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륜이 있는 복음
(2017년 장년부 온가족 여름 수련회 저녁)
설교기간|2017년 08월 13일 - 8월 20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7년 12월 12일
목 차
1. 사랑이 풍성해짐(빌 1:8-9) 2017.08.13.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 집회 7
2. 목양받게 하심(빌 1:10) 2017.08.14.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 집회 22
3. 복음의 경륜을 이루심(빌 1:10) 2017.08.15. 장년부 여름수련회 저녁 집회 32
4. 물은 피보다 진하다(빌 1:11) 2017.08.20. 주일오전예배 46
경륜이 있는 복음 1 2017. 8. 13 (여름 수련회 첫째날)
< 사랑이 풍성해짐 >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 1:8-9)
I. 본문해설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빌립보교회를 생각할 때 감사가 넘쳤음
그의 기도를 통해 구원의 신적 경륜을 봄
복음과 구원은 거저 주어지지만 계획이 있음
그 계획을 알며 사는 것이 기독교의 인생관임
II. 경륜이 있는 복음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이 경륜을 통해 드러남
경륜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그 펼쳐짐
감춰진 경륜과 드러난 경륜의 관계
창조 경륜이 구원 경륜을 통해 완성됨
인간을 참여하게 하셔서 경륜을 이뤄 가심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
타락한 인류의 구원과 교회, 그리고 성화
그 신적 경륜의 빛 아래서 우리의 인생을 봄
“내가 기도하노라”(9절) 주님의 소원을 제시함
III. 사랑을 풍성케 함
“너희 사랑” 아가페 사랑에 반응한 사랑
위대한 경륜은 아가페 사랑에서 시작함
그 경륜의 전개에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참여함
교회의 최고 사명: 주를 사랑하게 함
모든 목양의 목표는 주를 사랑하는 것
전도: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 자를 사랑하게 함
목양: 조금 사랑하는 자를 크게 사랑하도록 돌봄
IV. 사랑이 풍성해지는 길
복음을 통해 아가페 사랑을 알고 반응한 사랑
불신자에게 없는 사랑을 신자에게 주심
그 사랑은 소멸하지 않지만 상태는 가변적임
성화는 하나님께 대한 순전한 사랑의 성장임
인격 안에서 그 사랑이 풍성해져야 함
A. 지식과 총명 안에서
- “지식과 모든 총명 안에서...”(9)
1. 지식(epignosis)
“사물에 관한 온전한 앎”을 의미함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이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아래 통합된 지식
이 지식의 증진과 함께 사랑은 풍성해짐
a. 성경을 통해서 깨달음: 진리
b. 성령의 역사를 힘입음: 조명+감화
c. 지성의 탐구를 추구함: 친밀
- 이는 인격적 경험으로 통합된 지식
- 이 지식의 증진으로써 사랑이 풍성해짐
2. 총명(aisthesis)
“깨닫다” aisthanomai에서 유래
다른 판본에서는 noesis로 표기함
“인식, 이해, 판단” 실천적인 이해
행동, 환경에 대한 이해와 말의 분별
지식-이성, 총명-판단에 관여함
“모든 총명” 범위 아닌 깊이 (J. Calvin)
다양한 상황에서 효과 있는 판단력
적용적, 실천적, 구체적 판단의 능력
이런 판단력 제고로 사랑이 풍성케 됨
B. 사랑이 더 풍성해짐
“더 풍성하게 하사” perissheue
“어떤 테두리 안에 점점 넘치도록 풍부해지는 것”을 의미
감사, 영적은사,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함
넘치는 사랑이 지식과 총명을 통해 풍성해짐
동시에 사랑은 지식과 총명을 증진함
사랑할수록 지식과 총명이 더해짐
불은 장작을, 타는 장작은 불을 확산
이 관계에 대한 T. Aquinas의 설명
a. 신자 안의 성령은 지식과 진리 주심
b. 그런데, 성령님은 곧 사랑이시다
c. 사랑은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한다
d. 사랑은 신자 안에 올바른 성향을 형성함
e. 이 사랑의 성향으로 올바르게 판단
지식 단지 공부 아님: 기도, 묵상, 실천
이 과정을 통해 점점 사랑이 풍성해짐
충만히 넘치는 사랑을 통해 신적 경륜을 이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함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승하고 그 사랑 때문에 하강함
그 사랑은 존재의 질서를 따른 사랑임
무엇보다 사모할 것이 곧 이 사랑임
V. 적용과 결론
감옥에 갇힌 목회자의 간절한 기도
교회와 신자들을 향한 예수의 소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대신 싫증과 게으름이 가득함
첫 사랑 은혜의 때를 기억하라!
지식에 목마르고 총명을 사모했다
태만한 자기 신앙 온갖 핑계 찾는다
but 하나님은 아신다. 사랑 없음을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신다
그분을 사랑하는 목회자와 성도들도
이제 지리한 침체를 끝내고 돌아오라
경륜이 있는 복음 2 2017. 8. 14 (여름 수련회 둘째날)
< 목양 받게 하심 >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 1:10)
I. 본문해설
- 바울은 목회자로서 목양적인 편지를 씀
- 감옥에서도 계속되는 기도가 있었음
-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
-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비결을 말함
- 지식과 총명으로 그 사랑은 더욱 불 일 듯함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실천적 판단
- 이를 위해 교회를 통해 목양 받게 하심
- 이것이 세계에 대한 신적 경륜과 연관됨
II. 목양 받게 하심은
-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 세력화가 아님
- 역사적 교회는 이런 유혹을 받았음
- but, 진리 목양으로 바른 인생 살게 함
- 목양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함
- 왜냐하면 사랑이 거룩한 삶의 토대이기 때문임
- 교회를 통한 신자 목양의 세 가지 목표
A. 분별함
- “dokaimazein ta diaperonta”
- “차이점들을 시험해보다”
- dokimazo: 어떤 재료의 정체를 시험해 보는 것
- 이는 교리와 윤리를 포괄하는 것임
-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 선택할 수 있도록”(P. Obrien)
- 정확한 지식은 선한 삶에 필수적임
- 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임
- 무지의 그늘 아래 악한 삶이 만연함
-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 성경 진리
- 선악의 판단력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
- 여전히 판단력이 중요함(ex: 군인)
B. 진실함
- “진실하여” eilikrineis: 두 가지 해석
a. 태양빛(eilee) 아래서 판단함
b. 체돌림(eilos)으로써 판단함
- 어느 해석이든지 절대 규범을 보여줌
- “마음과 행동이 진리에 부합된 상태”
- 하나님 뜻에 맞추어져 순수한 상태
- 지상 자원이 삶의 방향을 결정 못함
- 그것은 삶의 양상을 결정할 수는 있음
- 삶의 방향은 인격과 성품에 결정된다
- 우리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번영?
-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
- 물이 흐르듯 진실한 인격을 따라 성취됨
- 때로는 넘어지나 진리에 부합하기를 힘씀
C. 허물없음
- “허물없이” aproskopoi
a. 적극적 의미: “진실”
b. 소극적 의미: “허물없이”
- Chrysostom의 해석을 추천함
a. 타인 넘어지지 않게: (고전10:32)
고전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b. 자신이 넘어지지 않음: (갈5:4)
갈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흠 없음
- 흠 없는 인격과 삶이 가능하지 않음
-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함
- ex: 원과 삼각형을 그리는 마음
- 극상품의 포도를 기대하시며 심으심
- 온전함에 이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함
- 용서와 그렇게 은혜를 갈망해야 함
III. 적용과 결론
-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통치하는 날
- 종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신자들
- 그 날을 사모함은 주님의 통치 실현 때문
- 완성되지 않은 나라에서 겪는 신자의 괴로움
- 그 날에 받을 완전한 위로와 상급을 생각함
- 이렇게 사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심
경륜이 있는 복음 3 2017. 8. 15 (여름 수련회 세째날)
< 복음의 경륜을 이루심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 1:11)
I. 본문해설
- 구원받은 신자를 교회를 통해 목양하심
- 중생과 회심을 통해 까리따스의 사랑을 부여하심
- 목양을 통해 그 사랑을 더욱 풍성케 하심
- 게으름과 싫증을 이기는 길: 지식+총명
- 교회를 통한 목양과 복음의 경륜을 완성함
- 영혼의 돌봄과 성화는 세계 경륜과 관련됨
II. 목양과 복음의 경륜
- 목양을 통한 신앙 성숙과 우주적 계획
- 타락으로 목적 의식을 잃어버린 인류
- 세계, 사회,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림
- 복음은 그 잃어버린 목적의 핵심을 보여줌
- 구원받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 계획을 따라 살게 함
- 그들이 잃어버린 목적을 다시 찾아 살게 하심
A. 의의 열매를 맺음
- “의”(righteousness)란 무엇인가?
- dikaiosune는 언약과 관련된 개념임
-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된 거룩한 인격과 생활의 총화”
- 마음의 품질과 생활의 열매로서의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상태임
- “율법적 의”와 대비된 “새로운 의”(롬3:21, 빌3:9)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생명의 비밀
B. 영광과 찬송이 됨
- 영광의 세 범주: a.본질 b.발산 c.효과
- 영광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
-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통치를 드러냄
- 신자는 하나의 충만한 사랑으로 살아감
- 신자: 다른 사상과 생활 때문에 구별이 됨
- 다른 인격+사상+생활+가치+목표
- 외적 성공, 번영, 업적에 눈길을 끔
- 그러나 그리스도인 삶의 가치는 다름
- 다른 존재로서 다른 삶의 길을 보임
- 순전한 사랑과 지식으로 주님을 드러냄
- 신자의 가치는 이웃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
C. 그리스도 때문임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ton dia Iesou Xristou
- 바리새적 율법주의의 열매가 아님
- 구약의 표현을 사용하나 새 언약과 관련됨(사32:17, 암6:12)
사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암6:12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 새 언약의 특징은 신적 사랑과 생명
-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에서 나온 결과
-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빌3:9)
- 그 연합: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임
- 사랑, 용서, 은혜와 영광을 베푸심
- 그 연합과 현실을 이길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심
III. 적용과 결론
- 우리의 구원은 우주적 경륜과 연관됨
- 구원으로 인한 자기 만족 속에 살면 안됨
- 신자가 행복하지 않다. 무엇 때문인가?
- 개인 구원을 우주 경륜에 연결시키지 않음
- 엄마 같은 사랑으로 목양하는 교회
- 각 사람을 온전한 신자로 세우시려고 하심
- 신자는 존재의 소명 따라 살 생명 사랑 누림
- 신자는 그 소명의 삶 안에서 행복할 수 있음
- 하나님 사랑으로 풍성해져 가라!
경륜이 있는 복음 4 2017. 8. 20 (주일 4부예배)
< 물은 피보다 진하다 >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 1:8)
I. 본문해설
- 우리의 인생은 잘 짜인 직조물과 같다
- 세계 창조의 목적과 내 인생의 행복
- 신자는 복음을 통해 이것을 발견했음
-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 함
- 인생의 가치는 구원 계획을 따라서 사는 것
II. 경륜에 참여하는 마음
A. 예수의 심장을 가짐
-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 “심장” sprinkna 창자를 의미함
- 인간의 영혼이 있는 자리를 가르침
- 인간 심령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힘
- “예수의 심장” 마음, 생각, 뜻 모두를 의미함
- 이것은 사랑의 합치를 통해 주어짐
- 지상에서 성화의 끝은 예수의 심장을 갖는 것
- 예수께서 우신 곳, 기도하신 곳, 죽으신 곳에 함께 함
- 교회의 제도: 육체, 교회의 정신: 영혼
- 예수의 심장을 가진 성도들의 총화임
- 십자가에서 구원하신 예수를 기억함
B. 지체들을 사랑함
- “물은 피보다 진하다” Augustine의 사상
- 지상 혈육(피)보다 세례 연합(물)이 더 큼
- 내 인생의 의미는 지체들과 묶여 있음
- 신자는 세례를 통해 예수를 통해 교회와 연합되었음
- 지체들을 예수의 심장으로 사랑하라
- 그들 안에 그 사랑이 충만하도록 섬기라
-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영혼을 사랑하라
III. 적용과 결론
- “내가 기도하노라”
- 예수의 소원을 마음에 품고 기도함
- 교회를 향한 경륜이 삶의 이유가 됨
- 이를 통해 이루어질 주님의 통치를 봄
- 인생의 가치를 구원의 의미에서 찾음
-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되찾자!
경륜이 있는 복음 (2017.08.13_온가족여름수련회 저녁 1)
경륜이 있는 복음 (2017.07.30._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1)
1. 사랑이 풍성해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 1 : 8-9)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해설
이 편지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갇혔을 때 쓴 편지입니다. 사형 당할지도 모르는 죄수의 몸으로 갇혀있었습니다. 예닐곱 평정도 되는 지하 동굴에 갇혀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의 복음의 위대한 경륜을 묵상하며 빌립보 교인들에게 지극히 목양적인 편지를 씁니다. 여기에는 어떤 변론이나 웅장한 웅변이 없습니다. 목회자로서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으로 권면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어떤 서신서보다 아름다운 서신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하지만 오늘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주는 권면에 따르면, 우리 인생의 참다운 행복은 하나님이 인류를 향해 가지고 계신 경륜을 이해함으로써 획득될 수 있는 것입니다.
II. 경륜이 있는 복음
그래서 제일 먼저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경륜이 있는 복음입니다. 복음은 매우 간단하지만 거기에는 매우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하나님의 경륜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복음을 단순히 믿을 뿐만 아니라 복음이 주는 우주적인 경륜을 숙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실 모든 세계에 대한 생각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안에 있었습니다. 경륜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 안에 품으셨던 그 생각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특히 인류 사회를 통해서 펼쳐지는 것을 경륜이라고 합니다. 감추어진 경륜은 하나님의 지혜안에 있고 시간과 역사가 흘러가면서 하나님은 당신이 가지고 계신 경륜을 이 세상에 펼쳐 보이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 이 경륜은 펼쳐지기 시작했고 특별히 이 경륜은 구원의 경륜이었습니다. 이 경륜이 펼쳐지면서 이제 역사가 본격적으로 전개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한 사람을 선택하시고 한 가정을 선택하시고 한 나라를 선택하시고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가 전개됩니다. 역사 속에서 멸망하여 사라지고 그 껍질이 깨어지면서 영적인 왕국인 예수의 나라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 드라마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이었습니다. 이제 매우 느리게 전개되던 구원의 경륜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하늘에 쏘아올린 폭죽처럼 찬란하게 펼쳐지게 되고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전개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전개하신 경륜이 아직 모두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 비밀스러운 경륜을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펼쳐나가고 계십니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조차도 어떻게 이 경륜이 펼쳐지는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를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펼치시는 지상의 광경을 보며 배워야 할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경륜을 홀로 만드셨지만 이 경륜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펼쳐나감에 있어서 인간을, 특히 신자들을 그 경륜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그렇게 경륜이 전개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창조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통해서 당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인류에게는 그것을 보여주고 하나님 자신은 그것을 바라보는 인류와 세계를 통해서 기쁨을 얻으시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고 타락했습니다. 그렇지만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면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더 훌륭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이 역사 속에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로 말미암아 비참해진 이 세상에 인류를 구원하고 이 세계를 완성하시는 구원역사의 전개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찬란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에 깊이 감명을 받으며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자비의 성품을 경험하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깨달음은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경험하지 못했을 축복입니다. 죄를 지은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이런 방식으로 이 세상에 가득 차게 하려고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계산을 초월하는 탁월한 지혜로서 인간이 행한 악한 결과를 합력하여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그 목적을 성취하는 데에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바로 그런 경륜의 빛 아래에서 자기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기로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하도록 그의 지성을 하나님이 변화시키시고 마음속에 그러한 인생관을 따라 살 수 있는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부여해 주신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복음을 잘 가르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가끔 지체들이 이사를 가거나 이민을 가면서 저에게 교회를 추천해달라고 합니다. 다행히 그 근처에 제가 아는 교회가 있으면 모르겠지만 어떻게 제가 그렇게 많은 교회를 알고 있겠습니까? 그때마다 제가 말합니다. “네가 찾아라. 그것도 훈련의 과정이다.” 제가 가라고 해서 가는 교회가 아니라 자기가 여태까지 배운 분별력을 시험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가지를 항상 확인하는 조건으로 삼아야 합니다. 첫째, 선포되는 말씀이 나를 설복하는 힘이 있어서 진리에 눈 뜨도록 만들어 주는지, 그 진리 때문에 나 자신이 새롭게 깨닫게 되는 기쁨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여태까지 배운 성경에 관한 교리에 부합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왠지 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나면 마음속에서 따뜻한 하나님의 사랑이 채워지고 그렇게 살고 싶은 감화가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이 두 가지가 모두는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기도하면서 찾아야 합니다.
복음을 안다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복음을 가장 간단한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영어로는 “Jesus died for us.” 이렇게 네 단어입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한국말로도 네 단어입니다. 더 이상 줄일 수 없는 복음이 이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말에는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도 포함됩니다. 그러면 이 사실 하나를 믿는다고 해서 복음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열쇠와 같은 것입니다. 열쇠로 딸깍 하고 금고의 문을 열었으면 그 다음에 그 금고 안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라는 것을 본 다음에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복음에 대한 지식은 복음 자체에 대한 지식과 복음 교리에 대한 지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안 후에는 그 복음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많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사도 바울도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이 시간까지 복음을 배워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초기의 서신서와 말기의 서신서가 다릅니다. 말기의 서신서에는 복음에 대한 이해가 훨씬 웅장하고 우주적인 생각으로 변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나를 대신해서, 우리를 대표해서,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죽으셨다.” 이것을 문을 열고 찬란한 빛이 들어왔지만 그 다음에는 끊임없이 그 복음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 속에서 인생관, 우주관, 세계관, 인간관, 교회관,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생각을 펼쳐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이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끊임없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대에 가장 커다란 신앙의 어려운 점은, 복음을 받아들였는데 그 복음이 내 인생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은 받아들였지만 그 복음이 인생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의 인생의 계획을 짤 때, 하나님이 이 복음을 통해서 어떤 경륜을 펼치시는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각자 마음에 부딪치는 대로 자기 인생의 계획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과는 거리가 많이 있는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목회자인 사도 바울 속에 있는 간절한 소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이런 사람, 이런 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가 서신의 전반부에 나오고 이후에 나오는 많은 권면과 내용들은 이 기도를 풀어서 펼친 것에 불과합니다. 그 정도로 여기 9절부터 11절 사이의 이 기도가 사도 바울이 생각한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그 경륜 안에 있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구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우리가 달려가는 우리 인생의 목표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람으로 지으시고 예수 믿게 만드신 그 구원의 목표가 일치하지 않겠습니까?
III. 사랑을 풍성케 함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지,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누가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너희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기도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제목이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너희 사랑”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바로 빌립보 교인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빌립보 교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이후에 많은 시련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여러 모양으로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경험하면서 자신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늘 이야기했던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먼저 있고 그 아가페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든 사물들을 사랑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나님이 이미 이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유독 빌립보서에만 교인들을 책망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서신에서도 나타나지만,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했다.”고 나오는데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서 근심하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사람이 있고 기쁨으로 기도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목회자가, 혹은 구역장이, 순장이 나를 위해서 기도할 때 나는 그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 양떼일지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하면 너무 기쁜 사람이 있습니다. 흠이 없습니다. 그런 교인이 바로 빌립보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렇게 기뻤던 이유는 그들이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 바울은 그것으로 성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특히 교회에서 목양사역을 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그것은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고 교제하는 모든 활동을 통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양입니다. 목양을 하는데 논쟁을 많이 하고 정죄하게 하고 시비를 걸게 만들고 끊임없이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 목양이 아니라, 목양은 그 성과가 사람의 수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고 목양의 마지막 가장 아름다운 결과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있어서 영혼들을 돌보는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순수하게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회였지만 사도 바울은 그것을 만족하지 않고 좀 더, 좀 더 그들 안에 그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비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목양의 목표는 주를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양하라고 주신 양떼들을 돌보는 목양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양을 하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주님을 사랑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인생의 보람인지를 알고 있어야 하고 또 인생의 모든 고통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것임을 이해하는 사람이 양떼를 목양할 때 거기에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전도는 무엇입니까? 전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에게 다가가서 네가 사랑하는 것은 너를 행복하게 할 수 없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신자는 없다고 아침에 설교했는데, 어떤 신자라도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는 그 작은 사랑을 점점 더 커지게 만드는 것이 목양입니다. 전도도 목양도 모두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이 전도와 목양의 목표인 것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왜 전도하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에 행복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해서 불행해지는 사람들을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들에게 우리가 올바른 사랑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양에 대해서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 해 동안 내가 목양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양떼들을 주님을 더 사랑하게, 점점 더 그 사랑이 풍성하게 해 주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목양을 받는 사람들도 생각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날 위해서 기도하고 진리의 말씀으로 나를 가르치셨는데 내가 정말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는지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이 지구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들이 뜨거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이 교회를 세우신 중요한 목표입니다.
IV. 사랑이 풍성해지는 길
그러면 이제 오늘 우리가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하면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질 수 있을까 입니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고 중생하고 회심하게 될 때,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사랑의 관계를 심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특별히 통하는 영적인 교통의 통로를 마련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이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과 생명을 끊임없이 부어주십니다.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즘 전쟁이 난다고 난리인데, 우리는 그저 주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저는 병기를 보면서 신기한 것이 있는데 최대 속력을 내면 한 시간에 2500km를 날아갈 수 있는 비행기가 엄청난 속도로 하늘을 날면서 기름을 공급받는 장면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더 큰 비행기가 위에 떠 있고 전투기가 아래에 있어서 큰 비행기에서 늘여 놓은 줄을 빨아들여 거기 매달린 상태로 기름이 들어갑니다. 공중급유를 이렇게 합니다. 마치 이렇게 전투기 성능이 아무리 좋아도 기름이 없으면 떨어집니다. 여객기나 경비행기는 기름이 없어서 엔진이 멈춰도 활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투기는 너무 무거워서 기름이 떨어지는 순간 쇳덩어리처럼 직하합니다. 이건 제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가르치던 학생이 전투기 조종사였는데 그 학생에게 물어보고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런 통로를 주셔서 그 사랑을 공급하십니다. 어떤 경우에도 이 통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내주”라고 부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그 통로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믿음으로 살고 진리에 풍성한 말씀을 먹으면 우리 안에 사랑이 많이 부어집니다. 점점 더 사랑이 풍성해집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은혜에서 미끄러지고 믿음 생활을 잘 하지 않고 불순종하게 되면 그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아주 실낱처럼 남아서 말라깽이와 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자신이 왜 그러는지 모를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이 거의 모두 사라진 뒤틀린 삶을 살게 됩니다.
성화라는 것을 아주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좀 더 간단하게 생각하면, 주님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과 싸워서 순결하고 풍성한 사랑을 갖게 되는 것이 성화입니다. 그래서 성화의 정도만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서 경험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더듬어 들어가다 보면 결국 사랑으로 귀착됩니다. 사랑은 사실 생명과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래서 이쪽으로 보면 사랑이고 저쪽으로 보면 생명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끊임없이 어떤 사람과 관계를 맺거나 혹은 이미 맺은 관계를 더 깊고 친밀하게 하려는 성향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해당이 되고 사람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많이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과 끊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잘못하는데도 ‘네가 나를 그렇게 대한단 말이지? 그런 너도 내 마음에서 잘라버릴 거야.’ 하지 않고,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합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처음 새롭게 관계를 갖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적거나 없고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사람과 관계를 가지면서 그 관계를 즐거워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생명은, 그것을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생명체에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생명이 있는 것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외부의 변화에 대해 반응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또 다른 생명이 있는 것을 끊임없이 낳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생명이라는 것이 영적인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영적인 생명은 사람, 혹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힘입니다. 그 생명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서 자신을 지탱하기 어려울 때 그 생명으로 지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비리를 저지르고 부패해도 내 안에 참 예수의 생명이 있으면 나는 거기에 항거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대 다수가 된다고 할지라도 생명이 있는 사람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삽니다. 결국 생명과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생명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이 생명과 사랑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면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사랑을 받고 나면 자기를 에워싸고 있는 이 모든 환경들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납니다. 생명력이 생겨나서 환경에 의해 휘둘리던 자기 자신이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이런 모든 변화들이 종합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A. 지식과 총명 안에서
그러면 그 사랑이 풍성해지는 방법, 어떤 방식으로 그 사랑이 풍성해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명쾌하게 설명합니다.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더 풍성하게 하사” 희랍어 성경에는 “으로”라는 말이 by 가 아니라 in 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식과 총명 안에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진다”는 뜻이 됩니다.
1. 지식(epignosis)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식”은 무엇입니까? 희랍어로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입니다. “에피”는 “전체”를 가리키고 “그노시스”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에피그노시스”는 “사물에 관한 온전한 앎”을 뜻합니다. 지식에는 설익은 지식도 있고 속속들이 알고 있는 깊은 지식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물에 대한 온전한 앎을 가리켜서 “지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식은 대상이 있습니다. 그 모든 대상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은 대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대상이 자연적인 사물일 수도 있고 인간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고 혹은 그것보다 훨씬 형이상학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모든 지식은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모든 대상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거나 고안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 안의 지식으로 존재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당연히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부채꼴 모양이 됩니다. 하나님 안에 지식으로만 있던 것이 시간과 공간 속에 펼쳐져 나오고 펼쳐 나온 것을 통해서 습득한 지식이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것입니다. 신비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런 모든 지식은 결국 대상을 가지고 있고 이 대상이 존재하기 전에 모든 관념이 하나님 안에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 안에서 이 지식이 폭발하듯이 창조되면서 이 모든 세계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물에 대해서 온전한 지식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그 사물을 잘 관찰하고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이 이 사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는지를 살펴보면서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이 사물을 어떻게 하시는지를 생각할 때 그 사물에 대한 에피그노시스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오늘날 어떻게 생각합니까? 지식에 대한 이론을 그런 식으로 갖지 않습니다. 내가 이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얻어낸 지식이 마치 최종적인 지식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은 에피그노시스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사물을 보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그리고 이것을 만드신 보다 완전한 지식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이 사물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것을 성경을 통해서 보면서 우리는 사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이런 모든 우리의 지식은 대상을 가지고 있고 존재하는 모든 대상은 하나님 안에 관념으로 하나님께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우리의 지식이 되는 많은 대상들에 대해서 참다운 지식을 소유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학문적인 지식만을 가지고 부분적으로 행복해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약물이나 식품에 대한 화학적인 작용을 모른 채 우리가 오용하거나 남용하면 심각한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학문을 통해서 전개가 되었기 때문에 그 공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육체의 건강을 해칠 염려는 부분적으로 적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은 육체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 인생의 행, 불행을 결정하는 중요한 것은 이런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결정이 우리의 인생을 바꿔 놓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고 내리는 판단보다는 하나님이 그것을 어떻게 보시가 하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지식을 증진함으로써 그 안에서 사랑이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지식이 먼저냐 사랑이 먼저냐 하는 식으로 논쟁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이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확실한 사실 하나는 사랑은 지식을 증진시키고 지식은 사랑을 증진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런 지식과 함께 사랑이 풍성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감화를 통해서 성경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성경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전달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 지식과 함께 사랑은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이미 결론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이것을 우리가 단순하게 믿게 되었지만 이것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너무나 쉽게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안셀무스(Anselmus Cantuariensis 1033-1109) 같은 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지성의 친밀함이 필요합니다. 이미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사실이지만 그 복음의 의미를 스스로 지성적으로 탐구하면서 우리의 지성에 낯설지 않고 아주 친숙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 작용을 통해서 성령의 감화를 받으면서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불러 일으켜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교제하며 사는 것은 사람과 교제하며 사는 것과 아주 유사합니다. 사람을 사귀어보면 만나자마자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말로는 “오늘 참 대화가 즐거웠습니다.”고 하는데 대화가 아니라 일방적인 연설을 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하고 헤어지지만 대부분의 사람 마음속에서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함께 사귀는 맛이라는 것은 내가 그 사람에게 알려지고 그 사람이 나에게 알려지는, 인격적인 교감이 이루어지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인간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사귈수록 더 깊이 사귀고 싶은 사람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나쁜 것을 발견하게 해주면 안 됩니다. 첫 만남에서 돈을 빌려달라고 한다거나, 그 다음에 만나서 카드 빌려달라고 하는 것은 싫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분 좋은 무엇인가를 계속 발견하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람들과는 계속 사귀는 맛이 있습니다. 하나님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맨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심할 때는 아주 단순한 복음의 진리가 청천벽력처럼 다가오면서 우리의 지성이 벼락을 맞듯이 깨달음을 주고 “내가 죄인 이었구나!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이런 이유 때문이었구나!” 하며 감동을 받고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정말 오래 간직하는 사람들은 소수입니다. 정말 오래 간직하고 있었다는 분을 봤는데 그 분은 첫 회심을 하고 6년 동안 그 열기가 식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도 굉장히 쉽지 않은 경우입니다.
말씀드리고자하는 요지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은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예수를 믿은 것이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내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의미와 구별될 수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잠시 후에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이 모든 인류를 지으신 목적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지으신 목적은 세계 전체를 창조하신 목적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만약 그것들이 다 떨어지고 서로 상관이 없을 수 있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지혜 속에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시고 하늘의 모든 별들을 정확한 거리에서 움직이게 하시고 모든 생물들이 서로 상호작용하게 하시고 인간의 영혼과 마음과 정신이 그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작용하게 하시는 분이신데, 어떻게 내 인생의 목적과 예수 죽으신 목적, 교회를 만드신 이유, 인류를 창조하신 계획, 그리고 이 온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이 파편과 같이 모두 상관없이 찢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 그래서 천국에 간다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현실을 살아가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 데에 있어서는 불신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갑니다. 거짓말하고 사기치고 협박하고 어떻게 하든지 돈이나 벌려고 하고 권력을 주면 사람들을 짓밟고 타고 다니려고 합니다. 이렇게 삽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욕을 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왜 사람의 지위가 사회적으로 조금만 높으면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불러서 간증이 시키는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며 욕을 먹습니다. 그것이 결국 지식이 없는 것에서 그 모든 사달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 성령을 통해서 감화를 받고 끊임없는 지성의 탐구로 복음지식을 친밀하게 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증진해 나갑니다. 풍성해져 갑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은혜 속에 있던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매일매일 성경을 펼치면 감동을 받는 말씀이 있었고 설교를 들으면 “어쩌면 저렇게 나에게 하는 설교 같을까!”하고 깨닫는 지성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 점점 더 내 마음 속에서 풍성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은 지식 안에서 당신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죄를 지은 것에 대해서는 회개하지만 하나님의 성경과 진리를 깨닫기에 게을렀던 것에 대해서는 별로 회개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불길이 점점 꺼져가는 요인입니다.
2. 총명(aisthesis)
두 번째는 총명입니다. 희랍어로 “아이스데시스(αἴσθησις)”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라틴어에서는 “센수스(sensus)”, “감각”이라고 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감각”이 아니라, “아이스다노마이(aisthánomai)라는 동사에서 오는데 이 뜻은 “깨닫다”입니다. 이것이 지식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보면, “지식”이 하나님을 알고 사물들을 아는 체계적인 이해라면, 이 “아이스데시스”는 “판단하게 하는 지식”입니다. “인식, 이해, 판단”의 의미를 가진 것입니다. 이것이 여기에 나타난 “총명”의 의미입니다. “지식”은 체계적이지만 이 “총명”은 직관적입니다. 어떤 사물을 보면서 판단력을 갖는 것입니다. 특히 도덕적인 판단력을 갖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나 환경, 이런 것들에 대한 이해, 말의 의미를 판별해내는 능력,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상당부분 이성에 속한 것이고 총명은 판단에 관계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지식과 총명 안에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정보이지만 총명은 적용적이고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하지 못하고 지식이 아주 뛰어나지는 않지만 아주 똑바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교리에 대해서 많이 알지는 못하는데 이상하게 똑바로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어떻게 저렇게 똑바로 살 수 있을까?’ 하는데 그런 사람에게는 “총명”이 풍부한 것입니다. 딱 보자마자, “그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지.”, “그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아.” 하며 무 자르듯이 잘라버립니다. 그런데 왜 안 기뻐하시고 사람의 도리가 무엇이냐고 근거를 물으면 다 말은 못합니다. 특히 할머니 같은 분들 말입니다. 그런데 타협이 없이 딱 잘라서,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야.”, “그건 사람의 도리라고 할 수 없어.”, “인간은 그렇게 살 수 없어.” 하고 한 칼에 내려칩니다. 비록 설명을 다 할 수는 없으나 굵직한 점을 툭툭 찍고 가듯 이 “총명”을 가진 자들은 지식을 상당히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판단이 떨어지는 사람보다 훨씬 똑바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허랑방탕한 삶을 살면서 괴로워하고 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회심 전야였습니다. 그때 자신의 양심 속에서 들리는 소리를 이야기합니다. “나는 이 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죄라고 하는 확고한 것도 없지만 이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주님의 소리를 마음속에서 들었습니다. “봐라! 너만큼 공부를 하지도 못한 아녀자들도 순결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다. 그게 그들 자신의 지식이나 힘으로 된 일이겠느냐?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이다. 그러니 너도 할 수 있다.”
“총명”한 판단을 어느 한 순간에 잃어버릴 때, 그때 인생의 방향을 잘못 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빨려 들어가듯이 끌려들어갑니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저 깊은 수렁 속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거기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판단력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B. 사랑이 더 풍성해짐
그 판단력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이런 판단력이 매일매일 늘어날 때, 그런 사람의 영혼 안에서 주님의 사랑은 점점 더 풍성해져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풍성해져 간다”는 것은 지식과 총명의 증진 안에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지식과 총명에 관심이 너무 많으면 사랑이 식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 반대입니다. 지식과 총명의 증진 없이는 사랑이 풍성해지지 않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들만 지식을 증진하고 총명을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식과 총명, 사랑의 관계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지식과 총명이 잘 마른 장작이라면 사랑은 불길입니다. 처음에 불을 땔 때는 아주 작은 성냥개비 같은 가지나 바짝 마른 나뭇잎을 놓고 불을 피웁니다. 불이 커지게 되면 조금 더 큰 나무토막을 올려놓고 그 불을 계속 뜨겁게 타오르게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합니까? 커다란 장작을 올려 놓습니다. 그렇게 계속 타오릅니다. 그래서 사랑과 지식은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주님을 알고자하는 마음 없이 주님을 사랑할 수 없으며, 주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 없이 지식이 증진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풍성해진다고 하는 것은 “페리쉬에(περισσεύω)”라는 단어인데, 이것은 울타리를 먼저 만들어놓고 그 안에 뭔가를 잔뜩 쌓아 올리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마른 땅에 곡식 같은 것을 쌓아 올린다거나 물을 댄다고 하면 그냥 막 거기에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울타리를 만들고 그 울타리를 꽉 채워서 풍성하게 하는 것, 이런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면 됩니다. 이것은 결국 감사, 영적인 은사, 하나님의 영광, 은혜에 대한 감격, 이런 것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분명히 있었는데 이 사랑이 지식의 증진과 총명의 발전으로 이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런 사랑은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사람을 더 총명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람이 세상 물욕에 눈이 어두워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욕심 때문입니다. 빗나간 “사랑”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순전하게 사랑하는 신자들은 그런 것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결국 의미를 가지고 사는 것인데 돈을 쓰고 그것으로 만족을 얻는 것을 인생의 의미로 삼으면 그 사람에게 부자가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때로는 부도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기를 택하지만 삶의 의미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사람은 또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유튜브에서 보니까 “돈 많은 중국 여자 아이가 노는 방법”이라는 영상이 있었습니다. 너무 할 일이 없으니까 모택동의 얼굴이 있는 중국 돈 100원짜리, 우리 돈으로 1만7천 원 정도 되는데 그것을 놓고 가위로 모택동 얼굴만 계속 오려서 큰 스케치북에 그 얼굴을 붙여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잘라놓은 돈은 당연히 못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이미 스케치북에 몇 페이지를 붙였습니다. 옆에 지폐를 이만큼 쌓아놓고 그걸 계속 오려 붙입니다. 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사는 게 너무 시시한 것입니다. 재미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게 될 때 판단력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지점을 다섯 개의 논리로 아주 재밌게 설명합니다. 첫 번째, 신자 안에 있는 성령님은 지식과 진리를 우리에게 주신다. 두 번째, 그런데 성령님은 사랑이시다. 이 두 가지로 이야기하자면, 진리가 있는 곳에 성령님이 계시고 성령님이 계신 속에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은 나누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래서 사랑이신 성령님은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신자를 데려가신다. 네 번째, 사랑은 신자 안에 올바른 성향을 형성한다. 사랑은 영혼의 경향성이고 마음의 성향입니다. 어떤 한 대상에 고정해서 그것을 계속 즐거워하려고 하는 성향입니다. 그래서 둘이 서로 뜨겁게 사랑하다가 한 사람이 없어져버리면 너무 보고 싶고 그리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떠났지만 그를 향한 사랑은 남아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사랑은 남아있고 그 대상은 사라져버리니까 사랑의 귀착점을 찾지 못하고, 귀착점을 찾지 못하는 만큼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사랑하다가 한 사람이 죽거나 사라져버릴 때 특별한 가치관이 없는 사람은 같이 따라서 죽는 게 그 사람에게 제일 편안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이 별로 없으십니까? 그런 사랑은 신자 안에서 올바른 성향을 형성합니다. 이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 올바른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독교 바깥에서 생각해보면, 순결이라는 개념이 “더러운 것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것”이 순결이지만 기독교 신학으로 볼 때, 이 순결은 한 사람의 마음과 정신이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순결입니다. 그렇게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아퀴나스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은 가장 명정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총명이 최고조로 발휘가 되어서 가장 올바르게 판단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총명의 증진으로 사랑은 풍성해지고 이 사랑은 결국 이 지식을 촉진하고 총명을 발전시켜서 있는 자는 더 많이, 없는 자는 있는 것도 자꾸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식은 단지 공부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기독교인은 어느 정도 신앙을 갖게 되면 이 지식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제가 예수 믿고 난 후에 이것을 마음속에 새기고 명료하게 정리했을 때, 그때의 기분이 마치 신앙의 바다에서 나룻배를 타다가 여객선으로 옮겨 탄 기분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이 정리가 되지 않으니까 막 요동을 쳤습니다. 나룻배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여객선으로 옮겨 타면 불과 한 이삼 백 톤밖에 안 되는데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요동을 치지 않듯이,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런 것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탐구하는 것이 이 속에서 계속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파도를 만날지 모르는 바다를 건너갈 때, 뗏목을 타고 건너시겠습니까? 돛단배를 타고 건너시겠습니까? 아니면 페리호를 타시겠습니까? 아니면 십만 톤짜리 크루즈를 타고 가시겠습니까? 당연히 그런 큰 배를 타고 싶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은 이런 것을 쭉 탐구하면서 마음속에 정돈된 생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식론입니다.
이 지식은 단지 공부로 획득되는 학원습득용 지식이 아닙니다. 기도와 하나님의 진리인 성경에 대한 깨달음과 깊은 기도, 묵상, 적용, 실천,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신의 온 몸으로 그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 지식이 증진되고 증진되는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놀라운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신자 안에서 사랑은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충만하게 넘치는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경륜과 상관이 없는 나의 이기적인 인생의 목표를 버리게 되고 주님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됩니다. 그 속에서 가는 것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저는 이런 그림을 그려봅니다. 정말 헤엄을 잘 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개울을 한 번 거슬러보겠다고 했습니다. 헤엄을 잘 치니까 거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는 정말 힘도 세고 수영을 잘 해서 다른 친구들은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개울에 뛰어들어서 미친 듯이 팔 다리를 저으며 수영을 하는데 우리가 보기에는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정지해 있는 것이었습니다. 잠시 후 힘이 빠지기 시작하니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물 흐르는 대로 떠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도도히 흐르는 강물의 엄청난 힘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그 친구는 물을 거슬러 수영을 하는 대신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헤엄을 치는데 그 때는 거의 선수급이었습니다. 흘러가는 방향대로 헤엄을 치니까 말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이 도도히 흐르는 강물이라면, 그 경륜에 자신의 가는 인생의 길을 맞춘 사람은 물의 흐름을 따라서 헤엄을 치는 사람이고, 방향도 올바르게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인생의 목표와 하나님의 경륜이 상관 없는 사람은 그 물길을 거스르는 사람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미국과 한국을 오가다 보면, 심할 때는 한 시간이 넘게 차이가 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바람 때문입니다. 바람이 비행기를 확 밀어주면 시간도 빠르고 기름도 훨씬 덜 들어갑니다. 이번에도 한 세 시간짜리 비행기를 탔는데 타자마자 승무원이 기쁜 소식을 알려주었습니다. “손님, 예정시간보다 45분 빨리 도착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기상정보를 보니까 바람이 몇 노트의 속도로 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바람 때문에 비행기가 확 밀리면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십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의 경륜을 거슬러서 인생의 목표를 정하면, 끊임없는 괴로움과 시련이 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고생을 합니다. 인생 전체를 살아도 올바른 의미를 구현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2, 3년 전에 접한 정보에 의하면 인간이 만든 배 중에서 가장 큰 것이 67만 톤짜리 유조선이 있다고 합니다. 그 위에 축구장 네 개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크기입니다. 만약 그 위에서 남쪽을 향해서 걸어가라고 명령을 받아서 나침반을 들고 남쪽을 향해서 정확하게 걸어간다고 합시다. 자신은 확신을 하고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남쪽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배 자체가 북쪽으로 가고 있다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을 깨알같이 보지 말고, 숲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처럼 살았다면 이번에 한 번 비행기를 타고 위로 올라가서 숲을 내려다보면서, 하나님이 이 교회를 세우시고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신 경륜과 내가 가고자하는 인생의 길이 같은 방향인지를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그 길을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가는 길이 힘듭니다. 우리는 주님께 호소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경륜을 따라 걸어가는 길인데 난관이 있습니다. 예수여 나를 도우소서!”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충만한 사랑을 경험하면서 삶의 이유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고정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이 인생의 길을 걸어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빨려 올라가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다시 내려온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자신의 인생의 계획들을 하나님의 경륜의 빛 아래에서 보는 것입니다.
자, 태어나고 자라고 장성하고 그 정점이 된 다음에 어떻게 됩니까? 늙고 병들고 시들어가고 사람들도 점점 떠납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어차피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 의미를 그냥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서 겨우겨우 구하면서 사는 인생은 너무 구차한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떠나도 나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사랑하셨던 그 하나님 앞에서 불변하는 인생의 어떤 의미를 발견하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다운 인생 아니겠습니까? 사람을 사랑하는 것, 좋습니다. 그런데 자기 인생이 뿌리째 흔들릴 것처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빌립보 교회에 주신 그 사랑이 아닙니다. 지식과 총명 때문에 넘쳐나야 할 그 사랑이 아닙니다. 그 하나의 사랑을 돌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사모해야 할 것은 이 사랑이니 우리 인생의 대부분의 문제가 이 사랑의 고갈 때문에 생명의 고갈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 그래서 내 인생은 곤고하다. 많은 것이 없고 모자라지만 그것을 내가 모두 얻는다고 한들 정말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까?” 하는 정직한 질문을 자신에게 칼같이 던져봐야 합니다.
취업을 못해서 우울하십니까?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취업을 해서 정말 좋은 회사에 들어가서 연봉을 많이 받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친 듯이 일해서 존재감을 주는 사람이 된다고 칩시다. 그것으로 나는 충분히 행복할까? 실제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얻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 정직한 책임을 그런 방식으로 회피하는 것입니다. 신앙 없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습성은 끊임없는 핑계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의 인생이 곤고한 책임과 이유를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태도에서는 찾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곤고한 이유는 남편이 속 썩여서, 자식들이 힘들게 해서, 날 사랑해주지 않아서, 우리 집안에 상처가 있어서, 부모를 잘못 만나서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칩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남편을 만나서 너무 힘들다고 그 남편에게 한 마디 한다고 해서 남편이 바뀌어 줍니까? 남편도 자기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 때문에 자기 자신이 바뀌어 본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본인은 많다고 얘기하겠지만 남편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부모를 만나서 인생을 힘들고 우울하게 산다고 한다면 이제 와서 다시 부모의 뱃속으로 들어가서 잉태를 무효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사실에 대해서 끊임없이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현실로 인정하고 그것은 내 몫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스도인 자세입니다. “왜 나에게 이런 상황을 주셨을까?” 그건 천국에 가서 주님께 물어보십시오. 모든 것을 알 수 있으면 믿음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때로 우리의 인생에는 현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상황을 맞닥뜨릴 때가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칼빈은 그것을 “주권에 복종하는 삶”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다시 태어나면 저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싶지 않고, 다시 결혼한다면 저 여자와는 확실하게 다시 결혼하지 않을 것 같고, 꼭 저 여자와 결혼해야 한다면 독신으로 살 것 같고, 다시 한 번 자식을 낳으라고 한다면 저런 녀석은 낳고 싶지 않고, 저런 녀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면 배우자를 바꿔서라도 다른 아이를 낳아보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현실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왜?”라고 물으면 안 됩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이렇게 물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수많은 선택 속에서 이미 일루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빨리 현실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러면서 모든 지식과 사랑 안에서 주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면 그렇게 나를 가슴 아프게 만들었던 나만의 독특한 상황들이 나를 정말 빛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듣기 좋으라고 한 얘기가 있었습니다. “제가 목사님의 설교에 모두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목사님은 인간을 너무 잘 아십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인간을 그렇게 알기까지 저에게 무슨 사연이 있었겠습니까? 다시 살고 싶지 않은 수많은 사연 속에서 인간을 아는 지식을 넓혀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가슴 속에 있었던 견디기 힘든, 결코 나의 일부가 아니길 바랐던 많은 일들 때문에 결국 마지막에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감옥 속에 갇혀 죽음을 앞두고서도 이 노 사도에게는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사랑, 은혜의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주님 사랑으로 정말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 매일매일 가슴을 때리면서 나를 깨닫게 하는 진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 같은 사람에게 이런 진리를 깨닫게 해 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경에는 항상 눈물이 흘렀고 성경을 깨닫고 난 다음에 부르는 찬송가에도 우리의 눈물이 묻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지식이 사랑을, 그 총명이 사랑을, 그 사랑이 끊임없는 지식과 총명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돌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지금도 주님의 간절한 소원은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주님께 돌아가고 이제 그 지루한 신앙의 침체를 끝낼 때입니다. 다시 여러분의 두 눈이 지식과 총명으로 빛나고 가슴이 주님의 사랑으로 불같이 타오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경륜이 있는 복음 (2017.08.14_ 온가족여름수련회 저녁 2)
2. 목양 받게 하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 1:10)
녹취자: 이배훈
I. 본문해설
사도 바울은 목회자의 따뜻한 심장으로 이 편지를 써 내려갔습니다. 감옥 속에 갇혀있는 몸이었지만 정신은 자유로웠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었고 그의 지성은 생애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복음의 경륜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감옥 속에서도 빌립보 교인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예전보다 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지식과 총명의 증진과 함께 불길처럼 뜨겁게 타오를 사랑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식과 총명이 장작이고 사랑이 그 장작을 태우며 타오르는 불길이라는 비유는 적절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사랑이 풍성해진 성도들을 하나님께서는 목양을 받게 하시는데, 그 목양을 통해서 무엇을 하게 하시는가를 사도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세 가지 목표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순서대로 풀자면 분별하는 것, 그리고 진실한 것, 마지막으로 허물없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을 교회에서 목양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를 세력화함으로 오는 나라는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언제나 이런 유혹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교회는 사람들을 진리로 목양해서 그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을 불러일으켜서 올바른 인생을 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신자들을 교회에 모으시고 질서 있게 목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모든 거룩하고 구별된 삶의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신자를 목양하는 세 가지 목표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II. 목양 받게 하심은
A. 분별함
첫째는 분별함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분별한다는 것은 희랍어 성경에서 ‘도키마조(δοκιμάζω)’ 라는 단어이고 ‘시험해본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비싼 값을 치루고 옷을 샀습니다. 그리고 세탁기에 그 옷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옷에서 빨간 물이 나와서 같이 넣었던 다른 모든 세탁물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서 다른 빨래를 같이 빨아야할 때에는 새로 산 옷을 빨기 전에 옷 일부분에만 세제를 묻혀 빨아봅니다. 그 때 붉은 물이 나오면 다른 세탁물과 같이 세탁기에 넣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험해보는 것입니다. 즉 어떤 작용을 가해서 그 물건이 가지고 있는 참된 성질이 밖으로 드러나도록 조사해보는 것이 시험해본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에서 분별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 분별함은 서로 다른 것들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에는 똑같은 것 같은데 정밀하게 조사하고 시험해보면 같아 보이는 것이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분별입니다. 이것은 교리적인 것과 윤리적인 삶 모두를 포함합니다. 그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목양 받게 하십니다. 피터 오브라이언이라는 학자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습니다. “많은 것 중에서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 19세기 유명한 주석가 뱅겔은 “좋아 보이는 것들 중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행위이다.” 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선한 삶이라는 것은 정확한 지식 위에 쌓아올려지는 것입니다. 선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식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것 없이는 무지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무지한 그늘 아래에서 악한 삶이 만연하게 됩니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범죄 중 50%가 밤중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실제로 일본의 한 도시의 시장 선거에서 한 후보가 야간 범죄를 근절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습니다. 당선 이후 그 시장은 가로등 수를 두 배로 늘렸고 야간 범죄는 반 이하로 줄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도 물리적인 어두움 속에서 하듯이 우리의 지성이 어둡고 혼탁해지면 오류가 난무하게 됩니다.
한 인간이 사람으로 태어나서 소변을 가리게 되려면 돌이 지나도 힘듭니다. 그 아이가 자라 네 살이 되면 어린이집을 가고 이후 유치원을 다닙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6년을 다니고 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쳐 6년을 다닙니다. 이렇게 15년 이상을 다녀야 비로소 사람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터득하게 됩니다. 하지만 기껏해야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리는 지에 대한 상식 정도의 지식을 가질 뿐입니다. 이 정도로는 안 되니까 대학과 대학원을 나오고 직장 생활을 위한 교육을 받는데 그 과정까지 계산하면 결국 사람은 20년 이상의 시간을 교육을 받는 데 사용합니다. 그리고 그 교육으로 이후의 남은 55년 정도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렇게 받은 학교 교육이 인간은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지는 못합니다. 가르치는 교사조차도 이 질문에 대한 정돈이 되지 않은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결국 이것을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면 이 세계의 의미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인간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도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됩니다. 또한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됩니다.
제가 14살 2개월 되는 때에 주일날 교회에 가다가 논둑에 엎드려서 목 놓아 울면서 떠올렸던 질문들이 그것입니다. ‘난 누구인가, 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계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은 정말 있으신가, 신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들은 따로 떨어진 질문이 아니라 모두 하나입니다. 한 덩어리로 된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금고를 열어야 하는데 그 열쇠가 복음입니다. 그 문을 열면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이 있는 성경이 그곳에 있습니다. 그 성경을 중심으로 지식이 실타래같이 우주 전체에 퍼지면서 이 모든 것들이 연결됩니다. 그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지금도 젊은이들이 PC방에서 모여 앉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게임을 합니다. 사람들은 그 게임이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삶이 너무 힘들어서 게임으로 도피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삶에서 진정으로 도피할 수 있을까요? 10시간 이상 게임을 하다가 눈부신 거리로 어질어질 걸어 나오면 다시 엄연한 현실이 자기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인간의 최대의 명제는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누가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살아있는 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버거운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짊어졌던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고 다시 사셨다는 것을 믿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왜 세상 살아가는 것이 똑같이 힘들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다음 세 가지 부류 중에 하나입니다. “그대는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니거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무 지식이 없어서 분별력이 없거나 아니면 은혜가 모두 사라져서 영적으로 말라버린 경우입니다.” 우리는 지식이 없어서 분별력 없는 삶을 삽니다.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루를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서 움직입니다. 매순간 우리는 결정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삶의 목표를 정하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고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 반성하고 기뻐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남편이 너무 속을 썩여 기쁨이 없습니다.” “직장 생활이 너무 힘이 듭니다.” “사업이 안 되어서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습니다.” 이럴 때 저는 묻고 싶습니다. “남편이 속을 썩이지 않고 성실하다면 당신은 인생을 똑바로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사업이 잘 되어 돈을 잘 벌면 똑바른 인생을 살 수 있을까요?”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나마 남편이 속을 썩이니까 새벽 기도에 나오는 것입니다. 주님께 이 남편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업이 안 되니까 하나님을 붙들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제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좋은 조건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도 그 조건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조건이 어느 정도 고통을 덜어줄 수는 있습니다. 그 조건으로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면 우리가 힘들게 예수를 믿을 필요 없이 우리 육신의 필요한 것들을 구하러 열심히 돈 벌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의 명제는 내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받고 싶으신가요? 그럼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뜨겁게 사랑한다고 가정해봅시다. 하지만 그 중의 어떤 사람도 나를 대신해서 나의 인생의 주체가 되어 줄 사람은 없습니다. 뜨겁게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고 결혼하고 한 이불을 덮고 자더라도 내 인생을 내 남편이 대신 살아주지는 않고 내 아내가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을 내가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인생은 마치 여행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느 목적지를 향해서 갑니다. 그 길은 카페트가 깔린 길이 아니라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입니다. 천로역정에서 믿음씨가 겪었던 모든 일을 겪으면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좋은 일도 만나고 때로는 나쁜 일도 만납니다. 우리 믿음을 격려하는 사람들도 만나지만 우리를 유혹하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그리고 한 순간에 인생이 끝장날 것 같은 무시무시한 위험에 처하기도 합니다. 또한 하늘에 오를 것 같은 가슴 터지는 환희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 앞길에 무엇이 펼쳐져 있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도 중요하고 빨리 달릴 수 있는 차도 필요합니다. 먹을 음식도 필요합니다.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우리의 판단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판단은 자신이 내려야 합니다. 처음 가는 여행길에서 그 지역에서 오래 살던 사람이 곁에 있으면 돈이 많은 여행길보다 마음이 놓입니다. 그 사람은 나를 대신해서 판단을 해주기 때문에 나에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의 인생길은 안내자를 따라서 가는 여행길이 아닙니다. 때로는 매우 고독하게 자기 혼자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과 의논을 할 수도 있고 상담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 사람이 나를 대신해 줄 수는 없습니다. 결정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분별력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말씀을 이해하고 지식과 총명을 더해갑니다. 그 지식과 총명 안에서 자라가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현재는 차이가 나지 않는 듯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 오면 오랫동안 축적되어 온 것으로 판단을 내립니다. 그것이 분별력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돌아보면 결정적으로 넘어졌던 지점이 있을 것입니다. 더듬어보면 그것은 판단의 오류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중에라도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입니다. 반성을 통해서 그 빛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잘못 판단해서 인생이 꼬였는데도 판단을 잘못한 자신을 탓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원망하게 될 때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 곁의 사람들은 힘겨운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의 존재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고 삶의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되지는 못할망정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는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분별력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우리의 삶이 자동차라면 지식과 총명은 연료이고 사랑은 폭발해서 힘을 얻어가는 엔진이고 그 차가 똑바른 길을 가게 하는 판단력과 분별력은 운전대입니다.
그 분별력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판단력입니다. 이것이 총명입니다. 또 하나는 체계적인 지식으로 생기는 판단력입니다. 처세술에 대한 책이 잘 팔리는 나라가 한국과 일본입니다. 미국인들은 처세술보다는 경영에 관심이 많습니다. 유럽의 나라에서는 처세술에 관한 책들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 이유는 그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사고하는 훈련을 받기 때문입니다. 문학, 역사, 철학 등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해서 대학을 졸업하게 되면 처세술에 대한 책의 도움이 필요 없고 자기 스스로 사고해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처세술의 스승이 뭐라고 하면 다 따라합니다.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이 나오면 모두가 새벽에 일어납니다. 주체성 없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책들을 읽어야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교인들조차도 기본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는 판단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시인은 말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내 발의 등은 개별적인 지식이고 내 길의 빛은 사상입니다. 그 진리의 빛으로 생각하고 판단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분별력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분별력을 사모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진실함
오늘 성경 말씀은 이렇습니다.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여기서 ‘진실하여’ 라는 말은 헬라어 ‘에일리크리네스(εἰλικρινής)라는 단어입니다. '에일리크리네이스'는 '에일리'라는 단어와 ‘크리오’라는 단어가 합쳐졌는데 ‘크리오’는 판단하다는 뜻입니다. ‘에일리’의 뜻은 크게 2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에일레’인데 태양빛이라는 뜻입니다. 컴컴한 가게에서 돈을 주고받았습니다. 진짜 돈일 줄 알았는데 햇빛에 비추어 보니 가짜 돈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진실하다’라는 단어가 밝은 빛을 받아서 다시 판단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해석은 ‘에일로스’인데 곡식 가루나 액체를 거르는 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진실하다’라는 단어는 검증을 통해서 판단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가지 해석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을지 모르겠지만 어느 해석을 취하더라도 이 ‘진실하다’의 의미는 같습니다. 그것은 검증되었다는 뜻입니다. 진실함은 솔직함과 정직함을 전제로 합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는 진실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강도가 들어와서 칼을 들이대고 돈을 주지 않으면 당신을 죽이고 돈을 빼앗아 갈 거라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이것은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다음 날 훔친 돈을 가지고 와서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빌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말하면 이것은 진실한 것입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솔직한 것이지만 전자는 진리라고 하는 객관적 규범이 없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강도를 하루 종일 괴롭게 한 진리라고 하는 객관적 규범이 있습니다. 이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강도가 한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것이 검증된 판단입니다.
성경에서 진실하다고 하는 것은 진리와 합치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 스스로가 규범이 된 것은 뻔뻔스러움입니다. 내가 나쁜 짓을 했지만 너희들한테 돌멩이 맞는 것이 하나도 안 무섭다고 말하는 것이 뻔뻔스러움입니다. 자신의 삶이 진리의 삶에서 이탈했다는 것을 깨닫고 진리라고 하는 선에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려고 하는 것이 진실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 것이나 하나만 고르라고 복을 탁자 위에 올려놓으셨습니다. 금 수저, 높은 지위, 탁월한 명예, 뛰어난 재주, 그리고 진실이라는 카드가 그것이었습니다. 다른 카드를 모두 밀치고 진실이라는 카드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진실하다는 것은 오늘날 융통성이 없고 주변머리가 없고 꽉 막혀서 사회생활을 잘 하지 못하는 외골수인 사람, 끊임없이 경쟁에서 뒤처지는 사람, 혹은 다른 사람보다 열등하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위장하는 사람의 덕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이 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을 내려다보실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실까요? 남자가 선을 보고 오면 사람들은 그 여자가 예쁘냐고 물어봅니다. 여자가 선을 보고 오면 사람들은 그 남자가 능력 있냐고 물어봅니다. 그 사람이 진실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마음과 행동이 진리에 부합하게 된 상태가 진실함입니다. 이것은 삶의 뜻과 사고가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진 순수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삶의 방향이 정해진 사람입니다. 모든 진실한 사람이 유능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크게 될 사람도 아닙니다. 진실함은 하나의 행동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에 그 성품에서 나온 모든 행동은 진리를 기준으로 정돈되어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때로 넘어지거나 쓰러질 때도 있지만 언제나 그가 가는 길에 일관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대기업 회장처럼 성공한 사업가가 될까요? 구멍가게에 그칠 수도 있고 애들 교육만 겨우 시킬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공직에 나간다면 장관이나 대통령이 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진실하더라고 죽을 때까지 계약직에 머물다 갈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높은 지위를 갖거나 사회에서 큰 활동을 하면 그 크기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정도라고 착각합니다. 이것은 맞을 수도 있지만 틀린 경우도 많습니다. 인생의 가치는 얼마나 빛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실까요?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진실을 제외하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규범이 되어서 자신을 거기에 끊임없이 합치시키며 인생을 걷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이 세상에서 멸시를 받고 외톨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은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자신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외롭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에게서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 철이 들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아도 내 인생의 주체는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 세상 사람들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 세상의 자원을 많이 가지고 있고 좋은 환경에 놓이게 될 지라도 이것은 삶의 양상이지 방향은 아닙니다. 삶의 방향은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성품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번영이나 성공입니까? 많은 재물을 모으는 것입니까? 이것이 삶의 방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내 뜻을 이루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만나면서 그 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자각할 때 내 인생의 꿈과 좋은 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고 이후의 내 삶을 덤으로 사는 인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임금삼아 사는 삶을 미워하고 바로 그 삶 때문에 예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목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이 시대에 이 땅에 있게 하신 뜻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매일의 삶이 하나님의 우주적인 경륜을 성취하는 데에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이러한 복음의 경륜을 이탈해서 스스로 행복해지려고 하는 데에서 생깁니다. 스스로 행복해지려면 하나님과 겨루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악에게 굴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악의 길을 걸어가면서 곤고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훌륭한 증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선을 성취해 가신다는 것을 입증해줍니다. 진리와는 상관없이 세상의 더러운 욕망을 신앙의 이름으로 성취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겠습니까? 세상에서 명예를 구하다가 이번에는 교회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의 방법대로 돈을 벌다가 교회에 와서는 예수의 도움으로 부자가 되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신 복음의 경륜과 우리의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길을 가면 안 되는데 온 몸을 부딪치며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그 길을 갑니다. 이것은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지식이 있어도 이미 마음이 변질되어서 다른 것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할 때 그 대상은 신실하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지 불신자들을 향해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기초가 잘못되면 쌓아 올라갈수록 결국 무너지게 되는 재앙을 초래합니다. 그 기초가 진실함입니다. 여러분들은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만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 모두가 유능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허물이 있겠지만 그 사람은 진리 편에 있는 사람입니다. 미끄러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때에도 진리를 붙들고 회개할 때에도 진리를 사모합니다. 그런 진실한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는 영광입니다.
미가 선지지가 우상 숭배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미 6:6-7)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내가 살아온 삶은 우상을 숭배하고 방탕했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무슨 뇌물을 드릴까 하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일 년 된 송아지를 드릴까,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드릴까, 혹은 당시 바알 종교의 자식을 태워 드리는 인신제사였던 맏아들 제물을 드릴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선지자는 대답합니다.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 무슨 물건을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정의롭고 인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다는 이유로 갑질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고 분노를 느껴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주님이 무엇을 분부하시든지 그렇게 살고 자신의 삶이 주님의 기쁨이 되려고 하는 인격과 성품을 가져야 합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섬김입니다. 오늘날은 그런 진실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진실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님의 진리 안에 있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성도들을 돌보고 목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영원을 섬기는 사람의 중요한 자격은 능력이 아니라 진실함입니다.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 진실한가? 이 질문은 공허한 질문이 아니라 요동치는 삶의 원인을 묻는 질문입니다. 나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쳐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사람됨과 살아감을 진리의 빛으로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그 진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 삶이 영혼의 아름다움을 더해가는 삶입니다. 진실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C. 허물없음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진실해지는 것이지만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허물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누가 감히 나는 허물없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 사람들이 이 구절을 다양하게 해석했지만 저는 초대 교부 크리스소스톰의 해석을 표준적인 해석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분은 이 허물을 고린도전서 10장 32절의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처럼 남을 넘어지게 하거나 자신이 넘어지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흠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에서 허물은 자신의 잘못된 가르침, 도덕적인 잘못된 행동, 혹은 질서에 어긋나는 오류 때문에 자신을 바라보거나 따르는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가 죄나 잘못에 걸려서 쓰러지는 경우가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가 허물없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아갈 때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안 되고 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느 논리학자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인간은 지구 위에서 영원히 삼각형을 그릴 수 없다.” 논리적으로 삼각형을 완전하게 그리려고 하면 완벽한 평면이 필요합니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지구 위에 삼각형을 그린다면 삼각형의 세 변이 둥글게 튀어나온 모양이 됩니다. 실제로는 완벽한 삼각형을 그릴 수는 없을 지라도 우리의 정신세계에서는 완벽한 삼각형을 그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 입습니다. 그 때에는 아무리 모양을 내어봐야 별 볼 일 없는 자신을 생각하면서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 입는 사람은 없습니다. 뭔가 표준적인 사람이 될 것이라는 착각을 하면서 화장품도 사고 신사복도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고 난 후에 마지막에 저는 정말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마지막에는 결국 자신이 주님의 무익한 종이었고 인생은 허물투성이의 인생이어서 주님께 잘못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내 인생의 좋은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게 주신 은혜 때문이었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허물없이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교회에서 목양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식과 총명의 빛으로 우리의 마음에서 사랑이 뜨겁게 일어날 때 우리는 그 자원으로 예전보다 허물없이 온전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사야 5장 2절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었도다.”에서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높고 뛰어난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최상의 섬김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많은 사물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가장 사랑하는 한 분이 되셔서 그 분으로 인해 삶의 질서가 그 분 안에서 재편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의 경륜을 발견하면서 그 복음의 경륜이 이 땅에 펼쳐지는 데 이바지하는 인생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는 그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온전함에 이를 수 없는 자신을 매일 발견하면서도 우리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이는 결국에는 은혜가 이길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때로는 부족하고 넘어지더라도 진리를 사랑하고 진리 되신 주님과 동행하면서 살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나를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연약한 자를 붙드셔서 잘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발은 이 땅에 디디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집안 일 하고 애들 키우고 직장에서 모욕을 받으면서 힘든 인생을 살면서도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의미를 위해서 태어난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불러주신 처음의 소명을 붙들고 미력이나마 영혼들을 섬기며 최선을 다해서 인생을 걸어가야 합니다. 더 많은 지식과 총명의 빛을 주시고 분별력이 있게 하시고 끊임없이 진실하게 도와주시고 때로 때 묻고 넘어지지만 허물없이 살아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작아 보이는 사람이 주님에게는 큰 사람일 수 있고 세상에서 커 보이는 사람이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청년부 수련회에서 교역자들과 점심 식사를 하고 걸어가다가 예쁜 찻집이 있어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소품들을 팔고 있었습니다. 인형, 컵, 도자기, 보자기 등 세계 각국의 예쁜 물건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소녀가 뒷짐 지고 뽀뽀하는 도자기 인형이 있었는데 가격도 너무 싸고 예뻐서 하나 살까 생각하다가 아래를 보니 큰 부대에 한 가득 같은 인형이 쌓여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인형은 빚은 도자기가 아니라 붕어빵처럼 틀에서 찍어낸 인형이었던 것입니다. 그 순간 사고 싶은 마음이 싹 없어져버렸습니다. 붕어빵처럼 찍어낸 인형에는 장인 정신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을 너무 붕어빵처럼 다루는 것 같습니다. 시중에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그런 인생으로 찍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고귀한 인생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도 훌륭하지만, 그 형상을 잃어버린 후에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그 형상을 회복해주시고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더 고귀합니다. 매일 매일 우리의 인생을 빚어가도록 돌아가는 물레 위에 진흙 한 덩어리를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식과 총명으로, 분별력과 진실함과 온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정성껏 자신의 인생을 빚습니다. 완벽한 작품은 나오지 않지만 최선을 다해서 빚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흙을 붕어빵 틀 속에 집어넣고 꽉 찍어서 들고 나오는데 저마다 똑같은 모양의 도자기 상품입니다. 작품과 상품의 차이는 큽니다. 상품은 신제품이 나오면 버려집니다. 작품은 다른 새로운 것이 나올수록 희소성이 높아져서 가치가 올라갑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습니다.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하루쯤은 술 마시고 춤추고 게임하면서 환락 속에서 잊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눈을 뜨고 돌아오면 엄중한 현실이 눈앞에 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분별력이 필요하고 진리 없이는 안 되고 막 살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목사님,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인간이 이 무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살면서, 지식과 총명을 구하고 분별력을 갖추고 끊임없이 회개하며 주님의 은혜로 진리에 합치하려 노력하고 휴식도 없이 남도 넘어지게 하지 않고 자신도 넘어지지 않으면서 살 수 있나요?” 맞습니다.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주님 없이 살면서 힘들었던 것보다는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차피 인간은 타락했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아직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행복해질 수는 없습니다. 지식과 총명으로 무엇인가를 깨달아서 지난날보다 현재 신앙적으로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자신이 발전하는 것이 항상 힘들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고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타오르고 있을 때에는 예배에 나와 말씀을 듣고 돌아가는 길에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 인해 기쁨이 넘칩니다. “주님이 나에게 이런 말씀을 주셨구나. 내가 잘못 판단했구나. 작년의 나를 본다면 그러지 말라고 가르쳐 줄 텐데.” 라고 말할 것입니다.
(찬양) 주여 진실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하루 순간을
주가 주신 힘으로 승리하기를 원하네 주여 나를 진실하게 하소서
진리의 빛이 들어와서 내가 잘못 했다는 것을 깨닫고 눈물 흘리며 회개합니다.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유명하게 되지 말고 부유하게 되지 말고 내가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러면 우리가 훨씬 더 주님 가까이 가 있고 진실해지는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이 무거운 짐이었습니까? 언제나 기쁨이었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 사랑의 불이 마음에서 꺼지면 힘들어집니다. 티끌만한 불꽃이 남아있지만 지식과 총명이라는 연료도 없고 사랑도 꺼졌습니다. 분별하는 것 자체가 힘겹고 진리를 사랑하지 않으니 진리가 눈앞에 있으면 안질 환자가 밝은 햇빛에 눈부셔하듯이 괴롭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별력 있고 진실하고 허물없는 삶을 살도록 당신의 교회에 그리스도인들을 모아서 그들을 일깨워서 주님 앞에 살도록 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그리스도 예수의 날에 이르게 됩니다. 그 날에 우리가 살아왔던 모든 삶을 들고 그 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상품처럼 자신의 인생을 살아왔던 사람들은 어떻게 감히 값싼 상품을 주님께 드릴 수 있을까요? 붕어빵처럼 수없이 많이 찍어낸 것을 어떻게 작품이라고 주님께 드리겠습니까? 그 날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살아가야 합니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랑하는 형제자매가 있어서 외롭지 않습니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고 진리를 위해 서로 격려하고 온전한 삶을 위해 서로 위로하면서 살아갑니다. 쓰러지면 형제의 발을 붙들고 일어서고 넘어지면 서로 일으켜 세워줍니다. 주님의 복음의 경륜에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인생을 맞추면서 살아가면서 예수 믿는 진정한 행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경륜이 있는 복음 (2017.08.15_온가족여름수련회 저녁 3)
3. 복음의 경륜을 이루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 1;11)
녹취자: 허혜숙
I. 본문해설
목회자인 바울은 감옥 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지식과 총명이 필요했습니다. 지식과 총명으로 그들의 사랑이 점점 불타오르게 하고 그래서 그들이 세 가지 삶을 살기를 바랐는데 첫째로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 분별력 있는 사람들이 되고, 두 번째는 진실한 사람들이 되고, 마지막에는 허물이 없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오늘 읽은 마지막 11절은 이렇게 될 때 최종적으로 그들의 삶이 하나님께 어떤 삶이 될 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우리는 이 문장의 주제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서 우리를 목양하시는 우주적인 경륜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목양과 복음의 경륜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들은 교회에서 돌봄을 받으며 이런 저런 많은 일들을 겪으며 신앙이 성장하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합니다.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고 돌아갔다가 쓴맛 다 보고 회개하며 돌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신앙에서 미끄러지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 세계에 있는 교회를 하나의 몸으로 세우셔서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의 성숙을 당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지으신 경륜을 완성하는데 이바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경륜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안에서 그들이 당신과 올바른 사랑의 관계를 맺고 행복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II. 목양과 복음의 경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아주 아름답고 선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셔서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받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총명과 지식으로 모든 사물을 연구하면서 하나님이 선하게 창조하시고 아름답게 창조하신 세계가 인간의 노동을 통해서 그 아름다움을 더 찬란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아름다움의 가능성을 가진 세계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타락하지 않았어도 아마 인간은 끊임없이 이 창조세계를 가꾸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죄가 들어오지 않은 때에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이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명령하셨고 모든 사물들과 함께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정점은 하와를 창조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를 잠들게 하서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최초의 사회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사회구성원은 이 두 사람이었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서로를 향한 고백 속에서 이 사회를 만드셨으니 이 사회는 가정과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인류가 이와 똑같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랑이 모두 하나로 이어지는 우주적 사랑 안에서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사회가 되기를 뜻하셨습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써 이 모든 것이 깨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변경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탁월한 방법으로 원래의 목적대로 이 세상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역사입니다. 구원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드러나지 않았을 탁월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찬란한 사랑을 인간의 역사 속에 눈부시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도 그런 빛이 없었더라면 여전히 이방인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체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렇게 당신의 구원 역사를 전개하시고 그것들을 성경에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위해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실까요? 하나님은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아주 탁월한 질서와 균형 속에서 창조하셨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 눈에 불규칙해 보이는 많은 우주의 현상들은 우리들이 아직 파악하지 못한 또 다른 질서 속에서 전개되어 나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이 우주 속에 지구라고 하는 위성에 아무 의미 없이 던지셨을 리가 없으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들, 심지어는 사탄까지도 하나님 앞에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목적을 지닌 채 이 세상에 창조되었고 확실한 근거를 두고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사람들이 아주 집요하게 이 우주의 근원과 인류의 시작에 대해서 묻는 이유는 마지막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에 이 근원에 대한 물음이 너무나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어떻게 시작이 되었을까? 우리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등등의 많은 궁금증들은 우리가 도대체 누구이고 무엇을 향해서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인류역사에 있어서 많은 철학의 역사와 인류 문명이 발생한 모든 지역에서는 풍부한 먹을거리와 생활할 수 있는 물질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금만 여유가 있으면 집요하게 삶의 의미를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답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명쾌하게 그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제시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 우리 인류가 던졌던 모든 질문, 즉 ‘나는 누구이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세계는 무엇이고, 신은 존재하는가’와 같은 삶의 근원과 목적에 대한 모든 물음이 바로 이 한 줄의 복음 속에 모두 담겨있습니다. 우리들은 이 복음을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은 후에는 그 복음의 심오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물으면서 예수 믿기 전에 우리의 삶을 힘들게 만들었던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성도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알아가는 것이 의무이며, 아는 것만큼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에 그 사랑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해쳐나갈 수 있습니다. 눈만 뜨면 우리는 매일매일을 살아내야 합니다. 오늘 아침도 눈을 떠서 살아있었기 때문에 하루의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찾지 않으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의미를 찾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여기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우리 개인의 인생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시든지, 내가 스스로 찾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내가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은 기반 자체가 매우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이라고 할 때에 ‘자기’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끊임없이 사랑하는 ‘자기’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내 본성에 맞게끔 끊임없이 ‘나’를 사랑하고 내 욕망을 따라가면 ‘나’는 필연적으로 진리의 빛을 떠나 어둠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어거스틴의 표현에 의하면 육체와 영혼이 있어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공평하게 사랑해야 되는데 진리의 빛이 우리를 잡아당기지 않으면 우리는 그냥 육신을 쉽게 사랑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분별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진리가 규범이 되지 않기 때문에 진실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진리를 떠나 살기 때문에 그는 수시로 남을 넘어뜨리고 자기도 넘어지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행복일 수가 있겠습니까? 잠시 쾌락을 맛볼 수도 있고 어둠속에서도 순간적으로 즐거움을 느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영원하고 진정한 행복일 수 있겠습니까?
이런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내가 서 있습니다. 여기가 중국인지는 알겠는데 어디에 떨어져 있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길도 보이지 않고 내 앞에 이어지는 것은 끝없는 벌판과 산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핸드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글맵을 쳐보니까 바둑판처럼 지도가 펼쳐집니다. 화면을 좁히니까 세계 지도가 축소가 됩니다. 그것을 보고서는 내가 중국에 있는 것이 맞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좀 더 확장을 해 보니까 중국 속에서도 신장성에 와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또 조금 더 확대해보니까 몇 킬로 미터를 더 가면 강이 있고 숲이 나오며 도시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에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가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구글 맵 위에 나타난 반짝이는 붉은 점이라면 하나님의 경륜은 구글 맵에 그려진 경도와 위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에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하는 구글 맵을 덮어 씌워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알게 됩니다. ‘이 길로 계속 가봐야 길이 아니구나.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깊은 산속 벼랑 끝으로 가는구나.’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모든 갈등은 결국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당신의 경륜과는 상관없이 사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의 경륜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내가 이 길을 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의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곳에는 따먹을 열매가 많아서, 그저 사뿐사뿐 밟히는 모래밭이 좋아서 걷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우리와 우리의 인생 모든 것은 당신의 소유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모든 소유권을 포기하고 그 분의 주인 되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리석은 인생을 살기 쉽습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맛있는 열매가 있으면 하나 따먹고 벼랑 끝으로 걸어갔습니다. 어느 길로 걸어가서 다시 고국으로, 다시 가족에게로 돌아갈까를 생각하지도 않고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멱을 감는 재미로 살면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순간순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야할 인생의 길이 단지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열매나 따먹다가 죽을 수 없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오늘 하루 누리는 즐거움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대로 살아간다면 내 인생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경륜이 아니면 우리는 인생의 진정한 목적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나라를 위해서, 혹은 이념을 위해서, 혹은 사상을 위해서, 아니면 자기의 취미를 위해서 그것을 자기의 인생의 목표인 냥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로 가거라’ 하고 주신 삶의 목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내 인생의 의미는 나 한 사람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들과 지체들의 인생의 의미가 연결되어 있고, 궁극적으로는 온 인류와 연결이 되어있으며, 마지막에는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관련이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오늘도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입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어느 나라든지 제일 먼저 무력화 시키려고 하는 것이 통신입니다. 자기 폭탄 같은 것들을 터뜨려서 엄청난 자기장이 나오게 해서 한 순간에 구글 지도 같은 기능이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GPS 지도가 없으니까 쏘아올린 폭탄이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되고 공중에 떠있는 비행기도 자기가 어디를 지나가고 있는지 인식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이처럼 인간의 지성과 사상계를 공격하여 갈 길을 잃어버리게 하는데 그것이 사탄의 궤계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가치는 매일매일 하루하루가 즐거우면 끝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해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와 이 사회와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찾아가는 커다란 길을 먼저 정하고, 매일처럼 직장에서 이런 저런 일들을 하면서 세상과 부대끼며 돈을 벌고 살아가고 있는 이 현실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류를 지으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또 나를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목양하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숙제입니다. 인생에 속도도 중요하지만 방향은 속도보다 더 중요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운전에 비유한다면, 모든 사람이 시속 350km의 어마어마한 속도로 단번에 주파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차종들 중에서 시속 350km를 달릴 수 있는 차는 최소한 3억에서 6억 이상 호가하는 고급 스포츠카이어야만 가능합니다. 길이 있든지 없든지는 나중 문제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도 그러하나 모든 사람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속 80km로 가다가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올바른 방향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정하신 우리의 삶의 목적이 부산이라고 한다면 부산에 도착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부산에 도착하는 사람이 없어도 부단히 부산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올바른 삶의 방향을 가지고 걸어가는 자들 가운데 시속 350km를 내는 사람들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의 말할 수 없는 행복과 보람이 있을 것이고, 시속 80km로 가는 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인생의 재미가 있을 것이며, 시속 40km로 가는 사람들 역시 그 사람 나름대로 재미있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시속 220km을 내며 영동 고속도로를 달리는 사람들도 재미가 있겠지만 자전거를 타고 지체들과 천천히 함께 가는 여행도 재미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속도는 각자 하나님 앞에 받은 분량만큼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심각한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 인생을 자기 힘으로 살아가고 필요할 때 원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그런 관계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경륜 안에서 우리 인생을 살아가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그대로 두시지 않습니다. 그들 모두를 교회에 모으셔서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목양하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온전한 신자가 되도록 돌보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시고, 특히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서 전도하게 하시고, 이미 믿은 사람들의 영혼에 하나님의 사랑이 풍성해지기를 갈망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영혼에 풍성한 은혜가 미치기를 소원하게 하시며, 마치 자기 자신의 영혼의 문제인 것처럼 그들을 위해 고민하게 만들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게 만드시고, 그들을 기꺼이 섬기며 우리 자신을 허비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지식과 총명을 공급받음으로써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 은혜를 받을 때에는 정말 분별력이 없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풍성해지게 되자 놀라운 분별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1년 전에 자신이 잘못 한 것, 인생에 있어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을 보면서 자기를 심하게 꾸짖고 싶은 마음이 들고 1년 전에 자신을 생각하면서 저것이 정말 나의 판단이었던가를 생각하며 후회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리고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찼던 사람들을 진실한 사람으로 만드시고, 수시로 사람들을 넘어뜨리고 자기도 넘어지던 많은 사람들을 넘어지지도 않고 온전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 속에 성도들을 모으고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목양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목양하고 돌보는 사람들이 결국은 신앙이 성숙해지게 되는데 그렇게 성숙해 지는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경륜을 세 가지로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이며, 셋째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A. 의의 열매를 맺음
첫째는 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희랍어 성경에는 ‘디카이오수이네’(δικαιοσύνη)라고 되어있습니다.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 ‘디카이오’(dikaióō)에서 나온 명사입니다. ‘의롭게 된 것’입니다.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지만 오늘 설교를 위해서 간략하게 요약을 하자면 이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와 관련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면 하나님 편에서는 인간에게 베풀어주실 은총에 대한 약속이 있고, 인간의 편에서는 하나님 앞에 구별된 백성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할 법의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그 법으로 판단해 볼 때 완벽하게 ‘너는 일체의 흠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인간 중에 한 사람도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고려해서 달아보시기 때문에 절대로 인간이 완전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직접 ‘그 사람은 온전하다,’ ‘너는 완전 하구나’라고 기억해 주십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의’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된 거룩한 인격과 생활을 모두 합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받아들일만한 상태가 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의’라고 부릅니다. 구약에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히 예수님 오실 때 유대인들은 그런 의가 자기 자신의 선행이나 율법적인 공로를 통해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율법적인 의고 여기에서 말하는 이 ‘의’는 율법의 의와 대조되는 새로운 ‘의’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3;21). 그러니까 율법을 완벽하게 지킴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의’를 획득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새로운 한 ‘의’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오셔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시고 당신이 받으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주심으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삼아주십니다. 우리는 그 은총을 입고 나니까 사실은 의롭지 않은 사람들인데도 하나님이 은총으로 우리를 의롭게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이제는 의로운 삶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 덧입은 ‘의’ 때문에 그 의를 따라서 살아가는 우리의 인격과 삶이 하나님께 받아 들여질만하게 된 상태라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것을 ‘의’라고 부릅니다. 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온 이 ‘의’가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된 것, 특히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게 된 것을 가리켜서 ‘의의 열매’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열매는 어떤 식물의 최종적인 결과물이고 그 결과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얻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열매라고 하는 이 비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유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이런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예수를 믿기 전과 똑같이 거짓말이나 하고 저 사람의 말을 자꾸 신용할 수 없게끔 만들면 그것은 의의 열매를 맺는 삶이 아닙니다. 예전에는 비겁했고 세상을 사랑했으며 사람들의 이목이 두려웠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으며 진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진리와 함께 하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비록 완전한 인간은 아니지만 하나님 이외에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직해 질 수가 있습니다. 거짓말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그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농부라면 사과나무를 심은 보람을 무성한 이파리나 튼튼한 나무줄기에서 찾지 않습니다. 가을에 얼마나 좋은 상품의 사과가 맺히는지를 기다릴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농부는 이른 봄부터 뜨거운 여름을 지나 가을 수확 때까지 이마에 구슬땀을 흘리고 그 나무를 가꾸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게다가 과수원 주인인 농부가 그 나무를 길렀지만 그 열매를 맛보는 사람은 그 작물을 위해서 땀을 흘린 농부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맛보는 것입니다. 시장에 팔기도 하고 이웃에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모든 사람들과 함께 그 열매를 맛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앞에 분별력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삶을 삶으로써 불의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미운 물건이 될 수 있겠지만 올바르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러분들이 그들에게 기쁨을 주고 즐거움을 주고 유익을 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면서 늘 지켜야 하는 윤리는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유익을 누릴 수 있도록 내 속에 그 무엇인가가 있게끔 하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티끌 같은 자기 이익을 위해 악을 부리고 피 터지게 싸웁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삽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로 말미암는 의의 열매를 누리면서 살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열매를 보는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그 열매를 맺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빌립보라고 하는 곳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아시아 쪽에 있는 꽤 큰 도시였습니다. 로마 제국이 워낙 영토가 넓었으니까 로마 제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의 로망은 로마에 한 번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조선 시대 때도 한양에 한 번도 못 와보고 죽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을 것 아닙니까? 아직도 서울에 못 와 본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중국에 가보면 중국인들이 북경이나 상해에 못 와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니 신약시대에는 교통이 더 불편했으니까 로마를 가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도 로마에 가보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2500년 전의 로마제국이 깔아 놓은 보도블럭을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당시 지어놓은 만신전이나 성들이 상당 부분 그대로 남아있어서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실제 로마는 우리들이 지금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더 화려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깜짝 놀랄 정도인데 그 당시의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로마가 직접 가서 보게 된다면 이 로마가 얼마나 위대한 제국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눈이 뜨일 텐데 그것을 모두에게 보여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국 곳곳에 로마를 생각나게 하는 도시를 여러 개 만들어놓았습니다. 보기만 해도 로마를 생각하게끔 도시를 건설해 놓은 것입니다. 그중 하나가 빌립보라는 곳입니다. 로마의 건물들을 축소 한 듯한 것을 여러 개 만들어 놓고 로마의 시를 다스리는 것 같은 규칙들을 가지고 그 도시를 다스렸으니 로마는 아니지만 빌립보에 온 사람들은 이 도시도 이렇게 아름답고 기가 막히게 발달한 도시인데 이 도시가 본뜨려고 했다는 로마는 얼마나 더 대단한 도시일까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로마를 본뜬 빌립보의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완성하고자 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로마라면, 교회는 바로 빌립보입니다. 빌립보를 본 사람들이 그 원형인 로마에 가고 싶어지듯이 교회를 본 사람들이 그 원형인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하도록 만드시기 위해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은 장기적으로 보면 인간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결국 교회를 거룩하게 만드셔서 당신의 역사의 목적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보면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뜨거워지고 분별력이 있으며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사람들이 그 교회를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뜨겁게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사회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보다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그 나라는 얼마나 더 아름다운 나라일까요? 그러니 사람들은 또한 그 하나님 나라를 얼마나 더 그리워하겠습니까? 당연히 자신도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맺고 싶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워 놓으신 경륜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성도들이 충성하든 충성하지 않든, 많은 교회의 등불이 꺼지든 밝은 빛이 빛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마지막에 당신의 권한으로 능력있게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가 건설해 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그 나라를 오게 하십니다. 우리는 그 나라가 올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가 오기를 이 땅에서 갈망하면서 살지만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룬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나라가 이루어지길 바라보면서 그 나라에서 누리게 될 생명과 사랑을 이 땅에서 앞당겨 누리는 것이며, 그때에 실천해야 될 윤리를 이 땅에서 앞당겨서 실천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에게 그 윤리를 아주 명백하게 보여주셨는데 그것이 산상수훈의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 것인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쳐주신 교훈들은 현실하고 잘 안 맞습니다. 아니 현실하고 맞으면 더 이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윤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 실현 될 때 펼쳐질 윤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곳은 지금 여기에 있는 세상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속에 이미 침투되어 들어와 있지만 아직도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에 의해서 지배되기 보다는 이 세상 사람들의 욕심에 의해서 지배되고 투쟁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그 윤리를 이 땅에서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많은 경우 우리에게 고난과 불편을 가져다줍니다. 교회는 마치 로마를 비쳐주는 빌립보와 같아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혹은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이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저런 존재, 저런 평안, 저런 윤리, 저런 사상, 저런 사고방식으로 인생을 보면서 살게 하실까’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그 의는 율법이 말하는 의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 9절에서 말합니다.“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러므로 결국 의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정의의 완성입니다. 정의의 마지막 목표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끊임없이 사랑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덧입혀주신 그 의 때문에 우리의 인격과 삶 속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은 그 열매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면서 살라고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어떻게 살면 나에게 좋은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한가? 이것보다 하나님의 이 경륜을 지도 삼아 나의 인생의 계획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의 올바른 계획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의 은혜입니다.
적합한 비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지도를 펼쳐놓고 세계를 여행할 아주 신나는 계획을 짰습니다. 그런데 막 출발하려고 보니까 뉴스가 떴습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여행 경로 곳곳에 지진 예보가 있고, 태풍도 오고, 전쟁과 폭도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여행계획을 바꾸지 않겠습니까?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교회를 세워놓고 우리 인생을 살게 하신 큰 지도를 우리는 먼저 고려하면서 우리의 인생계획을 짜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내 삶이 어떻게 하나님의 이 우주적인 계획을 이루는데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하는 삶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직장을 다녀도 밥을 벌어먹기 위해 다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다니는 사람입니다. 애들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면서 힘들게 살아도 그것은 가정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중에서 의미를 찾으면서 땅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가치를 향해 살아가는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세상 사람들은 외적인 성공이나 번영 업적에 눈길을 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치는 다릅니다. 티끌 같은 한 인간으로, 연약함으로 쌓여있는 한 인간으로 시련과 고난과 어려움을 만나면서 갈등 속에서 인생을 살지만 하나님이 나를 사람으로 지으신 뜻, 교회를 세우신 목적, 인류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이끄시는 그 위대한 계획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대답할 수 있을 때 그는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위해 사는 사람이고 땅에 살아가고 있으나 하늘 가치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런 목표와 의식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영광과 찬송을 받으심
둘째로, 이런 사람들이 오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렇게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이 풍성해져서 분별력이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게 살면 하나님에게 우리의 삶이 영광과 찬송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광과 찬송이라는 말은 동일한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 곧 찬송이 되게 하시니라’ 바로 이 뜻입니다. 여기에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영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거기에 계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며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시며 우리에게 참된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시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영광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불리지만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들었다 놨다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당신의 이름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높아지기도 하고 땅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높이 들려 올려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송하게도 만들고 땅에 떨어져 하나님을 멸시하게도 만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입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주기도문 속에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이 주기도문 속에서 가르쳐주신 첫 번째 기도이고 나머지 모든 기도는 이 첫 번째 기도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 내지는 전개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나라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가장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우리를 위한 간구가 나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처럼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악에서 구해달라’는 이 모든 기도를 우리에게 드리라고 하신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탐욕과 아주 더러운 욕망으로 주위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만 배가 터지게 먹는다면 거기에서 주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지체들이 한 번 잘못 한 것을 가지고 가슴에 칼을 품고 일평생을 원수처럼 여기고 살면 그런 사람이 모인 사회에서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을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시험에 들고 악에 빠지게 되면 그를 통해서 주님의 이름이 높아질 수 있겠습니까?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은 주기도문의 모든 기도제목들은 마지막에 하나의 수련입니다. 맨 처음에 나오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후대에 첨가된 것이기는 하지만 마지막에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는 기도는 사실 1번의 기도를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두 개의 꼭지 점을 중심으로 이 안에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에서 전개가 되면서 마지막에 영광을 돌리는 찬송으로서 마무리가 됩니다.
결국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영광’, 곧 ‘찬송’이 되게 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것의 마지막 목적입니다. 목적과 목표는 다릅니다. 목표는 목적의 수단입니다. 목표는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목적은 하나입니다. 전쟁에서의 목적은 승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쪽으로 바꿔볼까?’와 같은 방향전환은 없습니다. 그것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승리를 이끌 것인가에 대한 목표들은 변경될 수 있습니다. 공군을 주격으로 싸울 것인가? 해군을 주격으로 싸울 것인가? 이런 것들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기습공격을 할까 아니면 전면전을 펼칠까는 목표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목적은 바뀔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영광, 곧 찬송을 받으시는 것은 궁극적인 목적이기에 바꿀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찬송을 돌리는 주체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신 일을 보고 감동을 받은 인간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에게 지식과 총명으로 우리의 사랑이 불 일듯 일어나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분별력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는 분별없이 행동하면서 살면 마지막에 주님의 이름에 누를 끼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진실하지 않으면 복음이 욕을 먹게 됩니다. 많은 허물 속에서 잘못된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의 교회가 욕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이 모든 것들을 우리에게 교회라고 하는 이 울타리 속에서 목양을 받게 하심으로서 우리를 그렇게 분별력 있고 진실하고 허물이 없는 사람들로 만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보며, 또 그리스도인들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리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가치는 순전한 사랑과 지식으로 주님을 보여주는 것이고, 신자의 삶의 존재의 이유는 자신은 사람들에게 잊혀 져도 사람들이 자신 때문에 예수를 생각하게 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더라도 우리가 가장 행복했던 때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실 때였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이 모든 것을 통해서 기뻐하실 그때에 우리 마음에 즐거움이 있고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찾는 행복과 주님이 찾는 행복 사이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일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일치가 되어서 한 목표를 향해서 걸어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아우라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영광과 찬송이 되는 삶을 살아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이 모든 지도가 분명해집니다. 많은 혼란에서 벗어나서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탐욕을 버리고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통해서는 큰 영광을 받으시고 어떤 사람들을 통해서는 적은 영광을 받으실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든지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데 쓰임을 받으면서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영광 곧 찬송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그리스도 때문임
마지막으로 이것은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열매의 근원이 되는 ‘생명’을 보여줍니다. 바리새인적인 율법주의로 행해서 맺은 행위의 열매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맺은 열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생명이 아닙니다. 생명은 하나님께 있는데, 하나님이 당신의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고, 아들은 당신에게 접붙여진 교회에 주셨으며, 교회의 한 지체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생명을 분여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충만한 생명과 사랑 때문에 거기에서 우리들이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져 있을 때에는 수시로 좋은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하고 자신의 삶을 개선해 보고자 아무리 다짐을 해도 실제로 이행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이유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생각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실제적인 사랑과 생명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말씀의 은혜에서 멀어집니다. 동시에 성령의 감동에서 멀어집니다. 어느 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니까 잘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인생을 행복하고 재미있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자기만 너무 힘겹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자기만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어느 한 순간 확 밀려옵니다. 게다가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납니다. 일생을 살면서 이 사람들을 위해서 살려고 했는데 왜 떠날까라는 생각이 확 밀려옵니다. 그리고는 인간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섭섭한 생각이 막 밀려오는 것입니다. 원망스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일단 한 사람을 원망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한 순간에 사라집니다. 사람에게 원망이 없어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을 수 있는데 사람을 원망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생각까지 듭니다. ‘인간들 모두 필요 없다. 모두 나를 배신한 사람들이야.’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이 없어서입니다. 자녀들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도 모두 떠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장가를 보내놓고 그 아들이 아직도 자기 아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랍니다. 그 아이는 이제 며느리의 남편입니다. 못 말리는 사람들이 며느리보고 딸 삼고 싶다는 사람들입니다. 말 같지도 않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딸은 예쁜 도둑, 며느리는 그냥 도둑, 아들은 날강도, 손주는 떼강도.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생각이 들어오면 말할 수 없는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들면서 여태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해서 부당하게 대해주는 것 같은 반발심이 듭니다. 모두다 우리에게 생명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아들 딸이 있어서 20-30년을 재미있게 살았다. 돈을 벌어야 할 이유를 제공해 줬고, 아프고 병들어서 괴로울 때도 있었고 속 썩일 때도 많았지만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찾을 수 있었다.’ 고 하면서 그 아이들이 자라오면서 경험했던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많으면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해 줄 수 있도록 태어나 줘서 고맙고, 20년 혹은 30년 가까이 내 딸로 살아줘서 고맙다. 이제는 사위의 아내가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나는 너무 즐겁고 행복했다.’ 이렇게 마음속에 생명이 넘치면 그렇게 괴롭고 고통을 받아야 할 이유가 기쁨과 찬송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살다보면 누가 그렇게 자기 마음에 쏙 듭니까? 제가 늘 이야기 하지만 그렇게 완벽한 남편이면 어떻게 자기 차례가 왔겠습니까? 벌써 더 좋은 여자들이 데리고 갔습니다. 완벽할 정도의 여자이면 자기차례가 안 왔습니다. 더 능력 있는 남자들이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자기 주제를 파악해야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아, 저렇게 모자란 부분이 있었구나. 자기도 모르고 살아왔을 것인데, 얼마나 힘겹게 살아왔을까? 수많은 상처를 소낙비처럼 맞으면서 상처투성이로 살았을 텐데 내가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사랑하며 살라고 하나님이 그의 아내로 부르셨구나’고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불러주셔서 저런 사람을 온전케 하심으로서 받으실 영광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생명과 사랑의 방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신앙을 안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수없이 핑계를 대고 수없이 이야기를 하지만 마지막에 돌아가 보면 ‘내게 사랑 없음이며 생명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짜로 은혜가 충만한 목회자들은 교회에 조금의 어려움이 있는 것을 보면 도전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회를 통해서 자기를 얼마나 쓰시는지를 보여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뭡니까? 생명과 사랑입니다. 그것이 없는 목회자들은 ‘너무 힘들다. 다른 교회로 가 봐야겠다, 어디 좋은 교회 없을까?’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과 사랑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애를 낳아놓고서 하는 말이 ‘이 아이가 안 태어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이야기합니다. 그 아이가 다시 뱃속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이미 태어났습니다. 그 현실을 투덜거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런 마음은 끊임없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것입니다. 현실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하든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생명과 은혜를 달라고 빌어야 됩니다. 그런 생명과 은혜는 분명 우리 인생의 문제에 대한 해석을 바꿔놓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힘을 발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서 그런 생명과 사랑이 한없이 솟아나느냐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 때문에’ 라고 말합니다. 삶에 어려움과 고난을 닥치고 부정적인 생각들이 확 밀려오면 그것을 모두 걷어내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찬송)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 만 바라볼지라
‘네 아내가 너를 외롭게 해서 내가 너를 떠났느냐? 자녀들이 너를 떠나서 내가 너를 버렸느냐? 많은 사람들이 너를 홀로 외롭게 두어서 나도 그 사람들처럼 너를 떠났느냐?’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아, 아닙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사람들의 태도 하나하나가 내 인생을 흔들어 요동치게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내 곁에 계셨습니다.’ 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한 순간에 은혜가 확 밀려오면서 찬송이 나옵니다.
(찬송)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지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아, 그렇다 모든 복의 근원은 주님이신데 주님이 내 안에 있는데 무엇이 섭섭할까?’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생명이 다시 충만하게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도 부릅니다.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며 그 관계 때문에 한없이 행복해 하고 기뻐하는 사람, 마른 막대기와 같은 나를 사용하셔서 주린 영혼들을 먹이시고, 쓰러진 영혼을 일으켜 세우시며, 생명의 기운이 사위어 가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 속으로 들어가게끔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찬송하는 사람이 바로 생명의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자가발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을 예수에게 주셨고, 그 예수를 통해서 교회와 그 몸에 접붙여진 우리 모두에게 분여되어 누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생명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기도합니다. 어제는 어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로 살았고, 오늘은 오늘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부어주시는 생명과 사랑이 있기에 비록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없고 천사의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예수를 사랑할 수 있으며, 어두워진 이 세계 전체를 찬란하게 빛나게 할 수는 없지만 세상 한 귀퉁이에서 작은 불빛이 되어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혜택을 보여 주고 그 진리의 빛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인도해 주며 살 수는 있습니다. 목숨 다하는 날까지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의미 없이 인생을 살면서 어둠속에서 흐느끼고 울었을 쓰레기 같은 인간을 사용하셔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시고,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하나님의 온 우주를 창조하신 경륜을 가슴 벅차하며 자신의 인생의 초점을 하나님의 그 위대한 계획에 맞추며 살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섬겼던 수많은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아, 이런 쓸모없는 인간을 사용하셔서 이 영혼을 살리시고 저 영혼을 일으켜 세우시고 외로운 그 영혼의 눈을 뜨게 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보여 주셨군요. 주님은 더 이상 나에게 잘 해 주실 수 없을 정도로 나를 후대하여 살게 하셨습니다. 아멘.’ 이것이 성도의 인생의 끝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 있겠습니까?
어느 목사님을 만났는데 맨 처음에 유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혜성같이 나타났다고 칭찬했답니다. 그런데 벌써 은퇴할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나타났는가 하면 한 순간에 끝나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 엄청난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다만 눈을 뜨면 살아있는 날 동안은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저는 오늘 여러분들의 일상생활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천국의 공리공담을 늘어놓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먼 나라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일 눈을 뜨면 ‘나는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명제에 대한 답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되는가? 열심히 기도하지 않고 있지만 열렬히 기도한다면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못 해서 안 하기도 하지만 뭘 기도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접붙여져 있고, 나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고 매달려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모든 삶의 진로를 그분의 창조의 목적, 구속의 계획에 가지런히 합니다. 매일매일 살아가는 삶이 살 수밖에 없는 삶이 되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안에 평안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에 있든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과 동행하면서 힘닿는 데까지 바르게 발견한 인생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요동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까지는 파도치는 바다 위에서 쪽배에 올라탄 것 같은 인생을 살았다면, 이제 그 배를 버리고 항공모함 같은 배에 올라 타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요동치는 이 세상의 행복과 불행에 들뜨거나 좌절하지 않고 세상의 파도를 가르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교회를 세우시고 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면서 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4. 물은 피보다 진하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 1:8)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여름 수련회 때 9절과 10절, 11절을 설교했고 오늘 설교로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득불 경륜이 있는 복음 네 번째 설교를 오늘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물은 피보다 더 진하다’라는 제목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잘 짜인 직조물과 같습니다. 씨줄과 날줄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천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짜여 갑니다. 하나의 직조물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지으신 경륜이고, 또 하나의 직조물은 나라는 사람을 하나님이 무엇에 쓰기 위해서 창조하셨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경륜이 함께 짜여 가면서 우리의 인생은 천이 직조되듯이 그렇게 전개되어 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기라고 하는 이 인생이 하나님이 이 온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생각은 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조차도 일반 계시의 빛으로 하나님의 이 경륜에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만큼 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복음을 통해서 이 경륜의 의미를 안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으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고 특히 인류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한 사람을 짓고자 하지 아니하시고 여러 사람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사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남편과 아내로, 부모와 자식으로, 그리고 한 나라의 국민으로 서로 만나고 연관을 지으면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삼위간의 교제의 모상을 본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여기고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옆으로는 모든 인류를 알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을 알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앎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이 세상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더 가꾸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가 인간의 섬김에 의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에 창조주라는 사실을 더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드러내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고, 처음부터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동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은 바로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지으시고 인간 사회를 만드신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조차도 자신의 인생의 행복을 하나님의 이 창조 목적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얼마간의 지식은 있지만 그것과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리고 이 사회와 교회가 자신의 인생에 무슨 의미를 주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가치 판단에 있어서 최고층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사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물이 없는 메마른 땅을 방황하는 것처럼 인생의 힘든 길을 지나는 것입니다. 신자의 인생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따라 전개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이 구원 계획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타락에 의하여 좌절된 것처럼 보이는 계획을 다시 완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께서 절망적으로 당신을 떠나 불행해진 인간을 어떻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입니다. 그래서 금고 속에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면 복음은 바로 그 금고를 여는 열쇠와 같은 것입니다.
II. 경륜에 참여하는 마음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목양하시는 것은 사랑을 풍성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풍성함은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지식이 사랑과 결합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상적인 생활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실제 삶의 뚜렷한 세 가지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통하여 성도는 이 세상 사람과 구별되고 교회는 이 세상에 있으나 세상과 구별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고, 두 번째는 진실함이고, 마지막에는 허물이 없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두운 세상 한복판을 걸어가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 세상에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이런 삶을 삶으로써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게 되는데 그것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복음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썼습니다. 어쩌면 사형을 받을지도 모르는 몸으로 간절한 이 편지를 목회자의 심성으로 써 내려갔습니다. 이 9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은 사실은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섬기는 이유이고, 어쩌면 살아있는 목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인생의 본질적인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8절은 바로 사도 바울이 이 일을 어떤 마음으로 열망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목회자로서 사도 바울이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인 동시에 하나님의 복음의 경류 안에서 목양을 받는 모든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에 참여하는 마음입니다.
A. 예수의 심장을 가짐
첫째로 그는 예수의 심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라고 말합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사랑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평범한 표현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예수의 심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라고 말합니다. 어떤 주석가는 여기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배열에 주목합니다. 즉, 예수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인간이신 예수를 보여주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기름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인간 존재인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그리스도는 신적 존재인 예수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셨고 동시에 인간이 마땅히 어떠한 삶을 살고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에게는 예수 따로 그리스도 따로 이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예수를 통해 나타났고, 예수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 안에 있는 개인적 인격적 사랑이 아니라 사도 바울도 자신으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게 하신 그 어떤 사랑 때문에 그 사랑에 매여서 이들을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심장으로 번역된 희랍어 단어가 ‘스프랑크나’(σπλάγχνα)라고 하는 희랍어인데 이 단어의 뜻은 ‘창자’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의 좌소가 심장이 아니라 창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창자는 인간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 그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삼으셔서 이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보내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보내셨는지를 마태복음 9장 36절 이하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신 이유였습니다. 그들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것이 매우 가슴 아프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때에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이 희랍어 ‘스프랑크니스데’(ἐσπλαγχνίσθη)라고 하는 동사인데 ‘창자가 떨리기까지 움직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자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혹은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파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기 때문이더라고 번역이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도 이와 똑같이 예수님의 심령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내면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신 것처럼 사도 바울도 그 마음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며 우리의 인생의 갈 길과 하나님의 복음의 경륜이 하나의 직조물처럼 짜여 간다는 것을 눈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심장은 마음과 생각과 뜻, 모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유격을 동반한 이유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예수의 마음과 생각과 뜻에 사랑으로 자신을 완전히 합치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그로 하여금 예수의 분신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지상에서 성화의 끝은 어디까지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깨어지고 변화되고 자기 자신이 새로워지면 그 마지막은 어디에 도달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의 심장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같은 마음,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뜻을 가지고 그 분이 지금 내 삶의 자리에 사셨더라면 되셨을 존재와 사셨을 그 삶을 이어가는 것이며, 그러나 내 안에 진정으로 살게 하시는 이는 예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와는 다른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예수가 여기 계셨더라면 기도하셨을 그곳에서 기도하고, 섬기셨을 그곳에서 섬기고, 우셨을 그곳에서 함께 울고, 마지막에 죽으셨을 그곳에서 함께 죽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교회를 놓고 비유하자면 제도로서의 교회는 육체입니다. 그리고 그 육체에 깃든 영혼은 예수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튼튼하고 건장한 몸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의 정신이 썩어 있으면 그 건강한 육체 혹은 지식을 가지고 사회를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제도로서의 교회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립적입니다. 물론 그 제도도 잘못된 제도가 있을 수 있고, 성경에 가까워서 보다 더 좋은 제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는 생명 자체를 생산해 내지 못합니다. 제도는 사랑 그 자체를 생산해 내지 못합니다. 생명과 사랑은 그 속에 깃든 예수의 정신 속에서 공급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교회 전체를 제도로서의 교회라고 본다면 제도라는 육체 속에 예수의 정신이라는 영혼이 충만히 채워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의 정신으로 사무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서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의 사회가 되게 하신 교회의 경륜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읽어냅니다. 산란해 보이는 우리의 인생 위에 하나님의 경륜의 위도와 경도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깜빡이는 하나의 점으로서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게 되고, 나의 사랑하는 모든 지체들과 함께 한 공동체로서 역사의 지도위에 우리는 어디를 항해하고 있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합치시킴으로써 잠시 살다 사라진다 해도 영원히 있을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심장을 가진 지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순수한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경륜에 이바지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성도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 추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치는 제도로서의 교회의 크기가 아니라 순수성입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며 자신의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하나님의 경륜에 합치시킨 체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원래 예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나요?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없는 신성모독자라고 생각했고, 이단 중의 괴수라고 믿었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모든 무리들을 박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신의 부르심이라고 착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의 심장’이 아니라 ‘반(反) 예수의 심장’이 이글거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변하여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의 회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워낙 악랄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때문에 반(反) 예수의 심장이 바뀌어 예수를 위하는 심장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분만이 참 구약 성경에서 그렇게 꿈꾸고 그리워하던 메시야이시고, 이스라엘과 모든 인류의 소망이 그분의 부활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살아가면서 그는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 모든 시련과 고난 속에서 깎이고 고통을 받으며 그는 아직까지도 자기 안에 남아있는 이 세상의 정욕과 죄들을 씻어내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았습니다. 지성적으로 성숙하면서 그는 영적으로 더욱 깊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이 편지를 쓸 때쯤이면 아주 우주적인 경륜을 이해하는데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사역과 선교, 섬김을 더듬어 근원으로 가면 거기에는 바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죽으신 주님, 그 복음이 이 사람 속에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 예수의 심장을 가짐으로써 이 구원 경륜에 사심 없이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계획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데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B. 지체들을 사랑함
둘째로 이 사랑으로 지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물은 피보다 진하다’라고 잡았습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요한 사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물은 피보다 진하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물은 세례를 통해서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는 그 물이며 피는 지상의 혈육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이 피보다 진하다’라고 하는 것은 세례를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그 물은 지상의 어떤 혈육의 연대보다도 더 크고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물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의 의미를 통해서 우리를 예수와 연합시키시는 그 신학적인 뜻에 더 깊은 하나님의 경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 물이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움직이는 피보다 더 진할까요? 물을 통해서 사람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집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와 생명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생명을 개인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몸에 접붙여져 그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그 자체가 개인적이지만 공동체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받은 구원의 의미와 개인이 받은 구원의 의미가 찢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잘못된 생각들은 서구의 자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들어 낸 해석들입니다. 개인 개인이 예수께 접붙여지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은 처음부터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물을 통해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새로운 사회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회입니다. 우리 몸속에 있는 피는 기껏해야 우리 육신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지만 이 세례를 통한 물의 연합은 그 교회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이 그 연합을 통해서 공유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과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사회를 이 세상 속에 불러내신 그 위대한 경륜을 성취하며 살아가는 사회가 됩니다.
따라서 내 인생의 의미는 나와 함께 구원을 받아 예수의 몸이 된 지체들의 인생의 의미와 필연적으로 엮어져 있고, 모든 지체들의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이 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사회를 이 세상에 두셔서 세상 나라 속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와 구별되게 하신 주님의 위대한 경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하늘의 생명과 사랑을 공유합니다. 도저히 인생을 살아갈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은 신기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생명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래서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하고 눈물로 베개 잎을 적셔도 아침이면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하늘의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간관계, 때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삶의 정황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지만 그러나 나의 능력을 모두 포기하고 주님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는 깊은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이기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영혼 안에, 우리의 창자에 공급해 주시는 하늘의 생명을 경험합니다. 이 생명은 곧 사랑이니 이 사랑의 힘으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십자가처럼 기쁘게 짊어지며 사랑하도록 만들어주시고, 심지어 내게 심각한 악을 행하여 헤아릴 수 없이 고통을 준 사람들조차 아버지께 그들을 위해 용서를 빌 아량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실천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완전히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에 살기 때문이고, 내 안에도 하나님의 천국이 완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와 다투고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의 구원이 끝난 뒤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사회, 이것의 맛보기입니다. 그 사랑의 사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이 세상 나라와 또 다른 나라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할 인류의 이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그 사랑이 불일 듯 일어나야 합니다. 타오르는 불길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면 지식과 총명은 그 불길을 지속하는 장작과 같습니다. 신자는 성화 생활 안에서 그 모든 지식과 총명을 사모함으로 언제나 그 사랑이 가슴속에 충만하여져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추루한 자기 사랑을 끊임없이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를 모두 버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지체와 이웃을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안에서 우리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보람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충만한 사랑에 만족하며 그 사랑에 빚진 자임을 자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 속에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내가 그 분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눈물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셨으니 너희를 구원하신 데는 이런 위대한 경륜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말입니다. 증인은 법정에 서서 사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사도는 사형을 받을지도 모르는 죄수의 몸으로 옥 속에 갇혔으면서도 옥 바깥에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보다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수없이 권면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지체들을 사랑한다는 고백에 참여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둘째는 바로 이 증인이 자기 안에 현재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이시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들이 받을 그 부활의 열매의 보증입니다. 그래서 믿는 신자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가 마지막 날에 우리의 몸이 완전히 부활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게 될 것임을 하나님이 보증을 하셨는데 그 보증이 도장이고, 그 도장이 바로 우리 안에 주신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는 오늘 성령이 자기 안에 계신 것이 바로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하는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요약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도록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 경륜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야 하고, 이 심장으로 지체들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면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경륜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한번 가면 오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신자는 누구일까요? 우리의 정체는 언제나 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입은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영원히 부채로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이미 우리의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나의 인생은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위대한 경륜을 위해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라는 고백이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제 자신의 꿈을 따라 인생을 살도록 설계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따라 인생을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세팅하신 사람입니다. 인생의 가치를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지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복음의 경륜이 신자의 삶의 이유가 되어야 하고, 신자의 모든 인생의 계획은 그 위대한 경륜 속에서 그려져야 합니다. 주님의 이 선하신 부르심을 따라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아직은 그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길에는 속의 근심, 밖의 걱정들이 에워쌉니다. 그리고 때로는 악한 마귀와 그리고 이 세상의 권세들이 우리를 두릅니다. 우리는 그런 속에서 선한 뜻을 이루며 살기 위해 악한 이 세상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경륜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름을 따라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그 모든 생명과 사랑의 힘을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공급해 줍니다. 시련과 고난으로 연속되는 이 세상을 이길 힘은 땅에서 오지 않습니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인생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깁시다. 그리고 한번밖에 없는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서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은 그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 때문에 당신의 뜻을 이룰지를 생각합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의 은혜로 이 예수의 심장을 되찾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