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2020년
주일오전설교
설교기간 | 2019년 12월 31일 – 1월 26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0년 7월 24일
목 차
1.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창 39:3-5) 2019.12.31. 주일오전 5
2. 하나님이 함께하심(창 39:1-2) 2020.01.05. 주일오전 12
3.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창 50:19-21) 2020.01.12. 주일오전 19
4. 약속을 바라는 믿음(히 11:21) 2020.01.26. 주일오전 26
<설교 프레임>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1 2019. 12. 31 송구영신에배
<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3-5)
I. 본문해설
모든 사람들이 형통한 삶을 살기 원한다. 때로는 이에 대한 기대가 빗나가기 때문에 실망하기도 한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로 태어나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다. 그를 미워하던 형들의 시기 때문이었다.
그는 굴곡 많은 삶을 사는 우리들보다 더 많은 시련을 겪었다. 그러나 결국 믿음으로 승리하고 복된 삶을 살았다.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II.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A. 형통한 사람
첫째로, 그는 형통(亨通)한 사람이었다. 모든 일이 잘 되었다.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3)
여기서 “형통한”(mazriach)은 “발전한, 번영한, 평탄한”이라는 뜻이다. 인생의 행로가 막힘이 없이 뚫렸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의 삶을 보면 그렇지 않다. 잘못 없이 노예로 팔려왔다. 충성을 다했으나 주인 아내의 모함으로 투옥된다.
따라서 “형통하다”는 만사가 자기 뜻대로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예기치 않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것이다.
오히려 그의 인생은 사람들의 죄와 잘못으로 꼬였다. 그러나 그 때마다 새로운 인도를 받았다. 이것이 형통이다.
우리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지만, 믿음으로 살아가면 새로운 길로 인도 받는다. 이것이 형통이다.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진다.
a. 당신이 선포함으로써.
b. 우리가 살아봄으로써.
우리가 바라는 것은 최선이 아닐 수 있다. 또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 뜻대로 되지 않게 하신다.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은 우리 뜻대로 되지 않은 일들을 통해 오히려 더욱 복된 길로 인도하신다. 이것이 형통이다.
B. 은혜 입은 사람
둘째로, 그는 은혜(恩惠)를 입은 사람이었다. 사람에게 입었다.
“은혜를 입다”라는 표현은 흔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것으로 표현되었다(렘 31:2, 눅 1:30).
그러나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이때 사람에게서 받는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요셉은 하나님과 통(通)하고 또한 사람들과도 통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은혜를 입었다.
요셉이 좋은 주인을 만나게 하시고 은혜를 입게 하셨다. 왜 보디발은 히브리 종에게 은혜를 베풀었을까?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상처를 신앙으로 극복했다. 그가 상처와 원망 속에 살았다면 형통하지 못했다.
뜻대로 안 되는 것 같을 때 믿음으로 살라.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게 하신다. 형통하게 하신다.
C. 복을 주신 사람
셋째로, 그는 하나님이 복(福)을 주신 사람이었다. 노예인 요셉으로 인해 주인인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5)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은 그저 이방인(異邦人)일 뿐이었다. 그가 복을 받은 것은 그 집안의 종 요셉이 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위가 높은 것이 곧 하나님이 쓰시는 순서는 아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중심인물로 삼으신다. 노예 때문에 복을 받았다.
요셉은 자신이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의 통로(通路)가 되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높은 지위나 부(富)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으로 복의 통로가 되었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시 73:28)
자신이 하나님의 복(福)을 누리고 이웃도 그 복에 참여하게 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셨을 뿐이다. 자신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받게 하셨다.
새해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라. 그래서 형통하고, 은혜를 입고, 복을 받는 사람이 되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2 2020. 1. 5 주일 낮 예배
< 하나님이 함께하심 >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1-2)
I. 본문해설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 되기 전 노예로 끌려가는 고난을 당했다.
상상치도 못했던 상황에 던져졌으나 거기서도 형통한 사람이 되었다.
비록 자신이 바라지 않는 역경들을 만났으나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
II. 하나님이 함께하심
요셉이 형통(亨通)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이다. 그가 겪은 많은 어려움은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하셨음을 보여준다.
A. 고난 받음
그는 고난(苦難) 받았다. 어린 시절 유족했으나 애굽에서 고생했다.
요셉은 야곱이 사랑하던 아내 라헬(Rachel)에게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를 노년에 얻었기에 더욱 사랑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창 37:3)
요셉은 이전에도 신령한 꿈을 꾸곤 했다(창 37:7-9).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을 본격적으로 경험(經驗)한 것은 애굽에서였다.
누구나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신다. 때로는 고난(苦難)을 통해서 다듬으신다.
하나님은 요셉에 대해 큰 계획(計畫)을 가지고 계셨다. 장차 그를 애굽의 총리로 삼아 온 세상 사람들을 큰 기근에서 구원하고자 하심이었다(창 50:20).
또한 요셉의 집안을 애굽에서 번성하게 하여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民族)을 만들고자 하셨다.
아버지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해 올 때 가족들의 수가 70명이었으나(창 46:27), 애굽을 탈출할 때는 전쟁에 참가할 수 있는 남자만 60만 명이 넘었다(출 12:37).
이처럼 요셉은 구원(救援)의 역사에서 큰일을 이루기 위해 선택되었다. 따라서 그는 부르심에 알맞게끔 철저히 준비되어야 했다. 신앙과 인격, 지도력과 경영 능력을 갖춰야 했다.
그에게 전개된 예기치 못한 상황들은 모두 이 큰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이 그를 준비시키시는 과정(過程)이었다.
우리도 뜻밖의 난관을 만난다. 이는 우리를 더 크게 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준다. 그래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使命)을 맡기시고 또한 준비시키신다. 때로는 고난을 통해 더 큰 믿음과 능력을 주신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했다고 낙심(落心)하지 말라. 잠시 고난을 겪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더 놀라운 길이 나타난다. 이것이 형통이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과 함께하라. 시련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굳게 믿으라. 간절히 기도(祈禱)하라.
하나님은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善)을 이루신다(롬 8:29).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해도 결국 형통하게 된다.
B. 함께하심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해 주셨다. 고난 속에서도 도와주셨다.
그는 형통(亨通)한 사람이 되었고 큰 복(福)을 받았다. 이는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2-3)
이 짧은 구절에 “함께하셨다”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온다. 이는 그 사실이 성경 기록자에게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를 보여준다.
1. 노예에 불과함
그는 팔려온 노예(奴隸)에 불과했다. 요셉은 미천한 히브리 종이었고 반면에 보디발은 애굽의 최고위층 권력자였다.
그러나 성경 스토리(story)의 주인공은 보디발이 아니라 요셉(Joshep)이었다. 그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 요셉은 형통하지 않았다. 그의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았기에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그도 자신이 겪는 시련(試鍊)을 모두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심을 믿었다. 그의 소망은 하나님이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 11:22)
2. 형통하게 하심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亨通)하게 하셨다. 어려울 때마다 형통했다.
그것은 우연한 대박이 아니었다. 은혜와 믿음의 결과였다.
어려운 상황(狀況)들을 만났으나, 그때마다 피할 길을 주시고 극복할 힘을 주셨다.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당시 요셉에게 형통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자신의 억울함을 씻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길을 예비(豫備)하고 계셨다. 이는 요셉을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셔서 세상 만민을 다가올 큰 기근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는 것이었다.
요셉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했다. 하나님의 계획도 이루어졌고 꿈에도 그리던 가족들과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 이는 우리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자산이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가 원치 않는 현실(現實)이 전개될 수도 있다. 그때 우리는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세상의 시련에 마음이 꺾이지 말라.
하나님과 함께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한 더 큰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잊지 말라.
믿음으로 살면,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의 형통하심을 볼 수 있다. 이제껏 알지 못하던 위대한 계획(計畫)을 보게 된다.
가보지 않은 땅을 밟지 않고 어찌 약속의 땅으로 향할 수 있겠는가? 담대하게 한 해를 시작하라. 하나님과 함께하기를 사모하라.
하나님이 함께하신 사람3 2020. 1. 12 주일 낮 예배
<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I. 본문해설
요셉은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았다. 어디로 가든지 형통한 사람이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당했으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았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선(善)으로 바꾸셨다.
II.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모든 사람은 자신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누구나 자기에게 좋은 일들만 일어나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쁜 일도 일어난다.
하나님은 좋은 일들을 통해서만 아니라, 나쁜 일들을 바꾸셔서도 좋게 하신다. 하나님이 선(善)하시기 때문이다.
A. 해를 당하게 됨
요셉은 해를 당했다. 다른 사람들 때문에 많은 고생을 했고, 아주 나쁜 일들을 여러 번이나 겪었다.
그는 잘못이 없었지만, 형들에게 해를 당하여 애굽에 팔려왔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충성을 다했다. 그러나 결국 그에게 돌아온 것은 추행범의 누명을 쓰고 투옥되는 것이었다.
감옥 속에서도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었다. 그는 석방됐으나 요셉에게 받은 은혜를 저버렸다(창 40:23).
그의 인생은 참으로 꼬였고, 인복(人福)도 없어 보였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한 악(惡)과 배신의 연속이었다.
B. 바꾸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바꾸신다. 악은 사람에게서 생겨나지만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선으로 바꾸실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는 두 시야가 있다. 하나는 사람의 눈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은 무지하다. 그래서 과거를 쉽게 잊고, 미래는 알지 못한다.
사람의 눈은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다. 인생 전체를 보지 못한다.
삶은 알지 못하는 길의 연속이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하다. 그 길을 모두 알 수 없으나,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믿으며 가야 한다.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요셉의 많은 고난은 작정하신 때를 기다리며 준비시키신 그분의 섭리(攝理)였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창 41:46-47)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형들은 이전에 행한 악한 일들 때문에 요셉에게 보복 당할까봐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아버지의 거짓 유언을 지어내면서까지 요셉에게 용서를 받고자 하였다(창 50:17).
형들이 와서 엎드리며 스스로 “당신의 종들”이라고 고백했다. 비로소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하는 꿈이 이루어졌다(창 37:9).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하나님은 선(善)하시다. 나쁜 것이 없으시다. 나쁜 것은 모두 사람에게서 온다. 그러나 또한 생겨난 나쁜 것을 좋게 하실 수 없다면 어찌 좋으신 하나님이시겠는가?
여기에 인간의 소망이 있다. 인생은 죄 때문에 망가지지만 하나님은 고치신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신다.
C. 형제를 용서함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다. 자신을 팔아 애굽의 노예가 되게 만든 형들과 진심으로 화해하였다.
이것은 단지 인간의 너그러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의 신앙에서 온 것이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창 50:19)
이는 그가 자신이 겪은 많은 시련들이, 넓게 보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일어난 것들이었다고 믿었음을 보여준다.
요셉의 형들은 악(惡)을 행해서 잊을 수 없는 커다란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서 알지 못하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음을 알았다.
그는 형들을 용서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위로하고 그들과 자녀들을 돌보아 주기로 약속했다(창 50:21).
맺힌 것을 풀어야 영혼이 산다. 당신이 복 받기를 원한다면 이제껏 미워하던 사람들을 용서하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라.
하나님의 뜻이라는 관점에서, 넓은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보라.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인생을 믿음으로 살라.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인간이 나쁘게 만든 일도 좋게 바꾸실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 없이 좋은 것은 나쁘게 되는 길이고, 하나님과 함께라면 나쁜 것도 좋게 되는 길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기 뜻을 보이신다. 인생의 길이 거기에 있다.
부디 은혜를 받으라. 하나님을 만남으로 한 해를 시작하라.
하나님이 함께하신 사람4 2020. 1. 26 주일 낮 예배
< 약속을 바라는 믿음 >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 50:24-25)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 11:22)
I. 본문해설
요셉이 아버지 야곱과 형들을 만났을 때 그의 나이 약 39세였다. 애굽에 팔려온 지 약 22년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애굽의 총리가 된 후로 약 9년이 지났을 때 가족들과 재회하였고, 그는 이후로도 약 61년을 더 살았다.
요셉이 죽기 직전에 남긴 유언은 그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 말해준다.
II. 약속을 바라는 믿음
늙은 요셉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았다. 통치자로서 애굽의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그의 소망(所望)은 오직 하나님께 있었다.
A. 떠날 것을 당부함
그는 자손들에게 애굽을 떠날 것을 당부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약속(約束)하신 땅에 대하여 말하였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창 50:24)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오래 된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땅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요셉과 형제들의 후손이 누리게 될 땅(land)이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방랑(放浪)이 끝난다는 의미였다.
그 땅에 대한 약속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하시는 특별한 나라를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이었다.
요셉은 총리가 되었으나 오히려 자기를 나그네라고 여겼던 조상의 믿음을 공유하였다. 아벨과 에녹, 노아와 아브라함의 믿음이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그 땅은 곧 그리스도(Christ)를 예표하는 것이었다. 신약의 성도들이 그로 말미암아 누릴 영원한 안식을 바라본 것이다(히 4:8-9).
땅에 대한 요셉의 소망은 곧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었다. 그 땅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있고자 하는 소망이었다.
그는 믿음으로 소망(所望)을 가지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애굽에서 총리가 되기까지 힘을 다하여 살았다. 약 11년간 보디발의 집의 노예로서, 총무로서, 감옥의 죄수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가난과 시련을 겪었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세상(世上)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다.
우리의 기도 제목들은 대부분 이 땅의 일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린 것이어야 한다.
B. 자기 뼈를 위해 명함
요셉은 약속의 땅으로 떠날 때 자기 유골을 가지고 가라고 유언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증거한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 11:22)
출애굽에서 이 일이 이뤄졌으니, 이는 백년 후의 일이었다(출 13:19).
그는 애굽을 떠나는 일이 곧 일어날 것처럼 유언했으니, 그가 이 소망 안에서 종말론적인 삶을 삶았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었다. 사랑은 시간을 초월한 감정이기에 먼 미래를 현재(現在)처럼 느껴지게 하였다.
지혜는 영원(永遠)의 빛 아래서 순간적인 인생을 보는 것이다.
인생(人生)은 너무나 짧고 덧없어서 없는 것과 같다. 또 일생의 얼마나 많은 날을 슬픔과 탄식으로 보내는가?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시 39:5)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아는 것이 지혜(知慧)다. 이는 절망하게 하는 허무감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이다.
III. 적용과 결론
요셉은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으나, 그 상처가 영광으로 바뀌었다. 좋으신 하나님이 악을 선(善)으로 바꾸셨다.
언제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함을 알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며 살라. 믿음으로 살라.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2019.12.31_송구영신예배 1)
1.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창 39:3-5)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해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형통한 삶을 살길 원합니다. 때로는 이에 대한 기대가 지나치기 때문에 기대에 빗나가 실망하기도 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아들로 태어나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잘못이 없었으나 그를 시기하고 미워하던 악 때문이었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요셉은 애굽으로 팔려 와서 굴곡 많은 삶을 산 우리보다 훨씬 많은 시련을 겪었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인 노예로부터 한 나라의 총리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믿음으로 승리하고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많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순종의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의 그림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II.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이 주제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A. 형통한 사람
첫째는 형통(亨通)한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일이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2절,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형통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마즈리아흐”(mazriach)인데 이것은 “발전하다, 번영하다, 평탄하다”라는 뜻입니다. 인생의 행로에 어떤 막힘이 없이 뚫렸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형통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요셉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형통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막히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 당시 채색 옷을 입으며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잘못도 없이 그를 시기하는 형들에 의해서 상인에게 팔려 애굽에 노예로 끌려왔습니다. 그 집에서 충성을 다해 주인에게도 인정받았으나 주인 아내의 유혹에 순응하지 않았다는 구실로 모함을 받아 감옥에 투옥됩니다. 거기서 자기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 분명히 자기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는데 그 사람은 여러 해 동안 그 은혜를 저버립니다. 모든 것이 꼬인 것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성경은 “그가 형통한 자였다.” 고 말합니다. 아니,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모든 형제들에게 시기가 날 정도로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사람이 상인에게 팔려서 노예로 끌려왔고, 또 아버지는 피 묻은 옷을 보며 그 아들이 죽은 줄 알고 한이 맺히는 이별을 했는데 무엇이 형통했다는 말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형통하다”고 하는 것은 모든 만사가 자기 뜻대로 되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기치 않은 상황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것을 뜻합니다. 즉, 어려움을 만나고 인생이 꼬이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고 그런 시련을 만날 때마다 놀랍게 하나님의 새로운 인도를 받으며 자기가 꿈꾸지도 못했던 어떤 목적을 향해 가고 있는 상태가 형통한 것입니다. 아주 심하게 말하면, 고생을 해도 형통한 사람이 있고 모든 것을 누리고 자기 뜻대로 되는 것 같아도 형통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사람들의 죄와 잘못으로 꼬였습니다. 요셉은 누구에게 해를 끼치거나 그에게 악을 행하지 않았는데도 만나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선을 악으로 갚거나 혹은 은혜를 잊어버리면서 그의 인생은 여러 번 꼬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꼬이는 가운데 만난 시련 때문에 요셉은 하나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그도 알지 못하는 큰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통”입니다.
우리의 뜻대로 될 때도 있지만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도 감사할 정도로 새로운 길로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때로는 큰 시련을 만났는데도 그 사람은 언젠가 그때 그 시련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격하며 찬송합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가 그런 하나님을 찬송했습니까? 그렇게 고생을 많이 하고 그 시련 속에서 모진 아픔을 겪었는데도 결국 그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 하나님이 그를 그런 힘든 상황을 통해서 꿈꾸지도 못했던 새로운 길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감격이 없습니다. 자신의 형통함을 위해 온 인간의 재주와 생각을 의지하고 세속적인 결정을 내리지만 성공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하나는 당신이 선포하심으로써 알려집니다. “나는 이러한 하나님이다. 너희는 이렇게 믿고 이렇게 살아라.”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착념하며 성경을 성실하게 배우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이 압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은혜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살아봄으로써 알게 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흔히 “섭리”라고 부릅니다. “섭리”는 시간이 흘러가고 살아보아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으십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그는 혹독하도록 긴 세월을 시련 속에서 보내게 됩니다. 그가 감옥에서 나와 바로의 꿈을 해석하기 위해 그 앞에 섰을 때 그의 나이가 30세였다고 했습니다. 그 긴 세월을 애굽에 소년으로 끌려와 혹독한 세월들을 지내며 온갖 시련과 연단을 겪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애굽의 문화와 그들의 경영방식, 그리고 지도력을 길러나가게 하셨습니다. 그보다 더 뛰어난 것은 이런 형통한 사람이 되기까지 그는 의지할 곳도 없는 외로운 이국땅에서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자신 스스로 연단을 받게 됩니다. 그는 아마 죄수로 투옥됐을 때 바로 앞에서 국무총리로 지명 받으리라고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막연한 꿈이 있었습니다.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고 하나님이 요셉 자신을 형들의 인생에 뭔가 중요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희미한 것이었습니다. 후에 애굽의 고고학적인 발굴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놀랍게도 요셉이 끌려가던 이 시기의 공문서를 발굴하고 해독하면서 그 당시 공직에 임명될 수 있는 나이가 30세였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하나님은 30세 된 요셉을 애굽에 오게 해서 그 다음날 국무총리로 삼으신 것이 아니라 그 많은 세월동안 애굽의 문명과 학문을 익히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경영하는지를 배우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철저한 신앙으로 연단되면서 그 고난의 기간을 채우게 하신 후 애굽의 공직에 취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형통하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신 견해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 그 위대한 계획대로 요셉의 삶을 한 걸음 한 걸음 옮기셨고 어려운 시련과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을 만나면서 방향을 꺾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길을 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요셉 자신이 한 일을 없었습니다. 만약 이 요셉이 그저 허접한 장사꾼쯤 되는 집에 노예로 팔려갔다면 죽도록 일만하다가 생애를 끝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 애굽의 친위대장, 지금 우리시대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고관대작의 집에 노예로 팔려가고 거기에서 인정을 받아 그 집안의 일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애굽의 정세에 대해서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최선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뜻대로 가장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고 할지라도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 모든 것이 우리 뜻대로 되도록 내버려두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일생은 매우 혼란하고 좋은 곳으로 인도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잠시는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은 일을 통해서 오히려 더욱 복된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형통”입니다. 그래서 그는 “형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을 만나도 하나님의 신실함을 의지하며 신앙의 순수함을 유지했기 때문에 잠시 시련을 당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 형통한 사람이 되었고 누구도 그의 형통함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이 다가오는 한 해 동안 이렇게 하나님 앞에 형통한 사람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은혜 입은 사람
둘째는 은혜(恩惠)를 입은 사람입니다. 오늘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의탁하니”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전폭적인 지지와 인정을 받았는지를 보여줍니다. 누가 이 사람의 지위와 그가 받는 대접을 보면서 히브리에서 끌려온 노예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은혜를 입다”라는 표현은 예레미야 31장 2절이나 누가복음 1장 30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것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분에 넘치는 호의를 입을 때, 그때 “은혜를 입었다”는 표현을 본문처럼 자주 사용합니다. 이때 사람에게서 입은 은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요셉을 긍휼히 여기셔서 보디발의 마음에 감동을 주시고 종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대우를 받게 하셨습니다. 당연히 가정의 총무니까 그 집에 있는 청지기들과 그의 집에서 일하는 모든 종과 노예들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소유를 모두 맡겼으니 당시로 말한다면 크고 작은 곡간의 모든 열쇠를 요셉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전폭적인 신임을 받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훌륭한 삶을 살았지만 만약 악독한 주인을 만났더라면 요셉의 그 충성을 몰라보고 요셉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고난의 길을 걷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옛날말로 말하자면, 이 사람은 인덕이 많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자신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입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많은 것들은 하나님께로 직접 오는 것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많은 것이 사람을 통해서 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자신에게 꼭 맞는 말씀을 목회자를 통해서 설교하게 하시고 배우게 하심으로 그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물질이 꼭 필요한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했더니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놀랍게도 사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은혜를 입게 하시고 뜻하지 않은 커다란 혜택을 입게 하십니다.
제가 기회 있을 때마다 종종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약 19년 전에 이 예배당 자리를 살 때 39억에 계약하고,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교회 통장에는 1500만원이 가진 돈의 전부였습니다. 놀랍게도 이 주인이 3억의 계약금을 받고 금고에서 조용히 인감도장과 이 땅문서를 꺼내주면서 “교회가 돈은 있수? 무슨 돈이 있겠어. 이거 가져가서 명의변경하고 이 땅으로 대출을 얻어서 잔금을 치루시오.” 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귀를 의심했습니다. 평생을 사업으로 잔뼈가 굵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경영할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것은 자기 개인의 땅이 아니라 회사의 소유였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돌아와서 펑펑 울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할아버지를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습니까? 거래하기 위해서 세 번쯤 만난 것이 전부였고 담임목사인 제가 얼굴도 보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니까 땅문서를 인감도장과 함께 서너 번 본 사람에게 다 맡기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은혜를 입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은 하나님과 통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도 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은혜를 입었습니다. 얼마나 하찮았겠습니까? 애굽 본토에 있는 종도 아니고 근본도 없는 히브리에서 끌려온 이스라엘의 종이었고 애굽 사람들에게 히브리, 즉 이스라엘은 비교도 되지 않는 약소국이었습니다.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나라였습니다. 거기서 끌려온 노예였으니 얼마나 하찮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 요셉을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지위에 있어서 친위대장과 히브리에서 끌려온 한 노예는 비교도 될 수 없었지만, 그에게 이런 전폭적인 은혜를 입게 하셨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 보디발이 그 일에 관심이나 있었겠습니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예들 중에 어린 노예가 하나 팔려왔다고 해서 그것이 그렇게 대단히 주목할 거리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요셉이 그 집에 팔려 들어가는 순간 복이 굴러들어 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이 은혜를 입은 이유였습니다. 이유는 그가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일평생 미움과 원망의 상처를 끌어안고 한 많은 세월을 살다가 죽어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아픔과 상처를 신앙으로 극복했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부모와 떨어져 있어 보았기 때문에 그 외로움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할머니와 고모들이 그렇게 따뜻하게 잘 해주어도 항상 밤이면 마당에 나가거나 골목에 나가서 달을 쳐다봅니다. “우리 엄마 아빠도 저 달을 보고 있겠지?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멀리 떠나 동생들도 없이 혼자 외롭게 살까?” 하며 너무 부모가 보고 싶어서 울다가 들어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야말로 외로운 이국땅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을 그곳에 던져졌습니다. 당연히 언어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쪽 사람들은 셈족 언어이고, 애굽쪽 사람들은 함족 언어를 사용합니다. 글자 체계 자체도 다르고 쓰는 것도 다르고 말도 다릅니다. 그러니 그 외로움이 얼마나 극도에 달했을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 그 속에서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원망하고 끊임없이 스스로 상처를 곱씹은 사람이 되었더라면 그는 그야말로 쓸모없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는 집으로의 탈출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당신의 섭리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형들과 해후했을 때 “당신들은 나에게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만민의 목숨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나를 먼저 보내셨습니다.” 고 말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그런 계획과 섭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 요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꺼번에 보인 것이 아니라 마치 베일을 벗듯이 믿음으로 살면 한 꺼풀씩 벗겨져 하나님의 인도가 나타나고, 또 하나님의 인도가 나타나면서 마지막에 모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이 다가오는 한 해에 하나님과 통할 뿐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잘 통해서 은혜를 입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복을 주신 사람
셋째는 하나님께서 복(福)을 주신 사람이었습니다. 노예인 요셉으로 인해 주인인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 즉, 보디발이 -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의 집에 복을 내리심으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저는 약 35년 전에 이 성경본문을 읽다가 “요셉을 위하여” 라는 이 구절에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요셉은 팔려온 노예였고, 보디발은 애굽의 친위대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그는 그저 이방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기가 섬기는 이방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복을 받은 것은 그 자신 때문에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집안의 종, 요셉을 위해서 하나님이 복을 베푸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지위가 높고 많은 소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 그를 중심인물이 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 보기에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당신의 손에 붙잡힌 그 사람이 중심인물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복의 근원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너는 만민을 위해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만나는 많은 사람이 그 복을 누리게 하심을 보여줍니다. 요셉은 자신이 복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보디발의 집에 복의 통로가 되었고 그 사람에게 더 많은 은혜를 입음으로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에 팔려가게 하신 궁극적인 계획에 가까이 다가가게 하셨습니다.
지난 한해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사셨습니까? 끊임없이 사람들을 괴롭게 하고 고통을 주는 근원이 되었습니까? 여러분을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평화와 하나님의 덕을 끼치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줄 때 진짜 고통스러운 사람은 그 사람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고는 살 수 없도록 망가져버린 그 사람의 인간성입니다. 그 인간성을 가진 사람이 가장 커다란 피해자입니다. 얼마나 짧은 인생인데, 우리의 그 짧은 인생을 다른 사람의 복의 통로로 살다가 죽어도 시간이 짧습니다. 만나는 사람에게 그 사람들마다 사랑하게 해도 우리의 인생의 시간은 너무 짧습니다. 그런데 마치 자신이 천년을 살 것처럼, 영원히 기력이 성성할 것처럼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이웃에게 고통을 주고 괴로움의 통로가 되고 평안을 깨뜨리고 자신도 망가지고 사람들도 망가뜨리며 인생을 삽니다. 그런 사람이 결혼하면 아내를 망가뜨리고 자녀를 망가뜨립니다. 그런 사람이 사업을 하면 동업자들을 망가뜨리고 함께 생사를 걸고 그 회사를 위해 일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앞길을 망쳐놓습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은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하나님께 복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를 만난 보디발은 얼마나 이 요셉이 소중했겠습니까? 그는 이 요셉을 아주 소중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후에 자신의 아내가 자신에게 고하기를 이 요셉이 자신을 겁탈하려다가 실패했다고 고발했는데도 요셉은 왕의 죄수들이 갇히는 특별한 감옥에서 관리를 받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셉이 비록 보디발의 아내에게 고발되어 하는 수 없이 옥에 가두었어도 요셉을 향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요셉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의 통로가 되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의 계획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높은 지위나 부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신령한 복 때문에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한 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다가오는 한 해에는 하나님께 이렇게 큰 복을 받고 지극히 아름다운 사람들로써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의 통로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행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시편23편 2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즉, “이 세상의 행복은 무엇을 소유하고 어떤 지위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 라는 말씀입니다.
요셉은 모든 시련 속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은혜를 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멀어지신 적이 없지만 시련에 처하실수록 예수 그리스도는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계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형벌을 당하시면서도 그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르실 수 있었습니다. 신자는 먼저 하나님의 복을 누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이 복으로 불러들여 그도 복을 받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삶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복의 통로로 쓰시기 위해 여러분을 주님의 자녀로 부르셨고 또 한 해 동안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셔서 믿음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올 한 해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더 잘 믿고 더 큰 복을 받아서 많은 사람에게 이 복을 누리게 하는 아름다운 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그래서 형통하고 은혜를 입고 또 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2020.01.05._주일오전 2)
2. 하나님이 함께하심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창 39:1-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요셉은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노예로 끌려가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상상치도 못했던 상황에 던져졌지만 그는 거기서도 형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꿈꾸지도 못했던 커다란 역경을 만났으나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 비결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이었습니다.
II. 하나님이 함께 하심
요셉이 형통했던 것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가 겪은 많은 어려움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이 본문을 통해서 크게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A. 고난 받음
첫째는 고난(苦難)을 받았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유족하였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살았고, 가정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 특별한 귀여움을 받았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 라헬에게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더욱이 야곱은 오래 기다렸으나 노년의 때에 이 아들을 얻었기에 더욱 사랑했습니다. 창세기 37장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은 야곱의 별명입니다.
어려서부터 요셉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37장 7절에서 9절을 보면 그는 신령한 꿈을 꾸기도 하였습니다. 해와 달과 열한별이 절하는 꿈을 꾸기도 했고, 그 꿈을 형들에게도 말하였기 때문에 미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성품을 본격적으로 경험하면서 인격적인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애굽의 노예로 팔려온 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에도 없는 가족들과의 생이별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 받는 귀중한 아들에서 종의 신분으로 격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큰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 믿음의 사람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누구든지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려고 하십니다. 때로는 이 일을 위해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답게 다듬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요셉에 대해 큰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장차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셔서 온 세상 만민을 그 끔찍한 기근으로부터 구원하시려는 계획이었습니다. 또한 요셉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을 만들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해 올 때 가족들의 수는 70명에 불과하였습니다. 창세기 46장 27절에서 그 수요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민족을 이루어 애굽을 탈출할 때에는 전장에 참여할 수 있는 장년 남성만 60만 명이 넘었다고 출애굽기 12장 37절에서 증언합니다. 그러니 개략적인 수로 산출해볼 때 약 200만 명에서 300만 명 가까운 사람들로 인구가 불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요셉의 집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애굽에 그를 팔려가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큰일을 이루기 위해 선택되었습니다. 아무도 이 위대한 계획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요셉 자신도 알지 못했습니다. 이 큰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부르심을 감당하기에 알맞게끔 철저히 준비되어야 했습니다. 신앙은 더 성숙해져야 했고, 인격은 온전해져야 했으며 한 나라를 이끌 수 있는 지도력과 그리고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채색 옷이나 입고 호사를 누리는 성장 과정을 통해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큰 섭리 속에서 애굽에 팔려가게 하셨고, 그 나라에서 이 네 가지를 차근차근 갖추어 가게끔 인도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전개된 예기치 못한 삶의 상황들은 모두 이 큰 계획을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준비과정이었습니다.
우리도 뜻밖의 난관을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힘든 난관들은 우리에게 쓸모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인생에 들러붙은 쓸데없는 것들, 그리고 털어버리고 없애버려야 할 것들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노력해도 웬만해서는 역경과 난관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살기 때문에 그런 사람에게는 언제나 이 인생이 슬프고 비참한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은 진정으로 보람 있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도 뜻밖의 난관을 만나지만 이는 우리를 더 크게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준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는 현실을 믿음으로 살아갈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또한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십니다. 열심히 준비했는데도 쓰임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신앙에 있어서 인격에 있어서 모든 범사에 있어서 그를 훈련시키셔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했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잠시 고난을 겪지만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예기치 못했던 놀라운 길이 나타납니다.
요셉처럼 억울한 사람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해와 달과 열한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다고 자랑한 것이 과실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남의 나라 땅에 노예로 팔려갈 정도로 그렇게 잘못한 것일까요? 팔려왔어도 그의 인생은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보면 형통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애굽에 던져진 노예의 신분이었고, 상지사방을 찾아봐도 일가친척은 찾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집에서 온 마음을 다해 충성했으나 그 마지막은 결국 보디발의 아내의 성적인 유혹이었고, 그것을 신앙으로 뿌리쳤으나 그 결과는 감옥에 던져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생애는 발자국마다 원망과 한이 맺힌 사람들로 가득 찼습니다. 자신을 팔아버린 형들, 그리고 애굽 보디발의 집에 던져진 신세, 충성을 다했으나 자기를 믿어주지도 않고 지켜주지도 않은 주인 보디발, 그리고 자기를 유혹하고 거꾸로 죄를 뒤집어 띄워 성적 파렴치범으로 몰아 감옥에 내동댕이친 그 보디발의 아내, 그리고 아무도 도울 길이 없는 막막한 자신의 처지, 이것이 그의 애굽에서 걸어온 인생길이었습니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이 미움과 원망을 가슴에 품고 분노하는 삶을 살고, 복수를 꿈꾸었다고 할지라도 누가 그를 원망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모든 사람이 그런 길을 택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그 모든 사람이 선택하는 평범한 길을 갔다면 그는 애굽에 팔려와 한을 품은 채 죽어간 나그네가 되었을 것입니다.
인생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 그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의미를 너무나 확장해서 인생 전체의 뿌리가 뒤흔드는 것과 같은 그런 식으로 사고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에 처했다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자기를 향해 뜻을 가지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대로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형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형통한 모든 사람들은 뜻대로 되지 않은 적이 있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고난을 받으면서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시련이 왔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었고, 사람들의 배신을 당했으나 그럴수록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읽으십시오. 그 모든 시련의 날들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알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보여주시기 위한 한 과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처지에 놓여있든지 자신의 인생 전체가 뒤흔들리는 좌절에 빠지지 마십시오. 오히려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눈에 보이는 악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믿고 용기 있게 인생을 사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고 로마서 8장 29절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은 고난을 당할지라도 결국 그 고난을 통해 더 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배신을 당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도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바로 우리의 믿음의 진실함을 입증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 있게 하셨고, 또 나의 인생의 길을 인도하시나니 살든지 죽든지 내 인생이 주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라고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은 예기치 못한 어려움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내일 무슨 일을 만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 오늘 우리에게 일어나는 나쁜 일도 내일에는 좋은 일이 될 것이지만 오늘 믿음으로 살지 않는다면 오늘 일어나는 좋은 일 때문에 내일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는 고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요셉을 그리스도의 예표로 해석합니다. 순전한 사람이었지만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고, 고통스러운 현실보다는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그분께 자신의 인생을 의탁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신 것과 같이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상처와 원망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대신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순전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 요셉을 매순간 도우셨습니다. 요셉의 뜻대로 안 되는 일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가는 길로 인도받을 수 있었습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오히려 그에게 유익이 되었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고, 위대한 지도자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십시오. 여러분들은 하찮은 쓰레기와 같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더 가슴 뛰는 일은 여러분은 자신을 하찮게 여겨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향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만드셨고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어 여러분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요셉과 같이 이유 없이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고난을 통해 나를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킨다는 사실을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B. 함께하심
마지막 두 번째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그는 형통한 사람이 되었고,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와 관계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복을 받았습니다. 이는 그가 모든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9장 2절과 3절은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짧은 구절에 함께 하셨다는 표현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이는 그 사실이 성경 기록자에게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1. 노예에 불과함
그는 노예에 불과했습니다. 미천한 히브리 사람으로 종으로써 팔려온 그였습니다. 반면에 보디발은 애굽의 최고위층 권력자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스토리의 주인공은 그 높은 보디발이 아니라 천한 종이었던 요셉이었습니다. 사람의 보기에는 보디발은 지극히 높고 그리고 중요한 사람이고, 요셉은 하찮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요셉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 요셉은 결코 형통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인생은 시련의 연속이었고, 잘못한 것 없이 당하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인생의 앞날을 주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소망을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믿음의 위인들을 열거하는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납니다. 22절에서 요셉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라고 말입니다. 바로의 선대를 입었고,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아마 부귀와 영화를 함께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그 번영하는 애굽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조상들에게 주신 언약의 땅 가나안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으면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게 될 것을 예고하였고, 그때 자신의 유골도 함께 가져가 달라고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번영한 세상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고, 최고의 부를 누리고 살았지만 그의 소망이 애굽에 있지 않고 가나안 땅에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때 그는 최고의 권력자였고, 모든 것을 가진 최정상의 사람이었으나 그는 애굽에서 나그네와 같은 삶으로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마치 모세가 바로의 온 집에서 누리는 모든 영화를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만 못하게 생각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어디에 있습니까? 때로는 시련을 당하기도 하고, 때로는 기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의 삶에 정성을 들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으면서 용기 있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 형통하게 하심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이 함께 해주시는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그의 재능과 그의 능력으로 형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실 때마다 그 이전에는 언제나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는 시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련은 결국 형통하게 하는 하나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최선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한 대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의 결과였습니다. 역경을 만났으나 그때마다 피할 길을 주시고, 혹은 극복할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은혜의 사람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눈으로 볼 때 당시 요셉에게 형통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귀하디귀하게 자랐던 그가 이제 이 애굽의 한 집안의 노예로 팔려갔고, 그리고 비천한 종살이를 하였습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그에게 형통한 것이라면 아마도 자신의 억울함을 씻고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빨리 돌아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다른 길을 예비하고 계셨습니다. 그가 꿈꾸지 못한 고난의 길에 들어오게 된 것처럼 평탄할 때에는 상상도 하지 못한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셔서 세상 만민을 다가올 큰 기근으로부터 구원하고자 하시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요셉을 택하셨고, 역할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가혹하리만치 요셉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는 의지할 곳 없는 그 애굽 땅에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고,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했습니다. 아마도 깊은 밤에 잠들지 못했던 종이 된 이 요셉을 생각해 본다면 여러분 자신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처지에서도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역경을 당했으나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는 결국 고난 속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계획도 이루어졌고, 그래서 만민을 기근으로부터 구했습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오늘 우리에게 좋은 모든 것들이 내일은 나쁜 것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오늘 우리들이 겪어야 하는 나쁜 모든 것이 내일에는 좋은 것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로마서 8장 29절이 증거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올 한 해 여러분의 가장 큰 소망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어차피 인생은 어려운 일도 만나고, 기쁜 일도 만납니다. 쉬운 길도 가고, 힘든 길도 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가장 확실한 보험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 종 노예였어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니까 그 높은 권세를 가진 친위대장의 집에서 이 모든 위대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붙들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 이것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자산입니다. 이것과 바꿀 수 있는 더 훌륭한 것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신자의 일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은 주님의 품에서 태어나고, 주님의 품에서 살다가 마지막 주님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올 한 해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현실이 전개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더욱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시련의 마음이 꺾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함께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더 큰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형통케 하신 모든 사람들은 처음부터 형통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산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려움을 만났지만 육신의 정욕과 안목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았기에 이제껏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보게 되었습니다. 가보지 않는 땅을 밟지 않고 어찌 약속의 땅으로 향할 수가 있겠습니까?
담대하게 한 해를 시작하십시오. 어떤 일이 있어도 올 한 해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한 해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해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나 자신이 모든 것을 주님 앞에 내려놓겠습니다. 주님을 붙드는 여러분들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이 꿈꾸지 못했던 계획을 보여주셔서 여러분들의 인생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형통하고 복을 받는 한해가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 (2020.01.12._주일오전)
3.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창 50:19-21)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셉은 하나님의 큰 복을 받았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그는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고난을 당했으나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에게 악을 행했으나 그런 그의 악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본문에서 악(惡)을 선(善)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것입니다.
II.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누구나 자신에게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런 기대를 저버릴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일들을 통해서만 좋게 하실 뿐 아니라 나쁜 일들을 통해서도 그것을 바꾸셔서 좋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좋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나쁜 것들은 사람에 의해서 나쁘게 된 것이고, 하나님은 나쁘게 된 것을 바꾸어 좋게 만들어 주심으로써 당신이 선하신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러므로 가장 나쁜 상황 속에서도 가장 좋은 것으로 바꾸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을 기대하며 사는 것입니다.
A. 해를 당하게 됨
그러면 요셉은 어떤 삶을 살면서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까요? 첫째는 해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는 해를 당했습니다. 그는 죄가 없었지만 애꿎게도 다른 사람의 악을 당하여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는 잘못이 없었으나 자기를 시기하는 형들에게 팔려 결국은 애굽의 노예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섬겼던 주인집은 애굽의 친위대장인 보디발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형들이 자기를 팔아버린 것을 슬퍼하고 원망에 잠기며 마음에 한을 품었을 듯 했지만 왜 그런지 그의 집에 온 마음으로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럴 수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충성스럽게 여러 해를 섬겼지만 마지막으로 그에게 돌아온 것은 주인의 아내를 성추행한 범죄자로 누명을 쓰고 감옥에 투옥 되었습니다. 언제까지 옥살이를 계속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어두운 나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 던져진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깊은 시름에 잠겨 우울증에 걸렸을 뻔 하지만 그는 거기서도 마치 과거를 잊은 사람처럼 현실에 충실했습니다. 모든 간수들의 신뢰를 받게 되었고, 죄수였지만 자유인처럼 그 감옥을 다니며 옥의 일들을 맡아서 하였습니다.
거기서 왕의 진노를 사서 감옥에 갇힌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꿈을 꾸었고 요셉은 하나님의 지혜로 그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불안하던 그는 요셉의 꿈 해몽으로 인해 소망을 갖게 되었고, 요셉의 예언대로 복직하여 다시 왕을 섬기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억울함을 풀어주겠다던 약속은 새카맣게 잊어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요셉과의 신의를 배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요셉은 다시 그 옥 속에서 그 사람을 미워하며 원망할 수 있었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그의 인생은 꼬일 대로 꼬였습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사람들을 덕으로 대했으나 그는 참 인복이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이 잘못한 것 없이 다른 사람들의 악으로 끊임없이 해를 입은 배신과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B. 바꾸시는 하나님
그런데 그는 거기서 바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두움이 있기 때문에 빛을 알 수 있듯이 그의 인생이 꼬였기 때문에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고, 자기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이 사람들의 악을 선으로 바꾸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모든 악은 하나님이 원래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선한 것으로 바꾸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시야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지합니다. 그래서 그는 과거는 쉽게 잊고, 현재는 파악하지 못하며, 미래는 알지 못하는 무지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현실에 대한 판단이 올바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 전체를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한 번에 알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인생에 대해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당신의 뜻을 따라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과거는 이미 살았기 때문에 볼 수 있고, 현재는 지금 살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지만 미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일어나는 일이 우리가 겪는 현재의 일과 어떤 연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지도 우리는 모두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렵거나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과거와 현재밖에 몰라도, 하나님은 미래에도 과거처럼 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엄마가 주방에서 밥을 짓고 있으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지으시는지는 몰라도, 혹은 무슨 찬거리로 무슨 음식을 만드시는지는 몰라도 잠시 후 맛있는 밥상이 차려질 것이라는 사실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결코 독이 들어있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굳이 미래에 대해서 낱낱이 알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미래의 일을 우리가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것이고, 나쁜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면 하나님을 의지하기는커녕 낙심해서 포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래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 하나님과 맺고 있는 사랑의 관계에 의해 우리는 미래에 대한 염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모두는 살아온 인생의 많은 날들 중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마음을 쏟아 하나님께 호소한 때보다는 근심과 염려로 보낸 시간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우리의 육체를 지치게 만듭니다. 그렇게 많은 노고를 겪은 후에 결국 그 염려와 근심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끊임없는 비관과 자기 포기를 낳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시켜 하나님의 선하심을 불신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낸 인생은 우리에게 매우 커다란 손해입니다. 그렇게 보내온 삶 때문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은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초월하시는 분으로 나는 나의 갈 길을 알지 못하나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그 모든 길을 알고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나에게 나쁜 일을 하실 수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우리는 용기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요셉의 인생은 끊임없는 악과 배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를 향해 요셉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웅장한 섭리였습니다. 아주 위대할 뿐만 아니라 아주 세심하게 그의 인생을 인도하여 어느 지점에 도달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41장 46절에서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애굽 왕 바로 앞에 설 때에 삼십 세라 그가 바로 앞을 떠나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 일곱 해 풍년에 토지 소출이 심히 많은지라” 하였습니다. 누가 히브리에서 끌려온 소년인 종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될 것을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하나님은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아버지의 집에서 채색 옷을 입고 사랑을 받다가 그 나이가 되어서 애굽으로 데려와 국무총리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애굽의 국무총리로 삼아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 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기근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 역사의 한 시점에 요셉을 세우시기 위해 아무도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를 애굽으로 보내셨고, 감옥에 갇히게 하셨고, 거기서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나게 하셨고, 그가 요셉을 잠시 잊었으나 바로가 꾼 꿈을 인하여 다시 생각나게 하셔서 결국은 바로 앞에 세우시고 국무총리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아주 정교한 하나님의 계획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이 정교한 하나님의 계획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가 또한 요셉의 마음을 움직여 그 하나님을 신뢰하고 선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따라가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에게 바로 이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미래 계획을 모두 알 수는 없어도 좋으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내 길을 이끄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사람들의 악함보다 더 믿으며, 흔들리지 않고 신앙의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그는 거기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요셉의 형들은 두려웠습니다. 이제 아버지가 가신 후 요셉이 자신들에게 했던 악한 일을 기억하고 자기들에게 보복을 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차하게 아버지가 우리를 해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기셨다고 거짓말을 지어내면서까지 요셉에게 용서를 받고자 하였습니다. 형들이 와서 스스로 엎드려 요셉에게 ‘우리는 당신이 종들이오니’ 라고 고백했을 때 비로소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그의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이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이 어떻게 오늘날과 같은 선을 이루어 가족들을 보호하고, 온 세상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건져내게 되었는지를 고백하는데 이것이 바로 요셉을 지탱해준 신앙이었습니다. 창세기 50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에게는 일체 나쁜 것이 없으십니다. 나쁜 모든 것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생겨난 나쁜 것을 좋게 바꾸실 수 없다면 어찌 그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나쁜 것은 사람이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은혜를 주셔서 당신을 믿게 하신 사람들에게 그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셔서 사람의 뜻은 폐하고,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인간은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죄 때문에 망가지지만 하나님을 그것을 고치십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나쁜 것을 행하지만 하나님은 그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어주실 수 있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나쁜 것은 결코 우리의 운명이 될 수 없고, 우리가 당한 모든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의 숙명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나쁜 것이 아니면 당신이 얼마나 좋으신 분이신지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는 일 없이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나쁜 일을 겪었으면 그냥 나쁜 것입니다. 좋은 것을 겪었다면 잠시 후 나쁘게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 뜻대로 사는 사람, 연약하지만 날 위해 자기를 버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은 나쁜 일을 만났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좋은 일로 바꿀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지만 우리는 결코 그 악 때문에 나쁘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났다면 그것을 바꾸시는 하나님 때문에 좋게 될 것이고, 좋은 일이 일어났다면 하나님이 좋게 하셨으므로 그것은 끝까지 좋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먹은 대로 된다고 할 때 그것이 언제나 우리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어려움을 당해서 더 뜨거운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이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릅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힘으로 스스로 좋은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하고, 끊임없이 나쁜 것을 통해서라도 자기 스스로 좋은 것처럼 생각하려고 하니 인간의 비극이 여기에서 나는 것입니다. 열심히 움켜지지만 마치 그것은 기름으로 손을 움켜지는 것과 같아서 모두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많은 것을 모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밑 빠진 웅덩이 물을 붓는 것과 같아서 결코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모든 행복하고자 하는 사람을 당신의 품으로 불러들여 그 행복을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불완전한 세상에 우리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신앙의 힘으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옳은 말이 아닙니다. 신앙은 나쁜 일이 일어나도 그것이 좋으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도록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나쁜 일이 일어나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좋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좋으신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됩니다. 바꾸시는 하나님 때문에 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는 인생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가야 할 인생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이렇게 바꾸시는 하나님에 소망을 두고 과거에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지 말고 새로운 한해를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형제를 용서함
마지막 세 번째는 형제를 용서한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자신을 팔아 애굽의 노예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형들과 진심으로 화해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의 너그러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모든 악한 형들을 초월하셔서 자신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에서 비롯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요셉에게 악을 행한 것을 고백하며 용서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50장 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무슨 뜻입니까? 그는 자신이 겪은 많은 시련들이 좁게 보면 형들이 나쁜 짓을 한 것이지만 넓게 보면 하나님의 뜻이 계셔서 일어난 일들이었다고 믿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실제로 악을 행했고, 씻을 수 없는 큰 고통을 요셉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채색 옷을 입고 아빠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그 아이를 외로운 바다와 같은 애굽 땅에 노예로 던져지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수많은 날들을 고통을 받으며 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일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들은 신앙으로 보면 더 큰 하나님의 일에 다가가기 위한 한 과정이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형들이 행한 그 나쁜 일들 때문에 그는 애굽에서 국무총리의 자리에 올라 어렸을 적 하나님이 주신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그 크고 오묘한 섭리를 바라보며 형들을 향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을 접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위로하고 그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끝까지 돌보아 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행복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앞에서 올바른 자들과 관계를 맺고,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을 주셔서 누리게 하십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향해 맺힌 것이 있는 영혼은 이런 깊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복된 사람이 되겠습니까?
여러분들은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복을 받을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마음에 맺힌 것을 푸십시오. 그리고 이제껏 미워하던 모든 사람들을 마음 깊이 놓아주십시오.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 받은 사람들이라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내가 오늘 믿음으로 살면 내게 일어난 그 모든 나쁜 일들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이 바꾸셔서 나를 좋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모든 일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관점에서 넓은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바라보십시오. 잠시 지나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 우리의 인생의 인연은 지극히 짧습니다. 풀의 일생에 있어서 새벽에 그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의 반짝임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람 때문에 악한 일들을 겪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면 하나님은 그 악을 선으로 바꾸셔서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실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바로 그렇게 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모든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군병들까지도 용서하신 것처럼 복된 하나님께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음에 맺힌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들을 용서할 뿐 아니라 마음 깊이 그들을 축복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그 축복을 받기에 합당하면 그들도 복을 받게 하실 것이지만 혹은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렇게 미워하시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축복하는 여러분들을 복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서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때문에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인간이 나쁘게 만든 일조차도 좋게 바꾸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차피 이미 만난 나쁜 사람들은 우리가 어떻게 그 과거를 지울 수 있겠으며, 우리가 이미 행해버린 나쁜 일들을 어떻게 우리가 돌이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그렇게 사람 때문에, 나 때문에 생겨난 나쁜 일도 좋은 일로 바꾸실 수 있습니다.
나쁜 것이 계속 나쁜 것이 되어 우리의 인생의 발목을 잡는 이유는 과거에 나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이미 흘러갔고, 현재는 흘러가게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은 반드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행복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찌할 수 없이 망가져 버린 우리의 과거 때문에 우리의 미래까지 망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없이 좋은 것은 결국은 나쁘게 되는 길이고, 하나님과 함께 일어나는 일이라면 나쁜 것도 결국은 좋게 되는 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우리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도 주님께 맡기고,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현실도 주님께 맡기고, 알 수 없는 미래도 주님께 맡기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행복의 길을 말씀으로 보여주십니다. 우리 인생이 살 수 있는 길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제발 예전처럼 실패를 거듭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부디 은혜를 받으십시오. 주님을 만남으로 여러분들의 모든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이 된다면 올 한해 무슨 일을 만나든지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 분이신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복된 한 해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약속을 바라는 믿음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창 50:24~25)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히 11:22)”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요셉이 아버지 야곱과 형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의 나이 약 69세였습니다. 애굽에 노예로 끌려온 지 약 22년 되었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이때는 애굽의 총리가 된 후 약 9년이 지났으니(지났을 때 가족들과 재회하였습니다). 그는 이후로도 약 61년을 더 살고 110세가 되었을 때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요셉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그 사람의 소망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약속을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
II. 약속을 바라는 믿음
늙은 요셉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았습니다. 통치자로서 애굽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나 그의 소망은 애굽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있었던 것입니다.
A. 떠날 것을 당부함
제일 먼저 그는 떠날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자기의 형제들과 자손들에게 애굽을 떠날 것을 말하였고, 그는 이 유언 속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대하여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요셉이 오랫동안 자신의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것이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50장 2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하였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떠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를 이 애굽에서 떠나게 하실 것이니, 너희는 기억하고 있으라 하는 의미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요셉 덕분에 애굽에서 넉넉하고 편안한 삶을 산 그들이었다고 할지라도 이제 여기가 영원한 집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너희를 인도하여 이 애굽에서 떠나게 하실 것이니 그것을 기대하며 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오래된 약속을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요셉으로 하여금 이 파란만장한 생애를 애굽에서 사는 동안 버티게 만들어 주었던 하나님의 약속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요셉과 형제들의 후손이 누리게 될 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목 민족의 문맥에서 보면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방랑이 끝난다는 의미였습니다. 목축업을 했기 때문에 땅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땅이 없었기 때문에 목축에 종사하였던 것이 아닐까요? 얼마든지 자신의 땅을 가지고도 여기저기를 다니며 목축을 하다가는 자신의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의 조상들에게는 땅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땅에 대한 약속은 단순히 땅을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특별한 나라를 주실 것이라는 것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을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할아버지로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 약속의 땅에 관한 조상들의 믿음을 보고 들으며 자랐고, 그리고 이것은 요셉의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바로도 말하기를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이 용상 하나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사실상 애굽은 요셉에게 통치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부귀와 영화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자기를 나그네라고 여겼던 조상들의 신앙을 공유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벨과 에녹, 그리고 노아와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에서 14절은 이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고 하였습니다. 즉, 그들이 이 세상에서 남의 땅을 밟으며 나그네라고 여김을 받고 살아갔고, 자신들도 나그네라고 고백했으니 이는 하나님이 주실 약속의 땅, 거기로 들어갈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땅을 약속하신 것은 곧 신약 시대에 백성들이 누리게 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안식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을 얻음으로 안식을 얻게 되었듯이 신약의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기업으로 받고, 그리스도를 누림으로써 영혼에 안식을 얻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4장 8절과 9절이 증거하고 있는 바입니다. 땅에 대한 요셉의 소망은 곧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었습니다. 그 땅에서 하나님의 독특한 자비와 인자를 힘입어 그 분의 통치를 받으며 영원히 함께 있고자 하는 소망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믿음으로 이 소망을 지녔기 때문에 애굽에서 그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인에게 팔려와 애굽 사람의 집에 노예가 되었던 그때로부터 그 나라의 총리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그는 온 하나님(힘)을 다하여 살았습니다. 약 11년간 보디발의 집의 노예로서, 가정의 총무로서, 감옥의 죄수로서 온 힘을 다해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로부터 떨어져 가난과 시련을 겪었고, 그리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망은 애굽이라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불굴의 소망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할 소망이었습니다. 그는 치열하게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바라는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집의 노예로부터 그 집안의 총무를 거쳐 그리고 감옥의 죄수 그리고 바로 앞에 서는 해석자가 되기까지 그는 많은 난관을 겪었으니 기도하였을 것입니다(기도제목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제목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서의 일에 관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일이었을 뿐 거기에 소망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소망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한들 결국 우리의 몸은 세상에 묶여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속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 세상일들에 얽히고설킨 채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먹고, 입고, 마시는 것으로부터 이 세상에서의 여러가지 일을 놓고 기도 제목을 삼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본향은 여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고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니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약속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며 살았듯이 우리는(도) 이 세상에 살지만 영원한 그리스도를 유업으로 얻도록, 그렇게 살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 후 이 세상을 떠날 것을 기억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것들을 위해 기도하고 마음을 기울이나 그 모든 것들은 결국 하나님께 매달린 것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여 이 자리에 있게 하시고, 내가 아니면 이룰 수 없을 독특한 일들을 내게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우리의 의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꿈은 이 자체를 이루는데 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진흙처럼 부스러져 사라질 육신을 가진 이 연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눈앞에 있다가 사라지는 덧없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저것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하나님 앞에 기도로 쏟아놓습니다. 결국 떠날 세상이 헛된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잠시 살게 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더 깊은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여러분들이 떠날 것을 알고,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B. 자기 뼈를 위해 명함
마지막 두 번째는 자기 뼈를 위하여 명령한 것입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날에 약속의 땅에 나아가게 될 때에 애굽을 떠나게 되면 그때 자신의 뼈를 가지고 가달라고 유언했습니다. 25절에서 말하기를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고 하라”고 맹세까지 시켰습니다. 이것을 신약 성경은 위대한 믿음으로 증거합니다. 히브리서 11장 2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말이 나왔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믿음의 위대한 사람들에 관해 말하다가 나온 것입니다. 아벨과 노아와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하다가 그러한 믿음을 가졌던 사람이 또 있었는데 그가 요셉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를 찾는 이들에게 상을 주시는 이심을 너무나 굳게 믿은 나머지 애굽에서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그들(이스라엘 자손)이 떠날 것에 대해 말하고 그때에는 자신의 유골도 가지고 함께 약속의 땅으로 가도록 맹세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일이 출애굽 시에 모세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이는 약 100년 후의 일이었다고 출애굽기 13장 19절은 말합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태어나 모든 부귀와 영화를 한 몸에 누릴 수 있었습니다. 태어난 것은 히브리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그의 아들로 입양되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애굽의 모든 죄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있었으나 약속의 땅으로 자신의 뼈라도 가져가 달라고 부탁한 이 요셉의 유언이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때로는 가난하겠고, 어려움도 만나겠지만 때로는 부요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형통하기도 할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들이 만나는 현실 저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면서 사는지에 의하여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는(요셉은) 애굽을 떠나는 일이 내일이라도 이루어질 것처럼 유언했습니다. 100년 후에나 이루어질 일을 말입니다. 그러나 100년 후인지, 200년 후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의 마음속에서는 바로 오늘 일어날 것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이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 안에서 종말론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셔서 그는 매우 중요한 직위에 올라 그 땅을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애굽의 부귀와 영화가 구름과 같이 헛된 것임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을 주셨으나 그의 마음은 이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없었으니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고 사랑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약속의 땅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바로 오늘 이 애굽을 떠날 사람처럼 종말론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천국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무슨 이유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과 함께 영원히 있을 그 나라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은 시간을 초월하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먼 미래도 현재처럼 느껴지도록 만드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미래에 올 기쁨을 현재 앞당겨 느끼게 만들고, 과거의 아픔을(은) 이미 지나가버렸는데 오늘 느끼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어떤 한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현재도 불쌍하기 때문에 불쌍하게 여기지만 이미 모두 지나간 과거인데도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뛰어서 오늘 그런 과거를 끌어안고 살아온 그 사람을 가엾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예를 들어봅니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일종의 상처에 대한 회상입니다. 왜 그럴까요? 전심으로 남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정신 작용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게 될 때에 서로(주로) 많은 법입니다. 당연히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자신감이나 이런 것들이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나치게 교만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비굴합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자화상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예시) 모두 사랑이 가져다주는 시간을 넘나드는 효과입니다.
지혜는 기본적으로 허무함을 아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지혜는 기본적으로 얼마나 이 세상이 허무한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결코 지혜에 도달할 수 없고 또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지혜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지혜는 진리와 맞닿아있고, 이 진리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영원한 빛 아래서 순간적인 것을 볼 때에 그것(세상)이 당연히 허무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만약에 요셉이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다면 애굽에서의 부귀와 영화는 그에게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겠습니까? 그리고 젊음은 얼마나 잃고 싶지 않았을까요? 애굽의 총리가 된 지 9년이 지났을 때가 39살이었으니 서른 살에 그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아마 그가 할 수 없는 일은 지극히 일부분이었고, 대부분 모두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던 지위에 재직했습니다. 그가 만약에 하나님을 소망으로 삼지 않았다면 과연 그렇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약속의 땅에 대한 신앙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아마 그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생은 너무 짧고, 덧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것들은 영원한 것들답게 대우하고 순간적인 것들은 순간적인 것답게 대우를 하면서 인생을 사용하는 데에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비록 영원하지 않지만 우리 인생의 날들 중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슬픔과 탄식으로 얼룩집니까? 그래서 시편 39편 5절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셀라)”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허무하기 때문에 어차피 잠시 살다 지나갈 인생, 육체의 욕심이나 채우자 라고 하면 그것은 악에 빠지는 길입니다. 참된 지혜가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의 인생은 구름과 같아서 덧없고, 내가 든든하게 이 세상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는 동안에도 이것은 모두 헛된 것이라고 있는(믿는) 이 믿음 때문에 모든 헛된 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고, 헛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일이 그 하나님 앞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생각하며 곧 사라질 사람으로 곧 떠날 세상을 영원히 살 소망으로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결국 우리가 살아온 모든 삶에 대해서 왜 그렇게 살았는지 하나님 앞에 해명해야할 시간이 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진심으로 우리가 살았던 삶에 대해서 주님 앞에 말할 수 있도록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깨어져도 가기 원했던 길이 있었다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우리처럼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완벽해서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대우해주신 것도 아닙니다. 그는 애굽의 제사장의 딸과 혼인했고, 당연히 그 사람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완전하신 하나님을 바라는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한두 번 인생에 걸려 넘어졌다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살 필요도 없고, 한두 번 하나님 앞에 잘 살았다고 자신이 영원히 그렇게 살 것처럼 우쭐해질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생사 간에 자신의 인생과 자신이 살고 있는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손을 의존해 있으며 하나님이 한순간이라도 자신을 놓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 이외에 소망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삶을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인생의 짧고 덧없음을 알고 허무를 느끼지만 이 세상이 허무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노동을 합니다. 세상 때문이 아닙니다. 곧 사라져갈 덧없는 이 세계 때문이 아니라 영원히 계시고, 우리의 삶의 영원한 의미가 되시는 그 영원하신 하나님 때문에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라져 갈 것들을 위해 살지 말고 영원토록 있는 것을 위해 사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절망하게 하는 허무감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기(허무하기) 때문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품을 파고드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찬양)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매 내 모든 보배는 저 하늘에 있네. 천국 문을 열고 나를 오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둘 곳 없도다.
기라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모두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으나 결코 기죽지 않고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영원한 하나님의 본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처럼 서러움을 당하고, 때로는 진리를 위해 목이 잘리고, 죽임을 당하는 때가 있다 할지라도 나의 육체밖에 죽일 수 없는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원까지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분을 소망으로 삼으며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 허다한 구름 같은 증인들로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이 세상에 짧고, 덧없음을 아는 지혜를 가지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만난 하나님을 의지하고 영원한 세상을 향하여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셉은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살았으나 결국 그 상처 때문에 영광스럽게 되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그가 만난 수많은 악들을 선으로 바꾸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해하려고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셨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생인데(인생이지만) 하나님 앞에 영광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많은 뜻이 이 사람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붙드시고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언젠가 끝나는 세상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육체를 사랑하는 것이 허무한 이유는 영원하신 분께 바쳐야 할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소멸하여(소멸할 것에) 우리의 사랑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이 세상에 멸망이 다가오지 않아도 세상보다 빨리 우리가 이 땅을 떠나니 이 허무함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찌 신앙의 지혜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것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가 되었을 때에 그 과정이 애굽이 총리가 되게 하는데 꼭 필요한 일임을 어찌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높은 지위에 이르러서도 부귀와 영화에 대한 욕심 때문에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새롭게 하십시오. 잠시 후 이슬처럼 쓰러질 자신을 기억하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