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하나님 말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 40:8)
녹취자: 장주은
40장부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회복의 첫 장을 말씀하시면서 진노의 음성으로 가득 찼던 하나님의 마음에 그 백성들을 위로하려는 부드러운 심정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킨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불변성과 영원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고 정말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했던 비참하고 굴욕적인 사태들을 겪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깊은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름다운 영광은 현저히 사라졌고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 그들의 삶의 가변적인 현실과 어떻게 대조되는지를 보여주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영원성과 불변성, 그리고 그 말씀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헨델의 메시야에 이 성경 구절이 나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외치는 자의 소리와 함께 이루어지는 평탄한 길, 이것은 당시에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많은 중동의 나라들이 실제로 경험했던 사실들입니다. 그래서 왕이 지나갈 때가 되면 선포하는 자가 외치고 지나가고 그 외침이 끝나고 나면 대규모 공병 부대들이 도로를 평탄하게 하는 작업을 하고 그 도로를 보존했다가 왕의 마차가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회개를 불러일으키셔서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낮추고 주저앉아 낙심한 마음은 일으켜 세우고 하면서 그 마음을 평탄하게 만든 뒤에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을 보여주겠다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사야의 역사에 대한 해석은 거침이 없고 명쾌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가서 고난을 당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고, 포로로 끌려갔던 그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는 포로 귀환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고, 육적이 이스라엘의 껍질을 깨고 영적인 이스라엘인 교회가 출현할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은 가변적인 인간과 얼마나 대조가 되는가, 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물론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겠지요. 그렇지만 더 실감나는 것은 풀이 무성하게 나 있는데 풀을 깎습니다. 깎으면 꽃도 함께 떨어집니다. 그 깎은 풀이나 꽃을 굳이 치울 필요도 없습니다. 한나절만 내버려두면 모두 말라 검불이 되어서 흩어져 버립니다. 잔디밭이 워낙 넓으면 잔디 깎는 기계로 확 깎고 지나가고, 그 깎인 잔디를 치우지 않습니다. 내버려두고 하루만 지나면 검불이 되어서 다 사라져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의 혁혁한 이름을 내었던 위대한 임금도 이렇게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강성했던 나라들은 쇠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망가지고 허공중에 흩어져 사라지는 것이 사람이 살아온 역사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우리의 육체도 이 세상의 왕국도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라고 합니다. ‘선다’라고 하는 히브리어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저항을 견딘다’ 그리고 어떠한 정당성, 예를 들자면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누가 주앞에 서리이까, 정당성입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저항성, 이 세상에 조류나 우리의 삶의 상황이 그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거나 혹은 도전하거나 해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가 흐트러지거나 그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거기에 서있어서 수많은 것들이 와서 부딪히지만 부딪히는 것들은 스스로 깨뜨려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위대한 힘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런 정당성이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하나님이 옳다 여기셔서 그래서 그가 당하는 고난은 당신을 위해 받는 고통으로 여겨 주시고 그렇게 그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번영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축복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사실들을 입증하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이제 ‘가족과 잘 사는 것’이 열네 번째로 끝나고 이번 주부터 교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많이 교리를 배우고 공과를 공부하고 설교를 들어서 뭔가 마음이 트여서 어떤 인생의 이치를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이 이 성경을 대면하고 거기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대하면서 그 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고 깨뜨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매우 중요하고 힘써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교역자들은 이 시리즈가 계속되는 동안에 먼저 본인들이 성경을 착실하게 읽는 자기 훈련에 몰두해야 할 것이고 박희철 목사님처럼 4시간씩 성경을 읽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언제 또 사역을 하겠습니까. 얼마를 성경을 읽든지 마음을 실어서 성경을 읽고, 그 시간이 자신의 영혼에 놀라운 활기를 주고 영혼에 힘을 주는 시간을 여러분 자신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아주 소중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그 시간이 여러분의 마음속에 달콤하게 느껴져야 합니다. 그런 말씀생활을 하고 교인들에게 이 시리즈가 계속되는 동안에 성경을 직접 읽는 것, 매일 단 3장씩, 5장씩이라도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는 것, 읽고 그 성경 속에서 은혜를 받는 것, 그런 일들을 경험하도록 모든 교역자들이 집중해서 어린아이 미취학 아동부터 시작해서 소망부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이 성경을 매일 읽고 있는 일에 도전하고 매일 성경을 읽어가는 그런 삶을 여러분이 이 시리즈가 계속되는 동안에 많이 강조해서 성경을 읽게 하라는 것입니다.
개신교가 성서의 해석을 자유화 시킨 다음에 많은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카톨릭 안에서 품고 있었던 온갖 잡동사니 이단들이 성경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의 기회가 주어지고 나서 폭죽처럼 터져서 넘쳐났습니다. 지금도 그런 성경의 해석을 혼잡하게 해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사실 사도바울의 시대에도 있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아니하며’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성경을 직접 대하면 그 속에서 어떤 주님을 만나는 은혜를 경험하고 직접 옆에 주석이나 스터디 바이블을 놓고 성경을 읽으면서 받는 유익은 로마 카톨릭이 따라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힘입니다. 어마어마한 생명이고 어마어마한 힘입니다. 그런 힘들이 교회 안에서 정말 넘치기 위해서는 설교만이 아니라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성경을 직접 대면하며 천천히 읽으면서 은혜를 받는 생활들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는 동일합니다. 그래서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고 주님을 만나는 사람은 성경 읽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권위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결국은 교역자 그리고 영혼들을 돌보는 순장, 구역장 이 사람들이 먼저 실천하지 않으면 결코 이것이 사람들에게 스며들어서 실제로 그런 삶을 실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시대는 수없이 변합니다. 얼마나 많이 변하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엄청나게 변천하는 이 시대를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제일 모르는 사람들이 목회자들입니다.
어제 한신교회 세미나에 7,800명 모였는데 강연을 하면서, 전에 젊었을 때에는 그런 강연이 있다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서 단상으로 직행을 하고 폭포수처럼 퍼부었는데 요즘은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도대체 인간이 인간에게 과연 그렇게 긴 시간을 자기가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그렇게 강의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어쨌든 그런 자신없음이랄까,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가서 원고 한 구절 안보고 폭풍같이 60분 강연을 하고 30분 질문을 받았는데 시대를 너무 모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이런 것입니다. 어떤 시대를 안다, 라고 하는 것은 사회의 어떤 악이 있고 어떤 즐거운 쾌락이 있고 자기도 그것을 맛보았고, 이런 것이 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안다는 것의 의미는 오히려 그 세상 속에 파고들어서 세상의 즐겁고 쓴 맛을 봤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 유체이탈처럼 튀어나와서 우주공간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이 세계의 전체적인 흘러가는 것들을 볼 수 있는 사상적인 조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즘 어느 시대라고 교인 모아놓고 그 숫자나 자랑하고 자기네 교회에 어떻게 했더니 아주 잘되더라, 이것이 세상 사람들은 이미 그런 것들이 관심사가 아닙니다. 무엇인가 자기들이 만족해하는 종교적인 수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인간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이 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를 기독교가 쥐고 있다, 라고 하는 그 무엇을 주어야 합니다.
중고등부, 청년부 지도자들에게 얘기하는데, 열다섯 살 먹은 아이가 하필이면 교회 가는 주일날 논둑에 엎드려서 통곡을 하고 볼에 흐르는 눈물을 두 손등으로 훔치고 난 다음에 일생을 무신론에 헌신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지금 여러분 주위에는 열다섯 먹은 나처럼 그렇게 중등부에 오다가 펑펑 우는 애들이 없지요? 그런데 실제로 울고 있습니다. 그것을 읽어 내야지 진짜 교역자입니다. 그런데 나는 논둑에 엎드려져서 육체로 울었는데 아이들은 영혼으로 울면서 핸드폰을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그러고 있다고 해서 아무 생각이 없는 애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목자가 아닙니다.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없이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임에 몰두하는 아이들, 음란문화와 포르노에 몰두하는 아이들, 나는 그런 속에서 그때 논둑에 엎드러져서 펑펑 울던 나와 똑같은 통곡을 그 아이들에게서 읽어냅니다. 그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정말 회심해서 주님께 자신을 드릴 때에 그때 인생은 놀랍게 달라집니다. 교인들이 회심하지 않으면 목회의 깊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슨 깊이를 감당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우리가 한번은 넘어야 할, 한번이 아니라 매번 넘어야 할 산맥입니다. 그리고 도전입니다. 그러니까 그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정말 그런 주관적으로 겪는 나의 심경과 고통이 어떤 때는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어떤 때는 이런 사상을 좇아가기로 다짐을 하고 해봤자 다 흘러가고 변하는 것입니다. 그 때 열다섯 살의 마음인데도 그 마음에 정말 무신론에 헌신하고 싶었습니다. 나중에 책을 더 읽으면서 고등학교 즈음 됐을 때는 아예 전파자가 됐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교회 안에서 자란 사람이 누군가 그런 상황을 개선해보려는 진지한 노력이나 도움을 털끝만큼도 받아본 적이 없이 그렇게 무너질 수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결국 우리가 인생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든지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 모든 것들이 진리에 와서 부딪히면 진리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깨뜨려지고 부서지고 흩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영원히 거기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순간에 아, 그분을 믿으려는 나도 결국은 시간 속에서 흘러가는 존재이고 내가 그 하나님을 대신하여 붙잡으려고 하는 모든 것들도 풀의 꽃과 같이 마르고 시들고 사라지는 것이구나, 그것을 어느 한 순간에 깨닫고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 하나님의 말씀에 데려가려고 할 때 그 안에서 그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아름답고 존귀한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신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몇 주나 하게 될지 아직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이 시리즈가 진행되는 동안에 마음을 모아서 성경을 매일매일 읽으라, 그리고 그 속에서 주님을 만나라, 똑같은 삶의 유익을 성도들이 얻을 수 있도록 지도하고 가르치고 해서 온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서 흔들리고 요동치는 사람들이 영원히 있는 이 하나님의 말씀의 든든함 때문에 견고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