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 산다는 것
2021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21년 01월 03일 – 04월 25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1년 5월 6일
목 차
1. 나는 어디로 달려가는가?(눅 12:16-21) 2021.01.03. 주일오전 23
2. 멈춰서서 생각하라(시 94:8) 2021.01.10. 주일오전 33
3. 나는 누구인가?(엡 2:10) 2021.01.17. 주일오전 43
4.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마 5:14) 2021.01.24. 주일오전 51
5.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전 2:11) 2021.01.31. 주일오전 59
6.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사 44:21) 2021.02.07. 주일오전 68
7. 무엇을 위한 직업인가?(살전 4:11-12) 2021.02.14. 주일오전 77
8. 가족이란 무엇인가?(창 1:27-28) 2021.02.21. 주일오전 88
9. 과학기술이란 무엇인가?(창 4:22-24) 2021.02.28. 주일오전 100
10. 돈이란 무엇인가?(딤전 6:10) 2021.03.07. 주일오전 112
11. 불행이란 무엇인가?(전 2:22-23) 2021.03.14. 주일오전 121
12. 친구란 무엇인가?(잠 18:24) 2021.03.21. 주일오전 131
13. 정직이란 무엇인가?(잠 3:32) 2021.04.11. 주일오전 138
14. 늙음이란 무엇인가?(시 71:9) 2021.04.18. 주일오전 150
15. 희망이란 무엇인가?(히 9:27-28) 2021.04.25. 주일오전 164
<설교 프레임>
인간으로 산다는 것1 2021. 1. 3 주일 낮 예배
< 나는 어디로 달려가는가? >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6-21)
I. 본문해설
형에게 명령해서 유산을 나눠갖게 해달라는 한 사람에게 교훈하셨다.
당신은 그런 일을 위해 이 세상 재판장(裁判長)으로 오셔서 재물이나 나누게 하는 분이 아니시라고 답하셨다.
오히려 관심을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셨으니 이는 생명이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
이 생명은 좁게는 육체(肉體)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넓게는 영혼(靈魂)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II. 나는 어디로 달려가는가
여기에 예수님께 나아온 한 인물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이다.
A. 목적 없는 경주
본문에 동생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이 사건 이전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던 사람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확실한 것은 형이 부당하게 차지했다고 믿는 유산(遺産)을 재분배 받는 것이 그의 최대의 관심사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이 일을 바로 잡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이 고민(苦悶)했겠는가?
유산을 독차지한 형(兄)을 미워하며 부당하게 빼앗겼다고 믿는 재산(財産)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에게는 오직 그 일 하나가 가장 크게 느껴졌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利用)해서라도 자기 몫을 되찾고자 했다.
우리는 오늘도 부지런히 애쓰며 살아간다. 매일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고단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위한 삶인가?
정말 우리의 마음과 뜻을 다 바쳐야할 만큼 가치(價値) 있는 것일까?
심지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까지 양보해야할 만큼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인생의 목적(目的)을 알려 주는데 말이다.
*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
우리는 각자의 일상을 그렇게 비장한 열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부지런히 달리면 남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바쁘게 산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혼자서 하나의 쳇바퀴를 돌리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영원한 승자(勝者)같은 것은 있지도 않은 게임이다.
* 영화 아일랜드의 선발자
우리의 삶은 거의 전투적(戰鬪的)이다. 이른 아침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보면 전철에서 이미 지친 몸으로 직장에 들어선다.
자본주의 사회는 높은 효율(效率)과 경쟁(競爭)에서의 승리를 요구한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탈락하여 도태된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전보다 훨씬 못한 대우(待遇)가 기다리고 있다.
이전에는 가질 엄두도 못 내던 물건(物件)들이 이제는 없으면 살 수 없는 필수품들로 여겨지고 있다.
그것들을 누리며 사는 대가는 더 많은 시간을 노동(勞動)하거나 과외의 수입을 늘이는 것이다. 주식과 투기열풍이 그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현대인들에게 많은 육체의 수고와 마음의 긴장을 요구한다.
남들이 누리는 것들을 따라 누리고자 하는 욕망(慾望)의 증대는 우리를 더욱 물질중심(物質中心)의 사고로 흐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디로 향(向)하는지도 모르면서 쫓기듯 매일의 삶을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B. 의미없는 일상
현대사회는 무한경쟁(無限競爭) 사회다. 승자와 패자는 뚜렷이 갈리고 그들에게는 서로 다른 앞날이 기다리고 있다.
물질문명의 발달은 더 많은 욕구(慾求)를 낳고 그 욕구는 더 많은 시간을 일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목표(目標)가 주어진다. 매일의 삶은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 내몰린다.
* 공채 사원이 부사장 자리에 올라 과로사함
최근 택배기사들의 과로사(過勞死)가 문제가 되고 있다. 몇 해 전 세종정부종합청사에서 30대 워킴맘이 계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외교관이나 판사도 예외가 아니다. 이태 전 고등법원 소속 여판사와 외교부 소속 여국장이 각각 자택과 호텔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과로사로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그러는 동안 정말 소중한 관계는 버려진다.
인생의 목적(目的)과 목표(目標)는 엄연히 다르다. 목적은 의미(意味)와 연결되어 있고 목표는 효율(效率)과 연결되어 있다.
정상적이라면 우리의 삶의 목표와 목적은 수직적으로 일직선상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목표의 달성이 목적의 실현에 이바지해야 한다.
그렇게 연결되지 못할 때 인생은 혼돈과 공허(空虛)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그것은 자신을 가두어두기 위해 친 거미줄이 되고 만다.
미친듯이 일하고 돈을 벌어서 부자(富者)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이루면 행복할까? 그렇다고 치자. 그 행복의 느낌이 얼마나 갈까?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3200억 원짜리 초호화 요트를 주문해 두었다. 6주에 한 번씩 제작에 참여했다.
네델란드 Aalsmere에서 공개된 이 배에는 길이 80m에 6개의 호화 침실이 있고 철저한 방음(防音) 설계로 이루어졌다.
조타실(操舵室)에는 27인치 iMac 7대가 설치되어 이것으로 배를 조종할 수 있게 했다. 이 배의 이름은 비너스(Venus)호였다.
은퇴 후 가족, 친구들과 이 요트로 세계여행을 꿈꾸었으나 2011년10월 5일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스티브 잡스는 그 화려한 요트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世上)을 떠났다. 인생(人生)은 그런 거다.
이 사람의 초미의 관심사는 형(兄)의 유산을 나누어 갖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 물질(物質)도 자기가 살아 있어야 의미(意味)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전 3:19)
살아가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하지만,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意味)는 우리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바쁘게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물어야할 질문이 있다. 매일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日常)은 정말 의미 있는 것일까?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오늘도 이 세상(世上)을 살아간다. 도대체 어떤 의미를 발견하면서 일생(一生)을 살아가고 있는가?
C. 죽어야할 존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기심(利己心)으로 세상사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 역성을 들어달라는 이 사람에게 일깨우셨다.
한 비유(比喩)를 베푸셨는데 그것은 바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였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20)
인간이 사는 것은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행복(幸福)을 위해 정한 목표(目標)는 성취를 겨냥하지만 그 삶의 목표가 인생의 목적(目的)에 단단히 매달려 있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에서 인생(人生)을 바라보는 성찰(省察)과 하나님에 대해 믿음(faith)을 요구한다.
* 남대문가게 인수자의 사망
어리석은 부자의 사고방식은 오직 세상밖에 모르는 현실주의였다.
그러나 그것이 가장 비현실적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9)
* human mummy: 사진 화면에 띄울 것
인생은 허무하다. 그래서 허무맹랑하게 살잔다. 허무맹랑한 얘기다.
* 시지프스의 신화와 알베르 까뮤의 냉소
그것으로 우리 인생의 숙제가 해결되는가? 허무(虛無)란 "의미 없음"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의미 없는 존재로 태어나지 않았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이 의미(意味)의 전부이신데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시고, 당신과 관계를 갖게 하심으로 의미 있게 창조(創造)하셨다.
참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멋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인생(人生)의 의미를 확정해야 한다. 무엇으로 그것을 확정(確定)할 것인가?
인간으로 산다는 것2 2021. 1. 10 주일 낮 예배
< 멈춰 서서 생각하라 >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시 94:8)
I. 들어가는 말
때때로 허무감이 밀려온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日常), 목적 없이 달려가는 경주와 같은 삶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죽어야할 존재(存在)이면서도 그것을 망각한 채 허무하게 살아간다. 이기는 자도 없이 계속되는 경쟁의 삶은 언제 끝나는가?
이런저런 의심(疑心) 속에 잠들어도 아침이 어김없이 밝아오고 우리는 또 생활의 현장으로 내몰린다. 고민할 새도 없다.
이따금 음식의 간을 보듯이 진리를 맛보지만 매일 살아내야 하는 삶의 현장으로 내몰린다. 급류처럼 떠내려가는 삶에 저항할 힘이 없다.
또 다시 의미(意味)를 찾지도 못한 채 반복되는 삶이지만 박수갈채도 없다. 도대체 나를 진심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누군가?
II. 멈춰 서서 생각하라
무언가 잘못된 줄을 알지만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도 알 수 없다. 더듬이 잘린 귀뚜라미 같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시 94:8)
A. 성찰하라
먼저 성찰해야 한다.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시 94:8)
잘못된 결심은 더 큰 문제를 불러온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은가?
끝날 수 없는 달음박질로 지친 나, 의미를 찾지 못하는 허무한 삶에 내몰리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을 때, 질병적 증상이 나타난다.
가족에 대한 무관심, 빠져드는 게임과 오락, 과도한 소비와 중독, 끊을 수 없는 음란물 중독과 외도가 아닌가? 일중독에도 빠진다.
* 작년 주류 소비량: 3억 4천 6백만 리터
* 온라인 게임 인구: 현재 이용 61.1%, 경험자 61.7%
* 마약 중독자: 매년 16만 명씩 증가하고 있음.
* 자살자의 급증: 2019년 1만 3천 99명, 매일 38명, 38분당 1명
인생을 그렇게 살아서 마지막 우리에게 남겨지는 것은 무엇인가?
건강검진을 못 받는 사람 세 종류가 있다.
a. 검사 과정(過程)을 못 참는 사람
b. 검사 비용(費用)이 아까운 사람
c. 검사 결과(結果)가 두려운 사람
그러나 사실은 사실로 직면할 때 희망(希望)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회피하고는 그 위에 현실이라는 삶을 구축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살아가는 현실(現實)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다. 그 삶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힘들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人生)인데, 삶이 우리를 질질 끌고 다닌다면 그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다.
모두 변화된 삶을 산다. 그러나 누구에게든지 시작점은 똑같다. 잠시 멈춰서서 생각하는 것, 성찰(省察)이다!
성찰은 “자신이 한 일을 반성(反省)하는 것”이다. 자기가 한 일과 자기의 사람됨을 연관지어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 대해 실행하는 “반성적 사고”를 가리킨다.
심리학에서 이 말은 자신 너머에서 자신을 보는 것인데 이를 메타심리(metapsychology)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자기 밖에 있는 진리(眞理)를 인식함으로써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봄으로써 반성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성찰은 반성(反省)이고 반성은 생각이다. 따라서 성찰을 위해서는 자기를 객관적(客觀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진리를 기준으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가 바로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 지혜(知慧)없는 자”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시 94:8)
지혜롭게 되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반성은 치열한 생각을 요한다. 진리(眞理)를 알고 자기를 꼼꼼히 조사(調査)해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기 위해서는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다. 미련하기 위해서, 지혜 없는 자가 되려면 그냥 그대로 살면 그렇게 된다.
* “내 집이 제일 편하구나!”
이제껏 자기가 하던 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사는 게 편할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산 결과가 허무(虛無)하게 달음박질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이라도 달리 생각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의 삶이 의미 없고 허무(虛無)한 지도 알고, 미친 듯 내몰리는 경쟁의 끝이 죽음(death)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언듯언듯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곧 생각 없이 사는 일상(日常)으로 돌아가 버린다.
우리는 이런 이유가 지성(知性)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치부한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용기(勇氣)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할 용기다. 그 생각의 끝이 가져다 줄 진실과 대면할 용기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리(眞理)가 아닌 자기 생각으로 멋대로인 하나님을 만들고 그걸 우상(偶像)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게 바로 자기를 임금(king) 삼으며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들의 모습이다. 거기 무슨 삶의 보람과 행복이 있겠는가? 거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있겠는가?
“종교(宗敎)”란 모든 삶의 으뜸이 되는 가르침을 뜻한다. 그래서 근대 이전 유럽에서는 이 말이 곧 경건을 뜻했다.
또한 종교는 곧 신앙(信仰)을 의미하였으니 이는 모든 종교의 요체는 진리이신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성찰(省察)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는가? 그것은 자기의 무지(無知)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B. 무지를 인정하라
또한, 성찰을 위해 자신이 무지(無知)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소크라테스(Socrates)의 평생 과업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이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대화(對話)를 통해 무지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면 누구든지 소크라테스에게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아 그를 괘씸하게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오해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논리적 대화의 과정을 통해 자신도 참된 지혜에 도달하고자 한 것이었다.
머리가 좋다고 해서 자기 자신을 잘 성찰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심리학에서 메타인지 이론(理論)은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메타인지(metacognition): 자신의 인지과정에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자각하고 문제를 찾아내고 학습과정을 조절할 줄 아는 지성의 능력
메타 인지(meta認知)는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자기의 인지과정을 관찰하고 발견하는 능력이다. a. 자신을 보는 거울을 가짐, b. 헤쳐나가리라고 믿음, c. 자신의 불완전한 모습을 인정함. d. 새롭게 자신을 알고자 하는 희망을 가짐.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일정한 주제에 대해 회의 형식으로 모여서 구성원의 아이디어를 각자 제시하게 하여 서로 생각을 전환함으로써 새로운 방안을 함께 찾아내는 것
이것은 문자적으로 두뇌 속에서 태풍(storm)이 일어나는 것이다. 혼돈을 통해 새로운 생각을 찾아가는 것이다.
공부를 잘하고 이성(理性)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자신의 생각과는 다른 사실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회피하면 결코 새로운 성찰에 도달할 수 없다.
자기가 결코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라. 자신이 불완전한 사람임을 인정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좋은 결론(結論)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라.
* 빛이 없으면 소경과 같음
사물(事物)을 보게 되는 것은 그것에 빛이 비춰지고 그 빛이 반사되어 눈에 들어옴으로 사물의 크기와 모양, 색깔을 인식하는 것이다.
진리(眞理)가 인간 정신(精神)의 빛이다. 진리를 알고 마음이 그 빛을 받음으로써 자기를 알고 인생(人生)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5)
제일 먼저 분부하시는 바는 “생각하라”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회개하고 처음 행위로 돌아가는 것은 그 다음이다.
III. 적용과 결론
기독교는 지성(知性)을 요구한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시작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분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 안에서 참된 지혜(知慧)를 갖게 된다. 도대체 이렇게 미친 듯이 달음질치는 인생(人生)의 끝은 무엇일까?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허무감(虛無感)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나는 내일 금방이라도 다가올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됐는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남은 인생을 위해 생각할 용기를 가지라. 하나님께 깨달음을 구하라.
인간으로 산다는 것3 2021. 1. 17 주일 낮 예배
< 나는 누구인가? >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엡 2:10 상)
I. 들어가는 말
가장 절박한 문제는 이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를 믿은 것도 결국 다르게 살고 싶어서였다. 그냥 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살라고 가르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라고 말한다. 그런데 내 인생의 주체(主體)는 나다. 어느 쪽을 따를 것인가?
II. 현대인과 인생의 가치
누구의 말을 따르는지,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이 선택하는 가치는 둘이다. 개인적 평안(平安)과 풍요(風謠)다.
“개인적 평안이란 … 다른 사람의 어려움 때문에 곤란을 당하지 않고 … 최대한 방해받지 않고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 풍요는 …계속 높아지는 물질적 풍요의 수준에 의해 판단되는 성공을 뜻한다.”
F. Schaeffer,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p.306
이것은 매우 낮은 가치다. 그런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평안하고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다면 사회의 정의(正義)나 후손들의 살아갈 사회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한 가치(價値)가 아니다. 그것은 유혹 받은 가치다. 육체적 삶이 전부라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인생 목표가 된 것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물질주의(物質主義)와 하나님을 떠난 마음이 좇아가는 세속주의(世俗主義) 정신에 물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달려간다. 자기가 불행(不幸)한 것은 좀 더 풍요롭지 못하기 때문이고, 좀 더 부유하게 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모든 정신적 불안(不安)과 무게도 단지 그것 때문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경제적(經濟的)으로 나아지면 평안도 따라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면 행복은 재산(財産)의 순서란 말인가? 그렇지 않다. 경쟁에서 이겨서 어떤 이들은 재정적으로 성공하고 지위(地位)도 갖게 되었을지 모른다.
부유한 사람들은 생계형 범죄(犯罪)를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나 인생의 참된 가치를 찾지 못하면 다른 형태의 어두운 면들이 나타난다.
* 일본 온라인 패션몰 조조타운의 창업자 마에자와 유사쿠
개인적 평안과 물질적 풍요라는 낮은 수준의 가치를 실현하고 나면 거기서 인간은 쉼을 누릴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가 바뀌지 않았는데 무엇이 변하겠는가?
경제적으로 여유로우니 육체적 생활은 다소 평안(平安)해졌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표면적이다. 인생의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애슐리 메디슨(Ashley Madison)의 데이터 유출사건을 생각해보라. 기혼자들을 위한 불륜 사이트였는데 2015년 7월 임팩트팀이라는 해커 집단에 의해 해킹되어 약 3800만 명의 가입자 신상이 털린 사건이다.
인생에 있어서 평안과 물질은 목표가 아니라 수단(手段)이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면 인생의 질서는 위아래가 뒤집히게 된다. 이것이 악(惡)이다.
평안하게 살고 싶지만 풍요롭게 살려는 욕망을 포기하기는 어려워한다. 지난 세대 공감을 얻었던 다음과 같은 노래는 현실적이지 않아 보인다.
* 일곱 송이 수선화 낭독시 영상
이제 이런 이야기는 지난 세대 소설 속에서 나오는 순애보(殉愛譜)다. 개인적 평안과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삶은 별로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은, 비현실적인 삶이 아닌가?
더욱이 부유하게 되려는 노력(努力)과 개인적 평안(平安)은 양립하기 어렵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도록 태어났는가?
어떤 물건의 존재 목적은 그것을 만든 사람에 의해 규정된다. 쓸모를 따라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다급하지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먼저다.
III. 나는 누구인가?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걸작품(傑作品)인지 모르고 산다.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을 위대한 작품임을 모른다.
내가 왜 존재(存在)하는지 목적을 알아야 사는 방법이 나오지 않겠는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자니‥”(엡 2:10 상)
A. 하나님이 만드심
첫째로, 우리는 스스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창조주에 의해 태어났다. 여기서 “만드신 바”(poiema)는 그리스어로 “작품(作品)”을 가리키는데 특별히 “신의 작품”(divine works)을 뜻했다.
우리는 우연히 생겨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몸소 작품으로 만드신 것이다. 가장 선하시고 완전하신 분이 만드신 작품이니 최고의 걸작품이다.
한 예술 작품에 대한 최종적 해석(解析)은 작가에게 달려 있다. 그의 의도로 창작되었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의견일 뿐이다. 내가 누군지는 하나님께서 친히 규정하신다. “너는 나의 걸작품이다”
“저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 … 당신께 제가 무엇이길래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시고 그리하지 않으면 제게 진노하고 커다란 비참으로 벌하겠다고 경고하기까지 하시나이까?”(Quid mihi es?…Quid tibi sum ipse, ut amari te iubeas a me et, nisi fasiam, irascaris mihi et mineris ingentes miserias?) A. Augustinus, 「고백록」, 1.5.5
하나님이 감상하시기 위해 만드셨다. 만드신 원작품 그대로 두어야 한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모나리자(Mona Lisa)는 1962년도 7000억에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 값을 매길 수 없을 것이다.
* 모나리자 그림1
그런데 누군가 거기에 이렇게 낙서했다고 치자. 세계인이 분노할 것이다.
* 모나리자 그림2
그런데 왜 나는 걸작품인 내게 그짓을 하는 자신에게 분노하지 않을까?
나는 그림이나 조각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다. 살아있을 뿐 아니라 살아가는 작품으로 만드셨다. 하나님 닮은 영혼(靈魂)을 가진 나다.
우리의 죄로 하나님의 원작품(原作品)인 내가 훼손되었다. 그림에 콧수염을 칠한 정도가 아니었다. 나 아닌 다른 게 들어온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이 만들지 않은 나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책임(責任)져야 할 나이니, 내 힘으로는 나로 돌아갈 수 없다.
B. 선한 일을 위하심
둘째로, 우리는 선(善)한 일을 위하여 태어났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상)
그런데 죄(罪) 때문에 그 목적대로 살 수 없게 병들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구원(救援)해 주신 것이다. 병든 나를 고친 것이다.
* 정인이 학대 사망 사건
날 만드신 하나님 찾는 본성(本性)과 그분 없이 살려는 미친 기운(madness)이 함께 있다. 삼겹살 같은 인간이다.
남 보기에 선해 보이는 인간의 겉모습, 그 아래에 추한 본성, 더 밑에는 하나님을 닮은 영혼이 있다. 이 사실에 희망을 갖는다.
돈 잘 버는 법, 직장에서 출세하는 법, 주식 대박 나는 법, 열 살 어려보이는 화장법, 실컷 먹고도 다이어트 하는 법, 꿀잠 자는 법, 맛집 찾는 법, 노후자금 마련하는 법, 100만 유투버 되는 법.
이런 것들은 단지 육신(肉身)으로 세상을 사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은 아니다. 그것은 결코 죽어도 지속될 가치(價値) 있는 인생을 살게 하는 최종적인 답이 아니다.
죄가 들어옴으로 인간은 자기의 정체(正體)를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걸작품인데 쓰레기 더미에 던져진 것처럼 버려지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存在)인지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는 영혼과 본성이 병든 인간을 고쳐서 다시 참된 인생의 목적(目的)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아름다운 세계(世界)를 더욱 빛나게 하시려고 나를 만드셨다. 창조된 세계가 보석으로 만든 멋진 면류관(冕旒冠)이라면 우리는 대관식에 앉은 왕(王)이다. 면류관 때문에 왕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즉위하는 왕 때문에 면류관이 빛나지 않는가?
그런데 그 왕은 더 높은 “왕 중의 왕”(King of kings)의 뜻을 따라 세계(世界)를 돌보고 가꾸도록 부름 받았다
인간의 영광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이다.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선(善)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다. 거기서 인간의 존재는 가장 찬란하게 빛난다. 후회 없는 행복을 누린다.
나를 창조(創造)하신 분 앞에서 내가 그분의 뜻을 위해 태어났음을 깨닫는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날 사랑하셔서 대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所重)한 존재인지 깨닫는다.
IV. 적용과 결론
자, 이제 내 인생을 어떻게 할까?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지금처럼 달려가듯 살다가 죽어버릴까?
모든 것 괴로우니 놀이와 향락(享樂)으로 다 잊어버린 채 취한 듯 살까?
아니면, 스스로 답을 줄 수 없음을 알고 조용히 무릎을 꿇고 그분의 대답(對答)을 들어볼 것인가? 이제 선택하라!
인간으로 산다는 것4 2021. 1. 24 주일 낮 예배
<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마 5:14)
I. 들어가는 말
모든 인간은 행복하길 원한다. 불행(不幸)하게 되는 길을 선택할지라도 그것은 행복하리라고 믿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事物)이 저마다 쓰임새가 있어서 만들어졌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목적(目的) 없이 만들어 졌겠는가?
*우주왕복선 250만 개의 부품
좋다, 훌륭하다, 아름답다는 평가는 사물을 만든 의도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 존재의 의미는 그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규정될 수 있다.
나의 존재가치(存在價値)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에 있다. 나를 사랑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시니 존엄한 존재다.
인생의 목적은 선한 일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 나를 지으셨다.
II. 두 번 태어나는 인류
A. 첫 창조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創造)하셨다. 창조된 사람이 진화하여 더 발달한 인류(人類)가 되었으나 인간 아닌 것이 사람으로 진화한 것은 아니다.
첫 사람은 흙으로 빚으사 그 코에 생기(生氣)를 불어 넣으셔서 만드셨다.
흙으로 육체를 삼으시고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영혼(靈魂)을 창조하셨다.
이 둘을 결합해 살아있는 인간(人間)이 되게 하셨다. 따라서 육체는 지상(地上)의 자원을, 영혼은 천상(天上)의 자원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모두 불멸(不滅)하도록 창조되었으나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써 죽음(death)이 들어왔다.
가장 큰 벌은 하나님을 잊은 것이었다. 멀쩡한 사람이 일시에 시각(視覺)을 잃어 사물을 볼 수 없게 된 것처럼 말이다.
"눈먼 사람에게 말하라. 너는 자유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는다. 그는 길 한 가운데서 꼼짝도 않고 그대로 있다 …겁에 질려 있다.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른다… 사실 합리적인 미로에 사는 것과 도시라는 미쳐버린 미로로 나아가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주제 사라마구,『눈먼 자들의 도시』p,307
그들은 눈이 멀었다가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눈이 멀었었다. 볼 수 있지만 눈이 먼 사람들이었다. 홀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
자기가 무엇인지를 규정해 주는 근거(根據)를 잊어버렸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관계(關係)를 상실하였다. 그래서 존재의 이유도, 가치도, 목적도 규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명암을 구별할 정도로 희뿌옇게 보이는 시신경이 남아 있기에 인류사회의 도덕(道德)이 가능했다.
철학 같은 학문(學問)은 그것들을 세계 안에서 찾으려는 노력이었고, 종교(宗敎)는 그 갈망을 보이는 세계 바깥에서 찾으려는 시도였다.
자기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God)이신데, 그분을 떠난 인간이 어디서 자기를 찾는다는 말인가? 그러나 무엇이라도 해야 하지 않는가?
B. 재창조
하나님의 속박은 자유를 위한 배려였다. 어른들이 어린 아이의 행동을 규율(規律)하는 것도 자유를 위함이다. 자율(自律)할 수 있을 때까지.
*1996년 양은이파 <두목>과 지존파 탄생
인간의 본성(本性)이 하나님을 떠나 악하게 살고 싶어 하는데 어찌 속박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나님을 떠나면 더 큰 속박이 기다린다.
죄 때문에 눈 멀어 자기를 규정할 수 없고, 존엄한 가치(價値)도 알지 못하는데, 그런 인간을 내버려둔다면 어찌 행복에 이를 수 있겠는가?
하나님으로 행복하도록 태어났다. 죄인은 본성적으로 그분을 대적한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7)
그렇기에 인간의 본성은 수리가 아니라 전적인 재창조를 필요로 했다.
다시 선(善)한 일을 위해 살 수 있도록 하나님에 의해 재창조(再創造)되어야 했다. 그것은 단지 겉모습이나 생활의 개선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구원(救援)이 필요했던 이유다.
자기가 죄인(罪人)인 것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을 때 죽었던 영혼을 살리신다.
죄를 용서하시고 영혼에 성령을 주셔서 선한 본성을 새롭게 창조하셨다.
첫 창조의 인류는 아담을 머리로 하고 재창조의 인류는 예수를 머리로 한다. 아담의 후손은 피로 연결되고, 예수의 후손은 영으로 연결된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새 본성(本性)을 주신다. 이로써 땅에 매였던 인간의 마음은 하늘로 상승(上昇)하고, 그 사랑으로 다시 하강(下降)하면서 만물의 질서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그렇게 재창조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세상(世上)을 향하면, 거듭나지 못했던 옛날의 가치를 따라 살게 되고 예전보다 불행(不幸)해진다.
* 애슐리 메디슨 사건과 기독교인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는 다른 사상(思想)을 따라, 다른 방식(方式)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 중심은 진리와 사랑이다.
III.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신자는 용서 받고 재창조된 사람으로서 새로운 세상에 속해 있다. 그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통치(統治)를 받는 나라다.
신자는 세상나라를 진리(眞理)와 사랑으로 정복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상의 질서에 항거하고 변혁하도록 부름 받았다.
A. 순응적 그리스도인
세상에 항거하고 변혁하는 대신 타락한 문화에 순응(順應)하며 산다.
1. 명목상의 신자임
교인(敎人)이라는 이름은 가졌지만 내면은 신자가 아니다. 마음은 여전히 세상 사람이다. 단지 기독교 문화(文化)로 위안을 삼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예수 믿는 것조차 자기 위해, 세상 행복을 얻는데 이용(利用)해 보려는 사람이다.
그는 경건(敬虔)의 비밀을 모른다. 그분 때문에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사고방식과 삶이 여전히 육적인 성향에 매여 있다.
2. 죄에 지는 신자임
이 사람은 구원 받은 신자일수도 있지만, 현실적인 삶에 있어서는 늘 죄(罪)에 지는 삶을 살아간다.
머리로는 신앙의 이치를 알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도 안다. 주님 사랑을 경험했고 거듭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삶 속에서 죄에 굴복한다.
그는 내적으로는 거듭났으나 믿음과 순종으로 생활하지 않는 사람이다.
“너희는 세상의 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이 빛(light)인가? 어둠 속에 사는 신자가 세상의 빛일 수 있는가? 어둠에 더 큰 어둠을 더하지 않는가?
“너희”가 누군지 문맥을 보라. 팔복(八福)의 사람이다. 전국 백성의 인격적 특징이다. 무슨 소유가 아니라 존재 때문에 구별된 사람들이다.
명목상의 교인이든, 죄에 지는 신자이든 문화적(文化的)으로만 그리스도인이다. 이들의 관심은 여전히 개인적 평안과 물질적 번영이다.
기독교 문화의 분위기 속에 사는 것을 신앙으로 여긴다. 생명은 없다!
B. 변혁적 그리스도인
이 사람이 성경적(聖經的) 그리스도인이다. 이들은 세상의 사조와 문화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주님의 뜻에 거스르는 것과 싸우고 변혁(變革)한다.
그들은 경건을 추구한다. 그리스도(Christ)를 본받고 싶어 한다. 진리를 알고 싶어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거듭난 본성을 따라 살려고 한다.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人類)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기를 갈망한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나 악(惡)을 미워한다.
개인적으로 선할 뿐 아니라 사회악(社會惡) 구조적 모순에 저항하고 변혁(變革)하려고 한다. 현대 문화 속에 살지만 그것에 지배되지 않고 선하게 발전시켜 나갈 사명을 느낀다.
a. 사상적 전투, b. 윤리적 전투, c. 신령한 전투
거듭난 신자는 이 선(善)한 일을 위해 삶으로써만 행복(幸福)을 누릴 수 있다. 다른 삶을 꿈꾸는 것은 행복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다른 데서 행복을 찾으려 할 때 내면세계(內面世界)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엄청난 에너지를 쏟게 된다.
* 전투에 있어서 보급의 중요성
말씀의 검을 가지라. 은혜의 힘으로 무장(武裝)하라. 거기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랑의 친교(親交)를 누리라.
IV. 적용과 결론
인간은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되었으나 죄(罪) 때문에 세상이 망가졌기에 다시 그런 세상으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恩惠), 마음을 녹이는 사랑, 모든 필요에 대한 공급은 바로 이렇게 세상의 거짓된 물결과 싸워 이기게 하심이다.
죽어도 하나님 앞에 기념(記念)이 될 만한 인생을 살라. 썩고 멸망할 세상에서 불멸(不滅)의 가치를 찾아서 살라.
당신의 결혼식에 온 사람보다 장례식(葬禮式)에 올 사람이 훨씬 더 많은 삶을 살라! 살아서보다 죽은 후에 그리운 사람들이 더 많은 삶을 살라! 이것이 행복(幸福)에 이르는 길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5 2021. 1. 31 주일 낮 예배
<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전 2:11)
I. 들어가는 말
목적도 없이 달려가는 현대인의 삶. 치열하게 경쟁하나 승자는 없다. 경쟁해서 이겨도 그게 인생의 문제(問題)를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人間)이 누구인지 아는 것만큼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답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내가 느끼는 보람은 영원히 지속될 것인가? 그것은 세월이 흘러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가치(價値) 있는 것인가?
II.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전도자는 이미 모든 것을 누려본 사람이었다. 경험적으로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다 허무(虛無)하다고 선언한다.
A. 인생의 허무함
그가 제시하는 것들은 모든 사람들이 인간 행복(幸福)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웃음, 기쁨, 사업, 재산, 쾌락, 욕망들이다(전 2:1-10). 지금도 현대인들은 이것을 얻기 위해 경쟁(競爭)하지 않는가?
전도자는 사람이 하는 일과 애쓰고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기에, 허공을 움켜쥐고 바람 잡는 것과 같고 무익한 것임을 깨달았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전 2:11)
여기서 “무익한”이라는 말은 단지 아무 유익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덧없어서, 우리가 살아야 하는 인생(人生)의 의미를 규정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웃으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기쁜 일이 있으면 잠시 근심이 사라지고 생각까지 바꾸게 되지 않는가?
사업의 번영(繁榮)은 사회적 지위를 높이고 경제적 삶을 풍족하게 하지 않는가? 결핍으로 인한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가?
재산(財産) 증가는 자신이 하고 싶던 것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주고 넉넉히 소비할 수 있는 자유를 주지 않는가?
또한 전도자는 특별한 부자였다. 자신이 “노래하는 남녀들과 처첩(妻妾)들”을 거느렸다고 하지 않는가?
집안에 자기 위해 음악과 춤으로 기쁘게 할 오락조(娛樂組)까지 두었다. 아마도 그들은 이어지는 잔치와 향연을 빛냈을 것이다.
거기에 처첩들까지 거느렸으니 욕정조차 마음껏 채워보았을 것이다.
그는 욕망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욕망(慾望)이 어디서 멈추었을까? 그것도 보람을 느끼면서 말이다.
모든 것을 가져 보았으나 전도자는 마음의 공허(空虛)를 피할 수 없었다. 인간은 그런 것으로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후회(後悔) 없이 살 수 있을까?
B. 의미를 따라 삶
인간의 존재는 땅에 있으나 인생의 의미는 하늘로부터 부여된다.
인간의 정신이 땅에만 매일 때 의미는 자기 욕망에 따라 부여된다.
그러나 그 욕망은 시간(時間)과 함께 변한다. 채워도 또 다른 욕망이 생겨난다. 그것은 순간의 만족일 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욕망(慾望)을 좇아 사는 것은 허무한 것이기에 이로써 인간 정신은 방황하게 된다.
인간으로서 진정한 보람은 자기 인생의 의미(意味)를 알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데 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전 3:12-13)
이 세상에 잠시 있을 것과 영원한 것을 아는 것이 곧 지혜(知慧)다.
잠시 있는 것 위에서 영원한 것을 생각하고, 영원한 것 아래에서 잠시 있을 것을 생각해야 한다.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은 우리 삶의 의미를 결정하지 못한다.
행복하기를 원하면서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a. 정신적 행복을 잘 모름
그가 인생의 행복(幸福)을 지상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에서만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든 불행(不幸)과 불만족이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 슈퍼볼, 파워볼, 메가밀리언 이야기
행복을 물질(物質)과 세상으로부터의 만족에서만 찾으려 하니 그것은 여름날 목마를 때 마시는 설탕물과 같다. 더욱 목마르게 된다.
어차피 세상과 육체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어서 증대하는 욕망(慾望)을 따라가지 못한다.
행복 지수를 물질적 자원의 증가로 높이려 하나, 욕망의 증대함으로 늘 불행(不幸)하다고 느낀다.
끊임없는 욕망은 염려를 불러 마음과 정신을 갉아먹어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게 만든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God)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하는 데 있다.
자기가 사람으로 태어난 목적(目的)을 알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데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거기서 또한 자신을 완성(完成)해감으로 기쁨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b. 알지만 그대로 살지 않음
정신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욕망에 굴복하여 이기적(利己的)인 삶을 살아간다. 그때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구원 받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자유(自由)와 평안(平安)을 누릴 수 없다.
그래서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참된 자유는 일탈(逸脫)의 기쁨이 아니라, 좀 더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데 있다. 자기도 그런 세상을 원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맞짝으로 지으셨다. 지상세계와 천상세계다. 선함과 아름다움 모두 그것의 반영이 되게 하셨다.
자신과의 대화(對話)가 필요하다. 자기 밖에서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앙과 성찰은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말씀을 통해서 받은 은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다. 이 사랑으로써 지금 있는 나보다 나은 내가 되도록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각박한 현실을 살면서도 사랑과 영원을 향하여 끊임없이 대화함으로써 행복을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신앙생활(信仰生活)이다.
* 옛날 주화 복원하기
자기의 만족을 구하는 이기적(利己的)인 삶으로써는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자기를 참되게 사랑할 수 없다.
이기심보다는 사랑 안에서, 시간(時間)보다는 영원(永遠) 안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려고 애쓰며 스스로 대화해야 한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 말씀은 인생에 대한 회고의 답이다.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행복하게 살아갈 힘을 주신다.
진리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게 해준다. 가짜인 자기와 참된 자기 사이에 대화를 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달으라. 삶의 의미를 정립하라. 은혜 받으라.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라.
인간으로 산다는 것6 2021. 2. 7 주일 낮 예배
<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사 44:21)
I. 들어가는 말
우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으며, 이는 선(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임을 깨닫게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모든 인류(人類)가 서로 사랑하며 세계를 더욱 선하고 아름답게 하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 원래 있던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우리를 구원(救援)해 주셨다.
신자는 세상을 원래의 창조 목적(創造目的)으로 돌아가게 하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 이웃과 함께 행복(幸福)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 일에 이바지하면서 삶으로써만 행복(幸福)해질 수 있다. 이 사명대로 살려면 명목상의 신자나 죄(罪)에 지는 신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생의 허무(虛無)를 직시하고 세속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삶,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II.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나”라는 존재, 개인의 인생의 목적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야 하는가?
A. 영원한 목적
우리 인간의 영원한 목적(目的)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enjoy) 것이다.
이는 우리의 지상(地上) 생애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의 인생은 영원한 나라를 향하는 기차역의 대합실과 같다.
기독교에 귀의한다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世界觀)을 갖는 것이다. 이전에는 세상이 전부였는데 이제는 영원을 생각하며 인생의 의미를 붙들어야 하는 것이다.
불멸(不滅)하도록 창조된 우리의 영혼은 불사(不死)할 몸을 입은 후에 영원한 천국(天國)으로 들어갈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매 순간 새롭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榮光)과 아름다움 때문에 그분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다.
지성(知性)으로 하나님을 관상함으로써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God)의 완전한 성품(性品)을 알게 될 것이다. 이로서 지고(至高)의 행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따라서 믿음(faith)과 소망(所望)은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매우 유용하다. 그러나 천국에 이른 후에는 그것들은 필요가 없다.
거기서 우리는 믿던 바를 직접 보게 될 것이고, 소망하던 바는 모든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거기서도 영원(永遠)하다.
“우리가 지금은 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 ,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이라”(고전 13:12-13)
지상에서 신자(信者)의 삶은 이 하나님의 영광(榮光)을 발견하는 연습이다. 영원한 행복(幸福)의 그림자를 누리는 연습이다.
지상생활(地上生活)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을 연습하는 기간이다. 신앙으로써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善)하심과 아름다우심을 볼 수 있어야 한다.
B. 잠세적 목적
인생의 잠세적(暫世的)인 목적은 선(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이다.
인간이 따라 가면서 살아가야 할 선(善)과 아름다움의 기준은 성경(聖經)을 통해 보여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人生)의 목적을 이루어가며 살아야 한다. 거기서 이웃과 함께 하나님(God)을 기뻐하며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을 떠나서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할 때 인간은 불행(不幸)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서 기쁨을 찾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1. 보편적 인간으로서
나는 인간이라는 더 큰 범주(範疇)에 속해 있다. 하나님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선한 일을 위해 창조하셨다. 그럴 수 있도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원하셨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상)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선을 따라 살 수 있다.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이기적 욕망에 덜 휘둘리는 사람은 그 선(善)과 아름다움에 일부 근접하게 산다. 악인에 비해 덜 불안하고 덜 무의미한 삶을 살 것이다.
악인(惡人)은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하니 마음으로 그분과 원수 되었다(롬 8:7).
그들은 생각 없이 살거나 두려워하면서 살 것이다. 그들은 결코 자기 인생에서 영원한 의미(意味)를 발견하지 못한다.
2. 개별적 인간으로서
나는 다른 사람 누구와도 같지 않는 독특(獨特)한 존재다. 또 다시 반복되지 않은 특별한 존재(存在)로 태어나게 하셨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 목적은 다른 사람과 중첩될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인격의 깊이는 이 사실을 알고 모든 사람들을 존엄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이 세상(世上)에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더 좋으셨기에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다.
하나님은 나와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세계(世界)를 더욱 아름답게 하시려고 세상에 보내셨다.
결국 인생의 의미는 어떤 대상(對象)과 어떤 관계(關係)를 갖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거기서 자기 존재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God)
인생의 모든 의미는 하나님(God)과의 관계에서 온다. 그분의 존재를 믿음으로써 우주 안에서 자기 위치를 정하게 된다.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자기가 사랑 받는 소중한 존재(存在)임을 깨닫게 된다. 모든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의해 나만의 독특한 인생을 잘 살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만 자기가 특별한 사람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家族)
태어나서 처음 맺은 관계가 가족이다. 우리는 거기서 사람이 누구인지를 배웠다. 타락하여 죄인이 된 인간이 어찌 서로에게 온전한 가족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한사람이 가족으로 함께 살아가는 삶의 의미(意味)를 알아야 한다. 서로 사랑함으로써 참으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교회(敎會)
이전에 나는 인간으로서 사는 길을 잘 알지 못했고 행복하지도 않았다. 만약 그랬더라면 나는 결코 예수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져 한 몸이 됨으로써 자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지체(肢體)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과 함께 진리의 길을 가면서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배운다.
지체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랑의 관계에 대해 배운다. 신앙(信仰)에서 넘어진 자와 굳건히 서 있는 자를 통해 동시에 배운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 변절(變節)할 때의 불행과 온전히 그분을 사랑(love)할 때의 행복을 함께 배운다.
다른 사람(neighbor)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다른 사람들과 선(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자신이 행복해지는 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아직도 자기 안에 죄(罪)와 이기심(利己心)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자연(自然)
하나님은 나를 자연의 선량한 관리자(管理者)로 부르셨다. 나로 인하여 자연이 고통 받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그 자연(自然)의 선한 상태는 우리 자신에게 유익이 되어 돌아온다.
이 세상에서 내 인생의 목적은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고 사람들에게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 때 인간은 행복하게끔 만들어 주셨다. 그것이 힘들 때 말씀과 은혜(恩惠)를 주셔서 살게 하신다. 믿음의 기도로 하나님께 구하라.
III. 적용과 결론
나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 독특한 존재(存在)로 나의 인생을 살도록 세상에 보냄 받았다.
나의 일대기는 아무도 살아본 적이 없는 독특한 의미(意味)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잘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 보내셨고, 예수의 피로 구원(救援)하셔서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셨다. 이 세상에서 살고 있으나 영원한 세상을 위해 살게 하셨다.
나는 전 세계에 남은 희귀종 중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유일한 개체와 같다. 그런 내가 태어난 것도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가 아닌가?
더욱이 그분의 지극히 큰 사랑(love)을 받고 있지 않은가? 아들까지 주셨는데 무얼 아끼시겠는가? 다시 새롭게 살자.
인간으로 산다는 것7 2021. 2. 14 주일 낮 예배
< 무엇을 위한 직업인가? >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살전 4:11-12)
I. 들어가는 말
우리 모두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 직업 활동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이단적 종말론(終末論)에 물들어 생활이 무질서해진 데살로니가 교회 교인들은 말은 많고 일을 안 했다. 사도는 권면한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살전 4:11-12)
그의 요지는 두 가지다. 조용히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라는 것이다. 의무에서 이탈해 말만 많아진 사람들에게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일하라고 한다. 일 안하고 부유한 신자들의 자비심(慈悲心)에 의존해 사는 것을 그만 두라는 뜻이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살후 3:10)
정말로 어려울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살 힘을 얻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자신이 게을러서 일하지 않으면서 남을 의지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일해야 한다.
II. 무엇을 위한 직업인가?
노동은 인간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특권이다. 이것은 직업(職業)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행된다. 인생의 보람은 직업을 통해 자기가 인간으로 태어난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A. 직업의 동기
우리가 직업을 갖는 동기가 무엇인가? 기본적으로 생계(生計)를 위해서다. 우리는 직업 활동을 통해 소득을 얻고 그것으로 소비함으로써 삶을 영위해 나간다.
자기 스스로 번 돈으로 육체(肉體)의 필요한 것들을 조달하고, 내일 위한 염려에서 자유로워진다. 고행의 삶을 택하지 않는 한 미래의 육체의 필요를 위한 준비는 요구된다.
그러나 직업은 그 이상의 의미(意味)가 있다. 직업이 다만 생계를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왜 계속 일할까?
* 10조의 재산가 40년 살 때 매일 12억씩 쓸 수 있음
그런데도 열심히 일한다.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자신의 뜻이 이뤄지는 성취감(成就感) 때문이다.
* 연예인 생활을 접고 경영자가 됨
그 성취감은 웅장하지 않다. 전체적이지 않다. 일종의 자기만족이다. 그렇게 성취하는 목표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때로는 직업 활동의 성취감을 넘어서 야망(野望)에 의해 지배된다. 야망은 경쟁에서의 승리를 요구한다. 이 야망은 재력과 권력을 추구한다.
이를 위해서 때로는 부정(不正)한 방법을 사용하여 돈을 벌기도 한다. 이는 꿈이 아니라 야망에 지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한 소비(消費) 욕구 이상의 욕망을 갖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야망(野望)이 무엇인지는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기의 이름을 내고자 했던 사람들의 욕구를 통해 드러난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을 건설하여 그 탑 를 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 11:4)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꿈(dream)과 야망은 다르다. 올바른 꿈은 그것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로써 이웃들이 행복해지고 내가 더욱 나다운 사람이 되어가게 한다.
신자는 늘 질문해야 한다. 경쟁에서 어떻게 이기고 승리할 것인가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경쟁을 하고 있는가이다. 내 직업 활동을 통해 어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가이다.
그러나 야망은 정확히 자신을 하나님(God)의 위치에 두는 것이다. 자신의 뜻을 펼침으로 만족을 얻는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사람들의 영광을 받는 것이다. 야망은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하지 않은 자기 욕망이다.
그러면 직업의 동기(動機)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탐욕과 불의, 억압과 무질서로 망가진 세상을 고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당신에게 필요(必要)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확정해야 한다. 무엇이 필요한가? 불신자로서 우리는 더 많은 부를 원했다. 자기의 만족과 지위의 향상을 위한 것이었다.
인간답게 살아야 할 경제적 조건(條件)들이 채워지고 나면 그 다음에 필요한 건 무엇인가? 더 많은 소비에서 더 많은 쾌락을 누릴 수단으로 돈을 벌지는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단지 성취(成就)의 기쁨뿐이라고? 그렇다면 당신이 그렇게 많이 성취한 다음 그 끝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니라”(약 4:13-15)
그것은 곧 사라질 인간으로서 허무(虛無)한 일에 굴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그만 둘지라도 계속 될 의미를 찾아 살아야 한다.
혹은 내일 죽을지라도 후회 없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무엇이 필요하다.
B. 직업과 소명
종교개혁과 함께 직업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召命)으로 보는 것이었다.
중세시대 때에 로마 교황청, 사제, 수도사, 속인의 계급질서로 보던 인간관을 수평적 직업관으로 보게 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이미 종교개혁 400여 년 전, 12세기의 아시시의 프란시스(Franciso de Assisi) 같은 사람에게서 시도된 바였다.
수직적인 계급(階級)으로 여기던 직업관을 모두 하나님의 고유한 부르심을 받아 섬기는 수평적 직업관으로 보게 해주었다.
창조하실 때 아름다운 세계는 인간의 죄(罪)로 망가졌다. 직업(職業)은 노동을 통해 그 망가진 땅을 고치는 것이다. 모든 직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선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다.
* 영국의 국회의원과 청소부
직업 활동을 통해 주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힘을 창조 목적을 실현하는 데 사용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야망은 정화(淨化)되어야 한다. 우리의 야망이 아니라, 사랑으로써 재능을 따라 기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야망을 이뤄주시면 좀 떼어드리겠다는 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이 세상의 어느 공간도 하나님(God)이 창조하지 않으신 곳이 없듯이 어느 영역도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는 부분이 없다.
“자연에도 고정된 법칙을 따라 질료들에게 힘을 행사하는 주권 영역이 있듯이 개인, 가정, 학문, 사회, 교회 생활에도 저마다의 생활 규칙에 순종하며 그 수장에게 복종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전 영역 가운데 만물을 지배하는 주권자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실 수 없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 Abraham Kuyper, A Centennial Reader(1998), 467, 488
우리는 그 영역을 직업 활동으로 정복해 반역(叛逆)을 그치고 만물의 중심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이름을 높이도록 부름 받았다.
이전엔 그것도 모른 채 탐욕과 야망(野望)으로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았다. 심지어 생계를 위해, 더 많은 재산과 권력을 얻기 위해 이적행위도 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새로 발견했으니 어찌 직업의 의미가 새롭게 발견되지 않겠는가? 이제는 썩을 세상에서 부패할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창조의 목적을 위해 살아야 한다.
자신의 직장과 사업의 최고의 자리에 하나님(God)을 두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라. 그분이 거기 계셨더라면 가지셨을 목표(目標)를 가지고 그 영광을 위해 살아가라. 그 모든 것을 더하실 것이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단 6:20)
단지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will)을 이루기 위해서 직업 활동을 하는 것이다. 그분과 운명을 함께 하면서 진취적인 길을 가면서 세상을 바꾼다. 쉽지 않다.
그러한 어려움 때문에 주님의 은혜(恩惠)를 의지하면서 부족한 자신을 완성(完成)해 가는 것이 인생이다.
III. 적용과 결론
인간은 일하기 위해 태어났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새로운 질서(秩序)를 만들기 위해 태어났다.
이것은 세상을 창조(創造)하신 목적이다. 망가진 것을 고치고 부족한 것은 온전하게 해서 세상을 복되게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야망이 아니라 꿈(dream)을 가진다.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꿈이다.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는 세상이 될 꿈을 꾼다.
구원(救援)의 은혜는 그런 세상을 만들라고 주신 것이다. 나와 후손이 살 복된 세상을 위해 주시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살면서 나도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8 2021. 2. 21 주일 낮 예배
< 가족이란 무엇인가?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I. 들어가는 말
인간으로 태어나 좋아서 웃는 것도 가족(家族) 속에서 처음 배우고, 슬퍼서 우는 것도 가족 속에서 경험한다.
결혼(結婚)하는 모든 사람은 혼자 사는 것보다 행복하다고 믿기에 결혼한다. 불행해지려고 결혼하지는 않는다.
인생(人生)의 목적과 나의 가족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좋든 싫든 내 인생의 독특한 목적(目的)은 가족들과 관계 속에서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II. 가족이란 무엇인가?
A. 가족과 인생
가족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幸福)하게 살기가 얼마나 힘든가? 더욱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며 위로 받으며 살기란 얼마나 힘든가?
연일 보도되는 영유아, 부모 살해 등 존속 살인 사건은 이를 말해준다.
* 영아, 친족 살해 짧은 영상
인간의 삶의 첫 시작(始作)은 가족과 함께 시작된다. 엄마, 아빠,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배워나간다.
바람직한 인성(人性)이 좋은 가족관계 안에서 형성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인 것 같다.
가족(家族)이란 무엇일까? 먼저 국어사전적 정의(定義)를 살펴보자.
“부부를 중심으로 하여 그로부터 생겨난 아들, 딸, 손자, 손녀 등 가까운 혈육들로 이루어지는 집단, 또는 구성원. 대개 한 집에서 생활한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 p.66
국어사전적 정의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현상을 설명한다. 그러나 성경(聖經)은 가족을 기원과 발생, 목적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이 말씀은 가족이라는 주제에 대해 다음 네 가지 사실을 말해준다.
a.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됨
b. 남자와 여자로 창조됨
c.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심
d. 땅을 정복하고 다스림
창조(創造)의 목적은 내가 태어난 목적, 가족을 주신 목적과 연결되어 세계로 향한다. 내 인생의 목적을 가족과 동떨어지게 주지 않으셨다.
따라서 내 인생의 가치는 가족들과 얼마나 선(善)하고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것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하나님께서 가족을 주신 것은 부모를 통해 사랑(love)을 배우고, 형제들을 통해 사람이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다.
누가 그렇게 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우리 가정들의 현실은 어떠한가? 상처(傷處)가 많고 사랑보다 미움을 먼저 배우는 곳이 되었다.
그럴 때 가족은 세상에서 내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집단이 되고 만다.
행복하기 위해서 하루바삐 가정(家庭)을 떠나 독립해야 할 것 같지 않은가? 그러나 그 안에 내가 있는데 어찌 가족관계를 끊을 수 있는가?
가족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幸福)하게 살기가 얼마나 힘든가? 더욱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위로 받으며 살기란 얼마나 힘든가?
한 인간이 살아온 가족 관계는 그의 인간됨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
B. 인생과 나뉠 수 없음
나 개인의 인생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이라는 말 자체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關係)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기에 내가 있다. 내가 그분께로부터 왔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그분께 돌아가기는 만물(萬物)과 마찬가지다.
“이는 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하나님께서 나를 내 가족(家族) 안에서 태어나 함께 살게 하셨다. 곧 세상(世上)에 나가서 사람들과 함께 살 연습을 하게 하신 것이다.
나는 가족들 때문에 가족들은 나로 인해, 선(善)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이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다.
사랑에 넘치는 가족관계 속에서 인생의 무게를 견디고 감당할 힘을 얻는다. 그러나 그것은 무제한 인출이 가능한 은행계좌 같은 것이 아니다.
가족들이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한다. 누가 그들에게 그걸 가르쳐줄까?
* 젊은 시절 일에 미쳐 산 중년의 고독
가족은 특별한 타인(他人)일 뿐, 내가 아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절대적으로 고독한 나의 실존(實存)이 가진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아무리 사랑으로 감싸준다고 해도, 세상에 대한 낯섦은 무한한 우주공간에서의 소외(疏外)와 같다. 나조차 나에게 낯설지 않은가?
결국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세계와 우주로부터 소외된 존재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온전한 정신(情神)일 수 없다.
* 우주와 인간 영상
한 인간으로서 나의 실존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면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밤하늘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우주공간을 생각해보라. 자신이 홀로 고립(孤立)된 존재임을 느끼지 않는가?
내가 무슨 이유로 인간(人間)으로 태어나 여기에 있는지 결코 알 수 없고, 어디로 갈 것이지도 알 수 없는데 우주는 침묵(沈默)한다.
모닥불의 불꽃 한 알갱이 어둠속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영원(永遠)의 관점에서 보면 내가 그런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보이는 것은 오직 무한뿐이고 이 무한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한순간 지속될 뿐인 하나의 원자, 하나의 그림자와도 같은 나를 덮고 있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내가 곧 죽으리라는 것,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내가 모르는 것은 이 피할 수 없는 죽음 그 자체다.” Blaise Pascal,『팡세 Pensées』단장 194번
이러한 사실을 똑바로 보는 것이 무섭기에 관심을 돌린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외면(外面)이다. 세상사에 몰두하고 오락과 유흥에 빠진다.
그래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기에 진지함을 벗어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진정한 자유(自由)일 수가 있겠는가?
세상의 소유가 비참(悲慘)을 가릴 수 없음은 명백하다. 솔로몬은 가장 번영한 사람으로서 쾌락의 헛됨을 알았고, 욥은 가장 비참한 사람으로서 불행의 실체를 알지 않았는가?
인간은 하나님 때문에 존엄(尊嚴)하지만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인생을 진지하게 직시하기 무서워서 외면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thinking) 무서워서다. 그러나 생각이 가벼우면 인생은 무겁다.
나의 존엄성은 다른 사람이 내게 부여해줌으로써가 아니라 내가 사유(思惟)함으로써 비로소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다가오게 된다.
나는 우주공간 안에서는 티끌 같은 존재다. 그러나 우주와 바꿀 수 없이 존귀(尊貴)하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나의 존엄성은 공간(空間) 안에서 느껴지는 게 아니다. 사유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이다.
우주가 나를 파멸시켜도 나는 여전히 우주보다 위대하다. 그것은 나를 파멸시키는 의미를 모르지만 나는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 부모(父母)의 피를 받아 태어났다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것인가? 그 살과 피는 사랑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가족관계 안에서 한 인간으로 완성(完成)되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 앞에서 망가진 죄인이 어찌 완전한 가족이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닌가?
“그가 또 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아오게 하고… ”(눅 1:17)
하나님께나 가능할 무한한 기대를 가족에게 거는 것도 불행한 것이다.
가족은 우리의 이기적 행복을 위해 이용(利用)당하려고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각자 자기를 한 인간으로서 완성하게 하기 위해 주신 인연(因緣)이다. 영적 가족인 교회도 그러하다.
더 높으신 분으로부터 은혜(恩惠)를 받지 않으면 어찌 그리 살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부모로부터 이 모본(模本)을 보며 자라고, 아내와 남편으로 만나 이 모본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자녀들에게는 이를 본받게 하기 위함이다.
가족(家族)들이 함께 살고 사랑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배운다. 사랑할 힘이 자기 안에 없음을 자각하며 은혜를 구하게 된다.
자녀들은 괴테(J. W. von Goethe)가 말한 질풍과 노도의 시기를 겪는다. 가정은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고향과 같아야 하지 않겠는가?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행복은 결코 자식에게 말로 가르쳐지지 않는다. 삶으로 전수(傳授)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대가 누구냐고 묻지 마라. 당신의 가족(家族)들 속에 있는 그 사람이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 인생은 혼자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완성(完成)되어 가는 것이다. 가족 사랑의 어려운 과정을 겪으며 가족이라는 거울로 당신의 인생을 보라.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 학벌이 아니라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서 당신의 인생의 의미(意味)는 실현되어 가는 것이다. 신앙의 은혜(恩惠)는 이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다. 망가진 관계도 고치신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9 2021. 2. 28 주일 낮 예배
< 과학기술이란 무엇인가? >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2-24)
I. 들어가는 말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번성하는 후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인류 문명(文明)의 발전이 예고된다. 그들은 성(城)을 쌓고 촌락을 이뤘다.
이미 사회활동은 목축과 예술, 기술로 분화(分化)되었다. 라멕의 자손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에 대한 이야기가 그 사실을 증거한다.
인생은 자기 시대 안에서 사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時代)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오늘날 과학기술(科學技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고는 현대를 이해할 수 없다. 나의 인생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하다.
II. 과학기술이란 무엇인가?
“과학기술(scientific technology)이란 순수 자연과학, 응용과학, 그것을 이용한 공학, 그리고 이에 따른 생산기술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KNJ
A. 인간과 과학기술
인간은 탐구(探究)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자연(自然)의 법칙들을 이해함으로 과학기술은 발전하게 되었다.
1. 과학과 인간의 능력
자연에 대해 관찰하고, 그 결과를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써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기술(技術)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인간의 본질(本質)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이들은 생존을 위해 각각 천상자원과 지상자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영혼은 진리(眞理)를 누림으로써, 육체는 물질(物質)을 소비함으로써 자기를 지탱하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2. 과학기술과 산업혁명
기본적으로 과학기술은 물질적 사물들을 개발, 생산하는 일에 기여한다.
1차 산업혁명은 1780년 이후 증기기관의 발명을 중심으로 기차, 선박 산업이 발전하고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다.
2차 산업혁명은 1900년 이후 전기의 발명을 중심으로 화학, 자동차, 항공기, 라디오, 텔레비전 산업이 발달하게 되었다.
3차 산업혁명은 1969년 이후 컴퓨터(computer)의 발명을 중심으로 자동화 생산시스템이 폭발적 발전을 이루었다. 전통적 제조업 시대가 막을 내리고 네트워크와 협업시대가 도래했다.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AI)과 생명공학(BT)에 있어서 최첨단기술의 융합을 중심으로 한다. 가상현실과 생명공학 등의 폭발적 발전을 이루었다. 과학기술의 특이점(singularity)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문명에 대하여 어떤 관점(觀點)을 갖느냐에 따라 세 입장으로 나뉜다.
a. 문명 친화적 입장
b. 문명 적대적 입장
c. 문명 중립적 입장
3. 기술의 역할과 영향
과학적 지식이 그것을 응용하여 상품을 생산(生産)할 수 있는 기술과 결합할 때 많은 물건들이 값싸게 생산된다.
a. 긍정적인 면
과학기술의 발전(發展)은 생활을 편리하게 한다. 문명의 이기(利器)들이 발명되고 가격은 낮아져 대중적 소비를 촉진한다.
인간 몸이 가진 육체적 자원은 유한하다. 현대 과학기술은 그것을 절약(節約)하여 육체의 힘을 비축하게 한다. 육체적 삶의 질이 높아진다.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壽命)이 놀랍게 연장되었다.
구석기 시대: 18세, 신석기 시대: 20세, 로마시대: 25세, 18세기: 35세, 19세기 이후로 급속히 연장되었는데 과학의 발전 때문이다.
우리나라: 조선시대-34세, 1940년대-41세, 1970년대-67세였으며, 현재 기대수명(expectation)은 83세다.
항노화(anti-aging)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이 연장(延長)되고 있으며 150세까지 생존(生存)도 가능하다고 예측한다.
b. 부정적인 면
물질문명의 발달은 편리함을 가져다주지만 그로 인해 생산된 수많은 사물들은 견물생심(見物生心)으로 욕망을 촉진한다.
도시화로 인한 비인간화와 소외(疏外)다. 특히 소비 중심적인 문화로 인해 인생에 대해 성찰(省察)할 마음과 여유가 없다.
의식작용이 감각적 사물에 매이고, 쾌락주의(快樂主義)에 흐르게 되어 인간으로서의 주체적 정신능력이 약화되었다.
B. 과학기술과 내 인생
과학기술(科學技術)이 아무리 발달해도 그것이 인간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 행복은 물질로 살 수 없다.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부산을 30분에 갔다 오고, 화성으로 여름 휴가를 다녀올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 인생의 새로운 의미(意味)를 부여할 수 없고 도덕(道德)을 고양시킬 수 없다.
본문은 급속한 문명의 발전 속에서 인간의 정신(情神)이 깊은 질병 상태에 떨어지게 된 것을 보여준다.
“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창 4:23)
이는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심(利己心), 이웃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 여성에 대한 차별적 억압, 조상과 하나님에 대한 조롱 같은 것들이다.
과학기술은 발달했지만 선(善)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떠나자 인간에 대한 사랑도 사라졌다.
과도한 자본주의는 하나님(God)을 대신할 새로운 신을 창조하게 되었다. 돈을 숭배하는 맘모니즘(mammonism)은 말세의 징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1-4)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생의 비참(悲慘)은 자신이 그토록 존귀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무한한 우주공간을 보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도 참으로 자신(自身)이 누구인지를 깨닫지 못한다.
미천한 존재로서 자신의 필멸성(必滅性), 베일에 감춰진 자신의 미래의 운명을 생각할 때,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답을 찾지 않을 수 없다.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암 6:13)
파스칼(Blaise Pascal)은 이것을 자신의 비참한 운명(運命)을 애써 외면하려는 ‘회피’(divertissment)라고 본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기분전환’이라고 번역되는데 고전 발레에서 이야기의 줄거리와 상관없이 삽입되는 춤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진리(眞理)의 빛에서 멀어졌고, 그 인간의 특징은 허무(虛無)한 것을 좇는 열심이다.
인간이 세상에 있는 사물과 그것을 소비(消費)하는 데 골몰하는 것은 죽어야 하는 자신의 운명을 직시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오락에 대한 몰입이나 쾌락의 추구는 자기의 존재의 현실을 마주보지 않으려는 정신의 고집을 보여준다. 이는 극심한 공포(恐怖) 때문이다.
알맞은 분량을 초과하는 물질(物質)에 대한 욕망은 결국은 이렇게 자기 운명을 회피하는 데에 필요한 자원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인생은 고달프다. 이때 인간은 정면 돌파를 선택해야 한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현실(現實)을 직시해야 한다.
그 현실을 해석하고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
정신의 회피(回避), 위락과 기분전환으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할 때 그 정신은 자아(自我)를 찾지 못한다. 주체로 살지 못한다.
이렇게 살아갈 때, 진리(眞理)를 찾지 못해 행복에 이르지 못한다. 단지 보이는 것만을 좇는 감각(感覺)의 노예가 된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눅 12:19)
그는 매일 연회를 하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신의 회피가 오늘 죽을 운명(運命)을 바꾸지 못했다.
* 주식 투자의 광풍과 예견, 마음
내 마음은 그 물질적 풍요보다 더 중요하다. 그것으로 사유함으로써 내가 엄숙하리만치 존귀한 줄 알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 나의 존엄성(尊嚴性)은 내가 차지한 공간의 크기, 사회적 위치나 물질적 소유에 있지 않다. 자신이 존엄한 존재임을 아는 데 있다.
그러면 이 눈부신 과학기술의 문명(文明)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과학기술은 끊임없이 재화와 용역을 생산하는데, 이러한 환경이 인간의 극단적 자기 사랑(self-love)과 만날 때 인간은 진정한 행복(幸福)에 이르는 길을 반드시 잃게 된다.
III. 적용과 결론
과학기술의 혜택을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手段)으로 사용해야 한다.
신자가 현대의 과학기술과 담쌓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반(反)문명적 태도는 문화를 변혁할 선교적 사명에도 어긋난다.
새로운 기술이 내놓는 재화나 서비스에 마음이 빼앗겨서 하나님께 집중(集中)할 여유를 잃지 말아야 한다.
과학기술은 칼과 같다. 그것을 선하게 사용(使用)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내 인생의 가치를 찾아가는 데 유용한 도구(道具)로 사용해야 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10 2021. 3. 7 주일 낮 예배
< 돈이란 무엇인가? >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I. 본문해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생과 가장 많이 얽혀있는 것이 돈(money)일 것이다. 돈 때문에 사랑해야할 관계까지 깨지고 때로는 죽음으로까지 내몰린다.
이 편지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것으로 추측된다. 목회자 디모데에게 쓴 이 편지의 주제는 바른 교훈(敎訓)과 바른 생활(生活)이다.
바울은 편지 끝 부분에서 경건(敬虔)에 대한 가르침을 언급한다. 경건을 지키는 데 가장 큰 대적이 돈에 대한 욕심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년 전에도 그러했으니, 오늘날과 같은 발달한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에서는 돈이 우리의 신앙(信仰)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겠는가?
II. 돈이란 무엇인가?
경건의 비밀(秘密)에 대해 말하다가 거짓 교사에 대해 말한다. 결국 그들의 마음이 돈을 좇는 것을 보면서 경고를 받으라는 것이다.
A. 부에 대한 세 견해
신자가 이 세상의 부(富)를 소유하는 것에 대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 금욕주의(Asceticism)
가난을 미덕으로 여기고 부의 소유를 악(惡)하게 보는 것이다. 스토아주의의 영향을 받은 금욕주의(禁慾主義)로부터 수도원의 청빈주의에 이르기까지 이 견해를 따랐다.
소유를 미워하고 육체의 욕구(慾求)를 죄악시하며, 심지어 육체의 고통을 통해서 영혼이 정화(淨化)된다고까지 여긴다.
2. 번영주의(Prosperitism)
하나님과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영혼(靈魂)의 잘됨뿐만 아니라 범사에 번영(繁榮)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견해다(요삼 1:2).
이 견해에 따르면, 세상에서 부유(富裕)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일종의 인정(認定)이라는 것이다.
신자는 그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특권(特權)을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이는 믿음의 중심을 하나님 나라보다 육신적 번영에 두며 과도한 소비주의(消費主義)의 합리화에 신앙을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3. 성경적 견해(Biblical view)
성경은 부의 소유에 대해서 중립적(中立的)인 입장이다. 돈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단지 더 높은 목표를 위한 수단(手段)이라고 본다. 권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골뿐 아니라 도시(都市)에서도 말씀을 선포하셨다(눅 8:1). 가난한 자들뿐 아니라 부유한 자들도 예수의 복음을 믿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마 27:57)
사도들의 시대에도 이러한 입장은 계승된다.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도 있었다(행 13:1).
성경은 신자(信者)가 부유하게 되는 것을 정죄한 것이 아니라, 탐심으로 하나님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고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 6:17)
주를 위해 가난해지는 것도 덕(德)스럽다. 그러나 이는 가난 자체 때문이 아니라 가난해지는 동기와 목표가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청빈(淸貧)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이 청부(淸富)다.
* 물질 헌신으로 이룬 하나님의 뜻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그것을 주(主)의 뜻을 펼치는 데 쓰는 것이 신앙(信仰)이다.
B. 돈에 대한 경고
1. 사랑하지 말라
현대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개인적 평안(平安)과 경제적인 부유(富裕)함이다. 데카르트(René Descartes)가 말한 바와 같이 전자는 의학을 통해, 후자는 과학기술을 통해 이뤄진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문명의 혜택들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돈이다.
돈(money)이 이 세상에서 인간의 물질적 욕망(慾望)을 채우게 해주는 가장 탁월한 수단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대체로 신자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돈과 가까워지게 된다.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대부분 먹을 음식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이성으로는 알아도 감정과 의지의 절제(節制)가 안 된다. 먹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더 많은 양을 먹고자 하고 더욱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욕망이다.
이런 욕망(慾望)은 육체의 욕구 전반에 걸쳐서 누구에게나 나타나기 때문에 이것들과 싸우는 것이 큰 과제다.
* 물질을 누릴 자유와 절제
자기 육체(肉體)를 위한 사랑(love)은 돈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것을 사랑하는 것은 연습(練習) 없이 되는 것이며 그것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努力)이 필요하다.
“돈을 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돈에 대한 사랑은 세상(世上)과 육체(肉體)에 대한 탐심으로 나타난다. 탐심이 강해지면 하나님의 법(法)을 어겨서라도 부해지고자 한다.
2. 믿음을 떠난다.
당시 바울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믿음(faith)을 떠나는 것을 보았다.
신앙을 떠난 자들이 경건을 잃고서 결국 돈을 사랑하는 것을 보았다.
신자가 돈을 사랑함으로써 믿음에서 떠나는 과정에 대해 생각해 보라.
마음은 가난에 대한 두려움과 부에 대한 욕망(慾望)으로 불안하게 된다. 그런 마음으로는 신령한 은혜(恩惠)를 앙망할 수 없게 된다.
그는 믿음이 부족하다. 하나님을 인격적(人格的)으로 신뢰하지 못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돈을 더욱 의지(依支)한다.
신자가 경건을 잃어버리고 나면, 마음은 영혼과 신앙(信仰)보다는 재물과 세상(世上)으로 향하게 된다.
그때 신자의 내면의 은혜(恩惠)는 약화된다. 마음은 하나님 사랑에서 멀어지고 정욕(情慾)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3. 근심하게 된다
이로써 신자의 마음은 “많은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 근심은 육신적(肉身的) 염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염려는 재물(財物)에 대해 유혹을 받게 만들고 이로써 말씀은 그 마음에 열매 맺지 못한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근심으로 물든 마음은 지성(知性)을 혼란하게 한다. 그리하여 사리의 옮고 그름, 가치의 경중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한다.
또한 감정(感情)은 육욕에 이끌리게 되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요일 2:15).
한편, 의지(意志)는 지성의 올바른 판단을 따르기 보다는 감정의 열의에 굴복한다. 죄(罪)의 욕구에 쉽게 굴복한다.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을 신령한(spiritual) 방식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세속적(worldly) 방식으로 생각하게 된다.
돈에 대한 욕심(慾心)으로 자신의 영혼(靈魂)을 스스로 찌르는 것이다.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거기서 무슨 자유를 얻겠는가? 어떻게 자유로운 주체(主體)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부하려 하는 자들은 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성경이 돈(money)에 대한 사랑과 유혹을 경고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과 경건한 삶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채 살아가는 육신적인 근심을 돈으로 막아보려고 한다. 그러나 근심은 끝없이 생겨나고 불안해진다.
이는 그러한 인간 불안(不安)의 근원이 단지 재물(財物)로 해결할 수 없는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돈이 필요(必要)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그것을 탐하는 것이 위험(危險)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 하나님을 사랑하라. 육신의 욕망(慾望)이 아니라 진리(眞理)의 말씀으로 삶의 질서를 바르게 하라.
III. 적용과 결론
우리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돈(money)은 꼭 필요하지만, 그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수단(手段)에 지나지 않는다.
재물의 소유 여부가 우리의 인생(人生)의 방향을 결정해 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word)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省察)을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삶의 상황에 있든지 돈을 사랑하지 말자. 이미 주신 은혜(恩惠)에 감사하며 살자.
삶의 동기(動機)를 순전하게 하라. 하나님과 화목(和睦)한 삶을 살자.
인간으로 산다는 것11 2021. 3. 14 주일 낮 예배
< 불행이란 무엇인가? >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2-23)
I. 들어가는 말
평범한 농부(農夫)가 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파홈(Pahom)이었다. 그는 빈털터리로 가난하게 살았다.
어느 날 악마(惡魔)가 제안하였다. 해 뜰 때 출발해서 그 자리로 돌아온 길의 모든 땅을 주기로 했다. 그 대신 해질 때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받는 것으로 약조했다.
그는 좀 더 넓은 땅을 차지하려고 미친 듯이 걷고 뛰고 달렸다. 다행히 지평선에 해 떨어지기 직전 도착했다. 그러나 탈진해서 죽고 만다. 죽은 그에게 필요한 땅은 단 한 평(坪)이었다.
톨스토이(Leo Tolstoy)의 <사람에게 얼마나 넓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한 토막의 이야기다.
어리석은 바흠은 토지(土地)라는 공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목숨 곧 시간(時間)인 줄 몰랐다. 온 나라가 토지 때문에 난리다. 우리는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는 토지의 소유가 인간을 근원적인 고독과 불행(不幸)으로부터 건져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오늘날 이렇듯 불행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II. 불행이란 무엇인가?
불행(不幸)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그 자체로 규명되지 않고 오직 행복에 반대되는 경험으로써만 유추된다.
“행복하지 않음, 일이 순조롭지 않거나 탈이 많음”『국어대사전』(서울;민중서관,2001), p.1190
A. 끝없는 불행
전도자는 일평생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다.
그는 권력(權力), 지위, 소비(消費), 무엇이든 다 행해 보았다. 그러나 그는 인생이 행복하지 않았다. 그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전 2:22)
인간의 모든 불행의 배후에는 허무(虛無)가 있다. “헛되고 헛되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단지 인간이 하는 일이 허무하다는 뜻만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허무하다는 뜻이다.
인생의 의미(意味)를 세상에 있는 것들과만 연관지어서 찾으려고 한다면 결국 모든 것이 헛되다는 뜻이다.
전도자가 허무(虛無)를 강조하는 이유는 삶의 근거를 삼을 만한 것이 세상에 없다는 의미다.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으라는 것이다.
1. 존재에 있어서
첫째로, 인간은 존재(存在)에 있어서 너무나 미천(微賤)하기 때문이다. 한 인간의 크기를 생각해 보라. 키 170cm, 몸무게 70kg.
가장 큰 동물인 흰수염고래는 시내버스 길이의 3배 크기로 무게가 약 160~190톤에 달한다. 인간은 나귀 한 마리 무게에도 미치지 못한다.
목성(木星)은 지구의 1천배, 태양은 목성의 1천배인데 1860년 태양(太陽)의 1700배 크기의 별이 발견되었다. UY Scuti라는 별이다.
지구로부터 9500광년 거리에 있는 별인데 지구가 축구공이라면 스쿠티의 지름은 에베레스트산의 1.5배란다. 비행기로 그 별을 한 바퀴 도는 데 1천 년이 걸린단다.
우주에서 지구의 크기가 이렇게 하찮은데 거기 사는 인간은 말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내 발에 문질려져서 사라지는 개미 한 마리, 내리친 손바닥에 한 방울 피를 남기고 사라진 모기 한 마리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수명(壽命)을 생각해 보라. 5백 년을 산다는 백합조개, 4백 년을 산다는 그린랜드상어, 2백 년을 능히 산다는 붉은성게, 자연 상태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투르토프시스 누트리쿨라라는 해파리에 비하면 인간의 수명을 가지고 어디 살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2. 가치에 있어서
둘째로, 인간은 가치(價値)에 있어서 비천(卑賤)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위대함을 말하지만 역사는 그들의 야만을 함께 고발한다. 자연 세계에는 인류가 겪은 끔찍한 전쟁과 같은 대규모의 살상이 없다.
작은 이익(利益)과 사상과 종교(宗敎)의 다름 때문에 국가와 민족 혹은 신의 이름으로 끔찍한 전쟁을 벌인다.
차라리 세계에 사람이 살지 않거나, 인간(人間)이 작은 짐승에 불과하다면 그 세상은 지금처럼 끔찍하지는 않을 것이다. 적어도 비참한 전쟁(戰爭)과 무자비한 환경 파괴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2018년 현재 전 세계에는 약 15,850개의 핵폭탄이 있고 이 폭탄은 인구 10만 명이 사는 도시 5,283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분량이다.
이런 비이성적인 일은 전쟁뿐 아니라 개인(個人)의 삶에서도 나타난다.
2019년 이후 우리 나라의 영아의 유기 및 살인(殺人)이 143건이라고 발표되었으나, 연일 보도되듯 가정폭력에 의해 살해되는 수많은 어린 아이들은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또한 인간은 알 수 없는 미래에 직면해 있다. 몰두하며 어찌하든지 개인적 평안(平安)과 물질적 부요(富饒)를 누리며 살아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꿈은 현실에 짓밟힐 때가 많다. 수많은 연어(들이 떼를 지어 모천으로 회귀한다. 그러나 그 중 실제로 거기 도착해 알을 낳는 개체수는 얼마나 적은가?
치어 상태에서 잡아먹히고 다 자라서 더 큰 물고기의 밥이 되고 낚시꾼들이 던진 미끼에 물려 생을 마감한다. 살아남은 것은 수직으로 흐르는 폭포수를 거슬러 바위에 몸을 부딪히며 모천으로 올라간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고와 질병, 가족관계의 파괴와 치매와 죽음이 그것이다.
인간은 이런 위협에 직면(直面)하고 있기에 살아있다고 보증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인생은 맨 정신으로 살 수 없는 것이다.
드넓은 밤하늘의 우주를 보아도, 사회를 들여다보아도,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하다.
어디서 소망(所望)의 빛을 찾겠으며 또 찾았다고 한들 그것이 죽음에 처하도록 운명 지어진 그에게 얼마나 위로(慰勞)가 되겠는가?
B. 불행을 직시함
1. 하나님 없는 선택
이러한 현실을 직시할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중 하나다.
a. 운명에 체념함
허무하게 살다가 죽을 운명(運命)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질문들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는 것이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 모든 것을 운명으로 알고 체념(諦念)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운명은 누구의 무슨 힘 때문에 우리가 굴복해야 할 숙명(宿命)이 된 것일까?
이성(理性)으로 판단할 수 없으니 그것은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이성으로 증명(證明)할 수 있기에 받아들이는 것인가?
그러면 내가 죽는다는 사실은 이성적으로 분명한데, 이에 대해 아무런 준비(準備)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은 이성적인가?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데 그것은 이성의 논리를 따른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신(神)을 사랑하기 위해선 논리가 필요하고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논리가 필요 없다니 이것은 그야말로 철학적 내로남불이 아닌가?
이 비참한 인간의 미래(未來), 그 운명을 용감하게 받아들인 후 바위처럼 묵묵히 누구에 의해서인지도 모르게 운명 지어진 불행(不幸)과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유일한 대안인가?
*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들의 이야기
b. 현실을 회피함
끝없는 불행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인간이 현실을 직시하나 그것을 감당할 용기가 없을 때 할 수 있는 일은 회피(回避)다.
이것을 가리켜서 파스칼은 자신의 유명한 책『팡세』(Panseé)에서 ‘위락’(divertissment)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프랑스 고전 발레에서 막간의 뜬금없이 삽입되는 집단무용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물질과 돈(money)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탐욕(貪慾)은 바로 인생의 불행을 회피하는 데 쓸 자원을 미리 마련하고자 하는 욕구이다.
소위 “소소한 삶의 행복”이라고 하는 걸 생각해 보라. 그것이 과연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解決策)이 될 수 있겠는가?
* 60년대 교도소의 사형수와 오락
우리의 눈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뉴스와 오락거리들, 상업광고들을 보라.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관심(關心)을 이 근원적 불행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잡아당기지 않는가?
끊임없이 소비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돈에 대한 탐심을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저 깊은 어둠 속에서 죽어야 할 운명(運命)에 처한 나에게 추호의 도움도 주지 못한다.
매일 맞닥뜨리는 수많은 불행(不幸)에 대한 어떠한 대비책도 되지는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슬퍼하고 아파해 줄 수는 있다. 그런다고 내 인생(人生)의 무게가 티끌만큼이라도 덜어내지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절대적인 고독(孤獨)이다. 결국 인간은 정신을 딴 데다 팔지 않고는 이 엄청난 불행의 운명 앞에서 미칠 수밖에 없다.
심리학(心理學)에는 소위 “실존주의 치료방식”이 있다. 일종의 인간중심 상담이론이다. 가장 먼저 깨우쳐주는 것 네 가지가 있다. (1)너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2)너는 혼자다. (3)너의 현실은 네가 선택한 것이다. (4)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실존을 잘 깨닫는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네가 누구인지도 묻지 말라. 그냥 불행한 현실(現實)을 받아들이고 죽을 운명을 인정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들은 종교를 “철학적 자살”이라고 부르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철학이 “종교적 자살”로 보인다. 종교는 모든 철학의 어머니인데 말이다.
아주 특별한 정신력(精神力)을 가진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르나 그들도 대부분 회피의 수단을 가졌다. 성적인 탐닉(耽溺)과 향락이었다.
* 장 폴 사르트르 /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
인생은 비참하며 나열할 필요가 없을 정도의 수많은 불행(不幸)을 겪는다. 자신의 운명(運命)을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지극히 제한적이지 않은가?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전 6:6)
모르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죽을 존재라는 사실까지는 알지라도 그 후의 내 영혼(靈魂)의 운명을 회피하지 못한다.
답 찾기를 포기하고 쌓아올린 인생의 탑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세상에서 삶이 끝나고 그 후엔 각자 살아온 삶에 대한 심판이 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끊임없이 위락에 빠져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삶의 결국은 끝없는 영적 어둠과 속임 속에서 영원한 파멸과 죽음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연약한 존재(存在)다. 24시간을 자기 존재의 기원(起源)과 운명에 관한 사색으로 씨름하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위로(慰勞)가 필요하다. 여가와 휴식, 음악과 예술을 누리며 때로는 오락으로 기분을 전환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 6:31)
신약 성경에 “위로하시는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나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재물(財物)과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을 통해서 정당한 대가로 그것을 얻는다.
이러한 나의 위락(慰樂)을 위해서조차도 결코 남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면 더욱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참된 목적(目的)을 따라 다시 살기 위한 것이어야지 위락으로 회피하기 위한 현실도피의 수단이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믿음에서 물러가 침륜에 빠지게 될 것이요, 진정으로 구원 받은 자로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2. 하나님을 의지함
인생의 불행을 직시할 때, 우리에게 가능한 또 하나의 선택은 하나님을 의지(依支)하는 것이다.
우주와 인간, 심지어 나 자신으로부터 아무런 희망(希望)을 가질 기대를 갖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유한(有限)하고 세상에서 겪는 모든 불행과 행복은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인생이 끝난 후에는 사후(死後)의 세계가 있으며 이는 이성으로써가 아니라 심정(心情)으로써 아는 것이니 이것이 곧 믿음(faith)이다.
그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믿고 신뢰(信賴)하여 자신을 맡기는 의존이니 이것으로써 인간은 불가해한 인생에 대해 이치를 깨우친다.
기약할 수 없는 우리의 미래(未來), 끊임없는 불행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손해를 가져오겠는가?
III. 적용과 결론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턴(G. K. Chesterton, 1874-1936)은 “미친 사람은 이성(理性)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이성만 믿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늘 겪는 불행(不幸)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임을 보여준다. 자신이 자연만물과 함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함을 일깨워준다.
“주께서 사람을 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 주께서 그들을 처럼 쓸어가시나이다 … 풀은 아침에 이 피어 자라다가 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시 90:3-6)
지혜(知慧)는 인간 존재가 이렇게 덧없고 하찮음을 아는 것이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당신과 함께 온 세상을 선하게 다스릴 위대한 존재(存在)로 여겨주신 것이다.
인생의 불행을 넘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God)을 기억하자. 구속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생사간에 그분을 의지하며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12 2021. 3. 21 주일 낮 예배
< 친구란 무엇인가? >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 18:24)
I. 본문 해설
친구가 없는 인생은 홀로 광야를 걷는 나그네길과 같다. 그러나 친구를 갖는 것에는 상처(傷處)와 배신(背信)의 위험도 따른다. 그래서 친구를 갖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기도 하다.
인생에 있어서 많이 투자해도 아깝지 않은 소중한 자산이 있다. 그것은 친구(親舊)다. 친구는 인생 최고의 선물(膳物)이다.
“우정이란 … 선의와 호감을 곁들인 감정의 완전한 일치다. 지혜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불사의 신들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믿고 싶다” Cicero,『우정에 관하여』(Laelius de Amicitia), 6.20
본문의 교훈은 잠언 18장에서 인간관계의 지혜를 다루는 문맥 안에 있다.
지혜자는 잠언에서 친구(親舊)에 대해 무려 11회나 교훈한다. 부정적으로 2회, 중립적으로 3회, 긍정적으로 6회 언급한다.
II. 친구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적으로는 “가깝게 오래 사귀어 온 벗”이다. “친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raa)의 의미(意味)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본문은 번역상의 논쟁이 있는 구절이다. 히브리어에서 명사 “친구”와 “악인”(惡人)이 똑같은 단어다.
또한 “친구로 대하다”와 “악(惡)을 행하다”라는 동사도 단어가 같다. 히브리어 본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많은 친구를 가진 사람은 마땅히 (그들을) 친구로서 대해야 하는데,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더 친밀히 연합되어 있느니라” (잠 18:24, KNJ 私譯)
A. 친구의 위험성
인생에서 친구는 꼭 필요하지만 거기에는 위험(危險)도 따른다. 그것은 친구에게 속을 우려와 배신 당할 가능성이다.
친구를 사귀어 우정(友情)에 이르기까지는 많은 헌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얻은 진정한 친구는 인생의 동반자다.
친구는 특별한 타인(他人)이다. 타인이지만 특별하며, 특별하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친구가 아니다.
친구로 여겼는데 자기에게 이익(利益) 되지 않을 때 떠나기도 한다. 그때 믿었던 신뢰만큼 실망하게 된다.
가난하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떠나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니 꼭 필요한 때 변심한 것이다.
“한 자는 그의 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잠 19:7)
시인도 친구에게 큰 상처를 입기도 하였는데 배신(背信) 때문이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를 들었나이다”(시 41:9)
“내 떡을 나눠먹던”이라는 본문의 표현(表現)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친구가 궁핍하던 때에 도움을 주었음.
그를 가족(家族)처럼 특별히 여겼음.
그러나 친구는 시인이 고난(苦難)을 당할 때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다”. 이는 한 때는 친구였던 자가 적(敵)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시인이 우정이라고 여겼던 관계(關係)는 사실상 자기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또한 역경에 처해 도움이 필요할 때, 친구는 자기 이익(利益)을 위해 배신했다. 그때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한 관계의 깨어짐의 경험은 커다란 실망과 상처를 안겨줄 것이다.
마음을 주지 않으면 진정한 우정(友情)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 거기에는 언제나 배신과 실망의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모험 없이는 친구를 얻을 수 없다. 더욱이 진실한 친구를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헌신(獻身)이 필요하다.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친구(親舊)는 너무나 필요한 존재이기에 이런 모험과 희생을 감수하고도 가질 만한 가치가 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나사로를 “우리 친구 나사로”라고 부르셨고(요11:11), “너희는…나의 친구라”고 하셨다(요 15:14).
또한 친구를 위한 희생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이 없나니”(요 15:13)
B. 친구의 필요성
우리의 인생(人生)에 있어서 친구라는 존재가 왜 그토록 꼭 필요한 것인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실패할 수 있기에
첫째로, 실패(失敗)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다. 그래서 넘어질 때가 있다.
그런 상황을 믿음으로 잘 이기면 우리가 성숙(成熟)하게 되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깨어진 우정은 수치와 상처를 남길 수도 있다.
그런 것들을 누구하고 소상(昭詳)히 나누고 싶겠는가? 자기를 사랑하고 이해해 주지 않는다면 그럴 수 없다. 그래서 친구가 필요하다.
좁은 의미의 친구는 같은 또래의 벗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는 그럴 때 자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關係)를 가진 사람이다. 선배나 스승, 혹은 멘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
누구나 삶이 무너질 때가 있다. 인생의 위기(危機)다. 그때 나의 친구는 굳건히 서있을 수 있으니,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한 그가 넘어질 때에 내가 온전히 서있다면, 어려움에 처한 그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기에 친구는 꼭 필요하다.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잠 27:9)
한 친구의 충고(忠告)와 조언(助言)이 올바른 것이라면 그것은 원수들의 입맞춤보다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나의 미끄러짐을 소문거리로 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된 친구라면 나의 명예(名譽)를 보호해하며 내가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바랄 것이다.
참된 친구는 나의 영혼(靈魂)을 위해 염려하기를 마치 자기 영혼을 위해 염려하듯이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구라는 선물(膳物)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 안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참된 우정(友情)은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함께 연합(聯合)되어 있는 관계다. 그 마음으로 서로 일치를 이루고 있는 사이다.
2. 지혜가 필요하기에
둘째로, 지혜(知慧)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비록 말씀 안에서 살고자 하나 우리는 항상 총명하지는 않다. 그래서 친구가 있어야 한다.
어떤 때는 내가 친구보다 총명(聰明)하고 또 다른 때는 친구가 나보다 그러하다. 그래서 서로에게 친구가 필요하다.
또한 어떤 상황(狀況)에 대해서는 거기에 휘말려있는 당사자인 나보다는 그렇지 않은 친구의 판단이 더 정확할 때가 많다.
자기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친구(親舊)에게서 꼭 필요할 때 그런 판단을 빌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자산인가?
친구의 도움으로 자신이 보는 것과 다른 시각(視角)에서 문제를 봄으로써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잠 27:17)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듣기 좋은 얘기를 원하고 그렇지 않은 말을 듣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지혜(知慧)는 나만의 소유가 아니다.
남의 말에 전혀 귀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 곁에는 친구가 없을 것이다.
혹시 권력(權力)과 재물(財物)이 있다면 아첨하는 사람만 남을 것이다. 그런 사람은 줏대 없이 남의 말에 휘둘리는 사람만큼 비천하다.
사랑과 신뢰로 다져진 친구의 지혜로운 충고는 인생의 밤을 밝혀준다.
3. 공감이 필요하기에
셋째로, 공감(共感)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악기가 울리는 공간을 필요로 하듯이 인간에게 자기 처지를 공감해 줄 타인의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친구가 단 한 사람도 없이 외롭지 않게 살아갈 사람은 많지 않다.
영적으로 뛰어난 신자(信者)라면 다른 사람이 자기의 마음에 공감해주지 않아도 능히 선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것이다.
그가 뛰어난 영적인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수시로 지혜(知慧)와 사랑(love)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꿋꿋하게 살아간다면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토록 뛰어난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위로도 사람들을 통해서 경험할 때가 많지 않은가?
우리의 기쁨과 사랑의 정동(情動)은 친구와 나눌수록 커지고, 슬픔과 분노의 정동은 나눌수록 작아진다.
그런 감정을 공감할 통로가 없을 때, 신앙으로 다 소화하지 못한 고통과 슬픔은 상처(傷處)가 되어 우리의 성품을 굽어지게 한다.
그럴 때 불안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치자.
그는 약한 사람의 마음을 자기의 감정(感情)을 배설하는 쓰레기통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인간은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공감(共感)하도록 태어났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해(理解)하게 한다.
너무 사랑하면 굳이 이성으로써가 아니라 심정(心情)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큰 행복(幸福) 중 하나는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그는 내 인생에 필요한 존재가 되는 삶이다.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God)께서 자기 마음에 공감해 주시는 것을 경험함으로 시작되지 않는가?
4. 덕스러운 삶을 위해서
넷째로, 덕(德)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다. 인간의 행복은 덕스러운 삶을 사는 데 있으니 좋은 친구는 이를 위하여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덕스러운 삶은 선한 삶이다. 이것은 선(善)하고 아름다운 인격(人格)과 성품(性品)에서 비롯된다.
덕(德)스러운 삶은 사랑(love)의 삶이다. 사랑은 모든 사람이 그런 삶을 살아 행복하기를 바란다.
“사랑은 선한 관계를 맺는 마음의 성향이다. 이미 있는 관계는 더 깊게 하고, 아직 없는 관계는 새로 맺게 하는 힘이다”
내가 세상에 존재(存在)함으로 남에게 유익이 되고 그들을 행복에 이르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친구는 덕으로써 선(善)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나를 도와준다.
그러므로 선하게 살려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친구가 될 수 있다.
단지 이익(利益)이 아니라 진리(眞理) 때문에 선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만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God)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덕의 근본(根本)이다. 경건한 친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만들어준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충만하고 뜨겁게 사랑하며 살지는 않기에 이런 친구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진리 안에서 친구를 가지라. 그 친구를 자신처럼 아끼고 소중히 여기라!
이런 우정(友情)을 소중히 여기고 가꿔가라. 이는 연약한 자신의 인생(人生)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13 2021. 4. 11 주일 낮 예배
< 정직이란 무엇인가? >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 3:32)
I. 본문 해설
부정직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정직이 무시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흔히 보는 정치가들의 스캔들에는 예외 없이 부정직(不正直)이라는 속임수가 관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국가에 의한 폭력(暴力) 또한 국민을 속이는 거짓이나 위장, 혹은 기만 속에서 발생한다.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부도덕한 삶은 언제나 부정직과 연관되어 있다.
II. 정직이란 무엇인가?
국어사전적으로 정직(正直)이란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정직(正直)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바름(righteousness)과 올곧음(uprightness)이냐 하는 것이다.
정직을 영어로는 honesty 혹은 truthfulness라고 하는데, 문어적 표현으로 많이 쓰이는 후자는 “진리 혹은 진실로 가득 찬”이라는 뜻이다.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 3:32)
여기서 지혜자는 “정직한 자”(yesharim)을 “패역한 자”(naloz)와 대조시키고 있다. 따라서 성경에서 “정직하다”는 것이 단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뜻 그 이상임을 알 수 있다.
A. 부정직한 세상
오늘날 세상은 더 이상 부정직(不正直)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만큼 사회가 정직에 대한 가치(價値)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일상생활에서의 경제적인 거래나 도덕적 규칙에서부터 시작해서 정치(政治)에 이르기까지 부정직이 만연한 것을 본다.
유난히 초고령자가 많이 보고된 일본 사회를 조사해 보니 사망신고하지 않은 채 장기간 연금을 수급 받고 있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은 2010년 도쿄에서 일어난 이러한 사건에서 얻은 모티브로 제작된 것이다.
* 사진1, 사진2
2010년 7월, 1899년 생으로 호적상 111세가 된 최고령 남성이 있었다. 공무원이 방문해보니 사체(死體)는 백골화 되어 있었고 그때까지 자녀들이 노령연금을 부정 수급받고 있었다.
상습적으로 고속도로 요금을 내지 않고도 도망 다니던 차들이 적발됐다. 최근 5년간 민자 고속도로 통행료를 50회 이상 미납한 차량의 숫자가 49,000대에 그 금액이 21억 원에 달한다고 한다.
거짓이 상습화 되면 자신의 거짓말을 진실(眞實)이라고 믿게 하는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라는 성격장애까지 생겨나게 된다.
이미 우리는 신문이나 매스컴을 보면서 그것을 뒤집어 해석해야 사실(事實)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 학습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도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크리스천 정치꾼들의 말 뒤집기와 사업가들이 저지르는 대규모 탈세와 횡령 사건들을 보라.
* 경복궁 20만원 상품권
문방구에서 물건을 샀는데 백지(白紙) 영수증을 내밀기도 했다. 언젠가 유럽에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백지 영수증을 주며 나중에 원하는 금액을 쓰라고 하였다.
내가 직장 생활할 때의 일이다. 월말이 되면 담당자가 기관장을 대신해 영수증(領收證)을 모으러 다녔던 당신 그런 풍경들은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 인권 변호사를 자처하는 사람과의 대화
사소한 거짓말과 도둑질, 그리고 지식(知識) 전달자들의 표절도 이제 더 이상 부자연스럽지 않게 여기는 윤활유 정도로 여긴다.
B. 정직해야 할 이유
1. 정직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말하는 정직(正直)은 거짓말하지 않는 발설(發說)이나 특정한 행동(行動)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직은 그 사람의 사상(思想)과 신념(信念) 체계와 인격(人格)에서 나오는 올곧음이다. 그 기준은 진리(眞理)이다.
중요한 것은 진리(眞理)라는 기준이다. 그 기준에 입각한 사상이 있고 거기에 부합하는 인격에서 나오는 마음 씀씀이와 말과 행동이다.
본문은 정직한 자를 “패역한 자”와 대조시킨다. 여기서 “패역(悖逆)”은 진리를 벗어난 악한 삶이 저항할 수 없으리만치 마음과 생활이 굳어진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진리가 없이 그냥 솔직(率直)한 것은 종종 수치를 모르는 뻔뻔함에 지나지 않는다.
참된 정직은 진리(眞理)를 믿고 알며 사랑하기에 거기에 마음과 삶이 합치(合致)된 상태를 가리킨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직한 자의 신념(信念)은 진리에 기초하며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love)함에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정직의 가치(價値)는 얼마나 될까? 정직(正直) 없는 사회에서 공정(公正)을 기대할 수는 없다.
타인(他人)에게 정직을 요구하는 것은 입술을 움직이면 된다. 그러나 정직을 실천하는 일에는 늘 희생이 따른다. 사회가 부정직할수록 더 많은 희생이 요구된다.
* 부교역자들의 무상 교육 혜택
결국 부정직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不順從)이다. 신자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쉬운 길을 가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God)의 뜻대로 사는 보람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부정직(不正直)을 선택하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은 취소된다.
* 교회 부지를 사던 경험
물론 우리는 세상에서 부정직해지려는 유혹(誘惑)을 받는다. 그것은 죄가 아니다. 죄(罪)는 그 유혹에 마음이 굴복하는 것이다.
은행 창구에 놓인 오만 원 현찰 돈다발들을 보고 저게 내꺼였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밤에 출입문의 셔터를 따는 기구를 들고 은행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죄(罪)다.
2. 정직한 자의 특권
불의(不義)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사는 데는 매우 부당(不當)하고 커다란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부정직한 세상(世上)은 신자들이 정직으로써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보여줄 훌륭한 기회(機會)다.
* 유일한 박사와 5.16 군사 정권
* 사진3, 사진4
범사에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교통(交通)하심이 있다.
성경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다고 말한다(잠 3:32).
이 교통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交際)이며, 생명의 교통이다. 악과 어둠을 이기는 빛(light)의 교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와 그의 아들 예수 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신자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統治)를 받는 의로운 나라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뤄지는 질서는 사랑의 질서다.
우리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十字架)에서 못 박히심으로 우리를 구원(救援)하셨을 때 의도하신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불의한 세상은 정직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지만 그들이 정직(正直)을 굽히지 않을 때 그들은 부끄러움과 함께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스도인의 소망(所望)은 하늘을 향하지만 그의 생활(生活)의 발걸음은 이 땅위를 걷는다. 정직은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산다는 고백이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선포다.
III. 적용과 결론
신자가 순간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은 하나님께 쓴 연애편지(戀愛便紙)에 침을 뱉는 것이다. 그것은 싼 값에 자기 영혼을 파는 것이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는 당신과의 교통(交通)이 끊이지 않게 하신다. 신자는 그 생명(生命)과 사랑(love)의 교통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힘을 얻는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14 2021. 4. 18 주일 낮 예배
< 늙음이란 무엇인가? >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시 71:9)
I. 본문 해설
누구나 노년(老年)을 맞이한다. 그것은 젊음을 지나 늙음을 의미한다.
시인이 인생의 노년에 쓴 시(詩)다. 그는 늙어서 쇠약해져 있으며, 고난(苦難)이 계속되고 있었다. 자신은 악인들에 둘러싸여있다고 고백한다.
시인은 어려서부터 주를 의지(依支)하며 살아왔다. 늙은 후에는 더욱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깨닫는다. 이것이 신앙이다.
II. 늙음이란 무엇인가?
“늙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말의 국어 사전적인 의미(意味)는 다음과 같다. “사람이나 동물, 식물 따위가 나이를 많이 먹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중년(中年)이 지난 상태가 됨을 일컫는 말이다.
A. 늙는다는 것
1. 젊음과 늙음
첫째로, 늙음은 젊음과 대비된다. 젊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육체적(肉體的) 의미로, “나이가 한창 때에 있다”는 뜻이다. (2)정신적(精神的) 의미로, “혈기나 의욕 따위가 왕성하다”는 의미다.
살아있는 만물은 태어나서 한창 때를 향한다. 그 정점에서 늙어간다. 이는 물질(物質)이 유에서 무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 존재는 영혼(靈魂)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 불멸(不滅)하도록 지정되어 있어서 낡거나 늙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그러나 육체는 본질적으로 물질이다. 생겨난 물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여 소멸한다. 이것이 늙음인데 이는 육체적 생명의 쇠퇴다.
생명체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변양(變樣)과 신진대사(metabolism), 자기전사(自己轉寫)인데, 늙음은 이러한 기능이 쇠퇴되는 것이다.
그래서 늙으면 환경의 변화에 적응을 잘 못하고, 생명력이 떨어지며 생식능력도 사라지면서 소멸(消滅)되어가는 것이다.
생명(生命)은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기능이다. 육체의 늙음은 죽음에 항거하는 기능과 힘을 잃어버리는 과정이다. 그래서 한평생 믿음으로 살았던 시인은 간구한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시 102:24)
2. 늙음의 유익
둘째로, 늙음의 유익이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고 생각하기에 따라 비참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유익도 있다(Cicero).
a. 젊은이들의 공경(恭敬)을 받는다.
b. 인생을 사는 지혜(知慧)를 갖게 된다.
c. 정욕으로부터 자유(自由)하게 된다
어떤 사람이 나이가 들어 쇠약해진 소포클레스에게 성생활을 즐기냐고 질문했을 때 “무슨 끔찍한 말을! 마치 잔인하고 사나운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처럼 나는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왔다네” 라고 대답하였지.
키케로,『노년에 관하여』(De Senectute, 23.83)
사람이 생각하면서 늙어간다면 사려(思慮)가 깊어지고 다른 사람의 처지를 공감(共感)하게 된다. 그만큼 행복(幸福)하게 된다.
B. 평안하게 늙어감
인간은 늙음을 늦출 수는 있지만 피할 수 없다. 성경은 그런 노력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약간의 유익(有益)이 있다고 말한다(딤전 4:8).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 우리의 육체보다는 영혼(靈魂)의 생명이 풍성하도록 잘 보존(保存)해야 한다.
“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우리가 늙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평안(平安)하게 늙어가는 것은 가능하다. 다음 지침을 기억하라.
1. 늙음을 받아들이라
첫째로, 늙음을 받아들이라. 생명(生命)의 욕구를 가진 인간에게 늙어간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정신이 젊을 때 그것은 더욱 고통스럽다.
육체(肉體)를 잘 가꾸어 생명의 기운을 좀 더 보존(保存)하고 늙음을 늦추는 것은 건강뿐 아니라 섬김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그러나 늙어가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지라.
늙음과 함께 신체적으로 쇠약해진다. 또한 각종 질병을 겪는다. 육체의 건강(健康)을 보존하라. 질병을 예방하고 고치기를 힘쓰라.
그러나 질병과 싸우고 애쓰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비애(悲哀)를 느끼지 말라.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
인간의 정신(精神)이 이러한 늙음의 현상을 납득하지 못할 때 마음에는 커다란 부조화가 생겨나게 된다.
이러한 늙음의 감정들은 권태, 우울감, 그리고 비애와 고뇌, 원망을 거쳐 절망(絶望)으로까지 이어진다. 심해지면 우울증이나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나아간다.
봄이 되면 나무에는 새싹이 나서 꽃피고 잎사귀 무성해지다가 단풍이 들고 잎이 떨어진다. 이것이 자연의 질서(秩序)다. 육체도 그렇다.
영혼은 하나님(God)께 속했으나, 인간의 육체도 나무와 같이 자연의 질서(秩序)를 따르도록 지정되었다. 그것도 하나님이 정하신 뜻이다.
“은 마르고 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이로다”(사 40:7)
그렇게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처럼 육체(肉體)가 쇠잔해가지만 이로써 만물을 순환(循環)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이 영원함을 드러낸다.
“풀은 마르고 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히 서리라 하라”(사 40:8)
늙음과 함께 자신의 몸이 그렇게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자주 묵상(默想)하라. 질병 또한 물질(物質)인 육체가 무로 돌아가려는 변화가 아니겠는가? 이 거대한 자연의 흐름 속에 티끌 같은 존재임을 생각하라.
2. 소외를 받아들이라
둘째로, 소외되는 현실을 받아들이라. 늙은이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된다. 노년의 때가 되면 활동하던 사회(社會)로부터 배제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젊은 사람은 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며, 늙었다는 사실 때문에 소외(疏外)당한다.
자신이 소외당하는 것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 일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라. 본인의 정신에 해롭다.
우리도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냈고 노인(老人)들을 그렇게 대하며 살지 않았는가? 이는 죄(罪)로 인해 생긴 인간의 편견과 사랑 없음이다.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욕구(欲求)를 절제하라. 여전히 남아있는 사회적 욕구를 젊었을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채워가야 한다.
“몸은 늙었지만 마음만은 젊다”고 하지 말라. 젊은이들이 당신과 떨어져 있고 싶어 하는 것은 마음만이 아니라 몸이 늙었기 때문이다.
늙어갈수록 젊은이들에게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함으로써 기쁨을 누리기를 노력하라. 은혜(恩惠)가 없이는 그렇게 살 수 없다.
3. 죽음을 받아들이라
셋째로, 죽음을 준비하라. 젊은이는 늙음을 자주 생각하고, 늙은이는 죽음을 자주 생각하라. 그날이 가까웠음을 생각하라. 두려움 없이 고요히 죽음(death)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행복으로 만족하라.
“그리고 만약 신께서 노인인 나를 다시 어린이가 되게 하시어 요람에서 울게 허용해주시더라도, 나는 강력히 반대할 것이라네. 마치 경주장에서 결승선으로부터 출발선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나는 진실로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네” 키케로,『노년에 관하여』(De Senectute, 23.83)
아름답게 늙기 위해서는 젊어서부터 준비해야 한다. 생각 없이 살지 말라.
신앙 없이 보낸 젊음의 맨 끝에는 파산한 노년(老年)이 기다리고 있다.
삶이 허무(虛無)하다는 느낌은 의미 있는 존재로 태어났음을 증거한다.
늙으므로 누군가에게 버림받는다는 느낌은 이미 누군가의 사랑(love)에 속한 존재로 창조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하나님이시다.
질병과 쇠약함으로 육체의 자유(自由)가 속박당할 때, 신앙과 지식, 사색으로 공허함과 무기력함을 극복해야 한다.
이것을 극복하지 못할 때 젊은 시절보다 더 큰 혼돈의 고통(苦痛)을 겪게 되어 불행해지거나 도덕적으로 파탄하게 된다.
4. 열정을 잃지 말라
넷째로, 하나님을 향한 열정(熱情)을 잃지 말라. 겉사람은 늙어갈지라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다.
열렬한 신앙(信仰)과 치열한 사유(思惟)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붙들라. 그래야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몸이 노쇠해져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잃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우리 늙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자 특수한 훈련이다. … 기력이 저하되어 조만간 몸은 탈진할 것이다. 그러나 열정만은 끝까지 요지부동이어야 한다.” 제임스 패커,『아름다운 노년』p.82
III. 적용과 결론
지혜(知慧)는 이것이다. 늙어가면서 죽음(death)에 친숙해지는 것이다. 인생의 남은 날을 헤아리며, 죽음의 빛으로 삶을 보라.
늙어서 불편할수록 주님밖에 의지(依支)할 분이 없음을 기억하라. 경건하게 살라. 육체의 죽음을 통해 맞이하게 될 영광스러운 부활(復活)과 천국(天國) 소망으로 마음을 굳게 하라.
인간으로 산다는 것15(끝) 2021. 4. 25 주일 낮 예배
< 희망이란 무엇인가? >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시리라”(히 9:27-28)
I. 들어가는 말
이렇게 14주에 걸쳐우리는 인간(人間)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다. 마치 여행을 하고 온 느낌이 아닌가?
내가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로부터 시작해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거쳐 직업, 가족, 과학기술, 돈, 친구, 늙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의 여행(旅行)을 했고, 이제 마지막 시간에 이르렀다.
II. 인생의 끝은 죽음이다
인간의 죽음(death)은 스스로의 자연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렇게 죽음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여기서 “한번”이라고 말한 것은 육체(肉體)의 죽음인 첫 번째 죽음을 가리킨다. 인간은 두 번 죽는데, 그 두 번째는 영혼(靈魂)의 죽음이다.
“죽음”(death) 이것은 인생 전체를 보는 관점이어야 한다. 그것을 가지고 잠시 있다 사라질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이 지혜(知慧)다.
모든 사람이 태어났듯이 모두 반드시 죽는다 사실(事實)을 기억하라. 왜냐하면 그것이야 말로 의미(意味)를 물을 수 있는 입각점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는 마음을 압도하던 감각적 사물(事物)들을 더 이상 보고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갈라놓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조차 찢어져 허공(虛空) 중에 떠돌 듯이 사라져버릴 것이니 죽은 후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죽음이 끝이 아니다. 그 후에는 세상(世上)에서의 삶을 능가하는 또 다른 더 중요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심판(審判)”이다.
본문의 “심판”(krisis)은 원어적으로 “나누다, 판단하다”(krino)라는 동사에서 유래했다. 여기서는 법정적(法庭的) 심판을 가리킨다.
법정적 심판은 죄(罪)의 유무를 가리는 것이다. 둘 다 입증이 되어야 하며 유죄인 경우 죄의 경중이 가려져 형벌(刑罰)이 선고된다.
만약 인간이 온 곳이 없다면 갈 곳도 없을 것이고, 그런 존재라면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責任)져야 할 대상도 없을 것이다.
인간은 이성(理性)을 신의 보좌에 앉혔다. 대답해 보라. 인간이 기원 없이 생겨났다는 생각이 이성적인가? 그런 사물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생겨난 근원(根源)이 있다면 돌아가는 곳이 있을 것이 아닌가? 도대체 인간은 죽어서 어디로 돌아가는가?
단지 흩어져 먼지(dust)로 사라지기가 모든 물질과 일반이라고 믿는가? 그러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존엄하다고 믿어왔는가?
인간의 모든 도덕의식은 단지 관습(慣習)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의식(責任意識)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자로서의 인간 본분(本分)에 대한 인식이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의 심판대 앞에 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후 5:10)
인간은 모두 죽는다. 죽음 후에는 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있다. 그 심판을 준비하기 위한 유일한 기회는 살아있는 때뿐이다.
하나님을 깔보며 생각 없이 살지 말라.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며 그때는 어느 불행했던 순간보다 고통(苦痛)스러울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III. 희망이란 무엇인가?
이처럼 잠깐 태어났다가 죽어 영원한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필멸할 인간에게 희망(希望)은 무엇인가? 과연 희망이 있는 것일까?
인간이 태어나서 장수하여 일평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벌레 한 마리 태어났다가 죽는 것보다 나을 것이 무엇인가?
비록 그가 세상에서 온갖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누린다고 할지라도 무(無)로 사라지는 비천한 자와 일반이 아닌가?
성경은 인간의 행복(幸福)을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구분해서 말한다.
하나는 잠세적(世的) 행복이다. 필멸(必滅)할 인간의 육체의 운명을 인정한 채로 누리는 잠세적 세상에서의 행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전 3:22 상)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전 8:15 상)
또 하나는 영원한(eternal) 행복이다. 인간이 영적 존재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행복을 말한다.
전자는 후자를 기초로 해야지만 허무(虛無)하지 않은 행복이 될 수 있으니 공포와 비참 속에서 느끼는 쾌락(快樂)이 어찌 행복이겠는가?
그러나 많은 사람은 영원한 행복이 없이 잠세적 행복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필멸할 운명에서 고개를 돌리는 회피(回避)이외 무엇이란 말인가?
인간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가? 허무를 극복하고 불행을 이기며 행복하게 될 희망이 있다면 그 길은 무엇인가?
A. 구원을 받음
첫째로, 영혼이 구원을 받음이다. 인간은 단지 잠시 있는 육체만으로 행복(幸福)에 도달할 수 없다. 영원히 있는 영혼이 구원을 받음으로써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인간의 불행과 비참, 늙음과 죽음은 그 자체가 원인(原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원인에서 나온 여러 가지 증상일 뿐이다.
* 보이지 않는 질병과 보이는 징후들
그 모든 원인은 죄(罪)다. 나머지는 그 죄라는 질병이 가져다준 징후(symptom)일 뿐이다. 증상만을 완화시키는 임시적 조치로는 궁극적으로 건강을 되찾을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다. 이는 모든 인간의 불행을 가져다주는 원인인 마귀를 멸하고 죄(罪)를 없이 하시기 위함이다(요일 3:8).
죄(罪)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이고 죄악(罪惡)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열매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분별력(分別力)을 잃어버리게 하고 허무한 것을 좇게 한다.
* 청소년기의 가출과 귀향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救援)을 약속하셨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이것은 결코 육체의 죽음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구원을 받은 자에게 두 가지 자유가 주어진다. 신자에 주어지는 신분과 상태의 자유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신분(身分)의 자유와 죄에 매여 살지 않는 상태(狀態)의 자유다.
당신이 아직 구원 받지 못했다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子女)가 되라. 당신 인생에서 이보다 급박한 것은 없다.
당신이 이미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온전한 믿음(faith)을 가지라.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순종하라.
B. 주님의 재림
둘째로, 주님의 재림이다. 모든 인류는 주님의 재림(再臨)을 볼 것이다. 그때 이 세상에 살아있는 자는 그 상태에서 주를 볼 것이며 이미 죽은 자들은 부활(復活)하여 주를 만날 것이다.
세상에게는 최후의 날이나 우리에게는 행복 자체이신 하나님과 하나되는 시작(始作)의 날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용서(容恕)의 은총이,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審判)의 형벌이 주어질 것이다.
오늘은 그날을 위해 준비할 유일한 기회다. 그대의 죄를 회개하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8)
그대가 죽어야 할 운명(運命)인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죽음과 함께 영원한 어둠 속으로 들어갈 텐데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파스칼이『팡세』에서 말했던 그 유명한 내기이론이라도 생각해보라.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서 돌아올 나쁜 결과가 무엇인가? 그분을 믿고 단정한 삶을 사는 것이 무슨 손해를 가져올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신 것 같이 다시 오실 것이다(행 1:11).
IV. 적용과 결론
욕심과 정욕(情慾)대로 살지 못하고 단정하게 사는 것이 손해임을 말하려는가? 그것이 세상에서조차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며 살아온 것이 당신의 인생이 아니었는가?
신자(信者)에게는 보이는 이 세상을 능가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다. 거기서 사랑하는 주님을 뵈올 것이라는 소망이 있다.
인생은 잠시 지나는 나그네길이다. 다시 오실 주님을 앙망하라!
인간으로 산다는 것1 (2021.01.03._주일오전)
1. 나는 어디로 달려가는가?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눅 12:16-21)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형에게 명령해서 유산을 나누어 갖게 해달라는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그때 주님은 당신은 그런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재판장으로 온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오히려 그의 관심을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하게 하셨으니 이는 생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생명은 좁게는 육체의 생명의 가르치는 것이었고, 넓게는 영혼의 생명을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II. 나는 어디로 달려가는가
자, 오늘 우리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 예수님께 나오는 이 인물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초상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A. 목적 없는 경주
목적 없이 경주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이전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인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던 사람이었는지, 오늘 처음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형이 부당하게 차지했다고 믿는 유산을 재분배받는 것이 그의 최대 관심사였고, 예수님이 이 일에 도움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이미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이 일을 바로잡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을 것입니다. 아마 형과 깊은 대화를 나누려고도 하였을 것이고 혹은 법정에 고발하겠노라고 협박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유산을 독차지한 형을 미워하며 부당하게 빼앗겼다고 믿는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그는 온 마음을 다 썼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그 일 하나가 인생 최고의 숙제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용해서라도 자기 몫을 되찾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오늘도 부지런히 애쓰면서 살아갑니다. 매일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고단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위한 삶입니까? 정말 우리의 마음과 뜻을 다 바쳐 살아가야 할 만큼 그렇게 가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양보해야 될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인데 그것을 포기해야 될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일입니까? 다람쥐가 있는 곳에 사람들은 항상 쳇바퀴를 놓아둡니다. 심심한 다람쥐는 쳇바퀴 위에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다람쥐가 놀이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제 눈에는 노동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람쥐가 무슨 의식이 있어서 사람들 즐겁게 하고 싶겠습니까? 둥근 쳇바퀴에 올라가서 다람쥐가 한 발을 내디디면 바퀴는 움직입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또 한 걸음을 내디디면 바퀴는 더 빨리 굴러갑니다. 그러면 다람쥐는 더 빨리 다음 발자국을 내디뎌야 합니다. 천천히 쳇바퀴를 돌리는 다람쥐는 없습니다. 미친 듯이 달리면서 쳇바퀴를 굴립니다. 1등을 꿈꾸면서 달려가지만, 어디에도 1등은 없습니다. 열 마리면 열 마리가 다 그렇게 쳇바퀴를 돌리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일생을 때론 비장한 열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부지런히 달리면 남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각자 혼자서 자기의 쳇바퀴를 돌리는 것입니다. 쳇바퀴를 돌리며 달리는 그 경주에 1등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영원한 승자는 있지도 않은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오래전에 '아일랜드'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영화 내용은 비윤리적인 기업에서 복제 인간을 수없이 양산해서 독립된 공간에 가두고 외부 세계와 철저히 장막을 칩니다. 태어난 복제 인간들은 그 안에서 교육을 받고, 절도 있는 삶을 살며 규칙적인 식생활과 운동으로 최상의 몸을 만듭니다. 그들은 그 세계밖에 알지 못합니다. 정기적으로 그들이 모두 모인 곳에서 추첨을 합니다. 추첨을 해서 당첨된 사람에게는 또 다른 세계, 아일랜드로 가는 특권을 주는 것입니다. 당첨된 사람들은 말할 수 없이 기뻐하고, 모든 사람들은 부러워하며, 그들을 축하하는 열렬한 파티가 열립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는 세계는 바로 병원입니다. 거기서 장기를 적출당하고 패기 처리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거의 전투적입니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보십시오. 전철에서 이미 지친 몸으로 직장에 들어섭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높은 효율과 치열한 경쟁에서의 승리를 요구합니다.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자는 여지없이 탈락하여 도태됩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이전보다 훨씬 못한 대우가 기다리고 있고, 때로는 실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더 비참한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가질 엄두도 못 내던 물건들이 이제는 없으면 살 수 없는 필수품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미국을 기준으로 1920년대에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이 몇 개인지 물었더니 가장 많은 대답이 열아홉 가지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팔십 년의 세월이 흐른 2000년도에는 사람들이 이것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하는 품목이 256가지나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우연히 백화점의 가전제품 코너를 가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냉장고와 텔레비전 그리고 냉난방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가격표를 보고 눈을 비볐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냉장고 값은 80만 원에서 100만 원이라고 생각했는데, 1,000만 원이 넘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인가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냉장고는 아이스박스이고 그게 진짜 냉장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냉난방기기는 어떻습니까? 우리 교회에 설치한 난방기기는 한 개에 이백만 원에서 이백오십만 원을 주면 공사비까지 다 해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난방기기는 오백만 원 육백만 원, 값을 헤아릴 수 없고, 텔레비전 한 대에 천만 원이 정도 되는 것들이 즐비하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그런 것들이 매스컴에 끊임없이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메이저 신문 하나를 펼치면 양면 광고로 중간에 두 페이지에 걸쳐서 나오는 광고가 있습니다. 대부분 가전제품 광고입니다. 한 번 광고하는데 광고비가 1억 7천만 원입니다. 그런 것을 며칠에 한 번씩 수없이, 그것도 한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의 신문에 찍어 낸 것을 보면서 사람들은 학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을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림 같은 주방, 가구 같은 냉장고와 김치냉장고 등 모든 것들이 거실에 예쁜 가구처럼 진열되어 있는 비스포크를 보면서 갑자기 자신의 주방이 돼지우리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갖기 위해서 결국 더 많이 소비해야 되고, 소비는 우리를 더욱 노동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누리며 사는 대가는 더 많은 시간을 노동하거나 과외의 수입을 늘리는 것입니다.
최근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착실하게 저축을 해서 부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20%도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영혼까지 끌어다가 집을 사고, 주식 투자에 광풍이 불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에게 수많은 육체의 수고와 끝없는 마음의 긴장을 요구합니다. 남들이 누리는 것을 따라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증대는 우리를 점점 더 물질 중심의 사고로 흐르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면서 쫓기듯이 매일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오늘도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까?
B. 의미없는 일상
문제는 이런 것들이 의미 없는 일상이 되어서 우리를 현혹시킨다는 것입니다. 현대는 무한 경쟁 사회입니다. 승자와 패자는 뚜렷이 갈리고 그들에게는 완연하게 다른 앞날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물질문명은 더 많은 제품들을 생산하고 그것을 보는 사람의 눈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니,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구는 더 많은 시간을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끊임없는 목표가 주어집니다. 매일의 삶은 그 목표 달성을 위해서 내몰리는 삶입니다.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내로라하는 거대한 기업의 사장이 되고 회장이 되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 모두에게 열려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공채 말단 사원으로 들어와서 한 단계 한 단계 밟아가며 결국은 거대한 기업의 부사장 자리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약관 45세가 채 되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샐러리맨의 신화, 모든 셀러리맨의 롤모델, 모든 샐러리맨이 되고 싶어 하는 위대한 멘토라고까지 불렸습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과로사로 죽었습니다.
최근 택배기사들의 과로사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이런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발로 걸어가서 물건을 사는 것이 당연한데, 집에서 편히 앉아 받아보겠다면 마땅히 돈을 더 지불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은 택배기사 같은 사람들에게 돌아가서 그 사람들이 여러분들처럼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사들이 죽어가는 그 희생의 터 위에서 편리한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온전한 인간의 사고방식이 아닌 것입니다. 저는 피자를 그리 좋아하지 않지만 시켜 먹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화로 주문해서 배달을 시키면 만원인데, 걸어가서 사면 칠천 원인데 얼마나 놀라운 가격입니까. 굳이 집에서 기다리면서 식은 피자를 먹느니, 차라리 가서 따끈따끈한 것을 사서 담요에 돌돌 감싸서 빨리 차로 갖고 와서 가족들 앞에 놓고 먹는 것이 훨씬 경제적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굳이 편안하게 집에서 받아먹고 싶다면 당연히 30% 혹은 그 이상을 더 내서 택배기사들이 과로사로 죽지 않을 만큼 일해도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는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 돈을 지불하기 싫으면 자기 발로 걸어가서 사람의 서비스를 기대하지 말고 자기가 직접 구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층민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몇 해 전에 세종 정부종합청사에서 30대 워킹맘이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들어오질 않는 것입니다. 사무실 사람들이 이상해서 전화를 걸어도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직원들이 찾아보니까 계단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습니다. 사인은 과로사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외교관 혹은 판사같이 남부러워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2년 전, 고등법원 소속 여판사가 자신의 집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는데 과로사였습니다. 판사가 남들 눈에는 존경스럽고, 누구든지 해보고 싶은 직업이지만, 만만한 직업이 아닙니다. 평판사 한 사람이 1년에 감당하는 재판은 약 350건입니다. 350번 방망이를 두드려서 각각 선고를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한 재판에 짧으면 수백 페이지부터 수천 페이지, 때로는 수만 페이지에 이르는 사건 기록들을 읽고 공정하게 판단해야 됩니다. 판사 한 사람 한 사람은 개별적인 헌법 기관입니다. 판사들은 아무리 친해도 서로의 재판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입니다. 오직 자기 혼자 생각하고 판단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일반적인 직업과 다릅니다. 일반적인 직업은 승진하는데 수많은 요인들이 있지만 판사는 판결로 말합니다. 벽돌을 쌓듯이 차곡차곡 판결을 쌓고, 그것이 꽉 차면 승진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최선을 다해서 판결을 내렸는데 그것이 상고가 돼서 판결이 뒤집혀 환송되면 그 벽돌 하나가 깨지는 것입니다. 일 년에 몇 번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는 승진할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 직업도 만만한 직업이 아닙니다. 사건 기록을 퇴근하고 집에 가져와서 밤늦게까지 검토하다가 과로사로 죽은 것입니다. 외교부에서 여성이 국장의 자리까지 오른다는 것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 사람은 거기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러나 정상회담 뒷바라지를 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애쓰고 신경을 쓰다가 결국은 타국의 호텔에서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이외에도 기록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과로사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까? 아무것도 신경 쓸 사이 없이 오직 일에 내몰리면서 사는 동안에 승진과 전보, 더 나은 지위와 수입을 꿈꾸며 살아가는 동안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관계는 버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의 일반적인 경험에 의하면 아이들이 아빠를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기간이 십 년도 안 됩니다. 한 살, 두 살부터 시작해서 빠르면 열 살, 좀 길어지면 열두 살 정도까지 아빠를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사회생활하는 남성들에게는 무제한의 시간과 노력을 바쳐서 헌신해야만 겨우겨우 살아남을 수 있는 시기입니다. 한국에 있었던 어느 지체가 미국의 유수한 기업에 취직을 해서 갔다고 합니다. 가보니까 칼퇴근하는 분위기여서 6시가 되면 모든 것을 접고, 6시 5분만 되면 한 사람도 회사에 없는 문화를 그 사람도 철저히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가 못해 내는 일을 미국 사람들은 다 해내는 것이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자신은 칼퇴근해서 집에 가서 쉬었고, 그 사람들은 집에 일 보따리를 싸 가서 밤 11시까지 일을 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우리들이 내몰리는 사회입니다. 그런 속에서 결국 아빠 품을 그리워하던 아이들은 어느 날 아빠와 함께 앉아있는 시간이 너무 지루하고, 아빠가 1층으로 내려오면 아이는 2층으로 올라갑니다. 아빠가 이 방으로 가면 아이는 저 방으로 가고, 거기까지 쫓아 오면 현관문을 쾅 닫고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족들과 친구들과의 모든 소중한 관계들은 희생당한 채 우리들이 자신을 다 드려 살지만, 결국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인생의 목적과 목표는 엄연히 다릅니다. 목적은 의미와 연결되어 있고, 목표는 효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이라면 우리의 삶에 목표와 목적은 수직적으로 일직선상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목표가 성취되고 나면 목적이 이루어지는 데에 가까이 다가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표의 달성이 목적의 실현에 이바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올해는 지긋지긋한 전셋집을 청산하고 내 집을 마련하려고 거액의 부채를 안고 집을 사고, 또 그 대출을 갚기 위해서 더 많이 밤늦게까지 일해야 합니다. 금리가 오른다는 소식이 신문에 발표될 때마다 마음을 졸여야 합니다. 저는 그 삶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삶의 목표가 세워졌지만, 그것이 목적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때로는 허공을 치는 것과 같고, 미친 듯이 달려가지만, 마음의 공허를 사라지게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중에 누가 올 한 해는 내 나쁜 성질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자신을 성찰하며 자신의 모난 성격을 반성하며, 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세우고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서 많은 목표를 세우고 불같은 열정으로 살아도 그것이 우리를 올바른 목적으로 이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미친 듯이 일하고 돈 벌어 살려고 애를 쓰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할 때 결국은 실망하게 됩니다. 목적과 목표가 올바르게 연결되지 못할 때 인생은 필연적으로 혼돈과 공허 속으로 빠져들게 되고, 그것은 자신을 가두어 두기 위해 친 거미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하여 돌진하지만, 그것을 이루게 될 때 과연 행복할 것 같습니까? 또 그렇다고 치면 그 행복의 느낌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초호화 요트를 주문해 두었습니다. 얼마나 열심이었는지 바쁜 월드 CEO가 6주에 한 번씩 시간을 내어 몸소 제작에 참여할 정도라고 했으니 요트에 대한 그의 기대는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조타실에는 27인치 아이맥(iMac) 일곱 대를 설치하여 그것으로 배를 모두 조정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네덜란드 알스미어(Aalsmere)에서 공개된 이 배의 길이는 80m였고, 6개의 호화 침실이 있고, 소음을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라 철저한 방음 설계로 이루어졌습니다. 무려 3천 2백억짜리 요트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은퇴한 후 사랑하는 가족, 친한 친구들과 함께 이 요트로 세계여행하는 것을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이 요트가 완공되기 전, 2011년 10월 5일 췌장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화려한 요트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저는 가보진 않았지만 결국 그 요트는 완공되었으나 운행되지 않고, 소유는 부인의 것인데 모든 사람의 입장이 불허된 채 유령선처럼 부두에 매어져 있다고 합니다. 인생이 이런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인물의 초미의 관심사는 형의 유산을 나누어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 물질도 자기가 살아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많은 곡식을 거두어들이게 되었지만 쌓을 창고가 없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더 큰 창고를 지어 거기에 곡식을 쌓아 두고, 그 곡식을 팔아서 성대한 연회를 매일매일 베풀며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을 자신의 영혼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은 산해진미로 어우러진 화려한 성찬과 파티로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진리를 사모하는 영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3장 19절에서 지혜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이 당하는 일을 짐승도 당하나니 그들이 당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짐승이 죽음 같이 사람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살아있는 것은 우리 스스로 하는 것이지만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는 우리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쁘게 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도대체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은 우리에게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렇게 살면 나는 어디로 달려가는 것이고, 달려갈 때 그 끝은 어디일까?' 우리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오늘도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의미를 발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미친 듯이 누군가에게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에 정말 우리는 주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C. 죽어야 할 존재
결국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중요한 교훈은 인간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기심을 가지고 당신에게 나와 세상사를 가지고 주님께 역성을 들어 달라고 하는 이 사람을 일깨우셨습니다. 그리고 한 비유를 베푸시는데 그것이 바로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였습니다. 누가복음 12장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열심히 재물을 모으나 예기치 않았던 사람이 오히려 그 재물을 누리고, 자신은 그 재물조차 등지고 떠나가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사는 것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초가 아름다운 불꽃으로 사방을 밝히지만, 자신의 몸을 태우며 불빛을 발하듯이, 불타고 있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사라지게 하면서 불타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그런 것입니다. 행복을 위해 정한 목표는 성취를 겨냥하지만, 그 삶의 목표가 인생의 목적에 단단히 매달려 있기는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에 있는 인생을 바라보는 성찰과 확고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어느 시장에서 건물 하나가 경매에 나왔습니다. 저도 가봤는데 시장통 한복판에 있는 탐나는 건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장사의 뼈가 굵고 부동산에 눈이 밝다고 하는 사람이 경락을 받았습니다. 문제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내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본 그 빌딩은 우리 한림푸드 빌딩 정도 되고, 층수는 좀 더 높지만, 그보다 결코 크지 않은 빌딩이었습니다. 그 작은 빌딩에 들어와 있는 업체 수가 104개였습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고 들어가 보니까 제일 큰 가게가 한 평 혹은 두 평, 심지어 반 평짜리 가게까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을 상대로 소송을 벌여야 했습니다. 하나하나 소송을 이기면서 그 사람들을 꺾어 나갔고, 거의 그 건물을 손에 넣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이겼고, 등기를 자신의 앞으로 옮겼을 때 그는 몸에 심각한 이상 증세를 느꼈습니다. 병원에 갔지만 이미 뇌암 4기였습니다. 결국은 그 가족들도 그 건물에 정나미가 떨어져서 어느 교회에 헐값으로 넘기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어리석은 일에 신명을 바치지만 않았더라면 몇 해 더 살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어리석은 부자의 사고방식은 오직 세상밖에 모르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주의자가 가장 비현실주의자입니다. 왜냐하면 결코 자신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있을 수 없는 사실을 전제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9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모든 가진 것이 모자라는 사람들이 되풀이하는 말입니다. '내가 오늘 불안한 삶을 사는 것은 소유가 부족하기 때문이요, 내가 지금 이렇게 애쓰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내가 여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조금만 더 여유가 있다면 그때는 나의 인생이 좀 더 편안해질 것이요, 좀 더 애를 써서 좀 더 모으고 나면 나는 좀 더 안락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그 꿈이 실현되었습니까? 우리의 길지 않은 짧은 인생에서 그나마 안식과 위안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영혼이 주님의 품 안에 있을 때 아니었습니까? 돈이 우리에게 그것을 가져다주었습니까?
유명 재벌 3세들이 거의 예외 없이 한 집안의 몇 명씩 구속되어 신문 보도를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이 나오는데 그게 모두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죄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마약을 한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모든 것을 먹고 마시고 여행하고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것이 갖춰져 있는데도 마약에 탐닉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보다는 덜하지만, 연예인들이나 혹은 여유 있는 사람들이 중독적인 프로포폴을 맞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주사 한 방에 몇만 원 되지도 않는 것을, 약점을 이용해서 병원에서 한 번에 50만 원, 60만 원씩 받으면서 불법으로 주사를 놓아줍니다. 한두 시간 잠에 떨어지듯이 맡고 나서 게슴츠레한 눈으로 다른 병원을 찾아가서 또 주삿바늘을 꽂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그렇게 해야지만 겨우겨우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정말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을 이국의 사람들처럼 보고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헛된 희망에 취해서 사는 여러분들은 정신적인 프로폴포로 사는 사람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지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누군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세계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세계의 일부분 아닙니다. 인류 속에 있지만 인류의 부속품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몰랐을 때는 황톳빛 대지 위에 한 줌의 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나의 이름을 불러 주셨을 때 나는 세계에 속했으나 세계와는 다른 존재가 되었고, 나 때문에 이 세계의 의미가 부여되는 위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누구인지를 아십니까? 관심이나 있으십니까? 관심이 별로 없으십니까? 살기도 바쁜데 그런 고답적인 질문에 답할 만큼 여유가 없으십니까? 고단하고 비참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삶의 무게가 무거운 것은 고민을 많이 하기 때문이 아니라, 생각이 너무 가볍기 때문에 삶이 천근만근 무거운 것입니다.
저는 여러 해 전 영국에 출장을 갔다가 아주 우연히 거기에 있는 선교사의 호의로 브리티시뮤지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고고학적 유물들을 보았지만, 어느 한 전시품 앞에서 제 발걸음이 멈췄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충격이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설교하는 동안 설교 시간에 화면을 보여 드린 적은 없습니다. 오늘 최초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사람입니다. 5천 4백 년 전에 죽은 사람이고, 이집트 사막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성별은 남자, 키는 163cm, 늑골이 부러진 걸로 보아서 타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화면에 어느 정도 잘 나왔을지 모르지만, 제가 밝은 불빛 아래서 볼 때는 아주 깨끗하게 말린 건어물 같았습니다. 아주 생생하게 눈썹까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기 직전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요? 왜 죽었을까요? 그리고 죽은 하루 전과 죽은 하루 후는 어떻게 달랐을까요? 아마 그전에도 그는 온갖 욕망에 들떠서 지지고 볶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5천 4백 년이 흘렀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은 허무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하는 얘기가 '허무명랑하게 살자.'고 합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 신화, 시지프스의 신화를 생각하게 됩니다. 호머는 이 세상 인간들 중 가장 똑똑한 인간이 시지프스였다고 말합니다. 시지프스는 고린도 지역 폴리스의 왕이었습니다. 그 도시를 건설한 임금이었습니다.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신들도 시지프스에게 속아 넘어갔고, 신들을 가지고 놀았습니다. 인간의 영역을 지키지도 않고, 신의 세계를 넘나들며 신들을 이간질 시키고, 신을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농락했던 것입니다. 여러 스토리를 거쳐서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저 인간은 가만 내버려 두면 안 되겠구나.'하고 심판을 내리는데, 그 형벌이 바로 시지프스의 형벌입니다. 높은 산꼭대기에서 돌멩이 하나를 굴려 내리고 시지프스에게 명령합니다. 너의 형벌은 이 돌멩이를 굴려 산꼭대기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산꼭대기는 볼펜심 같이 동그란 볼처럼 되어 있어서, 거기에는 어떤 것도 놓아둘 수가 없는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시지프스는 돌을 굴리고 올라갔다가 다시 굴러떨어지고, 다시 내려와서 또 갖고 올라가는 일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오늘날 시지프스의 신화를 말할 때는 의미도 없는 일을 운명처럼 반복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 실존주의 문학가 알베르 카뮈는 이 신화를 완전히 새롭게 해석을 합니다. 그는 똑같은 제목의 '시지프스의 신화'라는 책에서 몇 가지 이야기를 엮는데, 그중에 뒷부분에 시지프스의 신화에 대한 해석이 나옵니다. 요지는 이것입니다. 바위를 굴려서 산꼭대기까지 올려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올려놓으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것도 운명입니다. 인간이 왜 그래야 하는지 물을 수도 없고 고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끝까지 올려놓고 굴러갔을 때 예전에 시지프스는 한숨을 쉬고 괴로워하며 죽을 것 같은 형벌이 언제 끝날까 하면서 비극적으로 내려오지만 한 가지는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굴러떨어진 돌멩이를 가지러 내려가면서 시크하게 쓴웃음을 지으며, 비웃듯이 웃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라는 것입니다.
저는 한때 실존주의 문학가들의 작품에 몰입했던 사람으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어떤 인생의 해답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시크하게 웃으며 내려오든, 통곡을 하며 내려오든 그를 기다리고 있는 운명은 다시 또 그 바위를 굴리며 언덕으로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해답을 찾지 못하는데, 거기에서 어떻게 인생의 자유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철저하게 자신을 외롭게 던져 버렸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온몸으로 겪어 본 사람으로서 그들의 결론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 인생의 숙제가 해결됩니까? 의미는 결국 내가 찾는 것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그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허무라고 하는 것은 '의미 없음'입니다. 허무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은, 없음 속에서 있음을 찾는다는 것만큼 이상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정말 우리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존재로 세상에 태어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미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고, 내가 있는 이유가 네가 있는 이유와 다르기 때문에, 나를 그가 아닌 나로 창조하셔서 여기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산 넘어, 산 넘어 드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푸른 벌판에 알록달록한 꽃들이 가득 끝없이 펼쳐져 있습니다. 인적이 없는 곳이라서 누군가 와서 보았을 리가 없는 산속입니다. 내가 거기를 방문합니다. 알록달록한 꽃들의 모양은 마치 예쁜 도화지에 색색으로 점을 찍어 놓은 것처럼 이 발끝에서 저 하늘 끝까지 이어집니다. 내가 그것들을 퉁쳐서 꽃이라고 부르는 동안에는 어떤 꽃도 내 마음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꽃들 중 하나의 이름을 불러 줄 때 그것은 모든 꽃들 위에서 튀어 올라 내 품에 안깁니다. 그 아름다운 모습과 향기는 내 마음에 기억이 되고, 이름만 불러도 그 꽃의 모습이 떠오르는 관계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특별한 사랑을 말할 때,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인생의 의미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지 그 이후에 어디서도 항구적인 의미는 발견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이 결국 우리 인생의 의미의 근원이십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알고 나를 아는 지식이 없이는 누구도 자기 인생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다른 사람으로 지으시고, 당신과 다른 관계를 갖게 하심으로써 의미를 갖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름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구원하셔서 우리를 당신과 관계 맺게 만드신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바르게 알고 참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행복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멋있는 것입니다. 백번 생각해도 안 태어난 것보다 태어난 것이 너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확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 그것을 확정해야 하겠습니까?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2 (2021.01.10._주일오전)
2. 멈춰 서서 생각하라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시 94:8)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때로는 허무감이 밀려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목적 없이 달려가는 경주와 같은 삶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죽어야 할 존재임을 알면서도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그것을 망각한 채 허무하게 살아갑니다. 이기는 자도 없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계속되는 경쟁의 삶은 언제나 끝나는 것일까요? 이런저런 의심 속에 잠이 들지만, 어김없이 아침이 밝아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생활의 현장으로 내몰리고, 고민할 시간도 없습니다. 이따금 음식의 간을 보듯이 진리를 맛보기는 하지만 매일매일 살아내야 하는 삶의 현장으로 내몰리니, 급류에 떠내려가는 판자 조각같이 우리 자신은 그러한 삶의 흐름에 저항할 힘이 없습니다. 또다시 의미도 찾지 못한 채 반복되는 삶에 박수갈채도 없습니다. 도대체 이런 나의 삶을 진심으로 알아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것이 오늘날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이런 형편을 벗어나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 할까요?
II. 멈춰 서서 생각하라
이것에 관한 대안을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 '멈춰 서서 생각하라'라는 것입니다. 무언가 잘못된 줄 알지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디서 끝날지도 모르는, 이러한 삶에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잠시 멈춰 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귀뚜라미를 가지고 장난을 치며 많이 놀았는데, 짓궂은 아이들이 귀뚜라미를 잡아서 더듬이 두 개를 잘라 버립니다. 귀뚜라미의 더듬이는 자기 몸길이보다 더 긴데, 그것으로 더듬으며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이 있는지 판단하는 것입니다. 더듬이를 잘라 버리면 귀뚜라미는 오도 가도 못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런 신세입니다. 이에 대해서 오늘 본문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A. 성찰하라
제일 먼저 성찰하라는 것입니다.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무언가 행동하라는 게 아니라, 먼저 가던 길을 멈추어 서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잘못된 결심은 더 큰 문제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미친 듯이 달려가는 삶, 의미를 찾지 못한 채 허무하게 달음박질을 치는 우리를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끝낼 수도 없고 부지런히 달려도 1등도 없는 달음박질로 지친 나, 의미를 찾지 못한 허무한 삶에 내몰리고 또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순간이 옵니다. 다시 말해서 그런 것들을 도저히 더 이상 이겨낼 수 없는 무게가 내 마음을 짓누를 때 질병적 증상이 나타납니다. 마치 도저히 담을 수 없는 무거운 물건을 부대에 많이 담아서 들려고 하면 어느 부분이 터지는 것처럼, 질병적 증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들에 대한 무관심,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습관적으로 빠져드는 게임과 오락, 분수에 맞지 않는 과도한 소비 생활, 약물과 알코올 중독, 끊을 수 없는 음란물 중독, 심지어는 외도, 이런 것들이 아닐까요? 이보다 조금 나은 사람은 모든 관계를 단절한 채, 일 중독에 빠지기도 하는데,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도 모르면서 노예처럼 일하는 것에 중독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끝은 어디일까요? 그리고 과연 그 삶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작년 통계를 찾아보았습니다. 작년 우리나라 주류 소비량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놀라지 마십시오. 3억 4천 6백만 리터입니다. 감이 안 오시죠? 10t 탱크로리에 술을 꽉 채워서 서울부터 대구까지 일렬로 줄을 세울 수 있는 정도의 길이입니다. 1인당 7.1ℓ의 술을 마셨습니다. 당연히 많은 알코올 중독자들이 양산됩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전체 인구 중 온라인 게임을 현재 이용하고 있는 사람이 61.1%, 전에는 했지만, 현재는 안 하고 있는 사람이 16.7%, 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안 할 사람은 20%밖에 안 됩니다. 저와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나라는 한때 마약 청정국이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마약의 허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부에서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강력하게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내서 유통되지 못 하게 해야 하는데, 중고등학생들도 마약을 살 수 있을 정도로 인터넷에서 판매되고 있습니다. 속칭 던져 놓기라고 해서, 여기저기 길거리 어딘가에 마약을 숨겨 놓고 비트코인이나 돈을 입금하면 장소를 가르쳐 주는 방식입니다. 이것을 많은 사람이 이용하고 있고, 매년 중독자가 16만 명씩 증가하고 있습니다.
2018년 통계를 보면 1만 3천 99명이 자살을 했습니다.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 매일 38명이 죽고, 38분에 한 명씩 자살을 합니다. 결국 이것이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부작용입니다. 그런 인생을 살 때 마지막에 우리에게 남겨지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미친 듯이 직장생활을 하고, 사업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 가족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가족 중에는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건강검진을 못 받는 사람이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비용을 아까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생각을 고쳐야 됩니다. 만약에 그 비용이 아까우면 이렇게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한번 병에 제대로 걸리면 평생 건강 진단비보다 더 많은 돈을 병원비로 쓰고, 혹은 죽을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검사 과정을 못 견디는 사람들입니다. 피를 뽑고 엑스레이를 찍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닙니다. 그러나 PTC 검사와 같이 방사선을 이용하는 검사를 자주 받으면 암에 걸릴 수도 있지만, 당장은 모릅니다. 어떤 검진은 사람이 치욕감을 느낄 정도로 비인간적으로 몸을 다루기도 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검사하다가 지치니까 차라리 병에 걸리고 말지 검사는 못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는 착실하게 건강검진을 받는 편인데, 어떤 검사는 생각만 해도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검사받기가 싫습니다. 세 번째는 검사 결과가 무서워서 못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검진했는데 폐암 3기, 혹은 전립선 말기 등의 결과가 나올까 봐 무서워서 검사를 못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로 직면할 때 거기에 그나마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피하면 그 위에 현실이라는 삶을 구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가는 현실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습니다. 이를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힘들기도 하고 또 두렵기도 합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인데, 삶이 우리를 질질 끌고 다닌다면 그것은 인생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내는 데 인생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변화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런 삶을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결론에 도달한 사람들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는 인생에 끝이 무슨 보람이 있겠느냐고 이제껏 살았던 삶에 대해 저항하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구에게나 변화가 필요한데 그 시작점은 똑같습니다. 그것은 잠시 멈춰 서서 생각하는 것, 곧 성찰입니다. 성찰은 사전적으로 자신이 한 일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단지 일에 대해서 반성하는 것을 성찰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찰은 자기가 한 일의 근원이 되는, 자기의 사람됨을 함께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을 보면서 미처 몰랐던 자신의 인간성과 연결시키면서,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인지 성찰하며 예전보다 나은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성찰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에 대해서 실행하는 '반성적 사고'가 성찰입니다. 이 말을 심리학에서는 자신 너머에서 자신을 본다고 해서 '메타심리'라고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자기 밖에 있는 진리를 인식함으로써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본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반성이 가능하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찰은 반성이고, 반성은 생각입니다. 성찰을 하기 위해서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반성을 할 때는 자기 편을 들거나, 핑계를 끊임없이 대면 반성이 안 됩니다. 반성을 할 때는 훌륭한 위인들의 전기를 읽거나 혹은 높은 인간의 이상을 기록한 책들을 읽을 때 그 표준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표준이라는 거울에 자기를 비추어 보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과 잘못된 부분을 생각하면서, 형벌을 주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생각해서 자기를 바꾸는 것이 성찰입니다.
성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모든 사람들은 이런 시간을 많이 갖는 사람들입니다.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한 번도 자신이 지혜롭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항상 자신의 미련함을 보면서 탄식하는 사람들 가운데 현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리를 기준으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을 성경에서는 어리석은 자, 미련한 자, 지혜의 없는 자, 우매한 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 94편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라고 시인은 탄식하고 있습니다. 시편 94편의 배경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매우 악한 사회입니다. 사람들이 포악하고 사악하게 살아가는 것이 보편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수난을 당합니다. 시인은 그런 세상이 된 이유를 지혜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미련하게 살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할 일이 없고, 그냥 살면 됩니다. 음식을 부패시키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여름에 맛있게 양념한 고기를 바깥에 내놓고 한나절만 지나면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하루만 지나면 곰팡이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미련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사람들은 무엇을 했기 때문에 미련하게 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살아왔기 때문에 미련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롭게 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고, 때로는 상상할 수 없는 노력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롭게 되면 될수록 노력하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고 즐거움을 가져다줍니다.
반성은 치열한 생각을 요합니다. 진리를 알고 자기를 꼼꼼히 조사해야 됩니다. 미련하게 되는 것은 그냥 가만히 살면 누구나 다 미련한 사람이 됩니다. 미련하기 위해서, 지혜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노력할 필요 없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내키는 대로 살면 그가 예외 없이 미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사람이 되는 길은 매우 매우 넓습니다. 아무 데나 걸어가도 미련한 사람들이 사는 무덤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매우 좁은 길을 가야 합니다.
여러분, 고단한 여행 혹은 출장을 다녀옵니다. 자신의 집보다 훨씬 좋은 호텔에서도 자보고, 창문을 열면 새파란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지고, 아름다운 숲이 펼쳐지는 좋은 곳도 가보았습니다. 그런데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세수를 깨끗이 하고 자기 침대에 벌렁 누운 다음에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내 집이 제일 편하구나!'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제일 편한 것은 이제껏 살아온 방식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무엇인가 집요하게 성찰하고 자기를 바꾸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결과에 대해서 허무하다고 느끼고, 달음박질하는 것이 의미 없는 삶이라고 느낄 때에는 그냥 계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이라도 달리 생각하고 조치를 취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의미 없고, 허무한 것도 알았습니다. 미친 듯이 내몰리는 1등도 없는 경쟁의 끝이 허무한 죽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언뜻언뜻 이런 생각이 떠오르지만, 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 없이 사는 일상생활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지적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적인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입니다. 생각할 용기입니다. 내가 이런 삶을 계속 살면 마지막에 어떤 삶을 맞이할까, 어떤 죽음을 맞이할까, 미래는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고 나면 무엇인가 결단을 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을 바꾸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그것을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장소 집착증이 있는 강아지들은 집 밖에 한 발짝도 못 나갑니다. 그런 강아지의 목에 줄을 매고 산책하러 가려고 잡아당기면 목이 부러져도 안 나가고, 그래도 힘껏 당기면 소리를 지르면서 끌려 나오고, 경우에 따라서는 오줌을 줄줄 쌉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해서 포르노 중독, 약물 중독에 빠지고, 자살을 생각하고, 술이나 퍼마시고 오락에 빠집니다. 나이가 들어 어른이 되었는데도 게임기에 달라붙어 가슴을 불태우지 않으면 도저히 생존이 안되는 삶이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다른 길이 있는지 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생각의 끝이 가져다줄 모습이 어떠한 것이든지 그 진실과 대면할 용기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진리가 아닌 자기 생각으로 멋대로 이 세계를 바라보고, 심지어 하나님을 만들고 그것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살아가는 대가는 영혼의 죽음입니다. 삶에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이따금 맛보는 세속적인 즐거움은 마취제 같은 것밖에 안 됩니다. 여기에 무슨 삶의 보람과 행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종교란 모든 삶에 으뜸이 되는 가르침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전에 유럽에서는 이 말이 곧 경건을 뜻했습니다. 종교는 신앙을 의미했으니 이는 모든 종교의 요체가 곧 진리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어쨌든, 우리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성찰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성찰은 무엇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되겠습니까?
B. 무지를 인정하라
마지막으로 '무지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평생에 과업은 사람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그 사람이 무지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델포이에 신탁이 내렸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 으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 본인은 기분이 좋았던 게 아니라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위 지혜가 있고 잘 안다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그와 대화를 하면서 물었고, 대답을 하게 했습니다. 대화를 하고 나면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던 많은 사람들의 무지함이 드러나고, 자신들도 그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소크라테스에게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았고, 그를 괘씸하게 생각했습니다.
저의 해석은 이것입니다. 그들이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지혜자가 아니었습니다. 지혜자는 자기가 무지하고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에 대해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은 이미 예전에 도달했던 깨달음보다 한 단계 더 올라가서 그 위에서 자신을 보고 있다는 인식입니다. 기뻐하고 환영해야 할 일입니까, 아니면 좌절해야 할 일입니까? 좌절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상스러운 말로 해서 소크라테스를 싹수가 없는 놈이라고 본 것입니다. 집요하게 꼬치꼬치 캐고, 요리조리 찔러서 마지막에 터트려서, 그 사람이 별것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마는 것입니다. 그가 참 지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미움을 받아서 온갖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 당한 지위 높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소크라테스에 대한 오해입니다. 왜냐하면 제 생각에 이것이 오해라는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과 끊임없이 대화를 할 때에는 그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자기도 지혜를 찾는 사람으로서, 그 사람이 도달했다는 결론까지도 모두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어서, 사실은 그 이상의 지혜를 찾아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도저히 더 이상 변론할 수 없을 정도의 결론에 도달한 사람이 있었더라면, 내가 생각하는 소크라테스는 깨끗이 무릎을 꿇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머리가 좋은 사람들을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공부를 잘합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이런 성찰을 잘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학자들은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일수록 이런 능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심리학에서 '메타인지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말씀드린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줍니다. '메타인지'의 메타는 '너머에, 뒤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어 전치사입니다. 그리고 인지는 어떤 사물을 아는 것을 포괄적으로 말할 때 '인지'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인지는 어떤 사물을 아는 것인데, 메타인지는 자기가 어떤 사물을 아는 과정 자체를 더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보면서 그 과정 전체를 아는 것입니다. 메타인지(Metacognition)란 자신의 인지과정에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자각하고 문제를 찾아내고 학습 과정을 조절할 줄 아는 지성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메타인지는 똑같은 차원이 아니라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자신이 어떤 사물을 알아가는 방식과 과정을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학교에서 수학이나 영어를 못해도 이 능력이 꽤 뛰어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변화를 유연하게 극복하면서 자기의 세계를 창조해 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격변하는 시대에는 이성의 능력보다도 메타인지 능력이 얼마나 높은가에 의해서 그 사람이 훌륭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 아이들 공부 잘 못 한다고 구박하지 말고, 또 공부를 잘한다고 너무 우쭐하게 대우해 주지도 마십시오. 부모는 자식들이 학교에서 공부 잘하면 좋겠지만,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모두 다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합니다. 제가 증인입니다. 저는 학교 다니는 것이 12년 동안 하루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운동회 하는 날이라든지 하루 정도는 행복했을 수도 있을 텐데 재미없었습니다. 혼자 하는 영어 공부를 제외하고 어떤 과목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빈틈이 없고, 모든 지적 능력을 동원해서 문제를 풀고 결론을 발표를 했습니다. 발표된 결론에 대해 사람들이 동의를 할 줄 알았는데, 여러 사람이 반론을 제기합니다. 그럴 때 메타인지 능력이 없으면 그 순간에 멘붕이 옵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런 모임에 절대 참석하지 않습니다. 결국은 자기가 생각하는 그 세계에 갇혀 있기 쉽습니다. 그런데 메타인지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자신의 생각에 누군가 반론을 제기하면 상대방의 생각을 들어보고, 거부할 건 거부하고, 배울 건 배우면서 자기를 보다 더 한 단계 높이 수정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인정하고 자신의 생각의 방향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맨 처음 자기가 완성한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를 도모해 가면서 입체적인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메타인지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이 메타인지 능력을 최고로 개발해 주는 곳이 바로 교회, 기독교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 없이 살 때 무엇이든 뜻대로 안 됩니다. 원래 인생은 뜻대로 안 되는 거라 했지만 열을 받습니다. 내 인생이 왜 꼬이고 풀리지 않는 것인지 생각해보니, 주변 사람들과 환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저 사람에는 보상을 하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내 삶 근처에 오지도 못하도록 만들고, 국가가 원인 제공자이면 끊임없이 소송을 해서 보상을 받아 내는 방식의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 들어오면 완전히 다른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인생이 꼬인 것은 주변 사람들과 환경 때문에 생겨난 게 맞지만, 더 높이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게 해 줍니다. 나쁜 일이 일어난 것은 맞지만, 올바른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자신을 반성하는 기회로 삼는다면 지금 겪는 어려움은 나중에 보면 정말 꼭 필요했던 어려움이 될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타인지 이론을 학습시켜 주는 것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들은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하늘과 연관시켜서 해석을 합니다. 연관시켜서 해석할 뿐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성을 가지고 현실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풀어나가면서, 누군가 문제를 제기했으면 당연히 책임을 묻고 혹은 용서해 주고, 어떤 종류의 사람과는 다시는 거래하지 않기로 하는 등의 생각을 정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한 것이 예수님을 믿기 전이라면,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메타, 그러니까 사물을 인지하는 자신 너머에서 자신을 보면서, 이것을 통섭할 수 있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변화에 대해서 개방성을 가지고 보다 더 세련되고 강인한 자신으로 변모되어 가는 것입니다.
인류학자들이 생물을 맨 위부터 24단계로 분류를 하면서 내려오면 학명으로 호모 사피엔스가 나오는데, 현재의 인류입니다. 현재의 인류가 되면서 진화론적으로 인간의 뇌가 갑자기 커졌다고 학자들이 말합니다. 뇌의 크기만 커진 것이 아니라, 뇌 중에서 어떤 활동이 어느 한순간 폭발적으로 사용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고 인류학자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분석 능력과 공감 능력입니다. 그게 확산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 것입니다. 분석은 같아 보이지만 다른 점을 찾아내어 갈라치기를 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분석은 종합의 반대입니다. 종합은 다르게 보이지만 같은 점들을 찾아내서 한 덩어리로 묶는 것입니다. 분석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어떤 자신의 고통의 문제 원인을 따지며 분석을 해 볼 때 어디에서 문제가 있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석은 문제를 해결할 수는 있지만, 공감을 하지는 못합니다. 공감은, 공감할 수는 있는데 해결을 못 합니다. 딜레마인 것입니다. 내가 어떤 죄를 짓거나 잘못된 일을 해서, 그것이 습관화 되어 오늘날 실패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냉철하게 분석해보니 과거에 잘못한 자신의 모습이 모두 보입니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지적질을 하면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두 분석하고 찾아내서 과거의 나에게 책임을 묻는 것입니다.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 자신이고, 그게 없었으면 지금의 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잘못이 지금 내 안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거의 자신과 공감할 수 있어야 됩니다. 사랑으로 끌어안으면서 잘못을 고쳐 나가야 됩니다. 과거의 자신을 용납하지 못할 때 소위 말하는 상처라는 것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것은 대상도 분명하지 않은 이 세계에 대해 어떤 앙심을 품게 만들고, 자신은 망가져 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훌륭하게 지적질을 하고 있지만, 십 년 후에도 똑같이 미래의 자신이 자기를 분석해서 현재의 자신을 비판할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도대체 몇 명으로 패가 갈라져서 일생 동안 싸움을 해야만 되는 것입니까? 그렇게 자신과 공감하고, 이웃과 공감하고, 다른 사람의 고통과 공감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 가족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엄마, 아버지, 아들, 딸이 있습니다. 칼날같이 아버지의 도리, 엄마의 역할과 의무, 자식의 도리를 정하고 따져서 그 칼날 위에 가족들을 올려놓을 때 상처받지 않을 가족이 누가 있겠습니까? 완전한 엄마, 완전한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식도 완전한 딸, 완전한 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분석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공감도 필요한 것입니다. 잘 살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은 그들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이해하며 끌어안아 주는 것입니다. 모든 가족들과 그렇게 살아갈 때에 분석의 결과를 다 따르지는 못해도 공감이 우리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능력입니다.
결국 메타인지는 한 차원 높은 위치에서 자기의 인지과정을 관찰하고 발견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첫 번째, 모두 자기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비춰보면서 소위 말하는 반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거울을 비춰보면서 자신의 마땅한 모습, 마땅히 되어야 할 자신과 현재 자신의 모습 사이의 격차가 무엇인지를 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반성의 거울입니다. 메타 인지 능력이 아주 떨어지는 사람은 티끌만큼도 반성이라는 것이 거의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에 대한 것이라면 당연히 경쟁력이 떨어지게 될 것이고, 사람의 됨됨이에 관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메타 인지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어떤 문제도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심리학자들의 말이고, 우리들의 표현으로 말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서 비록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결국은 헤쳐나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 손안에 있는 자기에 대한 믿음입니다. 세 번째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만들어가려고 하지만, 결코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고쳐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기회를 통해 자신을 새롭게 알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앞에 말씀드린 네 가지가 없는데 분석 능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 있다고 한번 가정해 보겠습니다. 삶을 과연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설교 시간에 자꾸 새로운 용어로 써서 미안하지만 하나만 더 하겠습니다. '브레인스토밍'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브레인(Brain)은 뇌고, 스토밍(Storming : Storm)은 폭풍입니다. 이것은 뇌에서 폭풍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폭풍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바다도 일정하게 물결이 치고, 모든 크고 작은 배들이 일정한 항로로 운행을 합니다. 그런데 폭풍이 일어나면 배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은 일정한 주제에 대해 회의 형식으로 모여서 구성원의 아이디어를 각자 제시하게 하여 서로 생각을 전환함으로써 새로운 방안을 함께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전혀 눈치 안 보고 이야기를 하니까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의 바다에 폭풍 같은 작용을 해서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반복함으로써 구성 모두가 자기 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촉발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완전히 새로운 발상을 찾아내 가는 행위를 브레인스토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브레인스토밍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내가 생각하는 것이 절대적인 게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배울 게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의 의견과 다른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모임에 참여할 수 없고, 참여해도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정돈된 것이 찾아내지 못했던 것을, 혼돈의 과정을 거쳐서 새롭게 발견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한 번쯤은 매일매일 살아가던 삶의 밑바닥에 문제를 모두 드러내서 여러분 속에 브레인스토밍 일어나야 합니다.
폭풍처럼 일어나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혼란이 일어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고통스럽지만, 거기에서 이제껏 내가 보지 않았던 방식으로 내 인생을 보면서 새로운 생각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첫걸음이 성찰이고, 곰곰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생각하라, 기억하여라, 너 자신을 되돌아보라, 너의 소위를 생각하여 보라, 생각하고, 생각할 때에, 잊지 말라 등의 말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습니까? 성경이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기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끗이 인정해야 하고, 나보다 훨씬 더 잘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래간만에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갔는데, 한 10년 만에 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좁아지고, 책은 엄청 많았습니다. 대략 한 시간 동안 서점을 여기저기 둘러보았는데 백 분의 일도 못 봤을 텐데 나중에는 한숨이 나왔습니다. 어마어마한 지식의 바다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얼마나 일부일까? 또 내 책이 얼마나 꽂혀 있는지 보니까 꽤 여러 권이 있긴 한데 사람들이 눈길이나 주겠습니까?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신간이 53권이라고 합니다. 10만 권씩 365일 신간이 출판되면 어마어마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드넓은 책의 바다를 보면서 과연 내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결코 자신은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고, 완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끗이 인정해야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성찰하면 생각 없이 인생을 사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어야 됩니다.
제가 회심하기 전이나, 회심한 후에도 제일 무서워하는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생각 없이 사는 것과 두려워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무지와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사물을 보게 되는 것은 먼저 빛이 사물에 비추고, 그 빛이 반사되어 우리 눈으로 들어오기 때문에 어떤 물체의 부피, 크기, 색깔, 모양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사물에 대한 것입니다. 만약에 공간 안에 많은 물건들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물건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내 눈이 보는 것은 같습니다. 빈 공간의 어두움이나, 물건으로 꽉 채워 놓은 방의 어두움이나 결국 인식 못 하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는 인간 정신의 빛입니다. 물질적인 사물들은 빛이 비춤으로써 사물을 인식하게 되지만,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은 진리의 빛이 비출 때에 그 크기와 모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마음이 빛을 받음으로써 자기를 알고 인생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회개가 굉장히 놀라운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처음의 행위, 처음 아름다웠던 신앙의 행위를 갖는 것은 너무 훌륭하지만, 그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각하라.', 이것이 제일 먼저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회개도 불가능하고,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생각을 안 할 권리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깨끗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내가 허무한 삶을 사는 것은 무지함 때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앎을 통해서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삶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기독교는 지성을 요구합니다. 목숨을 바치기 전에 먼저 뜻을 바치라고 합니다. 뜻을 바치기 전에 마음을 드리라고 합니다.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시작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 지식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인간은 그 사랑 안에서 참된 지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미친 듯이 달음박질치는 인생의 끝은 어디입니까?
미련한 사람은 자기 결혼식에 누가 올까 생각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장례식에 올 사람이 있을까를 염려합니다. 결혼식에 오는 사람은 진심이 아닐 수도 있지만, 장례식에 온 사람은 진심이 담긴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죽은 사람에게 덕 볼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정승이 죽으면 문상 오는 사람이 적어도,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미어터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장례식에 누군가 올 사람이 있습니까?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젊거나 늙거나, 높은 지위에 있든지 아무런 지위가 없든지, 여러분들을 고귀하고 사랑스럽게 생각하고, 존귀하게 생각하며 존경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으십니까? 그리고 지금의 삶을 계속 살면, 여러분들의 자녀들이 언젠가 존경스러운 우리 아빠, 정말 사랑스러운 우리 엄마라고 말해줄까요? 의미 없이 반복되는 일상의 허무감, 그 뿌리를 찾아내야 합니다. 내일이라도 다가올지 모르는 나의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아! 나는 정말 잘 살았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으십니까? 지나간 인생은 어차피 후회해야 소용없습니다. 남은 인생이 문제입니다. 남은 인생을 위해서라도 생각할 용기를 가지십시오. 하나님께 깨달음을 구하고 매달린다면 반드시 새로운 삶을 여러분들에게 주실 것입니다. 아멘.
인간으로 산다는 것3 (2021.01.17._주일오전)
3.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 2:10)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앞의 두 설교를 종합해 볼 때 우리에게 가장 절박한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를 믿은 것은 결국 다르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대로 살아서는 죽을 것 같았기 때문에 다르게 살 길이 있다고 믿고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 살라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라고 가르치는데, 도대체 우리가 어느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내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은 나 자신이기에 주체(主體)인 내가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는 어느 쪽을 따라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현대인과 인생의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II. 현대인과 인생의 가치
누구의 말을 따르든지 일반적으로 현대인이 선택하는 가치는 두 가지입니다. 개인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풍요입니다. 복음주의를 깨웠던 예언자 같은 사람 프랜시스 쉐퍼는, 그의 유명한 책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개인적 평안이란 … 다른 사람의 어려움 때문에 곤란을 당하지 않고 … 최대한 방해받지 않고 삶을 꾸려갈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 풍요는 …계속 높아지는 물질적 풍요의 수준에 의해 판단되는 성공을 뜻한다.” F. Schaeffer,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p.306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 이것은 우리의 삶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낮은 가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평안하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다면 일반적으로 사회의 정의나 후손들이 앞으로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목표로 삼을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인생의 목표가 된 것은 자본주의가 추구하는 물질주의와 하나님을 떠난 마음이 쫓아가는 세속주의 정신에 물들어 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왜 사는지도 모르고 미친 듯이 달려갑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자신이 불행한 것은 더 풍요롭지 못하기 때문이고, 더 부유하게 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거의 강박증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모든 정신적인 불안과 인생의 무게까지도 결국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정적으로 나아지면 평안도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복이 재정의 크기 달려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경쟁사회에서 이겨서 어떤 사람은 재정적으로 성공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을지 모릅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것은 어느 정도 평안을 주고 자유를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적어도 필요한 물건을 살 때에 궁핍함 때문에 어려워하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부유한 사람들은 생계에 문제가 없기 때문에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참된 가치를 찾지 못할 때 또 다른 형태의 어두운 면들이 나타납니다.
화면에 보이는 이 사람은 일본 온라인 패션몰 조조타운의 창업자 '마에자와 유사쿠'입니다. 이 사람은 이번 설에 자신의 페이스북을 팔로우하는 사람들에게 100억 원의 세뱃돈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10명씩 뽑아서 100만 원씩 1,000만 원을 뿌립니다. 얼마 전에는 현찰 1조 원이 들어있는 통장을 SNS에 공개하기도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개인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풍요라는 낮은 수준의 가치를 실현하고 나면 거기서 인간은 과연 쉼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의 가치가 바뀌지 않았는데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겪는 일 가운데 어떤 일은, 부유한 사람들은 겪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인생의 무게가 경제적인 풍요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져서 육체의 생활이 다소 평안해졌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2015년 7월 미국을 발칵 뒤집어 놓은 하나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애슐리 매디슨(Ashley Madison) 데이터 유출 사건입니다 '애슐리'와 '매디슨'이라는 이름은 외국 여자들 중에 가장 흔한 이름입니다. 기혼자들을 위한 불륜 사이트였습니다. 철통 보안을 자랑한다고 광고했지만, 결국 2015년 7월 임팩트팀이라는 해커 집단에 의해서 해킹이 되어 전 회원의 이메일 주소와 전화번호 등 모든 신상이 털린 것입니다. 이 사건이 터지고 명단이 공개되면서 사람들이 자살하고, 이혼이 줄지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정치계, 학계, 경제계 할 것 없이 수많은 지도자들이 이 사건으로 추문에 연루되어 사직하거나 혹은 쫓겨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풍요롭게 잘사는 전통적으로 기독교 국가라는 캐나다의 인구 중 6%가 이 사이트에 가입했다고 하니 미성년자와 노년층을 제외하면 얼마나 많은 기혼자가 이 사이트에 회원으로 가입했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68만 명의 명단이 공개되어 그 사람들이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결국 인생에 있어서 물질적인 풍요와 개인적인 평안이라고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재벌 3세들이 거의 예외 없이 약물중독 사건에 연루되고, 마약 사범으로 수사를 받는 일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입니까? 결국 개인의 평안과 물질적인 풍요는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결코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평안과 물질적인 풍요에 도달하고 나면 인간에게는 또 다른 욕망이 생기고 그 욕망의 노예가 되면서 인생은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에 있어서 평안과 물질은 목표가 아니라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 높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그것들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 버리면 인생의 질서는 위아래가 뒤집히게 됩니다. 수단이 목표가 되고 목표가 수단이 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 급기야 하나님도 이용하고 종교도 이용해서 이 욕망을 채우려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결국 인간의 삶은 질서가 무너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리고 그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악이라고 하는 것은 질서가 뒤집힌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수많은 고통이 또 재생산되는 것입니다.
평안하게 살고 싶지만 풍요롭게 살려는 욕망을 포기하기 어려워합니다.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면 개인적인 평안을 누리기 어렵고, 개인적인 평안을 추구하면 욕망을 포기해야 하는데, 두 가지 모두 할 수 없는 것에 현대인의 고민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아름다운 시 한 편을 낭독해 드리려고 합니다. 지난 세대에 많은 공감을 얻었던 이 노래는 오늘날과 같은 현대의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적이지 않아 보일 것입니다. 함께 영상을 보겠습니다.
일곱 송이의 수선화 나는 멋진 집도 없고 땅도 없답니다. 손에 움켜쥔 지폐조차 없답니다. 그렇지만 난 해드릴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끝없이 이어지는 언덕들 위로 밝아오는 아침을 보여주면서 입 맞추고 일곱 송이 수선화를 드릴 수 있답니다. 난 당신에게 화려한 것들을 사줄 재산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달빛을 엮어 목걸이와 반지를 만들어 줄 수는 있답니다. 아, 일곱 송이 황금빛 수선화는 햇빛 속에 빛나다가 사라지겠지요. 우리 함께 있는 하루가 저물 때가 되면은요. 그때 나는 당신을 위해 내 노래 한 곡조와 빵 한 덩어리, 그리고 베고 누울 소나무 큰 가지로 만든 베개를 드릴게요.
어떻습니까? 아직도 이런 노래를 부르며 낭만에 잠길 수 있다는 것이 고맙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는 더 이상 지난 세대의 소설 속에 나오는 순애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평안과 특히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이런 삶은 텔레비전 혹은 영화관에서 가끔 보면서 감동을 받고 싶지만, 자신이 직접 살고 싶지 않은 비현실적인 삶이 아니겠습니까?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고 저녁때가 되면 마른 빵 한 덩어리에 가수도 아닌 남편의 노래 한 곡조를 들으면서, 소나무 가지로 만든 베개를 베고 잠드는 그 밤의 불편함을 과연 현대인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도록 태어났습니까? 어떤 물건의 존재의 목적은 그것을 만든 사람에 의해 규정됩니다. 왜냐하면 만든 사람이 자신의 쓸모에 따라 그 작품을 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다급하기는 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먼저 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III. 나는 누구인가?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 리가 없습니다. 자신만을 들여다봐서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 목적을 알아야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법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것에 대해서 오늘 성경 본문이 답을 줍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A. 하나님이 만드심
제일 먼저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겨난 사람이 아니라 창조주에 의해 태어났습니다. 창조주는 어떤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만드신 바'로 번역된 이 말은 그리스어 성경에 한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포이에마(poiema)라는 단어입니다. 고전 그리스어와 그리스어 성경에 모두 '작품'을 가리키는 말인데, 모든 경우에 항상 '신의 작품'을 의미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우연히 생겨난 게 아니라 하나님이 몸소 예술작품처럼 만드신 것입니다. 완전히 선하시고, 완전히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니, 그분이 졸작을 만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결함이 있는 예술품을 창작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장인의 손끝에서도 명품이 탄생하는데, 완전하신 하나님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인간이 어찌 최고의 걸작품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예술작품에 대한 최종적인 해석은 작가에게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작가만이 완전한 의도를 가지고 그것을 창작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 작품을 보면서 이런저런 말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의견일 뿐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친히 규정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나의 걸작품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를 찾는 여행을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철학에서 심지어 이교도 신앙에서 그것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은 하나님이 만드신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의 존재의 의미는 자기를 창조하신 그분을 향하여 사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소중한 존재인지 몰랐고, 죽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달으면서,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존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고백록 제1권 5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에게 당신은 무엇입니까? … 당신께 제가 무엇이길래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하시고 그리하지 않으면 제게 진노하고 커다란 비참으로 벌하겠다고 경고하기까지 하시나이까?” A. Augustinus, 「고백록」, 1.5.5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러므로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지 목적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솜씨에 의해 만든 바 된 걸작품들입니다. 당신이 감상하시기 위해 작품을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걸작품은 누가 손대지 말고 반드시 원작품 그대로 있어야만 됩니다. 인류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소중한 미술 작품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도대체 모나리자 그림 한 장의 값이 얼마나 될까 궁금해합니다. 피카소의 그림은 960억에 팔렸고, 뭉크의 절규는 1,300억까지 한다는데,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경매에 나오면 도대체 얼마쯤 될까 학설이 구구합니다. 그러나 누구의 이야기도 맞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도, 어떤 경우에도 그 작품을 팔겠다고 내놓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1962년에 감정사들이 시험 삼아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가격이 얼마나 될까 하고 계산을 해보았습니다. 그때의 가격으로 7천억 정도로 평가되었다고 하니, 금값으로 계산을 하면 현재 5배 정도 올랐으니까 3조 5천억쯤 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 가격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 어떤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인터넷에 몇몇 사람이 자기가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라며 모나리자의 값이 1경 4,000억쯤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1만 4천조 원쯤 되는 것입니다. 팔 리가 없으니까 가격이 형성될 리가 없겠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어느 부자의 재산이 1천조라고 하는데 그것을 모두 정리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사지 못할 것은 분명합니다.
이 그림이 바로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웃을 듯 말 듯, 아무도 따라 그릴 수 없는 위대한 작품입니다. 인류에게 남겨진 단 한 장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림 원본에 누군가 낙서를 해서 훼손했다면 박물관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이 유산을 사랑하는 세계의 모든 사람이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사람입니다. 그림과 조각은 한번 만들면 그대로 멈춰 있지만, 여러분 자신은 걸작품일 뿐만 아니라 걸작품으로 살아감으로써 그 삶이 걸작품이 되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존재들입니다. 그런 걸작품에 우리는 매일 매일 낙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짓을 하는 자신에게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는 그림이나 조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살아가는 작품으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을 닮은 영혼을 가진 '나'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걸작품인 내가 훼손되었습니다. 그림에 콧수염을 그린 정도가 아니라, 나 아닌 다른 게 들어온 것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만들지 않은 또 다른 '나'입니다. 바로 나를 병들게 하는 '나'입니다. 그런데 내가 스스로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나'이니, 나로서는 내 힘을 가지고 나에게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불행은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 있지 않고 걸작품을 훼손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인 걸작품을 훼손했을 때 끔찍한 질병과 감염병들이 생겨나고,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훼손했을 때 그것들이 뭉쳐서 일어나는 사회현상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세계의 고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도대체 무엇에 쓰려고, 무엇을 위하여 사용하시려고 만드셨겠습니까?
B. 선한 일을 위하심
선한 일을 위해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이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지으심을 받은 자니…” 처음 지으심을 받은 사람은 인간이 낙서해서 망가뜨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재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재창조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당신 안에 품으셔서 새롭게 창조되게 하셨으니, 이제는 망가진 작품으로 살지 않고 원래의 걸작품으로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 때문에 그 목적대로 살 수 없었던 병든 우리를 예수를 통해 구원해 주셔서 고쳐 주셨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위하여 살도록 구원받게 하신 것입니다.
최근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어린아기 정인이의 학대 사망 사건이었습니다. 그 사건을 직접 취재한 KBS의 기자가 사석에서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보도된 것은 극히 일부이고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진실은 차마 떨려서 입으로 옮길 수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문과 방송을 통해 접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학대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췌장이 끊어지고 장기가 파열되었다고 하니 얼마나 무서운 폭력이 아이에게 가해졌는지, 죽는 순간까지 아이가 얼마나 큰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아이가 너무 불쌍하고, 아이를 학대해서 사망에 이르게 한 부모가 너무 밉고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자신의 아이를 그렇게 학대할 수 없는데, 결론은 철저하게 망가진 부모의 인간성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그렇게 망가진 자신의 인간성에 대해서 어떻게 항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더 충격적인 일은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리 아름다운 사람으로 창조하고, 또 우리를 구원하여 아무리 훌륭하게 재창조했다고 할지라도 결국 우리가 스스로 죄를 택하고 망가지는 길을 선택하면 인간이 도달하지 못할 악의 세계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누군가 무덤을 찾아가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망가지고 나면 못 할 일이 없고, 일단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을 떠나 삶의 질서가 뒤집히게 되면 저지르지 못할 죄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를 만드신 하나님을 찾는 착한 본성과 그분 없이 살려고 하는 미친 기운이 우리 안에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는 삼겹살과 같습니다. 제일 위에는 겉보기에 선해 보이는 인간의 모습이 있고, 그 아래를 뒤져보면 추악한 본성 있습니다. 거기에서 멈추게 되면 인간을 향한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분노하는 자신 또한 그런 추한 본성을 가지고 있고, 언젠가는 그 본성이 발현되었을 것이고, 앞으로 언젠가는 그 본성이 터져 나올 것이니 누가 누구를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더 밑으로 내려가 보면 거기에는 하나님을 닮은 영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희망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럴싸해 보이는 우리의 겉모습에 속지 않으시고 추악한 본성 때문에 사랑을 거두지도 않으셨으니, 이는 저 밑바닥에 있는 당신 닮은 영혼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지식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서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며칠 전 광화문의 대형 서점에 나가 보았습니다. 책들의 바다였습니다. 어지러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책들이 이 끝부터 저 끝까지 펼쳐져 있었습니다. 하루에 250종 정도의 책을 찍어 낸다고 하니,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지식의 덩어리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 속에 내 책 한 권을 더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지식의 바닷속에서 삽니다. 쏟아지는 책들 중에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책이 우리의 눈길도 끕니다. 돈 잘 보는 법, 빠른 시간에 직장에서 출세하는 법, 요즘 주식 대박 나는 법, 10살 어려 보이는 화장법, 실컷 먹고도 살 안 찌는 다이어트 방법, 꿀잠 자는 법, 동네 맛집 찾는 법, 노후자금 마련하는 법, 100만 유튜버 되는 법, 등등의 지식들이 넘쳐납니다. 이런 것들을 한 줄로 요약하면 모두 육신으로 세상을 사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당연히 지금 우리가 찾고자 하는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단 한 줄의 대답도 줄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그런 지식들은 결코 죽어도 지속될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게 하는 최종적인 해답이 아닙니다.
죄가 들어옴으로써 걸작품인 인간은 본래의 걸작의 모습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작품인데 쓰레기 더미에 던져진 것처럼 버려지게 되었으니,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무게로 달려서 고물상에 팔리는 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로 창조되었는지를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세계를 더욱 빛나게 하려고 나를 만드셨으니, 창조된 세계가 보석으로 만든 면류관이라면 우리는 대관식에 앉은 왕입니다. 면류관 때문에 왕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즉위하는 왕 때문에 면류관이 빛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왕은 최종적인 왕이 아닙니다. 더 높은 “왕 중의 왕”(King of kings)의 뜻을 따라 세계를 돌보고 가꾸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살 때 걸작품으로서의 진가가 드러나게끔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광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영광입니다. 세상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선(善)으로 가득 채우게 하시려고 우리를 창조하셨고, 죄 때문에 그 일이 망가져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목적은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되었으니, 선한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인간의 존재는 가장 찬란하게 빛나게 되고 아무리 많이 누려도 후회하지 않는 행복을 향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창조하신 그분 앞에서 내가 그분의 뜻을 위해 태어났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섭니다. 거기서 내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걸작품이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되었으니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삶으로써 궁극적인 행복을 누리게끔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 사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설교를 들으며, 우리의 생각을 동원하여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찾는 이유도 궁극적으로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풍요를 찾지만, 그것을 토대로 선한 삶을 살고 싶어서 하는 것임을 기억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자, 이제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는데 그냥 지금처럼 미친 듯이 매일매일 달려가다가 어느 순간에 확 죽어 버리시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것이 괴롭고, 생각하는 것도 힘들고, 답을 알아도 그대로 살기가 싫어서 놀이와 향락으로 이 모든 괴로움을 잊어버린 채 살다가 술에 취한 듯 죽어 버리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이 질문에 답을 줄 수 없음을 알고 조용히 무릎을 꿇는 것이 옳겠습니까? 그래서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위대한 걸작품으로 지으신 하나님께 최종적인 대답을 들어보기 위해 그분께 엎드리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무도 여러분의 선택을 대신해 줄 수 없고, 만약에 누군가 여러분들에게 강요한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을 결코 행복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여러분들이 여러분 인생의 주체로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친 듯이 달려가다가 죽어 버리거나, 놀이와 향락으로 술 취한 것처럼 살다가 죽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오늘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내가 누구이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깨닫고, 그렇게 살아갈 힘이 없는 나에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선택하여야 할 차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4 (2021.01.24._주일오전)
4.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 5:14)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사람은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든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불행하게도 되는 길을 선택할지라도 선택한 당사자는 그것이 행복에 이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리 한 것입니다. 삼라만상의 모든 사물이 저마다 쓰임새가 있어서 만들어졌는데, 하물며 그 모든 만물을 다스려 돌보도록 부름을 받은 인간이 목적이 없이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 이 그림을 한번 보십시오. 제가 세 가지 질문을 여러분에게 드리겠습니다. 좋아 보입니까? 예뻐 보입니까? 탁월해 보입니까? 대답을 못 하실 겁니다. 저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인지 알아야 그 쓰임새에 어울릴만한 품질을 가졌는지 측정할 것이고, 그때 비로소 좋은지, 나쁜지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저것이 무엇이겠습니까? 2003년도에 발사되고 있는 미 콜롬비아 우주선 사진입니다. 이 우주선은 250만 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져 있고, 방금 전에 본 노란 조각 사진은 커다란 로켓 옆에 붙어있는 연료통입니다. 발사될 때 로켓에서 단열재가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가방 크기만 한 단열재가 떨어져 나와서 왼쪽 날개를 치고 지나갔지만 몰랐습니다. 16일 동안 우주를 비행하고 귀환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망가진 부분이 그때 엄청난 압력의 공기와 충돌하면서 문제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쪽에 공기가 들어오면서 마찰열에 의해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장렬하게 폭발합니다. 떨어진 잔해들의 40%를 수거해서 모아 놓은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인간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아름다운지 추한지, 옳은지 그른지, 어떤 인생이 훌륭한 인생인가를 결정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쓸모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인지를 알아야만 그 다음에 평가를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의미는 그를 지으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규정될 수 있습니다. 그의 의도에 따라 결국 내가 누구인지 결정이 되고, 존재의 가치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에 있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나는 비로소 존엄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은 선한 일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인간을 만드신 그분이 그렇게 지정하셨습니다.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은 행복하게 하시고, 그 목적을 거스르고 사는 사람들은 불행하게끔 규칙을 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번 태어나는 인류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II. 두 번 태어나는 인류
A. 첫 창조
첫 번째 창조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된 사람이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오늘날과 같이 발달한 인류가 되었을 수는 있으나 인간 아닌 것이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첫 사람은 흙으로 빚으사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므로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흙으로 육체를 삼으시고 영혼은 직접 창조하셔서 영혼과 육체가 결합된 인간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체는 지상의 자원을 필요로 하고 영혼은 천상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당연히 그를 만드신 분은 땅에 있는 보이는 존재가 아니오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를 가짐으로써 그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무엇이고 무엇을 위해서 사람으로 만들어졌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모두 불멸하도록 창조되었지만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써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벌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일시에 시각을 잃어서 사물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신호 대기 중 운전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눈이 뿌옇게 되면서 시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끔찍한 일은 이후에 일어날 일의 서곡에 불과했습니다. 전염병이었습니다. 온 도시의 사람들에게 전염되면서 시력을 잃는 질병에 걸리게 되어서, 도시에 사는 사람 모두가 눈먼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의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입니다. 307 쪽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눈먼 사람에게 말하라. 너는 자유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는다. 그는 길 한 가운데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 겁에 질려 있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다… 사실 합리적인 미로에 사는 것과 도시라는 미쳐버린 미로로 나아가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보십시오. 사람들이 미친 듯이 자유를 갈구하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눈먼 사람들은 묶여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눈이 먼 채 달려가겠습니까? 그들은 눈이 보이다가 눈이 멀게 된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있었던 때도 사실은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모든 도시의 사람들이 앞을 볼 수 없는 소경이 되었을 때 의사의 아내가 유일하게 전염되지 않고 사물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눈에 비친 비이성적인 눈먼 자들의 도시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먼 자들은 무서워하지 않는데,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눈이 먼 광경을 지켜보는 이 여자는 새파랗게 공포에 질립니다. 자기가 무엇인지를 규정해주는 근거를 인간은 잃어버렸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하는 그 관계를 상실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의 이유와 인생의 가치와 삶의 목적도 규정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유를 찾아서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거기에는 더 큰 속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속박된 채로 살 수도 없고 자유를 찾아서 뛰쳐나갈 수도 없는 가련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류 역사의 철학은 그에 대한 대답을 세계 안에서 찾으려는 노력이었고, 종교는 그 대답을 보이는 세계의 밖에서 찾을 수 있다는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자기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인데 그분을 떠난 인간이 어디서 자기를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어디서 자기 존재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엇이라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쾌락과 오락에 빠져서 취한 듯이 인생을 살 것인가? 성찰하고 인생에 대해 생각하고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갈 길을 찾을 것인가? 여기에 우리의 인생의 문제가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평범하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인생살이에 긴급동의와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을 멈추고 이 설교를 들으십시오.
B. 재창조
하나님의 속박은 자유를 위한 배려였습니다. 당신과의 관계를 벗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인간에게 명령을 내리시고 그 안에서 행동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죄를 짓고 타락했습니다. 왜 어른들이 볼 수 있는 영화를 아이들은 못 보게 하는지 어릴 때 저는 궁금했습니다. 왜 어른들은 해도 되는 일을 아이들에게는 못 하게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들의 행동을 규율하지 않으면 결국 자유를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자율할 수 있는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규칙을 세우고 그 규칙이 인간으로 창조되는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는 속박을 받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1996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여성 사업가를 납치해서 카드를 뺏고 800만 원의 현금을 인출하고, 구덩이를 판 후에 이 여자를 집어넣고 돈이 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더 이상 돈이 없다고 말하자 묻어버린, 이른바 지존파 사건입니다. 아홉 명의 젊은이가 모여 폭력 조직을 만들고 자금 마련을 위해 저지른 범죄였습니다. 평범한 청년들이 왜 그런 일을 했겠습니까? 영화 한 편이 그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해 봄, 전설적인 양은이파의 두목이었던 조양은 씨의 생애를 그린 '보스'라는 영화가 상영되었습니다. 이 청년들은 그 영화를 수없이 보고 조직폭력 세계를 동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본성을 자극했고 상상을 현실로 옮긴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자유 속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율할 수 없다면 말입니다. 인간의 본성이 하나님을 떠나 악하게 살고 싶어 하는데 속박이 없이 어떻게 자유를 누릴 수 있겠으며, 자율이 없는데 어떻게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죄 때문에 눈이 멀어 자기를 규정할 수 없고, 존엄한 가치도 알지 못하는데, 그런 인간을 자유롭게 살도록 내버려 둔다면 어떻게 그가 자력으로 행복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행복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행복하도록 이 세상에 태어났고,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추호의 양보도 없으십니다. 그런데 죄인은 본성적으로 행복이신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로마서 6장 7절이 말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그렇기에 인간의 본성은 자신에 의한 수리가 아니라 밖으로부터의 전적인 재창조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았으나 그렇게 살 수 없는 인간을 고쳐 다시 그 목적대로 살 수 있도록 재창조되어야 했으니,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인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을 때 하나님이 죽었던 영혼을 살리십니다. 죽었던 영혼을 살리십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성령을 부어 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선한 본성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원래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기쁨으로 받아들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첫 창조의 인류는 아담을 머리로 하고 재창조의 인류는 예수를 머리로 하는데, 아담의 후손은 피로 연결되고 예수의 후손은 영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새 본성을 신자에게 주십니다. 이로써 땅에 매였던 인간의 마음은 하늘로 상승하게 되고 하늘로 상승한 마음은 다시 하강하면서 모든 사물들의 질서가 무엇인지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죄로부터 떠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렇듯 재창조된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세상을 다시 향한다면 구원받지 못했던 옛날의 가치를 따라 살게 되고 그때의 형편은 예전에 하나님을 몰랐을 때보다 훨씬 더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도대체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상과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세상을 바라보던 견해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갖게 된 사람입니다. 예전에 살았던 삶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고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선의로 대하면서 살게 된 사람입니다. 그 삶의 중심은 진리와 사랑입니다.
III.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신자는 용서받고 재창조된 사람입니다. 그의 몸은 여전히 세상에 속해 있지만 그의 영은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랑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 나라를 진리와 사랑으로 정복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하셨던 그 계명을 다시 이어받으면서 영적으로 그런 삶을 살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 세상의 질서에 항거하고,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세상답게 되도록 변혁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바로 거기에 있고 결코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A. 순응적 그리스도인
첫 번째 생각해 볼 사람은 순응적인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 항거하고 변혁하는 대신 타락한 문화에서 꿀 빨아먹으며 사는 환경 순응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명목상의 신자일 것입니다. 교인이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내면은 결코 신자가 아닙니다. 마음은 여전히 세상 사람이고 단지 자신이 기독교 문화 속에서 산다는 것으로 위안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고 예수 믿는 것조차 자기가 행복하기 위해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행복이 아닌 하나님이 지정하지 않은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당연히 그는 경건의 비밀을 모릅니다. 그분 때문에 행복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고방식과 삶이 여전히 육적인 목표에 매여 있습니다. 그가 가장 원하는 바는 개인적인 평안과 물질의 풍요함입니다. 죄에 지는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람은 구원받은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늘 죄에 지는 삶을 살아갑니다. 머리로는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혹은 그분의 사랑을 한때 경험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멀리멀리 떠났고 생명과 성령의 법을 거스르며 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 생명의 법이 내면의 세계에서 거의 중단된 사람입니다.
2005년 애슐리 메디슨 데이터 유출 사건이 터졌을 때 3천만 명이 가입한 불륜 사이트의 회원의 모든 내역이 공개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엄청나게 많은 종교인과 종교 지도자들이 그 명단 속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기자가 물었더니 그 담당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교, 아무 상관 없습니다. 하루에 한 번 기도하든 세 번 기도하던, 기도의 횟수와 사이트를 이용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죄에 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내적으로는 거듭났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결코 믿음과 순종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죄도 이길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들은 우리 신자들을 향해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 말씀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신자가 정말 세상의 빛입니까? 모든 신자가 진짜 세상의 빛입니까? 자신 있게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심지어 이 세상 어두움에 어두움을 보태는 그리스도인도 과연 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윤리적으로 타락하고 도덕의 수준이 불신자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정말 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무지몽매하기 이를 데 없고 무당만도 못한 신관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이 과연 빛일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가슴에 손을 얹고 결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저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할 때 이것이 예수 믿는 모든 사람을 향한 말이라는 해석에 추호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겠습니까?
여기서 "너희"란 무엇이겠습니까? 문맥을 보면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5장 3절부터 산상수훈을 설교하십니다. 입을 열어 첫 번째 선포하신 산상수훈 설교의 시작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구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등의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인가 소유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적인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그런 내면의 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예수가 말씀하고 싶었던 너희입니다. '너희는 그런 사람이 되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빛이 된 사람은 자신이 빛이 되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고 빛이 된 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현재적인 통치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천국 백성의 인격적인 특징입니다.
명목상의 교인이든 죄에 지고 있는 신자이든 문화적으로만 그리스도인입니다. 교회에서 유아 세례를 받고, 기독교식으로 결혼을 하고,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한다고 해서 그가 빛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락한 이 세상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여전히 개인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번영입니다. 이 두 가지만 있으면 나머지는 모두 장식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독교 문화의 분위기에 사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는데, 여기에는 예수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끔하시는 이유는 참된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직접 참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성공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렇게 죽으셔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참사람이 되기도 싫고,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도 싫은데 행복하고는 싶습니다. 그래서 빠지는 곳이 멋 부리는-멋 방, 먹는 방-먹 방, 벗을 만나서 수다 떠는-벗 방, 좋은 곳을 찾아 놀러 다니는-갈 방 등등입니다. 수많은 방들이 사람의 마음을 잡아끕니다. 저는 이것이 국가가 공인해 준 현대인들의 신종 마약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왜 존재하는지, 자신의 존재에 품격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불빛을 보고 날아드는 곤충들처럼 이방 저방 날아다니면서 고귀하고 존귀한 인간의 형상을 수치스럽게 하고 소중한 인생의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멋 부릴 수 없을 만큼 늙고,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허락하지 않고, 좋은 곳을 찾아갈 수 있는 힘이 다리에 없을 때는 무슨 즐거움으로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치매로 사랑하는 사람도 알아볼 수 없고, 덕을 쌓고 살지 않아 특별히 자기를 아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쓸쓸히 싸구려 양로원에 버려진다면 무슨 재미로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생각하면서 살지 않으면 불행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B. 변혁적 그리스도인
다음은 변혁적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의 사조와 문화를 모두 외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꿀 빨아먹듯이 매달리지도 않습니다. 모든 세상의 사조와 문화를 엄밀하게 비판적으로 수용합니다. 주님의 뜻에 거스르는 것과 싸우고 그것을 변혁시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다운 세계를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경건을 추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고 싶어 합니다. 그분을 삶의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참 인간으로 살았던 최고의 모범으로 여깁니다. 이런 참된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것은 힘의 모범이 아니라, 모범의 힘입니다. 참 아름다운 삶을 삶으로써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몇 푼 안 되는 돈, 한 줌 밖에 안되는 아름다움과 혹은 권세를 휘두르면서 사람들의 가슴에 생채기를 내지 않습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하나님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기를 갈망합니다. 모든 사랑을 사랑하지만, 그 사람들 안에 있는 악은 철저히 미워합니다. 개인적으로 선한 삶을 살 뿐만 아니라 사회악의 구조적인 모순에 저항하고 변혁하는 보람에 삽니다. 현대 문화 속에 살고 그중 어떤 것들은 즐기지만 그것에 취해서 자기의 소명을 잃어버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영적으로 부요한 삶을 살면서 그 모든 것들을 무기 삼아 전투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상적 전투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바라보는 비성경적인 사상과 싸우며, 우리들이 믿는 참된 사상이 정말 더 아름답고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싸웁니다. 부도덕과 비윤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윤리적인 삶을 살기 위해 전투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가치를 휴지처럼 버릴 수 있고, 모든 사람들이 내다 버린 소중한 것을 가슴에 끌어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 속에도 역시 악한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에 매일 매일 말씀 앞에서 짝퉁인 자신과 명품인 자신 사이에서 투쟁을 경험합니다. 자신의 힘으로 충분히 이길 수 없기에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기도하며 윤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이 모든 싸움이 단지 사상과 윤리의 싸움일 뿐만 아니라 신령한 전투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오,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의 어두운 주관자들과 하늘에 대한 것임을 알기 때문에 그는 신령한 전투에 자신을 바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의 자원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임하는 하늘의 신령한 자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매일 기도하고 매일 말씀으로 매일 하나님 사랑으로 자기를 이기며 하늘나라의 무기를 공급받으며 이 싸움을 치르는 것입니다.
거듭난 신자는 선한 삶을 삶으로써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다른 삶을 꿈꾸는 것만으로도 불행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고 행복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수많은 앞서간 인류가 행복이 무지개와 같다고 노래했습니다. 여기 있다고 해서 달려가 보면 사실은 신기루 불과했던 것입니다. 진리는 신기루를 걷어내고 참된 것을 보게 하는 힘을 주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깨달은 바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행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할 때 행복해지고자 하는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불행에 이르게 됩니다.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려 할 때 인간 내면세계는 온 정신이 찢겨 분열이 일어나고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에너지를 쏟게 되어 자기 이외에 누구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조차 사랑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게 되는, 이것이 대부분의 인간이 떨어지는 불행의 상황입니다. 이 전쟁은 너무 냉혹하기 때문에 낭만과 감성으로 치를 수 있는 전쟁이 아닙니다. 있는 것을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잘 훈련되고 무기를 잘 갖춘 사람, 싸우고자 하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사람, 그런 싸움에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이길 수 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 요세프스를 인용하면서 로마가 번성했던 시절의 국가적인 번성과 군인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로마의 힘은 군대에 있었다. 로마 군인에게 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전투였고, 전투는 피 흘리는 훈련이었다" 이렇게 전사적인 삶을 살 때에 로마는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검을 가지십시오. 진리를 소유하십시오. 은혜의 힘으로 무장하십시오. 거기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친교의 삶을 사십시오. 사랑으로 세상을 끌어안고 진리의 빛으로 어두운 사람들을 인도하는 안내자가 되는 것, 거기에 우리의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Ⅳ.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 때문에 타락하여 세상이 망가졌습니다. 다시 그런 세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 마음을 녹이는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고 우리의 육신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은 세상의 거짓된 물결과 싸워 이기게 하기 위함입니다. 죽어도 하나님 앞에 기념이 될만한 인생을 사십시오. 인생은 잠깐이면 지나가는 것입니다. 썩고 멸망할 세상에서 썩어질 가치를 따라 산다면 세상과 함께 망할 것이지만, 그 세상에서 불멸의 가치를 따라 산다면 그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당신의 결혼식에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말고, 장례식에 올 사람들이 훨씬 많은 삶을 살아가십시오.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후에 여러분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더 많은 삶을 살아가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5 (2021.01.31._주일오전)
5.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전 2:11)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목적 없이 달려가는 현대인의 삶을 보십시오.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승자는 없습니다. 경쟁에서 이겨도 그것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곤고합니다. 인간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만큼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가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내가 느끼는 보람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 것인가? 혹시 나중에 더 큰 후회를 가져오지는 않을까? 세월이 흘러가도 뉘우치지 않을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을 향해 가고 있는가? 우리는 묻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II.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하는 질문에 답하여야 할 차례입니다. 전도자가 제시하는 모든 것은 이미 그가 누려 본 것이었습니다. 경험적으로 사람들이 이런 것을 누리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다 누렸고, 그 결과 그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고 그는 선언합니다.
A. 인생의 허무함
제일 먼저 그는 인생의 허무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가 앞에서 제시하고 있는 많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든 사람들이 인간 행복을 위한 조건이라고 받아들여지는 것들이었습니다. 웃음, 기쁨, 사업의 번영, 재산의 증가, 쾌락, 욕망의 만족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자가 2장 1절부터 10절까지 거론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3천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전도자가 추구했던 것들을 현대인들도 그대로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손에 넣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자는 선각자로서 사람이 하는 일과 애쓰고 수고하는 모든 일이 헛되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허공을 움켜쥐고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무익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11 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후에 내가 생각해 본즉 ...” 즉, 깊은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갈 때는 깨닫지 못했던 진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냥 매일 눈 뜨면서 평상시와 같이 살아가는 방식으로는 절대 깨달을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뜻을 세우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생각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물의 눈에 보이는 것에 속지 않고, 그 이면을 통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연관관계를 찾아내서 그것이 과연 마지막에 우리의 인생에 무엇을 줄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본즉, 그것도 즉시가 아니라 그 후였습니다. 즐거움에 들떠 있는 마음으로는 판단 내릴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 모든 것들이 지나간 다음에 자신이 정신을 차리고 면밀하게 자기를 성찰해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며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 했습니다. 자, 사람의 손으로 바람을 잡을 수 있습니까? 움켜쥔들 빈 주먹 외에 거기에 무엇이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물을 움켜쥘 수 있겠습니까? 움켜쥔다면 그 물이 어디에 남아 있겠습니까? 결국 바람을 움켜쥐는 것은 물을 움켜쥐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하게 주먹을 쥐고 붙잡으려고 하지만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붙잡히지 않을 것들을 위해서 한 번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의 불꽃을 태우며 살았던 것입니다. 결국 전도자가 깨달은 것은 “... 해 아래에서 무익한 것이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태양이 비치는 이 지상에서 그것들은 유익하게 보였고 굉장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진지하게 성찰해 보니 그것들은 모두 무익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익한"이라는 말은 아무 유익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덧없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지나가는 세상의 번영과 즐거움과 같은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인생의 의미를 규정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잣집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요? 그래서 좋은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요? 그리고 잘 먹고 잘살았습니다. 그래서요? 죽었습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힘들게 살았고 죽을 때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다는 것입니까?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인데 힘들게 살았던, 편안하게 살았던 가고 없는 사람들인데, 죽은 다음에 그 사람의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웃으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기쁜 일이 있으면 잠시 근심이 사라지고 생각까지 바뀌게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모시고 있었던 담임목사님은 60년대에 미국 유학을 하셨습니다. 가족이 네 식구인데 당신은 공부를 하겠다고 가족들을 두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당연히 가족들의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방학이 되면 돌 짐을 져서 돈을 벌어 6개월 치 생활비를 가족에게 보내고, 6개월 치 학비를 마련하며 공부를 하셨습니다. 열심히 공부를 하던 어느 날 어깨가 점점 부어오르고 통증이 너무 심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나는 결국은 유학을 못 하고 끝내겠구나 하고 학교에 있는 의사에게 갔더니 극심한 스트레스로 생긴 병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약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유학 생활을 접고 오려고 마음먹으니까 열심히 공부할 필요도 없고 노동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다니면서 경멸했던 학생들 중에 매일 모여서 탁구를 치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힘들게 유학을 와서 공부를 해야지 왜 놀까 생각했던 학생들이었는데 거기를 가보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유학은 계속 못 할 것이고, 언제든지 돌아갈 사람이니까 한번 가서 탁구 치는 것을 보셨다고 합니다. 미국에 와서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깔깔거리면서 웃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학업을 포기하고 매일 가서 탁구를 구경하다가 당신도 쳐보고 싶어서 탁구를 치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학에서 돌아오려고 했는데 통증이 사라지면서 부은 어깨가 내려앉으면서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거의 80세 넘어서까지 탁구를 치셨는데, 잘 치셨습니다. 한 번의 웃음,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기쁨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자살하려고 벼랑 끝에 선 사람이 코미디를 보고 배꼽을 잡고 웃는다면, 다 웃은 후에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웃음과 기쁨, 이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사업의 번영은 또 어떻습니까? 사회적 지위를 높여 주고, 경제적으로 삶을 풍족하게 해서 결핍으로 인한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 주지 않습니까? 재산의 증가는 자신이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줍니다. 마음을 선하게 먹으면 어려운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는 혜택을 줄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또 넉넉히 소비할 수 있는 자유도 좋지 않습니까. 그것이 왜 나쁜 것입니까? 더욱이 전도자는 특별한 부자였을 것입니다. 자신이 노래하는 남녀와 처첩들을 거느렸다고 했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집안에 자기를 위해 음악과 춤으로 오락을 해서 기쁘게 할 일종의 기쁨조를 둔 것입니다. 웬만한 부자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일부다처제가 허락된 사회이기는 했지만, 처첩들을 거느렸다고 하니 그가 못 가져본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는 욕망하는 모든 것을 가져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어디쯤에서 멈추었겠습니까? 그것도 보람을 안겨주면서 멈추었겠습니까?
모든 것을 실제로 가져보았으나 전도자는 마음의 공허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이솝우화에 나오는 신포도 이야기처럼 갖지도 못할 것을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그까짓 것 필요 없다고 말하는 허세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모든 것을 가졌고 욕망하는 모든 것을 누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로는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공허를 느꼈던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많은 것을 누리지만 그럴수록 인간은 무언가로부터 철저히 소외된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 한 곳에 채워지지 않는 빈 잔 같은 것을 두셔서 소외된 외로움을 가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 빈 잔을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더 많은 오락거리를 찾고, 더 많은 재물과 명예와 부를 찾아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으로 채워집니까?
명예를 찾고 있으십니까? 누가 그 명예를 기억합니까? 어느 정부 부처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기자가 지난번 장관님이 누구였냐고 물었더니 어떤 간부가 여러 해 전이라 생각이 나지 않는다고 했답니다. 어떻게 간부가 지난번 장관 이름도 모르냐고 했더니, 우리 부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신문에 오르내리고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아 봐야 이삼 년 아니 넉넉잡고 칠팔 년 안에 새까맣게 잊힙니다. 다시 신문에 나면 그런 사람이 있었지라고 할 정도입니다.
무엇인가를 많이 가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것으로 사지 못할 것이 결국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데 그것으로써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습니다. 나는 부자가 되기로 결심했는데 왜냐하면 최소한 나는 갖고 싶은 것을 못 갖는 속박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아마 욕망의 크기를 잘 조절하셔야 될 것입니다. 내버려 두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몸부림치며 찾아본들 또 허무한 것입니다. 한때 대통령을 지냈다고 나라의 고관대작을 지냈다고 여기저기 세우는 기념비도 10년이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이 허물고 부수고 묻어버립니다. 이 세상에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입니까?
결국 모든 것을 보았고, 모든 것을 가졌고, 원하는 모든 것을 누렸지만 마지막 전도자가 도달한 결론은 마음에 깊은 공허였습니다. 당연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그 빈 잔은 오직 하나님 아니면 채워지지 않도록 하나님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B. 의미를 따라 삶
자,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후회 없이 살 수 있겠습니까? 의미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땅에 있지만, 그 존재의 의미는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부여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이 땅에만 매여 있을 때에는 그 인생의 의미는 자기 욕망에 따라 부여되는데 여기에서 인간의 불행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무엇을 욕망하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버려도 좋은 것들입니까? 아니면 오늘 밤에 여러분들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 취해져도 여전히 부끄러움 없이 그것을 욕망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입니까? 욕망은 시간에 따라 변합니다. 가끔 집안을 정리하면 쓸모없는 물건들이 많이 나옵니다. 한때는 그것 없으면 못 살 것 같아서 비싼 돈 주고 샀는데 이제는 버리지도 못하고 갖고 있지도 못하는 처치 곤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변덕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변덕을 부린 것입니다. 어쩌면 그때도 별로 필요 없는 것인데 그냥 눈의 안목에 사고 싶었던 것입니다. 채워도 또 다른 욕망이 생기니 인간의 욕망은 무저갱과 같아서 만족도 순간일 뿐 그것은 끊임없이 또 다른 것들로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욕망을 좇아 사는 것은 허무한 것이기에 정신은 끊임없이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보람은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깨닫고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알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말입니다. 전도서 3장 12절과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결국 모든 것을 누려도 허무해지는 마음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 잠시 있을 것과 영원히 있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잠시 있는 것을 위해서 영원한 것을 생각하고, 영원한 것 아래서 잠시 있을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들은 우리 삶의 의미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행복하기를 그렇게 원하면서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첫 번째, 정신적인 행복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생의 행복을 지상적이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만족에서만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충분히 가졌고 이제 더 이상 나에게는 지상적인 행복과 육체적인 만족이 필요없다고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인간이 갈 길을 찾지 못할 때에 정신은 방황하게 되고, 그 방황을 소화해서 성숙의 기회로 삼을 수 없을 때 인간은 오락과 쾌락에 탐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정신은 영원히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불행과 불만족이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경제적인 풍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모든 자신의 불행과 불만족의 원인이라면 부자가 되어 경제적인 여유가 있게 되면 평안이 찾아오고 안식이 찾아와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을 물질과 세상으로부터의 만족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뜨거운 뙤약볕이 쬐는 여름날, 먼 길에 땀을 흘린 목마른 나그네가 마시는 진한 설탕물 한 대접과 같습니다. 얼음을 띄운 설탕물이라 한 모금 마실 때는 목을 시원하게 하지만 단맛이 뱃속에 들어가면, 그것이 더 많은 수분을 부를 때 이전보다 더 큰 갈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원한 설탕물은 사실 그에게 더 큰 목마름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행복 지수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욕망분에 소유한 것을 말합니다. 발달한 시대가 되어서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부(富)를 누립니다. 어느 사회학자가 대략 이십 년 전을 기준으로 이야기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중산층이 누리는 물질생활이 17세기의 왕족이 누리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마 18세기의 왕족 수준 정도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세월이 갈수록 행복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국민소득이 제일 높은 나라는 노르웨이일 것입니다. 1인당 GNP가 10만 6천 불입니다. 4인 가족이면 일 년 수입이 5억, 6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행복 지수는 그런 나라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경제 최강을 자랑하는 중국이나 미국에서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가지고 있는 것은 많은데 욕망도 함께 증가하기 때문에 결국 전체적인 숫자는 작은 숫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아프리카의 아직 발전하지 못한 나라, 옛 러시아에 속했던 아직 덜 발전한 나라, 그것도 도시가 아닌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 지수가 뛰어나게 높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여성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감자만 캐도 김태희라고 합니다. 그 아름다운 여성들의 대한 인터뷰가 TV에 한 번 방영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자본주의를 공부하면서 한번 보신 적이 있을 텐데 농사를 짓고 너무 소박합니다. 한 남자에게 시집가서 사랑하고 자녀들을 낳고 화려한 선물이 아니라 남편이 밭에서 일하다가 길가에서 꺾어 온 꽃 한 송이, 들풀 한 포기에 감격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네입니다. 그런 동네는 물질적인 소유는 작은데 욕망의 크기가 아주 작아서 전체적인 행복 지수가 매우 높아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해서 숫자를 크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욕망이 더 빨리 증가하면 많이 누릴수록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을 어떻게 적절히 통제하고 그런 것들에 내 마음을 뺏기지 않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행복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욕망은 염려를 부릅니다. 마음과 정신을 갉아먹고 다른 사람을 돌아볼 여유가 없게 만듭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만물을 착한 뜻으로 돌보는 데서 인간은 행복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사람으로 태어난 목적을 알고 선하고 아름답게 사는 데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쉽지 않지만, 그것이 선물입니다. 그 길이 쉽지 않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고, 전도자가 말한 것처럼 후에 생각해야 하고 자기를 돌아보면서, 자기가 완전한 인간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런 행복 자체를 모르니 모든 마음의 신경이 물질과 이 세상의 번영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그 욕망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니 그 삶이 어찌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의 이유는 그런 정신적인 행복을 알지만 그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신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한 번 경험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욕망에 굴복하며 이기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때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한 오십 년 전쯤 우리 청소년 시절에 온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노래하나가 있었습니다. 고향의 푸른 잔디라는 노래인데, 나중에 한번 들어 보세요. 그린 그린 그래스 홈(Green, Green Grass of Home), 톰 존스가 노래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아니면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그 가수에게서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정말 쉽지 않던 시절인데 비디오라기보다는 영사기로 봤습니다. 그런데 대중가요 가수가 윗도리를 훤하게 드러내고 화려한 옷을 입고 전자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데 그 목소리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데 뜨거운 눈물이 주룩 쏟아지는 것입니다. 문학작품에서만 느끼는 엄숙함이 그 가수에게서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지금 읽어도 가슴이 뭉클한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감옥에 사형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일기처럼 적은 것을 노래한 것입니다.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탄 기차에서 내릴 때 고향의 푸른 잔디가 파랗게 돋아난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자신이 너무 좋아하는 엄마와 너무나 사랑하는 여자, 금발의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메리가 자기를 만나기 위해서 달려오는 꿈을 꿨습니다. 비록 집은 낡아서 페인트칠도 벗겨져 있지만, 고향은 너무 정겨웠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애인, 가족과 해후하는 아름다운 광경의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사형 집행할 시간이 되어 교도관에 의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내용의 가사입니다. 사형을 앞두고 있는 죄수가 그리는 고향의 푸른 잔디, 사랑하는 엄마와 가족들이 기차역으로 달려오고, 사랑하는 연인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자기를 만나기 위해 저 멀리서 금발을 휘날리면서 달려오고 있을 때, 그는 두 팔을 벌리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평안입니다. 그런 평안이 진짜 사람들이 돌아가고 싶은 평화입니다. 왜 사형까지 당하게 되었는지 노래는 그것까지 얘기를 하지 않아서 모릅니다. 억울하게 사형을 당할 수도 있고, 범죄에 연루되었을 수도 있고, 그때나 지금이나 사형 언도는 아무에게나 내리지 않으니 아마 커다란 범죄에 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꿈을 꾸면서 이 죄수는 무엇을 생각했겠습니까? 내가 잠시 도시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고, 이런저런 일에 연루되어 고향에서 누릴 수 없었던 물질적인 부를 누리고 쾌락을 즐겼다 한들 이것이 마지막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전도자가 했던 고백처럼 “...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고향 집을 그리워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정신에서 행복을 찾아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욕망에 굴복하며 여전히 이기적인 삶을 살아간다면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따스한 행복의 기억과 올바른 행복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적으로 도저히 그것을 따라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 용어로 바꾸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안식이 얼마나 달콤한지를 경험했습니다. 세상 모든 것보다 더 귀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분에게서 진정한 안식을 누렸고, 그분에게서만 참된 평화를 누렸습니다.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죄악이 나를 삼키고 욕망이 나를 뒤덮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는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 욕망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고집하며 살 때 그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 3대 로또가 있습니다. 슈퍼볼, 파워볼, 메가밀리언이라는 로또입니다. 실제로 몇 년 전에 파워볼에 한 사람이 1조 9천억 원에 당첨되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사건이죠? 세금을 다 빼도 대략 1조 2천억 정도 받았을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입니다. 언젠가 미국의 방송에서 역대에 어마어마한 당첨금을 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를 했는데, 두 가지로 나왔습니다. 당첨금을 타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고, 매우 매우 불행해진 사람들도 있는데 후자가 훨씬 더 많았습니다. 당첨금을 타면 남자들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기가 막힌 차를 사고, 그다음에 집을 바꾸고, 그다음에 아내를 바꿉니다. 그리고 마약 중독, 도박 등등에 빠져서 완전히 노동력을 상실하고, 그다음에는 쫄딱 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의 공식처럼 나온 것인데, 예외도 있습니다.
2016년에 로또가 한국 역사상 최고의 당첨금을 지불했는데 407억이었습니다. 세금을 다 빼고도 317억을 받아 갔는데, 당첨자는 놀랍게도 경찰관이었습니다. 당첨된 사실을 알고도 그 다음 날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해서 일을 보고, 동생과 가족들을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전화로 불러서 317억이 당첨된 복권을 보여주었습니다. 며칠 후 떨리는 마음으로 동생과 함께 은행에 가서 돈을 수령했고, 317억의 돈이 찍힌 통장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슈퍼볼, 파워볼, 메가밀리언에 당첨된 부정적인 당첨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 사람도 똑같이 좋은 차와 집, 별장을 사고 아내를 바꾸는 순서를 밟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동생과 어머니 등 가족들에게 30억을 나눠 주었습니다. 그리고 30억 원은 재단을 만들어서 시골에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많은 선행에 자신의 돈을 쓰고 여전히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결국은 부(富)가 우리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이기심을 버리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1조 9천억을 받은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했습니다. 어마어마한 돈을 기탁해서 재단을 만들고 가난하고 병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에 경찰서가 없어서 주민들이 늘 위협받는 것을 보고 자기 사재를 털어서 경찰서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건물에 자신의 이름을 명명하고 경찰서가 세워져서 모든 주민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그것을 소유할 때 오히려 그의 인생이 빛날 수 있습니다. 탐욕밖에 없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소유할 때 결국 불행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자유와 평안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참된 신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자신의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참된 자유는 일탈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금 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속박받지 않고 사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그런 세상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이 정말 선한 사람들로 가득 차고 아름다운 사람들로 가득 찬 세상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만 논리적으로 맞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모두 맞짝으로 지으셨습니다. 천상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 하늘과 땅,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하늘의 사랑과 땅의 사랑, 이렇게 맞짝으로 지으셨습니다. 선함과 아름다움은 바로 하나님 안에 있는 선함과 아름다움을 이 세상에서 반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옛날에 이 전도자가 그랬던 것처럼 웃고, 떠들고, 기뻐하고, 사업을 늘리고, 재산을 불려 가고, 동산을 짓고 포도원을 만들고 처첩들을 거느리고 양 떼와 소 떼의 소유를 더 많이 가지면서 살 때 자기를 성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나중에 모든 것이 헛되다고 탄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결국 거기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야 참 자신으로 돌아가서 거짓 자기로 살아왔던 자신을 살펴보면서 그때 행했던 많은 것들이 헛된 것들이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바깥에서 자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과 성찰이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받은 은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 사랑으로써 지금 있는 나보다 앞으로 더 나은 내가 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각박한 현실을 살면서도 사랑과 영혼을 갈망하고 끊임없이 주님과 대화함으로써 참된 자기를 찾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행복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님이 “잘했다. 이제 너의 살아갈 길을 다 달려갔으니 이제 내게 와서 쉬어라." 할 때에 그 소식이 가장 기쁜 소식이 되도록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번 보시겠습니까? 동전이 하나 있습니다. 저것은 한 오십 년 전의 동전인데 아주 지저분합니다. 50원이라는 돈의 가치를 생각하면 별로 만지고 싶지 않은 물건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이렇게 합니다. 닦아내는 거죠. 그리고 계속해서 닦습니다. 이렇게 여덟 번을 특수 약품으로 세척하면, 마지막에는 방금 찍어낸 돈 보다 더 반짝거리는 동전으로 바뀝니다. 저것은 이미 있는 돈이니까 실감이 좀 덜 납니다. 그런데 1세기, 2세기, 3세기 된 돈을 저렇게 바꿔 놓을 수 있는데, 복원 비용이 어마어마합니다. 말하자면 세상의 욕심과 허무한 것에 매여 사는 우리의 모습은 바로 50년 전의 저 동전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닦으시면 저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동전으로 바뀝니다. 그게 바로 우리 안에서 참된 우리가 아닌 것들을 덜어내는 과정인데 이것을 우리끼리 아는 말로 성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자기만족을 구하는 이기적인 삶으로서는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자신을 참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기심보다는 사랑 안에서, 시간보다는 영원 안에서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려고 애쓰며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려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면 이제 곁길로 가지 말고 그 행복을 따라야 하는 것이니 여러분들이 신앙을 고백했을 때 행복이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고백했던 사람들입니다. 다른 길 가지 말고 그 길에서 행복한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에 대한 최고의 답입니다.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당장 좋아도 자기를 해롭게 할 것이 무엇인지, 당장은 힘들어도 결국은 자기를 행복하게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진리는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게 만들어 주고, 가짜인 자기와 참된 자기 사이에 대화를 통해 거짓된 자기를 버리고 참된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십시오. 인생의 행복이 또 다른 데 있지 않음을 아십시오. 삶의 의미를 정립하십시오. 은혜를 받으십시오.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 될지 깊이 생각하고 오늘 주님을 붙드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인간으로 산다는 것6 (2021.02.07._주일오전)
6.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사 44:21)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난 두 주일 간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으며,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인류가 서로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더욱 아름답고 선하게 가꾸게 하시려고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신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원래 그 자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 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원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려놓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서 이웃과 함께 행복을 누리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인간은 이 일에 이바지함으로써만 행복을 누릴 수 있으니 부르심대로 살기 위해서는 명목상의 신자나 혹은 죄에 늘 지기만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그 자리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의 허무함을 직시하고 세속적인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가치 있는 삶,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경고하고 책망하신 후에 위로하시는 부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 이것은 하나님이 함부로 부리신다는 뜻에서 낮추어 보는 종이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뜻입니다. "...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지으신 것처럼 우리를 지었습니다. "...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으니 잊는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기억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잊혀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런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 주님의 마음에 잊혀질 수 없는 사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닌 것을 기억하고 세속적인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창조된 인간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며 의미 있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II.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러면 도대체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 개인의 '인생의 목적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나의 인생을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A. 영원한 목적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는데 첫째는 영원한 목적입니다. 나의 영원한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번에서 '인생에 제일 가는 목적이 무엇이냐?' 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나의 인생의 목적입니다. 이것은 지상 생애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언젠가 우리의 삶의 무대의 막이 내릴 것입니다. 죽음의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때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때를 탄식하며 기다립니다. 이 세상에서 인생이 끝나고 영원히 하나님을 완전하게 누릴 수 있는 천국에 이를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기독교에 귀의한다고 하는 것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갖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간 것이오, 그리고 영혼이 영원히 사는 그 나라가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불멸하도록 창조된 우리의 영혼은 잠시 후에 불사의 몸을 입게 될 것이고, 부활한 후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굳게 믿습니다. 거기서 매 순간 새롭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 때문에 그분을 더욱 많이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무엇일까요? 먹고, 입고, 마시는 것일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데 기쁨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생명수가에서 건들거리며 과일이나 따 먹는 것이 천국의 행복이라면 굳이 천국을 사모해야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서 우리들이 누리는 진정한 기쁨이 무엇일까요? 바로 거기서 매 순간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면 볼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지성으로 하나님을 관상함으로써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의 완전한 성품을 알게 될 것이고 그때마다 이전에는 도달해 본 적이 없는 최고의 행복에 도달하게 될 것이니 매 순간이 지고(至高)의 행복의 연속이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나라는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한 목적입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창조하셨습니다. 당신 때문에 행복한 자가 되게 하려고 창조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 소망은 이 세상 사는 동안에는 매우 유용하지만 천국에 이른 후에는 이것들이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바랄 필요가 없이 이미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믿던 바를 보게 될 것이고 소망하던 바가 성취된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사랑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고 매 순간 예전에 도달하지 못한 그런 사랑의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 이 일이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전서 13장 12절-13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지상에서 신자의 삶이 무엇일까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을 연습하는 시간입니다. 영원한 행복의 그림자를 누리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주님을 몰랐을 때 우리는 이 세상이 나를 즐겁게 하면 즐거웠고 슬프게 하면 슬펐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안식할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영원한 목적을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지상 생활은 끊임없이 이런 저런 시련을 만납니다.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이 모든 것을 뛰어 넘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연습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보이는 이 세상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로 삼습니다.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을 때 미움과 원망속에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미움과 원망 대신 이 세상의 것보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련과 고난은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훌륭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활게 켜지지 않고는 아름다운 음색을 낼 수 없는 바이올린의 현같이 고난과 시련은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그것을 통해서 시련과 고난이 없었더라면 발견하지 못했을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선하심을 발견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연습하기 때문에 시련이 많으나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나는 이 일을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영원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다른 사람이 아닌 나로 지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으로 태어났더라면 결코 살 수 없을 나의 독특한 인생을 살며 하나님의 아름다운 찬송을 부르라고 하나님이 나를 나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때문에 즐거운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을 상실한 사람이니, 하나님을 버리고 이 세상에서 무엇을 소유한들 그 사람이 하나님만큼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B. 잠세적 목적
마지막 두 번째는 잠세적(暫世的)인 목적입니다. 즉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죽는 날까지만 해당되는 목적이 있는데, 이것을 잠세적이라고 합니다. 잠시 할 때 '잠(暫)', 세상 할 때 '세(世)'입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있는 동안에 우리들이 가진 목적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인간이 따라가야 할 선이 무엇이고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이미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이 정하신 인생의 목적을 이루어 가며 살아야 합니다. 거기서 이웃과 함께 하나님을 기뻐하며 즐거운 삶을 살도록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행복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서 나를 나로 지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 때문에 누리는 행복을 떠나서는 결코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없으니 인간의 불행이 바로 그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 보려고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순이니 행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신데, 행복의 근원을 버리고 행복해지기를 원하니, 이것은 사실 허깨비와 다름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없이 행복해지려고 하다가 불행해 집니다. 불행해지기 위해서 불행의 길을 걷는 사람이 없으니 모든 사람의 본성이 행복해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하나님은 나뿐 아니라 모든 인간을 선한 일을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도록 그리스도 예수께 돌아와 구원을 받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지 않고 악하게 살면서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를 칼로 찌르며 건강해지기를 원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말합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하나님의 선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물론 비록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이기적인 욕망에 덜 사로잡힌 사람, 이성으로만이라도 인간의 참된 도리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사람은 덜 악하게 살 것입니다. 그리고 덜 추하게 살 것입니다. 어느 정도의 평안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악인처럼 무의미한 삶을 살고 방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멸시하고 대적합니다. 그러니 로마서 8장 7절에서 이른바와 같이 그는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생각 없이 살거나 두려워하면서 살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이 지상 생애 동안에 자신의 인생에서 영원한 의미를 발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즐기고 좋아하던 모든 것들은 결국 그를 버리게 될 것이고 죽음이 다가온 후 그는 홀로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과 같이 두려움 속에 이 세상을 떠나야 될 것입니다.
나는 개별적인 인간입니다. 인간이지만 다른 사람과 누구와도 같지 않은 독특한 존재입니다. 예전에도 나는 없었고 이후로도 없을 것이니 나는 영원히 딱 한 번만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살고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또 다시 반복되지 않을 독특한 존재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존재의 목적은 다른 사람의 존재의 목적과는 중첩될 수 없는 독특한 것입니다. 만약에 중첩될 수 있다면 나는 태어나도 되고 안 태어나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해도 좋고 안 해도 되는 일을 하신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쓸모없는 일을 하신 것이기 때문에 그분이 완전한 하나님이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을 이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태어나는 것이 더 기뻤기 때문에, 그리고 꼭 있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와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세계를 더욱 아름답게 하시기 위해 나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나 때문에 이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고, 나 때문에 이웃이 조금 더 행복해지고, 나 때문에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결국 인생의 의미와 목적은 어떤 대상과 어떤 관계를 갖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의 존재의 의미가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대상과 어떤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다른 사람 아닌 나로 창조하셨을까요? 나의 고유한 창조의 목적, 내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크게 다섯 가지 대상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입니다. 결국 나라고 하는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을 떠나서 발견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 때문에 이 세상에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나의 인생에 근원을 알 수 있고, 그분이 어떤 뜻을 가지고 나를 창조 하셨는지 깨달음으로서 나의 인생의 목적을 터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인류 중 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매우 독특한 사랑받는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내가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자기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매우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을 각자 자기로 태어나게 하셨으니 그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 사랑받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들이 존엄한 존재인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의해 나만의 독특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로 창조하신 것은 바로 내가 하나님과 누구도 가져본 적이 없는 독특한 관계를 가지면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기뻐하게 하기 위해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사람으로, 나로 여기 태어난 이유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 태어난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이 가장 행복한 자리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가족입니다. 우리는 가족 없이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비록 엄마가 나를 헛간에서 몰래 낳았다고 할지라도 그 땐 결국 나의 가족이 있었던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우리는 사람 속에서 태어나고, 그 처음 사람들이 바로 가족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배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가장 먼저 보여주어야 할 사회가 가정입니다. 그런데 '나'라고 하는 각 사람들이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멀리 멀리 떠났는데 누가 우리를 위해 온전한 가족이 되어줄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가족으로 살아가는 삶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여러분들 가족의 가슴에 비쳐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박수갈채를 받고 높은 지위에 올라도 가족의 마음에 피멍이 들게 했으면 여러분들은 쓸모없는 사람들입니다. 가족과 올바른 관계를 맺어 자신도 행복하고 가족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여러분들을 나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남의 가족이 아니라 먼저 여러분들의 가족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족을 온전히 사랑하는 과정은 여러분 자신이 진정한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교회입니다. 이전에 나는 인간으로서 사는 길을 알지 못했습니다. 알았더라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충분히 행복했더라면 무엇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했겠습니까?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결코 예수를 믿지 않고 여전히 나를 임금 삼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는 영적으로 그리스도 교회에 접붙여졌습니다. 한 몸이 됨으로써 자신을 사랑하신 것처럼 또한 자기도 지체들을 사랑하며 살게 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피도 살도 섞이지 않은 모르는 사람들과 섞여서 함께 하나님을 믿으며 거기서 용서를 배우고 사랑을 배웁니다. 비로소 우리는 물이 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의 물이 육신의 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세례의 물로 그리스도 예수의 피를 부어 우리 모두 한 가족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형제들과 함께 진리의 길을 가면서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배웁니다. 이런저런 많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들이 일어나지만 그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웁니다. 신앙 안에서 넘어진 자와 굳건히 서있는 자를 동시에 배우면서 무엇을 본받고 본받지 말아야 될지를 터득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사람이 변절할 때의 불행과 온전히 그분을 사랑할 때의 행복을 함께 배우며 좋은 신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으로 태어난 것은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갖게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 저 교회 떠돌며 수많은 목회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성도들의 가슴을 칼로 긁고 다녔다면 여러분들은 쓰레기 같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인간으로 태어난 참된 보람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를 나로 창조하신 것은 한 사람의 신자로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 창조하신 것이니 그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한 신자로서의 행복은 누려지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다른 사람입니다.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살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과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독특한 하나의 인격적인 주체로 또 다른 주체인 사람들과 만나 그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고 여러분 때문에 그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지고, 아름답지 않던 사람들이 여러분 때문에 티끌 만큼이라도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로, 여러분 자신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가치를 사회적인 지위나 재물의 유무 그리고 미모의 아름다움과 덜 아름다움으로 가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그렇게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신다면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 속에서 차별대우를 받는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신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전심으로 믿고 따르겠습니까? 물론 어떤 사람은 재주가 뛰어나고 어떤 사람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성격을, 어떤 사람은 저런 성격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신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문제는 죄가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씻어내고 정결하고 온전하게 되어지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주신 자연적인 아름다움이 얼마나 눈부신지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설령 여러분들에게 피치 못할 결함이 있다고 합시다. 그 결함 때문에 덜 사랑한다면 그분이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소를 기르던 농가의 이야기가 TV에 방영되었습니다. 송아지가 태어난다고 좋아서 남편과 함께 가서 봤는데 다리 하나가 없는 송아지가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다리 한 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송아지가 살아야 하니까 세 다리로 아주 불안정하게 비척거리며 서서 걷는 연습을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겼는데, 사료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료를 주면 건강한 송아지들이 달려와서 먹고 이 송아지는 따돌림을 당합니다. 심지어 어미 암소도 이 송아지를 머리로 밀어 버리고 발로 찼습니다. 주인이 이 송아지를 끌어안고 우유를 먹이고, 조금 더 크니까 사료를 먹여주었습니다. 사료 먹을 시간이 되면 이 송아지를 별도의 방에서 따로 사료를 주었습니다. 주인이 다리 없는 송아지를 너무 사랑합니다. 주인아줌마가 얼굴을 송아지 뺨에 비비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 송아지를 팔지 않고 영원히 기를 겁니다. 그리고 죽으면 묻어줄 겁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아! 그렇구나. 사람이 선한 마음이 가득 있으면 저런 생각을 갖는구나." 죽을 때까지 사료를 먹였는데 송아지를 묻어 주면 그 사료는 하늘에서 나옵니까, 땅에서 쏟아집니까? 이 송아지 너무 가엾고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모자라고 부족하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 여러분들을 더 사랑한다고 믿어지지 않으십니까? 부족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현실을 이기면서 이웃을 위해 살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남에게 신세만 지도록 태어난 사람도 없고, 남을 도와만 주게 태어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서로 돕고 서로에게 봉사하도록 하나님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는 자연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의 세계의 선량한 관리자로 부르셨습니다. 이 자연의 세계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모든 만물이 선하고 행복한 상태를 누리도록 돌보라고 위탁하신 것입니다. 자연을 파괴하고 폭력을 행하고, 탐욕으로 자연의 세계를 병들게 하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나로 인해 자연을 티끌만큼이라도 덜 고통받게 하기 위해, 아니 고통받는 자연을 해방시켜 티끌만큼이라도 행복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나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나 때문에 풀 한 포기라도 내가 태어나지 않는 것보다는 더 행복하게 하기 위해, 나 때문에 나무 서너 그루라도 내가 태어나지 않았던 것보다는 더 즐겁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자연에 대해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것들을 자신의 몸의 일부처럼 생각하며 돌보고 가꾸고, 구르는 돌멩이 하나도 제자리에 놓이고, 아침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벌레 한 마리라도 편안한 생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가족, 교회, 다른 사람, 자연, 이렇게 다섯 대상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기 위해 하나님 나를 다른 사람이 아닌 나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 인생의 목적은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과의 올바른 관계는 이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와의 올바른 관계는 바로 이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고 자연을 돌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로 태어나지 않고 펼쳐진 세상보다는, 내가 나로 태어나서 조금이라도 행복한 세상이 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 나를 나로 창조하셔서 여기에 두신 것입니다. 그렇게 살 때 인간이 가장 행복을 누릴 수 있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내가 사랑한 것은 하나님이지만 그 사랑 때문에 최고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나 자신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 길이 쉽지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늘의 은혜를 주셔서 은혜가 없었더라면 살 수 없는 삶을 살아 가게끔 만들어서 나도 행복하고, 이웃도 행복하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행복하시도록 하기 위해 우리를 이 세상에 나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에게 다른 인생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거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굴러 떨어진 낭떠러지와 같은 곳입니다. 사람들은 달콤한 말로 속삭이고 이 세상의 신기루가 여러분들을 현혹시켜도 따르지 마십시오.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 환상에 불과하니 그 길을 따라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으니 행복해지려다가 불행에 떨어진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다섯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자신으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나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태어나지 않을 독특한 존재로 나 자신의 인생을 살도록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나의 일대기는 아무도 살아본 적이 없는 독특한 일대기가 될 것이며, 그것은 누가 나대신 살아줘도 결코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의미가 될 것입니다. 내 인생은 그래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람으로 보내셨고 예수의 피로 구원하셨습니다. 예전에 몰랐던 인생의 목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날마다 썩고 늙어가는 존재로 살고 있으나 영원한 세상에서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나는 전 세계에 남은 희귀종 중 마지막으로 살아 있는 유일한 개체와 같습니다. 그런 내가 태어난 것도 살아있는 것도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너무 너무 좋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이 사실을 뒤집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하찮게 여기고 자신을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비하하는 것은 자기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깔보는 행위인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그것은 매우 큰 슬픔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으십시오. 나, 이 세상에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너무 좋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것입니다. 가슴이 벅차지 않습니까? 이렇게 날마다 넘어지고 쓰러지며, 날마다 아픈 마음을 부여안고 흐느끼며 불행한 길을 걸어가는 것 같은 내가, 그래도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좋으셨기 때문에 나를 여기에 창조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이것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그렇게 말했으면 너는 틀렸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완전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렇다는데 누가 이것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예쁜 집을 설계하고 그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금은 조금 식었지만 15년, 20년 전에는 건축에 대한 향학열이 불탔었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오는 잡지를 3년 동안 정기구독하면서 교회 이전에 대비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예쁜 집을 짓고는 싶은데, 거기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일주일 정도 수련회는 가고 싶지만 거기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익숙한 내 집이 편하고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훌륭한 인생을 살기 보다는, 덜 훌륭한 나의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흉내 내며 웃기보다는 나는 나만의 인생을 살면서 울고 싶습니다. 거기에 인생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도 화려하게 지은 집이 좋아서 하루쯤은 내 돈을 내고 묵을만하다고 여기지만, 진짜 우리에게 편안한 마음을 주는 것은 우리의 집인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일 때 가장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원래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실 때 주시지 않았던 것들은 덜어내고, 하나님의 주신 것은 다시 온전히 가득 채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내가 되는 것이 나로 태어난 이유입니다. 더욱이 하나님 내가 그렇게 밖에 못 살고 있는데도 그렇게 사랑해 주셨습니다. 가끔 나 자신에게 자책하는 마음이 들 때 그 송아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님 제가 한쪽 다리 없이 태어난 송아지 같은 존재입니다. 그 농부가 자기 송아지를 그렇게 아꼈던 것처럼 나의 약점과 결점이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매 순간 나를 사랑하셔서 자기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면서 내가 나를 떠나서 어디로 가겠습니까? 내가 어디로 도망가면 내가 따라오지 못할 피난처가 있어서 숨을 수 있겠습니까? 또 숨을 수 있다면 도망간 나는 누구이며, 따라온 나는 누구겠습니까? 이도저도 내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하나님 앞에서 내가 나인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백 년 전에 나라를 구한 위인도 아니고, 백 년 전에 전 세계의 어마어마한 부를 움켜쥔 갑부도 아니고, 수많은 사람의 박수갈채를 받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예술가도 아닙니다. 정말 특별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지만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더 좋은 세상이기에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것입니다. 나의 독특성이 나의 존재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에 관심 없고, 나를 나로 창조하신 하나님 앞에서 행복한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다리 한 개가 없이 태어난 송아지 같은 우리에게 아들까지 주셨는데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다시 한번 여러분들이 왜 태어났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자존감을 갖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누구도 여러분들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니 여러분 자신이 여러분의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인 것입니다. 다시 새롭게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7 (2021.02.14._주일오전)
7. 무엇을 위한 직업인가?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살전 4:11-12)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우리 모두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직업 활동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이 질문은 인간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아주 중요한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단적 종말론에 물들어 생활이 무질서해진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상에 물들자 말은 많고, 일은 안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권면합니다. “또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에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사도의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입 다물고 조용히, 직접 자기 손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의무에서 이탈해 말만 많아진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기 손으로 일하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임박한 종말론에 취해서 직업은 세상일이라는 생각으로 내팽개치고 전도자라고 하면서 그릇된 교리를 가르치고 다니는 말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종말은 임박했지만, 밥은 먹어야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택한 방법이 예수 믿는 사람 중 너그러운 부자에게 의존하여, 그의 동정심으로 먹고살았던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을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남을 의존해서 사는 생활은 부끄러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첫 번째 원리는 나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후에 역사에 길이 인용되는 중요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는 것입니다. 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이것을 가문의 명언처럼 사용했습니다. 노동을 착취하는 데 사용한 것입니다. 정말로 어려울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살 힘을 얻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도우며 살게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게을러 일하지 않으면서 남의 자비심을 의지하며 사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남에게 도움을 받아서 먹는 값진 성찬보다 자신이 노력해서 먹는 소박한 밥상이 훨씬 보람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II. 무엇을 위한 직업인가?
자, 이러한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위한 직업인가?’라는 주제로 데려갑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노동은 인간에게 주어진 아주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그리고 이 특권은 직업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실행됩니다. 인생의 보람은 직업을 통해 나를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A. 직업의 동기
직업의 동기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직업을 갖는 가장 중요한 동기 중 하나는 기본적으로 생계를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서 직업은 벌어 먹고살기 위해서 먼저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세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고상한 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가장 기본적인 것을 솔직히 이야기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여기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직업을 가져라, 일을 해라, 니가 직접 노동을 해라, 왜냐하면 그래야 궁핍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궁핍하지 않기 위해서 직업 활동을 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번 돈으로 육체의 필요한 것을 조달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일을 위한 염려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행을 택한 사람이 아니라면 미래에 육체의 필요를 준비할 것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직업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거주할 집, 그리고 인간다운 교육을 받을 여건과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여유, 이 모든 것들을 위해 우린 직업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직업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생계를 위한 것이 직업이라고 한다면 이미 돈을 많이 벌어놓은 사람들이 왜 계속 직업 활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부모로부터 많은 돈은 물려받거나 자신이 이미 상당한 돈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직업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무기력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최근 어느 돈 많은 회사의 사주가 10조가량의 재산 중 5조 원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언을 해서 세간의 관심을 끈 적이 있습니다. 10조 원이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서 설교 준비를 하면서 계산을 해봤습니다. 대략 일 년에 1.5% 정도 이자를 받는다고 가정하고, 이분의 나이가 50세쯤 되고 40년 정도 더 산다고 가정하면 10조를 하루에 얼마쯤 쓸 수 있을까 계산해보았습니다. 하루에 12억씩 써야지 다 쓸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루에 12억을 쓸 수 있겠습니까? 돈을 뭉텅이로 다른 누군가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 한, 좋은 차를 사는 것도 한두 번이지 수백 대의 차를 어떻게 보관하며, 또 집도 한 두 채지 어떻게 그것을 다 관리하겠습니까? 결론적으로 하루에 12억은 다 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냥 사람들에게 1억씩 나누어 주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정상적으로 물건과 서비스를 사서 소비하는 방식으로 12억을 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돈을 법니다. UN 본부 건물을 기증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록펠러는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업가였습니다. 항상 지난해의 액수를 갱신하며 최고의 수입을 올렸지만, 기자가 연말에 물을 때마다 내년에는 올해보다 좀 더 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경제학에서 노동 공급 곡선이라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애덤 스미스의 원리에 의하면 가격이 높으면 공급이 늘어나고, 가격이 아주 높으면 공급이 아주 늘어납니다. 그래서 결국 수요 공급 곡선은 가격과 비례해서 올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노동 공급 곡선은 활처럼 휘게 됩니다. 어느 정도 임금이 올라가면 노동의 공급도 늘어나지만, 그 시점이 지나면 오히려 노동하겠다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유명한 원리입니다. 왜 그런지는 경제학적으로 상당한 설명이 필요하니까 진도를 계속 나가겠습니다. 결국은 사람들이 단순히 돈 때문에 직업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성취입니다.
한때 연예인으로서 잘 나가던 사람이 있었는데, 정말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연예인을 계속했어도 결코 실패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한 길을 가던 사람인데, 스캔들도 없고 아무 이유도 없이 어느 한순간에 텔레비전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나타났습니다. 왜 인기 절정에서 갑자기 사라졌느냐고 물었더니, 조그만 회사를 시작했는데 경영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했습니다. 머릿속으로 구상한 일을 팀을 짜서 함께 일하고, 그 계획대로 잘 되어서 사업이 성공했을 때의 성취감은 텔레비전에 나와서 수많은 사람의 박수갈채를 받고, 가끔 광고를 찍고 수입을 얻을 때의 기쁨보다 훨씬 더 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취감입니다. 심리학자 매슬로우가 이야기하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충족되었기 때문에 오는 행복감입니다. 그런 성취감은 우리의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만약에 그런 성취감과 보람이 없다면 누가 계속해서 충성스럽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보람이 없는 일에 자기의 신명을 바칠 수 있겠습니까? 보람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보람 있다고만 생각하면 안 되고, 자신도 보람 있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보람은 객관과 주관 사이에 걸쳐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의 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직업이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 성취감은 웅장하지도 않고, 전체적이지도 않습니다. 또 하나의 높은 수준의 자기만족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렇게 매일 매일 자기 뜻대로 성취되는 것을 보면서 말할 수 없이 기쁨을 느끼고, 그것이 경영의 기쁨이라고 칩시다.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마지막에 이루고자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때로는 직업 활동이 성취감을 넘어서 한 사람의 야망에 의해서 지배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야망은 이루고자 하는 큰 뜻이고 거기에는 도덕적 개념이 배제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선하고 훌륭해야만 야망이 아니라 무조건 이루고자 하는 간절하고 큰 뜻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야망이 되는 것입니다. 야망은 당연히 다른 경쟁자와의 관계에서 승리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 야망으로 재력과 권력, 지위를 추구해서 궁극적으로 자기의 생각이 실현되는 기쁨을 누리고,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는 힘과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갖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때때로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여 돈을 벌기도 합니다. 이것은 꿈이 아니라 야망에 의해 지배되었기 때문입니다. 꿈과 야망은 다른 것입니다. 꿈은 반드시 도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도덕적인 의미를 배제한 욕망이 야망이기 때문에 꿈은 야망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꿈이 아니라 야망에 의해 지배되었을 때, 이것은 단순한 소비 욕구 이상의 욕망이 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야망이 무엇인지는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했던 옛 조상들의 욕구를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창세기 11장 4절은 바벨탑 사건을 다루며 이렇게 말합니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온 땅이 충만하라고 명하셨으니, 그러기 위해서는 흩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흩어지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높은 탑을 건설하고 하늘에 닿게 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온 백성들이 그 탑을 중심으로 모여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노래 한 사람은 당연히 밑에서 탑을 쌓기 위해서 흙을 파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 탑을 총지휘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야망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이 하는 것은 크기의 차이는 있지만, 직업을 통해서 이 바벨탑을 쌓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꿈과 야망이 다릅니다. 꿈은 그것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라는 인간을 세상에 보내신 계획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순수하게 나다워지고, 모든 사람도 나 때문에 행복하게 되는 사회를 그리는 것이 바로 꿈입니다. 그 꿈을 위해서 배우고, 일하고, 돈을 모으고, 더 나은 재능을 활용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세상을 망가트리고 고장이 나게 할 것인데, 내 손에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세상을 펴고, 고치고, 치료하고, 온전하게 하면서 사는 것이 성경이 그리고 있는 인간의 이상이고, 인간의 이상적인 직업 활동 없이는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가 "군자(君子), 즉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수기안인(修己安人) 이니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까?"라고 제자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또 "수기안인(修己安人) 이니라"고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 여기서 수(修)는 '닦는다, 수양한다'는 뜻이고, 기(己)는 자기 자신입니다. 안(安)은 '편안하다'이고, 인(人)은 당연히 사람입니다. 직역을 하면 자기를 갈고닦으며 사람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다른 곳에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라고도 합니다. 이때 치(治)는 다스린다는 뜻으로, 자기를 잘 닦아 가꾸고 사람들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治人)은 권력을 휘둘러 사람을 억압하고 폭압적으로 대하지 않고, 질서에 어긋나 있는 이웃들을 질서에 알맞은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이상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공부를 해야 합니다. 공부하기 위해서 인간은 태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부하지 않고는 수기(修己)할 수 없고, 수기(修己)할 수 없는 사람은 치인(治人)할 수 없습니다. 수기(修己)가 안되는 사람은 제가(齊家)를 할 수 없고, 치국(治國)을 할 수 없고, 평천하(平天下)는 물 건너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완성하는 데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상이 이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정결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가고, 주님의 말씀과 은혜로 질서에 어긋난 모든 사람을 잘 움직여서 제자리에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이웃도 행복하고,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시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주는 이상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인생의 본분입니다. 그리고 직업은 이런 이상을 구체화하기 위한 아주 확실한 사회활동인 것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벌어먹기 위해서 직업 활동을 한다는 것은 너무 낮은 수준입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듭니다. 그래서 신자는 늘 질문을 해야 합니다. '어떻게 경쟁에서 이기고 승리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경쟁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내 직업 활동을 통해서 내가 아니었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어떤 뜻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앞으로 이루어 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직업을 가지고 살 것인가는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적합한 직업을 찾고 거기에 자신을 쏟을 수 있다는 것은, 자기를 실현하고 이 세상을 하나님의 질서로 돌려놓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이런 창조의 목적과 자기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확고한 확신과 구체적으로 그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자기 직업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위가 높고, 수입이 많고, 일은 조금하고 대단한 대우를 받고, 엄청난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자리를 모든 사람이 갖고 싶어 하고 부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직업을 재단하지 않습니다. 거듭난 가치관으로 내 직업을 통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의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해야 합니다. 야망은 정확히 자신의 욕심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펼침으로 만족을 얻습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사람들의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야망은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하지 않는 자기 욕망이므로 그가 가는 곳이 결코 선한 곳일 리가 없는 것입니다.
직업의 동기는 무엇이어야겠습니까? 이것은 이 세상에서 자신의 직업 활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이 직업 활동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고, 또 다른 사람들을 온전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탐욕과 불의, 억압과 무질서로 망가진 이 세상을 자신의 신령한 직업 활동으로 조금이라도 고치며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세속적인 정신과 야망으로 직업에 참여하고, 한없는 탐욕과 불의로 인생을 살아가고, 부정한 방법으로 경쟁에서 이기려 하고,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남에게 승리하려는 이 모든 무질서와 불법은 결국 자기 자신을 먼저 망가뜨린 후에 이웃을 망가뜨리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으로 창조하신 목적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삶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확정해야 합니다. 정말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전에 불신자였던 시절에 우리는 더 많은 부를 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런 것처럼 더 높은 지위, 보다 더 나은 지위를 원했습니다. 자신의 만족과 지위의 향상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돈뿐만 아니라 명성도 얻고 싶었고, 많은 사람을 지배할 힘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들은 그런 모든 세상적인 욕심으로부터 벗어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야망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 사람이 어찌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잘 알려진 어느 연예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연예계 생활을 시작하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목표를 가졌다고 합니다. 스물여섯 살까지 20억을 모으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고 인기를 얻었습니다. 드디어 스물여섯 살이 되었을 때 20억이 넘는 돈을 모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느낌이 말할 수 없이 허무했다고 합니다. 그는 불신자였는데도 그것을 느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의 야망입니다. 인간답게 살아야 할 경제적인 조건은 우리에게 꼭 필요합니다. 어느 날 보험회사 직원이 보험에 가입하라며 저를 설득했습니다. 저는 굳이 보험 가입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데, 그분이 평생 무욕의 삶을 살았던 한 분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분이 평생 욕심 없는 삶을 살아서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말년에 암에 걸려서 사망했을 때는 병원비가 8천만 원이 나왔습니다, 결국, 본인은 그 돈을 갚을 수가 없어서 돈 많은 사람이 대납해주었다고 합니다. 마지막 결론으로 왜 죽으면서까지 폐를 끼치냐는 말에 뭐라고 변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목사님도 죽을 때 누구한테 폐 끼치지 말고 가입하라며 설득했습니다. 설득에 실패해서 가입은 안 했지만, 그 말은 굉장히 가슴에 와닿아서 남에게 폐는 끼치지 말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현재 필요한 것뿐만 아니라 미래에 예기치 않은 일에 대비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있는 것은 결코 탐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채워지고 난 다음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더 많은 소비를 위해서, 더 많은 쾌락을 얻을 수단으로 돈을 벌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렇지 않고 단지 성취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 그 일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렇게 많이 성취한 다음, 그 마지막 끝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의 허무함에 대해서 야고보서 4장 13절과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이것은 곧 사라질 인간으로서 허무를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하던 일을 모두 그만둘지라도 계속될 의미를 찾아서 살라는 것입니다. 자,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데려와야겠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아멘, 주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일생을 주님과 함께 행복하게 살았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야망에 의해서 직업 활동을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일 죽을지라도 후회 없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실을 깨닫고 직업의 동기를 올바로 하기를 바랍니다.
B. 직업과 소명
마지막 두 번째는 직업과 소명입니다. 종교개혁과 함께 커다란 충격이 유럽 세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직업이라는 주제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었습니다. 그때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직업은 세상 일이고, 예배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직업 활동은 땅의 일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하늘의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땅의 것은 하늘의 것과 비교될 수 없다고, 두 개의 영역을 상하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중세의 계급제도에도 정확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사회의 계급을 네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제일 위에 로마 교황청이 있고, 그 아래 사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제 아래 수도사가 있고, 그다음에 속인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사농공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계급적 질서로 보던 인간관을 수평적인 직업관으로 보게 되는 놀라운 충격이 종교개혁을 통해 구체화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관점은 종교개혁 시대 마틴 루터 한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400여 년 전, 12세기의 아시시의 프란시스(Franciso de Assisi) 같은 사람에게서 시도된 바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회를 수직적 계급으로 여기던 직업관을 바꾸어서 생각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고유한 부르심을 받아 섬기는 수평적인 직업관으로 보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제일 위에 교황이 있고, 사제가 있고, 수도사가 있고, 속인들이 있었는데, 위로 쌓아 올렸던 것들을 옆으로 펼쳐 버린 것입니다. 차마 교황까지는 수평으로 펼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그랬다면 이단으로 찍혀서 화형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은 예외로 하나님 아래 있다 치고 나머지 사제, 수도사, 사농공상에 종사하는 속인들, 모두 영역이 다를 뿐 각자의 영역에서 수평적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섬기는 사람들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르네상스의 인간관에 종자 씨가 된 것입니다. 당시 프레데리코 2세도 이런 사상을 가지고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르네상스의 태동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직업관이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시대로 넘어오면서 직업은 각자 하나님의 소명을 따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직업은 보케이션(vocation)인데, 보카치오(vocatio) '부름, 부르다'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셔서 거기 있게 하신 것이 직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직업을 운명으로 여기라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재능으로 어떤 직업을 섬길 때, 그것은 하나님이 불러서 거기에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사하고, 농사짓고, 기술자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과, 사제로 살아가는 삶 사이에 직업 때문에 인간의 우열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혁명적인, 유럽 전체의 질서를 뒤흔들어 놓는 새로운 사고였습니다.
창조하실 때 아름다운 세계는 인간의 죄로 망가졌습니다. 직업은 노동을 통해 그 망가진 땅을 고치는 것입니다. 모든 직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다시 선하고, 다시 아름답게 가꾸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출근을 하는 영국의 국회의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국사의 골치 아픈 일로 밤새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아침이면 집 앞에 대기한 커다란 검은 승용차를 타고 국회로 출근을 합니다. 의회로 가는 길에, 같은 시각 늘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환경미화원이었습니다. 그는 단 하루 즐겁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늘 노래를 부르며, 콧노래를 부르며 그는 아주 즐겁게 골목을 쓸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국회의원이 가다가 기사에게 차를 멈추게 하고 창문을 열고 인사를 하며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이 골목을 쓰레질하는 청소부이고, 나는 대영제국의 국회의원입니다." "나는 단 하루도 행복하게 출근한 적이 없는데, 당신은 단 하루도 행복하지 않은 날이 없으니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 청소가 말했습니다. "의원님, 제가 당신 집골목을 쓸고 있는 청소부로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한 번도 이 동네 주민을 위한 청소부라고 생각하며 쓰레질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한 모퉁이를 정화하고 있는 사람으로, 하나님 나를 이곳의 청소부로 보내셨습니다."
관점의 차이입니다. 직업 활동을 통해 주신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힘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데 자부심을 느끼고 일하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야망은 끊임없이 말씀과 성령에 의해 정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야망이 아닌 사랑으로써 재능을 따라 기쁘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야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야망을 이루게 되면 하나님과 거래하겠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캄캄한 밤 외딴 시골의 비닐하우스에서 도박판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10여 명 정도가 모여서 열심히 화투를 치고 있었고 돈다발이 오고 갔습니다. 새벽녘의 되었을 때 게임은 끝났고, 한 사람이 판 돈을 싹 쓸어버린 것입니다. 다행히 거기에 모인 도박꾼들 중에 비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깨끗이 손을 털며 "자네가 오늘 운이 참 좋군. 나는 오늘 진짜 운이 없는 날이니 다음에 보세."하고 10여 명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최후의 승자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잠깐 앉게. 내가 항상 돈을 딴 게 아니라 운이 좋아서 많이 땄는데 어떻게 자네들을 그냥 돌려보내겠나."하고 돈다발을 한 개씩 나누어 주는 것을 노름판에서 개평이라고 합니다. 자기가 가진 야망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그분께 개평 정도는 드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신앙을 이용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더러운 것은 받지 않으십니다.
삶의 목적 자체가 정화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마태복음 6장 33절은 천둥소리처럼 다가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세상에 어느 공간도 하나님이 창조하시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어느 영역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영역도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아도 되는 부분은 없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의 총리였고, 20세기 3대 칼빈주의자 중 한 사람인 아브라함 카이퍼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에도 고정된 법칙을 따라 질료들에게 힘을 행사하는 주권 영역이 있듯이 개인, 가정, 학문, 사회, 교회 생활에도 저마다의 생활 규칙에 순종하며 그 수장에게 복종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살아가는 전 영역 가운데 만물을 지배하는 주권자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다″라고 주장하실 수 없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 Abraham Kuyper, A Centennial Reader(1998), 467, 488 그래서 모든 영역에서 주님이 그 영역의 주인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직업 활동을 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망을 버리고 세속적인 동기를 버리면 여러분들을 부르는 직업들이 정말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순수한 동기로 직업에 뛰어드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사람들이 상상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하나님은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영역을 직업 활동으로 정복해서 반역을 그치고 만물의 중심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 직업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높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전에는 탐욕과 야망 그리고 내 뜻을 이루고 나의 만족을 위해서 직업을 구했고, 심지어 생계와 더 많은 재산과 권력을 위해 때론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하며 직업 활동을 했습니다. 그것이 예전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직업의 의미가 새롭게 발견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모두 뜻이 있어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여러분들이 발견하지 못한 특별한 재능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 세계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그런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저도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지런히 충성하다 보면 우리에게 하나님이 묻어 놓은 놀라운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썩을 세상에서 부패할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요? 자신의 직장에서 하나님을 최고의 CEO로 여기는 것입니다. 인사권, 연봉작성권, 아니면 고용과 해직의 권한을 동시에 모두 가지고 있는 전지전능한 CEO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십니까, 그러면 사업장에서 사장이 되지 말고 부사장 정도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이 내 사업의 사장님이라면 이 사업을 기뻐하실 것인가,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기를 원하실까, 고민하면서 살아야 직업을 통해서 죄짓고 악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열렬하게 직업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독립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간절한 기도 속에서 주어지는 직업을 붙드십시오. 현재를 보지 말고 미래를 보십시오. 거기서 꿈을 발견할 수 있으면 여러분들이 바로 그 직업을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붙들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위대한 모험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물려받은 유산 없고 든든히 밀어주는 뒷 배경이 없어도,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니 내 직업에도 주님이 함께해주시는 동행자가 되시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놀라운 일들이 우리를 위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직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님이 어떻게 동행하고, 어떻게 내 인생을 통해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가실지 기대하면서 우리의 직업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발견했으니, 직업의 의미도 새로워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분을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거기 계셨더라면 주님이 가지셨을 목표를 가지고, 그 영광을 위해 살아 보십시오. 놀랍게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일을 하나님이 행하실 것입니다.
다니엘은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나라는 죄 때문에 망하고 이방의 나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과 메대와 바사, 여러 번 왕국이 바뀌고 임금들이 바뀌었지만 그가 한결같이 주권자에 의해서 선택을 받았던 것은 유능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리오왕 시절에 그는 모함으로 사자 굴에 갇혔습니다. 왕은 간밤에 비로소 자신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갇혀 있는 굴로 아침 일찍 달려갔습니다. 그는 한 나라의 제왕이었고, 황제와 같은 지위를 누렸습니다. 그런 왕이 다니엘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다니엘은 겉으로 볼 때는 자신의 신하였고 심지어 종이였습니다. 그러나 왕은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법은 없지만 그를 움직이고 있는 진정한 주인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늘 왕국을 섬기고 왕을 보필했습니다. 그리고 그 왕국의 번영을 위해 누구보다도 순전하게 수고했습니다. 자기를 섬기는 신하였지만 다리오왕은 그가 섬기는 대상이 사실은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네가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사자들에게서 능히 너를 구원하셨느냐 하니라” 단지 벌어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직업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분과 운명을 함께 하면서 진취적인 길을 가며 자신도 변화되고 세상도 바꿉니다. 쉽지 않습니다. 쉽지 않기 때문에 주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부족한 자신이 얼마나 모자라는지 깨달으며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참으로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런데도 이 직업의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잊혀지지 않는 감동적인 예화가 있습니다. 에이든 윌슨 토저(Aiden Wilson Tozer)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직업의 고귀함은 직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설득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세 천사를 부르셨습니다. 첫 번째 천사에게는 황금으로 만든 지휘봉을 내리며 "너는 이것으로 저 아래 땅 어느 왕국의 임금 노릇을 하여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천사에게는 주판을 안겨주면서 "너는 저 아래 있는 어느 도시에 가서 최고의 부자가 되어 나를 섬겨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 천사에게는 군인 철모에 막대기 하나를 껴서 주면서 "이것은 똥 푸는 도구다. 너는 저 아래 빈민가로 가서 다른 사람 똥을 푸면서 나를 섬겨라."고 했습니다. 토저의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세 천사가 각각 하나는 황금 홀을 가슴에 품고, 또 하나는 주판을 가슴에 품고, 또 하나는 똥 푸는 도구를 끌어안고 구름 타고 내려올 때 그 느낌이 각각 달랐겠냐는 것입니다. 달랐다면 그것은 천사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소명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아직도 이 소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여러분들은 간절히 직업을 갖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직업을 결정함에 있어서 움직일 수 없는 기준이 되었던 것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직업을 가지려고 하는지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데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청춘의 황금기라는 뜻입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는 흘러갑니다. 시간은 인간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흘러가고 흘러가면서 여러분에게는 직업을 가질 기회와 확률이 점점 줄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세속적인 직업의 기준을 내려놓고, 무엇을 위해 내가 직업 활동을 해야 하는지 신성한 소명감을 가져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십시오. 반드시 직업을 주실 것입니다. 직업을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왜 거기에 있습니까? 좀더 나은 연봉을 위해서, 적게 일하고 많이 받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효용 가치보다 훨씬 큰 대우를 받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공정의 원칙에 위배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깨끗이 거절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젊은 날에 속히 직업을 취하고, 거기서 주님과 동행하는 흥미진진한 삶을 살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직업은 양태(樣態)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혼을 하고 안 하고, 직업이 있고 없고, 직업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모든 것은 삶의 한 양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일정한 나이가 되면 그가 누구든지 간에 모두 그 직업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때까지 우리 인생의 양태입니다. 그러면 본질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게 양태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본질을 움켜쥐고 있어야만 양태가 바뀌어도 그것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줄기차게 의미 있는 삶으로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직업은 무엇입니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그리고 왜 그 직업에 종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도와줄까?"라고 물으시면,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달라고 간구하시겠습니까? 그 직업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분명합니까?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까?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간절히, 눈물로 주님을 섬기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으로 부르짖으십시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왜 여러분들에게 직업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얼마를 살든지 자신을 온전히 쏟아부으십시오.
(찬양)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리다
III. 적용과 결론
적어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지구의 한 모퉁이에서 내가 비록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내 직업 때문에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어도 가까이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빛을 발견하고, 그들이 보다 행복한 자리로 돌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여러분들은 어느 회사에 다닐지라도 소속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입니다. 언젠가 여러분들의 인생이 불현듯 막을 내릴 때, 사장은 수없이 바뀌고 퇴직했지만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이 땅에서 살아 있는 동안 너의 직업을 통해 나의 의를 이루기 위해 헌신한 것을 내가 아노라. 이제 무거운 짐을 모두 벗고 주인의 행복에 참여할 지어다." 이렇게 칭찬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8 (2021.02.21._주일오전)
8. 가족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인간으로 태어나서 웃는 것도 가족 안에서 처음 배우고, 슬퍼서 우는 것도 가족 안에서 경험합니다. 결혼하는 모든 사람은 혼자 사는 것보다 행복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결혼을 하는 것이지 불행해지려고 결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나의 가족은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가족 안에서 태어났고 좋든지 싫든지 나의 인생의 목적과 가족의 목적은 함께 하나님 안에서 함께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 잘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함에 있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란 무엇인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족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II. 가족이란 무엇인가?
A. 가족과 인생
그러면 가족이란 무엇일까요? 먼저 가족과 인생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족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서로 뜨겁게 사랑하며 위로받기보다는 상처와 고통을 주는 관계가 가족관계입니다. 더욱이 연일 보도되는 영유아에 대한 학대와 살해, 존속인 부모에 대한 살인사건 등은 가족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파멸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비로소 생겨난 일들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일들이 있었지만,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제야 표면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잠을 자지 않고 보챈다며 세 살배기 아이를 폭행해 숨지게 한 20대 엄마와 외할머니가 붙잡혔습니다. 아이의 몸에서 수많은 멍 자국이 발견됐습니다.『sbs 8시뉴스』 이렇게 수많은 매스컴을 통해 가족들 속에서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삶의 첫 시작은 가족과 함께 시작됩니다. 엄마 아빠에게서 태어나 부모의 사랑과 돌봄을 받고, 형제들에게서도 고임을 받으면서 함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배우기 마련입니다. 바람직한 인성이 좋은 가족관계에서 형성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정의 현실은 정반대인 것 같습니다.
그럼 도대체 가족이란 무엇입니까? 가족이 무엇인지 국어사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이 아마 우리나라에 있는 국어사전 가운데 가장 방대하고 정확한 『고려대한국어대사전』 66쪽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지만 이 정의는 오늘 우리가 탐구하려는 인생에 있어서 가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설명해 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족을 기원과 발생, 목적에 이르기까지 통합적으로 보여줍니다. 창세기 1장 27절과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가족이라는 주제에 대해 최소한 다음 네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외적인 모양이 아니라 내적인 영혼과 우리의 정신의 구조들이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자신의 몸을 빌어 아이가 태어났어도 부모가 학대할 권한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아이를 하나님 대하듯이 해야 된다는 사실은 명확합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는 예외없이 남자와 여자의 생육의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자기의 몸으로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태어난 아이를 보면서 사랑할 본성을 주시고 그 본성을 따라서 아이들을 돌보고 가꾸어 생명을 보존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인간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누구인지, 세계가 무엇인지를 배우면서 아이들은 자라고,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부부가 가족을 이루고, 가족이 민족을 이루고, 민족이 나라를 이루고, 나라가 세계를 이루어 땅끝까지 번성해서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 가정을 주신 본 뜻입니다. 그러므로 땅을 정복하고 다스린다는 것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가 여기 사용된 '다스리다'라는 단어입니다. 결국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머리속에 이미 나라에 대한 질서가 있다는 것이고, 그 질서를 따라 목표를 가지고 나라 전체를 정치하고 운영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목적을 가진 공동체로 가족이 부름을 받고, 나 개인의 인생의 목적은 가족의 인생의 목적과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은 내가 태어난 목적, 가족을 주신 목적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것은 세계로 향하고 있습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가족과 결코 동떨어져서 주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인생의 가치는 가족과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살아가느냐와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가족들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족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가족들이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 하나님의 통치가 가득한 세상이 되게 하는 것, 선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드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가족을 주신 목적입니다. 부모를 통해 사랑을 배우고, 형제를 통해서 서로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알고 의지하고 도우며 살아야 되는지 배우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누가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누가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가정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이런 이상으로부터 멀어져 상처가 많고, 사랑보다 미움을 먼저 배우는 곳이 되었습니다. 이럴 때 가족은 세상에서 내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집단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 하루바삐 가정을 떠나 독립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그가 과연 행복해질 수 있겠습니까? 결국 가정 속에서 어떻게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사랑하고, 자기를 버리고 이타적인 삶을 사는 것에 대해 배우면서 한 인간으로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해져 가는 인간이 또 다른 온전해져 가는 인간과 만남으로써 비교적 온전한 가정을 이루고, 그들에게 자녀가 태어날 때 비교적 온전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를 이기는 많은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터득해야 할 인생의 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즐겨 먹던 번데기에서 나방이 나온다는 것은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번데기에서 나방이 나올 때, 어느 날 달걀을 깨듯이 탁하고 나오는것이 아니라 서서히 서서히 나옵니다. 그리고 나중에 몸의 허리 아래로 번데기 껍질이 매달려 있는데, 나오면서 그것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애달프게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는 동안에 하체가 강해지면서 여물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불쌍하다고 만약에 칼로 찢어서 번데기 껍질을 떼어버리면 날지도 못하고 다리를 질질 끌다가 땅에 엎어져서 죽습니다. 날갯짓을 하면서 하체에 힘이 생기면서 나방의 뒤꽁무니가 여물면서, 어느 순간 자신의 힘으로 껍데기를 벗고 하늘을 날수 있는 나방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이 좋은 것만 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도 그 가족들을 완성해 가는 것입니다. 행복하기 위해 가정을 떠난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결국, 태어나서 부모와의 관계도 올바르게 하지 못하고, 수많은 상처를 부모와 형제들에게 주고, 그리고 가족과 집을 버리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시집을 가고, 혹은 장가를 가서 가족들과 절연을 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그 사람을 배우자로 맞아주는 사람은 하나님입니까? 얼마나 잘 낫길래 그 사람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자기를 모두 받아준다는 것입니까? 그런 사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빨리 눈을 뜨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고, 결국 내 인생에서 짊어져야 할 고독한 실존의 십자가는 나 이외에는 대신 져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빨리 깨닫는 것이 지혜로운 인간입니다.
자녀들과 살다가 지쳐서 너무 힘들어 바람이 났습니다. 그래서 가정과 남편 혹은 아내를 버리고 각자 뛰쳐나가서 행복한 삶을 살겠다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갔습니다. 행복하겠습니까? 행복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가정도 못 이긴 사람이, 그 다음에 이룬 가정과 그 남자는, 혹은 그렇게 만난 여자는 하늘에서 내려왔습니까? 험한 인생을 살고 자기처럼 온갖 상처를 받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멋 모르는 나이에 만나서 맞춰서 살기도 힘든데, 이미 자기가 굳어질 대로 굳어진 채로 만나서 산다고 치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둘 다 죽는 것 아닙니까? 뇌경색으로 마비가 돼서 요양원으로 혼자 들어가든지, 둘 중 하나가 먼저 죽든지, 또 못 살겠다고 지지고 볶다가 헤어지던지, 교통사고로 죽거나 치매가 오던지, 심장마비로 어느 순간에 죽어 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또 경제적으로 어려워져서 먹고 사느니 못 사느니 하며 헤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마지막에는 나 혼자 남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 의탁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것이 가족들을 버리고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아보려고 선택한 결과가 될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모든 이혼을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도저히 성경적인 조건을 충족하고 살 수 없을 때는 이혼할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혼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가족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것은 결코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생의 문제는 고민하면서, 가족들의 문제로 고민은 하십니까? 내가 인생을 잘 사는 것과 내 가족이 잘 사는 것은 함께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나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면 내 인생은 결코 잘 사는 인생이 아니라는 정도의 생각을 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살아온 가족 관계는 그가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B. 인생과 나뉠 수 없음
말씀드리고 싶은 두 번째 요지는 이것이 인생과 나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 개인의 인생은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생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무인도에 있으면 인생이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혼자서 무슨 인생입니까?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셔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가 그분께로부터 왔고, 그래서 그분과의 관계를 알고, 사건은 땅에서 일어나지만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파악하고, 그 의미를 가지고 사람들 속에서 함께 살고, 함께 사는 사람과 내가 어떤 사람과 가정이 되고 싶은 목표를 가집니다. 그것을 위해서 애쓰고, 힘이 모자라기 때문에 은혜를 구하고, 때로는 희생도 합니다. 때로는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의미를 따라 걸어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로마서 11장 36절이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내 가족 안에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살게 하셨습니다. 이는 곧 세상에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 연습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나는 가족들 때문에, 가족들은 나 때문에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이 이 지상에 살아 있는 것이 하나님은 물론 모든 인간과 심지어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를 위해, 다른 사람이 사는 것보다는 더 좋은 삶을 살라고 하나님이 나를 가족의 일원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에 넘치는 가족관계 속에서 인생의 무게를 견디고 감당할 힘을 얻었습니다. 가족이 그 모든 것을 절대로 다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는 입금한 적도 없는데 무제한 인출이 가능한 은행계좌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들이 각자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누가 그들에게 어느 자리에, 어떻게 있어야 된다고 가르쳐 주는 것일까요? 부모로부터 배워야 되는데, 부모로부터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때 고난의 가시밭길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들을 생각해보십시오. 부모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사춘기를 지나고 있습니까? 엄마는 갱년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그런데 자녀들이 갑질을 하고, 툭툭거리고, 행패를 부리고, 골내고, 어떤 의미에서는 투명인간 취급을 당합니다. 낳아서 길러 준 것 밖에 없는데 왜 그러는 것입니까? 그때에 가족이라는 사랑의 계좌에 입금한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왜 수없이 인출만 해서 우리를 괴롭게 하느냐고 말하지 않을 수 있어야 됩니다. 얼마나 힘들면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기를 거치며 이제 겨우 자아에 눈을 뜨면서, 세계가 낯설고 심지어 자기를 낳아준 엄마 도 낯설고,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도 귀찮고, 어딘가에 쏟아 놓을 수 없는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정념들을 부모에게 쏟아 놓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무게를 누가 대신 감당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린 자녀는 아직 모릅니다. 그 때 가족들은 참아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울까 생각하며 그것을 견뎌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자식이 겨우 사람이 될 테니까 참아주는 것입니다. 나도 너무 괴롭고 힘들지만 얼마나 더 힘들까 하고, 그 자식을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식이 부모에게 하는 것 같이 싹수없는 짓을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면 그는 단연코 왕따가 되어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맘 놓고 성질을 부릴 수 있는 곳이 가족 밖에 없는 것입니다.
쇼펜하우어는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귀담아 들을 이야기 한 토막이 있습니다. 그는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누군가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을 공감하는 것은 인간에게 너무 중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통을 받을 때 나 때문이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플까! 나 때문이야.' 라고 말하는 데서 참된 인간성이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야기에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성질을 부리며 못되게 구는 사춘기의 어린 자녀들, 결혼 적령기의 자녀들, 혹은 결혼한 자녀들과 손자들이 와서 힘을 합쳐 힘들게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나도 얼마나 힘든데.'라고 폭발을 한다면 자기완성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끌어안고 '이 아이가 얼마나 아플까!' 하면서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정에서나 가능합니다. 거기서 세월이 지나면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힘든 자기를 돌봐준 부모의 사랑과 가족들의 돌봄이 그 당시에는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지만, 그것이 내가 지금 숨 쉬고 살 수 있는 원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성숙입니다.
젊은 시절에 남자들이 미치도록 일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가족들을 벌어먹여 살리기 위해서 불철주야 일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은 돌보지 않고 자기 일에 미치는 것은 자기가 재미있어서 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을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여자들이 아주 싫어하는 말입니다. 자녀들에게 조금도 공감받지 못합니다. 공감하지 않고 속으로는 거짓말한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해지셔야 합니다. 그냥 거기에 빠져서, 그나마 그것이 인생의 괴로움을 잊어버리는 한 방법이기 때문에 미친 듯이 코 박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무엇이 남겠습니까? 자, 어느 정도 돈을 벌 수도 있고, 못 벌었을 수도 있고, 결국 세월의 흐름에 의해서 회사에서도 밀려나고 , 사업에서도 밀려나서 이제 시간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위를 둘러 보니까 친구들도 별로 없고 자녀들과 어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텔레비젼과 소설 속에 자녀와 부모가 봉고차에 함께 타서 웃으면서 맥주를 나누며 어깨동무 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수십 년 동안 하지 않던 것을 왜 갑자기 하냐는 것입니다. 1층으로 가면 자녀들은 2층으로 올라가고, 보고 싶어서 2층으로 올라가서 말이라도 섞으려고 하면 외투를 입고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마지막에는 아주 고독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세상에 대해서 앙심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마지막 나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열심히 살았을지는 모르겠지만 방향이 틀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외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도 자녀들이 찾아와 주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두 번을 반복할 테니까 잘 들으십시오. "가족은 특별한 타인일 뿐 내가 아니다."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가족도 타인일 뿐 '나'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타인인데 멀리 미국에 사는 얼굴도 모르는 어느 백인 아저씨와는 다르고, 가게에서 만난 아줌마와도 다릅니다. 왜냐하면,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타인은 타인인데, 특별한 타인입니다. 거기까지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아무리 가족들을 사랑해도 그의 인생의 무게를 대신 져 줄 수 없고, 내 인생의 무게도 가족 때문에 가벼워진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너무 사랑하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심지어 돈을 들여서라도 자녀들이 고통을 전혀 겪지 않는 꽃길을 걸어 가게 하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아이들의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고통을 겪을 만큼 겪으면서 자기 실존과 씨름하는 가운데 하늘을 날아갈 수 있는 나방의 날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구도 나누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주고, 아빠가 아무리 유명한 지위를 가지고 있고, 엄마가 재산을 많이 불려서 아이에게 모든 것을 해줘도, 그것으로 인생의 무게가 덜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한 인간으로서 대신 해줄 수는 없지만 그의 친구가 되어서 그가 울고 고통 받을 때에 함께 울어주고, 기다려줄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절대적으로 '나'라는 실존은 고독한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는 고독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등 질 때에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소외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 소외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외시키는 나는 누구이며, 소외감을 느끼는 나는 누구인지 그 둘 사이에도 구분이 안 가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내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모든 것이 흑암 속을 지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으로 감싸준다 하더라도 세상에 대한 낯섦은, 무한한 우주 공간에 먼지처럼 떠있는 내가 소외된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리고 가족들도 이 궁극적인 외로움을 함께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까? 좋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좋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제가 결혼하지 않은 형제 자매들에게 늘 하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결혼해서도 행복하고, 혼자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둘이 만나도 절대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가 헤엄을 칠 수 있어야 누군가를 건져내지, 자기가 자꾸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똑같은 사람을 만나서 손을 잡는다는 것은 더 빨리 죽는 길입니다. 결국 인간은 외로운 존재이고, 세계와 우주로부터 소외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파스칼은 이러한 사실을 진실로 깨달을 때 우리는 미쳐버리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안 미친 것도 미쳐서 안 미쳤다는 것입니다. 영상을 보십시오.
자, 보십시오. 결국에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누구일까요. 내 바깥의 우주도 텅 빈 공간이고, 내 속으로도 끝없이 파고 들어가면 결국 원자핵을 지나서 빈 공간입니다. 어디쯤에 있는 것이 '나'일까요? 복잡해 보이고 우주를 품은 존재 같지만 벌레 한 마리가 사람들의 발에 밟혀 뭉개져 없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코에 겨우 호흡을 가지고 살아가는 벌레 같은 존재입니다. 우주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 무장을 할 필요가 없고, 수중기 한 방울이면 충분할 정도로 아주 연약한 존재에 불과합니다. 밤 하늘에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우주 공간을 보셨습니다 자신이 홀로 고립된 존재임을 느끼지 않습니까.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도대체 저런 나와 무슨 관계가 있으며, 수많은 사람이 손을 맞잡아은들 무한한 우주와 내 안으로 펼쳐지는 무한한 원자 이하의 세계 사이에서 우리의 손잡은 것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자신이 결국은 홀로 고립된 존재,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자신도 자신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이유로 인간으로 태어났을까요? 그리고 왜 지난날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도대체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가족의 손을 놓은 후에 우리는 각자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요? 이 수많은 절규하는 질문들에 대해서 우주는 침묵합니다. "타다닥 탁" 캄캄한 여름밤에 모닥불을 피었습니다. 불이 붙으면서 불꽃이 튑니다. '타다닥 탁' 하면서 하늘로 작은 불꽃 알갱이가 튀어 올라서 구슬처럼 흩어집니다. 공중에 빛으로 머물러 있는 시간이 1초도 안 됩니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 나라는 인간의 존재를 영혼의 관점에서 보면 도대체 내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무슨 차이가 날까요. 블레즈 파스칼은 팡세의 단장 제 194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똑바로 보는 것이 너무 무섭기 때문에 사람들은 관심을 돌립니다. 자신의 존재의 현실을 외면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사에 몰두하고 오락과 유흥에 빠지고, 새로 나온 가전제품과 새로운 스타일의 양복과 장신구 등의 물건에 골몰하며 사람들이 사는 이유는 거기에서 진짜 행복을 느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시무시한 죽음과 영원이라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 잠시 시선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없기 때문에 자꾸 인생을 똑바로 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서워서 인생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산 마지막 결과는, 결국 인생의 무서운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자원이 필요하므로 미친 듯이 노예처럼 일해서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것으로써 매일 매일 망각에 취하듯이 자신 인생의 실존에 대해서 잊어버리며 살다가 어느 날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을 산 사람 곁에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일생을 우리에게 참 인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며 살아오신 존경하는 나의 아버지"라는 자녀들의 찬사는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도 자식들의 인생관이 달라서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 자식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 않았다면 그런 노년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더욱이 자녀들이 훌륭한 부모님들이 그립고, 평생 자기가 어려울 때 붙들어 주고 참아 주었던 것이, 자신도 자식을 낳아서 길러 보니까 얼마나 어렵고 고귀한 희생이었는지 깨달아서 부모가 그리워서 자주 찾아오고, 함께 대화도 나누고, 함께 있어주고 싶어하는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언감생심입니다. 그런 인생은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정말 자신의 인생을 분투하면서 모든 어려움들을 이기며 살아온 사람들만 남는 것입니다.
연어가 모천에서 알을 낳으면 치어가 되어서 태평양까지 헤엄쳐 갑니다. 그리고 다시 모천으로 회귀를 합니다. 우리나라는 남대천으로 회귀해서 올라갑니다. 돌아와 보니까 지형이 다 바뀌고, 공해가 심해졌으며 낚시꾼들의 유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갑자기 폭포가 나오면 거기 바위 덩어리에 몸을 부딪치면서 하늘로 치솟으며 폭포를 거슬러서 모천으로 회귀를 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떠난 어린 치어들 중에 지극히 극소수의 치어들만 모천으로 돌아와서 산란을 하고 죽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비참을 가릴 수가 없다는 것은 명백한 것입니다. 솔로몬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왕이었습니다.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자기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엄청난 행복을 통해서 마지막 깨달은 것은 허무였습니다. 반대로 욥을 생각해보면 가장 비참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도 버림을 받은 것 같았고, 자식들도 한번에 다 죽었고, 재산도 모두 잃어버리고 아내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리라면서 자기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온몸이 욕창으로 인해서 기와로 긁어야 되는 신세가 되었으니 아마 뭉둥병과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욥은 행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극도의 불행을 통해서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결국 인생의 실체는 그토록 허무한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 어떤 것을 모두 소유하더라도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심지어 행복한 가족을 소유해도 그가 저절로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족도 특별한 타인일 뿐 결국 타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때문에 존엄하지만, 인간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며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 인생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때 두 가지 사실을 한꺼번에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비참한 존재면서 동시에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갈 신앙의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신을 존귀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무서워하므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얼마나 비참한지도 모르기 때문에 존귀한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비참한 것은 자신 때문에 비참해진 것이고, 존귀한 것은 하나님 때문에 존귀해진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을 아는 자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존귀한 사람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존엄성은 법이, 국가가, 심지어는 하나님이 나에게 부여해 줌으로써 내가 진짜 존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사유함으로써 주님이 부여하신 그 존엄함이 내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자존감을 잃지 않는 존엄한 존재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우주 공간에서는 티끌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주와 바꿀 수 없는 존귀한 존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나의 존엄성은 아까 영상에서 본 것과 같이 공간의 크기가 아닙니다. 공간의 크기를 가지고 말하자면 우주 안에 있는 나는 지구 끝에 매달려 있는 한 마리의 벌레만도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존엄성은 공간의 크기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나의 사유의 크기에 달린 것입니다. 내가 생각을 넓고 깊게 하나님까지 품으면서 생각하게 될 때 우주가 무한하지만, 나의 존엄성은 이 우주보다 더 커서 우주를 끌어안을 정도의 존엄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결국 나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인생을 해석하면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파스칼이 말한 바와 같이 우주가 나를 파멸시킨다 해도 나는 여전히 우주보다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우주는 나를 파멸시키는 의미를 모르지만, 나는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주공간에 먼지처럼 고립돼 있는 존재인데, 한 부모의 살과 피를 받아서 태어난 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입니까? 그것이 만약에 그렇게 대단한 것이라면 가족들 간의 끔찍한 학대와 폭행, 상처와 미움, 심지어 살인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부모로부터 살과 피를 물려 받았으나 그 살과 피는 사랑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족 관계 안에서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소중하고 존귀하게 여기며, 그들의 고통을 내 탓과 내 잘못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동정심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인간으로써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하나님 앞에서 망가진 죄인이 어떻게 완전한 가족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 그는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개를 불러일으킨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장 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해석하는데, 그것보다는 그냥 육신의 부모와 자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그 사랑으로 멀어지니까 워낙 이기심으로 충만해져서 자기 자식도 소중한 줄 모르고, 자기 부모가 귀한 줄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세례 요한의 선포를 듣고 회개하고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니까, 비로소 완악했던 애비의 마음이 녹아서 자식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딱딱했던 자식의 마음이 녹아 내려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만 가능한 무한한 기대를 가족에게 걸며 자기를 위해 희생을 요구합니다. 자식들이 특히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다 주고 길렀는데, 끊임없이 불만과 원망, 그리고 아무 것도 해주지 않았다며 가족으로부터 받은 많은 사랑은 망각합니다. 그리고 작은 상처 받은 것을 커다란 보화나 되는 것처럼 간직합니다. 그런데 묻고 싶습니다. 자식인 너는 부모를 하나님처럼 대한 적이 있는가? 그런데 왜 하나님만 가능한 기대를 부모에게 하는가? 부모를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모든 것을 바쳐본 적 있는가? 안 했는데 왜 그런 기대를 하냐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네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하나님께 직접 받으라는 것입니다. 딸들이 너무 엄마에게 자꾸 심부름시키니까, 그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들아, 나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딸이란다." 가족은 우리의 이기적인 행복을 위해서 이용해 먹는 집단이 아닙니다. 가족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서로를 완성시켜 주고, 자기도 한 인간으로 하나님 앞에 완성되기 위해 맺어주신 인연입니다.
똑같은 원리가 두 곳에 적용되는데, 한 곳은 가정이고, 한 곳은 교회입니다. 가정에서는 참 사람이 되는 것을 배우고, 교회에서는 참 신자가 되는 것을 배워서, 참 인간이 되면 참 신자가 되어야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신자가 되면 반드시 참다운 인간이 되어서, 각자 다른 육적 가족과 영적 가족 속에서 자라서 결국 하나를 이루는 것입니다. 더 높으신 분으로부터 은혜를 받지 않으면 어찌 그렇게 살 수 있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이 모본을 보고 자라고, 아내와 남편으로 만나 이 모본을 따라 서로 사랑하며, 자녀들에게는 이를 본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살고 사랑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인간인지를 배웁니다. 사랑할 힘이 자신에게 없음을 자각하면서, 자신의 고통보다는 가족들의 슬픔에 마음을 쓰면서, 자신의 인생의 무게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말할 수 없이 인생이 괴로울 때 아주 쉽게 벗어나는 방법 한 가지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너무 삶이 괴로우면 그 상태로 계속 있을 수 없으니까, 자신에게 스스로 말을 하십시오. "잠시 쉬자. 내가 이 고통을 느끼는 것을 잠시 쉬자." 그런데 사실은 휴전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매일 눈 앞에 삶이 전개되고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데 생각처럼 휴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저희 할머니가 가족들이 너무 힘들어할 때 불을 끄고 한 방에서 주무시면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습니다. "얘들아, 이렇게 힘들 때일수록 더 힘들게 살고, 불쌍한 사람들을 생각해 봐라. 그러면 살아갈 용기가 난단다." 그것입니다. 더 고통받는 또 다른 사람에게 잠시 가서 고통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나의 고통이 사라지고, 그의 고통이 들어오면서 나의 고통을 잊게 됩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산 모든 사람은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 아니라, 남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벌어 모은 것을 움켜쥔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던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행복한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어느 날 교회 직원들을 모아 놓고, 작년 한 해에 누군가에게 쉽게 잊힐 수 없는 큰 감동을 준 것이 있다면 이야기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별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는 매우 중요한 증거입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감동을 줄 때, 일상적인 것으로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도마나 고무장갑을 선물한다면 그것은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짜증나게 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 말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 감동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지어낸 마음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까 너무 가여워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연으로 고통받고 갔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직접 고통을 준 것은 아니지만 그 고통에 공감하면서 동참할 때 그 사람은 예기치 못한 감동을 받는 것입니다. 그때 신기하게 바로 며칠 전까지 내 인생을 지옥 아래로 잡아 당기던 무서운 고통에 대한 기억이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는 것입니다.
(찬양)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일생을 살면서 나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그 사람 인생의 모든 불행을 절대 해결해 줄 수도 없고,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특별한 타인이 되어 줄 수는 있습니다. 내가 그가 될 수는 없지만, 불쌍하고 고통받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 부모인 나에게 그렇게 밖에 못하는 자식의 고통스러운 마음속에 들어가서, 내가 흔히 만날 수 없는 특별한 타인은 되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그 속에서 놀랍게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문제가 깃털처럼 가벼운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를 지옥으로 잡아 당기는 것 같이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인생의 무게를 이기게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뜻이 사람이 자기에게로 향하여 모든 사람과 단절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뻗어 나가서 모든 사람들에게 스며들어 하나로 연결되게 하기 위해서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아까 본 우주도 신경망처럼 모두 연결되어 있는데, 바로 그것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살고, 사랑하면서 비로소 자기가 얼마나 모자라는 존재인지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에게서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절대로 그 외로움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해결하는 길은 누군가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보다 그가 편안하기를, 나보다 그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갈망하면서 그를 사랑할 때, 비로소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않아도 나는 행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사랑 안에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으로 충분한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쓰레기처럼 세상에 물들어버린 기독교를 통해서 기독교를 욕하고, 예수를 욕합니다. 그것은 마치 진주에 묻은 흙을 보면서 쓰레기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을 닦아서 그 안을 보면 우리 인류의 정신사를 붙들어 주었던 위대한 진리의 보고(寶庫), 어디에서도 우리를 기독교만큼 행복으로 인도해 줄 수 없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여기에 행복의 길이 있는데, 끊임없이 자신 속으로 깊이 파고들면서 갱도 같은 곳으로 굴러떨어집니다. 끝도 없는 심연으로 계속 굴러떨어지는데 거기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그런 식으로 사랑해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괴테가 말한 바와 같이 우리의 자녀들은 질풍과 노도의 시기를 겪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시기가 끝이 납니다. 그때 질풍과 노도의 시기를 지났지만 돌아갈 항구가 없으면 질풍과 노도에 침몰한 배와 살아남은 배는 모두 같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자녀들만 그런 시기를 거칩니다. 부모들도 갱년기를 지납니다. 그리고 결코 그 시기가 청소년의 그 시절보다 가볍다고 말할 수 없는 혹독하고 외로운 밤을 지나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춘기에서는 살아남았는데 중년에 자살을 합니다. 그래서 모세도 그 외로움을 고백하기를 "하나님이여, 저를 중년에 데려가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그것을 부부가 서로 이해하고, 참고 기다려 주며 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여기며 살 수 있는 가족의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것 다 필요 없고, 어쨋든 내 인생의 의미를 다른 곳에서 찾겠다고 한다면 과연 잘 사는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태어나서 가족하고만 행복하게 산 것 밖에 없다면, 그 행복이 어떤 의미의 행복이냐가 문제가 되겠지만 그건 또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가족들과의 관계를 제외해 놓고 인생을 잘 살았다고, 못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 가슴에 심고 싶은 것입니다.
가끔 남편이 흔들릴 때 기다렸다는 듯이 약점을 잡거나, 아내가 흔들릴 때 기다렸다는 듯이 꼬투리를 잡아서 책임을 물으며 인생을 산다면 도대체 누가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결국 잠시 우리 모두 흔들려도 돌아갈 수 있는 고향과 같은 가족이 있어야 합니다. 한 아내와 남편이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행복은 결코 자식에게 말로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삶으로 전수되어야 합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나는 누구이며,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성공했고, 돈은 많이 모으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는데, 나는 정말 잘 산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것을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울 앞에 서면 내가 스스로 뭐라고 생각하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거울이 우리의 온몸을, 외모를 정확하게 비춰주듯이 가족이라는 거울 앞에 서보십시오. 여러분 때문에 자녀가 행복했습니까? 아내가 행복했습니까? 남편이 기뻤습니까? 쓰러질 때 용기를 얻었습니까?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어날 때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었는데, 그 가족에게 손을 내민 사람이 여러분이었습니까? 그래서 그 가족들과 함께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대가 누구냐고 묻지 마라. 그 가족들 속에 있는 그 사람이 너다. 이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 인생은 혼자가 아니라 가족과 함께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가족 사랑이라는 지극히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한 사람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거울로 당신의 인생을 보십시오. 재산이나 사회적인 지위, 학벌과 문벌, 물려받은 유산, 그런 것이 우리의 인생이 행복하고 값진 인생이었다고 증명해 주지 않습니다. 가족과의 관계를 통해서 당신 존재의 의미는 이 세상에서 실현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힘이 없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족 같은 분이 계십니다.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 엄마는 나를 끝까지 이해 못하고, 아버지는 나를 다 품지 못하고, 자식들은 우리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의 가족으로서 주님은 우리를 이해하십니다. 우리가 소외되었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그 분이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고 계십니다. 그리고 내가 인생을 살아갈 힘이 전혀 없어서 인생길에 더 이상 한 걸음도 떼지 못하고 주저앉아 죽음을 위해 눈을 감았을 때 우리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분의 등에 업힌 것입니다. 내가 갈 수 없는 길을, 그분이 나를 업고, 내 가족으로, 그렇게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한없이 감사하고, 자기 인생에서 더 갈 수 있는 길을 발견하지 못해 포기하고 주저앉아 죽음을 생각하는 그 사람의 손을 붙들어 주고 업고 갈 수 있는 사람으로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아직 거두지 않으시고 여기에 살려 두신 것입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9 (2021.02.28._주일오전)
9. 과학기술이란 무엇인가?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창 4:22-24)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오늘 본문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번성하는 후손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인은 이미 성을 쌓았고, 그 이름을 아들의 이름을 따라 에녹이라고 불렀습니다. 촌락을 이루었습니다. 이때 이미 사회활동은 목축과 예술, 기술로 분화되었는데, 라멕의 자손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에 대한 이야기가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인생은 자기 시대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답하기 위해서는, 우리 시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과학기술의 시대이고, 혁명적인 기술의 발전은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진리는 옛 진리지만 우리는 새 시대를 살고 있고, 이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않고는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고자 하는 우리의 정신도 방황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II. 과학기술이란 무엇인가?
A. 인간과 과학기술
자, 그러면 과학기술이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정리를 하면 이것입니다. 먼저 인간과 과학기술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인간은 탐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자연의 법칙들을 이해함으로써 과학기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자연에 대해 관찰하고 그 관찰의 결과를 분석하고 종합함으로써, 그것을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의 진리를 양식으로 삼고, 육체는 지상의 자원을 끊임없이 소비하므로 생명을 유지해 갑니다. 결국, 인간은 천상의 자원 뿐 아니라 지상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영혼과 정신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과 정신보다는 우리의 감각과 육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과학기술은 물질적 사물들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일에 기여합니다. 인간이 살아온 모든 시기가 동일하게 기술이 발전된 것은 아닙니다. 1차 산업혁명이 1780년대 영국을 필두로 시작됩니다. 이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온 발명품은 증기기관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수력과 풍력에 의존했지만 증기기관이 발명됨으로써 어느 곳이든 에너지를 일으킬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기차, 선박산업의 발전과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약 120년 후에 2차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1900년대의 일입니다. 이것은 전기의 발명을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전기의 발명을 필두로 화학, 자동차, 라디오, 텔레비전, 항공산업 등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3차 산업혁명은 1969년 이후에 컴퓨터의 발명을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따라서 자동화 생산시스템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컴퓨터의 도움으로 몇 달씩 걸렸던 계산을 순식간에 하게 되면서 기술의 개발은 폭발적으로 발전합니다. 전통적인 제조업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네트워크와 협력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것입니다. 4차 산업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는데,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을 중심으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첨단 기술의 융합을 중심으로 인공지능과 가상현실, 생명공학과 과학공학의 결합 등으로 폭발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과학기술의 특이점 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특이점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천문학에서 나온 용어인데, 질량이 무한대인 공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블랙홀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블랙홀에서는 당연히 블랙홀이 아닌 곳에서 적용되는 과학과 물리의 법칙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은 분명하고, 그 모든 것들은 우리에게 베일에 싸여 있습 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과학기술은 조금씩 조금씩 발전하게 되었고, 이 가속도는 점점 더 가팔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이 되면 이것이 수직으로 위로 뻗는 단계가 온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기술 발전에 있어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즉, 무엇인가를 뚝딱뚝딱 결합해서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모든 새로운 기계와 장비들, 그리고 새로운 인공지능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하나 소개 받고 사용해보았습니다. 제가 쓴 설교문을 컴퓨터에 입력하고 김정은의 얼굴을 눌렀더니, 김정은이 북한의 노동당 대회 때의 그 어조로 저의 설교를 그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저의 영문으로 쓴 논문을 입력하고 트럼프 얼굴을 눌렀더니, 트럼프 목소리와 똑같이 읽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순간 만약에 이런 기술을 우리들이 활용한다면 선교적으로 굉장히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원숭이 뇌에 칩을 심어서 원숭이가 게임도 할 수 있고, 인간과 오락도 할 수 있는 시대를 열어 보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뇌에도 이런 칩들을 심어서 굳이 인간이 외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뇌속에 저장하는 기술이 개발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이것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활용함으로써 인간이 보다 더 높은 삶의 질을 찾아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문명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갖느냐에 따라서 다음 세 가지 입장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는 문명 친화적인 입장입니다. 무엇이든지 문명의 결과들을 빨리 빨리 받아들이고 잘 흡수해서 인간의 행복을 최고로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학교에서 머리를 싸매고 외웠던 모든 수학의 공식이나 역사적인 사실들은 이제 외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칩 한 개를 넣으면 어마어마하게 암기해야 했던 양 보다도 수백 배, 수천 배의 많은 것들이 머리속에 저장되어 있어서 꺼내어 쓰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더이상 암기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능력이라는 것은 하잘 것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과학기술의 기계가 인간의 몸과 결합하게 될 때,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으면서 인간의 능력은 극대화 되는 것입니다. 반 인간, 반 기계 같은 인간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이렇듯 끊임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문명의 결과들을 활용해야 된다고 보는 것이 친화적이라면, 문명 적대적인 입장이 있습니다. 이 입장은 현대문명은 타락했으니 이 문명을 너무 받아들이지 말고 시골스러운 삶을 살아가는데 인생의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아미쉬 공동체 같은 경우는 이런 사상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습 니다. 그들은 아직도 전기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거의 옛날 농촌생활을 반영하고, 수레로 끌고 다니며, 모든 것은 수작업으로 하고, 전기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비상전화 한대 정도만 농장 입구에 걸어 놓은 정도입니다. 할 수 있으면 문명으로부터 멀어져 옛날 생활을 고집함으로써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문명 중립적인 입장입니다. 문명 자체가 악하지도 않고, 선하지도 않기 때문에, 결국 중요한 것은 문명을 어떻게 사용하고, 무슨 목적을 위해 살 것인가는 인간의 도덕성에 달렸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 번째 입장에 서야 합니다. 과학기술 문명에 문외한인 것이 곧 경건을 입증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 설탕에 파리들이 달라붙어 빨아먹듯이 문명의 이기에 매달려 그것 없이는 인생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도 문명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이 아닙니다. 과학적 지식이 그것을 응용하여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결합할 때 수많은 새로운 물건들이 매우 값싸게 생산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제가 갓 전도사 생활을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그때 지금으로 말하자면 쏘나타 정도의 승용차 한 대 값이 주공아파트 한 채 값과 같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동네 아파트가 아마 8억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소나타는 삼천만 원이나, 삼천 오백만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차입니다. 물론 거기에는 인플레이션의 변화와 땅 값의 상승 등 여러가지 많은 변수가 있지만, 어쨌든 그 당시에는 집 한 채를 팔아야 살 수 있었던 자동차를 이제는 굳이 많은 지출을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과학기술의 끊임없는 진보로 자동차의 질은 그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좋아지면서 생산 원가는 떨어지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이 가지고 있는 육체적인 자원은 유한합니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많은 인류의 생활에 편리한 기구들을 만들어 주고, 기계들을 만들어주어서 육체의 힘을 비축하게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태어났다면 손으로 빨래를 하고, 손으로 말렸을 것입니다. 또 숯불을 피워서 프라이팬 같은 것에 올려놓고 둘이서 붙들고 다림질을 하고, 방망이질하면서 빨랫감을 매만져야 했던 시대였습니다. 이젠 세탁기에 집어 넣으면 세탁도 되고 건조도 되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우리의 육체적인 에너지들이 절약되는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과학기술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이 놀랍게 연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삶의 질이 높아졌습니다.
구석기 시대 인류의 평균 나이는 18세였습니다. 신석기 시대는 정착하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이때 20세 정도로 늘어나게 됩니다. 로마 시대의 평균 수명이 25세이고, 18세기 때까지만 해도 35세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9세기 이후 의학과 과학의 발전으로 인간의 생명은 급속히 연장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많은 문명의 이기들이 나오면서 인간의 육신적인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지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과학 기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다른 나라 말고 우리나라는 어떠했겠습니까? 조선 시대 중기의 국민 평균 연령이 34세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결혼을 늦게 하면 결혼하기도 전에 죽는 것입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14세에 장가를 가셨다고 합니다. 14세쯤 되면 빨리 결혼하고, 빨리 공부하고, 빨리 일하고 나면 죽을 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를 들어 평균 80세를 산다고 하면, 그 당시 17살이면 현재의 40세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940년대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41세, 1970년대는 67세까지 늘어났고, 2018년대 기대수명은 83세까지 되었습니다. 항노화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수명은 연장되고 있으며, 150세까지도 생존이 가능하다고 과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동물들은 인간의 짧은 수명을 비웃듯이 장수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대왕조개 혹은 양동이만큼 커다란 대합을 가끔 텔레비전에서 보면 사백 년 이상 삽니다. 오백여 년 사는 것이 발견되었는데, 나이를 알아보기 위해서 뚜껑을 열었더니 금방 죽었다고 합니다. 그대로 두었다면 얼마나 더 살았을지 모릅니다. 그린랜드 상어는 약 사백년 이상 사는 걸로 알려져 있고, 바닷가재는 조건만 잘 맞으면 이백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갈라파고스 거북이도 약 이백오십 년 가량을 산다고 하니, 인간보다 더 오래 사는 동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이들의 오랜 수명의 비결을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밝혀 내어,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하고자 하는 산업들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줄기세포도 바로 그런 예 중의 하나입니다.
이런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물질 문명의 발달은 편리함을 가져다주지만 그로 인해 생산된 수많은 사물들은 견물생심이라고 인간의 욕망을 촉진합니다. 더욱이 도시화로 인해서 사람들은 익명의 삶을 살아가고, 비인간화 되어가며, 기계처럼 되어가고, 소외되어 가는 문제들이 자본주의 시대에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엄청나게 많은 물건들이 생산되고, 인간의 삶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뛰어넘어서 쾌락을 가져다주는 사물들이 등장을 합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이것들을 소비하는 즐거움 즉, 향락의 즐거움에 빠져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게 성찰할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신라시대의 왕족과 귀족들의 유적지들을 발굴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발굴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것은 그 당시의 명품들이었습니다. 신라시대의 명품은 무엇이었을까요? 놀랍게도 로마제국의 장인들에 의해 생산된 수많은 물건들이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오색영롱한 이탈리아 장인이 만든 유리그릇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귀족들이 얼마나 갖고 싶어했는지, 오늘날 사람들이 명품을 갖고 싶어하는 것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값비쌌는지 명품 한 개와 같은 무게의 금을 달아 주어야 될 정도의 값이었다고 합니다.
시대는 달라져도 사람들은 그렇게 소비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의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많은 것들을 소비하지만 결국 인간의 의식 작용이 그런 감각적인 사물에 매이게 되고, 소비하는 쾌락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게 소비하고 싶은 것들을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수없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더 편해지고, 더 즐거움을 얻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사물들의 폭은 점점 넓어지고, 그것을 얻기 위해 돈이 필요하니까 사람들이 돈을 모든 것보다 최고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소비중심형의 인간이 되고 쾌락주의에 빠지게 되면서, 인간으로서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정신적인 능력이 심하게 퇴화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사물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대신 오토마톤의 지식 즉, 자판기의 원리는 모르지만 돈을 넣고 누르면 물건이 나온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그 기계가 의미하는 바, 그 물건이 의미하는 바는 모른체 끊임없이 그것들을 사용하는데 익숙해져서 결국 물질문명에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생산되는 과학 기술의 열매들을 맛보고, 더 많은 소비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그 대가로 인간은 없어도 되는 것들을 갖기 위해서 열렬하게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차이가 별로 없고 글로벌해졌지만, 그러지 못한 시절에 미국에 가면 부러운 것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두꺼운 홈쇼핑 카탈로그에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생각만 하면,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다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있으면 정말 필요하겠다는 생각하는데, 한편으론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꼭 필요하기는 한데, 일 년에 딱 한 번이나 두 번만 필요합니다. 그러면 한 두 번을 쓰기 위해서 1년 내내 어딘가 그것을 보관해야 됩니다. 그래서 결국 무한정으로 좋은 것들을 선택하고 소비하는 삶 자체가 가져주는 또 다른 혼란이 우리 앞에 전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집에서 찾아보시면 살 때는 꼭 필요해서 샀는데, 지금은 쓰지도 않고 그것이 있는 것조차 모르는 물건들이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런 소비 생활에 익숙해지는 덕에 인간은 사물 너머에 있는 정신 세계를 생각하고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은 점점 퇴화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B. 과학기술과 내 인생
자, 그러면 과학기술이 내 인생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과학기술을 통해서 수많은 새로운 물건들을 발명해 내고 그것들을 사용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영혼에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물질이 우리의 행복을 가져다주는데는 한계가 있고, 더군다나 진정한 행복을 찾아 간다고 할 때에는 물질로서 그것을 살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하이퍼루프라는 교통수단을 위해서 여러 나라들이 개발을 시도하고 있고, 미국에서는 이미 시험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프로젝트는 이런 것입니다. 지하나 지상에 서울부터 부산까지 파이프 같은 것을 깔아서 한쪽에서 미사일을 쏘듯이 기차를 쏘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산에 약 12분에서 15분 만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새벽기도 끝나고 부산에 가서 해장국을 먹고, 아침 출근하기 전에 서울로 돌아올 수 있는 시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2026년에는 인간을 화성에 보내겠다고 합니다. 일론머스크의 프로젝트가 성공할 가능성이 많을 것입니다. 6개월내지 7개월 혹은 8개월을 거기에서 여행을 하고 돌아옵니다. 언젠가는 아마 여름휴가를 화성으로 가는 우주선의 여객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인터넷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과학기술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해서 부산을 30분에 갔다 오고, 새벽에 미국으로 출발해서 저녁때까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식구들과 함께 저녁 식탁을 나눈다고 할지라도, 여름휴가를 화성으로 다녀오는 시대가 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인생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없고, 더욱이 우리의 도덕 생활을 고양시킬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발달했습니다. 그래서 죽어야 할 많은 사람들을 살렸습니다. 그렇게 살려 놓은 사람들 중에는 죽고 싶은 사람이 많은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과학기술은 악하고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인생의 문제와 고뇌를, 인간 존재의 의미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급속한 물질문명의 발전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이 깊은 질병 상태에 떨어지게 된 것을 창세기 4장 23절이 보여주지 않습니까. 즉, 라멕이라는 사람이 엄청난 문명의 발전을 이룬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이 얼마나 황폐해졌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그 인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또 어린 소년이 실수로 자기에게 생채기를 냈습니다. 그랬더니 그 대가로 소년을 단숨에 처치해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정신이 일체의 사람을 잃어버리고 황폐해진 상황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자기 사랑의 마음에 사로잡힌 이기심, 이웃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 여성에 대한 차별적 억압, 조상과 하나님에 대한 조롱 같은 것들이 바로 이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과학 기술은 발달했지만 선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 과학기술을 가지고 끊임없이 사람의 생명을 해치고, 환경을 파괴하고, 자연의 만물들을 괴롭히고,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 환경오염으로 죽어가는 사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이 발달했지만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자 세상은 악해졌고, 오히려 과학기술은 악한 세상이 더욱 악하게 되는데 이바지한 측면도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과학 기술에 대한 탐닉, 여기서 생산되는 수많은 물건들을 갖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은 극도의 자본주의를 부추겼습니다. 유물론과 자본주의는 극단으로 가면 모두 통하게 마련입니다. 유물론은 모든 인간을 물질이라고 보지만, 자본주의가 극단화 될 때 결국 모든 인간도 돈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사라지고 어떤 자본의 이익을 가져다 줄 대상으로서 인간을 보게 되는 것이니, 하나님을 대신할 신을 창조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돈을 숭배하는 맘모니즘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이것을 말세의 징표라고 보았고, 오늘 우리는 바로 그런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맞선을 보고 나면 남자친구들이 물어본다고 합니다. “나 오늘 선 봤어.” “그랬어, 그 여자 예뻐?” 이렇게 물어본다고 합니다. “그 여자가 00대학을 나왔고...” “그런데 예쁘냐고?” 반대로 여자는, 선을 봤다고 하면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남자 돈이 많아?" "정말 인품이 좋고..." "아니, 돈이 많냐구?" "정말 가문이 훌륭하고..." "아니, 돈이 많이 있느냐구?" 왜 사람들이 이렇게 돈과 외모에 집착하게 되었습니까? 결국 인간은 두 가지입니다. 인간이 그만큼 감각적으로 변했다는 것과 그만큼 외면을 중시하는 것만큼 내면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욱이 돈은 매우 중요한 조건입니다. 능력이 있는 것,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고, 벌 수 있는 능력보다 더 높이 평가받는 것은 이미 물려받은 유산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굉장히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발달한 과학기술로 말미암아 생산되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할 수 있고, 돈을 주고 매우 놀라운 기쁨들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에 대해서 디모데후서 3장 1절과 4절은 이미 오래전에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의 비참은 자신의 비참한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존귀하게 창조되었음에도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인간인지를 모르고, 비참하게 된 그 상태에 살면서도 비참한 줄 모르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무한한 우주 공간을 보면서 마땅히 인간은 자신이 하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고 가는 수많은 별빛,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나는 날파리 한 마리, 하루살이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도, 자기 자신을 파악할 수 없는 끝을 알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어찌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결국 참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욱이 미천한 존재로서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자신의 필멸성, 자신의 미래의 모든 운명은 베일에 감춰져 있는데, 그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자신의 존재의 현실에 집중하지 않고, 물질 문명과 세상에 있는 헛된 것들에 몰입했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6장 1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서 뿔은 ‘영광, 위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 없는 허무한 것들을 기뻐하고, 그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인해 자신이 모든 사람들 위에 뛰어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 것처럼 자기 자신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인간의 이런 태도 즉, 하나님을 찾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무한한 우주 공간 앞에서 자신이 허무한 존재라는 것을 직시하기 싫어하면서 다른 데 몰두하는 인간의 심리를 회피라고 불렀습니다. 이 단어는 불어에서 ‘기분전환’이라고 종종 번역 되는데, 이것은 고전 발레와 관계가 있습니다. 발레는 극의 이야기를 춤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춤으로 스토리가 이어지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에 앞, 뒤 문맥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춤을 추는 것입니다. 관객들이 다음에 전개되는 장면을 더 집중해서 지켜볼 수 있도록 앞뒤 문맥과 상관없는 기분전환을 시켜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회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진리의 빛에서 멀어졌습니다. 그 후 인간의 특징은 허무한 것을 열렬히 좇는 열심입니다. 인간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그것들을 소비하는데 골몰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가 주는 즐거움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것을 하지 않고는 자기 자신의 운명을 직시할 용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약에 한참 빠져 정신을 못 차리는 후배를 만나서 선배가 따끔하게 나무랐습니다. "왜 이렇게 사니. 이러면 네 인생은 망한다.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야지 젊은 애가 마약에 취해서 산다는 것이 말이 되겠냐?" 그러자 후배가 말했답니다. “형, 형은 아직 사는 게 얼마나 무서운지 몰라서 그래. 마약이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마약 없이 내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 무서워서 마약으로 피하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너무 인생 사는 것이 고달파서, 그래도 배울 것이 있다고 믿어지는 선배를 찾아 갔다고 합니다. “선배, 난 너무 괴로워. 삶이 도대체 무엇이야?” 그랬더니 선배가 담배를 뻐끔거리더니, “네이버에 물어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네이버에 삶은 무엇이냐고 검색하니까, 삶은 계란이다. 웃자고 만들어내는 이야기겠지만, 결국 직시하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결국, 오락에 대한 몰입이나 쾌락의 추구는 자기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을 마주하지 않으려는 정신의 고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극심한 공포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알맞은 분량을 초과하는 물질에 대한 과도한 욕망은 무엇 때문일까요? 결국 이것은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기를 회피하는데 필요한 자원을 미리 마련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설교에서 우리들이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이 결국 많은 물질을 모아도 소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한정으로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합니다. 열심히 모으나 어쩌면 그것은 자기가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의 몫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부지런히 물질을 모으고, 물질에 탐욕까지 갖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멸망할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는 대신, 회피할 수 있는 자원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물질을 소비하고, 물질로 향락과 서비스를 얻어서 자기의 운명을 직시해야 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바로 물질적인 욕망에 대한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인생은 고달픕니다. 이때 오락이나 물질을 소비하는 쾌락으로 기분을 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정면 돌파를 선택해야 합니다.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이고, 자신의 인생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지 답을 찾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난, 말할 수 없는 두려운 허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지 답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답을 찾고자 할 때 결국 그는 자신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찾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군가 밖으로부터 오는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일 때 그 사람은 인생에 대해서 하나의 희망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실을 해석하고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회피하고 위락과 기분전환으로 현실에서 도피하며 살고자 하면 정신은 자아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체적인 인생을 살지 못하고 그의 인생은 동물과 같은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진리를 찾지 못하게 되고 그는 행복이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만 끊임없이 따라가는 감각의 노예로 어느 한 순간 불현듯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 19절에서 어리석은 부자가 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뜻밖의 풍년이 들고 어마어마한 곡식을 거두어 들였고, 결국은 보관할 곳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큰 창고를 짓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매일 매일 연회하는 꿈으로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즐거워하는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런 정신의 회피가 오늘 죽을 그의 운명을 바꾸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태어나서 주식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아주 오래전 30년, 40년 전에 국민주가 나왔을 때 학교의 교수들이 모두 받으라고 해서 한 번 받았다가 본전으로 판 것 이외에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앞으로도 안 할 가능성이 많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매일 경제적인 동향을 살피고, 신문을 열심히 보고, 경제 소식에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6개월 전이었는데, 9월경으로 기억합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직원 한 명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한 번도 투자를 안 했지만, 만약에 내가 돈이 있다면 00주식을 살 테니까 나중에 오르는지 안 오르는지 한번 봐라.”고 했습니다. 테슬라, 아마존,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대한항공, 아시아나입니다. 아시아나는 그때 쫄딱 망했을 때입니다. 그리고 나서 6개월이 지난 지금은 모두 올랐습니다. 아시아나는 사천 원이었는데 만 이천 원까지 올랐고, 삼성전자는 사만구천 원에서 팔만오천 원까지 올랐다가 지금 조금 빠지고 있다고 하는데 어쨌든 테슬라도 올랐습니다. 제가 그때 5천만원 투자했으면 세금 빼고 5천만원 더 벌었을 겁니다. 그런데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식에 매어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저는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직장에서 아침 9시가 되면 빌딩마다 남자 화장실은 만원입니다. 왜냐하면 9시가 주식 개장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밤새도록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떨어진 주식은 팔아야 하고, 올라오는 주식은 빨리 사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9시에 하기 위해서 모두 화장실로 대피하는 겁니다. 그래서 화장실이 만원을 이룹니다. 신문에 나왔습니다. 주식에 투자하는 사람들이, 특히 영끌해서 투자한 사람들이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불 끄고 잘 때까지 핸드폰을 삼백 사십 번 본다고 합니다. 주식 동향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5000만원을 번 것이 아니라 6개월 동안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서 주식을 섬긴 댓가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주식에 투자하는 것을 비판하거나 죄악시 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으면 하십시오. 대신에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열어볼 마음이 없고, 하루에 수십 번을 봐야 될 마음이라면 여러분은 주식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으로 하는 주식은 대부분 투기를 노리는 것입니다. 비트코인에 미친듯이 매달렸다가 지금 곡소리가 나고 있습니다.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제가 몇 년 전에 설교하고 있던 상황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앞으로도 계속 오를 거라는 데에 베팅을 합니다. 그렇지만 사지 않습니다. 안 살거고, 여러분도 사지 않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돈을 버느냐 못 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정신을 모두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직장은 얼마나 불행할지 생각해 보십시오. 직원들을 고용해서 열심히 일을 해야 될 회사인데, 직원들이 출근 전, 후를 빼더라도 직장에서 약 이백번 이상 주가를 검색해야만 마음이 안정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몸만 회사에 있는 것이지 마음을 바쳐서 일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어마어마하게 빚을 내어 투자를 했는데, 주식이 올라가고 특히 떨어질 때, 그 사람들의 마음은 지옥을 오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인생을 살아봐야 몇 년을 산다고 그런 식으로 우리의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거기에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과연 합당한지를 묻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관점에서 묻는 것입니다. 절대로 주식 투자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마음과 뜻을 다 바쳐서 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또 하나의 신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어느 광고 카피를 보니까 ‘남은 음식을 억지로 먹으려고 하지 마라. 음식이 비싸지만 아무리 비싼들 당신의 몸만큼 비싸겠습니까.’ 그것이 맞는 말 같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자기 몸을 쓰레기통처럼 여기고 자기 속에 집어 넣어 건강을 상하게 하는 것보다 자기 몸을 더 존중이 여기라는 뜻일 겁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돈을 버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돈이 없으면 삶이 불편할 수밖에 없으니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버는 일을 무시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살려고 돈을 버는 것이지, 그것의 노예가 되기 위해서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마음은 물질적인 풍요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사유함으로써 우리가 비로소 엄숙하리만치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서 나의 존엄함은 공간의 크기, 사회적인 위치, 물질의 소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임을 알고, 자기가 얼마나 존엄한 존재인지 아는 데 있는 것입니다.
눈부신 과학기술 문명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이 끝없는 재화와 용역들을 생산해 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극단화 되면서 많은 물질을 모아 돈을 가지고 있을 때 사람을 위해 노예제도가 사라졌지만 사실은 노예를 부리는 것처럼 살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이런 물질적인 환경이 인간의 극단적인 자기 사랑과 만나게 될 때 인간은 아주 광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정신으로는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없을 것이고, 정신은 물질주의에 삼킨 바 되어서 끊임없이 어두움 속을 헤매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삶이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작별했던 삶입니다. 어찌 우리가 그 경건한 삶을 버려두고 그런 삶 속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보다 그리스도를 덜 생각하는 것이 신성모독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이고, 그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세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것은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공간이고, 우리는 결국 영원을 향하여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을 탐구하지 않고 이 세상의 물질문명에 몰입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과학기술 사회 속에서 우리는 웬만큼 결심하지 않고, 예전과 또 다른 결심을 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을 지킬 수가 없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며 살 수도 없는 어려운 때를 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 전기라고 말합니다. 전기가 인간의 밤과 낮의 경계를 무너트렸고, 결국 노동에 혹사당하는 세상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물질문명은 단순히 편리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정신과 마음이 짓밟히고 망가뜨려 진 채로 생산된 결과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사 문제를 보면서 이런 반문이 들었습니다. 정말 총알 배송을 해야 하는가? 그 물건을 6시간 쯤 늦게 받고, 하루 쯤 늦게 받는다고 우리 인생에서 생사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때가 몇 번이나 있을까? 이른 새벽에 싱싱한 야채와 식료품을 식단에 배달하기 위해서 밤을 새는 노동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총알배송을 받아서 일찍 소비를 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과로사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십시오. 수입 양탄자를 부잣집 마루 위에 깔려고, 그것을 생산해 내기 위해서 여덟 살, 아홉 살 된 아랍의 아이들이 비정상적인 노동에 혹사당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이런 가운데 우리들이 극단적으로 물질만을 추구하게 되면, 나만 그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그 산업에 종사하면서 사는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살도록 촉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물론 맞습니다. 그렇게 경제가 돌아갑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경제학자로서, 과학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물론 소비가 둔화되면 산업이 저하될 것이고 국제적인 경쟁력이 약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그렇게 많이 소비하며 물질에 탐닉하고, 물질문명의 눈부신 발전에 기대어 꿀을 빨아 먹고 사는 것이 과연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지 근본적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생각하면 제가 가장 행복했을 때는 일곱 살 이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기억도 없지만 행복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가 어떻게 보면 제가 머무르고 싶은 순간들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인생의 아름다웠던 기억들은 소비 때문에 저장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때가 그렇게 좋았습니까? 그리고 죽음의 휘장을 걷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한번 방문할 시간, 찾아가서 한번 다시 있고 싶은 시간과 공간이 있다면 그곳은 어디입니까? 어마어마한 물질을 소비하며 쾌락을 느꼈던 순간은 아닐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것을 초월했습니다. 사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이런 문제를 생각했는데, 제가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알았을 때는 이미 행복하지 않은 상태가 되어버렸고, 그리고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없는 나이가 된 것입니다. 그 어린 시절의 아기자기 했던 추억들, 인생에 있어서 머무르고 싶었던 추억이 담겨져 있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시간들은 대게 소비와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거기서 나를 발견하고, 누군가와의 사랑을 발견하고, 무엇인가 나를 빛나게 해주고, 내 마음을 불타게 해주고, 오랫동안 애착하게 해 줄 그 무엇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물질은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눈부신 과학기술의 시대를 살면서 여기에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자기 자신이 탐닉하며 살아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과학 기술의 혜택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수단으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질문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또 그래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무의미한 우리의 인생에 의미의 불빛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은 밤을 지나서 살아있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시간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 우리의 진정한 마음의 고향은 물질의 번영을 구가하는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집은 하나님 나라이고, 그분이 우리의 궁극적인 사랑이십니다. 신자가 현대의 과학기술과 담쌓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런 반문명적인 태도는 문화 속에 들어가서 그 문화를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변혁해야 할 선교적 사명에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술은 눈부시게 성장해서 끝없이 수많은 재화와 서비스를 내어 놓습니다. 거기에 마음이 빼앗겨서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때가 되었고, 그래서 이렇게 물질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간의 사고도 물질중심적이 됩니다. 경건하게 하나님을 찾고 신앙의 신비를 찾을 마음이 사라지고, 물질을 초월하는 인간의 도덕적인 가치와 심정적 가치를 존귀하게 여기며 참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보람을 정신 속에서 찾기 어려운 때를 지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내놓는 재화나 서비스에 마음을 너무 많이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이것들에 대한 인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채운 나머지 도저히 하나님을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의 세계의 집중할 여유조차 없는 삶의 끝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주겠습니까?
과학기술은 칼과 같습니다. 훌륭한 요리사의 손에 들리면 그 칼 때문에 맛있는 요리가 나오지만, 살인자의 손에 들리면 결국은 살인이라는 범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과학기술을 습득해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사는데 이바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이웃들을 그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유용하게 사용하도록 이바지해야 합니다.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시대를 살며 수많은 감각적인 사물들에 에워싸여 있고, 이것들로부터 즐거움을 누리며, 물질의 유혹이 강력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한걸음 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이런 물질과 이 세상의 것들에 빼앗기지 않도록 보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보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눈 감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물질적인 것들에 에워싸이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물질로부터 정신을 자유롭게 해방시켜 하나님께 날아가는 시간들이 더 많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현대의 과학기술 사회에서 문명을 대하는 여러분들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욕심을 줄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여러분들의 시간과 마음을 아끼십시오. 간절히 주님을 찾고 물질문명의 거센 파도를 이겨내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10 (2021.03.07._주일오전)
10. 돈이란 무엇인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 6:10)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생과 가장 얽혀 있는 것이 돈일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살 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돈 때문에 사랑해야 할 관계까지 깨지고 때로는 사람이 돈 때문에 죽음으로까지 내몰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것으로 추측됩니다. 목회자 젊은 디모데에게 쓴 이 편지의 주제는 바른 교훈과 바른생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 말 끝부분에서 경건에 관한 가르침을 언급합니다. 경건을 지키는데 가장 큰 대적이 돈에 대한 욕심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천 년 전에도 그러했으니 오늘날과 같이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우리의 신앙, 우리의 인생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II. 돈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돈이란 무엇입니까? 사도는 경건의 비밀에 대해 말하다가 거짓 교사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들이 참된 신앙을 떠나 교회를 대적할 때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자신의 삶으로써 자신이 진리 안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거짓 교사들은 마음으로 돈을 좇는 사람들이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경고를 받으라고 사도는 교회에 말하고 있습니다.
A. 부에 대한 세 견해
부(富)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금욕주의입니다. 이는 가난을 미덕으로 여기고 부의 소유 자체를 악하게 보는 것입니다. 스토아주의의 영향을 받은 극단적인 금욕주의로부터 수도원의 청빈주의에 이르기까지 이 견해를 따랐습니다. 소유를 미워하고 육체의 욕구를 죄악시 하며 심지어 육체의 고행을 통해서 영혼이 정화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와 정반대 편에 서 있는 것은 번영주의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요한삼서 1장 2절에 근거해서 하나님 앞에 영혼이 잘되는 사람은 육신적으로도 번영하게 된다는 교리를 지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궁극적으로 영혼이 잘될 뿐만 아니라 범사에도 번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신자가 이 세상에서 부유하게 되는 것은 일종의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며 신자는 이것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육신적인 번영을 신앙의 중심에 두려고 하고 또 과도한 자본주의적 소비주의의 합리화에 신앙을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자, 그러면 성경적인 견해는 무엇일까요? 성경은 부의 소유에 대해 중립적입니다. 돈 그 자체는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고 무용하지도 않고,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도 않지만 오직 더 높은 목표를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는 권력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가복음 8장 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시골에서만 말씀을 전하신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 뿐만 아니라 부유한 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심지어 예수의 제자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7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마 27:57).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청구하여 자기의 좋은 무덤에 안치시켰으니 이는 그가 부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시대에도 이러한 입장은 그대로 계승됩니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도 지도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사도행전 13장 1절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가 부유하게 되는 것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부유하게 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증거라고 강변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탐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딤전 6:17). 부자들에게 엄격하게 명해야 했는데 부자가 되었기 때문에 너희의 마음도 함께 부유해져서 교만해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재물은 본시 정함이 없어서 여기 있는 듯하면 저리로 떠나가는 것이니 그런 재물에 소망을 두면 결국 삶도 끊임없이 요동치고 떠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신자에게 적합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유할지라도 겸손한 사람이 되고 또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을지라도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그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누리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가난해지는 것도 덕스럽지만 그것은 가난 자체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가난해진 동기와 목표가 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청빈(淸貧)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이 청부(淸富)이기도 하니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없으면 없는 대로 없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요 있으면 있는 대로 그것을 선하게 사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위대하고 놀라운 일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과 하나님을 위해 넉넉히 헌신하는 물질을 가진 사람들이 협력함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입니다. 종교개혁 시대를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종교 개혁자들에게 참된 성경적인 신앙을 전파하도록 정치적으로 보호했던 사람들이 있었고 부유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금을 대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확장되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이 나라의 많은 기독교 대학이 외국의 독지가들의 헌신에 의해서 세워졌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많은 선교 단체들의 번듯한 유산들은 대부분 선교사들이 외국의 신자들의 헌신을 받아서 한국의 기증한 것들이었습니다. 이 교회가 이만큼 세워지기까지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여러분들이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많은 성도의 힘에 넘치도록 물질적으로 헌신했기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편안한 공간에서 편안하게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을 잊어버렸지만 주님은 그들의 헌신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모두 물질이 있었기 때문에 헌신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물질 있었어도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았다면 그 물질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믿음이 있었고 마음이 청결한 사람으로 돈 보다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의 헌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해서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인간의 마음에 달린 것이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돈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욕심으로는 부유한 사람이나 순결한 신앙으로서는 가난한 사람이 있고 신앙으로서는 가난하지만 욕심으로는 풍부한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주님이 주시는 것임을 알고 주님을 기뻐하며, 주님의 뜻을 펼치는 데에 돈을 사용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B. 돈에 대한 경고
그러면서 성경은 돈에 대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세 가지 교훈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뿌리에서 줄기와 가지, 넝쿨이 뻗어 나와 무성하게 되는데 돈을 사랑하는 그 마음이 수많은 악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개인적인 평안과 경제적인 부유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철학자 데카르트가 말한 바와 같이 개인적인 평안은 의학을 통해 신체의 건강을 촉진함으로 성취되고 경제적인 부유함은 과학기술을 통해서 번영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문명의 혜택을 소유하고 넉넉히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돈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이 이 세상에서 인간의 물질적인 욕망을 손쉽게 채우게 해주는 가장 탁월한 수단이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대체로 신자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돈과 가까워지게 됩니다.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대부분 음식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이 음식이 어떤 종류의 음식이고 이것을 먹으면 내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어떤 질병을 유발하고, 내 건강을 어떻게 해칠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합니다. 이성은 그것을 알아도 감정과 의지에 있어서 절제가 안 됩니다. 먹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이런 사실 관계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더 많은 양을 먹고자 하는 양적인 탐닉과 더 맛있는 것을 먹고자 하는 맛에 대한 탐심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들은 없으면 안됩니다. 우리 중 누군가 밥을 약 먹듯이 먹는다면 우리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참 어려울 것입니다. 식탁에 많은 반찬을 차려 놓아도 젓가락은 항상 몇 가지를 피해가 갑니다. 몸에는 좋은 줄 아는데 먹고 싶은 욕구를 못 느끼기 때문에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밥상에 올라오는 모든 음식이 먹기 싫은 것들이라면 과연 우리는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음식을 섭취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동네에 한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결핵에 걸려서 비쩍비쩍 마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 제가 보기에는 30킬로가 될까 말까 할 정도였습니다. 반소매를 입었는데 흉측할 정도로 뼈가 드러났습니다. 집안 식구들은 도통 먹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음식을 차려 놓으면 결심을 하고 안 먹는 것처럼 음식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 어린아이가 죽기를 작정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음식에 대한 욕구가 추호도 없으니 음식을 먹는 것이 죽도록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음식에 대해서 적절한 욕망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건강하면 반드시 먹고 싶은 것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은 죄일 수 없습니다. 또 좀 더 많은 양을, 좀 더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그것을 아주 비천한 죄에 빠진 것처럼 정죄 받을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우리가 먹고 즐기는 것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있지만 목적 없이 그냥 즐거워하라고 주신 것도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자면 기호품 같은 것입니다. 커피가 우리의 몸에 좋은 점이 있다는 학자들도 있고 해로운 점이 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모든 음식이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건강이라는 목적 뿐 아니라 우리의 기분을 전환하고 또 우리의 정신과 심신의 안정을 얻기 위해서 주신 측면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마약은 거기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면서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욕망을 적절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의 건강을 매우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욕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우리는 자신을 잘 관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느 한계를 넘게 될 때 부메랑이 되어서 우리에게 돌아와 건강을 위해 주신 욕구가 그 지나침 때문에 우리에게 해가 되는 사태가 오게 됩니다. 이 선을 적절히 지키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의 비극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욕망은 육체의 욕구 전반에 걸쳐서 누구에게나 나타납니다. 이 적절한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문화 명령을 수행하게 하는데 이바지하는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언제나 과도한 육체의 욕구에 흘러 죄를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과 싸우는 것이 일생의 큰 과제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육체를 위한 사랑은 돈에 대한 사랑으로 집약되는데 돈으로 육체에 필요한 대부분의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 사람들은 놀랍도록 크게 자신의 육체를 위해 사용합니다.
이제 코로나가 백신이 나오면서 잡힐 기미가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에 의하면 이것은 인류에게 있어서 시작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런 식의 어마어마한 감염병들이 일어날 것을 예견하는 어떤 학자에 따르면 이렇게 발생 가능한 바이러스나 질병들이 50만 가지 정도 되고 그중에 우리에게 밝혀진 것은 0.2%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하나님의 창조된 세계의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한 이런 일들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그것은 핵무기급에 버금가는 어마어마한 인류의 재앙이 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아무튼 표면적으로는 변이 바이러스들이 생겨나서 더 큰 재앙을 예고하기도 하지만 아무튼 기존에 있었던 이 바이러스로 인한 코비드는 서서히 제어될 수 있는 조짐을 보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7월 이후의 모든 여행상품이 동이 났다고 합니다. 어느 한 여행사에서는 180일 동안 크루즈 여행, 1인당 6억 원이나 하는데 하루 만에 매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2년 후의 크루즈 여행을 모집하고 있다고 하니 인간이 얼마나 강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분출하듯이 다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육체를 위한 사랑은 돈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돈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최근에 서울 시내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백화점이 생기고 호화로운 시설들이 갖춰져 있다고 합니다. 한번 들어가서 마사지를 받는데 20만 원, 30만 원씩 하는 곳에 예약이 밀렸다고 합니다. 그곳을 이용하는 세대들이 20대에서 30대라고 하는데 집도 사지 못한 사람들이 거기에 몰려서 예약을 한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차피 사지 못할 집 이제는 우리가 집을 위해서 절약하고 애쓰고 수고해봐야 우리 힘으로 도저히 되지 않으니 적절히 쓰고 즐기면서 인생을 살겠다는 풍조가 널리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육체를 위한 사랑은 연습 없이도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이미 신약 시대에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히브리서 13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즉, 주님께서 가르치신바 너희를 지켜주는 것은 너희 손에 움켜쥐고 있는 돈이 아니라 나 여호와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가르침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사랑은 세상과 육체에 대한 탐심으로 나타납니다. 탐심이 강해지면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라도 부유해지고자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니 이것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두 번째 경고는 믿음을 떠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당시 바울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돈 때문에 믿음을 떠난 것을 보았습니다. 신앙을 떠난 자들이 경건을 잃어버리고 돈을 사랑해서 침륜에 빠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신자가 돈을 사랑함으로써 믿음에서 떠나는 과정에 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은 가난에 대한 두려움과 돈에 대한 욕망으로 불안하게 됩니다. 당연히 그런 마음은 갈가리 찢어진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한 분을 앙망할 수 없게 됩니다. 그는 믿음이 부족합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사랑을 알고 그분을 의지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재물과 세상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보다는 돈을 더 의지하게 됩니다. 신자가 경건을 잃어버리면 마음은 영혼과 신앙보다는 육신과 물질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때 그의 내면의 세계는 은혜가 약화됩니다. 마음은 진리의 빛에서 멀어지고 심장은 하나님의 감동으로부터 멀어져서 물질에 대한 정욕으로 기울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근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신자의 마음은 많은 근심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 근심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내가 지금 갖고 싶어하는 것을 갖지 못한 고통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염려는 따라서 재물에 대해 유혹을 받게 만듭니다. 그리고 신자의 마음이 재물에 대해 유혹을 받게 되면 마음은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을 객관적으로 대할 수가 없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열매 맺지 못하는 가시떨기와 같은 밭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비록 신앙의 작은 체험과 말씀에 대한 어떤 깨달음이 있을지라도 말씀의 은혜가 마음에 떨어져도 이미 재물에 대한 욕심, 돈에 대한 탐심이 가시넝쿨처럼 엉켜 있어서 거기서 적절하게 싹을 키우고 열매를 맺을 정도로까지 말씀의 씨앗이 자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 22절에서 이 마음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마 13:22). 근심으로 물든 마음은 지성을 혼란하게 합니다. 생각은 돈에 대한 생각 육신의 염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사물이 옳고 그름, 가치의 경중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감정은 육욕에 이끌리게 되어 요한일서 2장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한편 의지는 지성의 올바른 판단을 따르기보다는 감정의 열의에 굴복하여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경건을 멀리하고 죄를 짓는 일까지 서슴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신자의 마음은 이 세상에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영적인 시각에서 해석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할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오뚜기를 보십시오. 아무데나 던져 놓아도 흔들리지만 결국은 똑바로 서게 됩니다. 아무리 위에서 눌러 물속으로 집어넣어도 공기로 부풀어 있는 공은 반드시 위로 떠오릅니다. 모든 신자는 이런 신앙의 환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잠시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고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을 영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거두고 이런 일을 겪게 하시는 하나님의 보다 깊은 뜻을 생각하며 자기 성숙의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갖지 않은 사람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자, 보십시오. 사업을 하다가 커다란 손해를 보게 되었습니다. 원인이 없이 그렇게 될 리가 있겠습니까? 일을 망쳐 놓은 어떤 나쁜 인간이 있을 것이고 그를 향해 보복할 수도 있을 것이고 법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 더 과격한 사람이라면 쫓아가서 구타함으로 그에게 복수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 흉악한 사람은 청부업자를 시켜서 살해까지 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어려운 일이 벌어졌을 때 원인을 생각하면 어떤 나쁜 사람들 때문이고 때로는 정부의 무능 때문이고 법이 거지같이 만들어져서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그것들 때문에만 일어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 나에게 그런 커다란 실패가 찾아왔을까? 앞에 말씀드린 모든 요인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자신의 실패 원인을 분석하고 다음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이미 일어난 실패는 하루속히 가장 효율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사업에 있어서 반성해야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그보다 한 단계 더 위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일이 피할 수 없이 내게 일어난 것도 하나님의 큰 뜻 안에서 일어났으니 이것을 통해서 내 인생에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자신이 경험한 실패는 사업의 실패였지만 신앙적으로 유익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성숙의 기회로 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하셨으니 선한 일만 일어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눈으로 볼 때는 좋은 일도 일어나고 나쁜 일도 일어나고, 원하는 일도 일어나고 원하지 않는 일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것이 함께 작동하여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그에게 선을 가져다 준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을 추적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영적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입니다. 물질에 탐심이 사로잡히고 돈과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돈이 사람의 목숨을 위하여 있고 목숨이 돈을 위하여 있지 않건만 돈 때문에 목숨을 끊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속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신령한 방식으로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데 돈을 사랑하고 근심에 빠지게 되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으로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자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6장 10절에서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거기서 무슨 자유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돈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자유로운 주체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디모데전서 6장 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 성경이 돈에 대한 사랑과 유혹을 경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결국 마태복음 6장에 예수님의 유서 깊은 가르침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희를 위해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 ..."는 교훈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섬김의 교훈으로 나아가고 마지막에는 "...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는 하나님의 대명령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돈을 사랑하고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경건의 삶은 결코 양립할 수 없으니 돈을 사랑하기 위해 경건을 팔던가 경건을 사랑하기 위해 돈을 수단으로 여기는 담대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난 채 살아가는 육체적인 근심을 돈으로 막아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근심은 끝없이 생겨나고 인간은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그러한 불안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이 불안해 하는 근원은 재물로 해결할 수 없는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이어 거듭 말씀드리지만 기독교적인 사랑의 첫 번째 원리는 나 때문에 누구에게 누를 끼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 누를 받아줄 용이가 있어도 나 스스로 누를 끼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누를 끼치도록 허락할지언정 자신은 누구에게도 누가 되지 않는 삶을 살기를 희망하는 것이 기독교적인 사랑의 첫 걸음입니다. 그래서 얻어먹은 화려한 밥상보다는 내가 스스로 노동해서 번 소박한 밥상이 아름다운 것이며 훌륭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존감은 건전하게 육성되는 것입니다. 결국,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마지막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의 육신을 불에 태우는 그 순간까지도 돈을 지불해야 화장할 수 있습니다. 화장한 우리의 뼈는 돈을 주어야 빻을 수 있고 돈을 주어야 유골함에 넣을 수 있고 유골함은 돈을 주어야 어딘가 장소에 보관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 돈과 상관없이 살 수 없습니다. 짐짓 자신은 돈에 대해 초연한 사람처럼 살아간다고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많은 사람에게 누를 끼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결국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돈에 대한 탐심이 더 위험하다는 것은 더욱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돈을 사랑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함께 있을 수 없고 이 주인을 섬기든지 저 주인을 섬기든지 둘 중에 하나니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살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방해는 결국 재물에 대한 탐심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고 누구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 수 있다면 소박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 살 수 있다면 만족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사하지만 결코 사치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사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 정도라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눈뜨고 밤에 누울 때까지 사람들의 삶을 움직이는 것이 거의 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에 대한 열망이 어느 때보다 치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신용대출을 받고 영혼까지 끌어다가 주식에 투자하는 광경을 보면 저는 마음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고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만 가난해진 것 같은 느낌을 받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라도 돈을 벌고자 하는 투기판에 내몰리는 것입니다. 미국 국채가 올라가고 금리가 올라가면서 주식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고통받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여기저기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례들도 나타나고 있으니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우리는 단번에 부자가 되려는 욕망 그리고 돈을 사랑하는 마음과 같은 것들을 깊이 경계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자(漢字)로 행복(幸福)이라는 말이 어디서 왔는지 아십니까? 행복(幸福)이라고 할 때 행(幸)이라는 말은 '어쩌다가'라는 뜻입니다.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무엇인가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온 것이 아니라 흔한 것이 아닌데 어쩌다가 자기 것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동양 사상에서는 행복을 자신이 일군다는 개념이 별로 없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참된 행복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가르칩니다. 돈에 대한 행복이 돈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는 행복이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행복을 능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행복해지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돈에 미치게 되는데 결국은 돈으로 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대신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돈은 신이 되고 자신은 그 돈을 섬기는데 결국 돈이 자신을 위해 헌신해 주는 것 같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돈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삶을 산 후에 마지막으로 얻을 수 있는 인생의 행복이 어디에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극단의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돈을 사랑하고 돈을 우상시 하는 시대에 살면서도 여러분들은 이 시대를 거슬러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그래서 그 하나님 때문에 여러분들이 행복을 누리고 또 이 세상에서도 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육신의 욕망이 아니라, 돈에 대한 탐심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으로 삶의 질서를 바르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돈은 너무나 꼭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일생 사는 날 동안 마지막에 죽는 순간까지 나의 존재로 인해 누구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를 다짐해야 합니다. 저의 은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은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부조금을 정성껏 준비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부조금을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가져왔으니 받으시라고 했더니 접수대 자체가 아예 없었습니다. 그래도 꼭 드리고 싶다고 했더니 유족이 하는 말이 고인의 유언이라고 했습니다. 은사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통장을 하나 아들에게 내놓으셨다고 합니다. "얘야, 이 통장에 내 장례식 치를 돈이 들어있다." "이 정도면 장례식장을 빌리고 조문객들에게 아마 식사는 대접할 수 있을 거다." "절대 돈 받지 말아라." "나 죽는 길에 누구에게 누를 끼치지 말아라." 당부하고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평소에 일생 사신 것과 꼭 같이 맑은 물처럼 살다가 가셨습니다. 하나의 저에게 큰 울림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도 죽을 때 저것을 본받자." 그래서 죽을 때 쯤 통장을 하나 아들에게 주면서 "나 죽거든 누구에게 누를 끼치지 말아라."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돈은 우리에게 꼭 필요하지만 돈이 있어야만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를 선하고 아름다운 삶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 사람이 돈을 이용해서 돈이 없을 때 보다 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때 그 돈은 빛나는 것입니다. 재물의 소유 여부가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줄 리가 없습니다. 우리 인생의 방향은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성령의 은혜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돈을 생각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지는 맙시다. 하나님의 은혜보다 돈이 더 소중하다고 여기면서 살지는 맙시다. 물질주의 시대 속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거기에 휩쓸리지 맙시다. 그 모든 물질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더 큰 사랑에 우리의 소망을 두고 감사하며 우리가 여유가 없을 때 더 절약하기로 다짐하고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사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삶을 살기로 다짐합시다. 여유가 있을 때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물질이 없어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고 또 구겨진 세상을 펼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라고 여기며 삽시다. 선한 일을 위하여 사용합시다. 삶의 동기를 순전하게 합시다. 하나님과의 사랑을 모든 돈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이 땅에 살고 있으나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11 (2021.03.14._주일오전)
11. 불행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2-23)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평범한 농부가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파홈(Pahom)이었습니다. 그는 빈털터리로 일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악마가 제안했습니다. 해 뜰 때 출발해서 제자리에 돌아온 길의 모든 땅을 그에게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대신 해질 때까지 출발한 그 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 받는 것으로 약속을 했습니다. 평생을 소작농으로 가난하게 살던 그는 땅에 한이 맺힌 사람이었습니다. 좀 더 넓은 땅을 차지하려고 그는 미친 듯이 걷고, 뛰고, 달렸습니다. 다행히 지평선에 해가 떨어지기 직전에 출발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만 탈진해서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평의 땅이었습니다. 레오 톨스토이의 <사람에게 얼마나 넓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소설에 나오는 한 토막의 이야기입니다. 어리석은 파홈은 토지라는 공간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목숨 곧 시간(時間)이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지금 온 나라가 토지 때문에 난리입니다. 벌써 두 사람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땅은 사람이 살자고 마련하는 것인데 땅 때문에 목숨을 버려야 한다니 이런 미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과연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다른 의미의 땅을 위해서 파홈과 같이 단 한 평이면 충분할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탐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파홈은 토지에 한이 맺힌 나머지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고독과 불행으로부터 건져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불행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불행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교하려고 합니다.
II. 불행이란 무엇인가?
불행이란 무엇입니까? 행복(幸福)을 중국말로 씽푸(Xingfu)라고 합니다. 푸는 복(福))이고, 씽(幸)은 '우연히, 어쩌다, 요행으로'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동북아 사람들에게 행복이라는 것은 자기가 찾아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받는 것인데 받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입니다. 불행(不幸)을 뿌씽(Buxing)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불행은 요행이 없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요행을 만나는 것이 일반적입니까? 요행이 없는 것이 일반적입니까? 요행이 없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심오한 철학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행복한 것은 하늘이 특별히 점지해야 누리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인간은 요행 없이 살아가는 것이라는 통찰이 이 안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불행이라는 것은 자체로 규명되지 않고 행복의 반대 되는 경험으로써만 유추되는 것입니다. 민중서관에서 나온 2001년판 국어사전을 찾아보니까 불행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행복하지 않음, 일이 순조롭지 않거나 탈이 많음” 『국어대사전』(서울;민중서관,2001), p.1190 어떻게 보면 우리 인생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은 끝없는 불행의 연속이라는 사실입니다.
A. 끝없는 불행
전도자는 일평생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았습니다. 권력이면 권력, 지위면 지위, 소비면 소비 무엇이든지 맘먹은 대로 할 수 있고, 다 해봤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생이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2장 2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인간의 모든 불행의 배후에는 허무가 있습니다. 전도자가 헛되고 헛되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은 단지 인간이 하는 일이 허무하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 허무한 것을 좇는 인간의 존재 자체가 허무하다는 뜻입니다. 허무하다는 것은 텅 비고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있지도 않은 것들 때문에 울고 웃으면서 그것을 따라가는 인간 자신도 결국은 무(無)로 사라질 육체를 가진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만 연관을 지어서 찾으려고 한다면 결국 모든 것이 헛되다는 뜻입니다. 전도자가 허무를 강조하는 이유는 삶의 근거를 삼을 만한 것이 이 세상에 있지 않으니 그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으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점에서 그렇게 허무하고 끝없이 불행한 존재입니까? 우선 존재의 크기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존재 있어서 너무나 미천하기 때문입니다. 한 인간의 평균 크기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한껏 많이 잡아주면 남녀 통틀어서 그저 키 170cm, 몸무게 70kg 정도의 몸집을 가진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은 얼마나 하찮은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은 보시는 흰수염고래입니다. 이 고래는 시내버스 크기의 3배이고 무게가 약 160톤에서 190톤이며 일 년에 한 번 지구를 한 바퀴 돌 정도의 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크릴새우를 먹이로 찾는데 한번 삼킬 때 200만 마리의 크릴새우가 몸속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역대 있었던 공룡보다 가장 큰 크기고 이것을 똑바로 세워 놓으면 10층 아파트보다 약간 더 큽니다. 심장은 승용차보다 훨씬 크고 심장에서 나온 혈관은 남자 한 사람이 수영을 해도 충분할 정도의 공간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당나귀 한 마리 크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몸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성은 지구의 1천 배고, 태양은 목성의 1천 배인데 태양은 지구의 1백만 배의 크기입니다. 그런데 1860년에 태양의 1700배 크기에 달하는 별이 발견되었습니다. 유와이 스쿠티(UY Scuti)라는 별입니다. 여러분은 보이지도 않는 아주 희미한 점이 태양의 크기이고 그 옆에 4분의 1만큼 나와있는 것이 스쿠티라는 별입니다. 그리고 지구는 점으로 찍힌 태양의 100만분의 1입니다. 지구로부터 9500 광년 거리에 떨어져 있는 별인데 지구가 축구공이라면 이 스쿠티의 지름은 에베레스트산의 1.5 배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코로나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외국을 드나들 때 탔던 비행기로 그 별을 한 바퀴 돌려면 1천 년을 비행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주에서 지구의 크기가 이렇게 하찮은데 거기 사는 인간의 존재는 얼마나 하찮겠습니까? 내 발에 문질러져서 사라지는 개미 한 마리 허공을 내리친 손바닥에 피 한 방울 남기고 없어져 버린 모기 한 마리보다 인간이 더 대단하다는 사실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수명을 생각해 봐도 그렇습니다. 500년을 산다는 백합조개 사백 년을 산다는 그린랜드 상어 붉은 성게는 200년을 산다고 하고 자연 상태에서는 영원히 안 죽는다는 누트리쿨라라는 해파리도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은 해파리의 일종인데 성체가 되어서 노쇠할 때쯤 되면 다시 폴립으로 변합니다. 그리고 폴립은 다시 성체가 되고 성체는 폴립이 되는 것을 반복하며 죽지 않는 생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수명은 어떻습니까? 기껏해야 80세 정도 사는데, 절반은 그 이전에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에 질병이나 사고, 살해 혹은 자살 등으로 사라져가고 절반의 사람이 80세 쯤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목숨이 장구한 세월을 사는 이런 생물에 비하면 정말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벌레 같은 목숨이라고 아니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가치에 있어서도 또한 인간은 비천합니다. 인간의 위대함을 말하지만 역사는 그들의 야만을 함께 고발합니다. 자연 세계는 인류가 겪은 끔찍한 전쟁과 같은 대규모의 살상이 없습니다. 작은 이익과 사상, 종교의 다름 때문에 국가와 민족이 전쟁을 일으키고 혹은 종교의 이름으로 끔찍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갑니다. 차라리 이 세계에 사람이 살지 않거나 혹은 인간이 벌레 같은 곤충에 불과하다면 이 세상은 지금처럼 끔찍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최소한 비참한 전쟁과 무자비한 환경에 대한 파괴는 없을 것입니다. 2018년 현재 전 세계에는 약 15,850개의 핵폭탄이 있고 이 폭탄은 인구 10만 명이 사는 도시 5,283개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는 분량입니다. 이런 비이성적인 일은 전쟁 뿐 아니라 개인의 삶에서도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2019년 이후 우리 나라의 영아의 유기 및 살인이 143건이라고 보고되었으나 연일 보도되듯 가정폭력에 의해 살해되고 유기되는 수많은 어린 아이들은 통계에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부모의 학대에 의해서 죽어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인간은 알 수 없는 미래에 직면해 있다는 것 또한 불행을 설명하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들은 몰두하며 어찌하든지 개인적인 평안과 물질적인 부요를 누려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 꿈은 현실에 짓밟힐 때가 많습니다.
수많은 연어들이 떼를 지어 모천으로 회귀하는 것은 알을 낳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거기를 출발한 연어 중 태평양을 돌아서 자기의 모천으로 회귀하는 개체수는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치어 상태에서 잡아먹히고, 다 자라서는 더 큰 물고기의 밥이 되고 낚시꾼들이 던지는 미끼에 물려 생을 마감합니다. 살아 남은 것들은 수직으로 흐르는 폭포를 거스르기 위해 몸뚱아리를 바위에 부딪히며 모천으로 회귀하지만 거기에 도달하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불행을 보지만 다른 사람은 우리의 불행을 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니 사고와 질병, 죽음과 가족관계의 파괴, 치매와 사망 등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남의 일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위협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보증할 수 없을 정도의 불안정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은 맨 정신으로는 자신의 인생의 실체를 직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즈 파스칼은 자신의 팡세에서 이런 얘길 했습니다. 인간이 정직하게 자신의 인생을 바라보면 미치지 않을 수가 없는데 너무 너무 불행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보고도 미치지 않는 이유는 이미 다른 이유로 미쳤기 때문에 미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드넓은 밤하늘의 우주를 들여다보아도 절망적인 사회를 들여다보아도 자기의 어두운 마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아도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캄캄한 심연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가득 찹니다. 그 어둠 속에서 어떻게 소망의 빛을 찾겠으며 또 어떤 것을 찾았다고 믿은들 그것이 죽음에 처하도록 운명 지어진 그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이 처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현실을 직시하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은 삶을 사는지 모릅니다.
B. 불행을 직시함
인간이 불행을 직시한다고 칩시다. 그럴 때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 없는 선택입니다. 하나님 없이 인생의 불행을 직시하고 자신이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운명에 놓여 있다고 생각할 때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첫째는 운명에 체념하는 것입니다. 허무하게 살다가 죽을 운명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질문들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어디로 가는가 죽음 후에는 사후의 세계가 있는가 이 우주의 기원은 무엇인가, 등등의 고민을 더 이상 하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냥 모든 것을 운명으로 알고 체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운명은 누구의 무슨 힘 때문에 우리가 굴복해야만 하는 숙명이 된 것입니까? 이성으로는 판단할 수 없으니 그것은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이성으로 증명할 수 있기에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내가 죽는다는 사실은 이성적으로 분명한데 이에 대해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사는 것은 과연 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내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성의 논리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논리가 필요하고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논리가 필요 없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철학적인 내로남불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비참한 인간의 미래 그 운명을 용감하게 받아들인 후 바위처럼 묵묵히 누군가에 의해서인지도 모르게 운명 지어진 자신의 불행과 죽음을 그냥 기다리면서 사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입니까?
저는 어린 시절 서울의 하월곡동에서 살았습니다. 당시는 서울의 거의 변두리 맨 끝이었고 그래서 아직 자연히 살아있던 때였습니다. 동네 옆에는 밤나무골이 있었고 아름드리 밤나무들이 산을 가득 메웠습니다. 새들이 노래하고 있었고 노루들이 여기저기서 겅중거리고 뛰어다니는 때였습니다. 그 변두리에 도살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도살장 옆을 지나서 학교를 다니고 또 잠자리를 잡으러 다니곤 했습니다. 그 당시 도살장은 소를 끌고 와서 도축하는 곳이었습니다. 소를 끌고 오면, 끌고 오기 전에 먼저 산속으로 소를 몰고 가서 나무에 매달아 놓고 강제로 입을 벌려 밧줄로 묶어 놓고 양동이로 물을 들이부었습니다. 무게를 늘리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끝나면 소를 끌고 도살장으로 가는데 소는 도살장으로 자신이 끌려가는 것을 압니다. 존 바에즈(Joan Baez)의 도나도나(Donna, Donna)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먼 산 보고 슬피 울며 끌려가는 소의 이야기를 그린 노래입니다. 자신이 죽을 운명인 줄 알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한사코 가지 않겠다고 버팁니다. 이때에 평소에는 전혀 내지 않는 독특한 울음소리를 냅니다. 평소에는 내지 않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도살장에 가면 굵은 나무로 아주 좁은 통로를 만들었습니다. 통로에 줄 지어서 소들이 들어오고 뒤에서는 백정들이 채찍으로 때려서 소가 계속 앞으로 가게 하면 소 앞에 나무 한 개가 가로질러져 있고 그 앞에 소 잡는 사람은 곡괭이로 정확하게 정수리를 내리쳐서 한 번에 끝내는 것입니다. 빗맞으면 난리가 납니다. 그러니까 아주 숙달된 숙련공이 그 앞에 서서 한 번에 쳐서 곡괭이로 두개골을 뚫고 들어가서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가 눈물을 흘리며 줄을 지어서 들어옵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수십 년 전에 그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가지 않겠다고 두 발로 버티면서 슬피 우는 소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인간의 운명을 정확하게 직시하면 바로 우리가 그런 처지에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소는 자기가 죽을 때를 알기나 합니다. 옛날에는 그때가 언제인지도 모른 채 죽음에 이르는 통로에 줄지어 들어갑니다. 거기에는 어떤 예측할 수 있는 순서나 번호표는 없습니다. 올 때 각각 다르게 태어났던 것처럼 갈 때 또한 각각 다르게 가는데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갈 때는 순서가 없습니다. 그게 인간의 비참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현실을 저처럼 까발리듯이 진실을 말해 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결국 자신의 이런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체념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없이 선택할 수 있는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현실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불행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인간이 그런 현실을 인식하기는 하지만 감당할 용기가 없을 때 하는 일은 회피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파스칼은 자신의 책『팡세』에서 프랑스어로 위락(dérobement)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프랑스 고전발레 용어인데 발레는 스토리를 가지고 무용극으로 진행이 됩니다. 그런데 작가가 생각을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했으면 스토리에 집중하기 위해서 관객이 굉장히 정신적으로 긴장해 있을 것으로 생각될 때 뜬금없이 끊어버리고 모든 배우가 나와서 이야기의 내용과 아무 상관 없이 춤을 추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집중하던 정신을 잠시 누그러뜨리고 쉬었다가 그 춤이 끝나면 다시 발레의 연기가 시작됩니다. 그것을 회피(dérobement)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물질과 돈에 대한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바로 인간의 이런 불행을 회피하는데 쓸 자원을 미리 마련하려는 욕구입니다. 소위 소소한 삶의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큰 욕심 내지 말고 살자는 점에서는 칭찬할만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이 죽어야 할 우리의 운명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끌려가서 곡괭이에 맞아서 곧 죽을 소가 어떤 소는 시궁창 같은 곳에서 대기하고 어떤 소는 온돌이 깔린 집에서 편안하게 대기하고 어떤 소는 최고급 수입 사료를 먹으면서 죽음의 순간을 기다리는 차이일 뿐입니다.
1960년대 교도소 생활을 했던 사람으로부터 생생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인권이 별로 보장되지 않았을 때니까 아주 혹독한 감옥살이가 있던 시절이었고 폭력이 난무하던 시기였습니다. 자신도 형무소에 들어갔는데 감방에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답니다. 그것은 남자들한테 강간을 당하던가, 맞던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맞겠다고 했더니 이불을 씌우고 수많은 사람이 피가 나서 터지도록 짓밟고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조차도 감옥 생활을 슬기롭게 하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식당에서 밥을 주면 한주먹 정도 훔쳐서 주머니에 넣어 갖고 온답니다. 지금은 잡지도 볼 수 있고 텔레비젼까지 있다고 합니다. 그 당시엔 그런 게 있겠습니까? 그 밥을 쉬는 시간에 간수 몰래 교도소 감방에서 짓이기는 것입니다. 꾸덕꾸덕해진 다음에 그것으로 무엇을 했겠습니까? 윷과 주사위를 만들어서 감방에서 오락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즐겁게 놀다가 잠이 들었는데 이튿날 아침 고기국이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죄수의 감방이 싸해진다고 합니다. 소고기국도 아니고 당시에는 돼지고기국이었고 합니다. 사형집행 되는 날 아침에만 나오는 고기국이었습니다. 그 국이 나온다는 것은 교도소에서 누군가 오늘 사형을 당하러 가기 위해 마지막 먹는 아침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놀던 사람 중에 호명 된 사람들은 조용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뉴스와 오락거리 상업광고들을 보십시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의 운명적인 불행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미끄러지게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끊임없이 소비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은 돈에 대한 탐심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저 깊은 어둠 속에서 비명과 함께 죽어가야 할 자신의 운명에 처한 우리에게 추호의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매일 맞닥뜨리는 수많은 불행에 대한 어떠한 대비책도 되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슬퍼하고 아파해 주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러나 냉정하게 말하자면 그런다고 내 인생의 무게가 티끌만큼이라도 덜어집니까? 죽어야 할 나의 운명이 그 사랑 때문에 연장됩니까? 그것이야말로 절대적인 고독입니다. 결국 인간은 이 비참한 불행에 처한 존재로서 정신을 다른 곳에 팔지 않고서는 이 불행의 운명 앞에서 미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심리학에는 소위 실존주의적 치료 방식이 있습니다. 일종의 인간중심의 상담이론입니다. 이 때 가장 먼저 깨우쳐주는 네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너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둘째, 너는 혼자다. 셋째, 너의 현실은 네가 선택한 것이다. 넷째,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을 때 너의 실존을 가장 잘 깨닫게 된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내가 누구인지 묻지도 말고, 그냥 불행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죽을 운명을 인정하며, 그것은 바꿔 놓을 수 없으니 오늘을 즐기면서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존주의자들은 종교를 철학적 자살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런 철학을 종교적 자살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철학적인 가르침 그 위에는 종교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모든 철학의 어머니입니다. 아주 특별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이 비참하게 죽을 운명에 처했다는 사실을 용감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도 대부분 회피의 수단을 택했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한때 실존주의자들에게 열광하던 독자였습니다. 나중에 철이 들고 들여다보니 그들의 삶은 본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용기를 외치고 모든 불행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것을 직시하며 산다고 외쳤지만 수많은 실존 철학자들과 해체주의 철학자들이 성적인 탐닉과 동성애, 향락으로 생을 마감한 것은 불신자인 나에게도 별로 본받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시대의 최고의 지성이라고 불리는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봐르의 결혼은 계약 결혼으로 전세계인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그렇게 계약 결혼을 하고도 계약상의 남편은 남편대로, 계약상의 아내는 아내대로 제자들과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며 불륜이 꼬리를 무는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20세기의 위대한 사상가라고 불리는 한나 아렌트와 마틴 하이데거를 생각해 보십시오. 두 사람은 예쁜 여학생과 촉망받는 젊은 교수로 만났습니다. 그러나 결국 인류의 정신에 새로운 지평을 외쳤던 사람들이 끊임없는 불륜으로 인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불행을 회피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본모습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생은 너무나 비참하고 불안하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증거를 나열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매일매일 만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끊임없는 불행과 허무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자신의 운명을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6장 6절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전 6:6).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지 모른다고 해서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을 존재라는 사실까지는 알지라도 그 후에 내 영혼의 운명을 그것 때문에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답을 찾기를 포기하고 쌓아 올린 인생의 탑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대로 이 세상을 살고 자신의 인생을 영위해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생은 불현듯 끝날 것이고 그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7절은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끊임없는 위락에 빠져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결국은 끝없는 영적인 어두움과 죽음 속에서 속임 속에서, 영원한 파멸과 죽음에 이르는 것 이외에 종말에 그 무엇이 있겠습니까? 인간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은 틀림이 없습니다. 24시간 자신의 존재의 기원과 운명에 관한 사색으로 씨름하기에 충분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여가와 휴식, 음악과 예술, 문학과 학문 심지어는 오락으로 기분 전환을 하는 것도 우리 인생에 필요합니다. 자신의 고혈을 다 짜 바쳐 하나님만을 위해서 사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줍니다. 마가복음 6장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가서 잠깐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막 6:31).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쉬지 않으셨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아시기 때문에 한적한 곳에 가서 쉬라고 하셨습니다. 신약 성경에 위로하시는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재물과 돈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노동을 통해 정당한 대가로 그것을 얻어야 합니다. 이런 나의 위락을 위함조차도 결코 남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면 더욱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락은 위락에 그칠 뿐 그것이 우리 인생의 참된 목적을 따라 살게 만들어 주지 않습니다. 위락을 통해 다소 힘을 얻고 다시 달려갈 길을 달려가지 않는다면 그 위락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가 죽기 직전에 먹는 맛있는 사료의 맛에 취해 자신의 죽을 운명을 잠시 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락은 우리 인생의 참된 목적을 따라 살기 위한 수단이어야 하며 그 현실을 회피하기 위한 현실 도피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믿음에서 물러가 침륜에 빠지게 될 것이오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로써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9). 하나님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미친 듯이 용감해져서 장렬하게 죽어 버리던가 아니면 끊임없이 자신의 다가올 운명으로부터 정신을 회피시켜서 위락 속에 살다가 불현듯 죽는 것 이외에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선택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불행을 직시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선택입니다. 전도자가 그렇게 목놓아 인생이 허무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절절하게 피력하는 이유도 허무주의자가 되게 하려 함이 아니요 하나님 의지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주와 인간, 심지어 나 자신으로부터 아무런 희망을 가질 기대를 갖지 않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유한하고 세상에서 겪는 불행과 행복은 미안하게도 이성적으로 모두 설명되지 않습니다. 왜 내가 이 가슴 아픈 길을 걸어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나는 어려서 죽음의 위협을 느껴야 하는 부모의 손 아래서 자라는 아이가 되었을까? 누가 이성적인 대답을 그에게 줄 수가 있겠습니까? 죽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은 살려 두시고, 살고 싶은 나는 죽음으로 데려가시는 뜻은 도대체 무엇일까? 이것이 과연 이성적으로 설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악한 자들은 남겨지고, 사랑스러운 자들은 죽음의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는 사망의 나루터에서 과연 우리의 이성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줍니까? 결국 바람처럼 지나가는 우리의 인생은 그야말로 우주적 존재들에게 비추어 본다면 일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이 끝난 후에는 우리의 동의와 상관 없이 사후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성이 아니라 심정으로 아는 것이니 이 심정이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원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신이 노여워했나보다, 마귀가 죽였나보다 하나님께 벌을 받았나보다 아니면 나쁜 짓을 하더니 결국 하늘의 보응을 받았나 보다 운의 대단히 나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하고 나니까 그렇게 죽어간 수많은 사람이 병균에 전염되어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던 사람들에게 과연 그 병균에 대해서 설명하면 누가 그것을 믿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은 믿지만 보이는 것은 있는 것의 전부가 아니고 오히려 보이는 것은 있는 것들 중 지극히 일부일 뿐이기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있는 것들을 판단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독특한 심정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우리가 영혼으로 밖에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보게 해 주시고 우리는 그것을 믿은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인생의 이러한 불행 속에서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찾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왜 우리 중에는 진짜로 행복한 사람이 소수인 것입니까? 인생이 끝난 후에는 사후의 세계가 있으며 이는 이성이 아니라 심정으로 아는 것이니 이 심정이 곧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여 자신을 맡기는 것이니 이것이 곧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불가해한 인생에 대해 이치를 깨우치게 되고 자기 앞에 기다리고 있는 큰 불행이 단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스쳐 가는 일일 뿐 그 뒤에는 어마어마한 인생의 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기약할 수 없는 우리의 미래 끊임없이 연속되는 불행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도대체 우리의 인생에 무슨 손해를 가져다 주겠습니까? 살아있는 동안에는 내가 그분을 의지함으로 담대하게 살 수 있고 사람들은 나를 끝까지 사랑하지 않고 버려도 그분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그분의 품에서 안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제된 삶을 살 수 있고 이 세상 헛된 것들에 자신의 생명을 모두 바쳐 종노릇 하는 후회할 인생은 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신앙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손해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이 연속되는 인생의 불행 운명처럼 펼쳐지는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피할 길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가 허무하다 허무하다 헛되고 헛되도다 통곡하듯이 울부짖은 것은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행복을 말하기 위한 전주곡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행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직시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고 현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남에게 일어난 모든 최고의 불행은 내일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어떠한 불행이 닥쳐도 예기치 못했던 불행은 없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또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 불행의 파도 속에서 우리 인간의 처지는 수십 미터로 길길이 뛰는 폭풍의 바다 위에 떠 있는 단 두 명이 탈 수 있는 쪽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배를 침몰시키기 위해서 온 바다가 들고 일어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파도 하나의 일부분, 물결 하나만 뱃머리를 때려도 그 배는 산산조각 박살이 나고 우리는 그 바다에 빠져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폭풍 이는 바다와 같은 인생 아무것도 의지 할 것 없는 쪽배와 같은 우리의 인생이지만 그 모든 바다를 자기의 마음대로 부리시는 하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불행을 이기게 하시면 그는 이 땅에서 더 살면서 하나님을 섬길 것이고 데려가시면 이 고단한 삶을 마무리하고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소망을 그리스도께 두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인생의 닻을 내리십시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할 적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존재의 숙명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사실은 없는 것들인데 있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들을 찾다가 자신도 사라져 가는 존재가 되지 말고 영원히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붙들고 살아서 인생의 허무를 이기고 영원을 향해 가는 순례자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영국의 사상가 체스터턴은 “미친 사람은 이성(理性)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이성만 믿는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늘 겪는 불행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보여 줍니다. 정말 드넓은 우주에 하잘 것 없는 존재 자연의 바람에 콧김만 불어도 어디론가 날라가 산산이 먼지처럼 부서질 허무한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이 사실 앞에서 우리는 좌절하고 낙담하는 대신 하나님이 우리를 허무하게 만드시고 이 세상을 헛되게 만드신 것은 추호도 자신이나 세상을 의지하지 말고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고 의미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만드신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자이면서도 그 인생의 진실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사람을 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 주께서 그들을 처럼 쓸어가시나이다 … 풀은 아침에 이 피어 자라다가 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시 90:3-6). 우리의 인생이 그와 같다는 뜻입니다.
지혜는 인간의 존재가 덧없고 하찮음을 아는 것입니다. 죽음의 빛으로 삶을 비춰 보지 않으면 삶의 의미를 제대로 발견할 수 없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지거나 근거 없는 희망에 치우쳐 인생을 망치기 일 수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당신과 함께 이 온 세상을 다스릴 위대한 존재로 여겨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질 벌레와 같은 존재를 위해서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불행을 넘어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가 영원히 의지해야 할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며 그것을 기억하며 생사간에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 분만 의지하면서 인생의 허무와 불행을 이기는 여러분들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12 (2021.03.21._주일오전)
12. 친구란 무엇인가?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잠 18:24)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친구가 없는 인생은 홀로 광야를 걷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그러나 친구를 찾는 것에는 상처와 배신의 위험도 따릅니다. 그래서 친구를 갖는 것은 일종의 모험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많이 투자해도 결코 아깝지 않은 자산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친구입니다. 인생길에서 친구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하나님을 비록 믿지는 않았지만 로마의 위대한 정치가요 사상가였던 키케로는 그의 유명한 책 우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정이란 … 선의와 호감을 곁들인 감정의 완전한 일치다. 지혜를 제외하고는 그것이 불사의 신들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믿고 싶다” Cicero,『우정에 관하여』(Laelius de Amicitia), 6.20
본문의 교훈은 잠언 18장에서 인간관계의 지혜를 다루는 문맥 안에 있습니다. 지혜자는 잠언에서 친구에 관해 무려 열 한 번이나 교훈하는데 부정적으로 두 번, 중립적으로 세 번 긍정적으로 여섯 번이나 언급합니다.
II. 친구란 무엇인가?
자, 그러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친구란 무엇입니까? 국어 사전적으로는 가깝게 오래 사귀어 온 벗입니다. 친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라아(raa)도 역시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잠언 18장 24절의 본문은 번역상 논쟁이 있는 구절입니다. 그 이유는 명사인 '친구'와 '악인'이 똑같은 단어입니다. 또 동사인 '친구로 대하다'와 '악을 행하다'도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말 성경의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접 옮기면 다음과 같이 다른 뜻이 됩니다.
A. 친구의 위험성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친구의 위험성입니다. 인생에서 친구는 너무나 필요하지만 거기에는 위험도 뒤따릅니다. 때로는 잘못된 친구를 사귀고 친구에게 속기 때문에 생명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자주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친구에게 속을 우려와 배신의 위험입니다. 친구를 사귀어 우정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남으로 만났지만 형제보다 더욱 연합된 마음이 되어 서로를 신뢰하고 사랑하여 우정을 쌓기까지 많은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얻은 사람은 인생의 진정한 동반자이고 때로는 가족들보다 우리의 인생에 더 큰 도움을 줄 때가 많습니다.
친구는 특별한 타인입니다. 타인이지만 특별한 사람이며, 흔치 않은 사람이며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결코 친구일 수가 없습니다. 친구로 여기며 살아왔는데 많은 우정을 주고 헌신을 했는데 그에게 이익이 되지 않을 때에 그는 나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때 그를 믿었던 만큼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친구를 찾는 사람이 감수해야 할 위험성이기도 합니다.
가난하게 되었다는 이유 때문에 떠나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었음을 증거하는 것이니 그는 내가 꼭 필요할 때에 있지 않으므로 그는 진정한 친구가 아님을 보여준 것이며 이는 변심한 것입니다. 잠언 19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는 그의 형제들에게도 미움을 받거든 하물며 친구야 그를 멀리 하지 아니하겠느냐 따라가며 말하려 할지라도 그들이 없어졌으리라” 자, 그러니 이 지혜자가 많은 친구가 있다고 해도 그중에 어떤 친구는 부유할 때만 친구이고 가난해졌을 때는 그를 냉혹하게 버리는 사람이니 그를 따라가며 말을 좀 붙여 보려고 할지라도 그는 속히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믿었던 친구가 자신을 이렇게 대할 때 느끼는 상처는 차라리 친구 없이 사는 사람이 오히려 낫다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 줄 정도로 커다란 고통입니다.
시인 역시 친구의 큰 상처를 입기도 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시편 41편 9절에서 시인은 그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내 떡을 나누어 먹던"이라는 본문의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친구가 궁핍했을 때 자신이 도움을 주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며 "떡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히브리 사람들에게 한 식구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말은 자신이 어려울 때 배신하는 그 친구를 평소 가족처럼 여긴 시인의 애틋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어려운 친구를 정성껏 도왔고 마음으로는 그를 가족처럼 여기며 가까이 두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시인이 고난을 당했을 때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이용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 친구 편에 서서 그를 지지해주는 것이 자신에게 추호도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에 매정하게 그를 버렸던 것입니다. 한때는 친구였던 자가 자기의 적이 되었음을 보여주고 한때는 친구였던 자가 모든 대적들 중에서 가장 간악하게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많은 슬픔은 이러한 사랑과 신뢰의 배신에서 오는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는 상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가난하고 힘든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사람으로부터 받는 실망 내가 신뢰했던 사람들에게 받는 배신 내가 사랑하고 아꼈던 사람으로부터 받는 배반 이런 것들은 우리에게 견딜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심지어는 이 세상 존재 전체에 대해서 회의를 품게 만들어 줍니다.
시인이 우정이라고 여겼던 관계는 사실상 자기를 이용하는 관계였습니다. 바보같이 그것도 몰랐으니 역경에 처해 도움이 필요할 때 친구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친구인 자신을 배신했습니다. 그때 받았던 시인의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이렇게 절절한 시로 남겼겠습니까? 그런 관계의 깨어짐은 우리에게 커다란 실망과 상처를 안겨주고 삶의 의욕을 꺾으며, 심지어는 삶보다는 죽음을 더 가깝게 생각할 절망을 안겨 주기도 합니다.
딜레마는 이것입니다. 마음을 주지 않으면 진정한 우정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언제나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배신과 실망의 위험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험 없이는 친구를 얻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진실한 친구를 갖기 위해서는 이런 모험을 무릅쓰고 친구를 위해 많은 헌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친구는 너무나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때로는 어쩔 수 없는 이런 모험과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친구를 찾고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며 우정은 가꿀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로 이런 친구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1절에서 가난한 나사로를 향해 "우리 친구 나라로"라고 불러 주셨고 요한복음 15장 14절에서는 "너희는... 나의 친구"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많은 사랑이 있어도 친구를 위해 자신을 버리는 희생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 이처럼 친구는 위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기도 하지만 친구를 통해서 때로는 실망과 배신의 고통을 겪기도 하니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도 이 세상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깨닫고 사람을 사랑하지만 의지할 이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B. 친구의 필요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친구의 필요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친구라는 존재가 왜 그렇게 꼭 필요한 것일까요? 최소한 다음의 네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실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믿음으로 잘 이기면 우리가 성숙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 깨어진 우정은 수치와 상처를 남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많은 고통과 실패 때로는 아무도 모르는 내 인생의 넘어짐 삶과 죽음을 오가는 극도의 고독 속에서 우리가 아무에게나 이렇게 소상한 것들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누가 그러고 싶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나를 가엾이 여기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혹시 사랑한다고 고백할지라도 나를 깊이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내밀한 나의 인생의 사연을 털어놓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를 사랑하고 이해해 주어서 평소 나에게 신뢰를 주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도 이런 것들을 털어놓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하지 않고 때로는 실패하고, 때로는 넘어집니다. 누구에게도 이 사연을 이야기할 수 없는 은밀한 고통 속에서 지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정이라는 수단을 주셔서 우리가 넘어질 때 붙드시고 쓰러질 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도구로 삼으신 것입니다. 좁은 의미에 친구는 같은 또래의 벗입니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친구는 자기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가진 모든 사람입니다. 선배나 스승, 부모나 혹은 멘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안전하게 서 있지 않으니 누구나 넘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때가 인생의 위기입니다. 그때 나는 넘어졌어도 내 친구는 굳게 서 있을 수 있으니 굳게 서 있는 그에게 넘어진 내가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전에 그가 넘어질 때는 내가 온전히 서 있어서 그를 도와주었고 지금은 내가 넘어져서 온전히 서 있는 그의 도움을 받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이 살아가는 것보다는 두 사람이 함께 묶여져 살아가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우정의 필요성을 너무나 간절히 느낍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성경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처한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기에 친구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잠언 27장 9절은 이 사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한 친구의 충고와 조언이 올바른 것이라면 그것은 원수들의 입맞춤보다 우리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아는 한 목사님이 우정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목회를 하다가 매우 큰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그분의 말로는 온갖 오해와 누명을 뒤집어쓰고 자신의 이름이 땅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되었을 때 도저히 이 나라의 있을 수가 없어서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고 합니다. 가기 전에 친구에게 연락을 해서 내가 이러저러한 어려움을 당해서 너무 견딜 수가 없어서 잠시 이 땅을 떠나 미국으로 가려 한다고 했더니 그 친구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출구에서 나오는 친구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꼈다고 합니다. 그런 관계가 하루아침에 생기겠습니까? 그 미국인 친구에게는 자기 친구가 정말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가 죄를 지었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오해한 것인지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친구가 지금 극도의 고통 속에 있고 자기를 찾아왔다는 사실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울어준 그 친구가 일생 잊을 수 없는 우정을 자신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친구의 충고와 조언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하는 충고니 그것이 나의 인생에 얼마나 소중한 것이 되겠습니까? 높은 지위에 있고 많은 재물을 가질 때 자주 다가와서 아첨에 입맞춤하던 그 수많은 무리들이 준 위로와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혹시 내가 미끄러졌을 때 그것을 소문거리로 삼을지 모르지만 참된 친구는 그런 상황에서도 나의 명예를 보존해 줍니다. 그리고 내가 바른 길로 돌아오기를 바랄 것입니다.
참된 친구는 나의 영혼을 위하여 염려하기를 마치 자기의 영혼을 위해 근심하듯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친구라는 선물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친구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알고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버리지 않고 위로하시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진리 안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친구를 주신 것이니 이러한 삶에 도움을 주지 않는 친구는 친구가 아니라 악인이며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서는 안 될 잘못된 만남입니다. 참된 우정은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이 연합되어 있는 관계입니다. "연합되어 있다"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다바크"인데 "붙어 있다"는 뜻입니다. 현대 히브리어에서 이 말이 명사가 되면 "데베크"가 되는데, 풀 혹은 접착제를 의미합니다. 그 마음으로 서로 일치를 이루고 있는 사이입니다. 우리는 늘 넘어질 수 있고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은 조롱하고 손가락질 할 것이지만 나의 실패와 넘어짐을 자신의 실패와 넘어짐처럼 아파하고 사랑하며 우리와 함께 마음을 나누어 줄 친구가 필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말씀 안에서 믿음으로 살고자 하지만 항상 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아주 뛰어난 믿음을 가지고 해박한 말씀의 지식을 가진 사람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역사의 제왕들 또한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친구가 필요합니다. 어떤 때는 내가 친구보다 총명하지만 또 다른 때는 친구가 나보다 총명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서로 친구가 필요합니다. 오해의 어두운 구름이 끼고 오류의 그림자가 우리의 눈을 가릴 때 총명한 친구는 우리에게 정신을 일깨워주어 바르게 판단하도록 사랑으로 우리에게 충고합니다. 오늘은 그가 충고했지만 내일은 그의 마음이 어두워질 수 있으니 그때 내가 깨어 있다면 친구에게 일생의 도움을 줄 조언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친구와의 우정 속에서 시련과 고난의 고비를 넘으며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때든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요나단이라는 친구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때에 어쩌면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충분했을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줄을 알기에 요나단이라는 친구를 주었습니다. 아버지를 대적하면서까지 자기를 기름 부은 자로 여기고 사랑해 주었던 우정을 통해서 시인이 받았던 위로와 사랑은 곧 하나님께서 직접 부어 주시는 위로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그를 버리고 떠났던 날에도 자신의 목숨보다 이 시인을 사랑했고 그래서 시인은 넘어졌으나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신뢰하는 친구에게 꼭 필요할 때에 그런 판단을 빌리며 살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자산입니까? 친구의 도움으로 자신이 보는 것과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보고 친구와 함께 대화를 나눔으로써 좁았던 자신의 생각을 넓히고 또 그릇된 자신의 생각을 바르게 하는 유익이 친구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27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모든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듣기 좋은 얘기를 원하고 그렇지 않은 말은 듣기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듣기 싫은 이야기를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혜는 나만의 소유가 아닙니다. 남의 말에 전혀 귀를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 곁에는 친구가 없을 것입니다. 혹시 권력과 재물이 많다면 아첨하는 사람들만 남을 것이니 그런 사람에게 둘러싸일수록 그는 하나님의 지혜로부터 멀어질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줏대 없이 남의 말에 휘둘리기만 하는 사람만큼이나 비참한 사람입니다. 사랑과 신뢰로 다져진 우정 안에서 주는 친구의 지혜로운 충고는 우리 인생의 어두운 밤을 밝혀 주나니 이렇게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적막한 삶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친구라는 선물을 주십니다.
세 번째는 공감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악기가 울리는 공간을 필요로 하듯이 인간에게는 자기의 처지를 공감해 줄 타인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런 친구가 단 한 사람도 없지만 그래도 외롭지 않게 살아갈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매우 뛰어난 신자라면 다른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공감해 주지 않아도 넉넉히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뛰어난 영적인 사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만 마음을 쏟아놓고 그것으로 충분할 정도로 꿋꿋이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뛰어난 사람이 우리 중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강함과 함께 약함이 있고, 순결함과 함께 불결함이 있으며 진리의 빛과 함께 오류의 어두움이 같이 있어서 둘 중에 어느 것이 언제 발현될지 모릅니다. 오히려 대부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도 인간을 통해 경험되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는 하나님의 위로도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다가올 때가 너무나 많지 않습니까? 기쁨과 사랑의 감정은 친구와 나눌수록 더욱 더 커집니다. 슬픔과 분노의 감정은 친구와 나눌수록 작아지니 우리의 인생 전체가 친구를 필요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감정을 공감해 줄 타인의 마음이 없을 때 신앙적으로 모두 소화하지 못한 고통은 자기 안에서 상처와 슬픔이 되어 성품이 굽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불안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칩시다. 아마 그는 약한 사람의 마음을 자기의 감정을 배설하는 쓰레기통으로 삼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 쓰레기를 받아주는 사람이나 쓰레기를 채우는 사람에게나 무슨 유익을 가져다줄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악취만 풍길 뿐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공감하도록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우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애틋해 하는 사람들이 우정을 나눔으로 그 마음에서 진리와 사랑이 점점 증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친구를 사랑하게 되고 친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진리 안에 있는 사랑을 기뻐하시기에 예수께서도 진리 안에서 저희를 하나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인간은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자신의 마음을 타인의 마음 안에 울려 퍼지도록 타인의 마음은 자신의 가슴 안에 공감하도록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은 현저히 불행한 사람인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행복은 타인의 마음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기쁜 것만 아니라 슬픈 것까지도 내가 공감할 때 나는 비로소 행복하게 되는 것이니 이로써 인간을 알고 하나님을 알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그는 내 인생에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존재가 되는 우정의 삶이 바로 덕스러운 삶입니다. 우리의 신앙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공감해 주는 것을 경험함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공감함으로 그분이 창 칼로 우리를 위협하지 않으셔도 채찍으로 우리를 위협하지 않으셔도 공감하는 그 마음 때문에 예수 위해 살고 예수 위해 죽고, 예수 위해 충성하는 사람들이 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신앙은 예수의 마음을 얼마나 공감하느냐이고 그래서 결국 그 공감의 깊이는 사랑의 깊이인 것입니다. 한 사람이 누군가의 마음을 깊이 공감해주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고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고통 받는 자와 함께 고통을 겪는 것이야말로 예수의 분신으로 사는 삶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화된 만큼 우리는 그런 삶을 사는 것이니 모든 이에게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덕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덕스러운 삶을 사는데 있으니 좋은 친구는 이를 위해 꼭 필요합니다. 덕스러운 삶은 선한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삶은 선하고 아름다운 나의 인격과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덕스러운 삶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사랑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런 덕스러운 삶을 살아서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사랑은 선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의 성향이니 이미 있는 관계는 더 깊게 하고 없는 관계는 새로 맺게 하는 힘입니다. 그래서 오류 가운데 있는 사람을 사랑의 우정을 통해서 진리의 빛으로 돌아오게 하고 허탄한 것을 좋아하던 사람의 눈을 돌이켜 참으로 신실하신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세상에 존재함으로 남에게 유익이 되고 그들을 행복에 이르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의 가치가 여기에 있으니 그가 부유하고 가난하고 유명하고 무명하며 높은 지위에 있고 낮은 지위에 있는 것은 이런 삶을 살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는 덕으로써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나를 도와주니 이 친구를 하나님의 선물로 알고 친구를 배신하지 않으며 진실한 우의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으로 불러 주신 또 하나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선하게 살려는 사람만이 진정한 의미의 친구가 될 수 있으니 악한 친구는 나를 하나님께 데려가지 못하고 행복 대신 불행으로 나를 이끌기 때문입니다. 단지 몸의 이익이 아니라 정신의 진리 때문에 선하게 살고 싶은 사람들만이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으니 진리 안에서 이 친구를 찾고 찾은 친구를 결코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그에게 마음을 다하십시오. 주께 하듯이 친구에게 하며, 우정을 배신하지 마십시오. 그가 아플 때 함께 그 자리에 있어 주고 눈물을 흘릴 때 그의 는 눈물을 닦아주며 그가 나를 필요로 할 때 나 자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런 우정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덕의 근본입니다. 경건한 친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끔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충만하고 뜨겁게 사랑하며 사는 것은 아니기에 이런 친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때로는 찌르는 침처럼 우리를 따끔하게 해서 정신을 차리게 만들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용기를 갖게 해주며 때로는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보여 주어 어둠과 실망 속에서 볼 수 없었던 눈을 뜨게 해주는 친구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고 이런 친구를 이미 주셨다면 그 친구를 위해 마음을 다해 헌신하십시오. 그에게 여러분을 친구로 사귄 보람을 느끼게 해주십시오. 여러분이 필요할 때만 그 친구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구가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주는 사람이 되십시오. 진리 안에서 친구를 갖고 그 친구를 자신처럼 소중히 여기십시오. 우정을 가꾸어 가십시오. 이는 연약한 우리의 인생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꼭 필요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13 (2021.04.11._주일오전)
13. 정직이란 무엇인가?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 3:32)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는 부정직이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정직의 가치가 무시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신문지 상에 흔히 오르내리는 정치가들의 스캔들에는 예외 없이 부정직이라는 속임수가 관련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국가에 의해 자행되는 폭력 또한 국민을 속이는 거짓이나 위장 혹은 기만 속에서 발생합니다.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부도덕한 한 개인의 삶은 부정직과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삶이며 따라서 그는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정직하지 않은 삶은 결코 덕스러울 수 없으며 모든 것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거짓으로 가득 찬 한 개인의 삶을 본받아야 할 만한 감동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II. 정직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정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국어 사전적인 의미로 보면 "정직이란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바르고 곧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꾸밈이 없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올바르다는 것입니까? 곧다는 것입니까? 결국 "곧다, 바르다 꾸밈이 없다"는 것은 본래의 모습 그리고 올바른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가능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정직이며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 바름이며 올곧음이냐는 것입니다. 정직을 영어로는 honesty 혹은 truthfulness라고 합니다. 문어적인 표현으로 많이 쓰이는 후자의 단어는 “진리 혹은 진실로 가득 찬”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정직이라는 것은 진리 혹은 진실과 떼어놓을 수 없는 어떤 미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이 진리를 부인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거부할 때 정직에 대해 관용하는 세상이 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거짓말 그리고 허위와 거짓 속임수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정직하다는 말은 단지 거짓말하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훨씬 더 총체적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 3:32) 여기서 "정직한"은 히브리어로 예샤림(yesharim)이라는 단어는 패역한 자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패역하다"는 것이 단지 거짓말을 몇 번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무언가 조금 속이고 저녁이 되어서 가책을 받는 사람을 가리켜서 패역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정직하다는 것은 단지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그 자체가 올바르고 곧아서 결국은 그 정신과 마음의 구조가 거짓말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총체적인 인격과 삶의 올바름을 뜻하는 것입니다.
A. 부정직한 세상
이 세상은 부정직한 세상입니다. 이제 더 이상 세상은 부정직을 별로 크게 문제로 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제는 정치가들의 거짓말 정도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법을 판단하고 재판을 하는 판사들의 거짓말도 우리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렇게 거짓에 대해서 정직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너그러운 사회는 아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정치는 신뢰를 잃어버리고 사람들은 재판의 결과에 굴복하지 않으며 재판을 통해서 정의가 구현될 것이라는 희망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 국가는 사람이 살만한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일상적인 생활에서 경제적인 거래나 도덕적인 규칙으로부터 시작해서 정치에 이르기까지 부정직이 만연한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거짓말을 절대로 안 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고 하면 놀라지만 늘 거짓말을 한다고 하면 우리는 조금도 놀라지 않습니다.
유난히 초고령자가 많이 보고된 일본 사회를 조사해보니 사실은 진짜로 오래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채 장기간 유족들이 연금을 수급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서 일본 사회에 충격을 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도 일본 사회는 정직하고 원칙이 통하는 사회라고 믿었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사회의 한 단면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고레에다 히로카즈라고 하는 영화감독입니다. 이 사람이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2018년 칸느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을 정도로 커다란 인기를 끌었습니다. 일본 사회의 단절에 관한 문제를 아주 진지하게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감명 깊은 영화입니다. 그런데 "어느 가족"이라는 영화는 2010년 도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얻은 모티브로 제작된 것입니다. 2010년 07월 당시 1899년 생으로 호적상 111세가 된 최고령 남성이 살아 있었습니다. 계속 연금을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무 기이하게 생각한 나머지 공무원이 직접 방문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이 노인은 언제 죽었는지 사체는 완전히 백골이 되어 있었고 그때까지 사체를 집에 놓아둔 채 자녀들이 노령연금을 부정수급받으며 금융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의 나라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상습적으로 고속도로 요금을 내지 않고 도망 다니던 차들이 대대적인 단속에 의해 적발되고 있습니다. 최근 5년간 민자고속도로 통행료를 50회 이상 미납한 차량의 숫자가 4만 9천 대고 그 금액이 21억 원에 달한다고 하니 깜짝 놀랄 일입니다. 민자고속도로가 아니라 국유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요금 포탈 행위를 포함하면 정말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고속도로에서 요금을 안 내고 포탈할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을 가르쳐 드릴 테니 사용하지는 마십시오. 예전에는 빠져나가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차단봉이 아주 딱딱한 막대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부딪치면 차가 망가지고 당연히 사고가 납니다. 그런데 내려진 차단봉을 과속으로 달려오다가 급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사람들이 죽는 사고가 여러 번 일어났습니다. 그다음부터는 차단봉을 통과해도 괜찮게 스폰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맘만 먹으면 과속으로 100킬로를 달리면서 툭 치고 지나가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차단봉을 치고 지나가면서 서울, 부산 간 고속도로를 비롯한 민자고속도로를 마구 이용하면서 결국은 무법천지로 요금을 내지 않은 것입니다. 더욱이 민자고속도로는 통일이 안되어 있기 때문에 구간마다 징수 주체가 달라서 A구간을 불법 통과하고 B 구간요금소에서 지불하려고 하면 거기서는 돈을 받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기가 위반했던 그 고속도로에 있는 영업소에서 정산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아는 사람들이 이렇게 부정직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렇게 해서 절약한 돈으로 얼마나 잘 사는지 한 번 두고 보겠습니다.
거짓이 상습화되면 자기 자신의 거짓말을 진심이라고 믿게 되는 말과 감정의 일체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소위 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리플리 증후군(Ripley Syndrome)이라고 하는 성격장애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한번 걸리면 우리는 완벽하게 속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심하면 거짓말 탐지기까지 통과하게 됩니다. 자신이 거짓말하는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감정과 호흡까지 완전히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문이나 매스컴을 보면서 이미 그것을 뒤집어 해석해야 사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에 학습되어 있습니다. 정치인 아무개가 그 사람 안 만났다고 하더라 그러면 만난 것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아무개 정치인은 절대로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하더라, 그러면 받았다고 해석해야 합니다. 이렇게 뒤집어야만 사실에 접근하고 세월이 흘러가면 그것을 뒤집은 우리의 추측이 맞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단 사람의 말을 믿지 않고 보는 사람들이 손해를 덜 보는 사회가 되었으니 이것이 어떻게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언젠가 지인을 만날 일이 있고 선물할 일이 있어서 저는 상품권 20만원을 예쁜 상품권 상자에 담아서 함께 밥을 먹으러 갔습니다. 식사가 끝난 후에 감사할 표시로 건네줄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식탁 위에 놓고 밥을 먹기에는 모양새가 안 좋아서 식탁 아래에 내려놓았습니다. 앉아있는데 옆 사람들과 테이블이 가까이에 있는 큰 방이었습니다. 그래서 불편했는데 종업원이 왔습니다. "손님, 바로 옆방이 비었는데 독방입니다. 옮기시겠습니까?" 그래서 고맙다고 하면서 옮겼습니다. 그리고 한정식이었으니까 꽤 시간이 걸려서 1시간 정도 식사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물을 주려고 보니까 옆방에 두고 왔습니다. 저는 당연히 거기 있겠지 하고 저쪽 방에 제가 식사하기 전에 식탁 아래에 놓아둔 물건이 하나 있는데 찾아봐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가서 보니까 없다고 하면서 한 팀이 밥을 먹고 갔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것이 아닌데 왜 가지고 갑니까? 당연히 테이블 밑에서 그것이 발견되면 종업원을 불러서 여기에 떨어져 있었으니 누군가 흘리고 갔을 텐데 주인을 찾아 주라고 하며 자기는 밥 먹고 돈 내고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갔습니다. 백화점 상품권이었습니다. 그 사람도 그것을 백화점에 가져가서 자기 자식들과 마누라에게 무엇을 사 주든지 자기가 무엇을 사 먹었든지 했을 것입니다. 그래봐야 20만원입니다. 나는 그것이 조금 아깝기는 하지만 아까운 감정보다는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결국 양심을 팔아먹은 정직의 가치가 20만원 밖에 안 됐던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 있을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창피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자기 자식들에게는 정직을 가르칠 것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합니다. 20만원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그 인간이 불쌍합니다.
문방구에서 물건을 샀는데 주인이 백지 영수증을 주면서 알아서 쓰라고 하는 것을 여러분은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간이영수증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줄 알았더니 유럽에서도 버젓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유럽은 택시비가 비싸서 출장을 가도 저는 웬만하면 택시를 타지 않습니다. 그런데 택시를 탈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겼습니다. 택시를 탔습니다. 목적지까지 갔는데 요금이 꽤 나왔습니다. 카드가 되느냐고 물었더니 카드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다행히 현금이 있어서 결국 현금을 줬습니다. 영수증이 필요하다고 했더니 어깨를 으쓱하면서 영수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회계 처리를 해야 되기 때문에 나는 반드시 영수증이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뒤적이며 무언가 하나를 주었는데 영수증 용지였습니다. 건네주면서 네가 원하는 대로 써서 사용하라고 해서 싫다고 했습니다. 나는 여기에 내 글씨로 쓰고 싶지 않고 네가 택시를 운전했으니까 미터기를 보고 네가 요금을 써서 나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마지못해서 꼬불꼬불 글씨도 잘 못쓰면서 숫자를 써서 건네받았습니다. 그러니 그만큼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독일에 갔을 때 물건을 한번 샀는데 물론 노점상이긴 하지만 난 당연히 영수증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영수증이 없다고 하면서 영수증 없이 사려면 사고 그렇지 않으면 말라고 했습니다. 결국 세금 포탈 아닙니까? 나라를 막론하고 어디에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볼 때에 결국 인간이 사는 사회가 얼마나 부정직에 노출되어 있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변했겠지만 제가 직장 생활할 때의 일입니다. 월말이 되면 담당자가 기관장을 대신해서 일식집, 한식집, 중식집을 돌아다니면서 가짜 영수증을 모으던 광경이 눈에 생생합니다. 지방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데 앞자리에서 열심히 설교를 들으며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변호사였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분이 함께 합석을 해서 몇 사람이 차를 마시면서 담소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인권 변호사라고 하면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 돈 없는 사람들을 자기네 로펌이 얼마나 헌신적으로 도와주는지 아주 장황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참 귀한 분이라고 생각을 했고 돈이 없어서 변호사를 구하지 못하는 사람의 인권을 위해서 돈도 안 되는 일에 헌신하고 있다니 참으로 고맙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물었습니다. "세금은 제대로 내십니까?" 갑자기 이분이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러더니 자기가 로펌의 대표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그것은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한쪽에서는 옳은 일을 하시고 한쪽에서는 부정직한 일을 하시네요." 그리 기분 나쁘게 얘기하지는 않고 부드럽게 따끔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셔야지 인권변호하시는 것이 더 빛나지 않겠습니까?"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목사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지금 나이쯤 됐더라면 그냥 조용히 웃고 넘어갔을 텐데 그땐 젊은 혈기에 그랬습니다. 자, 보십시오. 그냥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자기가 편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는 사소한 거짓말, 도둑질은 그저 크게 문제가 안 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언젠가 일입니다. 인터넷에서 들어갔는데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십니다. 설교 시리즈의 제목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것을 하는 분도 있다고 생각하고 우연히 들어가 봤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설교 1번부터 마지막 5번까지 똑같은 내용을 열렬히 설교하고 계시는데 원 저자가 김남준이라는 이야기는 안 했습니다. 어느 날 잡지가 한 권 배달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 잡지에 기고한 적이 없는데 내 글이 실렸습니다. 조금 이상해서 자세히 읽어 보니까 내 글은 틀림이 없는데 써서 내신 분은 어느 교수님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줄 알고 직원들을 불러서 이름을 가리고 두 페이지를 읽어보라고 한 후에 누구의 글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글입니다. 목사님의 책 000에 나온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버젓이 자신의 이름으로 그것도 논문을 현직 교수가 냈습니다. 왜 우리는 이런 식의 삶을 살아갑니까? 저는 그래서 정말 나 죽은 다음에라도 이런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합니다. 초창기에는 그런 면에서 약간 너그러웠기 때문에 인용하고도 그냥 지나가고 못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한 20년 정도의 기간 동안에는 철저히 제가 집중하면서 혹시 기억 속에서라도 표절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려고 철저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 10여 년 전부터는 100년 이내에 쓰인 설교집은 읽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저 나름대로의 집필 생활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것들이 정말 사회적으로 만연하게 된다면 결국은 진실의 가치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까짓 눈앞에 있는 티끌만한 유익을 위해서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버젓이 거짓말을 하고 아이들에게 나이를 속이라고 해서 입장료를 할인 받는 것들을 아이들이 보면서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부정직한 사회에 순응하며 아니 부정직을 미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며 살아가면서, 주일날은 교회에 와서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런 표리부동한 삶을 사는 것을 보면서 신앙의 양심이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죽은 물고기는 흐르는 물을 따라 떠내려 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흐르는 물을 거슬러 위로 올라갑니다. 우리는 죽은 물고기입니까? 살아있는 물고기입니까?
B. 정직해야 할 이유
그러면 정직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이 현실적으로 따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직해야 할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정직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특정한 행동만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정직을 훨씬 포괄적인 면에서 보고 있습니다. 정직은 그 사람의 됨됨이가 올바른 데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올곧은 말과 행동입니다. 자기의 이익을 비겁한 방법으로 추구하지 않는 데서 오는 정정당당함입니다. 그 사람의 사상과 신념의 체계가 진리에 입각해 있고 인격이 그 진실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꺾어지지 않는 올곧음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당연히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리라는 기준입니다. 그 기준에 입각한 사상이 있고 거기에 부합하는 진실을 좋아하는 인격에서 나오는 마음 씀씀이와 말과 행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모든 것이 삶과 행동, 마음, 성향 사랑, 이 모든 것들이 일체를 이루어서 올바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참된 말입니다.
본문은 정직한 자를 패역한 자와 대조시킵니다. 여기서 패역하다는 것은 진리를 벗어난 악한 삶이 저항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과 생활로 굳어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고통받는 질병 가운데 하나가 척추측만증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기형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는 오랜 세월 동안 자세가 구부정해서 척추가 휘는데 아주 심하면 S자로 휘어집니다. 그러니 이렇게 앉아도 고통스럽고 저렇게 앉아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등뼈가 올바르지 않으니까 온 몸이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대대적인 수술을 통해서 교정을 하기도 합니다. 어느 한 순간 자세를 구부정했다고 한번에 측만증에 걸리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그런 자세를 취하면서 근육이 굽은 상태로 발달하게 되고 뼈가 틀어지고 틀어진 것이 근육으로 굳어지게 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측만증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패역이라고 하는 것은 악한 삶이 마음과 행실 그리고 사상 속에 굳게 굳어져서 자신도 그 악의 저항할 수 없게 된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와 반대인 사람이 정직한 사람이니 그 정직이 말로만 올바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어떤 사람이 진리가 없이 그냥 솔직한 것은 종종 수치를 모르는 뻔뻔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물건을 훔쳤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의 상품권 20만 원을 누가 가져갔다고 치겠습니다 그 사람을 결국 찾아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솔직하게 시인했습니다. "예, 내가 가져왔습니다. 배 째실래요?" 이런 것은 솔직하기는 하지만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때 제가 마음에 욕심이 나서 가지고 왔는데 그렇지 않아도 후회를 했고 돌려드릴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것은 진실입니다. 참된 정직은 진리를 믿고, 알고 사랑하기에, 거기에 마음과 삶이 합치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직한 자의 신념은 진리에 기초하며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정직의 가치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우리는 얼마에 정직이라는 가치를 손쉽게 팔아넘길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젊은이들을 비롯해서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는 LH사태를 생각해 보십시오. 문제가 무엇입니까? 실제로 이루어진 땅 거래 중 그것은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국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그것을 책임지고 있는 장관이라는 사람이 한 말 때문입니다. "아마 그 사람들도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르고 투자했는데 대박이 났을 것입니다." 이런 말들이 국민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사실은 자유민주국가에서 살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점에서 불평등하다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이 공정하지 않다는 데에서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36년을 모아야 겨우 수도권에서 아파트 하나를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식으로 정보를 미리 취득해서 땅을 사고, 불과 몇 년 만에 두 배, 세 배의 돈을 남깁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땅을 사놓고 자기가 도시 개발을 하고 자신에게 보상을 하는 식의 불공정한 게임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의 차이가 있는 것은 너무나 잘 당연한 것입니다. 못사는 사람은 세금을 내지 않고 오히려 나라의 혜택을 받고 잘사는 사람은 많은 돈을 세금으로 내서 사회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런 빈부의 격차가 나는 것도 국가가 발전하는 한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게임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게임이 처음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한 사람은 속임수를 쓰고 한 사람은 정당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게임이 진행되는 과정도 공정하지 않고 결과는 아무도 승복할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때 사회에는 한을 품은 사람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그런 사회는 불안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나라에 대해서 긍지를 가질 수 없습니다. 결코 우리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거짓말이나 하고 남을 속이고 살면서도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타인에게 정직을 요구하는 것은 입술만 움직이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정직을 실천하는 일은 때로는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희생을 치루어야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더욱이 살고 있는 사회가 부정직하면 부정직할수록 정직하기 위해서 상상할 수 없는 많은 희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비화를 아는 사람들이 이제는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드리고 있는 이 땅은 저희들이 2002년도 4월 30일에 공장 건물에 이사와 수리를 해서 자리를 잡은 곳입니다. 이사 오기 2년 전에 이 땅을 구입했습니다. 돈이 있어서 구입한 것이 아닙니다. 월세를 주며 살고 있던 예배당에서 건물 주인이 건물을 부수고 오피스텔을 지을 것이니 빨리 나가 달라고 했습니다. 할 수없이 우리는 어디론가 이사를 가야 되는데, 도저히 갈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안양까지 와서 교회를 옮길 만한 거처를 찾았습니다. 마침 이 땅을 주인이 내놨다가 안 팔겠다고 했다고 부동산업자가 얘기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한번 그 주인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더니 주인이 마음이 변했기 때문에 아무리 찾아가도 안 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하여튼 억지로 주소를 찾아 내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집사님들이 가서 그 주인에게 이 땅을 우리에게 팔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안 판다고 하면서 왜 와서 귀찮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그래도 팔아 달라고 애원을 했더니 "자고 나면 매일 땅값이 오르는데 지금 내가 왜 땅을 팔아야 됩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땅을 팔면 무엇을 하려고 합니까?" "여기에 교회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일주일만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뒤에 결국은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회 통장에 돈이 현찰로 1500만원 밖에 없었습니다. 그분은 알고 보니까 60년대에 여기에 건물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가발 공장부터 전자제품까지 60년대부터 80년대의 경제성장 단계에 공장을 하시던 사업가였고 이제는 팔순이 다 되어서 은퇴를 앞둔 노인이었습니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렇지 않아도 이 공장터를 보면서 여기에 마지막으로 교회가 세워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가 봅니다. 가져 가시오."라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까 이분이 26살에 한경직 목사님에게 안수를 받고 장로가 되셨습니다. 바로 여기 공장에 한경직 목사님이 매주 화요일마다 1년 반을 오셔서 성경공부를 가르치신 유서 깊은 장소였습니다.
저는 그분을 비난할 마음이 없습니다. 너무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그 다음 일주일 후에 성도에게 3억원을 빌려서 계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계약금을 주었는데 돈이 있냐고 물으셨습니다. 없다고 할 수가 없어서 준비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 "교회가 있기는 뭐가 있겠어. 믿음으로 했겠지." 그러더니 자기 금고를 열고 거기에서 무언가를 꺼내셨습니다. 계약을 주었을 뿐인데 꺼낸 것을 보니까 등기부등본과 자기 인감도장이었습니다. "교회가 무슨 돈이 있겠소." "이거 가지고 가서 명의를 빨리 교회로 옮기고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잔금을 치르시오." 여러분, 그런 거래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분을 이전에 만난 적도 없고 저는 준공식 할 때 겨우 그분 얼굴 뵈었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순전히 하나님이 감동시키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 할아버지 살아 계신지, 돌아가셨는지 모르지만 한국에 안 계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고맙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그것은 땅값을 물어보니까 36억이었습니다. 천평이니까 그 당시에 360만원 이었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하자고 했더니 이 할아버지가 말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30억에 계약을 하고 6억은 현찰로 주시고 아무 기록도 남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해야 되냐고 했습니다. 토지초과이득세가 너무 많이 나와서 이것을 다 청산하고 은행에 빌린 돈을 갚고 나면 자기 돈 1억 정도를 여기다가 넣어야 될 판이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넘겨주는 것 까지는 할 수 있지만 자신의 돈을 여기에 도로 집어넣어서까지 청산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잘 몰랐으니까 건축위원들을 모아놓고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90% 이상이 아무 문제 없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대기업들도 다 그렇게 거래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나중에 알고 보니까 다운계약서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공인회계사에게 물어 봤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하는 얘기가 "목사님,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신 회계 장부를 2개 쓰셔야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목사가 장로와 둘이 앉아서 이중장부를 쓰고 그것을 교회 재정장부라고 세무서에는 A를 내고 집에는 자기가 B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저는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땅을 안 사면 안 샀지 그런식으로 해서 그 땅 위에 교회를 지어서 후손들에게 부끄럽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습니다. 세금이 얼마냐고 물었더니 3억이라고 했습니다. 가서 전하라고 했습니다. 36억을 달라고 하셨지만 우리가 39억을 줄테니까 정식으로 계약서를 쓰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36억 달라는 땅을 39억을 주고 산 것입니다. 돈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 3억은 제 2금융권에서 고리로 빌려서 몇 년이 지나도록 못 갚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때 그 결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런 정직하지 못한 방식으로 거룩한 교회의 땅을 구입했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세월이 조금 흘러가서 교회가 안정을 찾았을 때의 일입니다. 교역자들에 대한 대우가 너무 허술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례금을 현실화시켜 드렸습니다. 아주 잘해 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부목사님 아이들이 전부 다 어린집을 무료로 다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아빠가 무직자로 분류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연봉이 이만큼인데 당신들이 어떻게 무직자냐?" "그런 혜택을 받으면 진짜 가난한 집 아이들이 결국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냐." 이것은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금을 내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 당시에 법으로는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원을 시켜서 세무서에 가서 우리가 세금을 낼건데 얼마를 내야 하는지 산정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나는 세무서에서 표창이라도 주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짜증을 내면서 안내도 되는데 그렇게 유별을 떠냐고 했습니다. 두, 세 번을 찾아갔는데 안내도 되니까 내지 말라고 말렸습니다. 법적으로 안 내게 되어 있는데 그것을 왜 내려 하냐고 했습니다. 그래도 굽히지 않고 우리는 내야 되겠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아주 귀찮은 듯이 서류를 주면서 유별을 떤다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세금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때 교역자들 1년 동안 낸 세금이 첫 회에 4,800만원이었습니다. 그것을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꽤 세금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래도 기꺼이 냈습니다. 그랬더니 좋은 일도 생겼습니다. 우리 교회 교역자들은 카드회사에서 카드를 안 만들어 줬습니다. 왜냐하면, 세무서에 조회를 해보면 무직입니다. 소득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소득이 증명이 되니까 너도 나도 카드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우리 교회 부목사님으로 들어오면 1억 혹은 1억 5천만원 정도는 어느 은행이든지 서로 빌려 주려고 합니다. 좋은 시대가 된 것입니다. 하라는 사람은 없어도 소득이 있으면 당연히 내는 것이 맞다고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살아 계시던 때가 언제입니까? 그때는 그야말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던 시대였는데, 그때도 그 노인 분은 꼬박꼬박 자기 세금을 비서에게 계산시켜서 세무서에 자진해서 납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정직한 삶입니다.
결국 부정직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입니다. 신자가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쉬운 길을 손해보지 않고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보람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부정직을 선택하는 순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은 취소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법이나 제도 자체가 워낙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유혹을 받습니다. 특히 세금에 있어서는 정말 이런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심지어 한 때 어느 사업가를 만났더니 세금을 조정하는 것 자체가 기업을 경영하는 테크닉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니까, 사실은 얼마나 만연해 있는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화폐 폐지론자입니다. 모든 화폐를 폐지하는 것이 옳고 모두 신용거래로 이루어지고 길거리에서 파 한 단을 사도 매출이 모두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에게 세금을 부과하되 세금을 많이 낮춰서 정직하게 세금을 내더라도 지금보다도 더 골고루 과세가 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과세를 한다면 아마 지금보다 훨씬 덜 내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수는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런 정직한 사회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도가 그렇게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의 탈세와 불법, 그리고 거짓을 제도가 그지 같기 때문에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우리 자신을 속입니다. 그러나 일단은 법대로 내고 법정에서 투쟁하고 사회운동을 해서라도 잘못된 제도와 관행은 뜯어 고쳐야 합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거짓을 행하고 정직하게 내지 않으면서 결국 모든 것을 세상 탓으로 돌린다면 온 국민이 완전하게 만족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 수 있는 때가 언제쯤 오겠습니까? 그런 법이 세상에 존재하기는 하겠습니까? 아마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보십시오. 결국 우리는 세상에서 부정직해지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런 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죄는 그 유혹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가난해 죽겠는데 은행 창구에 같습니다. 오만원 다발 10개를 묶은 5천만원 다발이 세 개가 올려져 있습니다. 순간 "저 돈이 내 돈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느끼는 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날 밤 셔터문을 열려고 도구를 구해서 그 은행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것은 죄입니다. 불의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사는 데에는 매우 부당하고 커다란 희생이 뒤따르기도 합니다. 부정직한 세상은 신자들이 정직하게 살아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아주 훌륭한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제가 근대 사회의 기업인 가운데에 존경하는 분이 한 분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유한양행을 창립한 유일한 박사입니다. 원래 이 이름이 아니었는데 나중에 이름을 유일한으로 바꿨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이분이 1895년생입니다. 아직 일제시대 때에 미국으로 유학할 수 있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시카고 대학에서 유학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분은 조국을 사랑했습니다. 조국으로 돌아와서 지금의 총신대학교의 전신인 평양신학교를 설립한 미국인 선교사 세무엘 모팻에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정직과 신뢰를 신념으로 기업을 경영하고 일궈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유한양행에서 나오는 모든 제품은 한 번도 의심하지 않고 삽니다. 심지어 동일한 제품의 가격이 더 비싸더라도 저는 그 회사 제품을 택합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유명한 제품 중 하나가 안티푸라민입니다. 그만큼 창업자의 정신이 지금까지도 면면이 내려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재밌는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아들이 결국 유학을 하고 와서 아버지 회사를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본인은 반대했지만 주변에서 2세 경영이라는 것도 요즘 대세니 한 번 물려줘 보라고 해서 큰 아들에게 물려 주었습니다. 기가막히게 경영을 해서 회사에 흑자가 계속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이 아들이 돈 버는 데에만 빠삭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회에 대한 책임 같은 것들을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경영을 잘하는 아들을 아버지가 해고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회사와 상관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해고함으로써 유한양행은 전문경영인 체제로 들어갔습니다. 지금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분이 경영을 할 뿐만 아니라 돌아왔을 때는 일제시대였기 때문에 온 힘을 다해서 항일 무장투쟁을 돕는 자금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수고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정직으로 일관한 기업인의 표상을 보여주었습니다. 5.16이 일어났습니다. 군사정권이 들어서고 측근들을 관리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했겠습니까?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권세가 하늘을 찌르니까 기업가들이 돈다발을 싸들고 와서 엎드려 절을 하면서 갖다 바쳤고 전화 한 통이면 돈을 싸 들고 왔습니다. 안 들어오는 기업이 하나 있었습니다. 유한양행이었습니다. 여기는 그 당시 지금의 대그룹과 같이 굴지의 기업이었습니다. 밉보였습니다. 자금을 대 달라고 부탁까지 했는데 일언지하에 거부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무서를 동원해서 장기간에 걸쳐서 그 회사를 털었습니다. 세무조사를 하러 간 것이 아니라 아예 죄를 만들어서 뒤집을 씌워 회장을 감옥에 보낼 각오를 하고 보는 것입니다. 장기간 동안 세무사찰을 나와서 다 뒤졌는데, 결국은 마지막 혐의 없음으로 판명이 났습니다. 나중에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결국 박정희 대통령이 유일한 박사의 인격에 깊이 감동을 받고 나중에는 존경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결국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덕목인 것입니다.
저는 주식 하나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삼성이 오늘날 이런 위기를 맞이하게 되는 것을 보면서 유일한 박사를 본받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합니다. 그때 정권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으면 경영에 위기가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버림을 받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굴복하지 않았던 기업은 언젠가는 회행할 기회를 얻지 않습니까? 더욱이 정치인에게 잘하고 잘못 보이는 이유 때문에 기업이 쓰러지고, 설 정도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일찌감치 정리되어서 없어지는 기업이 되어야지 나라가 발전하지 않겠습니까? 왜 거기에 부정한 돈을 갖다 바치고 정치권의 도움을 받는 작업들을 하려고 합니까? 정말 부끄럽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는 그런 굴지의 대그룹들이 수 없이 일어난다고 해서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핸드폰 하나 잘 만들고 자동차 하나 훌륭하게 만든다고 해서 국격이 높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정말 그 나라를 마음에 간직하고 싶은 자랑스러운 나라가 될 때에 국민들의 마음에는 그 나라를 위해 살고 그 나라의 이름을 빛내고 싶은 소망이 생기고 자기가 그 나라의 국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럽지 않겠습니까? 거기서 나오는 애국심이야말로 진정으로 나라를 발전시키는 애국심인 것입니다.
들을리도 없겠지만 나는 오늘날 그 큰 기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겨우 정권에 의해서 명맥이나 유지해 갈 기업이라면, 일찌감치 청산하고 시골로 내려가서 농사나 지으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범사에 정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는 기업이 있습니다. 그 기업은 도자기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기업을 할 때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1950년 6월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피난을 가고 심지어 관공서들이 문을 닫고 피난을 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렸을 때 회장이 제일 먼저 내린 결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재무 담당자를 불렀습니다. "금고에 있는 돈을 모두 가져와라." "어떻게 할까요?" "빨리 은행으로 가서 대출한 금액을 전액 상환해라." "만약에 회사가 폭격을 당하고 우리 회사가 망하면 빌린 돈을 누가 갚겠느냐." 그래서 허겁지겁 피난 보따리를 싸는 상황에서 재무 담당자는 회사의 금고를 모두 털어서 대출한 은행에 찾아갔습니다. "우리 회장님이 전쟁이 나면 못 갚으니까 미리 대출금액을 갚으라고 합니다." 아직까지도 국민에게 존경을 받으면서 대기업으로 생존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삼성이 그렇게 안 했다면 더 크게 발전을 못했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과 소비자와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윤리적이고 자랑스러운 기업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의 철학이 없는 사람이면 기업가가 아니라 장사꾼입니다. 사기꾼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습니다. 제발 재벌 총수님들 그렇게 사시지 말고 똑바로 경영을 하셔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기업이 되라고 말입니다. 정치인들이 두려워서 가슴을 쓸어내리는 그런 기업의 표상을 세워 달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물건 팔아 줄 테니까 말입니다.
범사에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상급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교통해 주십니다. 이 교통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이니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생명의 교통이고 사랑의 교통입니다. 악과 어둠을 이기는 빛의 교제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1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신자는 세상에 살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의로운 나라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질서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우리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로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몸소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릴 때 의도하셨던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은 정직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지만, 그들이 정직을 굽히지 않을 때 세상은 부끄러움과 함께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 앞에 작아지게 됩니다.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양심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그분을 나의 사랑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담대함이 있습니다. 완벽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정직할 때마다 이러한 복음적 사실을 생각하며 회개하고 우리는 정직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정직한 사회를 꾸짖고 이 부정직한 사회를 고치는 그런 사회의 의사가 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은 정직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지만 용기 있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혹은 눈앞에 손해를 피하기 위해서 부정직함을 택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하늘을 향하지만 그의 생활의 발걸음은 이 땅 위를 걷습니다. 정직은 우리가 진리를 따라서 살고 있다는 장중한 고백입니다. 이는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으나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여전히 부정직한 사람들이 덕을 보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직하게 덕을 보기 보다는 정직하게 살다가 손해를 봄으로써 이 세상의 번영보다 더 소중한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서 우리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신자가 순간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 정성껏 쓴 연애편지에 가래침을 뱉는 것입니다. 그것은 싼값에 자신의 영혼을 파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아름다운 명문으로 고급 종이에 아름다운 글씨로 편지를 썼다 하더라도 가래침을 뱉어서 보낸 연애편지를 받고 눈물을 흘릴 사람은 없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조금 잃어버려도 주님이 더욱 가까이 계시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그 생명과 사랑의 교통을 통해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살면서 부정직한 세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여전히 정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진리가 이 세상의 거짓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줄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부정직한 세상이기 때문에 정직하게 사는 사람의 가치를 보여주고 핍박을 받아도 양심은 자유를 얻어서 자기를 속박하는 사람들은 양심의 밧줄에 매이지만 속박을 받은 우리는 오히려 양심의 자유를 얻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 땅에 살라고 목숨 붙여주시는 날 동안에 결코 우리의 양심을 더럽히는 거짓을 행하지 맙시다. 그리고 눈앞에 티끌만한 이익 때문에 신앙의 양심을 팔아 넘겨 불신자와 똑같은 사람들이 되는 일은 결코 하지 맙시다. 담대하게 나의 복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며 정직하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14 (2021.04.18._주일오전)
14. 늙음이란 무엇인가?
“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시 71:9)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사람은 누구나 노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것은 젊음을 지나 늙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인생의 노년에 이 시를 썼습니다. 그는 늙어서 육체가 쇠약해져 있었으며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악인들에게 자기가 에워싸여 있다고 고백을 합니다. 시인은 어려서부터 주를 의지하며 살아온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늙은 후에는 더욱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신앙입니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주제를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늙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II. 늙음이란 무엇인가?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늙음이란 무엇인가입니다. 늙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국어 사전적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나 동물, 식물 따위가 나이를 많이 먹다.” 특히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중년을 지난 상태가 됨을 일컫는 말입니다.
A. 늙는다는 것
늙는다는 것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늙음을 젊음과 대비해 보아야 합니다. 젊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입니다. 육체적으로는 나이가 한창 때에 있다는 뜻이고 정신적으로는 혈기와 의욕 따위가 넘쳐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젊다는 것은 아직 육체적으로 젊을 뿐만 아니라 젊은이에게 어울리는 혈기 혹은 의욕이 충만한 상태를 뜻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만물은 태어나면서부터 한창 때를 향하여 갑니다. 그 정점에 도달한 후에는 서서히 늙어갑니다. 인간으로 치면 여성은 23세, 남성은 25세부터 노화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는 물질이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돌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영혼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고 물질이 아닙니다. 불멸하도록 지정되었기 때문에 늙거나, 낡거나, 소멸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육체는 본질적으로 물질입니다. 당연히 생겨난 물질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고 흘러가고 급기야 소멸하고 맙니다. 늙음은 바로 이렇게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생명의 쇠퇴입니다.
생명체에게 결정적인 특징 세 가지가 있습니다. 변양과 신진대사와 자기전사입니다. 이 세가지 조건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그것은 생명체가 아닙니다. 첫째로 변양입니다. 변양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자신을 적응하면서 생명을 지탱해 가는 능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북극곰의 몸무게가 최근 50년 동안 수십 킬로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지구온난화로 인해서 먹을 것을 찾지 못하자 몸무게를 줄여서 생존하기에 적합한 적응을 한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이런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게 되면 이 능력이 점점 사라집니다. 그래서 노인들이 환절기에 많이 돌아가시는 이유가 바로 이런 적응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신진대사입니다. 메타볼리즘(metabolism)이라고 하는 이 생명체의 신진대사는 독자적으로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게끔 만드는 기능입니다. 그래서 양분을 섭취하고 그것이 몸 안에서 생화학적인 작용을 거쳐서 에너지로 변화되고 그 에너지를 사용하는 순환의 과정을 우리들이 메타볼리즘, 신진대사라고 합니다. 젊어서는 이런 신진대사 능력이 뛰어납니다. 그래서 많이 먹어도 좀처럼 살이 찌지 않습니다. 물론 너무 많이 먹으면 배가 나옵니다. 그러나 많이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 이유는 젊음이 왕성하기 때문에 신진대사 능력이 뛰어나서 속에서 이것들을 모두 다 해결해 내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이 먹으면 반드시 소화기에 문제가 생기고 혹시 소화기관이 아주 좋아서 많은 음식을 소화한다고 해도 신진대사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것들이 모두 몸 안에 축적되어서 살이 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폭발적으로 살이 찌는데 젊었을 때는 그 살이 골고루 퍼지는데 나이가 들면 특정 부위에 집중해서 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볼 때에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몸매가 된다고 고민을 하는 이유가 바로 노화현상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나타나는 현상이 신진대사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집니다. 이것이 생명이 쇠퇴되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가 자기전사인데 이것은 자기를 베껴 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종족 번식에 관한 능력입니다. 식물이든 생물이든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자기의 종자를 남기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퍼트립니다. 젊었을 때는 이런 능력이 아주 뛰어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여자는 생산능력이 사라지게 되고, 남자 역시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지게 됩니다. 결국은 자기를 전사할 수 있는 기능이 서서히 사라지는데 이것이 생명이 쇠퇴하는 과정입니다. 이것이 바로 늙음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늙으면 환경의 변화에 적응을 잘 못하게 되고 생명력이 뚝 떨어지게 되며 생식 능력까지 사라지면서 결국 더 이상 종을 남기지 못하고 소멸되어 가는 것입니다.
생명은 죽음에 항거하는 모든 육체의 기능입니다. 육체의 늙음은 죽음에 항거하는 기능과 힘을 잃어버리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육체의 힘이 소멸되어 가는 늙음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때 자신의 마음에도 변화가 오게 됩니다. 그래서 한 평생 믿음으로 살았던 시인은 하나님 앞에 특별한 간구를 합니다. 시편 102편 24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나의 말이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 주의 연대는 대대에 무궁하니이다” 여기서 "중년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구절이 "나의 생명의 중간에"라고 되어 있으니 우리가 말하는 오십 대를 뜻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여전히 살아있는 그 중간에 자신이 평범하게 계산할 때 인생의 죽음의 끝이 아닌 중간에 자기를 데려 가시지 말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 시는 시인이 소년의 때에 쓴 시가 아니라 중년이 넘어 늙어가면서 쓴 시거나 혹은 인생의 말년에 쓴 시일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렇게 죽음이 가까워 오고 늙음이 깊어지자 자신을 하나님이 데려가실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늙었다는 증거입니다. 이처럼 젊음과 늙음은 아주 날카롭게 대비가 되고 늙음은 이 젊음을 잃어버리는 과정입니다. 늙은이 중에는 젊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 없지만 젊은이들 중에는 늙었던 사람이 없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지식들은 그들에게 낯설게 보이는데 아름답게 늙기 위해서 이 지식이 매우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늙는 것이 이렇게 나쁘기만 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늙는 것의 유익도 있습니다.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늙음을 싫어하고 젊음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로마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던 키케로는 자신의 책 속에서 노년의 유익을 강조합니다. 그가 특별히 이야기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늙으면 유익이 있다. 왜냐하면 젊은이들의 공경을 받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키케로 시대의 문맥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는 로마 시대 사람이었고 그때까지만 해도 늙은이들을 존경하는 젊은이들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회 속에서 나름대로 만족을 누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라는 사상가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노인들이 어떻게 대접을 받았는지 그 역사를 추적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중국, 로마, 그리고 예수님 시대까지만 해도 노인들이 공경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노인은 지혜에 도달한 사람의 화신이었으며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갈등이 있을 때 가장 훌륭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노인이라고 믿던 시대였습니다.그래서 실제로 노인들은 공경을 받고 또 실제로 그런 갈등을 조절해주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굳이 중국과 로마 시대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노인들을 공경하는 것이 인간의 도리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까? 저희 고등학교 때만 하더라도 전철과 버스에서 노인이 타면 앞다투어 젊은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비켜 주는데 시내버스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아주 멀리 가는 시외버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버스에 노인이 더군다나 짐을 가지고 서 있는 것은 그 버스에 탄 모든 사람에게 부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회는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키케로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요즘 늙은이들은 젊은이들로부터 공경을 받는 늙음의 유익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면 왜 이럴까요? 사회학적으로 분석을 해보면 이런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산업혁명과 함께 일어났습니다. 산업혁명과 함께 말하자면 인간의 촌락 구조가 바뀐 것입니다. 예전에는 지연 중심 그리고 혈연 중심의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그래서 노인을 공경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아버지의 형제들이고 할아버지의 친척들입니다. 공경하지 않으면 그 사회에서 퇴출됩니다. 그러니까 싫든 좋든 공경하고 어려서부터 그렇게 학습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이제는 촌락 구조는 사라지고 도시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는데 생산 인프라를 위해서 각자가 봉사하고 그 대가를 받게 됩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인적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촌락 사회에서는 그런 노유(老幼)의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질서를 갖지만 생산에 이바지하는 인프라가 있는 도시에서의 삶은 노동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으면 되는 것이고 돈이 있는 사람은 자본을 투자하고 그 보상을 받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구조가 되다 보니까 늙음과 젊음, 장유유서 같은 것은 의미가 없는 덕목이 된 것입니다. 생산 활동에 기여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서 사회에서 받는 대우의 정도가 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면서 사실은 전통적으로 노인을 공경하던 풍습은 급격하게 곤두박질치게 됩니다.
더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현대사회가 기술 사회에 진입하면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전에 농업이나 임업 혹은 어업과 같은 1차 산업에 종사할 때 그리고 2차 산업 초기만 하더라도 선배들의 경험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선배들에게 제대로 배우지 않으면 딴 데서 삽질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학기술 사회에 진입하면서 이제는 그들의 경험이 별로 쓸모가 없었습니다. 예전에는 시집을 가면 비로소 엄마가 필요합니다. "엄마, 아이가 설사를 해." "어머니, 아이가 경기를 해요." "어떡하면 좋죠?" 그러면 "놀라지 말아라." "흔히 있는 일이다." "이렇게 이렇게 안아주고 이렇게 이렇게 먹이고 이렇게 이렇게 해라" 부모를 의존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며느리나 딸 중에 그런 전화하는 딸이나 며느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에서 다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앱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찾아서 자기가 응급조치를 다 하는 것입니다. 필요가 없습니다.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선배들은 그 바닥에서 많이 일을 했지만 한 번도 이런 기계, 이런 프로그램을 사용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답답하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이가 든 사람은 점점 쓸모 없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는 이런 분석도 합니다. 거기에는 이런 사회적인 변혁의 문제도 있지만 또 다른 하나는 젊은이들의 시샘이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노인들은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상당히 많은 경우에 오랫동안 재산을 축적합니다. 그래서 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이 볼 때는 그 노인이 쓸데없이 돈만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아이디어도 있고 그 돈을 가지고 즐길 수 있는 능력도 있는데 돈이 없는 것입니다. 그때 시샘이 작동하면서 공경의 사상을 깎아 먹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상당히 사회 심리학적인 분석으로서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서 이제 더 이상 노인들이 공경받지 않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슬픈 현실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키케로는 그 당시에 늙음의 유익을 젊은이들의 공경을 받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지금도 동의할 수 있는데 인생을 사는 지혜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그저 목숨을 걸었던 일도 나이가 들고 보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늙으면서 갖는 마음의 여유입니다. 땅바닥에 앉아서 바라보는 들판과 언덕에 올라가서 보는 벌판과 1500m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벌판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습니까? 그 나이 때는 그 수준에서만 세상을 못 보니까 노인이 되면 인생을 사는 지혜를 갖게 되기에 젊었을 때의 방황을 멈추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키케로가 늙으면 좋은 점에 관해서 가장 강력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세 번째입니다. 그것은 늙음의 유익은 정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노년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가 들어 쇠약해진 소포클레스에게 성생활을 즐기냐고 질문했을 때 “무슨 끔찍한 말을! 마치 잔인하고 사나운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온 것처럼 나는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왔다네” 라고 대답하였지.”키케로,『노년에 관하여』(De Senectute, 23.83). 어쨌든 늙으면 쓸데없는 정욕에 시달리는 것이 덜해지니 이것도 굳이 늙었을 때 찾을 수 있는 유익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의 지혜는 대게 돈을 벌고 성공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만 늙은 사람들을 지혜로 연결시킬 때는 돈을 버는 지혜가 아니라 인생을 슬기롭게 사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이는 손자병법에 나오는 지혜를 다른 사람을 꺾고 이기는 법을 지혜라고 부르지만 사십이 넘으면 논어에 나오는 지혜를 지혜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사람이 생각하면서 늙어간다면 당연히 사려 깊은 노년을 맞이하게 될 것이고, 젊었을 때 마음을 사로잡던 쓸데없는 욕망의 노예 됨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니 그는 훨씬 평안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다른 사람의 처지에 공감하는 능력이 향상되게 될 것이니 그만큼 그는 다른 사람에게 덕을 베풀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점에서 늙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B. 평안하게 늙어감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그러면 우리에게 남은 숙제는 평안하게 늙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은 비교적 젊은 분들이기 때문에 무슨 뜬금없는 소리인가 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여러분 보다 훨씬 어린 사람은 여러분들을 오래전부터 늙은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인간의 늙음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늦출 수는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늙음을 늦추려는 노력을 결코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까지 추천합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될 것은 늙어서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늙어서 결국은 내 힘으로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쳐서 그 사람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젊은 시절에 건강한 생활습관을 갖고, 운동하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 비교적 질이 좋은 노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젊음을 믿고 여러분들이 육체에 대해 별 생각이 없이 그냥 편한대로 사는 버릇을 하면 아주 질이 나쁜 신체를 가진 노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짊어지고 가야 할 인생의 무게가 더 무거워진다는 뜻이고, 급기야는 누군가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폐를 끼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찌 좋은 일일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늙음을 늦출 수는 있고 그러한 노력을 비난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나면 그는 천천히 늙으려고 애써야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아버지가 오십 세도 안 되셨는데 드러누우셔서 똥오줌을 받아내는 수발을 들어야 할 처지가 된다면 그 아버지가 여러분들을 아무리 애틋하게 사랑한들 여러분들의 삶의 질이 나아질 수 있겠습니까? 건강하셔서 칠십세가 되도 자녀들이 특별히 돌 볼 이유가 없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스스로 자립하며 살아 가실 수 있게 되는 것이 그분이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해줄 수 있는 매우 좋은 일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젊은이 입장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그러나 얼마 세월이 지나지 않으면 이 설교가 절절이 다가와서 여러분들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마음을 갖게 될 때가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리를 하는 것입니다.
나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내가 원하는 것을 먹을 때 금할 사람이 없고 내가 자고 싶고, 놀고 싶은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나에게 정죄할 사람이 없습니다. 나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음식을 가려 먹음으로 늙음의 노화를 늦출 수 있습니다. 예뻐 보이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아무리 머리가 덥수룩하고 얼굴이 할머니처럼 늙어가도 상관없다면 그냥 깨끗이 씻고, 깨끗하게 옷을 세탁하고 사는 것입니다. 디자인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이 그냥 늘 수녀복 같은 것을 입고 살던지 아니면 상복 같은 것을 입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울을 볼 때 무언가 자꾸 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러면 염색도 할 수 있는 것이고 화장도 할 수 있는 것이고 피부의 노화를 방지하기 위해서 안티에이징 화장품도 능력에 따라 바를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들은 성형수술하는 것에 대해서 펄펄 뛰면서 하나님이 주신 원판에 대한 수정이라고 반대를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할 수 있으면 자연 그대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저도 성형하지 않은 얼굴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성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울을 볼 때 늘 신경이 쓰이고 턱관절이 어긋나서 별로 안 좋다면 양악수술도 할 수 있고 , 거울을 볼 때마다 거슬리면 눈썹이라도 성형수술 할 수 있고, 피부라도 고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음도 젊고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그게 무슨 문제입니까? 신학적으로 아디아포라(adiaphora)입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자유에 달린 것이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명심해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질 육체보다 영원히 있을 우리의 영혼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결코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육체보다는 우리의 영혼이 풍성한 생명을 누리도록 잘 보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그 유익을 포기하라거나 아니면 그 유익을 버려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유익이라는 것은 영어로 exercise, 운동입니다. 그러니까 육체를 운동하고 몸을 단련하면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약간의 유익이라는 것은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별것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몸을 잘 단련해서 건강한 신체를 가져도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만 유익을 준다는 면에서 약간의 유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들은 자신의 육체를 잘 돌보고 생명의 기운을 유지하면서 사는 길을 성경이 전혀 멸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늙어가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추하고 불행하게 늙고 싶으면 그냥 살면 됩니다. 아무 생각없이 무절제하게 살면 한결같이 비참하고 쓸쓸한 노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불안한 노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늙는 것을 피할 수 없으나 평안하게 늙는 길은 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여러분들은 최소한 다음 네 가지 지침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첫째는 늙어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생명의 욕구를 가진 인간에게 늙어간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더욱이 정신이 늙지 않고 있을 때 육체가 늙어가는 것은 더더욱 커다란 고통입니다. 그래서 몸은 늙어도 마음은 젊게 살자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입니다. 몸이 늙어 가면 마음도 어느 정도 함께 늙어가는 것이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래야만 정신과 육체 사이의 심한 갈등을 면할 수 있고 조화점을 찾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나 어울리는 일을 늙어서 자꾸 하고 싶고 그런 것이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노인들만의 독특한 착각입니다. 그것을 하기 싫은 것이 정상적으로 늙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훨씬 평안하고 불안하지 않은 노년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신이 젊고 육체는 늙을 때 육체는 매우 부당한 대우를 받게 되고 모험을 감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육체를 자아를 가꾸어 생명의 기운을 좀 더 오래도록 보존하고 늙음을 늦추는 것은 자신의 건강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자, 보십시오. 여러분, 지금은 코로나 상황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전도하러 나가지 못합니다.그러나 코로나 이전에 화요일 여리고 전도시간만 되면 칠십대 중반, 팔십을 바라보는 노인들이 아주 씩씩하게 걸어 나오셔서 열심히 아파트를 다니면서 전도를 하십니다. 만약에 그가 몸이 약해서 병원 신세를 지고 자신의 용변도 가누지 못하는 정도가 됐다면 못했을 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남에게 폐를 끼치고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자립할 수 없는 노년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죽는 순간까지 자립하고,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원하십니까? 그래서 육체를 잘 가꾸어 생명을 아껴 쓰고 그 기운을 좀 더 절제 속에서 보전하는 것이 평안한 노년을 맞이하는 방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늙어가는 것은 결국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늙음과 함께 신체적으로 쇠약해집니다. 각종 질병을 겪습니다. 육체의 건강을 보존해야 됩니다. 질병을 예방하고 고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남녀 친구들이 모두 모이면 남자는 여자친구 얘기 여자는 남자친구 이야기를 합니다. 거의 대화의 90%가 그것입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합니다. 직장에 다닙니다. 그리고 나면 자기가 무엇을 먹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재미있게 놀았는지 그것으로 이야기 꽃을 피웁니다. 그러다가 좀 더 나이가 먹어서 30대 중반쯤 입니다. 누가 승진한 이야기 누가 사업해서 성공한 이야기로 90% 이상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좀 더 나이가 듭니다. 그리고 사십 대가 지나고 오십 대가 지나게 됩니다. 그러면 서서히 퇴직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 중에는 자발적 퇴직도 있고 비자발적 퇴직도 있습니다. 소위 해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연금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 시절이 좀 더 지나서 육십 대쯤 되면 모이기만 하면 90% 이상의 대화가 건강 이야기입니다. 어느 한의원이 진짜 용하더라, 어느 병원에 가니까 진짜 치료를 잘 해 주더라, 그리고 건강식품 사진을 찍어서 서로 보내주고 정보를 교환합니다. 그리고 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됩니까? 그 다음에는 자기 묘자리 사놓은 이야기 하느라고 대화의 대부분의 시간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묘자리를 사놨는데 뚜껑까지 만들어 놨기 때문에 들어가서 문만 닫으면 되고, 경치가 너무 좋은 곳이라고 합니다. 땅 속에 들어가서 경치는 뭐가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노년이 되기까지 결국은 질병으로 고생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냥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이런 질병과는 아무 상관 없이 젊은이 못지 않은 체력으로 아주 건강하게 살았던 노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서 나이 들어가는 노인들이 좌절을 하고 마음속에서 깊은 자신에 대한 실망을 느끼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몇십 명 중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사람을 보면서 부러워 하는 것은 마치 젊은 시절에 전교에서 한, 두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예쁜 미모를 가진 여학생을 보면서 여학생들이 낙심하는 것과 똑같고 전교에서 1등, 2등 하는 학생을 보면서 중간 밑을 빙빙도는 학생들이 "쟤는 어떻게 좋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서 나를 절망시킬까?"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극소수의 사람이니까 자신이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속상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은 나이가 들면 병원을 다니면서 삽니다. 그리고 오히려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노인들은 자신의 힘으로 병원에 갈 수가 없어서 의료 혜택도 못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자기가 원할 때에 제 발로 병원에 걸어갈 수 있고 병원비를 지불할 수 있는 사회의료 시스템이 있고 또 자신에게 재력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이 너무 발달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십년 전만 해도 자동차가 길을 가다가 멈추는 일은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더욱이 15만 킬로 이상 타고 20만 킬로가 되어가면 일주일에 몇 번씩 카센타에 가서 점검을 받아야 되고 지방에 내려가려면 멀쩡한 차를 가지고 카센타에 가서 "지금 500 킬로 가려고 하는데 괜찮은지 한번 봐주세요."하고 가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 사람들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차를 뽑고 한 2, 3년 정도는 카센타에 안 가지만 그 다음부터는 가는게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저 웬만하면 자신이 고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나 자동차나 물질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당연히 고치면서 사는 것이 자연의 섭리고, 젊음이 멀어지는 것은 젊음이 멀어지는 것만큼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는 거니까 죽음의 기운이 들어오면 해체 되게 마련이고, 해체된 것을 지탱하기 위해서 묶어 놓으려니까 병원이 필요하고, 약이 필요하고, 수술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 가는 게 인생입니다. 그렇게 질병 때문에 불편하고 애쓰며 살아야 된다는 사실에 비애를 느껴선 안 됩니다.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신 건강에도 매우 나쁩니다. 오히려 그러한 현실을 자연스럽게 받아 들이면서 버릴 몸이 아니고, 버릴 물건이 아니라면 깨졌어도 접착제로 붙이고 또 더러운 게 묻었어도 걸레로 닦으면서 씁니다. 소중한 물건은 그렇게 씁니다. 물건보다 자기 몸이 소중하니까 내 뜻대로 안 움직인다고 몸에 대해서 반감을 가지고 심지어 섭섭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결국은 부메랑이 되어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정신이 이러한 늙음을 납득하지 못할 때 마음에는 커다란 부조화가 생기게 됩니다. 이러한 늙음의 감정들은 권태, 우울감, 그리고 비애와 고뇌, 원망을 거쳐 절망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심하면 우울증이나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되는데 노인 자살이 유난히 많은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봄이 됩니다. 그러면 말랐던 나뭇가지에 싹이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새싹이 아주 연한 초록색으로 자라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 잎이 나기 시작합니다. 잎사귀가 무성해지면서 여름을 맞이하고 최고의 생명력을 자랑하다가 찬바람이 불면 단풍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소슬바람이 불어오면 잎이 떨어지고 그때도 지나가 겨울이 되면 나목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질서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바로 이런 자연의 질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께 속했으나 육체는 나무와 같이 자연의 질서를 따르도록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하나님의 정하신 뜻입니다. 이사야서 40장 7절이 이렇게 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제가 서른다섯, 서른여섯 즈음에 이 성경 구절을 읽고 6개월 동안을 눈물로 보냈습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 다시 보니까 젊었을 때 못 보던 새로운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숲을 이루고, 꽃이 아름답게 활짝 피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생명을 주어서 만물을 그렇게 무성하게 하고 아름다운 꽃이 피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반대로 묘사합니다.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후~ 그 위에 붊이라.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풀이 시들고 꽃이 마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결국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든 것처럼 육체가 쇠잔하는 것도 결국은 이 세상의 모든 만물과 우리의 육체조차 하나님이 다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만물을 순환시키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로써 영원하다는 사실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0장 8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풀이 마르고 꽃이 시드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영원히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늙음과 함께 자신의 몸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자주 묵상하십시오. 젊은 사람들은 최대한의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 젊음이 곧 끝날 것이며 매우 불편한 노년이 올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내가 싫어하는 노인이 되어서 젊은이들에게 싫음을 받을 때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가능하면 자주 자주 하셔야 합니다. 질병 또한 물질인 육체가 유에서 무로 돌아가는 변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좁게는 내가 서서히 생명의 기운을 상실하고 죽음으로 다가가면서 당연히 겪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내면의 세계를 성숙하게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 거대한 자연의 흐름 속에 티끌 같은 존재임을 생각하며 늙음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야말로 평안한 노년을 맞이하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젊은 시절 생각 없이 살다가 노년이 되었을 때 급격히 이런 생각을 하면서 노년을 받아들이게 되는 일들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노년을 생각하며 늙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소외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소외되는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늙은이는 젊은이들에게만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늙은이들로부터도 소외되니 늙은이도 늙은이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노년의 때가 되면 나는 아직 기운이 남아 있고 능력이 아직까지도 무성한데 "나이가 되었으니 그만 두시오."라는 아주 짧고 차가운 통보가 옵니다. 그것이 정년퇴직입니다. 사회로부터 활동이 배제되는 것입니다. 매우 매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젊은이들은 결코 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지 늙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젊은이에게 소외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처럼 듣지 말고 여러분 보다 훨씬 젊고 어린 사람에게 여러분들이 노인네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을 꼭 염두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위를 바라보지 말고 밑을 바라보고 살면 오히려 지혜로워질 것입니다. 그때 노인이 되어서 자신이 소외당하는 것을 부당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매우 잘못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일로 인해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젊은이를 원망하는 것은 본인의 정신을 매우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젊은 시절을 그렇게 보냈고 그 때에 우리도 노인들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귀찮았습니다. 그렇게 대하며 살았습니다. 결국 궁극적으로 인간의 죄로 인해 생긴 편견과 사랑없음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현실을 사람들이 각기 은혜를 받고 극복하며 살아서 나 같은 늙은이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까이 있기를 원한다면 말할 수 없이 좋은 것이겠지만 어떻게 모든 사회가 일시에 그렇게 변화될 것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소외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리고자 하는 욕구를 절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하는 것은 매우 미련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저것은 우리 목사님 정도 연령 이상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이 사십 대가 되면 이십 대와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언니라고 불러준다고 해서 그 아이들이 진짜 여러분을 언니로 본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속으로 이모라고 생각합니다. 가슴 아픈 이야기지만 현실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그런 내색 안 합니다. 우리 딸이 중학교 2학년 때에 일이었습니다. 사촌 언니가 고등학교 1학년인가 그랬습니다. 언니하고 같이 대화를 하라고 했더니 언니는 너무 늙었다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귀에 생생합니다. 말이 안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십 년 차이가 난다고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너무 웃기는 것이 사십 대는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육십 대는 자신들과 결코 어울릴 수 없지만 자신은 십 대를 숨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사람이 늙으면 똑같이 그런 이상한 노인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비결이 무엇이겠습니까? 너무 젊은 사람 있는 데는 가지마십시오. 사십 대는 사십 대끼리 놀고 육십 대는 육십 대끼리 노십시오. 그리고 안 놀아줘도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이 되셔야 합니다. 그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런데 굳이 젊은이들이 오라고 하면 가십시오. 못 이기는 척하며 가십시오. 그 대신 빨리 다른 곳으로 가십시오. 가자마자 지갑부터 여십시오. 그 아이들이 무엇을 먹고 싶어 하는지 보고 빨리 계산대에 가서 카드로 결제하십시오. 그리고 입을 잠그십시오. 지갑은 열고, 가능한 빨리 급한 약속이 있는 것처럼 "돈은 내가 냈으니 즐겁게 놀다 오너라."하고 떠나십시오. 여러분들이 사십 대에 그렇게 한다면 이십 대에게 사랑받을 것입니다. 오십 대가 되어도 사랑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육십 대라면 사십 대에게 그렇게 하십시오. 칠십 대가 되어도 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정반대로 오라고 한 번 했다고 "얘네들이 내가 꼭 필요하구나."하고 가서 철퍼덕 주저앉아서 지갑은 굳게 잠그고 입은 열고 온갖 훈장질을 하기 시작한다면 여러분 부른 것을 끔찍하게 후회할 것이고 다음에는 절대 안 부를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타나면 모였던 젊은이들이 흩어질 것이고 여러분이 사라지면 흩어졌던 젊은이들이 다시 모일 것입니다. 웃지 않는 걸 보니까 실감을 못 하시는 것 같습니다. 기다리십시오. 곧 다가올 것입니다.
나이 든 사람이 절대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입니다. "나,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너희보다 젊다." 이 말은 하면 안됩니다. 젊은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말입니다. 그냥 꼭 그런 말을 하고 싶으면 자기 혼자 속으로 하십시오. 절대 그걸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노인들에게도 이 말을 하면 노인네들에게 욕먹고 젊은이들에게 하면 젊은이들에게도 욕을 먹습니다. 사람 사는 지혜입니다. 그냥 자기의 늙음을 그대로 인정하고 결코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왜 나이 든 사람들과 함께 있기 싫어하는지 아십니까? 마음이 늙었기 때문이 아니라 몸이 늙었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노인들은 절대 그런 말 하면 안됩니다. 그 이야기를 육십 대, 칠십 대 노인에게만 적용하지 말고 여러분이 사십 대라면 이십 대에게 가서 절대 이런 말하면 안됩니다. 내 마음은 너희들보다 더 젊다는 말은 하면 안됩니다. 눈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신적으로 이미 노년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지혜없는 노년입니다. 늙어 갈수록 젊은이들에게 사랑받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연약하고 가엾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교제를 가짐으로써 기쁨을 누리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삶의 보람을 찾고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늙어도 이렇게 누군가에게 유익을 줄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소외를 받아들이라 이것이 두 번째 지침입니다.
세 번째는 죽음을 받아 들이라는 것입니다. 명심해야 될 사실이 이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평온한 노년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늙는 것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자주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5년, 10년 전보다 늙었다는 사실을 매 순간 확인하면서 노인화 되어가는 정신훈련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텔레비젼을 켜던 인터넷을 켜던 저같이 얘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다 거꾸로 이야기를 합니다. 늙을수록 계속해서 더 젊게 생각하고 젊게 꿈꾸고, 젊게 하라. 그것이 진짜 젊은 사람들의 눈에는 늙을수록 노망을 부리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적용될 수 없는 영역을 구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이 예를 들어서 나이가 들수록 정신차리고 책을 많이 읽을 것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주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늙을수록 깨끗하게 하고 다닐거라고 한다면 누구도 피해 달아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은 나이 든 사람들에게 아주 거대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실현될 수 없는 환상을 집어넣는 쪽으로 사회의 광고나 이런 것들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돈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늙은 사람 보고 조용히 늙어 가라고 하면 팔 것이 없습니다. 오십 대입니까? 이십 대처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우리 성형외과 오십시오. 그러면 돈이 되는 것입니다. 사회의 정보가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늙은이들의 감성에 호소를 해서 이것들이 말하자면 엄청난 소비욕구를 창출해 내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안 그런 사람도 많이 있지만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오십 대, 육십 대가 되면 경제력이 제일 탄탄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구매력이 있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가성비를 따지지만 돈 많은 노인네들 가성비를 안 따집니다. 그냥 만족도만 따지고 가격은 안 따집니다. 그런 중심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것을 사회학적으로 꿰뚫어 보면서 경제와 연관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것에 미혹되지 않는 것이 주체성이 있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는 늙음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늙은이는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반대로 합니다. 젊은이는 자신이 절대로 안 늙을 것처럼 생각하며 자기 암시를 주고 늙은 사람은 코앞에 죽음이 다가 왔는데도 의식적으로 그것을 회피합니다. 그리고 의식을 딴 데로 돌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느 순간 벼락같이 늙음이 다가오고 천둥처럼 죽음이 다가 오는데 번개처럼 치는데 그 때는 이미 준비가 안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늙은 육체를 지탱해줄 정신의 힘이 없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영혼의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늙어도 불행하고 죽을 때도 불행하게 죽는 것입니다. 원하십니까? 그런 삶을 원합니까?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늙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면서 그 날이 가까워 졌음을 생각하고 내일 늙어도 그리고 내일 죽음이 찾아와도 내가 이미 다 예상했던 것이 되도록 마음의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이런 설교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셔서 한 번 더 태어나게 해 준다고 한다면 제가 뭐라고 대답한다고 했습니까? "하나님, 말씀은 참으로 감사한데 마음만 받겠습니다." "한번 사는 걸로 족합니다." 제가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키케로가 했습니다. 한 번 보여드리겠습니다. 노년에 관하여 23장 83절입니다. “그리고 만약 신께서 노인인 나를 다시 어린이가 되게 하시어 요람에서 울게 허용해주시더라도, 나는 강력히 반대할 것이라네. 마치 경주장에서 결승선으로부터 출발선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나는 진실로 바라지 않기 때문이라네”키케로,『노년에 관하여』(De Senectute, 23.83)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몰랐어도 인생에서 생각하는 것이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추하고 지저분하게 늙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내키는 대로 살면 나중에 반드시 추한 노년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남들이 볼 때에 아주 추루한 노년을 맞이하게 되어서 젊은이들에게 이런 교훈을 줄 것입니다. "난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아무 생각없이 그냥 살면 됩니다. 불현듯 노년을 맞이하면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에 아름답고 품위 있게 늙고 싶다면 그것은 늙었을 때 준비하는 게 아니라 젊었을 때부터 준비하는 것입니다. 생각없이 살지 마십시오. 신앙 없이 보낸 젊음의 끝에는 파산한 노년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삶이 허무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역으로 우리가 결코 허무하지 않고 의미 있는 존재로 태어났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파스칼의 논리를 따라서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인간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살면서 결국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 느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만약에 비참한 것이 그의 운명이었으면 그는 절대로 그렇게 생각 안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비유가 유명한 노예가 된 왕의 비유입니다. 원래 노예인 사람이 노예였다면 갑자기 어제까지는 그런 생각이 안 들었는데 오늘 노예로서의 삶이 비참하다는 생각이 안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제까지는 한나라를 호령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지고 오늘 노예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면 그 때 노예가 된 그 비참함을 원래 노예였던 사람이 느끼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이 비참하다고 느끼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로 창조되어었는지를 역설적으로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논리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만약에 우리가 인생이 허무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면 결국 그것은 우리가 의미 있는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에 허무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늙음으로 누군가에게 버림을 받아서 외롭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면 역설적으로 우리는 이미 누군가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이 세상에 창조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질병과 쇠약함으로 우리의 육신의 자유가 속박당할 때 있습니다. 그때에 신앙과 지식 그리고 사색으로 밀려오는 공허함과 무기력을 이겨내야 합니다. 젊은 시절을 이렇게 보내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노년을 맞을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노년이 여러분들이 볼 때에도 늙은 것 자체는 부럽지 않지만 어쩌면 저렇게 고상하게 늙을 수 있을까. 정말 품위가 있다. 그리고 젊은 친구들과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이 저 분과 대화를 나눌 때 느껴진다. 아니 대화는 그만두고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정말 품위 있고 고상하다고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다가가서 물어보십시오. 그 사람은 노년을 노년에 준비한 사람이 아니라 노년을 이미 어렸을 때부터 준비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만 그렇게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이테가 쌓이듯이 차곡차곡 인생의 연륜이 쌓이면서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그리고 우아하고 품위 있는 거칠어 보이진 않지만 아무것도 쉽게 꺾을 수 없는 고고함이 그 노년에 깃드는 것입니다. 생각을 별로 안 해보셨습니까? 이제는 생각하고 사십시오. 왜냐하면 곧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정신적으로 극복하지 못할 때 그의 노년은 젊은 시절보다 더 큰 혼돈과 고통을 겪게 되는데 매우 불행해지거나 도덕적으로 파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잔치집보다는 장례식장에서 인생의 지혜를 얻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는 사람이 삶에 대해 공정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젊은 날의 영광 젊은 날의 화려함에 비추어 자기의 인생을 보지 말고 죽음의 빛을 비추어 젊음을 보고 자기의 인생을 보십시오. 그러면 지혜가 생겨날 것입니다.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연금과 같습니다. 여러분이 생각 없이 젊음을 다 보내고 50살 쯤 되었을 때 노년의 연금을 준비한다면 가입할 연금이 없습니다. 십 년 후에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아마 어마어마한 돈을 내야 될 것입니다. 한 달에 천만 원씩 내면 될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스물여덟에 직장에 취업해서 연금을 붓기 시작한다면 별로 얼마 붓지 않고도 육십 세까지 부으면 훨씬 여유로운 노년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이치와 똑같은 것입니다. 생각없이 살지 마십시오. 파산한 노년이 기다리니 여러분은 생각하면서 사는 노년을 맞으시길 바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 열정을 잃어 버리지 말라. 겉사람은 늙어 갈지라도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열정입니다. 열렬한 신앙과 치열한 학문적인 사유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붙들고 내가 그분의 사랑으로 지은바 된 피조물이며 그리고 일생을 보람있게 산 뒤에는 마침내 그분의 품으로 돌아 가리라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찬양)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에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이 가리라
사랑의 내 주님께 열렬한 신앙과 주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삶의 모든 상황을 극복해 가십시오. 그리고 내 육체는 쇠잔해 갈지라도 나의 영혼은 날로 새로워서 주님을 뵈오리라는 소망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가까운 죽음을 두려움이 아니라 소망으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작고하신 청교도 연구의 거장이었던 제임스 패커 박사는 <아름다운 노년>이라는 책에서 이점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몸이 노쇠해져도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잃어서는 안된다. 그것이 우리 늙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이자 특수한 훈련이다. … 기력이 저하되어 조만간 몸은 탈진할 것이다. 그러나 열정만은 끝까지 요지부동이어야 한다.” 제임스 패커,『아름다운 노년』p.82 젊었을 때는 너무 마음이 분산하게 흩어졌어도 늙어서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오로지 하며 그분의 사랑으로 마음이 더욱 불붙는 노년을 맞이할 때 그는 품위 있고 아름다운 노년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열정을 간직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지혜는 이것입니다. 젊은 사람은 늙어간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죽음과 친숙해져야 합니다. 늙은 사람은 자신이 곧 죽고 육체의 장막을 벗게 될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의 남은 날을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하고 죽음의 빛으로 삶을 봐야 합니다. 늙어서 불편할수록 주님밖에 의지할 분이 없음을 기억하고 젊음을 아껴 쓰며 아름답고 품위 있는 노년을 준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잠시 쓸 육체가 죽음을 통해 맞이하게 될 영광스러운 부활과 천국의 소망으로 마음을 굳게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으로 사는 것입니다.
15. 희망이란 무엇인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히 9:27-28)
녹취자 : 조복령
I. 들어가는 말
우리는 14주에 걸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마치 여행을 하고 온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내가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가?>부터 시작해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를 거쳐 직업, 가족, 과학기술, 돈, 정직, 친구, 늙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여행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는 마지막 시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과연 <희망이란 무엇인가?>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에게 정말 희망이 있는 것인지 묻고 싶은 것입니다.
II. 인생의 끝은 죽음이다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인생의 끝이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자연적 결함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태어나게 하시고, 육체로 죽음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한 번이라는 것은 육체의 죽음인 첫 번째 죽음을 가리킵니다. 사람은 두 번 죽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죽음은 영혼의 죽음입니다.
죽음, 이것은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잠시 있다 사라질 인생의 의미를 아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지혜입니다. 모든 사람이 태어났듯이, 모두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입각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는 이제껏 마음을 압도하던 수많은 감각적인 사물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는 인연이 끊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것이고, 우리의 육체는 티끌이 되어 이 세상에 흩어질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도 결국은 잊혀질 것이요, 우리의 기억은 조각조각 흩어져 그 마음 어디에도 머물지 못할 것입니다. 혹시 우리를 죽을 때까지 그리워하고 마음에 간직한 사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도 역시 우리와 함께 뒤따라 죽을 것이며, 오늘 문상객이었던 사람이 내일은 누군가의 문상을 받는 망자가 될 것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그 후에는 세상에서의 삶을 능가하는 또 다른 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후에 전개되는 세계입니다. 그리고 사후에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들어가는 대문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우리말 성경에 심판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그리스어 크리시스(krisis)는 원어적으로 “나누다, 판단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로마 법정의 그림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람이 혐의를 받고 법정에 서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가 변명하고 싶은 이야기와 그를 고발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증인들의 이야기를 청취합니다. 그리고 재판관은 최대한 공정하게 법을 따라 판결합니다. 법정적 심판은 죄의 유무를 가리는 것입니다. 죄 있음도 입증되어야 하고, 없음도 입증되어야 합니다. 유죄인 경우에는 죄의 경중을 가려서 형벌이 선고되어야 합니다.
만약에 인간이 온 곳이 없다면 갈 곳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온 곳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자신이 살아온 삶에 대해서 책임져야 할 대상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결국 이성을 신의 보좌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그 이성을 최고의 판단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한번 대답해 봅시다. 인간이 기원이 없이 생겨났다는 생각은 과연 이성적 입니까? 만약에 어떤 사물을 보여 주고 이것은 생겨난 근원이 없고, 돌아갈 목적지도 없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비이성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물질보다 뛰어난 인간이 어찌 온 근원이 없겠으며, 그리고 돌아가야 할 목적이 없겠습니까? 그 근원과 목적의 빛 아래서 인간은 당연히 잘 살고 있는지, 잘못 살고 있는지 판단을 받게 되어 있고, 책임질 대상이 있는 것입니다. 생겨난 근원이 없다면 돌아갈 곳도 없을 것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인간은 죽은 후에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단지 흩어져 먼지로 사라지기가 모든 물질과 일반이라고 믿는다면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무엇을 근거로 자신은 존엄한 존재라고 믿어왔던 것입니까? 인간의 모든 도덕의식은 단지 관습에서 유래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책임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된 자로서 인간 본분에 대한 인식이고, 이 희미한 인식이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의 힘으로 남아 도덕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0절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인간은 모두 죽습니다. 죽은 후에는 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동의를 구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똑같이 죽은 후에는 즉시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심판에서 옳다고 판결을 받기 위한 유일한 기회는 살아있을 때뿐입니다. 죽은 다음에 두 번째 기회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명심해야 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생각하면 누구도 자기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을 깔볼 수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을 생각 없이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즐겁다는 이유 때문에, 길에서 벗어나 함부로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과 함께 심판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 심판에서 옳지 않다고 판결을 받을 때는 그 어느 불행했던 순간보다 더 큰 고통의 현실을 앞두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인간이 무엇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지혜는 이것입니다. 죽을 존재임을 기억하십시오. 이제껏 우리가 왕 노릇하며 살았지만 왕도 죽습니다. 나라도 없고, 권력도 없이 왕 노릇하며 사느라고 고생했지만 우리도 죽을 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III. 희망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죽음 밖에 기다리고 있지 않다면, 인간에게 과연 희망이란 있는 것입니까? 이처럼 잠시 태어났다가 죽어서 영원한 침묵 속으로 사라지는 필멸할 인간에게 과연 무엇인가? 과연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장수하여 일평생을 오래 산다고 칩시다. 그래도 결국 죽음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그의 인생은 반딧불의 일생과 같습니다. 벌레 한 마리가 태어났다가 죽는 것보다 더 나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과학이 발달하고, 의학이 발전한 시대인데도 최근 미국에서 최고령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보도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117세, 360명의 자손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60세에 죽던, 70세에 죽던, 100세에 죽던, 117세에 죽던, 그것은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한 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또 만약 그가 이 세상에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모두 누렸다고 합시다. 결국은 그도 막대한 재산으로도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었으니, 죽으면 진토로 돌아갈 것이 가난한 자와 일반이니, 그 또한 무(無)로 사라지기가 비참한 자와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의 무덤은 아름다운 돌과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치장하고, 잘 돌본 어여쁜 잔디가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을지라도 어차피 흙으로 돌아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부자의 죽음과 가난한 자의 죽음, 권력 있는 자의 죽음과 힘 없는 자의 죽음이 매일반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의 행복을 크게 두 가지 영역으로 구분해서 말합니다. 하나는 잠세적인 행복입니다. 잠시 있다 사라질 세상의 행복을 성경이 모두 언제나 깔보는 것은 아닙니다. 필멸할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고,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잠시 있는 세상의 행복도 때로는 추천하고, 또 그렇게 살도록 우리를 가르칩니다. 전도서 3장 22절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음을 보았나니 이는 그것이 그의 몫이기 때문이라” 전도서 8장 15절은 나아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에 내가 희락을 찬양하노니 이는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해 아래에는 없음이라 ..." 이처럼 성경은 이 세상에서 잠깐 있다 사라져가는 인간 세상의 행복도 추천합니다. 그리고 아주 무시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즐거워하고, 또 그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 그리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운 것, 이것도 해 아래서 아주 소중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하나의 행복, 영원한 행복을 기초로 하지 않으면 모두 한갓 지나가는 꿈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 행복은 바로 영원한 행복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영적 존재로서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행복을 가리킵니다. 전자는 후자를 기초로 하고 있어야지만 허무하지 않은 행복이 될 수 있으니, 공포와 비참 속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어떻게 진정한 행복일 수가 있겠습니까? 두려워 떠는 가운데 오늘 느끼는 쾌락이 어떻게 행복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영원한 행복이라는 기초 없이 그저 잠세적인 행복의 탑을 쌓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지개처럼 붙잡고 싶어 하지만 실제는 있지 않은 것입니다. 필멸할 운명에서 잠시 고개를 돌리는 회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인간에게 과연 희망이 있는 것입니까? 그 모든 인생의 허무를 극복하고 불행을 이기며 행복하게 될 희망이 있다면 도대체 그 길은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그것을 두 가지로 말합니다.
A. 구원을 받음
첫째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잠시 있는 육체만으로는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육체의 만족과 즐거움이 때로는 추천할 만한 기쁨이 되기도 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영혼의 영원한 운명을 잊어버리는 데 사용된다면 미래에 죽을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지 않고 도피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마치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영원히 있는 영혼이 구원을 받음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고, 거기에서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행복해지려다가 불행해진 것이지, 불행해지려다가 불행해진 것이 아닙니다. 참된 행복이 거기 없는데 잠시 있을 것을 영원히 있을 것으로 알고, 지엽적인 것을 본질적인 것으로 알고, 겉으로만 있는 것을 것인 줄 알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할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게 되고, 그것 때문에 인간은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불행하고 비참한 시기를 지납니다. 질병과 다툼, 미움과 고독, 전쟁과 끊임없는 갈등, 그리고 늙음과 병듬, 죽음, 이런 모든 끔찍한 일들을 경험합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이러한 고통과 괴로움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쩌다 맛보는 잠깐의 즐거움과 기쁨은 놀랍게 그런 인생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또 한 번 속으면서 내일은 희망이 있겠지 하며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이러한 모든 인간의 고통은 그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원인에서 나온 여러 가지 증상일 뿐입니다.
한의원에 가면 진맥을 합니다. 진맥을 하면서 한의사는 이 사람의 몸의 어느 부분이 허약하고, 질병이 있는지 알아맞힙니다. 그리고 양의사한테 가도 굳이 X-ray, CT, MRI를 찍지 않아도 몇 가지를 계속 물어보고 신체를 살핍니다. 거기에서 어떤 원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기침과 재채기가 나고 콧물이 계속 흐르면 그것은 코와 목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감기라는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 것입니다. 피가 나오기 시작하고, 복수가 차고, 호흡을 할 수가 없고, 고통이 시작되면 그것은 암입니다. 모든 질병에는 그 징후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죄라는 질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인류는 그 징후인 모든 고통과 불행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증상만을 완화시키는 임시적인 조치로는 결코 건강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모든 불행을 가져다주는 원인인 마귀를 멸하고 죄를 없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요한일서 3장 8절은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자신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가치는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죄악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열매입니다. 죄는 우리의 마음에 들어온 순간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우리의 생각에 관여하여 우리에게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허무한 것을 좇아가게 만듭니다.
청소년기에 저는 가출한 적은 없습니다. 제 가까이 있던 친구들이 가출한 것은 여러 번 보았습니다. 때로는 집안의 갈등 때문에 혹은 부모에게 야단을 맞아서 혹은 야단맞지는 않았는데 성적이 너무 못 나와서 혼날까 봐 두려움에 가출을 합니다. 때로는 답답하고 지루한 생활로 아주 신나는 일이 기다릴 것 같다는 선배들과 친구의 꼬임에 빠져서 가출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집으로 가는 데는 며칠 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가출할 때 꿈꿨던 그런 기쁨이 없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주 잠깐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집을 떠난 허전함과 쓸쓸함, 외로움과 서러움이 집을 떠난 기쁨을 압도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다시 잔소리하는 엄마, 야단치는 아빠, 그리고 숨 막힐 것 같았던 집안과 학교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철이 드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집을 떠나고, 너무나 상처가 커서 오랜 동안 다시 부모를 찾지 않았습니다. 타 도시에서 굴러다니면서 결국은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묻습니다. “아빠, 우리는 왜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어?” 그때 조용히 생각하며 자신의 인생을 살아온 날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힘들게 살아가면서 부모가 자신에게 상처를 준 것은 맞지만, 그 부모도 정말 힘겨운 인생을 살았다는 사실을 공감하게 됩니다. 그때 철이 난 아들은 자녀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부모를 만났을 수도 있고, 이미 돌아가셨을 수도 있지만, 마음은 어쨌든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안 해도 되는 일을 한 게 아니라, 진작 그렇게 했어야 할 일을 이제서야 한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믿어도 되는데 특별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원래 처음부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뜻을 따라 살았어야 했는데 가출한 것입니다. 타의에 의해서 혹은 자신이 스스로 탕자처럼 집을 나갔을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알 수 없는 이교도의 집안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주님을 모르는 시대에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다행입니다. 그것은 특별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안 하면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었던 그 일을 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어린아이 때 철이 듭니다. 다행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 온갖 만고풍상을 겪으면서 너무너무 사는 것이 괴로운 나머지 철이 들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희끗희끗해서, 어떤 사람은 죽어가기 직전에 철이 들고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언제든지 당신에게 돌아오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분의 품에 안기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자기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이것은 결코 육체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 생명입니다. 육체의 죽음 후에도 오히려 우리는 더 충만한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과 함께 살 것이니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는 두 가지 자유가 주어집니다. 첫째는 신분의 자유입니다. 예전에는 마귀의 자식이었습니다. 죄의 종이었습니다. 그것이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니 엄격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인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참된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인데 사실은 당신을 모르고 살아가는 짐승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는 순간 그의 신분을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옮겨 주신 것입니다. 불법 체류자로 고생하고 도망다니며 살다가, 영주권을 받아서 그것을 흔들면서 기뻐하는 미국에 있는 한국 사람들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것은 신분의 변동을 가져옵니다. 더욱이 시민권까지 나오면 이제는 당당하게 미국인이 누리는 모든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사는 나라의 국민이 되어도 그렇게 자부심이 넘치는데,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게 바로 신분의 상승이자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이것만 주시지 않습니다.
두 번째 또 하나를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상태의 자유입니다. 이 상태라는 것은 영혼과 마음의 상태입니다. 예전에는 그 마음과 영혼이 무엇인가에 묶여서 고통스럽게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를 포기한 것입니다. 개를 길러보십시오. 여러분 개를 데려다가 예뻐해 주지 않고, 그냥 진짜 짐승처럼 내버려둡니다. 개가 진짜 짐승 비슷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인이 맨날 아침이면 나갔다가 밤중에 들어옵니다. 바닥에 말뚝을 박아놓고, 끈이라도 조금 길게 해 주지 1미터밖에 안 되게 해서 큰 개를 묶어 놓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밥그릇 한 개와 물을 갖다 놓고 갑니다. 개를 몇 달 그렇게 묶어 놓으면 안 움직입니다. 왜냐하면, 밖으로 나가 보려고 했는데 줄이 걸려서 목을 잡아 당기는 것을 몇 번 반복해서 경험하고는 그 자유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강아지는 돌아다녀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누가 못된 자식이 되고 싶습니까? 진짜 자식에게 상처만을 안겨 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그리고 진짜 형에게 없었으면 좋을 동생이 되고 싶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존경받는 부모가 되고 싶고, 사랑받는 자식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정말 남편에게 소중한 아내, 아내에게 정말 소중한 남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어느 두 부부가 대화를 나눕니다. 남편이 너무 아내가 사랑스러워서 칭찬을 받으려고 분위기를 잡고 감격적인 목소리로 얘기했습니다. “여보, 내가 할 말이 있어.” “뭔데?” 두 손을 꼭 잡고 “나는 다시 태어나도 당신하고 결혼할 거야.” 그러니까 아내가 갑자기 손을 뿌리치면서 하는 말이, “당신은 왜 다음 생에도 그렇게 이기적이야?” 모든 사람에게 다 감동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남에게 상처주는 것은 노력을 안 해도 잘 되는데, 감동을 주는 것은 쉽게 안 됩니다. 여러분, 최근에 누구한테 가슴이 시릴 정도로 감동을 주셨습니까? 주위에 감동을 받았는지 물어 보십시오.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영혼의 자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분별없는 사람들은 야생동물을 포획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사실 야생동물이 너무 많아서 경기도, 강원도 일원에 가보면 수백 킬로미터에 철조망을 쳐놓았습니다. 멧돼지 때문입니다. 35만 마리라고 합니다. 그 멧돼지가 아프리카돼지열병을 옮깁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수렵을 허가해서 멧돼지를 잡아서 개체수를 조절해야 합니다. 잡는 것이 너무 하면 생으로 포획을 해서 다시 번식하지 못하도록 계속 조치를 해야 됩니다. 모든 동물들을 그렇게 조절해야 됩니다. 그것이 가장 자비로운 방법 아닙니까? 저는 어려서부터 그런 것을 많이 보면서 자랐습니다. 시골사람들이 덫을 놓습니다. 덫을 놓은면 사람 안 다니는 곳에 놓습니다. 시골 사람들은 노루, 멧돼지가 다니는 길을 압니다. 아무데나 다니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길목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 알고 거기에 덫을 놓습니다. 그리고 낙엽 같은 것을 살짝 덮어 놓습니다. 특히 덫은 가을과 겨울에 많이 놓고 눈으로 덮어놓습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먹이가 별로 없을 때라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미끼를 먹으려고 발을 내밀다가 덜컥하면 밑에서 탕하고 뛰어오르면서 톱니바퀴처럼 된 것이 다리 하나를 꽉 조입니다. 덫은 쇠말뚝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빠져나오려고 합니다. 마구 몸부림치면서 빠져나오려고 하면 할수록 살갗이 까지고, 뼈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결국 공간이 나면 날수록 스프링은 더 강하게 조여서 뼛속까지 파고 들어갑니다. 절대 놔주지 않습니다. 한 번 걸리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죽든지, 누가 풀어 주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가 그런 상태에 놓여 있었는데 우리를 풀어 주신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멧돼지 새끼 한 마리가 걸렸는데 얼마나 살아나려고 몸부림을 쳤는지 하얗게 뼈가 드러났습니다. 살갖은 다 찢어지고 피가 났습니다. 마지막에 죽었는데 크지도 않았습니다. 눈물이 흘러서 얼어버렸습니다. 어미 돼지도 새끼를 구하러 왔다가 갔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데 가슴이 울컥 하면서 그 덫을 놓은 사람들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가서 고기를 사서 먹으면 되지 꼭 그걸 먹어야 됩니까? 그리고 거기에 어떤 균이 오염되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먹으면 안 됩니다. 더군다나 그것을 잡아서 생으로 내장을 먹는 사람들이 있는데 큰일납니다. 그런 상태에 우리가 있었던 것입니다. 죽은 것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한 분이 낚시광입니다. 한번은 자신이 일본에서 낚시로 잡아온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무려 80kg짜리 참치였습니다. 진짜 사진을 보여 줬는데 어마어마합니다. 어떻게 잡았냐고 했더니 사진을 다 보여 주는데, 낚시를 던지고 8시간을 씨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큰 고기를 달아서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80kg짜리 참치가 얼마나 힘차게 달릴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확 물었던 것입니다. 물고는 이 참치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배 밑을 돌아다니면서 심지어 스크류에 낚싯줄을 감아서 끊어 버릴 정도로 영리합니다. 결국은 8시간 동안 씨름을 하다가 포기하고 돌아온 것입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그 고기 한 점을 먹으려고 입을 내밀었다가 낚시에 물려서 결국은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유롭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을 떠나서 찾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가장 큰 유익은 우리가 그 자유를 다시 되찾게 된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죄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잘 살고 싶어도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안 될 때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면 정말 안 됩니다. 그러나 단, 그 때에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하나님이 힘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죄와 사망의 결박에서 풀려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시 자유를 주셔서, 다시 선하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다시 잘 살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입니다. 그 영생을 오늘 우리가 누리면서 살기 때문에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 아직도 구원받지 못했다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이것보다 더 시급한 일은 없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아무리 많이 생각하고 인간으로 사는 길을 궁리할지라도 여러분은 결코 영원한 행복에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이 만약에 이미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온전한 믿음을 갖도록 노력하십시오. 세상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결코 그런 신앙으로는 행복에 이룰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B. 주님의 재림
마지막 두 번째는 주님의 재림이 희망입니다. 모든 인류는 주님의 재림을 볼 것입니다. 그때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자는 그 상태에서 주를 만나게 될 것이고, 이미 죽은 자들은 부활하여 주를 뵈올 것입니다. 세상에게는 최후의 날이오 즐거움이 끝나는 날이지만, 신자들에게는 행복 자체이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시작의 날이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용서의 은총이,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의 형벌이 주어질 것입니다. 오늘은 바로 그날을 위해 준비할 유일한 기회입니다. 죄를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이제껏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했던 모든 노력이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었음을 인정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시고, 그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2장 38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여러분이 죽어야할 운명인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죽음과 함께 영원한 어둠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인데, 거기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 중에 그렇게도 주님을 믿기 싫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파스칼이 팡세에서 말했던 유명한 내기이론이라도 생각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기이론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파스칼은 사람들에게 제안합니다. 자, 생각해 보자. 결국 하나님은 있든지 없든지 둘 중에 하나인데, 어떤 사람은 없다고 믿고, 어떤 사람은 있다고 믿는다. 당신이 별로 증거도 없으면서 하나님은 없다에 인생 전체를 걸었다고 치자. 그런데 뜻밖에도 네가 죽었는데 하나님이 계신다. 그러면 당신은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인데, 왜 그런 식으로 내기를 거느냐. 진짜 도박을 하려면 따기 위해서 도박을 해야 되고, 따기 위해서 한다면 이익이 되는 쪽에 돈을 걸어야지 이익이 되지 않는 쪽에 걸면 어떻게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있다는 쪽에다가 내기를 걸었다고 가정해 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있다는 쪽에 너의 인생을 걸었다고 치자.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그리고 죽었는데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럴 때 파스칼이 묻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손해 봤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무엇을 손해 봤느냐? 욕심과 정욕대로 살지 못하고 단정하게 산 것이 손해라고 말하려느냐? 그는 말합니다. 너는 이미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을 수없이 보지 않았느냐? 그런데 네가 하나님이 있다는 쪽에다가 인생을 건 덕분에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사람들에게 사는 동안 존경을 받았고, 욕망에 덜 시달렸고, 죄를 짓지 않았고, 이웃에게 칭찬을 받고, 이웃에게 행복을 주었고, 그래서 모든 사람이 너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무엇이 손해냐고 묻는 것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서 돌아올 나쁜 결과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나는 그 사람의 이야기에 더 보태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진짜로 믿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하나님이 없는 사람으로 살 것이요, 있다고 믿었으면 진짜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있다고 말을 하면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산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엔 없다고 믿기 때문에 당신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보다 더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지 않겠습니까? 더 위선적인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누구에게 더 상처를 받습니까? 여러분을 노골적으로 미워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너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뒤통수를 치는 사람에 의해서 상처를 더 많이 받습니까? 누구에게 더 분노하게 됩니까? 하나님은 진실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분을 믿고 단정한 삶을 살게 하신 것은 그것이 바로 인간으로 지음 받은 목적이고, 그 안에서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살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 올라가신 것 같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날에 다시 오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예수를 믿으면 유익이 무엇이냐고 말한다면 수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사람이 나에게 당신이 예수를 믿고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난 할 말이 없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것이 없습니다. 정말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내 욕심껏 살고, 내 정욕대로 살고, 내 야망대로 사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살지 않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것이 결국 나를 불행하게 했을 텐데 어떻게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테러범이 채워준 폭탄 조끼를 입고 있다면, 그래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데 누군가 와서 기적적으로 그것을 풀어주어서 벼랑 끝으로 던져 계곡 아래서 폭발하게 만들어서 살려 주었다면, 당신은 왜 내 조끼를 훔쳐 갔느냐고, 왜 내 조끼를 가져갔냐고 항의하겠습니까? 그럴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가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그런 것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잃어버린 것은 예수를 찾은 것만큼이나 매우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유익이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얻은 가장 큰 유익은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인생의 처지에서든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그분이 계시다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선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죽음이 매우 가까이 다가와도 두렵지 않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주님 없이 철 모르고 방황하던 시절에는 내가 주님보다 높은 줄 알았기에 무신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로 살아보니 너무 고통스럽고, 견딜 수가 없고, 그 고통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가 없어서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날마다 햇빛이 나고 맑은 날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꽃길만 걸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에 주님을 몰랐더라면 꽃길을 걸으면서, 잔디밭을 걸으면서 지루해졌을텐데, 혹은 헛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걸었기 때문에 때로는 가시밭길을 걸으면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라와 같이 쓴 물을 머금어야 하는 때도 불평과 원망 대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에게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육신으로서는 결박을 당하고, 때로는 핍박을 당하고, 때로는 환란을 당하고, 때로는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눈을 뜨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시기도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아픔들은 악기를 연주하는 활과 같이 아름다운 가락을 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즐겁고 배부르고 기쁘고 신났던 때는 별로 기억에 남는 것이 없지만, 고통스럽고 슬프고 외로웠던 때는 기억에 남습니다. 그 자체가 좋아서 기억에 남는 것이 아니라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가 되었고, 한숨이 변하여 노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거기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찬송할 수 있는 제목이 되었던 것입니다. 인생이 무엇이겠습니까? 잠시 있다가 안개처럼 사라져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리고 검불처럼 사라져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육신은 쇠하여 가기 마련이고, 죽음을 향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바람이 불어 벚꽃이 떨어질 때가 벚꽃의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름답게 활짝 꽃필 때가 절정이 아니라 충분히 열매를 맺을 준비를 하며 바람에 나부낄 때, 그래서 그 꽃잎이 하늘에 흩어질 그때가 벚꽃의 일생에 절정입니다. 늦은 봄날에 나부끼는 수많은 벚꽃들의 춤추는 군무는 낙화암에 떨어지는 삼천궁녀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벚꽃의 절정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다가 바람에 나부끼면서 그 꽃잎은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증거합니다. 우리 인생의 절정이 젊을 때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이 무슨 절정입니까? 육체적으로는 절정이겠지만 마음으로는 결코 절정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절정은 고단한 달려갈 길을 모두 마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운 다음 우리 인생의 결승선을 통과하는 그때입니다. 주님께서 한 손에는 물수건을 들고, 한 손에는 물병을 들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그분의 품에 안기는 그때가 우리 인생의 절정입니다. 한 인간이 일생을 끝내고 숨을 거두는 그 순간이 꽃잎 되어 하늘에 나부끼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눈부신 순간입니다. 그때 온 몸에서 쏟아지는 엔돌핀은 일생을 살아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시상식의 상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거기서 긴 사연을 간직한 우리의 일생을 사는 동안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심지어 내가 당신을 버렸을 때나, 당신을 붙잡았을 때나 변함없이 나를 사랑해 주시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오늘 우리에게 죽은 자보다 나은 선물이고, 죽는 그 순간이 우리에게는 살아있는 자보다 더 나은 선물입니다. 어떻게 인생을 이렇게 바라보는 시야가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우리가 어디서 우리의 인생을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남은 과제는 이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이 선물로 주신 오늘 하루를 설레이는 가슴을 가지고, 내 인생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한 가닥의 노래가 되도록, 나의 살아 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이 되도록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고 이 세상 너머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이라고 일컫는 날 동안에 하나님을 사랑할 때도 하나님을 떠났을 때도 우리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모두 겪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만 늙어가지 않고,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도 늙어갑니다. 하나님을 의지했던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사람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끄러지듯이 그분의 품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고, 저 사람들은 슬피 울며 고통하며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든 죽든 그것은 주님의 손에 달린 것이고, 우리는 살아 있는 오늘 이 하루를 선물처럼 여겨야 합니다. 어제 죽은 사람은 받지 못했던 이 선물이 오늘 나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선물로 주신 이 하루를 나를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셔서 일생 나를 버리지 않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으로도 나를 맞이해 주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Ⅳ.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신자에게 보이는 이 세상은 전부가 아닙니다. 여기는 잠시 머무는 대합실이고, 본향을 찾아가는 순례자의 길입니다. 이 세상을 능가하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거기서 사랑하는 주님을 다시 뵈올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그분을 보았고, 그분의 사랑을 더듬어 유추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날에는 지금 우리가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의 행복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뵈옵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아무 소원도 없는 극치의 기쁨이 우리를 휩쌀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완벽한 만족을 누리고, 이제껏 누린 적이 없는 최고의 행복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로 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은 인생을 하나님을 사랑하며 여러분을 인간으로 창조하신 소명을 따라 살아서 행복하게 죽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