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마음속의 미움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5:21~22)
녹취자: 김경애
여름집회를 앞두고 각각 4주, 5주 정도 집회를 위한 준비를 위해서 말씀을 쭉 전했습니다. 지난겨울에는 어떻게 집회를 준비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넬료의 집회준비부터 시작해서 4주에 걸쳐서 우리들이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복음전도에 대한 시리즈를 더 할 것이 많이 있지만 일단 지난주로 마무리를 하고 오늘부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그런 수련회가 될 것인가 여름집회가 될 것인가를 가지고 용서의 문제를 이번 수련회전까지 다루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용서의 문제가 말하자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각양 좋은 것을 가로막는 그런 요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또 이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죄가 그렇듯이 이 죄는 아주 교묘한 죄가 되어서 몸 안에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는 그런 교묘함을 가지고 있어서 이런 것들이 이번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서 우리가 낮아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오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그런 거침돌을 우리들이 치어버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은 여러분들이 잘 알다시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로 시작하는 산상수훈 가운데 나오는 복음입니다. 이 산상수훈은 알다시피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미 믿고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면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를 쭉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느냐하면 이 산상수훈에서 모든 천국시민이 살아가야할 모든 삶이 다 나온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산에서 한번 설교하심으로써 천국시민으로서의 삶이 어때야하는 것을 단번에 다 말씀해주신 것은 아닙니다. 다른 곳에서도 실제적인 삶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히들 이 마태복음 5장을 천국시민의 대 헌장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여러 가지 교훈 가운데 가장 핵심적이고 소중한 교훈들이 말하자면 보훈이라고 그럽니다. 보배와 같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것들로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하는 이야기가 살인에 대한 이야기로 예수님께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살인에 관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사실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살인을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살인이 아니라 미움으로 말미암는 형제간의 불화를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살인으로 시작을 하셨느냐하면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첫째의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살인이라는 죄가 구약에서 매우 큰 죄였습니다. 그리고 이 살인은 신약시대에 들어오면서 물론 율법에 의해서도 통제를 많이 받았지만 이제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 살인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는 어느 나라에서든지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현대사회에서 말하자면 인간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사람만 죽이지 않으면 거의 사형에 해당하지는 않습니다. 특별한 죄가 아니면 말입니다. 그러나 살인한 죄에 대해서는 거의 동정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살인이 신약시대에는 법의 제제를 받으면서 많이 살인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우선 첫째는 살인이라는 구약의 큰 죄를 끌어들임으로써 예수님이 말씀하시고자하는 이 미움이라는 죄가 용서하지 못하는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 또 하나는 살인은 사람을 죽인 것이고 미움은 속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현상이지만 그 모든 기초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뿌리에서 살인도 나오고 미움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원해서 지금 이 살인을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이것은 구약시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라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너희들은 ‘옛 사람에게 일러진바 된’ 옛 사람에게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계명이 있는데 그것으로는 너희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새로운 시대가 되어서 너희는 나로부터 옛 사람에게 말한바가 아니라 요즘 사람에게 말하는 새 교훈을 너희들이 들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믿음의 표준이기 때문에 예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새 말씀을 들어야지 옛 사람에게 말한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살인하지 말라. 살인하면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 사람의 생명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누차 살인에 대한 형벌을 하나님이 아무리 자비하셔도 피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약에 나오는 모든 살인을 다 살펴볼 수는 없지만 하나만 살펴봅시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살인 사건이었습니다. 동기야 어쨌든지 간에 미움이었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 무슨 해로운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가인이 아벨을 해칠만한 어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의 마음속에 있는 미워하는 마음이 아벨을 죽이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죽이고 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아벨이 죽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가인을 찾으시고 가인에게 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때 뭐라고 성경이 언급하고 있느냐하면 재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십시오. 3장을 보면 어떤 이야기가 나오느냐하면 17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뭐라고 나오느냐하면 땅은 누구를 인하여?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그랬는데 4장으로 넘어가면 살인이 일어난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하면 이렇게 되었습니다. 4장 11절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라.’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땅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니까 선악과 사건을 통해서는 너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그랬는데 그 다음에 아벨을 죽인 살인 사건을 통해서는 땅 때문에 네가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말하자면 완전한 저주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땅의 상태와 그 다음에 가인이 아벨을 죽인 다음에 땅의 상태가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를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이 저주는 상승작용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범죄 했을 때에 그 사람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고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향해 범죄 했을 때에 이번에는 땅 때문에 사람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완전한 저주가 이 땅에 충만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구도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율법사가 이 율법 중에 가장 큰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처음은 ‘마음과 뜻과 성품과 네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 두 계명이 말하자면 성경 전체의 한 구도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신앙이 잘못되어질 때는 이 두 개가 따로 구분되어서 추구되어야하는 것 같은 혼란에 사람들이 빠지게 됩니다. 심지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데 방해가 된다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데 언제나 저해요인이 된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복음에 대한 이해가 뒤틀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인을 하게 되니까 심판을 받게 된다고 말했는데 그 심판은 정말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땅이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주신 저주는 너는 유리하게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땅과 사람은 하나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떼레쯔’ 라는 히브리말을 써놓고 땅이라고 번역해 놓기도 하고 사람이라고도 번역을 합니다. 그러니까 땅과 사람이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 땅으로부터 사람을 취하여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저주를 받은 다음에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가야 합니다. 완전한 자유입니다. 어느 정도로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떤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도시인의 질병의 상당히 많은 부분이 땅을 다 발라버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땅을 다 콘크리트로 발라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 맨땅을 밟고 오신분이 있습니까? 저는 맨땅을 좀 밟았습니다. 뒤뜰에서 밟았습니다. 몇 달이 지나도록 맨땅을 밟은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땅과 사람은 하나입니다. 또 인간은 본성적으로 땅에서 나는 것과 아주 친합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땅에서 나는 생명을 가진 것과 친합니다. 쇠보다는 나무에 친근감을 느낍니다. 비닐보다는 종이에 친근감을 느낍니다. 인간은 땅과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땅이 사람 때문에 저주를 받고, 사람이 땅 때문에 저주를 받는다고 하니까 이제는 땅이 인간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고향처럼 항상 안겨서 평화롭게 이 세상에서 가장 사이가 좋은 관계 속에서 살아야할 땅과의 관계가 단절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그 복된 땅이 유리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쫓겨 다니고 유리하고 방황하는 이런 저주를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살인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도 살인의 죄가 다스려지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게끔 율법 속에 아예 집어넣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자극하심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주신 이 땅의 생명들을 감히 해할 수 없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범죄가 질적으로 다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이 살인은 독특한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침해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생명을 주셔서 인간에게 그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인간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때에 보냄을 받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불림을 받아야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부르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다양한 방법으로 부르십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 사람이 살아있는 것이 나의 행복에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인의 동기는 극도의 자기 사랑입니다. 그것은 자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극도의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생명을 취하실 때까지 내가 참고 기다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손에 의해서 사라져가야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인을 한 사람의 눈빛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보통 사람들과 매우 다릅니다. 저는 실수로 사람을 죽이는 것 말고 의도적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확실히 악령의 역사입니다. 살인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을 향한 마지막 반항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살인의 문제를 그렇게 심각하게 다루셨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런 살인의 문제를 예수님께서 미움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끌고 들어오신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미움의 동기와 살인의 동기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느냐하면 당신이 지금 말씀하시려고 하는 미움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너희들이 작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위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하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근원적인 죄의 뿌리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근원적인 죄의 뿌리를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는 그렇게 사람을 죽이는 것 그래서 나타난 행동에 대해서 문제를 삼는데 사람들은 법과 제도에 의해서 살인할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나는 살인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세상에서 율법에 비추어서 볼 때는 그것이 그렇게 해석되는 것이 가당할지 모르지만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은 살인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에 있는 미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말하자면 황폐하게 되어버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해 아래 새로운 세상은 없습니다. 언제나 같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몇 사람 살지었던 초기 시대에도 그랬다는 사실을 가인과 아벨사건이 보여줍니다. 인간 속에 있는 본질이 어저께나 오늘이나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살인의 죄를 내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생각 하나를 가지고 만족하는데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열어주는데 살인하지 않았다는 행동으로 미움을 옮기지 않았다는 것 그 자체가 그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도와주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자면 그 구약에서 충분히 계시되지 않은 그 죄의 깊은 본질을 예수님께서 다루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은 단순히 욕하지 말고 그리고 라가라고 말하지 말고 아니면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우리의 무자비하고 예의 없는 행동을 교정시켜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 산상수훈을 그런 식으로만 본다면 이것은 완전히 윤리학 교과서로 전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특성을 안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보다 중요한 메시지는 그것이 아니라 영적인 의미에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풀어가겠습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그렇게 살인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징벌인데 너희가 구약시대 사람처럼 살인을 하지 않고 가인처럼 살인하지 않았는데 그러면 너희는 구약에서 가인이나 살인한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던 그런 어떤 하나님과의 놀라운 축복과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됨의 표징들 그리고 그렇게 살인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까? 하나님은 살인을 미워하시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와서 왜 구약시대 사람들이 와서 살인하게 되었는지를 말씀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그리고 그 동기를 끝까지 가지고 있는 한 그것은 결국은 옛날에 살인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당시 사람으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충격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철저하게 신앙의 초점이 외부에 맞춰져있는데 예수님께서 ‘네가 살인을 실행에 옮긴 것이나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나 동일한 뿌리이고 그것이 동일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된다.’ 이것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발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우리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이해가 예수적입니까? 아니면 그 당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회중들의 생각과 같은 회중적입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상당히 전자에 흐리지 않고 후자에 흐르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율법 속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 그 전체가 바로 무엇이냐 하면 화해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담과 화목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그냥 동산을 거닐면서 늘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하나 됨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와 그 모든 창조된 세계와도 그런 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완전한 화해의 관계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관계가 깨지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죄 때문에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움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순종의 역사는 무엇 때문입니까? 자기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미움입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자기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미움입니다. 그것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깨뜨려질 때 나타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말하자면 신앙의 본분을 새롭게 회복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신앙의 회복이라고 우리는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그렇게 되다가 마지막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셔서 우리를 화목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을 힘입어 이 세상에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용서가 더 널리 나타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미움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져서 인간과 땅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저주를 받고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이 저주를 받았던 이 부조화하고 깨뜨려진 불화의 관계가 치유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과의 대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땅으로부터 취해서 땅과 한없는 형제애를 느끼며 살아가는 그런 관계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대드라마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미움과 사랑의 이 조건이 성경에 얼마나 커다랗고 압도적인 흐름을 지배하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살인이 그처럼 무서운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옛날에는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그런 이야기를 너희가 들었으나 지금은 그 교훈으로 충분하지 않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것은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라가라는 자마다 공회에 잡히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니라 같은 말입니다. 히브리문학에서 이렇게 중요하고 강조하고 싶은 이야기는 말을 바꾸어가면서 반복적으로 하는 문학적인 스타일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라가라 하는 것은 무엇이고 또 노하는 것은 무엇이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차이점은 어떤 것이고 그 차이점으로 말미암는 심판의 결과가 어떻게 상이한가하는 것을 의논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당히 중요한 교리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는데 공회에 잡히는 것은 이해하겠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교회의 치리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 사람을 지옥불로 들어가게 만들어준다면 도대체 누가 천국에 갈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마 수십 번도 더 가서 지옥에 철썩 달라붙어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아니 다른 사람은 그만두고 자기 뱃속으로 낳은 자기 자식들에게도 미련한 놈, 곰탱이, 망할 놈이라고 수시로 욕하는데 형제도 아니고 자식에게 욕했으니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몇 번을 지옥에 가서 반장이라도 할 정도로 그렇게 깊이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문제를 가지고 깊이 고민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주님은 사람을 극도로 미워하게 될 때 그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분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형제라고 이야기합니다. 우선 여러분들이 이스라엘 시대는 교회와 세상이 분리되지 않았던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나라가 곧 교회였습니다. 국민이 되는 조건은 곧 교회의 회원이 되는 조건과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형제라는 것은 혈육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유기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때로 말하자면 모세의 율법 안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율법의 도리를 따라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의 연합이고 요즘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세례를 받고 그리고 한 형제가 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적인 자녀들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노하는 것, 진노하는 것, 라가라고 욕하는 것, 그리고 미련한 놈이라고 모욕을 주는 이런 것들은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의 내면세계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각종 더러운 오물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욕을 하고 진노를 하고 모욕적인 말로 사람들을 치욕스럽게 하는 그것을 말하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지옥에 들어가기로 작정된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보여주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마음은 진노하고 분노하고 그리고 욕하고 그리고 미련하다고 거침없이 형제를 모욕하는 그것이 바로 지옥에 들어가기로 작정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인데 그 내면세계를 주장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극도의 미움입니다. 그것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가 된 이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의무를 부과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들은 구원을 받는 특권만을 너무 강조합니다. 그리고 구원과 함께 우리에게 매여지는 많은 사랑의 율법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도외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외시하는 것은 자기 마음인데 문제는 그런 식의 편파적인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이 그 사람의 영적인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계속해서 그 미움이 나중에 뒤에 가면 알게 됩니다만 자기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그 모든 신앙의 행동들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마치 잘 익어 아름다운 과일이 속이 다 썩어서 겉모습 밖에 볼 줄 모르는 우리들은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귀한 선물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예물의 속이 썩어있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모욕입니다. 우리들이 내는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해서 이 돈이 벌려졌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남의 눈에서 피눈물 나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들어온 돈은 하나님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바칠 때는 다 그럴싸하지만 하나님은 그 봉투 속에 있는 돈이 여러분들의 어떤 삶을 통해서 만들어졌는지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를 바라보고 예물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이 ‘형제에게’ 라고 특별히 말씀하신 이유는 오늘 교회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커다란 각성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는 통용되지 않는 새로운 윤리가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교회 안에선 세상에서 통용되지 않는 세상에서는 인정받을 수 없는 새로운 윤리가 이 교회 안에 통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윤리를 따라서 살지 않는 사람 그 윤리에 자신을 기꺼이 복종시키면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그의 그러한 삶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세계가 아직 하나님 앞에 변화 받지 못한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오늘 예수님의 표현대로 말하면 그것은 너희들이 거듭나지 못한 표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모든 실패는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그 윤리와 도덕을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와서 그것을 교회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하긴 누가 그랬습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보편적인 논리와 도덕만을 가지고 들어와서 그것만을 지켜도 교회가 욕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그러는데 오죽하면 그런 이야기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나 오늘 이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살아가다보면 도대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제일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사람이 말도 안 되게 건수를 일으켜서 나를 괴롭힐 때 ‘아이고 저것을 그냥 죽여 버려 그리고 몇 달 들어가서 살다 나올까? 반쯤 죽일까?’ 치밀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능히 한번 박살낼 수 있지만 인간이 불쌍해서 그냥 봐준다. 빨리 서 자라.’ 세상에서 이런 사람을 자기 통제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인격적으로 자신을 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관점에서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을 향하여 극도의 미운 정을 품고 있는 것을 주먹을 한 대로 친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한 대 치고 철창에 들어가서 생각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을 묶어서 철장에 집어넣는 것은 잘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묵상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를 고요히 묵상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거기에서 대부분 후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좀 참을걸!’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미움은 그러한 후회의 기회조차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통하는 윤리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그런 윤리가 통하는 것이 아니라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자꾸 어떤 형제들과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자꾸 세상의 논리를 가지고 교회에 들어오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의 논리를 가지고 들어와야 합니다. 성경에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너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느냐? 그렇다면 너희에게는 지켜야할 새로운 율법이 있다. 그런데 그 가치의 기준은 세상에 있는 것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때로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한없이 좌절시킬 정도의 윤리를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이쪽을 때리면 ‘여기를 치시오. 살이 통통하고 뼈가 깊으니까 아마 덜 아플 것입니다.’ 이것이 농담처럼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신 성경의 윤리입니다. 자신을 향해 어느 정도로 엄격합니까? 이 손으로 범죄를 하면 그것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되면 차라리 네 지체에서 그것을 잘라 내버려라. 도끼로 찍어서 없애버려라. 자신에게는 그렇게 엄격하면서 사람들을 향해서는 때리면 이쪽을 때리라고 돌려댈 정도로 그런 삶을 살라고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우리를 비참하게 좌절시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런 삶이 항상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의 놀라운 영에 붙잡혀있을 때 아주 현실적으로 이런 사랑이 나타납니다. 그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스데반의 사건입니다. 돌로 쳐서 죽이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지막지한 것입니까? 저는 몇 번 돌에 맞아보았습니다. 핍박을 받아서 맞은 것이 아니라 옛날에는 그렇게 우리 어렸을 때는 동네마다 패싸움을 잘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생각하니 고등학교 2학년쯤 되었나. 참 푼수 없는 녀석이지! 초등학교 애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자기가 총대장이라고 그러면서 저쪽 동네하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깜깜하니까 그때는 넓은 공터도 많았습니다. 나는 거기에 왜 나갔는지 모르는데 밤중에 뭐가 날아와서 얻어맞았는데 금방 부어오르고 불이 번쩍합니다. 그런데 그 돌멩이에 맞아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악을 행한 자가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주여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스데반의 얼굴을 보니 천사처럼 빛나면서 성령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통용되지 않는 이와 같은 다른 윤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런 윤리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말하기를 진노하는 것에 대해서 말합니다. 노하는 것 그리고 욕하는 것과 모욕을 주는 이 모든 것에 관해서 성경이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뿌리입니다. 미움입니다. 그런데 미움과 사랑은 아주 통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입니다. 반드시 밖으로 드러내야합니다. 하여튼 그것을 억제하고 있는 것은 예레미아가 골수에 사무친 불을 안고 있는 것만큼 힘듭니다. 그 인격이 아무리 고매하고 철통같이 무장된 자제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억제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그렇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결국은 표현을 해야 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습니다.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가슴에만 묻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상사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움도 똑같습니다. 그 미움을 표현할 때 시원한 배설의 효과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움을 접어두고 그것이 일순위인데 미움은 극도의 미움이고 저 형제를 향해서 한번 퍼부어야하는데 그것이 꽉 차있고 그 일 순위를 묻어두면서 이 순위를 끌어올리려고 하니까 이 순위 삼 순위가 뒤죽박죽되어서 말이 헛 나오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 하는데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건강에 깊은 해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제 친구 어머니가 너무나 도움을 받을 길이 없고 연약해서 제가 모시고 한의사에게 갔는데 목사님이셨는데 목사님이니까 거저해줄까 하고 모시고 갔는데 툭툭 두들기더니 한의사가 워낙 나이가 많으니까 ‘이 양반아 무슨 한이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맺혔는고? 무슨 미운 생각이 이렇게 주저리주저리 맺혔는고?’ 그게 아마 맥에 나타나는 모양입니다. 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아주 편리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을 토해놓은 것입니다. 욕하고 싶으면 딱 쳐다보고 다다다닥 욕해버리고 덮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꼭 하는 말이 자기는 뒤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뒤끝이 없지 당한 사람은 언제나 뒤끝이 있습니다. 몇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습니다. 지금 돌아가셨으니까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 생활할 때 교회에서 전화를 쓰는데 물론 교회의 전화입니다. 교인의 상담전화가 와서 울고불고하면서 전화를 하는데 교역자가 되어서 내가 그것을 어떻게 중간에 끊을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통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 있더니 목사님 발자국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나와라.’ 그러는 것입니다. 놀라서 전화를 끊고 나갔더니 그 전화가 너 쓰라고 갖다놓은 전화냐고 그러면서 막 퍼 부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지금도 가시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이 훨씬 지났는데 지금도 전화벨소리가 나면 가슴이 막 뜁니다. 그분은 새까맣게 잊어버리셨습니다. 일주일만 지나면 잊어버리십니다. 그런데 전화벨 소리만 들리면 지금도 가슴이 막 뜁니다. 그래서 저는 휴식을 취할 때면 방에 있는 전화코드를 빼놓고 쉽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습니다. 처음에는 전화벨 소리만 나면 밤에 잠을 못잡니다. 발끝부터 시작해서 머리끝까지 소름이 쫙 돋는 것입니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어떻게 합니까? 그게 뒤끝입니다. 그 양반은 한번 다하셨으니까 시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뒤끝이 없지만 나는 뒤끝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가 뒤끝이 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이 평가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그렇게 모욕적인 발언을 마구 하는 것 그것 자체가 네 속에 있는 미움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마음속에 그 독한 미움을 품고 있을 때 그것을 막 쏟아놓는 것은 본인에게는 굉장히 시원합니다. 그런데 시원한 것은 느낌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막히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악순환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 미움의 감정이라는 것은 막 이렇게 돌아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소린지 예를 들자면 이 사람을 미워하다가 일주일 뒤에는 저 사람에게 가서 이 사람은 갑자기 사랑스러워지고 이 사람은 미워지다가 갑자기 저쪽으로 튀어가서 저 사람이 갑자기 지겹게 미워지고 그러다가 몇 주일 있다가 튀어서 갑자기 사랑스러워지는 그러는 것은 정신병자입니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없고 그리고 대부분 십 년 전에 미워하던 사람을 지금도 미워하고 있습니다. 확실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한 계속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잊히는 것은 안보면 잊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다시 생각나는 것입니다. 그 미움의 감정은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근원적으로 해결을 받고 밑동을 불로 지져서 치유되기 전에는 십년이 지나고 이십년이 지나도 다시 만나면 이 속에서 미움의 감정이 여건만 조성되면 기가 막히게 솟아납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더 심한 경우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을 딱 마주 대할 때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미워할 사람과 사랑할 사람을 결정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입니다. 편견이 아니고 그 판단이 정확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미움은 불행하게도 그 미워하는 문제에 있어서 다음 주에 설명 드리겠습니다만 미워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내 미움이 타당성을 가지고 있든지 안가지고 있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내가 지금 이 사람을 미워하는데 이 사람이 미워하는 미움이 타당성이 있는 미움이 있고 타당성이 없는 미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얼굴이 왜 저렇게 여우처럼 생겼는지 그래서 밉다.’ 이것은 타당성이 없는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은 그 얼굴이 예쁘다고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 ‘사람이 도덕적으로 너무 불결해 그래서 나는 너무 미워!’ 그것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타당성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음 주에 보시면 압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은 내가 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에 대한 타당성의 결여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감정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들으신 이야기가 우리들이 고정적으로 생각하던 것과는 굉장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사고 자체가 지극히 세상적인 기준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사람을 미워하는 그 미움에 타당성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건이 무엇이냐 하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해야겠느냐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일흔 번의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데 그 이야기는 그에게 용서를 빌러오는 사람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누구를 위한 말씀입니까? 용서해주는 그 사람을 위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 또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형제라는 말에서 이 교회는 구별된 하나님의 집입니다. 여러분들은 천국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잊지 말고 기억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는 천국의 시민답게 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성경을 사랑하지만 여러분들은 아직 성경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사람이 신앙을 받아들이고 성경과 거의 합일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성자와 방불한 삶을 살다가 죽는 사람은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하늘의 별들 가운데 지극히 소수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삶에 대해서 감탄하는 것입니다. 성자라고까지 불립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심할 정도로 저급한 수준에서 놀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끊임없이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자기를 주장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기초로 해서 그 진리의 말씀에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자기를 드리고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신앙의 태만함 때문에 사람들은 한심할 정도로 저급한 수준에 살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느냐하면 교회는 꿈은 한없이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한 사랑으로 부르고 완전한 하나 됨으로 부르지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미성숙과 천국시민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모든 태만함으로 말미암아서 한심한 수준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면 결국 무슨 결론이 나오느냐하면 교회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완전한 사랑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가운데 있는 허물이 제거되고 죄가 제거되어서 형제의 사랑으로 완전하게 충만하게 되어서 이 교회가 천국과 방불한 모습이 되는 것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하나님이 아주 자주 그리고 지금도 천국과 거의 방불한 교회로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개인이 완전해짐으로써 완전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용서를 통해서 교회가 완전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형제가 완전하지 못하고 죄가 있고 형제에 대한 신실함이 부족한데도 그를 용서해줌으로써 말하자면 완전한 사람이 교회 안에 심으면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장면이 바로 그것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것, 라가라고 하는 것, 그리고 미련한 놈이라고 말하는 것 이런 모든 많은 죄의 뿌리는 결국은 속에 있는 악한 미움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그 미움이 타당성이 있고 없고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뒤에 보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하면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이라고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을 했거든’ 그것이 아닙니다. 형제가 오해를 해서라도 너를 원망하고 있다면 그 원망이 하나님과 너 사이에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만해 이제 거기서 끝내 더 이상 하지 마’ 이것은 용서하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복수하지 않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 그것이 바뀌어서 미움을 몰아내는 최상의 방법은 밀어내고 빈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밀어 넣음으로써 미움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주위에서 또 우리 자신이 이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또 형제가 아니라도 가족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이런 것들 때문에 오랫동안 그것이 올무가 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심각하게 장애를 받고 심지어는 인격을 짓누르고 있는 그런 억눌리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화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자유로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모욕을 받는 것도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욕을 먹는 것도 우리의 자유를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것도 우리의 영적인 자유를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미움의 감정은 우리의 영혼의 자유를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자면 하나님과의 영적인 삶을 서서히 고갈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왜 그렇게 미운 감정이 그토록 나쁨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왜 그렇게 미워하는 감정이 나쁨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삶의 사망을 가져다줄 정도로 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 미움을 계속 지속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그것은 철저한 자기 사랑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빗나간 자기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만이라고 말합니다. 자존심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자존심이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인간 자체가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고 자신을 자랑하고 떠받들어야할 만큼 선한 것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만약에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이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혹시 내게 존귀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그 사실 때문에 내가 존귀해지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불신앙이 팽배하고 믿음이 없는 이 세상에서도 이 세상의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기를 거부하고 고난을 받으면서도 자존심을 지키고 절개를 지키면서 살아가는 그 모든 이유는 이 세상 속에서 나의 존귀함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의 존귀함 그리고 나의 막살아가는 삶으로 말미암아 나의 수치스러운 삶을 통해 나에게 은혜를 주신 하나님의 이름에 누가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이 신앙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자존심을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미워하는 동기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편을 보면 미움이 신령한 미움이 나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여 저 원수들을 도말하소서! 없이하소서! 이빨을 꺾으시고 원수들로 물러가게 하옵소서.’ 그런 극단적인 기도가 나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열망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움의 대부분의 동기는 결코 그렇게 신령한 동기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신령한 동기에 비롯된 미움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 사람 개인에 대한 미움이 아니라 틀림없이 죄에 대한 미움입니다. 그 사람은 언제든지 그 사람을 진심으로 찾아가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대부분의 미움의 동기는 동기 자체가 이기적인 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사소한데서 시작합니다. 언제나 사소한데서 시작합니다.
어느 집안에 형제가 있는데 그 중의 한 아들이 그 식구들에게 만날 미움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밥 먹을 때 소리를 낸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이렇게 그 미움의 이유들은 사소한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미움이 한번 씨앗이 떨어지는 것이 어렵지 한번 씨앗이 떨어지면 툭 떨어지면 놀랍게 자랍니다. 어디서 자라느냐하면 자신의 인격 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뿌리가 내리고 가지가 올라오고 줄기가 뻗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넝쿨처럼 뻗어서 자신의 심령을 에워싸는 것입니다. 캄캄한 어두움이 영혼 속에 깃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다른 죄들은 비교적 아주 분명하게 외부로 나타나니까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가 막혀있는 것들에 대한 분명한 진단을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솔직히 말해서 거의 순전히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그래도 절제력이 없고 무절제한 사람들은 그것이 수시로 나오니까 ‘아이쿠 내가 미워하는구나.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러는데 어느 정도 신앙이 들어가서 절제하고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 제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예수를 믿고 신앙이 어린 사람들이 용서를 잘합니까? 신앙이 깊어진 사람들이 용서를 잘합니까? 신앙이 깊어졌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교회생활을 오래해서 머릿속에 든 것이 많은 사람들이 용서를 더 못합니다. 그리고 미워하는 사람의 수요가 더 많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미워하다가 들어온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지식 때문입니다. 계속 자랍니다. 신앙의 수준도 자라고 지식도 자라고 계속 자랍니다. 계속 자라는데 살아가는 것을 보면 한심합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윤리적인 수준이나 한심합니다. 그러니까 이 미움의 죄에는 누가 빠지기 쉬우냐하면 시쳇말로 교회 속에서 아주 잘 훈련되고 그리고 교회에 아주 잘 헌신된 사람들이 빠기기 쉬운 죄입니다.
그리고 뭐냐 하면 그런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유일한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선은 이 죄가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얼마나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치명적인 해를 가져다주고 있는지를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무슨 아름다운 것을 해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속에서 쌓은 선으로부터 나오는 그 선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속에는 독한 것이 쌓이는데 겉에는 선한 것이 흉내 내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늘 하신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질렸다. 싫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며 공의를 행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죄가 얼마나 무섭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느냐하는 것들을 생각해야합니다.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미움의 감정 자체가 어저께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용서하는 것은 손가락을 잘라내는 것만큼 아프고 힘듭니다. 진정한 용서는 힘듭니다. 더군다나 복수만하지 말라고 해도 하겠는데 복수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라.’ 어떻게? ‘그리스도가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용서해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습니까?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혹은 그렇게 말하지도 않는 자에게 다가가서 죄가 생각나게 하십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됐다. 알았다. 그래 이것으로 끝이야 너를 굳이 지옥에 보낼 마음은 없어 그렇지만 이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마 이것이 너에게 주는 마지막 부탁이야 이것으로 우리의 관계는 정리하는 것이야.’ 이렇게 주님이 되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미움을 넘어서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자신이 누군가를 용서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나 넓이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계속해서 지니고 살기위해서는 결국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그 기초를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모든 미워하는 감정은 옛날의 무슨 사건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오늘 내 마음속에 충만하게 일어지 못하고 있는 죄 사함의 감격 때문입니다. 바울이 수많은 대적들을 만나고 목회사역에서 자신을 버리고 간 수많은 동역자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랑의 장과 같은 위대한 장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용서를 받으면 이것은 정말 죄인 중의 괴수가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사람을 보면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용서가 되겠습니까? 미워하는 사람이나 대상이 없어져버리면 그것은 진짜 허무한 것입니다. 왜? 뭔가 일이 잘 안 풀리고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고통이 생각날 적마다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드러누워서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잘근잘근 씹는 것입니다. 나쁜 놈, 나쁜 년 그러면서 속으로 씹는 것입니다. 그래야 공평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놀라운 위안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 맛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마약과 같은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루에 한번 씹으면 되었는데 다음에는 그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 다음에는 고요히 드러누워서 증오심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안 됩니다. 생각은 반드시 반복을 낳고 반복된 생각은 필히 행동으로 옮기게 만듭니다. 그리고 행동이 쌓이면 그것은 인격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움의 영 그 자체가 이 사람의 인격 자체를 지배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철저히 황폐화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교회를 섬기면서 그런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때로는 그것이 자기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닐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말도 안 되는 아버지를 만나고 그 집안에 태어나겠다는 것을 가편 투표를 하는 것은 아닌데 태어났는데 그때 아버지가 되먹지 않는 사람이라 만날 두드려 패고 만날 엄마가 맞는 것을 보고 말하자면 비참하게 상처를 받으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움의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정의 여지가 있습니까? 세상에서는 그렀습니다. 세상에서 주는 심리요법의 한계가 그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배설을 다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설을 받아준다고 해서 그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아닙니다. 결국은 동기가 어떻게 생겨났든 지간에 물론 하나님이 그 영혼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데 불쌍히 여기는 것은 불쌍히 여기는데 아무리 불쌍히 여긴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삶속에서 그가 미워하고 있는 감정이 그의 영적인 생활에 심각한 위험을 가져다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입니다. 그것이 결국은 어떻게 깨어집니까? 정말 심령의 부흥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렇게 깊이 박혀있는 것은 안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한없이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깨뜨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죄사하심의 은총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에 반드시 희생을 통해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오늘 이 세상에서의 화목도 반드시 우리 자신의 희생이 없이는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십자가 자체가 그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자신을 희생을 시키심으로 화목을 이루는 것입니다. 왜? 화목에는 반드시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미워하는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그를 끝까지 미워하면서 누리는 위로 그 특권을 포기해야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라도 위로를 삼았는데 그것도 없어졌으니 어떻게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속적인 생각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같이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이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그 실상을 예수님께서 파헤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예배와 직결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축소판입니다. 말하자면 에센스입니다. 그것의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주느냐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