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가족 특별 새벽기도회
2022년
온가족 특별 새벽기도회
설교기간 | 2022년 8월 15일 – 8월 17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2년 12월 09일
목 차
1. 낙심치 말고 기도하라(눅 18:1-8) 2022.08.15. 온가족특별새벽기도회1 3
2.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하라(눅 18:9-14) 2022.08.16. 온가족특별새벽기도회2 7
3. 기도가 막힐 때(마 5:23-24) 2022.08.17. 온가족특별새벽기도회3 12
2022.08.15._온가족특별새벽기도회1
1. 낙심치 말고 기도하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1-8)
녹취자: 이재호
이 누가복음 18장에는 예수님이 기도에 관해서 가르쳐주신 내용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중에서 첫 번째 나오는 이 과부의 이야기에 대한 비유는 우리가 기도에 있어서 아주 가장 중요한 그 두 가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드셨던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무엇인지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마을에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최악의 재판장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사회라고 하면 이상적인 재판장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을 존중할 줄 아는 재판장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재판을 내려주는 것이 가장 훌륭한 이상적인 재판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최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자체만으로 이 사람은 아주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빙자하여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었습니다. 오늘 처음 이렇게 하기를 시작한 게 아니라 이 사람 원래 되어 먹기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성향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늘 이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면서 재판장의 역할을 하면서 그 도시를 다스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에 과부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과부는 사회적으로 아주 취약계층이었습니다. 나라가 오늘날같이 민주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남편이 없는 사람들은 무시를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디에 호소할 때가 없는 그런 약자층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 과부에게 원한이 있었습니다. 어떤 원수가 이 과부에게 매우 나쁜 일을 하고 그 과부의 마음엔 그것이 너무 억울해서 원한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누구한테 호소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재판장에 가서 끊임없이 호소했습니다. 자주 그에게 가서 ‘원한을 풀어 주소서’라고 하였다고 했습니다. 한두 번 간 게 아니라 아주 자주 가서 호소를 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재판장은 예상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듣지 않았습니다. 워낙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군다나 과부가 가서 그렇게 간청을 해봤자 이 사람은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가 좀처럼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와서 끊임없이 탄원하면서 자기의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하소연을 하는데 안 들어줬습니다.
그러다가 혼자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했는데 가만 보니까 이 과부가 그만 듣고 포기할 것 같진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 여자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와서 끊임없이 원한을 풀어 달라고 하소연을 하면 결국 괴로운 건 자기밖에 없는데 그러면 ‘귀찮아서 어떻게 할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이 여자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시달리기 싫어서 ‘그냥 그 사람의 원한을 풀어줘야 되겠다.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할 텐데 그것보다는 그냥 한 번 제대로 재판을 해 주고 이 여자가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못하게 해 줘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정리를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재판장이 말하는 것을 들어봐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재판장이라도 결국은 들어주게 돼 있다.’ 조건이 있습니다. ‘끈질기게 열렬히 기도할 때, 열렬히 청구할 때, 결국은 그것을 들어주게 돼 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결국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싶어서 이렇게 하신 것일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결국 기도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 두 가지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 비유를 드신 것입니다. 그 기도를 하나님 앞에 응답받는 기도의 두 조건이 쉽게 그만두지 않는 끈질김입니다. 그래서 ‘밤낮 부르짖는 자’라고 하는 것은 밤이나 낮이나 계속 자신의 간청하는 바를 하나님이 들어주실 때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끈질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끈질겨도 열렬함이 없으면 그 기도는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의 두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끈질김’과 하나는 ‘열렬함’입니다. 끈질김은 시간적으로 그만두지 않고 계속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기도하고 잊어버리거나 상황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포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지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때까지 반드시 들어줄 것이다’ 것을 가지고 꿋꿋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끈질김입니다.
그 끈질김은 결국 믿음이 없이는 안 됩니다. 오늘 기도하고 나면 하나님이 내일 들어주시는 것도 있지만 어떤 기도는 수십 년을 해도 응답이 아직 안 되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못 하신다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안 하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분명히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그 약속이 주어졌으니까 반드시 하나님이 하시는데, 그런데 그것이 금방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시고 싶은 것은 끈질김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매달리는 것, 왜 하나님이 이걸 그렇게 칭찬하시겠습니까? 믿음이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금방 응답 되지 않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내 기도를 듣고 계시며 반드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끈질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믿음의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믿음을 입증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얼마나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고 아무리 우리 삶의 현실이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것 같다고 메시지를 주어도 ‘아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그 하나님은 반드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다.’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꿋꿋이 끝까지 기도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오늘날까지 우리들이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한 것들 중에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잘못 구했기 때문에 응답을 못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로 기도했지만 끈질기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응답을 보지 못한 기도도 많이 있습니다. 믿음의 시험에서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실 때 우리는 기도해서 하나님을 바꿔 보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끈질기게 기도하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바꿔 놓으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첫 번째 조건은 끈질김입니다. 쉽사리 끊어지지 않는 아주 강한 탄탄함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멈추지 않고 주님 앞에 매일매일 그 기도 제목이 이루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열렬함입니다. 그래서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원한까지는 몰라도 누구에게 매우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막 속에서 일이 잊히지 않습니다. 속에서 그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것이 상처가 되고 마음속에 분노가 되어서 밥을 먹어도 그 일이 생각이 나고 자리에 누워도 그 일이 생각이 나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원한입니다. ‘너무나 커다란 억울한 일을 당해서 이 일에 질서가 바로 잡히지 않으면 내가 견딜 수 없다’ 해서 마음에 깊이 고통을 받는 것이 원한입니다. 이 원한은 다른 걸로 해결이 안 됩니다. ‘원한 품지 마, 내가 돈 조금 줄 테니까 원한 품지 마.’ 그런다고 그 원한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이 올바르게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는 포기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분노가 느껴지는 게 원한입니다. ‘그런 원한을 풀어 주시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면 예수님의 말씀은 ‘원한에 사무친 과부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재판장에게 이 모든 일을 제자리로 돌려놓아 달라고 그렇게 와서 매일매일 졸랐던 것처럼 너희도 그런 원한을 품은 여자처럼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 그 뜻입니다. 그러니까 원한이 너무 크면 ‘자기가 이 원한을 못 풀고 이 땅에 살아있느니 차리리 죽어 버리겠다’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존재와 바꿀 수 있을 정도의 그런 간절함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열렬함을 가르쳐 주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끈질긴 기도는 반드시 열렬함을 동반합니다. 이 두 가지가 열렬할 뿐만 아니라 끈질기고, 끈질길 뿐만 아니라 열렬한 기도를 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가장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렬하게 기도하는 그 사람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고 있는 마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도의 응답을 지연시켜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결국 끈질김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는 올바른 기도지만 좋은 기도 제목이었지만 응답이 안 되는 것이고, 오래 기도했는데도 응답되지 않는 것은 열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끈질김과 열렬함이 항상 같이 살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새벽기도를 수십 년씩 나오는데 너무 훌륭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와서 거의 기도를 못 하고 돌아간다면 기도 생활에 큰 변화가 없습니다. 만약에 열렬하게 기도한다면 이 끈질김과 열렬함이 모두 그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기도 응답에 많은 간증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이 가르쳐주는 바입니다.
그러면 반성해 봅시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오래 기도한 것이 있습니까? 왜 응답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뜻이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열렬함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까? 기억하면서 오래 기도했지만 타는 것과 같은 원한을 품은 마음으로 열렬히 비지땀을 흘리면서 눈물을 쏟으면서 온 진액을 짜서 하나님께 받치면서 그렇게 열렬하게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기도했지만 그 기도에는 능력이 없었습니다. 열렬히 기도했지만 오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잠깐 울부짖는 기도였을 뿐 여러분 자신도 그 기도의 제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이 두 가지를 마음에 간직하고 ‘나는 기도자가 되어야 되겠다.’ 결심하시기 바랍니다. 끈질긴 기도와 열렬한 기도를 함께 드림으로 반드시 하나님께 응답받고 더 큰 믿음을 갖게 되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22.08.16._온가족특별새벽기도회2
2.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ㅣ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눅 8:9-14)
녹취자: 조경훈
유대인들은 하루에 세 번씩 성전을 올라가서 혹은 성전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아주 오래된 습관이었습니다. 성전에 올라가서 두 사람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당시 종교 지도자였고 세리는 세금을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멸시하는 직업이 두 개가 있었는데 남자는 세리고 여자는 창녀였습니다. 그들은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왜 세금을 걷는 사람을 멸시했을까요? 거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관리도 아니고 로마 당국에서 세금을 거둘 때 아무래도 이민족이 세금을 거두면 의사소통도 안 되고 분쟁이 일어나니까 우리로 말하면 반장이나 통장을 하는 사람처럼 마을을 잘 아는 사람을 세리로 위촉합니다. 당국에서 이 지역에 얼마큼 세금을 거두어 내라고 하면 세리가 거둬서 로마에 내고 자기 생활비는 자기가 알아서 조금 더 보태서 자기가 갖고 식생활을 해결하는 구조였습니다. 당연히 세리들은 동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야 하고 실제로 내야 하는 세금보다 더 거두어야 해서 항상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동족들의 입장에서 보면 세리는 동족이면서도 로마 편에 붙어서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어 걷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배를 받으며 사는 것도 억울한데 동족에게 가렴주구까지 당해야 되니까 백성들의 고통이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풍년이 들고 모든 것이 풍족할 때는 덜한데 흉년이 들고 나라가 어지러울 때 세금은 백성들에게 보통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세리는 이래저래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으며 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사실 종교지도자들 같은 사람들과 가까이 할 수 없었고 아주 불결한 사람들로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모임에 끼워주지도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도 기도를 하고 세리도 기도를 하는데 둘이 나란히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은 저쪽에서 기도하고 그 사람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한 세리가 기도한 것으로 묘사가 됩니다. 바리새인이 올라가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 세리를 염두 해 둔 것입니다. -,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아마 떨어져 있었지만 그 사람이 세리라고 하는 것을 이 바리새인도 알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차피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문맥이 그렇습니다. 지금 바리새인이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쭉 이야기하고 있는데 거짓말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진짜 이 바리새인은 토색이나 불의나 간음 이런 것들을 하지 않고 삶도 세리보다는 훨씬 도덕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일주일에 두 번을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주님께 드립니다.”라고까지 고백을 했으니 매우 훌륭한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이었습니다.
두 기도를 비교해 본다면 세리의 삶은 정반대입니다. 세리는 바리새인처럼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세리가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눈을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가슴을 쳤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무 힘들고 마음 아픈 일이 있으면 폐가 오그라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피가 잘 안 통하는 것입니다. 가슴이 답답해지니 반사적으로 가슴을 친 것입니다. 가슴을 치는 것을 하나님께 보여드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마음이 아프니까 가슴팍이 아픈 것입니다. 두드리면서 통증을 들어주는 동작입니다. 우리도 너무 마음 아픈 일이 일어나면 가슴을 친다고 그러는데 아파서 그러는 것입니다. 고개를 숙인 체 하나님께 들릴 듯 말 듯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고백을 한 것이 세리가 한 기도의 전부입니다. 기도의 길이로 보더라도 바리새인의 기도에 사 분의 일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딱 한마디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살아온 삶이 하나님 앞에 말할 삶이 없었습니다. 내가 이것도 하고 이것도 했습니다. 할 만한 좋은 것이 세리에게는 없었습니다. 그저 산 것이 죄를 지으면서 살았고 살아온 것이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한 적도 없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린 적도 없고, 토색하고 불의하고 동족들의 세금을 늑탈해서 먹고 살았던 부끄러운 삶밖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성전에 왜 올라왔을까요? 바리새인은 시간이 돼서 의무감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하려고 올라왔고 세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성전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차이입니다. 바리새인은 오늘만 이렇게 기도한 것이 아니라 어제도 이렇게 했고 그저께도 이렇게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세리는 평소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경건했으면 세리라는 직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믿음이 좋은 창녀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순간 자기 직업을 버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은 세리였는데 무슨 마음으로 성전에 올라왔습니까? 바리새인은 습관을 따라 올라왔지만 세리는 이날 주님을 너무 만나고 싶어서 주님을 뵙고 싶어서 성전을 올라온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서면서부터 자기와 이 성전은 너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바리새인부터 경건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득 있었습니다. 자신은 죄만 지으며 악을 행하면서 살아온 것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올라와서 막상 기도하려고 보니까 자기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은데 자기는 죄밖에 지은 것이 없으니까 감히 하나님 앞에 ‘내가 여태까지 뭘 했습니다. 나를 칭찬해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손을 높이 든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배의 기도입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복종의 기도이고 엎드린다는 것은 굴복의 기도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당시 기도의 격식을 깬 것입니다. 일어서서 기도하면 당연히 하늘을 바라봐야 하고 고개를 숙이고 하려면 무릎을 꿇어야 하는데 세리는 감히 거기서 무릎을 꿇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들처럼 서서 기도는 하면서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여태까지 살아온 모든 것들이 죄였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어떻게 설 수 있냐고 양심이 묻는데 마음이 오그라들어 도저히 그 양심을 거슬려서 대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앞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죄인이 하는 말이 ‘다만 가슴을 치며’ 얼마나 진실한 마음에 애통이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통증이 있을 정도로 기도해 보셨습니까? 마음이 아파 숨이 막히는 것 같아서 가슴을 때리지 않으면 진정이 되지 않을 정도로 기도를 해보셨습니까?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리가 드린 기도의 전부였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죄만 짓고 살다가 오늘 여기 와서 감히 면목이 없어서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비유로 두 사람을 들었는데 이 두 사람 중에서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가 ‘너는 참 옳은 사람이구나!’라는 칭찬을 받으며 그의 집으로 내려갔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뭐가 훌륭해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까지 드리고 죄를 짓지 않고 살아왔던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불합격이라고 하고 진짜 나쁜 짓밖에 한 것이 없는 세리를 향해서는 너는 하나님 앞에 옳다고 하셨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 의롭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의롭다는 것은 ‘흠이 없다’ ‘잘못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볼 때 잘못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상태를 의롭다고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는 것이 자기가 열심히 애쓰고 노력을 해서 비교적 의로울 수는 있지만 완전히 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을 모두 지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나만 어겨도 그는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의가 있습니다. ‘너는 의롭다.’ 하고 하나님이 바깥에서 그 사람에게 주는 ‘의’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용서해주셔서 베푸시는 ‘의’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 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지는 방법이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다고 해주시는 것이 ‘의’ 입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지만 불의한 사람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열렬히 기도해도 불순종하고 죄를 지으면 그날은 기도가 안 됩니다. 회개할 때까지 기도가 안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죄에 민감하신 분입니다. 매일매일 이 세리처럼 의롭다함을 입어야 되겠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세리에게 의롭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결론을 내리시는 것이 ‘무른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리라 하시니라’ 자기를 높인 사람은 바리새인이었는데 아주 긴 기도를 그럴듯하게 드렸지만 하나님의 귀에 들리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진짜 나쁜 짓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악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올바른 일을 많이 한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입니다. 이 세리는 훌륭한 일을 한 것은 없지만 아무튼 그는 언제부터인지 마음이 공허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올라와서 자기가 잘못한 것을 생각하니까 도저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비는 것은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게 고백하는 순간에 이 죄인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밖에 없습니다.
바리새인은 올바르게 살았으나 전혀 하나님을 간절히 원하지 않고 세리는 잘못 살았지만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가 어떤 기도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입니다. 똑같은 기도를 누가 드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만약에 세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용서의 은혜를 받고 돌아가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돌아온 다음에 그렇게 사랑하는 하나님께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예전에는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살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저는 그런거 안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며 십일조를 주님께 드립니다.’라고 고백했다면 하나님께서 엄청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간절한 기도는 가난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오늘 주님을 못 만나고 가면 나는 정말 큰일이다. 내가 오늘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나는 살아갈 힘이 없다.’ ‘하나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좋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 나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릴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멀리 학생들이 수련회를 갔습니다. 그때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열렬했습니다. 저는 고등부를 하고 있어서 고등학생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학생들이 40일 전부터 수련회를 간다고 금식기도를 하면서 준비를 해서 갔습니다. 찻길에서 꽤 멀고 전깃불도 길거리에 없을 정도로 캄캄한 길인데 거기를 들어가서 학교 같은 데서 수련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설교시간이 돼서 설교가 꽤 진행이 됐는데 밖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나 2학년이었나 자매 한 명이 그 시간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누가 차를 태워서 오지 않으면 올 수 없는 곳인데 설교시간에 대성통곡을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선생님들이 진정하라고 하고 설교를 했습니다. 끝나고 나서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자매가 주님을 깊이 만났습니다. 나중에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습니다. 이 자매가 교회에서 버스를 타고 같이 출발해야 하는데 무슨 일이 있어서 버스를 놓치고 제 시간에 못 온 것입니다. 저녁 집회에 맞춰서 가리라. 하고 어디로 오라는 것만 적어서 왔는데 내리니까 깜깜한 밤중이었습니다. 그 학교가 어디로 가야하냐고 물으니까 여기서 쭉 한참 걸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리니까 깜깜한 동네이고 보안등도 한 개 없는 것입니다. 왔다 간 사람들은 거기서 한 3, 4백 미터만 가면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 자매는 아무도 동행해 주는 사람도 없고 자기 혼자 내렸는데 밖은 깜깜한 길이고 도저히 얼마나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고 손전등도 없는 것입니다. 순간 거기서 생각했다고 합니다.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돌아오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야되겠다. 그런데 마음 한구석에서는 ‘아니야!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꼭 주님을 만나야 돼!’ 두 마음이 싸우는 것입니다. 결국 가기로 결심을 하고 걸어오는데 너무너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다가 저기서 불빛이 비치니까 혹시 여기가 아닌가? 하고 달려왔는데 선생님들이 마중을 나온 것입니다. 예배당에 들어서자마자 너무너무 무서워서 통곡하고 우는 것입니다. 그날 하나님이 그 자매를 위한 수련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큰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가난한 마음! 가난한 마음을 보시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밖에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내가 모두 다 희망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나는 것밖에 없습니다. 라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이 주일학교 학생까지 그 아래 유치부에서 유아부까지 다 만나주십니다. 네 살밖에 안 된 아이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도 봤습니다. 주님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당신을 찾고 진심으로 당신을 만나고 싶어서 간절히 간절히 낮아지는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 모든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을 오늘 만나고 돌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기도가 막힐 때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녹취자: 최연희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고 또 어떤 생활을 해야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내용입니다. 산에서 가르치셨다고 해서 산상수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산에서 가르쳐준 우리 모두의 법칙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교훈이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이제 사람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려고 제물을 가지고 왔습니다. 와서 제물을 드리려고 하는데 자기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여기서 형제는 그저 육신으로 낳은 같은 부모에게서 낳은 형제라기보다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을 하나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 공동체 안에서의 형제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면은 그 사람은 제사를 드리기를 중단하고 먼저 가서 먼저라는 것은 제사를 드리지 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리고 와서 예물을 드려라 이렇게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면 그것이 자신의 죄를 씻어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보이는 사람과의 관계를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제사 그 자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의 삶이 전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쳐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에 있어서는 형제들에게 원망받을만한 일을 하고 혹은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불화하고 그렇게 살다가 제사 한 번 드리는 것으로 모든 죄를 깨끗이 씻고, 그리고 자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고 또 살면서 자기가 잘못했던 일들을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고 반복해서 한다면 오히려 그 사람에게는 제사를 드리는 행위 자체가 마음을 점점 굳어지게 만들고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게 만드는 방편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이 원래 제사의 제도를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처음 제사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로 이렇게 하기 위해서 제사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이 제사를 주신 것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는데 하나는 이 제사를 드리는 것을 통해서 결국 우리의 죄가 우리 스스로 씻겨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위해 이렇게 희생해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사를 지내게 하신 것입니다. 자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왔습니다. 짐승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 짐승이 이제 제사장의 기도를 받고 그리고 끔찍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럼 거기서 자기가 이제까지 기른 양이 갈기갈기 찢겨지고 그 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흐르고 내장이 다 꺼내어지는 광경을 다 보면서 마지막에 그것이 이제 불에 태워져서 하나님 앞에 바쳐지는 것까지 목격하는데 결국은 그렇게 짐승이 아무 죄도 없는 짐승이 자기 앞에 죽어가야 했던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자기의 죄 때문에 애매하게 죽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결국 하나님 앞에 나의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느끼게 하는 동시에 나의 이 죄는 하나님 은혜 때문에 용서를 받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제사의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주시지만 이건 언제나 임시적인 것입니다. 다시 또 죄를 지으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집니다. 그런 일을 반복하면서 결국 마지막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뭐냐하면 결국 나는 나 자신을 완전히 구원할 수 없고 제물도 나를 완전히 구원할 수 없으며 언젠가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모든 죄에서 단번에 영원히 깨끗게 하실 것이라고 하는 구속주의에 대한 대망을 갖게 하기 위해서 이 제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제사를 잘 이해하고 구약의 신앙을 지켰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금방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 구속의 메시야로 오셨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서 사람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생각나게 해 주시고 또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지를 생각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면서 사람과 관계가 올바른지를 생각하게 만들어 주시고 사람들과 살면서 내가 과연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수 있는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이 사람은 제사를 드리러 왔다가 양심에 큰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때에는 제사를 드리는 일이 먼저가 아니라 먼저 자신과 불화하고 자기가 잘못해서 깨트려진 관계의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화해를 하고 서로 사랑하게 된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일주일 동안 어떻게 살았느냐에 의해서 주일예배가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드려지느냐 안 드려지느냐 결정이 되는 것이고 거꾸로 주일예배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으면 일주일 동안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움직여주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만약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것은 권력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항상 우리의 모든 삶의 질서들이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깨닫는 것입니다.
결국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결국 거기서 우리는 많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런 고통을 받을 때마다 자기를 힘들게 만든 사람을 생각하고 원망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고 사람들과의 관계때문에 고통을 받을 때 그때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신앙의 깊이를 반성하고 또 실제로 그 마음을 없애버려야 됩니다. 오해가 있으면 풀고 잘못한 것은 가서 용서를 빌고 그리고 사람과의 막힘이 일체없는 평화로운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그 제물은 하나님이 너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마음과 삶이 거기에 모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너무나 기뻐하시지만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신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기도가 잘 되면 좋겠지만 기도를 하려고 애를 써도 기도가 안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는 왜 나의 기도가 안 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저절로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기도가 안 되는 적은 없습니다. 내가 마음을 쏟아서 집중하여 기도하지 않거나 혹은 마음을 쏟아 집중하려고 하는데도 기도가 되지 않는 것은 내 안에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불화하게 만드는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거기서 포기하고 기도가 안 된다고 기도를 안 하죠? 그러면 자신의 삶에 대해 반성을 할 수 있는 힘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결국은 기도를 안 하면 못하게 되고, 못하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게 됩니다. 자기 욕심에 사로잡히고,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그러면 더 많은 죄를 짓게 되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면 기도는 더 하기 어려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삶에 악순환이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가, 심지어 자연의 만물과 어떤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는가를 생각하면서 삶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의 예배를 받아주신 그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이번 한 주간도 나에게 살라고 생명을 주시고 나에게 은혜를 주셨으니까 하나님의 그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은혜를 구하며 기도하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 앞에 수시로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이 어려움 속에서 우리를 건져달라고 기도할 때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모든 우리의 뜻은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일주일 내내 하나님을 바라다가 온 사람들은 주일 예배를 드릴 때 마음에 기쁨이 넘칩니다. 왜냐하면 일주일 동안 그 시간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일주일 동안 하나님을 뵙지도 못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도 하지 않고 살던 사람들은 주일예배가 괴롭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있고 싶은 곳이 여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낯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부모와 자식이 멀리 떨어져 있는데 태어나서 얼굴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 부모를 철이 들어서 그 부모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할 수 있을까요? 아마 ‘나에게는 왜 부모가 없을까 얼굴 한번 보고싶다’라는 마음은 가질 수 있지만 미치도록 그립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억나는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매일매일 영상으로 통화를 하고 목소리를 듣는 가운데 그 엄마 아빠를, 자녀를 뚜렷이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만났을 때 그 기쁨이 이로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 동안 하나님 한 번도 못 만났던 사람들에게는 주일예배가 감격스럽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불가능하지는 않은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동안 수시로 기도 속에서 말씀 속에서 가정예배 속에서 찬송 속에서 주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주일날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일주일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함이고 일주일 동안 사는 것은 한번 예배드리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제물을 드리다가 형제와 친구와 불화한 일이 생각나거든 가서 화해하고 와서 그리고 예물을 드리라고 말합니다. 기도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가족이든지 친구든지 이웃이든지 혹은 직장에 있는 사람이든지 누구든지 그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생각이 나거든 혹은 여러분의 마음에 가책이 느껴지거든 어떻게 하든지 그 사람과 맺힌 것을 풀고 용서하거나 용서받고 평화를 이룬 가운데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에 그 예배는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제사가 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 여러분들이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은혜로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힘과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이 예배의 감격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당시에 이렇게 사람들에게 수많은 못된 일들을 하고 화목을 깨트리고 고통을 주고 심지어는 그에게 상처를 주고 그리고는 외식하는 태도로 제사에 와서 제물을 바치기만 하면 자신이 더없이 하나님 앞에 옳은 사람이 된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던 당시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는 바깥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서른세 해 동안 사시면서 우리에게 마음과 자신의 삶이 일치된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심령이 가난한 자로 사셨고 애통하는 자로 사셨고 온유한 자로 사셨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사셨으며 긍휼히 여기는 자로 사셨고 마음이 청결한 자로 사셨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를 사셨고 의를 위해 박해받는 자로 사셨습니다. 그의 마음과 삶은 언제나 하나가 되어 있었고 그래서 그분은 성전에 있을 때만 하나님을 느끼신 분이 아니라 들판에서나 산에서나 그리고 시장바닥에서나 예루살렘 거리에서나 어디에서나 하나님을 느끼시는 분이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내가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하셨던 것처럼 그분은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사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고 주님께 예배하는 것이 곧 삶이었으니 결국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지는 삶이 있었기에 그분이 드리는 기도와 예배는 하나님이 언제나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마지막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그때까지라도 당신 자신이 못 박혀 죽어야 하는 그 죄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기도를 드리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교훈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만약에 열렬한 기도를 하고 싶다면 사람과 맺힌 것을 풀고 와라.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일이 기도하려다가 생각이 나면 그 사람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고 그리고 화해를 하십시오. 누군가에게 손해를 끼친 일이 있거든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람의 손해를 갚아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속인 일이 있으면 그것이 나의 잘못이라고, 속였기 때문에 나는 이익을 얻었지만 너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용서를 빌고 사람과의 관계를 평화롭게 한 다음에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결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처럼 기도도 역시 똑같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박고 두 손을 모으고, 그리고 아무리 무릎을 꿇어도 마음이 돌처럼 굳어지고 열리지 않을 때 여러분들의 삶을 보십시오. 하나님 원망하지 마십시오. 왜 기도하러 왔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도를 안 들어주시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왜 좋으신 하나님이 나의 기도의 문을 막으셨는지 내 기도가 막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내 죄를 생각나게 해달라고 빌어보십시오. 그러면 아마 화면에 영화의 장면처럼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씩 하나씩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잘못한 것이 있다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십시오. 자신이 잘못했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깨끗하게 지난날을 털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다시 사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능력 있는 기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다. 삶에 공을 들이는 사람, 매 순간 어떻게 살아야 우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를 깨닫는 사람, 그래서 자기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합치시키는 사람, 나는 죽고 예수는 살아나는 나는 버리고 예수그리스도는 취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리라고 다짐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기도의 은혜를 물 붓듯 부어주십니다. 마음을 쏟아놓게 만드십니다.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그의 기도가 주님의 보좌에 이르게 하십니다. 사단의 권세를 깨트리고 하나님의 보좌에 도달하도록 만듭니다. 천사들이 그의 기도를 사발에 담아 우리 하나님께 향기로 바치고 주님은 그 기도의 냄새를 맡으시고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하시면 우리를 가로막을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우리를 가로막을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께 기도하는 사람들의 편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셔야 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쉬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끈질김, 그리고 기도할 때마다 건성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이 주님 앞에 물처럼 녹으면서 간절하게 드려지는 그 열렬함 이 두 가지가 계속 우리 속에 불꽃처럼 살아있을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아! 하나님의 사람들은 저렇게 다르게 살고 다르게 믿는구나’하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