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예물보다 더 중요한 것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녹취자: 백지영
전 시간에 이어서 우리가 집회를 준비하는 의미에서 용서의 문제를 오늘 다루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미움의 문제, 용서하지 못하는 문제를 말씀하시기 위해서 왜 그 도입을 살벌하게 구약의 살인에서부터 시작했을까 그 문제에 대해서 자세히 말씀을 상당히 긴 시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미움의 기초 더 정확한 표현으로 말하자면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의 기초와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감정의 기초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어떤 것은 행동으로 표출이 되되 극단적으로 표출이 되었고 또 하나는 아직 잠복되어 있는 상태라고 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사실 담력이 없고 용기가 없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이미 살인한 미움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들에게 만약에 남들보다 뛰어난 용기가 있거나 아니면 잔인함이 있거나 아니면 힘이 있거나 기회가 있었더라면 살인을 실행에 옮겼을 미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예수님께서 미움을, 정확히 말해서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살인으로부터 이 복음을 도출한 이유라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리면서 이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의 문제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인지 하는 것들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천사들이나 사망의 위협이나 죽음이나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을 받아서 온 몸을 벌거벗기는 적신이 되는 것이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막을 수 없습니다. 예레미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감옥에 갇혀 있는 가운데서도 예레미아서를 읽어보면 계속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또다시 예레미아에게 임하니라’, ‘또다시 하나님이 예레미아에게 말씀하시되’, ‘예레미아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가로되’, 극한 상황이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쓴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한 승리를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인 것입니다.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바다 끝에 가서 새벽날개를 칠지라도 거기서도 여호와의 손이 붙드십니다. 한국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한 사람이 미국으로 간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습니다. 오늘 여기서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소련이 아니라 중공을 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질 리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가로막는 것은 오직 유일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그 죄관, 죄에 대한 생각은 복음적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율법적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오늘날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신앙 안에서 새롭게 만나는 그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인데 그런데 우리의 하나님과의 교통을 가로막는 죄에 대한 생각은 다분히 율법적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속는 것입니다. 즉 무슨 뜻이냐 하면, 자기가 죄인임을 확신하게 하는 그 요소들을 다분히 자신의 바깥에서 발견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 올바른 것이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 올바른 것처럼 그렇게 자신도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잣대를 가지고 또 다른 사람도 잽니다. 그러니까 교회 잘 나오고 그리고 인생을 주님께 드렸다고 말하고 주님만 위해서 살겠다고 말하고, 사실 그 사람들이 더 무섭습니다, 그 다음에 상당히 헌신적인 삶을 살고 하는 사람 그런데 사실은 그런 사람들 속에 깃들여 있는 편견이라고 할까 죄의 덩어리 이런 것들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집회를 가보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엎드려서 딴 짓하거나 뒤로 빙글빙글 돌아다니는 사람은 다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 오래 한 사람입니다. 자신들은 상당히 도덕적이고 헌신되었기 때문에 나무랄만한 데가 별로 없다고 말로는 안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중의 하나가 이 미움의 문제입니다. 사람의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마음속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곧 미워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간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미워하는 마음이 내 안에 가득 있는데 계속 해서 마음에 들려오는 속삭임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내가 이제껏 억누르면서 그 용서하지 못하는 미움의 감정을 행동으로 옮겨서 그를 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스스로 상당히 대견해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논리입니까? 세상의 논리입니다. 세상의 법은 내가 한 사람을 죽이려고 무수하게 속으로 생각하고 매일 저주하고 그리고 죽이기 위해서 청계천에 가서 칼까지 준비하고 갈고 그것을 가슴에 품고 있다고 해도 법은 처벌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법은 사람의 마음속에 감추어진 죄를 짓고자 하는 그 의도 그것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범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깨뜨리면서 말하자면 현실로 나타났을 때 그때 처벌하는 것입니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사람을 미워하는 감정을 억누르고 사는 것이 너무 힘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얼마큼 힘드냐 하면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힘든 것입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랑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고통입니다. 사람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미움을 표현하지 않고 가슴 속에 안고 살아가는 것은 큰 고통입니다. 그런 것들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말하자면 세상적인 각도에서 보면 그것을 표출하지 않고 단지 가슴에 묻고 사는 것은 대단히 수양된 사람입니다. 인격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의 관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그렇게 세상 사람들만 인정해 주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다 인정해 주어도 하나님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말씀하시면 우리는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따라 사는 것이 좁은문 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다음 주에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우리는 나름대로 그런 삶을 살 수 있을 만한 기초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는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 마음속에 있는 그 미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 그것이 아주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몸 밖에 있는 죄와 몸 안에 있는 죄를 구별하셨습니다. 몸 밖에 있는 죄는 행동으로 드러난 죄들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눈앞에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거기 설적마다 자기의 잘못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것 그것입니다.
그런데 몸 안에 있는 죄는 예를 들면 간음죄 같은 것을 몸 안에 있는 죄라고 말씀하셨는데, 몸 안에 있는 죄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몸 밖으로 드러나지 않고 내죄되어 있으면서 그 몸 안에 있는 내죄된 죄가 우리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주 비참하게 고사시키는 것입니다. 단번에 한 번의 미움으로 우리의 신앙이 당번에 파괴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아마 단번에 파괴되는 죄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흔하게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살인을 했다고 할 때 누군가의 경험담을 들으니까 살인을 하는 그 순간에, 예수 믿는 사람이 살인을 하는 그 순간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자신에게 밀려오는 것이 느껴지더랍니다. 악신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살인하는 것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정당방위, 하나님께서 율법에서도 인정하는 그런 것들이 때에 따라서는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고의적인 살인의 경우에는 이것은 정말 뒤집히는 것입니다.
제가 육군사관학교에 근무할 때 헌병대장이 있었습니다. 소령인데 아주 멋있게 생겼습니다. 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만 같은 소령이라도 헌병대 소령은 소령하고는 같이 안 놀았습니다. 대령들하고 놀 정도로 파워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육군사관학교의 지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수도방위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저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그 방에서 둘이 마주 앉아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그 눈이 그렇게 이글거리고 타오르는지 모릅니다. 나쁜 의미는 아니고 그렇게 눈빛이 차갑고 매서운 사람은 처음 보았습니다. 수사관의 눈초리 같습니다. 그런데 그 바로 윗 건물에서 총이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저를 불러서, 무슨 의도에서 저를 불렀는지 모르겠는데, 그 권총을 어떻게 찾을 길이 없겠느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훔쳐가지도 않았는데 온 몸이 얼어붙는 것이 느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주 재미있는 고백을 했습니다. 나보고 살인한 사람의 눈빛을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본 적이 없다고 했더니 이분이 하는 말이 자기가 옛날에 근무할 때 이등병하나가 두 사람을 살인하고 영창에 들어갔는데 이등병인데도 얼마나 보스기질이 있는지 이등병으로 들어갔는데도 그 감옥에는 여자 빼놓고는 없는 것 없이 다 있답니다. 그 수하들이 갖다가 바쳐서. 그런데 자기가 그 아이하고 눈이 마주 쳤는데 단 10초를 마주 있지 못할 것 같은 큰 공포를 느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살인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한 번의 죄로 말하자면 단번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덜컥하고 끊어지면서 영적인 어떤 추락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경험을 했지 않습니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하고 나서 즉시 하나님을 찬양하던 입술은 굳어버렸습니다. 그래서 51편에서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노래하던 온 몸은 악기와 같이 하나님을 찬송하던 그 몸이 당장 굳어버렸습니다. 노래를 잃어버렸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현이 끊어져버린 그런 화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미워하는 감정을 갖는다고 해서 단번에 신앙이 곤두박질을 치면서 추락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서움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수준이 아주 높고 그리고 아주 예민한 영적인 상태를 간직하고 사는 수준 높은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 수준이 높은 만큼 죄에 대해서 매우 예민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신 속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들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현격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에도 성령이 기도하게끔 미시는 것과 내 속에서 기도해야 되겠다는 의지가 나를 미는 것 이런 것들을 정확하게 면도칼로 자르듯이 그 부분을 정확하게 구분해 낼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면 내가 잘 나가는 것이 그것이 언제나 하나님께서 나를 옳다고 인정하시고 나를 미시는 것이 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죄를 모를 때는 자유롭습니다. 알게 되면 자유가 없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파란 차선이 좍 그어있습니다. 파란 차선은 서울 쪽으로 들어오는 것은 아침 7시서부터 5시까지이고 나가는 것은 5시부터 몇 시까지인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으레 파란 차선이 그어있으니까 이것은 올라가는 차선이니까 지금은 해당사항이 없겠구나 생각하고 탁 들어섰습니다. 달립니다. 앞에 보면 차도 가끔 한두 대씩 갑니다. 그런데 안가는 차가 훨씬 더 많습니다. 달릴 때는 속으로 이 좋은 길을 내버려두고 사람들은 왜 이렇게 가나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달려가는데 어느 순간에 앞을 보니까 아스팔트 바닥에 쓰여 있기를 아침 6시서부터 밤9시까지, 종일차선이라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두 줄 그었는데 처음에 똑같이 한 줄이었습니다. 알고 난 다음서부터는 그 길을 달려가는 데 갑자기 자유함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죄가 죄인지 모를 때는 우리에게 그런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가 성령 안에서 주시는 자유는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약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 자유는 참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여기시고 슬프게 여기시는 것이 우리의 기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서 우리를 기쁘게 여기시고 슬프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움이라고 하는 감정,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은 한 번에 우리 믿음을 추락시키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추락시킨다면 아마 사람들이 금방 미워한다고 하는 것 자체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몸 안에 계속 축적됩니다. 행위로 드러나지 않았으니까 회개할 것이 없습니다. 속에 계속 축적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그렇게 축적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성령의 놀라운 은혜 없이는 자신이 정말 심각하게 이 문제가 하나님 앞에 죄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마치 막 이불을 털면서 먼지를 낼 때는 먼지가 나는 줄 모르지만 커튼을 젖히고 나면 아침 햇살에 뽀얗게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때서야 입으로 손을 틀어막는 것처럼 모르는 것입니다. 모를 땐 자유롭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어떤 놀라운 역사가 있어야지만 그리고 이런 문제에 대한 아주 예리한 이해를 가져야지만 그러한 드러나지 않은 마음속에 감추어진 그 미움의 심각성, 그리고 용서하지 못하는 죄의 극악함 이런 것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영적인 생활에 고사, 서서히 말려 죽이는 그런 힘을 우리들이 느끼게 되는데 마음속에 그런 미움이 남아 있으면 그런 죄를 깊이 볼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막 몸부림치며 기도하고 가슴을 치고 그리고 헌신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외치는 기도소리는 함성이 되고 그리고 기도하고 난 마음은 후련할지 몰라도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배와 예배자의 삶을 예물과 예물을 드리는 삶이 일치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하고 단서를 달았습니다. 이것은 그 문장의 형태가 율법을 이야기할 때하고 아주 유사합니다. 율법이 이런 식으로 문학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네가 누구를 죽였다면, 만약 누가 누구를 어떻게 했다면, 혹은 했다고 치자 그러면 그는 하고 나옵니다. 여기서 똑같이 네가 예물을 하나님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이것은 생각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하는 가정법이 아니라 뒤편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의무를 충족시키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새 계명을 옛 율법의 문학적인 형태를 빌어서 오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에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은 누가 누구를 죽였거든 하고 말씀하셨지만 오늘은 만약에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배가 주는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놀라운 도전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예배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예배는 제대로 드려지는 예배에서입니다. 왜 하필이면 다른 곳에서 생각이 나지 않고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려 할 그때에 생각이 날까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예배가 정말 진정으로 진리 안에서 그리고 신령한 가운데 성령이 함께 하시는 가운데 드려지기만 하면 우리는 다른 어떤 장소에서 보다 훨씬 더 하나님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잘 알 수 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예배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이런 힘을 잃어버리게 될 때 그때는 형식적인 신앙이 만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 자신의 잘못이 생각나지 않는 삶이 다른 어는 곳에서 자신의 삶이 생각나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의 잘못을 예배 가운데 진지하게 돌아볼 수 없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를 헤매다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예배의 현장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그 일을 깊이 돌이키고 뉘우칠 수 있는 그런 여지가 없는 그 사람이 이 세상 어느 곳을 방황할 때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그런 힘이 어디에서 어느 기회에 생겨나게 되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배는 모였다 흩어지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성도의 의무가 아니라 특권입니다. 우리는 이 앞에 서서 하나님 앞에선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앞에 서서 우리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근본적으로 짐이 되고 있는 죄가 무엇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체가 무엇인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퇴치할 수 있는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기를 포기한 사람은 하나님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이 영적인 상태가 어떻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어떤 절망 가운데 있고 여러분들이 놓인 환경과 위치가 어떠하고 여러분들이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는 예배의 정신이 살아 있고 그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기대와 소망이 있는 한 여러분은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우리들이 생각할 수 있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러 오는 사람들마다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그 예배가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일 날 나올 때 가장 신경 쓰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속으로 한번 다 대답을 해 보십시오. 어쩌면 아무 것도 없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중대한 문제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오늘 이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가정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만, 만약에 실지의 인물이라면 지금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할 때 가장 정성을 기울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예물을 받지 않으시고 거기다 놓아두고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가장 신경 썼던 것이 예물이었습니다. 그것이 거절당하는 것은 이 사람에게 있어서 심각한 충격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예배드리러 나올 때 무엇이 가장 신경이 쓰여지는 것입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그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사람들보다 더 나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거절될 예물이라도 있었지만 여러분들에게는 주님이 거절하시래야 거절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때에 따라서는 여러분이 헌금일 수 있습니다. 주일 날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이 부담스럽지는 않지만 아무런 부담이 안 되는 것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이것은 지금 헌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헌금을 낼 때에도 부담이 되고 과도하게 눌리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무 부담이 안 되는 것도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러 나올 때 그들은 온 관심이 제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온갖 정성을 다 쏟았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 거절하는 것이 그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치는 것이 있어야 거절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현대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복음을 아무리 자세히 풀어서 설명을 해도 하나님 앞에 자신이 거절당했다고 하는 느낌이 없기 때문에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돈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 앞에 이 주일 예배가 아니면 나는 이제 끝이다, 이 주일 예배를 하나님이 안 받으신다면 어떻게 일주일을 산다는 말인가, 그리고 마음을 다 묶어서 하나님 앞에 드렸는데 그때 나는 그것 받을 수 없다 그러면 충격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의 경우에 하나님이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생각나게 하실 것이 없다 이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것이 아주 엄청나게 커다란 도전이었습니다. 이것을 읽을 적마다 이 사람 누군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문제 많은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본문을 보면서 가정법의 사람이지만 이 사람을 나는 정죄할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리고 내가 예배 속에서 하나님이 거절하실 만한 것들을 드려본 적이 있는가? 그러니까 잘 생각해야 됩니다. 여러분, 그러니까 예배에 나오는 것이 부담이 되지 않는다든지 기쁨이 되지 않는다든지 다 문제되는 것입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담이 되서 그 근심으로 눌릴 정도로 헌금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성령이 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매주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금이 내게 아무런 부담이 안 된다면 그것은 헌금 생활에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음 주서부터라도 고치십시오.
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셔서 우리 자신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싶어도 거절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온갖 신경을 써서 가져 나온 것이 없으니 거절당할 것이 없고 또 거절을 당하는 느낌이 없으니까 깨닫는 것이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기대하는 것이 별로 없으면 거절당하는 느낌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이 본문을 통해서 드러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평생에 사랑이신 하나님, 우리 삶을 날마다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앞에 매주일 여러분들이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물질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최선의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먼저 이 복음을 듣기 전에 하나님이 거절하실 만한 어떤 것들 그리고 주님이 거절하시면 우리가 충격을 받을 만한 어떤 것 그것이 헌금이 되었든 정성이 되었든 내 건강이 되었든 어떤 것이든 그렇게 내 마음을 다 묶어서 그것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았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우리는 회개화고 반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고 싶었던 말씀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사람들마다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선지자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는 너희들이 제물들에 대해서 온갖 정성을 쏟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온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제물을 미워하시는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증이 여기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그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자 자신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물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농축한 것이어야 합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든 삶을 농축시킨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예물에는 온갖 신경을 다 쓰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지 못하는 이러한 오류가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언제나 쉽게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일러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헌금을 하는 연보계에 돈을 넣는 많은 위선자들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예물이 그들을 삶과 동반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을 얼마나 슬프게 하시는지를 아셨습니다. 만약에 삶이 그 헌물에 동반할 수 있는 부응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과도한 헌금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헌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예물에 부합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이 그 예물을 통해서 자신의 죄악을 가려보려고 하는 시도는 위선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똑같았으나 그러나 그 이름은 각각 다르게 불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드릴 적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깨달았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특이한 것은 네가 제단에 예물을 들이다가 네가 네 형제를 미워한 그런 죄가 생각이 나거든 다시 화목하고 와서 예배를 드리라 그러면 앞에 이야기하고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앞에서는 적극적으로 형제를 욕하고 미워하고 하는 미움의 죄를 이야기하다가 이번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제단에 제물을 드리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즉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지금 네가 형제에게 악한 일을 했거든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고 이 사람은 가만히 있고 형제가 너를 원망할 만한 일이 있었던 것이 생각이 나면 그러면 너는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 시비(是非)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오해 때문이든 무슨 이유때문이든 그것이 진리에 관한 문제가 아닌 한 네가 누군가로부터 많은 원망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거든 네가 그리로 가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적용하기에는 힘겨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마음 아프게 하고 미워하는 것까지도 내가 감당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내가 잘못하지 않은 것까지도 그런 것을 가지고도 다른 사람이 나를 원망하고 미워하는 것까지도 내가 가서 그 문제를 위해서 화해해야 한다고 하는 이 복음이 바로 우리에게는 버거운 복음입니다. 그러나 버거워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에 그 의무가 버거우면 기독교 신앙이 버거운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배울 수 있는 사실 하나는 무엇이냐 하면, 형제에게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면 그랬는데 매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경우에는 형제 사이에 서로 미움이 깊어지고 용서가 안 될 때 그것은 어느 한 편의 책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나는 완전히 옳고 저 사람은 완전히 잘못됐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보아야 분간이 어렵습니다. 이쪽은 이쪽 이야기만 하고 저쪽은 저쪽 이야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명쾌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미워하고 관계가 나쁘게 된 원인을 어느 쪽에서 먼저 제공을 했거나 더 많이 그 관계가 악화되는 데에 기여한 사람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미워하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그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은 언제나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양자의 문제일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지금 무지함으로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물을 드립니다. 그런데 예물을 준비할 때까지도 전혀 생각에도 안 두었던 문제인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물을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 앞에 가까이 서면 설수록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문제, 그러다가 예물을 드리기 시작하면서 내 잘못은 아니지만 아마 그 형제가 나를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그것이 요만하게 떠오르기 시작하더니 하나님의 임재의식이 더 깊어질수록 그것이 엄청나게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때 그는 예물을 두고 가서 형제와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결코 형제가 너에게 잘못했기 때문이겠지만 그러나 그가 누렸던 것은 자신의 무지로 말미암는 자유 함이었습니다. 깨닫게 하실 때 그는 복종하여야 했습니다. 원망과 미움과 용서하지 문제는 정말 그것을 정확하게 누구의 잘못인지를 가려내는 것은 거의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는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원망들을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은혜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변화된 시각으로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심을 먼저 버릴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렇듯이 이 미움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자라납니다. 그리고 계속 해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땅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냅니다.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인격을 지배합니다. 그리고는 결국은 언젠가는 그 미움을 행동으로 옮겨서 죄를 범하게 되는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삶이 서서히 고갈당하는 고통을 경험하면서 자유를 잃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되었을 때에 “먼저 가서” 그랬습니다. 먼저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쪽에서 나에게 용서를 구하는 상응하는 반응을 보일 때 그때 내가 거기에 대해서 그에 부응하는 반응을 보이겠다고 하는 것들은 복음적인 태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가야 되느냐? 하나님을 먼저 만난 사람, 먼저 깨달은 사람,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안 사람 그 사람이 가서 용서하고 그리고 얼킨 것들을 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그 작업이 곧 무엇이냐 하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쓴 뿌리를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먼저 가서라는 간단한 말에 인간으로서는 실행에 옮기기 어려운 굉장히 많은 저항요인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려운 것은 간다는 것까지는 좀 나은데 먼저라는 이 말이 우리에게는 대단히 무거운 짊을 안겨줍니다. 먼저, 여기는 자존심이 남아 있는 한 먼저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그와 화목하기를 원하는 나의 정성스러운 수고가 상당한 보응을 받을 것이라고 하는 응분의 대가를 받을 것이라고 하는 기대 이런 것들이 먼저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그리고 미움이라고 하는 것은 사연이 있습니다. 이렇게 쳐다보는데, “얼굴이 왜 이렇게 잘 생겼어? 웃기네. 보기 싫어.” 이런 사람은 정신병자입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 있다고 하는데 괜히가 아닙니다. 반드시 어떤 사연이 뒤에 있습니다. 그 사연은 사랑의 사연도 깊어갑니다. 미움의 사연도 깊어갑니다. 소설 가운데 인류가 창조가 된 이래로 가장 오랫동안 써먹어도 마르지 않는 주제가 바로 그것 아닙니까? 길바닥에서 장사를 하고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사람이 사랑을 나누면 그 사람들의 사랑은 옛날의 귀족들이 나누던 사랑보다 가치가 덜합니까? 그 사람들은 돈 있고 시간 있고 재주 있으니까 주절이 주절이 써내서 사탕 바르고 꿀 발라서 달콤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것 못하니까 묻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연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고 샘이 깊은 물은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순간에 인간 정말 실망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날 일어나면 다시 그 샘물에 물이 고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사연입니다. 사랑의 연륜입니다. 어떻게 못하는 것입니다. 미움도 똑같습니다. 잘해 보려고 하는데 워낙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워낙 뿌리가 깊습니다. 잘해 보려고 하는데 나중에는 미움의 샘물에서 사랑의 물만을 한번 가려서 떠내보려고 그런데 나중에 하다가 역시 하면서 쪽박 집어던지는 그런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제는 아주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깊이 비춰보지 않으면 정말 생각나기 어려운 죄입니다. 그리고 일평생 자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체를 묻고 살았는지를 결국 자기도 모르다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죄가 이 죄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며 우리의 가슴 속에 무수한 시체가 있습니다. 수없는 사람을 살인했습니다. 지금 누워있습니다. 그런데 아벨의 피를 받은 땅이 하나님을 향하여 소리 질렀던 것처럼 그렇게 우리가 미움의 칼로 죽인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우리의 영혼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을 향해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미움을 주절이 주절이 가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새로운 회복을 기대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날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이것은 치유하고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식의치유와는. 자기가 미움의 감정이 있다 어찌할 수 없다, 물론 어찌할 수 없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설움에 겨워서 한없이 울고 났습니다. 치유가 됩니까? 가장 훌륭한 치유는 우리 속에 있는 그 미움의 뿌리들을 잘라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런 신령한 은혜와 그 사랑의 깊이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거의 포기하고 삽니다. 왜냐하면 노력을 해도 그 성과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자유를 우리들이 희구하면 희구할수록 이 문제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먼저 가서”라는 그 말씀은 우리에게 한편으로는 굉장히 어려운 무게를 안겨줍니다. 예를 들자면, 이 세상에 누가 보더라도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라 저 사람 잘못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때마다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하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때 자기가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말하면 정말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해 줄 텐데 그런데 오늘 성경 예수님 말씀은 “먼저 가라”, 그러니까 인간의 자존심과 그 다음에 인간 스스로 가지고 있는 모든 자기의식들을 포기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차라리 집을 팔아서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는 것이 낫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서 기대하시는 바는 결국 화목이라는 것입니다. 이 화목은 말입니다. 이 화목은 결코 이 세상에서 물질이나 나누면서 모든 깊은 미움들을 다 덮어두고 껄껄거리면서 살아가는 그런 피상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사도신경을 외울 때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라고 하는 그 구절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교통을 이야기합니다. 신학적으로. 하나는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그리고 그 교통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교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통은 질적으로 같습니다. 영 안에서의 교통입니다. 이단과는 교통이 없습니다. 영이 다른 이단과는 교통함이 없습니다. 불신자와 신자 사이에는 성도의 교통함이 없습니다. 영적인 교통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화목인데 그럼 그 화목을 무엇으로 생각하면 되느냐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떻게 화목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그 방법이 동일하게 우리와 우리 형제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는 방법과 동일한 방법으로 화목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어떻게 화목이 이루어집니까? 그것은 제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제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제사를 드릴 때마다 죄 없는 생명이 희생되어 가는 것입니다. 관계의 화목을 위해서 희생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요한 일서에서 명쾌하게 말하기를 그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 제물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과의 우리와의 화해를 위해서 하나님이 지불하셨던 몫이었습니다. 속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그러한 화목을 위해서는 속전이 주어져야 했습니다. 대속 제물이 주어져야 했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희생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야기했던 그 화목이 똑같이 오늘은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을 생각날 때 그 형제와 화목 하라는 그 화목이 오늘 여기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참된 화목을 위해서 그 사람의 예배가 하나님과의 화목을 위해서는, 열납을 위해서는 형제들 간에 화목이 필요한 데 그 화목은 희생을 동반한다는 것입니다.
자,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큰 소를 들여왔습니다. 그리고 뿔이 있는 황소를 들고 왔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치는 제물 중에는 단일 제물로서는 가장 커다란 제물이었습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그 소를 가지고 온 사람이 어떤 정성을 다 기울여서 가장 좋은 소를 골랐고 그 소를 깨끗하게 청소했고 그래서 그 소를 끌고 제단에 왔다고 하더라도 그 소가 그 제단 앞에 살아 있는 한은 아직 예배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한은 속죄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대속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 제물에 대해서 다시 예배를 드리고 찾아가야 되겠다고 하는 미련이 있든 없든 그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어쨌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그가 어떤 정성으로 어떤 희생을 각오하고 그 제물을 드렸다고 하더라도 그 소가 아직 제단 앞에 살아 있는 한은 예배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희생을 동반한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죽였습니다. 제사장이 손을 얹고 기도하고 그리고 죽였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기구에 맞아가지고 피를 토하면서 황소가 쓰러졌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각이 떠지고 내장이 다 해체되고 그리고 그것이 불태워진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마어마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똑같은 이야기를 오늘 형제 사이의 화목에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 죄로 말미암아 끊겼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참다운 화목을 이루기 위해서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그 제물이 완전히 죽어버리는 그런 희생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과의 화해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처럼 오늘 형제 사이의 화해도 하나님 앞에 그렇게 제물이 죽었던 것 같은 희생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 서로 미워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영적인 삶이 고사되면서 까지도 끝까지 하나님 앞에 결국은 화목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엄청난 희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무슨 희생을? 돈을 내라고 하면 차라리 낫습니다. 그리고 신체 중에서 손 하나를 자르라고 그것은 오히려 낫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나에게 손해를 입혔습니다.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렇게 내가 받았을 때 내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이미 미움이 있기 때문에 자유함을 누린다든가 그런 것 없습니다. 형제와 화목하지 못하고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런 완전함 자유함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무지로 말미암는 깨닫지 못함으로 말미암는 자유함은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영혼의 자유함은 없습니다. 그럼 그때 유일한 위로는 그 사람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뭔가 일이 안되고 어려움이 처할 적마다 내 가슴에 미워할 것밖에 없도록 만들어 준 그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으로 증오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위안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위안을 가슴 속에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를 진심으로 용서하게고 나면 이제 내가 살아가다가, 물론 그렇게 진심으로 용서하고 나면 하나님이 완전한 평화와 치유를 주십니다, 그런데 아직 받아보지 않았으니까 모릅니다. 그러면 결국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마지막 인간의 감정이 극도로 고통스러워졌을 때 떠올려서 그 사람을 증오하면서 받는 그 위로 그것조차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반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렇게 자기에게 물질적으로 명예에 있어서 혹은 마음에 그렇게 심각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던 그 사람을 내가 용서해 버리고 나면 살아서 훨훨 날아가 버리고 난 것인데 그리고 나면 내 감정 속에는 아무런 포로도 없는데 그러면 내가 살아가다가 그 형제나 그 자매로 말미암아 당하게 된 그 고통이 다시 나를 엄습할 때 나는 무엇으로 위로를 받을 것인가. 그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형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사람을 자기 미움의 감옥에 가두고 놔주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이번에 여름 수련회 때 오셔서 간증하실 권사님이 손동희 권사님인데 송양원 목사님의 친딸입니다. 여순반란 사건 때 공산당이 자기 아들을 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찾아가서 네가 내 아들을 다 죽였으니 너는 내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대통령에게 탄원을 해서 사면을 받아가지고 아들 삼았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하나의 윤리적인 고매한 성품이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하자면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장본인 미울 때마다 생각이 나면 그 이름을 떠올리면서 증오함으로 말미암아 그나마 위로를 받고 그 밤에 잠이 드는 그 이름을 반납하라는 것입니다. 자유케 해 주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살을 에는 고통입니다. 그 미움은 혀끝에서 돌이 되어서 쏟아져 나옵니다. 그리고 그 미움은 다시 우리 몸속으로 들어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그렇게 내 마음 속으로 수십 년의 세월 동안을 그렇게 떠올리면 미워하는 그런 아픔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 관계가 나에게 가져다 준 눈물과 고통은 맨 말로 해도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완전하게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자유의 시점이 무엇이냐 하면 진심으로 내가 그를 용서할 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참다운 치유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만져주심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동정의 눈물을 누군가가 흘려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정서적으로 위안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을 치료하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시간도 수많은 사람들은 죽이고 물건을 빼앗고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투절하고 남을 비방하고 모욕하고 십일조를 안 바치고 주일을 빼먹고 이러고 살아가는 것만을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있는 이 극한 미움, 용서하지 못하는 이 마음은 제법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그럴싸한 모습 속에 있는 영적인 각양 좋은 것들을 철저하게 고사시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껍질만 남고 말하자면 비참하게 썩어가도록 그렇게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는 대신 자기가 바친 제물에 크고 좋음에 대해서 자긍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자신 속에 고사되어 가는 모든 것들도 결국은 환경과 사람이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하는 말하자면 남을 향한 원망으로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자신을 기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정말 치유되기 어렵습니다. 다음 주부터도 계속됩니다만 우선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속에 이런 죄가 있을 수 있다는 개연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쳐서 우리를 고사시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영적인 모든 불만족과 침체와 모든 고통의 원인이 거기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하는 자기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문제들이 진지하고 심각한 통찰을 요하고 그리고 우리 자신도 속아 넘어가기 쉬운 그런 모든 한계 속에서 우리의 영혼이 이유도 없고 근원도 없다고 생각되는 가운데 고사되어가고 힘을 잃어가고 있는 한 가운데 오히려 쉽게 간파할 수 없는 이러한 죄와 악함이 무성하게 자라서 우리의 영성을 좀먹고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드려지지 못한 다른 모든 것들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이 따라오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교회가야지 그리고 나와서이렇게 예배드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찌하든지 우리가 알지 못하던 것들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시고 우리 스스로는 깨뜨리고 우리 스스로는 내려놓을 수 없었던 것들을 하나님의 지혜로서 우리 앞에 밝히시고 그리고 우리 속에 호소하셔서 우리로 깨닫게 하시도록 그렇게 나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 심령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부자유하고 억압하는 수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가끔 동물원에서 저는 잔인한 광경을 봅니다. 뚜껑도 없는데 수많은 새들이 거기서 1미터나 2미터씩 날아다니고 뛰어다니면서 모이를 먹고 있습니다. 표지판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이 새의 날개는 날을 수 없도록 날을 수 없는 특수 고무바킹이 끼어있습니다.” 여러분, 날을 수 없도록 고무바킹이 끼어있는데 수없이 날려고 날갯짓을 하고 몸부림을 쳐도 날을 수 있습니까? 발이 돌멩이에 굳게 밧줄로 묶여 있는데 아무리 날겠다고 새가 몸부림을 친들 날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형제를 용서하지 하는 그 미움은 또 다른 원망을 불러일으킵니다. 또 다른 미움을 낳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움이 가져다주는 철저한 악독입니다. 그리고 이 미움은 결코 중간에 멈추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사탄적인 이 미움의 감정,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 감정의 목표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철저히 파괴시켜서 우리를 껍질밖에 아닌 사람으로 비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황폐하게 만듭니다. 신앙만을 황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실상 하나님께로부터 아무런 좋은 것을 공급받을 수 없는 그렇게 철저하게 차단한 관계 속에서 고사시키도록 우리를 몰고 가는 것이 이 미워하는 감정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가는 일이 불가능한데 먼저 가라고 말씀하시고 불가능할 것 같은데 화목을 위해서 네 속에 있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종하려고 우리들이 한 발을 드려놓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잡히시던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 십자가를 지실 생각을 하며 그는 깊이 통곡하며 고통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결심을 하시고 일어나 가자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기이한 하나님의 힘이 예수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채찍과 심문과 고난을 받을 때에도 하나님의 신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셨고 그리고 쓰러지며 올라가셨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다 이루었다고 고백하실 그 때까지 능히 자신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무한하신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의 힘이 도저히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하고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런 놀라운 사랑들을 사람들은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불 가운데 들어가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 이 부름을 거역하고 그리고 이방신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고백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세배나 더 타오르는 풀무 불 가운데서도 견딜 수 있는 힘을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사망의 위협이 자기를 둘러싸고 돌팔매가 자기를 쳐서 죽이는 그때에도 아버지 하나님이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스데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 얼굴에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그리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그 모든 죽음의 위협과 그 모든 고통을 이기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던 구름과 같이 허다한 많은 증인들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힘으로는 건널 수 없다고 생각되는 그 요단강물에 발을 들여놓고 법궤를 걸머질 때에 그 요단강이 마르는 놀라운 역사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은 일찍이 경험된 적이 없는 위대하고 놀라운 능력의 보고를 안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말합니다. “아, 그 계명은 실로 우리에게 무겁도다. 누가 그것을 감당하랴. 아마 하나님은 감당할 수 없는 줄 다 알면서도 한번 해 보신 것이겠지. 우리 주위를 보라. 누가 그 무거운 계명 그 좁은문으로 들어가는 사람, 그 협착한 길로 들어가는 사람이 누가 있는고. 고로 그 길로 들어가지 않는 나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능력이 숨긴 바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 그의 위대하심은 약속을 믿고 그의 계명을 믿고 그리고 그 계명대로 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하신 바대로 자신의 삶을 얹어서 드리는 순종으로 그 믿음을 향하여 응답하고 싶고 그 부르심을 향하여 대답하고 싶어 하는 그 사람들을 위해서만 계시되고 그 사람들을 위해서만 보여 지는 것입니다. 파도치는 것같이 다가오는 이 엄청난 두려운 세상을 향하여 능히 웃으면서 세상을 맞이할 수 있게 만드는 위대한 신앙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느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자기를 향해 돌을 치는 그 많은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그들이 자신을 침으로 말미암아 당할 하나님 앞에서의 심판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말할 그때 그의 얼굴을 천사와 같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무거운 계명입니까? 아닙니다. 이 계명을 실천에 옮겨보고 죄인을 용서하셔서 희생하심으로 당신과 그리고 불순종하는 죄인들 사이에 화목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냈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짐이 결코 무겁지 않은 것을 아셨습니다. 여러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고 그 위대한 약속을 붙들고 그리고 그렇게 가서 진심으로 용서하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용납돼 주기를 원하는 일이 힘겹게 느낄 때마다 그것이 바로 제물이 살아서 움직이는 소리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 그때 하나님은 우리가 이전에 보지 못 했던 위대한 사랑의 힘을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가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몸을 버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사실을 왜 화목제물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를 풀게 되면 그 다음에는 연쇄적으로 그 모든 것들이 풀려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용서와 사랑을 누군가로부터 깊이 체험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그 사람이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고통 속에서 원망하며 뒤엉켜 있던 그런 모든 관계들 속에 하나님의 충만한 다스림과 화해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깨닫게 됩니다. “아, 이것은 우리의 힘이 아니다. 내가 누구관대 그를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그리스도 예수를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각자는 온전해 져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우리는 범사에 온전하도록 매우 힘써야 됩니다. 용서에 관한 교훈이 우리로 하여금 다가올 용서를 기대하며 형제들에게 부과된 용서의 의무를 빙자해서 마음대로 막 사는 것들을 용인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수없이 우리가 온전히 지려고 노력해도 그 노력 때문에 완전히 온전해진 공동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죄 사함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그 예수 그리스도의 위탁된 은혜에 의해서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용납함으로 죄 없는 완전한 공동체의 모습을 이루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거의 타오르지 않던 제단에 뜨거운 불이 붙게 되고 멈추었던 구름 기둥이 다시 인도를 계속하게 되고 타오르지 않던 불기둥이 맹렬하게 타오르며 어둠을 밝히며 우리 인생의 가야 할 바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