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청년부 여름 수련회
경륜이 있는 복음
김남준
2017. 07. 30 - 2017. 08. 20 (4회)
목 차
첫째날: 사랑이 풍성해짐 (빌1:8-9) p.5
I. 본문해설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빌립보교회를 생각할 때 감사가 넘쳤음
그의 기도를 통해 구원의 신적 경륜을 봄
복음과 구원은 거저 주어지지만 계획이 있음
그 계획을 알며 사는 것이 기독교의 인생관임
II. 경륜이 있는 복음
삼위일체 하나님의 뜻이 경륜을 통해 드러남
경륜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그 펼쳐짐
감춰진 경륜과 드러난 경륜의 관계
창조 경륜이 구원 경륜을 통해 완성됨
인간을 참여하게 하셔서 경륜을 이뤄 가심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냄
타락한 인류의 구원과 교회, 그리고 성화
그 신적 경륜의 빛 아래서 우리의 인생을 봄
“내가 기도하노라”(9절) 주님의 소원을 제시함
III. 사랑을 풍성케 함
“너희 사랑” 아가페 사랑에 반응한 사랑
위대한 경륜은 아가페 사랑에서 시작함
그 경륜의 전개에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참여함
교회의 최고 사명: 주를 사랑하게 함
모든 목양의 목표는 주를 사랑하는 것
전도: 하나님을 사랑치 않는 자를 사랑하게 함
목양: 조금 사랑하는 자를 크게 사랑하도록 돌봄
IV. 사랑이 풍성해지는 길
복음을 통해 아가페 사랑을 알고 반응한 사랑
불신자에게 없는 사랑을 신자에게 주심
그 사랑은 소멸하지 않지만 상태는 가변적임
성화는 하나님께 대한 순전한 사랑의 성장임
인격 안에서 그 사랑이 풍성해져야 함
A. 지식과 총명 안에서
- “지식과 모든 총명 안에서...”(9)
1. 지식(epignosis)
“사물에 관한 온전한 앎”을 의미함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 한 분이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빛 아래 통합된 지식
이 지식의 증진과 함께 사랑은 풍성해짐
a. 성경을 통해서 깨달음: 진리
b. 성령의 역사를 힘입음: 조명+감화
c. 지성의 탐구를 추구함: 친밀
- 이는 인격적 경험으로 통합된 지식
- 이 지식의 증진으로써 사랑이 풍성해짐
2. 총명(aisthesis)
“깨닫다” aisthanomai에서 유래
다른 판본에서는 noesis로 표기함
“인식, 이해, 판단” 실천적인 이해
행동, 환경에 대한 이해와 말의 분별
지식-이성, 총명-판단에 관여함
“모든 총명” 범위 아닌 깊이 (J. Calvin)
다양한 상황에서 효과 있는 판단력
적용적, 실천적, 구체적 판단의 능력
이런 판단력 제고로 사랑이 풍성케 됨
B. 사랑이 더 풍성해짐
“더 풍성하게 하사” perissheue
“어떤 테두리 안에 점점 넘치도록 풍부해지는 것”을 의미
감사, 영적은사, 하나님의 영광을 묘사함
넘치는 사랑이 지식과 총명을 통해 풍성해짐
동시에 사랑은 지식과 총명을 증진함
사랑할수록 지식과 총명이 더해짐
불은 장작을, 타는 장작은 불을 확산
이 관계에 대한 T. Aquinas의 설명
a. 신자 안의 성령은 지식과 진리 주심
b. 그런데, 성령님은 곧 사랑이시다
c. 사랑은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한다
d. 사랑은 신자 안에 올바른 성향을 형성함
e. 이 사랑의 성향으로 올바르게 판단
지식 단지 공부 아님: 기도, 묵상, 실천
이 과정을 통해 점점 사랑이 풍성해짐
충만히 넘치는 사랑을 통해 신적 경륜을 이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함
하나님의 사랑으로 상승하고 그 사랑 때문에 하강함
그 사랑은 존재의 질서를 따른 사랑임
무엇보다 사모할 것이 곧 이 사랑임
V. 적용과 결론
감옥에 갇힌 목회자의 간절한 기도
교회와 신자들을 향한 예수의 소원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대신 싫증과 게으름이 가득함
첫 사랑 은혜의 때를 기억하라!
지식에 목마르고 총명을 사모했다
태만한 자기 신앙 온갖 핑계 찾는다
but 하나님은 아신다. 사랑 없음을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신다
그분을 사랑하는 목회자와 성도들도
이제 지리한 침체를 끝내고 돌아오라
둘째 날: 목양 받게 하심 (빌 1:10) p.21
I. 본문해설
- 바울은 목회자로서 목양적인 편지를 씀
- 감옥에서도 계속되는 기도가 있었음
-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
-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비결을 말함
- 지식과 총명으로 그 사랑은 더욱 불 일 듯함
-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실천적 판단
- 이를 위해 교회를 통해 목양 받게 하심
- 이것이 세계에 대한 신적 경륜과 연관됨
II. 목양 받게 하심은
- 하나님의 나라는 정치 세력화가 아님
- 역사적 교회는 이런 유혹을 받았음
- but, 진리 목양으로 바른 인생 살게 함
- 목양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함
- 왜냐하면 사랑이 거룩한 삶의 토대이기 때문임
- 교회를 통한 신자 목양의 세 가지 목표
A. 분별함
- “dokaimazein ta diaperonta”
- “차이점들을 시험해보다”
- dokimazo: 어떤 재료의 정체를 시험해 보는 것
- 이는 교리와 윤리를 포괄하는 것임
-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 선택할 수 있도록”(P. Obrien)
- 정확한 지식은 선한 삶에 필수적임
- 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임
- 무지의 그늘 아래 악한 삶이 만연함
-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 성경 진리
- 선악의 판단력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
- 여전히 판단력이 중요함(ex: 군인)
B. 진실함
- “진실하여” eilikrineis: 두 가지 해석
a. 태양빛(eilee) 아래서 판단함
b. 체돌림(eilos)으로써 판단함
- 어느 해석이든지 절대 규범을 보여줌
- “마음과 행동이 진리에 부합된 상태”
- 하나님 뜻에 맞추어져 순수한 상태
- 지상 자원이 삶의 방향을 결정 못함
- 그것은 삶의 양상을 결정할 수는 있음
- 삶의 방향은 인격과 성품에 결정된다
- 우리 삶의 목표가 무엇인가? 번영?
- 신자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는 것
- 물이 흐르듯 진실한 인격을 따라 성취됨
- 때로는 넘어지나 진리에 부합하기를 힘씀
C. 허물없음
- “허물없이” aproskopoi
a. 적극적 의미: “진실”
b. 소극적 의미: “허물없이”
- Chrysostom의 해석을 추천함
a. 타인 넘어지지 않게: (고전10:32)
고전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b. 자신이 넘어지지 않음: (갈5:4)
갈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 흠 없음
- 흠 없는 인격과 삶이 가능하지 않음
- 그러나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생각함
- ex: 원과 삼각형을 그리는 마음
- 극상품의 포도를 기대하시며 심으심
- 온전함에 이를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함
- 용서와 그렇게 은혜를 갈망해야 함
III. 적용과 결론
-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통치하는 날
- 종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신자들
- 그 날을 사모함은 주님의 통치 실현 때문
- 완성되지 않은 나라에서 겪는 신자의 괴로움
- 그 날에 받을 완전한 위로와 상급을 생각함
- 이렇게 사는 자들에게 기쁨을 주심
셋째날: 복음의 경륜을 이루심 (빌 1:11) p.34
I. 본문해설
- 구원받은 신자를 교회를 통해 목양하심
- 중생과 회심을 통해 까리따스의 사랑을 부여하심
- 목양을 통해 그 사랑을 더욱 풍성케 하심
- 게으름과 싫증을 이기는 길: 지식+총명
- 교회를 통한 목양과 복음의 경륜을 완성함
- 영혼의 돌봄과 성화는 세계 경륜과 관련됨
II. 목양과 복음의 경륜
- 목양을 통한 신앙 성숙과 우주적 계획
- 타락으로 목적 의식을 잃어버린 인류
- 세계, 사회, 자신의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림
- 복음은 그 잃어버린 목적의 핵심을 보여줌
- 구원받은 신자들로 하여금 그 계획을 따라 살게 함
- 그들이 잃어버린 목적을 다시 찾아 살게 하심
A. 의의 열매를 맺음
- “의”(righteousness)란 무엇인가?
- dikaiosune는 언약과 관련된 개념임
-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된 거룩한 인격과 생활의 총화”
- 마음의 품질과 생활의 열매로서의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상태임
- “율법적 의”와 대비된 “새로운 의”(롬3:21, 빌3:9)
롬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빌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생명의 비밀
B. 영광과 찬송이 됨
- 영광의 세 범주: a.본질 b.발산 c.효과
- 영광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는 것
-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통치를 드러냄
- 신자는 하나의 충만한 사랑으로 살아감
- 신자: 다른 사상과 생활 때문에 구별이 됨
- 다른 인격+사상+생활+가치+목표
- 외적 성공, 번영, 업적에 눈길을 끔
- 그러나 그리스도인 삶의 가치는 다름
- 다른 존재로서 다른 삶의 길을 보임
- 순전한 사랑과 지식으로 주님을 드러냄
- 신자의 가치는 이웃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함
C. 그리스도 때문임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ton dia Iesou Xristou
- 바리새적 율법주의의 열매가 아님
- 구약의 표현을 사용하나 새 언약과 관련됨(사32:17, 암6:12)
사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암6:12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 새 언약의 특징은 신적 사랑과 생명
-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에서 나온 결과
-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빌3:9)
- 그 연합: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임
- 사랑, 용서, 은혜와 영광을 베푸심
- 그 연합과 현실을 이길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심
III. 적용과 결론
- 우리의 구원은 우주적 경륜과 연관됨
- 구원으로 인한 자기 만족 속에 살면 안됨
- 신자가 행복하지 않다. 무엇 때문인가?
- 개인 구원을 우주 경륜에 연결시키지 않음
- 엄마 같은 사랑으로 목양하는 교회
- 각 사람을 온전한 신자로 세우시려고 하심
- 신자는 존재의 소명 따라 살 생명 사랑 누림
- 신자는 그 소명의 삶 안에서 행복할 수 있음
- 하나님 사랑으로 풍성해져 가라!
넷째날: 물은 피보다 진하다 (빌 1:8) p.47
I. 본문해설
- 우리의 인생은 잘 짜인 직조물과 같다
- 세계 창조의 목적과 내 인생의 행복
- 신자는 복음을 통해 이것을 발견했음
- 그러나 하나님 밖에서 행복을 찾아보려 함
- 인생의 가치는 구원 계획을 따라서 사는 것
II. 경륜에 참여하는 마음
A. 예수의 심장을 가짐
-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 “심장” sprinkna 창자를 의미함
- 인간의 영혼이 있는 자리를 가르침
- 인간 심령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힘
- “예수의 심장” 마음, 생각, 뜻 모두를 의미함
- 이것은 사랑의 합치를 통해 주어짐
- 지상에서 성화의 끝은 예수의 심장을 갖는 것
- 예수께서 우신 곳, 기도하신 곳, 죽으신 곳에 함께 함
- 교회의 제도: 육체, 교회의 정신: 영혼
- 예수의 심장을 가진 성도들의 총화임
- 십자가에서 구원하신 예수를 기억함
B. 지체들을 사랑함
- “물은 피보다 진하다” Augustine의 사상
- 지상 혈육(피)보다 세례 연합(물)이 더 큼
- 내 인생의 의미는 지체들과 묶여 있음
- 신자는 세례를 통해 예수를 통해 교회와 연합되었음
- 지체들을 예수의 심장으로 사랑하라
- 그들 안에 그 사랑이 충만하도록 섬기라
- 예수의 사랑을 가지고 영혼을 사랑하라
III. 적용과 결론
- “내가 기도하노라”
- 예수의 소원을 마음에 품고 기도함
- 교회를 향한 경륜이 삶의 이유가 됨
- 이를 통해 이루어질 주님의 통치를 봄
- 인생의 가치를 구원의 의미에서 찾음
-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되찾자!
경륜이 있는 복음 (2017.07.30_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 1)
1. 사랑이 풍성해짐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 1:8-9)
I. 본문해설
오늘부터 수련회 기간 동안, 그리고 한 두 주정도 이어지는 설교에서 이 위대한 본분을 다루려고 합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사도는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도 그의 목회 활동은 그치지 않았으니 빌립보서를 쓴 것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서신 머리말에 기록된 그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 경륜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복음과 구원은 값없이 거저 주어지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숨겨져 있습니다. 신앙은 바로 그 계획에 눈을 뜨는 것이고 신앙의 성숙은 그 계획을 아는 지식의 깊이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 지식의 깊이를 더하면 더할수록 인생을 바라보는 눈이 분명해지고 세계와 인생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인생관입니다.
II. 경륜이 있는 복음
오늘날 마음의 허함을 온갖 유희와 그리고 쾌락으로 달래려 하는 사람은 결코 만족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기독교 신앙에 들어선 사람들이 그런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할 용기를 잃어버리고 종교 속에서 적당한 유희나 즐기면서 인생의 무게를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이 시종일관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은 경륜이 있는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일도 아무 생각 없이 우연히 생겨나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영원한 하나님이 삼위일체 안에서 창조를 계획하시고, 그 창조를 계획하실 때 이미 하나님 안에는 창조된 세계가 어떻게 시간과 공간속에 펼쳐지고, 펼쳐진 그 세계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계셨으며, 그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안에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의 닮은 형상을 인간에게 주셔서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옆으로는 인류를 알고 아래로는 자신에게 위탁한 자연만물을 이해하게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창조 세계 속에서 구현해냄으로 그 세상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을 창조의 계획으로 삼으셨습니다. 그 안에서 인간은 한 가족을 이루며 그 안에서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한 사랑을 누리며 행복하도록 지음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나님을 중심으로 뭉쳐진 모든 인류의 사회적인 연합을 보며 기뻐하시는 것이 창조의 본래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죄를 짓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위대한 계획은 인간의 타락으로 좌절되거나 포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원래의 창조목적을 이루어 가셨으니 그것은 바로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계획을 통하여, 그 경륜의 전개를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이 세계 속에 드러나게 하셨던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오늘날 인류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누릴 수 없는 더 놀라운 사랑을 누리고 있고,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더 깊은 하나님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역사의 전개 속에서 봅니다.
다만 이러한 심미는 단순한 이성의 지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의 눈으로 성경을 믿고 그 성경 속에서 전개되는 찬란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신비스럽게 작용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강조한 바와 같이 우리는 오늘날 마음이 녹는 것 같은 하나님의 사랑, 용서의 절절함, 죄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의 뜨거운 은혜의 감격 같은 것들은 죄가 들어오지 않고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오늘 사도는 바로 그 감옥 속에서 깊이 몰두 하고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였습니다. 오래전 로마에 있는 한 교회에 초청을 받아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그 교회의 한 집사님이 저를 데리고 사도 바울이 갇혀 있었다고 전해지는 한 교회로 데려갔습니다. 물론 교회가 아니라 동굴 감옥이었는데 사도 바울의 유서 깊은 고난을 기념하여 그 위에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그곳이 정말 사도 바울이 갇혀 있었던 자리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전해오는 전승에 의하면 그곳은 지하였고 조그맣게 뚫린 쇠창살로 간신히 지상의 햇빛이 들어오는 여섯 일곱 평 쯤 되는 흙더미와 바위 덩어리로 된 공간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거기서 사도바울은 기도에 몰두하였을 것입니다. 그 기도는 빌립보 교회의 성장이나, 교인들이 부자가 되는 것이나, 아주 일상적인 세상사를 위해 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오랫동안 깊이 젖어있었던 기도가 어떤 내용이었는지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는 기도 제목입니다. 이것은 그가 밤이나 낮이나 빌립보 교회를 생각하며 비는 최대의 기도 제목이었던 것이었습니다.
III. 사랑을 풍성케 함
여기에서 사랑을 수식하고 있는 소유격, 즉, ‘너희 사랑’이라고 한 것은 ‘너희 속에서 불러 일으켜진 사랑’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스스로 양심의 빛으로 일구어 낸 본성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였던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경험한 결과로 생겨난 사랑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 반응한 성도들의 까리따스의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지성으로는 탁월한 지혜로, 의지로는 충만한 사랑으로 세계를 창조하셨고,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이 세계에 악이 들어오게 되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탁월한 지혜로 구원을 계획하시고 사랑으로 그 구원의 계획을 실행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신자를 만들고, 그렇게 구원한 신자들을 어떻게 교회가 되게 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 주님을 믿는 것은 우리 인생의 계획에 별로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계획에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우리 인생의 계획에는 원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복음을 들으면서 나 혼자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내 인생이 결국은 나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껏 자신이 신뢰하고 믿었던 자기에 대한 모든 기대가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고백하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나 자신이 이 끝도 모를 깊은 절망의 심연에서 나를 건져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신자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내가 직면하고 있는 인생의 감당할 수 없는 무게와 모든 고통들이 사실은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들이 구원을 받은 그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짐을 경험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진실하게 회개하고 믿음을 갖는 그 순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 그가 의식하는 정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부어집니다. 그 충만한 사랑이 그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처음사랑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져 하나님의 생명을 분여 받습니다. 그리고 한 사랑 안에서 교회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마귀와 이 세상과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이 어찌하든지 그 사랑의 불길을 끄려고 집요하게 공격을 합니다. 교회는 불을 끄려는 세력들과 끊임없이 싸우며 어찌하든지 그 불길을 보존하기 위해서 힘을 씁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 여름 휴가철의 절정에 여러분들이 여기에 모여 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음으로 죄와 세상과 사단의 궤계들이 깨트려지고 주님이 내게 주셨던 그 사랑의 불길이 다시 불일 듯 일어나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오늘 우리들이 많은 것을 희생하고 여기에 와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최고의 사명은 끊임없이 그 사랑으로 멀어지려고 하는 신자들을 때로는 엄히 꾸짖거나 사랑으로 권고하거나 혹은 지혜의 말씀으로 깨우치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묶어서 그들 모두가 주님을 사랑하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이고 이것을 능가하는 교회의 사명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이외의 모든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웅변적인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한 우리 예수님의 칭찬이었습니다. ‘나는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알고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과 내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이 정도 되는 교회가 오늘날 이 세계에 몇 개나 되겠습니까? 몇 종의 칭찬이 나오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행위’와 ‘수고’, ‘인내’, ‘악한 것을 용납지 않고’, ‘사도들이 아닌 자를 시험하고’, ‘거짓을 드러내고’,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9종의 칭찬을 주님께로 쉼 없이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사라지자 이 모든 칭찬은 에베소 교회의 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 아홉 가지의 쉬지 않는 덕목들로 극찬을 받았지만 사랑 하나가 사라지자 그 아홉 가지가 있었던 모든 것들은 오히려 이 교회에 부끄러움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모든 것이 있어도 그 안에 충만한 생명이 없기 때문에 모두 시들어버리고 마는 것 같은 이치입니다.
IV. 사랑이 풍성해지는 길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이렇게 충만한 사랑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그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가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그 이외에 모든 것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잘할 수 없으면 그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일까?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나쁜 교회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볼 때에 좋은 교회라는 것은 어떤 교회입니까? 교회를 떠나게 된 지체들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어떤 교회를 찾아야 합니까?” 그러면 이렇게 답해줍니다. “기도하면서 너 자신이 찾아라. 그 과정도 하나의 훈련의 과정이다. 두 가지를 기억해라. 올바른 진리가 설득력 있게 선포되어 너의 지성을 굴복시키는가? 두 번째는 왠지 그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가르침을 받고 나면 주님을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고, 주위에 있는 성도들과 지체들을 보면 나보다 더 주님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라고 느껴지는 교회, 진리와 사랑이 가장 중요한 통로가 되는 그런 교회를 찾아라.”
목양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합니다. 목양은 양떼들로 하여금 현실에 적응하게 하고 모자라는 결핍에 익숙해지도록 만들거나 뭔가를 체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목양의 핵심은 주를 더 뜨겁게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목양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주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옛날에 사랑했었던 사람, 앞으로 사랑할 계획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네가 나를 사랑하고 있느냐?’ 하는 질문에 ‘아멘. 주 예수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목양에 가장 적합한 사람입니다. 옛날에 그랬던 사람은 옛날에 목양을 받았고, 이 다음에 사랑할 사람은 이 다음에 목양을 받아야 하고 지금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목양을 받아야 합니다.
제가 오늘 주일 예배 때 어디에서 설교했는지 아십니까? 고등부에서 설교했습니다. 설교하는 동안 아이들을 보면서 참 놀라웠습니다. 여러분들이 볼 때는 어린아이 같은 그 고등부 애들이 말씀을 들으면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 모습을 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정말 우리의 영혼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 이외에는 절대 행복하지 않구나.’ 잠시 고민을 잊거나 괴로움을 잊어버리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전도된 사람이 아니고는 목양 받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들을 말씀으로 잘 깨닫게 하고 설득해서 주님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던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전도입니다. 목양은 그렇게 전도된 사람의 마음속에 그 사랑이 점점 더 뜨겁게 타오르도록 도와주는 것이 목양입니다.
보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미친 듯이 복음을 전해서 교회로 들어온다고 칩시다. 더 많은 사람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교회 안에는 들어온 그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사랑을 점점 더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목양의 도구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때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주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았을 때 그 은혜를 간직하며 산 기간이 얼마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5년, 6년, 7년, 8년, 한결 같이 간직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누군가로부터 목양을 잘 받으면서 주님 안에서 자신의 신앙을 지켜갈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사명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주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고, 주님을 조금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켜서 주님을 점점 더 뜨겁게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모든 작용과 기능들은 바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A. 지식과 총명 안에서
그렇다면 그 사랑이 풍성해지는 길이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희랍어 본문으로 정확하게 번역하면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 속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ἵνα ἡ ἀγάπη ὑμῶν ἔτι μᾶλλον καὶ μᾶλλον περισσεύῃ ἐν ἐπιγνώσει καὶ πάσῃ αἰσθήσει). 물론 전치사 엔(ἐν)의 해석이 도구로도 해석이 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옮긴 것처럼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해지길’, 혹은 ‘지식과 총명 안에서 풍성해지기를’ 이라고 번역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바로 지식과 총명 안에서 풍성해 집니다.
1. 지식(epignosis)
첫째로, 지식 안에서 사랑은 풍성해집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희랍어로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라고 하는 단어인데 ‘에피’라고 하는 말은 ‘전체’라고 하는 뜻이고, ‘그노시스’는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이 지식은 정확하게 말하면 표면적인 지식이 아니라 심층적인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기노스크’라는 단어에서 온 것인데 한마디로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사물에 관한 표피적이고 단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사물에 대한 온전하고 심층적인 지식’을 가리킵니다. 그런 지식을 가진 사람이 ‘내가 안다’라는 것과 표면만을 보고 ‘그것을 안다’리고 하는 말은 완전히 다릅니다. 에피그노시스는 ‘사물에 관한 온전한 앎’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또 인간이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본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이 그런 지식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지식은 자신이 성장해오면서 계속 발전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아주 오랜 세월 인생을 살았지만 여전히 그러한 대상에 대해서 표피적이고 단상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어떤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하지만 다른 지식과 연결시키는 총체적인 지식을 갖지 못하거나, 혹은 알게 된 작은 지식을 그보다 훨씬 더 큰 선입견 속에서 잡아 당겨서 이상한 지식이 되게끔 발전해온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의 지식이라는 것은 성경이 지금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지식이 아닙니다.
모든 만물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바라보았을 때 하나님에게는 어떤 것도 의외의 것이라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님에게 다 알려진바 되었고 그 아는 것을 인식하는 인간의 능력 까지도 하나님에게는 이미 다 알려진 것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하나님은 모든 지식의 근원이시고 모든 사물에 대한 지식은 마지막에 그 사물을 있게 만들었던 하나의 궁극적인 존재를 향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것을 거꾸로 본다면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것들을 올바르게 추적해나가면 어떤 사물이 있고, 사물에 대한 온전함이 있다면 그것은 계속 그 위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하나님에게 도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탁월한 지혜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을 때 그 지식의 빛으로 다시 내려오면서 그 하나님이 가지신 탁월한 지혜가 모든 만물 속에, 특히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얼마나 탁월하게 녹아 들어가 있는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이것을 역으로 추적해 들어가는 귀납법적인 확인의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고 그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내려오는 연역적인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얼마나 지혜롭고 탁월하신 분이신지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서 탁월한 즐거움을 모르고 사는 자들입니다.
최근에 저는 색맹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알았습니다. 색각을 느끼는 정도에 따라 색약 혹은 색맹으로 구분됩니다. 그 사람들은 단풍을 바라볼 때 우리가 흔히 느끼는 그런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단풍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제가 외국 사람들을 만나면 늘 자랑을 합니다. 그 이유는 캐나다나 미국의 단풍은 웅장하기는 합니다만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아기자기 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볼 때 한국의 경우 기온이 높고 햇빛이 많이 있었던 여름이 지난 가을 단풍은 눈부십니다. 노란 색깔은 샛노랗고 빨간색은 핏빛입니다. 파란색은 아주 파랗습니다. 그 색깔이 어우러지면서 만들어내는 그 아름다움은 꽃으로 뒤덮인 숲속을 바라보는 것 못지않게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단풍을 보면서 우리는 감격을 합니다. 그런데 색맹이나 색약인 사람들에게는 그 단풍이 아주 지저분하게 보이는 광경입니다. 걸레들같이 지저분하게 보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수술받기 전 제 시력은 마이너스 26디옵터였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3미터 앞에서도 사람 얼굴을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수정체 수술을 하고 눈을 뜬 순간 너무 신비했습니다. 달 속에 정말 토끼가 있었습니다. 시력이 좋지 않았을 때에는 달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었습니다. 항상 내 눈에 비치는 달은 여섯 개로 보였습니다. 토끼는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눈부신 색깔을 볼 수 있는 시야를 잃어버린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우울하겠습니까? 저는 잊혀 지지도 않습니다. 2008년도 즈음에 눈 수술을 하고 교회를 돌아보는데 교회 실내가 편의점처럼 너무 밝은 것입니다. ‘왜 저렇게 등을 많이 달았을까?’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과거 늘 어두웠던 제 눈의 기준에 맞추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자매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다 아줌마 모습이었고, 아줌마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다 할머니들이었습니다. 눈을 뜨고 아내를 보면서 제일 먼저 한 말이 ‘여보, 왜 이렇게 늙었어? 원래 그렇게 늙었었어?’였습니다
문제는 원래 색맹이었던 사람은 인생이 그러려니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미색인줄 알았던 모든 벽은 사실은 흰색이었고, 열린 교회 신문이 백색 신문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미색인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밝아지니까 거짓말 좀 보태자면 저절로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일주일 동안은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습니다. 너무 신비했습니다. ‘아, 이 골목길이 이런 길이었구나. 숲속의 풍경이 이런 것이었구나. 아, 이 시냇물이 이랬구나. 내게 늘 들려주던 음성의 주인공이 이런 모습의 사람이었구나.’라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지식의 증진과 함께 풍성해져 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 지식 속으로 들어가서 풍성해지고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사랑이 풍성해지는 순환 관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조명을 받게 되고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고 감동을 받게 됩니다. 그 감동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그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놀라운지를 지성으로 탐구할 때에 그렇게 높이 있었던 것 같은 진리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안셀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적인 친밀함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높은 진리의 지식이 자기 안에서 실천적인 지식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지식은 인격적인 경험으로 통합된 지식이고 에피그노시스가 증진되는 속에서 사랑은 점점 더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간 결론은 이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했었는데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면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최근에 새롭게 감동적으로 깨달은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새로운 진리를 깨닫고 그 속에서 감동을 받든지 아니면 이미 깨달을 것이지만 내 기억의 창고 속에 드러누워 있었던 지식을 다시 불러내어 자신의 마음을 채워 그 속에서 새로운 깨달음, 더 깊은 깨달음이 일어나게 하는 지적인 작용이 멈출 때 사랑도 함께 멈추는 것입니다.
사랑에서 미끄러질 때 가장 먼저 게을러지는 것이 우리의 지성입니다. 새로운 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하나님 말씀을 깨달으면 그것이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고, 남이 깨달은 것을 받으면서 자신도 감격을 하던 상호작용이 있었는데 이런 모든 것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들을 만나 하루 종일 앉아서 이야기를 해도 신앙의 도움이 되는 대화는 없고 처음부터 끝까지 먹고 입고 마시고 보고 즐기고 하는 세상적인 이야기들만 난무하고, 돌아서서 나오면 이것이 성도의 교제인가 할 정도로 마음에 냉랭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사랑의 교제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에는 교제가 끝나고 돌아갈 갈 때에 어김없이 예수님을 더 알고 싶은 마음, 어떤 의미에서 영적인 시기심이 생겨나기 마련입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구나. 부끄럽다.’라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처음 시작은 세속적인 이야기로 시작했어도 마지막 헤어질 때는 마음이 따뜻해지고 우리가 한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동체 전체 속에 흐르는 힘입니다. 여러분들의 순 속에서 흐르는 힘입니다. 그런 힘이 있을 때 그 순은 계속해서 성도들의 마음속에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도구가 되는 놀라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약 25년 쯤 되었습니다. 친구 목사들 매달 한 번씩 모여서 공부를 했습니다. 한참 모일 때는 매주 모이기도 했는데 개혁주의 신학 책들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책들을 읽고 함께 공부 했습니다. 항상 그 모임이 끝내고 돌아올 때면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날도 밤 늦게 모임을 마치고 먼 길을 달려 돌아오는 차 안이었는데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정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싶은 소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부흥회를 하면서 돌아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모임 속에 진리가 있고, 성령이 그 모임에 역사하시어 그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을 때에 그런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의 증진을 통해서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들을 공격할 때 가장 먼저 공격하는 곳은 심장이 아닙니다. 가슴도 아닙니다. 어디를 공격합니까? 지성을 공격합니다. 주의력을 갖지 못하게 하고 새로운 지식을 깨닫지 못하도록 태만하게 만듭니다. 지성은 온 영혼의 경계령을 맡은 보초입니다. 여러분이 성을 공격한다면 제일 먼저 어디부터 공격하시겠습니까? 망루에 서 있는 보초가 아니겠습니까? 망루에 서서 불을 붙이고, 봉화를 올리는 그곳을 가장 먼저 공격하지 않겠습니까? 죄는 지식을 얻는 통로를 마비시켜 놓고 공격을 합니다.
그런 후 제일 먼저 다가오는 것이 싫증입니다. 뭔가를 탐구하고 새롭게 깨닫는 데에는 기쁨도 엄청나게 크지만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먹고 산책을 하면 배가 덜 고픈데 앉아서 공부를 하거나 어떤 연구에 몰두하면 당이 뚝 떨어져서 허기가 확 밀려옵니다. 어마어마한 칼로리를 소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하려면 이 속에서 끊임없는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그 에너지가 없으니까 탐구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공부 많이 했다는 이야기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옛날에 구들장에 장작 몇 지게를 지폈다고 해서 지금 따뜻하냐는 말입니다. 매일매일 불을 떼면서 살아야 합니다. 미친 듯이 한꺼번에 섭취하고 어느 한 순간에 모두 집어치우고 정신의 휴식기에 들어가는 사람보다는 적은 분량이라도 매일매일 깨달으면서 매일매일 그 지식의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랑은 다시 불 일듯 일으켜 집니다. 매일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을 묵상하고 생각하는 것은 성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임무입니다.
2. 총명(aisthesis)
둘째로, 총명 안에서 사랑은 풍성해집니다. 총명은 희랍어로 아이스테시스(αἴσθησις)라고 합니다. 이것은 ‘깨닫다’라는 뜻의 동사, 아이스타노마이(aisthánomai)에서 온 명사입니다. 현대 희랍어 성경에는 철학적인 용어인 노에시스(νόησις)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노에시스든지 아이스데시스든지 이 말은 ‘인식’, ‘이해’, ‘판단’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있는데 그 인식과 이해가 판단력과 관련될 때, 실천적으로 어떤 행동을 하게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 우리들이 그것을 ‘총명’이라고 부릅니다. 지식의 크기와 총명의 크기는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그 지식이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이 아닐 때에는 지식의 크기가 매우 커도 총명이 매우 부족할 수가 있고, 때로는 그 지식이 좀 부족해도 판단력이 아주 뛰어난 경우가 있을 때에는 총명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총명은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개별적 환경들이나 조건들에 대한 실천적이며 구체적인 판단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이 ‘이성’과 ‘경험’에 관한 것이라면 ‘총명’은 ‘판단’과 ‘실천’과 관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펼쳐지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 효과 있는 정확한 판단력을 제공하는 것이 총명입니다. 총명은 적용적이고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판단의 능력입니다.
이런 판단력이 재고될 때 사랑은 점점 더 풍성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총명이 가장 탁월하게 유지되는 것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입니다. 지식이 좀 부족해도 성경을 믿는 단순한 마음이 있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대부분 도덕적인 판단에 있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제일 먼저 죄가 침투해서 우리의 지성을 싫증나게 만들고 경계를 허물고 나면 새로운 지식을 획득하기가 싫어지고 그 지식을 탐구하기 위해서 드리는 에너지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영혼이 싫증에 빠지게 되면서 영혼은 죄와 상황에 대해서 경계할 수 있는 판단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서서히 무장해제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진리에 대한 사랑이 식어지는 만큼 육욕적인 욕망이 그 사람 속에서 싹트고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도 진리도 아닌 다른 곳에서 즐거움을 찾고 싶어 하는 욕망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때에 삶은 방향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점점 더 불순종을 먹고 강력한 힘으로 발휘될 때 자신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삶으로 자신의 인생을 몰고 가게 됩니다. 그것은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정도의 위대한 힘을 발휘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예기치 않았던 삶으로 데려갑니다. 결국은 악인의 말로입니다.
우리에게 한 번 적용해 봅시다. 정말 우리에게는 총명이 살아 있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정확히 판단하고, 판단된 것들은 즉시 시행할 수 있도록 마음과 정신의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런 것들이 정말 작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지름길이 있다고 가르치는 모든 가르침은 역사적으로 이단이거나 혹은 실패한 가르침입니다. 그런 것 없습니다.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훌륭하게 아름다운 신앙으로 자랄 수 있다는 하는 가르침은 사실이 아닙니다. 반대로 끊임없는 수도의 삶으로 우울하기 짝이 없는 자기복종과 자기죽음의 삶을 통해서 스스로 그런 거룩한 삶이 성취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복음의 비밀을 깨닫고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내가 누리고 그 사랑과 은혜의 힘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고 있을 때, 비록 부족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했을 때, 우리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고, 나의 마음과 영혼과 몸은 비록 부족하지만 그렇게 내린 총명한 판단을 따라서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시련과 고난 속에서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셨기 때문에 눈물 나게 매달리던 기도제목도 사라지고 편안한 삶이 되었습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면서 어느덧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이 오염되기 시작합니다. 형식과 모든 외적인 삶은 그대로 형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마음속에서 기꺼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총명한 판단을 따라 살고자 하는 육신의 부지런함은 사라집니다. 이때에 우리는 지식으로부터도 멀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공급받는 총명들이 사라지면서 얼마간 우리의 마음속에 타오르던 사랑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식어갑니다. 몇 푼 안 되는 돈 믿고 계속 소비를 하다 보니 어느 날 잔고가 바닥이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매일매일 그럴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인은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거나 혹은 말씀을 묵상하면서 추운 겨울 날 얼음이 들어 있는 양동이의 물을 확 뒤집어쓰는 것 같은 경험을 자주 해야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아, 이것이 아니었구나! 내가 전적으로 잘못 보고 있었구나! 나는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하는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학적인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철학적인 질문에 답을 주는 성경적인 내용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진리를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숙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B. 사랑이 더 풍성해짐
성경에 ‘더 풍성하게 하사’라는 말은 희랍어 ‘페리쉬에’(περισσεύω)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테두리 안에 점점 넘치도록 풍부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넘치는 사랑은 지식과 총명으로 풍성해지고 동시에 사랑은 지식과 총명을 증진합니다. 그래서 무엇인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지식을 얻는 것이 힘든 작업이 아니라 너무 즐겁고 기쁜 작업이 됩니다. 마치 불이 장작을 태워 나가고, 타는 장작이 불을 태우듯이 말입니다. 이 관계에 대해서 중세의 유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주 재미있는 설명을 했습니다. 신자 안에 있는 5단계의 논리인데, 첫째, ‘신자 안에 있는 성령님이 신자에게 진리와 지식을 주신다.’ 둘째, ‘성령님은 곧 사랑이시다.’ 셋째, ‘사랑은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한다.’ 넷째, ‘사랑은 신자 안에 올바른 성향을 형성한다.’ 다섯째, ‘이 사랑의 성향으로 올바르게 판단한다.’ 성경에 보면 성부를 향한 사랑과 성자를 향한 사랑은 나오는데 성령을 향한 사랑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어거스틴은 성령 자체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사랑하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부를 사랑하라고 할 때 이미 거기에 성령이 포함되어 있고, 성자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은 이미 그 사랑 안에서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 자체이신 성령께서 신자들을 진리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신자 안에 올바른 성향을 형성합니다. 나아가 이 사랑의 성향으로 인간은 모든 만물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게 됩니다.
결국 사랑이 지식의 원인도 되고 그 지식과 사랑의 증진을 통해서 거꾸로 사랑이 더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어느 것이 먼저가 아니라 이 두 가지가 함께 순환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점점 더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고 주님을 아는 지식에 목마른 사람들은 그 지식의 탐구의 과정을 통해서 주님의 아름다움을 더 많이 발견하기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는 사람들은 지식이 더 풍성해지게 되고, 지식을 버린 사람은 그 있는 사랑도 잃어버리게 되고, 사랑에서 떠난 사람은 이미 있는 지식도 자기의 마음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사랑은 점점 풍성해지고 충만하게 넘쳐나는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일에 인생의 흥미를 느끼며 살아갑니다.
최근에 우리 집에 식구가 하나 늘었습니다. 말티즈라는 강아지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개를 기른 것이 초등학교 때였고 키우던 개가 비참하게 죽는 것을 지켜본 이후부터는 어린 마음에 감당할 수 없는 트라우마가 생겨 개를 키우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딸이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20년 넘게 졸라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언젠가 그 강아지가 자연사를 하든지 사고를 당하든지 잃어버리든지 할 때에 그 인연이 끊어지는 경험을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가 있는 사이에 우리 집사람이 허락을 얻어 강아지가 들어왔습니다. 2017년 6월 1일생입니다. 겨우 두 달이 되어 가는데 너무 귀엽습니다. 너무 귀여워서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딩동’ 하고 벨이 울리면 제일 먼저 뛰어나옵니다. 그리고 막 꼬리를 치면서 얼굴을 핥고 발가락을 물고 장난을 칩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려고 눈을 떴는데 끙끙거리는 소리가 나서 보니까 발가락으로 내 방문을 계속 긁고 있습니다. 문을 열어주면 너무 좋아라 하면서 들어옵니다. 그러면 제가 꼭 끌어안아 줍니다. 이제는 미래에 이 강아지와 인연이 끝날 때 당할 슬픔과 어려운 감정들보다는 현재에 주는 기쁨이 훨씬 큽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에 ‘그래. 헤어질 때는 아프더라도 살아있는 날 동안 인연을 맺어보자.’ 그러면서 예뻐해 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산책을 하면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 그림이 참 서글펐습니다. 26살에 결혼을 했고, 7년 만에 아들을 낳고 12년 만에 딸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았을 때에는 신학공부를 하던 아주 가난한 전도사였고, 딸을 낳았을 때에는 아주 왕성하게 교수활동을 하던 때였습니다. 내게 맡겨주신 소명을 이루며 사는 일에 몰두한다는 미명하에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마음에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래도 아들도 나를 너무 좋아했고 딸도 나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지금 같은 지혜만 있었어도 아이들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젊은 시절에는 그런 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달려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 내 옆에 딸이 있었구나! 아들이 있었구나!’싶었는데 이 아이들의 관심사는 다른 데로 가버렸습니다. 아들이 결혼을 하여 손녀가 태어났습니다. 너무 귀엽습니다. 새벽에 나오면 밤이 되어야 집에 들어가는데 오후에 한 번이라도 들르지 않으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연애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출장을 가도 다른 식구들 선물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손녀에게 줄 선물만 생각납니다. 그 아이도 저를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 있던 아빠가 돌아오면서 식구라는 개념이 생겨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찬밥 신세가 되었습니다. 뒤이어 태어난 손자에게 이제 제 마음이 갔습니다. 그 아이는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울다가도 내가 들어가서 안아주면 소리를 내서 웃는 것입니다. 몇 달 동안을 그랬습니다. 그랬던 그 아이가 잠시 외갓집을 다녀오더니 할아버지라는 사람의 얼굴 자체를 망각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미국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갈 길을 찾지 못하던 내 마음은 강아지에게 귀착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뭔 그림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것이 인간이 너무 행복해지는 것도 사랑 때문이고 너무 불행해지는 것도 사랑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해지는 길을 사랑을 받는데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것도 사람에게서 받는데서 행복의 비결을 찾으려고 합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누구도 그렇게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는 사랑에 목매는 사람은 설탕물을 마시면서 목마름을 해갈하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행복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큰 사랑의 기대가 채워지지 않았을 때 그것은 인간에 대한 실망과 상처, 심지어는 미움과 원망을 불러일으키고 마음에 한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행복해지는 비결은 그런 사랑에 대한 기대를 접는 것입니다. ‘나는 네까짓 사랑 필요 없다.’라는 뜻이 아니라 거기에 자신의 존재와 행복이 흔들릴 정도로 기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사랑을 하는데서 찾아야합니다.
영국의 속담에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우유를 받아먹는 사람보다 오래 산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태어나서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사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에 그것이 비로소 우리 인생에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내가 사람이라는 것, 내가 사람으로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야한다는 것이 무서웠습니다. 오늘 말씀을 전한 고등부의 아이들 상당수도 그럴 것입니다.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도 있지만 부모의 눈물겨운 사랑 속에서 자란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해주는 부모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이 아이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눈물겨운 사랑이 자기 속에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자기의 인생을 극복하는 것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엄마의 뜨거운 사랑을 내가 알고 엄마로부터 그런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내 마음이 움직여서 내 인생에 변화를 줄 때는 자신이 그 엄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음으로 우리의 인생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그 사랑에 반응하여 그를 사랑할 때 그 사랑이 우리의 인생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머리가 하얗게 될 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내려놓지도 못합니다. 그러면 결국에 무엇입니까? 비관주의자로 인생을 살거나 닫힌 자아를 가지고 살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실 때 가지고 계셨던 계획에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끊임없이 교통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정말 힘들 때 도저히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수시로 죽음을 떠오르게 만드는 절망적인 상황이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토해내는 외마디 소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엄마, 나 어떻게 해?’ ‘엄마, 보고 싶어.’ 엄마는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어느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무한히 자기를 용납하고 어떤 경우에 있든지 어떤 처지에 있든지 나에게 악을 행할 수 없고 내편에 서주는 유일한 사람이 엄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엄마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엄마는 그렇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은 사랑을 받음으로써는 해결이 안 됩니다. 수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아도 인간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은 외롭지 않습니다. 자신이 한 그 사랑은 온 우주를 휘돌아서 마지막에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최고의 수혜자는 사랑 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자신입니다. ‘사랑받았음으로 행복했네!’ 가 아니라 ‘사랑하였음으로 행복하였네라!’고 외쳐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런 사랑이 어디서 그렇게 화수분처럼 솟아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생의 궁극적 화두입니다. 이것에 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있는 사람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결국은 신자도 이 사랑을 자가발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어디서 온다는 것입니까? 주님이 중생과 회심을 경험할 때 중생을 통해서 회심을 하면서 우리에게 이미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 안에서 풍부하게 역사할 수도 있고 사랑이 거의 말라깽이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하게 일어나는 것은 종교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나는 열린 교회를 목회하면서 정말 기쁨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성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것이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끊어지지 않는 사랑,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 그것이 우리 안에서 넘쳐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을 갖기 전을 생각하지 말고 신앙을 가진 후를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정말 신앙을 가진 이후 열린 교회를 다니면서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해줄 때 행복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때가 아닙니다. 주님을 순수하게 사랑할 때 그 사랑이 내 마음속에서 계속 불타고 있는 그때에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지식과 총명으로 우리의 사랑이 풍성해지는 이것이 우리의 인생에 가장 현실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어떤 사람들은 경제적인 문제로 시달리고 어떤 사람은 직장의 문제로, 또 어떤 사람은 헤어진 첫사랑의 인연 때문에,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슬퍼하고 가슴 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물어보고 싶습니다. 놀랍게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칩시다. 그때 여러분들은 어떤 상태가 되겠습니까? 기껏해야 근심과 고민이 잠깐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우리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지고 나면 지금 없었던 또 다른 문제들이 부각됩니다. 그러면 미친 듯이 그것을 치우면서 살려고 애를 써도 결국 치우려는 노력과 그 좋은 결과는 생겨나는 우리의 인생의 문제를 능가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그것이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왜 필요하고, 시련을 이기며 살아갈 힘을 신앙을 통해 받는다는 명제 자체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까? 말할 수 없이 피곤하고 무기력한 인생을 사는 모든 것이 결국은 나의 처한 이 환경 자체가 나에게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이 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 풍성해지게 되려면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생겨납니다. 살면서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생겨나게 되면 기대감이 높아집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어려움을 통해서 나를 예기치 않은 여행을 시키실 것이다.’ ‘그것을 통해서 알게 될 주님의 성품이 어떨까?’ ‘그리고 이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신비스럽고 감격스러운 일들을 준비하고 계실까?’ 하는 기대감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기대감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를 걸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인 경우를 볼 때 엄마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엄마가 내 생각과 달라서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는데 안 사줄 수도 있고 애인을 데리고 왔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딱지를 놓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사실은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 엄마는 당신의 생명과 나의 죽음의 순간을 바꿀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엄마는 어떠한 경우에도 본인이 의도해서 나에게 악을 행할 수는 없는 사람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이것이 통념적인 엄마에 대한 개념입니다. 인생의 깊은 난관에 처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엄마’라고 부르지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문화를 초월해서 모든 젊은이들에게 가장 그리움을 동반하게 하는 단어를 선택하라고 했더니 ‘엄마’였습니다. 아빠는 72위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입니다.
인생의 어떠한 난관을 만나도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은 엄마 같은 분이시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나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고 그분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는 결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동일하게 사랑할 때 그 사랑은 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을 붙들어주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결론이 이것입니다. 그 사랑의 자원이 고갈되고 그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는 사람들로부터 내키지 않는 너저분한 사랑을 구하게 되고, 그 사랑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스스로 상처를 받고, 그러면서 사람과의 관계가 깨어진 가운데서 불행하고 우울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밖에 있을 때 모습이었고 신앙 안에 들어와서도 주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에서 이탈할 때의 우리의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경험을 통틀어볼 때 마지막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랑이 풍성해지는 이 일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 생명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 우리가 당신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을 우리는 이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나쁜 일들도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우리를 파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어줍니까? 권력이나 힘이나 이런 것들이 아닙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그것이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인생의 문제가 많이 있지만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궁극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답하라고 하면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내 인생의 문제는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충만하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감옥 속에 갇히는 목회자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형수의 신분으로 간절한 기도를 올립니다. 그 올린 가장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 빌립보교회 교인들의 마음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불타오르게 하옵소서. 지식과 모든 총명 속으로 저의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해주시옵소서.’ 이 기도가 사도의 가장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예전에 주님을 깊이 만났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는 열린 교회에 와서 주님을 만났던 은혜의 감격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들의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게 되었습니까? ‘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악이며 생수의 근원이 되는 그분을 버리고 내 인생의 행복을 찾았던 것이 내 삶의 실패였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드러나는 진리 앞에 자신의 부끄러움을 주 앞에 보이고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주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이 충만해졌을 때 그때에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 여러분의 인생의 기쁨이었습니다. 나같이 모자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리스도 교회의 한 부분을 세우게 하시고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어린 영혼들이 미력이나마 나의 섬김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사랑하지 않던 주님을 사랑하게 된 것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눈물을 흘렸고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 영혼을 섬기며 그 영혼과 함께 울고 웃으며 기뻐했고 영혼의 봄날을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을 사로잡았던 진리는 이제 싫증이 나게 되었고, 끊임없는 진리의 말씀이 나를 깨우던 은혜의 감격들은 사라지고 육체는 영혼의 싫증과 타협하면서 게으름으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고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매우 빠르고 민감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영혼들을 섬기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그 일에는 매우 싫증내고 게으른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대화의 대부분은 세속적인 이야기로 채워지며 교제가 끝나도 하늘의 신령한 기쁨에 감동을 받는 일들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하고 장신구를 비롯해서 이 세상의 먹고 입고 마시는 여러 가지 즐거움에 대한 생각들로 신앙의 자리는 대신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처음 주님을 만나고 첫사랑을 누리며 살던 그 은혜의 때와는 얼마나 달랐습니까? 눈은 총명한 빛으로 반짝였고 지식을 얻고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서 기뻐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돌아가는 어두운 수요일 저녁에 걸어가던 그 길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한없는 기쁨과 희열을 주었습니다. 태만한 신자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온갖 핑계거리를 찾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자신의 핵심을 찌르지는 못합니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내 사랑이 식었습니다. 내가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내 말씀 속에서 상실했습니다. 이것이 나의 가장 큰 문제이고 이것이 나의 인생을 피곤하게 하고 있습니다.’ 라고 정직하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참회하는 아름다운 모습, 그리고 자신의 죄 때문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현재의 삶속에 투사시키는 믿음은 사라졌습니다. 그런 믿음의 실천이 사라지고 나니까 자기가 깨뜨려진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하늘의 놀라운 생명의 공급도 그칩니다. 여전히 내 인생도 아니고 남의 인생도 아닌 것처럼, 살아야 할 인생도 아니고 살기 싫은 인생도 아닌 것처럼 그렇게 인생을 살고 신앙생활도 그렇게 영위해가는 동안에 여러분들의 젊음은 스러져가는 것입니다.
소녀, 소년 같았던 사람들은 결혼적령기가 됩니다. 결혼적령기의 반짝이던 사람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채 아줌마, 아저씨를 닮아갑니다. 우리의 인생이 정말 이렇게 가치 없이 흘러가도록 만드시려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른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변절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속이려고 하고 주님이 주신 믿음의 길에서 이탈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거기에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탈했던 신앙의 길에서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금도 그분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목회자와 나를 섬기는 많은 지체들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를 위해 기도합니다. 자, 여러분 이제 어찌하시렵니까? 시간이 좀 흐르면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영혼의 침체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은 우리를 바라보며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실까요?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눈을 드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주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당신을 알지 못하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예정을 따라 당신이 가장 좋게 생각하는 그때에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또 다른 인생의 가능성은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지루한 침체를 모두 끝내고 이제 우리 주님께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래서 모든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다시 여러분들 속에 주님을 향한 처음 사랑이 불붙게 되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경륜이 있는 복음 (2017.07.30_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 2)
2. 목양 받게 하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빌1:10)
I. 본문해설
바울은 목회자의 따뜻한 심성으로 빌립보 교회를 향해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몸은 감옥에 갇혔으나 마음은 교회와 함께 했습니다. 감옥 속에 갇혔으면서도 자유로운 그 영혼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비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미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목양을 통해서 더 풍성해 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신자의 마음속에 불타오르는 것은 지식과 총명의 증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그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은 점점 더 풍성하게 되고 사랑이 역사하는 신자의 마음 안에서 이 지식과 총명은 증진되는 것입니다.
II. 목양 받게 하심은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도 그 목표를 앞설 수 없으니 그것은 바로 우리 개개인이 주를 향한 사랑이 날마다 불 일 듯 일어나 그 순수한 사랑으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성도들을 목양하게 하셨고, 이러한 지식과 총명으로 불붙는 사랑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위대한 구원의 경륜을 따라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실적으로 누구든지 주를 향한 마음이 이 속에서 가득 차지 아니하고는 누구도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맡겨주신 구원의 경륜을 따라 살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의 증진을 위해서 하나님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을 목양을 받게 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 나나를 위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정치 세력화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정치적 파당 중에 어느 한편에 경솔하게 설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런 유혹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독교가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이 세상을 고치는 원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을 고쳐나가는 기관입니다. 바로 진리로 목양을 함으로써 참다운 인생을 살게 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리고 올바르게 인생과 하나님과 세계와 인생과 교회와 역사를 보게 만들어주고 그리고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속하신 경륜의 위에서 바라보며 걸어가게 하는 것이 교회의 존재의 이유입니다.
가르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는 아무리 올바른 길을 자신이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 길을 걸어가기 위한 힘이 없으면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힘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교회를 세우신 위대한 경륜을 이해하면서 그 지도위에 자신의 인생을 놓고 자신의 인생이 어디를 향해 항해하고 있는지를 보며 가게 만들어주는 것이 교회이고, 그 길을 걸어갈 때 그 올바르게 아는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바로 하나님 사랑으로 감화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가지고 주님이 내 인생을 향해 가지고 계신 계획을 나도 기뻐하면서 그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이 내 인생의 보람이 되도록 살아가는 것이 교회가 있는 이유이고 그리고 목양의 모든 것이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이런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경솔하게 교회가 교인들을 동원하고 그리고 태극기 집회를 나가고 정치 운동을 하고 잠시는 박수갈채를 받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교회는 목양을 통해서 하나님과 정의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교회의 할 일입니다. 그 정의가 정말 올바른 것이라면 사랑을 완성하고, 사랑이 정말 참된 것이라면 그 사랑이 곧 정의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동시에 정의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목양을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풍부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공동체의 특징은 마음이 냉랭해졌던 사람이 그 공동체에서 함께 예배를 드리며 지체들과 교제의 떡을 나누며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제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통계로 계산될 수 없는 영적인 영향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그분의 사랑에 붙들려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가에 달려있고, 그 모든 것들이 총합으로 이루어져서 교회의 상태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오늘 여러분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의 오늘날의 영적인 생활, 신앙의 상태는 날아오르는 교회를 무겁게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교회를 주님의 은혜로 날아오르게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까? 그것이 교회의 영적인 영향력입니다. 예배 속에서 사랑하는 지체들과 함께 교제하면서 자신에게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랑이 불러 일으켜지는 것을 경험하게 하는 그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양이라면, 그렇게 사랑으로 불러일으켜지는 목양을 받게 하시는 목표가 무엇일까요? 그것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명쾌하게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A. 분별함
첫째는 ‘분별함’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어려운 구절입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그 다른 것들을 시험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단어가 희랍어 도키마조(δοκιμάζω)라는 단어인데, 쉽게 이야기하면 눈으로 보아서는 잘 알 수 없어서 그것을 긁어보거나 뜯어보거나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눈으로 볼 때에는 파란 광석이지만 가루로 갈면 회색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시험해 본다’라고 말합니다. 옷을 샀습니다. 아주 비싼 옷은 아니지만 내 형편에 꽤 돈을 주고 맘을 먹고 샀는데 어느 날 세탁기에 돌렸더니 뻘건 물이 쏟아져 나오면서 하얀 속옷을 뻘겋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이 세탁물이 하얀 옷과 같이 빨아도 문제가 없는지 따뜻한 물에 세제를 풀어서 조금 비벼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험해 보는 것을 도키마조라고 합니다. 우리 눈에 같게 보이는 것들을 시험을 해서 서로 다른 것을 구별하고 그 중에 제일 좋은 것을 선택하는 행동입니다. 그래서 피터 오브라이언(P. Obrien)이라는 학자는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만 그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선택하는 행동”이라고 규명했고, 독일의 유명한 주석가 벵겔은 말하기를 “좋은 것들 중에서 더 베스트를 선택하는 행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견지할 교리와 윤리 모든 것에 다 해당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판단으로 볼 때 모두 다 괜찮아 보이는 것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진리인지를 엄정하게 다각도로 비평해 보고, 성경 말씀으로 최종적으로 끊임없이 판단을 시도해야 합니다. 어떤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유행하고 있다면 그것이 정말 성경에 부합하는 것인지 집요하게 평가 비평을 해서 “아, 이것이 맞구나. 이것이 최선이구나”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툭 던지듯 “난 저게 좋아”, “난 이게 좋아”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정확한 지식, 엄정한 지식은 순전한 믿음과 선한 삶의 가장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흐릿한 눈으로 믿는 종교가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 신앙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기독교를 엄격한 윤리를 따르는 종교라고 생각하는 유교주의자들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지성의 모든 스위치를 끄고 자신을 신비적인 감정에 모두 맡기면서 무엇인가 자신의 마음속에 위안과 신비한 만족을 주는 종교로 생각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오락에 몰두하는 것처럼 기독교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잠시 세상살이에서 오는 고단함을 잊을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게 우리의 인생에 정말 도움이 되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젊은이들이 PC방에 새카맣게 모여서 1인용, 2인용 의자에 앉아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게임을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저는 여러분들 가운데 그런 습관에 빠진 사람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아마도 게임이 매우 재미있기 때문일거야.” 아닙니다. 인생이 힘들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 피곤한 것입니다. 그래서 게임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자기가 계속 뒤쳐지지만 게임의 세계에서는 2등, 3등 계속 올라갑니다. 돈을 갖다 부으면 그만큼 많이 점수를 낼 수 있겠지요. 그렇게 해서 한번 풀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헤드셋을 벗고 안경을 벗고 내려오면 현실은 그대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풀지 않고 덮어두었던 수학문제처럼 그대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취입니다. 환각입니다. 그런 것에 몰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명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인생은 나 아니고는 누구도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찌하든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명제입니다. 안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렇게 택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살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잘 살든지 못살든지 어차피 내 삶의 운전대를 내가 붙들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운전하는 내 뒤를 주님이 붙들고 계시냐 아니면 주님의 손을 뿌리치고 나 혼자 가느냐는 별도의 생각해야 할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인생의 주체가 된다고 하는 것은 엄연한 현실입니다. 이 사실을 부인하며 인생을 도피하면서 살아서는 결코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연애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연애하고 깨지고, 일주일 안에 또 다른 연인을 만들고, 또 깨지면 일주일 안에 또 다른 연인을 만들면서 메뚜기처럼 계속 떠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도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만 피곤하기 그지없는 삶입니다. 왜 그럴까요? 혼자 사는 게 너무나 무서워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사랑에 빠지거나 결혼을 해서 한 이불을 덮고 자도 자신의 인생의 주체가 자신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누가 대신 살아줄 수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가장 필요한 것은 정확한 분별력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내 인생에 정말 좋은 것인가, 다 좋아 보이지만 무엇이 진짜로 더 베스트인가를 판단하는 힘을 배양하는 것이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목양시켜 주시는 이유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정말이지 이 세상의 자원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을 지배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고민들이 어떤 것일까요? 대학을 졸업을 했습니다. 어떻게 취업을 할까? 취업을 한 사람도 고민이 있습니다. ‘월급이 너무 작습니다.’ ‘회사가 너무 갑질을 해서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습니다.’ ‘아침 8시에 출근을 해서 밤 10시 넘어서 퇴근합니다. 제 삶이 없습니다.’ ‘결혼 적령기는 다가오는데 시집을 갈 수 있을 것인가?’ ‘독신의 은사는 없는 게 확실한데 왜 타의에 의해서 이 독신은 계속 되는 것일까?’ 등등의 고민들을 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돈이 없었는데 어떤 계기로 해서 돈이 주어져서 돈에 대한 고민을 해결했고, 또 결혼을 못하고 있어서 고민을 했는데 그럴 듯한 남성이나 혹은 여성을 만나서 결혼 날짜를 잡고 결혼을 했으며, 마음에 쏙 드는 직장도 얻었다고 합시다. 그것이 정말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할까요? 물론 그 길로 들어서면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보다 더 많은 물질을 누리고 안락한 생활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배우자를 선택할 수 있는 폭도 훨씬 넓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삶의 방향일 수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으로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면 성경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지 그 죄인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가는지, 달구지를 타고 가는지, 걸어가는지, 아니면 기어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이 편지가 2천 년 전에 쓰인 것인데 불구하고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빌립보 교인이 부자였다더라. 그 중에서 세 사람은 빌립보 시에서 랭킹 몇 위에 오르는 갑부였다더라. 그 교회에 기둥 같은 여자 집사가 있었는데 미모가 탁월했다더라.’와 같은 것에는 관심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삶의 양상이지 근본적인 삶의 방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굉장히 촌스러웠을 것입니다.
저는 중국의 절세미인이라고 전해 내려오는 양귀비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사역이 있어서 시안에 갔다가 양귀비의 모양을 보고 너무 실망했습니다. 키가 157cm에 몸무게가 75kg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를 도자기로 빚어서 만들어 놓았는데 정말 못생겼습니다. 양귀비가 어떻게 미인일 수가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양귀비 자신이 당대 미의 기준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에 자기가 기준이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모두 삶의 한 양상이지 방향은 아닙니다. 기독교는 삶의 양상을 갖고 고민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냥 각자가 노력하여 더 좋은 길을 찾아서 부지런히 사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의 극대화를 통해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이 전환된다고 성경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빌립보서가 2천 년 전에 쓰였는데도 오늘날에도 현실성을 갖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얘기하는 것입니까? 분별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좋아 보이지만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이고, 달라 보이지만 그 중에 참된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어서 최상의 것을 선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어려운 교리를 배우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음에 사용할 공과책을 지금 쓰고 있지만 그 교재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 것을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열린 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착각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신학적인 지식은 많이 있지만...” 그래서 제가 속으로 웃었습니다. 있기는 뭐가 있습니까? 그냥 보고 지나갔을 뿐이지 정말 자기 것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저자인 제가『구원과 하나님의 계획』을 28번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그 지식이 삶을 살아가기에 충분한 지식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밥 벌어 먹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살기 위해서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최소한 12년의 교육을 받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유치원을 보내고, 또 대학을 보내니 인생의 삼분의 일, 그러니까 20년 가까이 교육을 받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교육으로 일등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섞여서 그저 원만하게 밥벌이하면서 살아가고 인간 구실하면서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들이 이 20년의 교육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일에도 이럴진대 그리스도의 교양으로 무엇이 교육되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자동차 운전면허 문제집에 대한 지식만큼도 진리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무엇을 분별하고 판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해 놓고 목회자들을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개업을 할 텐데 어디서 개업을 하면 되겠습니까?”, “이 사업이 하나님의 뜻입니까? 아닙니까?” 그것을 물어보고 구걸하러 다니는 불쌍한 신자들이 되어서 무엇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지한 그늘 아래서 악한 삶은 만연하게 됩니다. 초롱초롱 빛나는 빛, 지혜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어떠한 사랑도 그 마음 안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최고의 선(善)이고, 사랑이신 동시에, 그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진리보다 더 큰 것이 없다면 그분은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진리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하나입니다. 그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불러옵니다. 여러분들이 누구를 사랑하는데 너무 사랑하면 그 사람의 음성이 들립니다. 환청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너무 사랑하니까 마치 그가 와서 문을 두드리는 것처럼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아가서에서 신부가 노래한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첫 번째 특징은 성경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제가 20대에 주님을 만나고 깊은 변화를 경험했을 때 생전 처음 겪었던 느낌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이 연애편지처럼 달콤한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그분을 알아가고 그 지식과 총명 때문에 어떤 사안에 대해서 내가 정확한 판단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서 모든 것을 걷어가고 모든 것을 빼앗아 가셔도 마지막에 남겨두셨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늘 이야기하지만 내가 못하는 것은 못합니다. 내 능력 밖의 일은 할 수 없습니다. 나에게 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없냐고 물으신다면 죄송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직 없습니다. 나도 왜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갖고 싶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무엇입니까? 최소한 정확하게 판단해서, 내가 못하는 것은 못하지만 내가 판단을 잘못했기 때문에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게 하자니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어떤 질문에 대해 답을 하게 되면, 그 답은 근거를 요구하고, 근거는 뿌리를 찾고, 뿌리는 근원을 향하도록 우리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삶과 인생에 대한 견해가 견고하게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런 권고를 했습니다. “당신은 지금 왜 거기 있고, 왜 그 행위를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를 하나님 앞에 변명할 수 있도록 매순간 힘쓰라.” 그것이 분별력이 없이 가능하겠습니까? 정말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B. 진실함
둘째는 ‘진실함’입니다.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진실한’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에일리크리네스(εἰλικρινής)인데, ‘판단하다’는 뜻을 가진 ‘크리노’(κρίνω)에 ‘에일리스’라는 단어가 앞에 붙은 것입니다. ‘에일리스’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이냐에 따라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첫째는, ‘에일리’(εἵλη)라고 보는 것입니다. ‘에일리’는 희랍어로 ‘태양빛’입니다. 어둠 속에서 보았을 때는 가짜 돈인지 진짜 돈인지 몰랐는데 햇빛이 비쳐보았을 때에는 진폐의 세밀함이 잘 보입니다. 햇빛 아래 딱 비춰놓고 보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진실하다'라고 하는 것은 “변명할 수 없는 아주 밝은 빛 아래서 판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둘째는, ‘에일로스’(eilos, ‘체치다’라는 동사 에일리소 εἱλίσσω의 어근에서 옴)라고 보는 것입니다. ‘에일로스’는 희랍어로 ‘체’를 말합니다. 체질을 하면 이것저것 섞여 있는 것들 가운데 가루만 떨어지고 이물질은 걸러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곡식 알맹이와 껍데기들이 마구 섞여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무엇이 섞여 있는지 잘 판단이 서지 않지만 고운 채에 놓고 막 흔들면 곡식 알갱이만 빠져나오고 껍데기와 불순물들, 쭉정이들, 지푸라기들은 다 걷어 내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체질을 하듯 판단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나는 두 개의 해석 중 어느 것이 더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둘 중에 어느 것을 택하든지 별로 큰 차이는 나지 않는다고 봅니다. 어느 것으로 보든지 간에 이 단어가 의미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객관적인 규범에 의해서 검증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진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객관적인 규범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을 진실하다고 판단할 때 그때에 기준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진실한 것은 언제나 정직과 솔직함을 내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경우에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도둑이 들어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고백을 합니다. “저 강도질하러 왔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돈을 내 놓지 않으면 죽이려고 지금 이 품속에 칼을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이 칼을 사용하지 않게 도와주세요. 저는 양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솔직하고 정직하기는 했는데 그 사람이 하고자 하는 행동과 의도가 진리의 기준에 벗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우리들이 진실하다고 말합니다. 어제 왔던 도둑이 다시 찾아와서 고개를 숙이고, “어제 왔던 강도입니다. 어제 와서 제가 복면을 쓰고 와서 당신을 칼로 위협하고 돈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 생각하니 내 잘못이 너무 크고 당신이 모든 것을 읽어버리고 고통을 받았을 생각을 하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당신에게 빼앗아간 돈을 도로 가져왔습니다. 당신을 위협했던 칼도 여기 가져 왔습니다. 이제 이것을 내가 조용히 놓고 갈 테니 제발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은 우리는 진실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행동이 진리에 부합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객관적인 진리의 말씀이 있고 거기에 자신이 사랑으로써 합치된 상태가 진실입니다. 그 진실은 인격에 속하는 특징입니다. 그가 고의적으로 다르게 행동하지 않는 한 진실한 인격은 자연적인 상태에서 언제나 신실한 행동을 낳습니다. 진실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떤 행동 하나하나를 했을 때 모두 다 연결이 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한결같음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용할 때 우리가 그것을 신실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미가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었던 삶입니다(미6:7-8). “하나님이 높으신데 어떻게 할까? 천천의 수양을 드릴까? 만만의 기름을 드릴까? 아니면 내 태의 열매를 드릴까?” 요즘 버전으로 바꾸어 말하면, “내가 건축헌금을 왕창 해볼까? 구제헌금을 크게 해볼까? 우리 자식들을 신학교 보내 버릴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말합니다. “관둬라.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이미 보이셨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라. 겸손히.” 이 말은 하나님 앞에 낮아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복종된 상태로 낮아진 가운데 그분과 함께 “겸손하게 동행하면서’() 사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돈 많이 번 손정의 같은 기업가나 구글 회장 같은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해서 관심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되어서 그 돈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옳은 길을 걸어가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가판대에서 신문과 떡볶이를 팔아서 먹고 살아도, 공의를 행하며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자를 행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요즘 사람들은 정말 표독스럽습니다. 티끌 같은 것에 못 참습니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폭력을 행사합니다. 말로나 행동으로 엄청난 폭력을 행사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식을 때려서 병신을 만들고 심지어는 죽음으로까지 데려갑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인자가 없는 것입니다. 교만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을 가치로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 것들입니다.
신앙을 가진 자들 중에 빛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에서 한 스타덤에 올라선 사람, 그리고 탁월한 학벌을 가지고 있거나 사업적으로 성공했거나 능력 면에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매들도 그런 형제들을 보면 달리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그다지 주목하지 않습니다. “공의를 행하나? 정말 그 사람이 인자를 사랑할까?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을까?”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교회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의 순수함을 통해서,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그 속에서 주님의 향기로 살아가는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문제는 우리의 삶의 양상이 아니라 삶의 방향, 그 인생을 살아가는 주체인 나의 인격의 질이 문제인 것입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우리 주님이 만약 커다란 테이블에 ‘성공’, ‘미모’, ‘지식’, ‘학위’, ‘금수저’ 등등을 놓고 그 옆에 ‘진실’이라는 것을 놓았을 때에 과연 우리는 진실이 우리 인생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믿고 가장 강한 욕망을 가지고 진실을 선택할까요?
오늘날 ‘진실하다’라고 하는 말은 융통성이 없고 시대에 뒤처지고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의 모습처럼 비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패배한 자신의 실패에 대한 변명으로 봅니다. 그것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비쳐지는 모습입니다. 저는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누가 그럽니다. 자매들이 선을 보고 오면 똑같이 묻는 게 그 사람이 능력이 있는가를 묻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 내가 물어보고 싶습니다. “정말 그 사람 진실해?” 그렇게 물어보는 친구들이 있습니까? 성경은 이 진실을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사랑을 불 일 듯 일어나게 하는 현실적인 삶의 목표의 두 번째 주제로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좀처럼 회개하지 않습니다. 눈물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찬양집회가 뜨겁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닙니다. 음향 기기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진실의 가치를 무시하면서 살기 때문에, 다시 하나님께 돌아간다든지 진심으로 뉘우친다든지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오늘날 회개를 강조하는 설교를 듣기 쉽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실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회개의 가치가 저평가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절실하게 느낀 사람은 오류에 대해서 피가 거꾸로 솟는 분노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 오류가 수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데려갈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진실의 가치를 알고, 그 진실한 인격 안에서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그를 기뻐하시는지, 마치 아름다운 꽃을 보고 즐거워하는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처럼 주님은 그가 비록 완전하지 못하고 그가 부족하고 때로는 넘어지고 심지어는 때로는 악을 행하고 죄를 지었어도 진실해 지려고 할 때, 그리고 그 죄에서 돌이켜 다시 진리로 돌아갔을 때 그를 이 세상의 어떤 성공한 사람보다 아름다운 꽃으로 여기십니다.
그런 가치를 존중하는 공동체가 이 세상에 어디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가치가 교회 안에서는 유지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에게는 진정한 참회가 있습니다. 진실한 사람은 위선을 미워합니다. 진실한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 자기가 받을 비난보다 자신이 양심으로 진리를 버렸다는 것에 대해서 더 가슴 아파합니다. 그게 진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은 인생을 사는데 외롭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가 항상 그의 편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생을 사는데 좀 불편할 수도 있고 때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큰 손해를 감당해야 되는 경우도 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되든지 간에 진리를 이미 안 사람은 진리를 등지고 사는 일보다는 힘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사랑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을 보십시오. 시인들이 고난을 당할 때 굳게 붙들었던 확신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이 진리 편에 서 있고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은 내편이시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시련 속에서도 기쁨의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이 고난을 당하는 의미를 즐거워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가지 소원을 들어보라고 말한다면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들이 얻는 가장 큰 위로는 신실하신 그리스도가 자기편이라는 흔들 수 없는 확신입니다. 환란을 당하거나 시련을 겪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모든 시련의 계곡을 통과할지라도 신실하신 주님은 내편이시라는 위로, 어떠한 경우라도 세상으로부터 내가 버림을 받았어도 우리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신다는 그 영적인 위안, 확신, 그리고 주 없이 사느니 주와 함께 죽으리라는 확신, 이것이 세상이 흔들어 놓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위안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감옥 속에 갇혀 있는 노목회자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위해 간절히 빌면서 그들이 진실해 지기를 원했습니다. 성도가 제일 많이 모이는 로마제국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되기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유력한 정치인이 이번 선거에서 시장으로 당선되는 것을 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목회자인 사도 바울이 진심으로 바라던 것은 자기가 목회한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이 말씀을 보며 진리의 기준선 앞에 서 보십시오. 그리고 정말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 진실의 지도 위에 한번 놓아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삶의 모든 방면에서 진리와 부합하지 않은 것을 뉘우치고, 모자라고 부족하지만 할 수 있는 한 그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옛 성품을 미워하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그 은혜의 연합 안에서 주님을 붙들려고 하는 믿음을 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허물없음
셋째는 ‘허물없음’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진실이 소극적인 의미라면 허물이 없다는 것은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이 구절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은 크리소스톰이라는 교부가 제시하는 바와 같이 두 가지를 의미하는데, 첫째는, 타인을 넘어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장에서 사도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고전10:32) 물론 한 사람이 전혀 잘못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을 모함하거나 오해를 해서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 넘어뜨린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에 분별력이 없어서 스스로 넘어진 사람이고 거기서 안 넘어졌어도 언젠가는 넘어질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백하게 어떤 잘못을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넘어집니다. “아, 저렇게 행해도 되나보구나.” 혹은 “저렇게 판단해도 되나보구나.” “저 정도 잘못을 해도 괜찮은 거구나.”하고 사람들이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기 자신이 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갈5:4). 어떤 이유로든지 믿음이 부족해서 넘어지든지, 혹은 진리를 잘못 이해해서 넘어지든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서 주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마음이 약했기 때문에 넘어지든지, 어떤 경우이든지 자신이 넘어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남을 넘어지게 하고 자기도 넘어지는 것, 이것이 “허물 있음”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잘못해서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거나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다른 사람이 그것을 오해하거나 잘못 판단해서 스스로 넘어지기도 합니다. 걸어가다가 부딪쳐서 넘어질 때도 있지만 스텝이 꼬여서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안 부딪혔는데 말입니다. 어떤 경우든지 남을 넘어뜨리지 않고 자신도 넘어뜨리지 않는 삶이 허물이 없는 삶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어떤 완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에게 그런 것을 기대 안 합니다. 마치 그렇게 될 수 있는 듯이 최대한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허물없음”이라는 말입니다.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흠이 없이 온전하고도 진실한 인격과 삶, 이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순간에는 그럴 수 있을지 모릅니다. 삶을 모두 펼쳐놓고 보면 오늘 진실해 보이는 사람도 언젠가는 안 그런 적이 있었고, 오늘 진실하지 않은 사람도 언젠가는 진실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지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행적인 개념’입니다. 성향 자체가 진실해서 아침에 빗나가고는 오후에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런 이행적인 개념으로서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다.
어떤 논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도 지구 위에서 삼각형을 그릴 수 없다.” 무슨 뜻일까요? 평평한 지면위에 종이를 펴놓고 삼각형을 그리는데 지구는 둥급니다. 그래서 결국은 불룩 불룩 튀어나오는 삼각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엄밀하게 생각하면 그 말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삼각형을 그릴 때는 머릿속에 완전한 삼각형이 있는 것처럼, 본 것처럼, 그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삼각형을 그리는 것입니다. 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하는 허물이 없는 삶을 추구하는 신자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못삽니다. 못살지만 못살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신앙의 긴장의 끈을 늦추고 아무렇게 살아도 어차피 마찬가지라는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토기 중에서 특별히 사기그릇을 이용해서 인형을 만드는 예술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굉장히 발달했는데 절대로 기계에서 찍어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 인형을 여러 개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비싸게 받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정교하게 만들었을까 생각될 정도로 만듭니다.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인테리어 소품 같은 것을 파는 가게에 잠시 들렀습니다. 예쁜 인형이 있는데 소년과 소녀가 뽀뽀하는 모양입니다. 그런데 굉장히 쌉니다. 4천원이었습니다. 사고픈 마음이 들어서 인형을 들었다가 곧 제자리에 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점토 흙을 기계에 넣고 붕어빵 찍듯이 수없이 찍고 똑같은 색칠을 해서 쏟아져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술로서의 생명이 없습니다. 공장제품일 뿐입니다.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만들 때 그 도자기를 빚는 장인은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빚습니다.
우리들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은 딱 하나밖에 없는 예술작품입니다. 그러면 삶에 공을 들여야 됩니다. 이 말은 내 삶이 완벽한 삶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4천원 짜리 인형을 기계로 찍어내는 숙련공 같은 마음으로 내 인생을 대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명품을 만드는 것 같은 마음가짐으로 내 인생을 그 위에 올려놓고, 도자기를 빚는 마음으로 우리의 인생을 그려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향한 책임 있는 행동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받은 우리 인생을 향한 예의가 아니겠습니까?
삶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없는 사람은 올바른 분별을 위해서 매순간 총명한 눈으로 끊임없이 지식을 갈망하지도 않고, 어두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밝은 등불을 들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진리를 찾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그 진리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진실도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정말 허물이 없는 삶이되기 위해서 공을 들이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아주 혼미한 속에 살면서 인생의 힘겨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합니다. 하지만 절대 그 속에서 영혼을 울리는 명정한 기도가 안 나옵니다. 기도는 마치 공명통과 같습니다. 진리에 의해 마음에 공간이 생기고 아주 아름다운 스페이스를 만들 때, 그 속에서 마치 바이올린의 현을 켜는 것처럼 진리의 말씀이 자극한 기도가 울려 퍼질 때, 마음에 커다란 공명이 울려나면서 자신의 기도 속에 자신이 빨려 들어가는 변화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마치 인체와 같아서 진리와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작용들이 하나로 되어 있지 따로따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게다가 힘든 원인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도 안 하는 것입니다. 미친 듯이 한번 찬양집회에도 가보고 그것도 안 되면 어디 가서 기도도 받아보는데 죽을 만큼 힘든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지식도 없고 총명의 빛도 없고 풍성해 지는 사랑도 없고 분별력도 없고 진실함도 없고 허물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것은 필요 없고 그냥 내 마음만 편하게 해 주는 그 무엇을 찾고 싶은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기독교 신앙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냥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그 무엇을 찾았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단에서 발견됩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그렇게 해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집에 방문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집은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지만 가끔씩 엉망인 집안도 봅니다. 그러면 저는 정리하고 싶은 욕구를 느낍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집밖에 나올 때는 언제나 예쁘게 치장하고 나오기 때문에 그 사람이 집안을 거지같은 꼴로 해놓고 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그 누구도 하지 못합니다. 양말과 속옷부터 시작해서 수북이 쌓인 빨랫감에, 먹다 남긴 라면 그릇, 반만 먹고 버린 우유봉지, 요구르트 통까지 그야말로 개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정신을 바짝 차리고 우선 버릴 것부터 쓰레기통에 버리고 물건들은 제자리에 갖다놓고 더러운 곳은 걸레질을 하면서 한 두 시간 치우고 나면 이내 정리가 됩니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방향제를 뿌리고 이불까지 개켜놓으면 잠시 후에 들어가보면 정신이 맑아지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목사님,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 힘들어요. 어떻게 매일같이 그 지식을 찾고 총명을 추구하고 사랑을 불러일으키기를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분별력을 가지고 진리를 위해서 자신을 거기 합치시켜 진실한 사람이 되며,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늘 애쓰는 것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살았을 때의 그 힘듦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보다 쉽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내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내게서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멍에가 아예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쉽고 가볍다고만 하는 것입니다.
어지러움과 혼란 속에서 고통하고 계십니까?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혼란스러운 것들로 잔뜩 얽혀서 괴로워하십니까? 아침에 눈을 뜨면 무엇을 해야 될지를 모르겠고 밤이면 불안 속에서 잠들고, 하루를 살아가면 내 인생 같기도 하고 남의 인생 같기도 하고, 살고 싶기도 하고 안 살고 싶기도 하십니까? 이런 이상한 인생을 살면서 겪는 괴로움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총명한 눈으로 진리를 찾고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하며 분별력 있는 진실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그 애씀보다 얼마나 더 큰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애쓰는 삶에는 즉각적으로 생명과 사랑이라는 열매가 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 중에도 영적인 깊은 침체 속에서 무겁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더도 말고 하루만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영혼이 가벼워집니다. 한 시도 떨어지지 않았던 핸드폰도 내려놓고, 세속적인 것에 쓸데없이 몰두하지도 말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깨끗이 씻고 성경 한절을 읽으면서 큐티를 하고, 주님께 무릎을 꿇고 간절히 도와달라고 빌면서 하루 종일 마음을 지키고 밤을 맞이해 보라는 것입니다. 영혼이 고요해 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면 그 무거운 짐이 어느 정도 덜어집니다. 이런 생활이 하루가 아니라 3일, 1주일, 1달, 6개월, 1년이 되도록 유지해보십시오. 우리의 심령이 쇄신되고 그 안에서 죽었던 기도의 영은 다시 살아나며, 하나님의 말씀의 밝은 빛을 사모하는 감각이 되살아나고 주님의 영광과 사랑과 용서의 경험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게 될 때, 그때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가벼워지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거운 짐입니까? 우리는 죽어야 됩니다. 어차피 살아있다는 사실이 그 정도의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조직 폭력배로 온갖 악을 행하면서 사는 사람도 그 정도의 인생의 무게는 느낍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제자도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정당하게 치러야 할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가벼운 멍에이고, 세상의 염려와 근심과 영적인 침체에서 오는 좌절과 무력감은 아무리 빠져들어도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건을 위한 수고는 우리에게 생명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다시 살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이사야서 5장에서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기 심으시는 것이 극상품 포도를 얻기 위해서 그들을 포도원처럼 심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망대를 세우고 술틀도 놓았지만 좋은 포도대신 들포도를 맺었다고 한탄을 하십니다. 무엇 때문에 여러분들을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구원해 주셨을까요? 여러분들이 처음 영적으로 태어났을 때 요람에 누인 아기처럼 교회를 통해 정성껏 돌보고 양육하셨던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다시 주님께로 돌아와 주님의 목양을 받으며 분별력이 있고 진실하며 허물이 없는 삶을 살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같이 한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 오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무게는 너무 무겁고 힘겨움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님을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는 것이 우리의 고통인데도 그 사랑을 갈망하지 않고, 그래서 우리는 분별력도 없고 진실하지도 않은 채 허위의 삶을 삽니다. 허물로 가득 찬 삶을 살면서 거치는 자가 되었사오니 오늘 이 시간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한 번 주님의 사랑으로 넘어진 그곳에서 일어나게 해 주시고 엎드려졌던 그곳에서 다시 서게 해달라고, 우리에게 은혜를 달라고 한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합시다.
경륜이 있는 복음 (2017.07.30_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 3)
3. 복음의 경륜을 이루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빌1:11)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관건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풍성함은 감정적인 몰입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식과 모든 총명에서 자라갈 때에 사랑은 함께 역사하게 되고 그런 사랑의 성향이 우리의 마음속에 있을 때 주님에 대한 지식과 총명은 증진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우리 안에 주님의 사랑을 불타오르게 하심으로써 우리는 세 가지 목양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데 첫째는 무엇이 가장 탁월한 것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분별력과, 둘째는 말로만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에 합치된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셋째는 그렇게 될 때 절대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무흠할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주님 앞에 상대적으로 흠이 적은 삶을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나라를 향해 가는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11절의 말씀은 그렇게 함으로써 결국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들로 나타나게 되는지, 어떻게 교회의 목양과 우리의 사랑의 풍성함과 분별력, 진실함, 허물없는 삶을 통해서 세계를 향한 당신의 경륜을 이루어 가시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II. 목양과 복음의 경륜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가 아름다운 세계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노동으로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잘 가꾸기만 하면 더욱더 그 아름다움이 증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 세계에 두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고 마음의 눈이 어두워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계셔야 될 자리에 자기를 두고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가치의 최고 정점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죄입니다. 죄의 본질은 바로 이렇게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 생각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가 아니라 자기가 정한 질서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죄악된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인간의 타락에 의해 망가진 세계를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계를 고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타락한 즉시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셨고,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일어났던 방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이 온 세계에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의 경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창조의 경륜이 인간의 죄에 의해서 망가질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구속의 경륜을 통해서 오히려 창조의 경륜에서 예정하셨던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구속의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한 사람을 택하시고, 한 사람으로 한 가정을 선택하시고 그 가정으로 민족을 일으켜 세우시고 나라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와 관계를 맺으면서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건들을 통해 인간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당신의 경륜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구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은 구약에서는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때가 차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죄인들을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충만한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신 동시에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시는 지를, 당신의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또 한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통해서 참 인간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며 사랑하며 살아야 할 것을 본보기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불꽃처럼 타오르는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신약의 역사가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그 불꽃이 작렬하듯이 온 하늘에 터졌고 그 결과로 교회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는 그 교회와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어 그 교회 속에 당신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부어주셨으니 이 생명의 관계적인 측면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 내적인 사랑과 생명을 충만하게 부어주시는데 이러한 성령과 사랑의 작용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로 그 한 사랑 안에 있게 하시고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접붙여 당신이 머리고 그 모든 몸을 지체로 삼으셔서 한 몸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모든 인류의 구속의 경륜을 완성하신 후 모든 인류를 하나의 사랑, 생명, 가족으로 묶으실 종말론적인 성취를 미리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마지막에 이 모든 구속이 완성될 때에 이 세계의 그림은, -온 인류가 문명이야 계속 발전하겠지만- 온 인류가 서로를 “너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을 하며 완전한 사랑 안에서 함께 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족과 같은 공동체가 되게 만드는 것이 이 구속의 완성의 그림이고 이것을 성경에서 하나님의 나라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그런 충만한 사랑으로 그분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떠한 불순종도 있을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이나 불법같은 것들이 존재할 수 없어서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 완전히 성취되는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런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사람들이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나라의 본보기를 먼저 이 세상에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은 교회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인 생각을 갖지 않을 때 그 기독교 신앙은 뼈 없는 연체동물처럼 설 수가 없습니다.
이 빌립보라고 하는 도시는 로마라는 큰 제국 속에서 이쪽 서남아시아 쪽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입니다. 로마에서 굉장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습니다. 당시에 많은 로마 제국 치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로망은 로마를 여행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로마시대뿐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 때에도 유럽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로망이 로마를 한 번 가보는 것이었고, 피렌체를 중심으로 일어난 어마어마한 르네상스 운동도 도나텔로와 같은 예술가와 건축가들이 로마문명에 접하면서, 또 고대 사상에 눈을 뜨면서 르네상스에 불이 지펴지게 된 것입니다. 그만큼 로마는 중요한 곳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가본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로마의 문명은 굉장했습니다. 당시 로마의 문명을 일구어 갈 때 우리나라는 기껏해야 고조선 정도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니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문명을 일구어 낸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로마에 가고 싶어 하니까 로마 제국은 로마가 어떤 도시인지 제국의 위대함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나라와 사람들이 로마를 보고서는 그 앞에 굴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로마는 어마어마한 문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곳은 너무 멀었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못 가는 사람들에게 ‘로마가 이런 곳이겠구나’ 생각하도록 만든 도시가 빌립보였습니다. 로마와 흡사하게 만든 빌립보를 보고 사람들로 하여금 이렇게 대단한 도시가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는 원형인 로마는 그 얼마나 더 위대할까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비유하자면,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를 로마라고 한다면 교회는 빌립보입니다. 그 교회를 미리 세워서 종말에 하나님이 꿈꾸시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 될지를 보여준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막 뛰어오더니 가방에서 배를 꺼내서 잘라서 먹어보라고 권했습니다. 너무 맛있어서 만원어치를 샀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먹었더니 맛이 없는 것입니다. 맛보기로 준 배와 다른 배를 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교회를 진짜 천국의 맛보기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가장 중요한 사명은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교회다운 존재는 세상을 향한 종말의 최고 선포입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사회가 이 교회 속에서 구현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럼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교회에는 예수를 잘 믿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날도둑 같은 사람, 깡패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닌데 들어와서 앉아 있는 사람도 있고 옛날에는 잘 믿었는데 미끄러지고 타락해서 지금은 아주 흉악한 사람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또 지금은 잘 믿고 착실하지만 주님 사랑을 다 잃어버리고 미래에 미끄러질 사람들도 섞여 있습니다. 말하자면 끊임없이 전구가 깜박이는 것처럼 신앙의 변동이 있는 것이지 고요하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속해주셔서 그리스도의 생명에 접붙여졌지만 아직은 구원의 계획이 모두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불완전한 인간들이 죄와 세상의 영향을 받으며 삽니다. 그러므로 불완전한 우리가 어떻게 지식과 총명으로 그 사랑이 불타올라서 끊임없이 죄와 세상의 영향을 떨치며 순수한 주님 사랑으로 나아가느냐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것은 누가 집단적으로 던져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를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붙들며 그 사랑 안에서 심령의 부흥을 경험하게 될 때, 그 한 사람 한사람의 총합이 이루어지면서 교회의 사랑의 불길이 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기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을 붙들고 살고자 하는 거룩한 소원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린 사람들은 놀랍게도 자신의 물질을 서로 나누고 이기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희생적으로 남을 돕는가 하면, 진리에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 진리를 깨닫고 사람들은 누가 나보다 진리를 탁월하게 알 때에 기꺼이 인정하면서 도움을 구할 뿐만 아니라 자신도 지체들에게 진리를 나누어주고 그를 위해서 기도해 줍니다. 넘어진 자는 일어난 자에 의해 붙잡혀지고, 쓰러진 자는 일어서 있는 자의 도움에 기대어 교회는 그렇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각자가 겪는 인생의 많은 아픔과 고통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것처럼 사랑으로 나누면서 나보다 다른 사람이 진정으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사회가 되는 것,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입니다.
각 개인을 떠나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계획을 놓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교회를 전 세계, 각 동네마다 세워서 사람들이 보며 예수를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서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일까라는 생각하게 만드십니다. 그게 바로 선교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섬김입니다. ‘저 사람들은 다른 사회를 이루며 살고 있다. 그리고 행복해 보인다. 인생에 있어서 어려움이 오고 시련이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담대함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진리를 목말라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웃에게 이런 인상을 준다면, ‘당신은 틀렸어.’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사랑이 메말라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들은 굉장한 존재의 울림이 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누가 조금 잘한다고 해서 으쓱해질 필요도 없고, 누가 말썽을 피우고 사고를 친다고 해서 주눅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 일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교회는 진짜 티 하나 없이 순결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기서는 이런 일, 저기서는 저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주님이 보실 때 교회 전체가 어떤 모습이겠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개혁은 언제나 고민하고 있는 그 한 사람의 변혁으로 시작이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그런 우주적인 계획을 가지고 만드셨다면 결국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를 믿으며 살아가는 삶의 의미도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펼치시는 경륜과 연관을 맺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서 수백 만명의 군대들이 전쟁을 합니다. 얼마나 조직적으로 움직이겠습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뛰어난 나라가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이 세계의 모든 교회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한 공간을 차지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영역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나’는 학생이고, 직장인이고, 그것도 안양에 있는 조그마한 무역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입니다. 가게를 하고 사업을 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 장소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거기서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의미가, 교회 전체를 세우셔서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고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고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는 위대한 경륜 속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과학을 공부하고 이해를 시키면 우주에는 놀라운 질서가 있다는 것 정도는 이해를 하기 때문에 그 질서에 의해 움직이고 있어서 세상은 아름답고 안전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자신의 인생에 이 사실을 적용 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았으나 여전히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삶으로 귀결이 됩니다.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고자 하면 죄를 짓지 않고는 그 목적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 사람은 이런 현실적인 모순 속에 있게 됩니다. 인생의 가치를 돈을 모으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에 두는 사람은 너무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삶의 양상이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직장생활을 8년 동안 해봤는데 세상이 그렇습니다. 높은 지위를 얻기 위해 직장에 많이 기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의 말에 언제나 귀를 기울여 줍니다. 그러나 기여한 것은 없고 짐만 되었던 사람은 딱 한번만 귀를 기울여 줄 것입니다. ‘제가 이 회사를 그만두겠습니다.’라고 할 때 ‘아우 잘 생각했다고. 빨리 그만 두라고’ 말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지위와 탁월한 재능이라는 자원을 가지고 있는 자가 삶의 방향과 목표가 분명하게 정해져 있을 때에는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일들을 행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지위나 자원이 없고, 자원이 있는 사람은 올바른 삶의 개념이 없습니다. 모은 돈과 사회의 권력으로 죄를 짓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갑질을 해서 인간성을 파괴하고 망가진 세상을 만들어갑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이 돈 때문에 얼마나 망가져 가는지 보십시오. 만약에 그 사람들이 올바른 인생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자신의 지위와 모든 자원들을 사용한다면 이 세상은 어마어마하게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외국에서 사역을 하다보면 그곳 사역을 보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천문학적 숫자의 큰 돈도 아니고 불과 몇 백억이면 선교의 역사를 바꿀만한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그 정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생각이 없고, 생각이 있는 사람은 능력이 없다는 점도 함께 봅니다. 그런 점에서 존 오웬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의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당하게 싸워 이겨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갔더라면 창조된 세계를 파괴하고 망가뜨렸을 자원을 하나님의 질서대로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 일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염세적이거나 현실도피적인 사람들이 되지 말고 훨씬 더 공격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한 지체다. 그러면 주님이 이 교회 전체를 어디로 데려가시려는 것일까?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의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목양을 받게 해주시고 지식과 모든 총명을 주셔서 우리의 사랑을 풍성하게 하시고 분별하고 진실하시고 허물없이 살아가게 하실 때 모든 은혜를 베푸셔서 교회 전체를 향해 기대하고 계시는 바가 무엇일까?’라는 그 비전의 통로에 자신도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항상 자기 자신을 구원하여 교회의 한 몸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대해 거시는 기대와 나 자신이 내 인생에 대해 기대하는 바가 일치하지 않게 됩니다. 언제나 빗나갑니다. 그래서 좀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만 하나님이 교회 전체의 경륜에서 볼 때 그 기도를 들어주실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런 경륜의 기본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 인생의 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무엇을 위한 ‘주되심’입니까? 흔한 말로 우리는 예수의 꼬봉이 되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을 가진 지도자 밑에 있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꼬봉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꼬봉이라는 것은 도덕적이고 타당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리더 밑에 있는 하부사람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리더가 아니십니다. 그리스도는 주님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소유, 내 인생 전체는 주님의 것입니다. 이것이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주님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시는 지도 모르면서 주되심을 인정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구원 경륜에 어긋나는 삶을 살면서 자신은 주님을 인정하고 있다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완전 넌센스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구원하신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나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교회의 일부가 되었고 그 몸 전체를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은 나 인생 개인을 향한 경륜과 모순되지 않습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하자면 ‘교회’를 향한 위대한 경륜은 구글맵이라 할 수 있고 ‘나’라고 하는 존재는 깜박이는 점입니다. 그 전자 지도를 놓고 나의 존재의 불이 들어오게 해야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 한 몸으로서의 교회를 하나님이 어디로 데려가시는지를 알아 그 경륜 속에서 내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행할 수 있습니다. 학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사업하는 사람으로서, 정치가로서, 대통령으로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에 편승하여 살 것인지,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도울 수 있는 일과 하지 못하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교회 전체의 경륜 안에서 어떤 식으로든지 이바지하는 그 의미의 고리를 찾으며 살아야 합니다. 이루어진 교회, 현재의 교회, 미래에 이루어질 교회, 다시 말해 본성적인 연합과 영적인 연합과 신비적인 연합 속에서 서로 사랑하면서 교회 전체 경륜 속에 자신의 인생을 놓고 큰 꿈을 꾸라는 것입니다. 허황된 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전망을 꿈꾸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냥 밥이나 벌어서 먹고 소비나 하고 살지라는 생명이 없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위대한 꿈을 꾸면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택하신 이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나타날 위대한 경륜에 이바지하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때로는 시련을 만나기도 하고, 성공하기도 하며, 실패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며, 배신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 가슴속에는 가슴을 뛰게 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가치’(value)입니다. 가슴을 뛰게 하는 단어입니다. 불신자였던 시절에도 행복을 추구하며 살면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눈치 챘었습니다. 내 인생에서 맞이하게 되는 모든 시련과 역경, 성공과 실패와 같은 것들은 현상자체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 있는 일에 매달리게 될 때 그것은 가치 있는 인생이 됩니다. 그렇게 인생을 바라보는 것이 기독교인의 독특한 인생관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인생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럼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은 무엇입니까?” 결단코 얘기하건대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이 모든 생각과 인생관과 세계관이 정돈이 되어있습니다. 아니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그 경륜을 세 가지로 우리에게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의의 열매를 맺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이며, 셋째는,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A. 의의 열매를 맺음
첫째로, ‘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의’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로 디카이오수이네(δικαιοσύνη)라고 하는 단어인데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 디아이오오(dikaióō)에서 온 명사입니다.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인격과 생활의 총화’입니다. 그리고 더 분명하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 용납되도록 만드는 그 어떤 특질입니다. 그래서 결국 의의 열매를 맺었다고 하는 것은 마음의 품질과 생활의 열매 때문에 하나님께 ‘나’라는 존재가 기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고 그 상태가 의로운 상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의의 열매는 율법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1절에서 이러한 의는 ‘율법적 의’와 대비되는 의입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빌립보서에서 사도바울은 3장으로 넘어가면 아주 분명하게 이 의의 정체를 규정합니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9) 이 말씀은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써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가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에 속죄 제물로 주셨고 우리가 그분을 전심으로 믿을 때 이제껏 그리스도 이외에 구원의 길을 우리 모두 포기하게 됩니다. 예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말고도 구원의 길이 많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든 인생의 고민을 예술 하나로 해결해 보려는 사람, 사업 하나로 해결해 보려는 사람,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그 속에서 만족을 얻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겠다고 하는 이제는 나를 신뢰하고 의지하겠다고 하는 삶을 포기하고 그리스도만을 전적으로 의존 합니다. 그 의존의 마음이 성경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고,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 의를 부여하시며,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가 되게 됩니다. 그것이 복음 안에서 나타난 ‘새로운 의’입니다.
그렇게 의롭게 된 사람이 그 의롭게 여겨짐을 받아들여지는 순간 하나님은 그에게 생명과 사랑의 원리를 심으십니다. 죄와 사망이 지배하던 우리의 영혼에 놀라운 변화를 주셔서 예수의 생명과 사랑을 심어줍니다. 생명이 무엇입니까? 생명은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게 하는 힘입니다. 생명이 사라지면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지 못해서 죽습니다. 육체의 생명은 육체를 그렇게 만들고 마지막에 그 힘이 진해서 인간은 죽습니다. 영적인 생명은 어떤 것입니까? ‘나’라는 인생의 존재를 감당할 수 있는 정신의 에너지, 영혼의 에너지가 고갈될 때 인간은 죽는 것이 가장 좋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자살합니다. 자살은 생명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에서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의롭다 여겨짐을 받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 마음에 생명과 사랑을 심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자도 어떨 때는 정말 마주하기 싫은 암담한 현실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죽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기한 것은 마음을 모아 ‘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라고 여기며 기도를 합니다. ‘주님, 내가 도저히 살 수가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십시오.’ 기도가 잘 안 되지만 그 모든 어려운 장벽을 뚫고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눈물이 쏟아집니다. 회개가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을 뉘우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주님의 용서를 빌고 도움을 구합니다.’ 그렇게 하고나면 몇 시간 전까지는 죽고 싶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보였는데 놀랍게도 다시 살아갈 힘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이 예배가 내 인생에 마지막 예배일지도 몰라.’라고 낙심하며 예배를 찾았던 사람들이 예배를 드린 후 은혜를 받으면 ‘아,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다시 대면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겨나게 됩니다. 이것이 생명입니다. 그러니 신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입니까? 그 생명의 통로가 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믿음으로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면 주님은 고갈된 상태에서도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생명이 충만할 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풍성한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에는 부모에게 상처를 많이 받고 자랐습니다. 직장에서는 왜 그런지 모르게 자기만 뒤쳐지는 것 같고 이리저리 갑질을 당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생명이 없으면 도저히 이기며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 상처는 일평생 우리에게 드리워져 따라다니기에 마치 목을 밟고 있는 것처럼 꼼짝도 못합니다. 죽지는 않았는데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일평생 따라다닙니다. 그러니 결국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내게 상처 준 부모에게 복수의 칼을 꽂고 나를 아프게 하고 괴롭힌 사람들에게는 더 잔인한 복수를 꿈꾸면서 살게 됩니다. 내면의 세계가 다 파괴됩니다.
용서는 생명 없이는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랑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되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관용이 생겨납니다. 늘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결코 사랑받는 것으로 행복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끝까지 자신이 행복하도록 사랑해 주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누가 그렇게 해줍니까? 부모님이 해줍니까? 애인이 그럽니까? 남편이요? 사람들이 들으면 웃습니다. 반대로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행복 했을거야 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으면 이야기해 보십시오. 없을 겁니다. 여러분도 못하는 것을 왜 기대하십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미 충만히 받은 사람으로서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며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것이 바로 의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기도 시간에 주님 앞에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모든 친구들이 나를 버려도 주님이 내게 계시면 나는 충분합니다. 이미 나는 충분히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풍성해질 때 사랑 받지 못해서, 정확하게 말하면 주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이 떠오릅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풉니다. 그러나 우리는 빌립보이고, 주님은 로마이기에 우리가 베푸는 그 사랑을 보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여기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교회의 경륜 속에 두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피할 수 없이 선교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프리카나 남미를 가는 것만이 선교가 아니라 자신이 위치한 자리에서 뚜벅뚜벅 인생을 걸어가는 것이 ‘존재로서의 선교’입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지 그렇게 삶으로써 주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상태가 의의 열매를 맺은 삶입니다.
B. 영광과 찬송이 됨
둘째로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영광’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카보드’()라고 나오는데 이것은 ‘무겁다’라는 뜻의 ‘카베드’()라는 상태동사에서 나온 형용사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무겁다’라는 것은 중요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흔히 VIP(Very Importance Person)라고 합니다. 그만큼 무겁다는 의미입니다. 영광은 그런 뜻입니다. ‘사람이나 사물이 가진 어떤 특성 혹은 특질 때문에 다른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그 무엇’을 말합니다. 그 효과를 가리켜서 ‘카보드’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희랍어로 독사(δόξα)라고 부릅니다. 성경에 나오는 영광이라는 단어를 모두 검색해서 범주화 시키면 세 가지 정도로 구분지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본질적 영광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영광이십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John Wesley) 같은 사람은 너무 찬란하게 빛나서 나머지 것들은 안보이게 만드는 것이 영광이라고 설명합니다(W. T. Purkiser 재인용).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제대로 알고 나면 그 빛이 너무 탁월하고 눈부셔서 나머지 것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특히 내 욕심을 따라 살고 내 정욕을 따라 살던 목표들이 주님을 만나고 나면 다 근거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내려놓게 됩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정점으로 새로운 질서가 짜이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효과입니다.
둘째는 발산적 영광입니다. 장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구약에서 보면 예를 들어 모세의 경우 타지 않는 떨기 속에서 불길이 일어납니다. 이상하게 가시나무 떨기를 태우지 않습니다. 물리적인 불이 아닙니다. 어느 장소에 하나님이 당신을 생각나게 하는 강한 임재의 효과를 두시는데 쉐키나(Shekinah)라고 하고 영광이라 부릅니다.
셋째는 효과적 영광인데 성경에서 많이 쓰이는 용례입니다. 본문에서 이야기 하는 영광인데 그분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하나님이 이러한 특별한 성품을 가지신 분이구나.’ 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의 영광입니다. 여러분들이 회사에서 일을 잘하면 다음에 들어오는 여러분 학교 출신의 후배들은 이상하게 관리자들이 더 후한 점수를 부여하거나 좋은 선입견을 가지고 봅니다. 그 후배는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영광입니다. 영광 자체이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영광스러운 당신의 이름은 이 땅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높아지거나 낮아질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이름은 존귀해지기도 하고 땅에 떨어져 짓밟히기도 하고 다시 영광스럽게 되기도 합니다. 그 이름을 많은 사람에게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입니다. 성경에서 압도적으로 말하는 영광은 찬양 속에서 눈을 감고 올리는 식의 주관적인 영광 돌림이 아니라 자신의 인격과 존재와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선하시고 의로운 분이심을 인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와 인격과 삶 전체를, 그 심장부에 있는 인간의 마음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기를 ‘하나님은 이 세계 어느 장소보다 인간의 마음을 통해서 더 많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깊이 인정하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닮아갈 것이고, 주님을 닮은 그 인격은 삶으로 주님을 더 분명히 보여주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때문입니다.
요약을 하자면, 우리 속에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사랑을 불같이 일어나게 하는 것, 그리하여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진리에 합치된 진실한 삶을 살며 넘어지거나 넘어뜨리지 않는 허물없는 삶을 사는 것이 목표라면 그 목표를 통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들, 그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지를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분의 이름을 높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열방의 횃불로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여러 다른 모습으로도 묘사됩니다. 횃불처럼 타올라서 주님을 보여주기도 하고, 강같이 흘러서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을 적셔서 생명을 얻게 하기도 합니다. 그런 의도로 하나님이 교회를 선택하시고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그곳에 매달려 있습니다. 모든 영적인 침체에 빠졌을 때 점검해봐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올바른 구도 속에 잡혀있는지, 비록 그렇게 못 살아도 그 삶의 방향에 내가 동의를 하는지, 내 인생에 대한 많은 고민은 하나님의 경륜의 빛 아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고민인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부신 경륜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예수를 믿으며 살아가게 하셨는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나를 부르셔서 당신이 있기를 바라는 자리를 지정하셨음을 알고 직장인으로, 사업가로, 정치인으로, 학자로, 주부로, 새가족 위원으로, 팀장으로, 구역장으로, 목사로, 전도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야 합니다. 스치고 지나는 사람일지라도 나로 인해 그가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그분을 찬송하게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는 것에서 우리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한 구도의 길을 걸으며 그 사랑에 불타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찬란한 진리의 빛으로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님의 집에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 제가 며칠 전에 꿈을 꾸었는데 베개가 젖도록 엄청나게 울었어요.” “왜요?”라고 물었더니 꿈에서도 너무 행복하게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새 가족 위원으로 섬기고 있는데 제가 대뜸 “이제 교회 나오지 마세요. 새가족 위원도 섬기지 마세요.”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한없이 울었는데 깨어보니 꿈이었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자신의 인생의 목표에 대한 존재감은 직위의 크기나 일의 중요성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이 3명의 천사를 불렀습니다. 첫 번째 천사에게 왕의 지휘봉을 주면서 저 큰 나라의 보좌에 앉아서 ‘그 나라가 내 뜻대로 되도록 황제로서 통치하거라.’ 했습니다. 두 번째 천사에게 주판을 들려주었습니다. ‘너는 가서 큰 가게를 맡겨줄 테니까 장사해서 돈을 남겨라.’ 세 번째 천사는 황당했습니다. 육군 철모 같은 것에 막대기가 꽂혀 있는데 그것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가서 똥을 퍼라.’는 것입니다. 세 천사가 구름을 타고 지상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때 그 설교자가 물었던 질문은 이것입니다. ‘세 천사의 마음이 각각 달랐을까요?’ 우리처럼 천사는 절대 투덜대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섬김의 가치가 일의 높낮이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정한 것입니다. 높낮이에 달린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주님이 부여한 분부다라는 점에서 모두 똑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적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예로 들었습니다. 아주 작은 직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사랑 때문에 가치를 느끼며 거기에 헌신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충성되었던 사람에게 주님이 두 번째, 세 번째 일을 맡기십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C. 그리스도 때문임
셋째로,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 말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리킵니다. 신자가그리스도와 연합되었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생명이, 사랑이, 은혜가, 용서가 끊임없이 흘러 들어오면서 나의 고요한 섬김을, 생명이 들어오면서 그 생명이 나의 인격에 영향을 미치고 나의 삶에 영향을 미쳐서 결국 종류는 다양하지만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들어온 그 생명과 사랑을 자원으로 이루어집니다.
로버트 리담의 표현에 의하면 이런 것입니다. 동네에 전신주를 세우고 전기시설을 다하고 스위치까지 넣었습니다. 근데 전기가 안 들어옵니다. 어느 순간에 전기가 들어왔고 전기가 흘러가면서 빛을 내고 열을 내고 모터를 돌려서 동작을 하게 해서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내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런 우리의 인격적 변화, 섬기며 사는 삶, 만족과 기쁨, 내가 사랑받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여기며 사랑해주며 살 수 있는 관용과 아량을 흘러가게 하는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스위치 내리면 작동을 멈춥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또 한편으로 이 스위치는 절대 꺼지지 않는 스위치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불변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성화의 삶을 살면서 이 연합이 충만하게 우리에게 거룩한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시도록 하시려고 주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통해 분별과 진실함과 허물이 없는 삶을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목적이 그렇게 성취가 됩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들이 마지막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신자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 구원을 자기만족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 구원은 결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위대한 경륜을 위해 교회에 주셨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로서 교회에 주신 경륜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많은 사람이 신자가 되었는데도 진정으로 행복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이유가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며 사는데도 힘든 이유는 하나님의 경륜과 상관없이 노력하고 있고 때로는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교회를 세우시는 경륜과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그것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기도도 하고 그런 삶을 끊임없이 계획하는데 이 위대한 구원의 경륜 안에서 그 인생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어주실 수 없는 방향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기를 원하고 삶으로는 하나님을 거스르면서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신앙적인 갈등을 일으키고 하나님에게도 만족스럽지도 못하고 자신에게도 만족스럽지 못한 삶을 살면서 자신을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살지 못하고 허비하게 됩니다.
마음껏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자니 신앙이 발목을 붙잡고 주님을 위해 뜨겁게 살자니 자기 사랑이 발목을 붙들어서 세상에서도 부자유한 사람이 되고 신앙 안에서도 부자유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엄마와 같은 사랑으로 교회로 하여금 성도 각 사람을 목양하게 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태도로 말합니다. ‘교회가 이런 것도 안 해주고, 저런 것도 신경쓰지 않아.’ 사랑을 받음으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못 받은 것을 생각하지 말고 내가 이미 받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나보다 더 핍절한 상태에서 무엇인가 티끌만한 도움이라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섬기면서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놀라운 돌봄을 엄마와 같은 교회로부터, 그리고 엄마와 같은 하나님으로부터 받고 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무위도식하지 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받은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신자는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낮은 지위에서 사소한 일에 종사하며 산다고 할지라도 인생의 의미까지 그 일의 크기에 의해 결정해 버리면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신자는 소명의 삶 안에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리 안에서 다시 정말 뜨겁게 타올라야 합니다. 주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을 내려놓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에 붙잡히며, 그래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붙들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침체를 말하십니까?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고, 악을 행했으면 얼마나 큰 악을 행했겠습니까? 회개하면 하나님이 건져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구속의 공로는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모든 죄와 모든 현실적인 어려움을 능가합니다. 다시 그 생명으로 돌아가면 더 극단적인 상황에서 그 생명이 우리를 살리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어느 처지에 있든지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악을 행하실 수 없는 분이며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있는 모습 그대로 내가 당신을 찾을 때 당신은 나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영적인 침체에서 벗어나서 다시 뜨거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신비하고 놀라운 체험을 기대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꽉 붙들고 그 사랑을 내 마음속에 다시 불같이 일어나게 해주시고 내가 지은 가장 큰 죄는 그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었다는 고백을 하십시오. 다시 한 번 그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며 눈물 흘리던 예배, 그 십자가의 피를 기억하며 드리던 간절한 기도,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망치 소리를 기억하면서 내 인생에 고난을 가슴에 끌어안고 이기며 살던 그 믿음을 나에게 다시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내가 고통 받는 곳에서 담대하게 주님도 함께 고통 받고 있다고 고백할 수 있는 주님과의 일치, 내가 기뻐하는 곳에서 예수도 기뻐하고 계시다는 양심의 확신, 이 모든 것들을 내게 주십시오라고 간구하십시오. ‘이제 당신을 향한 믿음의 자세를 바꾸겠습니다.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해 이것이 옳고 좋은 것이라고 설득될 수 있지만 이것을 제 속에서 행할 수 있는 힘은 주님이 나에게 주셔야합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집에 돌아가서 자기 전에 침상에 앉아서 생각하십시오. ‘돌아가자. 그리고 안일했던 나의 생활을 고치자. 기도 안했던 것, 말씀에 착념하지 않았던 것, 경건생활을 거의 무시하며 살았던 것, 이런 것들 모두 종지부를 찍고 다시 부지런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자.’ 그러면 주님이 여러분들을 만나주시고, 비록 여러분들이 아무리 하찮은 존재라고 해도 이 영광스러운 주님의 우주적인 경륜을 교회를 통해 이루는 그 계획 속에 여러분들을 두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작아도 샛별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계획에 가슴 뛰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빕니다.
4. 물은 피보다 진하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I. 본문 해설
여름 수련회 때 9절과 10절, 11절을 설교했고 오늘 설교로서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부득불 경륜이 있는 복음 네 번째 설교를 오늘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물은 피보다 더 진하다’라는 제목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잘 짜인 직조물과 같습니다. 씨줄과 날줄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천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짜여 갑니다. 하나의 직조물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지으신 경륜이고, 또 하나의 직조물은 나라는 사람을 하나님이 무엇에 쓰기 위해서 창조하셨는가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경륜이 함께 짜여 가면서 우리의 인생은 천이 직조되듯이 그렇게 전개되어 갑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자기라고 하는 이 인생이 하나님이 이 온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생각은 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조차도 일반 계시의 빛으로 하나님의 이 경륜에 가까이 다가간다면 그만큼 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신자는 복음을 통해서 이 경륜의 의미를 안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으로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고 특히 인류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한 사람을 짓고자 하지 아니하시고 여러 사람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사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남편과 아내로, 부모와 자식으로, 그리고 한 나라의 국민으로 서로 만나고 연관을 지으면서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삼위간의 교제의 모상을 본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가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여기고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옆으로는 모든 인류를 알고, 안으로는 자기 자신을 알고,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를 앎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이 세상 속에서 그 아름다움을 더 가꾸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가 인간의 섬김에 의해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에 창조주라는 사실을 더 영광스러운 방법으로 드러내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고, 처음부터 인간의 행복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과 동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복음은 바로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이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지으시고 인간 사회를 만드신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조차도 자신의 인생의 행복을 하나님의 이 창조 목적에서 찾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 관한 얼마간의 지식은 있지만 그것과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알지 못하고, 그리고 이 사회와 교회가 자신의 인생에 무슨 의미를 주는지도 알지 못합니다. 여전히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가치 판단에 있어서 최고층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며 사는데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하기 때문에 결국 물이 없는 메마른 땅을 방황하는 것처럼 인생의 힘든 길을 지나는 것입니다. 신자의 인생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따라 전개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이 구원 계획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타락에 의하여 좌절된 것처럼 보이는 계획을 다시 완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하나님께서 절망적으로 당신을 떠나 불행해진 인간을 어떻게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입니다. 그래서 금고 속에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면 복음은 바로 그 금고를 여는 열쇠와 같은 것입니다.
II. 경륜에 참여하는 마음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목양하시는 것은 사랑을 풍성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풍성함은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지식이 사랑과 결합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이상적인 생활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 실제 삶의 뚜렷한 세 가지의 특징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통하여 성도는 이 세상 사람과 구별되고 교회는 이 세상에 있으나 세상과 구별된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한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고, 두 번째는 진실함이고, 마지막에는 허물이 없는 삶입니다. 이런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두운 세상 한복판을 걸어가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 세상에 보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이런 삶을 삶으로써 궁극적인 목적을 성취하게 되는데 그것은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놀라운 복음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서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썼습니다. 어쩌면 사형을 받을지도 모르는 몸으로 간절한 이 편지를 목회자의 심성으로 써 내려갔습니다. 이 9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은 사실은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섬기는 이유이고, 어쩌면 살아있는 목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인생의 본질적인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 8절은 바로 사도 바울이 이 일을 어떤 마음으로 열망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은 목회자로서 사도 바울이 마땅히 가져야 할 마음인 동시에 하나님의 복음의 경류 안에서 목양을 받는 모든 성도들이 서로를 향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다음과 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에 참여하는 마음입니다.
A. 예수의 심장을 가짐
첫째로 그는 예수의 심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라고 말합니다. 그는 여러 곳에서 사랑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평범한 표현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예수의 심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라고 말합니다. 어떤 주석가는 여기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배열에 주목합니다. 즉, 예수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인간이신 예수를 보여주고,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기름을 부음 받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는 인간 존재인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그리스도는 신적 존재인 예수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셨고 동시에 인간이 마땅히 어떠한 삶을 살고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에게는 예수 따로 그리스도 따로 이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예수를 통해 나타났고, 예수는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 교회 교인들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 안에 있는 개인적 인격적 사랑이 아니라 사도 바울도 자신으로 하여금 그들을 사랑하게 하신 그 어떤 사랑 때문에 그 사랑에 매여서 이들을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심장으로 번역된 희랍어 단어가 ‘스프랑크나’(σπλάγχνα)라고 하는 희랍어인데 이 단어의 뜻은 ‘창자’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영혼의 좌소가 심장이 아니라 창자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창자는 인간의 영혼의 가장 깊은 곳, 그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삼으셔서 이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 보내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떤 마음으로 그들을 보내셨는지를 마태복음 9장 36절 이하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신 이유였습니다. 그들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것이 매우 가슴 아프셨기 때문에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때에 ‘불쌍히 여기다’라는 말이 희랍어 ‘스프랑크니스데’(ἐσπλαγχνίσθη)라고 하는 동사인데 ‘창자가 떨리기까지 움직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자면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혹은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파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기 때문이더라고 번역이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도 이와 똑같이 예수님의 심령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내면의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신 것처럼 사도 바울도 그 마음으로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며 우리의 인생의 갈 길과 하나님의 복음의 경륜이 하나의 직조물처럼 짜여 간다는 것을 눈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심장은 마음과 생각과 뜻, 모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소유격을 동반한 이유는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예수의 마음과 생각과 뜻에 사랑으로 자신을 완전히 합치시킨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이 그로 하여금 예수의 분신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지상에서 성화의 끝은 어디까지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깨어지고 변화되고 자기 자신이 새로워지면 그 마지막은 어디에 도달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의 심장을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같은 마음, 그리스도와 같은 정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뜻을 가지고 그 분이 지금 내 삶의 자리에 사셨더라면 되셨을 존재와 사셨을 그 삶을 이어가는 것이며, 그러나 내 안에 진정으로 살게 하시는 이는 예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와는 다른 시대를 사는 우리들이 예수가 여기 계셨더라면 기도하셨을 그곳에서 기도하고, 섬기셨을 그곳에서 섬기고, 우셨을 그곳에서 함께 울고, 마지막에 죽으셨을 그곳에서 함께 죽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인 것입니다.
교회를 놓고 비유하자면 제도로서의 교회는 육체입니다. 그리고 그 육체에 깃든 영혼은 예수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튼튼하고 건장한 몸을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의 정신이 썩어 있으면 그 건강한 육체 혹은 지식을 가지고 사회를 망가뜨립니다. 그래서 제도로서의 교회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립적입니다. 물론 그 제도도 잘못된 제도가 있을 수 있고, 성경에 가까워서 보다 더 좋은 제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는 생명 자체를 생산해 내지 못합니다. 제도는 사랑 그 자체를 생산해 내지 못합니다. 생명과 사랑은 그 속에 깃든 예수의 정신 속에서 공급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교회 전체를 제도로서의 교회라고 본다면 제도라는 육체 속에 예수의 정신이라는 영혼이 충만히 채워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의 정신으로 사무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교회가 한 마음이 되어서 자기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그들을 구원하여 하나의 사회가 되게 하신 교회의 경륜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읽어냅니다. 산란해 보이는 우리의 인생 위에 하나님의 경륜의 위도와 경도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깜빡이는 하나의 점으로서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게 되고, 나의 사랑하는 모든 지체들과 함께 한 공동체로서 역사의 지도위에 우리는 어디를 항해하고 있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하나님의 그 부르심에 합치시킴으로써 잠시 살다 사라진다 해도 영원히 있을 하나님의 경륜을 성취하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의 심장을 가진 지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순수한 교회가 되고, 하나님의 경륜에 이바지하는 교회가 됩니다. 그러나 그런 성도의 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 추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치는 제도로서의 교회의 크기가 아니라 순수성입니다.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며 자신의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하나님의 경륜에 합치시킨 체 살아가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원래 예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이었나요?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없는 신성모독자라고 생각했고, 이단 중의 괴수라고 믿었습니다. 그를 추종하는 모든 무리들을 박멸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자신의 부르심이라고 착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의 심장’이 아니라 ‘반(反) 예수의 심장’이 이글거리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변하여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의 회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에 대해 워낙 악랄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 때문에 반(反) 예수의 심장이 바뀌어 예수를 위하는 심장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며 그분만이 참 구약 성경에서 그렇게 꿈꾸고 그리워하던 메시야이시고, 이스라엘과 모든 인류의 소망이 그분의 부활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살아가면서 그는 온갖 시련과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 모든 시련과 고난 속에서 깎이고 고통을 받으며 그는 아직까지도 자기 안에 남아있는 이 세상의 정욕과 죄들을 씻어내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았습니다. 지성적으로 성숙하면서 그는 영적으로 더욱 깊어지게 되었고, 그래서 이 편지를 쓸 때쯤이면 아주 우주적인 경륜을 이해하는데 도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사역과 선교, 섬김을 더듬어 근원으로 가면 거기에는 바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와 같은 죄인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죽으신 주님, 그 복음이 이 사람 속에 끓어오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 예수의 심장을 가짐으로써 이 구원 경륜에 사심 없이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계획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데 바로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것입니다.
B. 지체들을 사랑함
둘째로 이 사랑으로 지체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 제목을 ‘물은 피보다 진하다’라고 잡았습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중요한 사상입니다. 우리는 흔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물은 피보다 진하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물은 세례를 통해서 모든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는 그 물이며 피는 지상의 혈육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이 피보다 진하다’라고 하는 것은 세례를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는 그 물은 지상의 어떤 혈육의 연대보다도 더 크고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물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피 자체에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의 의미를 통해서 우리를 예수와 연합시키시는 그 신학적인 뜻에 더 깊은 하나님의 경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 물이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움직이는 피보다 더 진할까요? 물을 통해서 사람들은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집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와 생명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그 생명을 개인적으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의 몸에 접붙여져 그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그 자체가 개인적이지만 공동체적인 사건입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받은 구원의 의미와 개인이 받은 구원의 의미가 찢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잘못된 생각들은 서구의 자본주의와 이기주의가 만들어 낸 해석들입니다. 개인 개인이 예수께 접붙여지는 것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은 처음부터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물을 통해서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 새로운 사회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사회입니다. 우리 몸속에 있는 피는 기껏해야 우리 육신의 생명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하지만 이 세례를 통한 물의 연합은 그 교회에게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과 사랑이 그 연합을 통해서 공유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과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사회를 이 세상 속에 불러내신 그 위대한 경륜을 성취하며 살아가는 사회가 됩니다.
따라서 내 인생의 의미는 나와 함께 구원을 받아 예수의 몸이 된 지체들의 인생의 의미와 필연적으로 엮어져 있고, 모든 지체들의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이 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사회를 이 세상에 두셔서 세상 나라 속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와 구별되게 하신 주님의 위대한 경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져 하늘의 생명과 사랑을 공유합니다. 도저히 인생을 살아갈 힘이 없을 때 하나님은 신기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그 생명을 나누어 주십니다. 그래서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하고 눈물로 베개 잎을 적셔도 아침이면 다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며 하나님의 자녀로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갈 하늘의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간관계, 때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삶의 정황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지만 그러나 나의 능력을 모두 포기하고 주님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는 깊은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이기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때 우리는 인간의 모든 생각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영혼 안에, 우리의 창자에 공급해 주시는 하늘의 생명을 경험합니다. 이 생명은 곧 사랑이니 이 사랑의 힘으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십자가처럼 기쁘게 짊어지며 사랑하도록 만들어주시고, 심지어 내게 심각한 악을 행하여 헤아릴 수 없이 고통을 준 사람들조차 아버지께 그들을 위해 용서를 빌 아량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실천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도 우리가 완전히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나라에 살기 때문이고, 내 안에도 하나님의 천국이 완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와 다투고 있는 이 세상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모든 인류의 구원이 끝난 뒤 나타날 하나님 나라의 사회, 이것의 맛보기입니다. 그 사랑의 사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세상에 이 세상 나라와 또 다른 나라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할 인류의 이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그 사랑이 불일 듯 일어나야 합니다. 타오르는 불길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면 지식과 총명은 그 불길을 지속하는 장작과 같습니다. 신자는 성화 생활 안에서 그 모든 지식과 총명을 사모함으로 언제나 그 사랑이 가슴속에 충만하여져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추루한 자기 사랑을 끊임없이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를 모두 버리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지체와 이웃을 섬기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안에서 우리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보람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로부터 받은 그 충만한 사랑에 만족하며 그 사랑에 빚진 자임을 자처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 속에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내가 그 분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사랑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눈물의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셨으니 너희를 구원하신 데는 이런 위대한 경륜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고 말입니다. 증인은 법정에 서서 사실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사랑했기 때문에 사도는 사형을 받을지도 모르는 죄수의 몸으로 옥 속에 갇혔으면서도 옥 바깥에 자유롭게 살아가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보다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기뻐하라고 수없이 권면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예수의 심장을 가지고 지체들을 사랑한다는 고백에 참여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둘째는 바로 이 증인이 자기 안에 현재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이시라는 뜻입니다. 성령은 우리들이 받을 그 부활의 열매의 보증입니다. 그래서 믿는 신자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가 마지막 날에 우리의 몸이 완전히 부활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게 될 것임을 하나님이 보증을 하셨는데 그 보증이 도장이고, 그 도장이 바로 우리 안에 주신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는 오늘 성령이 자기 안에 계신 것이 바로 내가 너희를 이렇게 사랑하는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요약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하도록 구원받은 사람들이고 우리는 그 경륜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예수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로 다시 태어나야 하고, 이 심장으로 지체들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면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경륜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10절에서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모든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한번 가면 오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신자는 누구일까요? 우리의 정체는 언제나 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입은 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공로를 영원히 부채로 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이미 우리의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부터 나의 인생은 주님이 나를 구원하신 위대한 경륜을 위해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라는 고백이 그리스도의 주 되심을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제 자신의 꿈을 따라 인생을 살도록 설계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경륜을 따라 인생을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세팅하신 사람입니다. 인생의 가치를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의 지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복음의 경륜이 신자의 삶의 이유가 되어야 하고, 신자의 모든 인생의 계획은 그 위대한 경륜 속에서 그려져야 합니다. 주님의 이 선하신 부르심을 따라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아직은 그 나라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길에는 속의 근심, 밖의 걱정들이 에워쌉니다. 그리고 때로는 악한 마귀와 그리고 이 세상의 권세들이 우리를 두릅니다. 우리는 그런 속에서 선한 뜻을 이루며 살기 위해 악한 이 세상과 마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경륜을 따라 고난을 받는 삶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름을 따라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그 모든 생명과 사랑의 힘을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공급해 줍니다. 시련과 고난으로 연속되는 이 세상을 이길 힘은 땅에서 오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인생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깁시다. 그리고 한번밖에 없는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서 내가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은 그 보람을 느끼며 살아가는 우리 때문에 당신의 뜻을 이룰지를 생각합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말씀의 은혜로 이 예수의 심장을 되찾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