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안에서 자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벧후3:18)
여러분 혹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정확하게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그래서..... 그 생명이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는 우리 안에서 역사해서....그러니까 인간의 만사가 그러하듯이 이런 생각의 기초가 잘못 놓이게 되면 그러면 우리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신앙이 무엇이냐 물을 때 끊임없이 성경을 배우고 기독교인이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지식을 쌓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을 위한 것이지 신앙 자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식을 따라 지식 그 자체를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여기기 때문에 그 지식이 조금만 달라도 교회를 가르고 교파를 가르고 사람들끼리 등을 돌리고 그러고 사는 것이지요. 그게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가 무언가 그리스도인은 이 정도는 살아야지 하면서 사람들은 신앙을, 신앙의 본질을 의지에다 두기도 합니다. 열심히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열심히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가운데 제가 목회자로서의 양심을 걸고 영혼이 거의 죽어있는 것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도덕적인 삶은 단지 이 세상에서 칭송받는 도덕적인 삶과는 그 기초가 달라요. 기억을 해야 되요. 아주 쉽게 얘기를 하자면 이 세상에서 모두에게 칭찬을 받을 만한 도덕적인 사람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든지 패역한 죄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요. 이 패역하다는 말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막연한 죄인이 아니라 구체적인 죄인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차이를 잘 분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인의 도덕적인 것에 대해서 질타를 할 때 그것이 복음에 기초한 질타인지 단지 윤리와 도덕이라고 하는 이념에서 오는 질타인지를 잘 구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도덕적인 의무를 행하고 깨끗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고 그래도 그 자체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에요. 생명을 주시는 이는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 밖에는 없습니다. 그분께로부터 우리에게 생명이 부어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살고 올바르게 살아도 그 마음속에 거룩하고 신령한 은혜의 기쁨이, 생명이 넘쳐나는 놀라운 은혜와 감격이 그에겐 없습니다. 도덕적인 삶을 잘 살면 잘 살수록 마음속에서는 한 편으로는 눈에 보이지는 않고 하나님에게서만 보이는 잘못된 경향성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이해가 쉽게 갈 것입니다. 인간이 생겨난 대로 맘대로 살게 내버려 두어도 나쁜 사람이 되지만 하고 싶은 끝까지 못하게 해도 성격이 비뚤어지고 이상한 사람이 됩니다. 그건 여러분 이해할 수 있죠?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교육이 중요한데 때로는 교육이 매질도 하고 채찍질도 해서 징계를 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 자체로서 인간이 교육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바보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가 늘 애들을 때려야 된다고 강조를 하지만 그것은 늘 보조적인 수단이지 매로 다스려서 아이를 사람으로 바르게 기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때리면 돼지가 사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꼭 같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인간은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집 아이들은 놔서 길렀기 때문에 버린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집 아이들은 부모가 너무 심하게 징계를 했기 때문에 성격이 굽어버린 아이들이 있습니다.
인간도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도덕적인 규제가 없이 막 살아도 막된 인간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러나 계속해서 외부에서 이건 이런 삶을 살면 안 된다 이런 삶을 살면 인간도 아니다 나쁜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식으로 억압을 받으면서 자기 행하고 싶은 것을 안 행할 때 그 사람은 이상한 사람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결국 이런 의문이 떠오르잖아요? 목사님 끊임없이 죄악 된 행실 지체를 끊임없이 죽여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결국 부도덕한 삶을 살고 도덕적인 삶을 살고 불결한 삶을 버리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는 그러한 신앙생활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필요하지요. 그런데 단 무슨 단서가 필요하냐하면 성령을 힘입어서 그 일을 할 때에만 부작용이 없다 이 얘기에요. 그게 바로 성령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면 너희는 살리라 라고 한 그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결단하고 노력하지만 우리 자신의 힘과 의지와 도덕적인 삶을 살려는 노력만을 가지고 만약에 우리가 우리 지체를 죽이고--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렇게 해서 반듯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 때에는 인간이 부도덕하게 살고 싶은데 그것을 억눌려가지고 인위적인 힘을 가지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하니까 그 다음에는 뭐가 생기냐 하면 한 쪽은 다듬어 져서 도덕적인 삶이 되는데 반대편에서는 뭔가를 강요받을 때 이 속에서 비뚤어진 경향성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성령에 의해 다듬어져서 그 은혜로 거룩해졌기 때문에 도덕적인 사람이 된 사람과, 끊임없이 그리스도인은 이 정도는 살아야 된다는 이념을 가지고 도덕적이 된 사람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거예요. 전자의 사람들은 부도덕한 사람들을 보면 불쌍히 여기지만 후자의 사람들은 부도덕한 사람들을 보면 정죄한다 이거지요. 난 이렇게 사는 데 넌 왜 그렇게 못하느냐 이거지요. 그런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지속적인 태도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태도입니까? 또 다른 패역이라고요. 그 자체가 성경도 초월해서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나름대로의 판단과 선입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패역이라고요.
우리는 흔히 몸이 병이 들면 약을 잘못 남용했기 때문에 그 원래 있었던 병보다도 더 심각한 병에 든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요즘도 그 약이 나오는 지 모르는 데 ‘명랑’ 이라고.. 집사님 명랑 이라고 아세요? 그게 두통에 먹는 가루약입니다. 뻘건 가루고 상표가 이북 물건 같이 생겨서 눈에 확 띕니다. 요즘도 나오는지 모르지만. 한 번 그걸 남용한 사람 봤어요. 머리가 아파서 그걸 먹었는데 더 아프니까 자꾸 먹은 거예요. 이게 양이 많다 라고 느껴지면 깊이 생각을 해야 되는 데 그게 아니라 먹은 거예요. 이 사람은 매일 큰 거 한 통 한 곽 씩 먹지 않으면 잠을 못자는 중독증에 걸린 거예요. 그러면서 그 독한 약을 소화하려니 간이고 뭐고 상하잖아요. 처음엔 두통 때문에 약을 먹기 시작하다가 거의 폐인의 상태에 가는 거예요. 급속하게 허물어져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잘 생각을 해야 해요.
그러니까 결국 문제는 신앙을 도덕적인 삶 - 나는 예수 믿어서 깨끗하게 산다 탈세도 안하고 바람도 안 피고 .. 이런 식의 외부적인 삶에다가 만약에 신앙의 본질을 둔다면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런 거 저런 거 다 곤고하니까 열광하는 데가 둡니다. 하나님 믿는 참된 신앙이 마치 체험에 있는 것처럼. 은사추구하고 뭔가 보기를 원하고 체험하기를 원하고. 그런데 체험이 사라지고 나면 마약과 같아요. 더 큰 자극 더 큰 체험을 원하고 더 큰 체험이 자기에게 일어나지 않는 한 자기가 뭔가 병들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거룩한 삶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체험이지만 하나님은 체험을 통해 갖는 믿음이에요. 우리에게 있어서는 믿음이 중요하지만 주님에게 있어서는 그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귀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러면 그러한 생명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느냐 그것은 지식을 생겨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식 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지식을, 또 어떤 종류의 지식을 획득하느냐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뭐라고 그랬냐면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저는 누구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참된 신앙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아는 데서 시작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신앙에 관한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께 매달린 지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을 보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싶으면 하나님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잘 공부하고 깨달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맛보면 하나님의 사랑에 저절로 감격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분노하시는 것이 무엇이가를 깨달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그래서 말이지요. 이런 생명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가져다주는 그 통로가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리고 이건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객관적인 진리라고 하는 그 자체와 또 하나는 그것이 주관적으로 우리에게 깨달아져서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지고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좋은 지식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말씀이 우리에게 깊이 깨달아져서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주관적으로 우리에게 새겨지지 아니하면 인격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아니하면 그 말씀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풍성하게 열매를 맺는 것을 보십시오. 전혀 하나님을 믿을 것 같지 않던 사람의 마음속에 말씀의 작은 씨앗이 떨어지자 그 말씀의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고 줄기가 올라오고 잎이 피고 놀라운 성장의 역사를 이루어 갑니다. 그런데 그 씨를 보십시오. 그 씨가 있고 그 씨는 받아들이는 땅이 있을 때에만 성장을 거듭하는 것이지 땅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땅에 착상되지 않으면 바람이 불면 날아가는 거예요. 그 땅에 씨가 떨어졌든 안 떨어졌든 아무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 라고 할 때 한 번 깨달으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정확한 하나님의 지식이 우리에게 가슴에 새겨질 때 그 말씀은 말씀 자신이 역사하고 성장하는 그런 놀라운 창성함의 역사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똑똑한 사람보고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게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은혜 받는 사람을 가르치는 말입니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압니다. 요한복음1장 1절을 설교해서 깨달았는데 그 말씀이 내게 새겨져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말씀이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게 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겸손한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작은 말씀하나가 우리 속에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루어 갑니다. 이것은 자꾸자꾸 자랍니다.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깨달은 그 말씀을 우리들이 실천하고 행해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사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입증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더욱 미더워지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는 것이에요. 신뢰하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을 더 지키게 되고 더 지키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넘치게 되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넘칠 때 우리는 기도하기 매우 쉽습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옛날에는 아무리 기도에 있어서 놀라운 이력서를 가진 사람이라도 소용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상태입니다. 옛날에 유창하게 기도하던 사람이 오늘 전혀 기도에 대해 낯설어 질 수도 있고 옛날에 전혀 기도에 낯설었던 사람이 어느 순간 하나님을 아는 진리의 지식이 그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안에서 역사하면 기도의 문이 열리고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합니다. 네 시간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씩 기도하는 사람들은 원래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속에 말씀이 자라는 사람, 하나님의 은혜가 자라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는 사람 그러면서 기도의 깊이가 더해지고 기도의 높이가 더해지고 기도의 속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한 생명의 힘이 더 충만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성장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이런 식으로 자라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신앙의 척도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백번을 성경을 읽는 것보다는 깨닫는 사람이 한 줄 성경을 읽어주는 것이 신앙생활에는 훨씬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당연하지요. 그렇지요? 그래서 그런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이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정확한 진리가 객관적으로 존재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내가 깊이 깨닫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끔 진리가 무엇인지를 객관적으로 따져보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벤허 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죠? 그게 결국 벤 훌입니다. 아론과 훌입니다. 훌 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근데 그 영화가 만들어 지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영화를 만든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 무신론자였기 때문에 한 번 성경을 꼼꼼히 읽은 다음에 거기서 꼬투리를 잡아서 기독교가 얼마나 사기로 가득 찬 종교인지 온 세상에 공포하는 영화를 만들어 보려고 하는 것이었지요. 그러고 성경을 읽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 사람은 읽을 때부터 구원받고 싶어서 성경을 읽은 것이 아니라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성경을 읽은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을 전체를 삼분의 이 정도를 읽기 전에 그는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흔한 예가 아닙니다. 보다 흔한 예는 성경을 읽기 전에 인생을 지은 이는 하나님이시란다 너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데 예수님이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 믿는 자에게는 영생하는 은혜를 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에 출석하라 그런 전도를 받고 예수 믿는 사람이 많겠어요? 아니면 혼자 성경을 읽다가 예수 믿는 사람이 많겠어요? 말할 필요도 없이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거지요. 물론 하나님이 역사하실 수 있어요. 그러나 보다 하나님이 쉽게 역사하시는 방법이 진리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깃든 해설, 설교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한 책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또 성경을 읽을 때 자신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것을 하나님의 참 뜻을 해석해 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훨씬 더 하나님을 아는 분명한 지식에 설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들을 우리들이 습득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아멘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이해가 필요하고 그것대로 살려고 하는 찬동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말이지요.
이런 것들은 굉장히 많이 어디에서 작용하냐 하면 인간의 마음에서 작용하는 것이지요. 사람이 물러가서 뒤로 침륜에 빠지는 타락이 있기 전에 제일 먼저 어떤 일이 일어나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기쁘고 감격적이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이런 신앙생활의 기초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읽거나 묵상하거나 혹은 설교를 듣거나 혹은 책을 읽으면서 주님의 말씀이 강물과 같이 주님의 마음에 밀려들어서 커다란 감격을 경험한 것이 언제입니까? 그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감각과 감격 그것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의 감동이 없이는 우리의 기도생활도 메마른 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기도생활을 신속하게 복원하고 싶어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를 향해서 안타까워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느껴야 해요.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뜻이 무엇이고 두 번째는 그 뜻을 가지고 우리를 지켜보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얼마나 절실한지 느끼게 된다면 우리들 가운데 그 누구도 그 하나님의 마음에 불순종 할 정도로 강심장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그게 안 되니까 안 심기는 거고 자기 고집대로 죄악 된 대로 달려가는 거지요. 비유를 하자면 이런 거지요. 옛날에 제가 오도바이를 탔는데 처음 탔는데 잘 몰랐죠. 아무리 밟아도- 밟으면 콰릉 하고 걸려야 하는 데- 이게 아무리 밟아도 덜덜덜 하면서 안 갑니다. 이상한 게 약간 내려가는 길에서는 잘 가다가 올라가는 길만 되면 서는 거예요. 이 오토바이가 왜 그런가. 한 쪽 발에 발동 거는 쇠붙이가 여기를 박아가지고 피가 날 정도가 되었는데도 오토바이가 안 가는 거예요. 이상하다 해서 나중에 오토바이 센터로 끌고 갔더니 오토바이 센터 있는 사람이 불을 켜고 이렇게 보더니 ‘ 아저씨 기름이 없잖아요’ ^^ 주유소 가서 기름을 넣고 한 번 밟으니 ~~콰릉 하는 거예요. 그렇게 멍청했어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비유를 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에 잘 깨닫고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싫어하시는 구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구나 그렇게 불순종하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이 이렇게 아프시구나 이게 기름을 넣는 거예요.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대화하고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고백을 하고 의사소통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인데 이런 것은 제껴 놓고 어떻게 하든 세게 기도를 하면 기도의 발동이 걸려서 불같이 기도할 것이라고 하는 사람은 저하고 똑같은 사람 이예요. 기름은 안 넣고 발동만 걸려고 몸부림을 치는 사람과 똑같은 거예요. 그렇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기도의 모든 능력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로부터 오는 것이에요.
잘못했던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으면 먼저 와서 뭔 얘기를 해야 될 것 아니에요. 잘못했다든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든지 하나님을 향해서 뭔가 말이 있어야 될 것 아닙니까 그게 없고 자기 할 얘기만 하고 기도만 능력 있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사행심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를 기른다고 합시다. 자녀가 잘못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도 이런 것 이런 것 때문에 아버님 혹은 어머님이 나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고 계시다 나는 아무래도 언젠가 한 번 어쩌면 손 좀 볼거야 이런 예감이 드는 데.. 이런 것은 믿음이 없는 거야 라며 지워 버리고 들어가서 아버님 저 용돈 주십시오 저 뭐도 사야 하고 .... 청구서를 낭독할 때 정상적인 아버지라면 ‘야 이놈아 내가 은행장이냐 네 아버지냐’ 라고 묻지 않겠습니까 너 은행에 왔냐 아빠한테 왔냐 라고 묻지 않겠습니까 우선 먼저 저 때문에 얼마나 상심하셨습니까 내가 생각해도 내가 너무 밉습니다. 그럴듯 한 이야기를 하고 저는 나쁜 놈입니다 한 때 때려 주십시오 ‘그래 그럼 맞아라’ 그렇게 하든지 뭔가 과거에 대한 해결이 있고 아버님 제가 어떻게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여태까지는 그렇게 못했지만 이제부터는 이렇게 하라’ 잘 될지 모르지만 저도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뭐냐하면 지식에서 온단 말이지요. 그래서 늘 말씀드리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없으면 그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아직까지 살아있으면 기적이고 잠시 후에는 곧 죽습니다. 그걸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가지 요소 하나는 충만한 은혜 또 하나는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이 진리와 충만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풍성하게 역사할 때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진리를 사모하면서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