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이 있는 복음
(2019년 온가족 여름 수련회 장년부)
설교기간 | 2019년 08월 11일 – 08월 13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0년 02월 04일
목 차
설교 프레임
1. 하나님께 간구함 (시 67:1) 2019.08.11. 온가족 여름 수련회 …………………………………… 1
2. 확장되는 기도 (시 67:2-3) 2019.08.12. 온가족 여름 수련회 …………………………………… 13
3.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쁨 (시 67:4-5) 2019.08.13. 온가족 여름 수련회 ……………………… 31
<설교 프레임>
비전이 있는 복음1 2019. 8. 11 여름 수련회 첫째 날 저녁집회
< 하나님께 간구함 >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셀라)” (시 67:1)
I. 본문해설
이 시(詩)는 성전에서 인도자를 따라 부르던 노래였다.
저자는 분명치 않으나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탄원시다.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우주적 비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셀라)”(시 67:1)
II. 하나님께 간구함
먼저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 내용은 세 가지로 제시된다.
A. 은혜를 베푸심
하나님의 백성에게 은혜(恩惠)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한다.
은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호의”를 뜻한다.
이는 하나님의 선(善)과 자비(慈悲)에서 비롯되는 은택이다.
은혜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 은혜 없이 살 수 없음을 아는 것이 신앙(信仰)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라. 그 은혜가 마음에 넘치게 하라.
거기서 인생(人生)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은혜를 받으라.
B. 복을 주심
“복(福)”은 “창조 목적 안에서 만족과 기쁨, 쉼을 누리는 상태”다.
이 단어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모든 복(福)의 원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원한다. 누가 “만족과 기쁨, 쉼”을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복(福)의 원인은 아니다.
인간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다. 불행(不幸)한 것은 하나님 아닌 것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복은 없다.
인간과 자연 만물의 행복한 상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복을 주시고” “예바레케누(yebarekenu)”의 동사원형은 “바라크(barak)”, 명사가 “베라카(beraka)”다.
*asher와 비교해서 뜻을 설명할 것
참으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그 길은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복(福)을 구하라.
C. 얼굴을 비추심
이어서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모든 복의 진수(眞髓)를 간구한다.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시 67:1하)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게 하소서”(KNJ 私譯)
이것은 모든 복들 중 최고인 “영적인 복(spiritual blessing)”이다.
하나님이 인간에 베푸시는 복은 두 종류로 구별된다.
a. 섭리의 복: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심으로 주시는 복.
b. 영적인 복: 하나님이 직접 영혼을 만지심으로 주시는 복.
은혜에는 비전(vision)이 있다. 하나님의 선교 계획이다.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 비전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와 참된 행복(幸福)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은 개인의 영혼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마음을 다해 기도하라.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영적으로 변화를 받으라. 새 사람이 되라.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신다.
은혜를 받으라. 영적인 복을 받음으로 행복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만나라. 살아있는 이유를 발견하라.
비전이 있는 복음2 2019. 8. 12 여름 수련회 둘째 날 저녁집회
< 확장되는 기도 >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2-3)
I. 본문해설
개인의 영적 변화는 세상이 변화되기를 갈망하게 한다.
자기를 변화시킨 말씀이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받기를 간절히 바란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2)
II. 확장되는 기도
A. 주의 도(道)를 알리심
“알리소서” (ladaat).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지식(知識)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알라”, “잊지말라”, “기억하라”.
여기서 “도(道, derek)”는 인류가 믿어야 할 규칙(規則)과 살아가야 할 교훈(敎訓)이다.
이 “도(道)”는 사람이 마음으로 이해되고, 인격으로 나타나고, 생활로 고백된 지식을 가리킨다.
왜 “주의 도”가 땅 위에 전파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하는가?
그 도(道)와 구원이 전파됨으로써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道)”는 곧 “구원”이다.
“도(道)”를 알고 구원 받음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은혜에 대한 초월적 경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한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라. 하나님을 알라. 전파할 지식을 가지라.
하나님의 “도(道)”를 앎으로써 다시 희망을 찾으라. 불행한 인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라.
이것이 구원이다.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된다.
B. 주를 찬송하게 하심
이렇게 주의 도(道)가 전파되고 구원을 알게 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시 67:3)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1. 하나님을 기뻐함
찬송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드려진다.
은혜의 계획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분을 기뻐하라.
2. 하나님 뜻대로 살아감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은 반역(反逆)을 꿈꾸지 않는다.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찬송하게 하소서” 은혜의 계획은 민족들이 하나님을 “주(主)”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다.
찬송하는 사람은 죄가 있다면 회개(悔改)할 것이며 은혜를 받으면 더 많이 순종(順從)할 것이다.
하나님은 참된 경배자가 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우리를 통해 경배자를 세우신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불순종한다. 그래서 불행해진다.
행복하게 하지 못할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은 노예살이다.
순간을 살아도 영원히 빛나는 인생의 의미를 다시 찾으라.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의 비전을 찾으라. 넘치는 기쁨으로 살라.
비전이 있는 복음3 2019. 8. 13 여름 수련회 셋째 날 저녁집회
<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쁨 >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셀라)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4-5)
I. 본문해설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심으로써, 신자들은 복(福)을 누린다.
이로써 온 땅과 모든 나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을 주(主)로 찬송하게 하신다.
II.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쁨
민족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그의 자녀들이 경험하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셀라)” (시 67:4)
A. 심판하심
하나님의 자녀의 기쁨은 주님의 뜻(will)이 법대로 시행되는 것이다.
“심판하시며”(tisheppot) 이는 재판의 문맥이다. 법이 정의롭게 집행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기뻐한다. 하나님의 정의(正義)와 현실(現實)이 유리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서 구현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영혼이 변화되고, 선교가 이뤄질 때 하나님의 법(法)은 세상 모든 나라에서 현실이 된다.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3-24)
사회의 상태는 교회의 소명(召命)을 보여준다. 망가진 부분을 고쳐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근원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사람들을 원망하지 말라. 거기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라.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를 간구하라. 비전을 찾으라.
B. 다스리심
하나님께서 얼굴빛을 비추시고 구원(救援)을 모든 나라에 알리실 때 우리는 기쁘고 즐겁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나 개인과 교회를 넘어서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스리신다(tanhem)”는 의미는 원래 “이끌다. 인도하다” 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따라 사랑으로써, 이 세상을 질서(order) 있게 하신다는 뜻이다.
악(惡)은 이것을 무너뜨린다. 질서가 없다. 예수의 고난은 죄에 의해 무너진 세상을 다시 질서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질서는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따라 온 인류와 만물이 기쁨과 만족, 그리고 쉼을 누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다스리시는 나라다. 사람의 마음을 사랑(love)으로 정복하셔서 다스리신다.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통치(統治)가 마음 안에 이뤄지는 것만큼 세상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갈망한다.
말씀으로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성령(聖靈)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신다.
사랑은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세운다. 그 안에서 우리가 행복을 누리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의 보람은 이러한 통치(統治)를 기뻐하며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기뻐하게 하는 것이다.
III. 적용과 결론
왜 기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나? 보람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의미 있게 살라. 우리의 인생은 한 번 밖에 없다.
행복하게 살라. 다른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행복하게 하라.
비전이 있는 복음(2019.08.11_온가족여름수련회 저녁 1)
포로 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9.10.16.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1. 하나님께 간구함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시 67:1)
녹취자 : 오희열
I. 본문해설
이 시는 성전에서 인도자를 따라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의 공동체적인 탄원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편이 중요한 것은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우주적인 비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이 67편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말입니다.
II. 하나님께 간구함
이 말씀은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이것은 다음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A. 은혜를 베푸심
첫째로,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은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호의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공로나 우리의 좋은 점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신 성품에서 비롯되는 은혜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베푸시는 무한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힘으로 살아봅니다. 그것이 살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복되게도, 어떤 사람들은 도저히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인생의 한계를 느낍니다. 그때 그는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며 왜 자신이 홀로 도저히 인생을 살아갈 수 없는 것인지를 생각하며 어떻게든 바깥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구원의 길입니다. 원래 인간은 만들어질 때부터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랑과 생명을 받으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도저히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믿을 때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믿었습니다. 도저히 내 힘으로는 인생을 살 수 없고, 더 어려운 것은 내가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를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복음을 믿은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은 자신이 그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은혜가 주님께로부터 오는 것으로 믿는 것이요, 그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를 통해서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고 자신에게 분에 넘치는 호의를 베풀어 줄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작부터 하나님에게 기대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은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다면 분명히 그 인간을 지으신 목적과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결코 목적 없고 의미 없이 그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더욱이 창조의 면류관과 같은 인간을 지으시면서 아무 목적도 없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만들어질 때부터 하나님에게 의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살아있게 하심으로 살아있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습니다. 하나님이, “이제 너희 수고가 다 했으니 이제는 너의 인생을 끝내라.”하고 목숨을 거두어가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야말로 흙에서 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분의 품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모습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오늘 하루 숨 쉬고, 내 힘으로 걸어서 여기 수련회에 오고, 이렇게 내가 은혜를 받기 위해서 여기 앉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시니까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이면 우리들 중 누구를 데려가실지 모르고, 오늘까지 즐겁게 대화를 나누던 사람이 다음 주에는 하늘나라에 가 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너무나 익히 잘 알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만들어졌을 때부터 하나님을 기대어 있고, 생존하는 것도 하나님을 기대어 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에도 결국 우리는 주님을 기대어 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태어나서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그분께로 갑니다.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라고 말합니다.
신자된 우리는 죽음 이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그야말로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기대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으나 주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시고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의 완성되지 못한 영혼의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으셔서 우리의 성화를 완성시키시고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사 거기서 부활의 날을 기다리게 하십니다.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이 모든 세계와, 특히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의 출생과 삶과 마지막 죽음 이후까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기대어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덕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에 그 덕분에 우리는 태어나고 살고 죽고 그분의 품으로 돌아가고 다시 부활하고 영원한 세계에 살게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죄가 들어오고 인간이 타락한 다음에는 이것이 더욱 찬란한 하나님의 은혜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은혜는 타락하지 않았을 때 아담이 누렸던 은혜와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죄가 없고 지금은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죄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은혜가 오히려 넘치게 됩니다.
신앙의 요체는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살아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며, 오늘이라 일컫는 이 날을 살아가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의 품에서 죽는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미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이시지만 이 시인은 새삼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마음으로 이런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다시 한 번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여러분의 인생에 많은 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짐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원래 인생이라는 것은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우리가 이제껏 살아온 것은 기쁘고 행복하기 때문에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괴롭고 힘겨웠지만 그것을 헤치면서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하나님과 생애적으로 만나고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붙드는 열렬한 기도로 우리의 어두운 인생의 밤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나쁜 일처럼 보였지만 그 나쁜 일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오늘 여러분이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간구해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살아온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에 살아있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나는 당신의 품 안에 죽을 것입니다. 영원무궁토록 나는 주님의 은혜를 덕 입어서 살아갈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옵소서. 나에게, 그리고 이 땅에 있는 사랑하는 공동체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은혜를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복을 주심
둘째로, 시인이 간구하는 것은 “복을 주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이 ‘복’이 무엇입니까? 복은 창조목적 안에서 인간이 만족과 기쁨, 쉼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인간이 창조목적 안에서 만족과 기쁨, 쉼을 누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복을 주신다”는 동사가 두 개의 단어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사로 나옵니다. “예바레케누”(yebarekenu)라는 동사인데 이것은 “바라크”(barak)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 단어의 명사가 “베레카”(beraka)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아주 포괄적인 복을 가리킵니다. 정신적이고 영혼에 관련된 복에서 시작해서 배불리 먹고 잘 살고 넉넉한 삶을 사는 물질적인 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울러서 이렇게 “복”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당연히 이 복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바로 이 복을 베풀어주시기 때문에 이방인이 그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창세기 39장에서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끌려가서 종의 신분으로 일했는데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온 집이 복을 받았더라”고 할 때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당연히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도대체 이 세상의 누가 만족과 기쁨, 쉼을 원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불만족하고 고통스럽고 안식이 없고 불안한 삶을 바라겠습니까? 모든 사람은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인간 자신이 그 복의 원인은 아닙니다. 원래 인간이 누리는 이 모든 행복, 나아가서 이 모든 피조물이 누리는 기쁨과 만족, 쉼, 평화,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들인데 하나님이 그것을 피조물들에게 전달해주신 것입니다. 당연히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 사이에 이러한 만족과 기쁨, 완전한 쉼과 평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에서 사람들이 누리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 쉼과 평화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복”이라고 하는 이 개념, “행복”이라고 하는 이 개념은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인간의 영혼도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의 복이 임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정신구조로 인간은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예외 없이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그 행복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살아있는 것은 행복을 위해서 살아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불행하게 하려고 살아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모든 인간은 행복하기를 원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 밖에서의 행복을 꿈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닌 것에서, 하나님과 관계없는 행복을 찾기를 원합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을 우리 인간에게 투영시켜 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 만족을 누리고 기쁨을 누리고 안식을 누리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는데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만족하고자 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고통스럽게 하면서도 자기의 이기적인 만족을 위해서 삽니다. 하나님 없이 기뻐하고 싶습니다.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쾌락에 자신의 몸을 던지며 그 행복을 흉내 내어 보려고 합니다. 심지어 악을 행하는 사람도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만족과 기쁨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줍니까? 한 순간은 그럴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눈멀고 귀먹었기 때문에 그는 참되지 않은 것들을 보며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끼고 만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족 후에는 더 큰 불만족이, 기쁨 후에는 더 커다란 허무가 밀려오는 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쉼을 얻기 원하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쉼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 쉼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까지는 어디에서도 쉼을 누릴 수 없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투숙비를 주고 세상에서 제일 화려한 저택에 머문다고 할지라도 안식은 그런 육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정신이 무엇에도 속박 받지 않고 두려움이 없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양심에 구김이 없고 하나님을 향하여 정말 온전한 마음이 될 때 거기에서 쉼을 누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도둑질해서 먹는 값진 음식과 기름진 육식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열심히 일해서 먹는 한 줌의 보리밥이 더 맛있는 이유도 이 쉼에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만족을 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만족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르고 더 많은 만족을 누리기 위해서 이기적인 욕망의 노예가 됩니다. 기쁘기 위해서 또 그렇게 합니다. 쉴 수 없는 그 쉼을 위해서 그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허비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구가 없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불행해지는 모든 사람은 행복해지려고 하는 것이 불행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 자연 만물의 모든 만족스럽고 기쁘고 쉼이 있는 모든 상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만족은 아무리 누려도 후회가 없는 것이어야 하고, 진정한 기쁨은 아무리 많이 누려도 그 기쁨을 누렸기 때문에 언젠가 고통으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진정한 쉼은 안식을 누렸기 때문에 오히려 그 이후에 더 불안해지는 것이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십시오.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의 행복에 관해서 정해 놓으신 원칙입니다. 일생을 그렇게 끊임없는 불만족과 끊임없는 고통과 쉼이 없는 불안 속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당신 품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복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도 그 길은 너무나 멀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셔서 당신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 말씀은 항상 우리를 칭찬하고 우리를 격려하는 것만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의 죄를 도려내고 마음의 더러운 할례의 가죽을 베어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의료시설이 너무 좋고 치과 설비도 잘 되어있지만 예전에는 마취도 제대로 하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치과를 생각하면 모든 아이들에게는 공포입니다. 그렇게 아이를 데려가서 아이가 고통을 느끼며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은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아이가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비결이기 때문에 그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잠시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고서라도 그 아이가 건강한 치아를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때로는 꺾어지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 가죽을 베어내는 아픔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아픔 자체가 우리가 불행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아프지 않고 불행한 길을 가기 보다는 오히려 마음 가죽을 베어내며 잠시 아플지라도 행복한 길을 가기를 원하십니다. 거짓 만족으로 더 불행해지지 않도록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가죽을 베어내어 참다운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참 행복으로 우리를 데려가시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마음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의 마음 가죽이 베어지는 것도 싫고 여전히 육신의 욕심대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고 하나님을 위해서 진리 앞에서 조금도 꺾어지기 싫기 때문에 그 삶을 계속 고집합니다. 그렇게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행복하기를 꿈꾸지는 마십시오. 불행하게 그렇게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것도 인생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전혀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우리의 가족에게도 기쁜 일이겠습니까? 그것이 왜 기쁘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도 별로 없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도 그런 삶은 기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지 않으시고 사람들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는 포기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서 행복의 길을 가려고 하는 불행한 그 사람 본인은 행복하겠습니까? 만약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그냥 느낌일 뿐이지 진짜로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왜? 양심이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오늘 기분이 좋지만 이 돈은 정당한 방법으로는 내 손에 들어올 수 없는 돈입니다. 누군가는 이것 때문에 손해를 보고 피눈물을 흘립니다. 그런데 진짜 거기에 만족이 있겠습니까? 만약 거기서 영원한 만족을 누린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양심은 그런 식으로 작동할 수 없습니다.
신앙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간단명료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행복하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사십시오. 그러면 당신이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치지 않아도 당신은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복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할 마음이 없습니까? 그 일이 너무 힘들고 그 일이 싫습니까? 그러면 계속 하나님을 등지고 고생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불행할 것입니다. 젊은 날들도 우울하게 보냈기에 결혼이라도 하면 좀 나을까 하고 도망치듯이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갔는데 혼자 살 때가 자꾸 그리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또 아이를 낳고 하는 모든 과정 중에 하나님을 등지고도 행복한 과정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있다면 그것은 마취제입니다. 너무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내려다보실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을 하나님을 위해 엄청난 적선이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이 필요 없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 꼭 필요한 분이라고 한다면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이 행복해도 하나님이시고, 여러분이 불행해도 하나님이시며, 심지어 당신이 창조하신 것이 영원한 침묵 속에서 무로 돌아가도 하나님의 존재에는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뿐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이 싫다는데도 예수를 믿어라, 싫다는데도 죄를 죽여라, 그렇게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라고 요구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해서 복의 근원이신 당신의 품으로 불러들이시는 과정입니다.
지금은 정신을 못 차려서 그렇게 까불고 살지만 나중에 말씀의 은혜를 받고 과거를 돌아볼 때는 지금 이날이 너무나 부끄러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계속 나에게 뭘 달라고 하시나?’하는데 뭘 가진 것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지 자기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고유한 것은 뭐 밖에 없습니까? 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닙니다. 기껏 가진 것이 죄인데 하나님은 죄가 필요 없으십니다. 아무리 바치셔도 쓰레기 같은 것이라서 하나님은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이 눈이 얼마나 감겨져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데 짐승 같은 삶입니다. 하이에나를 생각해보십시오. 먹고 싶으면 떼로 몰려다니면서 짐승을 습격해서 먹고, 먹다가 자기들끼리 물고 뜯고 싸우고 그 얼굴에 피를 잔뜩 바른 후에는 만족한 마음으로 들판을 설렁설렁 걸어 다니다가 배가 고파지면 또 같은 짓을 합니다. 그것이 하이에나의 삶입니다. 어디 하이에나뿐이겠습니까? 이성이 없는 많은 짐승들은 하나님이 주신 질서가 아니었다면 정말 생존할 수 없을 정도의 삶을 살아갔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도 하나님 앞에서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훌륭한 마귀의 계략입니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하지 않고 자꾸 자기가 원하는 그 무엇을 생각합니다.
(요즘 이런 말을 들을 때가 많은데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솔직히 옛날보다 지금이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이 훨씬 깁니다. 기껏 저는 열심히 설교 준비를 해서 설교를 했는데 어떤 성도들은 요즘 설교보다는 옛날 설교가 더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옛날의 당신보다 요즘의 이 사람들이 더 좋다.”고 했습니다. 지하실 교회 때 설교했던 저는 언어도 거칠고, 시간도 보통 두 시간이나 두 시간 반씩 설교를 했으며, 성도들을 사랑하는 교인이 아니라 심판해야 할 원수들을 앞에 놓은 것처럼 설교를 했는데 뭐가 그렇게 좋습니까? 저는 별로 안 좋습니다. 지금 설교가 저는 훨씬 좋습니다. 돌아가 보면 옛날에는 열정도 있었지만 참 어렸다는 생각도 들고, 목회자인 저 또한 그 사람들과 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하는 따뜻한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 그렇게 옛날 설교가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제가 이야기합니다. “공부 좀 하십시오. 공부. 어떻게 지금 설교를 옛날 설교에 비합니까? 옛날 설교는 교회당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였지만 지금 설교는 밤하늘에 울려 퍼지는 설교인데 어떻게 그걸 비교합니까?” 이번 공과책이 1997년도에 설교한 원고입니다. 그때보다 지금이 나은지 한번 보십시오. 쓸데없는 소리를 하지 말고 하나님을 똑바로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하는데 회개의 첫 단계가 아는 것입니다. 아는 것, 느끼는 것, 그리고 죄를 버리는 것. 아는 것이 없이는 느낄 수 없고, 느낄 수 없으면 결단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려고 하십니까? 60분짜리 설교 한 편도 정신 차려서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자기는 행복해지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행복은 지식 없이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먼저 알아야만 행복의 길을 찾을 수 있고 그래야만 행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부르실 때 거기에 응답할 수 있습니다.
필름을 거꾸로 10년 돌려보십시오. 어떤 분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살았을 수 있지만 제가 아는 여러분은 대부분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떻게요? 자기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애쓰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얻은 것은 별로 없습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그분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은 것입니다.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만 생각하지 말고 앞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행복하지도 않은 삶, 끝장도 나지 않는 하나님 없는 행복이라는 신기루를 좇아서 앞으로 10년을 그렇게 산다면 그날이 얼마나 괴로운 날이 될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나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 본 사람들은 너무나 잘 압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멀리 있는 곳으로만 느껴졌던 행복이 하나님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면 갑자기 부자가 된다고 사탕발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잘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물질의 복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믿었다고 해서 내일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행복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하면서도 생각합니다. 저는 가난이라는 단어가 정말 싫습니다. 그런데 가난하던 때에 내가 불행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가난한 시절에도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진짜 가난할 때는 친구를 만나는 것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차 한 잔 마실 여유가 없는데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입니까? 더구나 성격상 남에게 신세지는 것을 싫어하고 남에게 밥을 얻어먹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그렇게 가진 것도 없고 이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는데도,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을만한 자리에 있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어떤 때는 목사가 되어 유명해지고 사람들에게 찬사를 받았던 때보다 훨씬 행복한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사람들에게는 재물이나 사람들의 관심 같은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하나님 안에 있어서 행복한데 무엇이 문제가 되겠습니까?
이 복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도록 간구하고 있습니다. 오랜 인생의 방황을 더 이상 계속하지 마십시오. 인생이 아깝지 않습니까?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가고 젊은이는 중년이 되고 중년은 노인이 되고 노인은 죽습니다. 이렇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있지도 않은 행복을 찾아서 살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는 것 없이 행복을 꿈꾸며 사는 그런 삶을 언제까지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미 그것이 없다는 것이 벌써 입증되었고 오늘 경험하고 있는 갈등과 인생의 괴로움을 통해서 충분히 입증되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더 고단한 그런 삶을 살려고 하십니까? 용기를 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너무 사랑하십니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당신의 품으로 돌아올 때 그분에게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무리 많이 퍼주어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복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행복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매일 매일 마음으로 비는 기도가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 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행복으로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얼굴을 비추심
마지막 세 번째로, “얼굴을 비추심”입니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모든 복의 진수를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67편 1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이것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직접 번역하면,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게 하소서.”입니다. “얼굴 빛”이 아니라 “얼굴”을 우리에게 돌리시면 우리의 마음이 빛나고 우리가 빛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둠 속에 있는 이유는 돈이 없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둠 속에 있는 것은 우리에게 쾌락이 없기 때문입니까? 단순히 우리가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은 또 다른 세상에 있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비추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영혼에 어두움이 가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물리치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어두움에 뭘 해보는 것은 해결책이 아닙니다. 캄캄한 방에 들어갔습니다. 손을 더듬어서 뭘 찾아야 할 정도입니다. 우리는 그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서 애쓰지 않습니다. 불을 켭니다. 그러면 어두움은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혼란스러운 인생을 사는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설교시간에 너무 자주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제는 지겹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원래 그런 것입니다.” 인생은 원래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의 예상을 빗나갑니다.
저는 교육학적으로 아주 어린 아이 때부터 그 아이의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떼를 쓰고 난리를 치고 길거리에 벌러덩 드러눕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냥 드러눕게 놔두어야 합니다. 마지막에 그 아이가 좌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아!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신발을 집어 던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드러누워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구나.’ 이러면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지혜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왜요? 어차피 그 아이 앞에 펼쳐질 인생은 그 아이의 마음대로 되는 순간보다는 안 되고 좌절하고 꺾어지고 자기를 굽혀야 할 시간들이 훨씬 더 많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은 부모들이 교육을 잘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자라난 아이들은 조금만 잘 되면 어마어마하게 교만해져서 사람들을 인간으로 보지도 않고 짓밟아버리려는 마음을 갖거나 혹은 예기치 않은 습격을 받으면 죽음을 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안 된다는 것이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면서 엄마만 부르면 엄마가 달려와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 아이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수없이 좌절을 겪어야 합니다. 인생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 안 되는 일이 일어나도 이것이 바로 인생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독자로 자란 아이들,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2대 혹은 3대 독자들, 그렇게 집안에서 떠받들어 키운 아이들보다 평균적으로 볼 때에 형제들이 너무 많아서 부모들이 거의 신경을 못 쓴 아이들의 인간성이 훨씬 좋습니다. 왜냐하면 어려서부터 동생에게 맛있는 것도 빼앗겨보고 형에게 맞아보기도 하고 누나가 고자질해서 혼나보기도 하면서 이 세상은 결국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수한 좌절을 겪으면서 앞으로 자신의 인생에 전개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린아이들이 아니라 다 큰 성인이 되었는데도 있지도 않은 현실을 꿈꾸는 것입니다. 분명히 내가 지금 꺾이고 내 맘대로 되지 않고 있는데도 이것은 예외적인 일이고 곧 내 맘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습니까? 개구리 뒷다리가 나올 때요? 개구리 다리는 이미 나왔습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 심지어 저는 목회자로서 목회를 하는데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내 맘대로 되지 않을 때에 거기서 하나님을 많이 배웁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안정입니다. 안정이 없으면 인간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정적이기만 하면 인간이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생기가 없습니다. 한 발은 안정하고 있는데 다른 한 발은 계속 흔들립니다.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 전개되고 내가 감당해보지 못한 어려움에 직면하고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인간관계로 어려움을 겪습니다. 좋은 의미에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때 이 마음에서는 많은 혼돈이 일어납니다. 혼돈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창조적인 혼돈이 됩니다. 이 속에서 마음이 소용돌이치고 정신이 괴로우면서도 안정되기만 했더라면 도저히 깨달을 수 없었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고, 가장 가까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잘 나갈 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던 사람이 한편으로 불안하고 자기가 흔들릴 때 하나님을 붙들게 됩니다.
오늘 소진영 간사가 간증하는 것을 잠깐 들었습니다. 방송에도 많이 나왔습니다. 자매님이 부잣집에서 태어나서 부족한 것 없이 먹고 입고 화려한 젊은 날을 보내고 또 집안 좋고 성격 좋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다면 저런 찬양과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우리가 고생하며 살 수도 있고 고생 안하면서 살 수도 있으며, 이렇게 살 수도 있고 저렇게 살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는 우리 모두 우리의 인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살아있는 우리 인생 자체가 향기가 되고 노래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없으면, 젊었을 때는 별로 예쁘지 않았지만 중년이 되어서는 더 별로이고 나이를 먹어서는 더 서금 서금 해져서 이제는 수족도 내 맘대로 못 움직이는 상태가 되어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이것이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쾌락에 빠져서 까불면서 젊은 시절을 보낸 사람들을 보면 너무 가엾습니다. 30년 후에는 인생 어음이 돌아올 텐데 뭘로 막으려고 저러나 생각됩니다. 청춘은 30년 후에 갚아야 할 지불 만기 어음입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성공은 선불입니다. 먼저 비용을 내야만 성공이라는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그것을 아는데 왜 신자가 된 사람들이 그것을 모릅니까?
생각해보십시오. 결국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는 하나님을 대면하지 못하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대면하시면 우리의 영혼에 빛이 비취고 우리 마음의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어두워서 보지 못하던 많은 것들이 질서정연하게 보입니다. 여기 이곳에 어두움이 내리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아주 작은 빛이 있지만 사람인지 무엇인지도 알 수 없고 가끔씩 사람의 이마의 빛, 안경테의 빛, 필기도구의 빛, 이런 것들이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불이 환하게 들어오면서 여기 성도들이 모여서 은혜를 받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여기에서 불안을 느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는 두려움이 없고 빛 가운데는 속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셔서 우리의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시면 우리가 병든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 살게 됩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어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과 관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두 종류입니다. 섭리의 복과 영적인 복입니다. 섭리의 복은 하나님이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즘 일본 상품을 불매한다고 난리입니다. 뭔가 그 상품을 대체하게 되는 업종은 대박이 납니다. 일식집 옆에 있는 한식집. 예를 들자면 말입니다. 그것도 좀 웃깁니다. 일식집에서 장사하며 사는 사람이 친일주의자입니까? 어떻게 하다 보니 일식을 배워서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으며 살고 있는데 우리는 그러지 말아야 합니다. 일식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일식하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고, 애국하는 마음으로 초밥을 만들고 있는데 말입니다. 어쨌든 그런 상황입니다. 조금 전에도 뉴스를 보니까 에칭가스를 비롯해서 일본이 금수 조치 한 것들은 거의 6개월 안에 모두 대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본 안에서는 굉장히 불안해한다고 합니다. 80%를 한국에 수출했었는데 한국이 이렇게 불안하게 하고 우리를 못 믿는 기업과는 거래를 못 하겠다고 하고 거래선을 돌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태까지 한국에서 빛을 보지 못하던 사업들은 대박이 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태어났다고 합시다. 그것이 자기가 받은 것입니까? 물론 자기가 노력한 것도 있겠지만 부모로부터 좋은 유전자를 받아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들의 유전자가 시원치 않으면 며느리라도 좋은 유전자로 합쳐줘야 합니다. 그런 것이 바로 왜 내가 이 집안에서 태어나서 이렇게 나쁜 머리로 태어났을까? 아무리 노력해도 따라갈 수가 없는데, 저 사람은 기가 막히게 놀라운 지능을 가지고 있어서 놀라운 지식에 대한 습득력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냥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 부모가 만약 독신으로 살았더라면 태어나지 않았을 자식인데 눈이 맞아서 결혼하게 되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자라서 그렇게 머리 좋은 사람이 된 것을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투덜거리면 안 됩니다. 이런 것들이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복을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이 두 가지 복 이외에는 없습니다. 일반섭리의 복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주시는 복입니다. 그 복과 대조되는 것이 ‘영적인 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그의 영혼을 어루만지셔서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만족과 기쁨, 쉼을 누리는 기쁨이 무엇인지 지혜를 갖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세상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고 미련하고 지혜 없이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에 입각하여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영혼을 직접 어루만지시는 영적인 복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얼굴을 비춰”달라고 하는 기도는 이런 영적인 복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가장 넓은 것이었다면 그 다음에는 복을 주시고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의 진수로서 “얼굴을 비추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시고 탐욕과 죄 때문에 붙잡혀있는 우리 영혼의 속박을 끊어내시고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주셔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혼을 고쳐달라고 하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복은 삼중적인 구조를 가지고 오늘 탄원의 제목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치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한 사람을 변화시키시고 그 사람이 영적인 복을 받게 하심으로 그가 일반섭리의 복을 받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것을 알게 하셔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그 사랑 때문에 자기와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그를 사랑으로 섬기고 돌보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 자신과 똑같은 행복을 누리며 살게 하는 것이 선교의 동기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에게도 슬픔이 있습니다. 불행하지 않은 슬픔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행복을 누리지 못하며 바깥에 사는 사람들을 볼 때 너무 괴로운 슬픔입니다. 그 괴로움과 슬픔은 결코 앞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그 행복을 침해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람들 때문에 아파하면서도 그 아픔 때문에 삭감되지 않는 행복을 누려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안에서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많은 것 같지만 마지막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얼굴빛을 내게 비추소서” 주님이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실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우리도 도저히 스스로 바꿔 놓을 수 없었던 영혼의 변화를 받게 되고 마음에 변화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없었던 사랑이 생겨나고 주님을 위해서 꺾어질 수 없었던 자신을 능히 꺾을 수 있는 힘이 생겨나고 사랑할 수 없었을 것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은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간절히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저녁에 한 가지만 마음에 새기고 돌아가십시오. ‘나는 정말 행복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하나님 바깥에서는 어떠한 행복도 없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주님의 얼굴빛이 나의 영혼에 비춰야 한다.’ 그리고 흩어졌던 생각을 쭉 하나님께로 모으십시오. 그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삶은 나아지지 않을 것입니다.
비전이 있는 복음(2019.08.11_온가족여름수련회 저녁 1)
염려에 관하여(2019.09.29._주일오전 3)
그리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기까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그 하나님의 행복을 등지고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합니다. 너무나 행복해지고 싶은데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을 하나님 안에서 찾지 않을 때 행복해지고자 하는 만큼 그들의 절망은 그들에게 무서운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 앞에 깊이 결심하십시오. ‘하나님, 나에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주님의 얼굴빛으로 비추어주십시오. 죽었던 내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해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비전이 있는 복음 (2019.08.12._온가족 여름수련회 저녁 2)
2. 확장되는 기도
“주의 도를 땅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시67:2-3)
녹취자: 이경순
I. 본문 해설
개인의 영적인 변화는 결국 교회가 변화되고 세상이 변화되기를 갈망하게 합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시인은 세 가지 간구를 드렸습니다.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시고, 얼굴빛을 비추어 주소서, 라는 기도였습니다. 이것이 만약에 개인과 교회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변화를 의미한다면 그 변화는 더욱더 확장되는 기도를 가져옵니다.
II. 확장되는 기도
그 확장되는 기도를 오늘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는 주의 도를 알리는 것과 주를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A. 주의 도(道)를 알리심
첫 번째는 ‘주의 도를 알리는 것’입니다. “주의 도를 땅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였으니 이 말은 사실상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시인이 기도하는 바 이제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온 세상을 향하여 간구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주의 도를 알리소서’입니다. 여기에서 ‘알리소서’(ladaat)라고 하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이러한 명령어를 수없이 보셨을 것입니다. ‘너희는 알라.’ ‘너희가 알지니.’ ‘너희는 잊지 말라.’ ‘너희는 잊어버리지 말라.’ ‘너희는 이것을 기억하라.’ 성경에서 이 명령 어구를 제하면 성경의 페이지를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자주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모세는 구약성경의 기초가 되는 모세오경을 저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 혹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표현 속에서 이 세 가지 명령어를 아주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너희는 알라.’ ‘너희는 알지니 잊지 말라.’ ‘기억하라.’ 이러나 명령을 그렇게 강조하신 것을 보면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엇을 믿어야 할지 알지 아니하고는 결코 믿음이 생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여기서 확장되는 기도를 세상을 향해 드리고 있는데, ‘이 땅 위에’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이 땅 위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하셨을 때에 ‘세상’과 같은 의미입니다. 진짜 땅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땅 위에 있는 사람을 염두에 두고 하는 기도입니다. 시인은 그 사람들에게 다름 아닌 ‘주의 도’를 알게 해 달라고, ‘주의 구원’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도’(道)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도는 결국 인생에 있어서 인류가 가야할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그렇게 보면 이 도는 결국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더 구체적으로 이 도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믿음의 규칙과 생활의 교훈입니다. 즉 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되는가에 하는 것에 대한 답이고, 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많은 인생에 대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선에 대해서 혹은 악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대게 비슷합니다. 그래서 아주 중요한 도덕률의 경우에는 동서고금에 상관없이 거의 일치합니다. 동양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죄인데 서양에서는 그것을 선이라고 칭송하지 않고, 누구의 물건을 빼앗고 강도짓 하는 것을 이 나라에서는 칭찬하는데 저 나라에서는 감옥에 보내는 그런 일은 거의 없습니다. 나라가 그것을 통제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문제는 있을 수 있습니다. 권력을 쟁취해서 그것을 가지고 큰 도적질의 기회로 삼는 사람들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형식적으로나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는 도둑질하지 말며,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것을 당연한 윤리로 가르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도는 그 근거를 모릅니다. 왜 내가 살인하면 안 되는지, 왜 내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면 안 되는지, 왜 우리가 서로 다투고 살면 안 되는지에 대한 뿌리를 스스로 확정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시인이 여기에서 ‘주의 도를 이 땅 위에’라고 한 이 말은 이 도가 주께 속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즉 땅에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고, 하나님이 붙들고 계심으로 지탱되며, 하나님께서 거기 있으라 하신 기간이 끝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모든 만물의 법칙을 만드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 지에 대한 규칙과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대한 교훈을 남겨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늘 위에 움직이고 있는 별들은 그저 일정하게 움직이면 되지만 우리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계처럼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어떻게 하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계획과 그 목적을 따라 살 수 있을까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도와 상관없이 사는 것은 인간의 삶이 아니라고 자고로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도는 결국 인류가 믿어야 할 규칙과 살아야 할 교훈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이 도는 언제나 있지만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그 도를 알고, 그 도를 따라서 믿고, 그 도를 따라서 살아갈 때에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시기 원하시는데 그 행복은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지 하나님 밖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이 그 행복을 누리는 것처럼 이 도를 따라 믿고, 이 도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비로소 하나님 안에 있고 그 안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도가 이 땅 위에 전파되고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져야 할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도가 전파되지 않고는 사람들이 알 수 없고, 그 도를 알지 아니하고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믿을 수 없으며, 그 도를 따라 올바르게 살수 없기 때문에 시인은 우리에게 알려진 이 도를 우리 교회를 넘어서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지기를, 그래서 그들도 구원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들을 겪고 문제들을 만납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그것이 인생입니다. 짜릿하고 행복한 순간은 너무나 짧고 온갖 시련과 역경을 겪으면서 우리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피하는 방법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도 인간을 네 종류의 사람으로 분류했습니다. 첫째는 그 도를 모르는 사람, 두 번째는 알지만 쾌락에 빠져 사는 사람, 세 번째는 아는데도 용기가 없어서 아는 것과 사는 것이 따로따로인 사람, 네 번째 사람은 용기 있게 그 도에 대해서 반항하며 맞서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네 종류의 사람은 아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인간이 이 네 종류에 속할 것입니다. 결국 진짜로 바람직한 인간은 그 도를 알아서 올바르게 믿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들일 것인데 그런 사람은 실제로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런 저런 세상의 많은 일들을 만나고 살지만 대부분 그 일은 지나가는 일입니다. 20년 전에 나를 괴롭게 하던 일이 지금도 나를 변함없이 괴롭힐 수는 있지만 이십년 전에 그것이 시작되었을 때의 고통과 똑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똑같은 문제가 구체적으로 똑같은 상황 속에서 자기를 똑같이 이십년씩이나 괴롭히지는 않습니다. 그냥 그것은 은근하게 밑에 깔려 있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자면 허리가 늘 아파서 힘들긴 하지만 죽을 만큼 우리를 데려가는 문제로 계속 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힘든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고보면 시간이 지나면서 흘러가고 다음에 또 다른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이제 평화가 왔나 했더니 그새 새로운 일이 생겨납니다.
아이들을 기르는 것을 생각해봅시다. 결혼을 하고는 몇 년 동안 아이가 없어서 안달복달을 하고 울면서 기도를 합니다. 드디어 아이를 가집니다. 먹을 수도 없고 잘 수도 없고 끊임없이 토할 것 같고 죽겠습니다. 그래서 낳기만 하면 해결되겠지 하고 낳아보니까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가 훨씬 편한 겁니다. 낳아서 밤잠도 못자고 이리 매치고 저리 매치고 하면서 고생고생해서 키웁니다. 그렇게 연년생 둘을 한 삼년 길러놓으니까 좀 살 것 같습니다. 자기네들끼리 스스로 가서 똥오줌 가리고, 하지 말라고 하면 안하고 하니까 좀 낫습니다. 이 아이들이 이제 초등학교에 들어갑니다. 더 살 것 같았습니다만 곧 사춘기에 접어 들어가면서 이제 고도의 정신적인 괴롭힘을 주기 시작합니다. 아이들에게 신앙도 제대로 안 들어갑니다. 그래서 너무 괴로워 애들을 위해 금식기도를 하고 철야기도를 하면서 자녀들이 예수 믿게 해달라고 막 몸부림을 칩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수련회에 가서 깊이 은혜를 받고 주님을 만나고 회심을 했습니다. 너무 좋아서 뛸 것 같습니다. 애들이 완전히 변했기 때문입니다. (예전과는 달리 아이가 먼저) 매일 예배드리자고 하고 자기 방에서 기도하고 주일날이면 제일 먼저 성경찬송가를 들고 교회로 뛰어 갑니다. 그런 아이를 보며 엄마는 살 것 같습니다. 그런데 또 무슨 일입니까? 이 아이가 이내 침체에 빠집니다. 다시 말하자면 옛날 본성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철없이 까불다가 다시 은혜를 받고 결혼을 합니다. 그렇게 시집을 갔는데 애를 못 낳는 답니다. 그래서 또 애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더니 감사하게도 애를 낳았습니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애를 키워달라고 맡기는 것입니다. 늘그막에 자기 허리도 감당을 못하겠는데 애를 업고 안고 키우느라 힘이 듭니다. 보십시오. 인간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문제에 문제가 꼬리를 무는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세요. 지금 당하고 있는 일이 아무리 괴롭고 힘든 것이라도 결국은 때가 지나면 지나갑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손주들도 다 자라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서 냄새 난다고 오지도 않고 안기지도 않습니다. 자기들의 인생을 살기 위해 훨훨 날아가 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드디어 할 일이 없습니다. 온 몸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병원을 다녀야 되고, 마지막에 지팡이를 짚고 혹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행여나 치매라도 걸리면 요양원에 가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이렇게 매 순간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은 그냥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지는 들풀 같고, 혹은 잠시 있다가 이내 사라지는 파도 위의 거품 같다고 칩시다. 그런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신혼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좋았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혹은 자매를 만나서 열애를 하고 결혼에 골인했을 때, 목사님이 부부가 된 것을 선언했을 때, 황홀한 신혼 첫날밤이 얼마나 행복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이 말을 듣고 다 웃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아, 옛날이여!’ 그런 뜻이지요? 그 시절은 다시 안 옵니다. 그렇게 행복한 날도 지나가고 “그땐 그랬지. 애를 낳았는데 이 애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아프면 병원으로 뛰어가고. 참 힘들었지.” 그러면서 지금은 웃습니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누리고 있는 좋은 것도 지나가는 것이고, 지금 겪고 있는 견디기 힘든 괴로운 일들도 지나가는 것입니다.
파도는 치지만 물 위에는 똑같은 거품이 생기는 법은 없습니다. 파도의 크기에 따라서 크고 작은 물방울을 일으키면서 거품이 일어나고, 또 다른 파도가 밀려올 때에 그 거품들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또 다른 거품들이 생깁니다. 우리의 인생의 행(幸)과 불행(不幸), 고난과 역경, 행복과 평안함과 같은 것들은 어떻게 보면 물위의 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행복이 무엇이냐고 했을 때 창조 목적에 안에서 누리는 만족과 기쁨과 쉼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만족한 순간도 물론 있겠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훨씬 더 많았고, 기쁜 순간도 있었지만 기쁘지 않은 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작은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만약 인생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을 이렇게 자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일과 상황에만 붙들어 맨다면 우리는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끊임없는 만족 속에서 살 수 있으며, 그러한 환경이 지속적으로 주어질 수 있겠습니까? 한없는 솟아나는 기쁨 속에 살 수 있도록 불만이 전혀 없는 환경, 어떠한 괴로움도 없는 평안함이 어떻게 끊임없이 주어지겠습니까? 그런 완벽한 환경이 지속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다면 인간은 거의 미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실제로 ‘소리 공학’을 하는 사람들이 실험을 했는데 인간에게 가장 큰 고문 중의 하나는 아무 소리도 없는 공간에 혼자 두는 것이랍니다. 과장을 하면 자기 기침 소리조차도 들을 수 없는 환경에 두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소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안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음이 너무 크면 안 되지만 적절한 소음이 있어야 잠을 잘 자는 것입니다. 진짜 잠이 오지 않을 때 인터넷에 들어가면 잠 오게 하는 소음이 있습니다. ‘백색소음’이라고 합니다. 빗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 모닥불 타는 소리를 들으면서 오히려 안정감을 느끼면서 자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결론 하나는 인간의 행복을 눈에 보이는 삶의 처지나 상황, 심지어는 바보같이 물질의 소유나 권력의 유무나 자기의 용모와 같은 것에 두면 정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이 사람들은 다 그런 것들이 자기에게 모자라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평생을 살면서 이런 세 가지 행복의 조건을 완전히 갖춘 채 장기간 동안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인간 자신 안에서 어떤 타락과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에게 모자란 것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완전한 만족과 기쁨과 쉼 속에 살았습니다. 그것 자체가 행복인데 그것보다 더 큰 욕망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자신의 처지가 절대행복이 아니고 더 높은 행복을 찾아야 되겠다는 욕망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이미 주셨던 만족과 기쁨과 쉼은 완전히 사라져버리고, 소유하지 못하면 자신이 불행해 질 것 같은 욕망을 느끼면서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이 행복이라는 단어는 이런 식으로 물질적인 의미에서, 또 환경적이고 육신적인 의미에서 사용되는 단어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어차피 슬프고 기쁘고 화나고 힘든 일은 예전에도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고 죽는 순간까지 이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현실을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톨스토이가 이야기한 두 번째 유형 혹은 세 번째 유형의 사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예 모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처음부터 그렇게 살려고 생각하지 않고 쾌락으로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리려 합니다. 그런데 그 쾌락을 느끼는 것은 행복의 한 요소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행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 누리는 행복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릇된 쾌락과 올바른 기쁨의 차이는 그것을 누려도 현실을 회피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릇된 쾌락은 쾌락을 맛볼수록 현실을 도피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점점 더 현실을 직면할 수 있는 용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 번째 유형의 사람처럼 다 알지만 쾌락에도 빠지지 못하고 어정쩡한 삶을 살면서 그냥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갑니다. 극단적으로 힘든데 그냥 쾌락이나 즐기자고 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해서 용기 있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아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물론 기쁩니다. 그런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쁜 일이, 그것도 너무 기뻐서 죽을 것처럼 팔짝 팔짝 뛰게 하는 그 기쁨이 솔직히 얼마나 지속될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얼마 안갑니다. 의외로 인간은 그 감격적이고 기쁜 일에 대해서 금방 만성적인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슬픔에 대해서는 덜 그러는데 기쁨에 대해서는 인간이 그렇게 금방 감사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기쁜 일이 일어나면 물론 기쁩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며칠이나 가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남편이 말합니다. “여보, 기뻐해! 이번에 보너스가 6천 프로가 나왔어.” 기쁘지 않겠습니까? 몇 년 전에 홍콩에 갔을 때 들었던 이야기인데, 어느 회사가 직원들에게 6천 프로의 보너스를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오백만원씩 월급을 받는 사람일 경우에는 3억씩이 인센티브로 나왔다는 말입니다. 이 정도의 규모는 너무 황당하게 많으니까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보, 기뻐해. 보너스를 천 프로를 받았어.”라고 들었다고 칩시다. 우리 교회에도 천 프로, 천 이백 프로씩 보너스를 받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백만원의 월급을 받던 남편이 그런 보너스를 받아온다면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남편이 그것을 매일 세 번씩, 삼일만 이야기 하면 여러분은 아마도 짜증을 낼 것입니다. “안겠다고. 안다고!”라고 소리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기쁠 때는 물론 기쁘겠지요. 그러나 얼마나 가겠습니까? 아프면 아프겠지요. 좀 오래 아플 수도 있습니다. 기쁠 때엔 기뻐하고, 슬플 때엔 슬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고통스러울 때 왜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을 통째로 조리를 돌리듯이 흔들어 놓아버린다면 이것은 행복의 세 가지 조건 중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만족도 없고 기쁨도 없고 쉼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정확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슬플 때에는 기쁘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기쁠 때에는 이 기쁨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한데서야 어찌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 곧 기쁜 일을 겪어도, 뼈아프게 슬픈 일을 겪어도, 눈물을 흘리며 가슴 아파하는 일을 겪는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의미를 추출해 내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이 아주 사랑하는 딸이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예쁘고 공부도 아주 잘해서 영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는데 너무 유능하니까 두바이라는 국제도시에서 월급의 3배를 줄 테니 자신들의 학교에 오라고 제의를 했고 가족들은 너무 좋아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딸이 ‘아빠, 몸이 너무 아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진찰 해보니까 암 4기였습니다. 결국 몇 달을 못살고 딸이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아빠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 꽃같이 예쁘던 딸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딸이 하늘나라에 가 버린 것입니다. 그 슬픔은 너무 큰 아픔입니다. 외국에 계셨는데 나오시라고 해서 만나서 저녁을 같이하면서 마음을 다해서 위로해 드렸습니다. 그런데 계속 우시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우리의 인생에 늘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에서 나의 행복과 관련이 있는 나 자신은 차치하고서라도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한 두 사람만 흔들려도 우리의 삶 전체가 요동칩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남편이 죽었을 때, 정말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 여러분은 너무나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모두 다 경험하는 일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더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을 때 그 때에 우리는 얼마나 요동치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일은 내 아이가 속 좀 썩이는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아주 고매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그런 속에서도 여전히 행복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행복은 처음부터 돈 몇 푼 때문에 헤헤거리고 웃고, 아주 예쁜 이성을 만났다고 낄낄거리고 웃고, 지위가 좀 올라갔다고 해서 배를 내밀고 거만을 떠는 그런 종류의 행복이 처음부터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무 기쁜 일이 있으면 그 기쁨을 느끼면서 동시에 이것의 의미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그 기쁨 때문에만 우리가 교만해 질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슬픔을 만나면 그 슬픔의 의미가 무엇인지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나면 슬픔에 처했다고 해서 온 세상이 오늘 하루로 끝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이 바로 ‘도’입니다. 도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언제나 있습니다. 그런데 있는 것만으로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행복해지려면 실제로 그 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 도를 내 것으로 삼아서 그 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믿고 그 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 인간의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모든 것들은 허무하고 다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보세요. 1990년도 후반기쯤 열린교회에 등록한 형제자매들은 아주 반짝거리는 젊은이였습니다. 지금은 권사님 포스가 나고, 배 나온 안수집사 포스가 나옵니다. 왜입니까?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고, 결혼해서 힘들게 안고 다니며 키웠던 아이들이 이제 대학을 들어갑니다.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의 인생도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지 오늘을 살아가는 의미를 발견하지 않으면 힘들어서 인생을 살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누리던 사람이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 받는 충격은 너무나 큽니다. 저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을 하는데 2003년도의 일이었습니다. 저는 얼굴에 무엇을 바르면 얼굴이 간사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로션도 잘 안 발랐습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바를 필요가 없이 얼굴이 늘 기름기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별 필요성을 못 느끼며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직원이 이런 요청을 했습니다. ‘목사님, 언론매체에 제공할 목사님 사진이 없습니다. 좀 찍으면 어떨까요?’ 당시 출판사나 신문사에서 사진을 달라고 하는데 마땅한 사진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동네에 있는 조그만 사진관의 사진사를 불러서 일당 30만원을 줄 터이니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제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200장정도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습니다. 차 트렁크에 옷을 잔뜩 넣고는 <제비울 미술관>부터 <남한산성>까지 이르기까지 한복을 포함하여 온갖 옷을 갈아입으며 온갖 포즈를 취하여 사진을 찍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그런 사진 찍는 게 싫어서 한 번에 잔뜩 찍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진을 인화해 가지고 왔는데 그날 밤에 잠을 못 잤습니다. 제가 너무 늙어 보였습니다. 그때부터 로션을 본격적으로 바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외모제일주의자도 아니고 남자인데다가 목사인데도 그렇게 나온 사진을 보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쁘게 생긴들 누가 알아봐주는 것도 아닌데 그 사이에 이렇게 늙었나 생각되면서 자꾸 그 사진 생각이 났습니다. 그러니 자매들은 얼마나 더 충격이 클까 생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자기만 충격 받지 아무도 충격 받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냥 고왔던 얼굴은 다 잊어버리고 지금의 모습만 생각합니다.
더 큰 충격은 제가 눈 수술 받고 왔을 때였습니다. 저는 눈이 너무 나빠서 교인들에게 오해를 받았습니다. 인사를 수없이 하는데 목사님은 너무 교만하셔서 인사를 안 받는답니다. 사실 너무 안보였습니다. 얼마나 보이지 않았냐면 안경을 벗고 있는데 제 연구실로 우리 집사람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쳐다보면서 “어디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하는 말이 “집에서 가정일로 왔습니다.”고 했습니다. 그 정도로 눈이 안보였습니다. 그리고 눈을 수술했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달의 토끼를 보았습니다. 그것도 맨눈으로 말입니다.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병상에서 제일 먼저 본 사람이 아내였는데 제 첫 마디가 “당신 왜 이렇게 늙었어?”였습니다. 교회 와서 보니까 온 교인이 다 늙었습니다. 제가 중년부인인줄 알았던 분들은 다 노인이고, 청년인줄 알았던 분들은 중년이고, 소녀인줄 알았던 사람들은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달 동안은 참 불편했습니다.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고 보면 눈에 보이는 것들 중 우리가 영원히 가지고 있는 것을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제발 ‘이것저것 때문에 내가 신앙생활을 잘 못하고 있다’라던가 ‘이런 저런 일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얻어내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 느낌은 며칠 안갈 것입니다. 아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천 이백프로 보너스를 받았다’고 아홉 번째 이야기할 때 아내가 신경질을 팍 낼 때에는 이미 그 기쁨이 끝난 것입니다. 처음 들었을 때야 뛸 듯이 기뻐 남편을 끌어안고 방안을 뱅글뱅글 돌았겠지요. 그것도 하루 이틀 삼일 정도입니다. 인간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무얼 손에 넣으면 그가 계속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바로 주의 도를 이스라엘을 넘어서 모든 민족, 온 땅위에 있는 사람들이 알게 해달라고 이 시인이 탄원하는 이유입니다.
(머리가 하얗게) 나이가 들었는데도 계속 붙잡아둘 수도 없고 쥐고 있어도 나를 계속 행복케 하지 못하는 것들을 가지고 여전히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좀 교만해지고 그런 것들이 없다고 해서 안달복달하면서 괴로워하며 마치 어린 아이들이 장난감 방울을 흔드는 것처럼 매일 매일의 삶이 요동치는 것, 그 나이가 되었는데도 그렇게 매일 매일이 지옥과 천국을 오가며 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교회 안에 들어와서 인간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도가 무엇인지를 수없이 듣고 가르침을 받았는데도 그런 식으로 인생을 생각하면서 행복을 구한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머리가 하얗게 되어도 유아기적 증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유아기의 아이들은 뭐가 그리 심술이 났는지 구석에서 울고 장난감을 던지고 떼를 씁니다. 그러다가 맛있는 사탕이나 혹은 아이스크럼을 안겨다 주면 막 빨아먹으면서 ‘할머니, 고마워요.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합니다. 잠깐 동안은 다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이 아이스크림이 녹기 전에 다른 욕망이 생겨나면서 또 심술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아기적 증세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언제나 손에 넣을 수 있을까요? 만약에 얻었다면 그것은 얼마나 내 손 안에 머물까요? 오래도록 머무르게 한다고 하더라도 내 마음은 또 안 변하겠습니까? 변합니다. 1200프로 보너스를 받아도 하루에 세 번씩 삼일만 이야기하면 신경질을 냅니다. 그렇게 우리가 누리는 기쁨은 짧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의 삶을 그런 조건에다 붙들어 매는 것은 우리를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쁜 일을 만나든 슬픈 일을 만나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든 그것들은 그냥 흘러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쁘면 감사하다고 주님께 아뢰고, 괴로우면 괴로우니까 이것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너무 쓰라리고 견딜 수 없으면 “내 인생에 이렇게 괴롭고 아픈 날들을 주님은 아시지요. 예수여 나를 도와주소서.” 기도하며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어디서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누구는 믿음이 좋아서 모든 것들을 다 손에 넣고 계속해서 행복했다더라.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유아기적 증세가 계속 되는 것입니다. 내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삶의 상황을 볼 때에 때로는 정말 좋은 사람만 만나서 그 사람을 통해 매번 덕을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우리를 만나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습니까? 늘 뜯기고 빈대 붙어 먹는 사람한테 시달리고 살 게 아닙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을 계속해서 못 만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런 호인을 세 번만 연달아 만나도 인생의 기적일 겁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빈대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 합니까?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을 겁니다. 다른 친구들은 시집가서 시부모님이 사랑해주시고 유산도 많이 물려주신 다는데 나는 아니랍니다. 대신 온갖 괴롭고 힘든 일들이 시댁에서 일어납니다. 어디 시댁뿐이겠습니까? 친정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니 결혼을 마치 집에서 탈출하는 통로로 삼는 것이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 사람만 만나서 행복한 관계를 누리고자 해도 그게 내 마음 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결국은 그렇게 좋은 사람을 만나서 덕을 입을 때도 있지만 정말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서 괴로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하고는 정말 오래 사귀며 살고 싶은데 그 사람은 싫다고 가는 적도 있고, 이 사람하고는 금방 헤어지고 싶은데 끈질기게 엮여서 도저히 떨어져 나가지 않는 관계도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대표적인 관계입니다. 어떻게 잘라내겠습니까? 데리고 살아야지 별 수 있겠습니까? 결국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행복을 찾는 것도 영원한 행복일 수가 없습니다.
물질은 주어지기도 하지만 사라지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지만 생겨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계속 없어진 상태로 있는 수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있는 상태로 계속 몇 대가 내려오면서 돈 염려 거의 안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행복합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저런 일이 일어나고, 이런 사람을 만나고 저런 사람을 만나든지 간에 우리는 본질적으로 거기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만나도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겸손하고, 어려운 일을 만나도 주님으로 인해 위로를 받으며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내 삶의 겉모양은 마치 잔잔한 바다와 같아서 파도가 안 보이는 호수 같은 때도 있습니다. 물만 찰싹찰싹 거립니다. 그런가하면 집이라도 삼킬 것 같은 파도가 밀려올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땅은 땅이고 바다는 바다일 뿐입니다. 파도의 높이만 다를 뿐이지 본질적으로 그것들이 땅으로 밀려오고 다시 빠져나가고 하는 양상과 원칙은 똑같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이런 식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도’입니다. ‘도‘가 그렇게 생각하게끔 만들어줍니다.
그럼 도가 어떻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런 생각을 만들어 줄까요? 도에 대한 의식이 나의 마음과 머릿속에 살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게 일어나고 있는 이 괴로운 일들은 정말 괴로운 일이지만 내가 견디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고, 이렇게 견디면서 살아가는 것은 괴롭고 힘들기는 하지만 이것도 내 인생을 살아가야하는 중요한 이유라고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미의 이유는 우리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부여하는 것을 믿음 안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참으로 바르게살기 위해서는 바르게 알아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고대 사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과학에 대해서 전혀 무지하던 때에 커다란 천둥소리가 들리면서 무섭게 불이 떨어지고 나무들이 불에 붙으면서 거대한 소리를 내면서 쓰러질 때에 그 광경을 바라보는 원시인들의 두려움의 정도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두려움은 잘 모르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잘 모르는데 그것이 현실에 나타났을 때 굉장히 무서운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모든 사람이 나타나도 무서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넓은 방에 여러분 혼자 있고 불이 꺼져있는데 오년 전에 돌아가신 시아버지가 나타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무섭지 않겠습니까? 그 둘 사이에 연결점을 찾을 수 없을 때 인간은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급한 대로 땅에 엎드려서 아무나 부르면서 살려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종교들의 출현의 동기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제 과학을 통해서 그 원리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늘에는 전기가 있는데 양전기와 음전기가 있고 그것이 만나면 충돌을 일으키면서 불꽃이 튀고, 빛은 속도가 초당 30만키이기 때문에 거의 동시에 우리에게 비칩니다. 소리는 초당 340미터 정도의 속도밖에 안되기 때문에 하나 둘 셋 넷 천천히 시간을 재면 얼마나 먼 거리에서 양전기와 음전기가 부딪혔는지를 과학적으로 계산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천둥이 치고 번개를 쳐도 편안하게 하던 일을 계속합니다.
우리들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어차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도 없고 또 우리가 바란다고 모두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우리가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대로 우리의 삶이 전개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뜻밖의 행운이라는 것도 흔하지 않지만 종종 있습니다. 욕망을 많이 가진 사람한테는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욕망을 아주 작게 가진 사람은 너무 자주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겠지요. 오늘 저녁에는 앞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밥 먹다가 꾸물거리는 바람에 늦게 왔으나 앞자리가 여전히 많이 비어 있는 것도 행운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매일 매일 그런 것들이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납니다. 무슨 뜻입니까? ‘도’를 통해서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의미를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할지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우리들은 힘을 다해서 입증하지만 과학으로 입증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에 믿어집니다. 그분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모두 다 설명할 수 없지만 나는 영혼을 가진 존재이고, 죽은 이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으며, 성령님께서 나를 감동시켜서 내가 할 수 없는 그것을 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를 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습니다. 도는 이성으로는 알 수 없는 것들이지만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 곧 무엇을 믿어야하는지에 대한 규칙을 가르쳐 줍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배워야 되는 것입니다. 몽롱한 상태로 그렇게 예배를 드리면 안 됩니다. 그러니 열린교회를 십년이나 다닌 사람들인데도 너무너무 무지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깊은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도대체 그 긴 세월동안 그 많은 설교를 했는데 나는 도대체 뭘 가르쳤나 싶습니다. 어쩜 저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무엇을 믿어야 될지 모릅니다.
그리고 더더욱 부끄러운 것은 그들에게는 삶의 교훈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삶을 살지 말아야 되고 이런 삶은 살아가야 된다, 라고 하는 앎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온갖 변명만 나열합니다. 너무 힘들다, 너무 어렵다 하면서 스스로 처방도 내리고, 위로도 필요하다 여기며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니 교회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누군가가 진심으로 위로해 주었다고 칩시다. 그가 떠나고 나면 그 다음 위로가 또 필요합니까? 묻고 싶습니다. 진짜 그렇게 한다고 행복해집니까? 그리고 자신은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인내심을 가지고 위로를 해주면서 산 적이 없으면서 왜 다른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렇게 미친 듯이 목숨을 걸고 봉사를 해야 됩니까? 물론 살아가면서 다른 성도들에게 사랑을 받고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그런 자립심을 가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주시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으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일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그것이 바로 이 시인이 그렇게 간절하게 주의 도를 온 땅위에 알리시고 주의 구원을 모든 민족에게 알게 하소서, 라고 부르짖어 기도했던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주의 도를 아는 것이 곧 구원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기독교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에는 참으로 신비한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기쁜 일이 일어나도 별 것이 아니라고, 며칠 지나면 흘러가는 허무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해야 하며, 괴로운 일이 일어나도 인생은 어차피 흘러가는 것이기에 눈 딱 감고 조금만 견디자는 것만을 가르쳐준다면 이는 다른 종교에서도 어느 정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탐욕을 격려하고 어떻게 해서든 많은 물질을 가지고 높은 지위에 올라서 호위호식하고 배 두드리면서 사치스럽게 사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가르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사교(邪敎)가 아니면 누군가가 만들어낸 거짓일 뿐입니다. 기본적으로 인간 사회에서 ‘종교’라고 평가를 받을만한 것은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에는 이런 이방 종교와는 다른 신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던져주시는 빛이라는 점입니다. 이 빛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나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많은 일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발견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하나님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기쁜 일을 만나도 주님을 생각합니다.) 남편이 1200프로 보너스 가져와서 육천만원이 생겼다는 것 때문에 신이 나긴 하지만, 그리고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남편의 목을 끌어안고 뽀뽀를 하면서 뱅글뱅글 돌면서 ‘당신 잘 났어’라고 연발하지만 신앙이 있는 자매라면 밤에 자면서도 조용히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이렇게 사랑하시는구나. 경제적으로 어렵고 도와드려야 할 부모님도 계시는데, 그래서 근심 가운데 있었는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뜻밖의 은혜를 베푸시는구나.’하고 눈물을 흘리게 될 것입니다. 돈 때문에 기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주관하셔서 자기에게 그런 유익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 때문에 더 기쁜 것입니다. 여러분도 작은 선물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 선물 없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힘들 때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었던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그런 것입니다. 도무지 잊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움을 처했을 때도 도의 빛을 비춰보면 ‘이 고난은 하나님께서 나를 참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고난이다. 비록 지금은 연단을 받고 있지만 나중에는 정금같이 될 것이다.’라며 거기에서 현실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겨낼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차 늙어갑니다. 젊었을 때는 한 얼굴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줌마, 아저씨가 다 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시집도 안 갔는데 혹은 장가도 안 갔는데 할머니, 할아버지 포스가 난다고 합니다. 그럴 때에 ‘난 괜찮아.’라고 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누구든 “아, 정말 늙어가는구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도 도의 빛 아래서 그 의미를 해석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과 연결 짓는 것입니다. ‘야, 이 나이가 먹도록 내가 이렇게 살아온 것이 주님의 은혜구나. 나의 겉 사람은 후패해가나 나의 속 사람은 날로 새롭게 하소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찬양) 이전 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감사가 나오고, 좀 늙은 외모가 무슨 상관이 있으랴 하고 떨쳐내며 살아가게 됩니다.
삶은 끊임없이 요동치고 환경은 날마다 변해도, 또 나쁜 사람을 만나든 좋은 사람을 만나든, 심지어 너무 사랑했던 사람과 죽음에 의해서 찢어지기도 하면서 슬픔과 기쁨과 애달픔과 분노를 경험하며 살지만 우리는 도의 빛을 받아서 그 의미를 해석하며 나의 인생의 의미를 하나님과 연결시키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쁜 일이 있어도 교만하지 않고, 슬프고 애달픈 일이 있어도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구역장 공부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잃어버릴까봐 두려운 것이 없이 살아가는 것,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울 정도로 그렇게 사랑하는 것이 없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다. 사랑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의미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사라져도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 자신을 묶으면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파도 위를 날아가는 새처럼 땅은 땅이고 바다는 바다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다.” 도가 없으면 도저히 인간은 거기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도가 땅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게 전파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믿으라고 하시는지, 어떻게 살라고 하시는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배워서 도를 붙들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주를 찬송하게 하심
마지막 두 번째는 ‘주를 찬송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와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주의 도가 전파되고 구원을 알게 하는 목표입니다. 모든 나라들과 모든 민족들이 이 도를 듣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 여기에 살아있는 이유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인생에 희로애락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붙잡았는가 하면 없어지고 하는 속에서 우리의 인생이 계속 흘러가는데 그렇게 우연히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다 제하고 나면 인간의 행복은 무엇입니까? 비록 지푸라기 같은 목숨이지만, 들풀과 같은 하잘 것 없는 목숨이지만 오늘도 내가 여기에 살아 있는 의미,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그 도를 알아서 인생의 참 뜻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도를 알도록 영향을 끼치며 사는 것 이외에 우리 인생의 영원한 의미가 무엇이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만이 궁극적인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저는 절대적인 금욕주의나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만나는 좋은 일들을 즐거워하고 누리세요. 그렇게 하면서 자기와 이웃과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것 역시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그 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내 인생의 의미를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전의 나처럼 그 도를 모르기 때문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을 꿈꾸면서 장난감 끝에 매달려 있는 방울처럼 요동치는 사람들이 나를 통해 이 도를 알게 되고 눈에 보이는 이 세계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을 믿고 그분께 연결할 수 있는 인생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 우리에게 진정으로 끝까지 남아있는 인생의 의미라는 것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들이 남편을 너무 사랑합니다. 훌륭한 일입니다.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서 삽니다. 너무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도 죽습니다. 하늘나라로 갑니다. 그런데 그 삶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입니까? 남편을 위해 봉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하는 부모들도 복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들이 자식들보다 먼저 하늘나라에 가게 됩니다. 살아 있는 동안도 자신은 자식을 그리워하는데 자식들은 부모인 나를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헤어집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여러분도 부모에게 그랬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허무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돌려받지 못했지만 내가 자식들을 그렇게 사랑하고 긴 밤을 뜬눈으로 새우며 그 자식을 위해 기도하고 그 자식을 위해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간구하면서 살았던 것은 그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가고 없어도 하나님은 내게 남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따라서 그들에게 면류관을 주십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이 도가 무엇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정확하게 깨닫고 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해하게만 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을 믿고 그것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아주 신비한 힘을 우리에게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힘을 우리에게 부어주십니다.
출장을 갔는데 아침을 먹기 싫어서 건너뛰었습니다. 그리고 10시가 좀 넘었는데 온 몸이 너무 이상한 겁니다. 운전을 하고 지방에서 올라오는데 도저히 운전을 계속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크게 아픈 데가 없는데 너무 피곤했습니다. 지난밤에도 잘 잤는데 왜 이렇게 피곤할까 생각했습니다. 그때 허기가 몰려왔습니다. 마침 팥을 잔뜩 넣은 맛있는 빵을 막 구워낸 집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가서 샀습니다. 그리고 배가 고프니까 생각 없이 두 개를 먹었는데 눈이 밝아지면서 온몸에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피곤했던 것은 제 몸에 당이 떨어졌던 것입니다. 그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아주 달콤한 팥으로 된 아이들 주먹만 한 빵 두개를 먹고 나니까 완전히 눈이 밝아지면서 사물이 또렷하게 보이고 몸에서 힘이 납니다. 이와 똑같이 하나님의 도의 말씀을 먹으면 신기하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가 도저히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데 슬픔을 이기며 살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탐닉할 것 같은 물질인데도 놀랍게 그 물질에 대한 사랑을 잠재우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 역사가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게 될 때 여러분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도에 눈을 뜨게 되면 예전의 자신처럼 살아가던 너무나 가엾은 사람들이 보입니다. 결코 얻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닌데 그것을 바라고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인생을 다 산 것처럼 괴로워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수없이 보입니다. 그들에게 자기가 받은 이 하나님의 도의 말씀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전파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이 그 도에 대해서 들으면서 정신이 버쩍 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아, 내가 인생을 정말로 잘못 생각했구나. 맞아. 아무리 해도 그렇게 해서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이었어.’라고 깨닫게 되면서 마음이 조금씩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랑으로 그들을 많이 돌보아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미 돈을 사랑하는 사람도 아니고 쾌락에 몸을 떠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에 의해서 발견된 의미를 따라서 생각해보자면 이 사람 역시 이 도탄에서 구해내는 것만큼 더 의미 있는 삶이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성심껏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병욱 장로님의 간증이 은혜로웠습니다. 아주 쉽게 설명을 하셨지만 골자를 얘기하자면 (제가 말씀드린 바로 이 내용입니다). 도 때문에 나쁜 일이 일어나도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궁금해 합니다. 무엇 때문에 저렇게 슬퍼할 환경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고, 불행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데 저렇게 행복할까? ‘돈 때문이 아니구나’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돈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에대해 부러움을 느끼거나 자기 비참을 느끼게 될 텐데 말입니다. 잘 살게 된 친구가 자기더러 한번 찾아오라 그럽니다. 그래서 가보면 진짜 맛있는 것을 많이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 때에 선물도 챙겨줍니다. 그런데 그 친구의 진짜 의도는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서 부른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의 마음은 서늘합니다. 왜 나는 그 사람처럼 될 수도 없는지, 그는 나보다 절대 위에 서있는 것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돌아올 때에 그 초라해지는 느낌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만약 우리가 그런 물질적인 것 때문에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때에 그 친구의 도움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자존심 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을 전하고 설교를 해서 여러분이 인생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될 때에 저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끼십니까? 아닙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설교를 통해 저를 만난 것이 아니라 저는 그저 도구였을 뿐이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똑같이 소중한 영혼으로 대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성령이 역사하셔서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못 끊어버릴 줄 알았는데 그것을 끊어버릴 수 있는 용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감당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진짜 복 받은 자녀들은 누구입니까?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은혜 충만하게 살아가는 엄마 아빠 밑에서 자란 아이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행복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엉뚱하게 빗나가는 애들도 있습니다. 이번에도 인터넷 기사를 보니 아버지가 생일 축하한다고 청년인 자기 아들에게 BMW를 사줬더니 아들이 그것을 끌고 가서 강에 빠뜨렸습니다. 재규어를 사주지 않았다고 그랬답니다. 제가 가격을 살펴보니까 삼천만원쯤 더 비싼 차였습니다. 그렇게 부모가 아무리 성령 충만하고 은혜로워도 (회심하기 전의) 우리의 아이들은 그 안에 모든 부패성들이 배태되어 있는 죄인들입니다. 그것이 벌써 두 살만 되도 나타납니다. 악 소리 지르면서 길거리에서 신발을 집어 던지면서 얼굴이 새파래져서 자기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몸부림칩니다. 인간이 그렇게 악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좋은 부모를 만나도 그들 역시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행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가정 안에 자란 자녀들은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깨닫게 됩니다. ‘아, 이 품이 사랑의 품이었구나. 나를 이렇게 품어준 부모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가!’ 사회에 나가보면 그렇게 대우 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집에서는 그렇게 난리를 치고 신발을 집어던지고 소리소리 지르면 부모에게 달려들면 부모님들은 당장에 달려와서 어떻게 해줄까 달랩니다. 그런 아이는 초등학교에 가면 친구도 없고 선생님도 없습니다. 청소년기를 지나서 직장에 가서 신발 벗어던지고 누워서 버둥거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도 정신병자라고 당장 해고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아이들은 자라면서 자신들이 얼마나 큰 사랑 안에 있었는지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도를 알게 되고 자기가 겪는 일의 의미를 하나님께 연결 지으면서 성령 충만함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마음깊이 찬송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슬픔은 다른 사람들이 그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자녀들도 진짜 신앙이 들어간 애들은 부모에 대해서 그렇게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굳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신의 부모님들이 신앙생활을 잘하셨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제가 직접 청소년들을 상담하고 양육해본 사람으로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반면 신앙이 안 들어간 애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부러운 것이 많은데도 자신의 부모를 세상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부족한 것들을 늘어놓으며 투정을 합니다. 그들의 부모가 자신들이 바라는 훌륭한 부모였다면 어떻게 그들과 같은 인간이 태어났을까요? 이렇게 인간은 자기 자신의 처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을 마음 깊이 찬송하는 사람의 간절한 소원은 이것입니다.
(찬양)온 땅과 하늘위에 계서 홀로 영원하신 이름
모든 나라와 만민이 그분을 찬송하지 않는 것이 슬픔이고, 그의 유일한 기쁨은 인생의 벼랑 끝에서 헤매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더니 그의 눈이 열리면서 보게 되고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도를 깨달았기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기 때문에, 그보다 더 큰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복으로 가는 통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복을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고, 또 나 때문에 모든 사람이 행복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나를 여기에 있게 하셨습니다. 아멘! 그리고 목회자가 그렇게 간절하게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고 땀을 흘리며 한자라도 더 가르치려고 하는 것은 양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합니까? 거기서는 발견되지도 않거니와 혹시 발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행복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주를 찬송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기뻐함
첫째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 찬송이라는 것은 원래 ‘기림’입니다. ‘기린다’고 할 때에 그 의미는 너무 소중하고 가치 있고 뛰어나고 훌륭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 높인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기림’입니다. 찬송은 ‘기림’입니다. ‘하나님을 기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하는 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뜻이고 하나님을 좋아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의 은혜의 계획을 펼치시는 이유는 우리를 찬송의 통로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선교하고 교회를 섬기는 이 모든 것의 결국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우리 밖에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박 3일 동안의 이 여름 수련회를 위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습니다. 엄청나게 많은 정신을 쏟았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수련회 자체가 엉망진창이 되고 무질서한 수련회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렇게 힘들게 여기 모여서 말씀의 은혜를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기리고, 육체의 것들을 기리고, 사라질 것들을 기리며 살던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은혜로 바꾸어서 이 모든 것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리고, 나의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신 단 한분의 존재이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이 일을 마다않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결국은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기뻐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기쁨은 사랑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너무 기쁜데 사랑하진 않는다는 이 말은 코미디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코미디언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쁨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사랑의 특성입니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특성이 기쁨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기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입니다. 괴로운 일이 아니라 기쁜 일입니다. 힘든 일이 생겨도 계속 만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려움이 기쁨을 능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기쁨이 차단되면 상사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보고 싶어서 병이 나는 것입니다. 그 기쁨에 깊이 심취되어서 그 기쁨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그 사랑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만 그 마음이 치료될 수 있지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치료될 수 없습니다. 어떠한 화려하고 좋은 것을 모두 누려도 주님이 자기 마음에 없는 공허함과 슬픔은 감출수가 없습니다.
2. 하나님 뜻대로 살아감
둘째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이 기뻐서 찬송하는 사람은 반역을 꿈꾸지 않습니다. 반역을 꿈꾸고 있다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두 번이나 나옵니다.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은혜의 궁극적인 계획은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최고의 주인으로 인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교입니다. 선교는 선교사들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지금 살아있는 여러분의 몫이기도 합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첫째로, 여러분 때문에 인생의 행복을 다시 찾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을 거슬러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단정하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여러분 가까이 있는 남편이나 아내, 아니면 가족들이 그것을 누리고 있습니까? 둘째로, 그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를 묻기 전에 여러분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까? 그를 기리고 있습니까? 그래서 사명의 문제와 나의 인생의 행복의 문제는 결코 나눠지질 않습니다. 참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 행복한 삶을 사는 것만큼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존재가 되고, 선교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그 안에서 나는 이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은 반역을 꿈꾸지 않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은 죄가 있다면 회개할 것이고, 은혜를 받으면 더 많이 순종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찬송자가 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이 찬송은 기림이기 때문에 찬송은 곧 하나님을 향한 경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경배자로 만들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같은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자신만 높이며 살아가던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경배하는 사람들로 세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살아있는 동안 주를 찬송하고, 여러분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참 행복으로 돌아와 주님을 찬송하게 하는 경배자들로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은 불순종하게 됩니다. 도를 모르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쁜 일이 생기면 교만하고, 슬픈 일이 생기면 좌절하고, 진정한 행복이 성취될 수 없도록 끊임없이 요동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행한 것입니다. 자신을 결코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삶, 곧 자기의 뜻대로 사는 것은 노예 살이 입니다. 노예는 이미 자유가 없기 때문에 그런 자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가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흘러갑니다. 우리는 고난과 슬픔을 수없이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그렇게 흘러갈 것입니다. 마음으로 간절히 빌 기는 부디 우리의 앞길에는 슬픈 일들이 적게 일어나고 기쁘고 즐거운 일들이 더 많기를 바랄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소원이고 우리의 인생의 전개되는 것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명심하십시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그 도의 빛 아래서 하나님과 연결을 지으며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많은 일들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다가갑니다. 순간을 살아도 영원히 빛나는 인생의 의미를 다시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의 비전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단 일 년을 살다가 죽어도 정말 사람답게 살고,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모든 이웃들에게 행복의 기회가 되며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나 자신에게는 넘치는 기쁨이 되도록 그렇게 살아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이렇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은혜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쁨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4-5)
녹취자: 김경애
I. 본문해설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심으로써 신자들은 진정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 영적인 복에서부터 우리의 육신과 마음, 그리고 우리의 삶의 복이 확장되고 이러한 복 속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도가 땅 위에 그리고 모든 민족들에게 전해져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나라와 백성들이 하나님을 주로 찬송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II.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쁨
그러면 세상이 그렇게 변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의 기쁨은 어떤 것입니까? 모든 민족과 나라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그의 자녀들이 경험하는 기쁨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위의 나라들을 다스릴 것임이니이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뻐하는 이유가 두 가지로 나옵니다.
A. 심판하심
첫째는 심판하심입니다. 이 심판은 우리의 어감으로 보면 무엇인가 중죄인을 찾아서 커다란 형벌을 가하는 뜻으로 다가옵니다. 물론 여기에 쓰인 ‘심판하시며’라고 번역된 ‘티슈파트’(tisheppot)라는 히브리어에 그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원래의 이 단어는 재판과 관련이 있습니다. 서로 ‘내가 옳다.’고 다투는 두 사람이 있는데 법을 위임받은 재판관이 사실을 모두 살펴본 후에 정확하게 판단을 내려서 더 이상 다툴 수 없게끔 공평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정해주는 행위가 바로 ‘티슈파트’라는 이 단어의 진정한 뜻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심판하심’이라기보다는 ‘재판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더 가까울 것입니다. 재판의 결과에 따라서 사형을 당하느냐, 무죄를 당하느냐와 같은 끔찍한 살인사건을 두고 일어나는 재판도 있겠지만 –근래의 고유정 재판처럼- 사소한 재판도 있습니다. 너무 사소한 문제이니 ‘둘은 서로 화해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판사가 판결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며 원고가 자기가 피해 본 것을 이야기한다면 모든 사실을 심리한 재판관이 ‘기각합니다. 이것은 재판이 성립할 수 없는 사유입니다.’라든지, 원고가 피고를 고발했는데 ‘이 사람은 무죄입니다.’라는 식의 판결을 내릴 수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시행되는 그런 세상이 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것을 바라보면서 너무 기뻐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서도 국가의 법이 정당하게 집행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우리나라 역시 민주화가 많이 이루어졌다고 하나 어떤 사람에게는 법이 고무줄 같이 작용합니다. 불과 몇 년 전에 일어난 일인데 어떤 사람이 사기를 쳐서 순식간에 오천억 원을 손쉽게 해먹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수많은 투자자들을 울리고 회사는 문을 닫았습니다. 그런데 (사기를 친) 그 사람은 감옥에 불과 몇 년도 안 살고 보석으로 풀려남으로써 모든 것이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누구네 집에 들어가서 집주인을 위협하고 5억 원을 훔치거나 강탈했을 경우에는 형법에서 어느 정도의 형량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최소한 5년 이상의 형이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나아가 오천억 원을 은행에서 털어왔다면 그 형량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법을 아예 모르는 우리들이 보더라도 이 사회에는 뭔가 불공정하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리처드 이스털린(Richard Easterlin)이라는 경제학자가 있는데, 그 경제학자가 이야기한 아주 유명한 이론이 있습니다. 돈과 행복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돈을 벌면 행복감이 같이 증가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평등한 나라에서는 돈을 많이 벌어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소득이 아주 낮을 때에는 돈을 벌면 버는 것만큼 행복감이 거의 45도 기울기로 상승하는데 돈을 어느 정도 벌고 나면 그 다음에는 돈을 더 벌어 들인다고 해서 행복감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끼니가 간데없고 폐지를 주워서 간신히 온 식구가 먹던 사람이 갑자기 연봉 5,000만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행복감이 수직상승할 것입니다. 연봉 5,000만원이니까 우선 아쉬운 대로 대출 좀 받아서 전세를 얻고, 애들 편안하게 학교에 보내고, 엄마는 폐지 주우러 안 가도 되고, 그리고 슈퍼에서 무엇을 사다먹으면서 안정적으로 살 것입니다. 그런데 일억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거의 소득 천만 원도 안 되다가 오천만원 올라갈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만족도가 떨어집니다. 일억이 된 다음에는 이억으로 올라가도 그것이 절대로 두 배로 상승하는 것이 절대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어느 지점까지 올라가면 돈이 아무리 늘어도 사람들의 행복감이 증가하지 않고 계속 수평을 그리거나 아니면 그런 정도에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또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경제적으로 너무 불평등하면 돈을 벌어도 행복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사회가 평등하다면 내가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합니다. 이 말은 자신의 행복이라는 것이 개인의 마음먹기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실 신앙적으로 설명해서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고 설명했지만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느끼는 행복감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이 사회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돈이 많이 있어도 밤에 어떤 강도가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산다면 그 행복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안전의 문제뿐만 아니라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면 그것도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저 자식 집어넣어!’라고 하면 24시간 안에 (부자인 내가) 감옥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사는 것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예 통계 지수가 나왔습니다. 법이 공정하게 잘 집행되는 사회, 국민들이 골고루 잘 사는 사회, 안전한 사회 속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 지수가 높게 나온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것이 성경이 이야기하는 ‘아쉐르’의 행복은 아니지만 우리가 행복하다는 이 느낌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시간이 없어서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 현실적으로 우리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때에 사회와 떨어뜨려 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직장에 사표를 내고, 가족을 포함하여 모든 관계를 끊고 산속에 들어가서 홀로 도라지나 심고 칡뿌리나 캐면서 그저 청풍명월을 벗 삼아 시나 쓰면서 사는 것을 만족해하고 행복하다고 하면서 살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기를 바라는 행복일까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삶을 선택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권장할 만한 삶은 아닙니다. 암에 걸렸다든지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하기에 문명에서 좀 멀어져서 자연과 가까이 지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권장할만한 삶이지만 젊은 나이에 일생을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서 보면 이바지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면서 하나님 안에서 내가 행복을 누리면서 살지만 나는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우리의 행복이라는 것은 사회의 행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이 사회를 향해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는 중요합니다. 권력자들을 향해서는 똑바로 정치하라고 엄중하게 지적해야 하고, 잘못된 일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며 사회를 고쳐 나가야 하며, 자신 또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사회를 위해) 올바른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격려해서 함께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일이기에 앞서 나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이런 일은 너무나 꼭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미국사람들은 -물론 소수의 사람들은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다수가 이런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슨 사태가 일어났는 줄 아십니까? 월가(wall street)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금융 쇼크’가 오게 된 것입니다. 그중의 한 가지만 쉽게 이야기하면 이런 것입니다. 외국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아이를 위해서 저금을 할 때에도 그것을 보통예금 통장에 넣어두는 것이 아니라 주식에 저축을 합니다. 그 시장은 여태까지 믿을만한 시장이고, 오랫동안 문제가 없이 자라온 수십 년, 혹은 백년 이상 된 기업에 돈은 넣는다는 것은 언젠가 망할지 모르는 은행에 넣어두는 것보다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직장에서 20년, 30년, 40년을 다니고 받는 연금도 거기에 넣은 것입니다 투자한 그 회사가 천천히 발전하면서 수익이 나는 대로 돌려주면 그것이 은행이율보다 훨씬 높았고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이 사회적인 안정망을 확충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월가에서 사기에 가까운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수십 년 동안 겪지 못했던 아주 복잡한 금융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투자들이 비효율적으로 일어나고 우리들이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는 모델을 벗어나서 전문가들끼리만 알 수 있는 방식으로 거래가 되면서 투자한 돈이 모두 날아가게 된 것입니다. 20년 내지 30년 정도 연금을 더 받고 충분히 살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당신의 연금이 고갈되어서 이제는 없습니다.’라는 통보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이 60세가 넘은 사람이 주유소에 나와서 알바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도대체 우리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서 사람들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낸 세금을 정부가 어떻게 쓰고 있으며, 우리가 맡긴 은행의 돈이 어떻게 굴러가고 우리가 투자한 돈이 정말 정당하게 회사를 운영하는 데에 쓰이고 있는가에 대해 엄청난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개인의 행복이 그냥 개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너무 밀접하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신앙적으로 말할 때 행복이 돈에 있다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에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하고 고통 받는 상황은 힘든 상황이며, 때때로 우리의 신앙도 방해합니다. 매우 힘들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돈이 많으면 신앙생활을 그 돈의 크기만큼 잘하느냐?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 너무 분명합니다. 따라서 행복의 본질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현실적인 우리의 삶이 행복하다는 느낌을 좌우하는 매우 커다란 요소들이 사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회가 되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고 자신의 탐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 사회가 자기의 탐욕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굴러가면 좋을 것입니다. 내 기업을 밀어줄 수 있는 정권이 들어서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 기업에서 돈을 받은 사람이 고위 공무원이 되어 우리 회사에 유리한 허가를 내어주면 기쁠 것입니다. 혹은 내 고향 출신, 그저 늘 친구처럼 술 마시던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고, 우리 회사에서 준 돈으로 선거운동을 한 사람들이 국회 의장이 되어서 국회를 장악하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세상은 계속 불평등해져갈 것이고 누군가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부당하게 이득을 보게 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부당하게 손해를 보면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회는 우리가 원하는 사회가 아닙니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고, 탐욕을 부리는 사람이 망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이 원하는 바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덕적인 동기가 아니더라도 경제적인 경쟁관계에 있기에 어느 기업은 밀려나고 어느 기업은 돈을 벌며, 어느 개인은 성공하고 어느 개인은 실패하는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까지 평등하게 해달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룰 자체는 공정해서 진 사람은 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 이긴 사람은 그런 룰을 따라 살 수 있었던 자신의 사회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서 경쟁에서 져서 넘어진 사람들의 손을 기분 좋게 잡고 일으켜줄 수 있는 사회가 우리가 꿈꾸는 건전하고 바람직한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표정을 보니) 전혀 안 그런 것 같은 표정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에게도 처음부터 경쟁을 가르치면 안 되고 어떻게 남을 이해하고 남과 함께 손잡고 남을 도와줄까를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경쟁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유치원만 들어가도 배우게 됩니다. 왜요? 선생님이 어떤 아이의 머리는 여러 번 쓰다듬어주지만 어떤 아이에게선 아예 고개를 돌립니다. 그 아이는 너무 많은 에너지를 선생님에게서 빼앗아가니까 그렇습니다. 그런 작은 일에서부터 우리의 아이들은 경쟁을 배우기 시작하기 때문에 이런 경쟁의 후유증들을 덜어내는 것들을 아이들에게 훈련시킬 때 그 둘이 조화와 융합을 이루면서 바람직한 사회를 건설해나가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견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심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확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신다면 어떻게 판단을 내리실까요? 확실한 것 하나는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너희 나라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 많으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적은 나라보다 너희 편을 들겠다. 그래서 너희는 나쁜 짓을 해도 나는 너희편이다.’라고 하실 리는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조국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주의 얼굴빛의 비췸을 받은 사람들이 깊은 신앙의 감격 속에서 (그 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전파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온 나라에 전합니다. 그래서 그들 역시 구원을 받아서 모든 이들이 주를 찬양하게 되고 모든 나라들이 주님을 노래하게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들의 울타리를 넘어서 그렇게 하나님의 도와 구원이 만방에 펼쳐지는 것을 보면서 기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고 살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지 않으셨는가? 당연히 그때에도 하나님이 다스리셨습니다. 이 세상은 단 한 치의 땅도 하나님이 통치하시지 않는 나라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온 나라를 다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그냥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찍어 누르듯이 하는 통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영적인 통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혜를 받고 복을 받고 주님을 깊이 만나 그 얼굴빛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었듯이 그들도 그렇게 은혜를 받음으로 스스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복을 받음으로 주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천박하게 복을 구했던 우상이 자신들에게 복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의 참된 사상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빛을 그들에게 비춰주심으로 온 세상과 만물은 그분이 지으신 것이며 그 위에 모든 것을 의미 있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찬양) 사랑해요 주님 사랑해요
사람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니까 이방인이었던 사람들이 이방의 더러운 습성과 우상을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마음 깊은 곳에서 찬양하는 것입니다. 어제 설교했지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반역을 꿈꾸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반역을 꿈꾸지 않습니다. 그렇게 찬양하는 사람은 죄가 있으면 회개할 것이고, 은혜를 주시면 더 많이 순종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짐승처럼 살던 이방의 사람들이 모두 주님께 돌아와서 그의 모든 관심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고 애쓰게 됩니다. 누군가 자신을 위협하면서 감시하는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심판하시며’ 라는 말의 뜻입니다. 혹은 ‘재판하시며’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을 의미 있게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볼 때 세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행복하게 산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그 하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의미가 ‘이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혹은 내 가족은 어떠하든지 다 필요 없고 그냥 나 하나만 하나님 때문에 기쁘고 만족을 얻고 쉼을 누리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특성상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특성은 관계적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대상이 있어야합니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왜요? 마음으로 그를 그리워함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나 나의 아내를 아무리 목마르게 그리워한다고 하더라도 회답은 오지 않습니다.
어느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너무 사랑했습니다. 시집와서 진짜 친딸도 그렇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시아버지와 관계가 좋았습니다. 참고할 것은 그 아버지가 거액의 유산을 물려주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지 6개월이 넘었는데도 며느리는 너무 보고 싶은 것입니다. 참 신기한 일이잖습니까? ‘시’자가 들어갔는데 말입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며느리는 시아버지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냈습니다. ‘아버지, 너무 그립습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왔습니다. ‘얘야, 나는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쉬고 있단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어라.’ 며느리가 너무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전화를 해보았답니다. 그랬더니 전화는 받지 않고 그 번호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 ‘저도 부모님을 잃은 적이 있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애틋하시면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셨습니까? 위로 드립니다.’라는 위로의 문자가 온 것입니다. 그런 며느리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은 하지 않고 웃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사랑은 아닙니다. 그리워할 뿐이지 대답은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랑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사랑입니다. 들려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하나님 아닌 것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면 놀랍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것들을 함께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특성이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을 사랑할 뿐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이상한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관심은 사회를 향해서 펼쳐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양한 스펙트럼의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군인이라면 악한 나라와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응징하는 일에 자신을 헌신할 것이고, 그 사람이 공직에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뇌물을 받지 않고 냉정하게 일을 처리해 주어서 모든 사람이 법의 혜택을 받게끔 해주지 않겠습니까?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니까 그 며느리도 만약에 하나님을 그렇게 깊이 만나고 은혜를 받았으면 그것 때문에 그렇게 시아버지도 사랑하고 가족들도 사랑하고 자녀들도 사랑하는 특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가족을 뛰어넘어서 이 사회의 온전함과 우리의 행복이 매우 밀접하게 연결 되어있습니다. 완전한 나라는 없지만 나라가 보다 더 온전한 나라가 되어갔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일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성심으로 자신의 나라를 가꾸어갔기 때문입니다. 일반은총의 차원이든지 특별은총의 차원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역사를 돌아보면서 불의한 일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사회의 정의를 외쳤던 사람들, 그리고 다른 나라가 지배하려고 할 때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면서 산화해 버렸던 사람들을 높이 칭송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죽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그렇게 침묵하지 않고 외세의 침입에 항거하고, 사회의 부패한 권력에 맞서고, 올바르지 않은 정치에 도전하면서 바른 목소리를 내며 희생해서 죽어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죽지는 않더라도 적지 않은 손해를 보면서 그 일을 위해서 헌신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쌓여서 오늘날의 이 사회를 이루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넘치도록 은혜를 주시고 난 이후에는 이 은혜가 교회를 가득 채우고 그 은혜의 강물이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서 이 세상에 흘러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 세상이 올 것이기 때문에 이 시인은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모든 민족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도를 받들며 짐승 같은 삶에서 참 인간의 삶으로 돌아오고, 그의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이 넘칠 뿐만 아니라 (사회 속으로도 흘러 들어가 모든 사람이 주님이 찬양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이 힘을 다해서 사회를 바꾸어 나가고, 하나님의 공평이 그 땅에 이루어지는 사회 속에 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진정한 기쁨이라고 노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은 자신이 어떤 만족감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쉼을 누리는 것이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움으로써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사랑하는 하나님이 만족과 기쁨과 휴식을 누리시는 그런 세상이 되는 것에서 옵니다. 이것이 그에게 가장 큰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소원은 개인적이고도 세속적인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고, 또 자기 안에 이루어진 이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이웃의 마음속에, 그리고 온 백성들에게 두루 널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사람의 행복이고 그것이 없다면 그는 천하에 모든 것을 다 가져다 주어도 그 사람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 오전 특강은 어땠습니까? 제가 여태까지 들어본 우울증 강의 중 최고였습니다. 그런 강의를 들을 수 없습니다. 정말 최고입니다. 아닙니까? 최고였습니다. 의학적인 견해도 올바르고 강의하시는 분이 영혼을 깊이 사랑하고 있는 것도 느껴졌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그 강의를 들으면서 목사님이 한 이야기가 저기에도 많이 나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울증에 걸렸다 할지라도 우울증은 추호도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울증 걸린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성격이 이상해!’라고 말하는 것은 진짜 아픈 사람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도 그런 사람이 되기 싫은데 병에 걸려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 참고 인내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 비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사람을 모두 골방에 모아놓거나 지하실에 가두어놓고 밥이나 주면 되겠습니까? 그 다음날은 자기가 거기에 있을지 모릅니다. 자신도 그런 취급을 받고 싶지 않으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울증에 걸린 사람에게 ‘진짜 성격이 이상해!’라고 하지 마십시오. 성격이 아닙니다. 원래 밤이나 낮이나 기침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감기에 걸려서 기침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밤이나 낮이나 밥 먹을 때나 항상 기침을 해댄다고 욕을 하면 얼마나 서럽겠습니까? 우울증도 똑같습니다. 자신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이 강의를 듣고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청년들도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울증은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보십시오.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그렇게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펼쳐집니다. 우리 중 누가 36살밖에 안된 자매가 꿈같이 결혼을 했는데 남편이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식물인간이 될 것이라고 일 년 전이라도 상상을 해본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 현실도 내가 살아낼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이 그 현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느냐 하는 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말씀드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불행하고 힘든 모든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 되지 못하게 말입니다. 허둥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의 참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애써서 외면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절대 상갓집에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례가 아닙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자꾸 자신의 죽음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에 정신건강에 안 좋아서 안 가는 것입니다. 그런 연세 드신 분들은 상갓집에 오지 않아도 예로부터 결례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렇게 연세 드신 분이 상갓집에 가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불행의 가능성에 대해서 의도적으로 눈을 돌립니다. 그것이 무슨 좋은 결과를 가져올까요? 마지막에 ‘꽝’ 하고 일어나면 상상도 못했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필이면 내가 왜?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하면서 이 현실을 계속해서 부정합니다. 부정할 때 마지막에 나타나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 현실에서 이탈해 버리든지 아니면 그 현실을 끝까지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하며 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이탈은 결국 죽음이고, 부정하면서 사는 것은 계속해서 원한을 품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는 있는 현실이 아니라고, 내가 있어야하는 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불행한 사람은 그것을 내가 있어야할 현실이라고 오래 전부터 생각하면서 살아왔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무슨 일을 만날지 모르니까 자신의 크기를 키워나가야 합니다. 믿음의 선조들이 끊임없이 이슬 같은 인생을 노래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잠시 지나가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사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은혜로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은혜 아니면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는 더더욱 없으며, 호흡할 수도 없고 무엇 하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인의 행복과 사회의 행복, 그리고 다른 사람의 행복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처세술이나 행복론 작가들이 자꾸 ‘네 생각만 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적절한 치유법이 아닙니다.
보십시오. 치매 걸린 우리 엄마, 파산한 내 남동생, 무능력한 내 남편, 그리고 공부하지 않고 게임에 빠져있는 우리 아들, 누가 그것을 원하겠습니까? 그런데 현실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맞닥뜨리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만 합니까? 기도만 해서 되겠습니까? 남편이 무능한데 아내인 자기가 벌어야 합니다. 치매 걸린 아버지를 누군가는 돌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돌보다 어느 한 순간에 나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벌렁 드러눕게 되는데 그것이 자아의 정신 줄이 끊어질 때 그냥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울증의 한 증상입니다. 정신 줄을 놓게 만드는 것이 우울증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자아를 강하게 키워나가고 모든 불행한 일이 내 가까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목사님은 인생에 대한 설명을 왜 이렇게 우울하게 하느냐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맞설 마음의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내 안에 이루어지고, 모든 나라들이 그렇게 기뻐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꿈꾸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비추어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그분으로부터 은혜를 받으며,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이바지하고. 사회의 올바르지 않은 것에 대해서 올바르게 이야기하며, 자신은 그러한 시류에 항거하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아이들을 위한답시고 학교에 돈 봉투를 갖다 주면 선생님이 자기애들을 잘 돌봐준다고 해서 그것을 똑같이 따라하면 지금까지 이야기하는 이 행복의 계획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주님이 주시는 은혜에 힘입어 이것들을 이기면서 살게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B. 다스리심
마지막 두 번째는 다스리심입니다.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시고 구원을 모든 나라에 알리실 때 우리는 즐겁습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나와 개인을 넘어서 땅 위에 모든 나라와 민족을 다스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다스리신다’라고 번역된 ‘탄헴’(tanhem) 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원래 ‘이끌다. 인도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사랑으로 이 세상을 이끄신다는 뜻입니다.
악은 이 질서들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세상은 악할수록 질서가 없습니다. 악에게도 무언가 그들만의 질서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억지로 만들어낸 질서일 뿐입니다. 아름다운 것은 이유가 있지만 추한 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아름답지 않은 모든 것이 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나름대로의 질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을 건드릴만한 질서가 그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이렇게 하나님의 선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것에 대해 다시 이 세상을 질서롭게 하기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질서는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온 인류와 만물이 기쁨과 만족, 그리고 진정한 쉼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함께 어울려 걸어가는 가운데 조금 앞서서 간다고 해서 그 사람이 무리 전체를 인도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몰려다닌다고 이야기합니다. 인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함께 걷는 사람이 모르는 길에 대한 지식이 있고,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가는 목표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무리를 이끌 때 우리는 이것을 인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 대해서 목적을 가지고 계신 것을 보여줍니다.
자,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법원에 제소를 했습니다. ‘저 사람이 돈을 훔쳐서 보관하는 것을 내가 훔쳤다. 따라서 나는 이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 왜? 그 돈도 어차피 그 사람의 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악이 아니다.’ 이런 것을 실제로 생각해본 사람이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나오는 라스콜리니콜프라는 젊은이입니다. 그는 수전노같이 고리대금을 해서 먹고사는 노파가 가지고 있는 돈 자체가 악의 덩어리라고 보고 자신이 그 노파를 살인하고 그 돈을 빼앗는다고 해서 그것은 악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합니다. 악하디 악한 그 인간을 죽여 버리는 행동, 불의하게 모은 그의 재물을 내가 취하는 것이 정말 악이 되겠느냐는 질문을 가지고 소설이 시작됩니다. 그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여러 설이 분분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나라의 법과 법관이 심리를 해서 이에 대해 정확하게 재판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판결을 확정짓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모든 백성들이 아직 명확하게 모르고 있었으나 이것이 바로 이 나라가 백성들을 인도하고자 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 판결을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사한 사례가 발생한다면 ‘그 사람이 돈을 훔쳐온 것은 훔쳐온 것이고 불의로 얻은 돈이라고 해서 내가 불의한 방법으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아니구나! 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은 인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올바르고, 법은 법대로 제대로 만들어진 사회가 되면 그 사회는 좋은 사회입니다.
가장 좋은 법은 하나님이 왕이셨더라면 다스릴 나라처럼 되게 만드는 법이 최고의 법입니다. 그런 법이 만들어지고 그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는 사회가 될 때 그 사회는 그 법의 인도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목적으로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서 우리 앞에 수많은 법들을 만들어놓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손을 벌려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많은 법과 법령집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혼자 앉아서 다 읽는 것은 몇 년 걸려야 될 일이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몇 가지 원리들이 있습니다. 어떤 법도 침해할 수 없는 원리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이것은 독재국가가 아니라 공화정이다.’ 모든 국민의 투표에 의해서 대표자가 세워지고 그들에 의해서 주권이 행사되는 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침해하는 법이 있다면 그 법은 당장 헌법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런 법은 엄밀하게 말하면 무효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이 세상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 가르침 전체를 꿰뚫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류가 당신 안에서 당신의 선을 누리며 행복한 상태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떠한 계명도 이것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계명들이 모두 이 원리를 관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께 사랑받으며, 이웃을 사랑하고 그 이웃들과 함께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복을 누리게 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말씀과 계명을 관통하고 있는 줄거리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첫 머리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소원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이었습니다. 주님이 꿈꾸던 세상과 시인이 꿈꾸었던 세상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모든 백성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을 기쁘게 하십니다. 이 은혜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기꺼이 순종하게 하며, 우리를 향해 믿으라고 주신 규칙을 전심으로 믿게 하고, 살라고 주신 교훈을 따르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을 때에는 이 교훈이 너무 잔인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이기심밖에 없는 교훈처럼 믿어졌으며, 나를 너무나 힘들게만 하는 명령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께서 내 안에 역사하고 난 뒤부터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따라 사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즐거운 것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이 이런 나라가 되기를 가장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는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늘 하시던 기도였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도, 머리 둘 곳 없는 생애를 사시며 고난과 핍박을 당하신 것도,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결국은 그렇게 해야지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그 일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주님의 은혜로 계승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정복하셔서 다스리십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십니다. 주님을 사랑한 것만큼, 자신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통치만큼 세상에서도 그렇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성령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당신의 다스리심을 펼쳐 가시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매우 많은 시간을 공들여서 여러분들에게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도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행복과 연관되는지를 설명을 드렸습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를 받아들인 사람들, 예전의 우리처럼 허무하게 세상을 사랑하다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결국 그 사랑 때문에 하게 되는 일이 무엇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다스리심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 나라 임하시고 주 뜻 이뤄지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사람들에게 이루어질 수 있고, 그 사람들이 그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다면 나 같은 것은 사라져도 불행할 것 같지 않은 그런 마음이 듭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잃어버려서 너무 두려운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담대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사람이 담대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나에게는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울 만큼 사랑하는 것이 없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이 세상의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든든합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랑은 모든 삶에서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질서를 다시 세웁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보람은 이러한 통치를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가 살아있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변을 돌아보면 산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돌아보십시오. 산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물어보십시오. “살았니? 죽었니?” 육체가 살았다는 것은 호흡이 있고 심장이 뛰고 머리가 돌아가고 기동을 하면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것은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악한 것에 대해서 저항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살아있다면 여러분들의 신체를 위협하는 것들을 보고만 있겠습니까? 결사적으로 피하려고 할 것이고 도저히 피할 수 없으면 칼을 든 강도라고 맞서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영적인 생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악에 대해서 항거하고 끊임없이 행복에 이끌리는 그 힘이 바로 생명입니다. 좀 전에 이야기했습니다만 치매 걸린 시어머니, 알코올중독인 시아버지, 무능한 남편, 성질고약하고 우울증 걸린 아내 -성질이 원래 고약했는데 우울증도 걸렸습니다. 우울증이 없을 때도 고약했습니다-가 있습니다. 원래 성질도 나쁜데 설상가상으로 우울증까지 걸린 우리 아내가 있습니다. 성질이 나빠서 자기 마음대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우울증이 올 확률이 낮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많이 옵니다. 저는 아직 우울증이 안 걸린 것을 보면 정말 많은 기도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어쨌든 게임중독에 빠진 우리 아들도 있습니다. 중학교 1학년밖에 안되었는데 미니스커트 입고 화장하고 다니는 우리 딸도 있습니다. 이것이 다 무슨 현상입니까? 죽음의 현상입니다. 그런데 꼭 한 사람 남편인 자신에겐 생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내를, 그 어머니를 힘을 다해서 돌봅니다. 아버지를 돌봐드리고 아내를 사랑하며 가엾이 여기고 돌봐줍니다. ‘여보, 꼭 우울증 나아.’ 그렇게 얘기했지만 우울증이 나아도 못된 성질은 어떻습니까? 성질은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좋으니 우울증이라도 나아라.’ 하면서 우울증 약을 타다 주고 지극정성으로 간호를 합니다. 그리고 아들을 챙기고 딸도 챙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기도합니다. 자기 안에 생명이 있으니까 죽음으로 가득한 가정을 두고 볼 수 없어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그러자 아내의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울증이 나으면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못된 인간이었는지를 더디기는 하지만 조금씩 깨닫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으면서 호전되어 가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도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갑니다. 아이 둘은 최근에 중고등부에서 은혜를 받고 회심을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청소년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하나님의 생명이 그 사람을 통해서 전달된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의 의미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우리 앞에 전개된 현실은 엄중합니다. 내가 직면한 이 현실 말고 다른 현실이 있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혹은 지금 당장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불만과 분노를 폭발하게 될 때 현실은 바꾸지는 못하고 자신의 내면의 세계가 무참하게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성이 파괴된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무지에 사로잡혀 살아가거나 쾌락에 빠져 살아간들 그것이 무엇을 가져다주겠습니까? 죄도 나이가 들면 죄 조차도 그 사람을 버립니다. 청교도 토마스 왓슨의 명언입니다. 죄도 쓸 만할 때까지 쓰고 죄를 지을 능력이 안 되면 죄고 그 사람을 버립니다. 다른 사람에게 갑니다. 중풍에 걸려서 움직이지 못하는데 누구에게 폭력을 가하겠습니까? 힘이 있을 때 죄도 짓는 것입니다. 사기를 쳐도 젊어서 정신이 맑을 때나 하지 자기 집도 못 찾는데 무슨 사기를 치겠습니까? 이것은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입니다. 죄도 그를 버립니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수련회를 마무리하면서 여러분에게 ‘은혜를 받아라, 예배에 잘 나와라.’는 식의 늘 하던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현실을 과감하게 맞서고 ‘이 현실은 내가 맞설 수 없는 현실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힘을 주실 지는 아직 모르지만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은혜를 주셔서 이 현실을 이기며 살게 해주실 것이다.’
용기를 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시간을 더 하고 싶지만 여기서 마무리합니다. 용기를 내시기 바랍니다. 안낼 수 없는 이유는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으려면 눈을 뜨고 세상과 마주해야 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한 여러분에게는 현실이 있습니다. 비교할 필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길을 가라고 하고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우리는 우리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힘겨워도, 어려워도, 기쁘고 감사해도, 내게 주신 이 길을 걷을 사람은 나 이외에 없다는 용기를 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