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이 있는 복음
(2019년 온가족 여름 수련회 청년부)
설교기간 | 2019년 07월 28일 – 07월 30일
편집내용 | 녹취 원본
출 력 일 | 2020년 02월 04일
목 차
설교 프레임
1. 하나님께 간구함 (시 67:1) 2019.07.28. 온가족 여름 수련회 …………………………………… 1
2. 확장되는 기도 (시 67:2-3) 2019.07.29. 온가족 여름 수련회 …………………………………… 15
3.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쁨 (시 67:4-5) 2019.07.30. 온가족 여름 수련회 ……………………… 37
<설교 프레임>
비전이 있는 복음1 2019. 7. 28 여름 수련회 첫째 날 저녁집회
< 사랑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셀라)” (시 67:1)
I. 본문해설
이 시(詩)는 성전에서 인도자를 따라 부르던 노래였다.
저자는 분명치 않으나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탄원시다.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의 우주적 비전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셀라)”(시 67:1)
II.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먼저 하나님께 간구한다. 그 내용은 다음 세 가지로 제시된다.
A. 은혜를 베푸심
먼저,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한다.
은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분에 넘치는 호의”를 뜻한다.
이는 하나님의 선(善)과 자비(慈悲)에서 비롯되는 은택이다.
은혜는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준다.
그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 신앙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라. 그 은혜가 마음에 넘치게 하라.
거기서 인생(人生)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은혜를 받으라.
B. 복을 주심
“복(福)”은 “창조 목적 안에서 만족과 기쁨, 쉼을 누리는 상태”다.
이 단어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모든 복(福)의 원인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로 한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원한다. 누가 만족과 기쁨, 쉼을 원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신이 스스로 복(福)의 원인은 아니다.
인간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하다. 불행한 것은 하나님 아닌 것에서 행복을 찾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복은 없다.
인간과 자연 만물의 행복한 상태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복을 주시고” “예바레케누(yebarekenu)”의 동사원형은 “바라크(barak)”, 명사가 “베라카(beraka)”다.
*asher와 비교해서 뜻을 설명할 것
참으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그 길은 하나님을 만나고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복을 구하라.
C. 얼굴을 비추심
이어서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모든 복의 진수(眞髓)를 간구한다.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시 67:1하)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게 하소서”(KNJ 私譯)
이것은 모든 복들 중 최고인 “영적인 복(spiritual blessing)”이다.
하나님이 인간에 베푸시는 복은 두 종류로 구별된다.
a. 일반 섭리의 복: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심으로 주시는 복.
b. 영적인 복: 하나님께서 직접 영혼을 만지심으로 주시는 복.
은혜에는 비전(vision)이 있다. 하나님의 선교 계획이다.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이 비전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와 참된 행복(幸福)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일은 개인의 영혼의 변화에서 시작된다. 마음을 다해 기도하라.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영적으로 변화를 받으라. 새 사람이 되라.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신다.
은혜를 받으라. 영적인 복을 받음으로 행복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깊이 만나라. 살아있는 이유를 발견하라.
비전이 있는 복음2 2019. 7. 29 여름 수련회 둘째 날 저녁집회
< 주의 도를 알리소서 >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2-3)
I. 본문해설
개인의 영적 변화는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갈망을 가져온다.
자기를 변화시킨 말씀이 세상에 전파되어 모든 사람이 구원의 은혜를 받기를 열망한다.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 67:2)
II. 확장되는 기도
A. 주의 도(道)를 알리심
“알리소서” (ladaat).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지식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알라”, “잊지말라”, “기억하라”.
여기서 “도(道, derek)”는 인류가 믿어야 할 규칙(規則)과 살아가야 할 교훈(敎訓)이다.
이 “도(道)”는 사람이 마음으로 이해되고, 인격으로 나타나고, 생활로 고백된 지식을 가리킨다.
왜 “주의 도”가 땅 위에 전파되어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하는가?
그 도(道)와 구원이 전파됨으로써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道)”는 곧 “구원”이다.
“도(道)”를 알고 구원 받음으로써 하나님 안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초월적인 은혜에 대한 경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행복하게 한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라. 하나님을 알라. 전파할 지식을 가지라.
하나님의 “도(道)”를 앎으로써 다시 희망을 찾으라. 불행한 인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라.
이것이 구원이다.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을 알게 될 때, 하나님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된다.
B. 주를 찬송하게 하심
이렇게 주의 도가 전파되고 구원을 알게 하는 목표는 무엇일까?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시 67:3)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한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1. 하나님을 기뻐함
찬송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드려진다.
은혜의 계획은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분을 기뻐하라.
2. 하나님 뜻대로 살아감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은 반역을 꿈꾸지 않는다.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찬송하게 하소서” 은혜의 계획은 민족들이 하나님을 “주(主)”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교다.
찬송하는 사람은 죄가 있다면 회개(悔改)할 것이며 은혜를 받으면 더 많이 순종(順從)할 것이다.
하나님은 참된 경배자가 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우리를 통해 경배자를 세우신다.
III. 적용과 결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불순종한다. 그래서 불행해진다.
행복하게 하지 못할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은 노예살이다.
순간을 살아도 영원히 빛나는 인생의 의미를 다시 찾으라.
하나님을 만나고 인생의 꿈을 찾으라. 다시 넘치는 기쁨으로 살라.
비전이 있는 복음3 2019. 7. 30 여름 수련회 셋째 날 저녁집회
<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쁨 >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셀라)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4-5)
I. 본문해설
하나님이 얼굴빛을 비추심으로써, 신자들은 복(福)을 누린다.
이로써 온 땅과 모든 나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알게 하신다.
궁극적으로,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을 주(主)로 찬송하게 하신다.
II.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쁨
본문은, 민족들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그의 자녀들이 경험하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셀라)” (시 67:4)
A. 심판하심
하나님의 자녀의 기쁨은 주님의 뜻이 법대로 시행되는 것이다.
“심판하시며”(tisheppot) 이는 재판의 문맥이다. 법이 정의롭게 집행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기뻐한다. 하나님의 정의(正義)와 현실(現實)이 유리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서 구현되기 때문이다.
개인의 영혼이 변화되고, 선교가 이뤄질 때 하나님의 법은 세상 모든 나라에서 현실이 된다.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암 5:23-24)
사회의 상태는 교회의 소명(招命)을 보여준다. 망가진 부분을 고쳐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근원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시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사람들을 원망하지 말라. 거기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라.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나도록 은혜를 간구하라. 비전을 찾으라.
B. 다스리심
하나님께서 얼굴빛을 비추시고 구원을 모든 나라에 알리실 때 우리는 기쁘고 즐겁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나 개인과 교회를 넘어서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스리신다(tanhem)”는 의미는 원래 “이끌다. 인도하다” 이다. 이는 하나님의 선(善)하심을 따라 사랑으로써, 이 세상을 질서 있게 하신다는 뜻이다.
악(惡)은 이것을 무너뜨린다. 질서가 없다. 예수의 고난은 죄에 의해 무너진 세상을 다시 질서롭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질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 온 인류와 만물이 기쁨과 만족, 그리고 쉼을 누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실질적으로 다스리시는 나라다. 사람의 마음을 사랑(love)으로 정복하셔서 다스리신다. 말씀과 성령으로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통치(統治)가 마음 안에 이뤄지는 것만큼 세상 안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갈망한다.
말씀으로 당신의 뜻을 알리시고 성령으로 서로 사랑하게 하신다.
사랑은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세운다. 그 안에서 우리가 행복을 누리게 하신다.
하나님의 자녀의 보람은 이러한 통치를 기뻐하며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기뻐하게 하는 것이다.
III. 적용과 결론
왜 기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나? 보람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의미 있게 살라. 우리의 인생은 한 번 밖에 없다.
행복하게 살라. 다른 사람들이 당신 때문에 행복하게 하라.
비전이 있는 복음(2019.07.28_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 1)
포로 된 자를 부르시는 하나님 (2019.10.16._가을말씀사경회 저녁 1)
1. 하나님께 간구함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시 67:1)
녹취자: 박나리
I. 본문해설
시편 67편은 성전에서 인도자를 따라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저자는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이스라엘의 공동체적인 탄원을 담고 있습니다. 이 짧은 시는 그 시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가 짧지는 않습니다.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우주적 비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II. 하나님께 간구함
시편 67편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소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간구를 담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과 복을 주시는 것과 얼굴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A. 은혜를 베푸심
첫째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라고 말합니다. 자기 백성에서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탄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은혜’라고 하는 단어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사용됩니다. 항상 이것을 기억하면서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그 은혜가 셋 중 어디에 해당하는 지를 이해하고 듣는다면 훨씬 더 성경을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범주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신 구원의 길, 그 자체를 은혜라고 부릅니다. 두 번째 범주는 하나님이 가치 없는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분에 넘치는 호의입니다. ‘나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할 때에 그 은혜가 바로 이 두 번째에 해당됩니다. 이 두 가지를 합친 것만큼 성경에서 많이 사용되는 것이 세 번째 범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입니다. 만약에 두 번째 용례의 ‘은혜’가 객관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이것은 주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격이 까칠하고 못되었던 사람이 아주 친절하고 너그러워졌을 때 우리는 “네가 은혜를 받았구나”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성경에서 각기 다른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으니, 이것을 명심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쓴 책 <죄와 은혜의 지배>라는 책은 이 세 가지 용례 중 무엇일까요? 3번입니다. 죄와 은혜의 지배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감동이 있는데, 죄가 들어오면 그 감동이 사라지고 죄가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것이 어떻게 우리 안에서 다투게 되는 지를 설명하는 것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라고 할 때에 이것은 어디에 해당되는 것일까요? 1번과 3번이 배제된다고 할 수 없지만 압도적으로는 2번의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의미에서의 은혜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런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는 머리도 좋고 엄마 아빠가 후원을 많이 해줘서 성적이 올랐다고 할 때에 그 원인과 결과 사이에 분명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어떤 의무도 없는 사람이 자기에게 다가와서 예기치 않은 혜택을 주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자기 인생에 너무나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가리켜서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시인이 여기에서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할 때에 그 심정은 어떠할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자기 혼자 힘으로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면, 자기 백성들이 자기 힘으로 넉넉히 살아갈 수 있다면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절히 호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확고한 증거는 없습니다. 누구도 이 시편 67편의 연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심정적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어쩌면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매우 큰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간구했던 시가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가 없나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왜 20년이나 30년 전에 비해서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는 비율이 많이 낮아졌느냐고 물을 때에 여기에는 사회적인 요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이 본문과 관련해서 지적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30-40년 전에는 먹고사는 문제가 너무 힘겨웠습니다. 그리고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는 노동에 헌신해야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그렇게 시급했습니다. 삶이 참으로 고달팠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쉽게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민소득 4만 달러가 넘는 오늘날은 먹고 입는 것이 국민소득 3천-4천 달러 되던 그 시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풍요로운 시대이며 사람들도 부요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풍족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을 안 합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누리지 못했던 많은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정신적인 쾌락을 즐기고 있습니다. 이런 속에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200페이지 책을 읽는 시간도 사람들이 참을 수 없어 하고 유튜브도 3분만 넘으면 사람들이 안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언제 응답해줄지도 모르는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의지하며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시인의 첫 번째 기도가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자기 혼자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시작이 됩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분에 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통계자료는 정확히 없지만 지금 기준으로 36분에 한 명씩 우리나라에서 자살합니다. 그러나 40년 전에는 결코 그 정도의 숫자는 아니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문명의 이기를 누리면서 살지만 그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다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것을 정직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방해하는 가장 큰 방해물 중 하나가 미디어입니다. 스마트폰이나 게임에 몰입하는 사람치고 아주 건강하고 열정적인 경건을 가지고 있는 경우를 거의 못 봤습니다. 그것을 멀리 해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서 게임 중독 수준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정직하게 정신과 찾아가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젊은 날에 나머지 인생을 그렇게 폐인처럼 살 수는 없습니다. 아주 복잡한 과업을 수행하다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자기가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정도로, 일주일에 한두 번, 한두 시간정도로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인상이 너무나 오래동안 우리를 지배하는 것도 무시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3D 같은 매체 속으로 들어가면 그 기억이 더 오랫동안 우리의 마음속에 남습니다. 저는 VR을 쓰고 딱 한번 체험을 해보았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의미와 보람을 찾지 못하던 자들은 (가상현실이 주는 쾌락)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쉬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약물 중독이나 성적 중독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들입니다. 그런 식의 중독에 빠지게 되면 우리는 결코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유’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무엇이든지 내가 마음먹었을 때 나의 결정에 의해서 실행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칸트는 ‘자유’보다 더 큰 개념으로 ‘자율’을 말했습니다. 그 자율은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개인의 ‘자유’입니다. 언제든지 내가 마음먹을 때에 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율을 구성합니다. 자율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통제’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의무와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율의 개념은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의무에 자기 자신이 통제를 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어떤 인간도 자율적인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어떤 쾌락을 느낀다고 할 때 정상범위 안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쾌락은 도덕적으로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을 어느 순간 부셔버리고 그 경계를 넘나들게 되면 쾌락을 느끼는 대역이 엄청나게 넓어집니다. 그렇게 될 때 어떤 영역에 묶여서 일정 범위 밖의 쾌락을 느끼지 못하는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자신이 엄청나게 자유롭다고 느낍니다. 이런 식으로 도덕률을 포기한 쾌락은 한 가지 특성이 있는데, 바로 ‘중독’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중독 속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자유롭게 되기 위해 그 경계를 부셔버린 자의 그 다음 상태는 결국 정상범위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망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무엇인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자유라면, 무엇에 의해서 통제를 받고 의무를 느끼는 그것이 합쳐져서 자율이 됩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도 타율적인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자율적인 인간이라고 하면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권력 구조 안에서 그런 것이고 한 인간으로서의 자율은 그런 식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의 외모가 아주 뛰어나다면 자기가 원하는 여성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런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아닐 것이지만요. 어쨌든 그는 자기가 자유롭게 선택할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후보자들이 나올 텐데, 그 중에 독이 든 사과와 같은 여자를 선택했다면 자유 때문에 불행해질 것입니다. 오히려 원하는 여성을 못 만나서 간신히 중매해서 결혼이 성사된 남자가 더 행복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율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유가 있어야 하고 자신이 스스로 통제를 할 수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미디어, 게임 등에 몰입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행위입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자유를 잃어버린 인간이 될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중독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칸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믿음으로써 인간스스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노동률’이라고 하는 것의 통제를 받으면서 그 의무를 이행함으로써 자율적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르치기를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가장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고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중요한 사상입니다. 기독교 사상에 눈을 뜨면서 가슴이 시리도록 감동을 받았던 장면은 기독교야말로 최고의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같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나는 나다워지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해야합니다. 다른 사람과 자기 인생을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할 수 있는 경우는 한 가지입니다. 그 사람을 본받음으로써 내가 참된 나로 돌아갈 수 있을 때는 그 사람을 본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외모, 지위, 탁월한 지능, 지식 습득의 능력, 운동의 재능 등을 부러워하면서 그것이 자기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비교하는 것은 ‘우리’를 ‘우리’ 그대로 만드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저는 태어나 많은 말을 했지만 제가 한 말 가운데 가장 자랑스러운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외국 학자들이 모여 있을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칼빈을 너무 좋아하지만 죽은 다음에 칼빈주의자 김남준으로 불리길 원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거스틴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천국에 가서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 둘 있는데 어거스틴과 우리 할머니 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죽은 다음에 김남준 목사는 어거스틴주의자였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존 오웬과 에드워즈에 대해 그렇게 열광했어도 저는 오웬주의자나 에드워드주의자로 결코 불리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수치스럽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죽은 다음에 김남준은 김남준이었다고 불리길 원합니다. 그 위인들은 내가 감히 어깨를 겨룰 수 없는 분들이지만 하나님이 그런 사람들을 나에게 선물로 주신 것은 나를 참으로 나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지 나를 버리고 그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은 아니기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그럴 리도 없겠지만 저 같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습니다. 제가 혼신의 힘을 다해 설교하는 것은 여러분 각자가 여러분 각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결국 성화라고 하는 것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본래 나를 창조하셨을 때 나답지 않은 것을 끊임없이 덜어내시는 과정, 어떤 의미에서 깎아 내시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화가 완성되었을 때 여러분은 가장 여러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 인류의 하나밖에 없는 희귀종의 마지막 개체입니다. 여러분들이 죽고 나면 이전에도 여러분은 없었고 이후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장엄하지 않습니까? 그 무구한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공간적으로 펼쳐진 수십억의 인구 가운데서 나 같은 사람은 앞으로도 없었고 동시대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습니다. 한번 반짝하고 사라지고 끝납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참된 의미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때가 되면 조짐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과의 커다란 만남이 있기 전에는 영혼의 놀라운 변화가 있기 전에는 조짐이 나타납니다.
(찬양)주 없이 살 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
이 깊은 고독 속에 내 인생 끝나도
그런 절실한 마음이 듭니다. 도저히 나 혼자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자신의 정신을 분산시키면서 쾌락에 빠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고 나 혼자 도저히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를 위해 기본적으로 해야 할 것은 여러분들의 삶을 정리해야합니다. 주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친구가 집에 온다고 해도 방이 더러우면 초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내가 여러분의 집에 심방을 간다고 하면 청소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여러분들이 먼저 마음을 하나님 앞에 오롯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빨리 삶을 정돈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적합한 상태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보시면 기도가 달라집니다. 기도해도 한없이 분산되었던 마음이 모아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할 때가 되면 점점 더 나 혼자는 도저히 살 수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죄에 가까워지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절대로 의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혼자 살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독립의 추함’입니다. 이에 비해서 은혜는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의존미’(依存美)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정말 아름답습니다.
요즘 시대가 많이 달라졌는지 모르나 제가 젊었을 때는 남자들이 자기를 의존하는 여성을 좋아했습니다. 지금은 안 그런 듯 하지만 말입니다. 여성이 자신을 의존하는 데에서 남자들은 깊은 매력을 느꼈습니다. 기본적으로 어떤 여성에게 마음이 끌리는데 그녀가 나를 의존하면 아름다움이 증가됩니다. 찬송가에서 ‘이 깊은 고독 속에’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주 공간 속에 나라고 하는 존재가 던져졌는데 어디서부터 오고 어디로 가는지 우주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외롭습니다. 이러한 고독 속에 내 인생은 끝납니다. ‘내 주는 나의 생명 또 나의 힘이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존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의 분산된 마음입니다. 산란한 정신, 분산된 생각으로 죄는 지을 수 있어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을 정리해야 합니다. 미디어를 자제하고 생각하게 하는 책을 읽고 기도를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갈망도 나옵니다.
B. 복을 주심
두 번째는 ‘복을 주시고’라고 했습니다. ‘복을 주시고’라는 말은 ‘복’이라는 명사와 ‘주다’라는 동사가 합쳐진 것이 아니라 그 단어 자체가 ‘복은 주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이 동사가 히브리 성경에는 ‘예바레케누’(yebarekenu)라고 되어 있는데 동사원형이 ‘바라크’(barak)이고 명사가 ‘베라카’(beraka)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구약 성경에서 나오는 복의 개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신약 성경에도 계승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복’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가장 많이 쓰이는 대표적인 단어가 두 개입니다. 그것은 ‘베라카’라는 단어와 ‘아쉐르’(asher)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의 의미가 차이가 있습니다. ‘베라카’라는 복은 우선 아주 물질적인 복부터 시작해서 정신적인 행복, 그리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서 영혼과 마음에서 느끼는 행복까지 모두 포괄하는 광범위한 개념의 복입니다. 그래서 이 복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만 받을 수 있는 복이 아니라 불신자들이 받는 복까지 모두 포함합니다. 대표적인 용례로 창세기 39장에 ‘보디발의 온 집이 요셉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았다’고 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을 따라 도덕적 성품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모든 복입니다. 그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그 사물들이 이리저리 물결처럼 흐르면서 어떤 사람은 많은 것을 누리고 어떤 사람은 적게 누립니다. 그런데 이 복이 정신과 영혼의 복 뿐만 아니라 물질의 복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해서 정신과 마음의 행복과는 완전히 끊어진 그냥 돈만 많다든지 부자라든지 하는 복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 단어는 포괄적 개념을 가진 복입니다.
이에 비해 ‘아쉐르’는 반드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만이 누리는 복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신자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주어지지 않는 복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영혼, 그것이 하나님과 연관된 가운데 누리는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아주 초월적이며 영적이며 비밀스러운 복을 의미합니다.
(찬양)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부자가 된 기쁨이라면, 권력자가 된 기쁨이라면, 성형수술에 성공한 보람을 느끼는 복이라면 누구든 다 볼 수 있는 복입니다. 또 사업에 성공한 보람이라면 이것 역시 모두 다 볼 수 있는 복입니다. 그런 복은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쉐르의 복은 모든 사람이 아는 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복입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복입니다.
(찬양)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제가 은혜를 처음 경험해서 사람들에게 간증을 하니 나이가 많으신 집사님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기쁘고 놀라운지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어리 디 어린 나 같은 청년이 그렇게 주님을 만나고 환희의 삶을 사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자기도 그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그 기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복은 (하나님을 만나지 않은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알 수 없는 복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쉐르’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복’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복’ 또는 ‘행복’이라고도 말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에 대한 개념을 설명할 때에) ‘행복’이라는 단어가 적합한 단어는 아닌 듯 보입니다. 그냥 ‘복’이라는 단어가 더 좋습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그 앞에 ‘행’(幸)자 붙어있는데 그 의미가 ‘운이 좋다’(lucky)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참된 복은 ‘아주 우연히’, 혹은 ‘운이 좋아서’라고 설명해서는 안 되는 복입니다. 그러면 기본적으로 복에 대한 정의부터 내립시다. 복 혹은 행복은 무엇일까요? 일반적 의미에서 정의를 하자면 “인간이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있는 상태”로서 사전적 정의입니다. 그러나 기쁨이나 만족 같은 것은 동물인 개도 느끼지 않습니까? 저희 집에 있는 강아지도 보면 기분이 좋은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을 불렀는데 가만히 있으면 기분이 안 좋고, 기분이 좋으면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흔듭니다. 그래서 이를 좀 더 철학적, 혹은 신학적으로 정의를 내리려 한다면 단순히 “기쁨과 만족을 누리는 상태”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누리는 주체의 자격이 기본적으로 영혼을 가진 존재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개는 행복을 누릴 수 없고 그냥 만족한 상태에 있는 것일 뿐입니다. 주인이 주는 고기를 먹든, 구멍가게에서 과자를 훔쳐 먹든 배부르고 기분 좋은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먹은 후에도 주인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나 죄책감 따위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럴 수 없습니다. 물질을 써도 정당하게 내 소유를 가지고 소비할 때에 기쁨과 만족이 있지 훔친 돈을 쓸 때에는 언제든지 들통 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에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에 대한 신학적 정의를 이렇습니다. “복이란 창조 목적 안에서 인간이 만족과 기쁨, 쉼을 누리는 상태입니다.” ‘창조 목적’은 객관적인 것이고, ‘만족, 기쁨, 쉼’은 주관적인 것입니다. 사실 진정으로 쉬는 것은 그냥 대자로 누워서 등뼈가 아플 때까지 누워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은 해야 하는 것을 하는 것이고, 휴식은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하는 것이 휴식입니다. 여하튼 만족, 기쁨, 쉼 모두 주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창조 목적은 객관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법 안에 있어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찾습니다.
법조계 저명인사이자 당시 사법연수원장을 지내시던 분과 식사를 같이 하면서 법에 관한 중요한 한 화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인간이 법을 만드는 근거가 무엇인가?’ ‘이 법을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랬더니 법조인이 저에게 이야기해주신 것이 두 가지였습니다. ‘자연법 이론’과 ‘실존법 이론’이 있다고 합니다. 자연법 이론은 인간에게 원래 자연이 부여한 법에 대한 인식이 있어서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법의 기원이라는 것으로 보는 것이고, 실존법 이론은 공동체가 규약을 해서 맺으면 그것이 법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근대국가 이후에 폭력주의와 독재, 비참한 군국주의 같은 것은 법을 초월해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히틀러가 독재를 시작할 때 국민 지지율이 93.5%였습니다. 바보 같은 국민들이 판단력이 없으니 엄청난 지지 속에서 그를 밀어주어 괴상한 독재가 탄생했는데 다 법을 가지고 탄생했습니다. 사실 근대의 폭력적 전제국가들(파시스트, 나치 등)이 모두 법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자연법만으로는 법의 근거를 규정할 수 없다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신학자인 저의 견해는 법이라는 것은 그 둘 사이에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봅니다. 끊임없이 변하는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대해서 법이 사람들을 보호하고 권익을 증진할 수 있어야 하는 동시에 그보다 위에 있는 가치, 곧 그 모든 법들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는데 이바지해야 하는 더 큰 전제의 규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모든 인간은 행복을 원합니다. 그 누구가 나는 결코 만족을 누리기 싫다, 기쁘기를 원하지 않고 쉼을 원하지 않는다, 한없이 고단한 인생을 원한다고 말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문제는 인간 자신은 복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문제를 여러분들이 아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행복할 수 없는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인간은 불행해집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불행의 원인은 행복 추구의 결과입니다.
저는 사회에 관심이 있어서 언젠가 잡지에서 이런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여대생이 어떻게 화류계 여성이 되어가는지를 특별 취재해 보도한 것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런 일을 위해 태어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그 중에 제가 읽은 것 하나를 간단히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화류계의 여성을 뽑는 사람들이 아주 즐겨하는 일이 길거리 캐스팅입니다. 절대로 광고를 내서 사람을 모집하지 않습니다. 그 영역에서 ‘언니’급의 젊은 사람을 일단 여대나 대학에 보냅니다. 그리고 여학생들을 관찰하게 합니다. 아주 빼어난 여학생들에게 접근을 합니다. 그리고 말을 트면서 관계를 갖습니다. 좋은 아르바이트가 있다고 소개하고 아무나 채용하지 않는 좋은 것이니 나중에 연락하라고 한답니다. 절대 그런 곳에서 일할 사람이 아닌 기품이 있는 여자가 명함을 주고 간답니다. 어느 날 돈이 궁해지면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한답니다. 일단 한번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하는데 요구 조건은 간단합니다. 술을 마시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시중드는 것도 아니고 높은 사람들이 와서 술을 먹는 자리에 그림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두 시간 반쯤 앉아있으면 150만 원쯤을 준답니다. 이 여학생에겐 이제 경제 단위가 달라집니다. 그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본인도 의식하지 못할 상태에서 그 업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은 아무 일도 없습니다. 이 주일에 한 번씩 가만히 앉아있으면 한 달에 세금 없이 300만원의 수입이 생깁니다. 편의점에서 열심히 일해 봐야 한 시간에 만 원 받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전화가 와서 직원이 몸이 아파 결근했는데 들어와 달라고 요청 받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천천히 빠지게 합니다. 일단 들어간 다음에는 나오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디 가서 한 달에 수 천만 원을 벌 수 있겠습니까? 많이 버는 사람은 한 달에 3천만 원도 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빨려 들어갑니다.
이 예화를 들기 전에 무엇을 이야기했습니까? 모든 인간의 불행은 행복해지고자 하는 열망의 결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꿈 꾼 적도 없다고요. 당연히 꿈꾸면 안 됩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늪 속으로 들어가서만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행복하지 않게 한다는 것을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행복해지는 것은 과녁을 향해 쏘는 화살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행복이라는 그 과녁 중앙에 활이 맞지 않으면 다 불행합니다. 앞서 말한 그 여학생이 노후에 섬으로 인신매매되어서 팔려가는 것도 불행한 일이고, 오늘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을 못 만나서 텅 빈 마음으로 돌아가는 사람도 불행하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말입니다. 후자는 언제든지 극복할 수 있는 불행이고, 전자는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불행입니다. 그러나 결국 행복이라는 것은 과녁을 향해 쏘는 화살처럼 쭉 잡아 당겨 쏘았을 때, 원에 딱 맞으면 행복하지만 빗나가면 모두 행복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 없는 행복을 꿈꿉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모순된 일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는 (인간이 행복을 아는 것은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복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경험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신생아 시기를 지나 아이가 눈을 뜹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경험한 세계라고 하는 것은 엄마 얼굴도 정확히 확인하지 못한 세계입니다. 처음에는 희미하게 보입니다. 그런데도 이 아이가 충분히 먹고 만족을 누리고 편안한 상태에서는 기쁨을 표출합니다. 불과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서도 그것을 느낍니다. 어디서 그런 것을 학습했겠습니까? 이것은 선천적인 것입니다. ‘나는 행복하다’고 할 때 그 행복은 학습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닙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행복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느 순간 행복하다고 느끼게 됩니다. 모순 아닙니까? (행복을 느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다고 느끼게 되는 걸까요?)
저는 초등학교 1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하루도 행복한 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가고 대학원 들어가고 혼자 공부하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런 행복을 학교에서 학습했겠습니까? 그러면 학습한 것을 능가하는 더 탁월한 행복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점에 있어서 우리들이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행복은 학습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 속에 유전자처럼 주신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의 행복을 모든 인간의 영혼 안에 유전자처럼 심어주신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행복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 때에 비로소 느낄 수 있으며 그 행복이 자신의 현실을 주관하여 바르게 해석해 낼 때에 이루어지게 된다는 점입니다. 행복은 결코 학습을 통해 오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산 사람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해석입니다. 많이 학습된 사람은 행복을 느낄 가능성이 높고, 학습이 별로 안 된 사람은 행복을 느낄 가능성이 적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그 논리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불행함 속에서 계속 우울하게 살던 사람은 그런 식으로 자기 인생을 해석하는 경향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절대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복은 결코 학습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유사한 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서 이것이 진리라고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학습이 아닙니다. 학습이라면 그와 똑같은 것이 언젠가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그리스도인이 되었지 왜 지금 그리스도인이 되었겠습니까? 옛날 것이 학습된 것이라면 뭐가 그리 놀랍겠습니까? 하나님이 행복의 원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회할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으면 그것은 후회할 수 있는 행복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후회하지 않을 행복을 찾는다면, 하나님을 떠나서는 인간은 행복할 수 없음을 명심하십시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을 때 인간은 ‘죄’라는 것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참된 복의 원천을 잃어버립니다.
이틀 전의 일이었습니다. 아들 내외가 집에 잠깐 와 있었는데, 집에 있는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커피포트에서 물을 끓이려고 하니 그것 역시 안 되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집안 전체에 전원이 나갔던 것입니다. 전기를 올리고 나니까 소리가 나면서 모든 전기제품에 다시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전기 공급 없이 가전을 사용하려했던 어리석은 자처럼 우리는)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신데도 하나님 없는 행복한 삶을 꿈꾸었던 것입니다. 물론 잠시 행복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을 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이익을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슨 이익을 보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 우리로 인한 어떤 이익이 필요하다면 그분이 어찌 하나님이실 수 있겠습니까? 칸트도 그것을 논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지 아주 길게 논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기적이나 ‘이기’(利己)라는 용어가 인간에게 적용될 때와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다른 의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다른 의미를 가진 ‘이기’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잘 믿으면 하나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최대의 수혜자가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여러분 주위에 있는 사람이 수혜자가 됩니다. 하나님께 복 받은 존재가 되고 그 복으로 하나님 앞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인생이 의미가 있는 인생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의 인생을 바꾼 만남이 있습니까? 아니면 굉장히 힘들었던 시기인데 그 사람을 만나 삶의 용기를 얻고 자신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된 경우가 있습니까? 신앙적, 혹은 영적으로 해석을 하면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런 일-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삶의 소망과 용기를 가지게 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서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던 것니다. ‘말미암아’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베카’입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네 안에서”(In You)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네 안에서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내가 복을 가지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서 누리게 하는 개념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복 받은 존재가 되면 아브라함과 교류하는 모든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마치 옹달샘에서 솟아나온 샘물 때문에 동산의 모든 식물들이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값진 열매를 맺게 되듯이 나로 인해 그렇게 된다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개념입니다.
사람에게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많이 실망한다는 말은 많이 기대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 인생에 걸려 넘어지는 이유가 사람 때문이고 환경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자기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진정한 만족과 기쁨, 쉼이 모자란다는 말입니다. 무슨 상처를 그렇게 많이 받습니까? ‘상처’라는 말은 쓸 수 있지만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함부로 남용하면 자신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는 기둥처럼 서있어서 차가 지나가면서 스크래치를 내고, 택시가 들이받아서 깨지고 하는 식의 존재로 자신을 묘사하지 마십시오. 나는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주체적인 인간인데 감히 누가 나에게 상처를 내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처라기보다 내가 극복하고 살아가야할 현실입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그것이 운명처럼 내 안에 있어서 나를 장악하게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매여 사는 것은 자기 결정력을 잃어버린 행동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극복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너무나 불행한 일을, 그것도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 때문에 당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에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다든지, 이혼으로 고아원에 버려졌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에도 상처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 됩니다. 그때는 어려서 어쩔 수 없이 충격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철이 든 후에는 그것을 극복하면서 주체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 진정한 주체로 살게 하는 힘이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하나님을 제외하고 행복을 찾는 순간 여러분은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만큼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메아리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이익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여러분들이 그 사랑 안에서 삽니다. 사람에게 무슨 기대를 많이 거십니까? 그냥 그 사람 생긴 대로 흘러가게 놔두십시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그 사람을 바꿀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찾아가서 삿대질을 하며 싸워서 바꿔놓을 수 있는 위치로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냥 강물처럼 흘러가세 두십시오. 하나님의 법도에서 멀어진 채 살아가는 사람보다 여러분이 훨씬 더 만족스럽고 기쁘고 쉼이 있고 평화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것이 존재의 아우라입니다. 아우라는 이상한 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주체성을 가지고 있고 거기에서 오는 고상함이 인간 존재의 아우라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그래서 바람직한 인간의 삶은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너무 가득해서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는 살 수 없지만 누구의 사랑을 받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자학하는 감정에 빠져들지 마십시오. 어려서부터 불행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었고 너무나 끔찍한 사건들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형성된 나의 상처와 약점들에 의해서 오늘날 내가 이런 존재 밖에 안 되었다고 누가 말한다면, 그 자리에서 강력하게 부인하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그것을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렇게 강력하게 이야기하면 여러분은 절대 양보하지 말고 더 강력하게 이야기해 주십시오. 소리를 질러서라도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내가 어찌할 수 없이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입니다. 그것에 대한 기억이 우리에게 남아있어서 힘들 수는 있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얼마나 겸손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는 자기도 모를 것입니다. 그런 사건들을 통해 적어도 인생의 허무함을 봤을 것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누구도 이 끝없는 우주 공간에서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 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에 대한 갈망이 우러나옵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찾고자 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시며,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안 해주시겠습니까? 안 해주신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운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너무 사랑하면 소원이 오직 하나 밖에 없습니다. 아무 것도 원하는 것이 없어지고 그냥 같이 있는 것을 원할 뿐입니다. 떨어져 있으면서 알프스를 보기보다 함께 있으면서 뒷동산을 보는 것이 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을 열망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립니다. 어차피 다 지나갑니다.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하고 못 하는 아이들이 확연히 갈리고, 싸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들이 뚜렷이 갈립니다. 그리고 그림 같이 예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가 갈립니다. 집안이 부자인 아이와 가난한 사람은 합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십여 년 세월이 흐르고 보면 일부는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삼십년 지나서 저처럼 할아버지가 되면 그 중에 무엇도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 같이 예쁘고 멋있었던 사람도 비슷해지기 때문입니다. 별 것 아닙니다. 다 잠시 지나가는 것뿐입니다.
(찬양)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 중심에 있으니
유혹이 흔들어도 무너지질 않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두려움 사라지네
주님이 항상 나를 지켜주시니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관계를 맺으면서 아무도 할 수 없는 사랑 속에서 사십시오. 모자라는 삶의 상황도, 죄인들도, 심지어 자신에게 나쁜 일을 행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용납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젊어서 한 때는 이성에 목숨을 걸고, 세상의 지위에 목숨을 걸고, 더 나이 들어서는 돈과 건강에 목숨을 겁니다. 그러나 결국은 이 깊은 고독이 흘러가면서 사라져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의 인생에 복입니다. 행복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잘 믿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면 하나님이 행복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행복합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C. 얼굴을 비추심
세 번째는 ‘얼굴을 비추심’입니다. 이것은 ‘아쉐르’의 복입니다. 영적인 복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라고 되어 있지만, ‘얼굴빛’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번역을 하면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빛 비추게 하소서’라는 말입니다. 즉 ‘그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게 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모든 복 중에 최고의 복인 ‘영적인 복’(spiritual blessing)입니다.
복은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 섭리의 복이고, 또 하나는 영적인 복입니다. 하나님의 일반 섭리의 복은 하나님이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어떤 사람에게 행복감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비트코인을 샀습니다. 맨 처음의 비트코인은 피자 한 판 값도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1,600만 원까지 올라갔습니다. 비트코인이 뜨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면 이것은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박 나는 부자가 되고도 불행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일반적인 복입니다. 태어났는데 두발 벗고 뛰어도 안 되는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학습을 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반 섭리의 복입니다. 태어날 때 그렇게 태어난 것입니다. 저는 아무 재능이 없다고 열등감에 시달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청소년기에 파바로티의 음악을 듣고 그와 같은 재능이 없음에 절망했습니다. 너무 뛰어난 사람과 나 자신을 비교했습니다. 그런 것들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위대한 사람들을 만나게 해주실 때 원하시는 태도는 그것을 보고 열등감을 느끼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게 자극을 받으면서 내가 내 안에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내 자신을 반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음악 교수를 만나서 오페라 투란토트의 유명한 아리아인 ‘네순 도르마’(Nessun Dorma)를 완창해 보는 것이 꿈이라고 했더니 그 분이 황당해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너무 비관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성대의 길이가 얼마만큼 되느냐에 의해서 나오는데 연습을 하면 많이 올라갑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더 연습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불공평한 것이 아니라 일반 섭리의 복일뿐입니다. 일반섭리의 복은 인간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합니다.
우리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복은 바로 영적인 복입니다. 이 복은 하나님이 사물의 질서를 이용해서 주시는 복이 아니라 직접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셔서 변화시키는 복입니다. 죄를 사랑하던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목적 없이 살던 사람을 목적 있게 만들고, 보람을 못 느끼던 사람을 보람을 느끼게 만들고, 삶에 대해 열정이 없던 사람을 열정이 있게 만드는 변화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받아야할 복입니다. 시인이 제일 마지막으로 구하고 있는 것은 전체 구절에서 가장 집중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은혜를 베푸사’는 광범위합니다. ‘복을 주시고’에서 좀 더 집중됩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빛 비추어 주시옵소서’는 가장 핵심적입니다. 마치 원뿔을 뒤집어 놓은 구조입니다. 햇빛이 내려와 모이는 듯한 구조입니다. 그래서 은혜에는 비전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 계획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켜서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안으로 돌아와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수없이 보았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전부 다 목회자가 한 것이 아니라 인생의 깊은 수렁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그에게 하나님이 누군가를 붙여주신 것입니다. 절망적인 삶을 살고 있던 그 사람에게 한 지체가 헌신해서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인 자기를 구하셨는지, 우물가의 여인같이 헛되고 헛된 삶을 살던 자신을 어떻게 바꾸어놓으셨는지를 자연스럽게 교제하면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인생에 눈을 뜨고 그 행복 속으로 들어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영적 사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인생이 완전히 바뀝니다. (앞서 믿은 많은 지체들처럼 그 역시)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복을 누리며 살게 되고, 다른 사람들을 하나씩 변화시키며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쁨과 만족을 누리며 고난과 시련을 이기고, 누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투덜대거나 한 맺힌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주체성 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하나님을 깊이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비전이 있는 복음(2019.07.28_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 1)
말씀을 맺겠습니다. 시인이 드리는 첫 번째 간구인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기도는 혼자 살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느끼는 것입니다. 두 번째 간구는 모든 행복은 하나님과 관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명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는 행복을 꿈꾸지 마십시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이제껏 보지 못했던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실되게 깊게 사랑해본 사람과 그렇게 못해본 사람은 어른과 어린 아이의 차이입니다. 하물며 완전하고 흠이 없으신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 속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어떻게 인생이 바뀌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깊이 만나십시오. 젊음은 힘겹고 고달플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금방 지나갑니다. 그 대신 젊어서 겪는 고통과 괴로움과는 다른 종류의 시련과 고통이 중년에 오고, 노년에는 전혀 얼굴이 다른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됩니다. 인생의 어느 시기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관계는 손 놓아 버리고 환경이 변하여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바보 같은 운명주의자입니다.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 하나님의 얼굴의 비춤을 받아서 하나님 사랑의 진수 속으로 들어가게 될 때 모든 것들은 견딜 만 합니다. 오히려 놀라운 것은 때로는 가장 고통스러울지도 모르는 상황들이 우리 인생에 놀라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이번에 교회에서 약 천 명 가까운 성도들이 <교회오빠>를 관람했습니다. 그 영화를 아직 못 봤으면 꼭 보시기 바랍니다. (말기암에 걸린) 그 사람이 행복한 무슨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생생한 기쁨을 느끼기 위해서 진통제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데에서 오는 진정한 기쁨은 모든 것들을 이기게 만들어줍니다. 불이 약할 때는 무엇을 집어넣으면 꺼질 수 있지만, 워낙 강렬하게 타오르면 모든 것을 태웁니다. 플라스틱, 구리 등을 다 태우면서 오히려 가연제가 들어갈수록 형형색색을 내면서 하늘로 치솟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기치 못할 일은 없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난들 무엇을 그리 걱정하고 애달파 합니까?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번 수련회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는 형제자매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비전이 있는 복음 (2019.07.29._청년부여름수련회 저녁 2)
2. 확장되는 기도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시 67;2-3)
녹취자: 이 솔
어제 배운 것을 복습하고 나아가겠습니다. 어려운 설교자의 사상을 여러분들에게 전한 것이 아니라 본문 말씀의 순서대로 공동체를 위하고 시인 자신을 위한 탄원 3가지를 전했습니다. 첫 번째는 은혜를 베풀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이 값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큰 호의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주체성을 갖고 살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데, 주체성을 갖고 산다는 것은 자율적 존재로서 사는 것이라 흔히들 말하지만 세상은 멋대로 사는 것을 자율이라고 부르기에 그렇게 살고 나면 마지막에 더 큰 타율에 속박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에 그것은 진정으로 자유로운 길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자율은 먼저 개인적인 자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 자유는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바를 무엇에 구속받지 않고 실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자율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자기를 초월해 있는 어떤 법이 규정한 의무에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 둘이 합쳐져서, 즉 자유와 책임이 혹은 자유와 의무가 합쳐짐으로써 자율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멀어지면 자유로운 것 같으나 결국은 타율적인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때 우리는 비로써 자율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간구였습니다.
두 번째는 ‘복을 주시고’였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은 인간이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상태인데 성경으로 본다면 적합하지 않는 정의입니다. 인간이 무조건 만족과 기쁨을 누리면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한잔 술에 취해서 온 세상이 자기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몇 시간 동안은 기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우리는 행복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마약에 취한 사람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모두 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행복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을 기준하는 목표와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은 영혼을 가진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 안에서 만족과 기쁨과 쉼을 누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모두 행복하려고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행복해지지 않고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행복해 지려고 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믿으면 최대의 수혜자는 하나님도 아니고, 교회의 목사도 아닌 자신입니다. 원래에 인간이 누리는 모든 행복의 근원은 모든 피조물이 있기 전에도 있었던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가졌던 완전한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그 상태를 인간에게 투영하셔서 인간이 그런 만족과 기쁨과 쉼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 없이 하나님 밖에서 행복해지려고 하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런 열망이 크면 클수록 인간은 역설적으로 그와 비례하게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행복을 자의적으로 설정하고 살면 절대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눈을 뜨면 괴롭고, 눈을 감으면 허무하고, 젊으면 고통스럽고, 늙으면 외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돈에 의해서, 세상의 지위에 의해서, 외모에 의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행복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면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세 번째는 ‘얼굴을 비추시는 것’입니다. 행복은 두 가지가 있는데, 물질로부터 정신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섭리적인 복과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백성에게만 주시는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그 복을 구체화 시킨 것이 ‘얼굴을 비추시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깊이 만남으로써 그는 행복의 진수에 도달하게 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남으로써 비로소 그의 영혼에 빛이 들어와서 우리가 버려야 할 것과 취하여야 할 것, 진정으로 사랑해야 할 것들과 사랑할 가치가 없는 것들을 분별력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어제 설교한 내용의 핵심입니다.
I. 본문 해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말씀인 2절은 이런 그림을 생각하면 될까요? 여기에 커다란 유리 사발이 있습니다. 물을 꽐꽐 붓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물이 찰 때까지 계속 수위가 올라올 것입니다. 완전히 꽉 찼습니다. 찰랑찰랑 하는 것에 물을 더 부으면 물이 흘러넘칩니다. 1절이 그 물을 채우는 것이라면 2절은 그것이 흘러넘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2절에서 ‘주의 도를 땅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고 했습니다.
II. 확장되는 기도
성경의 대표적인 단어가 ‘나라’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와 함께 항상 따라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민족’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둘의 구분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나라가 곧 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팩트가 아닙니다. 한국은 단일 민족이 아닙니다. 수많은 나라의 지배와 교류를 겪으면서 수많은 피들이 섞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코 단일 민족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세뇌를 받으면서 이 정신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이해되는 측면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적어도 흑인, 백인, 유색인종 이런 식으로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모양새는 전부다 비슷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나라’와 ‘민족’과 같은 개념이 없었습니다. 나라는 곧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당시로 돌아가 보면 이스라엘은 나라는 곧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애굽생활 이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라’라는 말은 히브리말로 ‘고이’(gôy)라는 말인데 ‘높아지다’라는 뜻을 가진 ‘가파’라는 단어에서 옵니다. 그리고 ‘민족’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나라’라는 개념은 영토와 국민과 주권을 갖고 있는 형식적 개념입니다. ‘민족’은 동일한 문화를 갖고 있는 나라의 구성요소가 되는 개념인데, 동일한 문화와 전통을 갖고 있는 핏줄 공동체의 단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당연히 하나의 민족이라 여겼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그들 역시 다양한 족속들과 섞이면서 자손들의 계보가 내려갑니다. 아무튼 애굽에서의 상황은 이와 달랐습니다. 당시 애굽은 국제적으로 수많은 민족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였습니다. 요셉의 시대를 생각할 때에 두 가지 설이 있는데, 하나는 정통 애굽이 지배한 시대라고 보는 설과 이민족이 들어와서 애굽을 지배하는, 그러니까 애굽이 잠시 외국인에 의해 지배되던 시대라는 설이 있습니다. 이렇게 그 안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섞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2장 34절은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날 때 여러 종류의 족속들이 함께 떠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은 피부색이나 문화가 모두 달랐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기 전에 일어났던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회는 패쇠된 공통체가 아니라 개방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할례와 신앙고백을 통해서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오는 통합적인 사회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선교적인 마인드를 고취시키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런 내용이 있답니다. 미합중국은 많은 민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전 세계에 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나쁘게 말하면 미국 제국주의 발상입니다. 아프리카, 유럽, 인디언, 남미, 아시안인들까지 모여 있으니 이 사람들로 인하여 미국이 그들의 출신인 각 나라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마음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다수가 같은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깨어있는 사람들이 갖고 있던 마음이었습니다.
그렇게 정돈하면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라는 말씀에서 나라와 민족은 떨어진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절이 하나의 상관관계를 이루며 전하고 있으니 형식적인 단일체로서 나라와 그 나라를 구성하는 수많은 민족들의 단위를 향한 선교적인 소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전할 말씀은 확장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시고 얼굴을 비추게 하신 후에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사는 자신 밖으로 확장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확장되는 두 기도가 나오는데, 첫째는 ‘주의 도를 알리소서’이며, 둘째는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입니다.
A. 주의 도(道)를 알리소서
첫 번째로 주의 ‘도’(道)를 알리소서, 라는 기도입니다. ‘도’라는 것은 성경에서 아주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와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시는데 ‘길’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가 ‘호도스’(ὁδός)입니다. 이 ‘길’이라는 말이 곧 ‘도’라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I am the way”라고 나옵니다. ‘도’입니다. 여기 히브리 성경에서는 ‘데레크’(derek)라고 나옵니다. 정확하게 ‘길’이라는 뜻입니다. ‘길’이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말 옛날 성경을 보면 여자들이 생리하는 것을 ‘경도’(經度)라고 합니다. 거기에도 여기 ‘길’이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녹취자 주: 경도는 한자어로 道자가 사용되지 않음, 예시에서 삭제 바람). 모든 길을 의미하는 단어가 ‘데레크’입니다. 인간이 일생을 살아갈 때에 그것을 마치 길을 걷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여 은유적으로 ‘인생길’이라고 묘사하여 그 사람 앞에 펼쳐진 인생을 가리키기도 하고 때로는 그 사람이 걸어온 지난 일생의 길을 돌아볼 때에도 그렇게 표현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성경에 “아무개 왕은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 혹은 “아무개 왕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더라.”라고 표현되는데 전자는 큰 칭찬이고 후자는 큰 책망입니다. (여호와께 순종하며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이었고) 반역하며 살았던 대표적인 인물 사람이 여로보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이 ‘도’는 우리가 행복을 말하는 도처럼 한 개인이 그냥 아무렇게나 살아온 길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인간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기를 원하시는, 또 그렇게 되길 원하시는 그 길을 가리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율적인 인간이 된다면, 진정으로 참 자율을 누리며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된다면, 주님을 깊이 만나서 그의 영광의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면 그가 걸어가고 꿈꾸는 인생의 길은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가게 하시고 싶은 그 길일 것이며, 지금 서있는 그 자리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일 것이고, 과거에 걸어온 길도 그랬을 것입니다. 행여나 그렇지 못했던 길에 서 있었다면 그는 거기서 회개를 할 것이며,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었다면 걸어온 그 길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런 길을 말합니다.
이 ‘길’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거나 성경을 읽을 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의 의미를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용어를 쓰지 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버스라는 말을 알 수 있을까요? 예를 들면 버스도 없고 교통수단도 없는 아프리카에서 돌 던져서 토끼나 잡아먹는 사람이 한국에 왔을 때에 ‘버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요? 바퀴가 여러 개 달렸고, 매우 크고, 쇠로 만들었고, 기름으로 가고, 운전수가 운전하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타는 그런 대중교통 수단이다, 라고 해야 할까요? 버스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내가 버스를 타러 갔는데 버스가 늦게 와서 기다렸더니 잠시 뒤에 버스가 왔는데 버스가 고장이 나서 다른 버스를 타게 됐다.’고 말할 때 그때마다 그 긴말을 다 반복해서 이야기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설교도 쉽게 해야겠지만 듣는 사람들도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아무튼 이 ‘길’이라는 말은 아주 의미심장한 단어입니다. ‘길’ 혹은 ‘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근본적으로 ‘도’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하여 정의해 놓으신 길’입니다. 운명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길을 정해놓으신 것입니다. 97년도 3월에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헬기를 탔습니다. 충무에서 부산까지 가는 민간 헬기였습니다. 조정사와 부조정사와 스튜어디스가 있었는데 승객은 저 혼자였습니다. 비싸지 않았습니다. 당시 5만원이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내비게이션을 봤습니다. 비행기가 뜨니까 가야할 길이 빨간 줄로 충무에서부터 김해공항까지 그려졌습니다. 이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에 따라서 파란 줄이 그려졌습니다. 굉장히 충격이었습니다. 몇 년 뒤 자동차에도 달렸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사용되는 내비게이션인데 군사용이나 항공기에 이미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도’라는 말을 여기에 비유하자면) 빨간 줄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길이고, 파란 줄은 내가 실제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법과 내비게이션이 다른 점은 내비게이션은 운전하다가 안내해준 빨간 줄로 안가고 다른 방향으로 들어서면 ‘다른 경로로 안내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경로를 바꾸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것을 어기고 갔을 때 ‘예전에 있던 도를 포기하고 새로운 도를 너에게 보여 주마’라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도는 변함없이 또렷하게 나있습니다. (그 도에 합치한 모습을) ‘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도덕이라는 말은 중국에서 차용한 말이긴 하지만 기가 막힌 번역입니다. 사람을 보고 ‘참 도덕적이다’라고 할 때에 그저 착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쁜 사람과 손잡고 그들을 위해 착하게 구는 사람을 도덕적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도’라는 객관적인 길이 정해져 있고, 거기에 나의 마음과 정신생활이 합치되는 것을 ‘덕’이라고 해서 ‘도덕’(道德)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도덕적이다’라고 말할 때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은 누구의 뜻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하늘의 뜻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길이 있고, 그 길에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삶이 합치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둘이 싸우다가 정색을 하고 이런 말을 하는데, “이것은 ‘경우’가 아니지.”라는 말입니다. 각기 다른 성격을 가진 사람, 각기 다른 생활의 환경에 자란 사람, 서로 다른 사상 아래 있는 사람 –사회주의자이든, 민주주의자이든, 자유주의자이든, 자본주의자이든, 공산주의자이든, 좌파이든 우파이든- 상관이 없이 모든 사람이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그것이 ‘경우’라는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특정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통하는 법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썼다면 모든 사람이 부인할 수 없는 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당하다 느끼며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어?” 할 때에 그 ‘법’도 같은 뜻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도’입니다. (인류가 믿어야 할 규칙과 살아가야 할 교훈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도는 사람이 마음으로 이해되고 인격으로 나타나고 생활로 고백된 지식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 의미는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참 인간의 도가 무엇인지, 인간으로 하여금 기준을 삼을 수 있는 그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기는 했지만 비디오를 보듯 생생한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전의 것이 오디오였다면 주님이 오신 것은 비디오처럼 생생한 것이었습니다. 죄는 없으시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서 오심으로써 인간의 도가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온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다시 말해서 “내가 곧 도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는 말씀은 “모든 나라에 주의 도와 구원이 전파되게 하소서”라는 뜻이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눈을 뜨게 되는 비전입니다. 인생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그가 가진 소유나 그가 하는 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는 나 사이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사람과 젊은 나이에 아직 직업도 갖지 못한 사람, 높은 지위에 올라서 이미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과 그 밑에서 지배 받고 있는 사람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런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오래 가지 않습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사람이 너무 화려하지만 (그것 역시 영원하지 않습니다). 러시아의 어느 부자의 아들이 결혼식을 했는데 결혼식 비용으로 10조 6천억을 썼다고 합니다. 어떤 결혼식이었을까요? 전 세계 모든 하객에게 1등석 비행기 표를 보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금수저를 물고 결혼을 해도 이혼 할 수 있고 아마 잘 산다고 해도 결국 늙고 죽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아버지에게로부터 금수저를 물려 받았지만 자식에게는 흙수저도 못 물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명백한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생의 의미는 소유나 지위, 그리고 우리가 행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의미는 참된 인생의 길이 무엇인지를 내가 먼저 알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길을 알아 행복하게 사는 것과 나를 만나고 접촉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행복에 전염되는 것입니다. 전염된다는 것이 좀 이상한데 그 행복에 물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들어서 그 사람이 나와 만난 것을 일생일대에 고귀한 인연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나와의 만남을 기뻐하고 좋아하듯이 그 사람으로 인해 또 다른 어떤 사람이 그와의 만남을 기뻐하게 되고, 또 다른 사람도 그렇게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내가 만나는 모든 인류를 행복으로 물들게 하는 것이 인생의 의미입니다.
탐욕을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눈치 챘겠지만 저는 열광적 엘리트주의자가 아닙니다. 저 자신이 엘리트가 아니고 처진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에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일류가 되라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두가 일류가 되면 모두가 삼류입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이 사회의 상층부에 살아도 불행을 감염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사회적으로 볼 때 하층민인 것처럼 살아가도 세상을 행복으로 물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보람과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결혼은 또 어떻습니까? 그거 아십니까? 결혼한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결혼한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낍니다. 서로 조심해야 합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리는 자유를 결혼한 사람에게 너무 많이 말하면 그 사람은 우울증에 걸립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몫을 감사하면서 살아내면 됩니다. 그렇다고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 청년부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졸업해서 바로 결혼하고 장년부로 가서 이 청년부가 없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결혼을 (인간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무언가를 생각하여) 비혼이 마치 자신의 결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그것이 삶의 한 양상일 뿐입니다.
여러분은 유색인종으로 태어난 것을 괴로워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한 번도 괴로워해본 적 없습니다. 그리고 백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물론 없었습니다. 물론 흑인이기를 바라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독재 국가에 태어났다거나 난민이 되었다거나 하면 너무나 괴롭겠지만 그래도 그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았을까요? 그때도 14살 2개월 때 괴로워했겠지요. (그렇게 인생의 문제를 두고 괴로워하는 것은) 양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그 안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신령한 은혜를 경험하고, 그 속에서 넘치는 사랑과 생명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맺어 갑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니까 그를 사랑해야하는 것은 알겠는데 만나기만 하면 내 기를 쏙쏙 빨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와 완전히 결별할 수 없는데 만나자면 겁이 덜컹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서는 자기 이야기만 하는데 기를 쪽쪽 빨아갑니다. 너무 힘이 들어서 미칠 것 같은 사람입니다. 그와의 만남이 하나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여러분에게 어떤 느낌을 줍니까? ‘만나지 말았다면 좋았겠다’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런 사람과 반대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들 가운데) 아직도 돈 많이 벌고 능력 있는 자매에게 장가가서 처가 덕을 좀 보고 싶다는 꿈을 꾸는 사람이 있나요? 그러면 자신의 인생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직도 그런 생각을 놓지 않고 붙들고 있는 것은 정신적 소아병 증세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태껏 살면서 수없이 경험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수없이 증거해 줍니다. 유튜브나 SNS에서 ‘나, 여기 가서 이런 저런 거 먹었다.’라고 사진과 글을 올리는 것, 비싼 미장원이나 새로 지은 호텔에 가서 신나게 즐기고 왔다고 자신의 모든 삶을 글로 올리는 것은 참으로 행복해서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정리하면, 인간으로 태어난 진정한 보람은 “주의 도를 땅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본문에 ‘구원’이라는 단어와 ‘도’라는 단어가 병행법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주의 도를(A) 땅 위에(B), 주의 구원을(A′) 모든 나라에(B′)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알리소서’는 공통으로 들어가는 동사입니다. 간단한 구조입니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예수아’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나옵니다. 구원이라는 말에서 구원자라는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주의 도가 땅위에 알려지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이 펼쳐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인생을 불행하게 산 것이 망해가는 집안에서 흙수저 물고 태어나서 그렇구나. 미모도 뛰어나지 않고, 일류 사립 초등학교, 일류 중고등학교, 일류 과외, 일류 대학을 못 나와서, 그리고 일류 직장에 못 들어가서 불행한 거구나.’ 우스갯소리입니다만 형제자매가 만났습니다. 형제가 너무 재미있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곧 헤어졌습니다. 그리고는 자매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잘 들어갔니?’ ‘어, 오빠도 잘 들어갔어? 그런데 오빠 궁금한 게 있어. 오빠는 왜 그렇게 재미있고 웃기는데도 여자 친구가 아직 없어?’ 형제가 문자를 보냈습니다. ‘얼굴도 웃겨서 ㅠㅠ’ 자신의 인생은 뒤쳐져 있고 별 볼일 없어서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심을 했습니다. ‘돈 많이 벌어야지.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올라야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성형수술을 할 거야.’라고 합니다.
예전에 읽은 책인데, <몰리와 우유통>이라는 (이솝우화)가 있었습니다. 소녀가 우유통을 메고 가면서 생각을 했습니다. 그 우유통은 엄마 몰래 빼돌린 우유통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시장에 가서 달걀로 바꾸고, 달걀을 부화시켜 병아리를 만들고, 그것들을 키워서 내다팔면 부자가 될 것이야. 그때 아름다운 옷을 입고 아름다운 머리를 하고 귀금속을 차고 있으면 수많은 남자가 와서 나에게 구애를 할 거야. 그때 나는 안돼라고 고개를 흔들거야.’ 그러는 사이에 우유통이 떨어졌습니다. 우유는 다 쏟아졌고, 소녀의 꿈도 모두 쏟아졌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렇게 끝이 납니다. 소녀는 후회하였습니다. 이 이야기처럼 생각한대로 모든 것을 얻은 사람도 없거나 희귀하겠지만 그것들을 모두 수중에 넣어도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왜? 인간이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것, 삶의 의미를 성취하는 것은 바로 관계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지 소유 속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촌철의 교훈 하나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러분들에 좋은 지침이 되고 결혼한 분들에게는 반성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혼자 살아서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둘이 만나도 절대 행복하지 않다.” 이것이 저의 인생의 경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지를 받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어떠하든지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복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행복은 소유나 지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그리고 하나님 은혜로 자율적인 인간이 되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행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남으로써, 은혜의 세계에 대해 심오한 깨달음을 얻음으로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여러분이 긴 세월동안 저의 설교를 들으면서 생명 없이 사랑을 말하거나 사랑 없이 생명을 이야기 하는 것을 거의 듣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 둘에 대한 성경적인 진리는 사랑과 생명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를 다른 측면에서 본 것이라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내 안에서 솟아나는 사랑과 생명은 마치 링거를 꽂아 놓는 방식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불신자의 상태에서 받는 생명은 그렇게 설명할 수 있겠으나 신자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생명과 사랑은 알고 보면 우리 속에서 솟아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가발전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운이 충만하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를 지탱해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생명의 기운이 솟아납니다. 그렇게 자기를 기쁨으로 지탱해갈 수 있는 생명이 넘칠 때에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결혼 상대를 고를 때에는 생명이 충만한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표현했을 때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이고 생명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일치를 이룹니다.
한번 보세요. 내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면서 넘치는 그 사랑과 생명으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리고 그가 나를 만났기 때문에 인간의 참된 도가 그에게 전해집니다. 그리고 그 도가 그 사람을 다시 생명과 사랑의 사람으로 살게 하고, 그렇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전해져서 모든 이들이 행복에 물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참된 보람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의 도리를 잘 알려고 하지 않고, 생각도 바꾸지 않으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니야. 그런 것 다 필요 없어. 어차피 돈 많은 것이 최고야! 어차피 짓밟고 올라가는 거야.’ 그런데 얼마나 돈을 벌어야 행복할까요? 그리고 과연 여러분들이 결심하면 몇 명쯤 밟고 위로 올라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승자가 될까요? 아니면 언젠가 또 누군가에게 밟히지 않을까요? 그건 모르는 일입니다. 그럼 확실한 사실 하나는 언제나 확고하게 영원히 승자로 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냉혹한 세계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행복에 수단이 된다고 하면 우리의 미래는 매우 매우 불안합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세상에 태어난 수사자들 중 자손을 번식하는 성 행위를 한번이라도 하는 사자는 여섯 마리 당 한 마리 정도라고 합니다. 나머지는 숫총각으로 죽습니다. 그것이 냉혹한 동물의 세계이고, 어떻게 보면 현재 우리 인간 사회이기도 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론>에도 나옵니다. 한 나라의 황제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이 이야기나 해보겠다고 어거스틴과 그의 친구를 찾아갑니다. 이 사람은 이미 기독교 신앙에 귀의를 하던 중이었습니다. 황제 가까이 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당시 황제는 한국의 대통령을 만 명을 합친 것보다 더 어마어마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황제 가까이 갔다고 해 봅시다. 그 옆에 있는 것은 또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것이 이 세상의 권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 다 집어치우고 ‘나는 자연인이다’ 외치며 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것을 얻으면 얻은 대로 그 인생의 의미를 펼치며 살고, 못 얻어도 못 얻은 대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찾으며 살면 됩니다. 그렇지 못하여 불행하다 여긴다면 참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도 다 떠나고, 찾아오는 친구 하나 없고, 조용히 눈을 감고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때라도 자기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고 행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씻김을 받았고, 놀라운 은혜를 주셔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게 하셨으며, 이 세상에 사라지는 것들에 자신의 행복을 걸지 않고 영원하고 완전하고 불변하신 하나님을 의존하고 있으니 그 얼마나 든든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까? 내 영혼 날마다 주님을 만나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행복하게 사는데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빼앗아가겠다고 달려들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염려가 없습니다. 세상이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행복의 요소가 아닙니다. 큰 행복의 요소가 아닙니다. 죽음마저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의하면 이생은 오히려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없는 많은 속박들에 에워싸인 채 그 행복을 부분적으로 누리며 사는 삶이고, 이 육신의 장막을 모두 벗는 그날은 우리가 완전한 행복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세상을 떠나도 안타까울 정도로 사랑하는 것도 없고,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그것을 잃어버릴 수 없으며, 잃어버려도 그것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 도를 땅위에 그리고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라는 말씀은 시인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깊은 세 가지의 간구 속에 사는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품질만큼 세상에도 그 나라를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갈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 것,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살 때에도 가슴 아프지 않은 것, 사람들이 매우매우 불행하게 되었는데도 그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단순히 내 안에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세 가지 간구가 내 속에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보는 세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연애를 시작할 때 상대방이 딱 보는 순간에 말도 섞기 싫다고 한다면 사실은 썸도 탈수 없습니다.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닙니다.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어서는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그때 환심을 사기 위한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계속 맞장구를 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통된 관심사에 계속 연결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의사항은 지식적인 측면이나 다른 모든 측면에 있어서 상대를 능가하면 안 됩니다. 항상 겸손하게 그 아래 있으면서 많이 아는 것 같지만 그녀가 이야기 하면 정말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것처럼 추임새를 맞추는 것입니다. 그녀의 취미의 진가를 발견해주는 의인을 만나는 것처럼 고마워하면 됩니다. 그러면 이 여자가 다시 연락을 하면서 답장이 옵니다. 답장이 안 오면 여러분은 처음부터 상대가 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의깊게 눈을 뚫어져라 보면서 깔깔거리며 웃어 주고, 의미를 몰라도 몇 가지 말만 하면 됩니다. “대박!” “정말?” “와!” 그 말만 하면 됩니다. 참 쉽습니다.
행복에 대한 생각과 확신은 건축의 기초와 같습니다. 보세요. 어떤 사람은 1m 정도 파고 집을 짓는데 또 다른 사람은 7m를 팝니다. 기초 공사를 하는 건축비로 7배나 많이 들었습니다. 엄청나게 깊게 기초공사를 합니다. “이 동네에서 나만큼 기초공사가 잘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고 자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초 공사를 끝내고 지붕을 올리고 집을 예쁘게 지었는데 이 사람은 계속 기초 공사 자랑만 하고 다닙니다. 기초는 결국은 무엇으로 연결이 됩니까? 위 건물로 연결이 됩니다. 위 건물이 굉장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집을 지었는데 기초가 부실하다면 어떻게 됩니까? 큰 바람이 불거나 홍수가 날 때 예수님의 말씀처럼 모래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질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행복을 누리면 나머지 삶은 다 집어치우고 아무렇게도 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기초를 갖고 왜 그냥 삽니까? 열심히 살아야지요. 게으름의 가르침은 아직 유효합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책이나 유튜브, 인터넷에 무책임하게 올린 것들이 있습니다. ‘인생 그렇게 살 필요 없습니다. 적당히 노세요.’ ‘난 매일 늦게 일어난다.’ ‘나는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다.’ 이런 글, 혹은 책을 낸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해도 되는 사람들입니다. 왜? 책을 낸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런 책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최소한 안 팔릴 책이었다면 그 책의 출판 비용을 몇 천 만원씩 출판사에 갖다 주었을 것입니다. 돈 안주면 출판사에서 책도 안 내줍니다. 판로가 보장이 되지 않았는데 왜 책을 내주겠습니까? 안내줍니다. 어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비교도 되지 않는 우리들이 이런 메시지를 받으면서 공감을 하는 것은 그런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입니다. 자신들과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영원한 차이를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젊은 날에 수녀처럼 수도사처럼 살 필요 없습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일 년에 한번이라도 갈 수 있다면 해외여행도 가고, 그것도 여건이 안 되면 해외여행 갔던 사람들의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미래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쏟아 부으면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왜?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오기 때문입니다. 찻집에 앉아 있는데 굉장히 있어 보이는 사람들, 그렇다고 초상류층은 아닌 듯 보이는 아줌마에서 할머니로 넘어가는 사람들이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너, 정신 차려야 해. 잘못하면 폐지 주워야 해.” 무슨 뜻입니까? (준비를 하지 않으면 노후에 힘들게 살 것이라는 말 아닙니까?) 결국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일할 수 없는 밤이 속히 옵니다.
솔직히 저는 기계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친구 목사들이 저를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싫습니다. 너무 영적이며 신령해져서 싫어진 것이 아니라 복잡한 것이 싫어졌습니다. 여러분도 나이가 들면 똑같이 그렇게 됩니다. 무엇을 갖다 놓고 하는데 자꾸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늙는 것입니다. (회사를 오래 다닌 나이 든 직원의) 월급의 1/3만 주면 팔팔하게 돌아가는 젊음으로 넘치는 사람을 고용할 수 있는데 3배나 많은 월급을 주고 있으니 고용주 입장에서는 그들이 정년퇴직하거나 불우의 상황이 생겨서 사직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언젠가는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날을 대비해야 합니다. 당연히 대비해야 합니다. 30대 들어서서 직장을 잡자마자 바로 연금을 붓기 시작합니다. 최저 임금을 생각해서 월급이 190만원 된다면 십일조 19만원 하고, 그 다음에는 무조건 20∼30만원 정도 연금을 붓기 시작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어떤 경우에도 나는 이것을 계속한다 생각하고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노후에 폐지 줍는 노인이 안 됩니다. 이건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보세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능으로 현실 속에서 무엇인가 노동을 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노동을 해야 합니다. 노동을 통해서 이 세상의 문명과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무언가 티끌만큼이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터 위에 쌓아 올린 삶을 구축해 나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들여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집을 짓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자본이 모자라서 아주 소박하게 지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초는 튼튼해야 합니다. 바람이 분다고 와르르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가진 직업을 잃고 내가 가진 건강을 잃고 심지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떠났다고 해서 내 삶이 뿌리째 흔들리면서 집터 자체가 붕괴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의사가 되느냐, 건설업자가 되느냐, 꽃집 주인이 되느냐, 신발가게 주인이 되느냐, 백화점에 입점을 해서 프랜차이즈 사장이 되느냐, 아니면 오늘 알바를 하며 먹고 사느냐와 같은 외관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이해됩니까? 그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을 탈출해서, 소위 세상과 단절되어 영적인 세계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도 기독교의 영성이 아닙니다. 현실주의적인 영성입니다. 그 영성의 힘은 그러한 영적인 관계에서 오는 생명과 사랑이며, 그것은 현실 사랑이 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도를 배우게 됩니다.
세계적인 거부(巨富) 조지 소로스, 워렌 버핏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워렌 버핏과 한 끼 식사를 하는 티켓이 24억원에 팔렸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돈을 버는데 천재적인 기술을 갖고 있기 때문에 24억을 내고 점심을 먹으면서도 한두 시간 동안에 돈을 버는 놀라운 지혜를 얻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와서 무릎을 꿇고 돈 버는 방법을 좀 가르쳐달라고 할 것이고, 악기를 기가 막히게 잘 다루는 자라면 제자들이 줄을 설 것입니다. 젊음 나이에 권력을 얻었다면 그 권력의 줄을 타기 위해서 사람들이 여러분 앞에 도열해서 설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냐고 과외를 하고 싶은 사람들이 줄을 설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린 것은 이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기술, 예를 들어 돈 버는 기술을 어떤 사람에게 가르쳐 주었고 그것이 적중해서 그 사람은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높은 권력을 잡는 비법을 전수시켜서 다행히 그 사람도 권력을 손에 넣게 된다고 해도 그가 행복하게 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기가 막히게 연애에 성공한 비결을 가르쳐주어서 그 남자가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하고 결혼하는 일에 성공을 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행복해진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어쩌면 안 맺어졌으면 오히려 행복해졌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인생의 행복을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최종적 요소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고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무엇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집쟁이처럼 살아가지도 않습니다. 이런 유연한 사고를 갖고 주체성을 잃지 않고 자기 길을 걸어갑니다.
여러분은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반일운동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회에 관한 많은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보처럼 TV를 틀어놓고 그것에 의존해서 결정하는 사람들은 꽝입니다. 항상 미디어를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봐야 합니다. 자기 주체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래서 많은 지식이 필요합니다. 판단을 유보할 수는 있지만 바보같이 풍각쟁이를 따라가는 사람이 되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은 주체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판단력을 갖고 확고하게 자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가 된 여러분들에게 어떤 사람이 와서 부자가 되는 비결을 배운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수 있지만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자신이 어떻게 행복한지를 가르쳐주어서 그 사람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드림으로써 도저히 불행해질 수 없는 사람이 되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도’입니다. “그 도를 땅위에 알리소서”라고 간구하는데 여기서 ‘땅’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에레츠’로서 땅을 지칭하는 것도 되지만 땅위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 땅은 신도시 후보지처럼 확 펼쳐져 있는 쓰레기가 가득한 황무지 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그 도를 몰랐을 때에는 돈 많이 벌었으나 사는 삶은 짐승의 삶일 수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짐승이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돈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참 사람이 되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존중을 받도록 만들어주기는 합니다. 노천에서 텐트를 치고 사는 것과 1박에 2∼3백 만원 하는 최고급 호텔에서 잠자는 것 사이에는 대우가 다릅니다. 후자의 경우, 아마 모든 직원이 깍듯이 인사하고 존중해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체크아웃하고 나가면 아무도 그렇게 대우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자들이 하나님의 참된 도를 알게 되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내 옆에 있는 이웃이 누구인지, 내 아래 세상 만물들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존재하는지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은 어떤 엑스타시(ecstasy)를 경험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런 속박과 무지, 노예적인 타율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책임에 눈을 뜸으로써 타율적인 존재에서 자율적인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되찾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지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에 교회만 오면 설교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그 길, 그 도를 아는 가장 정확한 길이요, 가장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참된 만족과 기쁨과 쉼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2절 마지막 부분에 “주의 도와 구원을 알리소서”라고 하는데 ‘알리소서’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라다트’(ladaat)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to know’ 정도입니다. “알게 하기 위하여” 혹은 “지식을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기독교 신앙의 지식의 중요성이 대두됩니다. 모든 것은 지식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자 보세요. 알지 못하면 믿을 수 없습니다. 알지 못하면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없고, 알지 못하면 생명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66권 전체에 걸쳐서 인간에게 가장 중차대한 문제가 바로 ‘아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너무나 많은 성경구절이 있어서 제가 여기 적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세요. 성경에서 “너희는 알라.”라는 말이 수도 없이 나옵니다. 그리고 “너희는 기억하라.”고 합니다. 어디에서 기억되는 것입니까? 몸에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 속에서 기억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것을 가르쳐주신 후에는 “잊지 말라.”고 합니다. 이 세 단어만 생각해보세요. “생각하라. 잊지 말라. 기억하라.” 너희는 “알지니라”라는 이 동사 없이는 성경 어느 책도 넘길 수 없을 정도로 성경 전체에 흩어져 있는 압도적인 명령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인생의 황혼에서 무엇이라 말씀했습니까?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왜입니까? 알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고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하기 때문에 자기는 푯대를 행해 달려간다고 말했습니다. 알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알지 않고는 당연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알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알지 않고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너무 산만한 것입니다. 마치 커피 내리는 주전자의 물을 담고 에스프레소 컵에 뜨거운 물을 부어야 하는데 잔이 끊임없이 요동을 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잘 겨냥을 하면 찔끔 물이 들어가는데 이 잔이 한 번도 가만히 있지 않고 요동을 칩니다. 그러니까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까 알 수가 없고, 알 수가 없으니까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는 저 설교자가 저렇게 힘들 정도로 긴 시간을 왜 그렇게 인간의 자율에 대해서 말하는지, 왜 그렇게 피가 맺히도록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말하는지, 왜 그렇게 하나님의 얼굴 비춰주시기를 간절히 구하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진리는 드라마를 보려고 리모컨을 막 넘기다가 광고처럼 잠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없는 일은 아니지만 그것은 우리들을 변화시킬 수준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계속 사는 것이 행복한가? 아닙니다. 뭐가 행복하겠습니까? 여러분의 얼굴이 증언합니다.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않습니다.’라고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셋 중에 하나가 거짓말입니다. 오죽하면 이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한 달만 설교를 듣는 예배자답게 설교를 듣고 아니면 차라리 다른 교회를 가라고 말입니다. 안 믿을 때 안 믿더라도 한 번은 기독교 신앙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주 재미있는 유튜브 3분짜리 영상과 설교를 비교합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설교자도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이 있다면 진짜가 아닙니다. 진리는 지루합니다. 죄인들에게는 지루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달콤합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죄인이기 때문에 진리가 지루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루한 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아무도 진리의 달콤함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을 헌신하고 있습니까? 뭘 크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조용히 복권 발표 기다리는 사람처럼, 연필을 들고 구슬 하나 굴러갈 때마다 번호를 적는 사람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이 바뀝니다. 스마트폰에는 3시간 40분이나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3분 40초도 너무 짧은 것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면서 행복하게 살면 말도 안하겠습니다. 하나도 행복하지 않으면서, 누구도 부럽지 않은, 누구도 부러워할 이유가 없는 그런 삶을 살면서 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20대인 여러분이 지금 그렇게 살고 있다면 15년 정도 더 살아서 40대가 된 후에도, 지금 35세인 사람들이 15년을 더 살아서 50세가 되어도, 지금 40세인 사람이 15년을 살아서 55세가 된다고 하더라도 오늘 느끼고 있는 이 마음, 이 정신, 인생에 대한 이 고민을 그대로 안고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상상하기도 싫지 않습니까? 전 그렇게 믿습니다. 상상하기도 싫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면 그렇게 됩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포장을 해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내가 오늘 사는 것 같은 방식으로 내 인생을 살아갈 때 15년 후 혹은 20년 후에는 내가 무엇이 되어 있을까?” 이 말이 미친 듯이 공부해서 뛰어난 성취를 해라, 지금부터 미친 듯이 저축하고 투자해서 돈 많은 사람이 되어라, 그래서 20년 후에는 고급 승용차 타고 강남에 입성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되는 일에 관심 없습니다. 강남에 살든 강북에 살든 저처럼 평촌에 살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경기도에 살든지 제주도에 이사를 가든지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관심이 있겠지만 주된 관심사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직업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때 멀리서나마 기뻐해주지 쓸데없는 일을 했다고 그러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피를 토하면서 열변을 토하는 것은 그런 일을 이루라고 여러분들을 채찍질하고 주먹질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고 인생의 어떤 처지에 있었으며 무슨 고민을 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20세에서 35세가 된 여러분은 15년 전 10대 때에 꿈꾸던 달달한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세대별로 화제가 다릅니다. 10대 때 모이면 이성친구나 놀러간 이야기를 하고, 40세쯤 되면 돈 모은 이야기, 여행 간 이야기를, 50세가 넘으면 갱년기 이야기, 노후 이야기, 은퇴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달라졌겠지요? 그러나 근본적으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10년 전, 15년 전보다 여러분들이 더 자율적이 되었습니까? 자유인이 되었습니까? 더 많은 책임감을 갖고 하나님 앞에 자율적인 존재로써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더 많이 행복하십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주님을 만나 이전에 못 가봤던 은혜의 땅을 가봤습니까? 아닙니다.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럴 리 없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문제에 대해 그렇게 냉담하고도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무슨 영향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보면 신앙이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사람들이 가난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힘드니까 그나마 교회에 끈을 달고 나오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부자였다면 외제승용차 타고 어디론가 자기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서 떠났을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무엇이 바뀐 것이 있습니까? 주님을 깊이 만나고,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받고, 자유로운 인간의 주체가 되고, 주체성을 가진 인간으로 노예와 같은 삶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자유로운 삶을 살고, 하나님 안에서 은혜의 세계를 누리며 행복하게 사는 그것 없이 10년 전의 그가 지금과 무엇이 다르며, 10년이 지나서 20대에서 30대 중반에 이르는 여러분들이 무엇이 달라지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40대, 50대, 60대에 접어들 때까지 내버려두면 세월이 문제를 해결해 줄까요? 아닙니다. 마지막까지 갈 길을 못 찾고 흙이불을 덮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으로 인생이 끝납니다.
자유롭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고 신령한 기쁨도 없는 그런 삶을 사니 그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가 땅위에 전파되는 것도 본적이 없고,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누리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입에 달고 다니는 것은 세상에 대한 원망과 사람에 대한 미움, 그리고 사람에 대한 험담입니다. 그리고 자기 가족에 대한 원한에 가까운 원망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인생살이에 그런 태도가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됩니까? 정신건강 측면에서는 우울증 예방을 위해서라도 다 쏟아 놓는 카타르시스가 좋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정말 인생이 달라집니까? 제발 원망하지 마세요. 신앙과 인생에 있어서 가장 덜 불행해지는 길은 불행하고 불만족스러운 자신의 삶을 용감하게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인정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떠나서 누가 되겠습니까? 내가 나인 것이 싫으면 누가 나인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 사람은 자기 인생을 살도록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주인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껍데기처럼 사용하셔서 우리 인생을 살아가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와 같은 방식으로 주인이 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효자가 아버지를 위해서 사는 것 같은 마음으로 주체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효자는 한 번도 아버지의 노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남편을 너무너무 사랑하는 아내는 한 번도 이 생활이 속박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찬양) 주의 사랑에 줄로 나를 주께 잡아 매소서
사랑은 지성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저는 아주 담대하게 여러분과 내기 할 수 있습니다. 넉넉잡고 12주 만 더 이상 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을 드리면서 예배를 드려보세요. 변화될 것입니다. 이런 결단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니까 인생의 행복을 위한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아몰랑주의’로 일관합니다. 맛집과 핫한 여행지, 핫한 상품들은 모두 꿰고 있으면서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도리에 대해서는 생각한 적도 없고 알려고 한 적도 없으며 더군다나 의문을 가진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너무 힘든 때는 의문이 떠오르지만 맛있는 커피 한 잔 마시고 나면 그런 의문이 눈 녹듯 사라집니다. 안개처럼 떠올랐다가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고민했다고 말하지만 무슨 고민을 한 것일까요? 정말 고민은 뺨이 여위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떤 연인과 사랑에 빠졌고 도저히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데 안 마르고 살이 계속 찐다고 하는 것은 추호도 그를 그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사병도 안 걸리는 신앙이 무슨 신앙입니까?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2019년 7월 29일 저녁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 한 것을 10년 후에 한번 만나서 대조해보세요. 오늘 이 고민을 그대로 가지고 갈 것입니다. 20년 후에는 그 고민이 바뀌겠지요. 언제 형제를 만날까, 언제 이 지긋지긋한 집안을 탈출해서 시집을 갈까, 혹은 장가를 갈까와 같은 고민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20년 후에는 관절염을 염려할 것입니다. 그런 차이는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달라질 것인지 보세요. 정신 차리세요. 딱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고, 지나가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냥 흘러갑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 인생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하지 않으면 거대한 시간의 어둠속으로 우리는 빨려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생입니다. 너무나 너무나 감격해야 할 아름다운 것이 많은데, 그래서 살아있는 것이 가슴이 시리도록 행복하도록 우리를 만드셨는데 우리의 일생을 아주 지리멸렬한 인생을 사는 것처럼 그렇게 보내는 것은 그냥 노예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하루를 살아도 아주 멋있게 아름답게 살고, 죽음이 온다고 할 때 기다렸습니다, 라고 담대하게 문을 열 수 있는 열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지성을 헌신하라는 말은 머리를 굴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유순하게 하나님 앞에 복종하며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사람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얼굴을 내게 비추지 않으시면 태양이 얼굴을 가릴 때 모든 산천초목과 풀들이 마르고 모든 이파리들이 죽는 것처럼 저 또한 그렇다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찬양)주님을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에 음성 듣기를 주님을 만져 보기를
전심으로 원합니다 주여
세상에 대한 모든 희망을 끊고, 하나님을 만나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은 자처럼 살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며 일어나야 합니다. 후자의 삶은 혀를 깨물고 죽어도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라고 하며 이제 더 이상 이렇게 살기는 싫다고 인생의 이 명제에 직면해야 합니다. 맞닥트려야 합니다. 그런데도 휴대폰이나 보고 세상 즐거움에 빠져 있으면 그런 고민이 마음에 떠오른다고 하더라도 사탄이 싹을 잘라버리고 나중에는 뿌리째 캐어버려서 짐승처럼 무감각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는 눈물로 고합니다. 여러분들은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의 인생은 천하를 다 주고도 살수 없을 정도로 값진 인생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에 대한 비인간적인 학대입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그렇게 살지 않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창조하셨는데 절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B. 주를 찬송하게 하심
두 번째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주의 도가 전파되고 세상의 모든 나라가 구원을 받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 목표가 바로 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뜻을 생각하면서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아멘.
나라와 대조되는 민족의 개념이 나옵니다. 앞서 설명 드린 것과 같은 것입니다. 형식적인 단일체로서 한 왕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 나라라면 이 민족은 각기 다르고 고유한 문화와 인종적 특성을 갖고 있는, 말하자면 단위 사회입니다. 당연히 한 나라 안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중국은 약 53개의 민족으로 구성됩니다. 그중에 압도적으로 다수를 한족이 차지합니다. 조선족도 그중에 한 민족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민족들은 중국이라는 한 나라에 속했으면서도 조선족은 조선족대로 한족과 다른 독특한 문화를 갖고 하나의 나라를 이루고 살아갑니다. 이런 것들이 갈등을 일으키면서 신장 사태, 위구르 사태 등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바라는 바는 그 형식적인 나라 안에 있는 독특한 문화를 갖고 핏줄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씨족의 확장인 민족들이 공통적으로 예외 없이 그렇게 되길 원하는 상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가 알려지고 주님의 구원이 알려진 효과 곧 결과입니다. 바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입술로 부르는 노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에서 솟아나오는 전심의 찬송을 이야기 합니다. 예를 들면 언제나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잘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전교에서 1등을 했습니다. 아니면 우리 아들이 최고의 회사에 입사를 했습니다. 아니면 우리 아들이 음악을 했는데 조성진처럼 콩쿠르에서 그랑프리를 먹었습니다. 그때에 엄마가 아들 자랑을 할 때 어떤 의무감으로 하겠습니까? 마음은 없고 입으로 자랑하겠습니까? 온 살갗이 떨리면서, 모든 피가 요동치는 정동 속에서 아들 혹은 딸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 자랑이 어느 정도냐면 들어주는 사람에게 모두 10만원 수표를 주고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하고 싶어 합니다. 이 장면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찬송 하는 것입니다.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 하나님의 도와 구원이 보편적으로 전파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열망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질병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똑같은 질병으로 고통 받다가 나은 사람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치료법을 가르쳐줍니다. 심지어 돈이 없으면 자기가 그 집에 손잡고 끌고 가서 약을 지어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경험했기 때문에 그 사람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분의 은혜 때문에 참다운 자유를 누려보고 주체성을 갖고 사는 것이 얼마나 보람된 것인지를 경험한 사람들만이 노예 상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가엾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들은 불행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리하고 고생하는 백성들을 보시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이유는 당신은 아버지 안에서 참 행복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렇게 사는 것이 인생의 길이 아님을 아시고 그것 때문에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깊이 경험해본 사람들은 그런 것도 없이 까불며 사는 사람을 보면서 너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 철딱서니. 저렇게 살아봐야 눈에서 눈물이 흐르도록 후회하는데 그걸 꼭 찔러서 먹어보기 전까지는 모르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어리석은 사람은 죽어도 해봐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볼 때 가슴이 미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 역시 아들을 자랑할 때에 엄마의 마음이 떨리듯이 모든 민족이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을 기뻐함
여기서 찬송한다는 것은 최소한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찬송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기뻐함으로써만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에 입각해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참으로 보람 있고 의미 있게, 그리고 죽음이 오늘 나를 찾아와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성경과 생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선택합니다. 그러면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그렇게 했더니 기뻤습니까? 5분이나 10분짜리 놀이기구를 탈 때에 느끼는 기쁨 말고, 적어도 내 인생을 깊이 지배하고 있어서 아무리 많이 누려도 여러분들을 불행하지 않게 하는 기쁨이 있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만약 기쁘다면 그렇게 살아보십시오. 그리고 온 몸으로 부딪쳐보세요. 그런데 인정하기 싫겠지만 하나도 안 기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 자기가 독립해서 살겠다고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 밖에 있는 행복을 목숨 걸고 찾았는데, 때로는 신앙을 발로 차면서 까지도 한 번 누려보려고 했는데 얻지 못했지만 얻었어도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사람에게 무얼 더 주시기를 기대하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 못 만나고 이렇게 피곤하게 예배당에 왔다가 지친 얼굴로 교회에서 돌아가는데 지금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기쁘더냐? 너희는 기쁘더냐? 너희는 즐겁더냐? 묻는 것입니다. 안 기쁘잖아요. 그러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런 삶을 지속하려고 합니까? 누구를 위해서. 어차피 살아가는 것은 자신입니다. 그런데 행복하지 않은 것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느끼잖아요. 실험해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기쁘지 않잖아요? 즐겁지 않잖아요?
그러면 제가 묻고 싶습니다. 누구를 위해서 지금도 그 삶을 계속 살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살고 무엇에 의해서도 쉽게 요동하지 않을 정도로 굳세게 살아가게 하는 그 힘이 어디서 나올까요? 죄입니다. 죄가 그 힘을 여러분들에게 줍니다. 죄는 기억해야 할 과거를 잊게 만들고 알아야 할 현실에 눈을 감게 만들며, 명심해야 할 사실을 향해 눈을 감게 만듭니다. 죄의 역할입니다. 죄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인간의 지성입니다. 그것이 여러분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줍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면 아주 무모한 사람이 됩니다. 원인과 결과를 모두 설명해도 다 필요 없습니다. “냅둬요. 그냥 이대로 갈거예요.”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위한 삶입니까? 누가 기뻐할까요? 누가 박수를 칠까요? 여러분들의 가족일까요? 목회자일까요? 하늘에 있는 천사들일까요? 아니면 여러분들에게 도를 가르쳐주시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할까요? nobody.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기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을 고집하십니까? 자신에 대해서 깊이 눈을 뜨세요. 그리고 얼마나 죄가 나를 오랫동안 속여오고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 수 있는 엄청난 흑암의 에너지를 나에게 주었는지를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은 자율적이지도 않고 주체적이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고 은혜에 대한 심오한 비밀도 모릅니다. 무엇으로 여러분들에게 그런 인생을 보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깊이 회개하세요. 그리고 이렇게 명백하여 핑계를 댈 수 없는데도 그렇게 불행하고 행복하지 않고 또 행복하지도 않을 삶을 향해서 대담하게 발걸음을 내어딛게 만드는 담대한 용기가 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죄에는 미친 기운이 있습니다. 광기입니다. 미친 사람은 이성을 내던져버린 사람입니다. 그게 죄가 하는 일입니다. 너무나 뻔합니다. 지금 통장에 돈이 조금 있는데 계속해서 돈을 빼 쓰면 언젠가 잔고가 0이 되는 것은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용카드를 긁으면 어느 날 은행에서 통고장이 날라 옵니다. 그것처럼 분명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얼마나 고귀한 인생이고 여러분들은 인류의 마지막 남은 개체입니다. 그 한 사람이 그 한 사람을 하나님이 말씀으로 부르셔서 그래서 당신 안에서 모든 속박을 벗은 자유로운 사람이 되고 행복한 사람이 되고 당신과 심오한 비밀의 교제를 나누면서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을 버리고 얻을 행복이 어디에 있기에 여러분들은 완고하게 그 길을 고집합니까? 깊이 생각하세요. 그리고 만약에 계속 고집하면 여러분들은 매우 불행한 중년과 노후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여러분들을 아끼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리스도 사랑으로 넘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쌍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돌보는 것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 뜻대로 살아감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심으로 찬양하면서 불순종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향한 찬양을 기뻐하십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이 모르세요? 하나님은 모든 만물 위에 가장 높으십니다. 하나님이 더 잘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지금도 날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신이 다 아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을 하나님이 좋아하십니다. 왜 좋아하실까요? 우리의 칭찬 몇 마디에 우쭐하실 분이라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왜 좋아하실까요? 그렇게 자기를 전심으로 찬양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당신에게서 기쁨을 찾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세포가 떨리며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당신에게 순종하며 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행복하게 될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시인이 반복해서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찬송하게 하시며’라고 두 번이나 같은 기도를 합니다. 그 열망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앞서 말씀드린 것이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은혜를 받고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많은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리고 신령한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습니다. 그랬더니 나를 통해서 행복에 이르는 도가 무엇인지가 그에게 전해지고, 그도 이 도 속으로 돌아와서 구원을 경험하고 나처럼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서 그것이 계속해서 확장되어서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길 원하냐 하면 이 지구상에 호흡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처럼 그렇게 행복하고 그렇게 자율적이고 주체적이며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들로서 복되게 살아가길 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이상은 온 세상이 호흡이 있는 자마다 모두 말할 수 없는 기쁨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찬송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찬양)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그러면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찬송해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너무 기뻐하고 그 사랑 때문에 모든 사람을 사랑하기를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여기는 세상이 되길 꿈꾸고 그때까지 할 일이 남아있는 한 눈을 감을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인생의 행복입니다.
하나님은 만약에 그렇게 영혼의 떨림으로 찬송하는 사람은 죄가 있다면 회개할 것이고 은혜를 받으면 더 많이 순종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아주 참된 경배자가 되도록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고 하나님과의 만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최종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무한한 경배의 정신 속에서 살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바라보시는 꿈이고, 그 비전에 참여하라고 우리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선택하셔서 오늘까지 우리를 인도해오셨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속박 받는 존재가 되고, 하나님이 아닌 데서 행복을 찾기 때문에 행복을 열망할수록 불행의 구덩이 계곡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입니다. 행복하려고 여러분 자신을 많이 섬기며 여러분 자신에게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은 자기를 행복하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거기에 순종하며 사는 삶은 노예의 삶입니다. 안 살고 말지 말입니다. 평생 사람들에게 자유도 없이 짓밟히면서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잠시 잠깐 후면 지나갑니다. 이건 피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때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짧은 시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을 아침에 잠시 떴다 사라지는 안개에 비유합니다. 그리고 잡초에 비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그렇게 잠시 있다 사라지는 들풀 끝에 매달린 이슬과 같은 인생은 그 자체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생이 관계를 맺고 있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향해서 살고, 삶과 죽음 사이는 땅에 그어놓은 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죽을 준비도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이 진정으로 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왜? 땅에 살고 있으나 그의 의미는 하늘에 있고, 의미는 하늘에 있으나 그 의미가 땅에서 구현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기 때무입니다.
(여러분들은) 너무 철이 없습니다. 설교를 해도 지금 저 설교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울려 퍼지는 이 말씀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결정적인 증언인지, 그리고 자신의 인생이 저 말씀 한마디에 운명이 달렸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리고는 농담처럼 여기면서 행복하지도 않고 자유롭지도 않은 인생을 꾸역꾸역 살아가며, 살아있지만 죽고 싶고, 그러나 진짜 죽기에는 무서운 삶을 살아가는데 그것이 불신자였을 때에 살아갔던 삶입니다. 그럴거면 왜 예수님을 믿습니까? 그냥 혼자 살지요. 이렇게 예수님을 믿어서 마지막 끝에 무엇을 보기 원합니까? 살아있는 동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위선자라고 손가락질을 할 것이고, 죽어서는 두고 가는 세상이 섭섭하고 하나님은 낯선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세상은 여러분을 그렇게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을 버릴 때까지만 사랑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세요. 날 위해서가 절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인생의 침묵과 어둠 속에서 사라진들 하나님에게 무슨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영원한 침묵 속에서 하루살이 같은 인간들은 태어났다가 사라지고, 어두운 밤하늘 가르고 떨어지는 별똥처럼 순간을 빛내다가는 더 깊은 어둠속으로 사라집니다.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 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 우리는 신앙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주제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태도를 확실히 해야 합니다. 진리가 아니라고 믿어지면 자기 길을 가고, 진리라고 믿어지면 똑바로 믿고, 아직 진리인지 확실할 수 없으면 정신 차려서 배우라는 것입니다. 알아야지만 이게 진리인지 아닌지 태도를 결정할 것입니다. 불신자가 보기에는 신자 같고 신자가 보기에는 불신자 같은 사람으로서 산다면 세상도 낯설고 교회도 낯설고 거울을 보면 자기 자신이 타인처럼 느껴지는 삶을 살 것입니다. 행복할까요? 저는 여러분 중에 아무도 20년 후에 2019년 7월29일 밤에 설교를 흘리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하보다 고귀한 사람들로 만드셨습니다. 들풀도 먹이고 공중에 나는 새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신데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시고 자기의 아들을 보내어 죽기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겠습니까? 너무 사랑하시니까 나 같은 사람이라도 보내어서 이 밤에 여러분들의 운명을 내 운명처럼 느끼면서 설교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인생의 도리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그분을 찌른 옆구리에서 쏟아진 피로 혈서를 쓰신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복음입니다. 적어도 이 성경구절이 이야기 하고 싶어 하는 내용 중에 빼놓으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하고 엄중한 진리는 설교되었습니다. 이제는 나의 책임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 말씀에 대해서 가부에 대해 하나님에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저는 전적으로 이 말씀을 거절합니다.”라고 하던지 “전적으로 (동의하여) 지금 즉각적으로 순종하겠습니다.”라고 말하던지 “내가 어린아이처럼 열심히 과연 그 진리가 그러한지 학습하겠나이다.”라고 하던지 해야 합니다. 적어도 셋 중에 하나는 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안하면 여러분은 nothing 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은 인간이 선택한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의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내가 비록 세상을 움직일 권력이 없어도, 모든 사람에게 베풀 수 있는 돈이 없어도, 다른 사람이 박수칠 재능이 없어도 하나님이 자기 같은 사람을 창조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발견한 사람은 반드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되지 못했으나 모든 사람이 도달해야 할 거기에 도달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결정을 뒤로 미루는 것은 비겁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비겁한 것입니다. 진리 앞에 내가 무엇을 결단해야 하는지를 여러분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그리고 만약에 모른다면 바울이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하나님께 고백했던 것처럼 “주여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리이까?”라고 간절히 묻는다면 하나님이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3.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쁨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당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다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시편 67편 4-5절)
녹취자: 장미연
I. 본문해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고 하나님이 얼굴을 빛 비추어 주심으로 우리가 주님을 더 깊이 경험하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변화된 삶을 살 때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도를 땅위에 그리고 당신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신다고 2시간 동안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도가 도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왜 그 도가 구원과 연결되는지, ‘알리소서’ 라고 한 대목의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지를 신앙에 있어서 지성의 중요성과 관련지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1시간 20분 정도 설교하고 내려갔다고 믿었는데 2시간 25분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3절은 찬송하는 겁니다. 자신들 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그리고 그 영향을 받은 모든 나라가, 그리고 그 나라 안에 있는 문화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고 핏줄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이 궁극적인 비전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온 나라와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때 하나님의 자녀는 놀라운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론적으로 먼저 말씀을 드리면 이런 이치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어떤 현실을 꿈꿉니다. 그 꿈꾸는 것은 때로는 우리에게 굉장히 놀라운 격려가 됩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10년 후에는 이런 일에 종사하고, 좀 더 나 자신을 발전시켜서 내가 지금 하는 일과는 또 다른 일을 하게 되는 등등의 나의 소원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갖습니다. 그런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지금의 현실보다 더 나은 것을 내가 희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그러한 희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기분 좋은 일이잖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중에 살아있으면 누구든지 하고 싶은 게 있고, 되고 싶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게 아주 세속적인 욕망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현재 현실로 이루어졌을 때는 더 기쁘지 않겠습니까?
(예화) 어느 자매를 봤는데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온갖 상상을 하는 겁니다. 놀러도 가고 영화관도 가고. 기분 좋아요? 나빠요? 실제로 그게 이루어지면 어떻겠습니까? 더 좋겠지요. 꿈을 꿨는데 사귀는 자매한테 차이는 꿈을 꿨습니다. 기분이 나쁘겠지요? 그런데 그날 진짜 차였습니다. 더 나쁘겠지요?
그럼 당연히 이 시인도 그럴 거 아닙니까? 이렇게 하나님께로부터 영적인 놀라운 변화를 받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도가 알려지고 구원이 모든 나라에게 전파되어서 알게 될 때에 실제로 그렇게 구원을 받아서 자기처럼 변화된 사람들이 실제로 생겨나는 현실을 보면 기쁘지 아니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취미 생활을 하는데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나한테 찾아와서 그것 좀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나의 취미를 같이 좋아하는 사람만 생겨도 좋고 진짜 기도할 때 안 생기던 사랑이 막 생기지 않습니까? 너무 도와주고 싶고 잘해주고 싶고 그렇잖아요? 그러면 자기는 지금 진정한 행복을 누리고 그 안에서 복을 경험했는데 그 속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더 사랑스럽겠습니까? 그 현실을 보면서 기쁨을 느끼는 겁니다. 인생은 그러한 보람에 사는 겁니다. 보십시오. 바로 그런 이치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II.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쁨
그렇게 온 땅에 하나님의 도가 전파되고 구원이 알려질 때 그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쁨이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기뻐하는지는 현실의 문제입니다. 현실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심판하심 때문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때문입니다).
A. 심판하심
첫째는 심판하심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이 이렇게 말합니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명령이 아니라 노래 할 것이니, 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는 민족들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며 땅위의 나라들을 다스릴 것임이라.”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이 기쁨의 이유 둘을 이야기 합니다. 첫째는 심판 하실 것이기 때문에 기뻐하고 두 번째는 다스리실 것임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심판하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히브리 성경에 ‘티시포트’(tisheppot)라고 나옵니다. ‘샤파트’라는 동사 원형에서 변형된 것입니다. ‘샤파트’는 재판 용어입니다. 재판하는 겁니다. 진실을 다투는 두 원고와 피고가 나와서 서로 옳다고 할 때 재판장이 판결을 내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최종적인 판결입니다. 우리도 재판에서 다투다가 대법원에 가서 쾅하고 판단을 내립니다. 그러면 일소불퇴입니다. 그 사건은 다시 소를 재기할 수가 없습니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서 한 번 재판된 것은 그것으로 끝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재판을 해서 3심까지 가서 판결이 내려서 사람을 죽였는데 알고 보니 이 사람이 죄가 없는 겁니다. 그럴 때는 끔찍한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의도되었다면 보통 사람이 받는 벌과는 비교 안 되는 징벌을 받아야 합니다. 엄청난 범법 행위입니다. 살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사람이 죽었습니다. 살려낼 수 없습니다. 판결한 사람은 있는데 나라가 그걸 다 배상을 해주는 겁니다. 몇 십억씩 배상을 해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훌륭한 나라일수록 국민들은 법원을 신뢰합니다. 후진국일수록 법원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그것을 이 백성들이 그렇게 즐거워한다라고 하는 것은 현실 속에서 이게 공평한 법이 시행되지 않는 세상 나라에 수많은 경험을 한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이 나라는 제법 나라다워졌습니다. 나라에 가깝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예화) 예전엔 어땠냐면 엉터리였습니다. 부정부패가 너무 만연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그냥 당연하게 받아들일 정도였습니다. 동사무소가면 주민등록등본을 띄려면 사람들이 줄을 서야 했습니다. 복사기도 없던 시대에 먹지대고 쓰는 겁니다. 와서 봉투를 주고 담배 열 갑 짜리 한 보루를 주면 순서를 위에다가 꽂아 줍니다. 그것부터 써줍니다. 그런데 그것을 뭐라고 사람들이 항의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항의를 하면 공무집행 방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감히 그렇게 못하지요. 누구나 자기 권리를 어느 정도는 주장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좋은 나라는 법을 정확하게 집행하고 좋은 법을 세우고 그 법을 정확하게 공평하게 집행하고 그 법이 이루어지는 존중되는 사회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안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묻겠지요. ‘그 법이 정말 완전할까요?’ 아니지요. 그래서 돈 많은 사람들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압력을 넣어서 입법부에다 자기에게 유리한 법을 만들게 하고 심지어는 법관들을 매수해서. 다 드러나고 있잖아요. 흥정해서 재판을 하게하고 당연히 정치하는 사람들이나 행정 하는 사람들은 그런데 영향을 받으면서 특정한 이익을 주는 사람들에게 법을 유리하게 집행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런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도를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사회가 신물이 나는 것입니다. 너무 너무 지겨운 세상입니다. 그 세상을 떠나서 자연인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왜? 여기가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신 사명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회 속에 살면서 나 때문에 그런 세상이 조금이라도 고쳐지고 새로워지도록 살아가야 되는 것이 나의 현실이고 또 내가 살아있는 이유입니다. 누군가가 올바르지 않은 세상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고 때로는 고난 받으며 죽어간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요만한 나라라도 된 것입니다. 안 그런 나라들은 지금 형편이 없는 나라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좋은 나라는 국민소득 5만불 되는 나라도 물론 좋은 나라겠지만 그 보다 더 좋은 나라는 기초가 되어 있는 나라입니다. 그게 법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합니다. 이유는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도에 의한 정의와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다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고 하나님을 깊이 만나서 그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사랑 속으로 사람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도를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현실은 그 하나님의 법에 맞게끔 만들어가는 그 사회가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런 나라에서 아무 지위가 없이 살아도 그런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그 사람에게는 그런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누리며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한 것입니다. 그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이 이 세상을 정의롭고 사랑스럽게 하는데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의 비전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인의 영혼이 변화되고 선교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도는 세상나라 많은 민족들 안에서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의 상태는 교회의 소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망가졌으면 망가진 사회를 보면서 자포자기 하거나 아니면 파괴적이고 원한에 맺힌 사람이 되는 것은 자기 자신도 망가지고 사회도 망가지는 것입니다. 불공정한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그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마다 다를 수가 있겠지요. 직장에 들어갔는데 옳지 않은 일이 이루어집니다. 한 번 분노하고 대판 싸우고 사표를 던지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게 자기의 신념이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요. ‘참자, 참자.’ 그리고 그런 순수한 마음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한 15년쯤 참으니까 회사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때 그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힘닿는 대로 자기가 막을 수 있는 것은 막으면서 그 회사를 공평하고 올바르게 하고 그 직원들이 올바르고 공평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편한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사람의 신념이라면 존중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나라가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을 짓밟고 악을 추구합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정부에 순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무기도 들 수 있는 거겠지요. 그게 그 사람의 신념이면 그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과연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의 마음속에 정의에 대한 의식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남의 불의는 아주 쉽게 지적하고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는 목청을 높이면서도 자기 개인의 삶은 아주 작은 이익과 편안함을 위해서 공평하지 않은 쪽을 너무나 쉽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의와 타협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절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해서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사람이 되고 하나님에 있는 행복 때문에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비춤 받음으로써 은혜의 깊은 세계를 경험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불의와 비겁함,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은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대한 사랑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명예든 자신의 물질이든 자신의 지위든 혹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 때문이든 어쨌든 하나님 아닌 것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항상 뚜렷하게 사랑을 추구하는 사람은 올바름을 찾는 것이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국은 사랑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것이 올바른 정의라면 올바른 사랑이라면 두 개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소외될 때 감당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찬양) 이 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예화) 언제 한 번 2차 세계대전 때 있었던 독일군과 연합군과의 전쟁의 이야기를 만든 영화가 있었습니다. 팩트인지 아닌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독일군이 수세에 몰려서 도망을 갑니다. 도망을 가다가 어떤 똑똑한 지휘관 하나가 급히 차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병사를 데리고 막 가가지고 사거리에 있는 ‘어디로 가시오.’라고 되어있는 표지판을 뽑아서 반대편으로 박아 놓는 것입니다. 뒤에 따라오던 사람들은 지도를 보고 헷갈리다가 결국은 그 표지판을 보고 다른 쪽으로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가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실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데는 많은 말이 없어도 결국은 진실은 진실로 판명이 됩니다. 거짓은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계속 더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이 세상에 구별된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신 것은 진실하게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 진실은 하나님의 도를 따르는 마음과 정신, 삶 전체입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나도 신앙이 없고 어리석을 때에는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이제 내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진정으로 자율적인 인간이 되고 주체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그런 식으로 어리석게 행복을 찾아서 자신의 욕망의 노예가 되는 삶은 살지 않는 것입니다. 금과 은을 한 바구니를 준다고 하더라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뭘 원할까요? 온 땅에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처럼 하나님 사랑하고 그래서 주체적인 인간이 되고 복을 누리며 살고 하나님 만나는 사람이 되어서 행복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회가 그런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아니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의도하신 삶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도 은혜를 받는 데는 큰 희생이 뒤따르지 않습니다. 그것도 희생이라면 희생일 수 있겠지요. 쓸데없는 정신을 산란하게 하는 것들을 멀리 하고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런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받은 그 은혜대로 살아가는 것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때로는 핍박이 때로는 소외가 따돌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그렇게 한 사람을 향해서 복수심을 불태우거나, 신자와 불신자를 편을 가르고, 또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신자와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신자의 편을 가르며, 또 하나님의 말씀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인생관의 차이에 의해서 사람들을 다시 가르고 하는 식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신 목적과 정 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은 내가 이미 받아서 행복한 이 하나님의 판단, 하나님 앞에 내가 옳다고 인정을 받고 하나님의 판단에 내가 혹시 잘못할지라도 기꺼이 복종하고 살아가는 이 행복한 삶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누리기를 갈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밥 벌어먹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세상으로 바꾸고, 그렇게 바꾸는 일에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 하고, 거기서 나의 인생의 의미를 이 현실 속에 구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할 수 있는 한 평화롭게 대하고, 이익에 연연해서 관계를 파괴하지 않고, 그러나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을 그런 불의를 계속 행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살아있는 동안에 이 삶을 도구 삼아서 누군가가 나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해주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십시오. 우리의 인생의 성공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나와 접촉했던 모든 사람들이 ‘내가 당신을 안 만났더라면 어떤 사람이 됐을까’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최상의 덕스러운 삶입니다. 혹은 그 고백을 못하는 사람이라도 나를 만났기 때문에 ‘유익했다. 그리고 정말 다행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그 하나님의 심판을 쭉 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정의를 따르는 사회가 되는 일에 이바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B. 다스리심
마지막 두 번째는 다스리심입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비추시고 구원을 모든 나라에 알릴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 두 번째 이유가 “하나님이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나와 교회를 넘어서 모든 나라, 그리고 모든 민족을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에 기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라고 하는 단어는 ‘탄햄’(tanhem)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원래 ‘이끌다. 인도하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펼치시는 질서와 관련된 것입니다.
(예화) 무슨 일이 생겨서 사람들이 정말 오합지졸입니다. 이 사람은 이 얘기를 하고, 저 사람은 저 얘기를 하니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합니다. 그런데 지도자 한 사람이 두각을 드러냅니다. 시간이 잠시 흘렀는데 그 사람이 모든 사람들을 통합하면서 그들의 의견을 하나로 집약하여 공동체가 다투지 않고 갈 수 있는 리더십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방법도 있지요.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그냥 제거하든지, 쫓아내든지, 아니면 죽여 버리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남아있는 사람들은 저 사람들과 나의 의견이 다르긴 하지만 저렇게 제거해버리는 것까지는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제거해버리면 남아 있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이제는 저 사람하고 다른 얘기만 하면 나도 제거 되겠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것은 필요한 리더십이긴 하지만 함부로 행사되어서는 안 되는 리더십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지도자가 가지고 있는 힘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이야기하게 하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하고, 자기가 못 보던 것을 그 토론을 통해서 보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서 가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음에 최선의 방안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은 여럿이지만 그 방안이 최선이라는 것에 대해서 마음을 일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모임 속에 질서가 세워지게 됩니다. 그게 바로 지도자가 하는 일입니다. 이것을 잘하는 사람은 사람을 제거하지 않고도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합해서 가는 힘이 있고, 못 하는 사람은 수 없이 제거하다 마지막에 자기 하나만 남는 사람입니다. ‘돌격’하고 달려갔는데 한참 달려간 다음에 보니까 자기 한 사람만 남는 겁니다. 깃발만 나부낍니다. 그것은 좋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는 사람이 우리를 이끌 때에 가장 큰 유익은 무질서를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질서를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그 질서가 억압된 질서가 아니라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설득된 질서이면 너무나 좋은 것이지요. 그게 ‘이끈다. 인도하다’라는 이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지 폭군이 엄청난 공포 정치를 통해서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것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보스와 리더의 차이는 보스는 자기는 안 가고 “절로 가.”라고 하고, 리더는 “나를 따라오면 된다.”고 하고는 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하나님은 그 모든 나라들에게 도를 전파하시고 구원을 전파하셔서 그 사람들이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들고, 그렇게 돌아온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두 한결같이 그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자기가 원하는 질서로 들어가기 위해 분쟁하고 혼란스럽던 공동체가 그 하나님의 질서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질서입니다.
(예화) 평생 독신으로 있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만나면 당연히 그 사람을 중심으로 생활의 질서가 다시 세워지게 됩니다. 그 사람이 나의 삶에 아무 영향을 준 게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폭탄 맞은 머리는 여전하고 아무렇게나 생활하는 것도 조금도 변함이 없다고 할 때 그건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우선 생활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동의하는 사람이 없는걸 보니 참 걱정되네요. 그래서 누가 그랬답니다. 목사님 설교는 연애라도 하고 온 청년들은 이해를 좀 더 잘한다고 말입니다. (사랑을 하면 그 아래로) 질서가 생기는 겁니다. 시집가서 애기를 낳잖아요. 애기를 낳으면 아기를 중심으로, 특히 여성들은 그 아이를 중심으로 삶의 질서가 완전 재편됩니다. 애기를 낳는다고 해서 남자는 그렇게 달라지지는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제럴드 다이아몬드라는 학자는 아이를 낳았으나 남자는 거기에 투자한 게 별로 없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여자는 어마어마한 투자를 했기 때문에 아이와의 관계를 쉽게 떨쳐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학자의 설명에 의하면 남자는 투자한 게 별로 없답니다. 1미리 리터의 정액만 투자했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여자는 그 아이를 배에 잉태하여 9개월 15일 동안 품고 있고, 먹고 싶은 커피도 못 마시고, 한증막에도 못들어가고, 감기가 들어도 감기약도 못 먹고 하면서 길러내는 겁니다. 그러니 태어났을 때 너무 사랑스러운 겁니다. 자기 생명의 일부가 되는 겁니다. 남편도 필요 없습니다. 형제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이 아이를 중심으로 벌벌 떨면서 모든 질서가 재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 하면 엄마도 아니지요. 그럼 남자는요? 그게 문제입니다. 제럴드 다이아몬드 이야기에 저는 백퍼센트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이 문제이긴 합니다.
사랑은 그렇게 질서를 재편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때는 말 갈 때 소 갈 때 없이 다 갑니다. 하나님 사랑하지 않을 때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합니다. 하나님 사랑하지 않을 때는 돈 벌어서 자기 위해서 씁니다. 하나님 사랑하지 않을 때는 시간이 남으면 다 자기를 위해서 생활을 합니다.
(예화) 회심하기 전에도 그렇게 낭비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로운 삶을 살지 않았지만 깊이 회심을 하고 은혜를 많이 받고 나니까 직장생활 하면서 돈 쓸 데가 별로 없었습니다. (회심 전에는) 매일 한 갑반씩 담배를 사느라고 주머니에 잔돈이 남아나질 않았습니다. 상당한 부담이었습니다. 지금은 담배 한 갑에 얼마나 합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갑에 4천 5백원이라구요? 한 갑 반 이면 약 7천원 정도입니다. 30일이면 얼마입니까? 21만원입니다. 그때도 그만한 비율이었습니다. 그때도 백원 짜리 담배부터 시작해서 아주 비싼 담배까지 있었습니다. 저는 밥은 잘 못 먹어도 담배는 좋은 것을 피워야 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최고급을 피워야 된다고요. 그것이 얼마나 부담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회심하고 나니) 그런 거 신경 안 씁니다. 친구들과 가끔 술이라도 마시고 그랬는데 거기도 이제 안 갑니다. 돈 쓸 데가 없습니다. 친구도 만날 일이 없습니다. 만나면 저에겐 감동도 안 되는 이야기 혼자서 막 떠들면서 나보고 재미없다 그러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나한테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인데 말입니다. 결국 그 돈을 누가 가져 가시냐면 하나님이 가져가십니다. 여자 친구라도 생겼으면 썼겠지요. 생긴 것도 우습게 생겨서 제겐 여자 친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거 가지고 교회에 헌금하고, 토요일에 교회에 찾아온 주일학교 아이들에게 자장면 사주면서 쓰는 겁니다.
사랑은 질서를 재편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면 당연히 시간도 하나님을 위해 쓰고, 돈도 하나님을 위해 쓰고, 젊음도 하나님을 위해서 쓰고, 놀아도 교회에 와서 놀고 싶은 것입니다. 여러분 안 그래요? 너무 공감을 안 해서 재미가 없습니까? 공감 많이 해주는데 가서 설교를 좀 해야 되는데. 어제 어느 교역자가 전해주더라고요. 청년들이 설교를 듣다가 몇 사람이 졸았답니다. 그러니까 다른 교회에서 온 청년들이 “세상에 어떻게 저 설교를 듣고 저렇게 졸 수 있을까?”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그럴 수도 있다. 괜찮다.” 격려가 되요? 맛집 사장 아들에게는 그 맛집 밥이 그냥 지루한 집밥일 뿐입니다. 이제 이해됩니까?
사랑하게 되면 당연히 질서가 재편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랑하게 되면 (무엇이든) 하나님 위해서 쓰고 싶은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질서가 들어옵니다. 사랑의 의해서 질서가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자매 간사가 한 명 있었는데 수련회만 가면 그 자매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고기를 입에도 못 대기 때문입니다. 생선은 조금 먹는데 고기는 못 먹습니다. 고기를 먹으러 가면 그 자매는 국수나 먹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고기를 너무 좋아하는 형제를 만났습니다. 사랑하니까 피가 뚝 뚝 떨어지는 스테이크를 같이 먹는 겁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질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질서를 만듭니다. 그 질서는 선(善)의 질서입니다. 선에 의한 질서를 만듭니다.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하고 싶은 걸 해주고 싶은 게 사랑입니다. 사랑하지만 그가 싫어하는 것만 내가 열렬히 하고 싶다거나 사랑하지만 그가 아주 지겨워하는 것만 골라서 하고 싶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복수할 때나 하는 겁니다. “가자.”했더니 “안가.”라고 하고, “먹자.”했더니 “안 먹을 거야.”하고, “쉬자.”했더니 “나 일할거야.”하는 것은 사랑의 감정이 뒤틀려서 미울 때나 하는 겁니다. 사랑하면 당연히 사랑하는 대상의 뜻을 따르고 싶은 것입니다. 내 뜻을 꺾는 것 때문에 힘든 것보다 저 사람의 뜻대로 되어서 그가 기뻐하는 것을 보는 게 더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내 뜻을 꺾어서 힘들고 아픈 것 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뜻대로 돼서 그 사람이 행복해 하는 것이 더 행복한 겁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게 뭘까요? 하나님이 뭘 원하시겠어요? 예배당 잘 다니기도 원하시겠지요. 헌금하기도 원하시겠지요. 전도도 원하시겠지요. 끝이 없잖아요. 그걸 전부다 통합해서 말하면, “하나님의 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속에는 선이라는 질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은 이걸 파괴합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모든 나라와 백성들을 이끄시고 인도하실 때 그것은 하나님 안에 있는 질서를 따라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사랑하는 사람이 볼 때에는 자기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질서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걸 보면서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면서 자신은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너무 속상하고 괴롭고, 심지어는 솔직히 말해서 하나님한테 섭섭했는데 몇 년 지나고 나서는 그때 그렇게 안 된 게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때 그렇게 됐더라면 지금 얼마나 힘들었을까, 라고 생각할 때 있지요? 하나님의 선을 따라서 이루어진 것을 보면서 감사하는 사람은 어쩌다 한 번씩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 매순간 그렇게 합니다. 진정한 감사는 매순간 그렇게 하는 겁니다. (어떤 상황을 보면서) 내가 이해 할 때도 있고 못 할 때도 있습니다. 이해 할 때는 빨리 이해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이해하지 못 할 때는 내가 다 이해할 수 없지만 나는 틀렸고 하나님은 맞으실 것이라고 확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선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선하게 살아가지 않는다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화) 요즘 청소년들이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때도 없었습니다. 90년도 즈음에 들어갈 때에 브로마이드가 유행했습니다. 가수들의 브로마이드를 집에 붙여놓고, 사진을 가지고 다니고, 책받침을 가지고 다니고 했습니다. 그때 제일 잘 팔리던 책받침이 소피 마르소 책받침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가슴이 뛰고 밤에 잠이 잘 안 오고 하는 적이 저는 없었습니다.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흔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영화 <러브스토리>를 보고 며칠 잠을 못 잤습니다. 너무 가슴이 설렜습니다. 나탈리 우드가 나왔던 <초원의 빛>이란 영화를 보면서도 그랬습니다. 대사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면서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여배우를 보고 영화 속에서 너무 좋아하게 된 것이지 인격적인 헌신이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방탄소년단 좋아하는 팬들은 그들의 브로마이드를 가지고 있을 텐데 가운데 김남준이라는 리더가 있습니다. 텔레비전을 보는데 저는 황당했습니다.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BTS가 공연을 하는데 6만 명인가 모였다고 합니다. 여러 방송사에게 보도를 하는데 갑자기 커다란 피켓이 등장이 하는 겁니다. ‘남준아, 사랑해.’ 이렇게 여배우를 보고 좋아서 설레는 것, 가수들이 멋있어서 동경하는 것에도 사랑이라고 느끼게 하는 모든 증상이 눈에 띄게 나타나지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솔직히 얘기해서 BTS를 좋아하지만 BTS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원하진 않잖아요? 그저 좋아할 뿐이지요.
그러니까 사랑은 선을 좋아하고 선에 따르는 질서를 만들고 그 질서의 합치하는 선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것만 그 사람을 선하게 하고 선을 사랑하게 만들고 그 선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때 가슴 벅차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이고 선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명목적으로 다스리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진짜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진짜로 안 다스리시는 나라도 있습니까? 있습니다. 어떤 나라입니까? 입헌군주국의 왕입니다. 외국의 사절단들이 와서 함께 밥 먹을 때 나타나고, 훈장 줄 때에 나타나지만 나라의 중요한 일은 총리가 다 하는 겁니다. 의례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진짜로 실권을 가지고 당신의 정의와 사랑으로 직접 선하게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말씀을 통해서 사랑으로 정복하여 이루어 가시는 나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가장 커다란 숙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따라해 봅시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3일 동안 설교를 했는데 다른 거 다 잊어버리고 하나를 들고 간다면 “내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나라고 하는 티끌 같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선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는 존재가 되고, 나와 만나는 사람이 그 사랑에 물들고,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람을 행복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입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말씀으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일깨우셔서 당신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실까요? 그 원리가 아주 간단합니다.
(예화) 저는 조금 깔끔합니다. 병적일 정도는 아닌데 위생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음식점에 가서 맛이 없어도 아주 청결하면 용서해 줍니다. 그 대신 다시 갑니다. 잠들기 전에 저녁 먹고 잠들기 전까지 손을 씻는 게 5번에서 7번 정도 됩니다. 청결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게 저는 호흡기가 별로 안 좋아서 가습기를 계속 쓰는데 항상 염려되는 게 세균이었습니다. 수없이 청소해야 합니다. 지금은 편리한 게 많이 나왔는데 예전엔 굉장히 까다로웠거든요. 너무 불안해서, 아니 불안하기보다도 개운하지 않아서 끓이는 가습기를 썼었습니다. 그것의 단점은 물이 펄펄 끓으니까 살균은 잘 되는데 계속 물 끓는 소리가 나는 겁니다. 그것도 스트레스였습니다. 그때에 가습기 살균제도 썼습니다. 지금은 제가 쓸까요? 안 쓸까요? 우리 중 아무도 가습기 살균제를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약품이 수많은 사람을 고통으로 몰고 갔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도 문제가 해결이 완전히 안됐기 때문입니다. (관계자들을) 왜 못 잡아넣는지, 진작 그것을 못 했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제가 알기론 어린 아이를 포함하여 10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한 아이는 갓난아기 때 가습기를 사용했는데 지금 청소년기가 지나가는데도 산소 호흡기 달고 삽니다. 안 쓰는 이유는 뭡니까? 이미 그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성이 우리 모두에게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의 빛을 비추심으로써 우리 마음에 사랑을 창조하십니다. 말씀의 빛을 비추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게 하십니다.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들을 사랑하고 나를 진정으로 기쁘게 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해서 내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버리게 하십니다. 진리의 위력입니다. 진리의 힘입니다. 문제는 그 진리가 내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이, 내가 잘못 사랑하고 있는 것들을 버리고, 나 자신을 바칠 가치가 없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을 그만두게 하는 위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 진리가 지성 속에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외국의 저명한 강연가들은 한 번 강연에 몇 억씩 오고 갑니다. 예를 들어, 약 20명의 청중을 위해서 한 번 강연에 약 10억을 줘야하는 외국의 강사가 왔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강연을 합니다. 20명이 모여 앉았으면 한 사람 당 5천만 원씩을 주고 한 시간 강의를 듣는 셈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하는 강의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그것은 한 시간당 5천만 원짜리 소리에 불과합니다.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듣지 않는 사람에게 그런 명강사의 가치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진리의 빛이 우리의 마음에 비춰서 잘못된 사랑을 몰아내고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사랑을 창조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 마음속에 비추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지해(知解)되게끔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하셔야 합니다. 애들이 엄마 젖을 빱니다. 배가 고프면 눈을 감고서라도 입을 막 벌리고 엄마 젖을 찾습니다. 물려주면 무서운 힘으로 빨기 시작합니다. 먹다가 배가 부릅니다. 그런데 엄마 품을 떠나기는 싫습니다. 그럼 젖꼭지를 물고 장난을 하는 겁니다. 그러다 실수를 하면 젖꼭지를 깨무는 겁니다.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진리,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만나면서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잘못된 사랑에 매여서 두려워할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두려워해야할 것은 두려워하지 않던 삶의 그 사슬을 끊어버리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나답게 살 수 있게 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는 것을 자율적으로 결정하고 살아갈 수 있는 상태입니다. 자기 스스로 결정하고 살아갈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이 10년을 교회에 다녀 보십시오. 무슨 변화가 일어나는지 살펴보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에티켓은 좀 나아질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사람이 괜찮은 사람이어야지만 에티켓이라도 생기는 겁니다. 그럼 뭐가 나아질까요? 그냥 교회에서 늙어가는 겁니다. 교회 청소년이 교회 청년이 되고, 교회 청년이 교회 아줌마가 되고, 교회 아줌마가 교회 할머니가 되고, 교회 아저씨가 교회 할아버지가 되는 겁니다. 없었던 신앙이 어떻게 생겨나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비추어 주심으로써) 우리 안에서 사랑을 창조하시는 겁니다. 진리를 통해서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세상을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에는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힘의 균형을 이루는 상태가 오는 것입니다. 이제껏 사랑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아직 충분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던 것들을 잃어버렸을 때 허무 같은 것이 찾아오지 않습니까? 너무 너무 사랑하던 사람에게 차였을 때에 그냥 ‘나쁜 인간’하고 끝내면 되지만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헤어지게 되었을 때엔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텅 빈 것 같겠지요.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진리의 빛을 통해서 하나님 이외의 것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고 나서 진짜 우리가 사랑해야 될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버려두었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다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눈이 멀어서 세상 것을 사랑하고, 눈이 멀어서 나를 사랑하던 사람이 이제 눈이 뜨게 되면서 자신이 얼마나 추한 인간인가를 알게 되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다스려 가십니다. 나를 통해서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도를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결국은 선한 사람이 되어가면서 하나님 안에서 행복해 하고, 그렇게 하나님 사랑에 물들어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자녀는 너무 행복한 것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좋으신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결론을 맺겠습니다. 왜 기쁨을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까? 어차피 한 번 태어나서 죽는 것은 우리의 마음대로 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은 어떻게 보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 힘들게 살아온 인생을 앞으로 한 500년 쯤 산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아직 10분의 1도 못 살았잖아요. 얼마나 힘들겠어요? 얼마나 많은 일을 겪어야 할까요? 다행히 하나님이 대충 100년 안에는 우리를 다 데려가십니다. 얼마나 좋아요? 감사하잖아요. 그렇지만 그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에 오늘 살아있는 날들이 우울해질 수는 없습니다. 그럴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우주적인 실현을 꿈꾸고 삽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못 볼 가능성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늘 하루 기쁨 없이 살아갈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사소한 행복에 즐거워하고 감사하고, 살아있고 호흡이 있음에 내가 원하는 곳을 갈 수 있고 내가 원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에 기뻐하며 사는 것입니다. 가슴을 활짝 펴고 한 번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떠보십시오. 자기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이 아름다운 광경을 보십시오. 눈 먼 사람은 보지 못하는 광경입니다.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수많은 소리들이 들립니다. 귀 먹은 사람들은 들을 수 없습니다. 혀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쓰고 시고 달고 짠 그 맛의 향연들을 느껴보십시오. 튜브로 영양분을 허리에 공급해야 하는 사람은 맛 볼 수 없는 즐거움입니다. 그런 것들에 매순간 감사하는 겁니다. 천년만년 살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죽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으로 남겨두신 것에 대해서, 아직은 살아가야할 이유가 있어서 여기에 남겨 두신 것에 대해서 감사합시다. 살아있는 동안에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갑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평화롭게, 심지어 강아지 한 마리에게까지도 호의를 베풀며 살아가는 겁니다.
왜 기쁨을 잃어버렸을까요? 보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삶에 의미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보람을 찾기 위해서는 돈과 상관이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돈과 상관없는 데서 오는 보람이 진짜 보람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보람이라면, 못 벌었을 때는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돈과 상관이 없는 것에서 자기를 완성해가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위해서 이바지 하는 삶을 사는 겁니다. 거기에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고 기쁨을 느낄 수 있을 때 그것은 아무도 뺏어갈 수 없는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삶이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는 삶을 견딜 수 없어야 합니다. 의미가 있으면 나는 그 길이 어떤 길이어도 간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자녀들의 불타는 마음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한 번 밖에 없습니다. 연습을 한 후 인생을 살아본다면 조금 잘못돼도 괜찮습니다. 배구나 농구, 혹은 다른 구기 종목의 선수들이 몸을 풉니다. 그리고 슛을 쏴보기도 합니다. 그때는 부담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휘슬이 울리고 플레이를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생은 그런 연습 타임이 없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든 삶이 우리의 인생이고 어느 순간 그 시간은 끝납니다. 한 번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가장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그들이 행복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당신 안에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행복하기를 원하시면 원하실수록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모든 사람이 당신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당신을 떠나는 것이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품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수련회를 마치면서 당부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행복하게 살라. 그리고 그대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행복하게 하라. 이것이 인생의 기쁨이다. 우리 주님은 바로 이 행복을 선사하기 위해서 당신이 불행을 당하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