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편)
녹취자: 김경애
자신의 인생의 목자가 되어주신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2절부터 왜 그 위대한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모시게 되었는지를 차례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설교하지 못했지만 2절에서는 자기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시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자신에게 필요한 육신의 양식들과 그리고 쉼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심을 고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3절에서는 그것과는 좀 다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고백이 등장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자기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소생시키시고’ 라고 했는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살아나게 하시고’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영혼을 살아나게 하시고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과연 하나님이 나의 목자시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살아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 의미를 따지기 전에 살아난다는 것은 언젠가는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때가 있었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영혼이 죽은 것과 같은 때가 있었기 때문에 자기 영혼을 살아나게 해주시는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 위대한 하나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어린양이 목동을 의지하듯이 자기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영혼이 살아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하는 것입니다. 영혼은 불멸하는 사물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든 죽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우리 속에 넣어주신 그 영혼은 하나님처럼 영원히 불멸하는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불멸하시지만 영혼은 하나님이 불멸하도록 지정하고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불멸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설령 우리들이 죽는다고 하더라도 이 영혼은 사라지지 않고 판을 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죽는다거나 살아난다는 말을 우리 육신이 죽고 사는 것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면 전혀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그렇게 죽는 법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죽은 자와 같은 영혼’ 그 다음에 영혼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에 이런 묘사가 나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육체의 죽음은 숨이 끊어지고 육체의 모든 기능이 멈추는 것이지만 영혼은 그런 식으로는 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영혼은 살아있고 기능은 움직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죽었다거나 살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명과 사랑을 끊임없이 공급받음으로써만 영혼이 영혼다운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순종하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러면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의도에 맞게끔 인생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혼을 주신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 영혼이 원래 영혼을 주신 목적대로 고유하게 잘 작용하고 있을 때에는 살아있는 영혼이라고 부르지만 그렇게 올바르게 영혼이 작용을 잘 안하고 영혼이 우리를 잘못된 곳으로 이끌어갈 때 그때 우리는 그 영혼을 죽었다 혹은 병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것이 소위 우리가 이야기하는 영적인 침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기도를 뜨겁게 하고 말씀에 매일매일 은혜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살아있습니다. 살아있어서 영적으로 예쁜 것을 보면 예쁘기 때문에 감동을 받고 영적으로 더러운 것을 보면 더럽기 때문에 혐오를 느끼고 그래서 반응을 합니다. 영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면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아니까 가슴이 뛰고 감동을 받습니다. 또 죄나 이 세상의 악을 볼 때는 그것이 불결하니까 더럽고 악하다는 마음을 받으면서 영혼이 우리에게 ‘빨리 피하라. 아니면 저것은 더러운 것이다.’ 라고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치 우리들이 실제 인생을 살아갈 때에 예를 들어서 자매들이 길거리를 지나갈 때에 쇼윈도에 예쁜 옷이 있다면 돈은 없지만 자기도 모르게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고 ‘나도 한번 사 입고 싶다. 정말 예쁘다.’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지나가다 누가 똥을 잔뜩 싸놨으면 예쁘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럽다 차라리 돌아가더라도 피해가야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것이 우리의 감정의 작용이듯이 영혼은 그런 하나님 앞에 영적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볼 때에 사랑하게 되고 미운 것들을 보게 될 때에 그것을 싫어하고 혐오하는 것을 생생하게 할 수 있을 때 그것이 영혼의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에는 신앙적인 감정의 기복이 풍부합니다. 찬양을 부르면 막 기쁘고 기도하면 눈물이 나오고 말씀을 들으면 감사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이 느껴지고 그러다가 안 믿는 사람을 보고 시험에 드는 사람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출렁출렁하면서 말하자면 느끼는 기복이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험에 들게 되면 그러면 찬송을 불러도 부르나보다 하고 남들은 열심히 부르는데 자기는 앉아서 가만히 듣고만 있고 딴 생각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별로 하고 싶지 않고, 예배를 드려도 정신을 딴 곳을 오가고 영적인 것이 어떤 시간이 주어져도 감정이 밋밋하고 아무 느낌이 없는 것입니다. 고갈된 것입니다. 이럴 때 사람의 마음은 세상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주 활발해집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저기에 이익이 있다고 하면 가슴이 들뜨고, 저기에 쾌락이 있다고 하면 가슴이 뛰고, 누가 나를 싫어하고 누가 나를 욕한다고 하면 분노가 일어나고 이런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은혜의 세계에서 감동을 받고 이런 것들이 풍부해지면 세상에서는 덤덤해지는 것입니다. 큰 어려움이 있어도 ‘아니야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야!’ 평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누가 욕을 하면 ‘아니야 나는 그렇게 잘못한 적이 없어 하나님이 아시는데 그 사람이 잘 몰라서 그러겠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이 충만하게 은혜의 상태에 있을 때와 뒤로 물러가서 침체에 깊이 빠졌을 때 영혼은 ‘죽음의 상태에 있다.’ 혹은 ‘죽었다’ 혹은 ‘허물과 죄로 죽었다.’ 혹은 ‘깊이 병들어있다.’ 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자신의 영혼이 소생되는 경험을 했으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자신도 언젠가는 영혼이 그렇게 죽은 것과 같이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신앙의 기쁨을 상실한 채 겨우겨우 살아가는 것 같은 그렇게 힘들 때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일생을 살면서 이런 영혼의 깊은 침체를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혼의 깊은 침체를 가져오는 영혼의 생명을 빼앗아가는 이유를 성경은 가장 중요하게 한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이 다윗은 정말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사무엘하 11장까지만 하더라도 이 사람은 정말 성경에서 이 사람만큼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고 또 하나님께 사랑을 받을 사람이 흔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크게 하나님 앞에 두 번 범죄를 하게 됩니다. 한번은 하나님이 금지하신 인구조사를 실시한 사건이었습니다. 왕이 인구조사를 하는 것은 행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인구조사는 주된 목적이 나라의 부가 얼마나 되고 전쟁에 나갈 군인과 병력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헤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우리나라가 상당한 실력이 있구나!’ 이런 자부심을 갖는 수단으로 인구조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러지를 않기를 원하셨고 사람의 수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나라라는 확신 속에서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교만해져서 인구조사를 하고 그 결과 나라에 커다란 재앙이 일어나고 수많은 백성들이 죽어갔습니다. 이것보다도 더 심각한 사건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건이었습니다. 다윗은 많은 시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나라가 드디어 평안해졌고 모든 것이 안정되었을 때에 그는 서서히 마음이 부패해져갔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는 이 사람이 그렇게 상처가 많고 외로움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는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보고 한눈에 반한 것입니다. 그러고 진심으로 그 여자를 사랑한 것입니다. 결국은 하룻밤 동침하고 형벌처럼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우리아를 죽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다윗에서 엄청난 경험이었고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영혼의 깊은 침체와 어두움 속을 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구원의 모든 기쁨이 사라질 것 같은 위기를 느꼈고 하나님이 기름을 부을 때 자기에게 부어주신 성령님을 거두실 것 같은 커다란 긴박감을 느꼈습니다. 왜 이것이 현실적으로 다윗에게 어마어마한 두려움이 되었느냐하면 그는 자기의 전임자 사울이 하나님이 부으신 성령을 거두실 때 그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입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미쳤습니다. 그리고 귀신들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렇게 비참하게 최후를 마치는 장면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영혼의 어두움 속에서 지냈고 통렬한 회개를 통해서 그는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요를 적시는 통절한 회개 속에서 그는 일생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영혼의 나락을 경험했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은혜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그렇게 범죄하지 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그 영적인 그 무한한 세계에 광대무변한 비밀들을 은혜의 비밀들을 터득하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돌아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련이나 고통이나 괴로운 고민거리들 때문에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잘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과거를 돌아보면 더 가난하고 병들고 더 비참하고 힘든 때에도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뜨겁게 주님을 섬겼던 기억이 우리에게는 언제나 있습니다. 문제는 환경이 전혀 상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문제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이 모든 한계와 그리고 어려움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가 열렬하게 신앙생활은 잘하지 못했지만 죄는 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내 영혼은 이렇게 기쁨이 없고 행복하지 않을까요?’ 라고 말합니다.
어느 군인들이 개울가에서 돌멩이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큰 푸대를 세 명의 장병에게 나누어주면서 ‘너희들은 지금부터 가서 돌멩이 50㎏씩 주워온다. 실시!’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가서 한 사람은 무식하게 50㎏짜리 돌멩이 하나를 집어넣어서 가져왔습니다. 또 한사람은 30㎏짜리 하나 20㎏짜리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또 한사람은 이것을 지고 어디까지 지고 갈지 모르는데 왜 저렇게 미련하게 할까 하면서 자잘한 공깃돌 1,000개를 주워서 50㎏를 만들어서 왔습니다. 각각 무게를 달아보니까 정확하게 50㎏씩 이었습니다. 그 다음 명령이 이 장병들을 황당하게 했습니다. ‘모두 제자리에 갖다 둔다. 실시!’ 그랬습니다. 한 개를 가져온 사람은 한 개만 가져왔기 때문에 어디서 가져왔는지 잊히지 않아서 제자리에 갖다놓았습니다. 두 개를 가져온 사람도 잠깐 망설였지만 제자리에 갖다놓았습니다. 그런데 자잘한 것 1,000개를 가져온 사람은 단 한 개의 돌멩이도 제자리에 갖다 놓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집안에서 보면 아이들이 비오는 날 옷에 진흙을 묻혀서 방에 들어와서 더러워진 거실이야 금방 씻깁니다. 그러나 5년씩 6년씩 걸쳐서 싱크대 속이나 아니면 장롱 뒤에 서서히 쌓인 먼지는 잘 닦이지도 않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모든 영혼의 생명이 사라지고 신앙생활의 뜨거운 감격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은혜를 많이 받고 신앙생활을 뜨겁게 할 때는 언제나 기쁨이 있습니다. 기쁨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슬픔도 분명합니다. 아직까지도 예수를 믿지 않고 있는 남편, 혹은 아내 혹은 아이들을 생각하면 슬퍼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눈물이 납니다. 그런가하면 옳지 못한 현실을 바라보면 마음에 끓어오르는 분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하나님과 신앙에 관한 일 자체가 자기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자기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웃음도 없고, 기쁨도 없고, 슬픔도 없고, 물론 눈물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무미건조하게 살아갑니다. 예배당에 와도 아무 기쁨이 없습니다. 예배에 오는 목적은 빨리 끝나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은 생각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이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돈이 많이 생기거나 애들이 취직하거나 좋을 일이 생기거나 복권이 맞아서 기쁜 일이 생긴 것 말고 신앙적인 이유 때문에 너무 기뻐서 가슴이 터질 것같이 행복해하던 때가 언제입니까? 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고 다 나의 잘못 때문인 것 같은 생각이 진심으로 들어서 눈물로 회개한 것이 언제입니까? 정말 찬양을 부를 때 나의 목소리가 하늘에 이르는 것처럼 느껴져서 지치고 고단하던 심령이 찬양을 부르며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 같은 그런 아주 가벼운 기쁨을 누린 적이 언제입니까? 어느 목사님이 선교사님이었는데 교인이 400명이 모이는 곳이었는데 설교하러 오라고해서 올라가서 막 설교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해도 웃지를 않고 슬픈 이야기를 해도 울지를 않습니다.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할 수 없으니까 설교 원고를 주섬주섬해서 내려오면서 지나가면서 ‘차라리 내가 돌부처 앞에서 설교를 하는 것이 낫지!’ 영혼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죽어있는 시체들을 향해서 바보라고 놀렸습니다. 시체들이 벌떡 일어나서 ‘누구보고 바보라고 그래?’ 대들겠습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다음에 정말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기도와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써 주님의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받아서 이 험한 세상을 매일 매일 이기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통해서 우리의 삶이 바뀔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인생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꿔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님이 사막에 집을 짓고 살았답니다. 사모님이 매일 설거지를 하고 물을 오른쪽으로 버렸답니다. 풀포기하나 나지 않는 사막에서 몇 달 동안 그렇게 설거지한 물을 버리니까 물을 매일 버린 그 자리에서 풀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막인데도 매일 물을 버리니까 거기에서 풀이 돋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은혜를 받아서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열렬히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꽉 붙들고 믿음 생활을 하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의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면 그것으로써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삶을 하나님 앞에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죄는 이런 것들을 모두 앗아갑니다. 죄에는 큰 죄와 작은 죄가 있습니다. 죄의 크기는 다르지만 질적으로는 똑같은 것입니다. 기분 나쁜 비유이지만 새벽이면 똥차가 와서 큰 통에 화장실에 있는 똥을 다 빨아들여서 출렁거리면서 거리를 지나갑니다. 그 차는 올 때는 항상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를 울리면서 옵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베토벤이 들으면 얼마나 짜증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나 아니면 공기 중에 스프레이로 똥물을 뿌렸을 때의 작은 입자나 모양은 다르지만 동질의 것입니다. 강을 흘러가는 물이나 그 물을 받아서 후 하고 뿜은 그 물이나 다 동일한 물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 영혼의 생명을 현저하게 앗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은혜를 많이 받기 전에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 눈물로 진실하게 회개하고 나면 그러면 놀랍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희생, 모든 것들이 생각나면서 신앙의 감격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러면서 감격이 확 밀려오는 것입니다. 회개와 함께 그런 변화의 역사들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만 바뀔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도 바꿔놓는 것입니다. 한 7, 8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우리교회에 어떤 자매가 처음 나왔습니다. 그 양반 친구가 우리교회에서 결혼한 자매였는데 자기 친구를 보니까 너무 곤고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 친구가 너무 불쌍해서 주일날 전화를 해서 밥이나 같이 먹자고 불러 놓고 기왕 온 김에 예배를 드리고 가자고 권해서 생전 처음 교회에 나온 자매입니다. 교회에 들어온 것입니다. 이 자매는 남편하고 살다가 남편이 하도 속을 썩이니까 이혼을 해야겠다고 서류를 갖다놓고 자기는 다 써놓고 남편보고 써달라고 하니까 남편은 뺀질거리고 안 써주기 때문에 장롱 위에 얹어놓고 각방을 쓰면서 사는 자매입니다. 자나 깨나 이혼을 생각하는 자매였습니다. 그날은 주일날이었는데 설교제목이 ‘이혼을 생각하는 그대에게’ 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교회에 나와서 친구 옆에 앉았는데 예배는 시작되었습니다. 예의상 앉아서 설교를 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자기 이야기였습니다. 설교가 끝났을 때는 이 자매가 펑펑 울면서 회개하고 거기서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이 자매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여보!’ 남편은 자기가 잘못한 것이 있으니까 아내가 불러도 대답을 잘 안합니다. 저쪽 방에서 대답을 안 한 것입니다. 저 마누라가 나에게 도장을 찍어달라고 들볶을 모양이구나!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부부가 안 살려고 할 정도니까 서로 사이가 얼마나 나빠졌겠습니까? 그런데 갑자기 아내가 얼굴이 벌게지더니 자기 앞에서 갑자기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여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당신을 너무 괴롭혔어! 여보, 미안해! 나를 용서해줘! 내가 정말 나쁜 아내였어!’ 그러면 남편이 뭐라고 그러겠습니까? ‘자식 그것을 이제 알았어? 진작 깨달았어야지 이 사람아! 네가 나쁜 아내라는 것은 동네사람이 다 아 알아!’ 설마 그랬겠습니까? 남편은 자기가 잘못한 것을 다 아는데 이 여자가 때리려고 그러고 삿대질을 하고 할퀴려고 덤벼들 때에는 꼴도 보기 싫었는데 이 여자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눈물을 흘리니까 무서운 것입니다. 겁이 덜컥 나더랍니다. 무슨 병이 들었나? 자기가 무릎을 꿇고 ‘여보 아니야! 내가 정말 나쁜 놈이야! 나를 용서해줘!’ 그것보세요. 한 사람이 주님을 만나면 자기 인생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믿고 이 험한 세상에 살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하지만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나를 가라고 명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이 세상에서 빛으로 이 세상에서 소금으로 부르신 이유입니다. 물어봅시다.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 남편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까? 여러분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인생이 바뀌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이웃이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에게 무엇이 부족한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입니다. 영혼의 소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만 그런 영혼의 소생을 경험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른 방법 가지고는 안 됩니다. 회개입니다. 그 이외에 아무 것으로도 안 됩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다윗은 즉각적으로 무엇을 생각했는지 아십니까? ‘그래 내가 죄를 지었지? 제사 지내면 되지 뭐? 내 밑에 제사장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 나라의 임금이었는데 짐승이 없었겠습니까? 아니면 말을 듣는 제사장이 없었겠습니까? 해보았더니 소용이 없던 것입니다. 죄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번제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더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결국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으며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으며 통회하게 됩니다. 생애적인 회개였습니다.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띄우고 그리고 요를 적시고 자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품에 손을 넣어보니 온몸이 뼈만 남았습니다.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있는 교회에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축복중 하나, 우리의 목회에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최고의 복중 가장 중요한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회개입니다. 그 회개는 하나님이 회개하도록 베풀어주시는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많은 물질 보다 더 더 위대합니다. 왜? 오늘 집에 가다가 복권이 맞아서 100억이 당첨이 되어도 우리의 영혼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무슨 획기적인 사건이 발생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회개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하고 만들어주고 주님을 향했던 영혼을 살아나게 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던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피 흘리기까지 주님을 위해 충성하도록 바꾸어줍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이 교회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부패했기 때문에 계속 상합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면 좋은 것이 아니라 회개를 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사람도 결국은 나쁜 사람이 되어갑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 중에 테르툴리아누스라는 위대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다가 어느 순간에 ‘이것은 제 잘못입니다. 나의 죄입니다.’ 그렇게 깊이 회개할 때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시고 은혜를 부어주시는 경험을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시인이 영혼이 소생하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아 내가 의지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구나! 그리고 이 더러운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 밖에 없구나!’
(찬양)
이 세상들 나를 버려도 나를 사랑하는 이 예수뿐일세
예수 내 친구 날 버리질 않네
온 천지는 변해도 날 버리지 않네.
하면서 깊이 회개할 때 오히려 그런 회개가 없었을 때는 도저히 경험해보지 못한 하나님의 찬란한 사랑의 광채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정확히 3,000년 전 사람입니다. 3,000년 전 사람인데 하나님의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복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에 관해서 가장 깊은 지식을 소유한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특별히 사랑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죄인이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그 용서하시는 과정을 통해서 터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죄를 용서받는 과정을 통해서 깊이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감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는 분은 없고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만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이 고난의 인생길을 걸으며 상처로 가득한 인생길을 살면서 우리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침체는 무엇 때문입니까? 정말 어려운 환경, 주위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이런 것들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지 실제의 문제는 소생하지 못한 영혼, 영적인 죽음의 상태에 있는 영혼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두울 때는 아무데나 앉고 아무거나 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환하게 비치고 나서 그것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가를 알면 우리들이 감히 먹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을 비추어 우리로 하여금 그 진실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환하게 비칠 때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이것이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죄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깨달음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혼이 소생되는 경험은 신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연관 지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 자신의 영혼에 각성이 일어나고 그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믿고 싶어요. 왜요? 정말 가슴이 답답해요. 은혜를 많이 받고 싶어요! 왜요? 그러면 너무 기쁘잖아요? 하나님 사랑 받으면 행복하잖아요! 그러나 신앙은 그런 신앙은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깊이 달으며 하나님 앞에 감격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는 분은 없고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만은 나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으면서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마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시인이 고난의 인생길을 걸으며 상처로 가득한 인생을 살면서 우리 하나님을 나의 목자라고 부를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침체는 무엇 때문입니까? 정말 어려운 환경, 주위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이런 것들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지 문제는 소생하지 못한 영혼의 죽음의 상태에 있는 영혼 때문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어두울 때는 아무데나 앉고 아무거나 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비치고 나서 그것이 얼마나 더러운 것인가를 알면 우리가 감히 먹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을 비추어 우리로 하여금 진실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 진리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환하게 비치면 그때 우리는 비로소 이것이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죄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서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영혼이 다시 소생하는 경험을 시인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으로 연관 지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깨달을 때에 자신의 영혼의 각성이 일어나고 거기에서 진정한 회개가 있고 그때 하나님이 죽은 자와 같은 자신의 영혼을 다시 살려내시는 생명의 역사를 이 신앙 속에서 체험하고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살아계시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살아 계실뿐만 아니라 자기 같은 죄인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경험하며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죽은 자와 방불한 자기의 자녀들의 영혼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다시 살리시는 이유 그래서 그에게 생명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은혜 받고 싶어요!’ ‘왜요?’ ‘정말 가슴이 답답해요!’ ‘은혜를 많이 받고 싶어요.’ ‘왜요?’ ‘그러면 너무 행복하잖아요. 너무 기쁘잖아요.’ ‘예수님 사랑을 받으면 좋잖아요!’ 그러나 그런 신앙은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받으면 ‘좋다! 행복하다!’ 혹은 ‘기쁘다!’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은 그 은혜를 주시는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수십만 명의 군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 군인들이 입대하고 나면 아무것도 개인물건을 쓰지 않습니다. 양말부터 속옷까지 국가에서 다 만들어서 보급해줍니다. 심지어 담배, 이쑤시개까지도 다 나옵니다. 그리고 군인들 중 계급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골프도 치라고 골프장도 만들어주고 호텔도 지어줍니다. 왜 그렇게 잘해줍니까? 그리고 월급도 줍니다. 그리고 제대를 하고나도 죽을 때까지 연금을 줍니다. 그것을 하기위해서 국민들은 세금을 내야합니다. 그것을 짊어져야합니다. 매년 35억, 36억 가까운 돈을 그렇게 군인들을 먹여 살리고 무기를 사고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절대로 전쟁이라는 것이 없다는 보장이 있다면 그 일을 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돈을 가지고 국민의 복지와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썼더라면 아마 우리는 지금 훨씬 더 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군인들에게 그렇게 해주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전쟁이 안 나면 좋겠지만 전쟁이 나면 너희들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이 나라를 지켜달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쟁이 났는데 군인들이 도망을 갔다면 용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에는 물론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거저 주시지만 그 은혜를 주실 때에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사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소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을 소명과 관련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많은 재물을 주셨을까? 세상 사람들은 너 먹고 잘살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뭔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소명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를 이렇게 높은 지위에 두셨을까?’ 그냥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으면서 사람들을 다스리면서 즐겁게 살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나를 여기에 세운 것은 하나님의 무슨 뜻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것과 같은 비참한 영혼을 하나님이 살려주셔서 하나님이 삶과 생명으로 가득 차게 하셔서 살아 있는 사람으로 만드셨을 때 거기에 하나님의 무슨 계획이 있으셨습니까? 오늘 성경은 그것을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죽었던 영혼을 새로 살리신다는 의도는 그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그 의의 길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의의 길이라는 것은 불의한 길의 반대입니다. 그러면 불의한 길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어떤 기준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무엇이냐 하면 그 당시의 율법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을 중심으로 하는 율법 이것을 따라서 사는 사람이 바로 의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인생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비유입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릅니다. 어떻게 다르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고 자기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심지어는 자기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자기에게 잘못해주는 사람은 미워합니다. 엄마인데도 배가 아파서 자기를 낳아주고 그렇게 길러주고 먹여주고 교육을 시켜주는데도 요만한 아이들이 해달라는 대로 안 해주면 물건을 던지면서 ‘엄마 미워!’ 그럽니다. 그게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가 판단 자가 되어서 걸어갑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뜻에 거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의한 삶입니다. 그런 불의한 삶을 살게 되는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런데 의의 길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이렇게 자기의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사랑,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생각하고 희생하고 고통을 받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이 올바른 길이기 때문에 핍박을 받고 손해를 보면서도 그 길을 걸어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구원받은 당신의 자녀들이 살아야할 삶입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그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들이 전도를 해도 잘 듣지를 않습니다. 마음을 열고 그것이 과연 그러할까 하고 생각할 시간을 주어야하는데 그런 것을 듣기 싫어합니다. 여러분이 오늘 전도지를 들고 나가서 정류장 앞에서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보십시오. 셋 중의 하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받지 않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들이 전도를 하는 또 하나의 길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얼마나 기쁘고 감사해야하고 행복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돈이 많고, 출세하고, 좋은 차를 타고, 좋은 집에서 살고, 매일 쾌락을 즐기고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것은 세상 사람들도 보여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도드라지지 않습니다. 이제 마음속에서 기쁨이 생겨납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라면 슬퍼할 위치인데 막 기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타협할 위치인데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올곧게 핍박을 받으면서도 그 길을 가는데 너무 기쁜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들이 ‘혹시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있는 것 아냐?’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는 그들이 자신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의의 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적당히 살고 타협하고 불의하게 산다고 해서 우리도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한 20년 전입니다. 그때도 저는 꽤 인기 있는 강사였습니다.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때는 그것이 사명인줄 알고 일 년에 50,000㎞내지 60,000㎞를 탈 정도로 전국을 다녔습니다. 그날도 저기 영동인가 어느 지방대학에서 설교를 하러 오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출발을 했는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습니다. 그리고 지방도로로 들어서서 시계를 보니까 부지런히 가지 않으면 집회에 늦게 생겼습니다. 학생들은 한 400명이 기다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한적한 시골길이니까 조금 밟았습니다. 교통이 저기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른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갔습니다. 교통이 차를 세웁니다. 경례를 하면서 면허증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그러니까 ‘속도위반을 하셨습니다.’ 아니 내가 이렇게 천천히 왔는데 무슨 속도위반을 했느냐고 하니까 ‘내가 보는 데서는 속도위반을 하지 않으셨는데 내가 보지 않는 저 산 너머에서 과속하셨습니다.’ 아니 내가 산 너머에서 과속한 것을 당신이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까 거기에 자기 동료가 있는데 스피드건을 쏴서 속도위반한 차량이 지나가니까 잡으라고 무전연락이 왔다는 것입니다. 뭐 그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예, 알았습니다. 제가 속도를 위반한 것 같으니 얼른 딱지를 끊어주세요.’ ‘뭐하시는 분이세요?’ 그때는 교수였습니다. ‘나는 대학의 교수인데 오늘 이 학교에서 나를 특별한 강의요청이 있어서 가는 길인데 시간이 없어서 제가 과속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분 좋게 웃으면서 ‘교수님이시군요! 걱정 마세요. 교수님! 벌점 없는 싼 것으로 끊어드리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무슨 소리인지 몰랐습니다. 범칙금 통보를 받아서 햇빛가리개에 놓고 간신히 제 시간에 도착을 해서 집회를 끝마치고 올라왔습니다. 그 다음날이 되었는데 그 딱지 생각이 나서 낼 것은 얼른 내야지 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직원을 시키려다가 그냥 은행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때까지는 확인을 하지 않았습니다. 은행 앞에서 확인을 해보니까 너무 쌉니다. 94년경이었는데 6,000원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60,000짜리가 없을 때니까 그래도 20,000은 할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쌀까 하면서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교수님이시군요. 걱정 마세요. 싼 것으로 끊어준다는 말이 생각나서 자세히 들여다보니까 뭐라고 쓰여 있느냐하면 ‘벌금 육천 원, 담배 피다가 걸렸음.’ 그것을 만약에 직원에게 주었으면 얼마나 시험에 들겠습니까? 우리 목사님이 어디를 가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서 딱지를 끊어왔을까 하고 시험에 들었겠습니까? 그 딱지를 가지고 오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일인가? 그리고 이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원칙을 세워서 20년이 넘도록 지켜오고 있습니다. 가능한 위반을 하지말자. 그리고 위반을 해서 적발이 되면 정당하게 처벌을 받자. 그래서 옛날에는 ‘깎아주세요.’ 아니면 ‘한번만 봐주세요.’ 그랬는데 그러지 말자고 원칙을 세웠습니다. 4, 5년 전에 갑자기 전화가 와서 핸드폰을 받다가 걸렸습니다. ‘이쪽으로 차 세우세요.’ 차를 세웠습니다. ‘운전하시면서 핸드폰을 쓰시면 안 되죠?’ 그럽니다. 눈초리를 보니까 ‘미안해요 제가 깜박하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용서해줄 것 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끊으세요.’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앞에 가서 끊더니 벌점 15점에 40,000원인가 60,000원인가를 끊었습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왔습니다.
평생 셋집에 가난하게 살다가 교회를 개척하기 전이었는데 교수로 취직을 했습니다. 교수로 취직을 했더니 학교에서 어느 날 ‘교수님 주택사정이 어떻습니까?’ 그래요. ‘큰방 하나하고 작은방 하나입니다. 두 개 가지고 세 식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애들을 가르치는데 그렇게 주거환경이 좋지 않아서 집중이 되시겠습니까?’ 그러면서 5,000만원을 10년 후에 갚으라고 무이자로 빌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 그냥 주는 것입니다. 그때는 대출을 받으려면 10% 내지 12%정도였으니까 사실은 그냥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전 처음 7,000만 원짜리 전세를 가게 되었습니다. 42평 큰 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났는데 우리가 세 들어 살고 있던 빌라 건너편에 1층에 사는 아줌마가 열심히 교회를 다니던 집사님이었는데 어느 날 우리 집에 오더니 우리 집사람보고 그러더랍니다. ‘사모님, 제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우리 집을 목사님께 팔라고 그러는데 사시겠어요?’ 그러더랍니다. 우리는 살돈도 없는데 말입니다. 아니 집을 사려면 우리에게 먼저 말씀하시지 왜 그 사람한데 먼저 말씀하시느냐고 그랬습니다. 기도를 하고 어떻게 해서 집을 샀습니다. 생전 집을 서울에 집을 산 것입니다. 그 조그만 집의 세금이 그렇게 비싼 줄을 정말 몰랐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법무사 사무실에 갔습니다. ‘이렇게 샀는데 세금이 얼마에요?’ ‘얼마에요.’ 그러니까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의 세금인 것입니다. ‘어휴 이렇게 많아요?’ 그러니까 그 여직원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아줌마 너무 많아요?’ ‘많지요! 그 조그만 집에 세금이 뭐 그리 많아요?’ 그러니까 여직원이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그러면 반만 내세요.’ 아니 무슨 세금이 여직원이 깎아주고 그렇습니까?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느냐고 하니까 ‘집을 판 사람하고 만나서 집값을 절반 정도로 낮추어서 가짜 계약서를 쓰세요. 다들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절반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는 와서 내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여보, 세금을 반만 내는 방법을 그 직원이 가르쳐주었어요.’ 내가 그랬습니다. ‘그게 말이 되냐?’ 그래도 목사인데 집을 파는 사람은 집사이고 집을 사는 사람은 목사인데 둘이 작당을 해서 가짜 계약서를 쓰고 그것이 나중에 청문회에서 이야기하는 소위 다운계약서가 그것이었습니다. 30%만 집값을 내리면 세금이 절반으로 줄어든답니다. ‘로마서 13장을 보아라.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바치라고 하지 않았느냐?’ ‘알았어!’ 그리고는 아무리 집안에 있는 돈을 모아도 세금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들의 벙어리저금통까지 털어서 세금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여직원이 그러는 것입니다. ‘세금이 많다고 그러시더니 다운계약서 해오셨어요?’ ‘아니요.’ ‘그러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냥 다 내려고요.’ 그때 그 직원이 ‘어머나 이런 애국자가 있다니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그랬겠습니까? 아니면 ‘아이고 잘난 척하고 자빠졌네!’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눈빛이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후자입니다. 몇 백만 원을 더 내고 싸늘한 눈빛이었습니다. ‘아이고, 주어도 못 먹어요. 병신같이.’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면 안 됩니다.
교회가 지하실에 있다가 교인이 많아져서 이사를 가야하는데 갈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새벽기도를 하고 괴로워하고 있다가 나와서 보니까 빈 예배당인데 천 명 정도 들어가는 예배당인데 ‘월세, 전세 놓습니다.’ 쓰여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기를 가보았더니 기가 막히게 좋습니다. 전에 있던 교회가 그것을 쓰다가 건축업자에게 팔고 다른 데로 갔고 건축업자는 그곳을 부수고 오피스텔을 지으려고 했는데 IMF가 터진 것입니다. 짓지도 못하고 교회에 세를 놓는 것입니다. 어쨌든 들어갔습니다. 한 3년이 지났더니 교인이 꽉 찼습니다.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사실은 서울에 있고 싶었지만 돈이 없으니까 떠밀리다 가니까 땅이 하나 있는데 천 평짜리 땅이었습니다. 복덕방에게 저 땅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니까 ‘소용없습니다. 임자가 팔려고 내놓은 땅인데 안 팔아요.’ 그래서 소개나 해달라고 그러니까 소용이 없다면서 소개를 해주었습니다. 갔더니 80이 넘은 할아버지가 사업을 하다가 다 접었는데 안 판다는 것입니다. 안 판다는데 왜 귀찮게 자꾸 여기에 오느냐고 그러는데 그래도 파시라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내가 땅을 팔면 당신들은 거기다가 무엇을 할 거요?’ ‘교회를 지으려고 그럽니다.’ ‘교회를 짓는다고? 일주일만 생각해봅시다.’ 그분이 장로님이셨습니다. 그 장로님도 보통 장로님이아니라 26살 때 한 경직 목사님께 안수를 받고 장로가 된 사람입니다. 평생에 자기 사업을 다 접으면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런데 교회를 세운다고 하니까 생각을 하신 모양입니다. 일주일 뒤에 가니까 땅을 파신다고 하십니다. 얼마냐고 그랬더니 건축위원회가 가서 물어보니까 36억입니다. 그래 그럼 돈은 없지만 그때 돈은 1,500만원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엇을 믿고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보자고 했습니다. 그때 1500만원으로 사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하려고 하는데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36억인데 30억짜리 계약서를 쓰고 30억은 주고 6억은 비자금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장로님 할아버지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느냐고 했더니 계산을 하는데 그 이야기가 일리가 있는 것이 그 땅을 워낙 싸게 샀습니다. 세금이 많습니다. 그런데 땅을 잡히고 이자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보니까 36억에 팔아도 청산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식회사니까 청산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그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이 교회를 짓는다고 하니까 감동을 받아서 내 땅을 본전에는 줄 수 있지만 두면 계속 올라가는 땅인데 그때 400만원 달라는 땅이 지금은 1200만원에서 1500만원으로 올랐습니다. 그 땅을 내 돈을 보탤 돈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금이 어마어마하게 나온다고 해서 돌아가서 의논을 했습니다. 목사니까 잘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하니까 다들 장로님들 집사님들이 ‘목사님 요즘 토지거래는 90%가 다 그렇게 합니다. 세무서에서 문제만 삼지 않으면 문제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회계사에게 물어보니까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은 불법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틀을 고민하다가 그 할아버지에게 다시 가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세금이 얼마냐고 물으니까 3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39억을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36억을 주면 팔겠다는 땅을 우리가 자원을 해서 39억을 준다고 해서 계약서를 쓴 것입니다. 사실은 지금의 우리교회는 3억이 큰돈이 아닐지 모르지만 그 당시 3억은 상상할 수 없는 돈이었습니다. 1,500만원을 가지고 땅을 사고 돈을 빌려서 계약금을 치렀는데 어땠겠습니까? 그래도 39억을 주고 그 땅을 샀습니다. 그것이 우리교회에는 큰 교훈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나의 이익과 상관없이 말씀대로 살자, 순종하자, 타협하지 말자, 아무사건도 안 일어났을 때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쉽습니다. 그런데 진짜 이해가 걸리고 시련이 오면 너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교회에서 정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업을 하고 병원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정당하게 세금을 내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교역자가 세금을 내느냐 마느냐 그러는데 우리는 벌써 5년 전부터 신고를 해서 세금을 다 떼어서 냅니다. 오히려 세무서에서 ‘아니 왜 그러니? 법적으로 내지 않아도 되는데 왜 내려고 그러니?’ ‘아니 우리는 내기를 원하니까 받아라.’ 그러니까 우대해주는 것이 아니라 짜증스럽게 대합니다. 교회의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먹어도 부가가치세 정확하게 1,000원에 100으로 세금을 냅니다. 그 세금이 1년에 수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런 피아노를 하나 사려면 삼천만원이라고 하면 영수증을 받지 않으면 삼천만원에 해주는데 세금계산서를 가지고 오라면 삼천삼백만원이 되는 것입니다. 혹은 삼천사백만원까지 달라고 합니다. 그것을 받지 않으면 탈세입니다. 다른 교회는 모르지만 우리교회는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 부가가치세는 최종소비자가 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삼천만원이면 삼천삼백만원을 줄 테니까 세금계산서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모든 물건은 정확하게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나가는 돈이 일 년에 몇 억 원입니다. 12월에는 공인회계법인에서 회계사가 와서 감사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삶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준다든지 하는 것은 나중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타협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옳다고 하는 그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물론 그 길은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1년에 몇 억을 세무서에 갖다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하면 그냥 또 그러려니 하는 것입니다. 가치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사느냐는 것이 문제이지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금계산서 아니면 교회에서 아예 돈을 주지 않습니다. ‘리어카에서 수박 10덩어리를 샀습니다. 십만 원입니다.’ 그러면 돈을 지출하지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실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은혜를 많이 줄 테니까 생명과 사랑과 위로와 은혜를 줄 테니까 이 세상 사람들하고는 다르게 살아다오. 그래서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어다오.’ 캄캄한 밤바다에 별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에 수십 척 배가 위기를 만납니다. 그때에 온 해안을 환하게 밝혀주는 대낮 같은 조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등대 하나만 빤짝거리고 있으면 그 폭풍 속에서 그 불빛 하나를 보면서 수십 척의 배들이 그 어두운 밤바다에서 피하여 항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진리가 대중적일 때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의로운 삶이 모든 사람이 따르고 좋아하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언제나 어두울수록 하나님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렇게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소금으로 살게끔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소명은 주님께 은혜를 많이 받고 옳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고난을 받거나 핍박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가라고하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알고 보니까 그 사람이 교회의 장로더라. 알고 보니 그 사람이 그 교회의 집사더라.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청년이더라.’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들을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삼으시려고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시인이 바로 목자 되신 하나님께로부터 이런 사랑과 은혜를 받았던 것입니다. 이 은혜를 구하며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