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용서의 기초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1-2上)
녹취자 : 김미현
음식도 먹다가 중간에 그치고 한참 기다렸다 먹으면 맛이 없는데 미움과 용서에 대해서 쭉 진행을 해오다가 아마 우리가 한 석주동안 쉰 것 같습니다. 이번에 한 이야기를 다 반복할 필요는 없겠으나 몇 가지는 언급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은 사람들이 악독과 노함과 분냄 같은 그런 육에 속한 성품을 버리고 그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고 또 용서해야 한다. 그 말씀이었습니다. 지난 시간부터 계속되고 있는 이야기는 마태복음에 이어서 용서가 그렇게 중요하고 미움이 그렇게 나쁜 것이라면 무엇이 그 우리로 하여금 미워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사랑에까지 나아가게 하는 기초가 되느냐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결론은 5장의 결론은 그것이었습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용서하라. 그러면서 5장 1절로 넘어오는데 ‘그러므로’ 성경에 나올 때 신약성경에서 특히 서신서에서 ‘그러므로’라는 말이 나오면 우리는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말하다가 그러므로인가?’ 그리고 ‘그러므로의 마지막 결구는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우리들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그러므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용서하라. 그러니까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재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했습니다. 오늘 분량으로 너무 많은 것 같지만 한번 더듬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미움과 용서에 관해서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떠나고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그리고 그 죄악 된 성품으로 가득 차있는 인간이 스스로 미워하는 자를 용서하고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 자기를 향하여 죄 지은 자를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일들을 인간 스스로 인간 그 안에서 그런 일들을 행할 수 있는 기초를 가지고 있다고 인간을 대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그런 놀라운 사랑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고 성경은 그렇게 보아주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하면 오늘 성경이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여기서 같이는 ‘답게’입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답게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사랑을 입은 자녀답게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즉, 미워하는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그리고 가슴에 깊은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을 그 죄를 용서하고 나아가서 사랑하는 이런 일들은 하나님을 본받음으로서 가능하지 자신의 성품을 깊이 들여다보고 그 속에서 어떤 선한 요소들에 대하여 그러한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적극적인 행위를 끌어내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거기에서는 참다운 사랑들이 미움을 용서하는 능력들이 솟아나오지를 않는다고 하는 것을 오늘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사람마다 자연적인 성품과 특질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작은 것조차도 참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꽤 커다란 것도 참을 수 있는 인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참는 것이 진정한 사랑과 용서의 한 요소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니, 됩니다. 되지만 그러나 참는 것 그 자체가 곧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용서나 혹은 사랑의 완성이나 미움을 버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연적인 성품 자체가 약간 프렌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확 털어놓고야 하는 성격입니다.
(예화) 불란서 사람과 영국 사람과 마차를 타고 이쪽에는 불란서 사람이 이쪽엔 영국 사람이 타고 마차를 타고 산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비가 와서 산이 다 뭉게져서 간신히 마차 하나가 지나갈 만큼 길이 남았는데 그만둘 것인가 계속 갈 것인가 하다가 결국은 계속 가기로 결정을 했습니다. 산비탈을 타고 가는데 바퀴가 굴러갈 때 마다 가장자리가 깨지면서 돌이 한없는 천길 만길 되는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창문 밖으로 내려다보니까 새파란 강물이 밑에 흐르는데 천길만길도 더 됩니다. 차가 굴러갔습니다. 그런데 영국 사람들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꼭 깨물고 참는 것입니다. 무서운 것입니다. 불란서 사람들은 길길이 뛰면서 이제 우리는 죽었다고 우는 놈, 울고불고 난리를 치고, 이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간신히 몇 시간 동안 사투 끝에 그 계곡을 지나고 주막에 이르렀습니다. 주막에 이르러서 술을 먹으면서 불란서 사람들은 다 잊어버렸습니다. 소리를 지르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노는 것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술도 안마시고 모두 방에 들어가서 드러누워서 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잉글랜드 기질과 프렌치 기질의 차이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기질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대단히 합리적입니다. 거기서 울고불고 소리쳐봐야 마차만 흔들리고 마차가 흔들리면 더욱더 위험하다는 생각에 눈을 지그시 감고 입술을 깨물면서 견디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랑이라는 것이 미움을 버리고 용서하고 그리고 인내라고 하는 것이 미움을 버리고 용서하는 이러한 사랑의 행위의 한 요소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곧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용서와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자연적인 특질을 보면 이런 프렌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어려운 일이 있으면 한 번에 울고불고 소리소리 지르고 털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은 상당히 성격이 낙천적이고 오랫동안 잘 삽니다. 그러나 잉글랜드 같은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참으면서 속으로 속으로 삭히는 사람들은 마음에 한이 많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상처가 많습니다. 꼭 참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는 안주었지만 그러나 자기가 상처를 받습니다. 이 본문이 끝나고 나서 상처가 어떻게 상처를 양산해 내는가 하는 그 문제를 이제 창세기에서 좀 다루어보려고 하는데 어쨌든지 간에 그렇게 다른 사람을 해는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속에 그런 인내하는 마음이 그 인내가 있지만 그 인내가 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미움과 아픔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준 것이 아니라 이 안에 그런 것들이 누적되어 있기 때문에 낙천적인 사람, 물론 귀신이 들어가던지 해서 사람이 휙 도는 것 이런 것은 틀리겠습니다만 일반적으로 우울증 이라던지 이런 영적인 현상이 아니고 정서적인 현상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프렌치 기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있긴 있지만 아주 확률이 낮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그런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속으로 속으로 삭히는 18세기 조선 시대의 말하자면 인종형의 사람들, 남자도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질병이 많이 옵니다. 무엇을 말하느냐하면 단순히 참는다고 하는 이것이 결국은 미움의 문제라든지 사랑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모든 치료를 가져오는 그런 궁극적인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렇게 많이 참고 덜 참고 하는 그런 특질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늘 인간의 그러한 인내심이라든지 무엇인가 폭발 할 듯한 자신의 분노를 억제하는 이러한 절제된 마음이 사랑과 미움을 버리는 것과 용서하는 것, 나아가서 사랑하는 것 이런 일들의 기초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본받으라. 그러니까 진정한 미움으로부터 자유로움, 진정한 사랑, 이것은 하나님을 본받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를 말하기를 사랑을 입은 자녀답게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닮으라고 말할 때 성경은 우선,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계시를 해주고 그리고 그 성품을 본받으라고 우리를 계속 촉구하고 불러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본받기를 원하는 신의 성품과 그리고 이 세상 속에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려고 하는 죄된 우리의 육신의 성품은 항상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는 것이 상당한 고통과 아픔을 말하자면 동반하는 것입니다.
(예화) 20여 년 전에 친구가 하나 죽었습니다. 수양회 가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물가로 수양회 가는 것을 절대 반대합니다. 제가 열린교회 있는 한은 경치 좋은 물가가 있는데 수양회 갈 가능성은 없습니다. 갈 필요가 없습니다. 가서 죽었습니다. 그것도 학생으로 좇아가서 죽은 것이 아니라 선생으로 좇아가서 수영 선수이니까 강이 하도 우스우니까 배 뒤를 헤엄치며 따라갔습니다. 수영을 못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쇼크로 죽었습니다.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말도 못합니다. 3대 독자입니다. 꼭 그런 사람이 죽습니다. 우리같이 아들을 바케스로 갖다 버릴 정도로 흔한 집안에서는 삼태기를 치워버릴 그런 집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3대독자가 족집게처럼 꼭 집힙니다. 죽었습니다. 아버지가 장로님이고 어머님이 권사님이신데 교회를 안 나옵니다. 하나님이 데려가셨는데 어린 나이에 우리 친구들 중에 제일 먼저 가서 양평인가 거기 가서 비석을 하나 세웠습니다. 제가 비문을 하나 썼습니다. 내 글씨체로 파서 그 비석 하는 아저씨 얘기가 그냥 갖다 세우면 보기 싫으니 너희가 돈이 없으니까 돈 주면 비싼 것인데 너희들이 이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시는데 웅툴 뭉툴하게 깎은 돌멩이를 정으로 쪼아대니까 기계로 가니까 평편해집니다. 빨랫돌같이 됩니다. 숫돌을 몇 개를 주더니 하루 종일 문지르라고 합니다. 거울같이 된다고 합니다.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비는 펑펑 쏟아지는데 지금 탤런트 하고 있는 친구와 둘이 앉아서 비를 주룩주룩 맞으면서 점심도 굶어가면서 그것이 맨질맨질 해지면 무엇 합니까?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나 그 때 믿었으면 그런 허무한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침을 손에다 발라가면서 문질렀습니다. 그 친구 얘기하다 문지르다 문지르다 거울 같이 됩니다. 돌이 거울같이 되었습니다. 반짝반짝하게 되었습니다. 산에서 뜯어온 그 바위를 정으로 두드리고 깨서 톱으로 잘라서 다이나마이트로 폭발을 시켜서 돌 톱으로 잘라서 그래서 그것을 다시 또 다듬어서 정으로 두들기고 수없는 연장으로 두드려서 그렇게 하니까 다음에는 반들반들한 하얀 비석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정에 맞고 두들겨지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되지 않습니다. 늘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들은 5년이나 10년 밖에 신앙생활 안했는데도 참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는데 20년, 30년, 50년을 신앙생활해도 영 비슷한 향기조차 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연조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자기의 육에 속한 더러운 성품과 죄를 좇아가는 육체에 속한 성품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정을 맞고 진리의 숯돌에 갈리워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끌로 다듬어 져서 그래서 반들반들하게 되어 지느냐 그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다른 모든 일에 있어서 그러하듯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고 그들을 향해서 오래 참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너희들은 너희 자신 안에 있는 인격에 호소하지 말고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그 앞에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답게’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누구든지 쉽게 사는 것 좋아합니다. 여러분, 누가 와서 여러분들에게 칼을 가지고 오고 톱을 가져와서 ‘넌 코가 너무 나왔으니 베어내자. 귀가 너무 쳐졌으니 잘라내자. 어깨가 너무 튀어나왔으니 끌로 깎아 내자.’고 말할 때 여러분들이 기꺼이 그렇게 해달라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몸을 잘라 내거나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쉬울지도 모릅니다. 성형수술 받는 사람들 보면 용기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뼈하나 높이는데 1000몇 백 만원 들어간다고 합니다. 중형차 한 대 값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것을 엉덩이에서 뼈를 깎아다가 붙이고 이렇게 하고 턱을 잘라서 가운데에 무슨 물렁뼈를 집어넣어서 턱을 위로 올라온 턱은 아래로 내리고.... 마음대로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프고 힘들다고 합니다. 돈 갖다 주고도 잘합니다. 육체의 그런 것은 아무리 통증을 느껴도 수술하고 나서 1~2주 지나서 통증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1~2주 울고불고 한다고 해서 성품이 바뀝니까? 어림없습니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예화) 보십시오. 소방서에서 불을 끄기 위해서 물을 뿌립니다. 큰 트럭입니다. 4~5톤 될 것입니다. 1분 30초 만에 그 물이 다 없어진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세게 나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뿌리면 3, 4, 5층까지 올라갑니다. 사람이 맞으면 장 파열 되어서 죽습니다. 그것을 바위에 쏘아대면 그렇게 센 물줄기도 바위에 갖다 쏘아대도 바위는 표적도 안 납니다. 그러나 똑똑똑 떨어지는 이 물이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소방호스로 갈겨도 살인적인 물줄기의 힘을 퍼부어도 변하지 않는 바위가 구멍을 내어서 뚫어집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사라고 하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한순간에 우리에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인격에 관련된 것, 이런 것들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답게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기대는 당신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당신을 닮은 자녀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것을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낳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도 우리가 낳게 되었을 때 우리는 두 번째 출생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다른 아버지가 계십니다. 다른 부모님이 계십니다. 그분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분을 본받고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우리들이 힘써서 해야 할 일들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의 문제를 다시 얘기하기에 앞서서 기초적인 전제를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사랑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진정으로 미워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끊임없이 배워도 그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관용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본받아야 할 자녀들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는 예수를 믿었지만 그러나 육신은 이 세상 속에 그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두 개의 윤리 속에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윤리와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육신에 속해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본받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하고 있는 천국의 윤리를 따라서 살 수 있는 힘을 우리들이 잃어버리게 될 때 우리는 아주 쉽게 그것에 대한 의무를 벗어버리고 땅에 있는 의무만을 취하면서 살아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어떤 윤리가 통용되고 있습니까? 자기에게 커다란 손해를 주고 회복될 수 없는 아픔을 안겨 준 사람에 대해서 복수하지 않고 마음으로 미워하고 참고만 있어도 그 사람은 이 땅에서는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사람들도 그렇게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성경은 이 세상에서 그렇게 우리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향하여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 어떤 윤리가 통용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성경은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의 관심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성경이 기억하고자 하는 바는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었은즉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하느니라. 너희에게는 하나님을 본받을 힘이 있고 너희에게는 하나님을 본받을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오직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아직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시는 그 위대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셨으나 그러나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곧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며 사는 것입니다. 저는 가끔 나는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솥뚜껑 열듯이 열어보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하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 속에 무엇이 들어있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이 미움으로부터 용서, 참된 사랑으로 말미암는 자유를 말하면서 사랑을 입은 자녀임을 우리에게 기억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의 출발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인자하심이었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그것을 깊이 깨달을 때 그 때에 우리는 비로소 용서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정리해 봅시다.
세상에서는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 세상에서는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을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은혜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오직 진심으로 용서할 의무밖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이렇게 세상과는 전혀 다른 윤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에서는 진정으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행하지 않아도 되는 그 어떤 은혜를 베푸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용서할 의무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중대한 반역인 것입니다. 왜 이런 놀라운 의무가 주어졌습니까? 그가 세상 사람들이 받지 못한 놀라운 특권과 은혜를 이미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무엇이 주어졌습니까? 값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들에게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을 입은 자녀답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입었으니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오셔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그 모든 허물과 죄로부터 구해 주시는 이런 죄의 용서들을 경험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흥이 일어날 때 이런 놀라운 용서가 보편화되어지는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부흥을 통해서 사람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죄에 대한 심오한 각성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래서 신앙부흥이 일어날 때는 언제나 요한복음 3:16이 사람들에게 새롭게 인식되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내가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내 마음에 있을 때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들이 얼마든지 가능해 졌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입은 자녀들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복음의 요청은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행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사랑을 하고 미워하지 않고 용서하려고 애를 써도 다른 모든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들이 그러하듯이 하려고 애를 쓰고 마음을 먹어도 잘 되지 않을 적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틀림없는 것입니다.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사실은 이미 우리에게 명제로 주어졌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을 해도 우리들이 항상 하나님이 만족하실만한 기도생활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께 완전히 만족을 드릴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깊은 기도의 교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충분히 교통하고 세상을 이길 정도로 충만하게 하나님과 교제하고 어떠한 시간적인 어려움과 환경적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담대히 기도하며 충만하게 기도의 영을 유지하면서 살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잘못된 일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언젠가 내가 내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들에 대한 기억들은 뚜렷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내게 죄지은 자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그를 용서해 주지 못한 사실에 대해서 가책을 받고 회개하고 그것이 항상 우리의 의식 속에 살아서 우리의 양심의 가책이 되고 우리의 회개의 기도의 제목이 되는 그러한 영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러므로 오히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용서했다고는 하지만 용서한 것이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의가 되어서 정말 진정한 용서를 위해서는 위로부터 끊임없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게 만드는 능력이 위로부터 공급되지 아니하면 우리가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이렇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는 일들을 위해서도 하나님께서 부터 위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리듯이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 없이는 그런 일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한 요인이 더욱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다시 그리스도 예수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이제는 방식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 행하라.’ 여러분 저는 생각합니다.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라고 하는 이 구절만 없었더라면 우리가 얼마나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이 말만 있었으면 우리는 상당히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엄격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용서에 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못 박힌 그리스도 예수 앞에 자신이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에게조차 먼저 화해와 용서의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이러한 사랑을 보이셨을 뿐 아니라 또한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한 것이냐 아니면 몇 사람들에게만 유효한 것인가를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의 의미가 주는 교리는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베푸셨습니다. 즉, 이런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 나오십시오. 이 찬송가를 드릴 테니 가정예배에 가지고 가서 쓰십시오. 주었습니다. 여러분 중 누가 누구에게 누구를 지명하고 드린 것이 아닌, 제가 이렇게 말했을 때 여러분 모두는 기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여러분 한 사람이 걸어 나왔습니다. 그 한사람이 유효하게 이 찬송가를 가지고 갔습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미쳤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향해 주께서 마지막 하셨던 기도가 무엇인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버지여 저희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저희는 저희가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함이니이다.’ 고백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들이 행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조차도 예수 그리스도는 용서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우리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용서하신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가치 없는 사람들에게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용서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이 사람을 구원하고 내가 이를 구원하고 나면 구원한 댓가를 내가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산술적인 그러한 가치를 가지고 인생들을 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평생을 강도짓하고 강도를 하고 살인을 하고 마지막엔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다가 죽어가는 강도 중 하나를 구원하심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얻으실 수 있는 영광과 유익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무것도 이 세상에 없었습니다. 그는 곧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오늘 나와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그는 일평생 그리스도를 기쁘게 한 적도 없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구원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서 그를 용서하신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런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찾아오셔서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용서의 방법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여러분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고 아픔의 씨앗과 미움의 뿌리를 남겨 놓은 사람들을 여러분들이 용서하고자 할 때 무엇을 계산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용서하신 것과 같은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를 믿고 오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것에 대한 의무로 여러분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런 의무를 주신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값없이 구원하신 그리고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는 자유라.’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옵나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 가서 그가 자유케 하셨으니 종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의무를 가지고는, 의무심 하나를 가지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새 계명을 이행하며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정말 불가능한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것에 의해서 움직이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의무가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무 그 자체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를 닮는 삶을 만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결국은 하나님을 본받기 위해서는 우리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인가 하는 것이 과거의 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의 어떠한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입고 지금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우리가 끊임없이 현실적으로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은혜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내가 무가치하고 여름날에 시골의 외양간에 들어가서 덮여진 가마떼기를 확 걷고 나면 속에서 기어 다니는 그 수많은 벌레들 기억나십니까? 그런 벌레들 중에 하나와 같이 하나님에게 혐오감과 그리고 한없는 말하자면 불쾌한 마음밖에 안겨줄 수 없었던 그런 인생들을 그것이 바로 내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오늘 그런 인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고 그 이름을 찬송하고 예수를 위해 살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인가 하는 것을 내가 오늘 매일 현재적으로 은혜 속에서 체험하지 않으면 무슨 어떻게 우리의 인격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일흔번의 일곱 번씩 죄를 짓고 용서해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피해보상을 요구하지 않고 용서해 줄 수 있는 이런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하는 것들이 우리 속에서 늘 체험되어지고 경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쉬운 말로 옛날 조상들은 은혜 충만한 생활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은혜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냥 좋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랑, 가치 없는 죄인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이런 소망이 없는 나를 향해 하나님께서 기대를 걸고 우리를 통해 영광 받으실 것이라고 믿어주시는 것들에 대한 한없는 감사,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서 솟아날 때, 우리가 맑은 영혼으로 이 세상의 고통 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나 하나가 구원을 받고 나 하나가 예수님 앞에 기도하고 그리고 살다가 세상의 죄에 물들지 않고 살려고 애쓰고 몸부림치다가 교회를 섬기다가 그냥 죽도록 그렇게 만들어진 인생들이 아닙니다. 여러분,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러분들은 가슴 속에 박힌 어떤 상처의 못 같은 것들을 인해서 어떤 때는 정말 성령도 못하시는구나 하는 이런 망발스러운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가슴 속에 있는 이 깊은 아픔과 그런 상처들을 예수를 믿고 매일 와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가는 이런 사람들도 아픈 상처와 그 다음에 뼈아픈 그런 아픔들을 이 가슴 속에 안고 살아갑니다. 그것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또 울고 또 기도하고 또 울고 기도하고 말씀을 늘 들으면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으로 다시 또 다른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상처와 상처를 만들어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부인이 저를 만나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아버지로 말미암아서 상처를 많이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나빠서 상처를 받은 것은 아니고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무엇이냐 하면 너무나 너무나 아버지가 필요하던 시기에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심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주었다는 것입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모두들 자기 형제 자매들이 아들 딸들이 어린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커서 돌아가셔도 상처가 되는데 어려서 돌아가시니 상처가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상처는 어렸을 때 생깁니다. 시집 장가 다 갔는데 환갑 먹은 엄마 아빠가 싸워서 이혼한다 그러면 상처라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부모 때문에 속 썩는다고 합니다. 속이 썩지 상처가 될 것은 없습니다. 이미 가정을 이루고 사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부모들이 산다 못산다 티격태격하는 때가 애들 초등학교, 중학교 그 때 아니면 더 어렸을 때 가능하지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꼭 아빠가 필요한데 아빠가 먼저 떠남으로 ‘아빠는 좋으신 분이었지만 큰 잘못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너무나 아빠를 의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당신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는데 그것이 자기에게 너무나 커다란 영향을 주어서 그것이 자식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데 그 영향을 자식들이 받는 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드느냐 하면 이 아버지가 남겨놓은 상처가 내 대에는 물론 해결이 안 되고 자식들에 대해서도 해결이 안 되고 내 아들, 지금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 딸들이 시집 장가를 가서 그 다음 아이를 낳으면 비로소 치료가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런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다가가서 가슴에 박힌 그 못과 상처들을 알려주고 그것들을 뽑아내어주는 이런 일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평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하신 이 말씀은 우리들이 매우 깊이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표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자녀의 표가 무엇인지를 세상에 밝히 드러내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 이외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샬롬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 예수가 어떠한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하셨고 하나님이 어떠한 방식으로 우리를 긍휼이 여기셨는지를 깊이 우리가 깨닫고 체험하는 이런 역사 그리고 이러한 현실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 속에서 충족하게 누리며 살아가지 아니하면 우리는 미워하기를 좋아하고 원망하고 상처를 끌어안고도 용서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러한 우리 자신의 강퍅한 아집과 자아의 경향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자연적인 인간의 특질로서 이런 것들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인간들이 대부분 망가진 채로 포기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여러분 혹시 그것 보셨습니까? 저는 서울 살면서는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시골에 가끔 가면 논 옆이나 그런데서 개울 근처나 이런데서 샘이 솟는 것을 보셨습니까? 정말 재미있습니다. 모래가 가득 있는 곳에서 샘이 퐁퐁 솟아오릅니다. 모래를 막 흔들면서 그러면서 분수처럼 치솟는 것은 아니지만 그저 1초 똑딱할 때마다 한 컵이나 반 컵씩 퐁퐁 솟아오릅니다. 본적 있으십니까? 샘솟는 기쁨 이해가 가십니까? 퐁퐁퐁퐁 솟습니다. 그래서 아주 거기서 샘이 나와서 그 근처의 모래에는 흙이 없습니다. 깨끗이 씻어서 정말 그 모래는 먹어도 될 정도로 깨끗합니다. 계속 솟아오릅니다. 그러다가 우리들이 가서 막아버리자 하고 발길로 차고 개구지게 뒤흔들어 놓으면 흙탕물이 벌겋게 됩니다. 그런데 한참 놀다 다시 와보면 다시 하얗게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속에서 솟아나오는 그 샘물, 그것이 말하자면 있으니까 그 크고 넓은데 오늘은 와서 진흙탕을 집어넣고 구멍을 밟고 막대기로 쑤시고 난리를 쳐도 그 다음날 다시 놀러 가보면 다시 그 샘은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나고 있습니다. 솟아나온 곳은 작은 구멍인데 커다란 웅덩이를 맑게 맑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하나님의 기대입니다.
가만히 보면 미움이라고 하는 것, 용서하지 못하는 감정이라고 하는 것들이 수없이 얽혀있습니다. 누구 하나도 양보 안하고 잡아당깁니다. 누구 하나가 풀면 수많은 사람들 속에 샬롬을 창출해 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샘이 그 안에서 솟아나오는 어떤 그 새로운 탁한 것을 정결케 하는 생명의 근원, 이런 것들을 소유하고 있어야지만 샘물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서 이렇게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 상처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용서해주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서 솟아나오는 생명력과 그리고 샘물들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그렇게 살지를 않고 ‘오늘 이야기한 이 이야기를 우리 남편이 듣고 나를 좀 이렇게 솟아나오는 생명력으로 나를 용서해주고 용납해 주었으면, 우리 자녀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이런 놀라운 솟아나는 생명력으로 나를 용서하고 용납해 주었으면 우리 부모가 되었으면’ 우리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를 포기하십시오. 성경을 보십시오. 어느 곳에서도 사람들이 너희를 용서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옳다고 말하지 않고 수동태가 아니라 모두 우리를 용서의 주체로 불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보십시오. 그렇게 본받고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랑이 얼마나 놀랍고 그리고 그 사랑이 아니면 오늘도 우리를 이 세상 속에서 살아나가게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이러한 영혼의 생명력들을 소유하여야지만 우리가 비로소 용서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소유하게 될 때 그가 하는 일들은 정말 천사도 흠모할만한 위대한 일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자기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함으로서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얽매인 것이 없는 사람, 그 사람은 진정으로 자유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정말 한 인간이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하고 죽을 수 있는지 모릅니다.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전혀 희망이 없고 그리고 몸부림치고 아무리 애써 봐도 극복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 인생의 그 한계, 소위 얘기하는 인간의 절망적인 빙점에서 구출 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이런 위대한 일들이 한 사람이 전해주는 예수의 놀라운 사랑과 그의 인격 안에서 경험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참된 용서를 체험함으로 인생이 놀랍게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용서의 이야기는 이제 다 지나가고 5장은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사랑, 사랑, 사랑, 사랑 계속해서 사랑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해 주는 것, 그 용서의 완성은 복수의 포기가 아니라 그 관계를 가지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복수를 포기하는 것은 미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그것은 마음속으로 타오르는 분노를 행동으로 표현해서 그에게 고통을 주지 않겠다는 다짐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방법을 보십시오. 죄를 많이 지은 우리를 향해서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 알았다. 더 이상 얘기하지 마라. 이제 그만해 끝났어. 나는 더 이상 너희들을 진노로 심판하지 않겠어. 그러나 더 이상 너도 나를 부르지 마. 나의 최고의 실수는 너희와 관계를 맺은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용서하시고 그리고 그 용서는 즉각적으로 우리를 당신과의 관계로 불러들이셔서 사랑의 끈으로 우리를 묶으셨습니다. 그리고 관계를 갖게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 관계 그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미워하는 것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또 다른 표현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용서한다는 미명하에 관계를 포기하는 것은 복수를 하는 또 다른 미움의 한 표현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누군가와의 관계를 끊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데려가게 하실 수 있습니다. 혹은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수 있습니다. 혹은 아무리 가까이 관계를 가지려고 해도 관계를 가질 수 없는 상황으로 두 사람을 떼어놓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진정한 용서는 관계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관계를 가지면서 사랑으로 완성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들이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다고 칩시다. 그 죄의식 속에서 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 사람이 와서 “이제는 내가 네가 나에게 지은 죄를 용서해 주겠다. 그러니까 자유로워 져라. 그 대신 너와 내가 만난 것은 인생 최대의 비극이었다. 이제 이것으로서 우리와의 관계를 정리한다. 내가 진심으로 너를 용서한다. 어떤 보복의 두려움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라.” 그리고 떠났습니다. 자유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정말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까? 자녀들이 부모와 같이 생활하다가 잘못했습니다. 부모 하는 말이 “마지막, 내 이번에는 말 안하겠어. 그러지마.” 여러분, 이렇게 참된 용서와 사랑이라고 하는 것, 관계라고 하는 것, 이 세 단어가 따로 따로 돌아다니며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은 그래서 오늘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극악한 죄인이라도 용서하시고 용서하셨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복수를 포기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고 그리고 당신을 통해서 타락하기 이전의 이 세상의 인간이 하나님과 가졌던 관계로 우리를 돌려놓고 싶으셨습니다. 그 관계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것들을 여러분, 무엇을 통해서 여러분들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하는 확신을 느낄 수 있습니까? 회개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회개를 안?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이 되게 됩니다. 그렇습니까? 아닙니까? 그렇게 관계가 단절되게 될 때에 우리가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무엇을 통해서 우리들은 ‘아, 주님이 내 죄를 용서하셨구나.’ 무엇을 통해서 확신하게 됩니까? 무엇을 통해 확신을 하게 됩니까? 믿음? 무엇을 통해 확신을 갖게 됩니까? 여러분, 우리들이 죄를 지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러다 내가 하나님 앞에 혼나지.’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범죄 할 때 우리 속에서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러다 혼나지 하는 책망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회개했습니다. 깊이 회개하고 났는데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라고 하는 확신을 어디에서 얻게 됩니까? 맞으면 맞다고 하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형벌 받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느낌을 받았을 때 우리가 용서함을 받았다고 그렇게 확신을 하게 됩니까? 아니면 형벌 그까짓거 받아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오늘 내가 기도하는 가운데 찾아오셔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이 확신 때문에 우리가 우리를 용서하신 것을 확인하게 됩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내가 죄를 지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를 깊이 사랑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느낌이 들면 내가 이전에 지은 죄 가운데 있을 때에는 보복이 두려웠는데 이제는 전에 지은 나의 죄를 죽음으로 속죄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이 얘기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너희를 용서하신 그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죄 사함을 받았고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를 용서하셨다고 하는 확신을 그리스도가 내가 이제 너희를 더 이상 벌주지 않겠다.’라는 믿음을 주실 때 우리에게 죄 사함의 확신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끊어진 관계를 다시 이으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부으시고 그 이전에 죄 짓기 전에 우리에게 부어주셨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의 증거들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우리의 마음이 다시 예수를 향한 사랑의 증거로 우리 속에서 타오르게 될 때에 그 때 우리들은 주께서 사랑해 주시는 사랑을 통해서 사죄의 확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관계가 다시 이어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하고 계시다고 하는 확신이 우리를 주장하게 될 때 우리는 이전에 지은 죄 때문에 형벌을 받아도 할렐루야 할 수 있을 정도의 담대함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가난하게 만듭니까?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를 용서하신 증거,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나를 용서하신 이 놀라우신 사랑이 나를 이렇게 놀라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실행하셔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그렇게 참된 죄사함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참된 죄사함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패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 실패한 베드로에게 네가 이전에는 나에게 많이 범죄하고, 네가 나를 저주하며 욕했으니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사람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아들 목전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욕하고 저주하며 능욕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베드로야, 네가 나를 그렇게 저주하며 욕하고 나를 버리고 도망갔지만 나는 너에게 복수하지 않겠다. 벌주지 않겠다.” 그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다. 또 베드로도 놀라운 것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갔을 때 베드로가 원했던 답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가 가지고 있는 죄의식을 덜어주고 그리고 네가 나에게 대하여 행한 그 불충한 행위에 대해서 보복하지 않겠다.’라고 하는 말하자면 그러한 약조를 받아내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복음적인 접근이었고 복음적인 대답이었습니다. 주님이 물으셨습니다. “Do you love me?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결국은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결국은 똑같은 질문입니다.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나이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베드로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그런 질문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전혀 사랑하지도 않는데 형제가 있는데 자매를 전혀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좋아하지도 않고 전혀 그 사람을 꿈에도 좋아해본 경험도 없습니다. 그런데 더벅더벅 걸어가서 “자매, 나를 사랑하십니까?” 묻는다면 정신병자입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다가가서 “당신 나 사랑하십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그 사람은 이미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논법으로 베드로에게 다가오셔서 “Do you love me?,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물으실 때 베드로는 두려움에 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 질문을 통해 계시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녹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베드로의 관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었고 문제는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의 태도를 어떻게 결단하는가에 달려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주신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상처를 준 관계는 죽어도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끊을 수 있는 관계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다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몇 번 얘기했지만 지루하지 않은 얘기입니다.
(예화)한번은 내 옆에 친구 목사님 차를 탔는데 초보운전이니까 후진을 하다가 걸어가는 사람인데 엉덩이를 슬쩍 건드렸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좀 건드려도 괜찮겠습니다. 엉덩이에 살이 워낙 많아서 살짝 툭 건드렸습니다. 그리고 이제 차를 세우고 창문을 여는데 이 사람이 걸어왔습니다. 미안하다고 백배사죄 했습니다. 그랬더니 점잖게 생긴 사람 입에서 설교시간이니까 되풀이를 못하겠습니다. 쏟아져 나오는데 똥물 같은 욕이 쉬지 않고 3분 동안 쏟아져 나옵니다. 이 목사님이 상처를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전에도 모르는 사람이었고 운전하고 큰길 나가면 다시 만날 사람도 아닙니다. 상처 안 받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대부분 우리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은 우리 인생에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관계를 포기한다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자기기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그런 식으로 용서하지 않았던 것을 우리는 상기해야 합니다. 소망 없는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용서하셨습니다. 용서하셨다고 하는 얘기는 오늘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 범죄와는 상관이 없는 이전보다 더 뜨거운 사랑으로 그 관계를 붙들고 지속하며 그 사랑을 퍼붓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늘도 전할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차를 타고 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아, 얼마나 버거운 일인가.’ 맞습니다. 설교하는 저 자신도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살지 못한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떻게 합니까?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을 어떻게 합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이 계명을 모두 완성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우리는 고뇌하며 이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고민이 살아있는 한 여러분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닮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민이 더 깊어져서 마지막에는 진주 살 속에 박힌 살이나 유리조각들이 진주를 잉태하게 되는 날이 이르는 것처럼 상처가 깊어질 그 때에 이미 여러분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모습을 본받는 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이런 놀라운 사랑으로 초대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난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용서의 완성을 사랑에서 보여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끊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한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를 안고 몇 십 년을 살아가다가 예수를 믿고 설교를 듣고 어느 날 이것이 얼마나 쓴 뿌리인가를 깨닫고 용서를 했습니다. 그런데 관계는 더 이상 갖고 싶지 않습니다. 관계를 가지면 또 다른 상처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한 일이냐는 것입니다. 매일 쳐다보는데 어떻게 가능합니까? 시집 장가가서 살아도 매 절기 때마다 만나야 하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가능하지 않지 않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말하자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사랑에 의해서 완성되고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오늘 말하기를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용서하고 또 상처를 제거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살아가는 것 그 자체를 사랑가운데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상처를 주고받고 용서하고 그러는 문제가 아니라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범사를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다 키우고 뿌리를 자라게 한 다음에 그것들을 뽑아내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이런 불행한 인생을 살지 않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그 충만한 용서와 사랑의 정신 속에서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샬롬을 창조해 나가는 방법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슴 속에 도처에 나있는 수없는 가시나무, 그리고 그 가시나무에 찔려서 그 가시나무가 자라서 다른 어떤 하나님의 진리의 체계나 아니면 죄인들을 향한 긍휼히 여기는 연민의 마음이 자리할 곳조차 없어져 버린 황폐하고 삭막한 그곳에 새들도 날아와서 찔리고 도망가는 이런 황폐한 가슴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 그러다가 상처를 남기고 후에 그것을 씻고 용서해주려고 하는 이러한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은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아 상처받지 않도록 범사에 온전한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가 그리스도 예수 가운데 있는 사랑가운데서 여러분의 입을 통해서 나오고 눈길 하나, 시선 하나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 가운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뒤편에 넘어가보면 음란한 것이나 그 더러운 말이나 허탄한 것, 농담하는 쓸데없는 희롱의 말, 농담, 이런 쓸데없는 말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의 통제를 받지 못하고 쏟아져 나옴으로 말미암아 그 자체는 큰 잘못이 아닌데 그것이 많은 사람 가운데 상처와 고통을 주고 더 많은 용서와 사랑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오늘 사도는 놀라운 통찰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들은 토해내는 수많은 말, 그리고 짓는 수많은 표정들 그리고 묵묵히 행하는 수많은 행동들이 전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랑의 통제를 받지 못하고 행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가 하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깊이 준비하고 결단해서 어느 한 순간에 한 번 보여주고 다시 통장 속으로 집어넣는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우리 안에 있고 그 사랑의 샘물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그 샘물을 통해서 말하고 행하고 듣고 표정을 짓고 행동하고 이러므로 말미암아서 하나님 안에서 그 관계를 끊지 못하고 살아갈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그러한 것들을 모두 제거한 가운데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행하고 보여주는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상처를 예방하는 최고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이 말합니다. 너희도 사랑가운데서 행하라는 말의 뜻이 엄청나게 많겠습니다만 그 중의 하나는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거나 혹은 내적으로 충만하지 못하거나 혹은 마음속에 심한 불쾌감이나 고통스러운 일이 있거나 혹은 역경 속에 있거나 무지함 가운데 있거나 혹은 커다란 곤란과 환란이 너무나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혀서 우리가 영적으로 말하자면 탈진한 상태에 있을 때 그 때에 우리는 언어와 행동과 모든 것을 통해서 그 속에 죄의 독소적인 요소를 그 속에 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말 자체는 문제가 안 됩니다. “밥 먹었어? 언니?” 그리고 물어봤는데 “알거 없어.” 대답했습니다. “말하고 싶지 않아.” 적당한 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사람들이 상처를 받는 것을 보면 아주 작은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가 사랑 속에 흐르고 있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왔을 경우에는 전혀 상처받지 않을 그 말들로 사람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우리 속에서 말이나 행위나 이런 것들이 쏟아져 나올 때 우리를 우리의 성품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감싸고 있으면 그것들이 밖으로 튀어 나올 때 사랑을 통해서 독소적인 요소들이 제거가 되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상처가 안 됩니다.
(예화) 옛날에 우리 교회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분에게 ??도 많이 받고 사랑도 많이 받았습니다. 한번은 그랬습니다. 우리 집사람 보고 “이명희 선생, 넌 어찌 그렇게 배짝 마르냐?”, 우리 집사람 하는 얘기가 “우리 김전도사는 제가 살이 자꾸 찐다고 걱정을 하는데요?” 목사님이 엉겹결에 “미친놈.” 사람들도 있는데 옆에 그랬습니다. “미친놈.” 저는 전혀 상처 되지 않았습니다. 그 할아버지가 나를 정말 미쳤다고 생각했다면 그 교회 교역자로 썼을 리가 있습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충분히 아이들을 사랑하니까 아이들을 교회에 와서 작대기로 두드려 패도 그것이 은혜가 됩니다.
사랑이 있으니까 행동이나 말이 그 사랑을 통해서 독소적인 요소가 다 빠져나와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니까 아픔이나 고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 자체를 띄어서 옮기면 세상의 상식이하입니다. 목사가 목사 입에서 자기네 교회 전도사에게 교인들이 듣는 앞에서 미친놈 그럴 수 있느냐 이것입니다. 내가 만약에 우리 교회 교역자들에게 그랬더라면 큰일 날 것입니다.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 들었습니다. 비슷한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전혀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전혀 상처가 되지 않는 이유는 사랑이 있으니까 그 사랑이 독소적인 요소를 제하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쓸데없는 농담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희롱하는 말, 그리고 음란한 말, 그런 행위를 실제로 하지 않을지라도 더러운 말, 이런 것들은 전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통제를 받으며 쏟아져 나오지 못한 모든 말들은 이 속에 진정한 악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상처와 분쟁과 고통과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상처를 낳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자라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령을 황폐한 밭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룩해져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룩해져가는 것에 있어서 최대의 난관은 우리에게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고 가치 없는 자들을 사해주며 그리고 우리가 더 이상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진심으로 용서하고 그들과 관계를 계속하고 그 관계를 사랑으로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이런 일들에 있어서 the initiative 우리들이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일들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높고 높은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들로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위해서 우리는 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은혜와 충만한 사랑의 부피와 깊이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들을 늘 깨닫고 체험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상처가 치유될 뿐만 아니라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박힌 상처의 못을 빼어 자유케 해줄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일들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녀들 이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