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가 있는 복음 (장년 수련회)
(2013년 설교모음)
승리가 있는 복음 1 (2013.8.11 장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 있는 복음 2 (2013.08.12 장년 수련회 새벽)
설교기간|201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8월 28일
목 차
승리가 있는 복음 3 (2013.8.12 온가족 장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 있는 복음 4 (2013.08.13 장년 수련회 새벽)
1. 우리를 구속하심(롬 8:31-34) 2013.8.11 장년 수련회 (저녁) 1
2.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2013.8.12 장년 수련회(새벽) 17
3.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롬 8:35-37) 2013.8.12 장년 수련회(저녁) 26
4. 사랑과 하나님의 영광(요 21:17-19) 2013.8.13 장년 수련회(새벽) 38
5. 끊을 수 없는 사랑(롬 8:38) 2013.8.13 장년 수련회(저녁) 46
승리가 있는 복음(장년) 1
승리가 있는 복음 1 (2013.8.11 장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 있는 복음 2 (2013.08.12 장년 수련회 새벽)
승리가 있는 복음 3 (2013.8.12 온가족 장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 있는 복음 4 (2013.08.13 장년 수련회 새벽)
승리가 있는 복음 5 (2013.8.13 장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있는복음 2013. 08. 11(주일) 첫째날 저녁
< 우리를 구속하심 >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롬 8:31-34)
I. 본문해설
-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구조 가르침
- 율법주의 사고 복음 교리로 혁파함
- 생명의 성령 받은 그리스도인들
- 피조물들의 구원과 인간의 영광
-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그 자녀들
II.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
A. 자기 아들을 내어주심
- 아들을 아끼지 않으심
- 모든 것을 내어주심
- 택하시고 의롭다 하심
B.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
- 고발할 수 없는 자녀들
- 정죄 받지 않는 자녀들
- 다시 살리신 그리스도
-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
-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
III.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
- 믿음으로 그 사랑 안에 살아감
- 언제나 거기서 기다리심
IV. 결론
승리가있는복음 2013. 08. 12(월) 둘째날 저녁
<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5-37)
I. 본문해설
II.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김
A. 세상과 신자의 현실
- 환란, 곤고, 박해
- 기근, 적신, 위험, 칼
- "죽임을 당하며‥도살할 양 같이"
- 시44:22‥이방에 짓밟히는 선민
B.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 "그러나" 앞의 상황을 뒤집음
- "이 모든 일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승리하게 하심
C. 승리하는 삶의 비결
- 그리스도와의 신비한 연합
- 성화의 진수인 그리스도와의 연합
- 영적 자원의 공급과 신비한 연합
- 사랑의 결과로서의 연합의 누림
III. 결론
승리가있는복음 2013. 08. 13(화) 셋째날 저녁
< 끊을 수 없는 사랑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8-39)
I. 본문해설
- 십자가의 구속으로 나타난 사랑
- 은혜를 주사 이기게 하시는 주님
- 경건의 실천과 성화의 중요성
II.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 우리가 확신하는 바
A. 인생의 역경과 대적들
- "사망이나 생명이나": 생사 여탈의 문제
- 천사들과 권세자들, 능력: 영적 피조물들
- 현재 일과 장래 일: 인생의 역경들
- 높음이나 깊음: 영적 침체와 번영
- 다른 어떤 피조물: 하나님을 거스러 해치지 못함
B. 끊을 수 없는 사랑
- 사랑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
- 나쁜 일이 우리를 악하게 하지 못함
- 스스로 부패하여 악으로 흐르게 됨
- 나쁘게 보이는 모든 것들은 선의 불꽃의 타오르는
소재임(롬8:28)
C.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
-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성부
- 자기 생명을 아낌없이 주신 성자
- 자기 사랑을 아낌없이 주신 성령
III. 적용과 결론
- 아무도 대적할 수 없는 신자들
- 스스로 부패함으로 사랑을 떠남
- 우리의 유일한 자산, 하나님 사랑
승리가 있는 복음(장년) 1
승리가 있는 복음 1 (2013.8.11 장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 있는 복음 2 (2013.08.12 장년 수련회 새벽)
승리가 있는 복음 3 (2013.8.12 온가족 장년 수련회 저녁)
승리가 있는 복음 4 (2013.08.13 장년 수련회 새벽)
승리가 있는 복음 5 (2013.8.13 장년 수련회 저녁)
1.우리를 구속하심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 8:31-34)
녹취자: 김경애
Ⅰ. 본문해설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로마서에 있는 구절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구조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이고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할 것인가 하는 것을 집중적으로 이 로마서에서 가르친 것은 한편으로는 아직 미약한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아직까지도 율법주의적인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은 사람들을 복음교리로 혁파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아주 아름답게 우주적인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관련하여 숙독하여야할 성경이 3권이 있는데 첫째성경이 로마서이고 로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웅장한 구조를 보여주시고, 두 번째는 에베소서인데 이 에베소서는 구원계획의 빛 아래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우주적인 경륜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편지가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이 구원계획과 교회를 향한 계획이 어떻게 우주적인 놀라운 성취를 이루는지를 기독론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책이 골로새서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3개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서로의 빛 아래서 나머지 책들을 읽어갈 때 우리들이 아주 웅장한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세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에서 특별히 우리가 읽은 8장 본문이 속해있는 이 내용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바로 생명의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단지 옛날의 많은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 아니라 용서 이상의 그 실제적인 무엇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사람들이고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단지 용서받은 죄인이 아니라 그 위에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성령을 받아서 살아가는 영적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성령이 신자들안에서 하는 위대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결국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고 창조된 세계가 인간에 의하여 완전히 망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대부분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라져버린 창조의 영광을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새롭게 회복시키시는가 하는 위대한 일들을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타락의 기사를 읽어보면 인간 한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의 빛을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지를 가지고 죄를 짓고 뱀의 유혹에 굴복하게 되자 아무 잘못이 없는 모든 이 창조세계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내리게 되었고 원래 그들 가운데 충만하게 드러나던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위대한 영광과 찬란한 광휘는 함께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거꾸로 뒤집어서 그렇게 망가진 세계 불완전한 세계, 모두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떠난 이 세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맨 처음 죄가 들어와서 망가졌던 순서대로 하나님이 구속하시는 것이 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위대한 역사를 제일 먼저 인간에게 베푸시고 인간의 구원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의 완성을 통하여 마지막으로 이 세계를 완성하고 이 세계의 인간의 구원의 역사가 모두 완성되는 그 시점에 이 피조세계에 내린 하나님의 저주는 사라지고 창조의 원래의 아름다운 광휘가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피조물들의 구원과 인간의 구원, 그리고 인간이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영광스러운 지위를 회복하는 것과 이 우주의 아름다운 영광이 회복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이 둘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한번 묵상해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계를 바라볼 때마다 감탄하고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솜씨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는지를 봅니다. 대부분의 영광이 이 자연의 세계에서 사라져서 흔적만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자연의 세계 속에 흔적이 남아있는 그것을 보고도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감격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이 대부분 떠나버린 인간의 타락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의 정신의 위대함과 문명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이 정말 간단한 존재가 아니라고 하는 인간의 위대함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볼 때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얼마나 아름다웠을 것이며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은 얼마나 존귀한 존재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운동이 르네상스 이후에 일어나고 나서 종교 개혁자들이 확고히 붙잡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어서 타락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굳게 붙들었다는 점에서 로마 가톨릭보다 훨씬 우울하고 비관적인 인간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종교 개혁자들은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타락하고 망가졌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존엄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에서는 로마 가톨릭과는 비교되지 않는 놀라운 인간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하자면 이 기독교 인문주의 운동과 여기에서 이어지는 종교개혁운동은 바로 이런 인간의 본래적인 지위에 대한 성서적인 자각을 통해서 일어난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인류를 향한 계획을 토대로 특별히 이 로마서 기자인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그 자녀들이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타락하고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인간이 그런 존엄성과 영광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면 이미 그 죄를 용서받고 그리고 중생하고 동시에 성화의 길을 걸어가면서 우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있는 신자들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이고 존귀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깊이는 인간을 대하는 태도의 깊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분을 사랑하는 깊은 경건의 도리는 바로 인간을 비록 그가 이 세상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지위나 많은 소유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인간이라는 사실 자체 때문에 존엄성을 읽을 수 있는 사람,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과 나아가서는 이교도들에게까지도 이런 생각을 확장할 수 있는 생각의 깊이 태도의 깊이가 경건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끊을 수 없도록 붙들려있는 그 자녀들의 존귀함과 영광은 얼마나 놀라운 것이겠습니까!
우리는 이 수련회의 주제를 승리가 있는 복음이라는 이야기로 문을 열고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승리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고 심지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분투하며 살아야할 어떤 전투적인 목표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승리하는 생활이라는 것은 꿈에나 나오는 이야기처럼 들릴 것입니다. 더욱이 패배에 익숙하고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이 승리는 매우 생소한 단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3일 동안 우리가 승리하며 살 수 있는 근거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는 방식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서 복음이 우리에게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를 차례대로 여러분에게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Ⅱ.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
제일 먼저 사도는 이 로마서 8장에서 위대한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는 죄 가운데 져서 신음하고 있는 죄에 진 상태를 그려내며 신음하고 있다면 8장에서 그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언하듯이 담대하게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제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해방된 사람이고 더 이상 죄가 지배할 수 없도록 사망과 죄의 법에서 혁파되어 자유를 얻은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나는지를 노래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담대히 노래했습니다. 자기 아들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약속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실패, 우리의 패배에 익숙해진 모든 삶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고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까워서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자원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패배하고 넘어지고 진다는 이야기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담대히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말하고자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자, 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하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구원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또, 하나님이 우리를 대표해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복되게 하시기 위해서 힘쓰시는 분이시라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면 이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의 인생은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위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 살려는 사람들을 위하는 것이 모순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 질서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 둘 사이에 모순이 생긴다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하는 일을 우리 자신을 위하는 일보다 먼저 선택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을 위하여 그를 사랑하고 그 뜻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를 위하시는 것과 당신 자신을 위하시는 것 사이에는 모순과 충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충분히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살아 계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사도가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에 지고 패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믿음을 촉구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을 위하여 살려고 하다가 실패하거나 좌절하거나 패배하거나 수치스럽게 되었을 때 적어도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적인 삶속에서는 종종 하나님이 우리를 대적하시고 우리의 가는 길을 막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좌표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면 우리가 당장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불행해질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막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대적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인데 악한 자에게 하나님이 악을 행하는 것처럼 느끼는 고통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을 거르려 살려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고 자기의 갈 길을 막으시는 분인 것처럼 악하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증거입니다. 악인은 고통을 당함으로써 자신의 길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이 위대한 주제에 깊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인의 승리에 관해서 말할 때 우리의 인생의 좌표를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진정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올바르게 하여야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신 목적, 창조해주신 계획, 하나님이 동의할 수 있는 인생의 좌표축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설계하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신 있게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나를 돕는 자는 하나님 한분이 시옵나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A. 자기 아들을 내어주심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까지 위하셨습니까?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고 말합니다. 32절은 말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지 아니하시겠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선교사가 복음 사역에 지지부진하게 일생동안 사역을 했는데 어느 날 사고로 사랑하는 두 아들을 함께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마저 병들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을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에 그는 선교를 포기하려고 생각했지만 그 두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두 아들이 끔찍하게 사고로 죽어가면서 그 아이들을 그 선교지에 묻으면서 이 선교사는 복음의 진수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두 아이를 땅에 묻고 아내마저도 땅에 묻고 선교를 접을 생각하고 있는 그때에 ‘얘야 너의 사랑하는 두 아들은 이 선교지에 묻은 것으로 네 마음이 쓰리고 아프냐? 나는 이미 오래전에 나의 아들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겪은 나의 아픔이란다.’ 라고 말입니다. 아들은 하나님에게는 완전한 하나님의 개념입니다. 아들이 최고의 사랑이었고 그 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셔서 죽기까지 복종하다가 십자가에 죽게 하신 이 사건은 하나님이라도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표현할 길이 없는 최고의 표현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렇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고 한 번도 후회하신 적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이 성령 충만하고 온전한 성화의 삶을 살면서 교회에 헌신할 때만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자녀였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에 지고 실패하고 어둠속에 미끄러져있는 때조차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아낌없이 내어주신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때문에 그 놀라운 사랑을 인하여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들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내어주셨다면 적어도 하나님에게는 우리는 피로 값 주고 산 당신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은 당신 자신을 제외하고는 예수 그리스도 보다도 더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소중한 그리스도도 우리를 위해 주셨으니 하나님은 적어도 우리에게 필요한 그 어떤 것을 주시지 아니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패배하게 하는 삶은 살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모든 기초는 처세의 방법이나 요령이나 수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승리를 향한 모든 삶의 기초는 구속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실하게 성경공부에 참여하였더라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반복해서 들은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모든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은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가 아무리 수준 높은 성경의 지식을 소유하고 있고 신학을 공부하고 그리고 신비한 은사의 세계를 두루 체험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자가 ‘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주사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컫게 하셨는가!’ 에 대한 자각이 없는 한 절대로 그 지식을 가지고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을 위한 기초적인 자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비록 용서받은 죄인이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존재이고 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다 적어도 나는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렇게 버릴 수 없는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존재다.’ 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내가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단 한순간도 의식 속에서 떼어버리지를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신 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라면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역시 나는 아무것도 아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셨지만 이제는 나의 진정한 행복은 나를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는 자기 고백이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신앙생활을 해보셔서 알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를 생각하면서 ‘이 벌레 같은 흉악한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왜 이 몹쓸 죄인을 위해서 존귀하신 당신의 아들을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이셨습니까?’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만을 바라보고 그리스도 십자가 이외에 내게는 자랑할 것이 없노라고 고백하면서 살아온 날들이 우리의 전체의 신앙생활 중 얼마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번에 한 달 동안 쉬는 동안에 참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우선 주일이 너무 편하다는 사실입니다. 한번만 그것도 남의 교회에서 부담 없이 무엇이든지 설교를 하고나면 주일 하루가 모두 정말 안식일이었습니다. 열린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주일은 언제나 노동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쉬니까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를 많이 시키셨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15년 전의 설교는 너무 부끄럽습니다. 15년 전의 교회를 경영하고 운영하던 방식이 어떤 때는 너무 창피하고 유치하기까지 했습니다. 또 15년 전에 썼던 책은 대부분의 책들은 그렇지 않지만 어떤 책들은 ‘이것을 다 버리고 다시 써야하는데…….’ 결정적인 비진리가 발견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 썼더라면 더 잘 쓸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속에서 새벽에 혹은 밤중에 일어나서 혼자 일어나 앉아서 기도하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 말고 그때 내가 신학생이었을 때, 이름 없는 집사로 교회를 섬길 때, 신학교 선생이었을 때 영혼의 변화를 받았던 복스러운 은혜의 날들 동안에 나의 마음속에는 이 십자가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차를 운전하고 가다가 길가에 차를 세워놓고 하나님 왜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서 자기의 존귀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기까지 나를 용서하셨을까? 하며 한없이 울고 그랬던 날들을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제가 88년에 안양대학교 전임교수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때 교수가 되고나서 88년부터 91년도 12월까지 그 학교에서 봉직했습니다. 그런데 그 4년 동안에 흘린 눈물의 양이 20년 열린 교회를 하면서 흘린 눈물의 양보다 많습니다.
(찬양)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여온다
빛을 잃은 많은 사람 길을 잃고 헤매나
탕자처럼 기진하니 믿는 자여 어이할꼬
강의를 하고 나오면 그 파리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신학생이 신학이라기보다는 교회에서 성경공부나 배워야 될 학생들을 보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고 마당으로 나가면 높은 언덕에서 밤중이면 저 아래 안양 시내가 보입니다. 그 불빛 아래서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황하고 죄를 짓고 있을까하며 엎드려서 한동안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미안합니다. 그때 4년이 내가 보기에는 사역의 첫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래서 그 회상을 할 때마다 여러분에게 20년 동안 내가 그때처럼 눈물을 쏟으면서 여러분을 목양했다면 지금쯤은 여러분이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텐데 나의 헌신이 부족했다고 느낍니다. 그것은 결국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의 깊이는 십자가에 대한 은혜의 깊이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신학지식이 탁월하고 뛰어나도 십자가의 현재적인 감화가 없는 사람보다는 작은 지식밖에 없어도 생생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그 뜨거운 피를 맡고 있는 초신자가 더 열렬하게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사랑을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위해 못 박으시기까지 그 모든 고통의 희생을 지불하시면서 나를 사랑하셨구나! 그리고 주님이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이 놀라운 사실은 바로 나로 하여금 주님이 나를 위해 주님이 자기를 버리셨듯이 나도 또한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을 버리며 살라고 내게 주시는 십자가의 은혜이구나!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오늘만 수련회를 나오고 못나오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패배하고 그것을 운명처럼 생각하면서 빛의 자녀이면서도 어둠을 걸어가는 삶을 살고 싶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들은 죄에 짓밟히고 패배하는 생활이 좋으면 그길로 가십시오. 그러나 만약에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된 승리하는 삶을 꿈꾼다면 십자가 없이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어렵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화목제물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나타났기 때문에 우리는 의지적으로 그 십자가를 많이 묵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어느 한순간도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을 통해 받은 이 구원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도록 우리가 이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 속에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내어주실 수 있고 기꺼이 그렇게 하시려는 분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하실 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하시고 또 마지막으로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내가 이 예배의 자리에서 다른 이유 말고 이렇게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은 부당한 것입니다. 하나님 왜 그렇게 무모한 일을 하셨습니까? 나 같은 인간이 무엇이기에 흠 없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셨습니까? 그리고 그 사랑은 어느 한순간도 자연스럽지 않고 그것이 찢어지는 고통이 되어서 그 십자가의 은혜에 눈물을 흘린 적이 언제입니까? 성경지식은 늘어났을 것입니다. 요새 또 주기도문을 공부하면서 얼마나 지식이 늘어났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소중하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에 대한 우리의 눈물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십자가의 사랑에 현재적인 체험 속에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
마지막 두 번째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니라.’ 라고 말입니다. 그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자기의 살을 찢고 피를 쏟아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일은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사역이고 이미 성취된 그리스도 예수의 사역에 우리는 티끌만큼도 보탤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아직까지도 끝내지 못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받게 해주시고 당신의 생명을 성령으로써 우리에게 주사 우리로 당신과의 생명적인 연합 안에서 살게 만들어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이 생명이 자 동적으로 우리 안에 역사해서 우리를 승리로 이끈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지금 주님의 보좌 우편에서 이 모든 우주와 천하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여호와의 권세를 당신이 스스로 장악하시고 있는 지금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위해서 간절히 빌며 간구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도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하실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빌면서 우리를 위해서 간절히 하나님께 비시는 중보기도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들을 지키고 보호해달라고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하나님보좌 우편에서도 아버지께 간절히 빌고 계시고 하나님 아버지가 다른 모든 것은 하실 수 있어도 당신의 아들의 기도는 거절하실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면 이 이중의 보증, 하나님이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셨고 아들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빌고 계시다는 이중의 보증이 결국은 무엇에 의하여 에워싸이고 어떠한 시련과 환란을 지나고 어떠한 죄와 사망의 위협이 우리 앞에 있어도 어떠한 양심과 율법의 정죄가 우리를 고발한다고 할지라도 다시는 정죄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이 너무나 명백하지 않습니까? 원래 정죄하는 것은 율법의 기능이고 송사하는 것은 양심의 기능입니다. 연약한 신자들에게 이 양심은 잘못된 방법으로 살아서 역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 하나님께 부당하게 송사하고 그래서 스스로 자신이 자신의 죄에 대한 재판관이 되어서 사형을 선고합니다. 그것이 믿음 없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형태가 죄책감으로 하는 자살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의 기능 그 자체는 나쁜 기능이 아닙니다. 만약에 양심의 기능이 인간에게 없다면 선과 악에 대한 정당한 판결, 선을 행할 때에 어떤 하나님의 보상이 따른다는 것, 죄를 지을 때 그 뒤에 따라올지도 모르는 응보의 대가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버릴 것이고 그러면 인간은 어떠한 도덕적인 결정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양심은 그 자체의 기능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이 때로는 양심에 대해서 강력하게 탄핵하고 공격하고 있는 장면은 무엇이냐 하면 그 양심의 기능이 뒤틀려서 잘못 적용되어 신자들로 하여금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그래서 내가 그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 그것은 그 양심의 작용보다도 더 위대하고 초월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면 신자도 죄를 지을 수 있고 미끄러질 수도 있고 양심에 가책을 받는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양심의 작용들이 이 속에서 발생합니다. 그러면 양심의 작용들이 일어나서 ‘내가 왜 예수 믿는 사람인데 그런 일을 했을까? 누구를 헐뜯었을까? 내가 왜 이런 죄를 지었을까?’ 라는 많은 양심의 송사들이 일어나면 이것을 그대로 가지고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야합니다. 그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하십니까? ‘너는 잘못했지만 그러나 너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이시고 너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간구하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너를 위해 빌었느니라.’ 이 사실 속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질 수도 없고 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등질수도 없고 더군다나 내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내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이 양심의 기능을 활용해야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보고 양심은 회개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용서를 빌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손해를 입힌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배상을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양심을 지도하면서 올바른 일을 하게해서 결국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게 만들어주는 것이 양심의 역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능이 깨어져버려서 미친 듯이 양심이 날뛰면서 이 양심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를 거부하는 완강한 죄성과 야합하게 될 때에 이 양심은 모든 것을 뒤집어놓는 역할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기능을 사도바울이 강력하게 탄핵하면서 그런 식의 양심의 작용들이 결코 우리를 하나님 앞에 송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양심의 송사보다 더 큰 변호자가 우리에게 계시니 양심은 우리를 위해서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지만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시기까지 못박혀죽으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자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양심에 대해서는 공부를 많이 해야 합니다. 청교도들은 이 양심에 대해서 엄청나게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고발하리요?’ 양심을 겨냥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양심은 고소를 하고 죄를 정하는 것은 율법이 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비추어서 양심이 막 고소를 할 때 율법에 호소를 하면서 고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피고인이 되고 양심은 검사가 되어서 소송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율법은 판사가 되어서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너는 죽음에 해당되는 죄다. 모든 죄는 죽음에 해당되는 죄다.’ 라고 판결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죄를 무효화하게 하는 분이 계십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우리의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지시고 그 율법의 요구를 따라 그분이 충분히 정죄를 받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구원의 은혜 안에 있는 한 율법의 요구를 이미 예수님이 이루셨기 때문에 그 율법이 우리가 그 율법을 범하였다는 이유 한가지만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도록 우리를 정죄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담대하게 말합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자, 죽을 때는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우리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는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실 때에는 그렇게 위하여 죽은 모두와 함께 우리를 끌어안고 당신 자신이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죽음에 참여한 것처럼 부활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중대한 이번 수련회에서 다루지 않으면 안 될 중대한 숙제를 만납니다. 여태까지 한 설교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없을 정도로 아주 명료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셨다. 그래서 그 십자가에서 우리의 지을 수 있는 모든 죄를 아들이 짊어지고 대신 형벌을 받으심으로 우리가 더 이상은 율법 아래 사는 사람이 되지 않게끔 만들어주셨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살아나셨고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계시는데 아버지는 그 아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시다. 이것이 여태까지 설교의 결론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현실적으로 패배하고 실패하는 삶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대체 그 패배의 정체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패배의 정체는 현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패배의 정체는 내가 큰 사업을 하다가 쭈그러들어서 작은 사업을 하게 되었다든지 아니면 내가 높은 지위에 있었으나 떨어져서 낮은 지위에 있다든지 내가 부인이 죽어서 결혼을 했는데 전 부인 보다 못난 여자에게 장가를 갔다든지 이런 것이 패배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이 패배인가? 이런 현상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담대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도대체 무엇을 이기셨다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런 식의 승리하는 삶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대척점에 서있는 대적을 염두에 두고 승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대척점의 대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죄와 사단의 권세입니다. 사단은 그 모든 것들을 조정하는 궁극적인 원인이지만 그러나 죄를 선택하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선택 없이는 그 마귀와 귀신들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마귀와 귀신들의 세력의 문제는 인간이 죄를 좋아하고 거기에 굴복하는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결국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승리하는 삶이라고 할 때 성경이 그리고 있는 승리하기 위해서 싸워야하는 대척점에 있는 대상은 궁극적으로 죄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이 죄가 마귀들의 도전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적인 전쟁으로써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유장한 그리스도인에 관한 우주적인 논증을 마치고 4장부터 그리스도인의 실제적인 삶을 교훈한 다음에 마지막에 이 편지를 마칠 때쯤 되어서 6장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종말로 형제들아 종말로 우리들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한 것이다.’ 라고 편지를 마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씨름이라는 것이 희랍어로 ‘팔레’(πάλη)인데 지금으로 말하자면 격투기입니다. 가죽에 쇠를 박아서 장갑을 만들고 이것을 끼고 그리고 맨몸으로 싸워서 한 사람을 피를 흘리기까지 쓰러뜨려서 죽이거나 항복을 시키는 것이 이 씨름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생사를 건 전투입니다. 그 유혈이 낭자하게 튀는 원형경기장 안에서의 격투를 모두 보고 살아왔던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이 ‘팔레’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악의 영들이 대적하는 싸움입니다.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성경에서 죄와는 상관없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용례는 죄가 침투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세상의 정신에 붙잡힌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과 우리는 매일 매일 맞서서 싸우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이 싸움이 정말 피곤하기 짝이 없고 어떤 때는 고통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피합니다. 그래서 타계적인 신앙이 됩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직장을 다니다가 은혜를 받으면 자꾸 사표를 내고 직장으로 들어오려고 합니다. 우리교회에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큰 교회에서 교인 하나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네 교회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부흥회만 하고 나면 30대 40대 젊은이들이 교회에서 일자리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세상은 너무 피곤하니까 만날 술을 먹으라고 그러고 밤중에 가서 비즈니스를 한다고 이상한데 끌고 가는 이런 일들이 벌어지니까 신앙이 괴로워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 때려치우고 교회로만 들어오면 세상은 그냥 니들끼리 하라고 놔두는 것 아닙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대부분 다 알고 있는 분인데 데이비드 웰즈 박사를 알고계시죠? 왜 그러십니까? 여기가 어느 교회입니까? 데이비드 웰즈 교수님을 만나서 당신 책이 우리 교회에서 베스트셀러라고 얼마나 자랑을 했는데 모르십니까? 알고계십니까? 겸손해서 그러는 것일 것입니다. 모르고 있으면 깊이 회개하고 지금 하는 이야기를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작년에도 만났고 이번 4월에 데이비드 박사를 만났습니다. 그래서 너무 반가워하시는데 이분은 저보다는 15년은 넘게 연상이십니다. 노학자이십니다. 머리가 하얗고 은퇴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연구실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정말 단둘이서 달콤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옆에 교수님의 제자 한 사람이 옆에 있었습니다. 거의 우리 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참 중요한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최근에 당신이 어떤 저자로부터 책을 읽고 추천서를 써달라는 편지를 받았답니다. 그 책을 시간이 없어서 다 읽지는 못하고 대충 읽어보니까 복음으로 이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내용이었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목사님 나는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구호는 참 예쁘지만 난 그런 구호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다 압니다. 그렇지만 물었습니다. 왜 신뢰하지 않으십니까? 그랬더니 단순한 복음이 사람에게 전해져서 그 사람이 복음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도덕적으로 변화되고 개인의 삶은 경건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적어도 복음의 감격에 붙들려있는 사람이 뇌물을 먹고 사기를 치고 당장 나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분 말씀은 이것입니다. 그런 개인적인 변화는 가능하겠지만 이 세상 전체가 어떻게 복음으로 변화가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개인이 아니라 강력한 사상을 형성하고 있고 그 밑에 딸린 수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것을 확신을 가지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복음으로 변화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복음이 쓸데없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 하나만을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9월 15일에 산상세미나를 하는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몇 년도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꽤 오래되었습니다. 광림수도원에 올라가서 여러분이 아마 그 세계화 사회에서 진리의 전달자라는 특강을 2시간 24분간 들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금은 그것을 들으신 분은 여기에 1/3정도 밖에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여러분이 2시간 24분 동안 질풍처럼 제가 강의를 했고 그때에 르네상스 이후의 이 서양의 철학사와 사상의 변화를 통해서 어떻게 무시무시하게 이 세상의 정신이 형성되어서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래서 복음을 전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는구나! 라는 것에 굉장히 충격을 받은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비 내리던 그날, 1500명이 올라갔던 그날입니다.
세상은 우리는 모르지만 그런 강력한 사상을 형성하면서 아주 조직적인 방식으로 이 세상을 공격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합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하나는 복음에 대한 개인적이고 현재적인 열렬한 체험입니다. 그것과 함께 이 세계의 정신이 무엇이고 어떻게 교묘하게 사상과 문화 속에 침투해서 그리스도인들을 무력화시키려고 밀고 들어오고 있는가에 대한 이 세상의 정신들을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 우리 모두 복음 하나로 이 세상을 바꿉시다.’ 그러면서 나오는데 성공한 사례가 없습니다. 그 구호는 너무 멋있지만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웰즈 박사 당신 자신은 그렇게 해서 세상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필요하냐하면 기독교적인 사상, 그리고 이 세상의 사상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사상이 훨씬 더 훌륭하다는 이 위대한 지적인 힘, 이것이 뜨거운 복음의 체험과 함께 역사할 때 이것은 마치 거대한 탱크가 강력한 엔진으로 구동하여 웬만한 산이고 들판을 깎고 달려가는 것과 같은 파격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하는 삶이라고 이야기할 때 우리를 겨냥하고 있는 두 번째 대적은 이 세상입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이 둘 중의 하나를 얻기 위해서 하나를 버리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여기 교회가 신학교도 아닌데 무슨 공부를 하냐고 그러느냐면 다 때려치우고 열렬히 기도를 해야 한다는데 그것을 가지고는 세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반대로 그것은 교양 없는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고 기도를 하고 그러는데 머릿속은 텅 비어서 그러면 안 되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공부는 하는데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 사상을 위해 사상은 아는데 그 사상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사상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을 따라서 죽기도하고 살기도 할 수 있는 신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신념은 지식이 없이는 생겨나지 않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이 신념이 생기면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그 두 개를 같이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이기는 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뭐냐 하면 자기 자신입니다. 어떤 자신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아름답게 성화된 자신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옛 본성 즉 수시로 낙망하고 죄 가운데 넘어지는 이런 옛 자아가 내안에 있기 때문에 이것들이 수시로 승리하는 삶을 위한 현실적인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늘 말씀드리지만 다 집어치우고 불을 끄고 우리들이 한 30분 동안 찬양을 부르고 하면 여러분을 다 눈물 흘리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그 눈물이 마르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까?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을 굳게 붙들고 이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있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이 은혜가 사라져버린 다음에라도 붙들고 살아야한다고 나를 각성시킬 수 있는 그 어떤 사상과 지식과 신념들이 생겨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됩니까?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아낌없이 주시도록 사랑하셨고 그렇게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니까 적어도 하나님이 우리가 순종하기를 원하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은혜를 조금 주셔서 승리를 못하게끔 우리를 방치하시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 정도로밖에 사랑하지 않으셨으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실 수가 없었고 그렇게 무관심하실 것이면 보좌 우편에서 그렇게 밤이나 낮이나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실 예수님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면 결국은 무엇입니까? 싸워야할 대적과 야합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거기서 우리들이 승리를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선택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이고 이제 우리에게는 승리하면서 복되게 살든지 패배하고 짓밟히면서 불행하게 살든지 둘 밖에는 없고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회색지대라는 것은 없습니다. 중간지대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제까지 살아왔던 우리의 이 전투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의 패배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족이나 그리스도 예수의 헌신의 부족 그리스도 예수의 관심의 부족 때문에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Ⅲ.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그렇기 때문에 이 약속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제일 먼저 우리가 이미 받은 것을 생각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이었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용서를 받고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그 사랑 때문에 은혜를 받아 율법이 정죄할 수 없고 양심이 송사할 수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가 기도할 수 없을 때조차도 성령은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을 간구하시고 예수는 주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비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비시겠습니까? 우리로 하여금 창조된 목적대로 살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계획대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기도문의 삶을 살도록 우리를 위해 빌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실패한다면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할 때에는 이 현실은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으로 허락하신 현실이 아니라 우리가 택한 현실입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요구합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요구하고 전쟁에서는 승리와 바꿀 수 있는 더 고귀하고 아름다운 가치는 없습니다.
그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의 갈 길을 선택하도록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저는 휴가를 가기 전에 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보지 못한 마가렛 대처라는 영화를 혼자 보았습니다. 아이패드를 가지고 보았는데 정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감동을 받은 한 장면은 그 포클랜드 사태에 임하는 대처의 정신이었습니다. 그 영화에도 사실은 아주 중요한 몇 개의 코드가 흐르는데 그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경제학에 관한 코드입니다. 그 영화가 간단해보여도 그것은 단순히 보수당과 노동당의 갈등이 아니라 존 하이에크라는 경제학자와 그리고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J. M. 케인즈라는 두 경제학자 사이의 오래된 논쟁을 말하는데 사실은 존 하이에크가 J. M. 케인즈에 묻혀서 빛을 보지 못했는데 그러다가 나중에 노벨상을 받으면서 이 사람의 이론이 다시 뜨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여기에서 이 사람은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경제이론을 신봉하고 그리고 J. M. 케인즈의 경제학에 의해 구축된 질서를 거부하는 길을 도날드 레이건과 함께 걸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대사가 나옵니다. ‘모두들 그길로 가라고 하세요. 이 숙녀는 가지 않겠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Sub Prime과 Mortgage사태들이 결국은 그런 신자유주의를 너무 광범위하게 허용했기 때문에 시카고학파들이 저지른 오류의 결과가 오늘날 경제의 사태가 아니냐? 그러면서 우리는 다시 케인즈를 생각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논쟁들이 한창 일어나는 그것을 배경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코드와 함께 깊은 감동을 받은 것이 전쟁에 관한 것입니다. 영국은 포클랜드를 아르헨티나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몇 해 전에 대처총리가 결정을 해서 최소한의 군인을 남기고 모두 다 본국으로 혹은 다른 곳으로 빼버렸습니다. 그런데 공격을 해온 것입니다. 한방의 미사일을 날려서 군함 한척을 침몰시켰는데 300명의 영국장병이 몰살했습니다. 그때 대처 총리가 300통의 편지를 모든 군인의 가정에게 자필로 썼습니다. 그리고 위로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빌었습니다. ‘당신의 아들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을 결심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국무장관을 보냈습니다. ‘총리님 포클랜드는 아무런 경제적인 가치가 없는 아주 하찮은 땅이고 인구도 많지 않고 영국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저 사람들이 잘못했지만 전쟁을 하시면 서로 피해가 너무 큽니다. 평화회담을 통해서 이 문제를 해결해보십시오.’ 그런데 이 대처가 말합니다. ‘말씀 참 잘하셨습니다. 당신네 나라 미국도 오래전에 하와이라는 작은 섬이 일본에 의해서 무차별 공격을 당했지요. 그때 여러분은 그 나라가 본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고 섬이 너무 작다고, 인구가 얼마 안 된다고, 경제적인 가치가 없다고 즉시 일본과 평화회담을 시작했습니까?’ 그리고는 전쟁의 발동을 걸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총리님 전쟁을 하시면 영국의 경제는 휘청거립니다.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총리가 말했습니다. ‘지금 경제이야기가 나올 시점입니까? 공격하려면 몇 시간이 필요합니까?’ ‘48시간이 필요합니다.’ ‘공격을 준비하십시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영국 국민들의 자존감과 자긍심은 돈으로 주고 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전쟁이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도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쟁은 비상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이 무엇이 좋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네가 진정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고 싶으냐? 그러면 너는 마귀와 더불어 이 세상과 더불어 부패한 너의 옛 본성과 더불어 전쟁해야한다. 삶 전체가 전쟁이라는 구도 속에서 재편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많은 은혜의 자원과 우리에게 주신 모든 재료들이 이 전쟁을 위해 이바지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야합니다. 새로운 하늘의 지식의 무기가 필요하고 이 무기를 발사시킬 수 있는 성령의 은혜가 필요하고 이 무기를 움직여 적군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기도의 응원군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승리는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하자고 하니까 ‘멀리 떨어져있는데 그것 하나를 말씀대로 한다고 해서 내가 당장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축복해주신다는 보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질적으로 작은 일을 위해서 너무나 커다란 희생이 뒤따르잖아?’ 이런 식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데 늘 실패하고 패배하는 삶만 살아가고 있을까? 아 괴롭다. 교회에 오면 만날 무위도식 한다고 그러는데 뭐 이상하게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무위도식한다고 하는데 교회에서 밥이라도 공짜로 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 모르는데 나도 이천 원씩 주고 사먹는데 무위도식한다고 만날 야단치고 그럽니다. 그게 결국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복된 삶을 사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은 오늘 첫 번째 설교를 통해서 아주 명백하게 감이 왔을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끊임없는 실패 하는 삶이라는 사실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끔찍이 사랑하셨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보좌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시는데도 실패하는 것은 싸우라는 적과 내통하면서 사는 우리의 이율배반적인 삶에 실패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분투하는 삶을 살아야할 것이고 그렇게 이길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이 결국은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경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해 전에 인턴십을 하던 학생 하나가 아주 감동적인 간증을 하나 했습니다. ‘매주 말씀을 듣고 숙제를 하면서 저에게 놀라운 변화가 있었습니다.’ ‘무슨 변화입니까?’ 순간적으로 정욕이 밀려오든지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못한 생각이 떠오르면 예전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오! 주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주님 나를 버리지 마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면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주 놀랍게도 이기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승리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그런 기도를 해본 적이 매우 드뭅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그런 간절한 기도가 필요한 시점에서는 이미 벌써 전세가 기울었기 때문에 몸부림치면서 이기기보다는 편안하게 지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웃으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심각한 이야기입니다. 농담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우리의 생활을 반성하면 패배하다가 승리해야할 혹은 유혹을 받다가 극복하여야할 결정적인 시점들이 있습니다. 그때에 마음을 쏟으며 열렬히 기도한 적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이미 넘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렬히 기도하는 사람은 대부분 거기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그 전에 이미 돌이킵니다. 그러니까 모순이 여기서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조용히 생각해보십시오. 진짜 결정적인 갈림길에서 내가 현저히 유혹을 받거나 갈등하고 있을 때 순종하게 해달라고 눈물로 마음을 쏟으며 기도해서 사태를 뒤바꿔본 적이 있는가? 입니다. 거의 없는 것입니다. 이게 그래서 실패가 숙명처럼 스며드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삶인 것입니다.
시골에서 닭을 기르면 여러분은 보지 못했겠지만 싸리나무로 이렇게 병아리 울타리를 만듭니다. 소쿠리처럼 생겼습니다. 거기에다가 어미닭이 까놓은 노란 병아리를 집어넣고 덮어놓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모이를 쪼아 먹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게 놓아버리면 사방으로 돌아다니니까 주인이 찾으러 다니기 귀찮습니다. 울타리도 없는데 돌아다니면 찾아다닐 수가 없습니다. 풀숲에도 들어가고 잘못하면 쥐가 물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내버려두고 저녁때가 되면 이것을 질질 끌면서 이동을 해서 처마 끝에 놓고 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시간이 지나가면 병아리가 조금씩 커져서 처음에는 도토리만한 것들이 점점 커서 주먹만 해지고 그리고 두 주먹만 해지면 울타리가 꽉 차는 것입니다. 얘는 그때까지도 나가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안 되겠다. 오래간만에 놓아서 돌아다니면서 지렁이도 잡아먹게 자유를 주어야겠다고 뚜껑을 엽니다. 그러면 안 나가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왜? 수없이 나가보려고 부리를 쪼고 부딪혀보았는데 항상 막혀있습니다. 그래서 실패에 익숙해져있는 것입니다. 이제 뚜껑을 열어주어도 자기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나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인이 가서 막 발을 구르면서 닭을 흩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때서야 밖으로 튀어나가면서 두리번거리는 것입니다. ‘여기가 어디인가? 나도 나왔네.’ 기이한 경험입니다. 그러니까 실패와 패배에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사실은 인간을 향한 마귀의 궁극적인 계획입니다. 왜? 구원을 취소할 수는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생동안 사는 동안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불행하게 살다가 죽게 내버려두는 것이 마귀의 원대한 계획이라면 하나님은 우리를 계속해서 성화시켜서 하나님의 자녀 되게 만드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개의 현저한 다른 계획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Ⅳ. 결론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은 적어도 여러분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하나님이 선하시지 않거나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고 패배한다는 생각은 버려야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므로 반드시 하나님 앞에 뜻을 세우고 이 승리하는 삶을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서 여러분이 그렇게 믿음으로 당신의 구속의 은혜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요 15:9)
녹취자: 김선희
요한복음 15장은 그 유명한 포도나무의 비유가 들어있는 장입니다. 15장의 많은 내용들이 담겨져 있고, 그래서 열린교회가 세워지고 나서 제가 이 15장을 약 33번에 걸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내용이 이 15장 안에 들어있지만 그러나, 그 15장 안에 들어있는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을 한다면 예수님과 신자들 사이에 있는 생명적인 연합, 이것이 바로 15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의 가장 중요한 주제이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이 큰 주제에 딸려서 나오는 주변적인 이야기들입니다.
포도나무를 여러분이 보셨을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옆으로 가지가 길게 뻗으면서 자라기 때문에 항상 포도원 농부는 그 나무를 그냥 내버려두면 안 되고, 가지가 뻗을 수 있도록 줄을 매달아 주고, 버팀목을 세우고, 그리고, 가지를 잘 쳐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가지에 집중적으로 양분이 공급이 되어서 그래서 좋은 포도를 거두게 하는 것이 농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원래 포도나무이시고, 그리고, 우리는 그 포도나무에 접붙여져서 그 진액을 먹고, 그 포도나무에서 나오는 수액을 받아 그래서 그 원래의 포도나무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우리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포도나무의 비유를 아주 극단적으로 해석을 해서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하는 게 뭐가 있느냐, 그냥 포도나무에 접붙여져 있으면 그냥 열매를 맺게 되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저절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화의 생활을 해나가게 된다, 소위 자동성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 포도나무의 비유를 그런 방식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비유를 사용하실 때에는 그 비유를 무제한으로 확대해서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을 기대하시면서 그렇게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비유를 사용하실 때에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진리와의 적합성을 겨냥하시면서 그것을 사용하셨기 때문에 제한된 한도 안에서 그 비유를 풀어야지 무제한으로 펼쳐서 이 비유를 생각하면 논리적인 모순에 빠지게 되고, 다른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진술과 충돌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도록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매우 요긴하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다른 곳에 나와 있는 여러 가지 가르침으로 미루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저절로 성화에 이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자동적으로 맺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사도바울이 무엇 때문에 “나는 매일 죽노라”라고 말하겠으며, 무엇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자기를 부인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했겠습니까? 이것은 적합한 해석이 아닙니다.
다만, 이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요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에 있는 생명적인 연합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들이 성화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들이 기도하고 힘쓰고 결단하고 힘을 내고 순종하고 살아가지만 그것만으로는 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생명적인 연합을 누리고 있고, 그 생명이 우리 안에서 풍부해질 때에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헌신들이 성화의 열매로 나타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이 포도나무의 비유는 예수님이 바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당신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신 그 말씀이 어떻게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적용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진리를 전달하는 비유라고 우리는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제 승리하는 삶에 대해서 그 근거가 구속이라는 것, 그리고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전투의 대상이 마귀와 이 세상과 나 자신인데 그 근저에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미 주신 생명적인 연합을 누리고 그 안에서 주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풍성해지면 그 풍성한 생명을 가지고, 그 생명이 없었더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이 충만하게 부어지면 자신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시련으로 가득한 현실을 극복하고, 도저히 용서가 불가능한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저히 거기까지는 하나님을 위해서 순종할 수 없었던 사람이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그 충만한 생명의 능력이 있으면 자신이 깜짝 놀랄 정도로 주님을 위해서 순종하고, 주님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도 기꺼이 드리며 헌신할 수 있는 그 삶으로까지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한편으로는 우리가 끊임없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구원하신 의도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매일 매일을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리고, 주님을 순종하며 따르는 매일 매일의 자기의 결단과 헌신이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들이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예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대학생하고 유치원 다니는 학생하고 씨름을 했는데, 대학생은 노는 것처럼 씨름을 하기로 결심을 했고, 유치원 아이는 한번 씨름에 생명을 걸었다고 칩시다. 그래도 유치원 아이는 이길 수 없습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지 결심을 한다고 해서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고, 결심을 안 한다고 해서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고 그런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 앞에 선한 결심을 했는데도 그 결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런 식으로 승리하는 삶의 자원을 자기 안에서 찾으려고 하는 그런 인본주의적인 사람들이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진정한 승리를 쟁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능력을 충만하게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다른 말로 성령충만 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런 생명의 충만함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가 그 충만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 때에 그 생명의 능력 안에서 우리가 결단하고 헌신하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절제하는 그 모든 것들이 실질적인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러분 중에 이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아, 그럼 목사님, 설교에는 지금 안 다루셨지만,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을 많이 주셨는데도 선한 의지를 가지고 결심하고 결단하지 않아서 승리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네요.”
사실은 그것은 굉장히 가능성이 매우 적은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이 놀라운 영적인 생명의 은혜는 우리에게 주어질 때 마치 우리 주머니에 있는 돈처럼 그렇게 주어져서 쓰지 않으면 그냥 주머니 속에 담겨있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어지지를 않습니다.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함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지성적인 활동을 타고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고, 들어온 그 충만한 사랑은 우리의 영혼의 모든 기능에 총체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선한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그 의지가 생겨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자 하는 그런 사모함이 생겨나고,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때에 그의 지성을 방해하던 혼란스러운 것들이 말끔히 사라지면서 이 정신과 모든 마음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 집중하기에 적합한 상태로 이 마음과 정신, 영혼의 모든 기능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굳이 하나님이 주시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작은 감정이라도 우리에게 그런 것을 주지 않습니까?
(예화)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몹시 섭섭하게 했는데 워낙 기쁜 일이 생겼습니다. 아들이 사법고시를 합격했다, 아니면 오늘 신문을 보니까 내가 주식에 투자를 했는데, 십억으로 뛰었다 하는 너무 기쁜 일이 생겼다고 한다면, 미워하고 한번 싸워서 폭력을 행사하게 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그래 기분이다, 오늘은 그냥 봐줬다”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재판을 받는 사람 중에서 제일 제수 없는 죄수가 아침에 부부싸움을 하고 온 판사한테 재판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와가지고 뿔이 왕창 났는데, 아침에 첫 번째 재판에 걸립니다. 웬만하면 징역, 웬만하면 무기징역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냥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법관들이 그렇게 이성 없는 사람들이 아니고, 여기에도 법관들이 계시니까 그렇게 말하면 안 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인간에게 그런 측면이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남편하고 부부싸움을 해서 성질이 머리끝까지 나 있는데, 아이들이 말을 안 들으면 주어 패는 것입니다. 남편이라고 생각을 하고 팹니다. 그런데, 사랑을 많이 받아서 눈물이 글썽글썽합니다. “아, 남편이 나를 이렇게 끔찍이 생각하는구나.” 그런데, 아이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엄마, 어떡해요? 나 이것 잘못했어요.” “괜찮아, 살다보면 다 그럴 수가 있단다.” 너그러운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아니, 인생 살다가 기분 좋은 일이 생겨도 의지, 감정, 생각, 모든 것에 변화가 오는데, 아니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 속에 들어오고, 신자 안에 충만해 지는데 변화가 안 일어난다면 거짓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의문을 가질 수는 있겠지마는 그러나, 그런 의문은 확장시키지는 마라, 그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됐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은혜가 충만하게 우리가 부어져야 하고, 그 다음에 그것을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사용하고자 할 때에 우리의 성화 생활에 진전이 있고, 우리의 삶에 변화가 있는 것이고, 거기서 우리들이 실패하던 삶을 승리하며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눈치 채셨을지 모르지만, 제가 공부하다가 힘들 때마다 즐겨보는 책이나 자료가 무엇이냐면, “현대 무기”입니다. 그래서 내가 여러분에게 한국의 무기체계에 대해서 두 시간을 강의할 수가 있습니다. 많이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멀었습니다. 세계의 각국이 그렇게 엄청난 돈을 들여서 미국의 전투기를 사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개발된 F35는 아직 안 들어왔는데, 한 대 가격이 2600억입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상상이 안갑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비싸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계속 값이 올라가서 이천 몇 백억까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비행기 한 대가 잘못되어서 수채 구멍에 빠져서 조금 망가졌다는데, 그것을 고치는데 백억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어마어마한 비행기를 서로 사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얼마나 사나 보면서 그 무기를 사려고 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가지고 있는 최첨단 전투기 F22 같은 것은 액세서리까지 전부 다 해서 붙이면 4,500억쯤 된다고 합니다. 비행기 한 대 가격이. 왜 그렇게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그 비행기를 사려고 하느냐 그러면, 그 공중에 뜬 전투기, 조종사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운전하는 전투기 한 대가 지상군 일개 사단이랑 맞먹는다고 합니다. 일개 사단이 대개 15,000명이 되고, 그 15,000명 산하의 대포, 전차, 항공기, 수많은 사람들이 딸렸는데, 그 15,000명하고, 그 비행기 한 대하고 똑같은 전력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나라의 최고의 관심은 최신의 무기를 구입을 해서 감히 자기네 나라를 전쟁하려고 넘볼 수 없는 전력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놀라운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데, 군인들이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이 한목숨을 버리려고 하는 그런 애국심이 없다면 그 모든 무기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월남이 망할 때 미군이 저녁때 무기를 주고 가면, 미군이 그 다음날 자기네들이 월남 군인한테 준 총에 맞아서 죽는다고 합니다. 저녁 때 그 무기를 가지고 가서 술집에서 술 먹고, 술값으로 주고 나면 그것이 베트콩으로 들어가고, 베트콩이 그 총을 가지고, 그 다음 날 아침에 전쟁하러 나갑니다. 이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부분 이 두 균형을 잘 못 잡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강조하고, 그저 은혜를 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상하게 의식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구원받은 것이 무엇이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어떻게 살아야하고 하는 이런 세밀한 결단들과 말하자면 실천들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그 은혜들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고, 많은 부분이 낭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전부다 60년대, 70년대에, 특히 70년대에, 80년대에 한 것 아닙니까? 성도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헌금 많이 해가지고 예배당 크게 짓고, 그 다음에 남으면 기도원 짓고, 기도하러도 별로 안가면서 기도원 짓고, 그러고 나서 돈 남으면 공동묘지 사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주신 자원을, 그것을 하면 절대 안 된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남의 수양관에 와서 집회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자원들을 생각을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이 세계를 창조하신 커다란 계획에 맞도록 사용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또 반대로 하나님이 이렇게 주시는 초월적인 은혜 같은 것들을 아주 가볍게 생각하고, 수준이 낮은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도덕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것 밖에 없는데, 사실 인간이 그렇게 무제한의 도덕심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결국은 표리부동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지 못합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 가능했더라면 바리새인들이 천지가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셨겠지, 왜 예수님을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사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셨겠습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이야기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마지막으로, 그럼 그런 생명이 우리에게 충만해지는 것이 매우 필수적이고, 요긴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그런 생명과 성령의 충만함을 우리들이 누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그것을 오늘 예수님이 우리에게 직접 답을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자, 우선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아버지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 예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 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 주목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과 동일한 사랑으로써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해서 대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형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 사이에 사랑의 일치를 이룬 하나의 사랑이 아버지에게서 예수님께로, 정확하게 말하면 삼위일체 안에서 예수님께로,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삼위일체의 사랑이 우리들에게로 미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것 사이에 어떠한 모순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공경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나도 성부인데 너희는 왜 성자만 사랑하고 공경하느냐고 시기를 하거나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랑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들을, 아들이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시는 바는 우리가 그 사랑을 가지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아계셨더라면 교회와 사람들을 사랑하셨을 그 사랑의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바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무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저는 달라스 윌라드라고 하는 기독교 철학자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누구냐 하는 정의를 내리라고 한다면, 저는 그분과 함께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계셨더라면 지금도 살아가셨을 삶 중에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삶을 기꺼이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좋은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살아계셨던 삶 중에서 우리가 흉내 낼 수 없는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사셨던 삶 중에서 우리가 본받고 그대로 살아가기를 원하셨던 삶이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셨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사랑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사랑은 그 자체가 관계입니다. 선한 타자와 선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마음과 정신의 성향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랑을 가지고 깊이 예수님을 사랑하며, 예수님께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그 사랑의 관계 안에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어제 말씀드린 그 모든 마귀와 세상과 그리고 이 세상에 물들어 있는 나 자신을 이기며 살아가는 비결이고,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힘이 그리스도와 맺은 생명적인 연합의 관계인데, 그 생명적인 연합의 풍성함은 우리가 얼마나 그 예수님을 사랑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은혜와 사랑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어느 것이 먼저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예수를 더 사랑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 사람들만이 주님을 예전보다 더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매일매일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은혜로서 우리의 심령이 깊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거기에서 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모든 힘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들으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이런 질문을 떠올리기도 할 것입니다. “목사님, 사랑이 있으면 승리한다는 이야기는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이 많이 사랑을 해주면, 힘도 생기고, 능력도 생기고, 선한 마음도 생기고, 또 우리들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이기고자 할 때에도 우리도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유혹도 이기고, 모든 것을 이기니까 승리할지는 모르지만, 마귀를 사랑으로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지속적으로 대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 놀라운 힘은 결국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것을 끊임없이 대적하면서 분투하는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랑은 그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정신의 자원을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예화) 제가 전도사 때의 일입니다. 할아버지 목사님을 모시고,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 성격이 만만하지 않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 참 본받을만한 일이 있는데, 1년이면 몇 번씩 저 가난하고 어려운 시골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해 주십니다. 그런데, 거기를 갔는데, 청년 하나가 정신이 조금 이상했습니다. 사람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했는데, 이분도 기도를 많이 하신 분이었으니까 데리고 와라, 그러고 열심히 기도를 했는데, 웬만하면 고쳐졌는데, 이 청년은 도저히 안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길길이 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목사님이 간증을 하시는데, 새벽에 기도를 하는데, 자신이 너무 불쌍하더라는 것입니다. 저 청년이 너무 가여운데, 고쳐주고 싶은데 당신에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 까지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그 청년을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새벽에 부모가 그 청년을 데리고 와 강대에 놓고, 옛날 같았으면, 호령하며 기도를 했을 텐데 이 청년을 붙들고 기도하다가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이 아이는 이렇게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괴롭힘을 당하니까 고쳐져야 되겠는데 당신에게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니까 능력이 없는 자기는 너무 불쌍하고, 또 그런 목사를 만나서 아직까지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그 청년을 보니까 더 불쌍합니다. 그래서 그 청년을 끌어안고, 삼일 동안을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 서럽도록 우셨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대부분 고쳐지려면 경련을 하고, 한바탕 난리를 쳐야하는데 조용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양반이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이더라.”
결국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 우리의 삶을 위해서는 지혜도 필요하고, 말씀에 대한 지식, 하나님의 은사 모든 것 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면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가져다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너희는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해야 되겠는가 그것을 우리들은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찬송)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이미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를 다 버리신 사랑을 우리가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모른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해주시는 것과 똑같은 사랑으로 우리가 예수님처럼 완전하게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처럼 그렇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는 없지만, 동일한 종류의 사랑으로 예수를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살아가는 그것이 결국은 우리 안에 주님의 생명 이 풍성해지는 비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것보다도 더 큰 우리 신앙의 목표라고 하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 우리의 숙제는 온전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 모든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그 모든 용기와 능력과 힘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3.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37)
녹취자: 박지성
I. 본문해설
저는 어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근거가 구속에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를 구속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고 우리를 위해 스스로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보좌우편에서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간구하고 계시니 하나님이 그리스도가 승리에 필요한 그 무엇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기 때문에 패배하는 삶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현실적으로 우리들이 패배하는 삶을 사느냐하는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오늘을 여러분에게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도는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위해 아들까지 내어주시고 아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간구하신다는 감격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선언한 다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담대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II.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김
A. 세상과 신자의 현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은 결국 구속에 근거하고 있고 그 구속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기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의 삶의 궁극적인 승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서 내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지만 그러나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신자의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펑펑 흘리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십자가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자녀가 되고 나면 우리에게 아주 아름다운 현실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전에는 우리가 이 세상 속에 함께 빌붙어서 이 세상 자녀로 살아갔고, 이 세상의 정신을 따랐고, 이 세상에 왕 노릇하는 마귀의 권세 아래서 주님께 불순종하며 살았고, 그에게 헌신하고 충성한 그 삯으로 우리에게는 사망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세상과 짝했던 사람들이고 세상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 중생과 회심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고 났을 때 그에게는 신앙의 감격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앎,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에 대한 초월적인 감각들이 밀려왔습니다만 그러나 눈을 뜨고 바라다보는 현실은 냉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모든 현실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모든 현실을 능히 극복하며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만들어 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실체가 우리에게 충만하게 부어졌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것을 가지고 이기고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매일 매일 이 세상에서 지고, 패배하고, 이 세상의 물결과 싸워서 패배하고, 자신과 싸워서 지고, 마귀에게 종노릇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기쁨은 승리한 사람들의 것이지 패배한 사람들의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패배한 사람들이 어떤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기쁨이 아니고 말하자면 환각적인 기쁨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쁨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의 최대의 수혜자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에 있어서 최대의 첫 번째 수혜자입니다. 왜입니까? 내가 매일매일 이기고 승리하는 삶을 살기 때문에 물론 하나님께도 영광을 돌리지만 제일 먼저 수혜를 받는 것은 그것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내 자신이 기쁨에 충만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기쁨에 대한 얼마나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 내가 우울하고 기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 중에서 속 썩이는 누구 때문이다. 이런 염려 저런 근심 때문이다.’ 그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근심이 떠날지는 모르지만 신령한 기쁨이 저절로 넘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돈이 있고 편안한 모든 사람들은 말할 수 없는 신령한 기쁨이 이 속에서 넘쳐야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은 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고 마음에는 기쁨과 생명이 넘쳐도 이 세상의 현실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고 엄혹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사도가 말합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물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들은 환란입니다. 곤고입니다. 기근입니다. 박해, 적신 벌거벗는 것입니다. 형벌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위험, 칼. 시편 44편 22절을 인용해서 시인인 로마서 기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해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니” 저항할 수 없고 아무 힘이 없어서 그래서 죽임을 당하게 되고 그저 죽이는 자가 끌고 오면 마지못해서 끌려가서 죽기를 기다리는 힘없는 양같이 되어 버린 것이 우리의 처지요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대적이 되는 그 세 가지 대상들, 마귀와 이 세상과 그리고 죄에 물든 자신의 옛 본성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정말 가능하다면 우리 안에 있는 자원으로써 충분히 그것을 이겨서 생명의 삶을 살고 승리의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삶이 가능하다면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피를 흘리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 안에 충만히 거하게 하심으로 당신의 생명의 능력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왜 이런 복잡한 구속의 과정을 선택하셨느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전체적인 구도는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로 데려갑니다. 그것이 뭐냐면 좋은 신학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이구나! 어떤 경우에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원해주신 계획대로 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절대적인 의존 없이는 불가능하구나!’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믿음에 대한 반응으로써의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삶이 가능하구나!’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좋은 신학일수록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드는 신학이 좋은 신학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왜? 형벌 받을 죄에서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던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고 결코 정죄함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무엇을 공급받으며 살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잠깐 보겠습니다. 로마서 8장을 보십시오.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명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이미 완전한 승리를 얻은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2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대로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무슨 뜻입니까? 이미 구원받고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죽을 수 있습니까?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죄와 사망으로 죽었던 너희들을”이라고 한 에베소서의 표현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 활기와 생명,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있긴 한데 죽은 자처럼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로되 영으로써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신 승리의 근거를 토대로 그 근거가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 근거를 가지고 끊임없이 육신대로 살기를 거절하고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며 사는 사람들만이 그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공급받고 승리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아주 간단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주셨고 아들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살아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 있는 현실은 여전히 환란과 곤고, 박해와 기근, 적신과 위험, 칼 그래서 종일토록 죽임을 당하며 도살을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는 신세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실입니다. 구원받았어도 이제는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인이라는 표가 붙었어도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칭호가 우리에게 주어졌어도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표가 우리에게 붙었어도 그 자체를 가지고 우리가 이기는 것은 아닙니다.
B.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그러면 이것이 세상과 신자의 현실이라면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이기는가?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기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러나”라는 것은 앞에 있는 모든 상황을 한 번에 뒤집어 버리는 접속사입니다. 너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을 아낌없이 주시는 사랑을 덧입은 자가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해서 보좌우편에서 간구하신다고 할지라도 너희는 여전히 곤고하고 환란을 당하고 박해를 당할 수 있다.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에 노출되고 죽음에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너희를 에워싸고 있는 현실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세상과 짝하고 하나님께 반항하며 살 때에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무슨 핍박이 있습니까? 같은 편인데. 세상이 왜 우리를 박해하고 핍박하겠습니까? 우리는 세상과 대척점에 서지 않고 오히려 세상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은 거대한 물결이 되어서 도도하게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이 내 마음에 떨어졌습니다. 그것이 찬란한 빛을 주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공부하면서 신학적인 지식이 쌓여갔습니다. 사상이 생겼습니다. 이 세상의 사상과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나는 바로 이 세상을 거스르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아드님을 아낌없이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혔다는 사실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거슬러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세상 속에서 살다가 하나님께 순종하려고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세상 속에 살다가 오히려 세상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때에 이 세상 편에서 보면 우리는 배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흐르는 강물에 몸을 맡기고 튜브를 타고 떠내려가면 힘들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튜브를 던져버리고 그 강물을 거슬러 헤엄치려고 할 때 비로소 이 물의 힘이 얼마나 도도하고 힘세서 팔이 부러지도록 몸부림을 쳐도 자신이 올라가기는커녕 서서히 밑으로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환란과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 이런 것 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가 여기에서 거론하고 있는 것은 그냥 일상적인 인간의 삶이 고해와 같은 이 세상을 지나는 길이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름을 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따라 살아갈 때 당하게 되는 어떤 일이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뜻을 정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 때 환란을 당합니다. 곤고한 일을 만납니다. 박해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하고 주기도문의 뜻을 따라서 살고자 할 때 기근을 당하게 되고 벌거벗기고 형벌을 당하게 되고 위험을 만나게 되고 칼의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말합니다. 앞에 있는 모든 상황을 뒤집어 버립니다. 만약에 우리 혼자라면 환란을 당하는 것, 곤고한 일을 만나는 것, 박해를 만나는 것,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의 죽는 데까지 내어주는 이 시련을 우리가 어떻게 이길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그런 것들과 싸워 이겨서 극복할만한 만만한 대상들입니까? 이 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만만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그 무게도 견디지 못해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손들고 왔거늘 이렇게 신앙 때문에 받는 환란과 곤고와 박해, 적신, 기근, 위험, 칼 이런 것들을 어떻게 감히 우리가 싸워서 이길 수 있겠습니까? 이길 수 있는 자원들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오늘 성경은 “그러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당한 이 환란과 곤고와 박해와 이 모든 시련들은 우리가 감히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어마어마한 대적이요 어마어마한 신자의 현실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이기게 해주십니다.
어떻게 이기게 해주십니까? 이 모든 일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기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라고 했는데 여기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결국 우리 신자 앞에 놓여있는 현실이 만만하지 않은 현실이고 더욱이 승리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에는 전쟁이 필수적인데 이런 전투적인 삶을 살 때에 우리의 승리와 패배를 좌우하는 중요한 관건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영적인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의해서 승리할 수도 있고 패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본 모든 사람들, 그리고 성화의 삶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과 싸우고 투쟁해본 모든 사람들, 마귀를 대적해보고 끊임없이 자신을 하나님 없이 살았던 옛 삶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자신의 옛 자아와 더불어 몸부림치며 싸워보려고 했던 모든 사람들은 그 승리의 비결이 그리스도 예수와의 영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는 항상 어려운 일을 만날 때에 기도를 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정말 힘들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이 자극이 되면 결국은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은혜가 충만하면 기도를 해야 될 시점이라고 감지가 되면 순발력이 있어서 즉시 기도가 터져 나옵니다. 마치 댐에 물을 가두어 놨을 때 물이 꽉 차서 수문을 탁 열면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그래서 존 오웬(John Owen) 목사님은 죄가 기도를 이기는 단계에서 첫 번째 단계는 기도할 준비를 해체시키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레디네스readiness입니다.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할 제목이 딱 떠오르면 준비 땅 하면 기도가 확 터져 나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데 마음의 조율이 다 흩어졌습니다. 바이올린이나 기타로 말하자면 기타를 방치해서 습기를 먹고 내버려둬서 줄이 다 틀어졌습니다. 때가 되어서 치는데 제대로 된 소리가 안 나옵니다. 조율이 다 풀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가 안 될 뿐만 아니라 된다고 하더라도 힘이 없습니다. 왜입니까? 마음의 조율이 다 흩어졌기 때문에 해도 그냥 중얼중얼 하는 것이지 그 속에서 강력히 솟구치는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기도가 안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안 됩니다. 어떤 어려운 일이 생겨도 기도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기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기도 안하는 사람들은 안 해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해서 안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도를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왜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는가?’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움직이면 가까스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에 기도하는 우리의 생각은 열심히 기도해서 상황을 바꿔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는 것은 기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믿음입니다. 왜입니까? 구하는 것을 그가 주실 것이라는 믿음 없이 열렬히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상황을 바꾸는데 있지를 않고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바꾸시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보면 기도하는 그 기도를 통해 상황을 바꾸어 놓고 싶은데 상황이 잘 안 바뀝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더 기도를 하는데 아주 안 바뀌면 기도가 포기가 될 테니까 뭐가 바뀔 듯 바뀔 듯 하면서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더 열심히 간절히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마음을 쏟아서 기도하는 가운데에 이 속에 붙어있던 더러운 찌꺼기 같은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펌프 물을 맨 처음에 받아놓고 펌프질을 계속합니다. 처음에는 온갖 흙탕물들이 나옵니다. 몇 시간을 하고 나면 맑은 물이 나오듯이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집중하고 자신의 곤궁에 처한 사정을 하나님이 고쳐달라고 하나님께 집중하며 매달리는 과정에서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도 반성이 많이 됩니다. 말씀을 깨달으면서 ‘나는 저렇게 못 살았어. 맞아. 저렇게 살아야해. 나는 정말 무위도식하고 있구나.’ 이런 것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지만 그러나 마음을 실어서 기도할 때에는 그것이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적용이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설렁설렁 들을 때에는 ‘아이고, 저거는 우리 집사람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구나’하고 듣지만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며 기도할 때 이것이 우리 아내를 위한 이야기지 내 이야기는 아니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관심이 없습니다. 왜냐면 내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적용을 간절한 기도가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상황을 움직이는 것은 하나님 손끝하나면 움직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고치실 때 사람 자신이 고쳐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셔서 고치도록 인도해 주시고 그럴 수 있도록 은혜를 주십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십니까? 물건을 옮기듯이 인간의 마음을 옮겨놓으시면 되지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존중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가 늘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동물들이 자기 이하가 될 수 없습니다. 개를 보고 개만도 못한 새끼라고 그렇게 욕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개는 아무리 나쁘게 되어도 개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인간만도 못하고 개만도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 인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할 필요가 훨씬 많은 것입니다. 개는 살다가 복날에 죽으면 그만이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습니다. 거기에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실 때에 그렇습니다.
이런 저런 어려운 일들을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끊임없이 당하게 되는데 그때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박해받는 상황에서 우리를 건져주시기도 하고 감옥에 갇혔던 베드로가 다시 살아났던 것처럼 기적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핍박 속에서 건져내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반드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비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제목을 주시는 것은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짧게 보면 너무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어떤 간절히 마음을 쏟아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기도의 제목이 있는데 그것이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시키시는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기도가 끊임없는 고통입니다. 그렇지만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당하지 아니하였더라면 결코 정결케 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불결한 것들을 씻어 내시고 결코 정신과 생각이 확장 될 수 없는 고정된 생각과 관념을 하나님이 바꾸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를 깊이 존경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지만 우선 천재니까 정말 천재입니다. 그렇지만 그 아우구스티누스를 신앙적으로 깊이 존경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그는 탁월한 지식으로 학문의 위대한 세계를 구축했고 땅에 있는 것들과 하늘에 있는 것들을 헤아릴 수 있는 철학적인 지혜를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 모든 것들을 아무리 쌓아 올려도 하나만은 못하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 하나가 뭐냐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가 깨뜨려지는 통회의 기도, 그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라고 묘사했습니다. 아름다운 제사라고 말입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고백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자기 깨어짐’이라는 것은 두 가지에 대한 깨어짐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자기 의와 자기 사랑에 대한 깨트려짐을 의미합니다. 파괴를 의미합니다. 파괴한다. 깨트린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면 예를 들어서 여기 안경이 있는데 이것을 집어 던져서 부러뜨려버리면 파괴한 것입니다. 파괴되고 나면 안경으로써의 기능을 제대로 못합니다. 파괴되어도 있기는 있는데 눈에 쓰고 눈에 잘 안 보이는 것을 볼 수 있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자기가 깨어진다고 인간이 자기 의에 대한 집착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럴 때 없습니까? 회개를 많이 하고 나서 ‘정말 오늘 회개 정말 많이 했어. 나처럼 이렇게 회개하는 사람이 참 이 세상에 많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해본 적 없습니까? 어떻게 자기 의와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인간이 완전히 해방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기 깨어짐은 그것들을 자꾸 파괴해서 그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에 합당한 기능을 못하도록 자꾸 망가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화에 도움이 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신 앞에 비친 이 엄혹한 현실, 마귀와 세상과 부패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고 그러나 마음으로 간절히 그 승리를 바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금방 우리의 어려움들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기도를 하라고 계속해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충천하는 불꽃처럼 하나님 앞에 타오르고 자신을 다 깨트려 자기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의로 삼았던 것 그리고 자기를 여전히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적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온전히 깨트려져서 마음이 물같이 녹아내리는 자기 깨트려짐의 기도가 있을 때 사실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린 것 아닙니까? 적어도 기도하는 그 순간만큼 하나님의 무슨 뜻이라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된 것 아닙니까? “너는 나를 위해 죽어라!”하면 죽을 수 있는 그것 아닙니까? 처녀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자기 깨어짐이 없이 “주님의 계집종이오니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자기가 온전히 깨어질 때에는 사실은 하나님 앞에 그 순간만큼은 자기 자신을 온전히 다 드리고 하나님의 모든 주권에 대해서 수용적인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찬양)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 끝에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이 뭐냐면 강물처럼 밀려들어오는 그리스도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사랑이 확 밀려들어옵니다. 사랑이 밀려들어올 때 미운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때에는 그렇게 가시와 같이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데 너무 가엾어서 진짜 한번 찔려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찔러도 그 사람은 허공을 찌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나와는 상관이 없으니까. 그런 생각 안 해봤습니까? ‘저 사람이 나를 미워하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까?’ 웃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정도까지 하나님이 바꿔놓으시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전에는 견딜 수 없었던 결핍을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언제나 견딥니다. 그럴 수 있는 용기와 힘, 결국은 수많은 환란과 곤고, 박해나 기근,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이모든 것들이 나를 에워싼다고 할지라도 결국 마지막에는 내가 이길 것이라고 하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밀려옵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옵니까? 그렇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온전히 깨어지고 예수를 사랑하게 될 때, 그때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쫒나니”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혹은 시련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환란이나 곤고나 기근,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어떤 일이라도 만날지는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는 나의 영혼에 무슨 나쁜 일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예화) 그래서 종교개혁시절 가톨릭이 군대를 몰고 쳐들어 왔을 때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출장을 갔다가 급히 그 소식을 알고 달려옵니다. 카펠이라는 곳에서 전투를 합니다. 거기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전사했습니다. 2000명 대 8000명의 싸움이었으니까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습니다. 그때에 그가 죽어가면서 남긴 유언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너희는 육신의 목숨을 헤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물론 시련도 만납니다. 그러나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C. 승리하는 삶의 비결
그렇게 이기게 만드는 힘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그리스도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항상 승리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래서 주님은 주님과 우리와의 사랑이 짝사랑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도 사랑해서 그리스도와 나 사이의 온전한 합치가 있을 때 우리는 이기고 승리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려울 때마다 돈 생기고 낮아질 때마다 지위가 높아지고 병에 걸렸을 때마다 치료가 되고 이런 사람들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이런 모든 시련과 환란을 당하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 굳게 붙들려 하늘 생명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 어떠한 삶의 환경과 처지에서든지 그의 영혼의 순전함을 하나님 앞에 버리지 않는 사람, 그래서 그 주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지 그렇게 세상을 이기는 삶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렇게 저 사람을 도우시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정말 살아계신 여호와이시로다!” 라는 고백을 이 세상 사람들이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인생의 위기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숙명론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핍박이 오면 핍박이 그치도록 기도할 것이고 환란이 오면 환란이 물러가도록 혹은 환란을 이기도록 경제적으로 궁핍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도록 위기와 어려움을 만나면 하나님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고 사랑하는 이웃이나 성도들과의 관계가 깨지면 그 관계가 온전한 관계로 회복시켜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화해를 시도할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또 그렇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건설적인 삶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언젠가는 시련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환란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는 핍박을 피할 수 있습니까?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명이 끊어지는 날이 없겠습니까? 언젠가는 우리가 너무나 사랑하고 일생동안 같이 있을 것 같은 사람들과 헤어지고 작별해야 하는 때가 없겠습니까? 그 때에 만약에 그 모든 것들이 있음으로 겨우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사람들이라면 환경이 흔들릴 때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리는 사람들이 되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예화) 제 친구 중에서 6대독자가 있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해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수련회에 가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예수 믿기 전부터 ‘물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열린교회를 세우고 나서 한 번도 물가로 수련회를 간적이 없습니다. 물이 없으면 차라리 물을 가져다 놓는 한이 있더라도 물가로 아이들을 데려가지 않습니다. 풀을 만들되 깊이 만들지 말고 거기서 놀도록 합니다. 그래서 한 번도 물 사고는 안 났습니다. 그때 양수리로 수련회를 갔는데 그 친구가 수영을 잘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가면 되는데 자기는 헤엄을 잘 친다고 헤엄치면서 배를 따라온 것입니다. 다 건너 왔는데 이 아이가 안 왔습니다. 그리고 4일 만에 물속에서 찾았습니다. 물이 너무 차가워서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장로님이고 엄마는 권사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놀랍습니다. 그 다음 주부터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냐면서 교회를 안 나왔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런 시련들이 우리의 믿음이 순전한 믿음인지를 시험하는 시금석이 되는 것입니다. 확 갈아보는 것입니다. 확 갈아보면 덩어리로 보일 때는 회색이었는데 갈아보면 노란색입니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물론 그 가슴 아픈 것이야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20대 초반에 죽었고 6대 독자였으니 다시 아이를 낳을 가망성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데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모든 비밀들을 알 수 없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어도 좋으신 하나님을 나는 믿습니다.’ 그렇게 하려고 신앙생활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 언젠가는 그런 일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런 모든 것들과 대면해서 우리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승리를 주시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을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모든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목숨을 버리신 그 큰 사랑이 너무나 무한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순종하기 위해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그 사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굳게 믿는 사람, 그래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매일 매일 불결한 우리의 옛 성품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정결케 되고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정결한 삶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결국은 그런 정결한 삶 없이는 그리스도 예수를 불같이 뜨겁게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것처럼 허위를 가장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허위와 가장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과 양심을 어떻게 속일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다른 것은 모를 수 있어도 내가 지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얼마나 받고 있고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우리가 속일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오해할 수 있지만 우리는 속일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그것에 대해서 무관심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속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사는 사람들, 시련과 환란이 다가와도 어린아이처럼 그분께 피할 수 있습니다.
(찬양)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그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께 언제든지 마음을 쏟아 놓을 수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열린 기도의 문을 가진 사람들은 불쌍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는 자 같으나 이기는 자요 짓밟히는 자 같으나 사실은 짓밟는 자요 패배하는 자 같으나 사실은 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도록 이미 승리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내 편이신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욕하고 짓밟고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버려서 나에게 불명예를 안겨준다고 하더라도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신다면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나를 사랑하신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 아닙니까? 그 사람에게 어떻게 실패하는 삶, 패배하는 생활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도대체 패배와 승리의 기준이 무엇이기에 그런 사람들에게 패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의 각별한 섭리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이 세상의 더럽고 악한 구조 때문에 내가 오해를 받거나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루터가 아주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패배한 선은 승리한 악보다 여전히 위대하다.” 승리한 악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지만 지금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쫒아서 선한 길을 가다가 패배했으나 패배한 이것은 더 크고 위대한 승리로 나타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III. 결론
그러므로 오늘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패배하는 삶의 궁극적인 원인은 그리스도 예수와의 사랑의 연합이 깨어진 데에서 옵니다. 그 때문에 우리에게 승리를 위해서 필요한 생명의 자원들이 충분히 내려오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에 3000명이 넘는 여러분 교인들이 매일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 때에 매 순간 향기로운 제사를 하나님 앞에 하루에 세 번씩만 드린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 자체가 선교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직장과 사회, 가정 어디에서든지 악에 굴복하지 않고 인간 같지 않은 사람들을 천사처럼 끌어안고 그들을 사랑하면서 산다고 할 때에 그 자체가 아웃리치입니다. 그 자체가 선교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위대한 선포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아! 하나님은 안보이지만 널 보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살게 하시는구나. 그렇게 나도 그런 하나님이 내게 있었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선교적인 삶입니다. 은혜가 떨어져서 집안 식구들하고 만날 욕하고 싸우고 그리고 직장에 가서는 불성실한 사람으로 찍히고 사업을 하면서는 온갖 더러운 탈법과 편법을 하고, 거짓말을 해서 남을 속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히고, 선교 간다고 보따리만 싸가지고 가서 여행하는 것은 선교가 아닙니다. 삶 전체가 포괄적으로 선교인의 삶을 사는 것, 그래서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사셨을 그 삶을 흉내 내면서 살아가는 사람, 물론 그분처럼은 못 살지만 그러나 길은 그 길을 가려고하는 것입니다.
참기름이 시골에서 짜가지고 온 기가 막힌 참기름도 있을 수 있고 거기에 막 뭐를 타서 섞었지만 참기름 비슷하게 길을 가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주님은 진짜 참기름이고 우리는 유사참기름처럼 따라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서 참기름 냄새를 맡으면서 진짜 참기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 앞에 세게 기도해서 예수님의 팔을 꺾듯이 항복을 시켜서 문제하나 해결하고 돌아가려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원하시면 무엇을 못해주시겠습니까? 아들을 아낌없이 주셨는데 그까짓 것 우리가 필요하다고 하면 하나님이 못 주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필요 없이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여러분을 소유하기 전까지 행복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인간이 되라고 하나님은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면서 그 하늘의 충만한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것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러면서 궁극적으로 우리의 참된 행복 그리고 분투하며 예수를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고단한 날들 동안에 우리의 진정한 고향이 본향이 하늘나라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살아야합니다. 그 하늘나라에 생명수가 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맛있는 과일이 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거기에서 그저 하늘하늘한 비단옷을 입고 매일 매일 사우나 하는 것처럼 쉬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왜 그렇게 하늘나라 가기를 그리워합니까? 거기에 우리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기에서 모든 것에 방해받지 않고 누리게 될 완전한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관계를 그리워하기 때문에 우리들이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완전한 만족과 완전한 행복을 기대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물론 승리하는 삶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이 크지만 그것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하늘나라가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런 기대를 갖는 것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매일매일 나 같은 죄인을 위해서 좋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살을 찢고 피를 흘려주신 그 놀라운 은혜가 단 한순간도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처럼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항상 그것이 부자연스러워야 합니다. ‘이 벌레 같은 인간을 위해 왜 죽으셨을까?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 때문에 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을까? 아! 정말 자고 일어나도 너무 새롭고 너무 놀랍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왜, 지금도 그 사랑을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버려두신 채 나 같은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이 사랑 이 은혜를 알게 하셨을까? 주님이 내게 이미 베풀어 주신 그 큰 사랑이 너무 큽니다. 그래서 하나님 내가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더 이상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라고까지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될 때 그 사람이 진정으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동행하며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4.사랑과 하나님의 영광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7-19)
녹취자 : 김선희
요한복음 21장은 요한복음의 부록입니다. 21장의 주제는 베드로의 지도력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부록처럼 되어 있는 요한복음 21장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매우 커다란 혼란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으로 끝나는 사복음서에서 베드로는 철저히 실패하고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이었는데, 사도행전 1장부터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간격을 메우기 위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21장이 들어왔고, 여기에서 그렇게 실패한 베드로가 어떻게 다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 지도자로써 리더십을 회복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고, 그 분께로부터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은 이것이 첫 번째는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세 번째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베드로는 여기서 예수님을 아마도 두 번째 뵈온 것 같습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는 제자들과 함께 고기 잡으러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비난하고, 세상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힐난하지만, 지혜로운 칼빈을 이 부분을 해석하면서 아직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우리 주님께로부터 받은 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것은 불신앙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행동이었다고 올바르게 해석을 하였습니다.
어쨌든 그들은 고기를 잡았고, 밤새도록 애썼지만, 고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맨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광경을 연상시킵니다.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얻은 것이 없었고, 그 때 예수님을 만나 큰 어획의 기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베드로가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마치 그 모든 기억을 심리학적 용어로 데자뷰 시키듯이 다시 한 번 똑같은 광경을 연출 시키시고, 그리고, 베드로로 하여금 맨 처음 그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셨을 때의 소명으로 데려가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발견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바다에 풍덩 빠져서 나오면서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 때까지 그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고, 우리 예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깨졌는지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침묵 속에서 갈릴리의 새벽이 아침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침묵 속에서 베드로는 수많은 예수님의 언어를 들었을 것이고, 자신의 양심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함성들에 귀를 기울였을 것입니다. 자기가 한 일을 생각하면 예수님께 감히 가까이 나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베드로에게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조반을 침묵 속에 먹은 후에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이나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은 본문은 세 번째 물으신 질문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디서 마련하셨는지 숯불을 피우셨고, 그 위에 생선을 얹으셨고, 그리고, 떡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들이 잡아 온 생선을 요청하셨습니다. 아마 그들로 하여금 마음을 풀어주시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없이 아침을 먹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당신을 버리고 도망쳤던 제자들과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를 위해서 식탁을 베푸신 것은 그들은 주님을 버렸어도 주님은 그들을 여전히 한 가족으로 생각하고 계시다는 움직일 수 없는 징표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 식사는 생명적인 공동체의 연합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질문하실 때에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고, 거의 같은 질문이 세 번이나 되풀이 되었을 때에 베드로는 크게 근심하게 되었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대신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알고 계십니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언제나 동일하였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실패한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셨을 때에 가장 먼저 세 번이나 집요하게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의심했기 때문에 세 번이나 물어보신 것이 아니라 베드로와 이 후의 이 기록을 읽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인 치듯이 예수님께서는 세 번이나 베드로에게 확약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가장 강력한 증거로써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라는 대답을 요구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야 말로 우리의 모든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과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분투하는 모든 생활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즘, 주기도문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열심히 공부하고, 그것을 여러분의 삶에 익힌다면 여러분은 정말 이 세상에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것입니다. 한 사람의 기도는 그가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보여주고, 그 기도의 열렬함의 정도는 그 기도의 내용이 얼마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입증합니다. 주기도문 속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는 기도가 예수님의 주기도문의 기도에, 아버지의 이름을 위한 기도 다음에 가장 먼저 오는 기도라는 사실을 배우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게 해 주옵소서” 라고 하는 우리가 응답되어서 주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온전히 실현된다면 그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잘 먹고, 배부르고, 첨단 문명에 없는 것 없이 사는 호사스러운 나라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와 진리와 그리고, 평강입니다. 평화입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 거기에서 오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있는 나라, 그 모든 것의 핵심은 하나님의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최고의 아름다운 상태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분을 온전히 공경하며, 이 땅에 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이기심과 영혼에 대한 무관심으로 말미암아 찢기고 갈등하는 모든 일들이 끝나고,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 되는 그런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당신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당신과의 평화를 누리며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기초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복락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은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이 선취적으로 우리 속에 침투하여 들어와 우리가 미리 그것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주는 놀라운 은혜이고, 영광이고,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큰 의무는 사람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끊임없이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으로 지으신 최고의 목적이요, 이유인 것입니다.
(찬송)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라도 내 할 말씀이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사랑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그렇게 분투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을 붙들며 살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그렇게 함으로써만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온전해 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러나, 문제는 여기부터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신앙의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 많이 사랑하면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해주시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이 세상에 있는 많은 것들을 축복으로 주셔서 그가 이 세상에서 영광과 존귀를 누리며, 이 세상의 풍족한 자원 속에서 사는 것을 신앙의 마지막 그림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신앙의 세계 안에는 전제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여러분이 인정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은혜와 사랑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 전에 책을 한권 읽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집이었습니다. 내용은 별로 없지만, 그래도 은혜로웠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 목사님은 목자로써 어느 한 성도가 하나님을 잘 믿었더니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주셨다는 이야기를 성도들에게 대신 간증해 주심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우리도 예수님을 잘 믿어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게 하시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아무개 아무개가 그렇게 신앙생활 잘 하더니 하나님께 복을 받았습니다.” 그래 놓고, “첫째 아들은 하버드에 들어가고, 둘째 아들은 프린스턴에 들어가고, 셋째 딸은 예일에 들어가고, 모두 복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순종해서 복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니까 우리 애들 생각하니까 너무 썰렁한 것입니다. 우리 애들은 하버드도 못가고, 예일 근처에도 못가고, 프린스턴은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애들인데, 그건 아니다 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비록 이 세상적인 복을 하나님이 많이 주셨다 할지라도 그것은 가슴으로 간직하고, 오히려 사람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복, 사도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이야기하는 “하늘의 모든 신령한 복으로 너희에게 복 주사”라고 한 그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데 마음을 기울이면 하나님이 더 큰 영광을 받으실 것 같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그렇게 간증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제 그 정도로 시련을 헤치고 믿음으로 살아온 사람들이라면 주님에 대해서 간증하는 모습도 달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정말 썰렁하였습니다. 우리 애들은 하버드도 아니고, 예일도 아닌데 난 복이 없는 건가 그러니 저만 못한 사람들은 얼마나 소외감을 느끼겠습니까? 말 안 듣고, 까불고 하나님께 대들던 애들도 그런 데에 갔습니다. 그것은 또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상의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89년도니까 벌써 한 24년 전에 기도원에서 이 본문을 읽으면서 생애적인 충경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가 아내나 남편이나 애들이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그럼 그럼” 이 정도는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님이 그 거룩하신 주님이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으로 우리 얼굴을 바라보시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을 때에, 그 때에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고백하는 것은 보통 용기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니까 이렇게 대담하게 대답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불가능할 정도로 어려운 대답을 할 때에는 주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적어도 “사랑하길 원합니다. 앞으로는 주님만 사랑할 것입니다” 라는 대단한 결단이 그 안에 들어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면 아무나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닙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마지막에는 “주님, 내 마음을 들여다보시는 주님,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전능하신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하고 주님께 대꾸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으니 최소한 이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최소한 베드로가 이 대답을 할 때에는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결단은 분명히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그 정도면 이제 예수님이 이 드문 고백을 받았을 때에 예수님이 예전에는 어떻게 축복을 하셨습니까? 예전에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했더니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고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고백을 했더니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그러면서 천국의 열쇠를 그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커다란 축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정도면 그에 버금가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데, “너의 아들 전부 다 아이비리그에 보내 주겠다.” 아니면 “지금 살고 있는 너의 아내는 어쩔 수 없지만, 이제 이다음에 너의 며느리는 아주 빼어난 너의 아내 열 명을 주어도 안 바꿀 미인을 주어서 너의 집안의 유전자를 개종시켜 주겠다.” 그 정도는 말씀하셔야 되는데 그렇게 안하십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십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아멘 아멘 레고 소이’(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σοι), 이것이 무엇이냐면, 이렇게 하시는 그 말씀은 변경될 수 없는 진실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화자로써의 예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아멘 아멘 레고 소이’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해석이 금방 나옵니다. 젊어서는 자기 마음대로 돌아다녔던 삶이 베드로의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늙어서는 남이 그를 띠 띠우고 그리고, 팔을 벌려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위해서 형벌을 당하고 순교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두절미하고, 이 대화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예수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 양을 먹여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십니다.” “내 양을 쳐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이렇게 확실하게 고백을 했더니 “그러면 너는 나를 위해 죽어다오” 이것이 예수님의 부탁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 전체를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중요한 주제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18절에서 성경 읽기를 끝낸다면, 이것은 어떻게 보면 당신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마지막에 베푸시는 응답이 “너는 나를 위해 죽어라” 그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잔인해 보일 수 있는 이 요구지만 그러나, 19절을 읽을 때에 우리는 마치 어두운 하늘이 찬란하게 밝아오며, 이런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 숨겨져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성경의 코드를 읽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 이러라” 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보여주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베드로를 한없이 소중하게 여기셨고 그리고, 그를 한없이 사랑하셨지만 그러나, 베드로의 행복보다 더 탁월한 가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광 안에서 우리는 당신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그 안에서 행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행복의 욕구가 모순을 일으킨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해 전 십여 년 전 로마를 방문했을 때, 전설 속에서 내려오는 쿼바디스 교회에 들어갔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의 핍박을 피해 황급히 도성을 빠져나가고 있던 골목길에서 맞은편에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답니다. 그 때 물었던 유명한 질문이 “쿼바디스 도미네” “주님이시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야, 너는 네가 버리고 온 로마의 내 양떼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노라” 했고, 베드로는 거기서 깊이 회개하고, 로마로 들어오시려는 예수님을 만류하고 자신이 스스로 돌아가 십자가에서 거꾸로 매달렸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베드로가 서서 만났다는 그 돌이 떼어져서 교회 바닥에 심겨져 있었지만, 그 돌이 그 돌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사실 유무와는 상관이 없이 그 길목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이 나누셨던 대화를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한없이 울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과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갈등을 일으키지만,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두 가지가 하나입니다.
(찬송)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가 지금 병상에서 죽어간다면 그리고, 여러분이 그 죽음을 대신할 수 있다면 자식을 위해서 죽는 여러분이 불행과 고통을 느끼겠습니까? 아니면 행복을 느끼겠습니까? 이 둘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것은 아직 온전히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그리고,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게 될 때에 그 사랑이 추구하는 최고의 행복은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살아있더라도 그렇게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는 정신으로 사는 그런 순교적인 생축,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 그것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이고, 자신의 삶을 통해서 그 가치가 구현되는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위해 장렬하게 죽는 꿈만 꾸고, 오늘 주님을 따르지 않는 것은 허위의 고백이요, 가식입니다. 거짓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하루 주님을 위해서 살던 사람만이 주님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의 삶의 모든 과제는 예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숙제는 예전보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여 우리 자신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찬송)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곧 그에게 죄를 다 고합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주 날 사랑하사 구하시려고 저 십자가 고난 당하셨도다
그 가시관 쓰신 내 주 뵈오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내 평생에 힘쓸 그 큰 의무는 주 예수의 덕을 늘 기리다가
숨질 때에까지 내 할 말씀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그 영광의 나라 나 들어가서 그 풍성한 은혜 늘 감사하리
금 면류관 쓰고 나 찬송할 말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5.끊을 수 없는 사랑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28-30)
녹취자: 백지영
I. 본문해설
우리는 지난 이틀 동안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제일 먼저 우리들이 넉넉히 이 세상과 마귀와 우리 자신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이 주셨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구속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나님이 사랑하셨고, 또 아들은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시니, 우리가 이기지 못한 이유가 없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바로 다름이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은혜로서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분명하게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고, 거기로부터 부어지는 생명의 능력을 충만히 받을 때에만, 주님이 주신 이 승리의 근거가 실제 현실 생활 속에서 성취가 되어 그래서 우리들이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II.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끊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유서 깊은 본문을 해설하기에 앞서서, 사도는 “내가 확신하노니”,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내가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고 담대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확신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위한 근거를 구속으로 주셨고, 하나님이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셨으니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아무리 하나님이 약속하셨어도, 그것을 개인적으로 깊이 확신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약속에다가 우리 자신을 던져서 내 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결코 이 세상이나 자기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어떤 힘들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고, 이 믿음이 있는 곳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을 보여 주시고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내셨습니다. 심지어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예수님이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을 친히 나타내 보이시지를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믿음이 있는 그곳에서 사람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 앞에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포기하며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믿음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이 당신의 놀라운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이 죄인이면 죄를 용서받게 해 주시고, 그 믿는 사람이 능력이 부족하면 능력을 주셨고, 그 믿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놓고 기도하면 그 믿음을 보고 다른 사람을 살려내시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비록 우리가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입고 아들을 내어주시는 사랑을 받았다할지라도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은 엄혹(嚴酷)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물결이 도도히 하나님을 거슬러 흐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인생 자체의 무게도 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이 세상의 풍조와 사조를 거슬러 살려고 몸부림치면 몸부림칠수록 이 세상이 우리를 향해 가하는 압박과 그 모든 힘은 대단한 것입니다. 쉽사리 그것을 꺾어버리고 이길 수가 없을 만큼 도도한 힘으로 우리 모든 인생들을 좌우하고 우리를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기 때문에 더 큰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이런 모든 것을 경험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자기 아들까지도 아낌없이 주실 정도로 우리를 한 없이 사랑하셨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생명과 죽음을 경험하고, 천사와 권세자들을 경험하고,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의 어려움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되었고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의 냉혹한 현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통치 속에 살지만 이 나라가 완전히 성취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취되는 과정 속에서 몸부림치면서, 그 모든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고, 하나님께 더 큰 은혜와 사랑을 구하고, 더 많은 생명의 능력을 받아 살아가야 할 필요를 매일매일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정도의 은혜면 충분하고, 이제 너무 은혜를 받아서 더 많은 은혜가 나에게 주어지는 것은 낭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날마다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보게 되고, 우리를 에워싼 마귀와 이 세상과 부패한 나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우리들이 쉬운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의 마음도 언젠가는 부패하게 되고, 더 절망적인 것은 자신이 그렇게 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부패했다는 사실 조차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비추는 더 밝은 진리의 빛이 필요하고, 이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지식 안에서도 여전히 살아남은 죄의 궤계들이 더 높은 차원의 공작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마지막 주님 앞에 가서 우리의 모든 성화가 완성되고 세계의 구속이 모두 성취되어 영화에 이르는 날까지 이런 한계는 언제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그리스도의 교회는 어떠한 성공적인 복음 사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한 겸손을 유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눈물이 있는 기도가 있고, 마음을 찢는 통회가 있고, 하나님을 향한 자기반성과 자기부인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이 냉엄한 현실이 좋은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은 이것들을 통해서 마지막 당신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하나님의 자녀들을 이 모든 시련을 거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이 세상에 드러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확신하는 것입니다. 담대한 확신,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하나님 아버지의 놀라운 사랑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는, 그때에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담대한 확신이 우리의 심령 속에 충만하고 가득 차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우리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그리고 최후 승리에 대한 담대한 확신의 크기는 우리의 성화의 정도와 비례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 세상에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자원들이 없다할지라도,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의 성령의 능력을 늘 공급받으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현실을 능가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실을 계산하서 내가 이 세상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겸손하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인간의 모든 계산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비범한 능력이 믿음의 통로를 통하여 우리에게 올 것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조금 형통한 일을 만나면 그저 즐거워하며 희희낙락하고 그래서 하나님 생각할 겨를이 없고, 좀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안 계신가보다 좌절하며 낙심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우리의 사이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믿는 종교가 우리의 인생에 주는 참 유익과 평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서 중요한 것은 바로 담대한 확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을 현실적으로 만난다할지라도 이 담대한 확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자기를 찢으사 죽기까지 하셨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는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붙들린 언약의 자손들이라 하는 신앙, 그것입니다.
A. 인생의 역경과 대적들
제일 먼저 사도는 인생의 역경과 대적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이 놀랍게 짝을 이룹니다. 사망과 생명, 천사와 권세자들, 여기에 권세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귀신들 중의 어떤 계급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계급이 있어서 가브리엘 같은 천사장이 있고 그 다음에 미가엘이나 다른 천사들이 있는 것처럼, 귀신들도 등급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등급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여러 등급이 나오는데, 정사, 권세 이런 것들입니다. 사망과 생명, 천사과 귀신들, 그리고 현재일이나 장래일, 그 다음에 능력이 나오고 높음이나 깊음이 나옵니다. 이 높음과 깊음이 뭔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조심스러운 해석은, 높음은 영적으로 은혜를 많이 받아서 아주 놀랍게 고양된 복된 상태라면, 깊음은 깊이 침체에 빠져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진 어두운 영적인 때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나 생명, 천사나 귀신이나, 지금 일어나는 일이나 장래 일이나, 혹은 능력이나 혹은 영적으로 깊이 높이 고양된 때나 깊이 침체에 빠진 때나, 이런 대적들을 우리는 날마다 만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들이 이런 일들을 만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수시로 죽음의 위협들이 우리 앞에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핍박을 받으면 때로는 죽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쇠잔해지는 육체 안에 죽음의 기운들이 수시로 들어와 생명의 기운들을 삼키려고 합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지키지만 귀신들이 우리에게 도전하기도 합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가 겪고 있지만 앞으로 어떤 일을 만날지 모릅니다. 영적으로 충만하고 은혜 가운데 있을 때도 있지만 침체에 빠져 깊음 속에 떨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B. 끊을 수 없는 사랑
우리는 그때마다 생각합니다. “아, 이제 우리의 인생은 끝났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구나. 이제 주님은 우리를 멀리 떠나셨구나.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희망이 없구나.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셨나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여기가지 우리를 도와주시지는 않는구나.” 라고 선을 그어버립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느니라.”, 현실이 여러분들에게 그러할지라도 지울 수 없는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은 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이러한 사망이나 생명, 천사나 귀신, 장래일이나 현재일, 높음이나 깊음 이런 것들에 의해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에 관한 교리는 우리를 신비한 교회의 연합으로 데려갑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해서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를 향한 사랑이 끊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모든 사랑을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리에 아주 단편적인 적용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만세전부터 삼위일체 안에서 당신의 아들을 사랑하셨고, 그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은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들을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고, 아들은 율법 아래 태어나서 율법의 요구대로 순종하며 사시다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해서 율법의 요구를 따라서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로 죽으십니다. 아들의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헌신적인 사랑의 죽음은 하나님께 커다란 기쁨이었고 그리고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에 대한 보상으로서, 이렇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그 희생의 공로를 인정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그 죽음에서 살려 내사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하시고, 모든 만물을 그 발아래 무릎을 꿇어 주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이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성도들 하나하나를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 그분의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공유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영적인 연결 속에서 공유함으로써,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충만한 은혜와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영혼의 깊은 침체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충만한 생명의 능력을 소유하며 사는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교회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당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졌고, 그 사랑은 아들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졌으며, 교회에 부어진 그 사랑은 교회의 지체들로 접붙여진 여러분 속에 스며들어 여러분들이 그 사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순수하게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항상 하나님을 향한 사랑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과 교회를 향한 그리고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사랑하셨던 이 세상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한 사랑 안에 함께 모순되지 않고 공존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냐 사람을 사랑할 것이냐 라고 하는 모순, 나의 행복을 추구할 것이냐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것이냐 라고 하는 두 목표 사이의 모순 같은 것들은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그 사랑은 그렇게 우리 모두를 통합하는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정말 아름다운 모습은 사랑을 제외해 놓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미인이 있다. 그런데 죽었다.”, 이미 죽은 미인을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몇 시간만 지나면 시체가 썩은 물이 등 뒤로 흐르게 되는데 어떻게 우리가 아름다움을 이야기 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랑은 교회를 아름답게 하는 놀라운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의 주도권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께 은혜를 받지 않고 하나님께 합당한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한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긍지 같은 것들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런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 자체가 내가 스스로 생산해 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신 데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한 모든 사람들은 사랑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기립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기립니다. 사랑을 하게 된 자기 자신을 기리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유명한 말을 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알쏭달쏭한 말을 하는데, 원래 대가들의 특징입니다. 그 말의 뜻인즉 이러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요”, 그런 의미에서의 사랑은 인간에 중심을 둔 사람 본위의 사랑이니, 그런 식으로 자기를 사랑하면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인데, 그런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려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리면 우리들이 승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까 “참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그렇게 이기심으로 자기를 사랑하지 않고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옵소서, 나를 온전히 버립니다, 나를 주님의 도구로 써주시옵소서’라고 할 때 그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사랑을 받음으로 그 사랑 안에서 자신이 살게 되는 것이니,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삶의 냉혹한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리 바꾸어 생각을 해 보아도 나쁜 일이 분명한 일들이 우리에게 발생합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믿지 않는 나태한 신자들에게는 물론이고, 때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본인의 의지적인 약함으로 악한 것은 선택하여 나쁜 일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 세상의 불안전한 구조 속에서 악이 그런 일들을 우리에게 가져오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의 악한 것들을 통해서 그런 잘못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고,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고 하는 담대한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 사랑하면서 산다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 나쁜 일이 결코 우리를 나쁘게 하지는 못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제약학에서는 독과 약이 서로 통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두 얼굴인데, 독과 약이 서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독이 되지만, 아니면 정체로서는 분명히 독이지만 그것이 어떤 경우에 쓰일 때 그것이 약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혼절하고 넘어질 때 먹는 약 중에 안궁환(安宮丸)이라는 약이 있습니다. 그 약은 3일 이상 먹으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6개월 동안 아이에게 먹여가지고 아이가 식물인간이 되서 약국을 상대로 고소한 것을 보았는데 그렇게 먹이면 안 됩니다. 그 안궁환 속에는 주사(朱沙) 혹은 주토(朱土)라는 성분이 있습니다. 붉은 모래 혹은 붉은 흙이라는 뜻인데, 무슨 성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것이 독입니다. 삼일 이상 먹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 독이 축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안궁환은 혼절해서 죽어가는 사람의 혀끝에 한 점 떼서 집어넣으면 신기하게 사람이 깨어납니다. 그 깨어나는 이유가 그 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옛날에 사람들이 인생을 비관하여 목숨을 버릴 때 먹는 것이 간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간수는 두부를 만드는데 있어서는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입니다.
이렇게, 그러니까 설령 누군가가 우리에게 악을 행하고 나쁜 일을 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그 나쁜 것들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없었더라면 일어날 수 없는 더 좋은 일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감격하면서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할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불행하게 할 수 밖에 없고 비참하게 할 수 밖에 없는 나쁜 일들을 심지어는 죄까지라도 사용하셔서, 결국은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드러내고 영광을 드러내도록 불꽃과 같이 사용하시는지 그 지혜를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이 일어나도 그것은 결코 나쁜 일이 될 수 없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이 일어나도 그 좋은 일이 나쁜 일이 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탄할 때에는 게으르고 나태했는데, 어려움이 닥치고 시련이 닥치니까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리면서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무엇인지, 하나님이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시련과 어려움이 없었더라면 그렇게 목 놓아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정말 비참한 인간이라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래서는 안 되는데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대부분 시련과 역경, 다시 말해서 기도 제목이 있을 때 간절해 지지 그렇게 시련과 역경과 안타까운 일들이 없는 데도 하나님 앞에 열렬한 마음으로 심장의 피의 펌프질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런 시간들을 갖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우리의 한계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 있는 신자들의 가장 아름다운 이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을 모두 주시고 우리의 세상적인 삶을 온전히 형통하게 인도해주신다고 할지라도, 찢어지는 가슴을 안고 터치는 눈물로 주기도문의 기도를 올릴 수 있는 신자가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에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이나 신앙의 경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21살에 회심을 했습니다. 그때는 제대로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는데 그렇게 은혜를 받고 회심을 하고 나니까 주기도문의 기도가 저절로 되는 것입니다. 순서는 좀 달라도 주기도문의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과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님을 몰랐을 때는 내게 상관이 없었던 불쌍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내게 죄 지은 사람들을, 수십 년 동안 가슴에 한을 품고 산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의 영적인 본능적 감각으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인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나쁜 것들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나쁘게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어난 나쁜 일은 마치 뒤집어쓴 오물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길을 지나가는데 누가 똥을 푸다가 똥바가지를 쏟아가지고 우리에게 확 끼얹었다고 칩시다. 우리가 그것을 뒤집어썼다고 해서 도덕적으로 악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깨끗한 양복을 입고 지나가도 마음속으로 악을 품으면 그것 때문에 우리들이 더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끊임없는 부패가 우리로 하여금 악으로 흐르게 하는 것이지, 우리가 만나는 환경이나 여건이나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들이 비참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인생을 신앙이 없는 사람과는 다른 각도에서 보도록 우리에게 촉구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생의 행복과 불행, 고통과 좌절, 기쁨과 행복 이런 모든 것들을 외부적인 요인들만을 가지고 거기서만 원인을 찾는다면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인생관과 다를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 나는 행복합니다. 오늘 먹을 것이 있고, 배가 불러서 행복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셔서 배불러, 그래서 행복해.”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 하나가 더 들어갈 뿐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생관 자체를 바꿔놓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끊임없이 만나는 생명과 사망, 생사간의 위기 그리고 천사들과 마귀의 도전, 장래 일과 현재 일, 영적인 호황이나 깊은 침체, 이 모든 사건들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볼 수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내게 왜 이 일들이 일어났을까? 그리고 하나님은 왜 이 일을 내게 허락하셔서, 나를 어떻게 다루시려고 이런 시련과 역경 속에서 살게 하실까? 무엇 때문일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도전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따르는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를 에워싸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 사망이나 생명, 천사들이나 귀신들, 현재일이나 장래일, 모든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해서 잘못 살았으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만들 것이고, 잘 살았으면 나 같은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이 무한한 은혜에 대해서 감격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현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반성하고,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용기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사랑의 진전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을 열고 충만한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여러분, 생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아십니까? 아이들이 학교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고, 남편이 직장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에 들어왔는데 아내가, 엄마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향해, 남편을 향해 살아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관계를 맺습니다. 그러면 그 생명의 기운이 나에게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낮에 있었던 모든 근심스럽고 고통스러웠던 것들이 다 사라져버리고, 이 안에서 생명의 전달력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울하게 들어왔는데 아내는 폭탄 맞은 머리를 하고, 집안은 개꼴이고, 인생 끝장까지 온 사람처럼 좌절하고 있다면, 모두 함께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망의 전달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전달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낙심하고 좌절한 사람에게 가까이 갔을 때 진정으로 회개의 힘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얼마간의 돈이나 물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 이렇게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저 사람은 저렇게 기쁨의 삶을 사는구나. 저 기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저 사람은 돈도 나보다 많지 않고, 집도 나보다 좋지 않고, 남편도 나보다 훌륭하지 않은데 어떻게 저렇게 행복한 삶을 살까?” 그것을 느낄 때 그것이 최고의 선교인 것입니다. 말씀인즉, 사람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잘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보면서 전혀 그런 도전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전혀 행복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 때문에 울고 웃고, 이 세상의 일들 때문에 울고 웃습니다. 그래서 사망도 끊어놓고, 생명도 끊어놓고, 천사들이나 귀신들이나 무엇이든지 수시로 그 사람을 방해해서 좌절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진 사람처럼 낙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매력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훌륭한 선교는 자기 자신이 충만한 기쁨 속에서 살아서 넘치는 생명의 전달력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좌절한 사람에게 가서 나도 똑같이 그런 일을 겪었다고, 그런데 별거 아니라고 그리고 자기의 살아온 이야기를 해 줄 때 사람들이 힘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방을 하거나 그럴 때 큰일 났다고 하면 흔한 일처럼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실제로 흔한 일이기도 합니다. 아기를 낳는데 심장에 구멍이 뚫렸다고 합니다. 그때, 그런 애들 많다고 그러면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 어떻게 심장에 구멍이 뚫릴 수 있냐? 그러고도 살까?” 그리고 심방 갔다 돌아오면, 심방 받은 부모들은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 목회하면서 수도 없이 많이 봤는데, 자라면서 살이 올라와가지고 구멍이 메워 지는 것이니까 괜찮아. 이삼십 명에 한 명씩 늘 있는 일이니까 기도 열심히 하면 다 되게 돼 있어.”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 이야기 한 마디만 들어도 좌절해서 죽을 것 같았던 사람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아, 이게 흔히 있는 일이구나. 저분은 수없이 많이 보았고 겪었구나. 그리고 하나님 의지하면서 살아난 수많은 증거들을 가지고 있구나.” 그때에, “사망의 기운이 우리에게 있지만 생명은 사망보다 크고, 마귀가 우리를 위협하지만 천사들의 도움은 그보다 크고, 장래에 불안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으나 현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는 더 크고, 영혼의 침체에 빠지는 때가 있으나 거기서 건져내어 우리를 영혼의 호황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높으신 은혜는 그보다 훨씬 더 크구나”, 되지도 않는 것들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면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렇게 놀라운 능력으로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우리의 소망을 거슬러서 최악의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죽음이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은 사망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놓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의사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죽을 때 굉장히 고통스럽지 않겠습니까? 특히 병에 걸려서 죽는다든지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이 아른아른하면서 사라지고 죽기 직전에 일생동안의 기억들이 필름처럼 확 지나갈 때, 그것들은 엄청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의학적으로 볼 때, 죽기 직전에 온 몸에 남아있던 모든 엔돌핀이 다 쏟아져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없는 기쁨 속에 죽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의 죽음 속에서도, 그 마지막 인간이 죽어가는 때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게 자연의 세계를 움직여서 인간의 죽음의 고통을 더시고 기쁨 속에서 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한때, 아이들이 집에 대들보에다가 줄 걸어놓고 목매다는 놀이를 하다가 많이 죽는 일이 있었습니다. 딱 매달려서 피를 콱 조여 가지고 죽을까 말까 할 때 기분이 그렇게 좋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하려고 청소년들이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다행히 무엇이라도 밟고 내려오면 되는데, 좀 더 즐기고 싶은 욕심에 시간을 끌다가 옆에 누가 사람이 없으면 자기도 모르게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런 식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의 육체, 어디 인간만 그렇겠습니까? 동물들의 육체의 죽음까지도 하나님이 그렇게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하물며 눈에는 비록 보이는 것이 없어도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며 신앙으로 살려고 하는 당신의 자녀들을, 더욱이 그들을 위해서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셨고, 당신 보좌 우편에서 그 아들이 지금도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변함없으신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향한 사랑에서 그들을 끊어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C.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
그런데 성경은 이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왜 자꾸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로마서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냥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계속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 가서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할 줄 모르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 이것은 진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들이 사랑을 생각할 때에 이런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 좋습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 그리고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죽고 부활하여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교회, 그 교회에 접붙여진 나, 이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확신,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는 이 담대한 확신을 나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누리며 우리가 그 사랑 가운데, 그래서 가장 약하고 때로는 악하기까지 한 지체들을 보면서 혹은 비참하게 좌절하고 있는 지체들을 보면서 그 사람조차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을 교회 안의 지체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불신자들, 심지어는 이교도들에게까지도 그것을 확장하는 정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진정한 사랑의 정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 세상을 이길 때 사랑의 힘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고난 속에서 나에게 이 고난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생명의 능력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사실을 붙들고, 그분을 더 강하게 붙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왜 그렇습니까? 사랑은 관계를 맺는 힘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랑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기를 원하고, 더 사랑하기를 원하고, 그분께 더 붙어 있기를 원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돌아보면서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들이 모두 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이미 우리를 위해서 대신 짊어지시고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우리에게 승리를 확고히 해 주신 그리스도 예수의 뒤를 따라, 우리가 싸워서 이길 수 없는 삶의 현실을 우리 안에 살아계신 그분의 능력과 생명의 힘으로 이기게 되기를, 나 자신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만이 아니라 교회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다른 모든 치제들의 삶 속에서도 이런 승리가 나타나기를 갈망하면서 사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사랑의 삶입니다.
죽음의 기운이 우리를 위협하고 때로는 귀신들이 우리를 향해 도전하고, 때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우리를 엄습하고, 영적인 침체와 낙심이 우리를 엄습할 때조차도 이런 것들이 우리에게 일어난다고 해서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증거는 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증거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현실보다도 더 분명한 사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했고, 지금도 그 하나님이 아들로부터 간구를 듣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보좌 우편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간구하고 계십니다. 이 땅에 남아있는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하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의 영광의 그 나라가 이 세상에 임하게 되도록 저희들을 사용해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믿음의 눈이 아닌 불신앙의 눈을 가지고 보면 우리를 에워싼 대적들이 아주 엄청나 보이지만,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보면 그 대적을 에워싸고 있는 하나님의 군대들 그리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능력들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실패하고 좌절하고 낙심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승리하고 이기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어디에서 이 차이가 오는 것입니까? 결국은 스스로 부패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대적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내 사랑 안에 거하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현실을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승리의 비결이 바로 이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자, 이제 결론을 내겠습니다. 우리는 한 순간도 패배하고, 좌절하고, 실패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이기고, 승리하고 싶고 그리고 극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잘 되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모든 잘못된 삶의 좌표, 그리스도와의 관계, 이런 모든 것들을 그대로 내버려둔 채 승리만 얻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탐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식으로 승리를 주시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혹시 얻은 것은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다. 나쁜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도 나쁜 것으로 사용이 되고, 좋은 사람들에게는 나쁜 것도 좋은 것으로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실패를 운명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이 삶은 불신앙의 삶이며. 하나님을 등진 삶이고, 구원의 계획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자신도 행복하지 않고 하나님도 기쁘실 수가 없습니다. 누구도 이익을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살아갈 때 여러분들의 가족은 얼마나 고통스럽겠으며, 교회의 목회자들과 다른 지체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의 삶을 보면서 얼마나 많이 희생해야 되겠습니까? 아무도 유익을 얻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이 이미 이루어놓으신 이 승리의 근거를 토대로 현실적으로 이기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승리를 꿈꾼다면 누구를 위한 승리이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위기와 난관 가운데 있어도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끊을 수 없다고 말입니다. 끊을 수 없는 이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힘이고, 우리가 처한 모든 역경과 난관들을 극복하게 만드는 놀라운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주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믿으며, 그 사랑을 붙들고 그 사랑에 어울리는 반응을 하면서 살아갈 때, 거기에서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향한 폭발적인 힘이 그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을 때에는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삶을, 혹은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은 결정을, 하나님 사랑으로 충만해지면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결국 순종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식고나면 내가 이때까지 지탱해오던 것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원이 고갈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 마음을 쏟는 기도,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신 십자가의 은혜에 대한 감격, 단 한 순간도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느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나에게 일어났을까? 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이런 낯섦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님께 대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어떠한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그 모든 상황들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자원들이 있을 때는 우리가 이길 수 있지만, 그럴 수 없을 때는 우리는 질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자원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해보셨습니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저를 사랑해주실 수 있다면, 제가 모든 것을 버리기를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처럼 하겠습니다. 제게 있는 모든 것을 가져가셔도 저에게 그것 하나를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드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승리가 있는 복음(장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