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가 있는 복음 (청년 수련회)
(2013년 설교모음)
승리가 있는 복음 1 (2013.08.04 청년 수련회 저녁)
설교기간|201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8월 28일
목 차
승리가 있는 복음 2 (2013.08.05 청년 수련회 새벽)
승리가 있는 복음 3 (2013.08.05 청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 있는 복음 4 (2013.08.06 청년 수련회 새벽)
1. 우리를 구속하심(롬 8:31-34) 2013.8.4 청년 수련회 (저녁) 1
2. 성도, 신실한 자들(엡1:1-2) 2013.8.5 청년 수련회(새벽) 17
3.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롬 8:35-37) 2013.8.5 청년 수련회(저녁) 26
4. 세상을 이긴 믿음(요16:33) 2013.8.6 청년 수련회(새벽) 38
5. 끊을 수 없는 사랑(롬 8:38) 2013.8.6 청년 수련회(저녁) 46
승리가 있는 복음(청년) 1
승리가 있는 복음 1 (2013.08.04 청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 있는 복음 2 (2013.08.05 청년 수련회 새벽)
승리가 있는 복음 3 (2013.08.05 청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 있는 복음 4 (2013.08.06 청년 수련회 새벽)
승리가 있는 복음 5 (2013.08.06 온가족 청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있는복음 2013. 08. 4(주일) 첫째날 저녁
< 우리를 구속하심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1-34)
I. 본문해설
-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구조 가르침
- 율법주의 사고 복음 교리로 혁파함
- 생명의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들
- 피조물들의 구원과 인간의 영광
-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그 자녀들
II.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
A. 자기 아들을 내어주심
- 아들을 아끼지 않으심
- 모든 것을 내어주심
- 택하시고 의롭다 하심
B.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
- 고발할 수 없는 자녀들
- 정죄 받지 않는 자녀들
-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
-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
-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
III.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
- 믿음으로 그 사랑 안에 살아감
- 언제나 거기서 기다리심
IV. 결론
승리가있는복음 2013. 08. 5(월) 둘째날 저녁
<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5-37)
I. 본문해설
II.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김
A. 세상과 신자의 현실
- 환란, 곤고, 박해
- 기근, 적신, 위험, 칼
- "죽임을 당하며‥도살할 양 같이"
- 시44:22‥이방에 짓밟히는 선민
B.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 "그러나" 앞의 상황을 뒤집음
- "이 모든 일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승리하게 하심
C. 승리하는 삶의 비결
-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 성화의 진수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 영적 자원의 공급과 신비한 연합
- 사랑의 결과로서의 연합의 누림
III. 결론
승리가있는복음 2013. 08. 6(화) 셋째날 저녁
< 끊을 수 없는 사랑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I. 본문해설
- 십자가의 구속으로 나타난 사랑
- 은혜를 주사 이기게 하시는 주님
- 경건의 실천과 성화의 중요성
II.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 우리가 확신하는 바
A. 인생의 역경과 대적들
- "사망이나 생명이나": 생사 여탈의 문제
- 천사들과 권세자들, 능력: 영적 피조물들
- 현재 일과 장래 일: 인생의 역경들
- 높음이나 깊음: 영적 침체와 번영
- 다른 어떤 피조물: 하나님을 거스러 해치지 못함
B. 끊을 수 없는 사랑
- 사랑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
- 나쁜 일이 우리를 악하게 하지 못함
- 스스로 부패하여 악으로 흐르게 됨
- 나쁘게 보이는 모든 것들은 선의 불꽃의 타오르는
소재임(롬8:28)
C.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
-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성부
- 자기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성자
- 자기 사랑을 아낌없이 주신 성령
III. 적용과 결론
-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신자들
- 스스로 부패함으로 사랑을 떠남
- 우리의 유일한 자산, 하나님 사랑
승리가 있는 복음(청년) 1
승리가 있는 복음 1 (2013.08.04 청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 있는 복음 2 (2013.08.05 청년 수련회 새벽)
승리가 있는 복음 3 (2013.08.05 청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 있는 복음 4 (2013.08.06 청년 수련회 새벽)
승리가 있는 복음 5 (2013.08.06 온가족 청년 수련회 저녁)
우리를 구속하심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1-34)
녹취자: 장소연
I. 본문해설
로마서는 원래 구원에 대한 체계적인 가르침을 사도로부터 직접 받아본 적인 없는 교인들을 위해서 체계적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쓰여진 서신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난 후에도 여전히 복음에 입각한 생활이 아니라 율법적인 사고에 의해서 살아가던 유대인들을 권면하기 위한 의도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사도바울이 고린도서에서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외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내적으로는 생명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생명의 성령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피조 세계 전체를 구원하고자 하는 우주적인 계획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이 세계는 모두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위해서 지어졌고, 그것들은 개별적인 사물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지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모든 사물들이 그물망처럼 얽히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자기와 함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고, 그들이 누구이며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인가 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어야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러니까 인간 이외의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들을 엄격하게 말하면 사랑의 대상입니다. 사랑의 대상은 오직 둘 밖에 없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과 인간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인간을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계획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이바지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서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가장 절실한 답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시차가 바뀌었는데 잠이 거의 안와서 30분 자고나서 밤새도록 계획에도 없는 철야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밤에 깨어 있으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정말 필요하고 그리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인간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정말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세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확실한 지식, 하나님이 누구이고, 나인 인간이 누구이고,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는 이웃이 누구이고, 이 세상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올바른 지식, 그 지식에 참으로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특별히 개혁 신앙 혹은 개혁신학이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개혁된 신학 혹은 개혁된 신앙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신학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이 세상의 학문을 통해서 얻는 모든 지식들이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데에 이바지하고,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데 이바지하고, 또 이 세상의 사물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식들은 모두 한 가지로 얽혀있기 때문에 하나에 대한 지식은 또 다른 지식을 증가시키고 이 속에서 사람들을 진정으로 확고한 말하자면 우리의 삶의 기초가 무엇인지 하는 지식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지식만 있으면 충분한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뜨거운 경건 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올바로 알 뿐만 아니라 아는 그것이 내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경건으로 역사해서 그래서 그 올바른 지식이 나로 하여금 그 올바른 지식 따라 살 수 있는 어떠한 신비한 힘들을 우리에게 공급해 줄 때에 그 다음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순결한 생활입니다. 여기에서 순결하라고 하는 것은 죄가 전혀 없다는 뜻이기라기보다는 순전한 삶입니다. 동기와 목표, 그것을 향한 실제적인 삶의 행동과 원리들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지기를, 사실은 온전하지 않지만 그러나 온전해지기를 끊임없이 힘쓰는 그 기준을 가지고 있는 생활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체계와 지식은 사람들에게 인식되고 우리들이 보여주는 순전한 삶은 사람들의 눈을 통해서 받아들여지고 사람들에게 이해되어집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신앙의 사상들을 이해하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우리의 삶을 감각적인 눈을 가지고 보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우리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실제 순전한 삶 사이에서 우리는 수없는 괴리를 느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아예 그런 적합한 지식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순전한 삶을 살아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그런 삶의 어떤 기준 자체가 자신에게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떻게 보면 시작도 안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 관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면서 우리에게 마치 천국은 땅에다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길가에 뿌려진 씨가 나오고 그 다음에 돌짝밭에 뿌려진 씨가 나오고, 그리고 가시 떨기에 뿌려진 씨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옥토에 뿌려진 씨가 나옵니다. 땅에 뿌려진 것은 생명이 전혀 움트지 않았지만 그러나 돌짝밭에 뿌려진 것은 살아있는 기운이 어느 정도는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거기에 싹이 나서 잠시 자라다가 햇볕이 뜨거우니까 타서 죽어버렸습니다. 가시나무 떨기에서는 좀 더 많은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올라오다가 계속 막혀서 그래서 결국은 열매에 열매를 맺는 결실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첫 번째 앞에 나오는 세 개의 신앙은 모두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아닙니다.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반드시 성장과 그리고 성화를 동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떤 지식의 일부분에 대해서 감동을 느끼고. 또 감동을 느낀 후에는 자신의 삶에 적용해서 그렇게 살아야 했다고 실제로 노력하는 때도 있지만 그것이 모두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시는 의도였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지 못한 신앙의 세계에도 감동, 깨달음, 등등의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아는 것과 실제로 순전한 삶이 이렇게 합치하지 않는 것 같은 모순과 부조화 속에서 우리들은 수많은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 어떤 경우에는 처음부터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영적인 성장이 없는 것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분명히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계속 실패하고 성화 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해서 그래서 영적인 성장이 거의 답보 상태인 경우가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죄의 지배를 받은 생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실패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이면서도 어둠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구원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에 대한 뜨거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는 매일 기도하는데도 불구하고 실제의 신앙생활에서는 승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34절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려고 하고, 앞으로 이틀 동안 35절부터 39절을 설교함으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어떤 원리 하에서 이루어지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바로 우리가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즉,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반드시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 확신의 기초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우리들이 풀기 전에 먼저 승리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뭘 의미하는 것인가? 승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미국 사람들이 이라크 전쟁을 치르고 어쨌든 자신들은 승리했다고 축제의 분위기에 들떠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이 커다랗게 항공모함에다가 내건 얼레에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we are prevailed.” 무슨 뜻입니까? “이제 우리는 우세하게 되었다. 적들을 모두 뒤덮어 우세하게 되었고 그래서 적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덤비지 못하게 된 상태에 이르렀다” 이게 바로 승리하였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자,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한다고 할 때에 궁극적으로 무엇에 대해서 승리한다는 것일까? 성경은 우리가 싸워야 할 전투의 대상을 셋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본질적인 세력으로써 마귀입니다. 이 세상이 결국은 하나님의 통치와 경륜 안에 있지만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커다란 징계를 받고 파멸에 이르게 되는 순간 여전히 사단의 세력들은 남아 있어서 그래서 복음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분깃도 없지만 그러나 유혹에 지고 죄를 따라 가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직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죄의, 악의 근원으로 떠오릅니다. 그는 범사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훼방하는 자입니다. 그 마귀는 수하에 수많은 졸개들을 거느리고 지금도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협하고 이 세상의 문화와 사상 속에 침투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력이 바로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첫 번째 우리의 대적입니다.
두 번째는 이 세상입니다. 성경에서도 세상이라고 하는 말은 죄에 대한 개념이 없이 순수한 하나님의 창조의 결과물로서 우리에게 제시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죄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세상으로 대두됩니다. 세상 모두가 다 죄악 덩어리가 아니라 이 세상이 정신을 지배하는 것들이 바로 죄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과 말하자면 대적하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번에 휴가 중 르네상스를 좀 공부하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갔습니다. 만족스럽게 공부를 못했는데 그렇지만 상당한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제 나름대로 그래서 멀지 않은 때에 다시 여기를 한번 방문해서 그래서 르네상스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을 한번 열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르네상스의 역사 앞에 가슴이 벅차보지 않은 사람은 인간이 누구인지를 아직 이해를 못한 사람입니다. 르네상스의 결과에 대해서 슬퍼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대답을 찾았다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자 라고 결심하고 돌아왔습니다.
어떤 사람한테는 이 르네상스를 아주 좋게만 묘사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하나님의 신본주의에 대항한 인본주의의 원흉인 것처럼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종교 개혁자들이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설명하기가 매우 힘들어집니다.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니까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고 역사가 그렇게 많이 흘러갔어도 정말 정의하기 힘든 것이 휴머니즘이라고 하는 르네상스의 산물입니다. 휴머니즘을 뭐라고 정의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그 이 세계를 모두 뒤덮은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지는 플로렌스 곧 오늘날의 피렌체였고, 그리고 이것을 사상화시켜서 온 유럽세계에 전파했던 도시는 베네치아였습니다. 이 두 도시가 없었더라면 그러면 사실은 르네상스 운동은 이렇게 현대의 자유 국가를 만들기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설교에 도움이 되는 한도 내에서 간단하게 정리를 하고 넘어가자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 르네상스는 야누스처럼 두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까지 종교개혁 이전의 로마 교회의 오류와 인간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들어 주는 밝은 측면과 또 한편으로는 그 해석을 타고 들어온 수많은 부패와 향락과 타락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어렸을 때에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읽으셨을 것입니다. 아마 한번 읽어보시면 ‘헐’ 하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얼마나 기존의 종교 체계와 이러한 교회, 이런 권위들을 아주 순식간에 휴지조각처럼 만들어 버리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맘마미아를 보는 느낌입니다. 맘마미아 그게 결국은 인류 사회 속에 있는 도덕이나 이것을 한 순간에 깔아뭉개면서 아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희화화시켜 버리는 그런 것을 데카메론이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그런 야누스의 얼굴에서 밝은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깊은 죄와 이런 것들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제가 떠나오기 직전에 피렌체에서 아주 중요한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도저히 일정상 참가를 할 수 없고 나중에 다시 가보려고 하니까 비행기 표가 너무 비싸서 결국 못 갔는데 그게 뭐냐 하면 “섹스 앤드 드러그 인 르네상스”라는 전시회였습니다. 그러니까 르네상스의 물결이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상한 것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르네상스와 함께 수많은 마약들과 향락주의, 그리고 특별히 성적인 말하자면 방탕들이 함께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보나롤라 같던 사람이 그렇게 치열하게 개혁을 외쳤던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모든 대처가 완전히 옳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걸 이해할 수 있는 측면들이 분명히 르네상스 속에는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뭡니까? 하나님을 향한 의존을 떠나고 나니까 결국은 인간의 행복과 인간의 이익과 관련된 모든 사고의 체계들을 지지하다 보니까 그 속에 죄의 영향들이 스며들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세상의 정신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아주 역설적인 존재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사랑하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하고 구속하여야 할 존재이고, 또 한편으로는 거리를 두고 그리고 그들과 연합하지 말아야 하고, 끊임없이 그들을 대적해야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이중적인 존재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날 수는 없고, 떠나서도 안 되고 세상 속에 살면서도 결코 그 세상의 문화 속에 함께 살면서도 그 문화를 물 먹듯 우리들이 마실 수 없는 것은 마치 우리가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뜨거운 여름에 물 위에 있으면서도 물 때문에 그 배가 떠가면서도 그 바닷물은 마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이중성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어느 부분까지가 우리들이 이해하고 용납해야 되는 부분이고, 어느 부분까지 우리들이 대적하고 싸워야 할 부분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그 지혜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쉬운 쪽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세상과 교회는 동일하다. 또 한쪽으로는 뭐냐 하면 세상은 다 우리의 대적이요, 마귀다. 이쪽은 그렇게 많이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위대한 구원의 계획을 모두 성취해 갈 수 없습니다. 결국은 죄입니다. 마지막에 성경이 제시하는 이겨야 할 승리의 대상이 뭐냐 하면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고, 이 세상의 문화와 현실을 보면서 우리들이 고통스러워하고 타락했다고 말하지만 우리 자신도 거기에 참여하면서 그것들을 만들어 내가고 있는 당사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세상을 향한 사랑이 공존하고 하나님의 통치와 세상의 통치가 공존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올바른 지성과 선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바로 이런 우리 안에 있는 세속으로서의 우리 자아를 극복하고 이겨야 할 전투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고 말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결국은 승리하는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죄의 근본적인 원인인 마귀와의 대적에서의 승리이고,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의 승리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지 않으려고 하는 부패한 자신과의 싸움에서의 승리인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구원받는 우리의 현실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왜? 사방으로 우겨 싸여 있고 마치 우리의 처지는 홈그라운드가 아니라 남의 나라에 가서 축구를 하면서 수많은 다른 나라 사람들이 에워싸고 우리의 대적들을 응원하고 우리가 뭐라도 좀 잘할라치면 깡통을 집어 던지고 술병을 집어 던지는 것 같은 그런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실에 대해서 아주 정확하게 우리에게 묘사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여기에 나온 씨름이라고 하는 것은 희랍어로 ‘팔레’(πάλη)입니다. 손에다가 가죽위에 쇠 같은 것을 박아서 두르고 그 다음에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팔레 경기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씨름이 뭐 이렇게 한판 승, 두 판 승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씨름이라고 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격투는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영들에게 대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실로서의 영적 전쟁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소극적인 태도로 우리의 삶의 현실을 바라보면 사실은 사기가 현저히 저하됩니다. 우군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패배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나 혼자고 내 친구들 모두 승리하는 삶을 산다면 내가 정말 비정상이라고 그러겠는데 내가 뭔가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가면 얘는 더 죽을 맛입니다. 주위에 봐도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살면서 승리하면서 사는 이 생활은 가장 선교적인 삶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존재하는 것 자체가 선교적인 삶이란 것입니다. 왜?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실패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이 삶 이상의 삶이 있다는 것을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교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똑같습니다. 학교에서도 공부 열심히 하고 싶어 하는 애들은 밥을 먹어도 공부 잘하는 애들하고 먹고, 놀아도 공부 열심히 하는 애하고 노는데 공부하기 싫은 애들은 그런 애들하고 어울리는 게 되게 부담스럽습니다. ‘어저께 밤새도록 수학을 풀었는데’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자기는 밤새도록 게임을 하다 새벽에 잠들었는데. 그러니까 어디로 가냐 하면 자꾸 안하는 애들 쪽으로 가서 걔네들끼리 뭉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영적으로 자기가 침체되었을 때에 성령 충만한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서로 끌어안고 있어도 자기만 왕따 당하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자기하고 상태가 안 좋은 사람 쪽으로 계속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고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이야기 하니까 항상 나는 한참 얘기 끝에 나오는 결론 “에이 그러니까 영화나 보러 가자” 그러니까 결국은 뭔가 시원한 해답이 안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도 도성인신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내가 은혜 많이 받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면 그런 사람들하고만 어울리지 말고 가서 정말 곤고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오히려 따뜻하게 해주고, 위로해 주고, 가만히 들어주기만 해도 그 사람에게는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자기보다도 더 어려운 처지 속에서 저렇게 소망을 가지고 기쁨으로 사는 그 근거가 무엇일까 이것을 궁금하게 여기에 만들어주는 것 자체가 훌륭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것을 하라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시고 그리고 말하자면 교회의 여러분을 한 지체로 삼으신 것입니다.
어쨌든 그러면 이제 우리들이 극복하고 이겨야할 대상이 마귀와 세상과 나 자신이다 그러면 결국 그 싸움이 너무 힘들게 느껴지는 그 마지막 궁극적인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사실은 마귀나 세상이나 그리고 자아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흔히 자아가 강하다고 그러는데 약한 자아를 가진 사람이 누가 있는지 나는 궁금합니다. 모두 다 강력한 철통같은 자기 아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모두 다 그런 강하고 완고한 자기 자신과 마주해야 하고 그것이 죄의 상태에서 우리에게 커다란 부담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현실적으로만 생각하면 우리는 우군이 없고 저것들은 간고하게 뭉쳐서 연합전선을 형성하면서 달려오는 것입니다. 삼켜버릴 듯이 달려오는 것입니다. 그것과의 싸움에서 쉽사리 이길 것 같은 그런 느낌이 안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구인지를 우선 정확하게 아는 것, 그래서 우리가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들이 충분히 이 세상과 싸워 이기며 나와 싸워 이기며 살아갈 수 있게끔 우리에게 허락하셨는지 그 근거를 이해하고 그 다음에는 원리에 맞게끔 승리할 수 있는 삶을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차분한 기초, 그리고 기초 위에 구축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들이 함께 있지 않으면 승리하는 생활을 현실적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것입니다.
II.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도대체 승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주셨다고 했는데 그 근거가 무엇이냐?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나옵니다. 이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가슴 벅찬 어조로 이 고백을 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우리들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선 그는 바로 7장 마지막 부분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나를 이 죄의 몸에서 건져 내리요” 라고 탄식을 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구원받기 전 사도바울이 자연인으로서 죄에 져서 신음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판단을 하는데 사실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자신이 쭉 자신으로서 써 내려가다가 갑자기 자신을 구원받기 전의 자신으로 투사시킨 그런 문학적인 복잡한 기법이 본문에 동원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와 꼭 같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성화의 길을 걸어가던 사도 바울이 이 죄의 강한 세력을 느끼며 그 속에서 갈등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위대한 사도라고 해서 항상 성령 충만하고 우리들이 범접할 수 없는 수준 높은 삶을 살기만 했다고 우리는 그렇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내적인 갈등 속에서 죄의 강한 세력을 느끼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한계 속에서의 몸부림이 바로 고백이고, 이게 중생자의 고백입니다. 칼빈, 존 오웬 비롯해서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이것을 그렇게 해석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반전이 주어집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반전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다시 12절에 한 번 더 반전이 주어지는데 그게 뭐냐 하면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는 반전이 주어집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는데 그런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육신의 행실을 따라 살면 반드시 죽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한 자로서 자신이 느끼는 이 곤고함이 어떤 원리 속에 이루어지는 지를 8장에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좁은 의미에서 보면 매일매일 우리의 삶은 죄와 싸우고 승리하면 생명이 있고, 죄와 싸워서 지면 실패가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은 이러한 약한 처지에 놓여있는 우리들을 전적으로 우리의 힘으로 의지하여 싸우라고 하나님이 외롭게 우리를 내동댕이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주셔서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서 결국은 우리들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고, 마지막에는 결국은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결국은 영화롭게 함으로써 당신의 구원을 완성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주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로 31절서부터 말하자면 이 모든 갈등을 초월하는 커다란 감격의 탄성이 터집니다. 뭐라고 하냐 하면 “그런즉 이 일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러면서 쭉 승리의 찬가가 나오는 것입니다.
A. 자기 아들을 내어주심
그러면 매일매일 우리들이 신앙의 싸움에서 지기도 하고 실패도 하지만 또 이길 때도 있지만 그러나 더 넓은 측면에서 보면 결국 우리는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 주신 사람들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전 성경에는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나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우리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에 비추어 볼 때에는 우리가 그대로 그 죄에서 탕감을 받고 놓여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기 위한 심판이 필요했고, 그 심판을 위해서는 우리들이 인간의 몸으로 범죄 했으니 완전한 인간의 몸에 의한 속죄가 필요했고,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를 구원하시는 방법을 당신 스스로 세우셨습니다. 인간의 철학이나 도덕이나 사상이나 수양이나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이루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직접 당신이 만족할 만한 구원의 방법을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를 범한 모든 인간을 위한 대속의 재물로서 자기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에게 이것을 강요한 일은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 당신 자신이 스스로의 성품에 모순되지 않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고 대신 죽임을 당하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에 의해서 마지못해서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 한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당신도 기쁘게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기쁨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그렇게 사랑하신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까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여러분은 대부분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아이가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간혹 여러분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는 부모든지, 혈육이든지, 친구든지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볼 때에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여러분도 느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같이 불완전한 사랑이 아니라 완전한 신적 사랑 안에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형벌을 받고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나이까” 라고 울부짖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하면 완전할수록 아들의 죽음을 보는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하는 동안 삼위일체의 희생으로 수렴이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본질적으로 고통을 받아서 무엇인가 신의 성품에 변화가 왔다기보다는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는 그 구원의 행동을 통해서 그것을 바라보는 신자의 마음속에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의 정동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같이 완악한 죄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사건은 우리 기독교가 영원히 돌아가야 할 모든 구원의 정초고 모든 하나님의 이 세계를 향한 재창조의 역사의 초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일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위해 다시 사신 것을 기리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새 가족 반에서 공부했겠지만 모든 승리하는 삶의 궁극적인 기초는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만약에 여러분이 나는 매일매일 지고 있고 실패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면 바로 그 실패하는 삶의 저변에 제일 먼저 더듬어지는 것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감격의 상실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하나님에 대해서 지금처럼 많이 알지 못하던 때, 주기도문 하나 가지고 넉 달씩 다섯 달씩 공부하지 않았던 때에도 승리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지식은 모자라지만 지금 없는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떨리는 마음, 다 갚을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감사, 그래서 자신의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죽이는 삶,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지식이 모자랐어도 충분히 승리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지식이 너무 많기 때문에 성령 충만히 살아졌다고 합니다. 머리에 아무것도 없으면서도 성령도 없는 사람 많습니다. 더 많습니다. 지식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십자가의 생활이 여러분 속에 상실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오게 된 것입니다. 뜨겁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붙잡혀 사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논증은 너무나 단순한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에게도 자기의 아들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신데도 당신의 아들보다 더 소중한 것은 하나님에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도록 하나님이 내어주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을 때 당신의 공의로 그를 처절하게 심판하셨습니다. 그게 하나님이 하신일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아들이 미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분노를 푸심으로써 대속하는 우리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당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형벌을 내리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다시피 사랑하고 소중하게 섬겨주셨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다른 것들을 왜 안 주시겠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아깝겠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구한 사람에게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그러면 결국은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죽음 안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겠다는 약속을 실현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 어떤 것도 아들보다 소중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만약에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위해서 영적인 자원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안 주시겠습니까? 육적인 자원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안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주실 능력이 모자라겠습니까? 구원은 기본이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주지만 필요한 나머지 것들은 매우 소중하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받을 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우리는 그렇게만 볼 수 없습니다. 왜? 십자가 사랑보다 위대한 것은 없고 아들의 죽음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아들을 우리 위해 주셨기 때문에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모든 것을 약속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는 신앙생활, 결국은 여러분이 신앙생활에서 실패하는 것은 영적인 자원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자원의 문제 아닙니까? 그러면 그런 자원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실패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런 자원들을 주시지 않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택하고 의롭다 하신 사람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까지 내어주셨는데 나머지 무엇을 우리를 위해 아끼시겠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모든 것이 우리를 위해 주어질 것이라고 하는 은혜의 약속이 우리에게 보증되어 있는 것입니다. 죄가 발목을 잡고 있다면 하나님은 용서라고 하는 자원으로서 우리를 거기에서 끌러주십니다. 그 속박에서 끌러주십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자원이 필요하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면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자원을 주십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최소한 하나님이 자원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실패하는 삶을 운명처럼 사는 일은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 자원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나 같은 인간 매일매일 실패하고 죄 가운데 떨어지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리고 이 세상의 자원도 모자라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치이며 살아가고 있는 삼류 같은 인간인데 오늘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주실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우리를 위해 섬겨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끌러주셨고, 십자가에서 흘리신 당신의 아들의 보혈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 커다란 죄의 소굴에서 건져주셨고, 승리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뒤이어 우리도 그 승리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설교한 것처럼 수많은 문제들을 이 세상에서 우리는 만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수많은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답도 그 문제가 만들어진 이 세상 구덩이에서 생겨나는 걸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시궁창에서 먹을 거를 찾고, 고개를 파묻고 돌아다니는 강아지처럼 그 속에서 무엇인가 해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며 미친 듯이 찾습니다. 거기 없습니다. 거기에 없습니다. 결국 그 답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역경을 허락하시고 곤고하게 하시는 것은 그렇게 강아지가 쓰레기 더미에서 개 코를 쳐 박고 그 속에서 뭔가를 찾아내려는 것처럼 실패한 자신의 삶의 상황에서 답을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이제 땅엣 것을 바라지 말고 위엣 것을 바라라.”
(찬양)
은혜와 긍휼을 열방 중에 비추소서
빛 되신 주의 말씀
언제나 그래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찢겼을 때 결국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야 자기가 왜 실패했는지 그리고 결국은 문제에 대한 해답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고 그 답을 자신에게 적용할 때 지혜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제일 먼저 여러분의 마음을 가득 채우십시오.
나중에 이제 꼭 한번 특강을 하겠지만 르네상스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기독교에 던져 준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인간이 르네상스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완전 불신자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세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런데 중요한 종교개혁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던 중요한 인간에 관한 메시지가 이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르네상스의 공헌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래 인간은 타락했다. 그래 인간은 죄인이다. 하나님 창조의 계획을 좌절시킨 장본인이다. 그 죄의 비참한 결과를 일평생 짊어지고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에게는 하나님이 부여한 존엄성이 남아있다.” 이 메시지가 사실은 종교개혁을 일어나게 했던 르네상스의 중요한 역할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추해지고 타락하고 심지어는 여러분 주위에 아직까지도 예수를 안 믿는 불신자, 아니 이교도까지 있다고 치자, 심지어는 이교도보다도 더 나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래도 여전히 그들은 존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존귀한 인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인식이 로마 교회에 의해서 다 인간론에 덧칠이 되면서 모두 말하자면 실제적으로 지워져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되살려 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매일매일 실패하고 죄에 지는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만물의 찌꺼기요, 이 세상의 가장 더러운 죄인이라는 사실만 생각하지 말고, 내가 비록 이렇게 죄에 대해서 지고 실패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나의 존엄성을 말살시키지는 못한다. 여전히 나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다. 그래서 충분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 앞에 존귀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내어주신 것이다 이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 집회가 끝나고 기도할 때에 한번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래서 “아, 내가 매일 실패하고 지고 있지만 그러나 나는 여전히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시기까지 나를 위해 희생해 주신 그래서 구속하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런 죄와 실패를 떨쳐버리고 살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여러분 속에서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B.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
두 번째는 그런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신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니라” 자, 여기에서 고발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면 로마서의 문맥에서 비춰볼 때에 사람을 누가 고발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성경에서 제시하는 것은 크게 율법과 양심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법도에서 어긋났는지 어긋나지 않는지를 재는 척도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정죄를 하고 이 정죄를 할 때에 고소를 받아서 정죄를 합니다. 그 고소하는 역할을 누가 하냐 하면 양심이 하는 것입니다. 양심이 끊임없이 고소를 하고 율법은 그 양심에 의해서 죽음에 해당되는 죄를 지었다고 하는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도록 짓밟는 역할들을 마귀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인데 누가 능히 고발을 할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셨는데 누가 그들을 고발할 수 있겠느냐, 더욱이 누가 정죄할 수 있겠느냐” 왜?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는데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율법 안에 태어나사 율법에 복종하시고 그 율법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구속을 성취하셨는데 어떻게 그것들이 우리에게 송사할 수 있고, 여전히 정죄할 수 있느냐 얘기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것들은 영원히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다는 판결을 내릴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선택하신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시간에만 예수님이 간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기도하지 않는 순간에도, 기도에서 멀어진 때에도, 심지어는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있는 때에도 지는 순간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주님의 보좌 우편에서 그의 간구를 거절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 빌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하나님의 커다란 복락인 것입니다. 고발할 수 없는 자녀들, 정죄 받을 수 없는 자녀들을 하나님이 다시 그리스도를 통해 살리셨고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금 우리를 위해 구속사역을 다 이루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구속의 계획을 따라 살도록 우리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 아버지께 빌고 계십니다.
신학교 교수로 있을 때에 애들이 하도 말을 안 들어도 눈물 나오게 하는 방법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걔네 엄마 얘기를 하면 됩니다. “권사님이 너 학교 보내놓고 새벽마다 얼마나 눈물로 기도하시는데 너 그렇게 공부도 안하고 말썽만 부리면 되겠니?” 그러면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왜? 자신이 신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할 때만 엄마가 기도하고 있는 게 아니라 사고치고 까불고 다니는 그 순간에도 엄마는 그날 새벽에 가서 서울로 보낸 우리 아들 좋은 목사 되게 해 달라고 그날도 눈물로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을 때뿐만 아니라 기도하지 못할 때, 기도하고 있을 때 뿐 아니라 기도하지 않을 때에도 보좌 우편에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는 계속됩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비시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는 것, 경건은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져 그 분을 공경하고 싶은 것이 경건의 핵심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수 있을 때뿐만 아니라 기도할 때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조차도, 심지어 범죄하는 순간에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왜? 우리는 구원 받기 위해 예수님을 위해 아무것도 바친 희생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당신 자신의 생명을 주고 사셨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그렇게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시는 것입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IV.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죄로 말미암아 패배하는 생활로 하나님의 약속의 복음을 덮는 것은 가장 나쁜 불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고, 하나님은 우리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을 추호도 후회하신 적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월이 많이 흐르고 역사가 바뀐다고 해서 우리의 승리하는 신앙생활의 원리도 변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저주신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이 사랑을 당연한 사랑이 아니라 이상한 사랑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에게 베풀어 주셔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을 뿐만 아니라 내가 게으를 때에도, 시련에 처할 때에도,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할 때에도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 간구 하셨습니다. 이 고백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과 우리의 현실은 언제나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 많은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세상이 우리에게 어떤 좋을 것을 주겠으며 하나님 없는 불신앙이 우리를 어떻게 예수님께로 인도하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순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합시다. 우리가 이렇게 비천한 인간인데도 여전히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창조하신 당신의 형상에 존엄성을 가진 인간들이고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며 어두움 속에서 살아서는 하나님도 기쁘지 않고 우리도 행복할 수 없게끔 그렇게 새로 지은 바 된 인간들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오십시오. 다시 하나님께 승리하는 삶을 달라고 간절히 빌면 하나님이 반드시 여러분에게 새로운 회복을 주실 것입니다.
성도, 신실한 자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엡 1:1-2)
녹취자: 김세나
오늘 아침에 이 두 구절을 모두 해설하는 것은 나의 설교의 목표가 아닙니다. 저는 오늘 읽은 이 본문 중 특별히 성도가 어떤 사람으로 기대되는 사람들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 드리려 합니다. 사도는 에베소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아마도 로마에 감금된 그 때 이 편지를 썼던 것 같습니다. 당시 에베소는 엄청나게 커다란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에베소에 가보면 그 당시 그 도시가 얼마나 대단한 도시였는가 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5만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고 하는 켈수스의 도서관의 흔적이 남아있고 거기에서 학생들은 열심히 학문을 탐구하였을 것입니다. 수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어마어마한 원형 극장도 있습니다. 도시들이 완벽하게 형성이 되어서 지금도 그 극장 주변으로 아주 아름다운 길들이 놓여 있고 잘 정리된 도시 계획 속에서 그 마을들이 축조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는 시골 동네가 아니었습니다. 로마 시대 때에 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하고 큰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도시가 크고 번영했다면 당연히 사람도 많이 살았을 것이고, 모든 시대에 그러하듯이 세속주의의 물결도 그 도시 안에 많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에 어떻게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는가 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부흥이 일어나고 그리고 거기에서 마술하는 책들과 모든 더러운 것들을 태워버리는 화영식이 있고 거기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확증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속에서 사람들은 세속의 정신을 따라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대등한 순접을 사용하여 ‘그리고’로 연결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동격을 나타내는 ‘and’ 입니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라는 것입니다.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서 성도를 향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 혹은 특정한 지식을 신봉하는 자, 이러한 사람이 아니라 신실한 자입니다. 그것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자,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으로서 성도,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성도는 거룩함을 입은 무리들입니다. ‘하기오이’라고 하는 이 단어는 사실 신약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가 아니라 이미 구약성경에서 풍부하게 사용된 단어이고 그것이 바로 ‘하시드’(dysij;)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입은 그 백성들을 바로 거룩한 백성들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고 하는 이 이름은 자신이 거룩해져서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어떤 사람들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일방적 은총에 의해서 구별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그의 삶의 방식이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어서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과는 분리되어 보이는 그 사람, 그 거룩한 무리들이 바로 성도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거룩한 무리다’라고 할 때 ‘거룩하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총의 산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알고 그에 합당하게 자신이 변화됨, 변화되어 가고 있는 모습 그 안에서 나타나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질들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이 미천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도의 모습입니다. 모든 만물위에 높고 뛰어나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 그 무한히 위대하심을 알고 자기 자신이 이 온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중요한 존재도 아니고, 나 자신이 존엄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과 관계 속에서만 내가 부여받은 것이라는 사상, 이것이 바로 거룩한 성도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그러니까 그 위대하고 높으신 하나님을 알고 그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하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아는 것, 그가 가진 존귀함과 존엄성 그 자체도 그 높고 탁월하고 위대하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존엄성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면 존엄성에 대한 인식이 하나님 앞에 이러한 겸손함을 방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에 있어서 높고 위대할 뿐만 아니라 실제 도덕에 있어서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름다우신 분이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완전하고 거룩하신 그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며 끊임없는 하나님의 용서와 아침마다 새로운 자비가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인간의 존엄성이 찬란하게 빛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람이 거룩하다’라는 말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두 번째 요소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그분과의 연합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이제 이 세상을 떠나야 되시겠다는 사실을 명백히 알리기 시작하였고, 제자들은 혼란과 깊은 근심에 쌓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 위해서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면 그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아니하시면 부활이 없을 것이고, 부활해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지 아니하시면 우리와 영적인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실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보좌 우편에 오르셔서 우리 모든 사람들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신다면, 잠시 그 주님과 헤어지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 주님 때문에 강하게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이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생명의 은혜가 당신의 제자들에게 부어지게 되어 그들이 이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져 연합된 사람들은 반드시 그와 함께 넉넉히 이길 것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져 그 분이 거하시고, 또한 그 분안에 거하는 생명적인 연합을 이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연합은 이렇게 원리적으로는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이 누리는 연합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실제적인 성화의 삶에 있어서는 끊임없이 분투하면,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만큼 그리스도 예수와의 연합을 실제적인 삶에서 경험하고 그것으로써 우리는 승리하는 생활의 동력을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 그리스도와의 아름다운 실제적인 연합을 곤고히 하는 헌신된 성화의 삶 없이, 더 쉽게 이야기 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는 생활이 없이는 누구도 승리하는 생활을 이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는 ‘신실한’ 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신실하다’라는 말은 영어로는 ‘faithful’이라는 단어이고 희랍어로는 ‘피스토스’(πιστός)라는 단어입니다. ‘피스토스’라고 하는 단어는 ‘피스테’,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는 자들, 혹은 믿을 만한 자들 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핵심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약 시대에 와서 견고한 성도의 삶의 중심이 매일 매일 그리스도 예수를 의존하고 그 분을 꼭 붙들면서 살아가는 신앙의 삶, 이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지식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 지식이라고 하는 것, 소위 우리의 신앙의 체계라고 하는 것, 이것은 매일 매일 헌신된 경건 생활 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붙들려서 사는 단순하고 강력한 신앙생활과 함께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번 수련회 때 아마 ‘은혜와 부패’를 공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 10년 전에 선포된 말씀인데, 열린교회에 가장 큰 신학적 충격을 주었던 한 10개의 시리즈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그 설교를 들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고, 있다고 하더라도 기억에 나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고, 기억이 난다 하더라도 그것대로 실천하는 사람도 더 없을 것이고, 실천한다 하더라도 열매를 맺는 사람은 소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엄정한 진리입니다. 이번 GBS를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그것은 기독교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우리가 왜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 충만한 데도 그렇게 쉽게 미끄러진 생활을 하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은혜로부터 멀어진 부패, 은혜와 부패라고 하였는데 은혜가 부패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자 안에 있는 은혜가 있고, 그 은혜를 간직한 마음이 부패해서 결국 은혜의 정동이 왜 사라지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마음이 은혜로부터 멀어져 부패해 가는 중요한 증거가 여러 가지 나타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관념적으로 이해될 때, 이것이 부패의 가장 중요한 증거입니다. 다 동의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고난당한 것, 다 동의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전에는 그러한 복음적인 사실이 내 마음을 찌르고 끊임없이 변화시켰는데, 요즘은 개념적으로만 그것을 알고 있을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그 지식을 차곡차곡 탐구해서 쌓아갈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그리스도 예수께 붙들려 있는 생생한 신앙의 생활, 이로써 신실한 자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예수를 향한 생생한 신앙의 정동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식의 온전한 체계가 없으면 그 경건이 거룩한 생활에 아주 훌륭하게 이바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예화) 지금도 잊어지지 않습니다. 몇 년도 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1974년도에 빌리 그레함 목사님께서 오셔서 했었던 전도 집회 같은 것이 80년대에 한번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저는 교회의 사택에 있으면서 교회를 돌봤기 때문에 자유가 없었는데 목사님께 특별히 부탁드려서 아내와 함께 밤 집회를 갔었습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으니까 엄청나게 복잡했습니다. 그리고 끝났습니다. 집에 돌아가는 게 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확 빠져 나가는데, 그 인파에 떠밀려 가는데 그 광경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너무 수치스러웠습니다. 산더미 같은 쓰레기가 여의도 광장에 가득하였습니다. 그 얼마 전에 가톨릭이 거기에서 교황이 오셨을 때였나, 100만 명이 공동으로 미사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40분 만에 미사가 끝났고 그리고 휴지 하나 떨어지지 않아서 신문에 보도가 되었던 것과 너무나도 대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며 열렬하게 기도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사람들이 거의 빠져나가고 우리도 빠져나가는데 한가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버스를 타야 할지도 모르겠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교회라고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버스가 지나갑니다. 텅 비었습니다. 두드리면서 교통편 있는 곳까지만 태워달라고 했더니 문을 쾅 닫고 안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면, 그때는 지금과 같은 전체적인 생각까지는 못하였지만, ‘도대체 우리가 열렬하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사랑이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매일 매일 열렬하게 그리스도 예수께 붙들려 사는 신앙생활, 매일 매일 예수님이 보고 싶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으로서 모든 것을 대치할 수 있다고 믿지 않고 끊임없이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성경을 통해 신학을 통해 알아가는 구체적인, 체계적인 지식의 추구, 이것이 함께가는 속에서 우리는 신실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다 알아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아는데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 힘이 매일 매일 그리스도 예수께 붙들린 성령께서 인도하며 사는 삶,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러한 은혜에 굳게 붙들려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들이 되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내가 교인이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그는 구별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선교라고 하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가 생각나게 만들어주는 것이 선교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가 깊은 영혼의 침체 안에 살면 나의 존재의 선교적인 의를 다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매일 매일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예수님을 신실하게 붙들며 사는 생활, 이것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해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도 아낌없이 내어주셨을 뿐 아니라 그 아들이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다는 구속의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에게 일어난 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바뀌어진 우리의 신분,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죄인에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된 것, 그 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신 무한한 크기의 형벌,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하나님의 그 무한한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알고 나면, 결코 패배에 익숙한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은 보신 적이 별로 없겠지만, 우리 어렸을 때는 시골은 물론 서울에서도 병아리를 많이 길렀습니다. 그 병아리를 길러서 봄에 길러서 복날 때쯤 되면 잡아먹는 재미도 괜찮습니다. 시골에 가면 그 병아리들을 이제 싸리대로 만든 커다란 소쿠리처럼 생긴 것에다가 이렇게 병아리를 모아놓고 위에서 덮어 버립니다. 그러면 병아리들이 오굴오굴 하고 돌아다닙니다. 다 뚤렸으니까 위에다가 모이를 던져 주면 그 안에서 모이를 쪼아 먹고 목이 마를 것 같으면 그 안에서 살짝 물을 집어 넣어주면 먹습니다. 낮에는 마당 한 가운데 놔두다가, 저녁때는 너무 춥기도 하고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소쿠리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것을 땅바닥에 너무 많이 들어 버리면 병아리가 도망가니까 땅바닥에 끌면서 천천히 이동하면 병아리들이 그대로 이동해서 지붕아래에 놓고, 아침에는 다시 햇빛 나는 곳에 끌어다가 놓고, 그렇게 합니다. 맨 처음에는 애기 주먹보다도 작은 병아리들이 노란 부리에 귀엽게 좁쌀을 먹다가 나중에는 커서 벌레도 잡아주고, 파리도 잡아주고, 지렁이도 주고, 먹다 남은 밥도 주고, 그러면서 병아리들이 자랍니다. 그것들이 자라서 어른 주먹만 한 병아리가 됩니다. 처음에는 공간이 여유가 있었는데 나중에는 덩치가 커져서 빽빽합니다. 그렇게 한 달이나 이정도 기르다가 병아리가 천천히 닭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일 또 치킨을 준다고 해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안 좋을지 모르겠지만, 75일 자라야지만 될 체격을 요즘은 40일에 키워 버립니다. 그리고 닭이 균형 잡힌 체격이었는데 사람들이 닭가슴살을 좋아하니까 가슴만 큰 닭을 인공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40일이 되면 잡아서 치킨을 튀김을 해도 좋을 정도로 앞가슴이 툭 튀어 나왔는데 다리는 아직 발육이 안 되어서 서지 못하고 앞으로 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병아리들을 대량생산하여 잡아서 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비인간적인 면들이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병아리는 천천히 자랍니다. 한 달 정도까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엽니다. 이제 열렸으니까 아무 곳이나 다닐 수 있는데, 한 동안 병아리들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 번 나가보려고 돌진해보았지만 그때마다 막혔던 것입니다. 끊임없이 자기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실패의 반복된 경험이 학습이 되어서 그것을 넘어설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 바닥에 발을 구르면서 병아리는 할 수 없이 확 튀어나가 보니까 그 다음에는 괜찮습니다. 여러분은 못 보았겠지만, 병아리가 부리로 닭 달걀 껍질을 깨고 나왔을 때 첫 번째 모습을 본 적 있습니까? 저는 어렸을 때 많이 보았습니다. 학교에서 집에 오는 길에 병아리 부화장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병아리가 이러고 있다가 톡톡톡톡 소리가 나면서 계란 껍질이 깨집니다. 그러면서 툭 튀어 나옵니다.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만히 서서 고개를 좌우로 흔듭니다. 여기가 어디인가. 알 속에 있었는데 무슨 세계인가. 한 발짝도 뛰어넘지 못합니다. 툭 깨고 나오자마자 막 뛰어다니는 병아리는 하나도 보지 못했습니다. 깨고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받는 것은 지적인 충격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무엇인가. 커다란 충격을 받습니다. 알 속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하였던 세계가 펼쳐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병아리의 일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식탁에서 끝나지만 말입니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큰 비극은 현실로 약속을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현실로 약속을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정확히 이야기 하면 죄에 지는 현실로 승리에 대한 복음의 약속을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패배에 익숙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의 실패하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 현실에 대해서 새롭게 도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을 가로막는 가장 커다란 원인입니다.
(예화) 우리가 국내 아웃리치를 한 지 벌써 15년 정도 지났기 때문에, 이제는 그러한 지역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한 6-7년 전만 해도 맨 처음 아웃리치를 나가면 가장 어려운, 지금은 사전에 교육도 시키고 또 신청해도 다 받아주지 못하면, 열린교회를 어디에 있는 교회인줄 알고 사람들이 빨리 와서 우리와 같이 아웃리치 하자고 하는 교회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서 설득해서 전도대원들이 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온 동네를 복음화 해야 합니다. 전도를 가로막는 커다란 요인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를 부른 그 교회 담임 목사입니다. 왜냐하면 확신에 차 있습니까? 절대 안 된다는 확신에 차 있는 것입니다. ‘그냥 애쓰지 마시고 하수도나 쳐 주시고, 파마나 해 주시고, 교회에 선풍기라도 몇 개 사놓고 가시라’고. 왜냐하면 자신이 한 20년 동안 해 봤는데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뜨리는 것이 가장 어려웠습니다. 여러 번 해 봤는데도 안 된다는 실패에 대한 반복이 학습되어서 그 실패한 현실로 복음이 이렇게 놀라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많이 가르치지, 복음이 우리에게 실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성경의 약속들을 반복되는 실패의 경험들로 덮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됩니까? 도전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패가 운명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승리와 거리가 먼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적인 이유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경우에는 여러분 만할 때 위인들의 전기를 읽는 것이 저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뛰어난 인물들의 자서전이나 전기를 읽으면서, 그것이 100%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읽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하면 나 자신이 생각하는 신앙, 기도면 기도의 수준, 헌신이면 헌신의 수준, 아니면 학문적 지식이면 지식의 수준, 주님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어떤 열정이면 열정, 그 모든 것을 나 하나의 울타리 안에 갇혀서 주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들의 삶에 비추어서 나 자신을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항상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전기를 쓰는 사람들이 그것을 읽는 사람들보다는 훨씬 못한 무지랭이 같은 사람들을 전기를 쓰지는 않지 않습니까? 일평생 예수를 믿었는데 세상과 교회 사이를 오락가락 하다가 마지막 확신도 없이 이 위인은 죽었다고 쓰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모두 나 보다는 탁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커다란 격려와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권합니다. 한 3년 동안 집중하여 전기를 읽는 일에 열심을 내고 항상 그 전기를 읽고 나서 덮을 때에는 가슴이 어떤 때는 깊이 낙심되기도 하고, 벅차오르기도 하고, 스펄전의 생애를 읽으면서 새벽에 읽고 옥상에 올라가면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우리 모두가 이 사람처럼 살자고 외치고 싶은 그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기독교에 대한 경험 말고 건전한 신학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체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러한 승리하는 삶이 있을 수 있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화) 여러해 전에 부산으로 설교를 하러 내려갔는데 어느 형제, 자매가 집회 끝나고 나오는데 나한테 와서 인사하면서 열심히 열린교회 설교를 듣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넥타이 하나와 편지를 하나 주고 갔습니다. 나중에 그 형제, 자매가 결국 우리 교회에 왔습니다. 숙소에 가서 편지를 뜯어보니까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승리, 환희, 희열, 기쁨, 이러한 단어들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고 성경 속에서나 있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나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도 그것을 경험하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약속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한번 결정적으로 승리해 본 사람들은 다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강력한 용기를 갖게 됩니다.
(예화) 저는 최근에 마가렛 대처의 생애를 그린 영화를 혼자 시청하였습니다.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몇 개의 코드가 깔려 있는데 존 하이에크와 우리들이 잘 아는 J.M.케인즈의 경제이론의 대결에 대한 코드가 그 속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 하는 나중에 시카고 학파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프리드먼 같은 학자의 이론들이 그 안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코드를 알고 보면 아주 재미있습니다. 마지막에 이러한 대사가 나옵니다. “모두 그 길로 돌아가라고 하세요. 이 숙녀는 가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경제 정책의 길을 이야기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더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은 아르헨티나와의 전쟁이었습니다. 포클랜드라고 하는 섬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아르헨티나가 역사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면서 공격을 했습니다. 영국 해구누 300명을 그대로 모두 몰살을 합니다. 그때 대처가 300명의 가정에 모두 친필로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보내고 전쟁을 하기로 결심을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제일 먼저 미국이 국무장관을 파견하여 경제적인 이익도 없고 작은 섬을 가지고 전쟁을 하면 좋을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회담을 통해 이야기를 풀자 했더니 이야기 했습니다. “당신네도 그러한 조그마한 섬(하와이)이 있었습니다. 그 작은 섬이 공격당할 때 본토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졌다고 덮었나요? 그리고 경제적인 가치가 크지 않은 섬이라고 해서 전쟁하지 않고 덮고 협상을 시작했나요?” 그리고 전쟁을 명령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고 심지어는 영국 경제가 거덜 날 것이라 보고합니다. 나중에 그 사람이 수렴하는 것이 뭐냐 하면 승리에 대한 확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크게 엄습했다는 것입니다. 패배할지도 모르는. 그런데 결국 이겼습니다. 그때 영국 국민의 가슴속에 타올랐던 조국에 대한 위대함의 각성이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승리할 수 있다는 약속을 우선 믿는 것. 그리고 삶의 작은 부분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승리를 경험해 보는 것, 이것은 더 큰 승리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진입니다. 아주 지리멸렬한 신앙생활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환경도 어려움에 처했지만 승리할 것이라는 희망이 없습니다. 결국 희망이 없는 낙심의 상태가 사실은 영적 죽음의 상태입니다. 사실상 죽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에게 종종 질문을 합니다. 주님이 지금 탁 오셔서, “너 소원이 무엇이니? 한 가지만 이야기 해봐라” 할 때 순간적으로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여러분 중에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하려면 여태까지 그 질문을 받기 전까지 살아온 삶에서 이것만은 내 삶에 있어서 꼭 이루어져야 하고, 어떠한 난관을 딛고도 이것만큼은 쟁취해야 한다고 하는 승리의 불타는 전의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 거기에 소원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슨 소원에 불타오르기 원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개별적으로 각각 다를 것입니다. 큰 틀에서 놓고 보면, 여러분이 지금 배우고 있는 <주기도문>이 우리들의 가슴속에서 불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소원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이루어가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일 먼저 꾸짖어야 할 것은 뭐냐 하면 여러분 앞에 있는 현실이 아닙니다. 제일 먼저 꾸짖어야 할 것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이렇게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러한 이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주셨으니 그보다 덜 중요한 것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열렬하게 하나님께 간구한다면 왜 안 주시겠는가 라고 하는 것, 그렇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진노의 자녀였다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 바꿔 주신 후에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시는데, 이 현실을 과연 우리가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가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승리에 대한 소망, 나아가서는 믿음, 그리고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이 모든 신앙생활에서 구심점을 찾을 수 있고 열렬해질 이유를 가질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자원을 주셔도 그 자원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목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마치 병아리 우리 아래 있어서 오랫동안 실패에 익숙해져서 거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병아리들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여러분의 모습이 아닌지 진지하게 한번 물어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을 약속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아주 넉넉히 잡아도 두 달에서 석 달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40년이 안 되는, 약 39년 동안을 방황을 하였습니다. 아주 단순한 사건,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 빼놓고 모든 사람들이 절망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 앞에 서니 메뚜기 같더라. 우리는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고, 우리는 그들에게 파멸될 것이다. 이 보고를 하였을 때, 또 다른 두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과 희망에 대해 일깨워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우리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 아름다운 땅을 우리가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두 사람의 약속과 희망에 대한 보고는 믿지 않고 절망과 실패에 대한 보고를 믿으면서 온 백성이 땅을 치며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소명을 받아서 자기들을 거기까지 데려온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이 가장 단순한 사건 하나로 말미암아서 40년 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애굽에서 출발한 사람들이 거의 죽을 때까지, 모두는 아니지만 거의 죽을 때까지 그렇게 비참한 시련의 길을 걸어야 했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오늘 마음을 닫고 ‘승리는 무슨 승리, 여태까지 해 봤는데도 안 되는데’ 만약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설교 더 들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백 번 양보해서 희망이 없다고 치자. 그러면 희망 없는 상태에서 여러분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은 무엇입니까? 어떠한 삶을 선택하겠습니까? 세상으로 돌아갈 것입니까? 이미 세상에도 여러분은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 이 세상에서는 이미 낙인찍혀 지명수배 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 돌아가자니 그것은 싫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신앙과 배교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면서 죽도록 고생하고 영혼의 어떤 평안과 안식도 없는 삶이 계속될 것인데, 그것이 사실 지상이 아니라 그것은 지옥입니다. 지옥. 그게 바로 지상에서 경험하는 지옥의 삶입니다. 모든 사상이 하나님이 없다고 확실히 믿고 그리고 짐승처럼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지옥까지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지옥이라 생각하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자신이 끊임없이 실패하는 현실로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약속하신 엄중한 약속을 덮어버리는 태도를 가리켜서 성경은 불신앙이라고 부릅니다. 불신앙은 잘 믿으려고 하는데 자꾸 의심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안 믿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불뱀에게 물린 사람들에게 놋뱀을 들며 ‘자, 여기를 봐라. 살 수 있다’고 그랬을 때 끝까지 안 쳐다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보면 되는데 싫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 믿게 변화시켜서 신앙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잘 믿으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영혼은 막 양식을 먹으면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양식이 두 통로를 통해 들어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신앙을 통해서 들어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적인 지식을 통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신학지식을 통해 들어옵니다. 두 개가 같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혼의 양식을 삼아 기뻐합니다.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이 만드셨고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이 변화시킨 사람인데, 이 양식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패배를 운명처럼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이 벅차오른다? 무엇 때문에 벅차오르겠습니까? 소망이 없는데 무슨 벅차오를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입니다. 오늘 그것을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깊이 생각하고 어디에서 떨어졌는가 생각하며 희망을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항상 여러분은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환경을 이렇게만 안 만들어 주셨더라면 나도 희망을 가졌을 텐데. 왜 하나님은 뭐 하나 되는 일 없이 나를 이렇게 방치하실까?’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여러분 스스로 그 희망을 버린 것입니다. 불신앙으로 그 희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깊이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시작해야 합니다.
II.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김
성경은 오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비추어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기게 하는 도구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A. 세상과 신자의 현실
제일 먼저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신자의 현실에 대해서 아주 길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환란이 오고 곤고하고 핍박이 오고 굶주리는 기근이 오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온 몸의 옷을 벗기고 벌거숭이가 되어서 형벌에 놓이는 처지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때로는 커다란 위험을 당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커다란 죽음의 위협 앞에 직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죽임을 당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시편 44편의 맥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민족에게 짓밟혀서 마치 하나님이 승냥이 떼에게 먹잇감을 넘겨주심 같이 이방민족에 의해서 짓밟히는 비참한 이스라엘의 현실을 탄식하는 장면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실일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세상이 요구하는 바에 쉽게 쉽게 순종하면서 신앙의 본질까지 양보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이러한 것들이 없을 수 없지만, 줄일 수는 있습니다. 핍박을 받을 때 신앙을 포기하겠다고 항복하면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 자신의 영혼을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한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깊이 결단하고 올곧게 그 길을 걸어가면 결국 세상과 항상 평화를 누리며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기를 온 마음을 다해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결국 환란도 당하게 되고 박해도 당하게 되고 적신과 위험과 칼의 위협에 놓이게 됩니다. 그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신자의 현실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러한 현실의 갈등과 고통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신 최고의 행복은 안전한 피난처에서 이러한 세상의 환란과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죽음의 위협 같은 것들을 피해서 홀로 안락하게 사는 것이 성도의 행복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의 진정한 행복은 그러한 현실 속에 자신이 온 몸을 던져 그 현실과 맞싸우면서 그 현실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행복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B.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그러한 현실을 극복하면서 살 수 있기 위해서는 결국 무엇인가 그 현실 속에서 극복하고 이기며 살게 하는 그 무엇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늘 이야기 하는 말로,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막다른 상황에 접어들게 되면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할 수도 없고,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속일 수도 없습니다.” 결국엔 그것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를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러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종일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앞에 있는 모든 상황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낱말입니다. ‘그러나’ 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환란과 곤고와 박해, 적신, 기근, 위험, 칼, 이 모든 신자를 향하여 공격해 오는 이 무거운 삶의 현실들입니다. 그 거대한 파도 앞에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힘이 없는 아주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결국 이 모든 일에 라고 하는 것은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 기근, 적신, 위험이나 칼같은 감당할 수 없는 현실들, 이 단어들이 우리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단어들이지만 이 편지를 받고 있는 로마의 수신자들에게는 엄청난 커다란 도전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갇혔던 곳은 로마였습니다. 그 자리라고 사람들이 거의 확신을 합니다. 거기에다가 교회를 세워 놓았습니다. 로마의 외곽입니다. 개구멍 같은 조그마한 동굴에 갇혀서, 쇠창살도 있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 그 자체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리고 60년이 지나고 70년 임박할 때 이미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 단어 하나하나가 이 수신자들에게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만나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은 함께 하신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승리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야 한다면 순교자는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를 죽였으나 사실 세상은 그들에게 졌습니다.
(예화) 초기 그리스도인의 역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카타콤에 숨었습니다. 그곳에 내려가면 동굴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모릅니다. 자연동굴이었습니다. 여러해 전에 일본에 있는 언론사 기자 둘이 취재를 하려고 들어갔는데 실종되었습니다. 못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 숨어 있다가 거기에서 회합을 갖고 예배를 드리고 피해 다니는 것입니다. 굶어 죽게 될 때, 어떤 사람이 거기에 숨어 있던 그리스도인을 위해서 끊임없이 양식을 공급합니다. 나중에 들통이 났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이 황제의 경호 대장이었습니다. 로마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 사람이 결국 어떤 식으로 죽임을 당했는가 하면 한 사람을 놓고 수십 명의 사람이 그를 에워싸 그에게 화살을 쏘았습니다. 혼 몸이 고슴도치처럼 되어서 죽었습니다. 그런데 죽는 그 모습이 놀라운 선교의 재료가 되는 것입니다. 너무 평안하게 자기의 목숨을 빼앗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완전한 용서와 사랑을 보이며 기쁨 속에서 죽는 것입니다. 유명한 예화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 복음을 믿게 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국지적으로는 선이 악에게 질 수 있습니다. 그래도 패배한 선이 승리한 악보다는 위대합니다. 왜냐하면 국지적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결국 악이 선을 이길 수 없습니다. 궁극적인 승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데 누구를 통해서 하시는가 하면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가 누구입니까? 처음에 나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하나님의 사랑이 아들에게 부어지고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에서 묶으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여기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지만, 독생자가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이제는 그 독생자 예수의 사랑으로 하나님이 그 독생자 예수를 통한 사랑으로 우리를 붙드심으로써 우리가 그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는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아는 진리이지만, 익숙한 진리이지만 잊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승리하는 삶의 실제적인 비결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누가? 누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어떤 자녀가 그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닌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신 사람들이 어느 한순간도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이 아닌 적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 뿐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 밖에도 나의 양 떼가 있어서 그들도 우리 안으로 인도하여야 할 터인데’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선교, 전도는 바로 우리 바깥에 있는 양들을 향한 절절한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전수받은 사람들의 소명입니다. 그래서 모든 소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사랑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 소명이 일반 직업인으로서의 소명이든 목회의 소명이든지 무슨 소명이든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랑하는데서 소명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 중 누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아닌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승리하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승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모순들을 어떻게 극복해야 되겠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마음을 이 본문에 깊이 녹여서 한번 이 편지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바울과 일체를 이루어 보십시오.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말할 때, 이 ‘우리’ 사도바울이 포함되어 있는 이 ‘우리’. 사도바울이 그렇게 ‘우리’라고 하는 사람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한 부분으로서의 자신을 두고 생각할 때 그는 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하는 것을 어떤 의미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까? 더 쉽게 이야기 하면, 단지 막연한 의미에서 구원받았으니까 누구도 구원받은 사람을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사람이 없다는 의미에서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까? 아니면 그 사랑을 알고 자신도 그리스도 예수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입니다.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교통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리스도께 붙들려 사는 사람, 그 사람이 승리를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실터인데 성령이 오실 터인데, 이 세워지는 많은 무리들이 모인 교회를 베드로에게 맡기시면서 물으신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일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의 신념을 사랑하고, 목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찬양)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구주 예수를 믿으니 온 세상 이기네
그 믿음에서 오는 인격적인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현실을 이기며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결국 조금 더 어려운 말로 하면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그 분께 마음을 쏟음으로써 그분과 영적인 연합을 곤고히 하게 되고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극복하며 살 수 있는 영적인 자원들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인 관계가 올바르게 되고 충만하게 하나님 앞에 은혜가 부어져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우리들이 처해 있는 일반적인 삶의 상황들을 하나님이 끊임없이 바꿔 주시는 축복들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 더 많은 부분들은 그대로 내버려 두셔도 상관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이 떨어지고 곤고해 졌을 때 기도는 안 하는데 실제로 생각하는 기도제목은 무지하게 많습니다. 그래서 ‘무엇도 주시고, 무엇도 주시고, 누구도 데려가시고, 이렇게 누구와도 이제 그만 보게 해주시고, 데려가시든지 등등’ 많습니다. 그런데 결국 마지막에 자신이 끊임없이 실패하는 삶의 원인이 사랑의 부족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에 익숙해진 자신의 불신앙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사랑이 물 붓듯 부어져서 그래서 예수의 사랑에 깊이 감동을 받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사랑하게 될 때 놀랍게도 기도가 단순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예전에는 저 사람을 안 데려 가시면 못 살 것 같고, 상황이 안 바뀌면 죽음 이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 극단적인 생각만 있었는데 주님의 사랑이 부어지고 나니까 별로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한 10년 쯤 티코를 탔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 교회 맨 처음 개척할 당시 처음으로 구입한 차가 다마스였습니다. LPG 넣는 다마스. 그 차는 정말 차라고 하기에는 정말 장난감 같습니다. 지금도 두 대 있지만, 좋은 점이 있습니다. 애들 데리러 다닐 때 골목 다닐 때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심하게 이야기 하면 길 가다가 껌을 밟아도 자동차가 시동이 꺼진다 할정도로 힘이 없는 차입니다. 그런 차가 있다고 할 때, 그런 차를 가지고 태백산맥 같은 곳을 추운 겨울에 넘어야 한다면 참 기도가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4-wheel-drive로 된 한 5000cc의 크리아슬러 지프를 타고 넘는다면 그렇게 절박하게 ‘계곡이 나오지 말게 해 주시옵소서’, ‘개울을 건너지 말게 해주시옵소서’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조금 전에 그렇게 기도의 제목이 많았던 것이 믿음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극복할만한 자원이 없으니까 모두가 기도의 제목인 것입니다. 좋은 의미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는 기도의 제목이 아니라 ‘이 사람과는 도저히 관계를 맺기가 힘이 듭니다. 데려가 주십시오’ 그 충만한 것이 부어지게 되고 그러한 사람을 사랑하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기쁨이고, 소망이 됩니다. 삶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아까 재밌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여 교역자가 여리고 전도를 나갔는데 우리교회 전도대원들에게는 블랙리스트가 있습니다. 문만 두드리면 망치들고 나오고 방망이 들고 나오는 사람이 바로 블랙리스트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밤새도록 일하고 들어왔는가 봅니다. 모르고 딩동딩동 눌렀습니다. 성질을 팍 내고 나오면서 당신네들 교회가 어디냐고 찾아가서 담임목사 만나서 담판을 짓겠다고, 거기에서 어느 집사님이 ‘우리 목사님 휴가 가서 없어요.’ 그 이야기 할 대목이 아닌데 어쨌든 그러면 그 다음 목사라도 만나겠다고 이제 빗자루인가 막대기를 들고 왔답니다. 교역자 다 없고 이종숙 전도사 혼자 있었다고 합니다. 이종숙 전도사님이 그런 것에 기가 꺾일 분이 아닙니다. ‘일단 막대기부터 놓으시고 말씀하십시오. 흥분하지 마시고 막대기부터 놓고 말씀하시죠.’ 추어도 그 정도에 꺾일 사람이 아닙니다. 그 정도에 꺾일 사람이라면 교회에서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 열 명이라도 와 봐라 그 정도에 꺾일 여 전도사들이 누가 있는가. 누가 꺾이겠냐. 오숙녀 전도사가 꺾이겠냐. 이명희 전도사가 꺾이겠냐.’ 안 꺾입니다. 자원이 내게 많으면 두려울 게 없습니다.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기도의 제목도 사실 아니었는데 살림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전기세가 밀렸어요. 쌀이 없어요. 쌀을 익혀 먹을 밥솥이 없어요.’ 결국 돈 떨어지니까 다 떨어집니다. 돈 떨어지니까 다 떨어집니다. 뭐가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가장 커다란 숙제는 다시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평생의 숙제는 뭐냐 하면 회심할 때 그렇게 살고 싶었던 그 삶.
(찬양)
1.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그에게 죄를 다 고합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2. 주 날 사랑하사 구하시려고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다
그 가시관 쓰신 내 주 뵈오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3.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림이라
숨질 때에라도 할 말씀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4. 그 영광의 나라 나 들어가서 그 풍성한 은혜 늘 감사하리
금 면류관 쓰고 나 찬송할말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C. 승리하는 삶의 비결
그것입니다. 가장 커다란 수칙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면 나머지 있는 것 또한 온전해지지 않고 오히려 있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올바르고 체계적인 지식, 그 다음에 그 지식에 합당한 순전한 삶, 이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하는, 그 지식이 순전한 삶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 그것입니다. 올바르게 획득된 지식과 쌓인 체계는 좀처럼 우리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가 떨어졌어도 계속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배우는 것 그 자체가 은혜가 사라진 것에 대한 원인이 아닙니다. 무지가 은혜를 불러오는 것이 아니듯. 그러나 항상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언제나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쉽게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수시로 우리의 마음속에 사라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제 불같이 뜨겁게 예수님 사랑하던 사람이 내일은 변절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그 그리스도를 향한 매일 매일의 현재적인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겸손해지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같이 부패한 죄인들이 자동적으로 주님을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말씀의 깨달음이 없습니다. 눈물이 있는 기도도 없습니다. 삶에 대한 진지한 반성도 없습니다. 그런데 진실한 회개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이 계속 우리 안에 유지가 되겠습니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사랑의 원인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과 그리고 올바른 삶, 이 두 가지를 묶어 주는 삼위일체 안에 있는 비밀스러운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힘입어 날 구원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진실한 인격적인 사랑, 이것이 승리하는 삶의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오늘 여러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인격적이고 진실한 사랑입니다. 그것이 여러분 속에 타오르면 여러분이 지금 도저히 헤어 나오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 문제들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이 그것을 이기게 만들어 줍니다. 아마 우리가 이런 저런 과오나 잘못을 회개하지만 예전보다 예수님을 덜 사랑하는 것을 커다란 잘못이라 생각하고 회개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III. 결론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 앞에 나의 복잡해 보이는 모든 삶의 중심에 사랑의 고갈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착한 인격, 거기에서 나오는 헌신된 삶, 그 안에서 나오는 진실한 실천,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우리 예수님을 어린아이처럼 의지하며 순종하는 삶, 그것의 결핍이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실패에 익숙해지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 어디서 떨어졌는지 깊이 생각하며 그 사랑을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비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세상을 이긴 믿음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녹취자 : 김세나
요한복음 17장은 아마 요한복음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장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요한복음 17장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대신 비시는 중보 기도의 장면이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린 이 요한복음 17장의 대제사장의 기도는 아마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던 날 밤에 올린 그 기도를 기록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이 장문의 긴 대제사장의 기도를 우리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께 올리시기 전 우리가 읽은 이 본문에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격려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있고나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갈 때, 이 땅에 남겨두고 가야 할 사랑하는 제자들과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 전심으로 비셨고, 땀이 피가 되어 땅에 떨어지기까지 하나님 앞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쳐 아버지 앞에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16장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가 가까이 왔고, 죽은 후에는 아버지께 갈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말하는데 이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우리를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시고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는 이 장엄한 구원의 계획을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터놓고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도 흔한 일이 아니었지만, 당신의 때가 가까워 옴을 보고 이 모든 것을 모두 드러내놓고 제자들에게 가르쳤어도, 그들은 아직 심오한 구원의 계획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 구원계획에 대한 전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성령을 보내신 이후에야 교회가 깨달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의 죽음과 대속, 성령의 오심과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평화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이성적인 지식으로 이 모든 것을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믿으셨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저들에게 가르치고 나면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승천, 그리고 성령의 오심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은 바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내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함이라’고 하는 ‘평안’, 희랍어 성경에서 ‘에이레네’(εἰρήνη)라고 하는 이 단어는 원래 히브리어로 ‘샬롬’(!lev;)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사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이르신 이 모든 구속의 역사가 정말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를 토대로 우리들이 진정한 의미의 평강을 누리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그 마음은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 것도 없는 사람처럼 의지할 곳 없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 의해서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울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도 운다면 모든 사람들이 슬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도 낙심하고 슬퍼한다면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없어서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믿지 못해 슬퍼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상해하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그 무엇을 가져다주는 통로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우리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만약에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렸더라면, 내가 신실한 믿음과 살아있는 기도생활이 없었더라면, 낙심하고 좌절해 쓰러질 수밖에 없는 환경을 발견했고, 우리는 그 안에서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때문에 승리하였습니다. 때로는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마음의 평화가 그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나를 뒤덮어 나도 나의 마음속에 있는 이 놀라운 평강의 근원이 무엇인지 의아해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을 위해 빌었던 그 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를 지키시기 원한다고 하는 그 말씀의 시련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승리가 은사에 달린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승리할 수 있는 은사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는 승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단지 넓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 믿음은 끊임없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하나님과의 평화의 산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우리가 승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에 관한 일을 물어야 합니다. 정말 내가 우리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있는가. 그리고 정말 우리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에 있는가,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참된 평화가 있고 거짓된 평화가 있습니다. 거짓된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암시하여 자기가 자신에게 부여한 평화입니다. 이것은 거짓된 평화입니다. 참된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 나를 알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모든 담을 그리스도 예수가 허물어 버리셨고 내가 바로 그 화목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한 사람으로서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이 온전한 평화, 그 속에서 우리들이 승리의 기초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주는 평화 막힌 담을 모두 허셨네
주는 평화 우리의 평화
우리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하신 많은 일은 바로 이 한 가지 일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원수 된 우리들을 당신의 피로 씻으시고 당신의 진리의 말씀으로 가르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의 질병은 하나님과의 불화였고, 우리의 재앙은 하나님을 등지고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셨고 하나님에게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을 호소하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한 화목의 재물이 되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해의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삽니까?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 순전하고 항상 온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연약함으로 하나님 앞에 넘어지기도 하고 오류에 붙잡히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거슬러 죄를 짓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죄를 지은 이 비천한 인간이 자기를 스스로 개선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깨뜨리고 멀리 떠나갔을 때 우리 스스로 그 평화를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 주시지도 않으셨거니와, 또한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떠나 미끄러졌을 때마다 다시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돌아올 수 있는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주님의 용서를 빌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미 이루신 그 용서를 우리에게 새롭게 하심으로 다시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회복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 보혈의 공로는 한없이 커서 이 세상 모든 인류의 죄를 씻고 지금도 하나님 앞에 다시 나와 용서를 구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정결케 하시기에 충분케 하시는 십자가의 보혈입니다. 실패하고 죄에 지고 세상에 넘어지는 모든 낙담한 삶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데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비록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시지만, 이 땅에 남아있는 우리들이 환란을 당하지 않도록 그 근원을 모두 없애주시지는 않습니다. 성령 충만해도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시련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믿음으로 살아도 불완전한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의 대적들은 여전히 있고 우리는 거기에서 환란을 당하고 또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믿음으로 살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시련과 고통이 고난이 우리 앞에 있지만 그리고 그것은 나쁜 것이지만, 그것이 항상 우리를 나쁘게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사는 삶,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은 시련과 고난이 올수록 반석이신 우리 예수께 피하고 그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생명 싸개로 그들을 감싸시고 시련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놀랍고 비밀스러운 은혜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클 때 시련과 환란이 넘칠 때 하나님과의 평화가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 세상에서 시련을 당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오늘 우리가 당하는 이 환란을 능가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오히려 우리는 노래할 것입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주님과 화목하고 그분과의 사랑에 있을 때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고 전날의 한숨은 변하여 우리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담대할 수 있습니까? “주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이까 천만인이 나를 에워 쌓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의지하리라” 이러한 고백은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사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지위나 영광,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것들을 다 주고도 반드시 사야 할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세상을 충분히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 세상을 망가뜨려 모든 인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였던 사단과 죄의 권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 있어서는 그 모든 절대적인 지배권이 종식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어떠한 길도 없기 때문에 그 죄에 매여 철저하게 종노릇하며 살았지만, 이제는 누구든지 그 피를 힘입어 그와 화목을 누리며 사는 모든 사람, 그분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려는 모든 사람들을 도우십니다. 더욱이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처럼 죄는 없으시지만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당하시고 고난을 겪으셨던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고 어디까지 참을 수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그리고 우리를 에워싸고 위협하는 죄와 이 세상의 위협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큰 것인지 예수님께서는 모두 아시기 때문에 같은 처지에 있는 우리들을 우리의 형제로서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고아입니까. 우리가 사생아 입니까. 우리가 버려진 자식들입니까.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피로 구속하신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당신과의 평화를 잃어버린 모든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십자가에서 찢으신 그 살과 피로 흘리신 보혈의 핏 길을 따라 당신 앞에 걸어오기를 원하십니다. 인간에 의해 모든 신발을 벗고 어린아이처럼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그 사랑을 의지하면서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길을 걸어 아버지 앞에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용서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시니 이 새벽의 시간에도 그 앞에 나아가 복음적인 용서를 얻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누려 이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끊을 수 없는 사랑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녹취자 : 조원정
I. 본문해설
로마서 전체의 대의는 바로 인간에 대한 새로운 규정입니다. 창조로부터 종말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불신자들이나 이교도들 심지어는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과 동물들 까지도 그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 특히 인간은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여 살도록 창조된 존재라는 것, 심지어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조차도 이 사실이 적실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로마서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대의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아무 희망도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복음이 되는 것이고 자기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비참한 존재이기 때문에 새로운 한 의가 나타나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근거가 되어주셨다는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소식이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자의식의 점검이 필요하며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 우리는 거룩한 성도다.
여러분 교회에서 교패를 붙여준 집에는 특이한 글귀가 써 있을 것입니다. 열린교회 성도의 집, 성도입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사랑은 나타났고 그로써 우리는 구원받은 자녀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죄로 물들고 절망 속에서 아비규환 하는 세상을 보면 끝이지만 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바라보면 그 구원은 겨우 시작에 불과한 것입니다. 한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태어나서 무릎팍으로 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다시 태어난 자식들은 비록 여전히 마귀와 세상과 죄를 따르는 자신의 소욕 때문에 에워싸여서 공격을 받는 처지에 있지만 하나님이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당신의 진리의 말씀을 주시고 성령의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 모든 죄를 이기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환난이나 시련 위험이나 적신, 칼 이 모든 위협들은 언제나 있는 것이고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쓰던 당대에는 더더욱 이것들은 언제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변화무쌍한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따라서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화목에서의 오는 진정한 평화 이것으로서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승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매일 매일 이 죄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자기 안에 더 있는 이 죄, 에워싸고 조종하고 있는 마귀의 세력들과 더불어 싸울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은 분명한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화목,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나도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어떤 삶의 상황 가운데에서도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자리이고 비록 내가 약해서 쓰러지고 가끔 넘어질 때도 있으나 내가 가고자 하는 이 삶의 방향이 하나님이 나에게 지정해 주신 소명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승리의 비결에 접근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내버려 둔 채 되든지 말든지 팽개친 채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를 왕 삼으면서 살아가다가 주일날 나와 가지고 아 참 그런 게 아니었네. 하고 뜨끔하며 찔림을 받고 그때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는데 오랫동안 집에 팽개치고 돌아다니면서 숙제 안하던 아이가 숙제 펼쳐 놓고 숙제 많기도 하네. 지겹게 많네. 이걸 어떻게 다해. 하고 돌아가는 것처럼 주일날 집에 가는 삶의 반복이 우리에게 무슨 변화를 가져다주겠냐는 것입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매일 기도하는 것,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는 것, 아침마다 저녁마다 자기를 반성하는 것, 몸은 세상에 있어도 마음속으로 우리 주님을 찬송하는 것, 깊은 밤에 일어나서 홀로 조용히 앉아 기도하는 것, 다 힘듭니다.
묻고 싶습니다.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음대로 살아갔을 때 그건 편합니까? 여러분이 오늘 나는 날마다 실패하고 패배하고 있습니다. 승리란 도대체 어디에 나오는 어느 나라 말입니까? 묻고 싶게 된 처지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입니다. 행복하십니까? 그렇게 살아서 행복하나 입니다.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지속적으로 그렇게 고백을 한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는 그럴 수 없습니다. 행복하지 않습니다. 쓰라리고 괴롭지는 않을지는 모르지만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공허하고 헛된 날들입니다. 환상이 우리가 간절히 씨름하고 몸부림 칠 수밖에 없는 인생의 비참한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도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대개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읽습니다. 그 다음 말이 중요합니다. 내가 주는 멍에는 쉽고 가벼우니 이 멍에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예화) 오래전에 자매 하나가 있었는데 전문대학을 나왔는데 어떻게 똑똑한지 시험을 봐서 삼성에 입사를 했습니다. 일도 아주 잘해서 어린 나이에 계속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팀장이나 보내야 해결될 일을 얘를 보냅니다. 너가 아니면 해결 못한다는 것입니다. 컴퓨터 회로 이런 것들을 하는 건데 강릉, 대구, 대전, 목포 출장을 보내는 것입니다. 엄마한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외동딸인데 어떻게 혼자 보내나 해서 엄마가 같이 출장을 갑니다. 가면 엄마 여관에 눕혀 놓고 자긴 그 회사에 가서 밤새도록 일하고 애가 빼빼 마릅니다. 그래서 제가 얘야 너는 그렇게 해서 어떡하나 했더니 엄마가 옆에서 얘 회사는 왜 얘만 가지고 들들 볶는지 모르겠습니다. 스물 셋인가 했는데 얘야 그래도 학교 다닐 때가 좋았지? 하니 깜짝 놀라면서 아니에요 목사님 하기에 왜 하고 물었더니 그래도 회사는 시험은 안 보잖아요 하며 학교 다시 다니기 싫다고 합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삶이 기도하는 게 싫고 말씀 깨닫는 게 싫고 신학 책 읽는 게 싫고 그러면 그만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두고 찾아오는 결과들은 그렇게 행복하나?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이 은혜로부터 멀어져 점점 부패하면서 예전에는 기쁘고 즐거웠던 일들이 하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싸우고 무엇을 가지고 이길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Ⅱ.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기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오늘 읽은 38절과 39절의 본문은 이 모든 궁극적인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강력하고 완전한 기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기초는 바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하고 말합니다. 이론과 논리와 의심에 대한 변증을 통해서 입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앙적인 확신을 통해서 인간의 이성의 추론을 초월하는 세계의 자연적인 질서로 설명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의 세계에 있는 비밀 그 위대한 능력의 비밀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지식과 상식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신앙으로서 확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확신을 하노니 하고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자성입니다. 지금 당장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을 붙들고 살 때에 반드시 이길 거라는 믿음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더 큰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서 잠시 패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날의 패배는 반드시 미래의 더 큰 승리를 위한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 될 것이라는 것, 그래서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는 여전히 위대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확신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이 신앙이 깊이 떨어져서 믿음이 식어서 확신할 수 없었다면 38절과 39절은 기록할 수 없었습니다. 이 편지를 쓰면서 더러운 작은 공간에 갇혀서 유일한 창문이라고는 굵은 쇠창살로 된 접시만한 창문 하나입니다. 거기에 갇혀서 순교할 날을 기다리며 살았던 사도입니다. 그렇게 핍박을 당하고 환난을 당하고 죽음이 항상 눈앞에 있는 삶을 살았지만 마음은 자유인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찬양)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듯이
그 뜻이 이뤄지다 외치며 사나니
A. 인생의 역경과 대적들
믿음이 현재적으로 충만하게 내 마음 속에서 떠오르는 믿음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지상에서 믿음은 사랑을 불러일으키지만 도덕적인 사랑은 저절로 믿음을 동반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이런 확신, 초월적인 사실들에 대해서 흔들 수 없는 믿음에 가슴이 불탈 때 사랑도 함께 불탑니다. 왜? 이 모든 것으로도 끊을 수 없도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지금 여기 내 안에 살아계시는데 내가 그분을 몰라 뵈옵고 실패를 운명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부도난 회사에 약속어음처럼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게 불신앙입니다. 누구도 믿음이 없이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없고 믿음이 없이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이김은 곧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히브리서 11장에서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이 얼마나 놀라운 승리의 원동력이 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도저히 이 세상이 핍박하고 죽이고 고문하고 빼앗고 유혹을 해도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요동치는 현실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 요동치는 현실 속에서도 움직이지 않는 신앙 견고한 의지는 바로 이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니라. 여러분의 마음속에 확신이 타올라야 됩니다. 믿음의 확신이 불타오르는 정도는 아까 말씀드린 데로 하나님 앞에 실제적으로 마음을 쏟으며 경건을 실천하며 사는 깊이 정확하게 비례합니다.
믿음이 아주 좋아하는 취향이 있습니다. 찻집에 이렇게 비도 오고해서 차를 한잔 마시러 들어갔는데 벽지는 전설의 고향 같은 걸 붙여 놓고 카세트 다 망가진 데서는 뽕짝이 나오고 잔은 누가 먹다가 갔는지 다 이빨이 깨지고 탁자에 발라 놓은 시트지는 벗겨지고 그러면 여러분 거기에 앉아서 오래도록 상념에 잠기도록 차를 마시겠습니까? 내 취향이 아닌 것입니다. 택시를 탔는데 유행가가 막 나옵니다. 끄고 조용히 갑시다 하니까 살짝 줄이고 꺼지를 않는 것입니다. 좀 끕시다 하니까 운전하면서 이거라도 듣는 게 낙인데 손님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그래서 저 앞에 차를 좀 세워 주세요. 아저씨는 계속 들으면서 가시고 저는 다른 택시를 타겠습니다. 그때서야 툭 하고 끕니다. 왜 그럽니까? 취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계속 우리 속에 충만하게 살아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의 취향이 그가 좋아하는 취향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것들이 믿음이 좋아하는 취향이어서 한 번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이 계속 활활 타오르게 되겠습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원에 관한 것입니다. 믿음은 허공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어떤 대상이 있고 거기에 대한 신뢰와 찬도 의존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또 들음으로서 그 믿음은 강해지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신학적인 책을 읽고 설교를 듣고 신앙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처럼 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 문제 없고 자기를 에워싸는 환난과 시련 그런 것 문제없습니다.
(예화)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도 되나 모르겠는데 이번에 로마에 갔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정명훈씨가 그 교회 교인이었습니다. 지휘자 그 분이 세계적으로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냥 유명한 사람이다. 조수미 비롯해서 몇몇 사람 중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대단합디다. 그중의 한 예가 오페라 라보엠을 전 세계 지휘자가 살아있는 지휘자 가운데 세 번째로 완벽한 지휘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신청이 쇄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갑니다. 이 담임목사님이 정명훈씨를 보고 뭐라고 하는가 하면 목사인 나도 배우고 싶은 수도사랍니다. 그런 정도 음악감독이 되면 프리마돈나를 꿈꾸는 젊은 여자들이 육탄 돌격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루는 물었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삽니까? 하고 물었더니 목사님 음악은 그 목표 자체가 사람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음악가는 음악에 연주를 하는 동안에만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연주를 해서 사람들에게 순수한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그 음악 앞에 살다가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다 한 얘깁니다. 여러분이 인정할 수 있죠? 더 결정적인 이야기는 평소에 음악 앞에 진실한 사람만이 진실하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디 출타중이서 직접 만나지는 못했는데 참 감동이었습니다.
난 충분히 이해합니다. 헤겔이 뭐라고 했는가 하면 진리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두 가지다. 하나님 말씀처럼 권위 있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참고로 들으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인식의 경험이 철학이라면 학문이라면 진리에 대한 대 인식을 못해도 감각을 하는 경험이 있는데 이게 예술이라는 것입니다. 둘 다 질서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되면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일 수가 있습니다. 결국은 아무리 이 세상이 강하고 환난이 크다고 이야기를 해도 그게 커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믿음이 작아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환난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나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에게 고난을 가한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을 능가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 분과 화목하고 그 분을 사랑하고 그분께 사랑을 받으면서 산다면 무한한 승리의 하나님이 통치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련도 없이 피 튀기는 믿음의 전쟁터에서 떠올려져서 하늘하늘한 실크옷을 입으며 비단길을 걸어가게 하시느냐 그런 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청교도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일평생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온 성도들의 얼굴에는 마귀의 손톱자국이 가득합니다. 왜? 할퀴긴 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쓰러트리지는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우리 얼굴에 난 손톱자국의 크기 정도를 가지고 1.2등급으로 우리를 구분하시는 분은 다행히 아닙니다. 문제될 거 없습니다. 그런 시련을 당해도 넉넉히 그것을 이기게 달라는 그것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믿음입니다. 항상 물어야 됩니다. 나의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좀 더 하고 싶은데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B. 끊을 수 없는 사랑
현실적으로는 뭐가 존재한다는 겁니까? 인생의 역경과 수많은 대적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이게 무슨 문제입니까?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승리를 확신하는데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죽든지 혹은 살든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 사랑은 계속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살고 죽는 문제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결정이 되는 판단요인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사자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등등 나옵니다. 이것들은 영적인 피조물입니다. 특히 여기 권세라고 하는 것은 마귀는 하나이고 그 밑에 귀신들이 있는데 귀신들이 등급이 다 있습니다. 그 랭킹에 속하는 어떤 이름들이라고 주석가들은 봅니다. 천사들도 그런 랭킹에 드는데 천사장 가브리엘이 있고 미가엘이 있고 타락한 마귀 루시퍼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천사를 훼방하는 귀신들이 있다고 칩시다. 그것들이 아주 랭킹이 높아서 거기에서 톱을 달리는 놈들이라고 칩시다. 그런 것들이 공격을 해와도 끊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현재일이나 장래일 현재는 역경을 만나고 장래에는 시련을 당할 수도 있고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살아가는 삶에 유한한 인생들이 겪는 변화무쌍한 삶에 흥망성쇠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습니다. 높음이나 깊음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물리적으로 높음 깊음 가지고 이야기를 한다면 지옥과 천국으로도 말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이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침체와 번영 이것을 암시하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 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를 많이 받고 천상에 올라가 있는 충만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가서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에 도달하는 영적인 흥망성쇠의 변화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은 눈에 보이는 수많은 피조물입니다. 맘에 안 드는 내 옆에 있는 사람들도 나를 가장 잘 괴롭히는 피조물들 입니다. 돈도 들어올 때는 힘들게 들어왔다가 나갈 때는 빨리 도망가는 피조물이라서 우리를 고달프게 만듭니다. 벌려면 땀이 뻘뻘 나고 허덕거리는데 쓸려고 하면 너무 쉽게 술술 나가 버립니다. 많은 피조물들이 우리에게 때로는 기쁨을 때로는 시련을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런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 우리는 순간순간 고통을 받고 죽음을 느낍니다. 그래도 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피조물이라도 하나님을 거슬러서 우리를 해치지는 못한다. 그러면서 사도는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 누구를 우리를 끊어 놓을 수가 없으리라. 이 모든 사랑을 주도권을 하나님이 갖고 계십니다. 언젠가도 설교 시간에 몇 차례 언급했지만 사랑은 형이상학적으로 말하자면 타자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려는 성향입니다. 그 성향의 힘을 우리들이 덕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덕스러운 사람을 어떤 까다로운 사람과 함께 갖다놔도 함께 있게 해도 항상 부딪히지 않고 좋은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좋은 것들을 흘려보내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버리게 하고 좋은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덕의 사람입니다. 형제들은 덕스러운 자매들에게 장가를 가야 됩니다. 덕이 어디 있나 덕을 보고 가야 합니다.
어떤 형제가 내가 하도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목사님 저는 신앙이 뛰어난 자매와 결혼해서 평탄한 길을 가느니 예쁜 자매를 만나 시련의 골짜기를 지나겠습니다. 무식한 것, 지가 시련의 골짜기를 압니까? 한번 시련의 골짜기에서 쓴물을 먹고 아침에 눈뜰 때 죽음을 생각하고 밥 먹을 때 죽음을 생각하고 마지막에 잠잘 때 죽음을 생각하는 처지가 한번 되어 봐. 참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이러면 안 되는데 유명한 스타들이 결혼이 파경에 이르고 다른 여자들하고 제 2의 삶을 삽니다. 먼저 있었던 여자보다 더 예쁜 여자에게 가는 남자가 없습니다. 이것이 나의 설교를 입증해 주는 것입니다. 형제들, 자매들만 고개를 그렇게 끄덕이는데 절대 그런 생각 말고 덕을 찾아 덕이 어디 있나 하고 오늘 깊이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덕을 찾지 않고 다른 것을 찾았기 때문에 사십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회개하고 참 덕을 찾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가을이 오기 전에 시월의 어느 푸르른 날에 결혼하게 될 것입니다.
C.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
사랑이라고 하는 관계는 타자와 선을 지향하는 관계를 맺는 힘입니다. 강도가 강도짓을 성공하기 위해 동업자들에게 끔찍이 잘해 주는 것을 우리는 선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것은 굉장히 큰데 관계를 맺는 힘이 지향하는 바가 은행을 터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가끔 뇌물을 막 먹은 다음에 누가 빵 터트립니다. 그 인간이 그렇게 배반할 줄 몰랐다고 하는데 그건 바보입니다. 그런 말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타자와 관계를 맺는 힘입니다.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그것을 희미하게 닮은 것입니다. 희미하게 닮았는데도 충만한 믿음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살 때 그 사랑의 힘이 그렇게 위대해서 우리를 감동시키고 눈물이 나게 하는 것을 보면 원천이신 하나님의 사랑은 얼마나 놀라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는 삶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묵상한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묵상한다는 말과 거의 동의어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아무리 망가지고 부서진 인간이라도 하나님이 끝까지 사랑하시고 따라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종종 이렇게 예수를 믿는 여러분이 때로는 실패하고 좌절하고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지 못할 사람을 봅니다. 그때마다 이런 말로 그들에게 용기를 줍니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생각해 볼 때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여러분이 아무리 불순종해서 정말 나쁜 인종이 되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불신자로서 하나님을 대적할 때보다는 굳이 하나님보고 달아 보라고 그러면 좀 다르지 않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그 의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불순종하고 허물이 있고 죄를 짓고 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자의식을 여러분이 아무리 명민하게 느낀다고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못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 아니라는 얘깁니다. 오히려 성령님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신 후에는 그 죄 때문에 자신이 도저히 하나님 앞에 열납 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의 구주이신 그리스도 십자가 아래로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굳게 붙들고 나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호소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싫어하는 여러분의 실제적인 생활의 핑계이지 진정한 이유는 아닙니다.
여기 전도사님들 목사님들 팀장도 있습니다. 가끔 이런 사람들 있습니다. 만나자고 며칠 전부터 이야기 하는데 기분이 이상합니다. 팀장님 하며 밥을 먹은 다음에 심각한 얼굴로 제가 이번 달로 순장을 그만하겠습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순장도 없어 죽겠는데 사람들은 계속 오고 왜 그래요 하니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 같은 사람이 순장을 하는 것은 우리 순원들에게 너무 커다란 손해입니다. 그럼 계속 하고 있는 사람들은 뻔뻔한 사람들 입니까? 순원들이 손해가 나든지 말든지 거기에 쳐 박혀 있는 사람들입니까?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아닙니다. 밑에 깔려 있습니다. 나 하기 싫다 말입니다. 나 순모임 하기 싫습니다. 순장 공부하면서 맨날 늦게 가는 게 싫다. 수련회도 안가도 되는데 꼭 와야 되는 게 싫다. 모임은 왜 그렇게 많습니까? 자유를 줘. 그것이 진짜 하고 싶은 얘깁니다. 그것도 모르는 팀장들은 아니야 괜찮아 자네보다 실력 없는 사람들도 얼마나 순장 많이 하는데 똑같아.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게 아닙니다.
상담자는 항상 영어 속담에 ‘read my lips’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독순술입니다. 대통령이나 군사지도자들이 이야기할 때는 항상 이렇게 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 독순술에 누출 될까 입니다. 독순술은 저기 1키로 밖에서 망원경을 보면서 국가 원수나 주요 지도자들이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정확하게 스펠로 옮기는 것입니다. 비밀이 다 누출 되는 것입니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너무 불쌍하면 기도를 해야지 사표를 낸다고 합니까? 그런 엄마가 어디 있습니까? 순장은 엄마입니다. 애들 잔뜩 놓아 놓고 어느 날 애들을 다 불렀습니다. 애들아 난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의 자격이 없다 애들은 그것도 모르고 엄마 괜찮아 최소한 엄마는 독약은 안 먹이잖아 괜찮아 하는데 아니야 난 자격이 없어. 그러고 도망갑니다. 어미도 아닙니다.
사랑이 없으니까 타자와 관계를 맺을 모든 힘이 완전히 고갈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점에 있어서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끊임없이 관계를 갖고 계십니다. 그 사랑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의 잘못이나 과오, 불순종 죄 같은 것들도 일단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그 불속에 던져진 가연제처럼 타오르면서 수많은 아름다운 빛들을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폭죽이 빵 터질 때 색깔을 금속의 종류로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가 8장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그 무엇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과의 관계로 돌아가고 믿음으로 살면 지금 나에게 매우 나쁜 때로는 너무 가슴 아픈 어떤 것들도 그 사랑의 불길 아래 찬란하게 타오릅니다. 두고두고 우리가 그 사실을 생각하며 하나님 사랑하게 만들어 주시고 내가 그렇게 미끄러지고 잘못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하나님의 아주 위대한 속성들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신뢰심으로 죄를 짓는 오늘의 삶, 불순종하는 우리의 삶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금하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어디에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이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깊이가 얼마나 큰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화) 오래전 일입니다. 선교사 한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사역을 했는데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아들을 한꺼번에 사고로 잃어버렸습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부모가 슬픔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은 선교를 포기를 하고 돌아갈 귀환 계획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 아들을 비가 주적주적 내리는 날 아프리카 이름 없는 야산에 묻으면서 이 선교사는 생전 처음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그게 가슴에 다가오지 않았는데 자기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야산에 묻으면서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 자기 아들을 우연한 사고, 자기도 보지 못하는 그 순간에 일어난 사고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그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와서 하나님이신데도 그렇게 업수히 여김을 당하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못 박혀 잔인하게 매질을 당하고 피 흘려 죽어가는 그 모든 광경을 인간보다 더 많이 느끼시면서 바라보실 때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아들을 죽여서 우리 같은 아들을 사랑하고자 하는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 이 선교사의 마음에 복음의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찬양)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라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어디 그뿐입니까? 아버지는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보내셨는데 아들은 자기를 보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알지 못하던 이 사랑에 눈 뜨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께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부르시는 하나님 같으신 분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렇게 주님처럼 사랑의 손길을 베푸시는 분이 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Ⅲ.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에 처한 상황은 한없이 다양하고 복잡하다 할지라도 길은 하늘 그분께로 돌아가는 것, 이렇게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여러분을 부르시는 그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 사랑이 끊을 수 없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실은 이 사랑이 우리에게 고통의 원인도 되기도 합니다. 주님이 포기하시면 편할 텐데 포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주님을 등지고 걸어가는 우리의 앞길에 가시덤불을 놓으시고 고난의 골짜기를 남겨두셔서 이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격적으로 깨닫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앞에 일어나고 있는 곤고한 현실은 뒤집어서 말하면 하나님의 피눈물 나는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이제는 그만하고 깨닫거라. 나의 사랑을 네가 끊고자 하느냐. 나를 향한 너 사랑은 끊어지더라도 너를 향한 내 사랑은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이니라. 주님께 돌아오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승리가 있는 복음(청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