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과 용서 4 (1995.7.26 수요예배)
4.하나님이 용서하신 것 같이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4:32)
녹취자 : 이경순
지난시간에는 용서의 기초에 대해서 인자와 불쌍히 여기는 긍휼함 이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제가 교회를 비웠기 때문에 건너 띠고 오늘은 32절 하반기부터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용서를 위해서는 우선 그 기초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기초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지 아니하면 용서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은 고난을 받는 것이 훨씬 쉽지 용서를 하는 것은 훨씬 고난을 받는 것 보다 어렵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야가 바뀌지 않으면 용서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용서의 감정과 불쌍히 여기는 감정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미워하는 마음과 그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인자하게 여기는 마음은 결코 공존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용서를 이야기하기 전에 너희는 서로 인자하게 하라 인자하게 하라 이 인자는 결국 히브리 성경에 나오는 ‘헤세드’ 입니다. 그것은 값없이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어주는 그러한 자비입니다. 그렇게 하라, 그리고 불쌍히 여기라, 그것이 바로 용서의 기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용서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그 두 가지를 성도들에게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본론을 이야기 합니다.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여러분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서로 라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아주 부한 자들은 결코 꾸는 법이 없이 살아가는 일이 가능합니다. 이 세상에 부한 자 들은 꿀 필요가 없이 언제든지 넉넉한 재물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꾸어주지 자기가 꿀 필요가 없이 그렇게 유족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해 전인데 저희 동기목사님가운데 지금은 목사님인데 그 때는 가난한 전도사였는데 이사를 갔다고 오라고 해서 갔는데 그 당시 제 눈으로서는 전도사로서는 너무 과분한 집이다 그 때 저는 지하실에서 코 구멍만한 방 하나에 까치발을 떼야 하늘을 볼 수 있는 그런 집에서 살았는데 이곳은 일층인데다가 햇빛이 잘 들어오는 집에 소파도 있고 응접실도 있고 침실 따로 있고 거실 따로 있고 애들은 하나밖에 없는데 애들 방까지 있고 그리고 올라오면 밖으로 나오면 정원 이었습니다. 너무너무 화려한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전도사가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까? 어떻게 이런 집에 왔냐 물었더니 방을 구하러 다니는데 자기가 교회 전도사라고 하니까 들어오라고 하더니 그냥 이집에서 살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돈이 안 된다고 하니까 나는 돈이 별로 필요 없으니까 얼마가 있는지 있는 것만 내고 살라고 했는데 그 당시 600만원에 그 큰집을 통째로 전세로 준 것입니다. 최소한 1500만 원 이상 가는 그런 집을 거저 주었습니다. 왜? 부요하니까 전세금을 받는 것도 꾸는 거랍니다 그래서 필요가 없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남한테 꾸고 신세를 져야지만 먹고사는 사람은 언제나 남한테 신세를 지게 마련입니다. 은행에 가서 카드로 빚내고 사람에게서 사채로 빚내고 친구한테 꾸고 그러면서 살아갑니다. 세상에서는 꾸는 자와 꾸어 주는 자들이 비교적 정확하게 나누어져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서로 용서하기를 서로라고 했습니다. 오랜 신앙생활을 하고 은혜를 충만하게 많이 받은 사람이 이제 신앙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는 사람에게 용서를 받아야하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심이 돈독하고 은혜체험을 많이 한 사람만 믿은 지 얼마 안 되는 사람을 용서해주어야 하는 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용서를 받아야 되는 때도 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로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서로 용서하기를 하고 너희들 중 누구도 인격이 완전하고 행함이 완전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받아야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너희들 가운데 있을 수 없다, 이것을 사도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너무나 자주 이 평범한 사실을 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나 생각합니다. 이미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기 시작할 때 자신은 하나님이 서계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완전합니다. 그리고 그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시비를 가리는 겁니다. 자신의 허물은 이미 접어두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자신은 허물이 없고 결점이 없다고 이미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용서해 주어야할 필요가 있고 다른 사람이 자기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정상적인 성도의 관계를 교회 속에서 유지를 하며 또 하나님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갈 수 없는 그러한 전적으로 타인의 용서에 의존해 있는 그러한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때도 그랬고 또 지금도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우리에게 죄 지은 자 들을 용서해준 것 같이 라는 말을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할 때 먼저 하도록 그렇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생각할 적마다 그렇게 또한 너희는 서로 그렇게 허물과 죄를 용서함으로서 비로소 그렇게 하나님의 교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이라고 하는 것을 주님께서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발짝 더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러면 왜 예수를 믿고 각자 완전해지도록 만드셔서 그렇게 완전함으로 말미암아 서로에게 고통과 용서받을 만한 결점이 있는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기를 원하시지 않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과 그 악함, 혹은 결점을 그대로 남겨두어서 그것으로 서로를 찌르게 하시고 또 찔 리운 것들을 인하여 아파하게 하시고 아파한 것을 인하여 다시 또 용서하게 하시고 용서하는 과정에서 그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과 싸우며 또 고통을 겪게 하시고 결국은 용서하게 하시고 또 그렇게 용서한 것처럼 용서를 받게 하시고 또 용서를 사람들에게 받은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죄 사함을 체험하고 그렇게 복잡하게 서로의 죄를 용서하며 서로의 허물을 용서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완전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도록 만드신 그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그렇게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죄를 짓거나 혹은 자기를 아프게 하거나 상처를 줄 때 그때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자신의 모습을 언제나 보게 하기위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행동으로 완전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가 있고 은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점이 있는 인간들이 서로 모여서 상처를 주고받으며 그 속에서 용서를 통해서 비로소 완전한 공동체로 나아가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아프게 하는 그 일들을 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 바로 그것입니다. 누군가 우리에게 용서를 받아야할 필요가 있을 때 그것은 바로 내 모습인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자리에 지금은 있지만 그러나 언젠가는 무릎을 꿇고 다른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위치에 있을 때도 있음을 오늘 서로라는 말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아도 아무리 신앙의 체험을 많이 하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아무리 거룩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그 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으며 산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결코 완전함이란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완전한 사람도 없고, 완전한 믿음도 없고, 완전한 사랑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이후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을 목마르게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혹은 이웃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사랑해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 사랑이 완전한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찬란한 사랑의 빛 앞에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그 사랑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만이 완전한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면 우리 자신은 이미 불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사랑이 주어져도 그 완전한 사랑을 느낄 수 없을 정도의 결함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미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그렇게 서로 죄를 용서해주고 긍휼이 여기는 그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호소하는 것은 너희는 거울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지나간 조상들의 일, 다른 사람의 일, 믿음에서 실패하는 사람들의 행동, 이 모든 것들을 거울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람들을 완전하게 하심으로 완전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의 죄를 용서하고 긍휼히 여김으로서 완전한 공동체가 되도록 만들어 주셨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그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고 또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강하신 분이었습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 살아계셨을 때 상처를 받으셨을까요? 안 받으셨을까요? 이 세상에서 사실 때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사실 때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상처와 우리의 상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상처는 항상 범죄를 낳습니다. 상처는 미움이 자라는 토양입니다. 마음속에 누군가를 향한 그악한 미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 뒤에는 그럴 수 있을만한 상처가 있습니다. 지나다니는데 ‘난 재 는 주는 거 없이 보기만 해도 밉다고 하는 것입니다.’그는 정신병자입니다. 지나가는 사람이 왜 밉습니까? 무엇인가 미움은 상처라는 토양에서 꽃이 피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심리가 있느냐하면 언제나 사람들을 미워할 때 무엇으로 자신을 정당화 하고 합리화하는가 하면 미워할만한 상처가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미워하고 있는 이 죄보다는 내가 이 전에 받았던 그 상처가 훨씬 크다는 이 심리가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개를 비교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이만큼 미워해도 내가 받은 이 큰 상처에 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뒤집어서 얘기하면 내가 그 큰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이정도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괜찮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한없이 상처를 많이 받으셨습니다. 상처가 없는데 왜 우십니까? 마지막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로 부터도 상처를 받았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옵나이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버림 바 되는 말하자면 그러한 거절감, 아니면 폐기되는 것 같은 느낌 ,그런 것들을 예수그리스도께서 받으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을 하나님아버지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당신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자신의 인격 속에서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인격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병든 자와 함께 병든 자가 되어서 그들을 고치시는 장면속에서 사람의 손길로 죄인들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격에 사람들로 하여금 감격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자신의 인생에 참된 사랑이고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고 그 인생을 붙들고 그리고 자신조차 눈물 흘리지 않는 그 인생의 비극에 대해서 고통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아픔의 심정을 전해지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너무나 오랜 세월을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고 유리하며 굳어질 대로 굳어진 그들의 마음을 녹이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속에 인간의 죄와 수많은 상처와 고통과 실망과 좌절 속에서 응고되어버린 그리고 그 모든 고통스러운 이 세상의 찌기들에 의하여 덮여져 버린, 사실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고 영혼의 유일한 목자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그 사랑하는 마음을 일깨우고 불러일으키고 다시금 새롭게 불붙게 하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을 깨우는 예수의 음성을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영혼에 대한 뜨거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미움으로 갚았습니다. 그 속에서 어떻게 상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 이셨습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완전한 인간 이셨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생애는 어떤 의미에서 상처 많은 그런 투성이의 인생을 사셨습니다. 그런 사실은 오늘 입증된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에 고통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를 찾아야합니까? 마음에 누구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이해될 수 없는 그런 특별한 상처를 가지고 그렇게 그 상처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일한 대안은 무엇입니까? 누가 그들의 상처를 결국 어루만지시고 누가 그들의 상처에 치료의 포도주를 부으십니까? 누가 그 들의 상처에 새로운 새살이 돋게 하시고 그 상처가 변하여 사람의 뜨거운 피가 흐르게 만드시는 치료의 손길을 궁극적으로 베푸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에 의해서 이해 받을 수 없는 수많은 상처에 그리고 수많은 가시와 엉겅퀴가 마음속에 나서 그것들이 서로 마음을 찌르고 그 속에서 참된 치료를 필요로 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품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그리스도는 이렇게 상처받아서 세상에서는 치료에 소망이 없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과 육신이 상처를 받아서 가난하게 되어 진 것처럼 그렇게 마음이 또한 가난하게 되어서 주님의 그 치료하시는 손길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그 때 진정한 삶의 치유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치유 하십니까?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예수그리스도도 상처를 받으신 분이시고 우리도 상처를 받지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상처가 미움이라는 죄를 나은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는 저희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성품을 계시해주실 때 우리가 그 성품을 보며 바라만 보며 즐거워만 하라고 우리에게 예수의 성품을 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가 행할 수 없는 종교적인 삶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만족하게 해 주는 그런 일을 위해서 이 지상의 생애를 사셨던게 아닙니다. 쉽게 예기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이 땅에서의 생애와 그리고 고난을 받으며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삶은 우리를 단지 감격시키고 우리를 흥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단 사실입니다. 무엇이 말합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당신의 하늘나라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왕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전능한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고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사실로 인해 감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거기서 끝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내려온 것 같이 너희는 나를 위해 너희 유익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의 영광을 위하여 오늘 버리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 자신을 위해 영광의 길을 걸어가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교수대 앞으로 나아오라고 이런 삶을 택하라는 메시지 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으로 거기에 반응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들의 삶이 예수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삶 수준 높은 그런 신앙심 뛰어난 영적인 세계 이런 것들을 보며 여러분들이 늘 감탄하고 감격하고 ‘아하, 아하 ’하고만 있다면 여러분 우리의 나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인간에게는 이러한 심리적인 대리만족의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그런 것을 탓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상처를 많이 받으셨지만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그 상처 때문에 사람들을 미워하신 일이 없었습니다. 그에게 미움이 있었다면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치는 것들에 대한 미움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얼마나 많은 순간을 우리들이 안고 있는 상처라고 하는 그것 하나가지고 마치 그것 하나만 있으면 그것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아무리 미워해도 면죄부를 부여받은 것 같이 그렇게 말로 마음으로 폭력과 범죄를 일삼으며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잘못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예수의 생애를 늘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상처를 많이 받으셨지만 그러나 조금도 미워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서로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 용서는 바로 너희들 속에서 함께 일어나는 것이라 미움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미움은 또 다른 미움을 낳고 그 미움은 또 다른 미움을 낳습니다. 용서는 그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주는 유일한 해결인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하라 용서하되 너희는 하나님의 용서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가끔 용서를 하다가 낙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 나도 이제는 나도 할 만큼 용서를 해줬다 그러면서 포기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준을 두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준을 가지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사람들과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 속에서 그 사람들과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진정한 고 참다운 용서가 불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다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용서하신 방법은 바겐세일의 용서가 아닙니다. 가끔 백화점에 가보면 물건을 5만원 짜리인데 세일기간이라서 30%할인해서 35000판다고 써 붙입니다. 그리고 빨간 작대기를 죽 죽 긋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35000원이라고 씁니다. 누가 봐도 옛날에 5만원이었던 거 다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되 이전에 죄짓지 않은 사람처럼 그렇게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속에서 극악무도한 죄인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비교적 선하게 살다가 돌아온 사람보다 차별대우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습니까? 오히려 죄인 중에 괴수였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서 일등으로 열심을 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죄인 중에 첫 번째였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들어내는 일에 천재가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로 악한 죄인으로 지목받았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그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발견 하게 되는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런 도구들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용서가 완전하고 결정적인 용서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이 늘 향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그것이 고맙고 감사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우리는 지난 주간도 범죄하고 잘못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와서 말씀을 들으며 진심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지난삼일동안에 우리의 많은 죄들과 이러이러한 잘못들을 고백하오니 용서해 주시옵소서. 마음에 용서의 확신을 얻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들에게 용서가 없다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되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때로 좀 큰 죄를 짓게 되면 하나님께서 쉽게 용서해주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쉽게 용서해 주지 않는 다는 이야기는 주님이 용서를 안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사죄의 확신이 쉽게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죄는 같은 죄지만 그러나 작은 죄를 짓건 큰 죄를 짓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죄의 깊은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죄가 크면 사죄의 확신은 그렇게 쉽게 우리의 마음에 오지 않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무얼 느끼게 됩니까? 내가 분명히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죄 사함의 확신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얻지 못할 때 여러분들은 뭘 느낍니까? 왜 사람들이 죄 가운데 있으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는 것 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거절 당하고 있는 느낌을 기도할 때 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절하십니다. 그 이유가 심지어는 무엇인지를 모를 때는 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절하는 사랑이신 하나님이 내가 기도할 때 듣지 않으신다 거절하고 계신다. 사죄의 확신을 나에게 주지 않으시고 사죄의 은총을 내게 보이지 않으신다. 거절하신 겁니다. 주님이 용서안하신건가요? 아닙니다.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죄의 확신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입니다. 용서를 안 하신 것이 아니라 사죄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 그게 우리에게 안 생기는데도 우리는 비참한 거절감을 느끼고 영적인 생활에 결정적인 해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깊은 영적인 생활을 못하도록 가로 막는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들 중에 대부분이 지금 그런 것들을 느끼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교회 기도 엄청 안하는데 그거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탁월할 정도로 새벽기도 안 나옵니다. 걱정입니다. 한때 25명 30명에 육박하던 새벽기도 인구가 요새 저를 지극히 겸손해 지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각성을 촉구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매번 느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은 큰 것 뿐 아니라 작은 죄를 가지고도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반복되고 있는 죄 뿐만 아니라 예전에 일어난 죄 가지고도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러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데 다가오는 것은 기도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친밀감하게 가까이 깊이 다가가는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거절당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가깝게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포기하는 겁니다. 마치 불꽃이 타다가는 픽 꺼지듯이 불붙을만하면 꺼지고 불붙을만하면 꺼지는 겁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주님은 이미 십자가상에서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못 믿습니까? 제 앞에 기죽을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미 다 용서하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앞으로 그 자녀 우리 하나님의 자녀 됨의 그 관계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죄의 확신을 내가 누려야 될 거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것 까지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또한 나를 이전보다 더 사랑하신다는 그 확신이 절실한 겁니다.
옛날에 교회 자매하나가 있었는데 아주 은혜를 많이 받고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은 더 특별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똑같은 잘못도 은혜 잘 못 받은 사람들은 적당히 넘어가는데 은혜 많이 받은 사람이 뺀질거리고 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간단하게 장부책에 외상값 지워버리듯이 그렇게 간단하게 안 넘어 가십니다. 자매가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사람이 교회에 10명만 있어도 굉장히 좋을 텐데 하여튼 참 탁월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잘 못 지켰습니다. 맛이 가기 시작하는데 한 일 년에 걸쳐서 서서히 맛이 갔습니다. 수련회를 갔는데 마지막시간에 기도를 하는데 드디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쉽게 말하면 귀신이 들어왔습니다. 그때 들어간 게 아니라 오래전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자기도 몰랐습니다. 기도하는데 말하자면 귀신들린 사람의 독특한 발작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 때 기도하면서 귀신은 나갔습니다. 내가 기분이 어떠하냐 하고 내가 물으니 뻥 뚫린 것 같고 그냥 허망하답니다. 충만하고 기쁘지 않니? 아니랍니다. 것 보세요 우리 생각에는 귀신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지배하고 있다가 축출당하고 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 갔지요 빠져나간 겁니다. 예증을 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시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부음 받아야만 그것이 비로소 완전한 용서의 확신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서의 확신이 없을 때 우리는 거절 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한없이 외롭고 비참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무척 힘듭니다. 하나님의 그런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존재들이 바로 그런 것들을 느끼게 될 때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용서가 얼마나 우리에게 영적인 삶과 신앙생활과 인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치료제인가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용서를 받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이 나를 그 죄에서 풀어주심을 알 때 그 한없는 해방감, 그것을 우리에게 줄 수 있도록 그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나를 고통스럽게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예수그리스도만이 행할 수 있는 그 죄 사함의 그 용서의 특권을 여러분들도 여러분과의 관계 속에서 행사할 수 있도록 여러분에게 특권을 주시는 것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을 치료하고 고치고 그리고 새롭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용서에로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인 것입니다.
우리는 잊혀져도 잊혀진 것과는 상관이 없이 우리의 용서의 의무는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용서와 그 위에 보태어 지는 사랑이 아니면 그 상처가 지워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방에게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상처가 되고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이 악함을 낳는 것입니다. 옛날에 어른들이 충고를 합니다. ‘야, 너무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하고 사귀지 마라 그 상처가 너에게 온다.’ 그럽니다. 그것은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들은 대게 마음에 한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한을 많이 가지면 감정과 사고가의 모든 체계가 정상이 아니라 굴절을 가져온답니다. 똑같은 사람들이 다들 희다고 하는데 혼자서 ‘까매’ 하고 대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웃는데 말하자면 ‘지금은 웃을 때가 아니다’ 그리고 대드는 겁니다. 그렇게 감정의 굴절들이 있는 겁니다. 그것을 자신도 모릅니다. 살과 같이 되어있기 때문에 그것이 자기의 인격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마치 평생 혹을 달고 다니는 사람이 그 혹이 불편한줄을 모르듯이 그것이 자신의 인격자체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어른들의 충고가 지혜로운 겁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들이 신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가만히 보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잘 주는 사람들은 상처가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잘 줍니다. 또 때로는 마음의 상처가 없어도 부족한 여러 가지 인격적인 결함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하여튼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상처를 많이 줍니다. 그런데 그 상처를 훌륭하게 소화해서 하나님 앞에 치유 받아본 사람들이 있을 거 아닙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 사람들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풀밭에서 과자를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나를 향한 예수그리스도의 용서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알고, 알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내 미움이 치료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 때문에 내 원망과 고통이 치료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흐느껴 우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아프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처를 생각나게 만듭니다.
어저께 태어나서 제일 많은 사람을 앞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CCC에서 한 3천오백 명을 모아놨는데 참 대단합니다. 가만히 계산해 보니까 4천 명이 모였다는데 요구르트 하나씩만 사줘도 40만원이 듭니다. 강당에서 하기로 했는데 심풍이 무너지는 바람에 건물진단을 냈더니 위험하다고 했답니다. 집회는 결정했는데 위험하다고 하니 난리가 난겁니다. 그래서 막대기를 가지고 운동장에서 큰 텐트를 쳤는데 덮게만 하는데 500만원인지 600만원이 들었다니 얼마나 큰 텐트를 쳤는데 알 수 있을 겁니다. 거기서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하다가 찬송을 부르니까 휘파람을 부르고 앙코르라고 부르는 놈이 없나 별놈들 다 있습니다. 하여튼 마지막시간에 끄트머리에 가서 하나님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하게 만드시는데 예수의 그 넓은 사랑, 상처 입은 자를 찾아오시는 그 예수의 사랑 그 예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데 곳곳에서 사람들이 울기 시작합니다. 왜 그럴까요? ‘야 그 사랑 좋다 할렐루야 그러지 않고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는 이유 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프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상처를 생각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 세상을 향하여 화목케 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며 고통 하는 사람들을 화목케 해주기 위해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은 이것을 알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상처를 생각나게 하는 방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찌르므로 상처를 생각나게 하는 방법이 있고 사랑의 포도주를 부으므로 상처를 생각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전자는 그 상처를 덧나게 만듭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드러나게 만드는 겁니다. 요즘 보면 푹푹 찌르는 겁니다. 그것은 치유가 안 됩니다. 구체적으로 수사관이 죄수를 심문하듯이 토해놓으라고 종지목 대지 않아도 중요한 것은 예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다가가게 만듭니다. 예수께서 어떠한 사랑으로 얼마나 소망이 없는 우리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는지 날마다 살아가는 삶속에서 하나님의 자녀 되기에 이토록 부족한 인생들이라고 하는 것을 맨 날 깨달아 아는 데도 하나님의 곁으로 부르시는 그 성경의 그 세미한 음성과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제일먼저 다가오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그 기쁨은 나중입니다. 맨 처음 다가오는 것은 고통입니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깨달을수록 그 더 큰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더 큰 상처를 하나님 앞에 드러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은 인간관계에서도 똑같습니다. 누군가가 자기가 가장 고통 받고 있는 상처를 털어 놓을 때는 심리적으로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저 사람에게 용납 받을 수 있다 그런 느낌을 받을 때 확신을 가질 때 털어놓는 것이지 내가 이 얘기를 다 눈물을 흘리며 내 상처를 털어 놓고 나면 그놈 분명히 나에게 ’아이고 푼수 이럴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결코 털어놓지 않습니다. 죽을래. 고백할래. 그러면 차라리 죽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우리의 상처를 드러내는 힘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우리의 마음속에는 고통이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을 통해서 우리의 상처를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이 화목케 하는 직분으로 부르셨는데 우리들이 그런 사랑의 힘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 믿는 사람하고 멱살 잡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라고 박박 우겨보십시오 그가 예수를 믿게 되는가 보십시오. 여러분 지옥이 있다고 선포할 때 때로는 각성을 하고 회개하는 일도 일어났지만 그런 일은 부흥의 시기에만 일어났습니다. 보다 많은 시기에 사람들은 협박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와서 그 크신 사랑을 말하는 사람은 그리고 나 같은 죄인도 살리실 수 있고 나같이 무가치한 인생을 위해서도 예수가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그게 가슴속에 깊이 다가와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고 그 가 징계를 당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는 이 놀라운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눈뜨게 될 때 그들은 일평생동안 장롱 속에 감추었던 상처를 하나님 앞에 끌어내놓는 것입니다. 주께서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감정적인 치유는 감정이 사라지면 언제나 다시 도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치료는 완전합니다. 도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면 말하자면 자신과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힘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건강함 보다는 투쟁을 통해서 얻은 건강함이 훨씬 더 강합니다. 그 예가 의사들이 폐가 멀쩡한 사람에게 비씨지 주사를 넣어서 그 속에 결핵균을 집어넣는 이유는 가만 두면 순결하게 건강한데 그게 좋지 않으니까 거기에 균을 일부러 넣는 것입니다. 폐 일부를 먹게 만드는 겁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 속에서 싸워서 이기고 그 균을 전멸시켜서 완전히 치유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음 에는 다시 그런것이 들어와도 자신의 폐 속에 상처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강한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천성적으로 형통하고 아주 꽃동산 같은 가정에서 자라서 유리관 속에 온실관속에서 부족함 없이 살아서 원망하려야 원망할 이유가 없고 불평하려야 불평할 이유가 없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마음에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조건이 그럴 때만 그 인격이 발동하는 것이지 조건이 바뀌면 즉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순전함은 우리가 추구할 수 없거니와 신앙의 영역에서는 별로 가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 남자를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산속에서 짐승처럼 살다가 순결을 유지한 그 처녀의 순결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렇다는 겁니다. 죄와 유혹이 범람하고 그리고 사단의 공격과 계교가 수없이 이렇게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끊임없이 예수를 알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의 거룩함과 그의 순결함을 알고 그 속에서 끊임없는 유혹과 싸워서 이기며 순결함 삶을 영위하고 경건한 삶을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순결한 삶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상처를 딛고 우리는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는 사람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을 들어 주위를 보십시오. 여러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목자 잃은 양같이 고생하며 유리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오랜 세월 동안 목자의 곁을 떠났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강퍅하고 상처는 더 딱지가 않고 딱지에는 더 상처가 않고 피가 어우러지고 그리고 그것들은 더욱더 껍질과 같이 굳어져서 목자를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강퍅한 심령으로 변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외치는 소리도 때로는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이야기에도 그들의 마음을 일깨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돌로도 칼로도 불로도 녹일 수 없는 마음 예수의 사랑은 녹입니다. 예수의 참된 사랑은 그들의 마음을 녹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에 의에서 화목케 될 날을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들을 고치고 치료할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누가 평화를 만드는 자입니까? 누가 샬롬을 창조하는 자 입니까? 누가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한 자리로 돌이키고 그리고 사람들 속에서 미움과 원망으로 그렇게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끊임없는 쓴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것들을 그 독으로 물들이고 가는 곳마다 곧은 관계를 창출하는 대신 파괴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 살아가는 사람을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하게 바꾸는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냐는 것입니까?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화평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관계에서 샬롬을 경험한 사람들이 샬롬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쓰라린 상처를 치유 받아본 경험 있는 사람들은 더 크고 절망적인 상처를 부여안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갈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도구입니다.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미쳤던 그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내 인생은 정말 상처가 많았지만 그러나 어느 순간 생각할 때 예수의 사랑은 내가 받은 상처를 능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비로소 그 상처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한없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를 그렇게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오늘 한 구절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서 용서하셨습니까? 성경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어디서 용서하셨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에게 미치기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그리스도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성경은 말했는데 그 그리스도가 도대체 누구입니까? 어떤 그리스도입니까? 하늘의 영광을 받으신 그리스도입니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그리스도이십니까? 그늘에 쉬고 있는 그리스도이십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는 오늘 십자가에 못 박힌 골고다언덕의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저 용서하신 게 아니라 대가를 지불하고 고통스러운 비용을 드리고 우리를 용서하셨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돈 많은 사람들이 써서 던져주는 거짓수표가 아닙니다. 백지수표가 아닙니다. 용서는 깊은 희생과 그리고 아픔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 용서가 자꾸 자꾸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더욱 그 용서가 얼마나 쉬운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마지막 죽는 순간 에 예수님과 똑같은 기도를 하고 죽었습니다. ‘아버지여 주여 저희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리고 잤습니다. 예수님이 똑같은 기도를 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 스데반이 그렇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이 유대인들 앞에 설교를 하다가 돌을 맞아 죽는 그 순간에 그가 그 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그 기도를 십자가에서 비로소 하실 수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이 세상을 끊임없이 긴 세월동안을 그렇게 자신과 싸우며 용서를 연습했습니다. 스데반 말입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용서하고 사람들의 죄를 긍휼이 여기는 그 사람을 예수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벗어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돌로 침을 당하고 죽어나가게 만드실 때 그 때에 스데반은 평소의 자신의 삶을 온몸과 마음으로 고백 했던 것입니다.그것은 ’주여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진심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심판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속에 그들이 돌을 던지는 대도 그 안에 있는 상처받을 수 있는 연약함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의 감정이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극복되지 못한 상처 그것은 더 작은 상처들을 많이 낳습니다. 한번 극복된 상처는 상처받을 수 있을만한 많은 것들을 말하자면 사랑으로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용서하심에 있어서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대가로 지불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우리의죄를 향한 모든 미움을 그리스도에게 쏟아 부으시고 그 그리스도 예수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그 고난 속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그것을 우리들이 늘 기념하고 예수의 이름을 모든 이름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우리를 그 이름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 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높이 부르고 예수의 이름을 노래하고 찬송하는 것을 결코 시기하지 않으십니다. 질투하시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진노를 성취하시고 그리고 우리와 화목하셨습니다. 그 그리스도 예수를 주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완전하고 책임 있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로 하여금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게 하는 그런 진정한 사랑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자신과 같이 가치 없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그 크기에 비례합니다. 비할 데 없는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고 그 앞에 가치 없는 자신을 용서하시는 큰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난 사람들은 크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이 용서하고 상처받은 자들을 끌어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큰 사랑을 마주하길 소원해야 됩니다. 또한 성경은 오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실제적인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는 또 한편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그 용서의 진정한 사랑을 우리가 깊이 체함하고 만남으로 예수님처럼 용서하며 살수 있다는 사실을 간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자존심과 악한 성품과 포악한 마음과 이런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솟아납니다. 이것들과 더불어서 싸울 때 우리는 고통스러운 희생을 지불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꺼이 지불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희생을 치러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그리스도 희생 속에서 보는 사람들은 마땅히 우리를 용서하지 못하게 하는 그 끊임없이 우리에게 솟아나는 죄와 그 악한 성품들과 더불어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용서를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 분속에 더 큰 용서의 능력을 주실 것이고 또 예수의 놀라운 사랑을 여러분들 속에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