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복음신학회 개회예배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녹취자 : 최영순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바와같이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싫어하고 유대교 완전주의자들의 가르침에 빠져 율법으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습니다. 따라서 친절한 문안인사도 없이 격렬하게 편지를 써내려 갔습니다. 그러다가 끝부분에 와서 사도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애정을 표했으니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랑이었습니다.
사도는 우리의 구원이 할례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오늘 이렇게 고백합니다. ‘누구든지 이후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하고 말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타스티그마타 투 예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해석이고 또 하나는 형상적인 해석입니다. 육체적인 해석은 물리적인 해석과 그리고 신비적인 해석으로 나뉩니다. 물리적인 해석 가운데는 한국교회에서 전통적으로 이 구절을 이해해 오던 핍박설이 여기에 속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예수의 흔적은 사도 바울이 헌신적인 복음사역을 하다가 핍박으로 말미암아 당하게 된 육체적인 상처를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에 나오는 속격인 투 예수는 바로 그 상처의 원인이 예수와 복음 때문임을 지시하고 있다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우리들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공정한 시각에서 갈라디아의 문맥을 본다면 이 주장이 합당한지 대단히 의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육체에 새긴 할례의 표를 자랑하는 갈라디아 교인들에 대해서 복음과 신앙에 유일성을 변증하면서 ‘너희들이 신체의 그 부분에 흔적이 있느냐 나도 내 몸에 또 다른 부분에 흔적이 있다’ 라고 맞섰을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율법과 복음, 육체와 영혼, 할례의 표와 예수의 형상을 수사학적 기교로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육체적 해석은 제의적 해석입니다. 이교도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신 앞에 헌신을 맹세하는 방식으로 자기 몸에 문신이나 혹은 흔적을 내곤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이렇게 자신이 그리스도께만 바쳐진 사람으로서 이러한 이교도의 관습에 따라 자신의 몸에 일정한 상처를 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들은 우리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신비주의적인 해석입니다. 이것은 바로 아시스의 프란시스의 전설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오상 곧 성은을 의미한다는 해석입니다. 이런 해석은 로마 카톨릭의 신비주의적인 전통을 따르는 해석입니다. 영적인 신비한 경험을 통해 육체에 상처가 났다는 이론들은 우리들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스티그마타 투 예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가장 좋은 해석은 이것을 형상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에 나오는 스티그마타를 신자의 내면에 있는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티그마타 투 예수는 예수를 닮은 결정적인 형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본문에서 읽고 있는 이 내용들은 이러한 논리가 될 것입니다. ‘너희는 할례로서 구원받은 백성의 표를 삼고자 하지만 나는 영혼과 마음에 예수의 형상을 지녔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임을 증거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상적 해석에는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노예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도망을 쳐도 자기의 소유를 알아보기 위해서 팔이나 혹은 등에, 어깨에 노예의 표를 새겼습니다. 그것을 이 사람들은 ‘스티그마’라고 불렀습니다. 노예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방지하였고 혹은 도망친 경우에는 그들의 스티그마를 보면서 노예의 신분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노예가 해방된 자라면 해방 문서를 가지고 자신의 신분을 입증해야 했는데 이런 스티그마의 전통은 노예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군인들에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오늘 갈라디아서 수신자들이 아주 친숙하게 이해하고 있는 로마시대의 스티그마 문화 그 전통을 배경으로 자신에게 그런 스티그마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가 말하는 바 스티그마 뒤에 나오는 투 예수라는 소유격이 지시하는 의미는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첫째는 자신의 스티그마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되어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의 노예로 자처하게 된 기원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노예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신적인 강제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기원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때문이었고 그를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복음을 위해 핍박받으며 살아가게 만든 것은 그의 은혜와 사랑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둘째로 그 의미는 사도의 자기정체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이 소유격은 노예의 원주인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스티그마타 투 예수라는 표현은 둘로스크리스트의 또다른 표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거의 모든 서신서의 머릿말마다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밝혔습니다. 오늘날 문맥에서는 가슴깊이 다가오지 않는 이 둘로스라고 하는 단어, 당시에는 아주 친숙하게 다가오던 노예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 아무 소유도 없고 그리고 자신의 몸에 대한 처분의 권한도 자기 스스로 지니지 않은 노예, 이것이 바로 사도의 자기인식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로 하여금 스스로 운명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선포적 사역에 자기를 붙들어 맨 일종의 아낭케 숙명같은 것들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노예가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 처럼 사도 바울에게는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가슴에 불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지 않고는 화가 있을 것 같은 그러한 강한 숙명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사도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를 선택하여 사로잡혀서 피할 수 없는 숙명에 매여서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온전히 자신의 생애를 불태우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그 핵심은 그노시스트 크리스트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아는 그 지식에 사로잡혔을 때 사도 바울의 방향없는 인생은 완전히 변화되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는 우리들이 아는 바 독특한 사도 바울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전에 여러 가지 많은 배경 속에서 구약의 전통을 따라서, 유대인의 전통을 따라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신학적인 편견과 심리적 편견이 있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과 유대인 이외에 다른 민족은 쓰레기라고 하는 사상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편견이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의해서 완전히 뭉개지고 그리고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난 그리스도 예수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가장 뛰어난 하나님 자신의 자기 현시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지식에 사로잡혀서 그가 바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그것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하는 표현이 여호와의 종과 관련을 갖는 것은 그누시스트 크리스트가 다트엘로힘과 갖는 관계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는 표현은 이미 구약에 에벳야웨사상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할 때 이것은 전혀 구약적 전통이 없는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적어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구약 선지자 사상의 재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신약에 와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이룬 표현이라고 봐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을 살펴보면 그들이 평범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중 한 사람이었던 사람이 어떻게 선지자가 되어서 그 시대와는 다른 사상을 그 시대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올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예고하고 율법을 해석하여 그 시대에 적용할 수 있었는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을 모든 다른 그 시대의 사람과 구별해주는 중요하고 결정적인 특징이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사건이었습니다. ? 이라고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만이라고 하는 이 선지자 소명의 공통적인 기사는 선지자들로 하여금 독특한 에벳야웨로서 적이 자기 정체성을 갖게하는 중요한 인식론적인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인신론적으로 뿐만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도 그 사람들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후에도 많은 요소들이 있었지만 이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다메섹의 체험은 구약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이 체험과 연장선상에 있고 신약적인 전환을 이룬 것이라고 보아야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의 체험을 통해서 그는 독특한 신적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소위 칼빈이 이야기하는 이 중의 신 지식중 구속주를 아는 지식을 갖게 되었고 이것을 통해서 막연히 알던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온전한 지식을 가짐으로 말미암아 창조주와 구속주를 동시에 아는 하나님에 대한 신적인 지식에 충만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은 교회의 하나님, 믿는 자들의 종교 영역에 있어서 국한된 하나님이 아니라 온 땅과 하늘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되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을 통해서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위대한 당신의 존재와 성품을 드러내 보여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에 희미하게 비치던 여호와를 아는 지식의 빛은 신약에서 기독론적인 전환을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찬란한 햇살과 같이 그의 지성속에 밀려들었고 그리하여 그는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계시의 빛 아래서 적어도 13권이나 되는 이 신약의 성사를 써 내려갔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신학교육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아주 혼탁한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알미뉴스주의를 넘어서서 이제는 그런 신학사상조차도 설교속에 담지 않는 탈신학적인 설교가 교회 속에서 보편화되고 있고 상업주의적인 사고방식들이 성공주의와 맞물려서 교회의 모든 이 아름다운 전통들을 흐려놓고 있습니다. 원래 바벨론과 대조되는 예루살렘의 특징은 크게 더 많이 성장해서 편만하게 이런 것을 특징으로 하는 나라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떠난 이후로 바벨론의 특징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더 많이, 더 크게, 그리고 더 엄청난 세력을 확장하는 것, 이것이 바빌론의 특징 아닙니까? 바빌론과 대조되는 예루살렘성의 특징은 크기나 부피, 넓이에 달려 있고 세속적인 세력의 크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특징은 거룩함입니다. 거룩함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찬란하게 알리는 계시의 전달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전달자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가치요,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심지어 자라나는 신학생들도 이제는 신학교에서 배우는 내용들은 목회현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공언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신학이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이제 신학교에서 한 것들을 다 버리고 새로운 목회의 방법들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어린 학생들이 이론 신학을 기피하고 이제는 어느 큰 교회가서 성장의 비결이나 배우기 위해서 기웃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미래의 한국교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학교들이 그렇게 학생들을 내버려두는 것은 아닙니다. 총신을 비롯해서 유수한 많은 신학교들이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을 가르치고 특히 칼빈을 비조처럼 여기고 있는 보수적인 신학교에서는 칼빈의 사상을 많이 가르칩니다. 우스갯말로 ‘바이블세즈’하면 이론이 있어도 ‘칼빈 세드’하면 이론이 없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칼빈은 추앙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칼빈도 제대로 연구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뒤로는 중세 철학과 단절하고 그 후로는 개혁파 정통주의와 단절되고 그래서 바다위에 떠 있는 외딴 섬 같은 기독교 강요 한권 달랑 가지고 우리가 칼빈주의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지적인 탐구도 훨씬 못 미치고 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왜 칼빈을 그렇게 비조처럼 여기고 존경하는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많이 있는데 그 사람을 닮은 목회자는 이렇게 희귀하게 등장하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 그것이 바로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린 이것이 바로 핵심인 것입니다. 칼빈에 관하여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빈 속에 있었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그것은 강단에서 그리고 우리의 강의실에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손으로 전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독특한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볼섹의 논쟁을 통해서 말 할 수 없이 고통을 받던 칼빈의 생애의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내성적으로 알려져 있던 칼빈이 볼섹과의 논쟁에서 받았던 그 상처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 문헌을 보니까 더 악랄한 반대자들은 칼빈을 색욕에 눈이 먼 광적인 성 탐닉주의자요, 동성애자로 까지 그렇게 비방을 하면서 칼빈을 매장하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 모든 시련과 고통을 담담히 인내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허락된 유일한 본분은 우리의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시련과 환란,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대적들의 괴롭힘과 고통까지도 하나님이 우리를 성숙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십자가로 생각하고 묵묵히 이겨야 한다, 견뎌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인간의 본분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렇게 이 모든 대적들과의 관계속에서도 일체의 인내심으로 복음을 위해 견디게 만들었던 파란만장한 그의 삶, 거기에서 우뚝 선 칼빈의 그 모든 저력들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단지 학문이 아닙니다. 인문주의와 그리고 중세철학에 달통하고 이후에 이어질 개혁파 정통주의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학문만이 그를 그렇게 만들어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학문은 전깃불이었고 거기에 공급된 전기는 바로 그누시스 크리스투였습니다. 파리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는 특별한 체험속에서 그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진리의 빛을 보았고 그리하여 그는 우리가 아는 칼빈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에 강력하게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는 경건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일생동안 그의 인생과 사역에 가장 중심적인 모토는 피에타스 ? 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강력하게 촉구되는 것은 바로 이런 도전인 것입니다. 우리가 칼빈에 관해서 가르쳐 준 것은 우리의 학문과 성실한 노력으로 가능하고 학생들의 학습으로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 있는 칼빈이 누구에게도 손에 쥐어질 수 없었던 각자 각자에게 해주는 이 놀라운 것, 사도 바울속에 있었던 ‘내가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이니라’ 고 고백하게 만들었던 신적인 강제력의 기원,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다양한 지식, 그의 사로잡히고 그를 사랑하고 그를 닮고 그와 하나되고 그와 연합하고자 하는 강력한 소원, 그 모든 열정과 하나님 앞에 두려움과 떨림, 그러면서도 이끌리는 사랑에 붙잡힌 이 경건의 체험 이것은 성령께서 오직 진리를 통해서 우리 선생들 각자 각자에게 우리 학생들 각자 각자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에 대한 충실한 칼빈에 대한 많은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기를 덜하게 만들어주는 위로의 자원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것이고 그것은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많이 탐구하고 더 많이 헌신하고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산 위에 쌓아놓은 장작불에 불과하고 이것에 불을 붙이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선생된 우리들이 목회자된 우리들이 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이 강력한 신지식의 부여를 위하여 우리들이 간절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강의 너머에 있는 그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누구든지 그 지식에 붙잡히면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힌 바 되어서 그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이 일을 마치려하면 자기의 목숨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노라 고백할 수 있게 만드는 그 신적 강제력, 그 어떤 것,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의 노예로 사는 것을 기쁨으로 알게 만드는 어떤 숙명, 이것이 모든 선생님들과 학생에게 강력하게 부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름이 노예라고 해서 노예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그 노예의 정신이 그 속에 박혀있을 때 뼛 속 깊이 그리스도 노예의 정신이 사무쳐 있을 때 그가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의 노예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 출생 500주년을 맞으면서 또 다른 칼빈의 출생을 대망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지식뿐 아니라 우리의 지식과 모든 논리를 초월해서 다메섹의 체험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은혜가 가르치는 우리 선생님 각자 각자에게 사랑하는 어린 학생 각자 각자에게 부어지도록 선생인 우리가 목회자인 우리가 더 많이 무릎을 꿇고 주님 앞에 우리의 학문에 기름을 부어주시도록 간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온 마음을 다해서 기도하므로 하나님께서 충만한 복을 조국교회 강단에 그리고 신학교 위에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