고 싶기도 한, 죽어버리고 싶기도 하고 계속 살고도 싶은 그런 이율배반적인 마음의 작용 속에서 인간은 제대로 된 자신의 인생을 단 몇 개월도 살지 못한 채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하나의 천연 기념물이 멸종되는 순간입니다. 권장할만한 삶일까요? 어떻게 그것이 우리가 본받을만한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에 비춰보더라도 우리는 그런 식으로 남과 비교하면서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저는 무슨 돈에 대한 아주 강한 집착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지식에 의해서는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 간증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평생 책을 읽으면서 아무도 어떤 저자가 천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의 책을 두 권 읽으면서 인간의 위대한 지성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게 기독교 학자 중에서는 어거스틴이 최초였고, 세속 학자 중에서는 플라톤이었습니다. 플라톤에게는 그렇게 무릎까지 꿇을 정도로 마음은 아니었지만 의지적으로 안 그러려고 애를 썼지만 어거스틴에 대해서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6개월 동안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어거스틴은 누구고 저는 누구인데 그 사람은 이러한 놀라운 지식들을 펼쳐내고 나는 열심히 노력을 해야지 겨우 이해하는 사람으로 만드셨습니까? 주님은 왜 차별하십니까? 나에게도 그런 천재성을 잠시만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응답 안됐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평범한 사람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기도를 했던 거 자체가 너무 부끄럽습니다. 왜냐하면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멸종했습니다. 그리고 신종이 태어났습니다. 이 개체를 보존해야 합니다. 하나밖에 안 남았는데 언제 1600년 전에 없어진 멸종된 그 개체를 보고 ‘내가 왜 그 개체와 같지 않을까?’ 그러고 있는 동안에 차라리 찬송 한곡 더 부르고, 그리고 훌륭한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면서 살걸, 사람들을 사귀어 보면 진짜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박수쳐주는 것, 진짜 안합니다. 그렇게 인색한 그것이 결국은 열등감의 표현입니다. 저는 그렇게 안 살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자유인이기 때문에 너에 대해서 열등감이 없다. 그리고 지나치게 부러워하지도 말자. 오히려 그렇게 노력하지 않은 나를 부끄러워하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로운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어떠한 느낌으로 ‘나는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멸종 위기의 개체인데 이 종은 예전에 화석으로도 남아있지 않은 독특한 종이다.’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도 발견하게 됩니다. 저 아름다운 저 사람이 모든 사람 앞에 빛나는 이유는 나같이 못 생긴 사람들이 뒤에서 받쳐주기 때문에 저렇게 빛나듯이 학문도 지위도 모든 것이 그러하다 생각하고 그러나 결코 그 지위와 아름다움과 부귀영화를 나의 독특한 인생과는 바꿀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힘차게 박수를 쳐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꺾이지 않은 불굴의 의연한 정신으로 이 세상 모든 인류중 단 한 사람도 살 수 없는 나의 독특한 삶을 하나님 앞에 자유로운 존재로 살게 하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감동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여러분들 중 아무도 하나님께 바울처럼 못 살았다고 책망을 받거나 김 목사처럼 말씀을 못 전했다고 책망 받을 사람은 여러분들에게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각자 자기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형형색색으로 이 우주공간에 어우러지고 서로 연결을 이루면서 찬란한 빛을 드러내는데 이게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어리석은 비교 의식에서 오는 속박의 굴레 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나로 유일한 개체로 이 우주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며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껍질을 본질과 바꾸는 사람들이 되라고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수없이 그 껍질들을 벗겨내서 그렇게 불변하는 자유의 본질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완전히 자유로운 한 개체로 하나님이 부여하신 이 모든 우주와 인류의 질서 안에서 당신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에게 무엇보다도 고귀한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나의 인생에 주체가 되어 자유롭게 무엇을 선택하고 실행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인간 존엄성의 본질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바로 이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에 요한 1서 4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 일4:15)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적 생명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생명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내가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인데도 어느 날인가 곤고한 때가 있습니다.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심지어는 숨을 쉴 수도 없습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먹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장소도, 그리고 갖고 싶은 물건도 없습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놓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무거운 중량감을 느낍니다. 왜 그럴까요? 생명이 결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를 만납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데 기쁨에 넘칩니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보니까 자기도 하나님을 향해 살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치기 시작하고 하나님께 자기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를 생각하며 마음에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다시 생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독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자기만 그것을 누리는 것으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이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그 생명은 곧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이런 영적 생명을 소유한다는 것이며,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너무 하고 싶어서 행한 것 때문에 자신이 고통을 받기도 하고, 자신이 자유롭게 선택한 것 때문에 노예처럼 속박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그런 의미에서 자유를 부여해 버리면 인간은 반드시 불행하고 비참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질서 속으로 불러들이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이 모든 세계가 창조되고 인간이 지은 바 되고 영혼이 만들어진 그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당신이 이익을 받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인간과 피조물이 그 자리에서 가장 완벽한 쉼과 자유를 누릴 것이고, 그 존재가 빛날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죄인들로 하여금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심으로 이 일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요한1서 4장 16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결론을 내리면 자유는 자신이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선택하고 자유롭게 언제나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상태가 자유로운 상태인데 인간은 죄 때문에 내버려 두면 마음속으로는 본래의 자유를 갈망하지만 결국은 그 자유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자유에 대한 선택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모순율 때문에 일관되게 어떤 행복을 위해 선택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선택을 하게 되어서 마지막에는 욕망에 시달리며 자신도 자기를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를 모르는 불가해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이유입니다. 바로 그렇게 어디로부터 왔고 우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고 그리고 무엇 때문에 우리가 자유를 잃어버렸고 그리고 어떻게 자유를 회복해야 할지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설정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다시 오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은 간절한 소원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당신에게 억압받는 노예가 되기 위해서 우리를 그렇게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완전한 자유인으로 그렇게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그 모든 속박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인간은 스스로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속박 받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이 올바르게 행복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자유이고 이 행복은 주관적으로 기쁘게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객관적으로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이 천지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죄로 자유를 잃어버린 것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지만 아무리 그것을 되찾으려고 자유를 선택해도 인간은 더 이상 그것을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가항력적인 이 죄 속에서 속박 받고 사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바로 이 자유를 위해 우리를 살게하려 하십니다. 예전에는 그 자유를 가지고 죽음을 향해 달려갔지만 이제는 그 자유를 가지고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이 충만한 자유를 누리고 이전에 누구도 살아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살 사람이 없는 여러분만의 독특한 인생을 어두운 밤하늘에 한 줄기 빛처럼 그리면서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유인으로 사는 길(2018.8.5. 주일오전2)
자유와 행복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자유란 속박이 없이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유롭다는 것은 한 인간이 이런 상태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자유로운 주체로 창조하셔서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유에 대해서 이처럼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 없이는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자유와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II. 자유와 인간의 행복
A. 자유로운 주체
지난 시간부터 우리는 자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배우고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로 창조하셨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면 주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 한번쯤 설명을 듣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데도 매우 큰 유익을 줄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한 그리스 철학자들 중 다수는 이 주체를 객관적이고 고유한 성질을 담지하고 있는 자라고 보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기독교 세계가 되고 이 사람의 철학을 토대로 신학의 금자탑을 이루었다고 알려진 토마스 아퀴나스에 오게 되면 이 주체의 개념은 다분히 지성적으로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아퀴나스는 주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영혼 안에서 생각하고 결정하는 인자라고 보았습니다. 그 후에 관념론이 유행하고 나서는 인간을 지성적인 존재를 보는 것은 많이 거절하고 주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 혹은 의식과 감각의 복합무리라고 보았습니다. 에른스트 마하(Ernst Mach, 1838-1916)라고 하는 사람은 ‘감각의 분석’이라는 자신의 유명한 책에서 감각과 인간 판단에 대해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주관은 주관적인 감각들로 구성되지만 일단 구성되고 난 후에는 다시 감각에 반작용한다.” 쉬운 말로 말하면 많은 사물에 대한 감각들이 한 사람 안에서 주관을 형성하고 그것들은 다른 감각 사물들과 접할 때에 판단하는 작용을 한다는 뜻입니다.
주체에 대한 의미 있는 사상적 전환은 뜻밖에도 칼 마르크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주체라는 말을 이해할 때에 다분히 운동권에서 쓰는 전용어인 것처럼 이해하는 이유도 칼 마르크스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이전에 인간의 주체를 지성으로 보거나 혹은 느낌, 감정으로 보는 견해들을 거부하고 이 주체를 사회 안에서 찾았습니다. 즉, 주체란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사회적 인간의 다름이 아니다 라고 보았습니다. 인간은 원래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야 하는데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주체로 살도록 태어났는데 세상은 이미 판이 짜여 있습니다. 그 판대로 살도록 강요를 받고 있는 것만큼 인간은 참된 주체성의 자유를 상실한다는 것입니다. 이 판은 바로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을 억압하고 권력 있는 자들이 없는 자들을 짓누르는 방식의 판이기 때문에 그 판에 순종하는 것은 주체적인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고 자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주체란 바로 이런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가기 위해 이 현실과 투쟁하고 때로는 도저히 맞설 수 없는 이 구조를 전복시키기 위해 혁명을 일으키는 것까지 포함하는 행동으로서 인간은 참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모든 역사속의 주체에 대한 생각들을 종합해 놓고 보면 결국 이 주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두 가지로 정의를 할 수 있고, 이것은 성경의 지지를 받는 견해입니다. 첫째는 개별적으로 주체란 인식하는 능력과 기능이며 이것은 하나의 영혼에 속한 작용입니다. 동시에 주체란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을 행동으로 무엇인가 변화를 가하여 세계를 의미 있게 하고 자신도 의미 있게 행동하는 임자가 바로 주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서로 다른 영혼을 주셨고, 그 영혼 안에서 각자는 독특성을 갖습니다. 그 독특성 안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선택하고, 의지적인 결정을 하는 임자가 바로 주체입니다. 이는 성경에서 입증하고 있는 명백한 사실입니다. 동시에 주체는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에 어떤 변화를 가함으로 자신도 의미를 찾고 세상도 의미 있게 하는 임자가 바로 주체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아름답고 선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최초의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창조한 세계는 완전히 선하고 완전히 아름다우니 아담 너는 손도 대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완전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이었지만 인간이 거기에 무엇인가 변화를 줌으로써 세상은 더 아름다워지고 더 선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세계였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짐승들을 창조하시고 그것으로 끝내셨지만 아담은 그것들의 생김새와 활동하는 특징을 보면서 이름을 부여하게 됩니다. 지시할 수 없이 무리지어 다니던 짐승들이 이제는 종류별로 그 이름을 고유하게 부여받게 되었고, 그 세상은 이름이 붙여지지 않은 세상보다 아름다웠을 것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체란 하나님께 창조된 영혼 안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할 뿐 아니라 주어진 현실을 의미 있게 살아가는 임자라고 말해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당신의 형상을 주셨습니다. 이 형상은 생김새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물을 그 사물 되게 하는 독특한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징입니다. 이것을 유일하게 인간에게 부여하셔서 하나님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이해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영적인 교류가 가능한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옆으로는 사람들을 알며 아래로는 자연 만물들을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이 세계와 자신과 이 모든 사회를 지으신 뜻을 따라 의미 있는 삶을 주체적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인간에게 주셔서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그것을 실행하게 하셨으니 이는 인간을 하나님 당신 닮은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에 태어났으니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도 하나님은 세계를 지으신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으니 또한 사람을 지으신 의도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렇다면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 나라고 하는 독특한 개체를 지으신 의도가 함께 짝을 이루며 인간이 무엇을 향해 살아야 할지를 규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을 하나님 안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 사람들을 사랑하며 자연 만물들을 돌보고 더 아름답게 가꾸도록 우리에게 주체성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 주체성 자체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로운 주체로 산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준으로 그 주체성을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뜻과 인류를 지으신 뜻을 이해하며 개별적으로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계획을 실현해 가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인간의 도리이고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주체로 인간을 창조하셨으니 인간의 지위와 아름다움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주체는 참으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야 했습니다. 자유로운 존재란 인식하고 판단하고 행위를 함에 있어서 무엇에도 속박 당하지 않는 독립적인 존재임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것에도 속박 받지 않는 절대적인 자유를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무엇을 하도록 강요하는 존재도 없고, 무엇에 의해 강요를 받음 없이 행하시니 하나님은 절대적인 자유를 누리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창조되었고 인간도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누릴 자유를 폭넓게 지정해 주셨으며 그 안에서 인간은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그 커다란 자유를 누리는 대신 하나님이 지정하시지 않은 자유를 누리려고 하는데서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은 평범한 나무 실과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셨고 그것을 따먹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언약에 대한 파괴라고 간주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물들이 있었고 따먹을 수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실과가 있었지만 최초의 인류는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욕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처럼 되는 것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정되지 않은 자유를 향한 강한 욕망을 갖게 되었고, 결국은 실행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독립적으로 그 일을 한 것이지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깊은 타락에 빠지게 되고 죄는 물밀 듯 들어와 이제는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사실은 자유 없이 노예 상태에 매인 그런 인간이 되어버리고만 것입니다.
이것을 그림처럼 잘 설명해주는 성경의 한 비유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그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모자라는 것이 없이 풍족하게 누리면서 살았고, 그 위에 아버지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생활에 대해 숨이 막힐 듯한 속박을 느꼈고, 그리고 그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허락되지 않은 자유에 대한 욕망이 자유로운 그를 속박 받고 있다고 느끼게 만든 것입니다. 돌아올 유산을 미리 받아서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허랑방탕하며 사는 동안에는 자유가 있었습니다. 술 마실 친구와 함께 쾌락을 즐길 여자들이 있는 동안에는 아마 자유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상 자유가 아니라 엄청난 속박으로 들어가는 길임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흉년이 왔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을 것이 없게 된 즈음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사실은 자유하게 하는 길을 들어선 것이 아니라 속박 받는 길에 들어섰음을 깨닫게 되었고 허랑방탕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궁핍을 느끼면서 자신은 자신이 살던 아버지의 집이 얼마나 풍요롭고 자유가 넘쳤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회개하며 아버지께로 돌아갔을 때 아버지는 그를 맞아주셨고, 그 집안에 살게 하셨으나 예전에 느꼈던 어떤 속박도 느끼지 않는 자유로운 주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먹도록 허락하셨을까?’ ‘아니, 그것을 왜 만드셔서 인간에게 유혹거리가 되게 하셨을까?’ 라고 의문을 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이 그것을 선택하였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실행에 못 옮기게 하셨다면 인간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을 텐데 왜 그러셨을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여기에서 하나님의 탁월성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의 위대성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처음부터 당신 닮은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를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자기가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자유 의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인간이 선이든지 악이든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로운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수동적인 기계처럼 창조하지 않으시고 당신처럼 영혼을 가진 독립적인 주체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매우 존귀하게 여기셨고, 그리고 당신의 세계가 파괴되고 죄가 들어오는 것보다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그대로 인간에게 맡겨주시는 것을 더 소중하게 생각하셨기 때문에 인간은 타락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했다고 하는 것은 악을 선택했다는 것이고, 인간이 악을 선택한 것이 실행되어 창조세계가 파괴되었다고 하는 것은 원래 그 인간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로 창조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교육의 차원에서 자녀들에게 효도 교육을 시킵니다.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이렇게 하라고 타이르거나 혹은 교훈을 하거나 때로는 책망을 해서 효도의 행위를 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에 그것이 충분히 기쁠 리가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에 진정한 기쁨을 주는 효도는 이런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는 이 자녀가 부모의 은덕을 생각하고, 부모를 향한 자신의 도리를 이해하면서 그 부모에게 효도가 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부모는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자기가 선택한 선한 효도는 강요된 효도가 줄 수 없는 탁월한 기쁨을 부모에게 줍니다.
아담이 악을 선택했으니 결과론적으로 나쁘게 되었지만 만약 이 사람이 예전처럼 위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선한 행실을 결정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섬겼더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얼마나 큰 영광과 기쁨을 받으셨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위대한 존재로 창조하셨는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려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주신 의지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타락한 아담의 후예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선한 일을 스스로 할 수 없고 더욱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은 행할 수 없으니 이것은 죄인의 처지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들을 하나님을 향해 선을 행하도록 당신의 은혜로 자극하셔서 의지의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고 선을 행한 사람은 그것을 행한 자신보다는 자기의 의지를 그렇게 힘주신 하나님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을 행할 때에는 하나님의 도움으로 악을 행한 것이 아니니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여 악을 행할 능력이 인간에게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언덕 위에 짐을 잔뜩 실은 큰 트럭이 하나 서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브레이크가 고장이 나서 하는 수 없이 언덕에 차를 세워 놓고 큰 돌멩이 네 개를 바퀴에 괴어 두었습니다. 차는 안전합니다. 그런데 그 네 개의 돌멩이를 빼버리자 아무도 그 차에 손을 댄 사람이 없는데 차는 언덕 아래로 굴러 내려가 부딪치는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립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물리학적으로 짐을 잔뜩 싣고 언덕에 비스듬히 서 있는 자동차는 이미 중력의 작용에 의해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의 처지가 그러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만약 우리 인간들을 무작정 자유롭게 내버려둔다면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최대의 악밖에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선악 간에 자유롭게 주체성을 가지고 선택할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고, 이 범위는 매우 큰 것이어서 하나님께 도전하는 자유까지도 허락을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얼마나 존중되었는지 악한 의지로 당신의 뜻을 거스르고 창조 세계에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되었는데도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즉, 악한 의지로 당신의 뜻을 거슬렀으나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닮도록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로운 주체성을 침해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참된 자유는 인간을 인간 스스로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 그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와 함께 어울리면서 인간은 자유를 누리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인간이 죄가 없이 완전했지만 그러나 언제든지 그 완전한 것이 깨질 수 있는 불안한 존재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고, 타락한 후에는 천성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죄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내적인 죄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은 바로 그렇게 자유를 잃어버리고 노예처럼 속박된 사람들을 진리로 자유케 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유의지론 제 2권에서 다음과 같이 의미 있는 발언을 남깁니다. “우리의 자유는 우지가 자신을 진리에 복종시킬 때 옵니다. 이 진리는 우리를 죽음, 곧 죄의 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신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영혼은 평화안에서 진리를 누리지 못하는 한 어떤 자유도 누리지 못합니다.” 즉, 노예 상태로 속박된 인간은 그 속박의 상태에서 풀려나기 위해 진리를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은 왜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를 인식론적으로 관련시켜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감각적인 사물들의 세계를 육체를 통해 볼 뿐 아니라 정신으로 감각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세계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죄가 들어온 후에는 이 위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사라져 버리고 육체로 볼 수 있는 감각의 세계들로 그의 마음이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 분에게는 키가 있었고 체중이 있었고 얼굴에 빛깔이 있었고, 모양새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물들을 볼 수 있는 육체의 눈을 가진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볼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이렇게 감각적인 것에 매여 있는 인간에게 주목받기 위해서 그렇게 감각으로 아는 모든 인간들이 감각으로 당신과 접한 후 진리의 말씀에 가까이 다가오게 하기 위해서 예수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진리이신 이유는 이 분 때문에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고, 모든 만물의 법칙이 그 분 안에 있어서 그 분이 친히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 분 자신 안에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모든 지식을 보고처럼 담으셨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을 곧 진리를 안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누구든지 예수를 안 사람은 이미 진리를 안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성을 가지고 살도록 창조하셨고,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죄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천부의 자유와 주체성을 상실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스스로 죄에 매여 노예 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처지가 되었고, 그 노예의 상태에서 행하는 모든 노예다운 집들도 결국은 자신의 그 의지 안에서 행하는 것이 되었으니 악에 대해 자유로우나 선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자유로우나 사실은 속박 받는 필연 때문에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역설적인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이런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으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음으로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B. 인간의 행복
하나님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롭고 자유로운 주체로 살게 하시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하시겠습니까? 모든 것이 당신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당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니 모자라는 것이 있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종종 눈물을 흘리며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오도록 간곡히 당부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을 받아야지만 행복하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스스로 만족하시고 당신 자신이 행복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신명기 6장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13장 3절에서는 종종 하나님이 이 사랑을 시험하신다고 말합니다.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시험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순전하도록 당신 사랑하도록 만드시는 것일까요? 당신에게는 모자라는 아무것이 없는데 왜 하나님은 우리보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하시고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큰 징벌을 내리셔서 우리를 비참하게 심판하실 것처럼 위협하시면서 까지 우리로 하여금 당신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여러분들을 위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돌아올 이익은 티끌만큼도 없는데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진정으로 자유로운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강력하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는 인간 자체로서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인간이 누구인지가 규정되는 것입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듯 하나님께로부터 낳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있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향해 죽을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배우는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의무는 공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삼라만상 모든 것들 중 그렇게 공부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습니다. 지난주에 책을 읽지 않는다고 많이 야단을 쳤더니 도서관에 사람이 많이 늘었다고 합니다. 그게 정말 야단을 맞고 책을 읽으려고 온 건지 너무 더워서 피서를 하려고 온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거기를 가득 채운 사람들이 평일에도 책을 읽고 있었으니 좋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인간이 무엇인지, 내가 누구인지를 배우고 동시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와 사회를 배우기 위해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배우고 알면 알수록 그 모든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유를 누리게 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끊임없는 지식의 습득 속에서 무지했던 자신을 깨우치고 하나님을 향하여 자유로운 주체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잘 믿는 길은 아는 것이고 그리고 참으로 잘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에 대해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논리로 우리를 설득한 위대한 사상가입니다. 그의 논리를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두 번을 반복할 테니 가슴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이 어떤 사람에게 말합니다. “사람아, 그대가 진정으로 믿고자 하느냐 그러면 너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설교를 이해하여라. 사람아, 네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하느냐 그러면 너는 하나님을 믿어라.” 반복하면 이것입니다. “네가 진정으로 믿고자 하느냐? 그러면 너는 이해하려고 하라. 그러면 마지막에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믿게 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하느냐? 그렇다면 너는 믿어야 한다. 그런데 그 믿음은 사랑이다.” 이런 논리입니다. 다시 설명을 하면 이런 뜻입니다. 인간이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잠잠히 자신의 이성을 동원해서 자기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해는 믿음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나면 그 다음에 하나님을 믿어야 하겠다는 결심이 생기는 것이고, 그렇게 믿음으로써 비로소 설명할 수 없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이로써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오랫동안 교회에 나와도 혼미한 가운데 어둠 속을 지나는 사람들은 먼저 신앙을 갖기 전에 이성을 되찾아야 합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이해하려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여러분들에게 오랫동안 가르쳐 온 명제, ‘모든 하나님의 은혜는 이해에서 옵니다.’라고 한 명제의 뜻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려고 애쓰고 나면 거기에서 답을 얻게 되는데 그 답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는 내가 알 수 없구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성이 설득되지 않으면 믿어야 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에 잠자는 자처럼, 조는 자처럼 그렇게 교회에 다니고 결국은 마지막에 구원받지 못한 채 인생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이해하고 나면 하나님을 믿게 되는데, 믿게 된다는 것은 곧 신뢰를 동반한 사유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사랑을 가져옵니다. 믿는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은 동의어입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진정으로 믿을 수 없고 신뢰할 수 없는 대상을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시간 안에 있는 존재로서 영원하신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고 말하는 이 진리에 대한 지식은 우리들이 학문의 법칙을 이해하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추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리를 지식으로 아는 것이고, 그렇게 진리를 아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자유를 주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것은 그 진리를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내 것으로 삼는 것, 그 진리를 누리는 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이 자유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인간 인간을 지금처럼 고유하게 창조하셨고, 누구도 우리와 꼭 같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을 자유로운 주체로 창조하셨고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임자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임자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강조하신바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인간은 비로소 눈에 보이는 이 수많은 감각적인 세계에 따라 휘둘리는 존재가 아니라 이 영원한 세계의 빛을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주님이 주신 인생의 가치를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은 아무도 산 적이 없고 살 수도 없는 인생이고 나만의 독특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살아줄 수 없고, 나도 남의 인생을 살 수 없으니 남이 나를 부러워하는 것도 온당치 않고 내가 남의 인생을 내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부러워하는 것도 비인간적인 것입니다. 오히려 진정한 삶의 가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삶의 의미를 알고 자유로운 주체로서 오늘을 누리며 영원을 향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먹고 마시고 보고 듣고 감각을 느낍니다. 이 모든 일들은 눈에 보이는 사물들이 우리의 육감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감각 세계에 우리의 정신이 모두 묶여 버린다면 우리는 결코 자유로운 주체로 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때로는 부요하고 때로는 가난합니다. 어떤 때는 만족을 느끼지만 어떤 때는 괴로움을 겪습니다. 어떤 때는 내 뜻대로 되는 때도 있지만 더 많은 순간에 모든 일들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깨닫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한계 안에서 머물고 전개되는 우리의 감각적인 현실에 따라서 울고 웃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마치 요동치는 풍랑 이는 바다위에 떠 있는 하나의 쪽배 같은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자유로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으며 언제 잃어버릴 지도 모르도 기쁨과 슬픔 사이를 롤러코스터처럼 오가는 안정성이 없는 인생을 어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십니다. 그 진리의 빛으로 우리의 인생을 비춰봅니다. 형통하고 그리고 가슴이 터질 듯 기쁜 때도 그 진리의 빛은 그 인생의 의미를 가르쳐 주며 우리로 교만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시련을 만나고 괴로울 때 우리의 인생이 고통뿐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진리의 빛이 비추어 주어 의미를 발견하게 도와줍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시련과 고난을 당하여 괴롭지만 의미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현실을 대면할 용기를 갖게 됩니다. 인생의 행복은 그렇게 물질세계에서 살지만 물질세계 너머에 있는 의미를 연결시키면서 하나님을 향해 사는데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통해도 교만하지 않고 시련이 와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살고 있지만 행복은 거기에 매이지 않는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인 이 진리는 감각세계를 너머 영원한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의 인간의 영혼이 영원으로부터 왔으니 현실을 육체로 살아가면서도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이 현실 세계에서 영원에 잇대어 사는 것이야 말로 인간의 자유와 주체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까지는 끊임없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우리가 바라기는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모두 하나님께로 가기를 바라지만 아직 살아있는 이 동안에는 한편으로는 이 세상에 발을 담그고 또 한편은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할 수 있으니 우리가 그 안에 거할 때 하나님 당신 자신이 무한한 행복이시기 때문에 당신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을 복되게 하십니다. 디모데전서 6장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안에 모든 인간을 불러들여 하나님 안에 있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동물에게 주시지 않는 탁월한 판단력을 주셨으니 이것은 물질에 매이지 아니하고 그 물질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이 능력은 죄 때문에 심히 어두워졌으니 진리의 빛을 필요로 합니다. 인간의 탁월성은 감각적인 것을 판단하여 거기에서 의미를 건지는데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된 종교』 제 29장 5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비이성적 동물에게 생명과 감각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하지만, 인간 정신의 탁월한 점은 감각적인 것을 감지하는데 있지 않고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 능력에 있다.『참된 종교』 29.53.”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판단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왜 많은 사람들이 이런 판단력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에게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고 그리고 파생적으로는 그가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여 곰곰이 그가 자신의 인생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성을 사용하여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현실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이때 그는 믿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게 되고 이는 사람의 설득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무한한 행복이시고 인간과 모든 만물을 당신 안에 있게 하심으로 쉼과 행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당신을 떠나 안정을 잃어버리고 자유롭지 않고 속박되며 주체성이 없이 휘둘리는 모든 인간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십니다. 당신을 사랑함으로 당신과 온전한 관계를 맺도록 초청하십니다. 당신의 진리를 알게 하심으로써 얽매였던 영혼들을 자유하도록 만들어 주시고 그 자유를 가지고 행복한 존재가 되도록 이끄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바로 참된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이 어떻게 영혼을 가진 인간을 자신 안에 두실까요? 당신의 뜻을 멀리 떠나 속박 받는 인간을 자유로운 주체로 살게 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밖에 있는 그 인간을 불러들여 당신 안에 있게 하실까요? 하나님은 진리를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진리를 비추어 주심으로써 그로 하여금 예전에 알지 못했던 자신의 인생의 진실을 보게 만들어 주시고, 그가 믿을 때 성령으로 역사하심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의지의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전에 방탕할 때에 가졌던 자유에 대한 모든 갈망을 끊어버리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사랑과 우주의 질서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변화되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로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행복이신 주님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된 주체로 사는 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 2:20)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이 편지를 쓸 때 갈라디아 교회는 두 가지 극단적 신앙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고, 또 한쪽은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에게는 율법이 필요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들을 권면하면서 우리의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왔으며 구원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20절에 와서 경험적으로 자신이 누리게 된 참된 자유스러운 주체의 삶에 대해서 말합니다.
II. 인간의 참된 주체성
A. 내가 산 것 아님
그러면 인간의 참된 주체성이란 이 사람이 무엇이라고 보았을까요? 아주 명료하게 두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첫째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면 어떻게 주체적인 인생이 될 수 있을까요? 주체성이란 곧 자신에게 주인 된 성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한 것이 어떻게 참된 주체성의 표현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서 말하는 ‘내가’라는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가? 입니다. 이 ‘내가’는 바로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던 그 자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했으니 이는 주체성을 잃어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속박 받으며 살던 그 자기가 이제는 사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으셨지만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을 그 모든 죄에 구원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창조되었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가운데 그 사람이 가장 자기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인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고백을 하고 있는 사도 바울도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예전에 그는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유대주의의 노예였고, 율법의 노예였고, 자신의 욕망의 종이 된 삶이었습니다. 자신은 그것이 가장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이라고 믿었으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유가 무엇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 종이 된 삶을 자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것이 바로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자유스럽게 살았다고 생각했던 삶은 죄와 욕망의 그리고 편견에 사로잡힌 노예가 된 생활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그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자신을 떠받들며 그런 자신을 주인 삼는 삶을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그는 예전의 삶이 노예된 삶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참된 주체성은 순수한 자기로 사는 것입니다. 그 순수한 자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만 순수한 자기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지은바 되었고 하나님 품 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갈 때에만 가장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참된 주체성은 순수한 자기로 사는 것이고, 이 순수한 자기의 발견은 하나님 품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사랑에서 멀리 떠나 죄에 빠져 주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욕망의 노예가 되고 죄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는데 그 삶이 어찌 자유로운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제 그런 생활은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탕자가 모든 것이 인자한 아버지가 계시고 모든 풍족한 것이 있는 집에서 사는 동안에 자유를 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 욕망과 그리고 헛된 바램이 싹트는 그 순간 인자한 아버지는 자신을 속박하는 아버지로 느껴졌고, 평화로운 집안은 구속받는 환경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유산을 청구하여 그것을 정리해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는 자유로운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욕망의 노예된 상태였습니다.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와 욕망에 매일 때 우리 인간은 참 주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아왔지만 내가 좋아서 산 것도 아니고, 싫어서 산 것도 아니고, 내가 산 것도 아니고, 남이 살아준 것도 아닌 애매한 인생을 살게 되고 그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진정한 기쁨과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교회 가던 14살 2개월 되던 어느 주일, 왜 교회를 가던 길에 논둑에 엎드려 그렇게 통곡하며 울었을까? 죽는 것은 무섭지 않았지만 사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무시무시한 두려움은 자신의 삶에 자기가 주체가 되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었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누구든지 살 수밖에 없고,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 그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않으면 동물로서 사는 것과 별반 큰 차이가 없습니다.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고 즐거울 때 웃고, 슬플 때 괴로워하면서 사는 것은 그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그것이 인간이 이 땅에 살아있는 최종적인 목적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미를 발견해야 될 텐데 그러지 않고는 자신의 인생의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토록 내가 누구인지를 궁금해 하고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궁금해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그 대답이야말로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필요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왜 나는 여럿이 아니고 오직 하나일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지만 정말 행복한 삶을 살 것인가?’ 이런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한 이유는 주체적인 인생을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전에 자유로운 것 같았으나 유대주의에 매이고 편견에 사로잡히고 욕망에 이끌린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보는 그 순간 그 분이 누구인지를 그는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 분이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 분이 왜 나무에 매달려 죽으셨을까? 그것은 죄 때문인데 자신의 죄 때문에 죽었더라면 자신이 그 분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없지만 우리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못 박히신 십자가는 한편으로는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어떠한 사랑으로 자기를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다시는 자기 자신이 욕망과 죄에 이끌려 자기를 주인 삼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작정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을 받는 그 순간 이러한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모두 깨뜨려지고 자신은 이제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고백을 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생긴 대부분의 갈등과 괴로움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향해 마음의 문을 더 활짝 열고 만약에 우리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자유와 진리를 가지고 고민한다면 우리는 그런 것들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속박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께서 사심
사도 바울은 두 번째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거짓된 욕망과 죄에 휘둘리는 거짓된 자아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 그는 자신의 죄를 알게 되었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이 믿음이 그에게 사랑을 가져왔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고난의 형벌이 바로 그 동안 자신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주인 삼으며 살아온 마지막 결과가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에게 불순종과 죄를 버리게 하였습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충만한 사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말씀드리려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이야말로 가장 자유로운 삶이고 가장 주체적인 삶입니다. 우리들이 욕망에 이끌려 사는 것은 자유 같으나 사실은 속박이지만 성령에 이끌린 생활은 누구도 그 안에서 속박을 느끼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렇게 원래 하나님의 영 안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는 없으셨지만 우리와 똑같이 고난과 시련, 궁핍과 결핍, 그리고 배신과 핍박 속에서 사셨던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그분의 주체성을 해칠 수 없었고 그 분의 자유를 침탈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관계 속에서 자유로운 주체로 인생을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떤 욕망이 예수를 휘둘렀나요? 어떠한 그릇된 죄와 불순종이 그 분을 종노릇하게 하였나요?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했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습니다.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주체적인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강요된 삶을 사신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당신 자신이 살고 싶었던 삶을 사셨는데 그 삶이 바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 받게 하고,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사랑하게 하시는 화목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십시오. 그 밤하늘의 별이 아름다운 이유는 별들이 빛나기 때문입니다. 크기와 거리, 빛깔이 같지 않고 다양한 별들이 하늘에 반짝입니다. 저마다 고유한 빛을 내며 찬란한 빛을 온 하늘에 퍼지게 하고 있기 때문에 밤하늘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밤하늘의 별처럼 독특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유한 인간성을 주셔서 예전에도 없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사람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누가 누구를 비교할 필요도 없으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위대한 작가의 예술품이니 그것은 서로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아름답고 소중하나 죄의 때가 묻었고, 불순종에 찌끼가 끼었습니다. 그것을 모두 닦아내고 나면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 됩니다. 찬란한 불빛 아래 까만 벨벳 위에 그 고유한 빛을 발하는 보석 같은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래 우리에게 주신 것들 중 나쁜 것은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가 획득한 것들 중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죄와 욕망 때문에 불결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회개와 믿음으로 깨끗이 씻어 정결케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님이십니다. 그 분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실 때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보석처럼 소중한 존재이고,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그 분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존재들입니다.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처럼 서로 다른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해 우리를 자유로운 주체로 지으셨습니다. 죄와 욕망, 불순종, 이런 것들이 우리의 아름다움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자유를 찾으나 부자유한 삶을 살고, 주체로 살고 싶으나 사실은 노예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나의 나됨을 버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찬란하게 빛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이라고 이야기할 때 이 의미는 자기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과 그리스도가 하나가 되어 진정한 자기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것만큼 진정한 자신이 됩니다. 정결해지는 것만큼 거짓된 자기를 버리게 되고 예수를 충분히 본받는 것만큼 참 자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얼마나 많은 날들을 이런 거짓 자아가 주인이 되어서 우리를 종 삼으며 살아오게 하였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삶이 너무나 지치고 고단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을 때 그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나를 주인 삼은 삶을 모두 버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충만하게 사심으로써 거짓된 나는 버리고 참 나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오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라는 고백은 여러분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은혜를 받았을 때 경험한 바였습니다. 우리는 한없이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영혼으로 이 땅에 얽매인 것이 없이 주님의 은혜 안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한없이 자유로웠습니다. 성령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우리도 행하기가 싫었고, 주님이 좋아하는 일은 우리의 생명을 드려서라도 꼭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삶을 살면서 이 연합의 신비를 누렸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아무리 그리스도가 충만하게 우리 안에 계셔도 우리를 속박한다는 것은 티끌만큼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우리는 얽매였던 모든 삶을 내던지고 자유를 맛보게 되었으며 종 되었던 삶에서 풀려나와 이제는 나 스스로 우리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이제 바로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고,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믿음 안에서 살아감
이 삶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답을 줍니다. 믿음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처한 환경을 탓하고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을 원망하고, 자기가 어쩔 수 없이 처하게 된 이 현실을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에 불행하게 된 것이 다른 사람 때문이고, 자기가 놓여있는 불만족스러운 상황이 환경 때문이라면 그때 여러분들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만약에 우리가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우리 인생에 대한 우리의 주체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또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르면 우리에게 원망할 사람이 모두 없어질까요? 그리고 모든 환경이 우리가 행복한 환경이 될 수 있을까요? 아마 그런 일을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몇 달 전에 어느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습니다. 라디오 방송국이었기 때문이 굳이 갈 필요가 없이 전화로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런 저런 신앙적인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대화를 한 다음에 아나운서가 이런 요청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지금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애청자들 가운데는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살고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그분들에게 무슨 위로의 말씀 좀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인생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했더니 방송국으로 막 문자가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인생이 원래 그렇습니다.’ 라는 말이 어떤 말보다 위로가 됩니다. 왜요?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너무 힘들지만 내일은 괜찮아질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사실이 아닙니다. 오늘 힘든 사람은 내일 일어나도 여전히 힘듭니다. 그리고 ‘조금만 참으면 좋은 일이 올 것입니다.’ 그것도 대부분 사실이 아닙니다. 그런 사탕발림으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그저 툭 털어놓고 “힘들죠? 고단하죠? 인생이 원래 그렇게 고달픕니다.” 그 말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체념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때 오히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야 되겠다는 의식이 우리 안에 생기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사탕발림하고 싶지 않습니다. 힘듭니다. 그리고 힘겹게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대체 이 원인이 무엇일까?’ 고민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돈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는 것이 없는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질병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깨어진 인간관계 때문에 인간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의 뿌리를 타고 내려가 보면 하나의 뿌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안에서 참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받으며 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애들이 아침마다 학교가면서 손을 벌립니다. “엄마, 과제물 사게 돈 줘.”, “엄마, 신발이 다 떨어졌어.”, “엄마, 교복을 다시 사야되겠어.” 손을 내밉니다. 그러면 엄마 마음은 너무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왜 힘들까요? 돈이 없어서 힘든 것입니다. 이게 뭐가 힘들겠습니까? 만약에 돈이 넉넉하다면 갈 때 카드 한 장씩 주면서 “네 소신껏 사서 쓰고 카드는 저녁 때 반납해라.” 그러면 될 것입니다. 인생사는 것이 원래 고달픕니다. 원래 힘듭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말이 의심이 된다면 예배 끝난 후 가까이 있는 지체들과 만나서 차 한 잔 마시면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대화를 나눠 보십시오. 누구에게나 십자가 없는 사람 없고, 힘든 것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모두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애들이 아무리 많이 돈 달라고 해도 달라는 것보다 돈이 훨씬 많으면 힘들지 않습니다. 인생은 어차피 힘들고 고달픕니다. 그런데 기쁨과 사랑과 은혜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으면 사는 것이 좀 힘들고 어려운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멜로디가 됩니다.
보십시오. 산에서 물이 흘러내리면서 돌멩이에 부딪치지 않는다면 침묵만이 흐를 텐데 돌멩이에 부딪치니까 재잘재잘하는 물소리들의 노래가 되어서 숲속에 메아리치면서 숲이 숲다워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얼마나 놀랍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산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끝이 없다면 침묵 밖에 없겠지만 부딪히는 돌멩이가 있기에 웅장한 폭포 소리가 나면서 우리는 그 먼 산까지 찾아간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안방에서는 들을 수 없는, 볼 수 없는 소리요 풍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가 충만했던 때에 우리의 인생에 문제가 없었나요? 힘들게 하는 자식들은 여전하구요,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어렵게 하는 남편과 아내, 시집 식구들, 그리고 주위의 사람들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달라고 요청하는 삶의 현실보다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늘의 자원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는 즐거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인생은 결국 에너지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이 삶의 에너지로 가득하게 될 때 거기에서 관용도 나오고, 그 다음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도 나오고, 남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무엇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끝” 이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 즉시 그 위대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어서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보십시오. 이것은 예수님과 같은 죄 없는 육체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상황과 현실을 초극한 그 영화의 때에 우리들이 누리게 될 그 완전한 육체도 아닙니다. 여전히 죄의 영향을 받고, 욕망에 흔들리기 쉽고,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 갈등하며 살아가야 할 그 육체, 안 먹으면 배고프고 힘이 빠지고 먹어야만 살 수밖에 없는 그런 평범한 육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내가 육체 가운데 살아간다.’ 이것은 불리한 것이지만 이것을 극복하게 하는 무엇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으나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삶이 비관적이지만 않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리스도의 무엇을 믿는다는 뜻일까요? 오늘 성경은 세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나를 사랑하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를 사랑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개들도 데리고 나가보면 주인에게 사랑을 받는 개들은 자신이 있습니다. 자신감이 있고 그래서 큰 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집에서 맨날 얻어맞고 이러는 개들은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점에서 매우 공격적입니다. 그래서 야수적인 성격을 띱니다. 그러면 개도 그런데 개보다는 비교할 수 없는 영혼을 가진 인간은 어떻겠습니까? 남편으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는 인격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아내는 어디 가든지 당당함이 있습니다. 아내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고 있는 남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로부터 그런 충분한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구김이 없이 살아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매우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 그 아이들 마음속에는 항상 어두운 그림자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을 살면서 어렵고 힘든 현실이 닥치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구나, 그리고 이 속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이런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고 원망하며 불평하고 살기에는 우리 인생은 너무 짧습니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며 살아야 됩니다. 그런 의미를 찾으며 살게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것이 의심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못 박힌 십자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해주는데 하나는 우리가 얼마나 커다란 죄인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죄인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면서 오늘 힘겹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나는 적어도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시면서 까지 구원하고 싶으셨던 사랑의 대상이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자녀들을 얼마나 사랑합니까? 그리고 아마 여러분들이 능력이 있다면 자녀가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을 것입니다.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에게 무엇인가를 금하는 이유는 그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모르고 여러분들은 알기 때문에 그것을 막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면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주신 모든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었고 주시지 않는 것 중에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믿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뢰,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참된 주체성을 유지하며 고달픈 현실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드는 힘인 것을 여러분들이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을 버리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사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 세상에 사는 지상 생애 동안에 우리를 위해 당신을 희생하신 모든 것을 가리키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는 그것이 사실 그리스도로서는 자기 자신을 버리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온전히 버리신 희생의 삶을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오히려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며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분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주셨으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아끼시겠는가 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인색한 분으로 보지 아니하고 능력이 모자라서 우리의 기도는 들으시지만 아직은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으신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을 따라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자기를 기꺼이 희생하셨으니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이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며 사는 한 그 분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이 다가와도 두 가지 사실을 믿으면 살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내게 나쁜 일을 행하실 수 없다는 믿음과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언제나 말씀으로 부르신다는 사실을 믿는 한 우리는 어떠한 시련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고단하고 힘겨운 삶을 살면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자기를 기꺼이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면서 용기를 얻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어떤 믿음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 아들은 누구일까요? 말구유에 태어난 아기 예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온 우주를 통치하고 계신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 아들입니다. 천하에 모든 권세를 그 아들에게 주사 그 아들은 이 온 우주와 인간 삼라만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늘에 나는 참새 하나도 그 떨어지고 나는 것을 알고 계시며, 들풀 하나에 깃든 그 모든 이삭까지도 헤아리시는 분이시니 그러한 사랑을 자연 만물도 받았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더 큰 사랑을 받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우리의 인생은 때때로 꼬이고 마음대로 안 되고 시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고통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봅니다. 이 온 우주를 하나님이 통치하고 계시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모든 세계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 같은 인간에 대한 인생의 계획도 그 분의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더욱이 그 하나님의 명을 따라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인류를 다스리시는 그 분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 그리고 나를 위해 부활하신 분, 나를 인생의 고난 속에서 만나주셨던 분, 그리고 가장 어려운 인생의 시기에 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시던 분 은혜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폭풍과 시련 속에서 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인생을 살았고, 그 믿음 때문에 우리는 어려움들을 극복하며 신앙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살게 하셨으니 과거에 그렇게 하셨다면 지금도 그렇게 하실 것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
문제는 우리에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날 사랑하신 그 사랑에 붙들려 감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자기 모두를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지만 그 분이 인색한 분으로 생각하고 그 분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통치하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내 인생도 그 분의 수중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고 하나님 바깥에서 무엇인가 자기 스스로 인생을 바꾸어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니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깊은 갈등과 고통의 심연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얻을 수 있는 행복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혹시 그것을 행복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우리의 착각입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니 오늘 이 말씀을 들은 여러분들은 과거에 자신을 속박하던 이 모든 원수 같은 삶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바로 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겠노라고 다짐해야 합니다.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어차피 이것이 인생의 현실이다 내게 필요한 것은 이것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것들을 짊어지고 맞서고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내게 자유를 주는 힘이다. 이 힘이 믿음에서 나는 것이다 믿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V. 적용과 결론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거짓된 자신으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한번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 그리고 온 인류에 딱 한번밖에 없는 나라고 하는 존재를 거짓된 나로 살면서 그렇게 허비해서야 어찌 인간의 도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거짓된 나를 버리고 진정한 자기를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그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충만하게 받고 믿음으로 살아가 이렇게 참된 주체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